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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머리를 숙여 부탁했으나, 켈리건은 오래도록 대답이 없었다. 1분 1초가 아까워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다. 그럼에도 루멘은 켈리건을 재촉하지 않고, 숙인 머리를 들지도 않았다. 고작 인간 하나의 부탁으로 신의 뜻을 굽힐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도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대로 검이 되어 살아가기는 싫었다. 카델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전하지 못한 채 차가운 날붙이로 전락하게 된다니. 소름 끼치도록 끔찍했다.
“……루멘 도미닉. 나의 하나뿐인 기사, 쟈닌의 뜻을 이을 자여.”
드디어 입을 연 켈리건의 음성에 루멘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좀 전의 빛 덩이가 아닌, 평범한 인간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훑어 낸 루멘의 눈빛이 작게 떨렸다.
‘쟈닌의 얼굴이다.’
책에 그려지고, 석상으로 조각된 쟈닌의 얼굴과 똑같았다. 건강미가 느껴지는 구릿빛 피부와 총명함이 깃든 검은 눈동자, 왼쪽 눈썹에 난 작은 흉터. 시원스럽게 자리한 이목구비와 인심이 엿보이는 따스한 미소.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본 쟈닌의 얼굴 그대로였다. 쾌활한 청년과 숭고한 영웅의 사이. 태양 같은 사내가 루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랑하는 인간을 희생해 얻어 낸 평화가 깨졌다. 쟈닌과 함께 버려진 검에 마지막 의지를 불어넣음으로써, 내가 할 수 있는 간섭은 끝났다. 너를 마주하는 존재는 망령에 불과하지.”
루멘이 그의 손을 맞잡자, 망령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생생한 감촉이 느껴졌다. 번져 오는 온기를 따라 잠잠하던 바다 위로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 망령의 마음에 후회와 추억이 들어찼으니, 너의 의지는 참된 사랑이리라.”
“…….”
“부탁을 들어주마.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네가 검이 되기를 거부했으니, 검 역시 네 것이 되기를 거부할 거다. 그 시련을 이겨 내고 하나가 되어라. 그리한다면 너는, 너의 빛을 지킬 수 있을 테니.”
손을 타고 오르던 온기가 뜨겁게 달궈지며 루멘의 전신을 순환했다. 그의 온기가 몸 곳곳을 파고들수록 육체의 감각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선 바다 위로 세찬 파도가 일며, 청명하던 하늘에는 균열이 번졌다.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루멘의 앞. 물처럼 흘러내리며 아래로 스며드는 켈리건이 마지막 목소리를 냈다.
“살아남아 되찾은 평화를 누리거라. 쟈닌이 얻지 못하고, 내가 내어 주지 못한 진정한 평화를…….”
흐려지는 음성과 몸을 덮치는 파도 속에서도 여전한 열기. 머리가 하얗게 질릴 만큼 생경한 감각이 몰려오며, 루멘의 시야가 암전됐다.
이가 딱딱 맞부딪혔다. 턱에 힘을 주어 멈추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나도 춥지 않은데. 오히려 끊임없이 몸을 움직인 탓에 후덥지근하게 열이 오를 지경인데. 걸음걸음마다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부산스럽게 굴러가는 눈은 매초 바라보는 곳을 바꿔, 어지러운 시야에 적응하지 못한 몸이 헛구역질을 해 댔다.
그럴 때마다 가르엘은 카델의 손을 꼭 움켜쥐거나, 별 효과도 없는 치유술로 어떻게든 그의 속을 달래 주려 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두 남자의 사이로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무슨 말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저 옆을 지킨 채 묵묵히 걸어 나가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난 혼자가 아니야.’
카델은 계속해서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옆에는 가르엘이 있고, 이 시공간 어딘가엔 분명 부하들도 있을 것이다. 그뿐만인가? 믿음직스러운 스승님도 그들의 곁에 있다. 그러니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루멘이 살아 있다는 믿음을, 절대 내버리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고 다짐했지만.
“……단장님!”
앞으로 기울어지는 카델을 받친 가르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품 안에 들어온 카델의 몸은 온통 식은땀투성이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선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이제껏 쌓인 피로도 문제였지만, 정신에 큰 타격을 입었기에 지친 육체가 버티지 못하는 것이리라.
“괜찮아.”
“…….”
“정말 괜찮아. 안 괜찮을 게 뭐야.”
카델은 반쯤 쓰러진 몸에 꾸역꾸역 힘을 주었다. 희망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려 하는데, 자꾸만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서려 했다. 만약 정말 루멘이 죽었다면, 자신의 계획은 이미 실패한 게 아닌지. 부하들을 평화로운 세계 속에 살아가게 하겠다는, 하나뿐인 꿈은 이미 바스러진 게 아닌지.
