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章. 화오궁의 습격
다음 날 아침, 현서는 도톰한 이불에 도롱이처럼 말린 채 현진의 품에 안겨 방을 나왔다. 내 발로 걷겠다고 했지만 열이 내리지 않아 이사와 현진이 강하게 반대했다. 두 명분의 잔소리를 이겨 낼 자신이 없었던 현서는 금방 포기했다. 패천검의 장원에 가는 일로 실랑이를 해서 기운도 없었다.
어젯밤, 저녁을 먹기 위해 일어났던 현서는 현진이 전한 이야기에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찬성을 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 때문에 혼례식 참석에 지장이 생길까 걱정한 참이었다. 철서에 송가장 말고 머물 곳 하나 없겠느냐만 외부에 숙소를 잡으면 현진의 일정에 차질이 생길 터였다.
멀리서 오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에 혼례식 삼 일 전부터 손님을 받고, 혼례 날부터 엿새간 잔치를 한다. 현진은 신랑의 지기이니 혼례 삼 일 후 신부가 친정에 돌아가는 회문(回門)에 신랑 쪽 사람으로 동행할 예정이었다.
원래 현서는 그 기간 동안 송가장에 머물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서가 송가장 밖에 머물게 되면 걱정 많은 현진이 회문에 따라가지 않고 곁에 있을 게 뻔했다.
그러나 패천검의 장원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곳이라면 안전에 관해선 그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다. 현서는 빠르게 결정한 뒤 자신은 패천검의 장원에 있을 테니 현진은 예정대로 송가장에 가라고 말했다. 현진은 당연히 안 된다고 말했지만 현서는 완강했다.
“형 친우의 혼례식에 온 것인데 나 때문에 소홀하면 그 얼마나 미안한 일이야. 이사도 곁에 있을 거고, 가벼운 감기야. 게다가 패천검의 장원이라니. 철서 땅에서 여기보다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어. 또, 소의선께서도 오신다잖아.”
“송준은 너도 나중에 만나 보겠지만, 이런 걸로 서운해 할 친구가 아니야. 그리고 이 먼 곳까지 와서 너를 어떻게 혼자 둬.”
“혼자 아니라니까 그러네. 이사는 뭐 병풍이야? 나 때문에 일정을 그르치면 내가 앞으로 미안해서 어떻게 형이랑 여행을 가. 안 그래?”
현서가 어릴 때처럼 현진의 소매를 붙잡고 흔들었다. 아프지 않았어도 집안의 막내로 어화둥둥 자랐던 동생이었다. 저렇게 조르면 누구도 이길 수가 없었다. 현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너를 어찌 이겨. 하지만 매일 연락받을 거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돌아올 거다.”
“응. 알았어.”
열이 올라 발긋한 얼굴로 생긋 웃던 현서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는데도 소매 끝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왜?”
“호부의 이름으로 인사하는 건데, 내가 못 가서. 큰형이나 작은형이 같이 왔다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미안해.”
“객쩍은 소릴. 나는 호씨가 아니야? 내가 가는데. 두 분 형님이 안 오셔도 나만 해도 차고 넘친다. 예정대로 혼례식에 참석하고 올 테니 너는 쓸데없는 걱정 말고 편히 쉬고 있기나 해. 자꾸 그러면 큰형님께 편지 할 거다.”
시무룩해 하는 현서가 짠했지만 현진은 티를 내지 않았다. 이상한 마음 먹지 말라고 다독인 뒤 부드럽게 소매를 잡은 손을 잡아 이불 안에 넣어주었다.
그렇게 현서는 현진이 자신 때문에 친우의 혼례식에 제대로 참석을 못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덜게 되었다. 대신 이불에 말려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이불 도롱이가 된 현서는 상천관 앞에 패천검이 준비한 마차를 보게 되었다. 현서가 이불 안에서 소곤거렸다.
“가마 정돈 줄 알았는데 이 산길에 마차라니.”
“그 아이도 감기라고 하지 않던. 너랑 아이를 위한 것이겠지.”
사씨 남매는 이미 말 위에 올라 있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 시선의 몇 할은 이불 도롱이인 현서와 마차에 쏠려 있었다. 현진이 마차 앞에서 내려주자 현서와 이사가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는 아이와 패천검이 타고 있었다.
현서는 잠시 멈칫했지만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는 걸 보니 이해가 되었다. 가벼운 목례를 마치자 마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차가 작지 않아 어른 세 명이 앉고도 가운데 차탁과 화로를 둘 정도였다.
“몸이 미령하다고 들었는데, 괜찮습니까?”
“말씀 낮추세요. 제가 무림의 후배는 아니나 그래도 연장자께서 높여 말씀하시니 듣기에 민망합니다.”
“무림의 후배가 아니니 더 예를 차리는 게 맞습니다. 화운검의 사촌이라 들었는데 무공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네, 형님은 모친이신 석청담의 회천검(廻天劍)께 검을 배웠습니다. 저는 서녕호가의 자손으로 호현서라고 합니다.”
“제가 은인에게 먼저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본인은 검각의 유위람이라고 합니다.”
“장원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 크흠.”
열이 있어 그런지 금세 입 안이 말랐다. 목소리가 갈라져서 작게 기침을 하자 이사가 찻잔을 내밀었다.
“소인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저희 도련님께선 몸이 편찮으셔서 말을 많이 하시지 못합니다.”
“아닙니, 큭. 콜록콜록.”
괜찮다는 말을 꺼내기 전에 기침이 먼저 터졌다. 눈치도 없는 기침!
한 번 시작되면 잘 멈추지 않는다. 아이가 깰까 봐 소매로 입을 가렸는데도 소리가 자꾸 샜다. 좁은 자리에서 이사가 등을 쓸어주느라 품에 아예 안긴 상태가 되었다. 마차가 움직이는 탓이라 생각했는지 유위람이 마차를 세웠지만 현서는 알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기침이 겨우 멎었다.
현서는 기운이 빠져 이사에게 기대 일어날 시늉도 하지 않았다. 눈물이 고여 반쯤 흐릿한 시야로 건너편을 보니 다행히 아이는 깨지 않았다. 안도하며 고개를 들었더니 빤히 자신을 보고 있는 유위람이 눈에 들어왔다. 아롱진 시야라 표정이 또렷이 보이지 않아 현서는 그저 유위람이 놀란 줄로만 알았다.
이사가 익숙하게 한 손으로 차를 따른 뒤 찻잔을 입에 대어주었다. 현서는 기운이 빠져 먹여주는 대로 차를 마시며 눈을 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따라 흘러내렸는데 닦는 것도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시선이 느껴졌지만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장원에 도착했을 땐 정오가 지나 있었다.
사씨 형제들은 송가장으로 바로 가고 현서 일행만 패천검의 장원에 들었다. 미리 연락이 간 것인지 현서가 지낼 곳으로 곧장 안내되었다. 이 층으로 이루어진 세 칸짜리 원락은 크지는 않았지만 아늑했고, 필요한 것들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여기 장원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객청이라고 하기엔 내원에 들어온 거 같지 않아?”
“내원이든 외원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은인이니 귀히 대접하려 하시는 거겠지요.”
따로 정리를 할 것도 없이 완벽한 방이었지만. 이사는 그렇게 보지 않는지 이것저것 확인했다. 현서의 약들을 정리하던 이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왜 그래?”
“현진 도련님의 짐과 같이 현서 도련님의 짐도 전부 송가장으로 보냈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들었지? 형은 얼른 송가장에 가서 내 짐을 여기로 보내줘. 얼른 가. 얼른.”
장원에 도착한 것만 보고 가겠다던 현진이 도통 갈 생각을 하지 않자 현서가 이때다 싶어 훠이훠이 내쫓았다. 현진은 한참을 현서에게 이것저것 당부하고 이사에게도 당부한 뒤 송가장으로 갔다.
“누워 계실래요?”
“아니, 잠도 안 오는 걸.”
높게 쌓은 베개에 기대 앉아 있으니 이사가 침상의 위로 차탁을 넣어주었다. 현서가 자주 마시는 약차와 간식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이사가 물러가자 방엔 옥과 현서만 남았다.
―괜찮으냐?
‘응. 머리 아픈 것은 없어졌어. 팔이 좀 아프고 열이 나고 기운이 좀 없긴 하지만 몸살감기는 원래 이런 거잖아.’
―그래. 심하지 않아 다행이지.
몸살감기에 걸린 이유는 차치하고 무난하게 앓고 있는 중이라는 게 둘에게는 더 중요했다.
열네 살 때 옥과 대화를 한 이래로 현서는 전생에 배웠던 무공을 연마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검술이나 보법 같은 몸을 쓰는 것을 뺀 것들을. 변명하자면 처음부터 외공을 연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무언가의 끝에 이르게 되면 지선(地仙)이 된다고 한다. 사문의 개파 시조는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검의 끝을 보아 지선이 되겠다는 뜻을 가진 것이다. 그렇게 지선이 되는 데 성공했고 그 지식을 제자에게 나누었다. 그 제자도 지선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제자를 들였다는 것은 확실했다. 자문원의 사문은 그렇게 이어져 왔으니 말이다.
스승이 별세해 산을 내려오기 전까지 다른 무인과 검을 맞대 본 적이 없었던 자문원은 사문의 내공이 특이하다는 것을 몰랐다.
자문원의 사문은 단전에 내력을 모으는 다른 문파들과 달리 내공을 모은다는 개념이 없다. 상중하 세 곳의 단전에 내공을 쌓아 갑자로 크기를 나누는 무림의 방식과 판이했다.
자문원의 내력은 쌓이지 않고 기혈(氣血) 속에 유영하며 호흡을 따라 자연스럽게 몸에 둘러졌다. 그가 실력을 의심받았던 것에는 이런 이유가 한 몫을 했다.
사문은 이름도 없었고―유명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이름이 없었다― 겉보기에 내력은 보통 사람과 비슷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튼튼해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자문원이 내로라하는 후기지수를 이겨대자 사술이라는 모함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싸울 때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내공은 정순하기 그지없었다. 무림인이라고 나대려면 자문원의 내공에 사기가 섞였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서의 관심을 끈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어차피 현서는 검술도 보법도 체술도 전부 익히지 못했다.
남들보다 조금 튼튼해 보이는.
현서가 관심을 둔 것은 그것이었다. 현서를 꾀는 데 성공한 옥은 야심차게 수련 계획을 짰다. 옥도 현서도 바보가 아니니 아주 쉽고,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했으나 문제는 금방 드러났다. 자문원이 여섯 살에 했던 기초 수련도 열네 살의 현서에게는 매우 버거웠다.
기는 아이에게 달리라고 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련법을 바꾸어야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옥과 현서는 내공 수련을 현서에게 맞게 변형시킬 수 있었다. 다행히 내공 수련은 현서도 익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느리긴 해도 성과가 있었다.
현서가 먹은 독은 절정 고수의 단전도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사문의 내공법이 일반적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단전에 내력을 모으는 방법이었다면 옥이 아니라 옥 할아버지가 와도 방법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터였다.
현서는 옥의 존재도, 자문원의 기억에도 깊이 감사했다.
사문의 내공 수련법은 호흡을 바르게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말만 들으면 어디 삼류 돌팔이 도사가 뻐기며 알려주는 양생법처럼 보이나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갈렸다.
외공 수련이 아니라 비밀로 할 것도 없었다. 현서가 침상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무공은 십성으로 나뉘어 있다. 지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십성까지 배우고 난 뒤의 수련은 각자의 몫이었다. 자문원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십성까지를 전부 통달했다.
스무 살의 호현서는 삼성까지 익혔다. 옥이 말하길 몸을 쓰는 부분을 제외한 것치고는 성과가 빠른 축이라고 했다. 옥은 혹시라도 현서가 마음 상할까 염려했지만 현서는 아무렇지 않았다. 자문원과 자신을 비교할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다.
스물다섯쯤에 사성, 운이 좋으면 오성 정도 될 거고 그때쯤이면 운신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현서의 목표는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으로 망가진 몸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수복하는 것에 있었다.
‘역시 기초적인 체술 정도는 익히는 게 좋을까?’
―어쩐 일이냐. 네가 먼저 외공 얘길 다 하고.
‘석청담보다 멀리 나오니 예상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지 알겠더라고.’
예정에 없던 여행은 좋은 공부가 되었다. 후일 독립을 위해 목표로 잡았던 몸 상태에 수정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내공 덕에 몸 상태가 회복되는 속도가 빨라지긴 했지만, 독립 전에 희아를 안아 들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아.’
―오 년 뒷면 희아는 아홉 살이 될 텐데?
‘놀릴래?’
현서가 발끈하자 옥이 웃으며 달랬다.
―네 마음은 기특하다만 외공 수련은 기를 몸에 두르는 것이 더 익숙해지고 난 다음에 시작하는 게 좋아. 그때가 되면 네 체력도 지금보다 더 좋아졌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열두 살 된 희아도 번쩍번쩍 들 수 있을걸.
‘정말?’
―장담하고말고. 그리고 사성의 익힘이 완숙해지면 문원이 썼던 잔기술 몇 가지는 흉내 낼 수 있을 거다.
‘청연참(晴煙斬)이나 벽효흘(霹驍紇) 말이지?’
현서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반짝해졌다. 청연참은 내력으로 손에 쥐고 있지 않은 물건을 순식간에 날리는 암기술이고, 벽효흘은 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포박술이다. 고수를 목표로 삼지는 않았지만 독립을 생각해 호신술 한두 가지는 익혀두고 싶다고 생각했던 현서였다. 본인의 체력이 좋지 않고 심각한 몸치임을 알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꼭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다만.
옥은 살짝 떨떠름해 했으나 그냥 넘어갔다. 의욕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 말이다.
―뭐가 되었든 네가 나아야 할 수 있으니 지금은 낫는 것만 생각하자.
‘응.’
현서는 그렇게 대답하며 몸에 힘을 뺐다.
송가장에 도착한 현진은 재빨리 짐을 보냈다. 저녁이 되기 전에 현서의 짐들이 전부 패천검의 장원에 도착했다. 후끈한 방 덕에 땀을 잔뜩 뺀 현서는 옷을 갈아입어야 했는데 제때 도착했다며 이사가 기뻐했다. 현서의 환복을 도우며 당장 도련님이 걸칠 만한 적당한 의복이 없으면 패천검의 옷을 뜯어 오려고 했다는 무서운 얘기도 했다.
“아니, 철서에도 포목점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장 호가에서 하는 곳도 있고. 거기서 구하면 될 걸 패천검의 옷을 뜯어 오겠다니……. 너 정말 대단하다. 게다가 그 옷들은 나한테 맞지도 않을 텐데.”
그래도 목숨은 하나니까 조심하자고 덧붙였다. 은인으로 대하니 패천검이 무례하다고 칼부림을 하진 않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지 않는가. 하지만 현서의 당부는 이사의 귀엔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옷은 작은 것보다 큰 것이 훨씬 낫습니다. 게다가 포목점에서 당장 구할 수 있는 옷은 질이 안 좋아요. 도련님이 입으셨다간 피부가 빨갛게 쓸려서 고생할 게 뻔해요. 한 시진(2시간)도 못 입고 계실 걸요.”
“그……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그 정도가 맞아요.”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보았을 때 포목점에서 샀던 옷들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기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자문원과 달리 호현서는 날 때부터 황궁에서 가져다 써도 문제없는 면직물과 비단으로 만든 옷만을 입어왔다. 당연히 그런 귀한 옷감으로 만든 옷들은 포목점의 기성품이 될 수 없었다.
전생에 입었던 옷들의 세세함 촉감 같은 건 떠올리지 못했던 현서가 당황했다. 그런 현서를 보며 이사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 도련님이 이렇게나 세상 물정을 모르지만 내가 있어 다행이지라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호가 상단에 연락했더니 대부인께서 새 의복들과 필요한 것들을 전부 준비시켰다고 합니다. 사흘 내로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네.”
“어머니께 서신을 보내야겠다. 설마 아프다는 얘길 한 건 아니겠지?”
현서가 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사는 죽 그릇을 현서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서신은 다 낫고 나서 쓰세요. 아프다고 집주인과 차 한잔도 못 하고 있다는 얘기를 대부인께 전하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요.”
“어. 응.”
현서는 얌전히 죽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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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이사는 소의선을 기다리지 않고 철서성의 유명한 의원을 청했다. 철서성의 의원도 상천관의 도사와 별다를 것 없는 말을 했다. 몸살감기라는 진단이었다. 약을 꼬박꼬박 잘 먹었더니 이틀 뒤에는 몸이 가뿐해졌다.
“봐, 가벼운 감기잖아.”
“좋아졌다니 다행이다.”
사씨 남매와 현진 모두 패천검의 장원에 방문해 현서를 만나러 왔다. 현서의 몸도 다 나았고, 혼례 전 이틀째 연회 날이라 빠져나오기도 좋았던 것이다.
“이게 철서의 유명한 간식이래.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유명한 곳인데 마침 송가장에서 연회를 위해 주방장을 따로 초빙했다지 뭐야. 그래서 한 상자 부탁했어.”
간식이 끊임없이 나오는 현서의 요술 소매를 인상 깊게 보았던 사수연이 과자를 챙겨 왔다.
“같이 먹어요. 철서의 유명 간식이라니 궁금하네요.”
사수연에게 과자를 건네받은 이사는 밖에 있는 하인이 눈짓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보았다. 이사는 곧장 밖으로 가 하인이 전하는 말을 들었다.
“도련님 과자는 있다 드셔야 할 것 같네요. 장원의 주인께서 차를 드시자고 청하셨습니다.”
“그래?”
장원에 온 뒤로 집주인과 차 한잔도 마시지 않았으니 초대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서가 돌아보자 현진과 사씨 형제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평온했다. 아니, 평온한 것 같진 않았다. 현진과 사무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부축은 필요 없어.”
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씨 남매와 현진은 정갈한 외출복 차림이었고, 현서 역시 옷을 다시 갈아입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옷은 괜찮지만 머리는 이대로 가면 실례겠지?”
긴 머리는 호부에 있을 때처럼 풀어놓고 있었다. 현서는 이사로부터 비단끈을 받아 입에 물고는 재빨리 묶었다. 송가장에 있었다면 좀 더 격식을 차리느라 관을 써 틀어 올려야 했을 텐데 여긴 그럴 필요가 없어 좋았다.
“가요. 어? 왜들 그러고 있어요?”
현서는 멀거니 자신을 보고 있는 세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호현진. 너 주워 온 애지.”
“무슨 미친 소리야. 현서야, 형이 몽수를 보내줄 테니 집에서도 쓰고 있어.”
“형은 또 무슨 소리야.”
헛소리를 하는 두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 현서는 사수연과 이사만 챙겨 방을 나섰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회랑을 따라 걷다 보니 팔모지붕으로 된 작은 건물이 나왔다. 정자라 하기엔 벽이 있었지만 그 벽에 문처럼 긴 장창을 내고 그 창을 전부 열어두어 정자처럼 보이게 만든 재미있는 건물이었다.
“장주님, 손님들께서 오셨습니다.”
열려 있는 문 사이로 패천검과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가벼운 인사가 오간 후에 아이가 현진 일행을 향해 읍했다.
“구명지은을 입었습니다. 영우곽가의 곽완비,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은인들께 꼭 보답하겠습니다.”
