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테오도어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팔라틴 왕의 표정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새 잔을 받으면 될 것을 뭐 하는 짓이냐? 좀스럽게.”
“아. 위스미아 전하께서는 술을 못하십니다. 한 잔 마시면 취하셔서요.”
테오도어가 시원스레 말했다. 위스는 그의 입이 움직이고 그의 눈이 멀쩡히 깜빡이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왕이 인상을 썼다.
“그런 말 없던데.”
“수줍음이 많은 분이라 거절을 잘 못하시니까요. 제게 먼저 물어보셨으면 좋았을 것을요.”
“수줍음이 많아?”
방금 전까지 떠들던 사람은 위스미아 왕자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단 말인가? 왕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도 테오도어는 동요가 없었다.
“예. 지금도 폐하 앞이라 긴장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몸이 약한 분입니다. 너무 피로하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그만 가라는 소리다.
“부인을 어지간히 챙기는군.”
“누구 명이시라고요.”
테오도어는 왕의 명령으로 결혼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명대로 제 부인은 제가 챙기겠습니다. 폐하의 배려는 감사하나, 더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가 네 부인을 정말 아끼는구나.”
왕이 다시 말했다. 미심쩍다는 어조였다.
“예. 폐하의 은혜로 귀한 분과 맺어지게 되었으니, 귀하게 대접하고자 합니다.”
“……부부가 다정하니 보기 좋구나. 맺어 준 보람이 있군.”
“감사할 따름입니다.”
왕은 입술을 뒤틀더니 뒤돌아 사라졌다.
위스는 왕이 등을 보이자마자 테오도어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테오도어의 눈이 커졌다.
그의 양 뺨을 잡고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위스는 이상 반응을 찾았다. 그러나 누군가를 살피기에 연회장은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손목이 두근두근 뛰었다. 손에 힘을 주어, 위스는 테오도어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따라와.”
테오도어는 허수아비처럼 끌려왔다.
따라붙는 귀족들의 시선은 테라스 커튼을 치자 사라졌다.
“뱉어.”
“예?”
“당장 뱉으라고. 지금 삼킨 거.”
위스는 테오도어의 입에 엄지를 넣었다. 말랑한 혀가 손톱에 눌렸다.
만져 보지 않아도, 테오도어가 이미 술을 삼켰다는 건 알고 있었다. 뭘 입에 머금고서 그렇게 말을 지껄일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미친놈이, 왜 나서서…….’
“전하. 괜찮습니다.”
“뭐가. 기사는 독에 면역이 있느냐? 네가 너무도 대단해 무엇으로도 널 해칠 수 없어?”
“전 독에 내성이 있습니다.”
“뭐?”
그 말은 위스는 더욱 화나게 했다.
“이 거지 같은 걸 전에도 먹어 봤다고? 네가 먹은 게 그 독이야?”
위스는 이성을 발휘해 가까스로 고함을 치지 않을 수 있었다. 테오도어의 목젖이라도 눌러 먹은 걸 게워 내게 하려 했으나, 그에게 손목이 잡혔다.
“어릴 적에 음료를 잘못 마셔 크게 탈이 난 적 있습니다. 그 독이 너무 강해 다들 송장을 치는 줄 알았다는 모양입니다.”
테오도어가 웃었다. 위스는 속이 터지는 듯했다.
“팔라틴은 아주 재미있구나. 어린아이 팔이 닿는 곳에 독이 굴러다니더냐?”
“예. 그런 일도 일어나더군요. 부주의가 겹치면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사고였습니다.”
“그래서!”
위스가 발을 구르자 테오도어는 다시 웃었다. 그는 그대로 위스를 끌어안아 버렸다.
“그래서는요. 다들 죽을 거라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나 전하 앞에 있지 않습니까? 독을 먹은 아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직접 보고 몸으로 겪으시고도 모르십니까? 제게 아무런 이상이 없음은 전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닥쳐라. 희롱으로 넘어가려 들지 마.”
“희롱이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전하를 희롱합니까……. 전부터 제게 하는 단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 행동거지부터 바꿔! 그 새끼가 은혜도 모르고 내리는 독주를 처마시고 있느냐? 네가 가져가긴 왜 가져가!”
위스는 마셔도 죽지 않는다. 그렇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어는 아니지 않은가? 세상에 독이 제가 어릴 적에 먹은 그것만 있단 말인가?
독 따위가 마법사를 죽일 수는 없다. 마법사를 죽이는 건 기사다.
위스는 눈앞의 기사 놈 때문에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말없이 듣던 테오도어가 물었다.
“그럼 제가 전하께서 그걸 마시도록 두었어야 했습니까?”
“그래.”
“저는 독에 내성이 있고 전하께선 지금도 미열을 앓고 계신데, 막지 말았어야 했다고요.”
“네가 이제 말을 알아듣는구나.”
“싫습니다.”
“뭐?”
위스는 핏대가 설 지경이었다.
“전하께선 제 말을 듣지 않으시는데, 저는 전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테오도어!”
