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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아이템 [데폴로의 피]를 섭취하였습니다.」
「금기된 힘의 발현으로 모든 속성의 마력이 개방됩니다.」
「경고! 육체가 과도한 힘의 증폭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버프 유지 시간 발생.」
「[데폴로의 분노] 유지 시간 : 00 : 14 : 59」
유지 시간은 고작 15분. 1분 1초를 아까워하며 약의 힘을 끌어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카델은 넋을 잃고 말았다.
‘[데폴로의 피]라니, 이건…….’
그는 「히어로 오브 나이츠」의 초창기 유저는 아니었다. 게임이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고, 흥미가 돋았을 때야 시작했으니. 그랬기에 게임이 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일어난 사건 사고를 전부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마밀 키파에게 마족의 뼛가루 9,999개를 가져가면 얻을 수 있는 히든 아이템. 구하기도 힘든 뼛가루를 9,999개나 모아서 한꺼번에 팔아 버린 미친놈이 있었지.’
개발자도 일종의 이스터 에그 삼아 업적 보상을 만들었다고 했다. 정말 그런 짓을 할 유저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실제로 그런 미친 인간이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해당 유저는 히든 업적을 깨고 얻은 [데폴로의 피]를 망설임도 없이 곧장 사용했다. 효과가 궁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용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든, 개발자조차 존재를 잊고 있던 아이템이다. 해당 유저는 [데폴로의 피]를 사용하면 주인공인 카델 라이토스의 모든 속성이 개방되고, 보유 포인트와는 상관없이 전 속성을 최대치로 찍을 수 있게 된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아냈다.
해당 유저가 올린 인증샷과 공략 글에 게임 게시판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운영진들은 [데폴로의 피]가 가진 버그나 다름없는 효과를 인지하고, 버프 지속 시간을 생성. 해당 유저에게는 개별 보상을 해 주었다고 한다.
‘지속 시간이 생긴 뒤론 쓰레기 아이템이 돼 버렸지. 그 짧은 시간 동안 강해지자고 뼛가루 9,999개를 모아 팔아 버리는 유저는 없을 테니까.’
그 전설과도 같은 글을 읽은 과거의 여환 역시, 세상엔 별놈이 다 있군, 하며 넘겨 버렸을 뿐이었다. 카델 라이토스에게 빙의되고도 한 번 떠올리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전설적인 글의 주인공인 [데폴로의 피]가 자신의 몸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에 순수하게 감복하진 못했다. 카델은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짓씹었다.
‘난 뼛가루도 몇 개 안 드렸는데. 그마저도 사기꾼같이 덤터기나 잔뜩 씌웠는데. 이런 걸…… 받을 자격이 못 되는데.’
그의 능력과 지식을 착취하기만 한 못난 제자에게, 마밀은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을 넘겨주었다. 그것이 죽고 싶을 만큼 죄스러우면서도, 카델을 강하게 만들었다.
빈 병을 움켜쥔 채 눈을 부릅뜬 카델의 맞은편. 불꽃을 닮은 마기를 피워 낸 에밀리아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왜 울려고 해? 막상 싸우려니 무서워?”
본인의 승리를 확신한 듯, 그녀의 눈빛에선 전의가 아닌 상대를 농락하겠다는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그 욕망을 엿본 카델은 짧은 심호흡과 함께 빈 병을 집어 던졌다.
이제 남은 유지 시간은 약 14분. 본래라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 여겼을 것이다. 부하들도 없이 홀로 마왕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아니. 반대야. 지금부터 네 당황한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설레네.”
“……무슨 자신감일까? 한낱 인간 따위가.”
오랜만에 상태 창을 열어 마력 속성을 확인한 카델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공략 글의 내용대로, [데폴로의 피]를 복용한 카델 라이토스의 모든 속성 마력 포인트는 MAX였다. 최강이다. 모든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 최상의 상태로, 마왕을 물리치지 못할 리 없었다.