현진이 아이를 일으키며 말했다.
“석청담의 호현진입니다. 이리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집안의 이름을 걸고 말한지라 현진도 소속을 밝히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곽완비는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데 하는 올망올망한 눈으로 현진을 올려다 보다 사씨 남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른처럼 말하고 있어도 볼이 통통한 아이인지라 모두의 시선이 몰랑몰랑해졌다.
“요천(遙泉)사가의 사수연입니다. 이쪽은 제 오라비인 사무문이랍니다.”
곽완비가 예의 바르게 사씨 남매와도 인사를 마치자 현서의 차례가 되었다.
“서녕호…….”
“저 알아요! 서녕호가의 현서 형!”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곽완비였으나 현서가 입을 열자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현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완비가 활짝 웃었다. 패천검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리긴 했으나 완비의 행동을 제지하진 않았다. 아이가 눈을 떴을 때 현서가 있었으니 더 친근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시비들이 찬합에 든 간식을 꺼내고, 차를 우리는 동안 완비는 어린 새처럼 재잘거렸다.
“형은 이제 안 아파요? 다행이다. 양주는 처음이에요? 완비는 몇 번 와봤는데. 저기 연밥이 든 과자랑 그 옆에 두 개 전부 호설루(皓雪樓)에서 사 온 건데 저기 간식은 다 맛있어요.”
현서는 완비가 말한 과자를 접시에 덜어 한 조각 먹어보았다. 부드럽고 단 것이 과연 맛이 좋았다.
“곽 공자 말이 맞네요. 맛있어요.”
큰일을 겪어 많이 무서웠을 텐데도 아이는 크게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현서는 다행이라 여겨 완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아이는 발그레한 볼을 하곤 고개를 숙이더니 과자 접시를 슥 밀어주었다.
맛이 다르니 적게나마 더 먹을 수 있겠지. 현서가 그렇게 가늠하며 과자 접시를 보고 있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유위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 하기엔 금방 유위람의 시선이 돌아갔다.
―건방진 눈초리다.
‘언제는 칭찬만 잔뜩 하더니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딱히 기분 나쁜 시선은 아니었는데.’
―그야. 널 본 게 아니라……. 아니, 아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궁금하게.’
“호 공자.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옥이랑 대화하느라 넋을 빼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몰려 있었다.
“아니에요. 배가 불러서 그만 먹으려고요.”
“벌써 배가 불러요? 세 개도 안 드셨는데.”
완비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곽 공자가 추천한 간식이 정말 맛있었나 봐요. 호 공자가 한 자리에서 세 개 가까이 먹는 거 처음 봤어요.”
사수연이 한 말에 곽완비는 물론 유위람의 시선도 전부 현서에게 향했다. 현서는 민망함에 말을 돌렸다.
“저 때문에 대화가 멈췄네요.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어요?”
송가장의 혼례 얘기를 하던 것 같았는데 그 얘긴 이미 끝난 듯했다.
“곽 공자의 부친께서 지복도(地覆刀) 곽나난이라 하셔서 모두 놀라는 중이었지.”
“아.”
현서가 맹하게 대답했다. 놀라서 나온 목소리였지만 사람들은 현서가 강호 인물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사수연이 곁에서 설명했다.
“검선은 알고 있지? 지복도 곽나난 선배는 검선의 마지막을 함께한 분들 중 한 분이셔. 항도에 있는 검선의 사당을 만드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셨대.”
“맞아요. 아버님과 유 숙부는 친한 친구 사이예요. 유 숙부는 제 대부시거든요!”
곽완비의 목소리에는 아버지와 대부를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문원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던 다섯 아이는 전부 내로라하는 무림 세력의 일원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한창의 나이가 된 지금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집을 나서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들리거나 만나는 것을 보니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럼, 곽완비는 다순의 종손이겠네.’
―곽다순 놈을 하나도 안 닮았구나. 좋은 일이야.
‘나난도 다순을 닮진 않았잖아.’
곽다순은 어딘가 흐릿하고 순해 보이는 얼굴로 잘 웃는 사람이었다. 세상 물정 몰랐던 자문원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맹했는데, 시비가 붙어 어찌할 바를 모르던 곽다순을 도운 것으로 시작된 인연이었다. 현서는 곽다순의 후일이 궁금하진 않았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아보지 않았던 건 너무 매정한가 싶었다.
―전혀 매정하지 않아.
‘뭐, 나중에 알아볼 기회가 생기겠지.’
현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대놓고 티를 낸 적은 없었지만, 옥은 자문원의 이른 죽음을 슬퍼했기 때문에 옥이 마음 상할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혼례식이요? 내일 혼례가 있어요? 우와.”
“곽 공자는 혼례에 참석하지 않나요?”
“네. 저는 외가에 가는 길이었거든요. 외가는 태원(太原)에 있어요.”
태원은 양주의 바로 옆에 붙은 담주(淡州)에 있어 이곳에서 가까운 곳은 아니었다. 아이가 납치되는 바람에 일정이 틀어진 듯했다. 좋은 일도 아니고, 납치를 당해 죽을 뻔했던 완비가 앞에 있어 다들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담주에는 태호(太湖)가 유명하다는데 가보았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현서가 대화에 참여하자 완비는 신이 났다.
“그럼요. 외가가 있는 곳이 태호랑 멀지 않아서 가보았어요. 정말 좋아요. 다음에 현서 형도 같이 가요.”
천하에 유명한 호수가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석호, 한 곳은 태호다. 태호는 복주(馥州)와 담주, 양주와 난주(蘭州), 이렇게 총 네 개의 주를 걸치고 있는 거대한 호수다. 담주에 걸쳐 있는 영역이 가장 커 태호라 하면 보통 담주를 많이 떠올렸다.
자문원이 스승과 지내던 곳도 담주와 난주 사이에 있던 무산(霧山)이었다. 높은 산봉우리에서 산 아래 있는 호수까지 오가는 수련을 할 때마다 아름다운 경관에 눈을 뺏기기도 했었다. 태호와 무산은 자문원의 기억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태호는 꼭 보고 싶은 곳이라 언젠가 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완비도 현서의 몸이 약하다는 걸 알아 약속을 재촉하지 않았다.
“꼭 편지하셔야 해요. 완비가 잘 안내할 수 있어요. 부친께서 태호 근방의 무산이 검선의 성지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가지 못했는데, 분명 청아한 기운이 흐르는 곳일 테니 같이 가요.”
다행스럽게도 기침은 하지 않았지만, 현서는 아연해졌다.
‘나난은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성지는 또 뭐야.’
―어리니 잘못 얘기한 것이겠지.
자문원의 성격상 미주알고주알 내력을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곽다순을 비롯해 몇몇에게는 말했다. 그 때문에 곽나난이 알고 있는 것은 놀랍지 않았지만 그걸 어린 아들인 완비에게까지 말했다는 건 놀랍긴 했다.
“그렇죠. 저도 가보았는데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태호에 간다면 꼭 들러보세요.”
유위람도 끼어들었다. 사씨 남매와 현진은 처음 듣는 얘기라며 꼭 가보아야겠다고 말을 보탰다. 그 사이에서 현서는 애매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혼례 날이 되었다.
“폭죽 소리가 들리는 거 같지 않아?”
“착각입니다. 도련님. 정 궁금하시면 잠시 나가보겠어요?”
“궁금한 거 아냐.”
송가장은 철서의 유력 가문이다. 신부를 태운 가마 뒤로 혼수품 가마들이 줄 지어 성안을 한 바퀴 돌며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다. 패천검의 장원은 송가장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기분 탓인지 떠들썩한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좋은 날이었다.
남의 집이었지만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아니라 현서는 호부에 있을 때처럼 느지막이 일어나 식사를 하고 산책길에 나섰다. 산책을 언제든 해도 좋다고 했다. 게다가 조심해야 할 곳이면 식솔들이 알려줄 테니 손님께선 원하시는 대로 해도 된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대단한 친절이었다.
볕이 좋은 곳을 따라 걷던 현서는 졸졸 들리는 물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저기로 가도 되니?”
이사 대신 장원의 어린 하인만 대동하고 나온 길이었다. 현서가 묻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자님.”
잠시 더 걷자 물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일 장(약 3m) 정도 되는 폭의 개울이었다.
“밖에서 물을 끌어온 거구나.”
연못이나 폭포를 만드는 경우는 보았는데 밖에서 물을 끌어와 개울을 만들다니 신기했다. 독립할 원림을 꾸밀 생각에 남의 집 꾸밈도 유심히 보게 되는 현서였다. 개울의 한쪽에는 둥그스름하게 올라온 다리와 돌다리가 있었다.
“저기 보이는 누각에서 잠시 쉴 테니 차를 부탁해도 될까?”
“네, 알겠습니다.”
하인이 차를 준비하러 물러가자 현서는 주위를 휙휙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돌다리 쪽으로 내려갔다.
―아직도 애구나.
옥의 타박에 현서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돌다리는 처음이잖아.’
일곱 살 때 어머니와 갔던 절 옆에 돌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땐 건너는 사람도 많았고, 현서가 어리니 열 살이 되면 다시 와 건너보자는 약속을 했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돌다리를 보니 옛 일이 떠올라 흥이 났다.
개울은 발목 정도의 깊이로 돌다리는 멋으로 놓아둔 모양이었다. 돌은 전부 다섯 개, 작지는 않았지만 간격이 좀 넓었다. 그래도 할 만하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진 현서가 다리를 쭉 뻗어 첫 번째 돌 위에 섰다. 슬며시 발을 굴러보니 돌은 단단하고, 미끄럽거나 흔들거리지도 않았다.
‘괜찮네.’
언제 사람이 올지 모르니 채신머리없는 행동은 재빨리 끝내야 했다. 마음은 폴짝폴짝이었지만 현실은 조신하게 톡톡 발을 구르며 돌다리를 하나씩 밟아갔다. 마지막 돌을 지나 땅에 도착한 현서는 기분이 좋아 자신이 밟아 온 돌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봐, 아무 일도 없었잖아.”
―이 바보야.
“그렇군요. 괜한 오지랖을 부리려고 했나 봅니다.”
“히익!”
애처럼 흥분해서 소리 내 말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옥의 혀 차는 목소리 위로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현서는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급히 몸을 돌리려다 그대로 발이 꼬였다. 갈대처럼 휘청거리는 현서를 목소리의 주인이 옭아매듯 잡아챘다.
“잘 넘어지는 듯싶은데. 돌다리는 잘 건너셨군요. 장하십니다.”
“아. 예. 예. 그…… 그렇죠. 제가 다리는 잘 건넌답니다.”
쪽팔리고 당황해서 현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패천검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한 손으론 허리를 잡고 다른 손으론 현서의 왼손을 잡았다. 너무 가까워서 패천검의 눈동자에 비친 당황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정신 차려.
“그,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괜찮으니…….”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놀라게 한 것 같군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저, 이제 괜찮으니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허리가 잡힌 채 바짝 붙어 있으려니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다. 현서가 바르작거리자 왼손의 소매가 걷히며 옥팔찌가 드러났다. 패천검이 표정을 굳히며 부드럽지만 재빨리 팔을 잡아 얼굴로 가져갔다. 유심히 보려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꼭 팔목에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가까워져 현서는 기겁을 했다.
―얘 좀 이상해. 네가 보기에 눈이 맛 가 보이지 않니?
‘내 팔에 얼굴을 붙이고 있는데 패천검의 눈이 보이겠어? 왜 이러지?’
―내가 좀 잘난 옥이긴 하지만 이거 너무 부담스럽다.
“좋은 옥이군요.”
괴상한 행동을 한 사람치곤 매우 멀쩡하게 말했다. 손이 풀려나자 현서는 한 발 뒤로 물러섰는데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패천검은 현서를 깃털인형처럼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안아 들고는 정자로 향했다.
정자에는 손님맞이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
‘이 꼴을 지금 장원의 하인들이 전부 봤단 말이야?’
패천검이 친절하다고 생각한 것이 반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현서는 떨떠름해졌다. 시비들이 차분한 표정과 몸짓으로 차와 간식을 내어놓고 정자 밖으로 물러섰다. 그사이에도 유위람의 시선은 계속 현서의 팔목에 있었다.
“정말 좋은 팔찌군요. 그 팔찌는 어디서 났습니까?”
“할아버님께서 주셨습니다.”
현서는 부모님이 시킨 대로 대답을 재깍 했다. 그 대답에 패천검이 고개를 숙이며 작게 탄식했다. 빙기옥골(氷肌玉骨)의 미남이 탄식하는 모습은 그림에 나올 법해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킬 만했지만 현서의 표정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옥과 현서는 패천검이 왜 저러지? 이상하다, 좀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 따위의 대화 중이었다. 날이 좋아 산책하러 나온 것뿐인데. 상대가 패천검 유위람만 아니었다면 무례에 쓴소리를 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만 일어날까?’
패천검이 무례한 건 사실이니까 그냥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그럴까? 현서와 옥이 그만 돌아가자고 결론을 내렸을 때쯤 패천검이 고개를 들었다.
“그 팔찌를 팔지 않겠습니까?”
“네?”
“샀다는 값의 열 배, 아니, 원하는 조건은 무엇이든 다 맞추겠습니다.”
팔찌를 팔라니. 세상을 준다고 해도 바꿀 리 없는 팔찌다. 현서는 반사적으로 팔찌가 있는 왼 손목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팔찌를 팔 생각이 없습니다.”
현서의 강한 거절에 패천검이 눈썹을 내리깔았다.
“제가 이상해 보였을 거라는 걸 압니다. 미안합니다. 오늘 사과를 드릴 일이 많군요.”
딱딱하게 나오거나 강압적으로 굴었다면 반발했을 텐데, 저렇게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져 있으니 뭐라 하기도 어려웠다. 그가 무례하게 군 것은 맞지만 패천검은 현서보다 열한 살이 많은 무림 명숙이다. 더욱이 이곳은 그의 장원이고 현서는 지금 혼자니 어깃장을 부리려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
자문원이 겪은 일들을 보았던 현서는 곧바로 사과하는 패천검이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제까지의 인상을 와장창 부술 만큼 특이한 행동을 했지만 말이다.
“이번 생엔 다시 보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이렇게 이 팔찌를 보게 되어 너무 당황했나 봅니다.”
“예. 그러시군요.”
―어쩐지 저번부터 기분 나쁜 눈초리더니 역시 날 노려서 그런 거였네.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옥의 헛소리 때문에 현서의 대꾸는 떨떠름하고 성의가 없었다. 현서가 납득하지 못해서 반응이 안 좋다고 여긴 패천검이 재차 말했다.
“그 팔찌는 제게 아주 소중한 분의 물건입니다. 이미 돌아가셨으니 유품이라고 해야겠군요.”
이어지는 패천검의 말에 현서와 옥, 둘 다 말을 잃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검선께 구명을 받았습니다. 돌아가신 분이니 은혜를 갚을 길은 요원해졌지요. 어쩔 수 없이 소소하게나마 그분의 묘와 사당을 짓고, 생전의 덕을 기리기로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신도 제대로 찾지 못해 묘라 해도 빈 곳이지만요. 그래서 그분의 유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팔찌는 그분이 마지막까지 패용했던 것이라 기대가 없었는데, 이렇게 보게 될지 몰랐습니다. 무례한 부탁이라는 걸 압니다만, 다시 한번 여쭈지요. 그 팔찌를 팔지 않겠습니까? 서녕호가의 사람에게 금전적인 대가를 말하는 것이 우습지만, 그래도 바라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치르겠습니다.”
패천검의 간절한 표정은 진심이었다. 현서가 황제의 목을 따 오라고 해도 들어줄 것 같았다. 죽은 자문원을 그렇게나 위해주는 건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팔찌를 주는 것은 현서가 들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죄송하지만 제게도 무척 소중한지라 팔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패천검은 현서의 거절을 받아들였지만 낙담한 듯 잠시간 말이 없었다. 팔찌에 대한 패천검의 눈은 진심이었다. 집착이 엿보였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사람이라 빼앗지 않고 요청하는 것이다.
현서는 힘을 가진 무림인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안다. 당장 힘으로 빼앗으면 현서로서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팔찌만 뺏어가면 차라리 낫고, 고분고분하게 주지 않았다고 팔찌를 차고 있는 팔을 잘라버릴 수도 있는 것이 무림인이었다.
패천검이 그런 짓을 할 것 같지 않았지만 청을 거절하고 한자리에 있는 것도 애매해 현서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이사가 약 드실 시간이라며 데리러 와 핑계도 좋았다.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현서가 꾸벅 인사를 하곤 종종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도련님, 왜 이렇게 급히 오세요. 그러다 넘어져요.”
잔소리를 했지만 딱 좋을 때 나타나 준 이사가 지금 현서 눈엔 선녀로 보였다.
“넌 선녀야.”
“선녀라니요. 신선이라고 해주세요.”
“그래. 그래. 이사 말이 다 옳아.”
현서가 이상하게 굴자 이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장원의 주인인 패천검이 서 있었다. 누각의 그늘에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사는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무림 고수의 시선이라 그런 걸까. 패천검이 보이지 않을 쯤이 되자 이사가 물었다.
“말씀 안 해주실 거예요?”
“별거 아니야. 이 팔찌를 팔지 않겠느냐고 물어본 것뿐이야.”
“네? 그게 별거 아니라니요.”
돌연 흥분한 이사가 발을 굴렀다. 현서는 이사의 격한 반응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안에 중환자가 있으면 모두가 영향을 받는다. 병구완하는 것에 있어 호가가 부족한 것은 없었으나 마음에 그늘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현서가 가족들의 굄을 받았기에 더욱 그랬다.
독을 먹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서가 중병에 걸린 줄 알았다. 오래도록 아픈 현서를 호가의 액운이라고 폄하하거나, 병에 걸린 아들이니 쓸모없다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호부 너머의 악의적인 말들은 말할 가치도 없었지만, 호부의 담 안에서도 그런 말들이 나오기도 했다.
당연히 만희당의 문을 넘나 들 수 있는 사람들 중에 그런 이들은 없었다. 악의적인 말이 현서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했다. 그런 말들이 현서가 병과 싸우려는 마음마저 앗아가게 할까 무서웠던 것이다.
팔 년 전 여름은 정말 최악이었다. 현서는 하루하루 말라갔고 눈에는 생기가 없어졌다. 이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현서를 잃을까 모두 두려워했다. 대부인은 밤마다 눈이 녹을 만큼 울었지만 아침이면 눈물 자국 하나 없는 얼굴로 아들을 만나러 갔다.
야시장이라는 미끼로 현서는 의욕을 되찾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현서의 몸 상태가 좋아 보이는 건 지금 잠시일 뿐이라고. 그래도 기운이 좀 생겼으니 괜찮을 거라고 서로를 다독였다.
그 여름의 호가 사람들이 스무 살의 호현서가 양주까지 여행을 간다는 말을 들었다면 욕부터 했을 터였다. 그러나 무슨 조화인지 야시장을 다녀온 이후로 느리지만 현서의 몸은 꾸준히 좋아졌다. 무엇보다 현서가 의욕을 가진 것이 가장 좋은 변화였다.
만희당의 식솔들은 옥이 도련님의 마음에 큰 위안을 주었다는 걸 알았다. 너무 커서 팔에 차지도 못할 때에도 옥은 늘 현서의 곁에 있었고 종종 손에 쥐고 잘 때도 있었다.
