소설리스트

490화 (4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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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들 툭, 툭, 죽어 나가는데. 넌 끝까지 카델 라이토스를 부를 생각이 없는 거니?”

충혈된 눈이 잘게 떨리고, 검을 움켜쥔 손등에는 시퍼런 핏줄이 돋았다. 루멘은 거칠어진 숨을 씹어 삼키며 제 앞에 쓰러진 이들을 바라보았다. 모들렌과 엑토, 반, 요젠, 라이돈까지. 실력을 인정했던 기사들은 물론, 믿고 있던 동료들마저 차례차례 방 안에서 튕겨 나왔다.

에밀리아는 그들을 건드리진 않았으나, 몇 차례 그녀에게 공격을 시도했던 루멘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들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다. 이들뿐만이겠는가? 여전히 싸우고 있는 소린과 마밀, 그리고 코앞에 있는 자신까지. 전부 쓸어버릴 수 있었다.

어떻게 이토록 강력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자신들이 한데 모여 힘을 합쳤다면 이토록 허무한 결말은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결계에 방심하고, 안일하게 계단을 올랐던 것이 패인이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대장을 불러낼 일은 없다.”

이곳에 선 것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결말이 달랐을까. 엑토나 소린, 모들렌이나 마밀이 자신의 역할이었다면? 아마 전멸의 최후를 맞기 전에 카델을 불러내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당장 마왕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하지만 루멘은 그러지 못했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직감한 순간, 빈말로라도 카델의 목숨과 나머지의 목숨을 교환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이곳에서 인간군이 전멸하고, 결국 평화의 돌을 되찾지 못하게 된대도. 자신이 카델을 내놓을 일은 없었다.

“꽤 절절한 사랑을 하고 있구나.”

“……그래. 아주 멍청한 사랑이지. 그러니 내게 선택권을 넘긴 건 네 실수다.”

이따위 기사는 존재해선 안 됐다. 세계의 평화보다 단 한 사람의 목숨을 우선시하는 자가 어떻게 기사의 직위를 얻었는지. 자신 때문에 인간들이 영원토록 고통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 없이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도, 평범한 일상을 지내오던 사람들도, 언젠가 꽃필 미래를 기다리며 노력하던 사람들도. 전부.

그들에게 지독히도 미안했지만, 미안한 마음을 품는 것이 전부였다. 고장 난 것처럼 도저히 카델을 데려오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굳건하게 선 루멘의 맞은편.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던 에밀리아가 무료한 시선을 돌리며 손을 휘저었다.

“실수는 아니야. 시간 낭비를 했을 뿐.”

작은 손짓에 단단히 땅을 딛고 있던 루멘의 발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몸뚱이가 무력하게 밀려났다.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밀려난 몸은 곧 활짝 열린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빛보다 빠른 속도를 따라 풍경이 정신없이 변화하며 일그러졌다. 먹먹한 귀와 혼란한 시야, 꿈틀거리는 내장까지. 치미는 구역질을 버티지 못한 그가 질끈 눈을 감은 순간. 허공을 가로지르던 몸뚱이가 둔탁한 충격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큿…….”

반사적으로 몸에 힘을 준 루멘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자, 좀 전의 복도가 아닌 완전히 다른 풍경이 들어찼다.

탁 트인 들판. 인간계의 푸른 들판과는 달랐다. 광활하긴 했으나 잡초는 온통 노랗게 말라붙었고, 땅바닥은 잔뜩 메말라 군데군데 패고 갈라졌다.

마계의 들판인가. 경계하며 몸을 일으키자, 하늘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카델 라이토스를 부를 일은 없댔지. 그 생각이 죽음을 앞에 두고도 변함없을지 궁금하네. 만약 그때 가서 마음이 변한대도 네게 남은 기회는 없겠지만.”

빠르게 고개를 들자 하늘에 둥실 떠오른 마왕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이들이 상대하던 분신임이 틀림없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죽든가, 죽이든가 둘 중 하나뿐이야.’

두 가지 선택지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죽이는 쪽을 고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짧게 숨을 고른 루멘이 검집에 손을 올렸다.

‘날 이곳에 보냈다는 건, 의식이 남은 이들 중 누군가를 대신 끌어냈다는 거겠지. 소린 경과 마밀 님……. 둘 중 누가 나왔더라도 대장을 위해 전멸을 택하진 않을 거다.’

그러니 그들의 선택으로 카델이 위험해지기 전.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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