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호위가 말했다.
“그런데요, 전하. 누가 전하를 만나 뵙고 싶어 하던데요.”
“누구?”
“피넥 남작이라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명하신 것을 하면 되느냐, 보여 주신 물건을 가져가도 되느냐고 물어보던데요. 아니면 왕성에 머물러야 하느냐고요. 또 뭐더라, 하여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습니다.”
피넥 남작에겐 보안 유지 마법을 걸어 놓았다. 그는 인형에 대해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뿐, 명령을 강제하진 않았다.
인형을 고치고 싶어 안달이 난 건 그 자신의 생각이라고 보아야 했다.
역시 그 인형은 걸작이었다. 장인과 마법사의 심장을 뛰게 하지 않는가?
“불러와.”
“예. 지금 갈까요?”
위스는 잠시 망설였다. 인형 옆에서 얼쩡거리다 테오도어에게 두 번이나 걸렸던 경험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니……. 그냥 말만 전해라.”
“말씀하십시오.”
위스는 펜을 들어 수식을 썼다. 그리고 종이를 접어 봉인했다.
수십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편지는 일정 영역에 도달하면 초대장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왜 그놈 말을 듣고 있는 거지.’
복잡한 짓을 하려니 위스는 기분이 영 껄끄러웠다.
이래서야 테오도어의 말을 따르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싸우면 못 이겨서다.’
열받는 이유지만 사실이었다.
‘또 민망한 짓을 당하고 침대에 처박힐 바에야 겉으로 따라 주는 게 낫지.’
어쨌든 피넥 남작에겐 허락이 필요했다. 위스의 공방과 ‘보물 창고’를 드나들 수 있는 열쇠가. 두 곳 모두 위스가 마법으로 출입을 통제해 놓았기 때문이다.
복원에 인형 원본이 필요하다.
‘그것만으로 불가능하지.’
피넥 남작의 발언은 자신만만했으나, 그 인형은 어린애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라 정교한 마도구였다.
설계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위스에겐 설계도가 있었다. ‘보물 창고’에 수없이 남아 있던 인형 원본과 함께.
‘그놈들은 발각된 걸 모르나?’
위스는 마법사들에 대해 의문을 가졌으나, 보물 창고를 되찾아가려는 시도는 아직까지 없었다.
애초에 그 안의 인형들은 다 옮겨 놓았지만.
“거기 적힌 데로 가서 참고 자료를 가져가라고 해. 몇 개 해체해도 된다고도 전하고.”
“예.”
호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잘도 대답했다.
“일 끝내면 연무장으로 와라.”
“예?”
“소화 안 된다며.”
“……아니요!”
“뭐가 아니야?”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제가 그때 하려던 말은 식사하다가도 전하를 떠올릴 만큼 제 충심이 깊다, 뭐 그런 거였습니다.”
“어. 나도 널 보면 빵이 안 넘어간다.”
“아악, 전하…….”
‘이 몸은 운동시켜야 한다.’
위스는 징징거리는 호위의 목덜미를 끌어다 밖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먼저 연무장을 뛰었다.
힘으로 누군가에게 져 본 경험이라니, 얼마 만의 일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것도 개인이 힘으로 위스를 강제하는 경험은 생소했다.
위스가 대단히 뛰어난 기사여서는 아니었다. 그는 기사로서도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누구와 겨루든 승리를 자신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자각이 뒤늦게 들었다.
위스가 어느 때고 자유로웠던 건, 그를 지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기사가 위스를 수호했다.
그 기사는 위스를 배신했다.
“전하, 목검 가져왔는데요.”
심부름을 마치고 호위가 돌아왔다.
“그거 놓고 이리 와.”
“예?”
“맨손으로 덤벼.”
“악! 저는 검이 좋은데요, 전하!”
호위가 되도 않게 주장했다.
“그럼 넌 들든가.”
“저만요? 그건 보기가 좀 그렇지 않나……. 으악?”
위스는 호위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그 위로 올라탔다. 체중으로 깔아뭉개자 호위는 일어서지 못했다. 목검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잠깐만요, 전하! 잠깐만요!”
“입 대신 몸을 쓰면 빠져나오지 않겠느냐?”
“팔을 꺾어 놓고 무슨 수로, 으어억…….”
‘이놈을 키운다고 그놈처럼 성장할 것도 아닌데.’
위스는 호위의 팔을 뒤로 꺾다가 허무해졌다.
그때 숨 막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호위가 몸부림을 쳐도 꼼짝 않던 위스의 몸이 번쩍 들렸다. 양 겨드랑이가 붙들려 두 다리가 허공에 떴다.
“……대공!”
“침실에 계셔 달라 했더니 여기서 호위와 뒹굴고 계시는군요.”
피부가 따끔거렸다. 위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페로몬이…….’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들고 있다.
페로몬에 자주 노출된 몸이 멋대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하고 다리가 떨렸다.
위스는 이런 반응을 원하지 않았다!
‘이 새끼가!’
“여기라 다행이지 않습니까? 침실에서 안 뒹군 걸 다행으로 여기시죠.”
위스는 테오도어를 떨쳐 내려고 했다. 그러나 팔꿈치로 배를 쳐도 어디 벽을 두드린 것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호위와 너무 친밀하시지 않습니까?”
‘저게 말인가?’
