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스 메리드 트러블 (31)화 (31/70)

16673017844531.jpg

#31

-디저트를 사 오려고 했는데 사실 못 구했습니다. 제 앞에서 떨어져서요.

위스가 소맷자락을 쥐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영리하고…… 귀여운 분이지.”

“예?”

예센이 되물었다. 테오도어는 고개를 저었다.

위스가 그를 이용하기 위해 사랑스럽게 군다는 건 알고 있다.

그게 전부 통한다는 게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나 리엔델 왕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그의 부인은 고결하고 영리한 사람이다.

마법사는 두려운 존재였다. 그들을 이용해 피해 복구를 하겠다는 발상을 보통 사람이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마법사 앞에 서는 것만으로 평범한 사람은 다리가 풀릴 것이다. 마법사가 주는 이상한 위압감은 제대로 된 정신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위스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사들의 약속을 이용해 식량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제약을 알고 있더라도 그랬다. 자신을 당장 죽일 수 있는 존재가 무언가를 약속하게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이던가?

골렘을 상대하는 법을 안대도, 약한 몸으로 테오도어를 따라올 생각을 했을 때와 같았다.

-저런 분이 계셨는데 왕국 재정이 이 꼴 난 게 신기한데요.

예센이 감탄하며 하던 말이 떠올랐다.

테오도어는 위스가 자신과 결혼해야 했던 두 번째 이유를 깨달았다. 오메가 왕자에게 주어지는 권한은 많지 않다.

위스가 알파였다면 상황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의 도피’ 따위의 근거 없는 헛소문이 퍼질 만큼, 이 나라는 후계자인 오메가 왕자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았다.

위스는 자신에게 어떤 생각이 있더라도 제대로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테오도어와 결혼해, 왕국의 차기 주인이 될 테오도어의 권한을 앞에 내세우기 전까지는.

‘그 남자를 앞세우려 했을까.’

테오도어는 모어 백작을 떠올렸다. 수도 방위군을 통솔하던 젊은 기사는 위스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의 신분과 재산, 업무까지 위스를 보좌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위스는 무뚝뚝한 편이었다. 사교에는 연이 없을 것 같은 태도인데도 사람을 잘 홀렸다.

‘또 무슨 생각이실까.’

테오도어를 떼어 놓고 어디를 다녀온 걸까.

뭐 아마 왕국을 위한 뭔가를 했겠지만…….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왕자궁에 도착했다. 그리고 위화감을 느꼈다.

바람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느낌.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직감이었다.

그건 왕자궁의 중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마법!’

테오도어는 더 생각할 여지도 없이 달려 나갔다. 그의 검에 푸른 막이 씌워지더니 굳게 잠겨 있던 문을 갈겼다.

문이 산산조각 났다.

“위스미아!”

테오도어가 목격한 건 피를 흘리고 있는 위스였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건, 테오도어가 잊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골렘을 조종한 인형이다.

테오도어가 파괴한 인형은 스스로 복구되어 다시 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판단은 빨랐다.

테오도어는 인형을 벽으로 날려 버렸다. 이어 인형의 목을 쥐고 손에 힘을 주었다. 인형의 목에 균열이 일더니 바스러졌다.

⚜ ⚜ ⚜

그 꼴을 위스도 봤다.

“미쳤어?”

위스는 인형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겁니까? 비키십시오!”

“너나 비켜라! 증거품을 훼손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증거품?”

“하나밖에 없는 증거다! 여기서 뭐가 나올 줄 알고?”

그런데 테오도어 이 미친놈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목에서 시작된 균열이 인형의 몸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저게 전하를 해쳤습니다.”

“난 멀쩡해!”

위스는 테오도어의 손을 잡았다. 힘을 주어도 놓지 않자 손톱을 세워 손등을 긁었다.

테오도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키십시오. 아니면 비키도록 강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놈이나 손을 놔!”

테오도어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위스의 손을 떼어 내고 휙 방 한가운데로 밀어놓았다.

위스는 인형처럼 뚝딱 떨어졌다.

“……!”

황당해서 입도 다물어지지 않았다.

위스는 타고나길 독종이었다. 어릴 적부터 시비가 자주 붙어서 싸움이라면 익숙했다.

개싸움부터 마법을 이용한 격투까지 안 겪어 본 싸움이 없다. 그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쉽게 다루어진 일이 없다.

그 와중에도 귀중한 인형은 부서지고 있었다!

위스는 눈이 돌아서 테오도어에게 달라붙었다. 뒤에서 어깨를 잡고 매달린 채 무릎 뒤를 강한 힘으로 밟았다. 테오도어는 순간 균형을 잃고 주저앉았다.

‘방심을 해?’

위스미아의 외모는 딱 한 군데 쓸모 있었다. 상대가 전혀 경계하지 않게 하는 데는 이만한 얼굴이 없다.

