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4화 (50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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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엘, 조심해!”

밀려나는 몸을 간신히 멈춰 세운 가르엘이 이를 악물었다. 어두운 마기로 뒤덮인 복도. 그 칙칙한 복도의 중앙에 마왕의 형체를 갖춘 그림자가 있었다. 이목구비도, 팔다리도 멀쩡히 달렸으나, 그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오직 마기였다. 꼭 요젠의 그림자 분신을 보는 듯했다. 그럼에도 실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강력했으니.

“분신이 아닙니다! 분신은 상대해 봐서 알아요. 이건…… 진짜 마왕이라고 봐야 해요.”

어떤 식으로 이동한 건지는 몰라도, 눈앞의 그림자는 진짜 마왕임이 틀림없었다. 가르엘의 외침에 뒤편에서 마력을 끌어 올리던 카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스승님의 말대로야. 여기서 시간을 낭비했다간 돌아온 의미가 사라진다. 당장 합류해야 해.’

복도의 단면 아래로 추락한다면 아군이 있는 곳으로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생각대로 안 된대도 아군과 가까워지기는 할 테니,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라도 있다. 하지만 바깥으로 떨어지기 위해선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마왕. 에밀리아를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했다.

카델은 최대한 많은 화염구를 쏘아 가르엘을 엄호했다. 가르엘이 아주 잠시라도 에밀리아의 허점을 노릴 수 있다면. 그때를 노려 도주할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 쓰러지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집중해야 해. 복도를 뒤덮고 있는 이 마기……. 없앨 수도 없는데 너무 위협적이니까.’

사방에 깔린 짙은 마기는 그들의 기운을 빼앗거나, 움직임을 제한하진 않았다. 하지만 불쑥불쑥 치솟아 공격을 시도했다. 계속 자리를 이동하거나, 철저히 방어하지 않으면 기습당하기 딱 좋았다.

사방이 마왕의 공격 지대. 마치 이곳의 신이라도 된 듯, 그녀는 자유롭게 복도를 누비며 가르엘과 카델을 압박하고 있었다.

“단장님!”

에밀리아와 거리를 벌린 가르엘이 카델을 불렀다. 반사적으로 가르엘에게 시선을 옮기자, 어두워 잘 확인할 수 없던 에밀리아의 그림자가 기묘하게 뒤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또 뭐야?”

에밀리아의 형체가 기괴하게 늘어지고 솟구치며 마족의 형태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상을 감지한 카델이 가르엘을 불러내 곁에 세웠다.

“변신이라도 하는 걸까요?”

“몰라. 하지만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건 틀림없어. ……지금이다. 전력으로 복도를 넘어가자.”

그녀의 변신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줄 마음은 없었다. 기회를 포착한 카델이 가르엘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달려!”

카델은 질주하는 가르엘의 뒤를 쫓아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임에도 어느새 몸집을 불린 에밀리아가 복도의 한 면을 가득 채워 가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신호 없이 에밀리아의 양옆에 난 좁은 틈을 향해 흩어졌다. 속력을 높인 그들이 구멍 사이로 몸을 던지고. 무사히 구멍을 넘은 가르엘은 다시 중심을 잡고 달려갈 채비를 했으나. 안타깝게도, 카델은 균형을 잡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큿……!”

“단장님!”

“오지 말고 달려! 뒤돌아보지 마!”

“단장……!”

“시끄럽고, 달리란 말 안 들려?”

이런 급박한 때에 부축받을 생각은 없다. 카델의 윽박에 주춤거리던 가르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카델 역시 빠르게 몸을 일으켜 뜀박질을 재개했다.

복도의 끝이 코앞이다. 먼저 도착한 가르엘이 뒤를 돌아 카델을 기다렸다. 카델이 어서 뛰어내리라며 소리쳤으나, 차마 카델을 두고 복도를 떠날 수 없던 가르엘은 그저 고집스레 고개만 저었다.

“아오, 체력 더러운 단장을 뒀으면 먼저 도망칠 각오 정도는 하라고!”

치솟는 성질에 바락바락 성을 낸 그가 가쁜 호흡을 씹어 삼키며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가 복도의 끝에 다다르기 전.

“어어……!”

바닥을 박차던 발이 허공을 가르며, 몸이 붕 떠올랐다. 맞은편에 선 가르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고, 복도의 천장이 가까워지는 동안. 카델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카, 델… 라이… 토스…….”

