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4화 (51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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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폴로의 분노] 유지 시간 : 00 : 6 : 03」

남은 시간을 일별한 카델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기어이 평정을 뚫고 나오는 감정이 심장을 둥둥 울려 댔다.

“……역시. 너희라면 해낼 줄 알았어.”

최악의 경우까지 가정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의 기특한 부하들은, 제 단장에게 무려 6분이란 시간을 안겨 주었으니. 그들이 분신을 해치웠다는 걸 알아채는 데에는 그리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에밀리아,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 슬슬 힘들어? 네가 육체파가 아니란 소리는 익히 들었거든. 그런 것치곤 너무 오래 버티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제 정신력도 바닥났나 봐.”

빈정거리는 카델의 웃음소리에도 에밀리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공중에서 펄럭이는 얌전한 날개와 당황한 눈빛, 무언가를 끌어모으듯 계속해서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손아귀.

내내 표독스러운 얼굴로 여유를 부리던 여자가 저렇게까지 동요하는데. 부하들의 승리를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기특한 모습을 내가 직접 봐 줬어야 하는데. 아쉽게 됐네.’

서로들 얼마나 자신만만한 얼굴로 분신을 처치했을지. 눈앞에 없음에도 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기분이 상기됐다.

“이제 나한테 대꾸도 안 해 주는 거야? 너무 서운하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며. 볼 장 다 보니 질렸나 봐?”

“……시끄러워.”

두 개의 분신이 전부 쓰러졌다. 물론 분신들에게 신경을 쏟지 못하기는 했다. 카델 라이토스가 예상외의 실력을 드러낸 탓이었다. 하지만 많은 양의 기운을 나누었으니, 카델 라이토스의 각성이 끝날 때까지는 버텨 주리라 예상했다.

빌어먹을 치유사들을 한곳에 몰아넣기까지 했는데. 그럼에도 분신은 힘을 잃었고, 그들을 이룬 기운의 핵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핵이 파괴되면 끝장이야. 난 영영 그 힘을 잃게 된다.’

상당량의 기운이었다. 그 기운을 잃는다면 전쟁에서 승리한대도 한동안은 인간계를 지배할 수 없다. 곤란했다. 현재 자신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왕의 혈통. 자신을 대신해 줄 형제도, 믿을 만한 부하도 없는 상황인데.

에밀리아는 아무것도 쥐지 못한 손아귀에 바짝 힘을 주었다. 괜찮다. 시야를 가리던 암흑 마력은 떨쳐 냈고, 분신이 죽는 동안 카델 라이토스의 힘도 꽤나 소모됐다. 그걸 위해 지금까지 얌전히 당해 주었던 거니까. 자신이 씹어 삼킨 아버지의 힘이 절반 이상 소실된대도, 여전히 승리는 자신의 것이다.

“또, 또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있지? 어차피 이기는 건 나다, 결국 승리는 마계의 것이다, 이따위 망상.”

거슬리는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며, 그와 동시에.

“결국 우린 누구도 완벽하게 만족할 수 없다니까.”

절로 눈이 감기는 강풍과 함께 둔탁한 충격이 번졌다. 기습 공격에 대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되레 분신의 힘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적극적인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그런데도 에밀리아는 전신을 두드리는 힘에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공기의 흐름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 곧 그녀는 자신이 복도가 아닌 넓은 시공간의 한복판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힘을 주어 눈을 뜨자, 날 선 눈동자 가득 카델의 얼굴이 들어찼다.

잔잔한 노을처럼 부드럽게 번진 미소, 그와 상반되는 살기등등한 눈빛. 에밀리아가 거칠게 카델을 밀치자, 에밀리아를 압박하던 카델이 순순히 거리를 벌렸다.

“그래도 마지막 전툰데. 무대는 넓을수록 좋지 않겠어?”

“……네 명을 재촉하는구나. 여긴 내 시공간이야. 나에게만 자유가 허락된 공간. 네가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복도뿐이었어.”

“그럼 좀 더 기뻐해야지. 네 원수가 자충수를 뒀다는데.”

스스로 무덤을 파 놓고도 카델은 당당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보다도 더욱 거슬리는 것은, 그의 등에 뻗친 한 쌍의 날개였다. 그것은 꼭 그를 인간이 아닌 한층 높은 경지의 무언가처럼 비치게 했다.

