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약혼이요? 누구랑요?”
위스는 상대부터 확인했다.
“누구겠니! 아카젤 대공이지!”
‘그럴 리가 없는데?’
방금 만났을 때만 해도 아무런 내색이 없지 않았나?
“대공이 수락했습니까?”
“팔라틴 왕이 너를 좋게 본 것 같구나! 서머와 팔라틴은 본래 한 뿌리 아니냐. 이렇게 연이 이어지면 아름다운 일 아니겠냐고 먼저 제안해 왔단다!”
제레미아 왕이 뿌듯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춰 경고했다.
“그쪽은 아직 네 소문을 못 들은 게 틀림없다. 다행이지 뭐냐. 그런데 이처럼 몸조심해야 할 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팔라틴 왕이 먼저 정혼을 제안했다는 말입니까?”
“그래! 다행이지 뭐냐.”
위스는 제레미아 왕의 얼굴에서 안도를 읽어 냈다.
‘아무것도 모르는군.’
팔라틴 왕에게 제레미아 왕은 계략의 논의 상대도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후손이 잘도 놀아나는 꼴을 보니 위스는 배알이 꼬였다.
“당사자 허락은요?”
“허락은 이제 받으면 되지 않니. 가장 중요한 관문을 넘었는데 허락이 대수겠느냐?”
“이제?”
“아, 왔구나!”
위스가 불길함을 느끼기도 전에 손님이 도착했다. 왕은 몸소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대공! 어서 오십시오. 대공이 새 요리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북부의 요리사를 고용해 솜씨를 발휘하라 했으니 그리운 맛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초대 감사합니다.”
대공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앉아 있던 위스와 대공의 시선이 마주쳤다. 대공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
“…….”
“아! 이곳에 앉으시면 되겠습니다. 제 아이가 대공을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렸다고 들었습니다. 이 애가 수줍음이 많아 제대로 말씀은 드렸나 모르겠습니다.”
수줍음이 많다는 대목에서 대공의 눈썹이 꿈틀댔다.
“……인사라면 충분히 받았습니다.”
“다행입니다! 하지만 부모 된 자로서 제가 감사 인사를 안 드릴 수 없지 않습니까? 조촐하게나마 취향에 맞춰 준비해 보았습니다. 대공께 마음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왕이 서둘러 신호하자 하인이 의자를 끌어 준비했다. 위스의 맞은편 자리였다.
대공은 말없이 앉았다. 부엌에서 나온 하인들이 접시를 가져다 나르기 시작했다.
왕이 테이블 밑으로 위스의 허벅지를 찌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웃으렴!’
“…….”
위스는 왕의 손을 잡아 제 위치로 돌려놓았다.
‘헛짓 하고 있군.’
선이라도 보라는 건가?
비위를 맞추는 것만으로 넘어올 인간이었으면 위스도 웃는 척은 했을 것이다.
“마음에 드십니까?”
제레미아 왕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대공은 “훌륭하군요.” 하고 대답했다.
‘먹고나 얘기해라.’
위스는 통째로 구워서 내놓은 꿩 요리를 잘라 큼지막한 다리를 개인 접시에 놓았다. 그리고 한 점 씹었다.
밍밍했다.
‘……소금을 안 쳤나?’
“제 아들도 입맛이 담백하답니다. 대공과 취향이 꼭 맞는군요!”
“……그렇습니까?”
대공이 위스를 빤히 보며 대꾸했다. 위스는 후추를 눈처럼 뿌리다 말고 양념통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이 장단을 맞췄다.
“하하. 취향이 맞는 것만큼 부부에게 중요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부부?”
대공이 멈칫했다.
“예에. 이미 들으셨겠지만, 리엔델 폐하는 양국의 혼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신다고요. 두 왕국 사이에 오랜 갈등이 있기는 했습니다. 하나 대공과 제 아들이 혼인으로 맺어지면 이 깊은 골이 메워지고 양국이 함께 발전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리엔델 폐하 또한 저와 생각을 같이하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레미아 왕이 웃으며 말했다.
대공은 웃지 않았다.
“리엔델 폐하께서 혼인을 수락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예에. 좋은 일은 미루는 것이 아니라며 축하 사절을 보내시겠다지 뭡니까. 폐하께서 이리 적극적이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니, 얘야?”
제레미아 왕이 동의를 구했다.
‘자리를 엎었어야 했는데.’
위스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왕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계속 떠들었다.
“아아, 대공께서 무언가 준비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약혼은 가볍게 치르고 결혼을 서두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 요즘 세상에 약혼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혼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중요한 것이지요.”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대공은 제레미아 왕과 위스를 돌아보더니 한 박자 쉬고 말했다.
“저는 이 자리에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예? 그게 무슨…….”
“이미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듯하여 공식적인 자리에서 다시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대공이 위스를 돌아봤다.
‘이미 거절했는데 내가 찾아왔다는 거지.’
위스는 내심 혀를 찼다.
