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章. 서녕호가의 막내 도련님
기주(己州) 서녕(西寧)호가는 대상 집안이다.
철과 소금을 다루지 않아서 만금방보다 못하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사정을 아는 이들은 그 말을 비웃었다.
소금과 철은 전매품이라 반드시 황제가 계시는 대도의 고위 귀족이나 고관과 한 배를 타야 했다. 그만큼 위험 부담이 상당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죄를 뒤집어쓰기 좋은 것이 전매상이었다.
서녕은 대도와 멀기 때문에 대도의 상황에 바로 대응하기 어려워 호가가 전매권을 가지게 되면 매우 쉽게 공격당할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호가는 전매권 대신 중앙 권력에서 한 발 떨어진 자유를 선택했다. 관과 무림과 적당한 사이를 유지하며 서녕 토박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세를 불리는 방법을 택했다.
전대 가주인 호익원이 혼란한 시대에 과감한 행보를 보여 가세를 크게 확장했고, 현 가주인 호상택은 내실을 튼튼히 다졌다. 호부에 불이 나면 금과 은이 흘러나와 강이 될 거란 얘기가 괜한 농이 아니라고 할 정도였다.
호현서는 현 가주인 호상택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호 대부인은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두었다. 그러나 약하게 태어난 넷째 아이는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난산과 아들의 사망으로 몸과 마음을 크게 다친 대부인은 오래도록 상심했다. 다행히 부부 사이가 좋았고, 세 명의 아이들도 부지런히 대부인의 곁을 지켰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부인은 생각지도 못한 임신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쌍둥이인 장남과 장녀의 나이가 열네 살 때의 일이었다.
네 번째 아이를 낳을 당시 생사가 오가는 난산이었던지라 모두들 기뻐하면서도 난색을 보였다. 평생의 비밀이지만 당시 호상택은 은밀하게 낙태를 할 수 있는지도 알아보았다. 그러나 출산과 낙태, 둘 중 무엇이 부인에게 더 나을지를 장담하지 못해 그만두었다. 아이를 낳겠다는 대부인의 의지도 강했다.
그렇게 모두의 기대와 불안 속에 아이는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무탈하게 태어났다. 진통 시간도 짧고 대부인도 심하게 기운 빼지 않아 숙련된 산파들도 놀랄 정도였다.
“모자 모두 평안합니다.”
산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가족들은 기다리던 말에 말릴 틈도 없이 우르르 산실에 들어갔다. 습한 공기와 피비린내, 약초 냄새가 어지러운 산실에 따뜻한 물로 막 목욕을 마친 아이가 포대에 싸여 있었다.
갓 태어나 피부가 아직 새빨간데도 작은 입을 오물거리다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 산실의 모두가 사랑에 빠졌다. 그만큼 어여쁜 아기였다.
늦게 본 아이라 대부인은 관례를 깨고 두 살이 될 때까지 본인의 방에서 같이 재웠다. 돌이켜 보면 이것이 예법 위에 막내 도련님이라는 사태의 시작이었다고, 오래 일한 사용인들이 말했다.
잘 웃고 순한 막내 도련님은 먹성도 좋아 곧 뽀얗고 토실하게 살이 올랐다.
태어난 지 백일이 되어 외부에 처음 얼굴을 알리는 날, 손님들의 첫인사는 모두 짠 것처럼 예쁘다는 말이 먼저였다. 백일 된 아기를 두고 미래의 사위로 점찍은 집들도 여럿이었다.
가족들의 애정 속에 호현서는 무럭무럭 자랐다.
현서의 위로 장성한 형이 둘이나 있었다. 집안은 번창했지만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압박은 전혀 없었다. 온 집 안을 들쑤시며 오늘은 어머니의 고방(庫房: 광)에서 금은으로 구슬치기를 하고, 내일은 할아버님의 고방에서 비단을 휘감고 낮잠을 자는 개구쟁이의 일과를 누렸다. 달콤하고 평화로운 나날들이 물처럼 흘러갔다.
세 살부터는 사촌 형인 호현진과 같이 지냈다. 형들과 누나가 예뻐한다지만 열 살 넘는 터울로 놀이 상대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현진과는 다섯 살 차이가 났고 둘은 곧 죽이 맞는 사이가 되었다. 현진은 현서를 데리고 온 호부를 헤집으며 하루가 짧으리만큼 놀았다. 세 살과 여덟 살의 도련님을 따라다니는데 기운 좋은 하인이 여럿 있어야 했다.
현서와 현진의 좋은 나날은 현진이 열한 살이 되어 외가인 석청담(析靑潭)에 정식 제자로 들어가면서 막을 내렸다.
현진과 헤어지기 싫어 떼를 썼지만, 현서는 석청담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떼써도 안 되는 일은 안 된다는 걸 배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현진이 없어도 현서의 하루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두어 시진(약 4시간) 되는 느긋한 수업이 끝나면 나무를 타고, 담장을 넘고, 외원을 돌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며 지냈다.
현서가 아홉 살인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집 안에서 소소한 연회가 있었다. 혼인한 누이도 집에 왔다. 누이와 큰형은 쌍둥이인데 혼인도 같은 해에 하고 자식도 같은 해에 보았다. 조카 둘은 세 살로 현서와 여섯 살 차이가 났다.
현서는 사촌 형인 현진과는 다섯 살 차이가 났지만 언제나 잘 놀았다. 그러니 조카들의 놀이 친구는 자신이 적격이었다. 현진 형이 가르쳐 주었던 재미있는 것들을 조카들에게도 꼭 가르쳐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화청(花厅)에 주연상이 차려지고 손님들로 떠들썩했다. 가희의 노랫소리와 금을 연주하는 소리가 사람들의 목소리와 한데 섞였다. 가족과 가까운 이웃만 온 연회라 아이들이 이리저리 우르르 놀러 다녀도 상관없었다.
정원에서 한 연싸움에서 대승한 현서는 기분 좋게 화청으로 돌아왔다. 은근슬쩍 배도 고팠다. 현서는 가족들의 자리로 조르르 뛰어갔다. 현서가 가면 누구든 옆에 자리를 만들어줄 터였다.
어른들끼리 인사를 다니는지라 자리가 비어 어수선했다. 곁의 시녀가 손 닦을 물을 준비하는 동안 냉큼 앞에 있던 떡을 입에 넣었다. 자리에 앉아 우물우물 떡을 먹고 있으니 가족들이 한둘씩 돌아왔다. 모두의 관심이 현서에게 쏠렸다. 볼이 상기되고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잘 놀다 온 모양이었다.
“손을 닦고 먹어야지.”
“탕을 좀 먹으렴. 단것부터 먹음 못 써. 고기도 먹어야지. 네가 좋아하는 생선찜을 가져오라고 할 테니 밥부터 먹으렴.”
“처남, 연싸움은 이겼나?”
매형이 선물로 주신 연이 정말 좋았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속이 이상했다. 작년 여름 상한 과자를 먹었을 때처럼.
“어머니, 이 떡…….”