‘넌 뒈졌다.’

위스는 테오도어를 깔고 앉은 채 응징하려 했다. 그러나 치켜든 주먹은 테오도어에게 붙잡혔다.

테오도어의 움직임을 눈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힘은 말할 것도 없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하십시오.”

“너……!”

테오도어는 위스의 두 팔을 모아 한 손아귀 안에 쥐었다. 그런데도 팔을 꼼짝할 수 없다는 데 위스는 충격받았다.

무력하게, 정말 어린애처럼 대해지고 있다.

“이…….”

“그만…….”

테오도어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열이 너무 올라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위스는 몸을 들썩이며 저항했으나 빠져나올 수 없었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피가 빠져나간 머리는 어지러워서, 자신이 깔고 앉은 엉덩이 아래가 단단해지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깨닫지 못했다.

“전하, 이제 그만…….”

완전히 우위를 점한 자세에서도 상대를 압도할 수 없다. 오히려 무력해진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마법을 써도…….’

삶에서 처음으로 만난 압도적인 강자가 그를 강제하고 있다.

위스는 이를 악물었다.

‘못 이겨.’

게다가 피를 너무 흘려서…….

순간 위스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전하!”

테오도어가 그의 몸을 받아,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일은 없었다.

위스는 마지막 힘을 짜냈다. 둘은 바닥에서 몇 바퀴를 뒹굴었다. 승자는 위스였다. 테오도어를 깔아뭉갠 꼴이 됐으나 더 응징할 기운은 남지 않았다.

머리는 흔들리고 구역질이 났다.

테오도어가 멱살을 잡은 위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

“그만하십시오. ……신관을 부르겠습니다.”

“약속해. 인형을 부수지 않겠다고…….”

“후…….”

테오도어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얌전히 신관에게 치료받겠다고 약속하십시오. 그럼 저도 약속하겠습니다.”

“약속했어…….”

테오도어가 내건 조건은 들리지도 않았다.

위스는 그러고 기절했다.

테오도어는 마법사가 아니며, 그에게 약속이 강제력을 띠지 않는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테오도어가 약속을 어길 리 없으니까.

⚜ ⚜ ⚜

열이 끓었다. 위스는 자신이 기절했음을 인지했다. 누군가 그를 침상 위에 옮겨 놓았다.

‘왜 다쳤더라.’

생각났다. 옆구리가 뚫렸다.

창이 정확히 위스의 몸을 찔렀다. 피를 너무 흘려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와중에도 위스는 전장을 이탈하지 않았다.

누군가 위스에게 후방으로 가셔야 한다고 말했으나, 위스는 듣지 않았다.

마법으로 상처를 막고 그곳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아군의 수가 적은 전장이다. 위스가 이탈하면 적의 사기가 오른다.

땡볕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 빛이 통증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위스가 아득함과 싸우고 있는 동안 그의 기사들은 승리를 가져왔다.

누군가 위스의 열을 식혀 주고 있었다. 미지근한 수건이 이마 위에서 떨어지고, 찬 수건으로 바뀌어 땀에 젖은 얼굴과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위스는 입을 열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이 약한 꼴을 누군가 보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저입니다, 폐하.”

부관 테오가 말했다.

“나가라. 멍청한 놈이…….”

“제가 꼴 보기 싫어지셨습니까?”

“그래. 보기 싫다. 네 몸이나 추슬러……. 멍청하게, 뛰어들 데 아닐 데도 구분 못 하고선…….”

그 창은 위스의 심장을 노렸다. 테오가 몸으로 가로막지 않았다면 옆구리가 찔리는 정도로 그칠 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위스보다 심하게 다친 놈이 여기서 뭘 하는 건가.

“꺼져. 보기도 싫다.”

“정말 갈까요.”

“넌 빈말도 모르느냐…….”

“하하…….”

가물가물한 시야로 테오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의 반을 가린 가면이 눈에 들어왔다. 화상을 입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착용한 물건이다.

다친 와중에도 저걸 얼굴에서 떼어 놓지 않은 이유를 위스는 알고 있었다. 그가 화상을 입은 테오의 얼굴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신관을 불러……. 네 몸부터 추슬러라. 아픈 놈이 눕지도 않고 왜 그러고 앉아 있어……. 네가 아끼질 않으니 그 몸이 남아나느냐?”

“전하께서 깨어나시면 누우려 했습니다.”

“헛소리 말고 이리 와. 넓은 침대 두고 뭐 하느냐? 누워 있어.”

환자가 팔을 쥐고 끌어당기니 테오는 하는 수 없이 누웠다. 위스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 나는구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이럴 수 있는 건 좋았지. 잔소리 많은 노인들도 없었고……. 제레미도 그때는 귀여웠는데.”

테오는 대답이 없었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그의 목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저는 옛날이 더 좋았던 듯합니다, 폐하.”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