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는 정말 마법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제가 견문이 넓지 않습니다.”
“위스 대왕을 선조로 두신 분이 마법사에 대해 이리도 모르셔서야…….”
책임자가 혀를 차며 앞장섰다.
위스는 그들을 끌고 논밭으로 갔다. 농부들은 살릴 수 있는 작물을 살펴보고 있었다.
위스 일행이 다가가자 그들은 물러났다. 훤칠한 왕족 뒤로 로브를 쓴 다섯 명의 수상한 사람들과 기사들이 따라붙으니, 누가 봐도 피하지 않으면 안 될 행렬이었다.
마법사들은 논밭의 규모를 보고 말이 없어졌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다 논밭입니까?”
“역시 어려우십니까? 너무 넓군요.”
“……너무 작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다행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논밭은 더 있습니다.”
“…….”
위스는 마법사들을 끌고 다니며 수도 인근의 논밭을 다 갈아엎었다.
“며칠만 더 수고해 주시면 겨울을 따듯하게 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 마법사님들 덕분입니다.”
“마법사님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위스미아 전하, 만세! 아카젤 대공 전하, 만세!”
일행은 꼬리에 꼬리를 문 뱀처럼 늘어났는데, 밤이 될 무렵에는 처음의 열 배는 넘는 규모가 되어 있었다.
인근 지역의 농부들이 전부 몰려들어서였다.
그 외에도 구경꾼들과 어린아이들, 할 일 없는 한량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이 마법사들을 찬양하니 로브를 쓴 샌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결혼을 정말 잘하셨군요.”
예센이 감탄했다. 마탑 마법사들의 협조를 구할 생각을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위스미아 왕자 전하는 천재적인 전략가에 뛰어난 연기자이심이 틀림없습니다.”
“전략가이시긴 하지. 연기는 그보다 못하지만.”
“예?”
테오도어는 분노를 억누르며 위스에게 다가갔다. 화난 상태로는 대화가 불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뒤에서 끌어안자, 위스는 놀란 듯 돌아봤다. 그러나 밀어내지는 않았다. 테오도어가 틈만 나면 달라붙어 익숙해진 탓이다.
“마법사들의 분노를 사면 어쩌려고 이러셨습니까?”
“쟤네가 왜 화냅니까?”
“……글쎄요. 이용당한다고 생각하면 보통 화를 낼 텐데요.”
‘네가 할 말이냐?’
위스는 테오도어를 쳐다봤다. 이용당하면서 호구처럼 구는 게 그의 특기 아니던가?
그런데 테오도어의 표정이 이상했다.
“지금 저한테 화내고 계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 왕국을 위해 이토록 훌륭한 성과를 내셨는데 제가 어떻게 화를 내겠습니까?”
‘그냥 화났다고 해라.’
이 새끼가 왜 꼬였단 말인가?
“마법사들은 보복 안 합니다.”
“마법사들이요.”
위스는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았다.
“……예. 마법사들은 자기가 한 약속은 못 어깁니다. 대가로 그들이 가진 마법이 걸리니까요. 식사값을 하겠다고 약속했으니 해야 합니다.”
“그것도 위스 대왕의 책에서 읽으셨습니까?”
“예.”
“약속이 끝나면요? 약속을 지킨 뒤에 전하께 보복하는 것도 못 합니까?”
‘X발, 내가 당해 줄 리가 있냐.’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점이 짜증스러운 지점이었다. 이전에는 위스가 하는 행동에 감히 토 다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왜 혼나는 어린애처럼 추궁받고 있어야 하는가?
“하루 종일 붙어 계시면서 옆에 있는 사람 하나 못 지키십니까?”
위스는 열이 뻗쳐서 되는대로 쏘아붙였다.
테오도어의 표정이 변했다.
“……저를 믿으셨습니까?”
당장이라도 싸울 듯한 분위기는 가라앉았으나, 위스는 괜한 소리를 지껄였음을 직감했다.
“제게 의지하셨군요.”
테오도어는 웃으며 위스의 뺨에 입술을 댔다. 위스는 도무지 이놈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협조적인 건 좋은데 말이야…….’
위스는 달라붙는 테오도어를 떨구고 외출에 나섰다.
-어디를 가십니까?
-카페요.
-……? 그곳에서 무슨 습격 모의라도 있습니까?
-한정판 디저트 사러 갑니다.
-같이 갈까요?
-대공은 눈에 띕니다.
-…….
테오도어는 네가 할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따라오지 않았다.
‘감시는 떨궜고.’
테오도어는 유능했으나 쓸 곳이 제한된 무기였다.
사실 위스는 테오도어에게 행정이나 정략적인 능력을 기대하진 않았다. 기사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대단한 기사가 훌륭한 행정가까지 겸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테오도어는 난놈이었다. 하기야 자국 왕이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대공이 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저런 놈이 팔라틴인이라니.’
팔라틴 왕은 전생에 공을 세웠기에 휘하에 인재가 즐비하단 말인가?
인력 자원이라고는 얼빠진 호위 정도밖에 없는 위스는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어가 쓸 만하다고 위스의 가장 큰 비밀을 공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여기 왔던 데 아닙니까? 술 드시려고요? ……설마 도박하시려는 건 아니시죠?”
호위가 물었다.
위스는 대답하지 않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 근처에서 마법적인 기운을 느꼈다. 위스는 눈여겨보았던 술집을 찾았다.
테오도어의 방해를 받아 조사하지 못했던 가게였다.