광활하게 펼쳐진 날개를 이룬 것은 오로지 불꽃. 붉지도, 푸르지도, 희지도, 검지도 않은 형형색색의 불꽃이 깃털이 되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에밀리아의 시공간에서, 카델이 만든 화염의 날개는 자유롭게 펄럭였다.

“……죽은 마밀 키파라도 따라 하는 거야?”

간신히 표정을 꾸며 낸 에밀리아가 이죽거리자, 잠시 멈칫하던 카델이 보란 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불꽃에 비친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거 알아, 에밀리아? 넌 내 각성인지 뭔지만 걱정하고 있나 본데. 나, 널 상대하면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어.”

“……?”

“하하, 뭐야. 정말 잊고 있기라도 한 거야?”

에밀리아의 찡그린 표정에 웃음을 터뜨린 카델이 거대한 날개를 털어 내듯 펄럭였다.

“적룡의 힘! 그 몸으로 감당할 수 있겠어?”

화가 났다. 지금도 전신을 가득 메우는, 의심스러울 만큼 방대한 힘이 느껴진다. 쿤라가 침묵을 택한 뒤부터 아주 미세하게 증가하던 기운이 이제는 자신의 마력보다도 월등하게 몸집을 부풀렸다. 그런데도 쿤라는 여전히 그의 힘을 사용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쿤라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니까.’

카델은 한껏 뻔뻔스럽게 눈을 빛내며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쉴 틈 없는 마법에 적룡의 존재를 잊고 있던 걸까. 어쩌면 자신의 각성이 적룡과 연관되었으리라 예상했던 걸 수도 있다. 뭐가 됐든, 균열이 번진 에밀리아의 표정은 보기 좋았다.

“그러니 죽고 싶지 않으면 평화의 돌을 내놓으라느니, 순순히 물러나면 봐주겠다느니……. 그런 말은 안 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세계에서 네 존재를 지워 버려야겠거든.”

강하게 날개를 펄럭이자 화염의 깃털이 화살처럼 쇄도했다. 색색의 깃털이 어두운 시공간 속에서 예술적인 잔상을 남겼다. 그리고 깃털을 방어하기 위해 마기를 두른 에밀리아의 뒤편. 그곳에선 은하수처럼 빼곡하게 드리운 자그마한 빛덩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 박자 늦게 새로운 마력을 감지한 그녀가 마법을 떨쳐 내려 했으나.

“항복하면 빠르게 죽여 줄게. 네가 죽인 인간의 수를 생각하면 아주 너그러운 처사 아니야?”

그녀가 마법에 반응한 순간,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궤도를 바꾼 마법이 각기 다른 포물선을 그리며 휘황하게 달려들었다.

키잉, 키잉, 키잉―

귀가 뜯어질 것 같은 거친 음파가 그녀의 사위를 둘러쌌다. 다급히 생성하는 모든 마법진은 빛과 화염에 뚫려 완성되지 못했고, 단단히 두른 장막 역시 부서지고 재생하기를 반복했다.

“이곳에 날 초대해 줘서 고마워. 이렇게 날뛰기 편한 시공간이라니. 너무 마음에 들어서 꿈에도 나올 것 같다.”

카델의 호쾌한 웃음소리를 따라 어두운 하늘에 낙뢰가 내리꽂혔다. 나무뿌리처럼 사정없이 갈라진 벼락이 에밀리아의 사위를 노리며 뻗치고. 바닥이 없는 시공간에서, 카델의 벼락은 끝도 없이 늘어났다.

조금씩 수를 늘리던 벼락은 곧 에밀리아를 가두는 원형의 기둥을 이루었다. 카델은 벼락 사이로 비치는 새까만 마기와 정신없이 마법을 쳐 내는 에밀리아를 응시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5분. 최고의 경지에 오름으로써 적은 마력으로도 이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게 되었으나.

‘[데폴로의 분노]가 끝나면, 나도 끝난다.’

버프가 빠지는 즉시, 제 안에 남은 마력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양이 될 것이다. 아니, 남은 마력이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5분 안에 마왕을 끝장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부하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랬기에 카델은 자신이 있던 복도를 깨부수면서까지 에밀리아의 시공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거대하고,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어딘가에 있을 부하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와 주기를 바랐다. 어찌 됐든 5분 안에 결착을 봐야 하는 건 달라지지 않겠지만.

“에밀리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궁금했거든. 왜 여기 혼자 있는 거야? 네 시끄러운 여자 친구는 어디다 두고.”

