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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 메리드 트러블 (40)화 (4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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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위스는 눈을 떴다.

거울에 비친 그는 앳된 소년이 아니었다.

“미친놈. 꿈에 나오고 난리냐. 배신은 네가 했잖아.”

뭐 좋은 기억이라고 자꾸 떠오른단 말인가?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스스로가 미친 사람처럼 느껴졌다.

‘너무 붙어 있었나.’

난데없이 300년 후로 떨어졌더니, 나라는 망해 가고 주변에는 얼빠진 놈들뿐이다.

그 와중에 쓸 만한 놈을 만나 좀 붙어 있었더니 뇌가 착오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놈이 아니야.’

위스는 뺨을 한 대 치고 문을 봤다. 호위가 서 있었다.

“대낮부터 왜 자해를 하고 그러세요, 전하. 술도 안 드신 것 같은데요.”

“넌 또 감시하러 왔느냐?”

생각해 보니 저 호위 놈의 행보가 괘씸했다. 처음 눈떴을 때는 제레미아 왕에게 알랑거리더니 이제는 테오도어의 말을 슬슬 듣고 있다.

“대공이 뭐라더냐? 또 나가지 못하게 막으라던?”

“아무 말 없으셨는데요. 전하께서 늦게까지 소식이 없으시기에 뵈러 온 겁니다. 배를 채우는데 어쩐지 빵이 술술 넘어가지 않는다 싶더라니, 며칠째 전하께 한 대도 안 맞았지 뭡니까. 아야!”

“내 추측이 맞았구나. 네가 맞고 싶어 그러는 거였어.”

“아니, 이런 거 말고요! 전하 수련에 어울려 드린 지 한참 됐다는 소리였습니다. 제 충심을 이렇게 곡해하시다니.”

호위는 억울하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왜 또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저한테 화풀이 좀 그만하십시오.”

“기분이 안 좋긴 뭐가 안 좋으냐?”

“그러게 말입니다. 하시는 일 다 잘되고 계신데요.”

“잘되긴 뭐가 잘돼?”

“아, 화풀이하는 거 맞으시잖습니까!”

한 대 더 맞은 호위가 분통이 터진다는 듯 말했다.

‘이놈은 매를 버는 취미가 있나.’

그러나 호위 말이 맞을 때도 있었다.

위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인이 호위도 아니었다.

위스는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았다. 삐딱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자, 호위는 눈치 빠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생각해 봐라. 대공이 내게 못 보일 꼴이 뭐가 있겠느냐?”

“못 보일 꼴이요? 그게 뭔데요.”

“내가 물었다.”

“아, 그러니까요. 너무 많아서 짐작이 안 된다는 소리였습니다.”

호위가 재빨리 변명했다.

“너무 많아?”

예상과 다른 말이다.

테오도어는 뒤가 구릴 법한 인물이 아니다. 위스와 달리 검은 속내를 품을 성정도 아니라, 매번 제 형에게 당하고 사는 인물이 아닌가?

“그분이라고 비밀이 없으시겠습니까?”

호위는 오히려 어리둥절하다는 투였다.

“전하께서 자기 이용하려고 결혼한 것도 다 아신다면서요? 저는 참 누가 시켜 줘도 왕족은 못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다들 그렇게 생각이 많으신지…….”

“간단히 해라.”

“아니 뭐……. 대공도 속셈이 다 있고 이용할 거리가 있어서 행동하는 걸 텐데, 무슨 관계라고 전하께 자기 속을 다 터놓고 보여 주겠습니까?”

그럴듯한 소리다. 상대가 테오도어가 아니라면.

위스는 코웃음쳤다,

“그놈 성격에 목적이야 뻔하지. 팔라틴으로 안 돌아가고 눌러살 곳이 필요하지 않았겠느냐? 제 형과 척지지 않고 살려면 평생 외방을 돌아야 하는데, 정착할 데 없이 전쟁터나 돌다가 죽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니까.”

죽고 싶었다면 팔라틴 왕이 습격할 때 알아서 목을 내줬을 것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건 모든 생물의 본성이다. 더 안전하게,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위스는 그 야망 없는 남자가 뭘 원하고 결혼했는지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 자신의 안전이다.

자신을 보호할, 믿을 만한 영토와 배우자다.

그 외에 위스에게 바랄 게 뭐가 더 있단 말인가?

테오도어가 결혼 전 믿음을 운운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신뢰는 이미 깨졌지만…….’

위스는 인상을 썼다.

“그런데 그거랑 팔라틴에서 보일 ‘못 보일 꼴’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호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네요.”

“……?”

“사생활 문제 아니겠습니까?”

“……!”

‘아니지.’

위스는 동요하려는 자신을 눌렀다.

그는 테오도어 같은 유형을 안다. 유능하고 인망이 있으며 충성심이 깊고, 사생활에도 문제가 없는…….

-그런데 왜 결혼을 안 했어? 신부 집안에서 반대하나? 신분이 왕녀라도 상대가 너라면 환영할 텐데.

-이미 결혼한 분이어서요.

‘잠깐.’