떡이 상했다고 드시지 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하지 못했다. 현서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했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리나 했더니 그 후의 기억이 없었다.
호현서의 인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 순간이었다.
화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호가의 대응은 재빨랐다. 방문한 손님들의 입단속을 하고, 부를 수 있는 의원은 모두 불렀다.
호현서가 독을 먹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그 독이 무엇인지,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를 아는 의원이 없었다. 약재를 아낌없이 써 숨만 겨우 붙여놓은 상태였다. 고명한 의원을 수소문할 때 마침 의당 당주의 수제자인 소의선(小醫仙) 화정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호가는 급히 사람을 보내 소의선을 모셔 왔다.
희귀했지만 소의선이 아는 독이었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정순한 내공을 가진 무인을 한순간에 죽이는 독이라고 했다. 극소량이긴 해도 무공도 모르는 아홉 살짜리가 먹었으니 목숨을 이어 붙인 것이 기적이었다.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황천에 발을 담군 것을 빼 왔으니 현서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눈을 뜨는 데 석 달, 침상에서 일어나 혼자 움직이기까지 꼬박 일곱 달이 더 걸렸다. 화정은 목숨이 붙어 있어도 백치가 되거나 실명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화정의 의술이 뛰어난 덕인지 현서가 복이 많은 덕인지 그 정도로 나빠지진 않았다. 하늘이 도왔다고 기뻐했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른들의 사정이고 열두 살이 되어 투병 삼 년째에 접어든 현서는 서서히 지쳐 가고 있었다. 목숨은 건졌으나 상한 몸이 호전되는 것이 너무도 더뎠기 때문이었다.
키는 아홉 살 때와 같았고, 팔다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짝 말랐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수도, 양도 제한되어 있어 새 모이처럼 여러 번 나눠 먹어야 했다.
올해 여름은 더욱 좋지 않았다. 서녕은 더운 지방이 아닌데도 폭염과 열대야가 기승을 부렸다. 다른 이들은 방에 얼음을 두고 간 얼음을 넣은 녹두탕이나 산매탕을 마시며 더위를 달랬지만 현서에겐 그 모든 것들이 금지였다. 옆에서 수시로 부채를 부쳐 주거나, 휘장이며 이불 등을 전부 얇은 여름 천으로 바꾸는 게 고작이었다.
더위를 타면서 한 숟갈 먹은 죽이나 한 모금 마신 차까지 죄 토하게 되면서 목도 부었다. 그렇지 않아도 목은 독 때문에 가장 많이 다친 곳이었다. 목이 아프니 약을 마시는 것도 힘겨워졌다. 식욕은커녕 먹겠다는 의지부터 사라졌다.
현서는 침상에서 일어난 후로 건강을 위해 매일 정해진 만큼 움직였다. 뜰을 돌거나, 약욕을 하며 손발을 느리게 움직이거나, 붓을 쥐고 글을 쓰는 등 다양한 것들을 했다. 어떨 땐 밤새 팔다리에 경련이 일어나 잠을 못 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오늘은 그늘을 따라 회랑을 한 바퀴 돌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나 현서는 침상에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안 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히 움직였던 현서였다. 그러나 더위에 더딘 회복까지 겹치자 몸과 마음이 모두 쇠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우두머리 시녀인 명명은 두말하지 않았다.
서원의 시녀들은 의원들로부터 도련님의 치료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긴 치료를 요하니 조급해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오늘은 너무 덥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지금 주무시면 저녁에 못 주무세요. 약차를 좀 드시고 소인이 책을 읽어드리는 건 어떨까요?”
깨어나고 꼬박 일 년은 다친 성대의 치료 때문에 말을 못 했다. 그 후로 갓난아이처럼 한두 마디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올해 들어서부터였다.
목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다 약해졌던지라 시력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는 것도 좋지 않다고 만류되어 명명을 비롯해 글을 아는 이들이 돌아가며 읽어주었다.
소의선 화정은 현서를 치료하며 직접 다닌 지역의 풍물 얘기를 해주었다. 현서는 곧잘 관심을 가져 소의선이 떠난 이후에도 다양한 지역들을 궁금해 했다. 그날부터 현서의 방에는 지리서나 여행기 등이 쌓였다.
호부에는 상행을 다녀오는 이들이 언제나 있었으니 현서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현서의 상세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듣기에 적합하지 않아 그들의 구술담을 받아 적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들을 틈틈이 읽어주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책을 만든 건 현서의 형들이었다.
명명의 말에 현서는 서탁의 책을 힐긋 보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방의 창문만 열어줘. 큰 창까지 전부.”
큰 창까지 전부 열어두면 밖에서 곧장 안을 살펴볼 수 있다. 그 말은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다. 명명은 잠시 망설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소인은 부엌에 가서 간식을 좀 가져올게요. 콩국을 새로 만들었다고 기별이 왔거든요. 도련님이 좋아하시는 비파를 넣어드릴게요. 자리와 춘도가 밖에 있을 테니 필요하시면 바로 부르세요.”
현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감았다. 명명은 자리와 춘도에게 도련님을 잘 살피라 말하고 부엌이 아닌 대부인의 처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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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정(戌正: 저녁 8시)이 되자 대부인의 정방에 침침한 안색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호 대인과 호 대부인이 항탁(炕卓)을 사이에 두고 앉자 나머지 사람들도 의자에 앉았다. 시녀들이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진아, 배는 고프지 않니? 간식을 좀 먹으렴.”
“괜찮습니다. 백모님. 오는 길에 먹었습니다.”
“서아는 보고 왔고?”
“네, 하지만 자고 있어서 그냥 왔습니다.”
올해 열일곱 살이 된 호현진이 오랜만에 호부에 들렀다.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기 전에 현서부터 보고 왔으나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너를 보면 기운을 좀 차릴 테니, 서원에서 자려무나.”
호 대인, 호 대부인, 그리고 현서의 두 형들은 늘 바빴다. 두 형은 혼인을 해 각자의 가족도 있어 매일 보러 갈 수도 없었다. 외가인 석청담에 입문한 현진 또한 독립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현서와 교류가 뜸하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직 여름 초인데도 이렇게 더우니 사달이 날 수밖에요.”
대공자인 호현규가 탄식했다. 현서와는 열다섯 살 차이가 나서 동생보단 마치 아들 같았다. 실제로 현규의 장남인 호영중과 현서는 여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현서는 어떻습니까?”
“날이 더워 먹는 족족 토한단다. 투정 한 번 안 부렸는데 오늘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더구나.”
“아파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이인데.”
호 대부인이 눈시울을 붉혔다.
현서는 아직 어려 너무 놀라 건강을 해칠까 독을 먹었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현서는 자신이 병에 걸려 아픈 줄 알았다. 전전긍긍하는 가족들에게 걱정시켜 죄송하다고 말하는 막내를 보며 대부인은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어린 막내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독을 먹고 피를 토했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 중, 내가 먹었어야 했다는 자책을 해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집에서만 지내던 아홉 살짜리 아이가 무슨 원한을 쌓아 독을 먹겠는가. 결국 전부 어른들의 일이었다.