‘여전히 느려 터진 이 못난 제자. 스승님의 유언만큼은 제대로 지켜 보겠습니다.’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을 위해. 드디어 최후의 전투를 시작할 때였다.
“넌 아무것도 몰라, 에밀리아.”
카델의 말에 에밀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짙은 살의로 번들번들하게 물든 눈동자는 오로지 카델만을 담아내고 있다. 제 앞에 우뚝 선 카델의 단단한 표정과 똑바른 눈빛, 그리고 갑작스럽게 넘쳐흐르는 기묘한 마력의 흐름까지 전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래.”
“신경 긁는 방식이 독특하네.”
“네가 다다를 수 있는 결말은 오로지 패배뿐이야. 날 죽여도, 네가 죽어도. 변하는 건 없지. 넌 영원히 승리할 수 없고, 마계 역시 영원히 해방되지 못해.”
패배를 목전에 둔 인간이 지껄이는 말은 전부 똑같다. 현실을 직시하기엔 그 연약한 정신머리가 버텨 주질 못하는 걸까.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멋대로 지껄여. 얼마 남지도 않은 목숨, 미약한 희망이라도 품어야 덜 괴롭지 않겠어?”
부드럽게 미소 지은 그녀가 한쪽 남은 팔을 크게 휘둘렀다. 휘어지는 손끝을 따라 지면이 내려앉을 만큼 묵직한 충격파가 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이 선 복도의 천장과 벽이 터져 나갔다.
두두두두두, 쉴 틈 없이 폭발하는 벽의 파편이 너머의 시공간을 부유했다. 탁 트인 삼면으로는 끝도 없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대로 발을 디딘 바닥마저 부서진다면, 날개 없는 카델은 어두운 시공간을 무력하게 떠다니게 되리라.
완전히 벽을 허물어뜨린 그녀가 전방을 향해 손을 뻗자, 널찍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 안에서부터 기다란 마기의 줄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징그럽게 뭉친 실뱀처럼 뒤엉킨 마기가 카델을 향해 거침없이 휘몰아쳤다.
카델은 그녀의 공격을 회피하거나 방어하는 대신, 그녀를 따라 하듯 전방으로 손을 뻗었다. 떠오르는 마법진은 없다.
“……!”
그의 손에서부터 마기와 똑같은 형태를 띤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카델의 마법은 에밀리아의 공격과 길이와 형태, 그 방식까지 쏙 빼닮았으나.
‘뭐지, 이 힘은?’
그 양과 질에서부터 차원이 달랐다. 구렁이처럼 두툼한 불꽃이 유선을 그리며 쇄도했다. 끝이 둥근 화염이 맞은편의 마기를 거침없이 깨부수며 전진했다. 단순한 불꽃이 아니다. 바람을 등에 업은 불꽃은 뻗어 나갈수록 크기를 키웠고 날쌔졌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달려든 불꽃에 에밀리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카델의 마법을 튕겨 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큿……!”
본래라면 간단히 소멸시켰을 불꽃은, 그녀의 손길에도 꺾이지 않고 기세를 이었다. 어느새 하나의 거대한 불덩이로 변모한 마법이 그녀를 집어삼키고. 다급히 마기를 끌어 올린 에밀리아가 몸을 보호했다.
‘내가 처음 감지했던 수준과 너무 달라.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 건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처음부터 이런 힘이 있었다면 바깥의 부하들을 단숨에 도륙 냈겠지. 기선 제압을 위해 힘을 무리하게 부풀린 거야.’
그의 스승이라던 마밀 키파도 이 정도 파괴력은 갖추지 못했다. 의심을 떨쳐 낸 그녀가 숨 막히는 화염 속에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불꽃 속에서 숨을 죽이다, 방심한 카델에게 일격을 먹일 셈이었다.
‘카델 라이토스는 무영창의 다속성 마법사. 입을 막는대도 마법은 사용할 수 있어. 속박은 의미가 없겠지. 최대한 빠른 템포로 공격하자. 어서 마력을 동내야겠어. 인간 마법사는 곧잘 폭주하니까.’
