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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루멘 도미닉’을 잃었습니다.」
“……뭐?”
끝도 없는 복도를 헤매다 잠시 지친 숨을 고르기를 몇 분. 카델은 뜬금없이 떠오른 시스템 창을 응시하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눈을 비비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시스템 창은 여전히 똑같은 문장을 비췄다. 루멘 도미닉은 잃었다는, 두 번째 알림을.
“왜 그래요, 단장님? 또 문제가 생긴 건가요? 복도에 갇힌 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아니길 빌죠.”
“…….”
“……단장님?”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누군가 뇌를 꽉 움켜쥐고 놔주지 않는 것처럼, 둔해진 사고가 무의식을 부유했다. 내가 루멘을 잃었다니?
가르엘은 혼이 빠진 것처럼 멍하니 앞을 보는 카델에게 다가갔다. 카델이 쉬는 동안에도 계속 근방을 수색했지만, 나오는 단서는 없었다. 그 부분에 절망해 넋을 놓아 버린 것일까. 그렇다고 여기기에는, 카델의 상태가 많이 이상했다.
그는 굳어 버린 카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미간을 좁혔다.
“단장님. 왜 그래요.”
“……가르엘.”
“네.”
“루멘이…….”
“루멘 경이요?”
“루멘이, 나를 버릴 리는 없지?”
“예……? 그게 무슨……. 당연하죠. 루멘 경이 단장님을 떠나는 것보다, 제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를 겁니다.”
카델의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응시하듯 흐리던 초점이 돌아오며, 그가 자신의 앞에 쭈그려 앉은 가르엘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입술과 부산스럽게 깜빡이는 눈. 반듯하던 눈썹이 일그러지며, 가르엘의 팔을 강하게 낚아챈 카델이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루멘을 잃었다는 건, 설마…….”
“왜 이렇게 떨어요. 단장님. 숨을 크게 들이쉬어 봐요. 걱정할 것 없어요. 지금은 막막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동료들을 찾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루멘이 죽었다는 거야……?”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에 일순 가르엘의 입이 다물렸다. 루멘이 죽었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카델은 농담으로라도 그런 흉흉한 말을 입에 담는 사내가 아니었다. 본인의 부하들에 한해서라면 더더욱.
가르엘은 조금씩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며 카델을 응시했다. 함께 그를 마주 보던 카델이 거칠어진 숨을 뱉으며 몸을 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루멘이 죽었을 리가 없잖아!”
“단장님……!”
“위험해진 거야. 내가 가서 구해 줘야 해. 당장, 당장 루멘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엘! 어디로 가야 해? 어디로 가야 루멘을 찾을 수 있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카델은 미친 사람처럼 루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온 방문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어느 문을 열어도 새로운 복도가 나올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주먹이 부셔져라 문을 내리쳤다.
가르엘은 그런 카델을 막아서려 했으나, 잔뜩 흥분한 그의 뒷모습에 대고 손을 뻗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시스템. 카델이 알려 주었던 이세계 신의 메시지. 만약 그가 루멘의 죽음을 알린 것이라면. 카델이 그 끔찍한 메시지를 읽어버린 것이라면.
불안으로 굳은 눈 안 가득, 어지럽게 열린 방문들이 뒤엉켰다.
요젠은 단검을 든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를 쓸었다. 언제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전투를 이어 왔던 그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거칠어진 호흡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그 정도로 혼신을 다했다는 뜻이었다.
방어 태세에 돌입한 마왕은 마기를 장막 삼아 무방비한 몸을 방치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가 행동을 재개하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는 사실만은 명백했다. 그렇기에 갓 깨어난 몸을 혹사해 가면서까지 공격을 퍼부었던 것인데.
“…….”
마왕이 사라졌다. 순식간이었다. 죽은 듯 얌전히 멈춰 있는 마왕의 모습에 방심했던 탓일까? 아니다. 요젠은 이곳에 들어선 뒤로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흩날리는 마왕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담긴 기운까지 집중하며 살폈으니까. 그리했음에도 요젠은 갑작스럽게 사라진 마왕이 어디로 떠났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어. 하지만 공간을 채운 마왕의 기운은 여전하다. 아예 이곳을 떠난 건 아니야.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거지?’
설마. 설마 카델이 성에 도착한 것일까? 카델의 등장을 눈치챈 마왕이 그를 해치우려 이동한 것일까?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불안한 상상에 요젠이 입술을 짓씹었다. 제 상상이 현실이래도 당장 복도를 벗어날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 처지였다.
전전긍긍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요젠의 뒤. 최선을 다해 요젠과 아군을 보호하던 마밀이 비틀거리는 몸을 벽에 기대며 말했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제법 답답한 일이겠군.”
“……?”
“마왕의 본체는 저기 있다. 루멘 도미닉이 갇힌 또 다른 시공간.”
복도를 이룬 방은 모조리 에밀리아의 통제하에 놓여 있다. 마왕을 제외한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특수한 공간인 것이다. 그랬기에 요젠의 암기는 복도의 방까지 감지하진 못했다. 감지하지 못하니 윤곽을 그릴 수도 없고, 너머의 존재를 가늠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요젠이 설명을 구하듯 고개를 돌리자, 지그시 눈을 감은 마밀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마왕의 본체가 들어간 탓인지, 내부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아낼 수 없다. 하지만 마왕과 루멘 도미닉이 충돌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지.”
“……위험한 상황이야?”
“마왕의 본체와 분신, 두 녀석이 동시에 루멘 도미닉을 노리고 있는 거다. 위험하지 않은 게 이상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더 이상한 건, 어째서 마왕이 루멘 도미닉을 직접 상대하겠다고 나섰냐는 거지.”
이미 분신을 두었음에도 직접 행차하셨다는 건, 루멘이 분신을 해치우고 나올 가능성이 생겼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어쩌면 분신을 해치우는 것 외에도 마왕의 입장에서 위험한 변수가 생겼을지 모른다.
“어찌 됐든, 루멘 도미닉이 큰일을 벌이고 있긴 한가 보다. 그 일이 성공한다면 마왕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되겠고, 우리에게는 그나마 희망적인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르지.”
잠시 숨을 고르던 마밀이 거칠게 기침을 토하며 주저앉았다. 그에 요젠이 반사적으로 다가가 마밀의 상태를 살피려 했으나. 마밀은 손을 들어 요젠의 접근을 저지했다.
“마왕이 빠져나오기 전에 서둘러 재정비를 하자꾸나. 난 마력의 사용을 멈추고 몸을 다스릴 테니, 넌 뒤에서 다른 이들을 보살펴 주거라.”
“알겠어. ……그런데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 거야?”
“……어이가 없군.”
진심으로 방법을 모르겠다는 듯한 난감한 표정을 마주한 마밀이 헛웃음을 뱉고는 뒤편의 장막을 거뒀다. 그러자 시체 꼴이 된 모들렌과 조금씩 의식을 되찾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뺨을 때리든 꼬집든,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게 하란 말이다. 그 뒤에 심한 상처가 있다면 모들렌 경에게 알리고, 가벼운 지혈이 필요한 상처라면 날 불러라. 불로 지져 줄 테니.”
건조한 대답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요젠이 사람들의 틈으로 섞여 들었다. 요젠의 관심이 완전히 돌아간 것을 확인한 마밀이 희미한 신음과 함께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촉박한 시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지. 그것을 생각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