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승전 축하연은 야외 연회장에서 열렸다.
본래 서머에서 왕실이 주관하는 여러 행사에 사용되는 장소였다. 옆으로 미로 정원과 산책길이 꾸며져 있고, 대리석 조각이 사방을 장식했다.
테오도어는 연회장을 살폈다. 어느 장소에서든 문에 가까운 쪽에 위치하는 건 테오도어의 습관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그의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는 상석으로 안내받았고, 어느 자리에서나 상석은 안쪽이기 마련이었다.
‘불편하군.’
서머 왕의 요청만 아니었다면 이런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을 텐데.
팔라틴은 짧은 시간 안에 전쟁을 끝냈다. 사람들은 테오도어가 대단히 뛰어나서 그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는 듯이 말했으나, 그가 진군을 서둘렀던 이유는 단순했다.
팔라틴은 군비를 유지할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후 서머와의 관계를 관리해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팔라틴은 긴 전쟁을 감당할 수 없다.
팔라틴은 강국이었으나, 나라 자체는 빚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왕국을 키우며 벌어들인 돈보다 쓴 돈이 더 많았던 것이다.
팔라틴 왕 리엔델의 전쟁 선포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나라 안에서 거두지 못하는 세금을 외국에서 받아 내기로 결정했다. 저 옛날의 위스 대왕처럼.
‘이름이 위스미아였지.’
위스 대왕을 떠올리자 테오도어의 생각은 위스미아 왕자에게로 흘러갔다. 왕자는 듣던 것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여러 의미로 그랬다.
부관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위스미아 왕자는 어리석은 인물이었는데, 테오도어의 눈에 비친 그는 그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눈으로 사랑이라고.’
테오도어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위스미아는 이성의 화신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온기 없는 눈이 테오도어의 가치를 재는 중인 게 보였다. 그는 아마 테오도어만큼이나 스스로의 가치도 냉정하게 계산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를 팔면, 이 사람이 사 줄까.’라고 생각하는 얼굴로 테오도어를 사랑한다고 말하다니.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소리다.
테오도어는 세 살보다는 영리했기 때문에 물론 넘어가지 않았다.
위스미아에게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가 그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국을 위해서겠지.’
테오도어는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익숙했다.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대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들에 위스미아 하나 더해진다고 기분 상할 일도 없었다.
당장 가까운 곳에, 누구보다 테오도어를 이용하며 사는 리엔델 왕이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해 보았는데요, 리엔델 폐하께서는 전하를 왕국에 들이기 싫으신 것 같습니다.”
부관이 말했다.
리엔델 왕이 내린 ‘결혼 명령’은 테오도어의 진영에서 화제였다.
도대체 왕은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
머리가 굳은 군인들이 창의력을 짜내 봐도 거기서 거기였지만, 부관은 나름대로 고등 교육을 받았다는 자부심이 있는 인물이었다.
“내가 팔라틴으로 돌아가는 게 싫으시다?”
“예. 수도에 있는 친구에게 들으니 영 분위기가 아닌 모양입니다.”
“분위기가 나쁠 수 없을 텐데. 승전을 했잖아.”
“승전을 이룬 건 대공 전하시죠. 폐하가 아니시잖아요.”
시민들은 바보가 아니라고 부관이 말했다. 모시는 주인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 주인이 리엔델 왕이 아니라는 건 명백했다. 테오도어의 부하들은 충성스러웠고, 그런 만큼 왕을 증오했다.
“서머를 안겨 주면 전하께서 눌러앉으리라 기대하신 거 아닐까요. 전하께서 돌아가시면 팔라틴에 왕이 둘이 있는 거나 다름없게 될 테니까요.”
“그런가.”
테오도어는 웃기만 했다.
그렇게 되진 않을 것이다. 테오도어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테니까.
그는 리엔델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 속에서 승전이 가져다준 흥분이 가라앉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변경에서 머문 뒤, 수도로 돌아갈 것이다.
리엔델이 명령하지 않아도, 테오도어는 형을 위해 늘 그렇게 했다.
“아무튼, 거부하셔서 다행입니다. 전 또 전하께서 충성을 보인다고 그런 분을 비로 맞으실까 겁먹었다고요.”
“그런 분?”
“제 입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까? 다른 남자랑 사랑의 도피를 하려던 왕자 말입니다. 그런 분을 대공비로 모시라고 했으면 전 그냥 짐 쌌을 겁니다.”
“글쎄. 그 소문이 정확한지 모르겠던데.”
투덜거리던 부관이 의아한 눈으로 테오도어를 쳐다봤다. 동시에 테오도어의 고개가 돌아갔다.
입구에서 누군가 입장하고 있었다.
위스미아 왕자였다.
‘언제 봐도 하얗군.’
눈부시게 희다는 느낌이었다. 밝은 담갈색 머리카락은 빛을 반사하는 듯했고, 매끄러운 피부는 진주를 입혀 놓은 듯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수군거림 속에서도 동요가 없었다.
“자국에서도 평이 별로군요. 그럴 것 같긴 했지만, 왕자가 입장하는데 입을 다무는 사람이 없네요.”