여전히 힘이 넘쳐나는 자신과는 달리, 인간계에서부터 전투를 이어 온 카델 라이토스의 마력은 이미 한계에 봉착했을 터. 다속성 마법사이니 최소의 마력으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겠지만, 몰아붙인다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리 생각했으나.
“매번 구상만 해 봤지, 진짜 시도할 기회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조금 신나네.”
불시에 자취를 감춘 불꽃 너머. 난데없이 시야를 채운 괴생물체를 발견한 에밀리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저게…….”
“인사해. [자이언트 라이돈]이야.”
공포심을 조성하기 위해 벽을 깨부순 것이 실수였을까.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위풍당당하게 떠오른 얼음 조각. 목이 꺾일 만큼 올려다보아야 간신히 얼굴을 볼 수 있는 거대한 얼음덩이는 신성한 천사의 모습을 그려 냈다. 등에는 두 쌍의 날개가 뻗쳐 있고, 단단히 그러쥔 손안에는 기다란 얼음 창이 들려 있다.
얼음이라니. 카델 라이토스가 얼음 마법을 사용한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혹시 그 요정이 개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타당한 의심이었으나, 에밀리아의 추론은 틀렸다.
“번개……!”
“귀엽지 않아? 라이돈이 이걸 보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자이언트 라이돈]이 창을 뒤로 젖히자, 창대의 위로 푸르죽죽한 전류가 휘감겼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선명하게 번뜩이는 전류가 위협적으로 몸집을 부풀렸다.
당장이라도 쏘아질 듯 위압적으로 드리운 창 아래. 에밀리아는 어떻게든 당혹감을 숨기려 했다.
‘방금 전까지 화염과 바람 마력을 사용했잖아. 그런데 얼음과 번개의 마력까지 사용한다고? 그래, 다속성 마법사니까 사용할 수 있는 마력 종류가 더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하지만 이 위력…….’
[자이언트 라이돈]에게선 에밀리아조차 일순 기가 질릴 만큼 압도적인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설마 이 순간을 위해 힘을 아끼고 있었던 걸까. 아니, 어쩌면 새롭게 각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혼란을 끊어 주겠다는 듯, 한계까지 허리를 비튼 [자이언트 라이돈]이 그대로 창을 내던졌다. 말도 안 되게 거대한 데다 자유로운 움직임이 어려운 시공간 한복판에서 쏘아진 창이다. 그러니 분명 내리꽂히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잘 던지네, 우리 라이돈.”
[자이언트 라이돈]의 손을 떠난 창대는 그야말로 벼락같은 속도로 날아 꽂혔다.
쿠웅―. 거대한 첨탑이라도 추락한 것처럼 우람한 소음과 함께 광대한 원형의 충격파가 퍼졌다. 강풍을 따라 주위에 떠다니던 온갖 파편이 훅 밀려나며, 순식간에 주위가 말끔히 트였다.
뒤이어 창대에 휘감겨 있던 전류가 복도에 꽂힌 창끝으로 빨려 들고. 곧 바닥을 통째로 뒤덮은 전기 그물이 펼쳐졌다.
카델은 시야를 꽉 채운 얼음 창을 응시하며 차분하게 마력을 조절했다. [자이언트 라이돈]을 칭찬할 때와는 달리, 맞은편을 가늠하는 그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네 입장은 생각하지 않을 거야. 동정심을 품지도 않아. 너, 너의 종족, 너의 세계에도 신경 끌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를 안타까워하기엔…… 난 너무 많은 걸 잃었거든.”
카델의 가벼운 손짓을 따라 [자이언트 라이돈]이 복도에 처박힌 창을 뽑아냈다. 쩌적,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창이 뽑혔다. 무사히 무기를 회수한 [자이언트 라이돈]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오래 유지하기엔 부담이 크다. 힘을 과시한 것으로 충분했다. 지금은 최대한 다양한 속성을 다루며 마력을 조절하는 것이 핵심이었으니.
