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늘 이렇게 해 오셨습니까?”
그냥 묻고 넘어갔냐는 질문에 테오도어는 입가를 문질렀다.
“예.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리러 온 건 아니었는데……. 앞으로는 좀 드물 겁니다. 이 정도까지 해도 절 죽이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을 테니까요.”
그는 약간 쑥스러운 듯 머뭇거렸다.
“게다가 전하께서도 절 도와주실 게 아닙니까.”
위스는 뭐라는 건가 싶었다.
‘네가 이 나라에서 죽으면 곤란하니까 당연히 돕겠지.’
“예. 그럴 거긴 합니다만…….”
“그러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위험하지 않을 거라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제 형님은 집중력이 강하고, 한번 생각을 정하면 잘 바꾸지 않는 분이셔서요.”
‘뭐가 괜찮다는 거지?’
팔라틴 왕이 집착적이며 그 집착을 동생 죽이는 데 쏟아붓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위스는 대공을 부추겨 팔라틴 내전을 일으키려던 계획이 실시간으로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예? 예.”
위스야 당연히 괜찮았다.
배상금 안 내려고 추진한 결혼이니 원목적은 이뤘다.
안 괜찮은 건 저놈 아닌가?
‘이 자식 머리 괜찮나?’
자기 보호 본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인간 같다. 자신을 해치려는 상대에게 살의는커녕 그런 짓을 못 하게 막겠다는 마음조차 없지 않은가?
위스는 자신이 놀라운 유형의 호구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공께서는 적에게 관대하시군요.”
“하하. 그렇지도 않습니다.”
뭐가 안 그러냐.
제레미아 왕에게 주모자 처벌을 넘긴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복수심이 희박하니까.
저 성격으로 잘도 전쟁 영웅 같은 게 됐다.
“당신의 옛 연인을 심문하면서…… 이자가 잘못되면, 당신께서 저를 원망하실까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면서 테오도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장갑 너머로도 기사의 단단한 주먹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저 안에 사람 목이 쥐어진다면 비명도 못 지르고 꺾일 것이다.
“당신의 호위가 탑 주변을 맴돌고 있는 걸 발견해서 다행이었습니다.”
테오도어가 상쾌하게 웃었다.
“…….”
호위를 못 봤으면 어쨌을 거라는 소리인가?
⚜ ⚜ ⚜
위스는 찜찜함을 느끼며 방으로 돌아왔다.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운동하는 것만큼이나 잘 먹는 것이 중요하다.
주방장이 준비한 닭 가슴살과 삶은 달걀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호위가 헛구역질을 했다.
“전하, 이거 언제까지 먹어요?”
“네가 나 이길 때까지.”
“그런 말 없으셨잖아요!”
반항하는 호위에게 위스는 닭 가슴살을 좀 더 덜어 줬다. 그리고 자기 몫의 달걀을 씹었다.
‘이 짓을 또 하고 있다니.’
노예가 잘 먹고 잘 자란 기사들만큼 체력을 갖출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추격하는 기사단에게 ‘이건 불공평하니 좀 쉬었다 가자’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위스는 강제로 몸을 키웠는데, 그의 ‘도주 행렬’에 전직 기사가 합류했던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늙은 기사는 주인을 잃고 떠도는 처지였다. 그는 위스와 위스를 배신한 부관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다.
위스는 테오도어에게 느끼는 찝찝함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닮았어.’
위스의 부관 이름도 테오였다. 저 테오도어도 선조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일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걸리는 건 둘의 성격도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위스의 부관은 노예 출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격적으로 완성된 기사였다. 성격이 유하고 자신이 피해를 보는 일에도 늘 관대한 사람이었는데, 도덕심이 투철한 데 반해 이상한 데서 잔인하게 손을 쓰곤 했다.
‘후손이라는 거지.’
위스가 떫은 기분을 정리했을 때였다.
“그런데요, 전하. 왕국 살리기는 잘 되어 가세요?”
“뭐.”
“그분 분위기 심상치 않던데요. 어휴, 아까 절 어떻게 쳐다보시던지. 전 처음에 왜 그런지도 몰랐다니까요.”
“무슨 소리야?”
“아니, 아까 전하께 얻어맞고 있을 때요. 그분이 절 이렇게 쳐다보시더라니까요.”
호위가 입을 일자로 다물고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전혀 안 닮았다.
“제가 전하랑 뭐 좋은 시간이라도 보내고 있었으면 억울하지도 않죠!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네 주인 뒤로 숨었냐?”
호위는 아차 하더니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그분이 전하를 해치실 리는 없으니까……. 제가 설마 전하를 방패로 쓰려고 했겠습니까? 하하. 악!”
위스는 호위의 정강이를 걷어차 주고 팔짱을 꼈다.
‘아무리 봐도 그건 그거지.’
호위 눈에도 그놈이 위스를 자기 부인 취급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는 소리다.
호위는 정강이를 쓰다듬으며 억울한 듯 말했다.