끔찍한 패배감이 카델의 내면을 지배하려 했다. 여전히 아무런 소식 없는 쿤라도, 더 이상 루멘의 상태를 알리지 않는 시스템도. 카델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떠밀고 있었다.
“계속 가자. 계속 걷다 보면 복도의 끝이 보이든, 공간을 깨부술 단서가 보이든 하겠지. 뭐라도 나올 거야.”
“아뇨. 잠깐 앉아서 쉽시다. 치유술을 전개할 테니 조금이라도 피로를 풀어요.”
“싫어.”
“왜 싫다는……!”
자신을 강제로 앉히려는 가르엘에, 카델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그를 밀쳐 냈다. 씨근거리는 숨을 고르며, 걱정으로 가득한 가르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침묵 속에서 아슬아슬한 시선이 맞닿고. 불쑥 차오른 구역질을 참지 못한 카델이 입을 가린 채 반대편 벽으로 달려갔다.
“우욱……!”
벽을 짚은 그가 되는대로 속을 게워 냈다. 뒤집힌 속을 달래고 싶은데, 먹은 것이 없어 쓰린 위액밖에 나오지가 않았다. 카델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가르엘에게 손을 뻗어 저지했다. 젖은 입가를 쓸며 벽에 머리를 기댄 그가 붉은 카펫을 적신 토사물을 멍하니 내려보았다. 곧 그 위로 뚝, 뚝, 투명한 액체가 떨어졌다.
‘……아직도 더 울 게 남아 있었나.’
감정을 따라 정직하게 눈물이 흐르는데,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카델은 자신이 진정한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체적인 한계가 아니었다. 루멘을 잃었다는 메시지를 읽었을 때부터, 카델은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자신의 버팀목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이 외딴 세계에서 항상 든든하게 옆을 지켜 주던 사내. 때론 친구처럼, 때론 연인처럼,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자신을 받쳐 주었다.
항상 무감하던 얼굴이 붉게 물드는 순간을 사랑했다. 자신의 앞에서만 풀어지던 표정도. 낮은 웃음소리와 곧은 자세, 깊은 눈빛과 결 좋은 머리칼, 특유의 체향까지. 무엇 하나 사랑하지 않은 게 없었는데.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돼.”
“대장은, 그냥 날 봐 주기만 하면 돼. 나의 충성, 명예, 삶의 모든 투쟁까지도…… 전부 똑바로 지켜보면 돼.”
그가 제게 바랐던 건 오직 지켜봐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한 가지를 해 주지 못했다. 그저 바라봐 주는 것을 하지 못하고, 다시 그를 놓쳐 버렸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카델을 아프게 했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따라 카델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몸을 웅크린 채 흐느꼈다. 그의 생존을 믿겠노라 힘을 낸 지 얼마나 지났다고. 한심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전부 포기하고 싶었다. 이대로 눈을 감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단장님.”
가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게 대답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단장님, 일어나 보세요.”
카델은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한 채 흐느끼기만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
“이것 좀 보시라고요!”
팔을 낚아챈 가르엘이 강하게 힘을 주어 카델을 강제로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카델이 눈물로 흐려진 눈을 깜빡였다. 슬픔과 당혹감이 뒤섞인 눈이 멍하니 가르엘을 응시하고. 가르엘은 그런 카델의 눈을 벅벅 쓸어 닦아 주고는, 바닥을 가리켰다.
“복도에…… 금이 갔어요.”
복도에 금이 갔다니.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시야를 옮기자, 바닥을 가로지르는 굵직한 선이 보였다. 바닥뿐만이 아니었다. 꼭 거대한 절단기가 복도를 자르기라도 한 듯, 선은 옆벽과 천장을 빙 두르며 이어져 있었다.
난데없는 변화에 카델이 서둘러 콧물을 훔쳤다. 뚫어질 듯 선을 바라보자, 곧 안쪽에서부터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이게 뭐죠……?”
가르엘이 조심스럽게 카델을 잡아끌었다.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가까이 있어선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카델은 제자리에 버텨 선 채 바닥의 금을 지켜보았다. 조금씩 푸르게 채워지는 굵은 선. 그 푸른 빛을 담아내던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루멘의 검기야!”
“네?”