카델은 창이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았다.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으깨진 복도 위. 에밀리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나 남은 팔로 바닥을 짚고, 거뭇해진 상체를 일으켰다. 축 늘어진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불규칙적으로 튀어 오르는 전류를 따라 에밀리아의 몸이 경련했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강인하게 몸을 바로 세웠다.
“……네가 많은 걸 잃어? 우습다.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산발이 된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자, 곳곳이 그을린 얼굴이 드러났다. 그 위로 짙은 마기가 피어올라 에밀리아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이래서 이 세계에 인간이 존재해선 안 돼. 전부 찢어 죽여야 해. 너희 같은 족속들은.”
“그래. 그게 바로 너희가 지하 세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야. 영원히 말이지.”
뿌득, 이를 간 에밀리아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번뜩이던 안광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가쁘게 오르내리던 어깨도 잠잠해졌다. 그녀는 움푹 팬 바닥을 뛰어넘어 카델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씩 천천히. 카델을 담아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거리를 좁혀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야, 카델 라이토스. 난 절대 이곳에서 죽지 않을 테지만, 만약 죽는다 해도……. 네게 승리는 없어.”
어느새 생성된 마기의 검. 카델이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그대로 속력을 높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높게 치켜든 검이 노리는 것은 오로지 카델. 빠르게 좁혀진 거리와 순식간에 늘어난 검날. 괴수처럼 달려든 에밀리아의 검격이 쇄도했으나.
“맞아. 내게 승리는 없어.”
분명히 카델을 베어 냈어야 할 마기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한 걸음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완벽하게 검의 궤적을 벗어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에밀리아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승리하게 될 거야. 그걸로 충분해.”
에밀리아의 시야가, 까맣게 암전됐다.
인간계에서 그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타고난 재능과 처절한 노력으로 일궈 낸 그의 무력은, 그야말로 ‘무적’이었으니까. 그의 공격은 ‘제대로 먹혔다’와 ‘조금 아쉽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언제나 유효타를 끌어냈다.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런 싸움을 이어 갈 수 있던 것은 전부 암기 덕이었다. 암기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공간을 지배했고, 그를 지배자로서 군림하게 해 줬으니.
하지만 마계, 그것도 마왕이 만들어 낸 이 독특한 시공간 속에서 요젠의 암기는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바보. 멍청이. 약해 빠졌어. 장난하는 거야? 지금이 장난할 때야?”
쏟아지는 라이돈의 비난에 요젠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따끔한 통증이 번진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니 피의 감촉이 느껴졌다. 자신의 공격은 무엇 하나 제대로 먹히지 않는데. 몸에 난 상처는 점점 늘어 가고 있다. 최악이었다.
“침착하게 움직이게.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치유사가 없어. 부상은 최소한으로. 라이돈 경의 장막이 막아 줄 수 없는 공격은 무조건 회피해야 하네.”
“……알고 있어.”
치유사가 없는 그들에게 유일한 목숨줄이란 라이돈이었다. 그들을 위해 강도 높은 장막을 유지하게 된 라이돈의 마법엔 자연스럽게 제약이 생겼다. 장막 유지와 동시에 강력한 마법을 전개하기엔 상대의 수준이 너무 높은 탓이었다.
뛰어난 마법사가 방어에 치중하고 있으니, 분신의 처치는 남은 엑토와 요젠의 몫이었다.
“다시 시도해 보지. 계속 앞에서 주의를 끌어 볼 테니, 조급하게 굴지 말고 신중하게 빈틈을 노리게.”
입 안에 찬 피를 뱉은 엑토가 분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인형처럼 표정 없이 엑토를 마주하던 분신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분신과 엑토의 사이로 마름모꼴의 기이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엑토가 그 위로 대검을 내리찍자,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날붙이를 닮은 무수한 마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할 줄 아는 건 얻어터지는 것밖에 없네!”
