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章. 깃털, 유리, 솜인형
서원(西院) 만희당(萬喜堂)은 서녕호가에서 가장 늦게 아침을 시작하는 곳이다. 다른 처소들은 묘시(卯時: 새벽 5시-7시)에 하루를 시작하지만 만희당은 진시(辰時: 아침 7시-9시)에 시작된다. 서원의 주인이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가 되어야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택의 그 누구도 서원 주인이 게으르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희당의 주인이 사시 전에 하루를 시작하면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현재 서원의 주인은 호가의 막내 도련님인 호현서다.
미혼인 막내아들의 처소는 부모님이 계시는 동원(東院)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법도라고 한다. 그러나 호가엔 예법 위에 막내 도련님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 서원은 호 노대인의 거처였다. 저택에서 가장 호젓하고 안전한 곳이라 현서는 치료하는 내내 이곳에서 지냈다. 그렇게 십일 년이 지나 만희당은 완전히 현서의 처소가 되었다.
호가의 분노나 복수와 별개로 현서가 독을 먹은 일은 가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어린 현서가 피를 뱉으며 쓰러진 그 순간이 칼처럼 눈에 박혀 죽어도 사라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도 몸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소의선을 비롯해 현서를 치료했던 모든 의원들이 완치는 평생 없다고 단언했다. 원래도 예뻐했던 막내는 깃털인형, 유리인형, 솜인형 등으로 분류되어 호가에서 황궁의 장중보옥(掌中寶玉)보다 더 귀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렇게 호가에서 깃털, 유리, 솜인형을 담당하고 계신 막내 도련님은 현재 눈만 뜬 채로 침상 위를 뒹굴고 있었다. 눈을 떠도 곧장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던지라 침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습관이 들었다.
현서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침상은 화리목(花梨木)으로 만들었는데 장수를 기원하는 거북과 불로초, 학 등을 새겨놓아 화려했다. 벽면에는 나전으로 만든 궤짝이 놓여 있고, 전체를 비단휘장으로 가려놓았다.
침의를 입은 팔 사이로 옥팔찌가 보였다. 요철 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진 채옥(菜玉)팔찌다. 팔찌를 하고 자다니 괴상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역시 호가에선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도련님, 기침하셨어요?”
진즉에 현서가 눈을 뜬 건 알았지만 지금 물어보는 것은 이제 휘장을 걷어도 되냐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야?”
“석청담의 하우대 님이 보낸 서신이 도착했어요.”
“그래?”
휘장이 걷히며 현서가 얼굴을 드러냈다. 몇 년 전까진 부축 없이는 일어나지 못했는데, 측근 시종인 이사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현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대견하다는 눈으로 보지 말지? 눈빛만 보면 네가 우리 할아버진 줄 알겠다. 너, 나랑 동갑이거든.”
현서와 이사는 어린 시절 종종 보았지만 아홉 살 이후로는 서로 보지 못했다. 그러다 이사가 열두 살이 되자 현서의 측근 시종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사는 그때 현서가 독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사는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재회의 순간 마주한 막내 도련님이 기억과 너무 달라 크게 충격을 받았다. 동갑인데도 너무도 약하고 어려 보여, 이사는 그때부터 우리 도련님 깃털인형파에 가입했다. 그 후로 팔 년을 함께 했다.
현서가 침상 밖으로 나오면 공식적인 만희당의 하루가 그때부터 시작된다.
이사가 눈짓하자 문 밖에 서 있던 시녀들이 기민하게 들어와 세안과 의복 시중을 들었다. 환복이라고 해도 긴 머리를 비단끈으로 묶을 뿐이었고, 장신구는 팔에 팔찌뿐이라 시간이 들지도 않았다.
공복에 가벼운 약차를 마시면 아침 먹기 전의 준비가 모두 끝난다.
“오늘 날씨는 어때?”
“아주 좋답니다. 문을 열어드릴까요?”
“응.”
날씨가 좋으면 정방의 창과 격선문(格扇門)이 모두 열린다. 최근엔 볕이 좋은 봄날이 이어져 창을 여는 횟수가 늘어났다. 창 너머로 현서의 모습이 보이자 뜰의 꽃나무를 돌보고 회랑을 오가던 모든 이들이 현서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모두 좋은 아침이야.”
