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화 (5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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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말이 되는가? 죽음을 느끼다니. 죽음이야말로 무의 경지가 아니던가. 아무것도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해야 옳을 텐데. 루멘은 자신이 죽었음에도 여전히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쩌면 이대로 환생을 하는 건 아닐까? 애초에 인간의 영혼은 일회성이 아니고, 계속해서 새로운 몸에 빌붙어 살아가며 영원토록 우주를 배회하는 것이다.

이러한 쓸데없는 사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죽음 위에 빛이 있으리.]

언젠가 들었던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루멘의 눈이 뜨였다.

“…….”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드넓은 바다였다. 투명하고 새파란 바다 위, 루멘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하늘은 맑다 못해 하얗다. 구름 한 점 없는 눈부신 하늘 아래, 파도 한 번 치지 않는 잠잠한 바다. 아득한 수평선 위로는 어떤 것도 비치지 않고, 근방을 날아가는 갈매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떠한 생명의 박동도 느껴지지 않는 광활한 바다 위에서, 루멘은 중얼거렸다.

“죽음이란 게 이런 건가.”

고요한 바다 위를 정처 없이 걷는 것. 빠지지도, 빠져나가지도 못한 채, 하릴없이 생의 기억을 더듬는 것. 이런 것이 죽음이라면, 끔찍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끔찍한 죽음을 경험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바다 위.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신은 누구지?”

인간의 형체를 갖춘 빛무리. 윤곽을 채운 환한 빛 때문에 얼굴을 들여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루멘이 경계하며 묻자, 빛은 대답했다.

“켈리건.”

간단명료한 자기소개에 루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눈앞에 제국의 수호신인 켈리건이 나타났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정말 죽은 게 맞나 보군.”

이런 미지의 공간에서 옛 수호신을 목격했다는 것보다 확실한 죽음의 증거는 없다. 급격히 착잡해진 마음에 루멘이 미간을 구겼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일어날 후폭풍이 걱정된 탓이었다. 그러나 켈리건은 루멘이 걱정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너는 죽었으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지?”

“네 영혼과 의지는 전부 나의 검에 담겨, 세상의 악을 처단하고 평화를 안기리라.”

자신의 영혼과 의지가 켈리건의 검에 담긴다고? 루멘은 이 모호한 말에 질문을 던지는 대신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이곳에 오기 전, 자신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왕에 의해 심장을 뚫렸다. 켈리건의 검이 직접 자신의 심장을 꿰뚫었다. 어딘가에서 등장한 가르엘이 마왕을 무찌르고 치유술을 전개해 주지 않는 이상, 자신이 살아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그런데도 자신은 여전히 ‘자아’라는 것을 갖추고 있으며, 미지의 공간에서 켈리건을 마주하고 있다. 그의 검에 자신의 영혼과 의지가 담길 것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뻣뻣한 손을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내리깐 속눈썹이 눈가에 그늘을 만들며, 바다만큼이나 새파란 눈동자에 깨달음의 빛이 스쳤다.

“나의 영혼으로 당신의 검이 완성되는 거였군.”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의식의 끝자락. 그럼에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루멘의 머릿속을 울리던 음성.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 죽음 위에 빛이 있으리.]

‘그런 거였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자. 켈리건은 그의 의지를 통해 검의 봉인을 푼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목숨을 바치는 자에게만 켈리건의 검은 승리의 빛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나의 영혼을 먹고 살아 있는 검이라도 되려는 건가? 황당하군.’

인간을 찌른 검이 제멋대로 날뛰며 위협하는 모습을 보면 마왕이 얼마나 당황할지. 그 표정을 상상하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너의 의지로 인간들은 저주받은 전쟁을 끝내고, 무한의 평화를 누릴 것이다.”

“…….”

“네가 바라던 승리를 안겨 주마.”

바라던 승리라. 맞다. 자신은 승리를 바랐다. 마왕을 해치우고, 마지막 평화의 돌을 찾아 마계를 봉인하는 것. 누구 하나 피 흘리지 않을, 평화로운 세계를 되찾는 것. 분명 그런 것을 바라긴 했다.

하지만 승리만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난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루멘은 천천히 다리를 뻗어 켈리건에게 다가갔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과도한 빛에 눈이 벌어 버릴 것 같았다.

“날 되살려라. 당신은 수호신이잖아. 인간 하나 정도 되살릴 권능은 있지 않아? 검에 영혼을 집어넣을 힘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네가 되살아난다 해도 승리의 미래는 오지 않는다. 너로는 부족하지. 고작 인간의 몸으로는 나의 힘을 담은 검을 다루지 못한다. 그렇기에 네 영혼을 검에 넣어야 하는 것이지.”

“그건 해 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 한 번만 기회를 줘.”

캘리건의 앞까지 다다르자 눈알이 뜨겁게 달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루멘은 켈리건의 이목구비를 가늠하며 그를 마주 보려 했다.

“내 영혼과 의지를 검에 담아도 소용없어. 그 검은 마왕을 죽이지 못할 거다.”

“…….”

“대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사람을 찾아가, 그의 곁을 지키려 하겠지. 그게 내가 바라는 승리니까.”

전쟁의 승리도, 세계의 평화도. 전부 카델이 있기에 가치가 있었다. 그와 함께 평화로운 세계를 살아가고 싶었고, 함께 일상을 누리고 싶었다. 그것이 루멘이 승리를 바라던 이유였다. 그러니 마왕을 죽이는 검이 되겠다고 카델과의 미래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이기심이라 해도 좋다. 쉬운 길을 놔두고 모두의 희생을 택했다 비난해도 좋다. 그 죗값을 평생을 걸쳐 받아도 좋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 카델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왜냐하면.

