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아카젤 대공은 본래도 왕국 최고의 결혼 상대였으나, 최근 얻은 명성으로 대륙 최고를 논할 정도가 되었다.
그가 추남에 지금보다 나이가 스물은 더 먹었대도 그랬을 텐데, 그는 젊은 데다 미남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그에 비해 위스미아 왕자가 가진 건 서머의 후계자라는 위치와 상징성뿐이다.
문제는 그 상징성을 팔라틴 왕이 몹시 중요시하고 있다는 사실이지만.
“그 말에 검을 뽑았다고?”
“예에. 그렇다니까요. 위스미아 왕자가 보통내기가 아니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대공 뒤에 딱 달라붙어서 충동질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손끝으로 남자를 부리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닙니다.”
“그놈이 오메가에게 눈이 돌아갔다고.”
왕이 중얼거렸다.
시저 남작은 변명을 위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이건 아무 말이 아니었다.
“예. 틀림없습니다. 위스미아 왕자에게 확답을 받겠습니다. 감정적이고 유치한 성정인 듯했으니 움직이기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왕은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놈이……?”
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연결이 끊겼다.
시저 남작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작위를 받은 이래 아카젤 대공이 그를 존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남작이 왕의 밑으로 들어가 그의 명령을 하달했기 때문이다.
왕의 심부름꾼을 왕에게 하는 것과 같이 존중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남작이 어떤 거만한 태도를 보여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대공은, 왕의 앞에서만은 그가 내뱉는 말도 안 되는 신경질과 모욕을 받아넘겼다.
그 모습을 종자 시절 목격했을 때, 남작은 왕의 신하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왕이 총애해 곁에 두는 자가 되어서 대공이 머리 숙이는 모습을 눈앞에서 볼 것이다.
아카젤 대공이 무엇이 그리도 대단한가? 왕국의 시초 테오 경을 연상시킨다는 뛰어난 검술 실력이나 자비로운 성품도 그를 왕좌에 올리지는 못했다.
그가 정말 테오 경에 견줄 만한 인물이라면, 리엔델 왕은 이미 목이 떨어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테오 경은 부당한 지시에 항명해 팔라틴의 편에 섰다.
기사의 충심은 더 바른 곳에 있다는 그의 말은 후대 기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팔라틴에서 지금도 기사를 최고로 치는 건 그의 영향이었다.
기질이 허약해 기사로서 자질이 없는 리엔델은 그래서 불완전한 왕인 것이다.
‘상관없다. 그놈은 용기가 없어.’
왕을 치고 자리를 갈취해 낼 용기가 없다.
그와 같은 겁쟁이가 무슨 테오 경의 이름을 잇는가…….
시저 남작은 복도에 무릎 꿇어야 했던 기억을 억지로 지워 냈다. 그래, 그는 대공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다. 앞날을 위해 잠시 몸을 숙인 것이다.
“남작.”
“……대공!”
시저 남작은 소스라칠 뻔했다. 아카젤 대공이 문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이곳까지…….”
“부지런도 하군. 위스미아 전하께서 언제 회복하실지도 모르는데 폐하께 연락부터 드리다니.”
“제 충심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대공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전하께서 몸이 좋지 않아 걱정되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간병하며 한시도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도 아니실 텐데 너무한 처사셨습니다.”
남작은 평상심을 되찾고 꾸짖듯 말했다. 대공은 이 정도의 무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대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대공이 웃었다. 남작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있는 그가 대단한 장신에 거대한 체구를 가졌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무슨 말씀을…….”
“예전부터 날 곤란하게 만드는 일에는 열심이었지. 하지만 눈치는 빨랐던 걸로 기억하는데. 종자보다 못한 실력으로 왕의 측근을 자처하는 게, 보통 눈치로 되는 일이 아니잖아.”
대공은 남작의 어깨를 쥐었다. 가볍게 손에 힘을 주었을 뿐인데 남작은 뼈가 으스러지는 듯했다.
“으헉…….”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해야지. 내 앞에서 으스댈 특권을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제, 제가 무슨 잘못을…….”
“적당히 하라는 뜻이야. 왕의 명령서로 으스대는 건 그대의 권리지. 하지만 내 체면을 손상시키는 데까지 동의한 기억은 없군. 그대가 앉은 자리가 그럴 만한 힘은 없지.”
대공은 쥐었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리더니 남작을 빤히 봤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라 믿네.”
남작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시선을 피했다. 대공이 사라진 뒤에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이, 이…….”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가는 것도 몰랐다. 공포와 모욕감에 몸이 떨렸다…….
⚜ ⚜ ⚜
‘이만하면 됐나.’
테오도어는 시저 남작을 떠나며 생각했다.
비슷한 시기에 기사가 된 그들은, 종자 시절부터 서로 잘 맞지 않았다.
