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章. 인연이 있으면 천 리를 떨어져 있어도 만나고
“예쁘네.”
감탄하는 것치고는 어딘지 맹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눈앞에 푸르른 강물이 햇살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따라 반짝이는 수면이 참으로 예뻤다. 꿈에서가 아닌,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을 오가는 큰 배를 타본 현서는 뱃전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배를 따라 흐르는 경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허 참, 세상일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그러게.’
하지만 대답은 어딘가 건성이었다.
하우대의 편지를 받고 먼 거리의 여행은 아직 시기상조니 내버려 두자고 했던 것이 고작 열흘 전이었다. 그런데 지금 현서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것도 호부가 있는 서녕 땅에서 배를 타고 보름가량 걸리는 양주(陽州)로 말이다.
엿새 전의 일이다.
현서는 어머니와 점심을 먹었다. 대부인은 자식들을 아꼈지만, 자질구레한 예법은 따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장남이 혼례를 올린 후로 문안 횟수도 줄였다.
그러나 막내인 현서는 예외였다. 미혼에 워낙 괴는 아들이라 대부인이 먼저 부를 때도 있었고, 현서가 내키는 날이면 불쑥 찾아가 식사를 하기도 했다. 마침 어머니가 주신 옷감으로 만든 옷이 완성이 되었던지라 현서는 새 옷을 입고 점심을 먹으러 어머니에게 갔다.
“청색이 잘 어울리는구나. 바느질도 잘되었고. 침방에 상을 내려야겠다.”
아니나 다를까 연신 흐뭇해하시며 입에서 미소를 지우질 않았다. 자신을 향한 식구들의 과보호를 달관한 상태로 받아들이게 된 현서는 그러려니 했다.
유채 나물을 새우에 볶은 것이 마음에 들어 조금 더 먹을까를 고민하는 현서를 대부인이 웃으며 보고 있었다.
“맛있니? 오늘은 식욕이 도는 모양이구나.”
“정 의원께서 나눠 먹어야 해서 그렇지 식사량은 괜찮다고 하셨는 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 젓가락은 새우로 향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눠 먹으니 더욱 적게 먹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앞에서 안심시키겠다고 무리했다간 십중팔구 탈이 난다. 몇 번의 경험으로 체득한 사실이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자 물 흐르듯이 식탁이 치워지고 입 안을 정리하는 차와 간식이 준비되었다. 현서는 겨우 차만 마실 뿐이었지만 거기에 간식이 있는 것을 모두 당연시했다. 혹시라도 도련님이 한입이라도 드시면 좋은 일이니까.
차를 마시면서 며칠 전에 보았던 잉어 얘기로 화제가 옮아갔다. 그사이 시녀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어머니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에 대부인이 소녀처럼 웃었다.
“진이가 너한테 아무 연락 안 했니?”
“진이 형이요? 형이 평소 연락하는 사람인가요. 무슨 일이 있나요?”
현진은 몇 년 전부터 강호 출사를 해 호부에 오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선물은 꼬박꼬박 현서에게 보냈지만 편지를 하는 일은 잘 없었다. 간간이 하우대로부터 소식만 들을 뿐이었다.
“진이가 송가장(宋家莊)의 혼례에 초대를 받았다고 하더구나. 송가장은 우리와 직접적인 왕래가 있는 가문은 아니지만, 진이가 워낙 친구가 많지 않니. 더욱이 혼례의 주인공이 진이와 절친한 친구라 하니 우리도 축하를 안 할 수 없지.”
“송가장이요? 소자가 아는 송가장은 양주에 있는 곳인데 거기요?”
“그래, 나는 잘 모르지만 진이의 얘길 들으니 송가장은 강호 명문 중 하나라더구나.”
“네, 소자도 그렇게 들었어요.”
“거기에 소의선(小醫仙)께서도 오신다더구나.”
의당의 후계자인 소의선 화정은 생명의 은인이다. 독을 마신 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곁에서 쭉 치료했다. 침상에서 일어날 때쯤 돌림병이 돌아 의당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떠났다. 말할 때까지 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떠날 만큼 정성으로 치료해 주었다.
그 후로도 자주 오진 못했지만 편지를 보내 소식을 물어 오곤 했다. 호부의 각별한 은인이었고, 현서의 전생인 자문원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현진의 친구고 또 호부의 이름으로 인사하는 것이니 현규나 현성을 보내야 하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둘 다 집에 없지 않니.”
송가장의 혼례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무슨 얘기인지 몰랐던 현서의 눈이 일순간 커다래졌다.
“그러니까 어머니 말씀은.”
“그래, 어제 정 선생께 물으니 네 몸이 많이 좋아져서 양주에 가는 것 정도는 조심만 한다면 괜찮다고 하시더구나.”
생각지도 못한 말에 현서의 눈이 커다랗게 변하더니 이윽고 입이 귀에 걸리기 시작했다.
귀애하는 아들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기뻐하는 것을 보니 대부인은 덩달아 기쁘면서도 속이 아렸다. 아프지만 않았으면 진즉에 형들처럼 상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을 아이인데.
사실 대부인은 현서를 양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올 손님이라 부르기도 싫은 사람들과 마주치게 하는 것은 더 싫었다. 금세 끝날 소란이 아니라 되도록 현서가 멀리 있는 것이 좋았다.
석청담도 후보에 있었지만 석청담은 서녕에서 너무 가까웠다. 고민하던 차에 현진에게서 서신이 왔다. 현진이 사정을 알고 서신을 보낸 것은 아닐 테지만 그 연락이 참으로 적절하긴 했다.
정 의원에게 확답을 듣고도 여러 모로 따져 본 뒤 내린 결정이 여전히 불안했으나 현서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이것 하나는 다행이다 싶었다.
“기쁘니?”
“네. 소자 너무 기쁩니다! 어머니가 힘써 주신 거죠? 너무 감사해요!”
현서도 집에서만 산 것은 아니었다. 일 년에 서너 번이지만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가기도 했고 석청담에 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양주만큼 먼 곳은 이번이 처음으로 그간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현서가 멀리 가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전부 부친 아니면 형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허락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속으로 반대는 할지언정 번복은 못 한다는 얘기였다.
현서는 너무 기뻐서 어머니를 껴안고 이리저리 덩실거렸다.
“어휴, 다 큰 애가 남사스럽게.”
늦둥이 막내라 그런지 어릴 때부터 살갑기론 다른 아이들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예의를 차린다고 내외하는 게 내심 서운했던 대부인은 이 순간 아들의 애교를 실컷 즐겼다. 시녀들과 어멈을 내보낸 것은 대단한 비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다 이것을 위해서였다.
“집 밖을 나서면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 네 안위를 제일로 생각해 주렴. 네가 몸 건강히 웃으며 집에 돌아오는 걸 기다리마.”
“네, 어머니. 소자 약속할게요.”
호 대부인이 다정하게 아들의 머리를 넘겨주며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눈동자에 비치는 걱정과 다정함에 현서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으며 약속했다.
“진이가 저녁에 온다니, 자세한 얘기는 진이에게 듣고, 준비부터 해두렴.”
“네, 어머니. 소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이 형은 저녁 식사 전엔 오는 거죠? 어머니, 저녁 식사 때 뵐게요.”
“그래. 그래, 조심히 가렴.”
현서는 알겠다고 답했지만 곧 뜰에서 도련님 천천히 가시라는 얘기가 들려와 결국 저녁 시간에 대부인은 다시 한번 조심을 당부해야만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쩌다가 지금 이 배에 올라와 있는지를 회상하던 현서는 현진의 물음에 활짝 웃으며 답했다.
“형이 복덩이라는 생각.”
꽃이 피는 것처럼 주변이 화사해지는 웃음에 뱃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한순간에 시선을 사로잡는 미인의 미소였다.
현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사실 현진을 비롯해 호씨 성이 붙은 사촌들은 전부 비슷비슷하게 생겼는데, 그중에 백부와 백모님의 좋은 점만 물려받은 것인지 현서는 모두와 닮았으면서도 특출 났다.
병색은 화사한 미모에 어떤 흠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눈을 끄는 묘한 분위기만 자아낼 뿐이었다. 백부님과 백모님이 현서의 혼사에 방관적인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매파들이 문지방 닳도록 호부를 오간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한 것들이 꼬이지 말아야 할 텐데.’
현진은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그도 호씨 성을 달고 있는지라 사촌 동생이 웃는 게 더 좋았다.
“그렇게 좋으냐?”
“그러엄!”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뱃길은 순탄했다. 봄이라 물살이 강하지도 않고 관선이 많이 오가는 물길이라 밤에 항해해도 안전했다. 게다가 호부의 상선들도 늘 이 강을 오갔다. 안전한 길이라 해도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이렇게 함께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현서와 현진은 물길이 갈라지는 곳까지 호부의 상선들과 동행할 예정이었다.
“현진 도련님.”
사환 한 명이 다가왔다.
“명첩을 가지고 온 배가 저희 배 옆으로 와 승선 허락을 받겠다고 합니다. 사공을 제외하면 두 분이 계시는데 도련님의 친우분이시라고 합니다.”
“내 친우? 내 정신 좀 봐. 서아야, 잠시만.”
현진이 짚이는 곳이 있는지 급히 뱃전으로 가더니 얼마가지 않아 키가 훤칠한 남녀 한 쌍을 데리고 왔다. 현진의 손님이 궁금했던지라 현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인사해. 이쪽은 내 친구인 사무문과 동생인 사수연이다. 이 두 사람과 동행하기로 하였는데 내가 말하는 걸 잊었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호현서라고 합니다.”