대부인은 독과 관련된 것들을 산 채로 찢어버리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정 의원께서 말하길 더위를 심하게 타는 것도 그렇지만 서아가 의욕이 너무 없답니다.”
“가엾은 것. 지칠 만도 하지.”
병상에 누워 반나절도 눈을 뜨지 못했을 때도 우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던 아이다. 쓴 약도 곧잘 먹고, 말 한마디 못 하는데도 울지 않았다. 독을 먹기 전의 현서는 곧잘 떼도 쓰고 어리광도 잘 부리는 아이였는데, 아프면서 너무 훌쩍 커버렸다.
“소자의 뜻도 어머니와 같습니다. 하지만 서아는 착한 아이니 우리가 말을 꺼내면 가족을 먼저 생각해 무리할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병이 나서 가족들을 슬프게 했다고 말하는 막내를 떠올리는 호 대인의 마음도 부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식을 잃을 뻔했는데 어찌 그 대가를 치루지 않게 해.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은 것이라 하지만 상인의 복수 또한 그 못지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이 일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었으니 분노는 조용히 갈무리해 두었다.
“그렇다고 혼자 추스르게 둘 수 없지 않느냐. 마음에 병이 있는데 몸인들 낫겠느냐.”
“소질에게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현진이 말을 꺼냈다.
“의원께 물어야겠지만 먼저 백부님과 백모님의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말해 보렴.”
“한 달 후면 백중이지 않습니까? 백중 야시장에 데려가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현진의 말에 잠시 침묵하는가 싶더니 곧 둘째인 호현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 서아는 원래 활발하지 않았습니까. 저택에 서아가 안 가본 곳이 없었지요. 그랬던 동생이 꼼짝을 못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내일 정 의원께 물어보아야 할 테지만,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해야 나갈 수 있다고 하면 서아도 의욕이 생기겠지요.”
“그래, 소의선께서도 그랬지만 다른 의원들도 모두 길게 봐야 한다더구나. 목표가 있는 게 훨씬 좋겠지.”
대부인의 찬성이 이어지자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 ❖ ❖
더위로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해 푸르게 질린 현서의 얼굴이 현진을 보자 밝아졌다. 시녀들은 현진 도련님이 오셨으니 막내 도련님의 식욕이 좋아질지 모른다고 기대하며 아침을 준비했다.
과연 시녀들의 바람대로 평소보다 죽을 조금 더 먹었다. 현진의 이야기를 듣느라 천천히 먹어서 게워 낼 것 같지도 않았다. 명명을 비롯한 시녀들은 현진 도련님이 천년만년 만희당에 계셨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아침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 의원이 왔다. 어제 왔으니 오늘은 왕진 올 날이 아니었다. 더위로 몸이 축나서 오는 횟수가 늘긴 했지만 매일은 아닐 텐데. 현서의 얼굴에 궁금증이 어렸다.
“대부인께서 한 달 뒤 도련님이 외출을 해도 괜찮은지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왔지요.”
현서가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인지 처음에 이해 못 했으나 곧 알아들어 딱딱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해사하게 변했다. 마르고 창백해 병색이 완연한데도 이렇게 눈을 끄니 이 고비를 넘기면 여러 사람의 마음을 훔칠 미인이 될 게 분명했다.
정 의원도 호부를 오가면서 ‘우리 막내 도련님이 제일 예쁘고 사랑스럽다’ 병에 걸린 것이다.
물론 정 의원은 자신이 ‘우리 막내 도련님’ 병에 걸린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의당 당주의 수제자인 소의선 역시 같은 병에 걸려 갔으니, 정 의원의 의술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병이 무서운 탓이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한 달 뒤 백중날까지 죽을 반 되는 먹어야 합니다. 또, 뜰을 쉬지 않고 세 번은 돌 수 있어야 하고요. 약도 전부 먹어야 합니다. 백중날까지 이것들을 전부 하면 야시장에 갈 수 있습니다.”
“해요! 해요! 꼭 할게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자 명명이 재빨리 말렸다. 의욕이 생긴 건 좋으나 자칫하면 방금 먹은 죽도 토할 판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당장이라도 뜰로 나가려는 모습에 이번엔 정 의원이 말렸다.
“무리하면 안 하니만 못한 게 됩니다. 이제까지 했던 것들을 쭉 이어 하면 한 달 뒤 조건을 전부 채울 수 있을 겁니다.”
정 의원이 돌아가고 현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현진에게 말을 걸려는데 기침이 터졌다. 명명이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고 춘도가 차를 가지고 왔다. 현서가 먹는 것은 물부터 간식까지 모두 약선 음식이었다. 차도 그냥 차가 아니라 목에 좋은 약재를 연하게 우린 것이었다. 물처럼 마시되 약효가 너무 강해서도 안 되는 탓이었다.
기침이 쉬이 멎지 않았다. 종국엔 피라도 토할 것처럼 격렬해지자 현진은 안절부절못했다. 당장이라도 정 의원을 다시 데려오고 싶어서 움찔거렸지만, 시녀들이 침착하게 현서를 돌보는 것에 참았다. 시녀들의 저 침착함은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얘기라 마음이 썼다.
사촌 형님들만큼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현진도 현서가 독을 먹었다는 것은 알았다. 현진이 아직 성인이 아니라 직접 듣지 못했지만, 현진의 부모님 역시 그 일을 조사 중이라 알게 된 것이다.
현진은 외동이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현서가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던 개구쟁이가 피를 토할 것처럼 기침하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행이 먹은 것을 죄 게워 내는 일은 없었다. 입을 헹구고 난 뒤 현서가 멋쩍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형 앞에서 흉한 꼴 보일 뻔했네.”
“지금 오랜만이라고 형을 타박하는 거냐?”
“아니이.”
평소라면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자주 놀러오라고 했을 텐데 오늘은 아니었다.
“형이 말해 준 거지? 야시장.”
현진도 현서를 과보호하지만 다른 가족들에 비하면 좀 나았다. 아주 조금.
부모님과 형님들이 현서를 깃털인형처럼 여긴다면 명명은 종이인형, 현진은 솜인형 정도로 여기는 차이가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하겠지만 호부 내에선 제법 큰 차이였다.
“뜰 세 바퀴는 다 못 채워도 괜찮다. 형이 안고 다닐 테니까.”
현진은 열일곱 살이지만 키가 육 척을 훌쩍 넘긴 지 오래였다. 그러나 현서는 키가 거의 자라지 않아 사 척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현진은 무림인이니 현서가 아프지 않아도 번쩍번쩍 잘 안고 다닐 터였다. 현진 도련님이 막내 도련님을 안고 다닌다고 하니 명명은 안심이 되었다.
“오랜만의 외출이니 새 옷을 지어야겠네요. 대부인께서 보내신 갑사(甲紗: 여름 비단) 중에 길상무늬가 있는 것이 있는데 그걸로 만들면 될 것 같아요.”