위스를 이를 악물었다.
“대공께서는 부관과 연애라도 하십니까? 하루 종일 붙어 계시던데요.”
“서운하셨군요. 전하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늘리겠습니다. 진작 말씀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말이 통하질 않는다.
테오도어의 체취 때문에 몸 자체가 거대한 심장이 된 것처럼 두근거리고, 그의 분노에 동조해 감정은 요동쳤다.
“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요. 뭘 하고 계셨습니까?”
“연무장에서 뭘 하겠습니까? 누구한테 잡혀서 또 어디 갇히지 않게 수련하고 있었습니다.”
“저 호위와요.”
“예.”
위스는 이를 악물었다.
테오도어는 위스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맞닿은 등으로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누구의 심장이 더 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검을 가르치는 거라면 제가 더 훌륭한 스승일 텐데요.”
“알 바입니까?”
테오도어가 한숨을 쉬었다.
“증명할까요.”
호위는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채고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반응 속도가 테오도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누가 전하께 더 적합한 스승일지 시험해 보고 싶네. 응해 주겠나?”
“대공께서 당연히 더 훌륭한 스승이시지 않겠습니까? 시험이라니요.”
호위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니. 이 경우 그대가 감독관이지. 전하께선 인정하지 않으실 테니, 자격 증명이 필요해. 그대가 수고해 주게.”
“이미 통과라니까요? 제 말씀 들어주시지도 않을 거면서 허락은 왜 구하십니까?”
호위는 우는소리를 하며 도망쳤다.
위스는 이마를 짚고 싶은 심정이었다.
‘목검이나 주워라.’
발에 걸리는 목검을 걷어차고 호위는 전속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테오도어에게 붙잡혔고, 그 즉시 허공을 반 바퀴 돌아 바닥에 떨어졌다.
퍽!
연무장 바닥에 작게 흙먼지가 일었다.
호위는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가 기절했는지 죽었는지는 알 바 아니었으나, 위스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런 놈을 왕자 호위라고 붙여 놓나.’
“맨손 격투는 제가 더 능한 듯합니다.”
“……그래 보입니다.”
“전하께서는 뼈대가 작고 근육이 없어, 타격기로는 상대에게 충격을 주기 어려울 겁니다.”
“근데요.”
“전 관절기에도 능숙한 편입니다.”
“…….”
위스는 홧홧한 이마를 손으로 문댔다. 한 방에 나가떨어진 호위는 아직 사지를 뻗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안 일어나냐.’
“어디 해 보시죠.”
말을 내뱉고, 위스는 바로 달려들었다.
호위가 붙잡힌 자세 그대로, 몸을 낮추고 팔을 내민 채였다.
붙잡히지 않으려면 테오도어는 몸을 빼거나 위스를 걷어차야 할 터였다.
‘걷어차진 않겠고.’
위스는 본능적으로 판단했다.
자세를 낮춰 위스를 역으로 넘기는 건…….
‘못 한다.’
연무장은 단단히 다져진 흙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스미아가 이 위에 메쳐지면, 어딘가 부러진다.
테오도어의 팔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가 빠졌다.
그 모습이 위스의 눈에 들어왔다.
쿵!
위스는 테오도어를 쓰러뜨렸다. 상체를 못 쓰게 다리로 엮고, 배 위에 걸터앉은 채 주먹을 치켜들었다.
기절한 척하던 호위도 눈을 뜨고 그 모습을 봤다.
마른 왕자가 제 체구의 두 배는 되는 기사를 깔아뭉개고 패기 직전이었다.
테오도어는 눈을 감았다. 고개를 꺾어 충격을 감쇄할 시도도 하지 않았다.
찰싹.
“……?”
그러나 대비하던 타격은 없었다.
위스는 테오도어의 뺨을 가볍게 건드리고 말았다.
엉덩이에 깔린 테오도어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위스 자신도, 오래 달린 사람처럼 숨이 가빴다. 페로몬이 날뛰고 피는 빠르게 돌았다.
위스가 성질을 냈다.
“어디까지 봐줄 생각입니까?”
“때리고 싶으신 것 같기에.”
테오도어가 눈을 떴다. 섬세한 속눈썹 아래로 푸른 눈이 위스를 응시했다.
‘진짜 이놈은 뭐지?’
위스는 종잡을 수 없었다.
“더 안 때리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테오도어가 미소 지었다. 성격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위스는 맥이 빠졌다.
‘누굴 쓰레기로 아나.’
“저항 없는 상대를 패는 취미 없습니다.”
위스가 멱살을 놓고 일어났다. 테오도어는 그의 다리 사이에 쓰러진 채 고개만 들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심장이 뛰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위스의 시야에 멀리 바닥을 구르고 있는 포장 상자가 들어왔다. 위스가 들어올 땐 없었으니 테오도어가 가져온 것이다.
‘뇌물인가.’
“갈까요, 팔라틴에.”
다리 사이에서 테오도어가 말했다.
위스는 어리둥절했다.
‘왜 갑자기?’
“전 전하를 이기는 법은 모르겠습니다.”
테오도어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웃었다.
위스는 어지러웠다.
페로몬이 발작하고 있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생각하는 데 방해됐다.
‘무슨 생각인지…….’
역시 위스미아의 몸은 쓸모라곤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