부관이 평했다. 그 말대로였다. 왕자가 입장하는데도 소란이 가라앉지 않는다. 왕자에게 경의를 표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위스미아는 저런 대접을 받을 사람은 아니었다.
테오도어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외모에 이렇게 잘 홀리는 인간이었던가 싶어서였다.
위스미아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하얗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피부에 튄 피가 더 붉게 보였다.
그는 피에 젖어 새빨간 입술로 테오도어를 올려다보았다.
테오도어는 찔린 것처럼 움찔했다.
그 이후에도, 위스미아를 보면 동요하게 됐다. 겉으로 표를 낼 만큼 어리숙하진 않았지만.
“미인계는 훌륭한 계략이야. 그렇지 않아?”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면서도 속고 싶어지니까 말이야.”
위스미아가 조금이라도 테오도어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면, 그는 난처했을 것이다. 평생 이상형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위스미아는 취향에 관계없이 사람 눈을 잡아끄는 미인이었다.
테오도어는 위스미아에게서 눈을 떼려고 했다. 그러나 위스미아가 곧장 테오도어에게 다가오는 바람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저분 이쪽으로 오시는 겁니까?”
“그런 것 같군.”
‘또 청혼인가.’
본래 아름다운 사람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작정한 것처럼 차려입었다. 수군대던 귀족들도 막상 위스미아가 다가오자 입을 다물었다.
부관까지 멍하게 만들었으니 그 위력을 알 만했다. 테오도어는 쓴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누르며 잔을 들었다. 위스미아에게 건네기 위해서였다. 예의는 차려야 할 테니까.
그런데 지척까지 다가온 위스미아가 테오도어의 손목을 잡았다.
“그 잔 내려놓고 따라오시죠.”
“……?”
“일단 여길 뜹시다.”
단둘이 밀담을 나누자는 어조는 아니다.
테오도어의 의아한 시선이 위스미아에게 닿은 순간, 폭발음이 들렸다. 테이블이 뒤집어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미로 정원에서 병사들이 튀어나왔다.
“저기다! 대공을 잡아!”
앞장 선 남자가 테오도어를 가리켰다.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이 울렸다.
“전하, 저기!”
테오도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연회장을 장식한 조각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 ⚜ ⚜
위스는 호위에게 보고를 들었다.
“그냥 도박하고 술 마시던데요?”
모어 백작이 수상한 자와 접선하지도 않고 병력이 숨겨진 곳에 몰래 다녀오지도 않더라는 얘기였다.
위스도 호위에게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도박장에 드나드는 면면이야 호위가 알아볼 리 없다. 팔라틴인이라고 뭐 눈이 세 개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도박하는 무리에 끼어서 신호를 주고받았다면 호위가 눈치채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뭘 어쩌려는 거지?’
다만 의아하긴 했다.
왕성 근처에 주둔한 군대는 아카젤 대공의 것이 다였다. 그를 습격할 만한 세력은 따로 보이지 않았다.
백작 휘하의 병력이라 해 봐야 수비 방위군 일부가 다였다. 그걸로 습격을 감행할 만큼 멍청할 리는 없지 않은가?
예상이 빗나갔나?
위스는 찜찜함을 느끼며 연회에 참석했다. 왕성 안 야회 연회장이란 곳은 야외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시야가 트이지 않는 곳이었다.
사방이 장식물과 울타리로 막혀 있어 하나는 출입구로 통하고 다른 하나는 미로 정원으로 통했다.
위스는 들어가자마자 가장 대표적인 장식물을 쳐다봤다.
“…….”
대리석 조각이었다.
무슨 신의 조각 같은 거였는데, 심미적인 부분은 모르겠고 저걸로 사람 치면 틀림없이 죽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애초에 죽이려고 만들었을 테니까.’
그도 그럴 게 저건 골렘이었다.
위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연회장 내에 골렘이 몇 기나 있는지 세 보려는 시도였다.
그는 몇 개 세다 말고 포기했는데, 수를 세는 게 의미 없을 만큼 이곳에 골렘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스는 소름이 돋았다.
입장해 있는 귀족들은 신경 줄이 대단한 게 틀림없었다. 언제든 자신의 머리를 날려 버릴 수 있는 골렘 아래서 하하 호호 잘도 웃고 있었다.
그는 저 골렘이 혹시 연회장 호위용은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그럴 리 있냐.’
골렘은 통제가 어려운 물건이다.
뛰어난 골렘술사라도 한 번에 다섯 기 이상은 통제하지 못했다. 그런데 수십 기를 가져다놓는다고?
수십 명의 술사들이 달라붙어도 폭주를 막지 못할 것이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위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테오도어에게 다가갔다. 하필이면 가장 안쪽에 처박혀 있어서 조용히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일단 여길 뜹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나가자.’
그가 테오도어의 손목을 잡았을 때였다.
테오도어의 뒤에서 검을 들고 근엄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조각이 눈만 움직여 위스를 쳐다봤다.
‘X발.’
폭발이 일어났다.
“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