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이상한 일은 또 일어났다.
“오오, 오늘의 주인공이 왔구나! 건강하고 용감한 내 아들!”
위스는 열이 다 내렸다는 판정을 받자마자 식사 자리에 끌려나왔다.
제레미아 왕은 위스를 두 팔 벌려 환영했는데, 위스는 저 대사가 정해진 것인지 궁금했다.
300년 후 왕실에는 자기 자식에게 없는 덕목을 인사말에 넣는 관습이 생긴 것은 아닐까? 아니고서야 위스미아에게 해당 안 될 말만 귀신같이 붙어 있을 리가 없다.
여하튼 위스는 왕의 포옹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을 줄 몰랐던 인간을 쳐다봤다.
테오도어는 위스보다 먼저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그가 지난 식사 자리에서 한 술도 안 뜨고 나갔던 걸 생각하면 특이한 일이었다.
‘뭔 수로 불렀냐?’
제레미아 왕의 재주가 위스의 기대보다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테오도어가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
위스가 다가가자 그는 의자를 빼 주었다.
“앉으십시오.”
“……?”
뭐 하는 짓일까? 위스는 시키는 대로 앉았다. 테오도어는 긴 테이블을 돌아가더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위스와 마주 보는 위치였다.
“이런. 참 친절하시구나. 그렇지 않니, 얘야?”
제레미아 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네가 완치된 것을 축하하자고 먼저 말씀 주신 분이 누군지 아니?”
위스는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일단 물어봤다.
“누군데요?”
“대공 전하시란다!”
“……그렇군요.”
“얘도 참.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이어서요.”
제레미아 왕이 위스의 허벅지를 쳤다.
‘그렇군요, 가 뭐니, 고맙다고 해야지!’
반응은 테오도어에게서 나왔다.
“예.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호의적인 대답이었다. 제레미아 왕은 다시 위스의 허벅지를 쳐 댔다.
‘위스, 얘야, 들었니? 세상에.’
허벅지를 방어한 손등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테오도어의 유한 반응 덕에 식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놀랍게도 습격 건은 위스가 원한 방향으로 처리된 듯했다. 사태 정리를 제레미아 왕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은 서머 왕가가 손잡을 만한 상대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럴 만도 한가.’
위스라도 협력자가 좀 무능하고 다루기 쉬운 쪽이길 바랄 것이다. 영리하고 독사 같은 놈들은 언제 배신할지 모르지 않는가?
‘무능한 놈으로 찍힌 게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군.’
위스는 알 수 없는 상황에 긴장한 어깨를 풀었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동맹이 서로의 친분을 드러내기 위한 자리였던 것이다.
그때 테오도어가 물었다.
“입맛이 없으십니까?”
“아닙니다.”
“접시를 주십시오. 고기를 잘라 드리겠습니다.”
“……?”
위스도 손이 있었다. 왜 남이 고기를 잘라 줘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접시를 내밀었다. 제레미아 왕이 온몸을 들썩이며 기뻐하고 있어서였다. 테오도어가 대단한 호의 표시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거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기는 가지런히 썰린 채 위스에게 돌아왔다. 위스는 한 입 우물거리다 말고 향신료를 찾았다. 역시 음식이 싱겁다.
그런데 손에 후추통이 쥐어졌다.
“찾으시는 게 맞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테오도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잔을 채웠다. 그리고 위스에게 내밀었다.
‘전담 하인을 둔 기분이…….’
위스는 와인을 한 병쯤 마시고 메인 메뉴를 두 접시 먹었다. 잔이 빌 때마다 테오도어가 채워 대는 통에 딱히 거절하기도 뭐했다.
배부르게 먹고 살짝 취한 위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전하께서는 단걸 좋아하시는군요.”
“아무 맛도 없는 걸 간식으로 먹을 바에야 대놓고 단 게 낫지 않나요.”
“스콘 같은 건 취향에 안 맞으시겠군요.”
“그런 건 간식이라고 안 하죠.”
“곤란하군요. 북부에서 손꼽히게 단 과자라 봐야 떠오르는 게 없는데……. 설탕을 입힌 젤리는 좋아하십니까?”
“아니요.”
“하하.”
테오도어가 어깨를 들썩였다.
제레미아 왕이 변명했다.
“하하, 얘가 사실 입맛이 이렇게 어린애 같진 않은데, 오늘 좀 농담이 과하군요…….”
“아닙니다. 귀여우십니다. 잘 어울리는데요.”
식사 자리는 화합 넘치게 끝났다.
다음 날 위스에게 선물 꾸러미가 도착했다.
초콜릿 쿠키라기에는 쿠키의 비율보다 초콜릿의 비율이 더 높은 과자였다.
“누가 보냈지?”
“대공이십니다. 공무 중에…… 거리에서 가게를 발견하고 전하께서 떠오르신다며 보내셨습니다.”
대공의 부관이 대답했다.
위스는 물론 그가 대공이 보낸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왕성을 점거한 상대의 얼굴을 위스가 잊을 리 없지 않은가.