현서가 공수를 하자 사무문이라고 소개받은 남자가 손을 덥석 잡아 왔다. 놀란 현서가 무슨 행동을 하기도 전에 사무문은 사수연에게 등짝을 맞고 떨어져 나갔다.
“무슨 짓이야!”
“오라버니!”
찰싹찰싹, 찰진 소리가 뱃전에 가득 울렸다. 사수연은 오빠의 등짝을 매섭게 후려갈기면서도 예의 바르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오라버니가 악의는 없는데 눈치도 없어서 초면에 무례했습니다.”
“아야. 아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아야. 아니, 현진의 동생이면 내 동생이나 다름 없……. 아야. 아야.”
현서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서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아야 하는 남자가 등을 맞을 때마다 불판에 올라간 오징어처럼 몸을 배배 꼬더니 곧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그간 들은 얘기가 많아, 혼자 너무 반가워서 그만 실례를 하였습니다.”
“괜찮습니다. 형님의 친구분이라면 제게도 형님이신 걸요. 편히 하세요.”
이런 부산스러움은 석청담에서도 보지 못했다. 호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현서가 아프고 나서는 사람들의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던 탓이다.
정말 밖에 나왔구나. 여행 중이구나. 기분이 좋아진 현서가 배시시 웃자 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몽수라도 뒤집어씌우고 다녀야 하나.’
현진이 제법 진지하게 몽수 구매를 떠올렸다. 현진이 엄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이사가 주위를 환기시켰다.
“도련님, 약 드셔야 합니다.”
손님이 왔는데 차를 권하기 전에 현서의 약부터 챙기다니 과연 호부의 사람인 건지, 아니면 방금 전의 일로 사무문이 미움을 샀는지,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약 그릇을 받던 현서는 두 쌍의 시선이 약 그릇을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손님이 계신데 차도 권하지 않고, 정신이 없긴 했다.
현진 역시 친구들을 세워두었다는 걸 깨닫고는 사씨 남매에게 자리를 권했다. 뱃전에는 현서가 최대한 편하게 머물며 경치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곳이 있었다. 차와 다과가 준비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사씨 남매, 그리고 새신랑이 될 송가장의 장남은 현진이 강호에 나가 사귄 첫 친구들이었다. 사문이나 가문을 벗어나 만난 첫 인연이니 각별하다면 각별한 사이인 셈이다.
‘자문원이 강호에 나와 처음 사귄 친구가 곽다순이었나?’
―그 머저리를 기억해서 뭐 해.
‘하긴.’
곽다순은 자문원의 좁다란 세계에 몇 안 되는 친구였으나 그 끝이 좋지 않았다. 현서는 곽다순이 정말로 배신했는지, 아니면 오해였는지를 알아볼 마음이 들지 않아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현진과 그의 친구들을 보니 문득 떠올라 나서 옥에게 말해 본 것이다.
강물이 잔잔한 덕인지 걱정했던 뱃멀미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육지에 비해 배 위에선 빨리 지치는지라 현서는 두툼하게 깔아놓은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안부 묻기가 끝나고 나온 대화의 태반은 강호 얘기였다. 오가는 대화를 자장가 삼아 현서는 졸기 시작했다.
선잠이라 현진은 현서를 안고 선실로 가는 대신 이사에게 손짓을 했다. 이사가 건네준 화우능(花羽绫) 장포로 현서의 몸에 한기가 들지 않게 여며주는 것을 사씨 남매가 보고 있었다. 몸이 약한 사촌 동생을 끔찍이 생각하는 것을 알았기에 놀리는 말 한마디 없었다. 현서와 팔찌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여전히 현서가 천수를 누리지 못할 거라 여겨 더욱 그랬다.
현서는 달게 잠이 들었다가 사무문의 목소리에 청각이 잠의 경계에서 끌려 나왔다. 하지만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물소리처럼 들리는 이야기들을 한 귀로 흘리며 기분 좋게 잠에 취해 있었다.
“나는 천하를 놀라게 하는 검이라 경천검(驚天劍)이라 부르는 건 줄 알았지. 그게 비웃는 뜻일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냐.”
“연이 네가 저렇게 무식한 오라비를 두어서 고생이 많다.”
“말도 마세요. 어른들께서 오라버니의 별호에 무치(無恥)나 무지(無智) 따위가 붙을까 봐 전전긍긍하신답니다.”
“연아, 네 오라비 귀 멀쩡하거든.”
“귀만 멀쩡하면 뭐 해. 그래, 그래서? 다른 데도 아니고 검각이 있는 항도(杭騊)에서 경천검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는데도 네 머리가 여전히 목 위에 붙어 있는 게 너무 신기하다.”
“말도 마라. 그때의 소름끼치는 침묵을 네가 봤어야 해. 객잔의 모든 눈동자가 나를 향하더라니까. 시선이 칼날이었으면 시신도 못 건졌을 거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나야말로 억울하다고 했지. 패천검(覇天劍)이 뭐가 모자라단 말이냐. 검선이 살아 돌아와도 패천검을 인정했을 거라고 했지.”
다시 떠올려도 억울한지 감정이 격해진 사무문이 술잔인 것처럼 찻잔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현서가 살짝 뒤척이자 현진이 도끼눈을 떴다. 사수연이 소음을 염려해 등짝을 때리는 대신 손가락으로 사정없이 옆구리를 찔렀다.
날렵하게 움직여 가볍게 찌르지만 통증은 확실하다. 소리도 못 내고 몸을 둥글게 말아 아픔을 참는 친구를 보며 현진은 사수연의 지법(指法)이 전보다 더욱 늘었다고 감탄했다.
“전부터 느꼈지만 네 명줄은 정말 길구나.”
“오라버니는 어찌 이리 경솔해. 패천검 유위람이 검선의 도움을 받았다는 얘길 모르는 자가 강호에 어디 있어? 검선께 구명받은 자들이 개웅산에 사당을 지으려는 것을 패천검이 강하게 주장해 항도에 묘와 사당을 지은 걸 알면서도! 오라버니는 거기서 그런 말을 해!”
“컥. 콜록, 콜록.”
수연이 다시 사무문의 옆구리를 찌르며 장맛비 같은 잔소리를 쏟아부으려 하였으나 현서의 성대한 기침에 저지되었다.
“서아야!”
“그. 괜. 크컥. 컥. 콜록콜록.”
“말하지 마라. 기침이 더 나지 않아!”
현진이 깜짝 놀라 손수건을 건네주곤 현서의 등을 쓸어내렸다. 기침이 한번 시작되면 쉽게 멎지 않는다. 이사는 발을 동동거리며 약을 준비했으나 먹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침하고서야 겨우 멈췄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다행히 수건에 피가 묻어나진 않았지만 목이 따가웠다.
기침이 멎자 현진이 현서를 재빨리 안아 들고는 선실로 사라졌다. 이사가 종종거리며 약 그릇을 들고 따라갔다.
사씨 남매는 말로만 들었던 현서의 약함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바람에 크게 놀랐다. 외유를 나올 수 있을 만큼 회복된 것이 이 정도라면 예전은 어떠했단 말이야? 호현서가 깃털, 유리, 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 이가 늘어났다. 그들은 현서의 건강을 걱정하며 사환의 안내를 받아 각자의 선실로 향했다.
“지금이라도 배를 정박시키고 의원을 데리고 와야겠다. 이사, 선장을 불러오너라.”
“아냐. 이사, 가지 마. 형. 잠깐 쉬면 괜찮아. 기침이 잘 안 멈춰서 그렇지 어디가 나쁜 건 아냐.”
“그게 나쁘지 않은 거면 어디가 나쁘다는 얘기야.”
배를 뭍에 댈 수 없으면 거룻배로 옮기겠다는 말까지 하는 것에 현서는 필살기를 쓰기로 했다. 잘 안 쓰지만 한 번 쓰면 집안사람들에게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먹힌다. 현서는 깊게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내리깔고는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도 알다시피 완전히 낫는 건 아니잖아. 이런 기침은 심한 것도 아니고. 이 정도로 의원을 불러야 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호부에만 있어야 하는 거네.”
현서가 이렇게까지 말하면 현진은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 알았다. 형이 네 말 다 들을 테니 더 말하지 마라.”
현진이 현서의 등을 쓸었다. 조금이라도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면 백모께서 현서의 외유를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걸 알았기에 현진도 물러선 것이다. 이사도 이번에는 현서 편을 들었다.
“정 의원께서 의원을 불러야 할 경우에 대해 꼼꼼히 적어주셨는데, 이 경우에는 괜찮습니다.”
현진은 물론이고 현서의 눈도 동그래졌다.
“정 의원께서 적어주셨다고?”
“네, 책이 있습니다. 도련님께서 석청담에 가셨던 그해에 처음 만들어서 꾸준히 증보했지요.”
책이라니. 정 선생님이 주기적으로 자신의 상태와 그에 따른 대처법을 만희당 사람들에게 강연한다는 건 알았지만 책까지 만들었을 줄이야. 집안의 과보호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현서의 착각이었다.
“이사, 그 책 나도 보여줘.”
“네, 현진 도련님.”
현진이 너무도 당연하게 책을 보겠다고 나섰다.
“그럼 나도 볼래.”
“안 됩니다.”
“뭐? 왜?”