빠르게 장막을 강화한 라이돈 덕에 죽음은 면했다. 엑토는 둔탁하게 몸을 두드리는 마기의 향연을 견디며 다시 한번 대검을 내리찍었다. 강력한 기운이 담긴 일격이 둔중한 충격파를 울리고. 균열이 번진 마법진을 우악스럽게 깨부순 그가 너머를 향해 검기를 쏘아 날렸다.
“제국의 기사단장을 얕보지 마라!”
연달아 이어지는 검기가 묵직한 바람을 일으키고. 공격을 버티는 분신의 장막에서 진한 마기가 흩어졌다. 그 기운을 연막 삼아 분신은 또 다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챈 엑토가 거침없이 몸을 내던졌다. 분신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켜야 했다.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뒤론 이렇게 무식하게 몸으로 때우는 전투는 피해 왔건만. 어쩌겠는가. 이곳에서 분신을 정면으로 상대할 만한 인물은 자신뿐인데.
가슴을 노리는 검격을 피해 가볍게 몸을 물린 분신이 마기의 검을 생성했다. 엑토의 것과 똑같은 크기의 대검이었다. 제 몸집만 한 검을 한 손으로 가볍게 움켜쥔 분신이 엑토를 노리고. 두 대검의 충돌을 버티지 못한 복도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힘겨루기라면 자신 있다. 얼마든지 상대해 주지!”
호기롭게 외쳤으나, 분신과 검을 맞댄 엑토의 팔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검을 올려치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어떻게든 내리찍어 보겠으나, 지금의 엑토는 고작 응급 처치를 받았을 뿐인 환자나 다름없었다. 이럴 때 치유사가 있었더라면.
“네놈들에겐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다. 그러니 결국 승리는 인간의 차지가 될 테지.”
도발처럼 지껄인 말에도 분신의 표정엔 동요가 없었다. 거슬릴 정도로 말이 많던 이전의 분신과는 다르다. 오로지 마왕의 힘만 나눠 받은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마왕이 카델에게 완전히 빠져 있다는 증거일 테다.
“후웁!”
기합 같은 숨을 뱉은 엑토가 대검으로 전신의 무게를 더했다. 버텨야 한다. 분신이 자신의 공격을 떨쳐 내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여유 따윌 부릴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설 수 있도록.
한계까지 부푼 근육에 쓰라린 열감이 번지고, 꽉 다문 잇새로 얇은 핏줄기가 흘렀다. 오기와 패기로 가득 찬 눈이 분신의 무감한 얼굴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드디어!’
분신의 뒤편으로, 요젠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새까만 암기를 두른 고요한 신형이 분신의 목을 노렸다. 눈으로 보고도 존재에 확신이 들지 않는, 그야말로 암살자다운 일격이 분신의 목숨을 끊어 내려던 때.
“큿……!”
아무런 움직임 없이 늘어져 있던 분신의 날개가, 칼날처럼 매섭게 솟았다. 기습적인 행동에 요젠이 빠르게 몸을 물리고. 암살의 실패와 동시에 분신이 엑토의 검을 완전히 빗겨 쳤다. 그 야만적인 힘을 견디지 못한 엑토의 몸뚱이가 복도를 구르고. 짙은 마기가 한바탕 복도를 휩쓸었다.
“하아……. 또 실패야?”
지겨운 실패의 반복이었다. 다행이랄 것은, 이 분신은 그들이 선제공격하지 않는 이상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지만, 위협적인 공격을 퍼붓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마왕과의 거리를 벌린 요젠이 쓰러진 엑토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려던 엑토가 짧은 신음과 함께 다시 주저앉았다.
“갈비뼈가…… 빌어먹게 아프구만.”
이미 한 번 박살이 났던 갈비뼈를 모들렌의 치유술로 간신히 고쳐 놨건만. 격한 싸움에 기어이 덧나 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상태로도 싸움을 이어 갈 수는 있겠다만, 자칫했다간 큰 내상을 입고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도 있었다.