현서가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격 없는 가벼운 인사였으나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손을 흔들자 소매 아래로 채옥팔찌가 보였다. 불순물이 하나도 없고 색도 모난 곳 없이 투명한 팔찌는 누가 보아도 귀한 물건으로 보였다. 빼곡하게 새겨진 무늬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정교했다. 팔찌는 현서의 팔보다 살짝 커서 흔들리는 손을 따라 흘러내려 곧 소매에 가려졌다.
그 짧은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옥팔찌에 모였다가 흩어졌다. 보물인 옥팔찌를 부러워해서가 아니다. 좋은 옥은 착용자의 몸 상태에 따라 색이 변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호부, 특히 내원의 사람들에게 팔찌가 그 아름다운 색을 잃지 않는 것은 도련님이 오늘도 건강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도 변함없이 영롱한 옥팔찌를 보며 내심 안도하는 이들의 다정함을 아는지라 현서는 배시시 웃었다.
정말로 몸 상태에 따라 색이 변하는지 현서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옥은 변함없었고, 그 변함없음에 모두가 안심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 여겼다.
‘괜찮다고 천만 번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데 손 한 번 흔들어 안심시킬 수 있다면 남는 장사지.’
어쨌든 호현서도 상인 집안의 사람이다. 아홉 살에 독을 먹고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의 생각치곤 태평하긴 했지만 말이다.
서원, 아니, 호부의 가장 중요한 아침 행사인 막내 도련님의 손 흔들기가 끝나자 현서는 탁자 위의 서신을 집어 들었다. 서신을 한 번에 다 읽은 현서가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생각에 잠기면 나오는 버릇인 걸 시중드는 이들은 모두 알아 방해하지 않았다.
잠시 후, 시녀들이 아침이 든 찬합을 들고 오자 명명이 현서가 먹기 좋게 식탁에 올려두었다. 만희당 문을 넘는 시녀와 시종들은 모두 호부에서 오래도록 일한 사람들이었다. 그중 우두머리 시녀인 명명은 혼인을 한 이후에도 쭉 여기서 일했다.
“하우 도련님께서 안 좋은 소식이라도 보내셨어요?”
현서가 좋아하는 생선 완자탕을 덜어주며 명명이 물었다. 하우대는 석청담의 문하로 현진의 사제 중 한 명이었다.
열네 살 때 현서는 처음으로 현진의 외가인 석청담을 방문했다. 석청담은 호부가 있는 서녕에서 장정 걸음으로 사흘이 걸리는 한녕(翰寧)에 있다. 하지만 현서는 마차를 타고도 사흘을 들여 도착했다. 다행히 크게 몸이 나빠지지 않아 한동안 그곳에서 지냈다. 하우대는 그때 사귄 친구였다.
그 후로 종종 석청담에 가거나 하우대를 비롯한 친구들이 호부에 놀러 오기도 했다. 교우 관계가 좁은 막내 도련님의 몇 안 되는 친구라 만희당 사람들은 하우대에게 호의적이었다.
“걔가 늘 어디 다치는 건 아냐.”
전에 놀러와 검무를 추겠다고 방 안에서 난리를 치다가 눈앞의 화분이 금 한 냥짜리라는 얘기에 혼자 넘어진 것이 무척이나 큰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현진이 숨이 넘어가게 웃다가 하우대의 귀를 잡아채 석청담으로 돌아가는 것을 만희당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 그 때문에 하우대는 성격 좋지만 어딘가 얼빠진 도련님으로 자리 잡았다.
현서보다 두 살 연상인 하우대는 석청담의 전통에 따라 일 년의 폐관 수련을 끝내고 강호를 주유 중이었다. 석청담에 있을 때만큼 아니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서신을 보내왔다.
걔가 그래도 젊은 유망주에 들어가는 검수인데. 현서가 급히 친구를 변호했지만 명명의 관심사는 도련님의 식사가 먼저였다.
“하우 도련님이 건강하시다면 우선 식사부터 하세요. 탕이 다 식겠어요.”
식사량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지만, 여전히 한 번에 많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지라 여러 그릇에 음식이 종류별로 담겨 있었다.
“오늘 좋은 양고기가 들어왔다지 뭐예요. 어떻게 드시고 싶으세요?”
대갓집의 식사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호부에선 예법 위에 호현서가 있다. 아픈 막내가 식사 중에 대화를 나누면 좀 더 먹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호가에선 오히려 침묵을 경계했다.
현서가 혼자 먹을 때는 식사 시중을 드는 시녀들이 곁에서 말동무를 해주었다. 이 역시 예법을 무시한 일이었으나 호부 안이나 밖에서 일어난 소식들을 듣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 현서는 좋아했다.
