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기가 막힌 건 위스도 마찬가지였다.
“절 모욕한 자입니다. 왜 대공이 처벌하십니까?”
“더 때리면 전하 손목이 나갑니다.”
“…….”
“제 손목이 전하 것보다는 튼튼할 텐데요. 전하께 저를 이용하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위스는 할 말이 없었다.
이용한다는 게 정말로 도구처럼 사용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테오도어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더니 모어 백작의 멱살을 잡았다.
그가 주먹을 휘둘렀다. 퍽 소리가 나더니 백작의 고개가 꺾였다.
“…….”
위스는 눈을 의심했다. 한 대 맞고 기절한 건가?
테오도어는 백작의 뺨을 때렸다. 손으로 사람 피부를 때리는데 채찍으로 가죽 치는 소리가 났다.
“으, 으으…….”
백작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떴다.
테오도어는 커다란 손으로 다시 뺨을 쳤다. 뻑,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백작은 고개가 다시 휙 돌아갔다.
아무 말 없이 사람을 깨웠다 기절시키기를 반복하면서도 테오도어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위스는 머리끝까지 오른 화가 식어 감을 느꼈다.
“……그만.”
“만족하셨습니까? 부족한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도 테오도어는 백작을 내려놓았다. 멱살을 놓자 백작의 몸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테오도어는 바닥에 떨어진 백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만족하지 못한 사람은 테오도어 같았다.
“……어디서부터 들으셨습니까?”
“처음부터요.”
“미행했습니까?”
위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테오도어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몸도 약한 분이 흉악범을 만나러 가셨다기에, 걱정이 되어 따라왔습니다. 요즘엔 그런 일도 미행이라고 합니까?”
“…….”
반박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긴 했다.
잘 보니 테오도어는 약간 숨이 찬 기색이었다. 골렘을 잡을 때도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놈 이마에 약간 땀까지 맺혀있다.
테오도어는 위스의 손을 잡더니 한숨을 쉬었다.
“걱정했습니다. 저를 부르셨어야죠.”
‘내가 왜?’
하지만 걱정했다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다.
위스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모어 백작이 절 해치진 않을 텐데요.”
“예. 그걸 걱정한 건 아닙니다.”
“……?”
“전하께서 옛 연인에게 미련이 남으셨을까 봐서요.”
테오도어는 위스의 손바닥을 간지럽게 문질렀다.
“제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를 이용하는 대신 부인의 역할을 다하시겠다고요.”
“……?”
‘그게 무슨 상관이냐.’
위스가 모르겠다는 표정이자, 테오도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남자를 만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부부간에는 신의를 지킬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 이게 무슨…….”
“단둘이 같은 공간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테오도어가 표정을 바꿔 추궁했다.
하긴 뭘 했단 말인가?
‘한번 자자는 소리나 듣고 있었다, X발.’
“다 들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자가 전하께 한 모욕적인 말은 들었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왜 이자를 찾으셨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테오도어가 미련이 남았냐는 눈으로 위스를 쳐다봤다.
위스는 다 넘어가도 그 오해만은 참기 힘들었다.
“배후를 좀 캐 보려고요.”
“습격의?”
배후가 팔라틴 왕이라는 건 두 사람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위스가 알고 싶은 건 그쪽이 아니었다.
“실무자 쪽이요. ……마법사 말입니다.”
“……!”
“남의 왕성에 골렘을 장식으로 놓아둘 정도면 못할 일이 없다는 건데. 뭐 하는 놈인지 알아는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테오도어의 눈이 커졌다.
“그렇군요.”
“팔라틴 왕 밑에 두기 아까우니까, 섭외 가능하면 빼오고요.”
“……좋군요.”
테오도어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이놈이 아는 건 없는 것 같고. 팔라틴 왕 근처에서 마법사 보셨습니까?”
“글쎄요. 수도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게 이 년 전이어서요. 그때까지 없었던 건 확실합니다.”
‘애매한데.’
이 년은 꽤 길다.
사실 위스는 이 시대의 마법사에 대해 거의 몰랐다. 위스의 시대에도 마법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보기 힘들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팔라틴 왕은 무슨 수로 구했지?’
“아! 이곳에 계셨군요.”
그때 숨을 몰아쉬며 예센이 올라왔다.
“지금 내려와 보셔야 합니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예. ……마탑에서 오셨다고 합니다.”
테오도어와 위스는 시선을 교환했다.
⚜ ⚜ ⚜
마탑의 마법사들은 말 그대로 마법사 같았다. 수는 총 다섯 명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더워서 뇌가 익었나.’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입지 않을 차림새였다. 위스는 이들이 범상치 않은 놈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임자가 나와서 물었다.
“아카젤 대공이십니까?”
“예.”
“골렘을 회수하러 왔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
‘맡겨 놨나?’
위스는 상대의 당당한 태도에 감탄했다.
그런데 대공은 예센을 돌아봤다.
“부서진 골렘이 있는 곳으로 손님들을 안내해 드려.”
“예, 대공 전하. 손님들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친절한 안내에도 책임자는 만족하지 않았다.
“안내는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성 안팎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만 해 주십시오. 통행증을 만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수가 다섯이니 다섯 개를 만들어 주시면 되겠군요.”