“더 두꺼운 장막을 둘렀다간 움직임이 둔해질 거야.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장막이야.”
“알고 있네. 장막을 강화해 달라는 게 아니야. 내가 앓아눕기 전에 제대로 된 파훼법을 생각해 보자는 게지.”
엑토는 요젠의 손길을 거절하고 직접 몸을 일으키길 시도했다. 그런 엑토의 옆에서 요젠은 말없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실수 하나 없는 완벽한 은신이었다.’
과할 정도로 많은 암기를 끌어내 가장 경지 높은 은신술을 사용했다. 누구도 예상 못 할 기습이었다. 그런데 그 회심의 공격이 보란 듯이 실패할 줄이야.
어떻게 알아챈 걸까? 이 시공간이 마왕의 창조물인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자신은 특기를 몰수당한 채 팔자에도 없는 정면 돌파를 감행해야 했다.
‘은신 없이도 공격은 할 수 있어. 하지만 분신을 단숨에 쓰러뜨릴 만한 일격은…… 자신이 없다.’
이곳에는 자신이 공격을 준비할 동안 시선을 끌어 줄 동료가 없었다. 라이돈은 장막을 유지하느라 발목이 묶였고, 엑토는 이 전투가 이어질수록 빠르게 약해질 테니.
어서 끝을 내야 한다. 그래야 마왕의 본체를 상대하고 있을 카델이 안전해진다. 그야말로 피 말리는 조급함에 요젠의 침착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게 어지러운 머리를 굴리는 요젠의 뒤. 물끄러미 요젠을 응시하던 라이돈이 손안에 쥔 무언가를 냅다 던져 올렸다.
“……?”
그 기척을 눈치챈 요젠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무언가를 낚아챘다. 손안으로 번지는 시린 감각. 그것은 얼음덩이였다. 날아온 궤적으로 보아, 자신의 머리를 노린 공격임이 틀림없었다.
흐릿한 황당함이 번진 얼굴이 라이돈을 향했으나. 그는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약골! 내 얼음에 암기를 바를 수 있겠어?”
“……뭐?”
“내 얼음 위에 네 마음대로 암기를 묻힐 수 있겠냐고. 두 번 말하기 귀찮으니까 빨리 알아들어!”
난데없는 윽박과 성질에도 요젠은 묵묵히 얼음 위로 암기를 퍼뜨렸다. 당연하게도, 이미 질리도록 익숙해진 라이돈의 마력에 제 기운을 뒤섞는 일은 간단했다. 요젠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돈이 보란 듯이 커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 자기가 없으니 내가 돌봐야 할 인간이 한둘이 아니네. 능력 있는 요정은 피곤하다니까.”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눈치가 그렇게 없어서 어떡해? 넌 지금 이 복도에 네 암기를 마음대로 퍼뜨릴 수 없어서 고민인 거잖아. 마왕의 시공간에서 암기를 퍼뜨려 봤자 금방 발각되니까.”
“맞아. 그런데?”
“그런데? 하아아! 정말 답답하네! 내가 그 얼음을 왜 던졌겠어?”
답답하니까 맞아 죽으라고? 그냥 성질이 나서? 자연스럽게 라이돈의 더러운 인성을 떠올리던 요젠이 서서히 입을 벌렸다. 차가운 얼음을 힘주어 움켜쥔 그가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가능하겠어? 장막과 동시에 유지하려면 많은 마력이 필요할 거야. 달라붙는 마기를 차단하려면 엄청나게 무리해야 할 거고.”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징그럽네! 평소처럼 조용히 싸울 준비나 해.”
짜증스레 외친 라이돈이 대화의 맥락을 잡지 못하고 멀뚱히 눈을 끔뻑이는 엑토를 돌아보았다.
“일어나. 다시 한번 분신을 막아 줘. 이번에야말로 요젠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 하길래 그리 장담하냐는 질문은 필요 없었다. 눈 깜짝할 새 생성된 새하얀 마법진이 사방의 벽을 메우며, 지독한 한기가 복도를 뒤덮었다.