현서의 상태가 좋을 때 치수를 하나씩 재두어야 한다며 명명이 얼른 자리를 비웠다. 해장죽(海藏竹)으로 만든 여름용 장의자에 반쯤 기대 드러누운 채로 현서가 입을 열었다.
“형은 백중까지 집에 있을 거야?”
“아니. 백중 이틀 전에 올 거다.”
“그럼 오늘 돌아가?”
“아니, 나흘은 있어.”
“정말?”
현서가 활짝 웃었다. 방 안의 시녀들도 밝아졌다. 도련님의 의욕이 야시장으로 크게 올랐지만, 현진 도련님이 계시는 것은 좋은 일에 좋은 일을 더하는 셈이니 말이다.
❖ ❖ ❖
현서는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불평했지만 시간은 똑같이 흘렀다. 몸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날이 더워 봄보다 몸이 축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의욕이 생기니 정 의원이 말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계속 토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약한 목에 무리가 가는 일이라 죽 반 그릇을 먹는데 반시진(1시간)을 잡았다. 산책도 나눠서 할지언즉 하루에 해야 할 만큼은 다 했다. 그런 노력들이 쌓여 결과를 얻었다.
야시장이라는 미끼가 너무도 크고 영롱했던 덕이다.
백중 전날, 정 의원이 합격이라고 하자 현서는 물론이고 온 가족들이 집에서 금맥이 터진 것처럼 기뻐했다.
“길에서 파는 간식은 딱 한 가지만 됩니다. 맵고 짜고, 신 것은 금물입니다.”
정 의원의 충고에 현서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호가에 음식이 없겠는가. 야시장 전체를 집 안에 옮겨놓을 수도 있으나 현서를 기쁘게 하는 것은 집 밖에 나간다는 그 자체였다.
백중날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염라대왕은 매년 칠월 초하루에 지옥문을 연다. 재난으로 죽은 혼과 현세의 자손에게 재물을 받지 못하는 혼을 일시적으로 지상에 보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지상으로 돌아오는 영혼이 아귀가 되지 않게 제를 지내는 날이 칠월 보름인 백중이다.
백중이 되면 호가는 절과 사당 두 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안채의 부인들과 아이들은 절에 제사를 지내러 간다. 그간 아파 쭉 절도 사당도 가지 못했지만, 오늘은 사당에 있는 장명등(長明燈)에 새 불을 밝히는 제를 올리러 갈수 있었다.
사당은 족보에 오른 이들을 위한 곳이다. 그러나 호가 사당에는 족보에 오르지 않은 이들을 위한 장명등이 있다.
호가는 전국에 상회를 가지고 있어 상행이 빈번했다. 백 년도 훨씬 전 상행을 다닐 때는 사망자가 나오는 일이 지금보다 잦았다. 사당의 장명등은 상행에 나섰다 죽은 이들 중 연고가 없는 이들을 위한 등이었다. 아귀가 되어 괴롭지 않게 극락왕생하거나 더 좋은 내세를 빌어주기 위해 등을 켜는 것이다.
사당의 다른 불은 매일 켜고 끄지만, 이 장명등은 세심한 관리 아래 쭉 켜둔다. 그리고 백중날이 되면 새 불을 올린다. 평소엔 가주인 호 대인과 장남인 현규가 관리를 한다.
호가의 사람들은 사당에 출입할 나이가 되면 먼저 장명등에 대해 배우게 된다. 장명등에 불을 교체하는 법, 장명등에 올라간 인물들을 적은 책을 관리하는 법 같은 것들이다. 대신 백중날 사당에 오는 것은 열 살이 넘어야 해서 현서도 이날 처음 왔다.
오랜만에 오는 사당은 여름인데도 약간 서늘했다.
아버지와 큰형이 장명등의 불을 새로이 켜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 낮인데도 어두운 사당 안엔 등불만이 조용히 일렁거렸다. 새 불을 켠 다음엔 부들방석에 꿇어앉아 절을 올려야 했지만 현서는 체력이 되지 않아 향만 올렸다.
백중에 지상에 오르는 영혼들이 길을 잃지 않고 극락왕생하기를 빌었다. 꼿꼿하게 향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향을 부러뜨리는 일은 없었다. 사당은 원래 음기가 강한 곳에 두느라 북쪽에 있어 시원한 편인데도 긴장한 탓인지 땀에 흠뻑 젖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감기 들겠구나. 안 될 일이지.”
큰형이 현서를 번쩍 들었다. 보통의 열두 살짜리였다면 이렇게 쉽게 들지는 못했겠지만 현서는 현규의 여섯 살짜리 큰아들과 무게가 비슷했다. 현규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막내 동생을 다독거렸다.
“해가 지면 진이랑 외출해야 하니 조금 자두거라.”
어린아이를 토닥이는 손길에 현서는 큰형이 자길 조카처럼 대한다며 입을 비쭉였지만 곧 잠이 들었다.
❖ ❖ ❖
꿈을 꾸었다.
누군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을 건네주었다. 지금처럼 바짝 마른, 그러나 좀 더 어린 팔이 손을 뻗어 찐빵을 건네받았다. 그것은 꼭 수묵화와 같아 색도 소리도 없었고, 맛도, 향도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찐빵의 온기만은 머리에 박힌 듯이 또렷했다.
따뜻해서 서러워 눈물이 났다.
“찐빵…….”
침상에 누워 있던 현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현서는 원래 잠에서 깨어도 바로 일어나질 못한다. 벌떡, 이라는 수식어는 마음에만 있을 뿐 몸이 전혀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외출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현진이 현서가 깨어난 줄 알고 말을 걸었다.
“찐빵이 먹고 싶어? 별일이네. 안 좋아하잖아. 오늘 나가서 찐빵 가게를 찾아볼까? 팥이나 달게 조린 콩이 들어간 걸로 사면 되겠지. 홍시나 밤을 넣은 것도 있을 텐데. 찐빵 노점들을 구경할까?”
눈물이 고여 코끝이 매워진다는 느낌에 눈이 반짝 떠졌다. 평소라면 꿈을 반추하며 여운을 느꼈겠지만, 지금 현서의 머릿속에 든 것은 야시장뿐이었다.
“……형? 지금 몇 시야?”
“안 늦었어. 물부터 마시자. 아직 시간 많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야시장이 열리는 동시(東市)는 호부에서 마차로 반시진(1시간)이 걸린다. 일행은 마부를 제외하면 단출하게 현진과 현서, 그리고 시종 둘이 전부였다. 몰래 따라올 호위대를 제외하고 말이다.
서녕 땅에서 미치지 않고서야 호가의 사람을 대놓고 해치지 못할 거라는 믿음은 현서가 집 안에서 독을 먹으면서 산산이 깨어졌다.
호위를 담당하는 수대처의 사람 중 몇몇이 뒤따르고 있을 터였다. 현진은 기감을 넓혀 살필까 하다 그만두었다. 백부의 사람을 굳이 들쑤셔 볼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성안을 다니는 마차라 크지 않았지만 안은 솜을 덧댄 비단으로 벽을 바르고, 현서를 위해 마차에 맞춘 작은 침상과 차탁을 두었다. 차탁에는 차 외에도 간식 몇 가지와 만일을 대비한 비상약이 놓여 있었다.