그 옥이 진실로 영험한 옥인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가족들과 만희당의 식솔들은 옥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 옥을 팔라는 말은 매우 나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이사는 그때 야시장을 따라가서 옥의 출처를 세탁한 일도 알고 있었다.
이사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대인께서 옥의 출처를 노대인으로 하신 이유를 알겠어요. 꼭꼭 숨기고 다니세요.”
“괜찮아. 안 판다고 했어.”
“잘하셨어요. 뺏으려고 하면 제가 꼭 막을게요.”
“얘가 무림인 무서운 줄 모르고. 옥이 탐나서라기보다는 사정이 있대. 그러니 억지로 뺏으려 하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그럴 사람 같진 않았으니 걱정 마.”
패천검을 피해 도망가는 주제에 묘하게 패천검 편을 드는 말을 해버린 현서다. 하지만 현서의 오른손은 옥팔찌를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너도 참.
핀잔하는 옥의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현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유위람이 입을 열었다.
“좌서.”
“여기 있습니다.”
“서녕호가에 대해 알아 오너라. 호현서와 그 가족, 그리고 저 옥팔찌의 출처에 대해서도 전부.”
“알겠습니다.”
좌서라고 불린 남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를 다오.”
시녀가 조용히 다가와 식은 차를 버리고 새 차를 채운 뒤 물러났다. 유위람은 자리에 앉아 상념에 빠졌다.
‘저 팔찌가 어디서 났을까.’
그날, 천지를 가르는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내려앉아 사방이 암흑천지처럼 어두워졌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그들이 본 것은 검선의 무덤이 되어버린 거대한 산이었다.
검선이 묻힌 그곳을 뒤로 하고 뒤늦게 도착한 원문백가의 사람들과 호수를 건너야 했다. 무거운 슬픔과 기괴한 침묵 속에서 유위람은 몇 번이고 뒤돌아 그 산을 보았다.
후일, 유위람은 여러 번 그곳을 찾았다. 혼자일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다. 반미치광이가 된 곽다순이 피눈물을 흘리며 흙더미를 파헤치는 것도 보았다. 허나 검선이 살아오지 않는 한 다시 산이 잘릴 리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팔찌가 나왔단 말이지.”
처음에는 비슷한 것인가 했다. 검선의 팔에 딱 맞았던 것이 살짝 크긴 해도 호현서의 팔에 걸려 있었으니 크기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자세히 보니 확실했다.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우서.”
“예.”
“너는 개웅산에 가서 달라진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아라. 혹 근방의 도굴꾼들이나 약초꾼들이 하는 얘기가 없는지 알아보고.”
“명을 받듭니다.”
우서가 사라지고, 시녀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 일렀다.
“스승님들은 불초한 제자가 무얼 하든 신경 쓰시지 않겠지만, 각주를 걱정시킬 수는 없지.”
유위람이 스물여덟 살 때 새로이 검각의 각주가 된 윤채풍은 마흔이 넘었지만 유위람의 사손뻘이 된다. 전 각주도 현 각주도 나쁜 사람이 아니라 유위람도 그들에게 냉정하게 굴지 않았다.
유위람이 마두(魔頭)가 되어 강호를 피바다로 만들지 않는 이상 뭘 해도 상관 않는 스승들과 달리 새 각주는 예전부터 어린 사숙조(師叔祖)를 걱정하고 신경 썼다. 유위람이 부모로부터 받은 이들을 수하로 부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 명의 스승들은 유위람을 제자로 들여 검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유위람이 작정하고 검각을 장악해 사유화시켜도 내버려 둘 게 뻔했다. 스승님들을 제외하고는 현 검각에서 유위람의 배분이 가장 높으니 식은 죽 먹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다. 더욱이 강한 검수를 숭상하는 검각인지라 유위람을 존경하는 이들로 넘쳐 났다.
하지만 유위람은 착한 사람에게 나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유위람의 인격 형성에 자문원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현서는 물론 자문원이 살아온다고 해도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해 할 일이긴 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다 쓴 서신을 시녀에게 건네주고 유위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하들이 빨리 소식을 가져왔으면 했다. 팔찌를 억지로 뺏을 마음은 없지만 친해지면 새로이 부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유위람은 현서와 친분 관계를 만들 생각이었다.
옥도 현서도 질색할 일이었지만 유위람은 제 결론이 퍽 만족스러웠다.
❖ ❖ ❖
집주인과 떨떠름하게 헤어졌으니 현진이 돌아오는 날까지 패천검과 마주칠 일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하루도 못 가서 실패했지만.
현서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 소의선 화정이 찾아온 것이다.
전날 패천검과 있었던 일로 기력이 빠진 현서가 침상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는데 화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완비의 은인인 환자가 있다더니. 이게 누구야. 현서잖아.”
“화 선생님!”
화정의 뒤에 유위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현서는 반가움에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일어나렴. 어지럼증 생긴다.”
화정은 의원이라 현서의 상세부터 챙겼다. 뒤따라 온 이사가 화정을 보고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차를 준비했다. 그사이 화정은 현서를 부지런히 살폈다.
“세상 좁다고 해도 너를 여기서 볼지 몰랐는데. 못 본 사이에 키가 많이 컸네.”
화정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현서는 화정의 눈높이보다 작았다. 아파서 제대로 자랄 수나 있을까 싶었던 키는 열여덟 살을 넘기자 늦은 성장기를 맞이했다. 성장통도 쉽게 넘어가지 않아 고생했지만 그래도 현서는 기꺼웠다.
“혼례 연회서 현진이 뭐라 말하려 하더니, 그게 네 얘기였나 보네.”
화정이 현서를 자리에 앉히고 당연한 것처럼 진맥을 했다. 그사이 유위람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사의 눈썹이 움찔 했지만 집주인을 상대로 나가라 할 수도 없었던지라 찻잔 하나를 더 놓을 뿐이었다.
눈을 감고 한참을 집중해 진맥한 화정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반짝 눈을 떴다.
“정말 좋아졌어.”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지요.”
“내 덕이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이유를 모르니 어찌 내 덕이라 하겠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저를 은혜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시려구요.”
“컸다고 말도 늘고.”
웃는 얼굴을 한 화정이 현서의 코를 가볍게 잡았다 놓으며 놀렸다.
“자세한 건 천천히 살피자꾸나. 손이 찬데 뭐 놀란 게 있어?”
“아뇨.”
“저 때문일 겁니다.”
화정의 질문에 현서와 유위람이 동시에 말을 했다. 유위람을 두둔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없다고 여긴 현서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네가 현서를 놀라게 했다고?”
화정이 의아해 했다. 유위람과 가까운 사이라서가 아니라, 성정이 괴상하긴 해도 약자를 상하게 할 망종은 아닌 걸 알아서였다. 유위람을 믿는다기보다는 유위람이 검선에게 가진 진심을 믿었다. 하지만 화정은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은 저 시커먼 놈보다는 의원으로서 환자의 편이었다.
“현서야, 쟤가 뭘 잘못했어? 사과는 받았고? 혹시 억울한데 무림인이라 말 못 한 건 없니? 내가 칼침은 못 놔줘도 머리에 침을 꽂아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하는 꼴은 만들 수 있는데, 그래 줄까?”
싱긋싱긋 웃으며 하는 말은 농담이지만 살벌했다. 이사가 속으로 마구 박수를 치는 것도 모르고 현서는 기겁을 했다.
“그냥 팔찌를 팔지 않겠냐고 하셔서 거절한 것뿐이에요. 정중하게 물어보셨고, 사과도 하셨어요.”
“팔찌?”
화정은 아홉 살 난 현서의 곁에서 칠 개월을 넘게 같이 있었지만, 그 후로는 자주 보지 못하였다. 찾아 와도 하루 이틀 정도만 머물고는 길을 떠났다. 현서는 의당으로 편지했지만 화정이 한곳에서 지내지 않아 서신이 엇갈릴 때도 많았다.
“아, 만희당 아침 행사!”
화정이 몇 번 갸웃하더니 기억해 냈다. 화정이 마지막으로 호부에 온 것은 현서가 열일곱 살 때였다. 현서가 식사 전에 창 너머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어본 화정이 깔깔거리며 웃었더랬다. 그 기억에 대번에 표정이 묘해진 화정이 유위람을 빤히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팔찌를 팔라고 했다고? 너 지금 우리 현서한테 수작 부린 거야?”
“수작이라니, 아무리 해도 화 누이의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가 없군요.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저는 차치하고라도 호 공자에게도 실례가 됩니다.”
“하지만 내가 네 성정을 아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하는 말이지.”
“그 팔찌, 검선의 것입니다.”
“뭐?”
“네?”
화정과 이사가 동시에 놀랐다.
그러고 보니 보니 검선의 왼손에 팔찌가 있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팔찌를 보게 된 것도 싸움이 격해지며 검선의 옷이 찢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화정은 열세 살이었고, 쫓기느라 신경이 모두 거기에 가 있었는지라 얼핏 보았던 팔찌의 모양까지 기억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물론 유위람이라면 충분히 기억하고도 남는다는 걸 화정도 알았다. 유위람이 검선의 팔찌라고 했으니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그 팔찌가 어떻게 바깥에 나왔을까.’
팔찌의 정체에 놀라긴 했지만, 화정 역시 유위람과 같은 의문을 가졌다.
[개웅산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화정이 슬쩍 유위람을 보자 유위람이 전음을 보냈다. 전음 사용을 배우지 않아 들을 순 있어도 보내지 못하는 화정은 눈만 살짝 깜빡였다.
“팔찌를 빼앗지 않겠다고 검선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켜줄까?”
검선의 팔찌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유위람처럼 팔겠느냐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왜 맹세를 검각이 아니라 검선의 이름으로 시킨다 하는지 영문 모를 일이었지만 현서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굴긴 했지만, 실제로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또, 자문원을 그만큼 생각해 주는 사람이지 않은가.
“아뇨. 괜찮아요. 패천검께서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
“뭐, 그렇겠지만 쟤 너무 믿지 마라. 쟤가 성격이 괴상하게 나빠. 어지간하면 근처에 가지 말고.”
“화 누이, 사람을 앞에 두고도 이리 욕을 하시니, 그만 물러나라는 눈치인가 봅니다.”
“잘 아네. 얼른 가.”
그러게 뭐 하러 따라와서는, 화정이 성의 없이 손을 휘저었다. 유위람이 쓴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인사한 뒤 물러났다. 이사가 새 차를 따라주자 화정이 현서의 소매를 잡았다. 현서가 웃으며 소매를 흔들었다.
“편한 옷이라 과자는 없어요. 그렇지 않아도 선물받은 과자가 있는데 같이 먹어요. 철서에서 유명한 곳이래요.”
“그래. 그 전에 좀 더 자세히 보자꾸나. 목은 어떠니? 요즘에도 기침이 심하면 목에서 피가 나?”
“아뇨. 기침은 한 번 시작하면 잘 멎지는 않는데 피는 안 나요. 올핸 한 번도 피가 나지 않았어요. 이사, 그렇지?”
“네, 소인의 기억으로도 그러합니다.”
“다행이구나. 입 안을 좀 보자꾸나.”
화정을 만날 때마다 했던 일이라 현서는 익숙하게 입을 벌리고, 눈과 귀를 보여주고, 겉옷을 벗었다. 화정이 현서의 맥을 짚고, 몸 곳곳을 눌러보며 통증의 여부를 물었다. 옆에 있던 이사가 화정에게 정 의원의 일지를 보여주었다. 현서가 겉옷을 챙겨 입는 동안 화정이 빠른 속도로 일지를 읽었다.
“몸이 많이 좋아졌구나. 이렇게 예상이 틀려서야, 소의선이란 이름이 아깝단 소릴 듣겠어. 그래도 이런 어긋남은 언제라도 환영이야. 이 정도로 회복되었으니 호 대부인께서 널 양주로 보내신 거겠지. 그래도 무리하면 안 되는 거 알지? 피로가 쌓일 때마다 회복도 더뎌진다. 여행도 좋지만 충분히 쉬어야 하는 것도 잊으면 안 돼. 몇 가지 약재를 적어줄 테니 나중에 정 의원께도 보여주렴. 그리고 지금 먹고 있는 약을 보여다오.”
이사가 현서가 마시는 약차와 약재들을 보여주었다. 화정은 약차를 입에 머금어보고, 약재들을 손을 쓸어가며 향을 살폈다.
“목이 좋지 않으니 환보단 마시는 약이 더 좋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환을 포함해 약을 더 만들어주마. 밖에서 먹기에 환이 더 좋기도 하고,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현서의 상비약들도 살펴본 화정이 약을 더 만들어주기로 했다. 소의선 화정이 만든 약이다. 갖고 싶은 사람들을 줄 세우면 성 하나는 거뜬히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를 표했다.
“좀 컸다고 예의를 차리니? 섭섭해지려고 하네.”
화정이 웃으며 현서를 자리에 앉혔다. 몸을 살폈으니 이제 미뤘던 얘기를 나눌 때였다. 주로 화정이 얘기하고 현서가 듣는 쪽이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간 뒤 화정이 물었다.
“너와 현진 일행이 완비를 구해주었다는 건 들었는데 어찌 된 일이야?”
현서는 자우정 폭포 아래 있던 완비를 현진이 건져 상천관에 데리고 갔던 일을 얘기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화정이 중얼거렸다.
“곽가 내부는 정리가 되었을 텐데?”
작은 목소리라 해도 가까이 있어 들렸지만 현서는 모른 척했다.
“그러고 보니 소의선께서도 곽 공자를 아시네요. 곽 공자는 보고 오셨어요?”
“그럼, 잘 아는 사이다마다. 돌잔치도 갔는 걸. 완비는 들에 풀어놓은 꿩처럼 나는 건지 뛰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펄럭거리며 다니고 있더구나. 아주 건강해.”
“흉사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어린데 괜찮은 거죠?”
죽을 뻔했는데도 아이는 겁먹어 숨어 들지 않았다. 듣기에 일곱 살이라고 했는데, 현서가 묻자 화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기야 했지, 집에 가서 제 엄마를 보면 옷자락 붙들고 울고불고 할 거다. 지금은 제가 아주 안전하다는 걸 알아 그런 것이니 괜찮다. 무서움을 이겨내는 것도 결국 자기가 깨달아야 할 일이지.”
그렇게 말하며 화정은 현서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네가 걱정이 된다.”
“저요?”
“세상에 미친놈이 얼마나 많은 줄 아니? 너는 예쁘고 몸도 약하고 돈도 많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지. 어디 다닐 때 절대로 혼자 다니면 안 된다. 알았지? 현진이나, 호위, 그것도 아니면 불편해도 유위람이라도 끌고 다니렴. 혼자는 안 돼. 알겠지?”
화정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서는 건강할 적에도 혼자서 대문을 나선 적이 없었다. 아픈 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마 패천검의 장원까진 따라오지 못했겠지만, 아버님이 보낸 호위도 철서성에 있을 게 분명했다. 자신이 위험해지거나 도움을 요청하면 나타날 것이다.
현서의 꿈은 제자를 키우며 사는 안온한 삶이었기 때문에 위험한 일 근처에는 갈 생각도 없었다.
❖ ❖ ❖
“호 공자는요?”
“잔다.”
나를 봐서 얼마나 들떴던지, 한 줌이던 기력이 쑥 하고 빠져나갔지 뭐야. 화정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유위람은 화정이 왜 우쭐거리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본인의 성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 만큼 자기 객관화가 되는 유위람은 남도 그만큼 봤다. 소의선이라는 이름에 묻히긴 했지만 화정이나 자기나 성정은 거기서 거기라는 얘기였다.
차탁의 식은 차를 아무렇게나 마시는 화정의 머리 위로 꽁지깃이 검푸른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 왔다. 손을 뻗자 새는 유위람의 팔 위에 내려앉았다. 다리에 묶인 작은 통을 빼내는 동안 화정이 차탁에 있던 새의 먹이를 꺼냈다.
화정이 계량한 만리추종향(萬里追蹤香)이 든 먹이다.
만리추종향을 먹여 기른 새들은 어디에 있던 각인한 주인을 찾아낸다. 각인시키기 위해선 주인도 만리추종향을 한동안 복용한 뒤 새에게 피를 먹여야 하지만, 번거로운 과정을 감수할 만큼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쪽지는 유위람의 손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낮이라 촛불이 없으니 귀찮다고 내력으로 태운 것이다. 성취가 뛰어나다고 해도 이제 이립을 넘겼으니 남들이 본다면 감탄할 일이었으나 화정은 게으르다는 정도의 평만 남겼다.
검각의 노괴들이 보쌈해 갈 만큼의 재능에 수련 또한 미친 것처럼 했으니 뛰어나지 않으면 괴상한 일이긴 했다.
“나난이야?”
“아닙니다. 화 누이. 오시는 길에 어린아이 납치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 있습니까?”
유위람의 질문에 화정이 기억을 더듬었다.
천하를 주유하고 태의원 시험을 치지 않아 강호 세력으로 구분이 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의당의 사람들은 의원이다. 무공 실력이 부족할 수는 있으나 의술이 부족한 제자는 없다는 말을 자랑하는 곳이다. 천하의 병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시조의 말에 따라 의당은 비무림인과 무림인, 정사의 구분 없이 환자를 대한다. 때문에 무림의 악적이라고 해도 의당의 의원에겐 손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의당 본산엔 주로 수련하는 어린 제자들이 있고 당주인 의선을 비롯해 대부분의 제자들은 천하를 돌며 환자를 돌본다. 역병이나 큰 사고로 환자가 생기면 의당의 제자들이 가장 먼저 움직인다.
현서를 치료하던 화정이 떠난 것도 수해가 생기며 이질이 생긴 지역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의당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얻은 지식들을 사형제들과 나누었는데 그래서 정보를 주고받는 일이 잦았다. 의원이기 때문에 정보를 사고파는 정우문(整羽門)과 또 다른 방식으로 듣는 것들이 많은 걸 알아 유위람이 물은 것이다.
“유괴나 인신매매는 많이 일어나는 범죄긴 한데. 그런 걸 묻는 건 아닐 테고, 도드라지는 흑도(黑道)나 사교(邪敎)의 얘길 묻는 거라면 나는 딱히 들은 게 없어. 완비의 일이랑 관련 있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곽가 내부는 아니고?”
화정의 질문에 유위람이 고개를 저었다.
“곽가 내부가 어떻게 정리된 줄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던.”
“살아 있어야 쥐라도 되지요.”
유위람의 말은 냉정했다. 담장 안에서 벌어진 곽가 내부의 일이라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것은 학살이었다.
“하긴, 지금 나난을 적대할 만한 사람은 전부 죽어버렸으니. 그분이 그렇게 하실 줄 누가 알았겠어.”
“그렇죠.”
화정의 목소리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주로 연민과 안타까움이었다. 곽나난의 얼굴을 보아 얌전히 맞장구쳤지만, 곽다순에 대한 유위람의 평은 매우 박했다.
백양교 사건, 아니, 천의맹 배신자 사건은 여러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끼쳤다. 개웅산에 있던 그 모두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유위람을 포함한 다섯 명의 평균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그러나 어리다고 해서 바보는 아니다. 천의맹에 모였을 때부터 아이들은 석연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의문은 매일 조금씩 쌓였으나 자문원의 죽음과 함께 어느 것도 해소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아이들은 의문을 안고 각자의 사문으로 흩어졌다.