극한까지 정제된 검기. 어떠한 불순물도 끼지 않은 깔끔한 검격과 군더더기 없이 가벼운 동작. 번뜩이는 섬광은 한 올의 실처럼 번짐 하나 없이 사뿐하다.
루멘의 검술은 감탄이 나올 만큼 완벽에 가까운 경지를 자랑했다. 켈리건의 가호. 옛 수호신의 힘을 흡수했기 때문일까?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성장이었다.
질투의 감정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반은 스멀스멀 차오르는 질투심 대신 믿음을 택하기로 했다. 이것은 적이 아닌 동료의 힘. 그렇다면 기쁘게 활용해 줘야지 않겠는가.
“지금이다!”
분신의 앞을 막아선 반의 신호와 동시에, 허공으로 수십 개의 푸른 섬광이 새겨졌다. 루멘의 섬광은 분신을 베어 내지 않았다. 그가 갈라낸 것은 시공간 그 자체. 벌어진 유선형의 틈새로 세찬 검풍이 몰아치고. 쇄도하는 푸른 검기가 순식간에 분신을 집어삼켰다.
반은 분신을 휘감은 [가시]에 기운을 더해 강하게 붙들었다. 오라의 위로 격렬한 몸부림이 느껴졌으나, 분신이 강한 마기를 개방할수록. 그의 오라 역시 맹렬하게 몸집을 부풀렸다.
뇌가 얼얼할 만큼 자극적인 마기에 그의 기운은 성난 짐승처럼 날뛰었다. 가슴을 치고 오르는 부정적인 감정, 점점 좁아지는 시야, 머릿속을 메우는 잔인한 갈망. 느껴지는 익숙한 변화의 흐름에 반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가능한 한 억제해야겠지.’
지금 자신의 옆에는 뛰어난 치유사와 검사가 있다. 그들이 있는 이상 자신이 맡아야 할 역할은 확실하다. 버티기. 그들이 분신 앞에서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발을 묶어 두어야 했다.
“다시 공격이 시작될 겁니다. 조금만 버티십쇼!”
가르엘의 외침과 동시에 분신의 몸체에서 대량의 마기가 폭발했다. 화산이 분화하듯 순도 높은 마기가 흥건하게 흘러넘치며, 다음 순간.
“크읏……!”
마기로 질퍽해진 바닥에서 수십 개의 병장기가 솟구쳤다. 바닥을 촘촘하게 채운 날붙이가 굳건하게 선 반의 하체를 사정없이 꿰뚫고 할퀴어 댔다. 그럼에도 그는 공격을 피하지 않고 [가시]를 단단히 옭아맸다.
살벌한 고통에 반이 낮은 욕설을 읊조렸다. 동시에, 그물처럼 세밀하게 교차한 푸른 섬광이 날붙이를 가로질렀다. 눈 깜짝할 새 조각난 병장기들이 액체처럼 흘러내리고.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마기가 반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분신이 아닌 가르엘의 마기였다. 그의 마기는 분신의 기운을 덮어 공격을 억제하고, 동료의 상처를 치유했다.
“괜찮습니까, 반 경?”
“다리에 감각이 없는데요. 제대로 치유한 거 맞습니까?”
“괜찮나 보군요. 다행입니다. 역시, 몸 하나는 정말 튼튼하다니까요.”
대꾸를 관둔 반이 짧게 혀를 찼다. 가르엘이 완벽하게 공격을 차단하자, 분신의 마기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함께 자취를 감춘 검기의 난무 너머로 꼼짝없이 붙들린 분신의 모습이 드러났다.
끓는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분신의 위로 검은 마기가 폴폴 피어나고 있었다. 그 역한 기운 속에 섞인 짙은 피 냄새를 감지한 반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봐, 도련님. 나까지 상대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빨리 마무리를 지어.”