내 상세와 그에 대한 대처법이라면서 왜 내가 보면 안 되는데? 현서의 눈이 불만으로 가느다래졌다. 하지만 이사는 태연하게 말했다.
“정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도련님이 이 책을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상세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조심하게 될 거라 하셨어요. 주인어른과 주인마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에요.”
현서는 무척이나 억울해 했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현서가 불퉁한 얼굴로 현진을 바라보았지만 현진은 웃으며 약 그릇을 내밀 뿐이었다.
“약이 알맞게 식었네, 약 먹자.”
현서는 책을 보겠다는 생각을 접고 얌전히 약을 받아먹었다.
“나는 이제 쉴 테니까. 형은 친구분들께 가. 안 좋은 모습 보여 죄송하다는 말도 전해주고.”
현진도 이사도 전부 선실에서 물러났다. 배 안이라 크기가 작긴 해도 만희당의 방처럼 꾸며놓은 곳이었다. 현서가 침상의 베개에 기대며 크게 숨을 내뱉었다.
‘정말 놀랐어.’
―내가 더 놀랐다. 목이 아프진 않고?
‘응, 이제 괜찮아.’
―너도 참,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느냐. 자문원이 한 일은 마땅히 칭송받을 만한 일이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만. 기껏 해봤자 위령비(慰靈碑) 정도인 줄 알았지. 사당에, 묘라니.’
현서가 여전히 벌건 얼굴을 문질렀다. 얼굴에 열이 오른 건 기침 탓만은 아니었다. 사무문의 목소리가 커질 때쯤 잠이 반쯤 깼던 현서였다. 일어나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얘기가 들려 사레가 들린 것이었다.
‘패천검 유위람이라.’
전생이라도 해도 현서가 자문원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꿈으로 꾸었다고 해서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현서는 자문원의 인생이 크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현서가 자문원의 제자였다면 사부의 복수라는 과업이 있겠지만, 현서는 자신을 자문원과 다음 세대를 위한 연결 고리 정도로 보았다. 그래서 자문원의 개인사보다는 무공과 관련된 것들만 신경 썼다.
때문에 사람에 관한 것은 기억들을 좀 더듬어야 했다. 한 번 꾸었던 꿈들은 잊히지 않았지만, 오래전 읽었던 책이나 마찬가지라 떠올리려면 시간이 걸렸다.
―기억나?
‘응. 생각나. 검각의 어르신이었지.’
현서가 샐쭉 웃었다.
자문원과 처음 만났을 때 유위람은 아홉 살이었다. 하지만 배분은 자문원보다 윗줄이라 윗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했다. 일인전승으로 오로지 자신과 스승님밖에 없었던 자문원은 그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평했다.
유위람은 너무도 뛰어난 자질을 가져 자칫하면 화가 될까 싶어 검각의 은거기인 세 명이 동시에 제자로 들였다고 했다. 그들이 전전대의 고수라, 배분으로 따지면 유위람은 당시 검각 각주의 사숙뻘이 되었다.
검각의 모든 제자들은 유위람을 사숙조(師叔祖)라 불렀다. 그러나 외부인이 부를 마땅한 호칭이 없어, 검각의 어르신, 혹은 제자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자문원이 유위람에게 가진 첫인상은 저것이 반짝반짝한 자질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유위람은 차가운 얼굴을 한 것치고는 자문원을 제법 잘 따랐다. 쫓기고 있을 때 개웅산으로 틀겠다는 자문원의 판단을 가장 먼저 지지한 것도 열 살의 유위람이었다.
현서의 꿈에서 유위람에 대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쨌든 자문원이 목숨을 걸어 살린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이가 잘 살고 있다니 좋은 소식인 셈이다.
‘잘 자랐나 보네.’
―그 자질과 그 배경으로 잘 자라지 못하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지.
검각은 거대 문파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곳이다. 천하제일검을 가장 많이 배출했다는 자부심이 있는 곳. 그래서 당시 자문원을 깔보는 이들은 자문원이 검각의 이름 아래서 겸손해질 것을 강요하곤 했다.
당대 검각 제일 검수가 자문원과 스무 합도 겨루지 못하고 졌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유위람의 스승들이 나온다면 너 같은 건, 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가끔은 유위람이 자라면 너 같은 건, 이라는 말도 있었다. 자문원에게 천하제일검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지만 면전에서 욕먹는 것이 딱히 좋은 일도 아니었다.
-항도에 구경 갈래? 나 궁금한데.
‘아니. 싫어.’
현서가 단칼에 거절했다. 자문원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생의 자신이 모셔져 있는 사당이라니 어딘지 낯 뜨겁게 느껴졌다.
사씨 남매가 도착하고 이틀 뒤에 배가 중간 기항지인 안계현에 도착했다. 식량과 식수를 보충하고 이곳에 내려야 할 물건들도 있기 때문에 하루를 묵어야 했다.
안계현 자체는 크지 않지만 배들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항구 근처는 시끌벅적했다. 현서 일행은 호가 상단에서 수배해 준 객잔으로 갔다. 금수루(金水樓)라는 이름을 가진 총 오 층 건물로 안계현의 명물이었다. 오 층에서 보는 경관이 명물이라 오 층을 전부 예약했다. 현서가 계단을 오르려고 하자 사씨 남매가 걱정했다.
“진아, 네가 안고 올라가는 게 더 낫지 않겠어?”
현진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그렇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안다.
“몸 상태가 좋을 때 너무 움직이지 않는 것도 좋지 않아. 호부에 있을 때도 매일 산책을 했어.”
“호 공자가 뱃마루를 여러 번 오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래서였군요.”
사수연이 재빨리 대답했다. 눈치 없는 오라비가 덥석 안아 데리고 갈까 봐 먼저 올라가 보겠다는 말을 하곤 소를 몰 듯 사무문을 몰아 층계 위로 사라졌다.
계단을 이렇게 많이 오르는 건 처음이었지만 중간 중간 쉬어가며 전부 올랐다. 오 층에 다 오르자 현진과 이사가 박수라도 칠 기세로 칭찬했다.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부끄러울 뻔한 현서가 한숨을 쉬었다. 현서의 부끄러움에 조금도 공감을 하지 않는 현진은 감탄을 담아 말했다.
“백모님께 서신을 써야겠다.”
“응. 어머님께 내 안부도 전해줘.”
가족이 이러는 건 이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사씨 남매가 곁에 없어 다행이었다. 현서는 서신을 쓴다는 현진을 내버려 두고 이사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식사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 먼저 씻으시겠어요?”
“응.”
배에서는 아무래도 씻는 것이 쉽지 않아 탕에 들어가 씻는 것은 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한쪽에 욕조가 들어오고 병풍을 둘렀다. 현서는 목욕용 중의로 갈아입고 탕에 들어갔다.
“시중은 필요 없어.”
“네. 도련님. 필요하면 부르세요.”
도련님이 몸이 따뜻해질 때까지 탕 안에 가만히 있는 걸 아는 이사가 물러갔다. 현서가 발 받침대에 올라 발끝부터 탕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물에서 은은하게 차향이 났다. 약간 뜨겁게 느껴질 정도의 물에 푹 잠겨 있으니 곧 온몸이 노글노글해졌다.
―졸지 말고.
옥이 잔소리를 했다. 현서는 어지간해서는 수련을 거르지 않았다. 상황이 안 되면 짧게라도 했다. 밖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검법에 소질도 없고, 의욕이 없는 것과 달리 내공(內攻) 수련에 대한 의욕은 많았다. 내가 수련은 소질이 없어도 꾸준하기만 하면 되는지라 현서는 더 열심히 했다. 호부의 엄청난 지원도 있었지만 현서가 이 나이에 여행을 나올 만큼 몸을 회복할 수 있게 한 일등 공신이기 때문이었다.
옥은 검법을 배울 마음이 전혀 없었던 현서를 건강이라는 커다란 미끼로 살살 꾀었다. 열네 살의 순진했던 현서는 옥이 권하는 대로, 가장 기본 검초인 천이(天理) 십이구결부터 배웠다.
현서는 눈을 감고도 투로를 그릴 수 있다. 붓으로 종이에 그려 낼 때는 그랬다. 그러나 붓을 휘두른다면 사구결까지나 겨우 흉내나 낼 정도였다.
옥은 그것을 흉내라고 하지도 않았다. 누가 보아도 무공 수련을 의심하기는커녕 벌레를 잡는 줄 알 거라며 혹평했다. 혹평이라고 하나 마음이 상하진 않았다. 현서도 매우 공감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옥은 끈기 있는 스승이었으나 결국 현서가 심하게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현서도 억울하긴 했다. 의욕은 없었지만 배울 때 절대로 대충하진 않았다. 정말 한 점의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 했다. 그러나 머리로 떠올려보면 다 될 거 같은데 몸으로 구현할 수가 없었다.
옥은 오래도록 미련을 못 버렸지만 현서는 안 된다는 걸 받아들인 이후로는 재빨리 노선을 변경했다.
‘꼭 검술을 배워야 건강해지는 건 아니잖아.’
현서의 주장은 타당했고, 옥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욕조에 앉아 있던 현서가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스윽 움직이자 손가락을 따라 물이 움직였다. 수면 위에 맞댄 손을 들어 올리면 마치 끈적끈적한 풀물처럼 물줄기가 손가락에 따라 붙었다.
