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막을 강화할게! 버텨!”
쿵, 쿵, 쿵. 날카롭게 뻗친 마기가 장막을 강타할 때마다 절로 욕이 나올 만큼 거센 충격이 느껴졌다. 밑에서부터 솟구치는 공격의 반동에 몸이 들썩였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아군이 있는데……!’
부하들과의 합류가 코앞이다. 그들의 얼굴이 분명하게 보이는데도 가까워지기는커녕 더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애가 탔다. 게다가 마밀. 모들렌의 곁에서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그의 상태가 너무도 걱정됐다.
“내가 베어 내지. 가르엘 경, 경은 대장과 함께 내려가는 데에만 집중해 주십쇼.”
“좋아요. 무리해도 괜찮습니다. 다친 것 같으면 바로 치유술을 써 드릴 테니까요. 마구 돌진하세요.”
몇 차례 공격을 버티던 루멘이 검을 들고 나섰다. 카델과 가르엘의 아래로 내려가는 루멘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들이 갇힌 이 어두운 시공간 속에선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행동도 느려지고 몸도 무거워져, 발도술 같은 재빠른 검술을 사용하는 루멘에게는 꽤 치명적인 제약이었다.
“또 올라오고 있어! 베어 내지 못할 것 같으면 그냥 피해, 루멘!”
디딜 곳 하나 없이 부유하는 몸과 불편한 호흡, 모래주머니라도 단 것처럼 묵직한 팔다리.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상태였지만, 이런 극한의 상황이야말로 켈리건의 검을 길들이기에는 좋은 기회였다.
“네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해라.”
몰려드는 루멘의 기운을 거부하듯 검이 낮은 울림을 뱉어 냈다. 루멘은 검의 반항을 무시하며 솟구치는 마기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자신에겐 카델의 장막이 있고, 언제든 박살 난 몸을 고쳐 줄 가르엘도 있다. 몸을 사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끼기기기긱.
정직하게 맞부딪힌 검과 마기 사이로 찢어지는 쇳소리가 울렸다. 밀리지도, 밀려나지도 않는 팽팽한 힘겨루기. 검에 무게를 싣던 루멘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얌전히 좀 굴어……!”
켈리건의 검이 기어이 루멘의 기운을 뱉어 내며, 역류한 기운이 팔에 저릿한 통증을 안겼다. 검을 쥔 팔에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으나, 루멘은 굴하지 않고 다시금 기운을 불어넣었다. 켈리건의 검에 자신의 기운을 핏줄처럼 새겨 넣어야 했다.
“루멘!”
새로운 마기의 줄기가 루멘의 양옆을 스쳤다. 가르엘의 보호를 따라 공격을 피한 카델은 아슬아슬한 루멘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루멘은 죽지 않고 돌아왔어. 하지만 아직 한계 돌파에 성공했다는 시스템 창은 뜨지 않았다. 언제 다시 위험에 빠질지 몰라. 지금이라도 막아야 하나?’
루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루멘에게 끔찍한 시련을 떠안길 시스템의 악의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델이 루멘을 불러들이기도 전.
“단장님, 저길 봐요! 불꽃이 올라오고 있어요!”
가르엘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뜨끈한 열풍이 전신을 휩쓸었다. 가볍게 눈살을 찌푸린 그가 시선을 옮기자, 곧 어두운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널찍한 불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불길은 솟구치던 마기를 모조리 꺾어 가며 곧게 길을 내고 있었다.
“마밀 님의 마법이야……!”
분명 마밀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건만. 아직 이 정도 마법을 사용할 여유는 남아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품으면서도 카델은 코앞까지 다다른 불길을 반겼다. 넓게 펼쳐진 불 위로 발을 디딘 그가 감탄하며 말했다.
“불꽃이 발을 잡아 주고 있어. 이 위로 걸어가면 훨씬 빠르게 내려갈 수 있을 거야. 루멘! 이쪽으로 와!”
뜨거운 불길이 발목을 감싸고 있음에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밀이 만들어 준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카델은 떨어져 있는 루멘을 향해 다급하게 손짓했다. 함께 불길을 발견한 루멘 역시 이동 방향을 틀기 시작했으나.
“이런……! 마왕이 불길을 부숴 버리려는 모양입니다. 이런 식이면 마밀 님의 마법도 오래 버티지 못해요. 서둘러야 해요.”
그새 수를 늘린 마기가 그들이 선 불길을 마구잡이로 난타하기 시작했다. 마밀의 불꽃은 그런 마기를 튕겨 내며 버티고 있었지만, 마밀의 상태를 감안하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먼저 가! 내가 아래에서 마기를 막아 볼 테니까.”
“뭐? 됐으니까 빨리 이쪽으로……!”
“난 걱정하지 말고 가, 대장! 이 기회를 놓치면 모두의 노력이 헛수고가 된다고!”