귓가로 소름 끼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어느 괴생물체의 흐느낌처럼, 질척이고 축축한 음성. 뻣뻣한 고개를 돌리자, 높게 날아오른 에밀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형체는 여전히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으나, 등에는 날개가 아닌 네 쌍의 거대한 촉수가 뻗쳐 있었다.

이내 제 몸통을 감싼 마기의 촉수를 발견한 카델이 마른침을 삼켰다.

“단장님, 장막을 두르세요!”

가르엘은 붙잡힌 카델을 구하기 위해 검을 빼 들고 곧장 달려갔다. 하지만.

쿵! 쿵! 쿵!

그녀의 등에 달린 촉수가 무자비하게 복도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굵직한 촉수가 방망이처럼 바닥을 두드려 대니, 멀쩡히 회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렇게 가르엘이 정신없는 공격 속에서 접근을 꾀하는 동안. 카델은 제 허리를 묶은 촉수를 불태워 보려 했다.

“크윽……!”

그러나 화염에 닿은 촉수는 바짝 움츠러들며 더욱 강하게 카델의 갈비뼈를 조여 왔다. 장막을 둘렀음에도 금방이라도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끙끙대는 카델의 앞으로 에밀리아의 그림자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네게… 최악의 고통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새까만 기운에 불과하던 몸체에 본래의 피부가 더해지고 있었다. 카델은 서서히 본 모습을 찾아가는 에밀리아를 마주하며 조여 오는 촉수 안에서 발버둥 쳤다. 도저히 몸을 가만히 놔둘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아래에 있는 가르엘을 살필 여유조차 없었다.

‘먼저 이 촉수를 없애야 해……!’

촉수와 딱 붙은 몸에 충격이 덜 가도록 마법을 전개하고 싶었지만, 어쭙잖은 마법으로 촉수를 자극했다간 갈비뼈가 으깨질 가능성이 컸다. 카델은 부상을 감안한 마법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몸을 빼내기만 하면, 아래에 있는 가르엘이 자신을 살려 줄 테니.

어느새 벌겋게 물든 눈을 일그러뜨린 카델이 지척으로 다가온 에밀리아를 향해 이를 갈았다.

“드디어 보네. 반갑다, 야.”

뚝뚝 끊기는 웃음소리에 에밀리아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그를 감싼 촉수가 한층 더 팽팽하게 조여졌다. 그에 왈칵 피를 토해 낸 카델이 다급히 촉수를 움켜쥐고. 강한 폭발의 마력을 끌어낸 순간이었다.

쩌적. 쩌저적.

카델의 바로 왼편. 마기로 덮인 복도의 벽면에, 푸른 섬광이 새겨졌다.

푸른 섬광.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린 그 찬란한 빛이 시야를 뒤덮은 순간. 카델은 기적을 목격한 신도처럼 뻣뻣하게 굳어 입을 벌렸다.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곧은 사내의, 그의 영혼을 증명하는 기운이었으니.

이질적 존재의 침입을 감지한 에밀리아는 서둘러 몸을 방어하려 했으나. 자신의 시공간조차 갈라낸 검기를 막을 방도는 없었다. 파랗다 못해 하얗게 번져 가던 섬광이 일순 자취를 감추고.

찰나의 정적을 깨부수며, 마기에 뒤덮여 있던 벽이 무너졌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파편. 그리고 그 너머에서부터 추락하듯 떨어지는 한 사람.

“루멘……!”

그는 빛에 휩싸여 있었다. 한밤의 호수를 닮은 기운이 육신을 감싸고, 깊은 두 눈에는 환한 달빛이 담겼다. 벽을 뚫고 나온 그의 등장이 슬로 모션처럼 늘어졌다. 빛 속에서도 저물지 않는 고결함과 빛무리에 뒤덮인 채 흩날리는 아름다운 먹색의 머리칼.

어둠을 가르고 나온 루멘은 꼭 신이 점지한 희망의 사자 같았다. 이 숨 막히는 감각이 자신을 옥죈 촉수 때문인지, 벅찬 감동 때문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이윽고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내가 카델을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드디어 찾았다.”

언제 잘려 나갔는지 모를 촉수가 조각난 채 허공을 날았다. 그 잔해를 좇을 새도 없이, 루멘이 카델을 안고 그대로 바닥에 착지했다.

“단장님! 루멘 경!”

