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서머의 귀족들은 초대장을 받고 왕성으로 향했다.
발신인은 위스미아 왕자였다. 그는 결혼식에 와 주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파티를 준비했다고 했다.
‘확실히 왕자가 쓴 편지는 아니겠군.’
귀족들은 위스미아 왕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짐작했다.
왕자에게는 타국에까지 소문난 연인이 있었다. 사실 이 연인이 유명해진 이유는 사랑의 도피 때문이었지만…….
도피에 실패한 왕자는 왕성에 갇혔고 그 연인인 모어 백작은 왕성 출입 금지를 명령받았다.
모어 백작은 훌륭한 기사였다. 사실 훌륭하지 않은 기사에게 수도의 방위를 맡길 리 없었다. 충성심과 용맹으로 유명하던 그 기사는, 자신의 연인을 되찾기 위해 얼마 전 엄청난 일을 감행했다.
왕실 주최 연회에서 대공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런 계획이 성공할 리가 없었다.
암살의 실패로 서머가 뒤숭숭한 가운데, 위스미아 왕자는 대공과 결혼했다. 여기에 왕자의 의지가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위스미아 왕자는 섬세한 성품이었다. 귀족들은 결혼식장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저 왕자가 식이 진행되는 도중 실신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저 왕자라면 연인을 그리며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뒤숭숭한 결혼이었다.
아카젤 대공은 서머를 정복하고 그 후계자와 결혼해 왕국을 손에 넣었다. 결혼식은 졸속이었고 이후 피로연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이번 파티는 피로연 대신인 셈이었다.
의미를 따지자면 왕국의 새 주인인 대공이 귀족들의 인사를 받는 자리라 해야 할 것이다.
슬픔에 잠겨 있을 왕자가 파티장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리 없으니, 귀족들은 대공의 눈에만 들면 됐다.
물론 왕자가 제정신이었대도 귀족들이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없었겠지만.
“참석이나 하셨는지 모르겠군. 몸이 약한 분이라 본래 파티에 자주 불참하시지 않나.”
“본인이 주최한 파티인데 설마 그러시겠나?”
귀족들은 잡담을 하며 주최자를 기다렸다.
위스미아 왕자는 대공과 함께 입장했다. 소란스럽던 파티장이 잠시 조용해졌다.
대공은 왕자를 위해 팔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 팔을 잡고 입장한 왕자가 평소보다 애처롭게 보인다고 귀족들은 생각했다.
대공은 장신인 데다 큰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볕에 그을린 피부는 건강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으니 왕자는 더 창백하고 작게 느껴졌다.
대공이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동안, 왕자는 입을 다물고 주변을 관찰하는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귀족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위스미아 왕자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파티장에서 시간만 때우던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새삼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귀족들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다른 걸 알아차렸을 터였다. 왕자의 시선이 닿은 자들에게 기사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을.
쾅!
갑자기 연회장의 문이 닫혔다.
“무슨 일인가?”
귀족들이 주변을 둘러보는데, 왕자가 말했다.
“호버 남작, 클라넷 남작, 라드 백작.”
기사들이 호명된 자들을 붙잡았다.
“뭐…….”
“전하, 이게 무슨?”
“대공 전하 시해 미수 혐의로 체포한다.”
기사들이 그들의 팔을 뒤로 꺾고 결박했다.
“……?”
“손대지 마라! 전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그들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엮이지 않으려는 움직임이었다.
“근거도 없이 사람을 이리 핍박하실 수는 없는 겁니다! 에이, 놓으라니까!”
“폐하! 폐하께서는 어디 계신가?”
“폐하께서는 이번 일로 크게 상심하셔서 쉬고 계신다. 처벌을 내게 일임하셨으니 그대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왕자는 왕의 인장을 내보이고 다시 품에 넣었다. 그리고 결박된 귀족들 앞으로 다가갔다.
“모어 백작이 그대들의 이름을 말하더군. 조사실에 갇혀 있어야 할 이들이 좋은 자리에 나타났으니 그 뻔뻔함을 이루 말할 수 없어.”
“모어 백작이? 그, 그럴 리가…….”
호버 남작은 당황했다.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들은 팔라틴 왕이 언급한 습격 실행자들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실행자들은 그들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거짓말입니다! 백작을 만나 보게 해 주십시오! 억울합니다!”
“무슨 원한이 있어 모함인지 몰라도…….”
“억울하다?”
왕자가 되물었다. 호버 남작은 이 마음 약한 왕자를 물고 늘어져야겠다 싶었다.
“예, 예! 물론입니다.”
“내가 그대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왕자는 표정 없이 말했다.
호버 남작은 억지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댄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위스미아 왕자가 저런 성격이었나?’
왕자는 위엄이나 냉엄함 같은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건 제레미아 왕도 마찬가지여서, 서머의 귀족들은 왕족을 상대하며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호버 남작은 위스미아 왕자를 마주하고 머리끝까지 얼어붙었다. 왕자가 거역할 수 없는 상대처럼 느껴졌다.