“파 많이 넣어서 볶아달라고 해.”
“네, 그럴게요. 식후 산책을 연못 쪽으로 하시는 건 어떠세요? 이 부인께서 특이하게 생긴 비단 잉어를 구하셨대요.”
“둘째 형수님께서 벼르던 잉어를 구하셨나 보네.”
현서의 둘째 형수의 취미는 특이한 무늬를 가진 잉어를 기르는 것이었다. 추울 때는 작은형의 처소로 옮겨두지만 날이 좋을 때는 저택 여기저기에 풀어두었다.
탕을 다 마시자 명명이 빈 그릇을 치웠다. 현서가 다음 음식을 말하면 덜어주려고 말을 기다렸다.
“오늘 죽이 땅콩 넣은 거랬지? 그럼 그거랑 식초를 넣은 연근만 먹을래.”
“속이 안 좋으세요?”
평소보다 적게 먹는 것에 명명이 걱정하며 물었다. 당장이라도 의원을 불러올 모양새다.
“아니. 연못에 간 김에 정원에 좀 앉아 있으려고.”
“네.”
간식을 좀 이르게 먹겠다는 얘기에 명명의 표정이 금방 좋아졌다.
“따로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세요?”
“밤떡. 나머진 어머니 처소의 주방에 가서 몇 가지 골라줘. 하나 정도라면 튀긴 것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서원에도 부엌이 있지만 현서는 간식은 대부인의 처소에서 만든 걸 먹었다. 간식 만드는 어멈의 솜씨가 좋은 것도 있지만 뭐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랬다.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탕을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랬다간 며칠을 고생할 게 뻔했다. 그러나 간식은 소매에 넣고 다니다 먹을 수도 있고, 나눠줄 수도 있어서 좋았다.
현서가 뭐라도 한입 더 먹었으면 하는 사람들의 욕망으로 현서의 소매 안은 늘 간식들로 풍성했다.
산책은 현서의 하루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다.
아홉 살 이전에는 산책을 빙자해 온 집 안을 휘젓고 다녔으나, 아홉 살 이후론 약해진 몸을 위해 회랑을 오가거나 뜰을 도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숙뿌! 쑥부우!”
정원을 오가는 회랑에서 조카를 만났다. 잉어를 보러 나온 이가 현서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흥분하면 된소리가 나오는, 이제 네 살 된 꼬마 아가씨는 큰형님의 막내다. 현서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평을 듣는 이 조카는 걷기 시작하고서부터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지금도 유모가 잡지 않았으면 현서에게 돌진했을 기세였다.
“아기씨, 숙부님을 뵈면 어찌해야 한다고 했죠?”
“사뿐사뿐, 예쁘게, 폭?”
몇 달 전에 순식간에 달려온 희아가 발치에 매달리는 바람에 뒤로 넘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 미처 보지 못했던 것뿐이라 대단한 일은 아니었는데 그것을 보았던 식솔들은 식겁을 했다.
그렇다고 네 살짜리 아이를 야단칠 일도 아니었다. 그저 깃털, 유리, 솜인형인 숙부를 대하는 방법을 배운 조카 한 명이 더 늘었을 뿐이었다.
현서가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
“희아야, 숙부 준비되었단다.”
양팔을 벌리자 네 살 아이가 치맛자락을 옹골지게 움켜쥐곤 나비처럼 사뿐하지만 속도는 벌처럼 빨리 다가와 품에 폭 안겼다. 현서는 희아라면 품에 안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랬다간 주변 사람들의 간이 바닥에 떨어질 거 같아서 얌전히 껴안고 있기만 했다.
자주 보지 못하는데도 조카들에게 현서는 인기 만점이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고사리 같은 조그마한 손이 은근슬쩍 소매 언저리를 만지는 것에 현서가 웃자 희아가 조잘거렸다.
“오늘은 팥떡이에요? 계화떡? 희아는 장미병도 좋은데.”
“아쉽게도 셋 다 없지만 대신 오리알을 넣은 녹두떡이 있지. 아니면, 연못 정자에 가면 밤떡이 있을 텐데 그걸 받아갈래?”
현서가 묻자 잠시 고민하던 희아는 곧 명쾌하게 결론을 내며 손을 손뼉을 쳤다.
“오리알!”
슬슬 다리가 저려 오는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매에서 기름종이에 싼 녹두떡을 꺼내 조카의 손에 올려주었다.
