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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분명 죽을 만큼 아픈데, 어떤 공격도 먹히지 않아 아득하기만 한데. 자신은 몇 번이고 일어나 검도 아닌 검집을 휘두르며 버티고 있다. 꼭 뭐에 홀린 것만 같았다. 곳곳에 금이 간 뼈와 어긋난 관절이 비명을 질러 대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분신의 일격에 피를 토하고, 수십 번씩 땅에 머리를 처박아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고통이 반복될수록 그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탐험가처럼 황홀한 두려움을 느꼈다.
분신은 루멘의 육체를 망가뜨렸으나, 그럴수록 루멘의 내면은 담금질한 쇠붙이처럼 단단해지기만 했다. 이 모든 폭력이 그에게는 성장의 기회였다.
“거울이 있다면 지금 네 모습을 꼭 보여 주고 싶은데.”
마기의 검을 늘어뜨린 분신이 조소를 흘렸다. 그녀의 앞에는 어떻게 서 있는지조차 의문인 루멘이 구부정하게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꼿꼿하게 펴지도 못한 다리는 볼품없이 후들거렸고, 근육이 상해 가동 범위가 좁아진 팔은 축 늘어졌다. 게다가 고개를 들 힘도 없는지, 그는 더 이상 앞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저 혼탁해진 눈빛을 갈라진 땅바닥에 고정하고 있을 뿐.
이제 그에겐 의식이랄 게 없어 보였다. 몰아치는 공격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거나, 그럼에도 피하지 못해 무력하게 맞고 날아간다. 그것이 루멘이 하는 전부였다.
차라리 시원하게 눈을 감는다면 다른 이들이 있는 복도로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왜 저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에밀리아의 쪼개어진 영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검귀 같네. 소멸하기 직전의.”
작게 중얼거린 그녀가 초라하게 선 루멘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조금씩 비틀거리고 있었다. 다가올 공격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어쩌면 죽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예 마기의 검을 털어 없애 버린 뒤, 팔짱을 낀 채 게슴츠레 눈을 떴다.
“죽은 거야?”
늘어진 팔을 따라 흐느적거리는 검집. 반동을 따라 흔들거리는 몸. 숙인 고개 아래로 피가 잔뜩 섞인 침이 늘어졌다. 처음의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짐승 같은 꼴이었다.
에밀리아의 건조한 시선이 루멘을 느리게 훑어 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 이 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한 거겠지. 짜증 날 정도로 질긴 인간이었다.
“네 편안한 죽음을 기다려 줄 생각은 없어.”
이대로 놔둬도 알아서 죽겠다만, 고작 인간의 죽음 따위를 기다리며 시간을 버리고 싶진 않았다. 그리 생각한 분신이 한 걸음을 뻗은 순간이었다.
“내, 게는…….”
송장이나 다름없던 루멘이 입을 열었다. 그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춘 분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꺾였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내게는…… 확신이, 있다…….”
반쯤 풀린 채 벌겋게 충혈된 눈, 사라진 초점, 턱을 타고 흐르는 피. 곧 죽을 자의 유언이었다. 에밀리아는 차오르는 불쾌감을 만면에 드러냈다. 그가 죽는다면 가장 먼저 저 검을 빼앗을 셈이었다.
하지만 루멘은 보란 듯이 검을 들어 올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팔을 들어 한 손으로는 검집을,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초점도 없는 눈동자가 정확하게 분신을 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너를 죽이고, 카델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굳게 닫혀 있던 검이 뽑히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던 검집이 열리며, 좁은 틈새로 눈부신 빛줄기가 새어 나왔다.
“켈리건의 검이…….”
시야를 가득 물들이는 섬광. 넓은 들판을 가득 메우는 신의 응답에, 분신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루멘은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자신이 아는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귓가를 스치는 훈풍처럼, 희미하고 묵직한 음성.
모든 감각이 멀어지는 순간에도, 그 음성이 내뱉는 말 만큼은 분명하게 각인됐다.
[승리의 미래를 보았는가.]
