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테오도어는 한술 더 떴다.
“인형을 그렇게 이용하실 생각이라면 조종법을 모르는 편이 낫겠습니다.”
“……물론 건전하게 이용할 방안도 생각해 뒀습니다. 작물과 성벽에 마법이나 걸라고 하죠.”
“좋군요.”
‘뭐가 좋냐.’
위스는 열이 더 오르는 듯했다. 입맛이 떨어져서 찻잔을 내려놓자, 테오도어가 말했다.
“쓰다고 그만 드시면 안 됩니다. 정 싫으시면 꿀을 넣어 드릴 테니까요.”
‘X발!’
위스는 차를 다 마시고 쾅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침대에 누워 고치처럼 만들어 놓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자, 테오도어는 잘했다는 듯 이불을 여며 줬다.
미칠 노릇이었다.
예센이 보고를 이어 갔다.
“다음은 합자 상단에 관해서입니다. ……다음에 보고할까요?”
“아니. 부인께서는 듣고 계시다.”
테오도어가 위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귀를 열고 있던 위스는 그 말에 눈을 감았다.
왜 어린애처럼 구는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실제로 그는 자기 의견이 관철되지 않은 경험이 드물었다. 노예 시절 이후로는 거의 처음인 듯했다.
“상인들은 시간이 금이라 상당히 초조해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큼. 서머 왕실 상단에서 합자할 만한 자금이 있는지도 의구심을 갖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돈은 또 다른 귀족들에게 얻어 낼 생각이신 듯한데.”
테오도어가 위스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위스는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맞습니까?”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고지식한 놈들이 이런 양아치 같은 발상을 하긴 쉽지 않았다. 위스가 약간 감탄하며 묻자 테오도어가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효율적인 분이시니, 한 가지 일로 한 가지 이득만 생각하시진 않으리라 짐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위스라면 양아치 짓을 하리라고 예상했다는 뜻이다.
위스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 위에 얹어져 있는 테오도어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X발!’
“그만 웃으시죠.”
위스가 이불을 열었다. 테오도어는 웃는 얼굴을 슬쩍 돌렸다.
“얼굴 보여 주시니 좋군요. 실무자는 어떻게 할까요.”
“왕실 상단에서 일하는 놈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십시오.”
“괜찮으십니까? 믿을 만한 사람들 같지는 않던데요.”
예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거기까지 조사했나.’
위스는 뭘 미끼로 걸면 예센을 빼내올 수 있을까 고민했다.
“괜찮습니다. 걔네가 일할 것도 아니고.”
“……?”
위스는 상업은 전혀 몰랐으나, 아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성공하는 놈들이 성공한다는 사실이다.
피넥 남작을 비롯해, 위스가 접근한 귀족들은 서류 너머로도 알 수 있는 상재를 가진 자들이었다.
“상단 운영하는 귀족들이 알아서 일할 겁니다. 애초에 그러라고 붙잡고 늘어진 거니까요.”
“저, 전하. 왕실 상단의 실무자들이 일을 안 한대도, 문제를 일으킬 수는 있습니다.”
예센이 지적했다.
실무자들이 횡령이나 비리를 일으키면 어쩌느냐는 말이었다.
“그러라고 해.”
“예?”
“그놈들 상행 다녀오면 감사 들어갈 거니까. 익명의 내부자 고발이 있어 조사 들어간다고 하면 명분도 좋군. 상행 직후라 대비도 못 하겠지. 이참에 그놈들 과거 비리까지 싹 털면 되겠군.”
“전하…….”
예센은 감동해서 두 손을 모았다.
테오도어가 정리했다.
“남은 건 상행 성공뿐이겠군요. 전하께서 눈여겨보신 이들이니 사업 자체는 훌륭하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문제는 상단이 이동할 지역이군요.”
위스는 사업 내용 따위는 살펴보지 않았으나 잠자코 있었다. 어차피 그의 돈으로 진행되는 사업도 아니다.
사업으로 얻을 이익도 이미 충분했다. 전도유망한 귀족들과 사업적인 연결 고리를 만들고, 왕실 상단 내부의 고름을 짜내게 되지 않았는가?
“예. 피넥 남작도 하이엔 산맥을 어떻게 지나가야 할지 고민이 많은 듯했습니다. 사실 남작은 투자금보다 호위 쪽이 훨씬 걱정인 것 같던데요.”
예센이 보고했다.
보통 왕실 상단에서 합자하는 사업이라면 호위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는 않는다. 어지간한 도적이라면 왕실 상단의 깃발만 봐도 도망칠 테니까.
그러나 이 경우 상단의 뒷배가 되는 왕실이 서머라는 게 문제였다.
‘겁을 먹을 리 있나.’
다 털리고 싶지 않다면 호위라도 보강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서머에는 가용 병력이 없었다.
위스는 이제 한심하지도 않았다.
서머가 빈껍데기이며 모든 면에서 엉망이라는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가?
‘빌어먹을 제레미…….’
그때 테오도어가 물었다.
“합자 상단에 투자 비율을 낮추고 병력을 확충하는 쪽으로 협력해도 되겠습니까?”
“……예?”