반년 뒤, 백양교가 몰락했음을 천명하며 천의맹이 해산했다. 무연산장을 비롯한 몇몇의 문파들이 백양교의 첩자로 밝혀져 소요가 일었으나 그것도 곧 잠잠해졌다.
사문의 미래라고 불리어도 아직 어려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유위람이 이전까지 연락하지 않았던 집에 연락을 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정보를 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유위람뿐만이 아니었다. 화정이 의당의 연락법을 계량해 만리추종향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검각(劍閣)의 유위람. 의당(醫堂)의 화정. 청사파(淸使派)의 소화리. 태호문(太昊門)의 감윤. 영우곽가의 곽나난.
모두 자리한 곳은 달랐지만 그랬기에 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유위람이 얻은 최초의 비밀 정보는 백양교 교주를 죽인 것이 천의맹주 곽모의가 아니라 검선 자문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유위람은 호인인 척하던 곽모의의 면상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문에 답을 찾으려 했다.
강해표국 혈사는 천의맹에 배신자가 있다는 것을 알린 심각한 일이었다. 그 일에 관한 증인을 몰래 보호하는 일에 천의맹의 사람이 아닌 검선 한 명만을 보낸 것부터가 이상했다.
더욱이 배신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위해 다섯 아이들을 볼모로 잡은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일 영우곽가를 제외한 나머지 네 곳의 문파가 아이들을 증인들과 같이 보낸 일로 크게 항의했다. 아이들을 보내긴 했으나 그와 같이 위험한 행로에 동행시킬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검선은 죽었으나 아이들도 증인들도 모두 살아남아 검선의 고강한 무위나 약자를 지킨 협의(俠義)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축소시킬 수는 있었다.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루지 않았다는 것도 나중이 되어서야 알았다.
검선의 희생은 천의맹의 죄였다. 그래서 숨기고 감추기에 급급했다.
왜냐면 검선에겐 가족도 사문도 없었으니까. 그의 사문이 그를 마지막으로 맥이 끊어졌기 때문에 검선을 대신해 화를 낼 사람이 없다고 여겨 그런 것이다. 참으로 치졸했다.
‘그럼 내가 검선의 편이 될래.’
청사파의 소화리가 말했다.
‘스승님은 내게 은원 앞에서 한 점의 부끄러움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 나는 검선의 제자도, 가족도 아니지만 검선은 생명의 은인이니 내가 검선의 편이라고 해서 누가 무어라 할 수 있겠어?’
은원에 관해선 정사를 통틀어 가장 서릿발 같은 청사파의 제자다운 말이었다. 나머지 아이들이 동의를 표했다.
검선에게 구명지은을 입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청사파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문 전부가 은혜, 구명지은을 중히 여기라고 가르쳤다. 때문에 난색을 표할 명분도 없었다. 소화리가 먼저 말했을 뿐 모든 아이들은 이미 검선의 편이었다.
가족이 아니라고? 같은 사문이 아니라고? 그게 왜 검선의 편에 서지 못할 이유가 되는가. 검선은 자신의 목숨으로 가족도 아니고, 동문도 아닌 이들을 지켜 냈는데. 이것보다 더 확실한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누가 검선을 죽이려 들었는지 알아야겠어.’
유위람이 말했다.
‘복수하게?’
소화리가 물었다. 은인의 적은 나의 적. 청사파의 일원다운 말이었다.
‘검선의 이름에 복수를 붙일 수는 없지. 지금은 그냥 알고 싶을 뿐이야. 그날 우리가 보았던 자객들이 전부 무연산장이나 그 일당들이 보낸 걸까? 낙영도의 사문인 일사문과 파성군의 사문인 진천문(振天門)은 왜 입을 닫고 있지? 강해표국과 한 집안인 금어방(金魚幇)은?’
천의맹의 발표를 전해 들은 유위람을 코웃음을 쳤다. 누굴 바보로 보고.
‘누가 검선을 사지로 밀어 넣으려고 했는지, 누가 적인지를 나는 알아야겠어.’
‘알기만 하게?’
화정이 묻자 유위람이 빙그레 웃었다.
‘아직 어리니까요. 지금은 알기만 해야죠.’
유위람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이제까지 말을 얹지 않고 가만히 있던 곽나난이 불쑥 끼어들었다.
‘거기에 영우곽가를 뺀 건 나를 배려해서야?’
곽나난이 전에 없이 사나운 얼굴을 하고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검선의 공적을 가로챘다. 무영객잔의 습격에는 큰 숙부가 연루되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말은 못 했지만 곽나난은 그곳에서 큰 숙부의 사람들을 보았다. 검선이 죽은 뒤 사람이 너무 순해서 걱정이라는 소리를 듣던 작은 숙부, 곽다순이 광인의 꼴로 나타나 할아버지의 서재를 부숴놓은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네 작은 숙부는?’
‘근신하라고 수련동에 보내 폐관 중이라는데 모르지. 사지 근맥이 멀쩡하시려나. 팔다리라도 안 잘랐으면 다행이긴 한데.’
조만간에 나도 그렇게 될지 모르지. 곽나난이 조소했다.
천의맹주이자 영우곽가의 가주인 곽모의는 큰아들이 사망한 뒤 남은 아들 중에서 후계를 골라야 했음에도 미적거렸다. 그것이 자격지심이 있던 큰 숙부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물론 곽나난은 피붙이라 해서 할아버지와 큰 숙부는 물론, 우유부단한 작은 숙부까지 두둔할 마음이 없었다.
‘어른들의 말씀처럼 아직 어려 모르는 게 많다 하시니 기다릴 밖에요. 시간은 결국 우리 편일 테니.’
유위람이 말했다. 곽나난이 곽가를 이끌겠다면 지지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의 아이들이 가만히 웃었다. 유위람이 스승들의 이름을 빌려 모두를 모은 첫 번째 회동이었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유위람은 스승들이 있는 일천봉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세인들은 검선의 죽음과 함께 백양교, 천의맹의 일은 끝이 났다고 믿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오 년 뒤, 죽은 줄 알았던 곽다순이 나타나 영우곽가의 대문을 걸어 잠갔다.
염원을 이루어 가문의 후계자가 된 제 형을 찢어 죽이고, 부친의 단전을 파괴한 뒤 자문원의 죽음에 책임을 물어야 할 이들을 전부 죽였다. 단전이 파괴되고 사지의 근맥이 잘린 부친에게 그 모든 장면을 보게 하고서야 끝을 냈다.
큰 숙부의 횡포를 피해 외가에 가 있던 곽나난이 급히 돌아와 곽다순이 휩쓸고 간 집안을 정리하며 약식으로 가주가 되었다. 열일곱 살의 어린 가주를 반대할 사람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곽다순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곽나난도 몰랐다. 모든 일을 끝내고 자살했을 것이라는 얘기에 무게가 실렸지만 시체도 찾지 못했다. 영우곽가의 세력은 그 일로 위축되긴 하였지만 곽나난은 훌륭한 가주였다. 영우곽가는 천천히 가세를 회복해 나가고 있었다.
“완비라서 노렸다기보다는 어린아이를 노린 범죄 같았습니다. 완비에게 물으니 좋은 옷을 입고 있으니 더 잘되었다는 얘길 들었다고 합니다.”
“알았어. 나도 사제들에게 물어볼게.”
단순 유괴라 해도 패거리가 있다면 일망타진해야 할 일이다.
“어느 미친놈이 송가장의 혼례식에 초를 치나 했더니, 처음부터 철서 근방에서 일을 꾸민 건 아니었네.”
“네. 완비가 납치된 곳은 미양 부근이었으니까요.”
“완비는 어쩌기로 했어?”
“일단 곽 부인에게 서신을 보내두었습니다. 대자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제 책임이 크니까요.”
문 밖에서 기척이 들리자 유위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 화정이 허락하자 하인이 상자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차탁 위에 상자를 두고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화정이 적은 처방대로 준비한 약재들이었다.
“응. 잘 갖고 왔네. 이대로 손님께 보내줘. 이사에게 내가 보낸 것이라고만 말하면 돼. 나머진 다 설명해 뒀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화정의 확인이 끝나자 하인이 상자를 챙겨 나갔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뇨. 화 누이가 환자에게 잘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호 공자에겐 특히 더 잘해주는 듯 보여서 말입니다.”
유위람의 말에 화정이 기억을 더듬기 시작해 시선이 살짝 비켜났다.
“처음 봤을 때 숨이 너무 가늘어서 깃털을 코 아래 두고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깃털이 움직이는지도 모를 정도였어. 눈뜨는 데 석 달,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에 다시 일곱 달이 걸렸어. 내가 떠날 때까지 말도 하지 못했지. 그때 현서는 아홉 살이었는데.”
“병이 아니었군요.”
“그래, 독을 먹었어. 현서를 목표한 건 아니었지만, 부잣집 아이가 독을 먹는 건 그렇게 별스런 일은 아니야. 하지만 그 독은 부잣집 후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
“독의 출처가 독곡(毒谷)입니까?”
“아니, 그랬다면 지금까지 독곡이 저렇게 조용했겠니? 호가가 씹어먹으려고 들었을 텐데. 너도 아는 독이긴 해. 극소량을 쓰긴 했지만 그건 분명 산혼투(散魂偸)였어.”
화정의 말을 듣던 유위람이 놀랐다.
세간에는 산공독(散功毒)이라는 것이 있다. 무색무취의 독으로 생명을 빼앗지 않으나 내력을 흩트려 독을 해독하기 전까진 무공 사용에 제약을 건다. 무림인에게는 상당히 골치 아픈 독이다.
당하는 이들도 많았고 그런 만큼 산공독의 해독법도 다양했다. 산공독에 당한 상태에서 적을 만나게 되면 죽을 수도 있지만, 독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라면 내력으로 독을 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산혼투다. 내력을 못 쓰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단전을 파괴하고 목숨을 빼앗는 독. 소량이라도 섭취하게 되면 목숨을 건지게 되더라도 반드시 단전을 폐하게 된다. 무림인에게 그것 또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어 악명 높은 독이다.
“산혼투는 만드는 법이 까다롭고, 전인도 없어 실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호에 나온 것이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게 어떻게.”
“그래, 이상한 일이지. 산혼투는 만들고 사나흘이 지나면 맹물이랑 똑같아져. 게다가 산혼투를 만든 호궤마는 제자를 두지 않았어. 호궤마가 죽은 이후 산혼투를 만들려는 시도는 빈번했지만 성공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없었지.”
“누이나 의선께서도 못 만드십니까?”
“못 만들어. 만들 생각도 없고. 재료를 다 모르기도 하거니와, 너 거기 사람의 골수가 들어가는 건 아니?”
화정의 말에 유위람의 표정이 굳었다.
“죄송합니다. 확실히 의당이나 독곡에서 만들 물건은 아니군요.”
“그래.”
“그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거군요.”
“맞아. 쉽게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산혼투가 다시 나왔으니 강호에 파란이 일 줄 알았지. 하지만 이후로 산혼투에 당했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 물론 천하의 일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도 서녕호가도 추적 중인데도 꼬리가 잡히질 않으니 기이한 일이지.”
“의당과 호가의 추적을 십 년 넘게 피하다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그랬으면 좋겠다만.”
유위람은 화정이 모든 얘기를 다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캐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정 궁금하다면 알아보면 될 일이다.
산혼투가 나와 얘기가 다른 곳으로 흘렀기에 유위람은 말을 돌렸다.
“호 공자는 그야말로 천운을 타고났군요.”
극소량이라고 해도 아홉 살 아이가 산혼투를 먹고 살았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유위람은 연약한 귀공자로만 보았던 호현서를 새삼 다시 보았다. 그 독을 먹고 저만큼 나았다는 것은 본인의 의지가 대단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내가 그만큼 잘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번에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네.”
그렇게 말하며 화정이 웃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현서는 스물다섯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 빤했다. 하지만 못 본 사이 현서는 무척이나 좋아졌고, 좀 더 두고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수명이 늘어난 것은 분명했다.
“틀려서 잘되었지. 이렇게 틀리는 건 언제라도 환영이야. 내가 다른 환자들보다 현서에게 더 마음 쓰는 거 같다고 했지? 좋은 사람은 많아. 착한 사람도 많지. 하지만 산혼투를 먹은 아홉 살짜리가 다정하기는 쉽지 않아. 더군다나 그 애는 서녕호가의 장중보옥이잖니. 내 장담하건대 황궁의 황자도 현서만큼 귀하게 자라진 않을 거다. 천하의 다시없을 개망나니로 자라서 호가의 재산을 전부 헐어버려도 잘한다고 박수칠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다정하게 자랐지. 귀한 건 귀하게 대접해 주어야 해.”
길게 말을 해서 목이 탔는지 화정은 연거푸 차를 마셨다.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것은 이유가 있음이라. 가만히 듣고 있던 유위람이 물었다.
“제가 팔찌 때문에 호 공자에게 나쁘게 굴 것 같습니까?”
“아니. 네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 현서가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너 같은 고수가 툭 치면 그야말로 큰 사고가 될 테니 조심하라고 하는 얘기야. 서녕호가를 적으로 돌리면 검각은 말할 것도 없고 네 부모님이라도 다 막아주기 어려울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화정이 씩 웃었다.
“의당은 무조건 호가의 편이 될 거다. 나도 그럴 거고.”
“의당의 어마어마한 후원자가 누군가 했더니 서녕호가였군요.”
어느 문파든 문파를 유지하는 데는 많은 돈이 든다. 의당은 말할 것도 없다. 환자를 가리지 않고 치료해 주기 때문에 대가를 받지 못할 때도 많았다. 받을 수 있을 때 크게 받거나 후원을 주로 받는다.
원래부터 상인들은 의당과 사이가 좋았다. 상행을 다니거나 전국에 점포가 있는 큰 상단일수록 의당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현서가 아프기 전부터 서녕호가는 의당과 사이가 좋았다.
그럼에도 화정이 현서를 치료하고 난 다음에야 의당의 사람들은 서녕호가의 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막대한 후원금은 물론 의당의 사람이면 누구든 천하에 흩어져 있는 호가 상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황제의 칙사도 성마다 이런 대접은 못 받을 거라며 의당의 제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호가에 상주하는 의원이 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걔는 말한 직후 따로 불려가 의서를 다섯 권 필사하고 면벽 수련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화 누이도 검선의 사당에 팔찌가 놓여 있으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은 해보셨지요?”
“당연한 얘길 하는구나.”
지체 없는 대꾸였다. 검선의 사당과 묘는 모두의 합작품이었으니 말이다. 누구 하나 뺄 것도 없었다. 둘은 눈이 마주치자 소리 내 웃어버렸다. 한참 웃던 화정이 덧붙였다.
“그래도 나는 그 팔찌가 어찌 밖에 나왔는지가 더 궁금하네.”
“저도 그렇습니다. 호부에서 팔찌의 내력에 관해 들은 얘기는 없었습니까?”
만희당의 아침 행사가 흥미를 끌긴 하였으나 그게 다라 물어본 일이 없었다. 화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현서가 무척 아끼는 팔찌라는 거 말곤 딱히 들은 건 없구나.”
“개웅산에 사람을 보냈으니 문제가 있다면 연락이 오겠지요.”
❖ ❖ ❖
혼례식 이후 삼 일이 지났다.
현서는 늦은 아침을 먹은 뒤, 뜰에서 볕을 쬐고 있었다. 유위람은 팔찌의 일을 재차 사과했으나 현서는 신경이 쓰여 산책을 나가지 않고 처소 근처에서만 지냈다. 화정과 완비가 놀러 와서 심심할 틈도 없었다.
어제저녁에 현진이 사람을 보냈다. 오늘부터 송가장의 신혼부부를 따라 신부의 친정에 가는 회문에 동행하는지라 한동안 철서성에 없을 거라는 얘기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가까운 거리라면 하루 만에 끝나지만 신부의 집이 멀기 때문에 적어도 일주일은 걸린다고 했다. 전부터 미리 말을 해놓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말을 전해 온 하인에 따르면 화정이 머무르고 있다는 얘기에 안심했다고 한다.
현서의 몸도 좋아졌으니 돌아오면 같이 송가장에 인사하러 가자는 말도 있어서 흔쾌히 승낙했다.
“형이 돌아오면 호설루에 가서 밥 먹어보자. 완비가 그러는데 거기 밥이 맛있대. 특히 민물게 요리가 유명하다지 뭐야.”
“호설루면 저번에 나눠주신 과자를 팔던 곳이죠? 과자가 맛있더니 다른 음식도 맛있나 보네요.”
이왕 나왔으니 철서성 구경을 좀 하고 돌아간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어머니도 천천히 구경하다 돌아오라고 하셨으니 말이다.
“형이 오면 귀시장(晷市場)도 가고 싶어.”
“귀시장(鬼市場)이요? 그런 위험한 곳을 현진 도련님께서 데리고 가실 리가 없을 텐데요.”
현진이 얘기해 준 귀시장은 없는 게 없다는 뒷세계의 위험한 시장이었다. 간혹 주인 없는 보물이 나와 이득을 얻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가짜거나 장물을 속여 팔아 칼부림이 나는 건 예사라고 했다. 비정기적으로 열리고 알음알음 가는 곳이라 현진도 어쩌다 갔다고 했다.
“아니, 그런 귀시장(鬼市場) 말고. 황제가 계시는 대도에서는 여름 동안 축시(丑時: 밤 1시-3시)부터 인시(寅時: 새벽 3시-5시)까지 시장을 연대. 그걸 귀시장(晷市場)이라고 한다는 거야. 양주 참의(參議)의 부인이 대도 출신이라 철서에서도 몇 번 야시장을 열어보았는데 반응이 좋아서, 그 후로 꽃 피는 기간에는 여기서도 대도처럼 귀시장을 연다고 하더라.”
“시간이 너무 늦지는 않을까요?”
“다음날 실컷 자면 되지.”
“그런 거라면 현진 도련님도 반대하지 않을 것 같네요.”
이사와 철서성 근방 여행에 관한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있는데 뜰의 입구에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장원의 하인이었다.
“무슨 일이니?”
“손님께 고합니다. 밖에 호가 상단에서 온 물건들이 도착해 있습니다.”
“호가 상단? 아. 어머님이 보내신다던 그거구나.”
“상단에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여기로 바로 보내셨나 봐요.”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나갔다 올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어딜 가는데?”
평소처럼 화정이 완비와 놀잇감을 가지고 들어오며 물었다. 그러나 오늘은 특이하게도 뒤에 유위람이 달려 있었다.
“주사위 놀이를 하려는데 사람이 다섯이어야 한단 말이야.”
현서가 패천검과 화정을 번갈아 바라보자 화정이 말했다. 현서는 이사를 보내고 손님을 내실의 곁방으로 안내했다. 유위람과 화정, 곽완비가 조르르 차탁에 자리하자 현서가 차를 우리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호가 상단 편에 제 물건을 좀 보내셨다고 해서 이사가 가지러 갔어요. 주사위 놀이는 이사가 올 때까지 잠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주사위가 썩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손님에게 과자도 대접해야 하는데 과자를 보관하는 찬합이 보이지 않았다. 찻잎 근처에 분명 있을 텐데 보이지 않아 현서는 급한 대로 소매에서 주머니를 두어 개 꺼냈다.