자문원은 검과 체술 등을 익히며 배운 방법이지만 현서는 그럴 수 없어서 옥과 머리를 맞대어 수련 방법을 바꾸었다. 하지만 물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현서는 물줄기를 여러 갈래로 만들거나, 아니면 두껍게 만들거나 하는 식으로 연습했고 열에 일곱 정도는 성공했다.
―이제 그만하자.
현서의 몸으론 너무 오래 수련하는 것도 좋지 않다. 또, 물이 식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딱 맞춰 이사가 방으로 돌아와 병풍 너머에서 불렀다.
“도련님?”
“응. 다했어. 이제 나갈래.”
이사가 큰 면포를 들고 병풍 안으로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말리는 도중 현서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감기자 이사가 조용히 물었다.
“저녁은 방에서 드시겠어요?”
“……아, 아니. 괜찮아.”
현서가 잠에서 깨려는 듯 머리를 확 흔들었다. 느슨하게 땋아 묶은 머리채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각자 방에서 잘 쉬고 왔는지 식사를 위해 모였을 땐 다들 표정이 좋았다.
“안계현은 차가 유명해 차를 이용한 요리가 많다고 하더라.”
“좋은 향이 난다고 싶었는데 차향이었군요.”
식탁엔 이미 요리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사가 두부찜과 민물생선탕을 덜어 현서 앞에 놓았다.
이사가 골라준 음식들은 맛이 강하지 않고 새콤달콤한 맛을 주로 쓰는지라 현서가 먹기에도 부담이 없었다. 생선가루를 넣은 흰죽, 데친 채소와 생강을 넣은 두부요리, 차를 넣고 끓인 생선탕, 쌀가루를 넣고 찐 돼지고기 등 전부 입에 맞아 현서는 과식을 했다.
“잘 먹는 건 좋은데,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니야?”
현진이 넌지시 걱정할 정도였다. 그 말은 들은 사씨 남매의 동공이 흔들렸다. 현서와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오늘이 처음인 탓이었다. 남매가 보기에 죽은 종지에 들었고, 입에 댄 음식의 가짓수도 적었다. 더욱이 모두 한두 입 맛본 것이 고작이었다.
“밖에 나와서 많이 움직인 탓인지 입맛이 도네.”
‘입맛이 돌아 저 정도라고?’
사무문은 놀랐지만 현명하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사수연의 젓가락이 유난히 뾰족하게 보인 탓에 없던 눈치가 생겼다.
현진과 사씨 남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평소보다 많이 먹었고, 워낙 천천히 먹는지라 젓가락을 내려놓았을 때는 모두 식사가 끝이 나 있었다.
식탁을 놓은 방은 창이 커다랬는데 그 전부를 열어두었다. 해가 져 배는 더 들어오지 않지만 항구라 밖이 시끌시끌했다.
빈 그릇을 치우고 차와 간식을 가져다 두기 위해 사환들이 오갔는데 그중 열 살 남짓 되는 어린 점소이가 있었다. 제자를 들여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로는 열 살 남짓의 아이들을 습관처럼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쪼르르 다가왔다.
“시키실 게 있으신가요?”
현진과 남매의 눈도 현서에게 모였다. 현서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별건 아니고, 얘, 거기 앉을래?”
현서가 식탁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등자(镫子) 하나를 가리켰다. 아이는 주저했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전부 괜찮다고 하니 등자에 앉았다.
“우린 여행객인데 뭐 재미있는 이야기 같은 건 없는지 궁금해서.”
“그런 것이라면 소인 말고 어른들이 해야…….”
아이가 주저하는데 열린 창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싸움 소리였다.
“대단한 얘길 들으려는 게 아냐. 그래. 저기 창밖의 사람들이 누구고 왜 싸우는지 알 거 같아?”
아이가 등자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고 왔다. 다행히 아는 얘기였는지 아이의 표정이 좋아졌다.
“네, 알아요. 저 아저씨들은 갱씨 아저씨와 공씨 아저씨인데 두 분 다 어부예요. 요기서 좀 더 상류로 올라가면 거기서 고기를 많이 잡거든요. 근데 고기잡이 그물에 이상한 게 올라 왔대요. 삼 척(약 90cm)쯤 되는 관 같은 게 나왔는데 나무관은 아니었대요. 예전 홍수에 어디 무덤이 휩쓸린 거 아니냐는 얘기가 나와서 어부 아저씨들이 묻어주었대요. 얼마 후에 누가 그 관을 묻은 자리를 찾는 사람이 나왔대요. 후하게 사례하겠다고 해서 갔는데 빈터만 있더래요. 갱씨 아저씨와 공씨 아저씨가 서로 몰래 팔았다고 믿어 싸우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아닐 거라고 말렸는데. 원래 저 두 분은 사이가 안 좋았거든요.”
그저 동네 술주정뱅이들 얘기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그 관을 사러 왔다는 사람은 외지인이니?”
“모르겠어요. 도련문(屠鍊門)에서 나왔다는 얘기도 있고 외지인이라는 얘기도 있고. 저희 주방장님은 그냥 관 얘기부터 다 거짓말이라고 하셨어요. 관을 돈 주고 사겠다는 사람을 봤다는 것도 저 두 사람뿐이었거든요.”
“정말 관이었을까?”
한여름에 들을 법한 괴담처럼 들리기도 했다.
“관이었는지도 몰라요. 주방장님 얘기론 고기 잡는 사람들은 그, 그, 불결? 아니, 불길한 걸 싫어한대요.”
점소이가 어려운 단어를 기억해 내느라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떠올리곤 말했다. 바다든 강이든 배를 타는 이들 사이엔 금기가 많다. 조금이라도 불길한 것이 나오면 위험하다고 믿으니 관이든 아니든 재빨리 손을 터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터.
납득할 만한 얘기였다.
그사이 싸움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는지 조용해졌다. 현서는 아이에게 차를 권했다. 아이는 주저했지만 원래 이야기꾼은 차도 술도 다 마시는데 넌 어려서 차를 마시는 거라고 했더니 잘 마셨다.
이 손님들이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준다는 것을 안 아이는 신이 나 그 후로 여러 얘기를 했다. 동네 강아지 얘기, 가장 맛있는 과자를 파는 과자점 얘기 같은 자신이 아는 얘기에서부터 쌍어방(雙禦幫)에서 데릴사위를 뽑을 거라는 손님들에게 들은 얘기, 관군의 눈을 피해 생긴 도적이 나온다는 지명 같은 유익한 정보까지 다양했다.
현서를 비롯한 일행은 모두 아이의 입담에 크게 만족했다. 성인 이야기꾼에게 맞는 값을 치르자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현서는 아이를 부른 뒤 자신의 소매를 뒤졌다. 조카들을 비롯해 만희당 식솔의 자녀들에게 자주 했던 행동이었다.
“갓 만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맛있을 거야.”
비단주머니에 기름종이로 싼 과자가 몇 가지 들어 있었다. 전부 장기 보관용이었지만 그래도 맛이 나쁘진 않을 터였다.
곁에서 보던 사수연이 흥미를 보이자 현서는 사수연에게도 주머니를 하나 주었다. 집에 있을 때는 낱개로 넣어 다녔지만 밖에 나와서는 주머니에 넣어 다녔다. 주머니를 열어본 사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감사 인사를 표했다.
❖ ❖ ❖
다음 날 일행은 점심을 먹기 전에 승선했다.
점소이가 가르쳐 준 간식 가게의 간식이 괜찮았는지 이사가 몇 가지를 사 왔다. 갓 구워 따뜻한 것 몇 가지를 빼고 나머지는 기름종이에 쌌다. 소일거리 한다고 이사 옆에 붙어 현서도 같이 종이를 접었다.
“과자를 사러 가서 들었는데, 칠암문(七暗門)이 봉문했대요.”
볕이 좋아 현서는 갑판에 만들어진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현진과 사씨 남매도 곁에 있었다. 이사의 말에 그 셋 모두 흥미를 보였다.
“봉문이라고?”
“직접 가서 봤다는 사람은 없었는데, 오늘 안계현에 도착한 사람들이 말해서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봉문 이유는 뭐래?”
“그걸 아는 사람들이 없어서 시끌시끌하지 뭐예요.”
이사가 대답했다.
칠암문은 정사지간의 문파로 연주와 양주 등지에서 제법 이름이 난 곳이었다. 주로 암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정사지간으로 분류되었으나 이 대 문주인 비영도(飛影刀) 교암추가 무골호인이라 주변의 평도 좋았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봉문하지 않는다. 그러니 봉문을 하게 된다면 그 전부터 뭐라도 소문이 돈다. 그러나 이사의 말을 들으면 하루아침에 봉문했다는 소리로 들렸다.
봉문했다는 소문은 도는데 이유에 관한 말은 돌지 않을 만큼 먼 거리도 아니다. 칠암문은 석계현에서 고작 백 리(약 40km)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세상의 모든 문파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문파가 이런 식으로 봉문을 했다는 얘기는 현진과 사씨 남매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비영도 어르신이라면 송가장에서 분명 초대장을 보냈을 거야.”
“당연히 그렇겠지.”
“송가장에 도착하면 알게 되겠네요.”
봉문에 관한 이유도 없으니 뜬소문일 확률이 높았다.
‘아는 게 있어?’
―칠암문이라. 딱히 짚이는 게 없는데.
‘나도 그래.’
현서도 봉문 얘기에 옥이랑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자문원과 딱히 접점이 없던 곳이라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사가 사 온 과자 포장이 다 끝이 나자 배의 주방장인 만씨가 새 과자 찬합을 들고 나타났다.