그땐 그런가 보다 넘어갔으나,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마탑이 눈에 불을 켜고 마법사란 마법사는 다 끌어가는 세상에, 눈먼 마법사가 웬 허름한 술집을 나돌아 다니고 있단 말인가?
“오늘 가게 쉬나 본데요.”
“문 열어.”
“예?”
“부수라고.”
“아니, 전하. 아무리 그래도 남의 사유 재산을 함부로 막 부수는 건…….”
위스는 마력으로 다리를 강화하고 문짝을 걷어찼다. 찌릿찌릿한 거부 반응이 혈관을 타고 몸을 내달렸다.
그러나 전처럼 피를 토하지는 않았다.
‘운동한 보람이 있군.’
위스는 코피를 손등으로 훔쳤다.
“아, 좀! 하지 마시라니까요! 몸을 뭐 그렇게 함부로 쓰세요? 사유 재산은 중요하지만, 전하의 명령이 중요하니 제가 하겠다, 뭐 그런 말을 하려고 했는데 왜 사람 말을 다 듣지도 않으십니까?”
호위가 투덜투덜하며 검집째로 자물쇠를 쳤다. 깡깡 소리가 나더니 자물쇠의 약한 고리가 흔들렸다.
덜그럭!
자물쇠가 떨어졌다. 호위가 발로 차서 문을 열자 위스는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한동안 문 안 열었나 본데요.”
호위가 손을 내저어 먼지를 치웠다.
위스의 눈이 밝은 빛으로 변했다. 허공에 모인 마력이 그물처럼 뻗어 나가 사방의 벽에 달라붙었다.
그물이 섬세한 발로 벽을 더듬었다.
마력 반응은 벽 너머에서 감지됐다.
“저거 부숴.”
“네? 벽인데요?”
“어.”
호위는 다시 투덜거리며 카운터 뒤의 벽을 발로 찼다. 그런데 돌벽에서 쿵 소리가 났다.
“어?”
호위는 눈을 의심하며 이번에는 온몸에 힘을 실어 돌벽을 쳤다.
쿵!
분명히 소리가 들렸다.
호위가 이를 악물고 다시 벽을 밀어붙였다.
쿵!
벽이 활짝 열렸다. 호위는 안의 공간으로 한 바퀴 굴러 들어갔다.
“악!”
벽이 아니라 문이었다.
위스는 쓰러진 호위 위를 건너갔다. 비밀 공간 내부는 조금 어두웠는데, 그럼에도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천장에 붙은 야광석 때문이었다.
그것 역시 마법 물품이었다.
위스는 깨달았다.
이곳은 마법사의 공방이다.
그리고 이 공방에서 연구되고 있던 건 인형이었다.
“……이게 뭡니까?”
호위가 위스에게 달라붙었다.
사람 크기만 한 인형이 벽에 등을 대고 주르륵 서 있었다. 연구대를 제외한 세 개의 벽이 전부 인형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수가 스물은 될 듯했다.
스무 개의 인형이 초점 없는 눈을 공방의 입구에 두고 있었다.
호위가 떨든 말든 위스는 연구대로 걸어가 펼쳐져 있던 책자를 들었다.
책자에 적힌 내용은…… 인형의 구상도였다. 재료와 치수와 배합이 세세하게 적혀 있어 구상도만 보고도 인형을 만들 수 있을 듯했다.
‘미쳤나.’
위스는 소름이 돋았다.
이곳은 마법사의 공방이 아니었다.
보물 창고였다.
⚜ ⚜ ⚜
위스는 흥분에 차 성으로 돌아갔다.
테오도어는 그의 빈손을 보고 의아해했다.
“디저트를 사러 갔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위스는 그런 변명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예. 먹고 왔습니다. 맛있던데요.”
“…….”
‘하나 사 올 걸 그랬나.’
테오도어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위스는 잠깐 생각했다.
“그보다 손님 대접 좀 할까요.”
“손님 대접이요.”
“마탑에서 오신 분들이 저희를 위해 수고해 주셨는데, 맛있는 식사라도 대접하는 게 도리 같아서요.”
“예……. 옳은 말씀이군요.”
테오도어는 뭐라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마법사들을 불러다 주긴 했다.
위스는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 앞에서 웃으며 손님맞이를 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이렇게 조촐하게나마 대접하려고 합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
마법사들은 어리둥절해서 앉았다.
‘굶어 죽겠으니 손님에게 식비 내놓으라던 놈이 갑자기 무슨 변덕인가 싶겠지.’
그러니 대접에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마법사들은 경계하며 자리에 앉아 스푼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위스가 웃으며 전채를 해치우고 메인 디시에 손을 대는 걸 보고서야 식사를 시작했다.
며칠 간 강제 농사에 동원되었던 마법사들은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주린 배를 채워 주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마음이 풀리기 마련이었다.
위스는 마법사들의 얼굴에 포만감이 드러나길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법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수백 명이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을 이렇게 몇 분이서 순식간에 해내다니요. 골렘이 습격했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기분이 풀린 책임자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희는 그 골렘이 부서진 게 더 놀랍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골렘을 부수다니, 가능하리라 생각도 못 했는데요.”
“대공께서는 못 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위스는 반짝이는 눈으로 대공을 봤다.
대충 호응하라는 신호였다.
‘저놈들이 먼저 인형을 언급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대공은 위스를 물끄러미 보더니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바라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위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누가 그딴 걸 조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