“이게 뭐예요??
완비가 단번에 관심을 보였다.
“과자 주머니지.”
화정이 대신 대답하며 주머니를 뒤집어 털자 서너 개 되는 과자가 후드득 떨어졌다.
멋지다. 하루 정해진 개수만큼의 과자만 먹을 수 있는 완비의 눈이 대번에 초롱초롱해졌다. 조카들이 자신을 볼 때의 눈이랑 다르지 않아 현서는 그만 소리 내 웃어버렸다.
현서의 웃음에 조용해진 것도 잠시 완비는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쀼루퉁해졌다. 그게 아니라며 과자 주머니를 하나 더 꺼내 완비를 달래고 있자니 이사가 돌아왔다.
격선문을 열어둔 상태라 여럿의 하인들이 상자를 들고 오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가문비나무에 수지와 흑칠을 한 튼튼한 궤짝이 총 여섯 개였는데, 궤짝 하나당 장정 두 명이 들어야 할 만큼 컸다.
어머니가 보낸 것치고는 적게 보내셨구나 하는 현서의 감상 옆으로 완비가 말을 보탰다.
“엄청 커요. 저도 그렇고 어른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곽 공자님, 무서운 얘기 마셔요.”
이사가 질겁했다. 유위람이 궤짝들을 슥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상자 안에 사람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도 없군요.”
“들었지? 패천검께서 없다고 하시니 안심해.”
하인들이 이 층에 올려두려고 하자 일단 정리부터 해야 한다며 이사가 곁방에 옮겨달라고 말했다.
하인들이 물러가고 이사가 돌아오자 주사위 놀이가 시작되었다. 주사위 놀이는 현서도 서녕에서 가끔 했었는데, 놀이판도 규칙도 현서와 이사가 아는 것과 달라 처음 몇 판은 화정이 가르쳐 주면서 했다.
규칙을 대강 알게 된 뒤 현서는 적당히 빠지려고 했는데, 웬걸 옥이 너무 재미있어 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까지 즐거워하는 건 처음이라 적당히 하려던 것을 잊어버리고 현서와 옥은 완전히 몰입해 버렸다.
옥이 기뻐하는 게 좋아 주사위 놀이를 이어갔던 현서는 내리 세 판을 이겼지만 그 때문에 체력을 아주 바닥까지 득득 긁어 써버렸다. 옥이 아차 하며 미안해 했다.
‘나도 재밌었거든. 담에 만희당에서도 해보자.’
“저는 이제 더는 못 해요.”
땡볕 아래 무말랭이처럼 시들해진 현서가 더 이상 못 하겠다며 휴식을 선언했다. 이사가 내실에 들어가서 눕겠느냐고 물었지만 좀 더 구경하고 싶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기고 빠지다니 치사하다고 할 만하지만 현서의 체력을 알고 있는지라 이사가 사람을 불러 냉큼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인용의 널따란 의자 위로 푹신한 깔개와 등받이 등이 구비되느라 부산했다. 현서가 빠진 자리는 등받이를 가져온 하인이 채웠다.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왁자지껄한 소음을 자장가 삼아 현서의 눈이 느리게 깜박이기를 반복했다.
졸린 와중에 편한 자세를 만들려 뒤척이자 누군가가 곁에 앉았다. 적당히 따뜻하고 단단해서 기대 눕기 딱 좋았다. 아픈 이후로 다른 사람에게 기대거나, 다른 사람이 안아 옮기는 것에 익숙해진 현서였다.
당연히 이사인 줄 알아 현서는 좀 더 놀다 와도 되는데 하고 중얼거렸지만, 잠에 취해 실제로 나온 말은 웅얼거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옥이 뭐라고 하는 거 같았지만, 잠든 것과 마찬가지라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을 먹을 때까지 달게 잤던 현서는 깨어나서 기겁을 했다.
눈을 떴을 때 현서가 본 것은 패천검의 옆얼굴이었다. 깜짝 놀란 현서가 금방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그게 될 리가 없었다. 현서가 허우적거릴수록 패천검의 옷만 구겨질 뿐이었다. 당황한 현서를 유위람이 부드럽게 일으켜 의자에 앉혀주었다. 벌게진 얼굴로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해요. 불편하셨죠.”
패천검의 옷에 침이라도 흘린 건 아닌가 싶어 황급히 살폈는데 옷이 구겨지기만 했을 뿐 침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호 공자가 깃털처럼 가벼웠다고 하면 기루에 사는 무뢰배처럼 보이겠죠. 하지만 저도 강호에서 칼 밥 먹는 사람이라 이 정도는 괜찮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패천검이 칼 밥이라니 이건 겸손이야? 자랑이야?’
―요즘 애들 화법을 내가 어찌 알아.
당황한 현서는 옥이랑 같이 말문이 막혔다.
“현서 깼어? 깼으면 쟤 헛소리 그만 듣고 밥 먹자.”
다행히 화정이 현서를 구해주었다. 현서는 재차 사과한 뒤 나름 잽싸게 움직여 화정의 곁에 자리했다.
식사 자리에선 주사위 놀이 얘기가 주였고, 현서가 패천검을 붙들고 잔 얘기는 일절 올라오지 않았다. 당황한 현서가 체할 걸 배려했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까지도 현서는 계속 창피해 했다.
“왜 안 깨웠어.”
―난 말했다.
‘알아.’
현서가 열이 오른 얼굴을 문지르며 우울하게 대답했다. 뭐라 하는지 듣진 못했지만 옥이 말한 건 기억이 났다. 현서는 이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패천검을 멀리하라며. 그럼 깨웠어야지.”
“도련님 편히 주무시는데 뭐 하러요? 도움이 되었으니 잘되었죠.”
“천하의 패천검을 이리 홀대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궤짝에 사람 들었을까 무서워하면서 왜 패천검은 안 무서워하는 거야.”
“궤짝에 사람이 숨어 있다면 좋은 의도로 있는 게 아닐 테니 당연히 무서워해야죠. 하지만 그분은 소의선께서 가만히 계셨잖아요. 소의선께서 아무 말씀 안 하셨다는 건 도련님께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니까요.”
“언제는 팔찌 때문에 발까지 구르며 화내더니.”
현서가 삐죽거리며 반박했다.
“안 뺏는다면서요. 그리고 뺏게 되면 그건 그때 막을 일이지요.”
“이사, 또 말하는데 만약 뺏는데도 절대로 막지 마. 위험해. 그리고 내 건강을 걱정한다면 내 부끄러움도 잊지 말아줄래?”
“도련님의 몸이 지금보다 더 튼튼해지면 그것도 챙겨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이사는 현서의 투덜거림에 성실히 대꾸하면서, 궤짝을 열어 가장 위에 있던 서신을 가져다 현서의 손에 쥐어주었다.
“서신은 인편으로 보내실 줄 알았는데.”
물품 목록을 궤짝에 넣는 김에 서신도 같이 넣어두셨나. 어머니의 서신을 읽던 현서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눈을 꾹 감았다 뜨자 평소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이사. 그만하고 이리로 와.”
“네?”
궤짝 안의 짐을 살피던 이사는 의문을 표하면서도 금세 현서의 곁으로 왔다.
“어디 불편하세요? 서신에 뭐 안 좋은 얘기라도 적혀 있었어요?”
“아냐. 모두 잘 지내고 계신대. 이거 모두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시작하기 전에 뭐라도 먹고 하자 싶어서.”
현서가 음식을 먹겠다고 하는 얘기는 언제 들어도 좋아 이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시고 싶은 게 있으세요?”
“두부랑 죽순을 넣은 탕으로 하자. 죽은 좁쌀이랑 말린 고기가 들어가면 좋겠어. 나머진 이사가 골라줘.”
이사가 기분 좋게 방을 나서자 자리에는 현서와 옥만 남았다.
―무슨 일이기에 이사를 보냈어?
‘어머니가 보낸 궤짝은 다섯 개래.’
―뭐? 그럼 사람을 불러야지, 이사를 내보내면 어찌해.
‘패천검이 사람이나 살아 있는 건 들어 있지 않다고 했잖아.’
―이상한 기관 장치가 되어 있으면 어쩌려고.
‘지금 열진 않을 거야.’
옥의 잔소리를 들으며 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궤짝으로 향했다. 집에서 흔히 쓰는 궤짝이다. 석청담에 갈 때도 이 궤짝을 썼다. 튼튼하고 수지를 꼼꼼히 칠해서 방수도 잘되었다. 검은 옻칠은 주기적으로 해서 벗겨진 곳도 없었다.
‘독이 있는 거 같아?’
현서는 궤짝에 독이 발려 있지 않을 거라 여겼지만, 확실히 하고 싶어 옥에게 물었다. 옥의 말에 의하면 독이 있으면 부자연스럽게 기감이 흐트러진다고 했다. 그 설명을 현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람이 아닌 옥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 다를 수밖에 없다 여겼다.
―아니. 없어.
‘다행이야.’
현서가 아직 열어보지 않은 다섯 개의 궤짝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궤짝을 열어보는 대신 두들겨보고 흑칠의 상태 등을 관찰했다. 서신이 들어 있던 첫 번째 궤짝도 확인한 뒤 이사가 돌아오기 전에 자리로 돌아갔다.
‘뭐가 우리 것이 아닌지 알 거 같아.’
패천검에게 청하든, 화정에게 말하든 우선 밥부터 먹고 움직여야 했다. 단순 착오든 아니든 간에 이 일을 얘기하면 밥 먹기 어려울 게 뻔했다. 게다가 배고프단 얘기도 빈말이 아니었다. 억지로 식사를 했다간 탈이 나기 때문에, 배고프지 않으면 음식을 먹겠단 얘기는 하지도 않는다.
이사와 밥을 먹고 약까지 다 먹은 뒤, 궤짝에 관한 얘기를 꺼내려는데 문 밖에 하인이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손님? 송가장에서 사람이 왔어?”
“아닙니다. 호가 상단의 행수께서 오셨습니다.”
하인의 말에 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궤짝이 하나 더 온 일로 왔나 보네. 현진과 달리 현서는 아직 철서 지부의 행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실수였구나.
‘그러게, 열어보지 않길 잘했네.’
현서는 옥과 대화하며 손님을 곁방에서 맞이하겠다고 알렸다. 곁방에 가자 철서 지부의 행수로 보이는 이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수로 궤짝을 잘못 보내 찾으러 왔다고 보기엔 너무도 시원스러운 얼굴이라 현서는 갸우뚱했다.
“도련님, 처음 뵙겠습니다. 철서의 행수를 맡고 있는 신 모입니다. 딱 좋을 시기에 오셨습니다. 철서에서 지내는 것은 어떠합니까?”
“예. 반갑습니다. 행수께서 신경을 써주셔서 잘 지냈습니다. 철서는 서녕보다 봄이 이르게 와서 그런지 따뜻해서 좋네요. 신 행수께서도 평안하시지요?”
“그럼요. 보내주신 선물도 잘 받았습니다. 안사람이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이다.”
“어머니께서 드리라고 한 걸요. 신 부인께서 마음에 드셨다고 하니 어머니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사이 이사가 차를 준비해 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어제 저희 사람들이 서녕에서 보낸 물건을 도련님께 전해드렸다고 해서 제대로 도착했는지 걱정이 되어 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어요. 어머니께서 보낸 짐이 제법 큰데 상한 곳 하나 없이 잘 왔더군요.”
“석계까지 배로 오니 제가 한 일이 뭐 있겠습니까. 전부 여섯 개라 짝을 지워 싣기도 편했습니다.”
현서의 감사에 행수가 겸손하게 말했다. 현서의 눈썹이 살짝 움찔 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로 소소한 대화들이 이어졌다.
어머니가 신 부인에게 준 선물은 무게당 금으로 값을 매기는 채색 비단 세 필과 우단과 옥을 엮어 만든 꽃 비녀였다. 신 행수의 집에 딸이 있어 혼수에 쓰라고 보낸 것이다.
꽃 비녀는 그렇다치고 채색 비단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숙련된 비단 장인 다섯 명이 넉 달을 꼬박 써야 한 필이 나오는데 그나마도 대부분은 진상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닷새쯤 뒤면 현진 도련님도 돌아오시겠군요.”
화운검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지만 행수는 호가 상단 사람이라 현진 도련님으로 불렀다.
“네, 형이 돌아오면 철서와 인근의 명소를 구경하려고 하는데 행수께서 추천해 주실 만한 곳이 있나요?”
현서가 그렇게 묻자 행수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이게 본론이었구나. 누가 봐도 알 만한 표정 변화였다.
“그렇지 않아도 도련님께 드리려고 했던 것이 있는데, 이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 기쁩니다.”
그렇게 말하며 행수가 품에서 꺼낸 것은 수선화 향을 입힌 초대장이었다.
“이틀 뒤에 열려 현진 도련님은 참석하시지 못하나 철서의 봄 명물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연회입니다.”
초대장의 겉면에는 유려한 글씨체로 춘풍만월(春風滿月)이라 적혀 있었다. 어떤 종류의 모임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 현서에게 행수가 설명했다.
호가 상단 소유의 다관에서 열리는 봄 연회로 봄꽃과 보름달을 주제로 한다. 그래서 이름도 춘풍만월이다. 차와 음식은 제공되지만 술은 없는 것이 특이했다.
주최자는 신 행수지만 철서성에 있는 호가 상단의 상점들이 전부 관련되어 이른바 호가 상단을 알리고 과시하는 연회였다.
“올해는 황상께서 술을 내린 금(琴)의 명인을 초청했습니다. 저희 연회는 늘 호평이었지만 올해는 더 특별하겠지요. 도련님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마침 혼례로 송가장에 온 손님들이 다 떠나기 전이라 호가 상단이 눈도장 찍기에도 좋았다. 상단에 득이 되는 일이니 이건 도와야지. 현서가 참석을 결정했다.
“현진 형이랑 같이 못 가는 것이 아쉽네요. 괜찮다면 일행을 좀 더 데리고 가도 괜찮을까요?”
현서의 말에 행수의 얼굴이 벌써 뜬 보름달처럼 환해졌다. 조금 전부터 계속 웃는 것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중에 신 행수의 얼굴이 얼얼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말해서 무엇 합니까. 즐거운 일에 사람이 많은 건 늘 환영할 일이지요.”
반색을 하는 행수의 모습에 현서는 속으로 웃었다.
날짜가 잘 맞아떨어졌다면 송가장의 신혼부부를 초대했을 게 분명했다. 허나 혼례 길일과 만월이 맞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만월 연회에 달을 뺄 수도 없고, 혼례 길일에 입을 댈 수도 없다. 또, 황족이나 왕공 귀족에게 불려 다니는 일 많은 명인을 초대했으니 번복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호현서에 패천검과 소의선이라면 송가장의 신혼부부가 오지 않아도 남는 장사다.
현서가 현진을 따라 송가장의 혼례에 참석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부터 이 초대장을 준비해 놓았을 터였다. 그땐 화정과 패천검이 있을 줄은 몰랐겠지만, 그래도 문제되지 않았다. 호현서가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체면은 충분히 세우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현서는 철서에 도착하자마자 패천검의 장원으로 가버렸고, 연락은 전부 이사를 통했다. 아무리 철서 지부 행수라 해도 일면식도 없는데 대뜸 이사의 손에 초대장을 들려 보낼 수는 없었다.
행수가 서녕에서 온 짐을 보내며 기뻐했을 거라는 걸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핑계로 한달음에 초대장을 주러 왔으니 말이다.
신 행수는 얼굴에 꽃이 핀 것처럼 활짝 웃으며 돌아갔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연회에 현서를 비롯해 패천검과 소의선이 참석할 거라고 믿는 것이 잘 보였다.
지금 행수의 눈에는 현서가 황금을 든 귀인으로 보일 터였다. 현서가 말한 일행에는 이사와 화정만 있다는 걸 모를 테지만 말이다.
행수를 배웅하고 온 이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연회에 참석하시게요? 별일이네요.”
의문을 표하는 이사의 손을 붙잡아 조용히 내실로 들어갔다. 따로 사람을 부르지 않으면 이사 외에는 내실에 출입할 수 없지만 그래도 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사, 서신에 따르면 집에서 보낸 궤짝은 전부 다섯 개야.”
“네? 왜 진작 말씀 안 하셨어요.”
이사가 크게 놀라 당장 사람을 부르려고 하자 현서가 붙들었다.
“우선 내 말부터 들어봐. 일단 저 궤짝 중 무엇이 우리 것이 아닌지 알 거 같아.”
“어떻게요?”
“가문비나무가 아닌 게 있어.”
“아! 흑림으로 만든 궤짝이 있군요.”
“그래. 맞아.”
튼튼해서 건물이나 가구에 잘 쓰이는 질 좋은 가문비나무는 가격이 비쌌다. 그래서 비슷한 종의 흑림을 쓰는데 겉보기엔 큰 차이가 없어도 자세히 보면 구분이 갔다. 현서는 가문비나무에 익숙했기 때문에 아닌 걸 찾기가 수월했다.
“좀 전에 신 행수가 오셨을 때 왜 아무 말 안 하셨어요?”
“너도 들었잖아. 신 행수는 석계항에 도착한 궤짝이 여섯 개라고 했어. 게다가 어제 짐이 도착한 걸 핑계로 초대장을 주러 이리 급히 온 걸 보면 신 행수는 모르는 일인 것 같아.”
현서의 말에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가 보기에도 봄 연회에 현서를 초대하고 싶어 애달아 보이던 행수가 꿍꿍이를 가진 것 같진 않았다.
“믿어도 될까요?”
“그래서 연회에 참석하려는 거야. 아버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만나야겠어.”
패천검의 장원 밖으로 나서게 되면 호위들이 자연히 현서의 근방에 있게 된다. 철서에 있는 호가 상단이 결백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현서가 믿을 수 있는 쪽은 부친이 보낸 호위들이었다.
단순히 하역 실수라면 궤짝을 열었을 때 주인을 특정하고 간단히 끝날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호위를 만나려고 한 것이다. 호가 상단을 돕는다는 겸사겸사한 이유도 있고 말이다.
“알겠어요. 그럼 지금 궤짝을 다 열어볼까요?”
“아니. 그러지 마.”
“궤짝에 문제가 있을까요?”
현서의 단호한 저지에 이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편지가 든 첫 번째 궤짝만이 표시가 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표식이 없었다. 현서는 세 번째에 놓여 있는 것이 흑림으로 만든 궤짝이라고 말했다.
“독은 없었어.”
“독이요? 독부터 떠올릴 정도로 위험한 것 같아요? 아니, 그건 그렇고 독이 없다고 도련님이 어찌 확신하세요? 설마 만져 보셨어요?”
놀라 창백해진 이사의 말이 빨라졌다. 독을 마신 일이 있었으니 독이라는 말에 이사가 과민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서는 자신의 말실수를 탓하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독이 있다는 게 아니라, 독은 아닐 거 같다고. 그냥 낯선 곳에 있으니 조심하자는 뜻이었어. 놀라게 해서 미안해.”
현서가 거듭 사과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며 이사의 손에 찻잔을 쥐어주었다.