할머니인 대부인의 처소에 가면 같은 것을 받을 수 있는데도, 조카들은 현서의 소매에서 나오는 간식을 좋아했다. 지금은 머리 좀 컸다고 얌전한 척하는 녀석들도 전부 현서 소매만 뚫어지게 보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숙뿌, 나중에 뵈어요.”
어머니와 새 장난감을 보기로 했다며 희아는 손을 붕붕 흔들었다. 유모가 안아주려는 것도 거부하고 씩씩하게 걸어 금방 점이 되어 사라졌다.
―다시 봐도 아깝구나.
낯선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그러나 현서는 전혀 놀라지 않은 채 천천히 목적지인 연못을 향해 걸었다. 놀라기는커녕 속으로 대꾸도 했다.
‘우리 희아의 재능이 반짝이긴 하지.’
―참으로 아까워. 혹시 말이다.
‘안 돼. 가족들에게 무어라 말하게. 독 때문에 미쳤다는 소릴 듣게 되면 평생 서원 밖을 나가지도 못할걸.’
―그건 그렇지.
대꾸하는 목소리에 살짝 힘이 빠지나 싶더니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너는 미친 게 아니야.
‘당연하지. 나는 내가 미쳤다고는 개미 뒷다리만큼도 생각해 본 적 없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
―그래. 조심하는 게 좋아. 나 역시 이런 일은 처음이니.
낯선 목소리는 현서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고, 친한 사이인 듯 편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현서의 뒤를 따르고 있는 시종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평온했다. 당연했다. 현서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니까.
현서가 목소리를 내었다면 도련님이 아프다고 호가가 뒤집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속으로 말하는 거라 도련님이 귀신에 홀린 건지, 상상의 친구를 만들어 낸 건지, 혹은 미친 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귀신에 홀린 것도, 미친 것도 아니고, 상상의 친구를 만들어 낸 것도 아니었다.
친구는 맞지만.
―친구라니. 인간이 무슨 옥이랑 친구를 하느냐.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건 나뿐이라며. 뭐, 그럼 옥 님이라고 해줘?’
―됐다. 됐어.
가끔 이렇게 현서의 생각을 읽기도 하는 존재는 현서의 팔에 걸린 채옥팔찌였다.
부잣집 막내 도령이 어쩌다 옥이랑 대화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말하려면 제법 긴 얘기가 된다. 간단히 말하면, 전부 독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아홉 살, 독을 먹게 되면서 호현서의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현서를 놀라게 한 일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전생의 일을 기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옥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현서가 처음부터 전생이라고 안 것은 아니었다.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아홉 살짜리가 알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꿈으로 시작되었다. 깨어나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특이한 꿈. 그게 다였다.
눈을 뜨고 있는 시간도 거의 없고, 죽 한 그릇 마시는 데도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만큼 힘을 들여야 했고, 심지어 일 년간은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가끔 꾸는 꿈이 무에 그리 의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꿈은 중구난방이었다.
아파서 정신이 혼곤한 탓이라고 여겼던 꿈이 처음으로 의미를 가진 것은 열두 살이 되어서였다. 열두 살 여름, 백중 야시장에서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팔찌를 발견했다. 현서는 홀린 듯 그 팔찌를 샀다. 그러나 그때도 신기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열네 살이 되어 석청담에서 팔찌가 말을 걸고서야 자신이 전생을 꿈으로 꾸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단한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놀라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전생의 자신이래도 남의 얘기였다. 현서는 이 모든 것들을 비밀로 했다. 옥도 찬성한 일이었다.
하지만.
열다섯 살의 현서는 전생의 자신이 죽던 날도 꿈으로 보았다. 끊어진 염주처럼 여기저기 내용이 빠진 꿈이었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전생의 자신은 죽음에 대한 슬픔도 원망도 없었다. 딱 한 가지만을 마음에 두었는데 제자를 두지 못하고 죽어, 돌아가신 스승께 미안해 하는 것뿐이었다.
독을 먹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다. 하지만 알게 되었으니 이것도 무언가의 인연이라 보았다. 더욱이 전생의 기억에 도움을 받았다고 여긴 현서는 자문원을 대신해 제자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결정은 순식간에 끝이 났는데 실행에 옮기는 것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비밀로 해야 한다든가, 제자가 될 아이를 어디서 찾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도 꿈속의 기억과 팔찌의 도움으로 해결 가능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당연히 건강이었다.
“……련님.”
“…….”
“막내 도련님!”
“응? 왜?”
“어지러우세요?”