‘미친놈들인가?’
남의 영토에 들어와서 자유 통행증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다. 위스가 책임자를 빤히 보는데 대공이 다시 대답했다.
“예센.”
“예. ……위스미아 전하, 통행증을 지급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질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예’라고 대답하라는 태도였다. 책임자는 번거롭게 무슨 허락을 받느냐는 듯 위스를 쳐다봤다.
“그래.”
위스는 일단 대답했다.
예센이 마탑 일행을 끌고 나갔다. 위스는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물었다.
“뭡니까?”
“무엇이요?”
“왜 저놈들 말을 다 들어주고 있습니까?”
테오도어는 신기한 호구였으나 만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호락호락한 인간이었으면 모어 백작을 그렇게 패 놓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탑의 마법사니까요.”
“근데요?”
“……모르십니까?”
오히려 테오도어가 놀랐다.
“알아야 합니까?”
“아니오, 그렇지는 않지만…….”
“월담하다 머리를 박아서 기억이 드문드문합니다.”
“……?”
테오도어는 손을 뻗어 위스의 머리를 만졌다. 뒤통수를 조물조물 만져서 위스는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아직도 아프십니까?”
“보통 이러면 뭐 하다 월담했냐고 묻지 않습니까?”
“어쩌다 그러셨습니까?”
테오도어의 눈가에 웃음기가 돌았다. 위스가 장난치는 아이라도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위스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사랑의 도피를 하다가 머리 박았다는 게 자랑할 얘기는 아니었다.
위스의 뒤통수를 만지던 손이 이내 머리카락을 만지기 시작했다. 테오도어는 버릇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시선이 위스에게 고정되어 있어서, 분위기가 놀랍도록 친밀해졌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무슨 일을 할 때 허락받지 않습니다. ……아니, 허락은 받지만, 거절당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위스는 기분이 불편해서 몸을 조금 뒤척였다.
“왜요?”
“마탑주가 예언자니까요.”
‘그건 대단한데.’
예언은 드문 능력이었다. 위스만 한 경지의 마법사도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는데, 파괴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능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말로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미래를 아는 인간이 제대로 된 인생을 살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 마탑주까지 해 먹었다고?’
“예언을 들으려고 마탑을 대접해 주는 겁니까?”
“아. 아니요. 마탑주는 누가 청한다고 예언을 해 주진 않습니다.”
위스는 의아해졌다.
“그럼 예언자라는 게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원치 않는 예언을 하니까요.”
“……?”
“200년 전에 마탑주가 예언을 했습니다. 세계 멸망의 씨앗이 태어날 거라는 예언이었는데……. 그 ‘멸망의 씨앗’으로 지목받은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끔찍하게 죽었는데, 아무도 마탑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왕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던 기사들은 살아 돌아가지 못했고요.”
‘그게 뭐야.’
의문이 한두 가지 드는 게 아니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었다.
“200년 전 마탑주도 예언자였다고요?”
“아, 마탑주는 대대로 예언자입니다.”
“……?”
“이름도 같은 이름을 씁니다. 마탑을 세운 초대 마탑주부터, 마탑주의 이름은 사무엘이었습니다. 마법사들의 무슨 규칙인 모양입니다.”
테오도어는 가볍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냐.’
적어도 위스가 살던 시절에는 그런 징그러운 전통이 없었다.
살해 위협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 숨어살던 마법사들이, 대대로 이름을 이어받는 것 같은 태평한 문화를 이어 갈 수 있을 리 없다.
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그리운 이름이긴 했다.
‘사무엘이란 말이지.’
위스의 측근 마법사도 그런 이름이었다.
그는 문득 미심쩍어졌다.
“마탑이 언제 세워졌다고요?”
“300년 전입니다. 위스 대왕의 측근인 대마법사 사무엘이 대왕의 사후 속세를 떠나 마탑을 세웠으니, 서머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일 텐데요.”
“……까먹었습니다.”
그 사무엘이 맞았다.
“그 예언이 사실이었는지는 지금도 의혹이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던 왕을 죽이기 위해 마탑주가 꾸며 낸 얘기라는 설도 있고요. 하지만 마탑주의 예언 능력은 진짜입니다. 큰 흉작이나 자연재해의 경우 경고를 해 줄 때도 있으니까요.”
한마디로 예언 능력을 과시하면서 마탑의 이름값을 높였다는 소리다.
위스는 이 방식이 익숙했다.
사무엘 놈의 방식이다.
“그리고 사실…… 20년 전에 또 예언이 있었습니다.”
테오도어는 위스의 머리카락을 계속 만지며 말했다.
“멸망의 씨앗이 다시 태어났다고요. 성년을 전후로 한 왕족이 있는 나라들은 지금 숨도 못 쉬고 있을 겁니다. 누가 멸망의 씨앗으로 지목될지 모르니까요. ……마탑의 눈에는 띄지 않는 게 가장 좋습니다.”
테오도어가 위스의 눈을 들여다봤다.
위스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사람은 위스미아다. 스무 살을 전후로 한 젊은 왕족.
위스는 순간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그러니까 이 새끼들이 면전에서 협박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