“루, 루멘의 검기……. 이 파란빛, 틀림없다고! 루멘의 검기가 맞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루멘의 눈동자를 닮은 이 새파란 기운을 몇 번이나 봐 왔는데. 심장이 터질 듯 널뛰었다. 카델은 복도를 감싼 금이 루멘의 검기임을 확신하며 가르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과과과과―
대기를 울리는 묵직한 진동과 함께 복도가 빠른 속도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훅 넘어가는 중심에 카델이 반사적으로 가르엘의 허리를 붙들었다. 그런 카델을 품에 안은 채, 가르엘이 넋 나간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지금 제가 뭘 보고 있는 걸까요……?”
그어진 금을 따라 반토막이 난 복도. 미끄러지듯 어긋난 복도의 단면 너머를 바라보는 가르엘의 눈이 잘게 떨렸다. 그들의 앞에는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새까만 공간 속 오로라처럼 넘실거리는 자색의 마기. 곳곳에 박힌 작은 점들이 별처럼 빛나며 시야를 밝혀 준다. 정체불명의 파편들은 목적지 없이 한가로이 흘러갔고, 웅웅거리는 낮은 진동이 묵직하게 귀를 울렸다. 가르엘과 함께 잘린 복도 너머를 바라본 카델이 작게 입을 벌렸다.
그들이 선 복도는 낡은 우주선처럼 망가진 시공간을 부유하고 있었다. 카델과 가르엘은 한 발짝만 뻗으면 심연 아래로 떨어질 듯한 위태로운 복도 위에서 서로를 붙잡고 섰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뎠다간 그대로 추락할 것 같았다.
“여태 이런 곳을 떠돌고 있었던 겁니까? 그냥 층을 올랐을 뿐인데 어느새…….”
“저길 봐, 가르엘! 복도야! 또 다른 복도!”
기묘한 시공간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 카델이 겁도 없이 발을 뻗었다. 그에 경악한 가르엘이 다급히 카델을 품 안에 끌어넣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 아래를 살폈다. 그러자 카델의 말대로 자신들이 선 곳과 똑같은 복도들이 보였다. 자유롭게 떠다니는 복도는 그들의 것처럼 반토막이 나, 단면 너머로 안쪽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다른 복도로 이동할 수 있을까요? 각도를 잘만 맞추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요.”
“시도해 볼 만해.”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이동 경로를 따라 점점 더 많은 복도가 드러났다. 카델은 시야를 빼곡하게 채운 복도의 향연에 당혹감을 드러냈으나, 곧 신중하게 표정을 굳혔다.
“루멘이 이 뒤죽박죽한 시공간을 통째로 베어 버린 거야. 이 복도들 어딘가에 부하들이 있는 게 틀림없어.”
루멘이 만든 상황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그렇다고 섣불리 아래로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들이 복도에서 몸을 빼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 때문에 그들은 우선 어딘가에 있을 동료들을 찾기로 했다. 온통 텅 빈 복도뿐이었지만, 동료를 찾아낼 수 있으리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카델? 카델이지? 카델 맞지?”
익숙한 외침이 시공간을 가로질렀다.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바닥에 납작 엎드린 카델이 복도의 단면 너머로 고개를 빼 들고. 멀지 않은 곳에서, 위쪽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드는 라이돈의 모습이 보였다.
“라이돈! 무사했구나!”
라이돈이 있는 복도는 카델이 보기에 수직으로 꺾여 있어, 당장 아래로 굴러떨어진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라이돈은 바닥에 발을 딛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곧 그의 뒤편에 자리한 다른 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반과 요젠, 마밀과 엑토, 모들렌까지. 빠르게 그들의 모습을 확인했으나, 끝내 루멘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에 조급해진 카델이 루멘의 행방을 물으려 했으나.
“이곳으로 넘어와라, 카델! 거긴 위험해!”
마밀의 다급한 음성과 동시에, 그들이 있던 복도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쩍 벌어진 입과 부릅뜬 눈, 힘주어 펼친 손끝과 벌어진 팔다리. 기괴한 모습을 한 에밀리아의 전신에서 검은 마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듯, 맹렬한 기세로 솟구치는 마기의 목적지는 카델과 가르엘이 자리한 복도. 그 분명한 궤적에 기사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이 빌어먹을 마족 새끼가! 단장한테 손끝 하나라도 댔단 봐!”
돌아온 카델과 말 한마디 섞어 보지 못했건만. 마기로 뒤덮인 복도를 올려다본 반이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다. 갑자기 반 토막이 난 복도와 아득하게 펼쳐진 암흑의 공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마왕을 죽이면 전부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라를 두른 반의 일격은, 에밀리아를 휘감은 검은 마기를 넘어가지 못했다.
카가가가가각.
