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3화 (49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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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인간은 너 하나야. 마지막 기회를 줄게. 카델 라이토스를 데려와.”

더 버틸 재간도 없었다. 마밀은 방을 빠져나오자마자 냅다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조금만 더 전투가 길어졌으면 사지가 찢겨 그대로 명을 다했을 것이다. 마왕에게 죽을 뻔한 것을 마왕이 살려 준 셈이었다.

“굳이 데려오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올 거다. 네가 가진 평화의 돌이 목적이니, 널 죽여서라도 빼앗아야지 않겠어.”

“……그래? 난 그 아이가 내 형제들을 죽이는 데에만 혈안이 된 줄 알았는데. 그 짓거리를 하고도 감히 내 앞에 나타날 생각이었나 봐?”

“형제들?”

형제들이라니. 카델은 지금쯤 적룡과 함께 마왕을 해치울 마법을 준비 중일 텐데. 의아함을 품으면서도, 마밀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 제 뒤에 쓰러져 있는 이를 건드렸다. 모들렌이었다.

“카델이 네 형제를 죽이고 있다고?”

“이미 죽였어. 싹 다.”

“어째서지?”

“나야말로 묻고 싶어. 내 형제를 죽여 얻는 게 마왕의 분노 말고 뭐가 있냐고. 네 말대로라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답이 나오겠지.”

“기다리는 동안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인가?”

“글쎄. 굳이 죽이지 않아도 이미 의식은 없고. 카델 라이토스가 도착한다면 너희들은 훌륭한 걸림돌이 되어 줄 텐데.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까?”

요란하게 굴면 마왕은 곧장 눈치챌 거다. 마밀은 모들렌과 닿은 손끝으로 작은 불꽃을 피웠다. 모들렌을 깨워야 했다. 자신에겐 누군가를 치료해 깨울 힘이 없으니. 과격한 방식이라도 사용해 유일한 성기사의 의식을 되찾아야 했다.

“두 명이 모자라군. 한 명은 분신과 싸우고 있는 듯하고. 나머지 한 명은 어디 있는 거지?”

“하하. 이것 봐.”

조소를 흘린 에밀리아가 옷의 목 부분을 끌어 내려 쇄골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자 새하얀 피부 위에 새겨진 진한 흉터가 드러났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자그마한 상처였다.

“내 몸에 상처를 만들었어. 꽤 어려운 일이거든, 그거. 그래서 상으로 죽음을 선사해 줬지.”

“…….”

“성 바깥으로 떨어뜨렸어. 시체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서.”

소린 살라모는 이미 죽은 듯했다.

‘나와 같은 제안을 받았을 텐데. 마왕이 원치 않는 대답을 한 모양이군.’

그 같은 기사가 명을 다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력을 다한 일격이 고작 손가락 한마디만 한 흉을 만드는 데서 그쳤다는 건 절망적이었고.

“내겐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다. 훌륭한 걸림돌이 되어 줄 테니, 이대로 쉴 수만 있게 해 주지 않겠나?”

“무슨 수작을 부릴 줄 알고? 인간은 나약해. 나약한 만큼 비열한 짓거리도 잘하지.”

“아군도 몽땅 쓰러지고, 내 힘도 전부 소진한 상태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겠나? 지금의 나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제자가 달려와 구해 주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데.”

“제자……. 카델 라이토스가 네 제자야?”

“그래.”

“각별하니?”

“그다지 각별하진 않지만, 서먹하지도 않다.”

솔직한 대답에 에밀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늘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마기로 만들어 낸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허공에 뜬 의자를 따라 가녀린 몸이 흔들거렸다.

“그럼 네 쓰임새가 좋겠구나. 깨어 있게 해 줄게. 그동안 저 안에서 열심히 발버둥 치는 네 동료나 지켜봐. 말로 성질을 긁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라, 크게 괴롭혀 줄 예정이거든.”

에밀리아를 따라 루멘이 있는 방을 들여다보며, 마밀은 모들렌의 팔에 불을 지폈다. 제법 고통스러울 테지만 이것 말고는 의식을 잃은 인간을 깨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죽이진 말아 주게. 나이를 먹으니 시체를 보기가 힘들어서 말이지.”

“하하, 나이를 먹었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그런 편의를 봐주진 않아.”