누가 보냈냐고 물어본 건 요식 행위였다.
좀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위스미아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뭐 동맹 상대와 잘 지내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고맙다고 전해 주게.”
“예.”
대공의 부관은 찜찜한 표정으로 나갔다.
위스도 비슷한 표정으로 포장을 깠다.
‘맛있군.’
당도가 적절한, 훌륭한 쿠키였다. 만든 사람은 제과의 장인일 것이다. 약간의 짭조름한 시즈닝이 첨가된 게 일품이었다.
맛이 워낙 뛰어난 탓에 위스는 의문을 지웠다. 그라도 이런 과자를 거리에서 발견했다면 풀이 죽은 제레미에게 보내 관계 개선을 도모했을 것이다.
‘잘해 보자는 거지.’
위스도 원하는 바였다.
⚜ ⚜ ⚜
호위의 말에 따르면 모어 백작과 주모자들은 북쪽 탑에 갇혀 있었다. 귀족들의 감옥이었다.
위스도 그곳에 동생 제레미를 가둬 본 적 있었으니, 귀족을 처벌하는 데 있어서는 전통적인 장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곳에서 주모자들은 심문받고 있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배후에 팔라틴 왕이 있다는 자백은 진작 나온 듯했다.
‘그런데도 심문을 계속하고 있군.’
서머 왕실에 대해 뭐가 나올까 더 캐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
위스는 북쪽 탑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갔다.
신체 단련이었다.
“으악! 악! 전하! 언제 검을 배우셨어요?”
“검을 배워야 쓰느냐?”
“그럼 안 배우고 쓰는 사람도 있대요? 악! 아, 아프다니까요! 아야!”
호위가 호들갑을 떨며 바닥을 굴렀다. 위스의 검이 호위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을 쳤다.
위스는 내심 혀를 찼다.
‘무겁다.’
물체가 무겁다는 것과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손에 든 검이 무겁긴 했다. 맞아도 다치지 않게 속이 빈 나무로 만든 검이었는데도, 얼마나 휘둘렀다고 손목이 시큰거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손목보다 몸 그 자체였다.
근육이 없다. 아니, 사람이 근육이 없을 수는 없으니 정확한 표현은 근육이 물컹거린다는 것에 가까웠다.
거대한 부채를 흔들고 있는 것 같다. 강단 없이 흐느적거리는데 그게 바람 저항을 맞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놈들은 수련장에 줄 세워 놓고 하루 종일 뛰게 해야 하는데.’
위스는 머릿속으로 훈련 일정을 짰다.
두세 달만 땀 빼게 하면 좀 사람다운 몸이 될 것이다.
“검 다시 들어.”
위스가 명령했다.
‘하는 김에 이놈도 좀 교육하고.’
호위는 어떻게 기사가 됐는지 실력이 허접하기 그지없었다. 위스는 이런 수준의 기사를 휘하에 둬 본 적이 없었다.
봐도 봐도 놀라운 실력에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다. 호위를 바꿀 수도 없으니 답은 개조밖에 없었다.
순간 위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수련 중이셨습니까?”
기척도 없이 다가온 테오도어가 물었다.
“호위에게 검술을 배우고…… 계시는 중이 아니셨군요. 전하께서 가르침을 주고 계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제 호위 기사는 모시는 주인의 체면을 세워 주려고 노력하는 성격이어서요.”
위스는 호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대 차기 전에 일어나라.’
호위는 눈치 빠르게 일어나서 엉덩이를 털털 털었다. 그리고 슬쩍 물러났다.
“전하께서는 검을 좋아하십니까?”
“예. 대공 같은 기사 앞에서 말씀드리긴 부끄럽습니다만…….”
‘여긴 또 왜 왔지?’
목검 대련하던 곳은 왕자궁 뒤의 공터였다. 외부인이 산책을 하다가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테오도어가 위스를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위스가 물었다.
“주모자 심문이 끝났습니까?”
“……예? 아. 전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군요.”
테오도어는 잠시 당황했다.
“심문은 끝났습니다. 배후는 짐작한 분이 맞는 듯합니다. 서머의 귀족들이 연관되어 있으나, 제레미아 폐하께서도 저를 배려해 주셨으니…… 범인들의 처분은 폐하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의심에서 벗어났다.’
위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결론이 비어 있었다.
“그래서요?”
“예?”
“배후가 짐작한 그분이고, 증언 증거 다 나왔는데 그게 끝입니까?”
‘추궁 안 하냐?’
테오도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
“이대로 묻는다고요?”
“어쩔 수 없으니까요. 소중한 가족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게 무슨 X소리야.’
위스는 산길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팔라틴 왕에 대해 저놈이 분명 그런 소리를 했던 것 같긴 한데…….
그 말이, 왕이 살의를 품고 있고, 그걸 적극적으로 표출도 하고 있고, 그래서 증인과 증거가 이미 넘쳐나는 데도 대응을 안 할 거라는 소리였냐?
이 새끼 뭐지?
위스는 난생처음 만난 종족을 색다른 시선으로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