눈앞에 있는 분신의 모습마저 흐릿하게 보이는 상태다.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고 문밖으로 튕겨 나간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승리의 미래를 보았느냐 묻는다면.
“내게는…… 확신이, 있다…….”
보았다. 무사히 이 들판을 벗어나, 돌아온 카델의 옆에 선 자신의 미래를. 켈리건의 검을 뽑아 들고 그와 함께 마왕과 대적할 자신의 모습을.
“너를 죽이고, 카델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루멘이 대답하자, 목소리는 다시 한번 그의 머릿속을 휩쓸었다.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 죽음 위에 빛이 있으리.]
죽음 위에 빛이 있으리. 그 마지막 말이 주문처럼 혓바닥을 맴돌았다. 그리고 둘도 없는 자극처럼 되풀이되는 문장을 기어이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대체 어떻게 검을 뽑은 거지? 어떻게!”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던 의식이 선명해지며, 새로운 영혼이 들어찬 것처럼 전신에 생기가 돌았다. 루멘은 순식간에 또렷해진 시야에 놀라며 반사적으로 검을 바라보았다.
켈리건의 검. 마검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옛 수호신의 검이, 자신의 손안에서 찬란한 검신을 드러냈다.
“이건…….”
어떻게 뽑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죽자 살자 검집을 움켜쥔 채 싸웠고, 혼이 절반은 빠진 상태에서 환청을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렇게.
‘검이 뽑혔다. 진짜인가? 이게 진짜 켈리건의 검?’
검이 뽑혔으면 뽑힌 거지, 몸에선 갑자기 왜 이렇게 생기가 도는 것인지. 분명 길가의 돌멩이보다도 더 심하게 땅을 구르며 수백 번은 깨지고 부러진 몸인데. 갓 태어난 것처럼 팔팔하기만 했다.
루멘은 자신의 변화에 당황하면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 단단하게 손잡이를 그러쥐고, 몇천, 몇만 번은 연습했던 자세를 취했다. 발도술의 기본자세.
다시 뽑힐지 안 뽑힐지도 모르는 검을 망설임 없이 납검하고, 검집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오른 다리를 굽히고, 왼 다리를 길게 뺀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자세를 취하며, 눈으로는 전방을 훑는다.
그곳에 분신이 있었다. 결국 켈리건의 검을 뽑아 버린 인간에게 경악하며, 봉인이 풀린 검을 빼앗으려 하는 마왕의 영혼이.
“두 번 다시 그 검에 마족의 피가 묻는 일은 없어. 널 죽이고 그 검을 빼앗아 인간의 피를 적시겠어.”
분신이 다시금 마기의 검을 치켜들며 위협적으로 읊조렸다. 그녀의 위로 진한 마기가 피어오르며,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흉흉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하지만 루멘은 그녀의 기운이나 심적 변화에 조금도 집중하지 않았다. 집요하게 분신의 심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른 곳으로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누군가 강제로 초점을 고정한 것처럼, 그는 분신의 유일한 약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군.’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준비 자세를 갖춘 채 자리에 멈춰 있을 뿐임에도. 루멘은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신의 행동과 들판의 바람, 자신의 숨소리조차. 망가진 태엽처럼 길게 늘어진다.
이 잘못된 시공간을 깨부숴야 할 것 같았다. 느려터진 공기의 흐름을 베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시멸재]를 성공했을 때와는 다른 느낌. [시멸재]는 공간을 빛보다 빠른 속도로 베어 내 아주 작은 시공간의 균열을 만들고, 그 틈으로 적의 신체를 밀어 넣는 검풍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비틀린 시공간이 가진 ‘소멸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루멘은 자신을 가둔 시공간을 압도하려 하고 있었다.
‘할 수 있어.’
승리에 대한 강한 확신. 그리고 그보다 높은 곳에, 카델의 존재가 있었다. 한낮의 태양 아래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그의 미소는 어떤 순간에도 잊히지 않았고, 그랬기에 루멘은 매분 매초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꼭 돌아갈게.”
짧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루멘의 신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