“말씀하십시오.”
“됐으니까 그만 떠들고 토하기나 해!”
위스가 테오도어의 멱살을 잡았다.
힘으로 강제할 수 있는 상대면 엎어 놓고 어떻게 해 보았겠으나, 테오도어는 근육질의 거구였다.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옷에 가려진 몸이 끔찍하게 단단했다.
“제가 그렇게 걱정되십니까?”
“너는 정말 미친놈이냐? 입 열지 말라고 천 번을 말하면 듣겠느냐?”
그러자 테오도어는 위스의 머리카락에서 무언가를 떼어 냈다. 꽃잎이었다.
위스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꽃잎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꽃잎을 던져 나무줄기에 박아 넣었다.
퍽!
나무가 바위를 맞은 것처럼 휘청이더니, 붙잡고 있던 이파리를 우수수 떨어뜨렸다.
“독으로는 저를 해칠 수 없습니다. 대륙 제일의 기사가 아닙니까? 한번 극복한 것에 다시 당하지는 않습니다.”
테오도어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위스는 그에게 감탄해야 하는지 질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조사를 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사실 네 윗대에는 인간이 아닌 생물의 핏줄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유감스럽지만, 제 윗대는 전부 가계도에 이름이 적혀 관리되어 온 터라 이생물이 끼어들 여지는 없는 듯합니다.”
“네가 자는 사이 마법사가 수상한 짓을 하고 가지 않았다는 법이 있느냐?”
테오도어는 위스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전하께서는 정말 마법을 좋아하시는군요. 하지만 마법사는 마탑에만 삽니다. 팔라틴에 있었던 기억이 없군요.”
위스는 인상을 쓰며 테오도어의 손을 치워 냈다.
“어린애 취급은 그만둬. 어린애는 너다…….”
“예. 그렇습니까?”
위스는 말없이 테오도어를 노려봤다. 테오도어가 어깨를 떨었다.
“아니요, 어린애를 걱정하시느라 전하께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저런 것도 가족이라고 매달리는 꼴이 어린애가 아니고 뭐냐. 저자가 아주 무도하구나. 악명을 두려워하지 않아. 서머의 왕족 따위 제거하고도 무마할 수 있다는 게 아니냐?”
연회장에서 독을 먹이고 하인의 짓으로 덮어씌우는 건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계략이었다.
아무도 하인을 진짜 범인으로 생각지 않는다 해도, 이미 죽어 버린 인간을 살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서머의 왕자가 그렇게까지 죽여야 할 인물인가?
“리엔델이 무슨 수로 무마하겠습니까?”
“방법이야 많아. 술을 따른 궁인에게 덮어씌워도 될 일이고.”
“아, 그 술 말씀인데……. 안에 든 게 독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테오도어는 턱을 문지르더니 위스를 힐끗 봤다.
“뭐라?”
이놈이 사람 바보처럼 날뛰게 만들어 놓고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화내지 마십시오, 전하. 그때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저도 다급해서…….”
“어.”
위스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테오도어는 난처한 얼굴로 좀 더 몸을 붙여왔다.
“리엔델은 좀 전통적인 유형의 전략가여서요.”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음모는 사람 없는 곳에서, 단둘이 있을 때 해치운다고 할까요. 예민한 성격이라 평판에 민감합니다.”
위스는 이놈의 사람 보는 눈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평판에 민감한 놈이 너를 박대해?”
“평판에 민감하니 그러는 거지요. 자신보다 더 명성 높은 신하를 좋아하는 군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귀족원을 피하는 것도 자신의 면전에 대고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라 그렇습니다. 누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가 정말 중요한 분이라고 할까요.”
말이 길어지고 있다.
“됐고 네가 먹은 거 독이야, 아니야?”
“모르겠습니다. 독 맛이 어떤지 기억을 못 하니까요.”
“술 맛은 알지 않느냐?”
“독 같은 맛 아닙니까? 쓰지 않습니까.”
이놈이 술을 모욕하는 건가?
위스는 깨달았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너 정말 미맹이 맞구나.”
테오도어의 표정이 떫어졌다.
“전하께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
잠깐의 기분 나쁜 눈빛 교환 끝에 위스는 입장을 정리했다. 지금 그가 할 일은 테오도어의 죽어 버린 입맛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다.
“그놈이 너를 동생으로 생각하는 것 같더냐? 그랬다면 남들 앞에서 동생을 모욕 주고 그 동생의 배우자를 협박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지. 귀족들이 조용해지는 걸 보았느냐? 내가 독이라도 삼키는 것처럼 굴더군.”
왕이 정말로 독살을 시도했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요는 그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형제라고 생각하는 건 너 하나뿐이다. 짝사랑은 그만둬. 네게 해롭다.”
이만하면 설득력 있는 연설이 아닌가 싶었는데, 테오도어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웃으며 위스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걱정해 주시는군요.”
위스는 이놈이 눈을 발바닥에 달고 다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