그런데 이 새끼는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왕이 대놓고 명령하는데 아예 퇴짜를 놓아?
‘감당할 자신이 있나?’
“리엔델 폐하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겠으나, 그 논의에 제 의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폐하께 어떤 말씀도 듣지 못했고, 들었더라도 거절했을 겁니다. 두 분께 불필요한 오해를 산 듯하군요.”
“아니, 그럼…….”
“저는 위스미아 전하와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럴 의사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 일로 다시 뵙는 일은 없으면 합니다.”
대공은 한 술도 뜨지 않은 식기를 두고 일어났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초대 감사합니다.”
“대공? 대공!”
대공은 제레미아 왕의 애타는 부름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럴 줄 알았다.’
위스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대공을 따라 나갔다.
“대공.”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대공이 뒤를 돌아봤다.
“예.”
“말씀하십시오. 결혼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면 듣겠습니다.”
위스는 잠시 생각했다.
‘이 새끼 왜 이렇게 튕기냐.’
물론 결혼에 대한 얘기였지만, 위스는 순발력을 발휘해 포장했다.
“먼저 저 자리를 만든 건 제 의사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십니까?”
대공이 쓴웃음을 지었다.
“리엔델 폐하와 저런 대화가 오갈 줄 몰랐습니다.”
“그렇군요.”
“…….”
“하실 말씀은 끝났습니까?”
대공이 웃으며 물었다.
위스는 그가 분명히 선을 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믿는군.’
아니, 위스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의 말을 이제 고려도 안 하겠다는 태도다.
위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팔라틴 왕이 쓸데없는 제안을 하고 제레미아 왕이 옳다구나 받아서 대공이 벽을 쳐 버리지 않았는가.
기사들은 머리가 굳어서 한번 고집을 부리면 밀고 나가는 성향이 있었다.
“정말입니다. 대공께는 뭐든 사실대로 말씀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바마마께 여쭤보십시오. 제가 아무것도 모른 채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실 겁니다.”
“예. 믿습니다.”
‘믿긴 뭘 믿냐.’
“저는 대공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위스는 주장했다.
“전하.”
대공은 여전히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전하께 불이익은 없을 겁니다.”
“…….”
“저는 전하께서도 사랑하는 분과 행복해지시길 바랍니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위스는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몸의 특성이 너무도 확고한 나머지 타국의 대공에게까지 충고를 듣고 있다.
“남은 일을 해결하고 제가 돌아가면, 제레미아 폐하도 전하께 관대해지실 겁니다. 전하는 사랑하는 사람과 미래를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함께하고 싶은 분은 대공입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음식이 식겠습니다.”
대공은 무시하고 돌아섰다.
방금 충고가 마지막 호의였던 셈이다.
위스는 더럽게 철벽 치는 대공을 무슨 수로 설득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위스는 말로 누구를 설득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이게 설득이 필요한 일인가?’
이 몸이 인성과 평판에 결격 사유가 있다는 점은 위스도 인정했다.
하지만 땅도 있고 태도도 협조적이지 않은가. 외모에 중대한 하자가 있지도 않으니 이만하면 쓸 만한 결혼 상대다.
위스는 슬슬 짜증이 차올랐다. 정략결혼에 뭐 얼마나 대단한 신뢰가 필요하다고 빼는지 모를 일이다.
‘습격이란 말이지.’
위스는 머리를 굴리며 식당으로 돌아갔다. 외롭게 앉아 있던 왕이 벌떡 일어나 위스를 반겼다.
“어떻게 됐느냐? 대공이 진심은 아니겠지? 설마, 팔라틴 왕이 직접 제안한 일인데…….”
“진심이던데요.”
“뭐라고!”
왕이 파랗게 질렸다.
“아니, 안 되지. 그럼 어떡하느냐? 이미 귀족들을 다 초대해 뒀는데…….”
“어디에요?”
“전승 축하연!”
“……?”
“네 약혼을 알릴 겸해서 초대장을 전부 돌렸단 말이다!”
전승 축하연이 알던 것과 다른 의미인가?
위스는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승 축하연이란 건 아카젤 대공을 위한 것이었다.
‘이놈은 자존심도 없나?’
뭘 축하한단 말인가? 왕국을 패전국으로 만들어 줘서 감사하다고?
그보다…….
‘초대장을 돌려?’
귀족들을 불러 모았다면 규모가 크다는 얘기다. 사람이 모이면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고, 경계를 삼엄히 해도 언제나 틈은 생긴다.
‘습격이 일어날 때를 알아낸 것 같은데.’
위스는 멈칫했다. 대공에게 경고한대도 그놈이 대비할까?
대공의 열받는 철벽을 떠올리자 저울추가 다른 방안으로 기울었다.
습격을 방관하자.
‘그리고 구하는 게 낫겠군.’
아무리 염치없는 놈이라도 구원받는 순간에는 경도되기 마련이다.
신뢰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행동으로 보여 주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