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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않아.”
벌써 몇 번째 복도를 넘어온 것인지 세기도 지쳤다. 반은 바닥에서 꼼짝 않는 마기를 내려 보며 인상을 구겼다. 이쯤 되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미세하게 움직여서 라이돈이 우는소리를 내며 마법진을 생성해야 하는데.
“아직 기운은 멀쩡해. 멈출 이유는 없어.”
마기를 감싼 얼음덩이에 손을 얹은 요젠이 고개를 기울였다. 모두의 관심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마기에 몰렸으나. 라이돈은 조금이라도 쉴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게 주저앉았다.
마왕의 시공간에서 그녀의 기운을 거스르며 이동하는 것은 엄청나게 버거운 작업이었다. 카델을 찾아가는 것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그만두었으리라. 벌벌 떨리는 손등으로 코피를 닦아 내는 라이돈의 곁으로 가르엘이 다가왔다.
“치유술을 써 드리죠.”
짧게라도 시간이 났을 때 라이돈을 돌보아야 했다. 라이돈은 더 빈정거릴 힘도 남지 않은 듯 순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이마 위로 손을 얹은 가르엘이 곧장 마기를 개방했다.
“……마력관이 꽤 손상됐는데요. 아예 쉬었다 가자고 할까요?”
“아니. 쉴 틈은 없어.”
“여기서 라이돈 경이 폭주하기라도 하면 저희는 정말 끝장인 거 알죠?”
“흐응, 걱정 마. 딱 가르엘만 데리고 저 아래로 떨어질 테니까.”
“이런, 상상만 해도 울적하네요.”
시답잖은 대화와 함께 치유술을 마친 가르엘이 손을 털었다. 라이돈의 마력관을 걱정했으나, 사실 당장 자신의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 쉼 없이 치유술을 써 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적어도 단장님을 치료해 줄 마기는 남겨야 할 텐데. 가능하려나.’
주먹을 쥐었다 펴며 남은 마기를 가늠하던 가르엘이 천천히 아군에게로 다가갔다. 한데 모인 그들은 여전히 미동 없는 마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조금만 쉬었다 움직이죠. 라이돈 경이랑 살을 맞대고 추락하긴 싫거든요.”
지친 목소리로 모두에게 휴식을 권하자, 다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요젠. 가장 가까이서 마기를 살피던 그는, 가르엘의 말에 무언가 깨달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추락…….”
“예?”
“아래……! 아래에 있는 거야!”
얼음덩이를 움켜쥔 요젠이 급하게 복도의 끝자락으로 달려갔다.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한 요젠의 모습에 모두의 놀란 시선이 따라붙고. 단숨에 복도의 끝까지 다다른 그가 얼음덩이를 든 손을 바깥으로 내뺀 순간.
“어어, 요젠 경……!”
어마어마한 인력이 요젠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위험할 뻔했잖습니까!”
빠르게 달려온 가르엘이 요젠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거리 계산을 실패하기라도 한 걸까. 요젠의 돌발 행동에 놀란 심장을 진정시킨 가르엘이 그를 끌어 올리려 했다.
“……잠깐만요. 요젠 경, 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무겁네요? 설마 이게 다 근육 무게입니까?”
온 힘을 다해 끌어당겼음에도 요젠의 기울어진 몸은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부지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날렵한 느낌의 몸이 아니던가.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감에 가르엘이 당황한 소리를 내자, 요젠이 흥분이 가시지 않은 투로 말했다.
“저 아래에 있어. 보이지 않아?”
“예……? 여기서 제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저흰 같이 떨어져요.”
“상관없어. 상관없으니까 네 눈으로 확인해 줘.”
본인은 상관없을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이 상황이 이어질 것 같았기에, 가르엘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최대한 뒤로 젖혀 고개를 빼 들었다.
반 뼘씩 소심하게 움직이는 발끝을 따라 조금씩 아래의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검은 시공간을 가르는 자그마한 불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대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아주 자그마한 불씨였다.
불씨는 그들이 선 복도를 넘지 못하고 그대로 사그라졌다. 하나, 둘, 번뜩이다 소멸하는 불씨를 응시하던 가르엘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마기, 뒤로 던져요.”
“못 던지겠어. 무거워.”
“내놓으세요, 그럼!”
가슴 떨리는 기대감에 없던 힘도 샘솟았다. 가르엘은 우악스럽게 손을 뻗어 얼음덩이를 빼앗았다. 차가운 기운이 손안 가득 번짐과 동시에 상상 이상의 무게감이 팔을 당겼다. 금방이라도 어깨가 빠질 것 같은 고통이다.
이딴 걸 들고 잘도 뛰어왔구나. 짧게 감탄한 가르엘이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곤, 바닥으로 얼음덩이를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도대체 뭘 하고 있냐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외쳤다.