마기에 닿은 대검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은 팔이 터질 듯 힘을 주어 에밀리아의 가슴을 베어 내려 했으나. 마기는 마치 견고한 철벽처럼 간단히 그의 공격을 차단했다. 뿐만 아니었다. 묵묵히 반의 공격을 견디던 마기는, 몇 초 뒤 폭발하듯 몸집을 불리며 그를 튕겨 냈다. 강한 충격에 떠밀린 반의 위로 새로운 얼음 장막이 둘리고. 인상을 구긴 반이 짜증스럽게 외쳤다.
“젠장, 요젠! 이건 어떻게 돼먹은 기운이지?”
반이 묻기 전부터 요젠은 진즉에 마왕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동하고 있어.”
“뭐? 이동? 자리에서 꿈쩍하질 않는데.”
“껍데기는 이곳에 두고, 자기 영혼……. 그러니까, 본인의 기운을 끌고 이동하고 있는 거야. 저 둘이 있는 곳으로. 그게 몸을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빠르다고 판단했나 봐.”
그런 건 유체 이탈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몸이 없는 상태에서 공격이 가능하다니. 에밀리아의 비정상적인 능력에 아군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왕의 이동을 막아야 해. 기운이 전부 넘어간다면 아무리 적룡이 있대도 위험해.”
마왕을 직접 상대해 본 그들이기에 알 수 있었다. 가르엘의 치유술은 대단하고, 적룡의 힘을 품은 카델의 실력 또한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 둘만으로는 부족했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제기랄, 대체 어떻게 막으란 거야? 이 빌어먹을 마기는 뚫리지가 않는데!”
당장 카델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반이 조급함을 드러냈다. 항상 얌전하던 요젠 역시 조금씩 일그러지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엑토와 모들렌, 마밀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하지만 딱 한 명. 소중한 카델이 돌아왔음에도 다른 곳에 주의를 돌리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루멘. 어디 있는 걸까?”
라이돈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요젠이 고개를 움직였다. 라이돈은 그런 요젠을 바라보며 말했다.
“복도를 자른 거, 분명 루멘의 검기였잖아. 그렇지?”
“맞아. 루멘의 기운이 느껴졌어.”
“그럼 살아서 방을 나왔다는 거니까, 복도 어딘가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디 혼자 떨어져 있는 건가? 그런 외톨이 같은 모습이 잘 어울리긴 하지만, 이런 때까지 분위기에 맞게 놀 필요는 없는데.”
진동하는 검집에 마왕은 당혹감을 드러냈으나, 그녀는 곧장 평정을 되찾고 기사들을 공격했다. 그녀의 폭격에 아군은 정말이지 필사적으로 반격했다. 하지만 겨우 의식을 되찾았을 뿐인 그들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고, 전투가 완전히 마왕의 흐름을 타려던 순간. 눈부신 섬광이 복도를 통째로 가로지른 것이다.
복도를 가른 쓸데없이 눈부신 섬광은 분명 루멘의 검기였다. 그 기운을 확인하자마자 루멘의 생존을 확신했는데.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혹시 그 검기가 최후의 발악이었나, 조금은 걱정이 드는 것이었다.
“여기선 기척을 감지하기가 어려워. 당장 위에 있는 카델의 상태도 확인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살아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흐응, 걱정 같은 건 안 해. 죽었으면 주검이라도 회수해야 카델이 덜 슬퍼할 거 아니야. 그래서 위치가 궁금했던 것뿐이야.”
전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라이돈은 부러 얄밉게 말을 뱉었다. 요젠은 그런 라이돈의 진심을 모르는 척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마왕의 이동을 막기 위해선 육체를 훼손해 기운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기운의 이동 경로를 차단하는 수밖엔 없겠군.”
마왕을 유심히 살피던 엑토가 대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겨우 목숨을 부지했을 뿐인 그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으나, 몸이 아프다고 내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모두 힘을 합쳐 공격한다면 마기를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오. 시도해 보지.”
기운의 이동 경로를 차단하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으니, 물리적인 방법밖엔 남지 않았다. 그의 의견에 찬성한 반과 요젠 역시 무기를 빼 들고 공격을 준비했으나.
“우리가 무식하게 장막을 뚫는 동안 카델과 그 부하가 죽기라도 하면 끝장일세. 기운의 이동을 직접 막는 게 나아.”
“지금의 우리에겐 마기의 이동을 억제할 만한 힘이 없지 않소.”
“다들 비키게. 내가 할 테니.”
마밀이 모두를 물리고 전방으로 나섰다. 지친 눈으로 뒤편의 기사들을 훑어본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양손을 털었다.
“적린 기사단. 자네들은 카델을 이곳으로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을 만한 방법을 생각해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