“도련님, 소인의 과자도 싸두셔야지요.”
“응. 그럴게. 근데 그 전에 식사부터 할래. 과자 말고도 엄청 좋은 냄새가 나.”
“여기 나는 생선들이 그렇게 싱싱할 수가 없네요. 통째로 튀겼으니 뼈까지 드세요. 연해서 걸리는 것도 없을 겁니다.”
만씨의 자신 아래 과자를 싸던 탁자 위로 식사가 차려졌다. 그리고 사씨 남매는 어제 현서가 정말 많이 먹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자주 식사를 같이 하며 사씨 남매도 적응했다. 다 같이 담소를 나누다가 사무문이 등짝을 맞는 것을 보는 일도 익숙해졌다.
중간에 이틀 정도 비가 왔지만 그 외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비는 부슬비였고 바람이 좋아서 예정보다 며칠 빠르게 석계현에 도착했다.
배에 있는 동안 현서는 사수연과 친해졌다.
남매 둘 다 성격이 시원시원했지만 눈치가 없는 사무문보단 사수연이 더 대하기가 편했고, 나이도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서였다.
“자우정(紫雨亭)이요?”
“자정향 군락지 근처에 폭포가 있대. 꽃이 필 때면 보라색 비가 내리는 듯해서 자우정이라고. 마침 자정향 꽃이 필 무렵이고 일정도 늦지 않으니 괜찮으면 들렸다 가는 게 어때?”
사수연이 시간이 남았으니 근처의 유명 관광지를 들렸다 가자는 말을 했다.
양주 철서(喆徐)로 가는 길목에 있는 정산에 꽃으로 유명한 정자가 있단다. 자정향은 양주 근방에서만 주로 피는 꽃이라 다들 본 적이 없어 모두 찬성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길이라 말을 타고 갈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짐들은 먼저 송가장으로 보내고 단출하게 이사를 포함해 다섯 명만 산에 가기로 했다.
말을 타는 문제로 한 차례 실랑이가 있었다. 현서는 혼자서 말을 타겠다고 말했지만, 그 누구도 현서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말도 딱 네 필이었다.
“그럼 소인이 곁에서 고삐를 잡겠습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사는 현서가 말을 혼자 타면 자신은 걷겠다고 말했다. 배에서 기침 건으로 한 번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현서가 양보해야 할 차례였다. 불퉁해진 표정으로 현진의 말에 오르는 현서를 보며 사씨 남매가 웃었다.
‘속았어.’
―아서라. 가마를 타는 거보단 낫지 않아.
현서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일행이 모두 말을 타자, 기다렸다는 듯 몇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미리 수배한 안내인이었다. 항구에 도착해 배에서 내려 객잔에서 하루를 묵었다. 사수연이 자우정 얘길 꺼낸 건 그날 밤이었는데 하루 사이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현서가 끝까지 말을 혼자 타겠다고 우겼으면 태울 가마까지 다 준비된 상태였다. 전생의 기억이 있다고 해도 현서는 천하의 부를 갈라먹는 대상가의 막내아들이었다. 따지면 어지간한 황족, 왕족보다 귀하게 자랐다. 그러니 산길 초행에, 그것도 몸이 약한 현서가 있는데 대뜸 다섯 명만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야 했다.
“유명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사람이 별로 없군요.”
양주는 호부가 있는 서녕보다 남쪽이라 따뜻해 봄이 한창이었다. 어제 비가 왔다는 걸 말해 주듯 진흙길이었지만 봄비가 봄에 생기를 더했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에 연두색 새잎들이 흔들리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흥을 더했다. 한갓지게 구경할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유명한 관광지치곤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와서 그렇습니다. 자우정까지 가는 길은 보통 두 곳인데 어느 길이든 많이 붐빕니다. 가마가 많아 정체가 생기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봄엔 산의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비가 자주 옵니다. 비가 오면 가마로 산에 오를 수 없으니 비가 오고 난 직후에는 사람이 뜸해지지요. 운이 좋아야 이렇게 사람이 없는 날 도착할 수 있는데, 소인들끼린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말을 합니다. 소인이 여기를 오간지 십 년이 넘었는데 이번 같은 날은 손에 꼽을 만합니다. 아마 귀인들께서 덕을 쌓으셔서 그런가 봅니다.”
설명을 하던 안내인은 넉살 좋게 추켜세우는 아부로 말을 끝냈다. 여유롭게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게 싫을 리 없으니 분위기도 좋아졌다.
“이쪽 갈림길로 쭉 가면 상천관(上天觀)이 나옵니다. 오늘 묵으실 곳이죠. 태화(太和) 팔 년, 무여제께서 친림하신 후로 객청이 무척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미리 객청 별원에 머무르실 수 있게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숙박업소는 아니니 돈을 따로 받지는 않지만 참배객이 시주를 한다. 별원에 자리를 잡으려면 시줏돈이 제법 나갈 테지만 돈의 액수보다 들고 간 명첩이 유효했던 모양이었다.
“우와.”
“정말 이름 아깝지 않네.”
잔뜩 온 비 덕분인지 폭포의 물줄기가 시원스러웠다. 보통 폭포를 바라보는 정자들은 절벽 위에 있는데 자우정은 꽃나무가 잔뜩 우거진 폭포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자잘한 보라색 꽃들이 뭉쳐져 달고 진한 향기를 뿌리고, 비가 오는 것처럼 물방울이 정자 위로 튀었다. 물방울을 맞은 꽃잎들이 흔들릴 때마다 시원하고 달콤한 향이 짙어졌다.
“선경(仙境)이라는 게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건가 봐.”
“그러게요. 정말 멋지네요.”
도착하니 사람이 몇 있었지만, 정자가 넓어 부딪힐 일도 없었다. 더욱이 그들이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교대하듯 사람들이 빠져나가 정자에는 그들뿐이었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인가 봅니다.”
이사와 안내인 일행이 정자에 차와 간식을 준비했다. 귀부인의 행차처럼 비단깔개부터 요강까지 준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산 속의 정자에서 쉽게 누릴 호사는 아니었다.
차와 간식을 먹고 나자 안내인들은 한 명만 남고 나머지는 상천관으로 먼저 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들이 떠나자 현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잠시 산책.”
이사가 따라 움직이려는 것에 현서가 손을 흔들었다.
“형님이랑 다른 분들도 있으니까 괜찮아.”
현서는 이사를 떼어두고 정자 근처를 돌았다. 시원한 물소리와 달콤한 꽃향이 무척이나 좋았다. 서녕에 심기는 어려울 테지만 하우대가 찾아준 저택에는 괜찮을 것 같았다.
‘원림에 심어도 좋을 것 같아.’
옥은 향도 맛도 느낄 수 없지만 좋은 대화 상대였다.
―그래, 조그만 폭포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거기에 정자를 만들어도 되겠다.
폭포 아래로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물은 무척이나 맑았는데 폭포 아래는 제법 깊어 보였다. 살펴보니 정자 아래는 그렇게 깊어 보이지 않아 손이라도 담가 볼까 싶었다. 하지만 괜히 물에 손을 넣었다간 잔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질 걸 알아서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 때 폭포의 포말 사이로 무언가가 흘깃 보였다 사라졌다.
‘저거 사람 아냐?’
옥은 눈이 없지만 기감을 느끼는 것에 무척이나 뛰어났다.
―어린아이다.
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서가 소리쳤다.
“형! 현진 형!”
현서가 부르는 것과 동시에 물을 향해 현진의 신형이 뛰어 들었다. 풍덩 하는 소리도 잠시, 곧 현진이 물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놀라 미끄러지는 바람에 발이 물에 빠졌지만, 현서는 곧 정신을 차리고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란에 모두가 달려왔다.
“어린아이?”
물에 빠져 있던 것은 예닐곱 정도 된 아이였다.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가슴을 강하게 압박하자 물을 토해 냈지만 정신을 차리진 못했다. 현진도 아이를 건지느라 젖었지만 건장한 무인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급히 젖은 아이의 겉옷을 벗겨 냈다. 이사가 말에 매어둔 짐에서 현서의 옷을 하나 꺼냈다. 옷을 받아 든 현진이 급한 대로 아이를 둘둘 말았다.
“옷을 보니 평범한 집안 아이는 아닌 듯한데. 혹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겠나?”
아이의 옷은 손이 많이 가는 채색 비단으로 지은 것이었다. 비단옷이 아니어도 자우정은 저만한 아이가 혼자 올 곳도 아니었다. 안내인이 상천관과 정산 인근에서 일을 했다고 하니 혹 눈에 익은 얼굴일까 싶어 물어보았다. 안내인은 아이를 유심히 살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소인은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아이의 일행이 있을지도 모르니, 자네는 우리와 함께 산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지.”
“나는 아이와 현서를 상천관에 데려다주고 합류할게.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말까지 나를 못 만나면 상천관으로 바로 와.”
“알겠다.”
“알겠어요.”
사씨 남매와 안내인이 폭포의 위쪽으로 향했다. 현진이 자신의 말에 아이와 현서까지 태우려고 하자 현서가 거절했다.
“한시가 급한 건 이 아이야. 형 혼자서 나와 아이를 말에 태우고 산길을 가는 건 위험해. 내가 이사와 남은 말을 데리고 갈 테니 형이 아이를 데리고 먼저 가.”
현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몸이 약하다 해도 당장 쓰러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는 빨리 치료해야 했다. 현진은 잠시 고민했지만 곧 결단을 내렸다.