기세 좋게 마차에 올라타 창문부터 열었던 현서는 골목 하나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멀미를 호소했다. 마차도 말도 곧잘 탔던 아홉 살의 현서를 떠올린 현진은 찢어 죽일 것들을 속으로 다시 욕하며 창을 닫았다.
“오랜만에 마차를 타서 그런가 보네. 좀 쉬어두면 괜찮을 거다.”
마차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현진이 현서를 품에 안았다. 사당에서 큰형님도 그렇고 너무 애 취급이라며 궁시렁댔지만 금세 편안함에 굴복했다.
“경씨네 찐빵이 유명하다는데 우선 거기부터 가볼까?”
“찐빵? 형 먹고 싶어?”
“기억 안 나? 네가 침대에 누워 찐빵이라고 했는데, 잠꼬대였나 보네.”
찐빵을 안 좋아하던 애가 갑자기 왜 찐빵 타령인가 했다. 현진의 말에 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꿈? 기억이 안 나는데.”
“원래 대부분의 꿈은 기억이 안 나는 게 맞아. 형이 거짓말하는 거 아니다. 명명도 들었는 걸.”
“형을 의심하는 거 아니거든. 그게 아니라.”
무어라 말하려던 현서는 곧 입을 다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꿈이 기억이 안 나다니 이상한 일이네. 현서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꿈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닫힌 창 너머로 시끌시끌한 소리들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현서의 신경은 온통 마차 밖으로 쏠렸다.
야시장은 주로 명절 전후로 열리는데 백중 야시장은 백중날 하루만 열린다. 자정까지 열리는 다른 야시장과 달리 백중 야시장은 해시(亥時: 저녁 9시-11시)가 되기 전에 끝이 난다. 지옥문이 닫히기 전까지 지상에 나온 귀신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다.
가장 많이 팔리는 것들은 물가에 띄우는 등이다. 연꽃에서 배 모양, 제사상 모양 등 각양각색의 등들이 팔린다. 그런다고 등만 파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지라 동시 근처에서 마차를 세웠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 유시(酉時: 오후 5시-7시)를 막 지났는데도 사람이 많았다. 현진은 현서를 능숙하게 안아 들었다.
“열두 살인데.”
현서는 입을 삐죽였지만 인파의 물결을 보곤 얌전히 팔을 형의 목에 둘렀다.
“형, 힘들면 말해.”
“네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 어머니 웃다가 숨넘어가실걸. 어머니가 내 팔다리에 매달았던 추가 네 열 배는 더 무거울 거다.”
“거짓말.”
“거짓말이긴, 다음에 네가 석청담에 와서 직접 보려무나.”
“좋아.”
석청담은 현진의 외가이자 현진이 속한 문파로 서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현서는 형의 초대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시선을 돌렸다. 삼 년 넘게 호부 안에만 있다가 밖에 나오니 별세계가 따로 없었다. 현진이 키가 커서 안겨 있는 게 구경하기 훨씬 좋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형, 저기.”
형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곧 통달한 현서는 능숙하게 현진을 부렸다. 품에 안겨 있어도 쉽게 지칠 게 뻔해 현진은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현서는 야시장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한껏 흥분했다. 평소라면 관심 없었을 가면이나 유리풍경에 정신을 파는 현서를 안고 있던 현진은 품 안의 몸이 조금씩 따끈해지자 쉬어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잠시 쉬었다 움직이자. 힘이 남아 있어야 간식도 고르지.”
몸 상태에 관해서 욕심 부리면 안 된다는 걸 아는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피곤하기도 했다.
현진은 현서의 외출이 결정되자 바로 야시장에 있는 다루(茶樓)에 예약을 잡았었다. 야시장 날엔 사람이 많을 테니 좋은 자릴 잡기 위해서였다. 현진이 예약한 곳은 삼 층이라 한 눈에 시장이 내려다보였다. 사람이 많았지만 일 층과 달리 이, 삼 층은 주루의 각자(閣子: 별실)처럼 분리되어 있어 시끄럽지 않았다.
다실에는 호부의 하인 둘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현진은 창가에 놓인 탑(榻)에 현서를 내려놓았다. 보료를 도톰하게 깔아 푹신한 탑에 자리를 잡자 하인이 미지근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현서의 얼굴과 손을 닦고 챙겨 온 약차를 데웠다.
현서가 약차를 마시는 동안 현진은 다루의 사환에게 차와 간식을 주문했다. 현서는 노점의 간식을 고를 생각에 들떠 있었지만, 다루의 간식을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있으니 종류별로 전부 시켰다.
“도두랑 이사도 간식 먹으며 좀 쉬어.”
도두는 이십 년이 넘게 호부에서 일한 노련한 시종으로 도좌방 소속이었다. 객청에서 손님을 맞이하거나 호부의 사람이 외출을 할 때 따라나서는 일을 주로 했다.
이사는 유모의 조카로 어릴 때부터 현서와 현진을 자주 보며 같이 놀기도 했다. 정식으로 서원 만희당의 식구가 된 건 올해 들어서였다.
서원에 오자마자 여름을 심하게 타는 현서를 보았던지라 이사는 오늘의 외출도 대단히 걱정을 했었다. 현진이 품에 안고 다니는데다가 현서도 기분이 좋아 생글생글 웃는 걸 보고 마음을 놓았다.
창을 전부 열어놓았는지라 현진은 겉옷을 하나 더 둘러주었다. 여름이지만 현서는 작은 바람에도 아플 수 있으니 말이다.
창 아래 바로 난간이 있어 밖을 내려다보기에 좋았다. 목을 길게 빼고 있어 자칫하면 아래로 떨어질까 봐 이번에도 현진이 품에 안았다. 가족들의 과보호에 달관한 현서는 고개를 한 번 젓는 걸로 항의를 대신하곤 왁자지껄한 야시장 전경에 곧장 정신을 팔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야시장의 모습은 또 달랐다. 여기저기 등을 잔뜩 걸어두었고 여름이라 해가 길어 구경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
“아까 봤던 유리등 가게야!”
흥분한 현서가 새처럼 재잘대려고 했으나 목에 무리가 가는 걸 막기 위해 현진이 얼른 말을 받았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과자를 골라야 하니 과자 가게부터 살펴보자. 전부 돌긴 어려우니 여기서 보고 고르는 게 낫겠다.”
“응응!”
아프고 난 이후로 이렇게 즐거운 적은 처음이었다. 현서는 잔뜩 들떠 있었다. 현진 형이랑 같이 나오지 않았다면 몇 배로 더 힘들었을 거다. 역시 현진 형이 최고야. 위의 두 친형들이 들었다면 부러워 울었을 생각을 하며 현서는 음식을 파는 노점들을 훑었다.
인기 있는 가게들엔 사람이 많았다. 사람이 많은 곳 위주로 고개를 돌리던 현서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설탕과자 가게였다.