루멘의 단호한 외침에 카델이 입을 다물었다. 루멘을 이 위험한 공간에 단 1초도 더 놔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공격을 방치한다면 마밀이 기껏 만들어 준 불길도 소용없어질 것이었다.
결국 카델은 루멘을 믿고 불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그들의 사방으로 투창을 닮은 마기가 쇄도했다. 그러나 그 마기가 그들에게 가 닿기도 전. 눈부시게 새겨진 푸른 섬광이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마기를 가로지른 섬광은 투창을 완전히 소멸시키진 못했으나, 기운을 반으로 잘라 카델과 가르엘의 경로를 완전히 비껴가게 만들었다. 카델과 가르엘은 루멘의 엄호 아래 막힘 없이 불길을 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것이 루멘을 위한 일이었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던 불길에 드디어 끝이 보이고. 복도와의 거리를 가늠하던 가르엘이 카델의 허리를 낚아채 그대로 몸을 날렸다. 바닥을 구르는 몸을 따라 둔탁한 통증이 번졌다. 카델은 충격이 멈추자마자 가르엘의 품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얘들아!”
“단장! 무사한 거예요?”
“카델……!”
“자기!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잖아!”
마왕을 견제하던 부하들이 빠르게 거리를 벌리곤 카델의 상태를 확인했다. 카델은 너머의 엑토에게 가벼운 눈짓을 건넨 뒤, 부하들에게 다가오지 말고 태세를 갖추라며 손을 내저었다. 마왕을 앞에 두고 재회의 감동을 누리는 건 사치였다. 그러나 카델이 서둘러 몸을 일으킨 순간.
“정말이지……. 느려 터진 제자로군.”
미처 확인하지 못한 뒤편에서부터,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상태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많이 지친 탓에 몸이 늘어진 것이리라 예상했다. 몸을 일으키기 힘들 만큼 지쳤어도 위급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야, 마밀은 자신을 위해 마왕의 시공간을 가르는 불의 길을 만들어 주었으니까. 당장의 전투에서 힘을 아끼게 한다면, 상태가 호전되리라고. 카델은 믿었다. 실로 무책임한 착각이었다.
“스승… 님…….”
쓰러져 누운 마밀은 카델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선 꼴을 하고 있었다.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의 머리가 닿은 자리에는 흥건히 피가 고였고, 몸 위로는 불씨가 탁탁 튀어 올랐다. 짓이겨진 석류처럼, 피와 상처로 가득한 몸뚱이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하얗게 센 머리칼만이 그가 마밀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스승의 처참한 모습에 카델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자리에 굳었다. 뻣뻣하게 굴러간 눈동자가 마밀을 지키고 있던 모들렌을 향했다. 그의 눈빛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왜 마밀을 치료하지 않고 있는 것이냐고 묻는 듯했다. 그의 앞에서 모들렌은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가르엘. 가르엘……! 당장 뒤로 빠져. 이리 와서 마밀 님을… 스승님을 치료해! 어서!”
다급하게 가르엘을 불러낸 그가 마밀의 앞으로 달려가 주저앉았다. 모들렌은 그런 카델에게 무어라 설명하는 대신, 그들을 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라진 모들렌을 대신해 카델은 마밀의 눈을 적시는 핏물을 닦아 내고, 늘어진 팔과 어깨를 더듬거렸다. 그에게서 생명의 신호를 찾아내려 애썼다.
혼란함 속에서 카델은 뒤늦게 마밀을 발견한 가르엘에게 서두르라며 윽박질러 댔다. 하지만 가르엘이 마밀을 치료하기 위해 전열을 이탈한 순간.
“크읏……!”
마기로 엮인 바람결이 강렬하게 불어 젖히며, 순식간에 복도를 가득 메웠다. 까맣게 흐려진 시야와 강풍에 밀려나는 몸. 매서운 마기 속에서 카델은 마밀을 꽉 끌어안은 채 들썩이는 몸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버텨 주세요, 스승님. 조금만…….”
맥없이 흔들거리는 몸을 덮듯이 웅크리자, 벼락처럼 하이론과 소린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죽음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던 그들의 마지막 얼굴. 그들의 고요한 표정과 흐릿한 눈빛이 마밀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 예언 같은 이미지를 떨치기 위해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가르엘……!”
“단장님! 어디 있는 겁니까, 소리를 내 보세요! 제 이름 좀 불러 봐요!”
“가르엘, 가르엘, 가르엘, 제발……!”
에밀리아의 마기 속에서 떨어져 있는 그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위치도 인물도 특정할 수 없었다.
카델은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 가르엘에 절망했다. 울지 않으려 했으나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맞닿아 있기에 알 수 있었다. 제가 끌어안은 스승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마밀은, 하나뿐인 제자의 품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얼굴을 보여 주겠느냐?”