“아니, 전하의 계획 실행력이 훌륭하셨다, 그분 전하께 넘어간 것 같다고 말씀드리는데 왜 때리고 그러세요?”
위스는 픽 웃었다.
“나도 알아.”
그 결과가 오메가 부인 취급이라는 점이 떨떠름한 점이었으나, 그게 뭐가 대수인가?
배상금에 깔려 죽을 미래를 막았는데.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단둘뿐인 가족이니까요.
‘아니.’
위스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쫓아 보냈다. 쥐가 고양이 생각해 주고 있다.
어차피 그놈은 형과 원수졌다.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저 혼자일 텐데, 팔라틴의 왕이 되면 목숨의 위협은 안 받고 좋은 거 아닌가.
후궁 들여서 애 낳으면 진짜 가족도 생기는 거고.
문득 위스는 문을 쳐다봤다.
“왜 그러세요?”
“나가서 확인해 봐.”
“……아무것도 없는데요?”
호위가 돌아왔다.
위스의 기감에도 잡히는 게 없었다.
착각이었나? 인기척이 느껴진 것 같았는데.
위스미아의 신체는 성능이 뒤떨어지는 주제에 예민하기만 했다. 바짝 마른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먹고 저녁엔 수련장 뛰자.”
“또요? ……너무 좋네요.”
방엔 풀 씹는 소리만 들렸다.
⚜ ⚜ ⚜
테오도어의 부관 예센은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원인은 그의 상관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아카젤 대공 테오도어는 훌륭한 기사였다. 그는 약자를 위하고 정의로우며, 충성심이 강한, 기사도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 평판이 실물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세간에서 모르는 것은 아카젤 대공이 상상 이상으로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대공 휘하의 기사들은 단합이 잘 되는 편이었다. 그들이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팔라틴 왕이라는 적이었다.
대공 휘하에 들어온 기사들은 그에게 금방 온 마음을 다해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상벌이 공정하고 억지스러운 명령을 내리지 않는 상관을 존경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상관이 왕국 제일의 기사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공정하고 훌륭한 기사인 아카젤 대공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제에게만큼은 온당한 벌을 돌려주지 않았다.
휘하 기사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개 같은 명령을 내려도 불만 없이 복종하는 기사에게, 상은커녕 벌을 내리는 주인은 없는 법이다.
심지어 테오도어는 팔라틴 왕에게 왕국을 바쳤다. 정복 전쟁에서 승리해 팔라틴의 이름을 드높였다.
그 대가가 이것인가?
‘더 이상 못 견디겠습니다. 대공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기사들의 불만이 터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센이라고 알겠는가?
‘네놈들이 대공 전하의 심중을 어떻게 이해하겠냐? 닥치고 수련이나 해라.’ 하고 입을 다물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센은 테오도어를 꽤 오래 모셨다. 팔라틴 왕의 위협이 테오도어를 상처 입힌 적은 없었으나, 그건 외적인 부분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또 취하시겠군.’
예센은 내심 혀를 찼다.
그러나 테오도어는 평소대로 상심하지 않았다.
그는 최근 이상하게 상태가 좋았다.
뭐가 다른 거지?
게다가 왜 요즘 부쩍 디저트에 관심을 갖게 되셨단 말인가? 위스미아 왕자의 행동반경을 궁금해하시는 건 또 왜고?
그가 집무실로 들어갔을 때였다.
“……대공 전하?”
“마침 왔군. 어때?”
“뭐가 말입니까?”
대공이 미소 지었다. 사실 예센의 눈에도 이상한 게 눈에 띄긴 했다.
“꽃을 좋아하시는 것 같기에. 전하의 눈에 찰 만한가?”
삭막한 집무실 책상 위에 꽃다발이 누워 있었다. 꽃을 얼마나 풍성하게 엮었는지 사람 머리통보다 컸다.
색색의 장미 다발을 장식한 건 작은 진주가 엮인 실이었다. 그게 포장을 둘러 거대한 매듭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저기에 얼마가 들어 갔을까’가 먼저 떠오르는 물건이었다.
“아주…… 아름답네요.”
예센은 가까스로 ‘비싸 보이네요.’라는 말을 참았다.
“그런가? 다행이군. 난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야.”
“위스미아 전하께 선물하시게요?”
“그래.”
테오도어가 꽃다발을 들고 입꼬리를 올렸다. 아카젤 대공의 수많은 장점을 두고 굳이 외모를 언급하는 기사들은 드물었으나, 사실 대공 진영의 기사들은 ‘우리 주인이 저렇게 훤칠하고 멋지시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안 그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게, 오해를 살 수도 있고…….”
“무슨 오해?”
“보통 그런 꽃다발은 고백할 때나 프러포즈할 때 쓰이지 않습니까?”
예센은 위스미아 왕자에게 좋은 인상이 없었다.
습격 주모자가 그 왕자의 애인이 아니던가?
그놈은 심문을 받으면서도 다 왕자를 되찾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왕자가 끌려가는 애인에게 달려가던 모습까지 떠올리면, 참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 프러포즈용으로 주문했으니까.”
“……잘 못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