뒤에서 따라오던 시종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각을 향해 걷다가 생각에 빠져 걸음을 멈춘 모양이었다.
“볕 아래 너무 오래 계셔서 그런가 봐요. 속은 괜찮으세요? 현기증이 나거나 하진 않으세요?”
시종이 그렇게 말하며 당장 부축하려 들자 현서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던 것뿐이야.”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누각도 지척이었다. 작은 화선(畫船: 놀이용 배)을 띄울 수 있을 만큼 큰 연못이라 수랑(水廊: 물 위를 지나는 다리)을 만들어 연못 가운데 누각을 지었다.
명명이 만반의 준비를 해둔 것이 보였다. 누각은 사방이 뚫려 있어 바람이 들지 않게 양쪽에 휘장을 내리고, 혹시 몰라 병풍까지 쳐 두었다. 이른 봄이라 석재로 만든 의자 위엔 두꺼운 보료를 깔고 푹신한 등받이를 올려두었다.
탁자 위엔 차를 끓이기 위한 화로부터 은주전자, 그리고 대부인의 처소에서 받아 온 밤떡을 비롯한 간식이 잔뜩 든 찬합까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역시 명명, 빈틈이 없네.”
현서가 자리에 앉자 누각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차를 준비했다. 현서는 찻잔을 들지 않은 손을 흔들며 곁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물렸다.
“어차피 혼자 있을 거니까, 너희들도 저쪽에서 과자 먹으며 쉬고 있어.”
“네, 도련님.”
누각에 혼자 남게 되자 현서는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대가 보낸 편지 때문이야?
‘응.’
하우대는 석청담에서 사귄 이들 중 가장 믿을 만한 친구였다. 믿을 만하다는 기준은 현서의 개인적인 부탁을 현진에게 일러바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현서의 친구인 동시에 현진의 사제들이었다. 하우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현진이 캐어물으면 숨기지 못할 게 뻔했다.
게다가 석청담에서 현서가 피를 토한 적이 있어서 그들은 현진 편이었다. 죄 또래인데 현서를 제일 어린 동생처럼 보았다. 심지어 가장 어린 녀석까지!
하우대는 뺀질거리긴 해도 입이 무거웠다. 그래서 몰래 집을 구하는 일을 하우대에게 상담했다. 괜찮은 집은 돈만으론 구하지 못한다. 하우대의 매형은 공후가의 방계로 인맥이 좋았다. 이 년 전에 가격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고, 이왕이면 서녕에서 먼 곳으로 저택을 구해달라고 부탁해 두었던 것에 대한 답이 아침에 도착한 서신에 적혀 있었다.
<……(상략)……해서 계약은 전부 끝났다. 급하게 나온 원림이지만 문제가 있는 곳은 아냐. 매형이 말하시길 원주인이 장남을 대도(大都)에서 분가시키려고 파는 거라고 하셨어. 천자가 계시는 곳이니 계옥지지(桂玉之地: 장작이 계수나무보다 비싸고 쌀이 옥보다 귀한 곳이라는 뜻으로, 물가가 비싼 도회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건 아닐 테지. 너야 대도에서 대저택도 살 수 있지만 말이다. 네가 준 돈으로 대금을 치루고 남은 금액은 전장에 넣어두었어. 집의 기본적인 정리도 끝냈다. 집을 세세하게 꾸미는 것은 네가 해야 할 테니 방문하게 될 것 같으면 미리 연락을 해다오. 부릴 사람이 필요하면 소개인을 알려줄게. 집에 들이는 사람을 아무나 고용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략)……>
현서는 편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이것저것을 셈해 보았다.
‘당장은 가기 힘드니. 그사이 집을 관리해 줄 관리인만 대에게 부탁해 둬야겠어.’
현서가 보료를 툭툭 두들겼다. 그림으로 본 게 전부지만 현서는 새로 구한 집이 마음에 썩 들었다. 독립을 염두에 두고 고른 첫 번째 집이라 꽤나 신경을 썼다.
독립.
집안의 반대는 거세겠지만 제자를 키우기로 마음먹으면서 쭉 준비해 온 일이었다. 어린 막내가 독을 먹은 일로 어른들의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목숨은 건졌지만 천수는 누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소의선의 진단으로 절정에 달했다.
현서를 애지중지하는 것에는 이런 죄책감도 한몫을 했다. 가족들은 현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지만, 동시에 현서가 황금으로 만든 울타리 안에서 달콤한 사치만을 누리며 지내길 바랐다.