“마왕을 죽이는 건 내가 아니야. 그 미친 짓을 성공할 영웅은 따로 있다. 그러니 나를 되살려, 하나뿐인 영웅을 지키게 해 줘. 목숨 바쳐 당신의 검을 휘두를 테니까.”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이 전쟁을 끝마칠 단 한 명의 주인공이 있다면, 그건 바로 카델.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찾아올 승리를 믿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신의 유일한 희망을 지키고 싶었다.

“당신이 정말 켈리건이라면……. 부탁하지. 나의 빛은 저 바깥에 있어.”

난 도대체 몇 번이나 더 널 잃어야 하는 거야?

카델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첫 만남부터 좀처럼 쉽게 가지는 일이 없던 루멘 도미닉이라는 사내를.

그로 인해 처음으로 부하의 이탈을 겪었고,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음에도 헤어져야 하는 쓰라린 이별의 고통을 겪었다. 이별과 재회의 반복. 솔직히 말해, 그 과정 덕에 루멘과의 관계가 돈독해진 것은 맞다. 더는 루멘을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결코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그의 맹세에 영원한 관계를 꿈꾸기도 했다. 맹세를 믿었던 만큼 하루하루가 애틋하고도 행복했다. 약속한 대로, 더는 루멘이 자신을 떠나지 않으리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왜.

“루멘…….”

숨을 쉴 때마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카델은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 복도를 바라보았다. 미친 듯이 문을 열어젖히고, 되는대로 복도를 내달렸음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루멘이 죽어 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은 그의 마지막 유언조차 듣지 못한다. 어찌 이리 무능할 수 있는가? 무능한 데다 불운하기까지 하다. 그런 대장을 따랐기에 루멘 또한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

“루멘, 제발…….”

답이 나지 않는 상황에 카델은 천천히 무너졌다. 고요한 복도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처량하게 웅크려 흐느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제 눈으로 직접 봐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절대 그의 죽음을 믿지 않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루멘이었다. 언제나 믿음직스럽게 자신의 곁을 지키던, 둘도 없는 나의 부단장.

말 그대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당장 어딘가로 달려가고 싶은데, 어디에도 도착할 수 없다.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걸음일 뿐. 바뀌는 것이 없었다.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악몽에 갇혀 서서히 말라 가는 기분이었다.

카델은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이마를 짓이겼다. 육체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리고 그런 카델의 뒤로, 묵묵히 그를 뒤따르던 가르엘이 다가왔다. 그가 만들어 낸 기다란 그림자가 카델의 웅크린 몸을 덮었다.

“…….”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위로하고 다독여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어떤 말을 꺼내도 부질없을 것 같았다. 당장 자신만 해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성의 꼭대기에서 떨어진 소린이 죽었을 때부터, 동료들이 아주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크게 다치기 전에 서둘러 합류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가르엘의 상상 속 어디에도, 동료들이 죽는 모습 따윈 없었다.

그들은 종종, 마족의 피가 섞인 자신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것 같아 보였으니까. 어떠한 일에도 죽지 않고 질기게 살아남아, 오래오래 카델의 곁을 지킬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들이 다칠 걱정은 했어도, 죽을 걱정을 하진 않았다. 염려되는 쪽은 오히려 모들렌이었다. 남은 이들 중 죽을 확률이 가장 높은 이를 꼽자면, 바로 자신의 옛 부하라고 생각했다.

“단장님.”

카델의 옆에 앉은 그가 떨리는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약하게 힘을 주어 그를 잡아당기자, 서글프게 일그러진 눈물투성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축축해진 뺨, 계속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는 창백한 입술. 그 얼굴을 눈에 담으며, 가르엘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선의 말을 했다.

“시스템이 단장님에게 뭘 보여 줬는지, 뭘 봤길래 루멘 경이 죽었다는 결론을 낸 건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요, 저는……. 루멘 경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요.”

“시스템이…… 시스템이 내가 루멘을 잃었다고 했어. 기사단을 이탈했다는 얘기도 없이, 그냥 잃었다고. 그건…….”

막연히 생각하던 것을 입 밖으로 내놓으니 루멘의 죽음을 확인 사살하는 것 같았다. 강하게 입술을 깨문 카델이 눈을 내리깔자, 가르엘이 그의 턱 끝을 들어 자신과 마주 보게 만들었다.

“정말 죽었다 해도 아직 방법이 남았을지 몰라요. 전 로렌스의 심장을 먹었습니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각성제도 있고요. 그 힘을 총동원한다면, 루멘 경이 죽었대도 되살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단장님. 지금 이렇게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

“루멘 경이 죽음 속에 방치되기 전에, 서둘러 찾아가야 해요. 그래야 부활을 시도해 볼 수라도 있죠.”

부활의 방법 따윈 모른다. 제 모든 걸 쏟아부어도 죽은 이를 되살릴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가르엘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자신이 희망을 놓지 않아야, 주저앉은 카델 역시 빛을 잃지 않을 테니까.

“제대로 숨을 쉬고, 일어나요. 운다고 해결책이 나오진 않아요. 겪어 봐서 잘 압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 옅게 미소 짓는 가르엘의 얼굴을 담아냈다. 그의 색 다른 눈동자 속에는 분명 자신과 같은 종류의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런데도 가르엘은 그 감정을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되레 자신을 격려하고 있었다.

카델은 조금의 떨림도 없는 가르엘의 눈빛을 가만히 받아 내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여기서 납작 엎드려 흐느낀다고 루멘이 나타나는 기적은 벌어지지 않는다. 돌파구 따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래도, 좌절하지 않고 나아가야 했다.

‘루멘은 몇 번이나 떠났지만, 결국 몇 번이고 되돌아왔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으로선 루멘의 생존을 믿고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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