“아래에 단장님과 마왕이 있습니다! 마기를 없애야 해요!”
카델이 아래에 있다. 가르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과 루멘, 쉬고 있던 라이돈까지 허겁지겁 달려왔다. 가르엘은 그들보다 먼저 복도의 끝자락에 매달려 아래로 고개를 빼 들었다. 그러자 불씨의 근원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저것이 진정 마왕과 인간의 싸움이란 말인가. 이제껏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놀라울 만큼, 그들의 아래는 화려한 전장이 펼쳐져 있었다.
입이 벌어질 만큼 거대한 화염의 날개. 카델의 주위로 끊임없이 내리꽂히는 벼락. 공간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무수한 빛줄기. 회오리치는 바람과 그 결을 채우는 암흑. 저 말도 안 되는 다속성 마법은 대체 뭐란 말인가. 대체 어느 틈에 저런 힘을 얻은 것인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화려한 마법의 난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개미 한 마리 살아 나가지 못할 것처럼 살벌한 마법. 그럼에도 마법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마왕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우릴 상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르군.”
어느새 가르엘의 옆에서 함께 아래를 내려보던 루멘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말대로, 카델을 상대하는 마왕에게선 이전보다 고차원적인, 쉬이 가늠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시공간을 활용하는 날쌘 움직임, 빠르고 방대하게 생성되는 마법진, 줄어들기는커녕 매초마다 배로 늘어나는 마기. 그녀는 자유롭게 비행하며 빛과 벼락을 회피했고, 카델을 방어하는 화염의 날개 위로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이 충돌할 때마다 주위의 파편이 휩쓸려 나갔다.
카델은 마왕과 일대일로 대적하고 있음에도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완벽한 호각. 인간이라기보단 신에 가까운 권능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밀이 줬던 약을 먹어서 저 정도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된 거야. 오래가진 못해.”
라이돈의 판단대로, 전투가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건 언제나 인간이었다. 게다가 카델의 마법이 워낙 화려했기에 곧장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을 뿐. 수직의 위치임에도 그들과 카델의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복도 바깥에서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합류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복도에 이동 마법진을 만드는 게 좋겠어. 하지만 그 전에…….”
라이돈의 시선이 바닥의 한 지점을 향했다. 가르엘이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분신의 마기. 저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카델에게 접근할 수 없다. 분신을 이루고 있던 저 기운은 분명히 마왕에게 힘을 보태 줄 테니까.
“내가 부수지. 마력을 거둬라, 요정 놈.”
말없이 카델의 싸움을 지켜보던 반이 대검을 빼 들고 나섰다. 흥분으로 널뛰는 심장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려하던 그대로였다. 카델이 합류했음에도 자신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반은 제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해내 카델을 지키고 싶었다. 제가 튕겨 낼 수 있는 것이 고작 마왕의 일검뿐일지라도, 온몸으로 막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마왕의 싸움을 두 눈으로 목격한 순간. 반은 절감했다.
‘단장을 지키겠다는 건 건방진 생각이었군.’
저토록 강한 사내다. 그 부드러운 웃음과 따뜻한 손길을 받으며 지내 왔기에 잊고 있던 걸까. 그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보호 따윈 필요 없을 만큼 강인한 사내였는데. 자신이 해야 할 것은 몸을 던져 그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앞에 자리한 장애물을 넘어뜨리는 것. 카델이 더욱 멀리 달려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먼저 이동해라. 이걸 부수려면 꽤 큰 공격이 필요할 것 같으니.”
이동하는 걸 기다려 줄 시간은 없다. 반은 마기를 가두던 얼음이 사라지자마자 오라를 개방했다. 순식간에 퍼져 나간 대량의 오라가 복도를 휩쓸고. 라이돈은 곧장 이동 마법진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마왕과 가까이 이동하는 만큼 이전보다도 세밀한 마력의 운용이 필요했다. 이어지는 긴 영창을 따라 주위로 서늘한 냉풍이 일렁였다.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시야와 차갑게 내려앉는 공기.
“다들 들어와!”
라이돈의 신호와 동시에, 범람한 오라가 짐승처럼 사납게 털을 곤두세웠다. 아군의 안전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날카로운 기운이 그들의 살갗을 할퀴어 댔다. 그들은 라이돈의 장막을 방패 삼아 빠르게 마법진 위로 이동했다.
짧은 섬광과 함께 아군이 자취를 감추고. 홀로 남은 복도 위. 붉어진 눈을 번뜩인 반의 얼굴로 붉은 결정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적혈망매]. 무엇을 건대도 상관없다. 카델의 앞길을 막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라도 깨부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