“투자금을 아낄 수도 있을 듯해서요. 피넥 남작 쪽은 병력 지원을 더 기꺼워할 테니, 오히려 감사를 받으며 협상에 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병사를 갑자기 어디서 구합니까?”
“전쟁이 끝나 일자리를 잃은 용병들이 다수니 금방 구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와 일해 본 자들이라면 모집에 쉽게 응할 듯한데요.”
테오도어는 으스대지도 않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놈 무패의 기사였지.’
용병들이 고민 없이 모집에 응할 만도 했다.
용병 입장에서도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데 보수를 떼일 걱정도 없는 일자리 찾기는 쉽지 않았다.
“좋군요.”
위스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갑자기 테오도어가 행동을 멈추고 위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
“입 맞춰도 될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설명했다.
위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슨 얘길……!”
“예. 이렇게 화내실 듯하여.”
위스는 말 대신 베개를 들어 테오도어의 배를 쳤다. 테오도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화내지 마십시오. 열이 오릅니다.”
“화낼 만한 짓을 해 놓고 뭐라는 소리냐?”
“음, 역시…….”
휘두르던 베개가 잡혔다.
“반말이 좋군요.”
“뭐라?”
그제야 위스는 자신이 또 반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아차 싶지도 않았다.
“다 나으면 맞아 드리겠습니다. 베개 놓아 드릴 테니 지금은 쉬십시오.”
이 새끼가 지금 누굴 봐준다는 건가?
그러나 객관적으로 테오도어가 봐주는 게 맞았다. 위스는 이 몸을 하루빨리 근육질로 개조하고 싶었다.
‘빌어먹을 위스미아.’
테오도어는 위스가 쥐고 있는 베개를 자기 것처럼 가져갔다. 위스는 몸이 답삭 들려서 베개를 베고 눕게 되었다.
테오도어가 위스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열은 옮기면 낫는다던데요.”
“……!”
위스의 입에서 형용할 수 없는 소리가 나오려다 막혔다. 테오도어의 입술이 가로막았다.
“음…….”
“……다음에 세 대 더 때리십시오.”
테오도어가 붉어진 얼굴을 떼어 내더니 말했다.
“고작 세 대?”
위스는 이를 갈았다.
그러다 문 앞에 서 있던 호위와 눈이 마주쳤다.
‘우와.’
호위는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위스를 보고 입 모양으로 감탄했다.
‘뒈지고 싶으면 계속 해라.’
위스는 눈으로 경고했다.
“으흠. 으흠. 제가 일이 바쁜데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저는 이만 나가 봐야…….”
예센은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나갔다. 테오도어도 뒤따라 일어났다.
“밤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위스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추는 건 잊지 않았다.
“…….”
문이 닫히자, 위스는 목을 꺾었다.
“이리 와.”
“왜 이러십니까, 전하. 식사를 하고 싶으셨지요? 제가 그럴 줄 알고 이렇게 수프를 가져왔습니다. 오는 길에 먹기 딱 좋게 식었으니…… 아야! 아, 전하!”
“주인의 곤경을 비웃어?”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아야! 곤경도 아니시던데요. 아니 부군 되시는 분께서 애정 표현도 충만하신데 왜 저한테 화풀이를…….”
“이리 안 오느냐?”
“악!”
잠깐의 소동 끝에 위스는 호위를 꿇어앉혀 놓고 죽을 떠먹었다. 호위가 이마를 문지르며 볼멘소리를 냈다.
“왜 저한테 화풀이십니까? 제가 전하를 가둔 것도 아닌데요.”
“네가 참된 종자라면 거기서 웃고 있을 게 아니라 주인이 나갈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고 보니 네놈은 대공에게 협조해 주인 가는 길을 막기까지 했지?”
위스가 스푼을 내려놓자 호위는 깜짝 놀랐다.
“아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전하께서 정말 싫어하셨으면 저야 목숨이라도 걸고 탈출을 돕지 않았겠습니까? 두 분 분위기 좋으시던데요. 전하께서도 말로만 싫다고 하시고, 알콩달콩하신 게…….”
“네가 목숨이 두 개로구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요. 전 바로 전하께서 나간다고 난리이실 줄 알았는데 얌전히 잡혀 계시지 않습니까? 저야 좋기는 하지만, 우리 전하께서 그런 성격이 아니신데. 아, 그렇구나. 전하께 다른 생각이 있으시구나. 제가 또 딱 알아채지 않았겠습니까?”
위스는 나불거리는 호위의 입을 가만히 쳐다봤다.
호위가 움츠러들었다.
“……아니십니까? 진짜 갇혀 계신 거였습니까? 아니…… 뭐 나쁘진 않은데요. 원래 결혼하면 오메가는 알파에게 순종하는 것이 미덕 아닙니까. 전하께서 잘 따라 주시니 대공도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닥쳐.”
위스는 잠옷을 벗어 던지고 셔츠를 꿰어 입었다.
테오도어가 협조적인 것과 별개로 위스를 가두고 통제한 것도 사실이었다.
위스가 명령에 고분고분 따른 적이 있었던가? 노예이던 시절에도 그러진 않았다.
그리고 테오도어는 위스의 주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