제 안에서 흉흉한 본성이 깨어나는 감각이 생생했다. 침착하게 숨을 고르는 반의 곁으로 일순 찬 바람이 스쳤다. 눈을 돌리지 않아도 루멘이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푸른 눈동자에 더해진 희미한 빛. 검집을 쥔 팔은 뿌리처럼 뒤엉킨 섬광에 갇혀 꿈틀대고 있다. 흰 피부 아래로 도드라진 핏줄이 터질 듯 부푼 모습이 제법 고통스러워 보였으나. 루멘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이런 때에도 약한 소리나 하다니. 한결같군그래.”
“고상한 도련님은 이런 때까지 여유로운 척을 해 줘야 성이 풀리나?”
“척 같은 게 아니야. 직접 상대해 보니 확실해졌다. 이 분신, 우리가 상대해 왔던 분신과는 달라.”
“다르다고?”
여전히 [가시]에 묶인 채 재생하는 분신에게선 반격의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완벽하게 재생한 뒤 공격을 재개할 심산인 듯했다. 이러한 분신의 판단까지 포함해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분신에겐 ‘자아’가 없다. 원래라면 이 분신도 본체와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겠지. 그런 부분이 마왕의 분신이 가진 최대의 강점이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아니야.”
“……확실히. 적극적으로 몰아세우는 느낌은 없지. 지금까지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얕볼 만한 힘은 아니야. 우릴 붙들어 두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힘이지.”
“좀 전에는 여유롭다고 했던 것 같은데.”
반의 코웃음에도 루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릴 죽이기 위해 인원을 나누고, 강한 힘을 가진 분신을 뒀어. 그런데도 지금 이 분신은 살인이 아닌 반격에 초점을 두고 있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모르면 됐어. 기대도 하지 않았…….”
“쓸데없이 말 늘리지 마. 단장이 마왕을 몰아붙이고 있다는 소리잖아.”
“용케 알아들었군.”
“지금 내가 분신을 붙잡아 두는 데 얼마나 힘을 쏟고 있는지 알기는 한 거냐? 도련님. 그냥 나한테 정보를 전하는 척 쉬고 있는 거 아냐?”
“말에는 지성이 묻어 나오는 법이지. 쉽게 밑천을 드러내지 마.”
“그래. 단장에겐 네가 분신을 상대하다 명예롭게 죽었다고 전해 주마.”
대화가 길어지기 무섭게 날을 세우는 두 남자의 뒤편. 열심히 분신을 주시하던 가르엘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저만 빼고 다정하게 대화하지 말아 주시죠! 소외감이 듭니다만!”
“가르엘 경!”
“예!”
“대장이 적룡과 함께 준비하던 마법, 경은 알고 있겠죠? 내내 같이 있었잖습니까.”
갑작스러운 루멘의 질문에 가르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다. 본래 카델은 쿤라와 함께 마왕을 죽일 마법을 준비하려 자리를 비운다고 했다. 하지만 가르엘은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내. 마왕의 형제를 죽이기 위해 겪었던 온갖 고생을 떠올린 가르엘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예, 확인했죠. 당연히.”
“그 마법으로 마왕을 얼마나 오래 붙들어 둘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 음, 글쎄요.”
“잘 생각해 보세요. 그게 우리가 공격하는 데 주어진 시간이 될 테니까요.”
분신은 강력하지만, 자아도 없이 반격만 꾀하는 분신을 해치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승리를 노린다면 카델이 마왕을 압박하고 있는 지금뿐. 가르엘의 계산을 토대로 조금이라도 더 완벽한 전술을 세워야 한다.
가르엘 역시 루멘의 뜻을 이해했으나, 그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이라곤 곤란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뿐이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마법의 파괴력을 대체 어떻게 가늠하느냔 말이다.
“음……. 한 이십……? 아니, 십 분 정도이려나요……?”
“지금부터 십 분 정도 남았다는 소립니까?”
“어……. 아마도요?”
모호한 대답에 루멘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향해 한껏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가르엘에 모습에, 그들을 엄호하는 데 집중하던 모들렌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추합니다, 단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