“아카젤 대공에게 연인이 있다는 얘기 들어 보았느냐?”

“어…… 아니요.”

“넌 왜 아는 게 없느냐?”

“저기, 전하. 모든 왕족의 연애가 전하처럼 요란하지는 않습니다. 캑, 멱살은 잡지 마시고요.”

호위가 손을 내저었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전하 같은…… 그, 뭐냐, 낭만주의자가 귀족 사회에서 흔치 않잖습니까?”

위스는 떨떠름하게 멱살을 놓았다.

‘연애 문제였나.’

“그놈은 흔치 않은 쪽일걸.”

“예? 하긴. 그런 것 같긴 했습니다. 아무리 전하께서 미모가 출중하셔도, 소문을 무릅쓰고 결혼하시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위스는 호위가 지껄이는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예전 연인이란 말이지.”

“예?”

어쩌면 예전이 아닐지도 모른다.

팔라틴 왕의 선전 포고는 갑작스러웠다. 테오도어도 대비 없이 끌려나온 처지라면, 그 연애가 현재 진행형일 줄 누가 안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테오도어는 부관의 잡담을 가로막았다. ‘대공께서 얼마나 인기가 많으신지’가 요지였는데, 위스가 듣지 못하게 할 필요도 없는 잡스러운 얘기였다.

자기 가정사는 제 입으로 털어놓던 놈이다. 그런 얘기를 막을 필요가 어디 있었나?

‘이유가 저거라면 들어맞는다.’

위스는 아주 불쾌해졌다.

⚜ ⚜ ⚜

시저 남작은 수정구 앞에 섰다. 팔라틴 왕은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폐하.”

남작은 황송하다는 듯 몸을 낮췄다. 수정구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대략적인 표정 정도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폐하의 심복인 제가 직접 찾아서 명령한 일이 아닙니까? 아카젤 대공은 저항하는 듯했으나, 결국 폐하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위스미아 왕자의 몸이 낫는 즉시 팔라틴으로 가 폐하께 인사드리기로 약조를 받았습니다.”

남작은 자랑스럽게 말했으나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게 언제냐?”

“예? 위스미아 왕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그자가 언제 건강해질 줄 아느냐? 병을 핑계로 천 년을 눌러앉아 있겠다면 너는 그러라고 할 셈이냐? 그따위 것을 약조라고 받아?”

팔라틴 왕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시저 남작은 아차 싶었다.

남작은 기사 작위를 받아 중앙 사교계에 편입한 뒤, 바로 팔라틴 왕 뒤에 줄을 선 몸이었다.

그는 왕이 명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 가운데는 제대로 된 기사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간에선 그를 명예를 모르는 개라고 비웃었다. 권력에 스스로를 팔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저 남작이 팔라틴 왕의 심복이 된 이유는 권력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권력의 맛이 달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

하지만 그게 아카젤 대공을 깔아 볼 수 있는 자리보다 더 가치 있겠는가?

팔라틴 왕의 심부름꾼인 그는 아카젤 대공에게 명령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가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왕의 명령을 대공에게 전달할 뿐이다.

그러나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아카젤 대공은 복종했고, 그 모습은 시저 남작에게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십 대 애송이 시절부터 이 대공을 질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대륙 제일의 기사라고.’

왕국 제일의 기사로 불리던 젊은 아카젤 대공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 대륙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아무도 바라지 않던 결과였다.

적어도 시저 남작과 팔라틴 왕이 바라던 결과는 아니었다.

“시일을 특정하겠습니다. 대공은 출발을 늦출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명령도 자의로 곡해하려 드는 놈을 네가 무슨 수로 강제하겠느냐?”

“대공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위스미아 왕자를 움직일 겁니다.”

시저 남작은 침을 삼켰다.

“네가 나를 웃기는구나. 서머의 왕자 따위를 움직여서 뭐 어쩌겠다는 것이냐?”

팔라틴 왕이 실소했다.

“폐하, 위스미아 왕자는 소문대로의 미모였습니다. 보통내기가 아니더군요.”

“……그래서?”

“아카젤 대공이 왕자와 결혼하라는 명령에 순순히 따른 이유를 궁금해하시지 않았습니까?”

“왕자가 절세가인이기 때문이다? 내 왕성에 어릿광대가 필요 없겠구나. 네가 이리도 재치 있느니 말이다.”

남작의 등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아카젤 대공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외모 따위에 홀리는 자였다면 이미 오래전에 함정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교계에서 여지를 남긴 적이 없었다. 불능이라는 소문이 돌 지경이었다. 물론 그 소문은 그와 한 공간에서 생활하던 기사들에 의해 금방 불식됐지만…….

“왕자의 말 한 마디에 그 아카젤 대공이 검을 뽑았습니다!”

“뭐?”

“검을 겨누고, 제게 모욕을 사과하라 했습니다! 위스미아 왕자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말입니다!”

팔라틴 왕은 예민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럴 놈이 아니야. 네가 선을 넘었겠지.”

“전 왕자에게 ‘아카젤 대공과 결혼하다니 운이 좋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남작은 억울했다.

사실과 다른 말도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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