“조심해서 와야 한다.”
“응. 알았어.”
현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진이 훌쩍 사라졌다. 이사의 입에서 감탄의 말이 터졌다.
“경공이라는 거 처음 보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그러네.”
현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이어 한숨이 들렸다. 그 한숨의 의미를 아는 현서가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경공은 될 줄 알았지.
‘내 말이.’
검술에 관해선 욕심도 의욕도 없었지만 다른 것들은 아니었다. 검술에 시큰둥한 현서가 경공에 의욕을 보이자 팔찌도 매우 반겼다. 그러나 경공도 몸을 쓰는 것이라 검술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참의 도전 끝에 포기했는데 눈앞에서 보니 괜히 부러워졌다.
“별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그러게요.”
둘은 아이에 관한 말을 아꼈다. 단순 사고든 그렇지 않든 간에 쉬이 입에 올려 좋은 일이 아니니 말이다.
말들은 온순해서 데리고 가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현서와 이사는 현진과 헤어지고 한 식경쯤 지나서 상천관에 도착했다. 고즈넉했던 자우정 근방과 달리 상천관에는 참배객이 오가서 부산스러웠다. 상천관 입구에 안내인이 현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맡기고 따라가자 사람이 없는 별원이 나왔다.
“여기 계십니다.”
“고마워요.”
현서는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별원은 정원을 마주 보는 두 채의 작은 원락(院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서는 안내에 따라 왼쪽 건물의 난각(煖閣)으로 향했다.
“형!”
“왔구나.”
침상에 누운 아이를 돌보던 현진이 재빨리 고개를 들어 현서를 살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생길 리도 없건만, 확인을 해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현서가 과장되게 손을 들어 팔랑거려 주자, 그 모습에 현진이 가볍게 웃었다.
“아이는 어때?”
“산 아래서 의원을 부르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도관에 부탁드렸다. 조카가 자우정 근방에서 놀다 미끄러져 물에 빠진 것 같다고 했어. 천사(天師: 도사)께서 보시곤 물에 빠진 탓에 기절한 것뿐 다른 상처는 없다고 하시더구나. 곧 약이 올 거야.”
“응. 알겠어. 여긴 내가 있을 테니 형은 친구분들께 가보아.”
현진이 이사에게 현서를 부탁하곤 밖으로 나섰다. 현진이 나가고 곧바로 별원에 배정받은 하인이 약을 들고 왔다.
“당장 먹여야 하나?”
“아닙니다. 소공자님께서 깨어난 뒤 드시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
“다른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나는 여기 있을 테니 이사가 알아서 해줘.”
“네.”
이사는 우선 씻을 물부터 준비시켰다. 미리 준비해 놓았는지 따뜻한 물이 곧 방에 들었다. 목욕을 할 수는 없어서 가볍게 손과 발만을 씻었다. 아까 물에 빠졌던 신발을 그대로 신고 온 걸 이사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앞서 짐을 가져다 두어서 갈아입을 옷도 있었다. 현서는 중의 위에 가벼운 장포만을 걸치곤 요대로 느슨히 묶었다.
“곧 약 드셔야 해요. 드시고 싶은 건 없으세요?”
“입이 깔깔해. 죽이면 괜찮아.”
“네.”
난각의 침상도 데우고 숯 화로도 가져다 두어 방이 훈훈했다. 봄이라 해도 산의 밤이고 물에 빠진 아이가 있어 신경 쓴 것이다. 현서는 맨발로 침상에 올라 색색 고른 숨을 쉬고 있는 아이의 곁에 자리 잡았다. 볼이 불그스레한 것이 열이 오르는 중인 듯했다.
깨면 약을 먹이라고 했는데, 깨워서 먹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현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어 아이의 볼을 만졌다. 열을 재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거기에 보태 은근슬쩍 다른 것도 살폈다.
‘무림의 아이구나.’
근골이 좋아 보여서 혹시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미 무공을 배운 흔적이 있었다. 현서의 손가락이 톡톡 이불 위를 두들겼다.
‘이상한 일이야.’
철서성 밖이라고 해도 이곳은 송가장의 앞뜰이나 마찬가지다. 소규모 무뢰배가 있을지 몰라도 무공을 배운 아이가 이런 일을 당하는 건 이상했다. 개인적인 원한? 아니면 어떤 미친놈, 혹은 그에 준하는 미친 집단이 있나. 그렇다곤 해도 대담하다.
송가장의 혼례가 코앞이다. 이게 무림의 일이라면 누군지 몰라도 대놓고 송가장의 뺨을 때린 격이 아닌가. 단순 사고일 수도 있으나, 혹시 모를 일이었다. 일행 모두 그것을 알았기에 현진과 사씨 형제들이 산을 한 번 더 살피기로 한 것이었다.
‘별일 아니면 좋겠는데.’
―멍하니 있지 마!
‘응. 알아.’
따뜻한 방의 훈기에 눈이 감기려는 순간 옥이 잠을 깨웠다.
“으응.”
정신이 들려고 하는지 아이가 움칫거렸다. 앓는 소리가 길게 나더니 눈을 떴다. 그래도 바로 정신이 드는 건 아닌지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괜찮니?”
혹시 시야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말을 걸었더니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이 아픈 건 아닌 모양이었다. 대신 이불을 꼭 쥐고 있는 게 많이 놀란 듯해 보였다. 현서는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나는 기주 서녕에 사는 호현서라는 사람인데, 자우정에 갔다가 물에 빠진 너를 발견했어. 여기는 상천관에 있는 별원이고. 네가 물에 빠져서 도관의 도사께서 약을 주셨어. 네가 깨어나면 먹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낯선 사람이니 겁이 나지?”
현서의 조곤조곤한 말을 듣는 아이의 얼굴이 발개졌다. 약을 먹이기 위해 현서는 말을 계속했다.
“상천관에 와본 적 있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되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갈게. 이곳이 상천관인 걸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야. 그럼 안심하고 약을 먹을 수도 있겠지.”
어느 집 아이든 낯선 이를 경계하라고 배운다. 무림의 아이니 입에 넣는 것도 조심하라 가르쳤겠지. 바로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 걸 보면 교육을 잘 받은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작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현서는 얇은 이불로 아이를 돌돌 만 다음에 번쩍 들어 올, 올리지 못했다.
―괜, 괜찮아?
‘응. 괜찮아.’
한 번에 들어 올리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현서는 숨을 콱 들이쉰 다음 아이를 안아 올렸다. 신발도 신지 않아 차가운 발에 한기가 올라왔지만 현서는 모른 척했다.
‘희아를 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만용이었나.’
―그 아이는 더 어리지 않느냐.
옥이 너무 위로하는 목소리로 말해 더 뼈아팠다.
힘들다고 아이를 놓치면 큰일이라 조심히 걸었다.
“문을 좀 열어줄래?”
문 앞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한 손으로 아이를 들고 문을 열 순 없었다. 현서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안해진 현서가 웃자 아이는 발개진 얼굴로 문을 열었다. 바람이 차갑지는 않았지만 워낙 방이 따뜻해서인지 바깥 공기에 살짝 한기가 들었다. 아이와 현서가 동시에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춥지? 얼른 보고 들어가서 약 먹자.”
읏차, 현서가 힘을 다시 주고 문지방을 넘어섰다. 차가운 돌바닥의 냉기에 발이 시렸다.
“도련님!”
건너편 건물에서 방을 정리하고 나오던 이사가 현서를 발견했다.
“이크.”
이사의 눈이 대번에 뾰족해졌다. 예정된 잔소리에 현서가 어설프게 웃으며 일단 방으로 돌아가는 시늉을 했으나 운이 없게도 아이를 둘둘 싸고 있던 이불 끝을 밟아버렸다. 아이를 떨어뜨리지 않는 게 최선이었던 현서는 뒤로 넘어지게 힘을 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멍청아!
옥이 걱정하는 소리는 들렸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안아 든 것이다. 사위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슬그머니 실눈을 뜨자 새까만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빛을 삼킨 것 같은 깊은 눈동자를 가진 냉랭한 인상의 아름다운 남자가 보였다.
“누구세……?”
현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불에 파묻혀 있던 아이가 고개를 쏙 빼곤 소리쳤다.
“숙부님!”
아이의 일행인 모양이었다. 현서는 일단 안도했다. 감사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남자의 시선이 아이를 안은 현서의 팔에 먼저 닿았다. 옷 아래 가려 있어도 무리를 한 탓에 팔이 떨리고 있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남자는 현서와 아이를 같이 안아 성큼성큼 걸어 침상에 둘을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현서가 얼떨떨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남자가 아이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말했다. 아는 사람을 만난 반가움 때문일까, 아이는 열이 올라 발긋해진 얼굴로 손을 뻗었다. 배운 것이 있어 의젓하게 굴긴 하였으나 많이 무서웠을 것이다.
이제야 제 나이로 보이는 아이를 남자가 익숙하게 안아 들었다. 품에 안고 속삭이는 것이 달래는 중으로 보였다. 둘 사이의 대화를 듣지 않으려고 곁에 있는 사람을 불렀다.
“너희는 약을 데워다오. 따뜻한 물과 수건도 준비해 주고.”
현서의 말에 주변이 재차 분주해졌다. 둘 사이의 대화가 끝이 나자 남자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무어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저희 일행이 거기 있었을 뿐입니다. 누구라도 그리했을 것입니다. 또, 아이를 구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침상에서 방 앞까지 애를 안고 걸었다고 팔에 경련이 나는 것을 보았으니, 현서가 구했다고 해봤자 믿지 않았을 테지만 이런 건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았다.