손재주가 좋은 주인이 녹인 설탕물을 이리저리 휘두르자 금방 새나 꽃, 향낭 등이 만들어졌다. 현서의 눈과 입이 동그랗게 변했다. 현진이 안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 난간 아래로 떨어질 모양새였다.
“가서 구경하고 살까?”
“응, 응. 형 얼른.”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제 발로 걷겠다는 소리도 없이 냉큼 현진의 목에 팔을 감고는 재촉했다.
“둘은 따라오지 않아도 되니 간식 다 먹고 곧장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가 있어.”
한 손으로 현서를 안은 현진이 주머니 하나를 꺼내 이사에게 건넸다.
“구경하다 갖고 싶은 거 있음 사고.”
“현진 도련님, 소인은 안 주시구요?”
도두가 장난스럽게 물어보자 현진이 주머니 하나를 더 꺼냈다.
“내가 도두를 잊었으려고. 이사를 잘 챙겨가.”
“네, 도련님, 걱정 마세요.”
“이사, 있다 봐.”
현서가 손을 흔들었다. 현진을 비롯해 주인어른의 사람들이 현서를 호위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 두 시종은 토 달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자신들을 배려해 준 것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그사이 몸을 들썩이던 현서는 현진의 귀에 속삭였다.
“형.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안 돼? 도두랑 이사도 없는데. 형은 고수니까 창문으로도 나갈 수 있잖아.”
양손을 맞잡고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모양새가 귀여웠지만 안 될 말이었다. 현진이 슬쩍 코를 잡았다 놓으며 잔소리를 했다.
“오늘 잘 다녀와야 백부님과 백모님이 다음에도 외출을 허락해 주시지. 석청담에도 와야 할 거 아냐.”
“맞아! 석청담에도 가야지! 형 말이 맞아.”
현서가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웃으면 당할 수가 없다. 현진은 창문에서 뛰어내리지는 않았지만, 대신 보법을 사용해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막 사탕을 받아 든 일행이 떠나는 바람에 운이 좋아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한 손에 녹인 설탕을 넣은 국자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색소가 든 막대를 흔들자 순식간에 봉황이 완성되었다. 현서는 넋을 뺀 채로 박수를 쳤다. 봉황을 주문한 이가 받아가자 현서가 냉큼 다음 주문을 했다.
“용이요!”
“도련님, 어느 정도 크기로 해줄깝쇼?”
“가장 큰 크기요!”
“통이 크신 도련님이네. 기분이다. 내 오색빛깔 용을 만들어드리리다.”
색소 통의 색소를 모두 쓸 작정인지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구경하는 인파들도 감탄을 마구 내뱉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집중해 바라보던 현서는 주인이 용을 건네자 참았던 숨에 찬탄을 올려 뱉었다.
“도련님 덕에 실컷 실력 발휘를 했는데, 어째 도련님 마음에 드시오?”
현서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용을 건네받았다.
“마음에 들어요. 이렇게 예쁜 용은 처음 봐요. 형. 이것 좀 봐. 비늘이 반짝거려.”
설탕용을 기울이자 등불 아래서 여러 빛깔로 빛이 났다.
오색 비늘을 가진 설탕용을 든 현서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현진이 시간을 가늠했다. 술시(戌時: 저녁 7시-9시)를 지났으니 이제 돌아가면 딱이었다.
“과자도 사고 등도 샀으니 돌아가자. 강가는 못 가지만 집에 돌아가서 후원 연못에 등을 놓으면 되겠다.”
현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용 사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야시장에 사람은 더 늘어났지만 현진은 어렵지 않게 움직였다.
“형. 형! 잠깐만.”
“왜?”
마차가 있는 곳을 향해 쭉쭉 나아가는 현진을 현서가 붙들어 세웠다. 갖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다 싶어 현서의 시선을 따라갔다.
야시장의 노점은 동시의 길을 따라 쭉 이어졌는데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은 사이사이 좁다란 골목에 물건을 펼쳐 두었다. 현서의 시선이 그 사잇골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가지 물건을 펼쳐 둔 노점이 보였다.
“맘에 드는 게 있어?”
“응. 저 팔찌.”
용이 깨어질까 봐 조심하고 있던 게 무색하리만큼 다급하게 소매를 흔들며 재촉했다. 낡은 깔개 위에 몇 가지 물건이 있었는데 그중에 옥팔찌가 있었다.
각지고 두꺼운 모양을 보니 남성용인 것 같았다. 그러나 흙과 이끼가 끼어 있어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곳에서 파는 옥이 좋은 옥일 리도 없고. 하지만 현서가 갖고 싶어 하니 물었다.
“주인장, 그 팔찌는 얼마요?”
“은 열 냥이오.”
순 사기꾼 아닌가. 현진이 발끈했다. 제대로 된 옥도 아닌데 저 가격이라니. 그러나 현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현서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왕 야시장에 가는데 현서도 돈이 있어야 기분이 나지 않겠느냐며 아침부터 대부인과 형들이 와서 은표를 잔뜩 찔러주고 갔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이 야시장을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한 돈이 현서의 소매 안에 있었다. 그러나 열 냥짜리 은표는 없었다.
“형.”
현진은 자신을 강호인이라 여겼지만, 어쨌든 반은 상인의 핏줄이다. 호가의 일원으로서 사기당하는 것이 분명한데 깎지도 않고 샀다간 사당에서 벌이라도 서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고민은 길게 가지 못했다. 너무나도 가지고 싶은지 현서가 품에서 백 냥짜리 은표를 꺼낸 것을 본 것이다. 화들짝 놀란 현진은 현서를 추슬러 안으며 얼른 은 열 냥을 치렀다. 흙과 이끼로 지저분한 팔찌가 무명천에 싸여 현서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엄청 갖고 싶어 했으니 용 사탕이 뒷전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현서의 반응이 특이했다.
대단히 기묘한 것을 보는 것처럼 손 위에 올려두고 뚫어지게 보고만 있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샀다기보다는 놀란 것 같았다. 현서의 반응이 이상했으나 현진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거 깨지지 않게 챙겨줘.”
용 사탕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닌지 마차에 타기 전에 이사에게 건넸다. 하지만 팔찌는 여전히 현서의 손 위에 있었다. 현서의 조그만 손 위에 있으니 팔찌가 매우 커 보였다. 아마 헐렁해서 팔에 찰 수도 없을 것이다.
“팔찌, 형이 챙겨줄까?”
“아니. 괜찮아.”
골똘히 생각에 잠기나 싶더니 마차가 움직이자 곧 잠이 들었다. 팔찌를 손에 쥔 채였다.
현진은 잠이 든 현서를 품에 안은 채로 팔찌를 바라보았다. 그냥 더럽고 꼬질한 팔찌인데. 백부님과 백모님은 현진이 어디서 사기를 당해 와도 위로부터 해주실 분들이지만 위에 형님들은 과연 그럴까,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다.