카델이 만들어 낸 회오리가 벼락의 감옥을 가득 채우며, 그의 마력이 에밀리아를 정신없이 몰아세웠다. 허겁지겁 방어하고, 틈틈이 반격을 꾀한다. 지금의 에밀리아에게는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신도 이런 처지가 믿기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언젠가는 카델 라이토스의 마력이 동날 것이다. 적룡의 힘? 어차피 온전하지도 못한 그깟 힘의 일부, 마력을 잃은 카델 라이토스를 보호하는 게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정신을 붙잡으면 된다. 오로지 마계의 해방을 위해, 빛나는 미래를 위해 버틴다면.

“아, 혹시……. 내가 배달해 준 폭탄에 터져 죽었나? 같이 죽으라고 보내긴 했는데, 진짜 죽었나 보네. 신나라.”

에밀리아의 눈동자로 섬뜩한 이채가 돌았다. 평정을 잃지 않으려 표정을 숨긴 얼굴에 구김이 일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혐오감, 분노, 혼란, 절제……. 결국은 참을 수 없었다. 에밀리아는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을 이 지경까지 끌어내린 것은 멍청한 부하도, 빌어먹을 변수도, 끈질긴 인간들도, 카델 라이토스도 아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마지막 순간마저 비참하게 용서를 빌던 그녀. 셀레브였다.

전부 그녀 때문이었다. 마계의 자유를 되찾아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패자가 된대도. 그녀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 사실이 자신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고 있었다.

“……카델 라이토스.”

하지만 이곳에는 원망할 셀레브가 없다. 너 때문이라고, 네가 허무하게 죽었기 때문에 자꾸만 가슴이 갑갑해진다고. 그리 말할 수조차 없다. 고이고 고인 원망은 결국 자신을 무너뜨릴 테니. 그 전에 셀레브를 대신해 분노를 퍼부을 대상을 찾아야 했다. 그것만큼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너무 봐준 모양이구나. 너무 많이 쟀어. 그냥 널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데.”

에밀리아를 조여들던 카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녀를 가두던 벼락, 할퀴던 회오리, 꿰뚫던 화염과 빛. 그 모든 마력이 빠른 속도로 밀려나고 있었다. 올곧던 벼락이 바깥으로 밀려나며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휘어졌다. 다시 벼락을 세워 보려 했으나, 안에 가둔 마기의 파괴력이 좀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젠장, 혹시나 해서 찔러 본 건데. 셀레브를 어지간히 아끼긴 했나 보네. 괜히 건드렸나?’

셀레브가 정말 죽었는지 확인하고픈 마음과, 부하의 죽음에 조금은 슬퍼할지 모를 에밀리아의 동요를 노린 도발이었다. 생각보다 효과가 너무 뛰어난 듯해 당황스러웠지만.

“좋아! 끝장을 내 보자. 결국 쓰러지는 건 네가 될 테지만!”

에밀리아의 높은 웃음소리와 함께 기어이 밀려난 벼락이 우렁찬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눈부신 섬광과 강렬한 충격파. 화염의 날개를 굽혀 풍압을 견딘 카델이 이를 악물고 정면을 보았다.

그곳에는 모든 마법을 소멸시킨 에밀리아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의 윤곽을 따라 드리운 짙은 마기. 부드러운 날갯짓을 따라 일렁이는 기운이 더없이 음험한 분위기를 띠었다.

“얼마나 남았니? 1분? 2분? 하하……. 한 시간이 남았대도 상관없어.”

그녀의 입가에 맺혀 있던 틀어진 미소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오로지 분노만이 담긴 흉흉한 눈동자에 안광이 늘어졌다.

“덤벼!”

아무런 준비 자세 없이 어마어마한 추진력을 끌어낸 그녀가 카델을 향해 쏘아졌다. 카델은 그녀의 돌진을 저지하거나 피하는 대신, 촘촘한 전기 그물을 전방에 생성했다. 에밀리아 역시 카델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 미친……!’

앞으로 뻗친 그녀의 손이 그대로 전기 그물을 찢어발겼다. 아릿한 전류가 그녀의 몸을 타고 오르고. 뻣뻣해진 몸을 떨면서도, 에밀리아는 미친 것처럼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기세였다. 카델을 향한 시선에선 오로지 광기만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기세에 주춤하기엔, 카델은 너무 많은 희생과 의지를 밟고 올랐다. 그들의 피와 눈물을 발치에 두고, 단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다.

“……좋아. 죽을 때까지 덤벼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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