남자는 매우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했으나 통성명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이미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현서도 남자에겐 부러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도관의 하인들이 데운 약을 가져왔다. 남자가 약 그릇을 한 번 보곤 현서를 보았다.
“다른 외상은 없으나 물에 빠져 한기가 들었다고 합니다. 진맥과 약의 처방은 상천관의 천사께서 해주셨습니다. 깨어나면 바로 먹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현서의 말에 남자의 눈썹이 올라갔다. 주변에 사람이 오가고 있어 현서는 말을 두루뭉술하게 했다. 말을 마친 현서는 남자의 반응을 살폈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하인에게서 약을 받아 아이에게 먹였다. 상천관도 현서도 경계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현서는 남자가 아이가 물에 빠진 이유를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도련님.”
생각에 빠진 현서를 이사가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상냥한 표정으로 약 그릇을 들고 있는 이사가 보였다. 남 약 먹는 거 보지 말고 도련님 약이나 드세요라는 뜻이다. 보는 눈이 있어 참고 있지만 잔소리가 낮에 보았던 폭포처럼 예약되어 있을 터였다. 잔소리를 줄이기 위해 현서는 고분고분하게 약을 마셨다. 아니, 마시려고 했다.
“이런!”
팔에 힘이 빠져 약 그릇이 엎어졌다. 소매 위로 약이 쏟아지자 이사가 놀라며 급히 옷자락을 걷었다. 팔찌와 중의까지 모두 젖었다.
“데이진 않으셨어요?”
“괜찮아. 마시기 좋은 온도라 뜨겁지 않았어.”
난각의 침상이 큰 편이긴 했지만 어른 셋에 아이 하나가 뭉쳐 있기엔 너무 번잡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눈앞이 빙글 돌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옥의 혀 차는 소리를 들으며 현서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몸살감기입니다.”
상천관은 유명한 도관이라 의술이 해박한 천사들이 여럿 있었다. 현서가 쓰러지자 도관의 하인들이 급히 천사를 모셔 왔다. 물에 빠진 아이가 감기에 걸린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현서가 감기에 걸린 건 의외긴 했다.
“나는 물에 빠지지도 않았는데…….”
기절하면서도 기력이 다한 탓이라고만 여겼던 현서는 어쩐지 억울해 중얼거렸다. 그에 이사가 냉랭하게 정정했다.
“발이 빠지셨잖아요.”
“세상에.”
물에 발이 빠졌다고 몸살감기라니, 얼마나 약하단 말인가. 안타까워하는 사수연의 탄식이 방에 울리자 현서는 민망해졌다. 여기서 별거 아니다, 이 정도는 문제없다고 하면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 게 뻔해서 현서는 그냥 말을 돌리기로 했다.
“아이의 일행은 찾았어?”
“아니. 못 찾았어.”
“설마. 일행이 전부.”
죽었어? 하는 물음을 담았더니 현진이 고개를 저었다.
“산 전체를 살피지는 못했지만 시신이나 싸움의 흔적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어.”
“그래도 보호자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죠.”
사수연의 말에 현진과 사무문의 눈이 어색하게 흔들렸다.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행동에 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의 보호자는 예의 바른 남자였다. 자신에게도 은인이라고 깍듯하게 인사한 남자가 현진이나 사씨 남매에게 안면을 몰수하며 드잡이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현서가 의아해 하자 사수연이 웃으며 말했다.
“저 둘은 지금 너무 좋은데, 마냥 좋다고 티를 내지 못해 그래. 내 형제가 좀 바보인 건 진즉에 알았는데, 진 오라버니도 그럴 줄이야.”
사수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평소였음 욱해서 반박했을 사무문이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사실인 모양이다.
“좋아? 뭐가요?”
“너도 몰랐지? 아니다. 현서 너는 강호인이 아니니 그분이 누구신지 당연히 몰랐겠지.”
“누구신데요?”
―모르고 있었느냐?
갑자기 옥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현서의 좁고 좁은 세계는 가족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정말 한 줌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굳이 기억을 뒤지고 할 것도 없어서 더욱 의문이었다. 그가 누구기에?
―하긴 쑥쑥 컸으니 못 알아볼 만도 한가.
“패천검이셔.”
“네?”
“패천검 유위람 선배님이라고.”
“허.”
상상도 못 한 대답이 돌아왔다.
감기 때문에 열이 올라 발그레한 볼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 그러잖아도 반짝이는 미모에 귀여움까지 더해졌다. 옆에 있는 바보 오라비도 패천검의 이름을 들었을 때 비슷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었다.
배분이 높은 것은 둘째치고, 그 뛰어난 무위만 보아도 무인으로서 동경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긴 했다. 사수연도 굉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눈이랑 입만 있는 토용이 된 오라비보다야 놀라도 이렇게나 귀엽고 예쁜 현서 쪽이 더 좋은 게 당연했다. 바보 오라비랑 바꿀 수 있음 바꾸고 싶을 정도다.
“놀랍긴 하네요. 그분도 혼례식에 초대받으셨대요?”
송가장이라면 패천검을 혼례에 초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혼 당사자의 인맥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소의선으로 불리는 화정과는 이미 아는 사이였다. 그러니 강호에 나온 이상 다른 인연들도 어쩌면 보게 될 거라는 예상은 막연히 있었다.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옥이야 기운으로 알아보았겠지만, 현서는 유위람의 기세가 기억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열 살 때라 젖살이 남은 볼만 떠올랐다. 게다가 좀 전에는 정신이 없어서 얼굴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도련님. 바로 누우세요.”
유위람에 대해 생각하다 약 기운이 돌아 어느새 앉은 채로 졸기 시작한 현서를 이사가 조심스럽게 눕혔다. 현서가 잠들자 나머지 세 사람은 조용히 곁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곁방에는 선객이 있었다.
“유 선배님.”
세 명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유위람도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공수했다.
“조카를 구해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오. 이 은혜는 잊지 않고 꼭 갚겠네.”
“은혜라니요. 아닙니다. 도울 수 있는 일이기에 도운 것뿐입니다.”
셋 다 어쩔 줄 몰라 했으나 목숨 빚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패천검이 차를 권하자 모두 자리에 앉았다. 통성명과 아이를 구했던 상황 설명은 현서를 보러 오기 전에 이미 해둔 뒤였다.
“아이는 괜찮습니까?”
“지금 약을 먹고 자는 중이야. 괜찮다네.”
“저희가 산을 수색해 보았지만 전부 살피지 못했습니다. 혹시 찾아야 하는 일행이 있습니까?”
“아니. 다른 일행은 없고, 납치범은 이미 명을 달리했네.”
“그렇군요.”
모두 그사이 생략된 것들이 많다는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는 일을 캐물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범인은 죽었다고 하니 무어라 입댈 것도 남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유위람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은인들에게 비밀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지 않은 일을 말하는 것이 저어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어.”
“이해합니다.”
패천검이 데리고 있는 아이를 납치하다니 단독 범행은 아닐 것이다. 그 말은 아직 배후를 특정 짓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화운검(沎雲劍)의 사촌 동생은 좀 어떤가?”
“지금은 약을 먹고 잠이 들었습니다.”
“질아를 안고 나오는 바람에 팔에 경련이 이는 걸 보았는데 괜찮은지 모르겠군.”
패천검의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
“물가에 발이 빠진 걸로 감기는 그렇다 쳐도 몸살은 어쩌다 걸렸나 했더니.”
사수연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말했다. 몸살감기를 따지자면 오늘 하루가 다난했기 때문이고, 굳이 꼽자면 말을 탄 것이 더 문제였을 테지만,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자네의 사촌은 몸이 약한가 보군.”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존경하는 선배라고 해도 현서의 상태를 미주알고주알 말할 필요는 없었다. 현진의 말을 들은 유위람이 잠시 생각하더니 곧 말을 꺼냈다.
“송가장이 박대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혼례에 초대를 받았는데 아픈 이를 데리고 가는 건 실례가 되겠지. 철서성 내에 내 장원이 있어. 사촌 동생을 거기에 묵게 하는 게 어떻겠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현진의 친구인 송준이 현서를 데리고 간다고 해서 싫어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혼례식이 있는 집에 병자를 데리고 가는 것은 확실히 실례가 된다. 그래서 현진은 송가장에 묵는 대신 철서성에 있는 호가 상단에 부탁해 따로 집을 구할 계획이었다.
“폐라니, 행여 그런 생각은 말게. 소의선이 내 장원으로 올 예정이지. 자네들도 알겠지만, 다른 의원을 청하는 것보다 화 누이가 봐주는 게 훨씬 나을 거라 보네. 질아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니 마음 편히 여겨주어.”
패천검 유위람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소의선 화정은 기꺼이 현서를 봐주시겠지만, 그래도 패천검이 청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결론을 내린 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선배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 할 일이지. 그럼 나는 질아를 보아야 하니 이만 일어나겠네.”
유위람이 나가자 배웅하느라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사무문이 털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후와. 죽는 줄 알았네.”
“패천검께서 널 잡아먹기라도 하신대? 뭘 그렇게 긴장해. 촌스럽긴.”
“너도 긴장해 놓고는. 응? 연아. 왜 그렇게 넋을 빼고 있어? 패천검께 반하기라도 했어? 하긴 그분이 보기 드문 미남자긴 하지만 네가 오르기엔 좀 높은. 악! 악! 악!”