“도련님 말씀대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소의선께 여쭤보는 건 어떨는지요?”
“응, 그렇지 않아도 도움을 청하려고 했어.”
“소인이 바로 다녀올까요?”
“아냐. 부탁하는 거니까 내가 가야지.”
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사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궤짝을 일별하곤 따라나섰다.
화정의 처소에는 마침 패천검도 자리하고 있었다. 궤짝과 연회의 일로 정신이 없어 어제의 추태를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살며시 민망해졌다.
헛기침한 현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꽃놀이 연회 얘기부터 꺼냈다. 패천검이 있어서 머뭇거렸지만 궤짝 얘기를 하고 나면 더 꺼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화정은 흔쾌히 허락하곤 고개를 돌렸다.
“너도 갈 거지?”
“저도 초대하신 겁니까?”
거기에 대고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지라 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이지요.”
“그럼, 저도 기쁘게 가도록 하지요.”
선선히 참석 의사를 보였다. 결국 신 행수의 바람대로 된 것이다. 패천검이 기뻐하는 것 같으니 그걸로 되었지. 초대가 끝났으니 현서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뭐? 아니, 너는 그걸 지금 말하니.”
궤짝에 관한 얘길 들은 화정이 놀라며 현서를 타박했다. 당장 현서의 처소에 가려고 성큼 걸어가려다 현서와 보폭을 맞추었다. 패천검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행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태연한 저 얼굴에 대고 오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해 가만있었다.
“궤짝을 옮긴 사람이 잘못되었다는 얘길 듣지 못했으니 독은 없는 게 확실하지만. 안에 뭐가 있을지 걱정도 되고. 그저 잘못 배달된 거라면 웃고 말겠지만, 혹시 몰라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요.”
“잘했다.”
현서가 독을 마신 일을 아는 화정이 잘했다고 칭찬했다. 배에서 짐을 내릴 때 잘못 섞인 것이라면 주인을 찾아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안 좋은 의도로 보내진 물건이라면 문제가 된다. 어떤 이들에겐 집 밖으로 나온 ‘호’현서가 좋은 먹잇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현서가 말한 흑림 궤짝을 살펴본 화정도 독이 없다고 확언했다. 이사가 궤짝을 열려고 하자 유위람이 말렸다. 독은 없지만 내용물을 모르니 방에서 여는 것은 좋은 것 같지 않다고 말이다. 타당한 말이라 현서도 동의했다.
혹시 몰라 처소의 사람들을 전부 물려놓은 상태였다. 사람을 부를 새도 없이 유위람이 손을 휘젓자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패용하던 검을 검집째 손에 쥐고는 궤짝의 바닥을 툭 하고 건드렸다. 정말 툭이었다. 그런데도 힘에 밀린 궤짝이 허공에 가볍게 뜨더니 그대로 미끄러지듯 움직여 뜰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이사는 처음 보는 고수의 능력에 깜짝 놀라 눈과 입이 동그랗게 변했다.
―허공섭물(虛空攝物)까진 아니지만 내력 운용이 좋구나. 내공의 흐름은 거의 변함이 없는데도 섬세하게 운용할 줄 알아. 똑똑하군.
옥이 칭찬을 했다.
‘그래?’
옥의 칭찬에 현서는 패천검을 새삼스럽게 봤다. 현서의 기준은 전부 자문원에게 맞춰져 있어서 자문원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가 보다 하고 여기는 현서였다.
현서의 생각이 그런 것을 진즉에 알고 있던 옥이 비웃음 섞어 혀를 찼다.
―눈만 높아서는.
옥의 비웃음을 못 들은 척하고 현서는 방 밖으로 나섰다. 궤짝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패천검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궤짝의 뚜껑이 열렸다. 다행히 독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내심 긴장했던 현서는 한숨을 폭 내뱉으며 안을 보기 위해 다가갔다.
“말린 꽃? 약재인가요?”
궤짝의 위를 채운 것은 말린 꽃이었다. 화정이 한 움큼 쥐어서 살폈다.
“감람나무꽃이네. 꽃보다는 열매를 주로 쓰는데 향유나 향을 만들 때 쓰지. 방부제로 쓰이기도 해서 시신을 염할 때 사용하기도 하고. 여기선 안 자라는 나무라 잘 보기 힘든데. 일단 이것들을 좀 덜어 내야겠다.”
이사가 가져다 놓은 넓은 천 위로 말린 꽃들을 살살 덜어 냈다. 계속 꽃만 나오자 답답해진 화정이 궤짝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유위람, 여기 좀 와봐.”
“무슨 일입니까?”
“이 안에 뭐가 있어.”
패천검이 말린 꽃들을 헤치고 궤짝 가장 아래에 있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삼 척(약 90cm)이 넘는 긴 상자로 패천검이 너끈히 안아 들 만한 크기의 물건이었다. 처음 보는 물건의 모양에 모두들 갸웃거렸다.
“이게 뭐지? 이음새도 안 보이는데? 나무도 아니고, 철도 아닌 거 같은데. 금속인지도 모르겠어. 생긴 건 꼭 관 같은데.”
“아!”
“아!”
물건을 살피던 화정이 꺼낸 말에 현서와 이사가 동시에 소리를 냈다. 유위람과 화정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아는 물건이야?”
화정의 질문에 현서가 고개를 끄덕이려다 저었다.
“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현서가 안계현에서 들었던 얘기를 꺼냈다. 그사이 궤짝의 안쪽을 다 살핀 이사가 어디에도 주인을 특정할 만한 표식이 없다고 말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다량의 말린 꽃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짐이 다였다. 궤짝을 열어보긴 했지만, 답을 알기는커녕 모르는 것만 늘어난 셈이다.
“가문비나무나 흑림은 호부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니 일부러 제 짐에 섞으려고 한 게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네요.”
현서가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안계현에서 점소이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충동의 소산이었다. 제자를 찾는 일 때문에 어린아이를 살펴보았던 것뿐이고, 그것 때문에 주변의 관심을 끌자 말을 돌리려고 바깥의 드잡이질하는 소리에 관심을 준 것이었다.
게다가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강바닥에서 주운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 사라졌다는 게 전부였다. 그냥 듣고 넘길 이야기였는데, 갑자기 이야기에 나왔던 물건이 현서에게 왔다. 우연이라고 해도 이상한데 이걸 그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만히 듣고 있던 패천검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제가 도련문 쪽을 알아보고 싶습니다.”
“네? 패천검께 그런 수고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현서가 사양하자 화정이 끼어들었다.
“쟤가 완비의 대부잖아. 너는 완비의 은인이니 쟤를 마음껏 부려먹어도 괜찮아.”
애초 현서가 패천검의 장원에 온 것도 완비의 은인이라는 명분 때문이었다. 현서가 애매하게 웃었다.
“완비를 구한 건 제가 아닌 걸요.”
현진의 공로를 가로채는 것 같아서 정정해 주자 유위람이 말했다.
“화운검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처럼 호 공자가 베푼 배려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팔에 경련이 나도록 완비를 안고 있었던 것이 매우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몸살감기가 인상 깊었나? 현서가 볼을 긁적였다.
“다른 문파를 흠잡을 뜻은 없으나 도련문은 조심하는 쪽이 좋습니다. 무림인이 아닌 이가 알아보려고 했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으니 제가 알아보는 것이 나을 겁니다.”
“도련문이 어떤 곳이기에 그런 건가요.”
현서의 기억, 아니, 자문원의 기억에 도련문에 대해서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강호엔 많은 문파가 있다. 자문원의 강호 생활은 십 년이 넘었지만 모든 방파를 다 알지 못했다.
현진의 외가인 석청담처럼 천의맹의 일원이었어도 거의 활동하지 않았거나, 칠암문처럼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문파는 자문원도 몰랐다.
게다가 자문원은 강호 초출부터 곽다순을 만나 함께했다. 당시 천의맹주를 맡을 정도로 세가 컸던 영우곽가의 삼남과 다닌 바람에 규모가 크거나 이름 있는 세가나 문파들을 주로 접한 것이다.
“청부 살인을 받는다고 하더군요.”
문파의 종류는 다양하다. 정파나 정사지간이 아닌 사파를 표방한다면 대놓고 뒤가 구린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암살이나 청부 살인은 사파 중에서도 위험한 부류기 때문에 그들끼리의 결속력이 강하고 접근하기가 쉽지가 않다.
호가에서 조사를 못 할 것은 아니나, 무림인이 아닌 사람을 쓰면 더 눈에 뜨일 것이다. 그리고 서녕까지 오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유위람이 알아보는 것이 여러 모로 낫긴 했다.
상량을 거듭하던 현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유위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인 궁금함도 있어 그런 것이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위람이 깍듯하게 말했다.
“너 이제 쉬어야 해.”
“그렇지 않아도 좀 쉬려고 했어요.”
아침부터 손님을 맞이하고 궤짝을 파헤치느라 하루치 기력을 다 쓴 참이었다.
“이 궤짝은 어디 둘 거야? 찜찜하면 패천검의 이름으로 보관하는 게 어때?”
“일단 제 짐에 섞여 왔으니 여기 둘게요. 혹시 주인이 찾으러 올지도 모르니까요. 문간방에 두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네.”
이번에도 유위람이 궤짝을 옮겨주었다. 궤짝에 문제가 없는 걸 알았으니 사람을 불러 치우면 될 일인데도 그러지 않았다. 완비의 은인이라고 해도 도련문의 일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는데 도와주는 것도 그렇고.
자상함과 다정함 속에서 지냈던 현서라 그만큼 타인의 자상함을 잘 볼 수 있었다.
‘패천검은 좀 다정한 사람인 것 같아.’
현서의 마음속에서 유위람이 좀 이상하지만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자리 매김하는 순간이었다.
화정이나 유위람의 스승들이 알면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러다닐 만큼 심각한 착각이었다. 하지만 정정해 줄 사람이 없었다. 화정은 독심술을 못 했고, 유위람의 스승들은 독심술도 못 하고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옥 역시 현서의 오해를 몰랐기 때문에 아무도 현서의 착각을 정정해 주지 못했다.
현서의 잘못된 생각을 전혀 모르는 채로 유위람과 화정이 돌아가자 내실에 들어와 늦은 낮잠을 잘 준비를 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현서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급할 거 없으니까, 나머지 궤짝은 내일 정리하자.”
“네, 그렇지 않아도 소의선께서 혹시 모르니 내일 다시 오신다고 하셨어요.”
“응.”
“주무세요. 모레 연회 참석을 하시려면 충분히 쉬셔야 해요.”
“응. 이사도 쉬어.”
‘별일 아니면 좋겠다.’
옥에게 희망 사항을 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현서는 잠이 들었다.
연회 날이 되었다.
어제 현서는 식사 후의 산책을 빼곤 종일 침상에 누워 있었다.
나머지 궤짝들은 모두 어머니께서 보낸 것이 맞았다. 목록과 비교해서 빠진 것도 없었다. 총 다섯 개의 궤짝 중 세 개는 옷이 든 것이었고, 나머지 두 개의 궤짝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들어 있었다. 패천검의 장원에 머문다는 얘기가 어찌나 빨리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는지 화정의 선물은 물론, 패천검과 완비에게 주는 선물도 들어 있었다.
현서는 나한상에 반쯤 누운 채로 화정과 이사가 수다를 떨면서 궤짝을 정리하는 것을 보았다. 푹 쉰 덕분인지 연회 당일 현서의 몸 상태는 아주 좋았다.
연회의 시작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부터로 되어 있으나 현서 일행은 술시(戌時: 저녁 7시-9시) 초쯤 출발하기로 했다.
“이렇게 성장(盛裝)을 한 게 얼마만이지?”
“이 년 전에 관례를 올릴 때 이후로 처음이지요.”
호부의 침방에서 만드는 현서의 옷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언제나 편한 옷 위주였다. 대부분 헐렁한 장포 하나만 입고, 긴 머리칼도 거치적거리지 않는 정도로만 대충 묶었다. 차림만 보면 어디의 신선놀음하는 망나니였지만, 예법 위에 막내 도련님인 호부에선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 보낸 옷들도 전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그중에 성장용 옷이 몇 벌 들어 있었다. 석청담에 갈 때는 챙긴 적 없었으나 이곳은 좀 더 체면을 차려야 해서 넣은 듯했다.
“계혈옥(鷄血玉)은 너무 튀지 않아?”
“전혀요. 그리고 밤이라 괜찮아요.”
이사가 기하학적 무늬가 들어간 계혈옥비녀를 골랐다. 관례를 올렸기 때문에 반 머리로 조그맣게 틀어 올린 머리에 상투관을 써도 무방했다. 하지만 이사는 관 대신 비녀와 한 쌍인 비단끈을 골랐다. 장포와 같은 색인 감청색 비단 머리 끈의 끝부분은 구름 모양의 계혈옥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장포랑 머리끈이 감청색이라 괜찮아요. 적색 계통의 옷을 입으신다면 또 다르겠지만요.”
현서가 옷을 고르는 기준은 편한지 안 편한지가 전부였던지라 이사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성장이라고 해도 현서는 장신구를 많이 쓰지 않는다. 열네 살부터 늘 현서의 팔에 있던 채옥팔찌 외에 장신구는 향낭이나 반지가 전부였다. 향낭이래도 향을 넣는 대신 급할 때 먹는 약을 넣은 것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오늘은 현서가 불편하다고 해서 반지도 끼지 않았다.
박쥐 모양의 계혈옥향낭을 허리춤에 대어보던 이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몇 번 기울였다. 그러곤 모란 모양의 양지옥향낭으로 바꾸고선 만족스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신구는 단출했지만, 대신 현서가 입는 옷들은 전부 송금, 운금, 채색 비단 등으로 만들어졌다. 옷 하나에 들어가는 비단의 가격이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이사가 포목점에서 만들어 파는 기성품을 현서가 입지 못할 거라고 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소매 안에 간식 주머니와 비상약은 기본 물품이고 오늘은 외출을 위해 양면 자수 손수건을 추가했다. 그리고 현서의 손에 끈 장식을 달아놓은 접첩선(褶貼扇)을 쥐어주는 걸로 외출 준비를 끝냈다.
“다 끝났어요.”
“이사, 고생했어.”
“고생은요. 오랜만에 도련님을 꾸미니 저도 좋네요. 아유, 우리 도련님, 언제 이렇게 훤칠하게 크셨을까.”
“너랑 나랑 동갑이라니까.”
현서가 구시렁대며 이사와 약속 장소인 수화문으로 갔다. 그곳엔 이미 유위람과 화정, 그리고 완비가 도착해 있었다. 완비도 가기로 했다. 술을 내지 않는 다회고, 패천검의 장원이 안전해도 패천검이 곁에 있는 것만 못하니 말이다.
인기척에 돌아보던 완비가 입을 벌리고 섰다. 평소라면 칭찬을 건넬 화정도 조용했다. 현서는 원래도 눈길을 끄는 화사한 미인이었으나 성장을 했을 때 주는 박력이 달랐다.
이사는 패천검도 놀라 표정이 은근히 변하는 것을 보고 웃었다. 이사가 본 사람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패천검 역시 잘나긴 하였으나, 우리 도련님에 비할 게 아니지 하는 마음으로 우쭐거렸다.
“오늘 날씨가 무척 좋네요. 달이 잘 보이겠어요. 응? 왜 그러고 있어요?”
현서는 자신이 잘생긴 축에 든다는 건 알았지만, 병색이 완연해 좋은 부분을 소용없게 만든다고 여겼다. 살아온 날들의 반 이상을 아픈 채 보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성장이 어떤 파급력을 주는지 모르고 현서는 오랜만에 머리를 깔끔하게 묶었더니 눈꼬리가 올라가서 까다로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지 따위의 질문을 이사에게 하는 중이었다.
패천검 장원의 식솔들은 전부 교육이 잘되어 있었다. 게다가 반 이상은 무림인이었다. 그런 그들도 놀라 현서를 빤히 볼 정도였다. 기묘한 침묵 속에 현서와 이사만이 떠들며 마차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비는 완전히 정신을 차려 재잘거리며 현서에게 붙었다. 현서의 옷이 구겨질까 찰싹 달라붙지 않는 것을 보며 이사는 곽 부인의 교육이 훌륭하다고 감탄했다.
현서 일행이 도착하자 신 행수가 발 빠르게 마중을 나왔다. 말을 타고 온 유위람이 말고삐를 다관의 사환에게 건네는 동안 마차에서 나머지 일행이 내렸다.
“잘 오셨습니다!”
활짝 웃으며 환영의 말을 건네는 신 행수의 인사는 현서를 보느라 한 박자 늦긴 했지만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과연 한 성의 상단을 책임지는 행수네. 이사가 속으로 순수하게 감탄했다.
초대해 줘서 감사하다는 가벼운 인사가 오간 후에 신 행수가 자리를 안내했다.
연회가 열리는 다관은 연못가에 지어진 이 층짜리 누각이었다.
이 층에 오르자 일순 조용해지더니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유위람이나 화정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구나. 현서는 속편한 생각을 하며 신 행수를 따라 움직였다.
층고가 높아 이 층이라도 누대에 오르니 경관이 훤했다. 누각은 연못 위로 튀어나와 연못의 삼분지 일을 감싸는 형태라 꼭 물 위에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다관에는 등을 달아 밝게 해두었지만 호숫가에는 아무런 불도 켜두지 않았다. 달이 뜨면 호수에 그대로 비치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각각의 자리마다 낮은 병풍을 둘러 서로 누구인지 확인 가능한 동시에 어느 정도 일행끼리 분리를 시켰다.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해둔 모양이었다. 현서 옆에 완비와 화정이 앉고, 현서의 뒷자리엔 이사가, 그리고 완비의 옆 자리에 유위람이 앉았다.
신 행수가 차를 대접하며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간략하게 언질을 해주었다. 철서를 기반으로 하는 가문들이 대부분이었고, 송가장의 혼례에 온 이들도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송가장의 차남과 장녀를 비롯한 강호의 사람들, 상인들, 혹은 철서의 호족들이 있었다. 특이하게 사족(士族)의 자손들은 있어도 관직에 오른 사람은 없었는데 아마 관과 관련된 사람들과는 따로 연회를 가지는 듯했다. 가족들과 온 미혼의 여성들도 보였으니 자유로운 분위기라 그런지도 몰랐다.
병풍이 낮아 고개를 치켜들면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현서는 자신들 쪽으로 쏠린 시선들과 눈이 마주치자 작게 웃으며 목례하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저런.”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자 화정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상사병엔 약도 없는데 큰일이야. 화정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유위람만 들을 수 있었다.
차를 마시고 음식이 차려지기 전의 막간을 틈타 송가장의 남매가 인사를 하러 왔다. 현진이 자리에 없었지만 현진은 송가장의 장남과 막역한 사이였으니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송가장의 송이원이라고 합니다.”
“송미령입니다.”
“서녕호가의 호현서입니다.”
어쩌다 보니 현서가 대표로 일행들을 소개하게 되었다. 화정은 혼례식에 참석했으니 이미 통성명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패천검은 소개받지 못했지. 패천검을 향한 남매의 눈이 과하게 반짝이는 걸 보니 그를 동경하는 게 훤히 보였다. 송가장의 남매들과 일행들이 대화를 하는 동안 현서는 이사를 데리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화장실에 가는 줄 알아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시선들이 현서를 따라다녔지만 무례하게 치근덕거리는 이들은 없었다. 현서가 누군지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기 때문이다.