테오도어가 편하게 느끼기에는, 남작이 그에게 너무 관심이 많았다.
그 시절 테오도어에게 관심 많은 자들은 얼마든 있었으므로 그만하면 견뎌 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작이 가진 관심은 좋게 보기는 어려운 방향이었다.
‘피곤하군.’
시저 남작은 기억력이 비상해, 남들이라면 그냥 넘길 일도 잊지 않고 보복하는 면이 있었다. 위스가 그를 모욕했으니 남작은 무슨 수를 써서든 그 모욕을 돌려주려 할 것이다.
남작의 목표물이 되면 인생이 피곤해졌다. 테오도어에겐 익숙한 피로감이었으나, 위스가 견디기엔 좋지 않을 터였다.
위스는 남작이 아니라도 지고 있는 짐이 많았다. 테오도어는 위스가 쓸데없는 원한을 사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남작이 테오도어에게 가지고 있는 원한을 조금만 건드려 주면 됐으니까. 남작은 테오도어를 증오하느라 위스에 대해서는 잊을 터였다.
테오도어는 남은 업무를 처리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비협조적인 귀족들을 만나 협력을 얻어 내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테오도어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도 있었다.
-위스미아 전하께서는 순진하고 감정적인 분이 아니십니까? 누군가 옆에서 화를 부추긴 자가 있었을 겁니다. 괜한 감정에 저희를 이리 박대하시고, 후일 어찌 하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잘 다독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테오도어는 위스미아 왕자가 어째서 이렇게 무시당하는지 의아했다.
그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잠깐의 대화만으로 총기를 깨달을 수 있을 텐데, 귀족들은 귀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귀까지 갈 필요도 없다.
‘눈이 먼 건가.’
위스는 보는 순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부류의 사람이지 않은가. 테오도어는 그런 사람이 존재할 거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었으나, 위스를 만난 순간부터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그의 상상력은 빈약했다. 현실은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이야기 속의 비극보다 현실의 것이 언제나 더 강렬하다. 그건 사실감을 갖기 때문일 터였다.
살아 움직이는 위스는 테오도어가 지금껏 경험해 온 어떤 것보다 더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게 했다.
‘어려운 사람이다.’
독특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어디로 튈 줄 모르겠다.
위스가 인형 앞에서 또 각혈하는 모습을 보고 테오도어는 그래 본 적이 없을 만큼 분노했다.
그렇게 부탁했는데, 위스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테오도어는 위스의 배우자였다. 그에게는 위스를 걱정하고 보호할 권한이 있다.
위스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슴이 욱신거려서, 테오도어는 위스를 몰아붙였다.
위스가 정말로 싫어하면 화를 낼 수도 없을 것 같아, 그가 저항하지 못하게 팔을 붙들었다.
그런데 위스가 끙끙거렸다.
온몸이 뜨끈뜨끈해서 테오도어는 그가 품 안에서 녹아 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단 체향이 테오도어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붙드는 건지 밀어내는 건지도 알 수 없게, 작은 힘으로 테오도어의 가슴팍을 꼭 쥐고. 위스가 훌쩍였다.
-싫어……. 기분 좋은 거…….
-……기분 좋으십니까? 좋은데 왜 싫다고 하십니까?
-머리가…… 이상해져……. 싫……, 으응…….
-후…….
-다음부터 안 그럴 테니까…….
그러면서 위스는 깨물었던 손을 핥았다. 붉은 입술이 간지럽게 살결을 할짝이는데 테오도어는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위스가 필요할 때만 사랑스럽게 군다는 건 알고 있다.
한번 꼬이면 또 저렇게 못될 수가 없지 않은가.
-대공께 제 이름을 허락한 기억도 없군요.
-그게 무슨 꼴인지 전 보고 싶은데요.
궁인이 보고했다.
“위스미아 전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신관은?”
“이상 없다고 하십니다. 열도 내리고 몸 상태가 괜찮은 듯하십니다.”
테오도어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고민은 짧았다.
‘화를 풀어 드리자.’
언제나 더 절박한 쪽이 지지 않는가.
“어디에 계시는가? 궁에 계시나?”
“그게, 연무장에 나가셨다고…….”
‘정말 말 안 들으시는군.’
휴식을 취하라고 싸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밖에서 힘을 쓰고 있다. 망아지가 따로 없었다.
테오도어는 새벽부터 줄 서서 사 온 딸기 수플레 팬케이크 상자를 품에 안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단걸 선물하면 대화에는 응해 줄지도 모른다. 귀족들을 굴복시킨 이야기를 들려주면 마음을 풀지도 모르고.
연무장에 도착한 그는 눈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악, 전하! 항복! 항복이요!”
위스와 그 호위가 연무장 바닥에서 딱 달라붙어 엉켜 있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