“저, 저는…….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폐하를 위해 충성을 다했습니다. 먼 타국에서 십 년도 넘게 외교 활동에 복무하다 돌아온 제게 이러실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순순히 목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호버 남작이 우는소리를 했다. 실제로 울고 싶은 기분이었기 때문에 목소리는 충분한 이상으로 떨려서 나왔다.
“나라를 위해 외교관으로 복무했던 사람을…….”
“전하께서 오해하신 게 아닌가?”
주변 귀족들이 동요했다. 호버 남작은 팔라틴에 파견되었던 외교관이었다.
외교 관리라는 건 능력도 중요했으나, 그 개인이 십 년 이상 고된 외지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람을 배신자라고 핍박하고 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분위기를 느낀 호버 남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가 억울함을 호소하기 전에 왕자가 먼저 물었다.
“그런가? 한 달 전 그대의 외교관 시절 친구에게서 뇌물을 받은 것도 충성심의 발로인가?”
호버 남작은 말문이 막혔다.
“그걸 어떻게…….”
그는 실수했음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땅으로 떨어졌다.
“팔라틴에서 지낸 세월이 길었지.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귄 모양이야. 전쟁 중에 국경을 넘어 달려오는 친구도 있으니 말이야. 그자가 그대를 돕겠다고 했나? 이 전쟁의 승자가 정해져 있으니 그 전에 그대의 충성심을 돈 받고 팔라고 했어? 언제부터 두 명의 주인을 섬기고 있었나?”
“아, 아닙니다, 전하!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두 명의 주인이라니요? 배신이라니. 제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저는 그저…….”
호버 남작은 소스라쳐서 변명하려고 했다. 그는 정말로 전쟁과는 관계없었다!
팔라틴 왕이 옛 지인을 통해 그에게 선물을 건넨 건 사실이었으나, 그 시기는 제레미아 왕이 백기를 든 후였다.
선물의 대가로 팔라틴 왕이 바란 것 역시 전쟁과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대공이 죽을 것이라고 했다.
-제게 대공을 습격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은 대단한 기사가 아닙니까! 그런 일이 성공할 리 있겠습니까?
-리엔델 폐하께서는 그런 무리한 일은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대공을 죽일 자는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남작은 쉽지만 중요한 일 하나를 처리해 주면 됩니다.
팔라틴 왕의 지시는 과연 어렵지 않았다.
남작이 할 일은 이후 일어날 혼란을 수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뿐이었다. 팔라틴 왕이 서머에 관대한 제안을 할 때, 그것에 동의 표를 던지기만 하면 되는…….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왕자의 곁에는 대공이 냉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명실상부 대륙 제일의 기사였다. ‘저는 대공이 죽은 뒤의 일만 돕기로 했습니다.’같은 소리를 지껄였다간 바로 남작의 목을 날릴 터였다.
왕자가 호버 남작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뇌물을 받지 않았다고? 모어 백작이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아니면 그대가 만난 자가 팔라틴의 세작이 아니라는 말인가?”
남작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인정하면 그는 반역죄로 처벌받는다!
“예, 예! 그렇습니다! 세작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전하. 제 외교관 시절 친구가 찾아온 건, 제 형편이 어려움을 알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친구가 찾아온 시기를 다시 조사해 주십시오. 때가 맞지 않음을 아실 겁니다! 저 또한 외교를 위해 일해 온 사람이 아닙니까? 양국이 화평을 약속하고서야 그 친구를 만나 주었습니다!”
“그자가 찾아온 시기가 정확히 언제라는 건가?”
“전쟁이 끝난 직후입니다! 제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위험이 가라앉았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와 준 모양입니다.”
남작은 변명을 주워섬겼다. 팔라틴 왕의 사자를 절친한 친구로 둔갑시키지 않으면 목이 잘린다.
“고마운 친구로군.”
“예,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왕자는 표정 없이 말했다.
“그래서 그 고마운 친구를 위해 대공을 습격했군.”
“예?”
“동기를 알았으니 나머지는 심문실에서 들어도 되겠지. 끌고 가.”
“……저, 전하! 전하! 아닙니다! 살려 주십시오!”
기사들이 호버 남작을 끌고 갔다. 그의 변명을 응원하며 듣고 있던 클라넷 남작과 라드 백작은 뒤늦게 무고를 주장하고자 했다.
“전하, 저희는 아닙니다! 저희는 호버 남작과 아무런 관계가…….”
“이거 놓아라! 내가 누군지 아느냐? 으억…….”
그들이 끌려가며 지르는 소리가 파티장을 울렸다.
“외교관이었다는 자가 양국이 화평하는 지금, 대공을 습격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는 변명은 하지 않겠지.”
왕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대공을 돌아봤다.
“대공께서는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대공을 해치고, 양국의 평화를 해치려는 벌레 같은 자들은 제가 용서치 않겠습니다.”
지금까지와 다른 다정한 어조였다. 말의 내용도 연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상냥했다.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얼이 빠져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저 두 사람은 부부가 맞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