모임의 주최는 초대객들끼리의 사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이가 좋지 않는 이들을 둘 다 초대해야 한다면 자리를 떨어뜨려 놓아야 했고, 그게 어렵다면 한쪽만 초대해야 했다.
현서는 철서성에 인연이 없기 때문에 거를 초대객은 없다. 무림 인사들이 있으니 패천검이나 화정과 반목하는 손님까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서 분란을 일으킬 만한 사람은 초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서는 시선들이 자신을 따라오는 이유가 ‘호’현서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연회가 끝난 뒤 서녕의 본가에 매파들이 더욱 넘쳐 날 거라고 이사는 예측했다.
일 층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층의 누각을 지지하기 위한 커다란 기둥들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쁘게 다니는 시녀와 사환들을 뒤로 하고 현서와 이사는 구석진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기둥 뒤에 서자 호위 중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흑립을 눌러 쓰고 있어 하관 말고는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호 대인은 현서가 독을 마신 뒤 호위들을 관장하는 수대처를 대대적으로 손을 보았다. 어디의 누구와 계약했는지, 현서조차도 모른다. 아버님과 큰형님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어머니께서 보낸 궤짝에 문제가 생겼어요. 호부에선 다섯 개를 보냈다는데 여기에 여섯 개가 도착했습니다. 어디서부터 궤짝이 여섯 개가 되었는지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석계까지 어떤 배를 탔는지도요.”
현서가 품에서 서신을 한 통 꺼내 건넸다.
“이 서신을 아버님께 전해주세요.”
“답신이나 연락은 어찌할까요? 신 행수에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니요.”
현서가 고개를 저었다. 서신을 본 뒤 아버님께서 신 행수의 결백을 확인해 준다고 해도 일이 번거롭게 된다.
“현진 형님이 와도 패천검의 장원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로 오시면 됩니다.”
현서는 자신의 말에 호위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덧붙였다.
“패천검의 장원 담을 넘으란 얘기가 아닙니다. 패천검께 미리 양해를 구해놓을 테니 정문으로 오시면 됩니다. 호가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하면 시선을 끌지 않을 겁니다.”
호 대인이 붙인 호위들은 현서가 위험에 처하지 않는 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호위가 비밀이기에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영문을 모르니 미지의 위험에 노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서의 말을 호위도 납득한 것이다.
서신을 갈무리한 호위가 금세 사라졌다. 현서가 알기로 호위는 전부 세 명이다. 아마 그중 한 명만이 서녕으로 갈 것이다.
원래 현서는 몸이 좋아졌으니 현진이 오면 패천검의 장원에서 나가려고 했다. 신 행수에게 부탁하면 적당한 집을 찾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진이 돌아와도 이 께름칙함이 해결되기 전에는 패천검의 장원에 있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현서는 자신의 목숨과 건강과 안위를 두고는 모험이나 도박을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안전이 제일이지.’
이 층으로 돌아오니 자리 배치가 약간 바뀌어 있었다. 화정의 곁으로 송가장의 남매가 앉았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유위람의 곁에 앉을 만도 하건만 아무래도 배분이 높아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현서 일행과 합석한 송가장 남매를 부러워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현서는 듣지 못했다.
현서가 자리에 앉자 식사가 준비되었다. 다회의 식사 자리라 각자의 자리에 음식이 천천히 나오는 형태였다. 첫 음식은 부들부들하게 만든 면을 연한 국물에 넣은 것이었는데 아주 맛이 있었다.
현서는 뒤에 앉아 식사 중인 이사에게 요리법을 알아가자고 소곤거리다 송미령과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현서가 웃자 송미령이 멈칫 하더니 곧 말을 걸었다.
“현진 오라버니께 말씀 많이 들어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쁘네요.”
현진이 밖에서도 자기 얘기를 많이 꺼내는 것을 현서도 알고 있었다. 현진은 외동아들이고 사촌들 중에서도 현서가 유일한 손아래 동생이라 더 형처럼 굴려고 하는 게 있었다. 석청담이야 현진 형의 집이니 그런다지만, 그래도 밖에서는 자제를 좀 하지. 현진 형이 무슨 얘길 하고 다녔는지 전혀 알고 싶지 않은 현서였다.
현서가 민망해 하며 말했다.
“좋은 말이면 과한 칭찬이니 반은 잘라 들으시고, 흉을 보았다면 맞는 말일 겁니다.”
“현진 오라버니가 허풍이 좀 심하다고 보았는데, 이제 보니 말솜씨가 부족했던 것이었네요.”
“그러게 말이야. 호 공자, 진주는 좋아하십니까?”
“예?”
송이원이 대화에 합세했다.
“저희 형님이 현진 형님과 내기를 하였는데 오늘 보니 형님이 질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내기 상품은 질 좋은 남주(南珠) 한 주머니지요. 호 공자 덕에 이긴 것이니 진주를 호 공자가 받아도 무방하여 드린 말입니다.”
남해 진주는 진주 중에서도 상등으로 꼽힌다. 현서나 현진이 진주가 아쉬울 리 없겠지만 내기의 상품이니 현진은 분명 받을 것이다.
“무슨 내기였기에?”
화정이 물었다.
“오라버니께선 세상에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동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거든요.”
송미령의 말에 현서는 민망해 어쩔 줄 몰라 했고, 화정은 박장대소를 했다.
“두 사람이 연년생으로 송가장의 사고뭉치라는 얘기를 혼례식 내내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었구나.”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새신랑 송준이 억울해 할 일이었다. 매사에 사려 깊고 진중한 장남과 달리 차남과 장녀는 기어 다닐 때부터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송준은 사고치는 동생들 때문에 머리가 아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세상의 모든 동생들은 부질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사수연에게 등짝과 옆구리를 자주 내어주고 있는 사무문까지 합세해 동생은 사고를 치거나 무섭다는 중론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현진의 눈에 현서는 전혀 그런 동생이 아니었다. 아프기 전에도 죽이 잘 맞는 놀이 친구였고, 아프고 나서는 더 애틋하게 되어 특히 그랬다.
사무문은 사수연이 있어 내기를 하지 않았지만, 송준은 현진의 큰 소리에 내기에 응해 남주 한 주머니를 걸었다.
“남주를 넘기는 오라버니 표정을 봐야 하는데.”
송미령과 송이원이 킬킬댔다. 단정한 미인과 시원시원하게 생긴 호남의 인상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장남의 낭패에 낄낄거리는 철딱서니 없는 동생들을 보며 완비가 울상이 되어 유위람에게 물었다.
“숙부, 동생은 진짜 저래요? 숙부의 동생들도 저랬어요?”
완비 역시 장남으로 이제 막 태어난 귀여운 동생을 보러 외가에 가는 길이었다. 동생이 자라면 이것저것 같이 할 계획에 잔뜩 들떠 있던 완비는 악당과도 같은 동생들이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작게 말했지만 완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패천검도 동생이 있구나. 현서는 유위람이 무엇이라 대답할지 궁금해서 아닌 척하며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혈육이라고 해도 천하의 패천검에게 덤비는 간 큰 동생이 있을까?
“숙부는 동생들을 만나지 않아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호 공자는 집안의 막내라 누군가의 동생이지. 호 공자 같은 동생도 있다는 얘기니 괜찮다.”
나 같은 동생은 뭐고, 괜찮은 건 또 뭐야. 현서는 머리가 아팠다. 사람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현서가 현진의 눈에 사랑스럽고 예쁘고 어쩌고 한 동생인 것은 정말로 어른스럽고 얌전해서가 아니라 현진과 쿵짝이 잘 맞는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아홉 살 이전까지 둘이서 친 사고는 송가장의 남매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게 뻔했다.
“제 동생이 현서 형 같으면 좋겠어요!”
금세 기분이 좋아진 완비가 눈을 반짝였다. 집안사람들의 과한 애정을 받고 자란 현서는 여기서 무어라 말을 보태면 긁어 부스럼이 되는 걸 알아 가만히 있었다. 이럴 땐 민망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것이 제일이었다. 현서는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며 완비에게 웃어주었다. 다만 나중에 현진 형에게 잔소리는 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짓궂긴 해도 송가장의 남매는 좋은 대화 상대였다. 악동이 되는 것은 장남 한정인지 나무랄 곳 없이 사교적이었다.
“부모님께서 이번에 다녀오시곤 무척이나 좋았다고 저희도 꼭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을쯤에 형님과 형수님과 같이 다녀오려고 합니다.”
“항도는 좋은 곳이지. 꽃과 물의 성이라는 게 괜한 말은 아니네. 검각의 사람이 아니었어도 항도를 여행지로 추천했을 걸세.”
“당연히 항도도 좋지만 모친께서는 검선의 사당이 매우 인상 깊었다고 하셨습니다. 무척이나 훌륭하고 장엄해 소주에 이름난 원림들도 한 수 접어야 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송 대부인의 고견에 감사를 표한다고 전해주시오.”
‘좋아하는 거 같지?’
―그러게. 좋아하네.
현서가 지켜본 바로는 패천검 유위람은 입을 열지 않으면 냉담해 보이고, 표정 변화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막 웃고 있진 않지만, 주변의 공기가 슬며시 누그러진 것이 확실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패천검 앞에서 검선의 사당을 칭찬하라는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서에게 편한 주제는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배에서의 대화와 패천검이 팔찌를 팔라고 했던 일로 예방이 된 덕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자리에서 추태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만족하기로 했다.
“내 안목도 들어 있거든. 왜 쟤만 검선의 사당에 진심일 거라 생각해.”
화정이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부친께서도 열심히 하셨어요. 어머니가 그러셨는데 무슨 돌을 구하신다고 천리를 가셨대요.”
완비가 현서에게 소곤거렸다.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순 없지만 아버지가 빠졌다고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게 귀여워서 현서는 완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곽나난이 천 리 길을 갔다는 얘기는 못 들은 척했다.
“아버님께서 무척이나 훌륭한 그 사당에 기둥 하나를 더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검선의 사당에 기부를 하겠다는 뜻이다.
“송 장주께서? 내게 그런 말은 없었는데. 아. 혹시 송 장주께서 검선과 인연이 있다하시던?”
검선의 사당은 검선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힘으로만 짓고 있다는 걸 송 장주께서 모를 리 없으니. 화정이 덧붙인 말에 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상한 조건도 조건이지만 송가장의 편편도(翩翩刀) 송익군과 딱히 인연이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선께선 의협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분이셨지요. 그분께 도움을 받은 많은 이들로부터 들은 얘기로 공덕비도 하나 더 만들 예정이랍니다.”
‘아, 안 듣고 싶다.’
기쁘게 말하는 유위람의 모습은 탄성이 나올 만큼 멋들어진 그림 같았지만 현서는 저 대화에 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약을 먹는다는 핑계로 현서는 이사의 곁에 갔다. 옥이 은근히 항도에 가보자고 말했지만 현서는 다시 한번 거절했다.
현서에게는 참으로 기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신 행수가 어렵사리 초정했다던 금의 명인이 누각 이 층에 나타났다. 무늬가 없는 흰색 옷을 입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인이 자리에 앉았다. 많이 쓰는 칠현금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구현금을 가지고 있었다.
“음공을 쓸 줄 아나 보네.”
화정이 말하자 송미령이 대답했다.
“네, 저분은 도각선자(道覺仙子)인데, 스승께 금을 배우며 음공도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연주를 더 좋아해 음공을 쓰는 걸 본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팔무문(八武門)의 제자인가.”
“사문은 밝히지 않았어요.”
화정과 송미령이 대화하는 사이 도각선자는 자리를 잡고 부드럽게 현을 뜯었다. 시작 전에 음을 고르는 것뿐이었는데도 누각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곧장 연주에 들어가자 누대에 있는 이들 모두 빠져들었다. 과연 명인이라고 불릴 만하구나. 현서는 감탄하며 다음에 어머니를 위해 호부에 초대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첫 곡은 유명한 봄을 노래한 곡이었다.
누각 외벽에 달린 등들이 하나씩 꺼지자 호수에 비친 달이 더욱 선명해졌다. 호숫가 주변에 핀 흰색 자두꽃이 바람에 흐드러져 호수 위로 떨어질 때마다 물 위의 달도 같이 흔들렸다.
금 연주를 들으며 멍하니 호수에 걸린 달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완비가 현서에게 기대 잠이 들었다.
‘졸릴 만도 하지.’
혹시 추울까 가져온 겉옷 하나를 완비에게 덮어주었다. 한 곡이 끝나자 도각선자는 차 한 잔만을 마시곤 곧 바로 다음 연주에 들어갔다.
“봄은 해마다 돌아오니, 꽃이 진다고 서운해 말게(年年春更歸, 不用惜花飛).”1)
봄을 노래하는 시를 읊으며 금을 연주하는데, 곡에 취한 사람들이 간간이 눈물짓는지 훌쩍이는 소리가 살며시 들렸다.
‘밖에 나오니 정말 좋아.’
석청담에 있을 때도 가벼운 연회는 있었지만, 이렇게 혼자 밖에 나와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쑥스러워 말을 못 했지만, 정말 성인이 된 것 같아 많이 뿌듯했다.
―점점 더 너를 부르는 곳도, 네가 가야 할 곳도 많아질 거고, 네가 여는 연회도 많을 거다.
옥은 현서의 그런 마음을 알았지만 놀리지 않았다. 친구라고 말하며 투덕거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옥에게 현서는 어린 것이었다. 옥이 보자면 어린 것이 아닌 이가 없을 테지만 굳이 꼽자면 편애하는 어린 것인 셈이다.
옥의 다정한 말에 기분이 좋아진 현서가 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보드랍게 웃었다. 도각선자의 연주에 사람들이 취해 있지 않았다면 과장을 보태 졸도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랐다.
금 연주에 별반 관심이 없던 유위람만이 그 모습을 보았다. 패천검이 졸도하는 일은 없었지만 옥이 눈치를 챌 만큼의 긴 시선이 현서에게 머물렀다.
옥은 굳이 현서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요주의 인물 상위에 유위람의 이름을 올려두었다.
연주가 끝난 뒤 현서는 도각선자와 인사를 나누고 신 행수가 소개해 주고 싶어 한 이들과도 인사를 했다.
달이 높이 떠 호수 정중앙을 채운 자정이 지나서야 연회는 끝이 났다. 호가의 도련님 노릇을 톡톡히 한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다회가 끝났으니 달을 보며 술을 마시려는 이들, 야시장 구경을 가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현서는 얌전히 돌아가는 무리에 속했다. 송씨 남매는 야시장을 구경하자고 한 번 권했지만, 현서의 몸이 약한 걸 알아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 실컷 놀아야지요.”
송 장주 부부는 혼인 연회를 모두 끝내고 이젠 사돈이 된 친구 부부를 만나러 갔다고 한다. 남매는 현진이 오면 또 만나자고 말하곤 물 만난 고기처럼 팔딱대며 사라졌다.
“졸리진 않으세요?”
“응. 좀 피곤하긴 한데 괜찮아.”
밤바람이 불어도 봄이라 차갑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완비는 현서의 옷자락을 쥐고 잠이 들었지만 자신이 완비를 안고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패천검이 완비를 안아 마차에 태웠다. 마차의 창문을 열어두었더니 달이 환해 등롱 없는 길도 밝게 보였다.
봄날 비단에 편지를 써 서왕모를 초청하고, 붉은 누대 깊은 곳에서 연회를 여네(春羅書字邀王母, 共宴紅樓最深處).2)
현서는 특히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흥얼거리며 밖을 보았다.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네? 네. 계속 입에 맴도네요.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게 시경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나 봐요.”
“서재를 증축했을 정도로 책을 많이 봤다고 그러던데, 여기서 더했다간 과거라도 보려고?”
“과거라니요. 전부 여행기나 잡학서인 걸요.”
현서가 웃으며 말했다. 병석에 누운 현서를 위해 모으기 시작한 책들은 마치 새끼를 치듯이 점점 늘어났다. 독립을 하면 전부 가져갈 수는 없을 테니 구하기 어려운 것들만 챙기고 나머지는 새로 사려고 했다. 원림을 살 때 서재 건물인 장서루(藏書婁)를 따로 지을 계획부터 세워 장서루의 벽과 기와의 색까지 다 정해두었다.
이윽고 마차가 장원에 도착했다. 패천검이 완비를 안아 화정과 사라지고 현서도 머물고 있는 처소로 돌아갔다. 사람을 불러 시중을 받아 환복을 마친 뒤 재빨리 침상에 누웠다.
“늦게 일어날 거니까 해가 떠도 휘장은 걷지 마.”
“네. 일어나실 때까지 안 깨울게요.”
“이사도 피곤할 텐데 얼른 쉬어.”
이사가 침상에 휘장을 내리고 물러나자 현서는 가물거리는 눈을 얼른 감았다. 만족스러운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참이었다.
‘서왕모! 약수(弱水)!’
현서가 눈을 번쩍 떴다. 몸을 바로 일으키지 않은 것은 오래된 습관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정보를 정리할 새도 없이 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습격이다.
‘뭐?’
현서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휘장 안으로 손이 불쑥 들어왔다. 놀라 소리를 내기도 전에 패천검이 현서를 품에 안은 채로 몸을 굴렸다. 현서가 있던 자리에 시퍼런 비도가 날아와 박혀 있었다.
많이 놀랐지만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고개를 드니 복면을 쓴 남자 다섯 명이 있었다. 멀리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저들만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적이 침입했으니 현서를 피신시키러 온 것이다. 유위람은 현서를 자신의 왼팔로 안아 올린 채 검을 들었다.
자신이 패천검보다 머리 하나가 작고, 들기에 가볍다고는 해도 적이 눈앞에 있으니 이대로는 걸리적거릴 뿐이다. 현서가 내려달라고 어깨를 살짝 잡아당겼다. 패천검이 질 것 같지는 않았으나 방해되지 않게 물러나 있으려고 했다.
“괜찮습니다. 무서우면 눈을 감고 계세요. 완비가 있는 곳으로 갈 것이라 급히 가야 하니 꽉 잡으십시오.”
호 공자의 시중인도 피신했습니다. 현서가 등 뒤를 곁눈질하자 유위람이 알려주었다. 현서는 감사하다고 속삭이며 패천검의 어깨를 꽉 잡았다.
“목에 팔을 감는 게 더 편할 겁니다.”
유위람이 그대로 지면을 박찼다. 빠른 속도에 눈을 감지는 않았지만 패천검의 말처럼 목에 팔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유위람의 발이 다시 바닥에 닫기 전에 첫 번째 자객의 목이 잘렸다. 잘린 목에서 피가 터져 나오기도 전에 먼지를 털 듯 칼을 휘둘러 검풍으로 시체와 피를 밀어내 버렸다.
강호인에게 별호는 그 사람의 특징을 알려주는 지표다.
패(覇) 자가 들어가는 별호는 두말할 필요 없는 강자에게 붙는 것이나 뜻이 좋은가 하면 애매하다. 별호에 패가 붙은 이들이 애초에 많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천하 통일을 할 군주에게나 붙는 호칭답게 패가 붙는 별호를 가진 이들의 무공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에도 불구하고 패천검은 손속에 일말의 자비도 두지 않았다.