그들을 발견한 가르엘의 다급한 부름이 들려왔다. 하지만 카델은 도저히 가르엘을 바라볼 수 없었다. 자신을 꼭 끌어안은 남자의 얼굴조차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필사적으로 그의 목을 감싸고, 가슴을 맞댔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살짝 들뜬 숨소리에 집중했다. 자신이 안고 있는 이가 루멘이라는 것을, 루멘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서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면서. 두 사내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채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언제까지고 맞붙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시간도, 상황도 허락되지 못했다. 빠르게 둘에게로 달려온 가르엘은 곧장 그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으나. 루멘의 얼굴을 바라본 그가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루멘 경……? 원래도 미남이긴 했지만 이건 좀 과하게 눈부시지 않나 싶은데. 어디 승천이라도 하고 왔습니까?”

“비슷합니다.”

환하게 빛나던 루멘의 모습은 카델의 콩깍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도 빛나고 있었다. 전신에 둘린 기운에선 희미하지만 낮은 울림도 느껴졌다. 항상 납검 상태를 유지하던 장검은 훤히 뽑혀 있고, 눈은 밤 짐승의 것처럼 희번덕 빛난다.

가르엘은 루멘의 이 기묘한 변화의 원인이 궁금했으나, 하나씩 따져 묻기에는 시기가 적절치 못했다. 루멘의 기습 공격에 마왕이 주춤한 지금. 복도를 탈출해야 했다.

“경이 촉수를 잘라 낸 덕에 마왕이 움직임을 멈춘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이동하죠.”

“저 때문이 아닙니다.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가장 약한 부위를 잘라 낸 것뿐이에요. 아마 마왕의 육체를 상대하고 있는 아군이 수를 썼겠죠.”

“뭐가 됐든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고요. 자, 단장님. 이만 루멘 경한테서 떨어지지 않겠어요? 제가 이런 때까지 치졸한 감정을 느껴야겠습니까?”

가르엘이 카델의 옷자락을 끌어당기자, 무력하게 루멘의 품에서 떨어진 카델이 코를 훌쩍였다. 어느새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빤히 루멘을 올려다보았다. 그 불어 터진 면발 같은 얼굴에 담긴 억울함과 원망에, 루멘이 당혹스레 눈을 깜빡였다.

“대, 대장……?”

“이렇게 살아 있으면서. 왜 그랬어? 왜 그렇게 날 괴롭혔냐고!”

“뭐? 내가 뭘 괴롭혔다는…….”

울음기 가득한 외침은 사실상 이상한 알림을 띄워 정신 공격을 한 시스템을 향한 것이었으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루멘은 있지도 않은 자신의 죄를 더듬어 가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리 오세요, 단장님! 남자를 울리는 남자라뇨? 최악이군요. 상종도 하지 마세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십쇼. 또 가르엘 경이 변태 같은 짓을 해 놓고 저한테 뒤집어씌우는 거 아닙니까?”

“딱 봐도 루멘 경 때문에 우는 건데, 그 책임을 남한테 떠넘기시겠다? 이거 안 되겠네요. 그래도 저희 중엔 제일 건실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 다 연기였던 거죠.”

“큽……! 시, 시끄러워 둘 다. 빨리 도망이나 가자…….”

간신히 흐느낌을 가라앉힌 카델이 더듬거리며 말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은 가르엘이 덥석 카델의 손을 잡고 복도의 끝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 둘의 뒷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루멘이 마지막으로 뒤편의 에밀리아를 흘겼다.

‘얇은 촉수 몇 가닥을 잘라 냈을 뿐이지만, 그것 역시 마왕의 기운이다. 잘라 낸 만큼 약해졌을 거야. ……하지만 마왕의 본체는 지금처럼 쉽게 베어 낼 수 없겠지.’

그를 둘러싼 빛은 켈리건의 가호였다. 검에 잡아먹혀 죽었어야 할 루멘을 되살린 힘. 루멘은 죽음의 강을 건너 돌아왔으나, 아직 완전히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를 감싼 가호가 언제든 그를 검 속으로 빨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이 가호를 다스려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드는 순간. 켈리건이 남긴 기운은 자신의 것이 되고, 쟈닌의 검 역시 자신의 손안에 들어오리라.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이 힘을 온전히 움켜쥘 수 있었다. 검집 없는 검을 허리춤에 매단 루멘이 지그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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