카델이 도착하기 전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인원을 깨워야 한다. 마밀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모들렌의 팔을 불태웠다.

‘미치겠군.’

상황이 이리 위급한데도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분신을 해치우고 방에서 나가 카델을 지키겠다는, 한없이 호기로운 마음은 여전하다. 기세도 꺾이지 않았다. 자신의 기세보다도 먼저 검이 꺾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뿐.

루멘은 벌써 두 번째로 동강 난 검을 그러쥐며 미간을 좁혔다.

‘여기엔 더 주워다 쓸 검도 없는데 말이지.’

큰일이었다. 탁 트인 들판에는 검은커녕 날카로운 돌멩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분으로 쓸 검도 없다. 아니, 검이 한 자루 남기는 했다만.

‘뽑지도 못하는 검과 두 동강이 난 검……. 이것들로 대체 뭘 할 수 있지?’

정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였다. 절망적인 결론에 루멘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맞은편에 선 에밀리아의 분신이 맑은 웃음을 흘렸다.

“생각 중이야? 부러진 무기로 날 어떻게 상대할지.”

“…….”

“왜? 네겐 내 무기고에서 훔친 검이 있잖아. 그걸 쓰면 되지 않아? 하하……. 알아. 네가 그 검을 뽑지 못한다는 건. 표정 좀 봐. 볼만하네.”

그녀는 거침없이 루멘을 조롱하며 마기의 검을 빙글 돌렸다. 그녀의 검은 길이와 너비를 마음대로 조절하며 간단히 루멘을 압박해 왔다. 일 검, 일 검이 충격적일 정도로 강력하다. 그럼에도 검사로서의 감은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의 분신이 여전히 본 실력을 꺼내지 않았다는 걸.

진짜 마왕도 아닌 분신조차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그래도 될 만큼 자신이 약하다는 증거였다. 약하다니. 그토록 필사적으로 수련하고, 죽을 고비를 몇 번씩이나 넘겨 가며 이곳까지 왔는데. 그런데도 아직 부족하단 말인가? 불쾌한 감정이 가슴께를 스멀스멀 타고 올랐다.

“네 말대로다. 검이 없으니 난 이제 싸울 수 없어. 이 반토막 난 검이나, 뽑지도 못하는 검집으로 방어하는 게 최선이겠지. 그래. 이제 날 본격적으로 죽여 볼 셈인가?”

무감하던 얼굴에 반항적인 눈빛이 스쳤다. 에밀리아는 그런 루멘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죽이진 않아. 죽고 싶어질 만큼 실컷 괴롭히다, 카델 라이토스가 도착하면 그 앞에 던져 줄 거야.”

“대장이 도착하면……?”

“카델 라이토스가 이곳으로 열심히 달려오고 있대.”

이미 누군가 카델을 불러낸 건가? 어떤 식으로? 카델이 그 부름에 응한 건가? 일순 숨이 턱 막힐 만큼 불안한 감정이 들어찼으나, 루멘은 서둘러 고개를 털었다.

누군가 그를 불러냈든, 그러지 않았든. 카델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건 그가 공격의 준비를 마쳤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카델과 합류해야 한다.

‘아마 가르엘 경도 함께 오고 있겠지.’

카델에게 전해 줄 것이 있다며 떠난 그는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도 카델과 만나지 못한 게 아니라면, 아마 그에게 뭔가의 도움을 주느라 합류가 늦어졌던 것일 테지. 카델과 가르엘은 함께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루멘은 동강 난 검을 바닥에 던져 버리곤, 대신 마검을 꺼내 들었다. 그에 에밀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걸로 날 상대하려고?”

“문제라도 있나?”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며 게슴츠레 눈을 뜨던 그녀가 예고 없이 몸을 던졌다. 강풍을 동반한 폭발적인 돌진. 루멘은 마검을 들어 단숨에 거리를 좁혀 온 분신의 일격을 막아 냈다. 널찍하게 퍼진 충격파에 들판의 풀들이 납작 엎드리고. 루멘은 속절없이 밀려나는 몸에 바짝 힘을 주며 검집에 기운을 둘렀다. 튕겨 나가지도 않고, 튕겨 내지도 못한다. 둘은 검을 사이에 둔 채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역시, 인간의 손에 그 검이 들린 모습은 꼴 보기가 싫네.”