❖ ❖ ❖
외출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러나 사흘을 그 후유증으로 계속 비몽사몽간으로 지냈다. 가족들은 걱정했지만 피곤한 것뿐이라는 말에 안심했다. 현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사흘째 새벽이 되자 실컷 잤는지 눈이 반짝 떠졌다.
“막내 도련님, 깨셨어요? 어디 불편하세요?”
오늘 숙직 시녀는 명명이었는지 휘장 너머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냐. 너무 잤는지 눈이 일찍 떠진 것뿐이야. 지금 몇 시야?”
“묘시(卯時: 새벽 5시-7시) 초예요. 일어나시겠어요?”
“아침 먹을 때까지 쉬고 있을래. 불만 켜주고 명명도 쉬어.”
명명이 불을 밝히는 사이 꾸물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여름용 휘장이라 걷지 않아도 사물을 분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현서는 곁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야시장에서 사 온 물건들을 보았다.
용 사탕, 연꽃 모양 등, 그리고 팔찌.
팔찌는 우단을 깐 상자에 넣어두었지만 흙과 이끼를 털지 않은 상태였다. 팔찌가 든 상자를 가져다 이불 위에 올렸다. 둥근 고리 모양이 아니라 각지고 두껍다. 게다가 요철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더러워서 무늬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현서는 그 무늬를 눈을 감고도 똑같이 그릴 수 있었다.
그렇다. 호현서는 이 팔찌를 알았다.
‘이상한 일이야.’
아프고 난 이후의 현서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몰라서였고, 시간이 더 흐른 후엔 혼자만의 비밀로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말했다가 그렇지 않아도 걱정 많은 가족들을 더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또, 현서가 보기에 비밀은 병과 상관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비밀은 꿈이었다.
꿈이야 누구나 꾸는 것이고, 아프기 전에도 당연히 꿈을 꾸었다. 하지만 아프고 난 이후의 꿈들은 지나치게 생생했고, 처음 보는 것투성이였다. 꿈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저 이상한 꿈은 깬 이후에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다못해 꿈에서 본 책까지도 기억할 수 있었다. 본 적도 없는 책을 꿈에서 보았다고 기억하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꿈은 중구난방이어서 매일 꾸지도 않았고, 내용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꿀 때도 있었다. 의미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산의 풍경만 보이거나, 사람들이 걷기만 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말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지만 잘 들리지 않거나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때도 많았다.
좀 이상하긴 해도 그것은 그냥 꿈이었다.
그런데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이 생긴 팔찌가 야시장에 있었다.
용 사탕이 등불에 반짝이는 게 재밌어서 계속 보다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너무 한 곳만 보고 있던 탓이라 여겨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야시장은 여전히 시끌벅적했고, 여러 가지 물건들로 가득했다. 등이 환하다고는 해도 골목 후미진 곳의 물건이 눈에 들어온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흙과 이끼로 더러웠지만 현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깜짝 놀랐다.
동시에 마음이 급해졌다. 저 팔찌를 꼭 확인해 보고 싶었다. 가슬가슬한 천 위에 있는 옥의 무게가 손바닥 위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꿈에서 보았다고 해도 이렇게나 익숙한 느낌이 들 일인가. 그렇게 되뇌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현서는 손가락으로 팔찌를 톡 톡 두드려보았다. 딱 봐도 컸다. 더럽고 커다란 팔찌를 팔에 걸쳐 보았다. 쑥 하고 들어간 팔찌는 목걸이처럼 대롱대롱 흔들렸다. 옥팔찌를 처음 가져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감촉이 어딘지 친근했다.
시선이 연꽃 모양 등으로 옮겨갔다. 백중날, 잠드는 바람에 연못가에 띄우지 못해 그냥 곁에 둔 모양이었다. 백중날 등불은 갑자기 죽어 제대로 된 이별도 못 한 이들이 극락왕생하거나 새로이 태어나 복을 누리길 바라며 흘려보내는 등이다.
현서는 옥팔찌를 연꽃 등 옆에 놓아두었다.
어스름한 불빛이 일렁이며 꽃 등과 팔찌의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걸 보다 금세 잠이 들었다.
외출의 후유증으로 사흘을 보내는 바람에 현진이 돌아가는 날이 금세 다가왔다. 현진이 떠나기 전날 저녁 식구들은 연희당(燕喜堂)에 모여 식사를 했다.
큰형의 가족과 작은형의 가족까지 모두 모였다. 여섯 살과 네 살인 조카들을 비롯해 현서도 자주 못 본, 두 살 된 작은형의 쌍둥이와 그들의 유모들까지 와 떠들썩했다. 기분이 좋아 현서는 그날 요리를 한 가지 더 먹을 수 있었다.
식사 후 쌍둥이들은 잠이 들었고, 여섯 살과 네 살인 조카 둘은 연희당 뜰에서 공놀이를 했다. 오랜만에 조카들을 본 현서는 공을 차는 것을 응원하다가 약을 먹으러 다시 연희당으로 돌아왔다.
큰형수님과 작은형수님은 어머니와 같이 조카들이 보이는 창 곁의 자리에서 차를 마시고 계셨다. 약을 먹고 조카들에게 가려던 현서는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명명. 그 상자 좀 줄래?”
“네. 도련님.”
현서는 대화 중인 아버지와 형들을 뒤로 하고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대부인이 웃으며 현서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니?”
“어머니, 이것 좀 봐주세요.”
방 안의 시선이 현서에게 모였다. 명명이 상자를 열자 우단 위에 더러운 팔찌가 보였다.
“어머.”
귀금속과 옥을 주로 다루는 상가 출신인, 큰형 호현규의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현서가 야시장에서 팔찌를 산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현진이 은 열 냥이나 했다며 투덜거렸기 때문이었다.
조악한 옥이라도 현서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충분히 은 열 냥의 가치를 한 것이라며 대부인이 웃어 넘겼다.
“이 팔찌를 깨끗하게 만들고 싶어요.”
현서가 상자에서 꺼낸 폭 이 촌(약 6cm)짜리 옥팔찌에 방은 침묵에 휩싸였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현서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머니? 안 되나요?”
물에 살살 씻으려고 했는데 명명이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렸다. 대부인께 여쭈어보면 될 거라고 했는데 어머니도 어려운 걸까. 이왕이면 꿈에서처럼 깨끗한 상태이길 바랐는데, 안 되는 걸까. 현서가 시무룩해지자 방 안의 사람들은 재빨리 눈짓을 했다.
“아니란다. 좀 자세히 봐야겠구나. 이리 주렴.”
대부인의 손 위로 팔찌가 올라갔다. 떨어져 있던 남자들도 모두 대부인 곁으로 모였다. 현서와 현진을 제외한 사람들이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현진은 큰 사촌 형수가 백모님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저 팔찌가 문제 있는 건가? 귀시장(鬼市場)도 아니고 평범한 야시장에 문제 있는 물건이 흘러나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기껏해야 싸구려를 비싸게 샀다고 생각했는데.
현진의 걱정스러운 눈을 본 호현상이 빙긋 웃었다. 안심하라는 뜻이었다.