가족이 가진 죄책감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아홉 살짜리 아이에게 차마 독을 먹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린 현서는 자신이 병이 난 줄로만 알았다. 너무 오래 아파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린 현서를 보고 가족들은 다시 한번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언제까지 비밀일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현서가 관례를 올려 성인이 되자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현서는 놀라긴 했지만 가족들의 걱정처럼 비관하거나 엇나가지는 않았다. 전생을 기억하게 되면서 이미 음독 사실을 알고 있던 탓이다.
몸이 약하다 해도 거상 집안의 장중보옥이다. 천하에 다시없을 개망나니로 자랄 만한 토양이 갖추어져 있었는데도 현서는 그러지 않았다. 망종은커녕 가족들의 바람대로 얌전히 지내는 모습에 착한 막내가 가족들의 욕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라며 또 미안해 했다.
옥이 말하길, 과보호의 굴레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잊은 것이 있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든, 몸이 약하든 호현서는 호현서였다.
현서는 여섯 살 때 지붕 장식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붕에 올랐던 아이였다. 그리고 지붕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팔이 빠졌다. 우물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궁금해서 눈이 오는데도 한밤중에 우물 옆에 숨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심한 독감에 걸려 한 달을 앓았다.
하루에 한 번씩 크고 작은 사고를 쳐 대던 장난꾸러기에 녹록하지 않은 고집쟁이 사고뭉치였다는 것을 홀랑 잊은 것이다.
전생을 자각한 현서는 자문원을 대신해 제자를 키우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물론 가족에게는 말 못 할 비밀이니 독립을 결심했다. 호가의 막내 도련님인 호현서를 모르는 곳으로 가면 누군가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덜컥 가출을 해버린다면 가족들이 온 나라를 이 잡듯 뒤져 자신을 찾을 것이다. 끌려오는 건 둘째치고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눈물바다를 만들어놓을 테지. 가족의 걱정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접진 않겠지만, 적당히 타협을 해야 했다.
그래서 현서가 떠올린 것이 명분 있는 외유였다. 독립이 아니라 장기 외유 정도로 얼버무릴 수 있으면 딱 좋았다.
아파서, 철이 들어서, 가족들의 욕심에 맞추어주느라 얌전히 지내는 것이 아니었다. 열다섯 살에 목표를 잡은 이후로 현서는 하나하나 준비 중이었다. 스물다섯 살 전후로 집을 나서고 서른 살 안으로 제자가 될 아이를 찾아 그 아이를 쭉 가르칠 계획이었다. 집을 구하는 것, 사문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씩 준비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스물다섯 살 이후의 생존은 전생을 기억한 덕을 톡톡히 보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너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몸 쓰는 것에 재능이 없어.
‘그렇지.’
―무공을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렇지.’
현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제자를 키워 사문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싶은 거지, 천하제일인을 키우겠다는 게 아니거든.’
―그건 그렇지.
팔찌에도 목이 있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터였다.
호현서는 정말 개미 뒷다리만큼이나 검술에 재능이 없었다. 이립에 검선이라 불리고, 가장 어린 천하제일인이 될 거라 점쳐졌던 사람의 무공을 전부 알고 있지만 몸으로는 천만 분의 일도 재현하지 못했다.
현서는 건강 말고는 무공의 성취에 아무런 욕심이 없었지만 팔찌는 달랐다.
옥은 자문원이 펼치는 검술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현서가 어느 정도는 재현할 거라 기대했던 바도 있었다. 그러나 오 년의 시간 동안 팔찌의 꿈은 산산이 깨어졌다 또 깨어지기를 반복했고, 결국 고집쟁이 팔찌도 납득하게 되었다.
―약이 다 식었겠다. 얼른 먹기나 해라.
현서는 검술의 기본 움직임조차 따라하지 못했지만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이 현서의 건강에 도움을 주었다.
아주 많이. 매우 크게.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독립은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상한 장기들까지 살리진 못해서 약을 아예 끊을 수는 없었다.
‘뭐, 목표한 것만큼 몸이 좋아진 것도 아니고, 아직 사오 년 남았으니까 천천히 하면 되지.’
요절을 걱정하지 않게 되자 현서는 느긋해졌다.
무공을 배운 이들이 강호에 나가 실력을 쌓는 것처럼,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도 안목을 높인다는 이유로 여행을 많이 한다고 했다. 견문행이라 불리는 유행이란다. 그러니 안 되면 세상 구경하고 싶다고 드러누울 마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