피가 끓는 탁한 음성에 카델이 납작 엎드려 있던 몸을 세웠다. 그러자 곧 눈물로 엉망이 된 지저분한 얼굴이 드러났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 하며, 질질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까지. 꼭 울음보가 터진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 서러운 얼굴에 마밀은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느슨하게 풀어진 손을 들어 카델의 코를 닦아 준 마밀이 그의 귓불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스승님. 절대 눈 감으면 안 돼요. 조금만 더 버텨 주세요. 저 두고 가시면 안 된다고요. 네? 아셨죠?”
그의 손끝에 걸린 것은 내내 카델의 귀에 박혀 있던 작은 마도구였다. 조심스럽게 귀걸이를 빼내자, 빼앗겼던 본래의 색이 차차 돌아왔다. 부드러운 밀 색의 머리칼과 맑은 안광을 품은 다갈색의 눈동자. 본인이 가진 강인한 정신력과는 달리 누르면 누르는 대로 휘어질 것 같은, 한없이 유하고 말캉한 얼굴. 실로 오랜만에 보는 카델의 진짜 모습에, 마밀의 입꼬리가 짧게 떨렸다.
“처음엔 젠가의 핏줄이니 거뒀다.”
“아뇨, 아뇨. 말을 아끼세요. 그냥 숨만 쉬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요. 제가 어떻게든 가르엘을 데려올게요.”
한 마디를 꺼냈을 뿐인데 카델은 제 스승이 심장이라도 꺼내 놓은 것처럼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밀은 제자의 유난에 할 말도 못 하고 눈을 감을 생각은 없었다. 몰아치는 마기가 뺨을 할퀴고, 요란한 바람 소리가 귓속을 파먹는 듯했지만. 마밀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지키지 못한 내 친우를 대신해 네게 꽤 공을 들였지.”
“스승님……. 제발요…….”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제법 깊게 정이 들었더구나. 내 유일한 제자인 네가 꼭 손자 같기도, 아들 같기도 했어.”
“마지막인 것처럼 말하지 마시라고요…….”
젠가와 똑 닮은 얼굴. 분위기마저 그의 젊은 시절과 비슷했던 카델은, 언제나 마밀에게 그리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카델을 보면 자연스럽게 젠가와 함께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은 젠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담긴 사내는 젠가가 아닌 카델 라이토스. 그가 참으로 오랜만에 어여삐 여긴, 소중한 제자였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정을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참으로 간단히 그 다짐을 꺾고 들어와 기어이 뿌리를 내린 아이.
“지키지 못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갈 운명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바쳐 그 우울한 운명을 이겨 냈으니, 오히려 영광이지.”
“안 돼…….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죽지 않을 거잖아요. 계속 제 곁에 있을 거잖아요. 자꾸 왜 그러는 거예요!”
“카델. 날 똑바로 보거라. 네 스승의 마지막을 제대로 눈에 담아다오.”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마밀의 최후를 믿고 싶지 않았고, 현실을 직시하기는 더더욱 싫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자신을 지켜 줄, 믿음직스러운 스승님으로 남으리라 생각했다. 영원한 자신의 어른일 거라고. 그러니 만약 자신이 부하들을 두고 이 세계를 떠나도, 종종 그들을 돌봐 주지 않으려나. 뻔뻔한 기대도 했었다.
그는 이 세계에 멋대로 끌려온 자신에게 고난을 이겨 낼 힘을 주었다. 든든한 조언도 해 주고, 실질적인 도움도 건네주며. 때로는 든든한 아버지처럼, 때로는 정 많은 할아버지처럼 카델을 품어 준 존재였다.
자신이 조금만 일찍 도착했다면 마밀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마왕의 형제를 죽이는 걸 포기했다면? 처음부터 이들과 함께 성을 올랐다면 마밀을 지킬 수 있었을까? 소린도 죽지 않았을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전쟁을 끝내기를 택했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선택의 대가가 무거웠다. 너무 무거워 고개를 들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마밀은 그런 카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끝까지 함께 싸워 주지 못해 미안하다. 부디 스승보다 나은 제자로, 네가 바라는 것을 위해 싸우거라.”
마밀은 죽어 가는 와중에도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을 주어 카델에게 제대로 된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 그랬기에 카델은 정신없이 우는 와중에도 마밀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괴로운 일이었다. 마밀의 따뜻한 마음이, 훗날을 염려하는 애틋함과 순수한 다정함이. 이 빌어먹게 한심한 제자에게 남김없이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죄송해요. 이제야 찾아와서. 느려 터진 제자라…… 정말 죄송해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눈을 들고 마밀의 마지막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카델은 간신히 사죄의 말을 꺼냈으나, 더 이상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깨를 두드리던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카델은 무너지듯 몸을 숙여 다시금 마밀을 끌어안았다. 반응 없는 몸을 품에 안고, 미약하게 남은 온기를 느끼려 했다.
생전 내 본 적 없는 찢어지는 절규가 입 밖을 뚫고 나왔으나. 마기로 뒤덮인 복도는 그의 슬픔마저 집어삼켰다. 이곳의 누구도 카델의 고통을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