“우리 서아가 눈이 좋구나. 이 형이 보기엔 좋은 걸 산 거 같아. 어머님과 형수님께서 살피는 동안 우리는 간식을 좀 먹을까? 차가 딱 마시기 좋게 식었구나.”
현상이 현서의 주위를 돌렸다. 그리곤 능숙하게 설탕을 녹여 만드는 과자에 관한 얘길 꺼냈다. 그날 사 온 납작한 모양 말고 공처럼 동그랗게 만드는 것도 있다는 얘기에 현서의 정신이 설탕과자에 팔렸다. 그사이 어른들은 눈으로 재빨리 결론을 내렸다.
현서가 돌아가고 얘기하자.
대부인이 말했다.
“옥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양의 기름으로 닦아야 된단다. 깨끗하게 만드는데 며칠 걸릴 것 같은데 괜찮겠니?”
“네. 괜찮아요.”
현서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금세 주저했다.
“왜 그러니?”
“그…….”
현서가 이렇게 말을 끄는 법이 잘 없어 가족들이 궁금해 했다. 가족들의 시선 속에서 조금 빨개진 얼굴로 망설이다 말했다.
“팔찌가 곁에 있으면 잠이 잘 오는 것 같아서……. 빨리는 안 될까요?”
꼭 옥 때문이라는 건 아니고, 그냥 기분에요. 열두 살이나 되었는데 인형을 안고 자는 애처럼 보이는 게 싫어 현서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의욕이 생겼다고는 해도 더위는 여전하고 현서는 잠을 계속 설쳤다. 그런 현서가 잠이 잘 온다고 하는데 팔찌의 효과든 아니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팔찌 할아비라도 안겨줄 판이었다.
현서가 좋다잖아.
가족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허공에서 부딪혔다.
“최대한 빨리 해보마. 그렇지만 이렇게 좋은 옥을 상하게 하는 건 아까우니까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단다.”
“좋은 옥이요?”
“서아는 채옥(菜玉)을 이번에 처음 봤구나. 이건 채옥이라고 한단다. 봄의 첫 싹처럼 투명하고 예쁜 옥을 두고 하는 말이지. 닦으면 어떤 색인지 알 수 있을 거야.”
현서는 꿈속에 봤던 팔찌의 온전함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봄날처럼 여린 잎처럼 보드랍고 생기 있는 색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구나.”
대부인이 옥팔찌가 든 상자의 뚜껑을 덮으며 아쉬워했다. 어린 조카들도 아직 잘 시간이 아니지만 현서는 쉴 시간이 되었다. 아직도 공놀이 삼매경인 조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밤 인사를 했다.
현진이 따라나설 줄 알았는데 오늘은 호현상이 배웅하겠다고 나섰다. 사당에 갔을 때 큰형이 안아다 데려다주었으니 이번엔 둘째 형이 나서도 이상하지 않았다. 현서는 노곤함에 의심 없이 작은형의 손을 잡고 방을 떠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남은 사람들의 시선이 현진에게 향했다.
“진아. 이걸 어디서 샀니?”
“야시장 골목길에서 샀습니다. 백모님, 이 옥에 문제가 있습니까?”
현진은 어떤 물건들은 물건 자체로 삿될 수 있다는 걸 안다.
귀신이나 저주는 믿지 않지만 피를 많이 먹어서 주인을 미치게 하는 혈검(血劍)을 본 적이 있었다. 옥에게서 삿된 느낌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또래 중에서 출중하다고 해도 아직 어려 경험이 적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느끼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어머니께 알려야 할까요?”
혹시 무림과 관련된 물건일까 현진이 긴장했다. 석청담은 기주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큰 강호 세력이고, 호현진의 어머니인 회천검(廻天劍) 이약약은 손에 꼽히는 무림 고수였다. 현진의 걱정을 알아들은 현규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게 아니야. 이 옥이 나쁜 게 아니라 좋은 옥이라 그런 거지.”
“좋은 옥이요?”
“그래, 은 열 냥으로 샀다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물건이구나. 귀물(貴物)로 불려도 손색이 없어.”
호현규의 부인인 장정유는 귀금속과 옥 등의 패물을 다루는 상가의 여식으로 눈이 좋았다.
“이렇게 좋은 채옥은 나오지 않은 지 오래되었어요. 황궁에서도 이런 물건은 쉽게 못 찾을 겁니다. 아마 전조(前朝)의 물건이지 싶어요.”
그들의 걱정은 귀한 물건이니 복잡한 사연이 있거나 장물이면 어쩌지 하는 것이었다. 이런 좋은 물건을 가지려면 보통 신분이 아닐 테니 주인이 있으면 문제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우선 이 물건의 출처를 알아보자꾸나. 정말 주인 없는 물건일 수도 있으니.”
“서아가 잠이 잘 온다고 하니 꼭 돌려주고 싶어요. 좋은 옥을 곁에 두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니까요.”
“일단 그 물건을 팔았다는 사람부터 찾아봅시다.”
호가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 없는 물건이 맞았다. 가장 걱정했던 황궁과 얽힌 물건도 아니었다. 가족들은 크게 안심했다. 달리 말하면 황궁과 얽힌 게 아니면 그 외의 일은 호부가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주인이 없다고 해도 열두 살짜리가 야시장에서 사 왔다는 얘기가 돌면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출처 세탁까지 했다. 아끼던 막내 손자가 독을 마시자 큰 충격에 직접 영약을 구하겠다고 집을 나선 현서의 할아버지가 팔찌의 출처가 되었다.
호 노대인은 호가 상단에서 은퇴했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했다. 노대인이 현서를 아낀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덕에 귀한 옥을 손자의 건강을 위해 보내주었다는 얘기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깨끗해진 옥을 현서는 나흘 뒤에 돌려받았지만, 이 모든 소동이 마무리되기까지에는 한 달이 걸렸다. 출처 찾기와 출처 세탁까지 엄청난 속도로 끝냈으나 현서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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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여 닦아놓았더니 옥은 귀티가 물씬 났다.
꿈속에서 본 것과 다름없는 색과 모양에 현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서의 팔목보다 아직 팔찌가 커 상자에 넣어 늘 곁에 두었다. 잘 때도 베개 옆에 두고 잤다.
더위가 물러가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정말 옥의 영험함인지 현서의 상태도 조금씩 좋아졌다. 옥팔찌를 보는 가족들의 시선이 더 호의적이 되었다.
팔찌를 가지게 되면서 오히려 꿈을 꾸는 횟수가 줄었지만 현서는 그것이 아쉽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내년 봄이 되면 석청담에 보내준다고 해서 현서의 관심은 죄 거기 쏠려 있었다.
그러나 현서는 다음해 봄에 석청담에 가지 못했다. 심한 감기에 걸려 몇 달을 자리보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열네 살이 되어서야 석청담의 문을 밟을 수 있었다.
현서가 도착했을 때 석청담은 검각의 유위람이 백양교의 소교주를 죽이고 패천검(覇天劍)이라는 별호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바야흐로 신진 고수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