“내 저럴 줄 알았지. 맞아도 싸지.”
사수연이 평생을 갈고 닦은 등짝 때리기를 보며 현진은 차를 마셨다. 사수연의 무기는 검이지만, 사무문 덕에 장법이나 지법의 경지도 상당했다.
“내가 틀린 말 한 것, 악! 아야. 아야, 아니, 내가 틀린 말 했다. 내가 잘못하였어.”
“진짜. 남 앞에서 저런 소리 할까 겁나. 사람들 입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그리고 나는 현서 같은 미인이 더 좋거든.”
“백부와 백모님께선 현서의 혼례에 뜻이 없으신데.”
자신의 취향은 현서 같은 미인이라는 사수연의 말에 현진이 저도 모르게 말을 붙이자 도끼눈을 뜬 수연이 휙 돌아보았다.
“진이 오라버니도 등짝을 좀 내어주시려구요?”
“내가 실언했다. 미안하다.”
현진이 재빠르게 고개 숙여 잘못을 빌었다. 사수연의 용서를 받은 현진은 따가운 등짝을 문지르는 사무문을 모른 척하며 물었다.
“그럼 무슨 생각을 했어?”
“그냥,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구나 했을 뿐이에요.”
“소문?”
“차갑기론 새벽 서리도 가져다 댈 분이 아니라는 얘길 들었거든요. 그런데 저희 같은 무명소졸들에게도 예의를 차려주시네요.”
무명소졸이라는 말에 그 자리의 모두가 웃었다. 이 세 명은 예전에 젠체하는 이로부터 별호도 제대로 없는 무명소졸에게 차릴 예의는 없다는 빈정거림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중에 별호가 있는 이는 현진뿐이었고, 당시에는 현진도 별호가 없었다.
그 자칭 무림 명숙도 패천검에 비하면 바닥에 말라붙은 때 정도일 것이다. 저 대단한 패천검도 후배들에게 이렇게 예의를 차려주는데 말이다.
“워낙 유명한 분이시니 소문도 많겠지.”
현진의 말에 사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천검 유위람과 소문하면 유명한 얘기가 있다. 사무문이 말했던 그 경천검과 관련된 일화였다.
유위람이 검각에 입문했을 때 아니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죽은 줄 알았던 전전대 고수, 그것도 세 명을 동시에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기연을 가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치 한 배에서 난 것처럼 세 명 전부 성격에 흠이 있어 은밀히 만화산(萬華山) 삼요괴라고 불리는 일이 더 많았으나, 강호를 종횡하던 시절엔 삼검왕으로 불리던 검수들이었다. 더욱이 그들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면서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검각주보다 배분이 높아졌으니 쑥덕이는 말이 없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잘났는지 두고 보겠다.
질투와 부러움에 유위람의 성장을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저런 이들도 많았다. 간간이 얼굴을 내비쳤던 유위람은 열두 살 이후 스승들이 있는 만화산 일천봉(一千峰)을 벗어나는 일이 일절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유위람이 스무 살이 되었다. 스무 살 전후로 강호에 출사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은 그해를 기다렸다. 그러나 유위람은 여전히 일천봉 밖으로 걸음하지 않았다.
유위람이 스물두 살이 되던 해 영우곽가의 곽나난이 정식으로 가주 자리에 올랐다. 그 축하 자리에 유위람이 십 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옥골선풍(玉骨仙風) 미남자의 모습에 실력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유위람은 그 어떤 비무 요청에도, 도발에도 응하지 않았다.
유위람은 배분이 높았기 때문에 후기지수(後起之秀: 후배 중 뛰어난 인물)라는 것들이 비무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이었다. 하지만 실력을 보고 싶어 그 무례를 모른 척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유위람은 단단한 시선으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기를 수차례, 종가의 후계자가 도를 넘었다.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분노에 유위람을 비꼬았다.
‘아, 검을 뽑으시면 하늘이 뒤집어지는구나. 그래서 우리 같은 이들을 걱정하셔서 검을 안 뽑으시는구나.’
유위람의 면전에서 하진 못했지만 종사상의 가벼운 말은 이때다 싶어 날개를 탔다. 종가주가 아들에게 치도곤을 안겼으나 이미 퍼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유위람의 뒤에서 그를 경천검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생겼다.
검각에선 크게 분노했지만 사람의 입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유위람을 질투하거나, 그냥 남을 깎아내리고 싶어 하는 이들이 이때다 싶어 다 튀어나왔다.
그러나 검각은 여전히 굳건했다. 항도에 있는 이들 말고도 강호를 떠도는 검각의 제자들은 강했다. 유위람의 소문을 듣고 검각의 제자들에게 시비 걸던 이들이 떨려 나가길 부지기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억측하기 시작했다. 검각의 검술이 녹슨 것이 아니라, 어릴 때 재능이 좋아 보였던 유위람이 꽝이었던 것이라고. 경천검이라 유위람을 들먹이며 검각을 위로하는 멍청이까지 나올 정도였다.
호현진과 사무문, 사수연은 당시 한창 수련하던 때라 그 소문을 듣지 못했다. 사무문의 집안도 석청담도 유위람과 검각을 깎아내리지 않는 쪽이라 더욱 그랬다.
그렇게 삼 년의 시간이 흘러 유위람은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 그러나 그 악의적인 소문들은 여전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백양교의 잔당을 일소하면서였다.
검선 자문원이 사망하고 얼마 후, 천의맹은 공식적으로 백양교의 소탕을 선언하며 해산했다. 하지만 도망친 소교주를 잡지는 못했다.
이미 죽었거나, 몸을 숨긴 채 살 거라 예상했지만 오산이었다. 소교주, 아니, 이제 교주가 된 그는 복수와 교의 회복을 노리고 있었다.
천의맹의 일원이었던 은산문(恩山門)이 백양교의 이름 아래 멸문지화를 당하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은산문의 문주는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한때 천하 십대 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던 이였다. 그런 가주의 시신이 짐승에게 먹힌 것처럼 찢겨 있었다는 증언은 사람들을 겁먹게 만들었다. 천의맹을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들도 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유위람이 백양교의 이 대 교주의 목을 잘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처음엔 경천검이라는 비아냥거림 때문에 믿지 않으려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유위람이 새 교주와 싸우는 것을 본 이들이 적지 않았다.
천의맹은 해산했지만 비공식적으로 백양교의 잔당들을 추적하는 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잡힐 듯 말 듯했던 꼬리가 은산문을 멸문시키면서 드러나게 되었다.
백양교 잔당의 위치를 특정하게 되자 유위람이 포함된 선발대가 급히 추적에 나섰다. 검각과 곽나난의 얼굴을 보아 유위람이 선발대에 있는 것을 묵인했던 이들은 얼마 후 그들이 직접 보게 된 유위람의 무위에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혹시나 자신들이, 자신들의 가문이나 사문이 유위람을 비웃었던 일이 없었나 하고.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패천검(覇天劍)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무위였다.
그들이 과장했을 거라며 유위람의 무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닥치라는 소리를 해주는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굳이 믿으라 하며 싸울 필요도 없었다. 유위람은 소교주를 죽인 이후 검을 뽑는 일을 전혀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건방진 녀석들의 대련 요청도,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악적들도 가리지 않고 검으로 해결했다.
배분이 높은 이에게 가르침을 청하겠다고 왔으니 그 가르침의 정도를 정하는 것은 유위람의 마음이었다. 검집으로 가까스로 숨만 붙여놓는 일을 몇 번 했더니 가르침을 청하는 머저리들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누가 보아도 유위람의 무위는 삼 년 만에 완성될 경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유위람이 삼 년간 비아냥거림을 들으며 참은 이유를 궁금해 했으나 물을 수가 없었다. 담이 큰 누군가가 유위람의 친구인 곽나난에게 물었지만 곽나난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는 말이 있을 뿐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경천검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다고 뻐기고 다니던 종사상은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꼴이 되었다. 용서를 빌러 갈 담력도 없어 폐관 수련이라는 핑계를 대고 집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불민한 아들을 대신해 종가주가 검각을 방문했으나 패천검은 자리에 안 계시다는 소리만 듣고 돌아가야만 했다.
유위람이 패천검이란 별호를 얻은 지 육 년이 지난 지금도 종사상은 폐관 수련 중이다. 이 일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훌륭한 반면교사의 사례가 되었다. 호현진도 사씨 남매도 강호에 나서기 전에 말조심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으며 이 얘기를 들었다.
현진은 아직도 등짝을 문지르며 아파하는 사무문을 보며 혀를 찼다. 저 바보는 가르침을 홀랑 까먹고 경천검은 멋진 뜻이라고 혼자 지레짐작했을 것이 뻔했다. 항도의 사람들은 이런 미친놈이 아직도 있다고 화를 내려다 저놈이 너무 해맑으니 바보가 분명해 화를 안 낸 것일 테지.
“다시 생각해 봐도 네놈의 명줄은 예사롭지 않아. 무슨 비법이 있는지 궁금할 정도야.”
“멀쩡히 있다 왜 시비야?”
사무문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눈을 치켜떴다. 사수연은 현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알았다. 사수연이 혀를 차며 사무문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진이 오라버니가 맞는 말 했으니. 차나 마셔.”
등이 따가웠던 사무문은 치켜뜬 눈을 내리깔고는 얌전히 차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