빈틈없는 루멘의 눈빛을 마주한 에밀리아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제법 힘을 주었으나, 쉽게 동강 났던 좀전의 검과는 달리 이 검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검의 주인을 알고 있나? 검을 뽑는 건 포기했지만, 검을 뽑을 수 있던 자가 누구인지는 궁금하군.”

“알려 줄 의무는 없어.”

“부탁하지.”

힘과 힘의 대결임에도 루멘은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이렇게 너덜거리는 몸뚱이로 용케 자신의 힘을 견뎌 내고 있다. 오로지 정신력. 지금까지 그가 두 발로 서서 멀쩡히 싸울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은, 체력도 지구력도 아닌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이런 자가 마족으로 태어나 제 부하가 됐다면. 어쩌면 많은 부분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에밀리아의 나눠진 영혼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짧게 혀를 찼다.

“인간계의 것이었어. 하지만 인간의 것은 아니었지.”

“그게 무슨 소리지? 인간이 만든 검을 마족이 사용했다는 건가?”

“인간계의 수호신, 켈리건의 검이다. 나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검.”

제국의 수호신 켈리건. 그 말을 들은 루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분신은 당혹감이 만들어 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검을 밀치듯 빗겨치자, 충격을 버티지 못한 루멘이 바닥을 굴렀다. 거친 들판을 무력하게 굴러가면서도, 루멘의 머릿속에선 에밀리아의 말이 떠나지 않았다.

‘이게 전대 마왕을 쓰러뜨린 검이라고? 마검이 아니라, 수호신 켈리건의 검이었단 말이야?’

켈리건이 직접 사용한 검이든, 그의 기사였던 쟈닌이 사용한 검이든. 이 검엔 마왕을 죽일 만큼 강력한 힘이 깃든 것이 틀림없었다.

‘이걸 뽑을 수만 있다면…….’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루멘은 굴러가는 몸을 가까스로 멈춰 세우곤, 분신의 위치를 찾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곧 그의 시야 속으로 맹렬하게 달려드는 분신의 모습이 들어찼다.

“네가 이 검을 뽑지 못하도록 봉인한 건가?”

분신은 루멘이 누워 있던 자리로 검을 내다 꽂았다. 빠르게 몸을 굴려 회피한 루멘이 자세를 바로잡자, 움푹 팬 땅에서 검을 빼낸 그녀가 말했다.

“그럴 리가. 난 진심으로 그 검을 뽑고 싶었어. 쓸 만한 검이니, 뽑아서 내가 사용하든, 부하를 주든 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뽑히지 않더라고.”

“이유는?”

“몰라. 내 아버지를 쓰러뜨린 인간은 마계에서 명을 다했어. 그 검도 시체의 곁에 있었으니, 마족이 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켈리건이 수를 쓴 걸지도 모르지.”

검의 봉인을 해제하는 데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는 에밀리아조차 알지 못했다. 빼앗기면 곤란하고, 처치하긴 아까워 보관해 두고 있던 것일 뿐. 실수로 인간의 손에 들어갔으나, 그 역시 뽑지 못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시 몰아치는 에밀리아의 검격을 회피하며, 루멘은 끊임없이 이 수수께끼에 대해 생각했다.

‘영구히 봉인한 건 아닐 거다. 그럴 거였다면 뽑지 못하도록 막을 게 아니라, 그냥 부숴 버렸어야지. ……마족이 아닌 인간이 검을 들었을 때. 무사히 적을 죽일 수 있도록 일종의 제약을 걸어 둔 거다.’

봉인했던 마계에 인간이 돌아와 사활을 건 전쟁을 반복할 때. 그들이 이 검의 힘으로 다시 마왕을 무찌를 수 있도록. 켈리건은 작은 희망을 남겨 두어 혹시 모를 재앙에 대비한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기사를 대신해 평화를 지켜 주길 바라며.

‘생각해라. 켈리건이 이 검에 어떤 마법을 걸어 뒀을지. 어떤 인간에게 검을 뽑을 자격을 주기로 했는지.’

생각해야 한다. 이 검을 뽑아야만 카델의 검사로서 마왕과 대적할 수 있을 테니. 가까스로 분신의 공격을 막아 낸 루멘의 눈빛에 결의가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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