―검각의 검술은 원래 매섭기로 유명하지만, 저치의 검은 그야말로 패왕의 검이구나.
예기를 품은 유위람의 검이 문답무용으로 상대를 베어나갔다. 현서를 안고 있어 편치 않을 텐데도 상대를 쓰러트리는 데 한 사람당 오 합을 넘지 않았다.
현서는 검각의 검을 알고 있었다. 패천검은 오직 종과 횡으로 이루어진 검각의 기본 초식(抄式)만으로 상대를 했다. 완전히 적을 무시하는 행동이었으나 이미 목숨이 끊어졌으니 억울해 할 것도 없었다.
마지막 한 명의 허벅지를 그어 바닥에 뒹굴게 만들어놓곤 그대로 턱을 발로 차 턱뼈를 부러뜨렸다. 자결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칼을 휘둘러 피를 털어 낸 유위람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현서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재빨리 변명했다.
“자결을 막아야 하는데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손을 쓸 수 없게 만든 이유가 본인이라 현서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위람은 현서가 놀라 겁을 먹은 줄 알아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계속했다.
“잠시 후면 확실해지겠지만 저들은 아마 도련문일 겁니다. 도련문에서 보낸 것치곤 실력이 형편없지만. 그건 도련문 내부 사정이 복잡한 것 때문이겠지요.”
“내부 사정이요?”
“오늘 수하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도련문에 내분이 일어난 모양이더군요. 문주는 출타 중이고 장남과 삼남이 싸우는 모양입니다.”
이틀 전에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벌써 조사를 했단 말인가? 빠른 속도에 놀라기도 전에 수하라는 뜻밖의 단어가 들렸지만 현서는 티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느 쪽이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지간히 얕보인 모양입니다. 제가 있는 장원을 습격하려는데 보내는 이들의 면면이 저래서야. 의뢰인이 워낙 거물인 모양입니다.”
“패천검께서 짚이는 곳이 있으신지요?”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다. 대놓고 너 적이 있니? 하고 물은 꼴이지 않은가. 현서가 민망해 하며 재빨리 사과했다. 패천검은 개의치 않아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저와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려는 곳이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요.”
―좀 재수 없지만, 맞는 말이네.
옥이 냉정하게 말했다.
“현서 형!”
“도련님!”
패천검의 처소에 도착하니 화정과 이사, 완비가 모두 있었다. 셋 다 다친 곳 없이 무사해 보였다. 아무도 자신이 패천검에게 안겨 오는 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에 쓴웃음을 지으며 패천검이 내려준 곳에 앉았다.
이사가 한달음에 달려와 다친 곳은 없는지, 놀라지 않았는지를 거듭 물었다. 이사야말로 크게 놀란 것 같았다. 가늘게 떨리는 이사의 손을 꼭 잡으며 현서는 힘주어 말했다.
“패천검이 제때 와주신 덕에 정말 괜찮아. 다친 곳은 아무 곳도 없어. 놀라지도 않았고, 아프지도 않아.”
사실 이 정도면 이사도 엄청나게 침착하게 군 것이다. 이사는 어릴 때부터 현서와 같이 자라 상행을 나간 적도 없고, 밖을 다닐 때도 늘 호위들을 대동해 안전하게 다녔다. 복면을 쓴 무인이 습격해 오는 것도 모자라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을 보았으니 놀랄 만했다. 현서도 자문원의 기억이 없었다면 이사보다 더 크게 놀랐을 터였다.
“저 아이에겐 놀랄 때 먹는 약을 먹였으니 괜찮을 거다. 너는 저 아이보단 괜찮은 것 같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맥을 짚어보자.”
화정은 현서가 늦게라도 놀라 쓰러질 수도 있다고 보아 맥을 짚었다. 소의선으로부터 괜찮다는 말을 듣고서야 이사는 정말로 안심한 듯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연달아 흉한 일을 당한 완비는 화정이 약을 먹여 재웠다. 다른 방에 데려다 두는 것도 마땅치 않아 침상에 눕히곤 병풍을 쳤다.
“네 장원에 실력이 모자란 자객을 보내다니. 단순 도발이라고 쳐도 질이 나쁜데, 기분 나빠.”
넓은 천하에 패천검과 소의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누군지 몰라도 방법이 너무 조악했다. 기습을 하려고 해도 어느 정도 실력이 뒷받침이 되어야지. 이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 아닌가.
의자에 앉은 현서가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느낌이 안 좋아. 그저 패천검의 분노를 사려고 이랬을까? 더군다나 여긴 철서성 안이야. 편편도 대인이 부재중이라 해도 송가장과 척을 지는 것도 상관 안 하겠다는 것인데.’
단순히 검각, 의당, 송가장, 그리고 호가. 이렇게 네 곳과 척을 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만약 현서가 화를 입었다면 호가는 물론이거니와 호가와 연관이 되어 있는 모든 세력과 척을 진다는 뜻이 된다.
이런 식으로 다수와 척을 져도 상관치 않겠다는 건 그만큼 세력이 강성하거나, 미쳤거나, 아니면 그만한 이득이 있어서이다.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은 이유야.’
잠시 후, 사람이 들어왔다. 이제까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아 몰랐는데, 단순히 장원의 하인이 아니라 유위람이 말한 수하인 것 같았다.
“잠입한 흑의인은 전부 서른 명이고 턱이 부러져 기절한 한 명을 빼곤 모두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기절한 사람을 포함해 모두 등 가운데 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현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도련문이 아니야.”
탄식이 섞인 현서의 중얼거림은 작았지만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그 점이 하나였지요?”
“네. 그렇습니다.”
현서의 질문에 의아해 하면서도 수하는 대답해 주었다. 현서가 고개를 들어 패천검을 바라보았다. 유위람, 화정, 이사는 얘기를 들어도 상관없지만 보고하러 온 저 사람이 있어도 괜찮으냐는 뜻이었다. 유위람이 보고를 마친 수하를 내보냈다.
“듣기에 패천검께서 도련문의 자객이라 하셨는데, 저들의 진짜 소속은 화오궁(華悟宮)일 겁니다.”
언제부터 도련문도의 행세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현서의 말에 화오궁이 뭔지 모르는 이사를 빼고 유위람과 화정의 표정이 굳었다.
조금 전, 이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것에 세 가지 이유를 꼽았는데 그중에 화오궁은 미친 쪽에 들어간다. 그리고 아마 현서의 추측이 맞는다면 이득도 있을 것이다. 그 이득이라는 것이 보물을 얻겠다는 것인지, 사람을 해하려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말이다.
“화오궁이라고?”
화정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갑자기 화오궁이 등장한 것도 그렇고, 그것을 현서가 그것을 아는 것에도 전부 놀란 탓이다. 화정의 의문을 모른 척하며 현서가 말했다.
“네, 등 가운데 있는 점이 그 증거입니다. 화오궁의 사람들은 모두 등에 점이 있습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점의 개수가 늘어 꽃 모양을 이룬다고 합니다. 저들은 화오궁의 말단으로 도련문에 첩자로 보내진 이들이 아닐까 싶어요.”
화오궁은 강호 세력 중 하나로 기이한 곳이다. 백양교 같은 사교는 아니나, 더 배타적이고 비밀스러운 미친놈들 소굴이었다. 자문원은 악독하기론 백양교, 미친 걸로 따지자면 화오궁이라고 평했다. 백양교는 교리에 대한 광신이라는 목적이라도 있었지만, 화오궁은 살육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굴었다.
화오궁이 악명에 비해 입에 잘 오르내리지 않은 것은 강호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였다. 허나 의당과 검각 같은 크고 오래된 문파에선 화오궁을 모르지 않았다. 그들이 강호에 나올 땐 반드시 피바람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갑자기 화오궁이라니. 백화호(百花湖) 사건의 그 화오궁을 말하는 거지?”
“예. 그 화오궁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백화호 사건이요?”
유위람과 현서가 동시에 말했다. 현서도 옥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현진이나 석청담의 친구들로부터 간간히 강호의 얘기를 들긴 하였지만 일부러 강호의 소식들을 찾진 않았다. 그래서 현서가 알고 있는 상당한 정보들은 대부분 옥의 것과 자문원의 기억에 기반했다.
화오궁은 아는데, 백화호 사건은 모른다니. 유위람은 되묻는 대신 현서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했다.
십이 년 전, 정보를 사고파는 문파인 정우문(整羽門)의 백화호 지부가 몰살당하는 일이 있었다. 건물은 부서지고 사방에 피와 시체가 난무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살이 난 현판 옆에 화오궁에 거짓 정보를 팔아 합당한 대가를 치렀다는 글귀만이 적혀 있었다. 백화호 지부에는 당시 정우문의 소문주도 있었다. 정우문은 길길이 뛰었으나 화오궁은 언제나처럼 사라져 아직 복수하지 못했다.
―십이 년 전에 한 번 나왔다고? 시기가 안 맞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일인데. 이상해.
의문스러워하는 옥의 혼잣말을 뒤로 하며 현서는 자문원이 보았던 이십구 년 전의 역산 혈겁을 떠올렸다. 역산 혈겁은 역산을 거점으로 하고 있는 세 개의 사파, 역산 삼맹을 대상으로 화오궁이 일으킨 대량 살상을 말했다.
역산 삼맹은 정사지간이 아닌 순수 사파였고 당시 천의맹은 발족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맹을 꾸리는 것도, 백양교와 싸우는 것도 급급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천의맹에 소식이 전해지는 것이 늦었고 도와주러 갈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스물여섯 살의 자문원이 그 일행에 끼게 된 이유였다.
급히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는 모든 일이 늦은 후였다. 역산은 피와 시체로 가득했고 숨이 붙은 이들도 있었으나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끔찍한 광경을 화오궁주가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화정의 말에 현서는 이어지던 상념을 접었다.
“화오궁의 악명에 비해 자객들의 면면이 모자라 보이는데.”
화오궁이 한번 나오면 피바람이 분다는 소리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화오궁이든 뭐든 간에 그래도 패천검 유위람의 위명이 있는데 모자란 하수인을 보낸 것이 이상하다는 말이었다.
현서는 침상에서 떠올린 생각에 추측을 입혔다. 이런 식으로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았지만 화오궁이 튀어나왔고 그 얘길 해버린 이상 빨리 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현서가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옥에 손을 올린 채로 말을 이었다.
“아마 저들은 죽으라고 보낸 미끼로 보여요. 소문을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서요. 어쩌면 이미 소문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이곳에 보물이 있다고요. 저들은 그것을 확인하러 왔다 죽임당한 것이 되겠지요.”
세상 누군들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보물에 대한 강호인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한다. 신병이기(神兵利器)나 귀물을 손에 넣기 위해 자식이나 부모도 죽인다는 소릴 하는 곳이다. 이제껏 보물이 발견되었다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피바람이 몰아쳤다.
“보물? 무슨 보물? 설마 궤짝에 있던 그것 말이니?”
화정의 말에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도 금속도 아닐 수밖에요. 저도 예전에 들어본 것이 다라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궤짝에 있던 그 긴 상자의 겉면은 실입니다. 실을 감아 마치 고치처럼 만든 거죠. 그래서 이음새도 없고 나무나 금속으로도 안 보였던 거예요. 월영사(月影絲)라고 불리죠. 불에도 타지 않고 칼에도 끊어지지 않지만 오직 약수(弱水)에서만 풀어진다는 특이한 실이에요.”
“약수라니? 그건 서왕모가 산다는 전설에 나오는 강이잖아?”
“물론 깃털도 뜨지 못한다는 그 약수는 전설에 나오는 곳이지만, 실제로 월영사를 풀어지게 하는 약수가 있습니다. 유주(油州) 감산(甘山)의 흑하(黑河)가 그곳입니다. 월영사 자체도 보물이지만, 문제는 그 안의 물건입니다. 들은 적 있어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비법을 월영사로 감싸 봉인해 놓았는데 그 크기가 삼 척쯤 된다고요. 효장락공주능의 부장품이라는 소문이 퍼져 백양교가 도굴했지만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합니다. 궤짝에 있던 월영사가 그것이 아닐까 싶어요.”
현서가 말을 마치자 일순 조용해졌다. 화오궁도 갑작스러운데 월영사니, 죽은 사람을 살리는 보물이니 하는 얘기까지 나왔기 때문이었다.
유위람은 소매에 가려진 현서의 손을 지긋이 보았다. 강호의 오래된 세력과, 자신도 처음 들어보는 보물에 대해 유창하게 말하는 현서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추궁할 뜻은 없어 그저 자신의 작은 의문을 조용히 갈무리해 두었다.
“헌데 화오궁이 월영사를 노리는 것인지, 아니면 소문이 퍼지는 그 자체를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현서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전자가 보물을 노린 것이라면, 후자는 사람을 노린 것이다.
궤짝이 현서의 물건에 섞여 왔지만 월영사도, 습격도 전부 현서보다는 패천검을 노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게 느껴졌다. 병약한 상가의 막내아들을 죽이자고 무림 세력이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이상하니까.
하지만 현서는 어쩐지 이 사건이 자신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현서의 추측을 가만히 듣고 있던 패천검이 입을 열었다.
“과연 어느 간 큰 곳이 감히 나와 척을 질까 했더니 화오궁이라면 그럴 만하군요.”
“패천검을 노린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현서가 가능성 중에 하나를 거론하자 유위람이 오만하게 웃었다.
“호 공자를 노렸을 수도 있다고요?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제 장원의 손님을 노린 것이니 저를 노린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래, 저거 저거 성격 봐라. 틀림없이 저놈 미워서 그런 걸 테지.”
현서와 이사를 걱정한 화정이 일부러 농담을 했다. 반은 진담인 거 같기도 했다. 강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사가 현서에게 물었다.
“그 보물이란 거 어차피 도련님 것도 아닌데 그냥 버리면 안 되나요? 화오궁인지 뭔지가 그 물건을 바란다면 주워가면 되는 것이고, 도련님이 갖고 있지 않다면 소문이 나도 소용없는 거 아닌가요?”
가장 원론적이고 간단한 해결책이다. 이사의 말에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게 하는 게 제일 간단한 해결책이지. 나도 그러고 싶어.”
이사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궤짝채로 길에 버리고 올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근데 당장은 안 돼.”
“왜요?”
“위에 말한 것들은 전부 내 추측이긴 하지만. 만약 소문이 있다면 어떤 내용인지를 알아야 하거든.”
“소문을 확인해야 한다고요?”
“응. 저 물건을 나나 패천검이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라면 사람들 눈앞에서 월영사를 강에 던져도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믿어주지 않을 거야.”
“네? 그런 터무니없는!”
이사가 어이 없어했다.
좋은 물건에 대한 상인의 집착과 강호인의 집착은 시작부터 달랐다. 강호인들은 상대를 죽여 원하는 것을 쟁취한다는 선택지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물에 눈이 돌아가면 칼의 대화 말고 그 어떤 방식도 통하지 않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어렸을 때부터 쭉 거대 상가의 울타리 안에서 자랐던 이사에겐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비보(祕寶)에 관한 강호인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영약이나 신기라고 불리는 무기, 혹은 보물이 숨겨진 곳을 가르쳐 주는 장보도 따위가 나올 때마다 진위에 상관없이 엄청난 피가 흘렀습니다. 더욱이 첫 발견자나 원주인은 대부분 좋은 꼴을 보지 못했습니다.”
패천검의 말에 이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싶었던 현서가 이사를 달랬다.
“그래서 우리는 재빨리 도망가야 해. 도망가서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를 보고 내 이름이나 패천검의 이름이 없으면 그냥 어디 강이나 산에 버리면 돼.”
“그럼 이름이 붙어 소문이 났으면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지금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그러니 짐을 싸줘. 최대한 가볍게 싸야 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짐도 있어야 하고. 현서의 말에 이사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위람이 사람을 불러 이사를 처소까지 데려다주게 했다.
[잘하셨습니다.]
이사가 서둘러 나가는 것을 보는 현서에게 패천검이 전음을 보냈다.
현서가 이사에게 한 말의 반은 유위람의 뜻이었다. 패천검이 전음으로 현서에게 장원을 비워야겠다고 알려 왔던 것이다. 궤짝에 들어 있던 물건이 정말로 월영사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나 현서의 가정이 타당하다고 보아서였다.
화오궁이 쳐들어온다면 이곳 장원에서 맞이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보물에 관한 일이면 좀 다르다. 편편도를 비롯해 송가장의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이때에 자칫하면 철서성이 엉망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소문이 났다는 가정하에 적들이 더 불어나기 전에 몸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직 장원 주위를 살피는 이들은 없지만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다.”
전음으로 보고를 받았는지 잠시 창밖을 보던 유위람이 말했다.
“반시진(1시간) 후에 완비의 부친인 나난이 도착할 겁니다. 그가 오면 바로 출발하죠. 같이 철서성을 나가 나난과 완비와는 헤어질 것입니다.”
곽나난이 도착하는 날과 마침 맞아떨어졌다. 보물을 노리는 이들이 붙기 시작하면 어린 완비가 가장 취약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완비가 걱정되었던 현서는 내심 다행이라고 안심했다.
“그리고 저와 나머지 일행들은 우선 담주로 가죠. 누이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어쩌긴 내가 여기 너랑 있는 거 못 본 사람 있어? 당연히 같이 가야지.”
유위람이 현서에게 말했다.
“호 공자는 월영사나 그 안에 물건에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까?”
“네.”
현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패천검께서 가지고 싶으시다면.”
주인이 있든 없든 좋은 의도로 보낸 물건이 아니니, 패천검이 가지겠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일종의 보상금인 셈이다.
“아니, 아닙니다.”
유위람이 자신 역시 전혀 필요치 않다고 말하며 덧붙였다.
“가지고 있으나 없으나 성가실 것은 자명하니 가지고 가지 않는 쪽이 나아 보여서 말입니다. 비슷한 크기의 짐을 만들어 여기저기 흩뿌려 놓고 저것은 일단 만화산에 보내두려고 합니다.”
유위람의 말에 화정이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그래, 만화산이라면 안심할 수 있지. 노사들께서 계시는 곳이니.”
“네, 일단 도착하고 나면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일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유주와도 가깝지요. 패천검이 덧붙였다.
“월영사를 걷어 내고 안의 물건을 꺼내시려고요?”
“네, 안의 물건은 없애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월영사도 진귀하겠지만 분명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비법일 테니까요. 그런 비법이 있을 거라 믿지는 않으나, 그래도요.”
유위람이 위험한 얼굴을 하고 웃었다. 보물의 진위와 상관없이 누구도 못 가지게 없애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웃는 얼굴에 살기가 담겨 흉흉한 것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화오궁이라 해도 쉽게 넘어가지 않겠구나. 저런 기세를 가진 이를 화나게 했으니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하셔야 해요?”
이사가 현서의 옷을 갈아입히며 말했다.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움직이기 편한 것을 골랐다. 소매는 평소에 입는 장포보다 짧아졌지만 물건을 못 넣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다람쥐가 물건 숨기듯 옷 여기저기에 약 등을 챙기려 해서 이사가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만약 싸움이 일어난다면 너랑 나는 짐이나 안 되면 다행인 상황이 될 거야.”
“잘 이해가 안 돼요.”
아무리 귀해봤자 그건 실이고,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잖아요. 게다가 죽은 사람을 살린다니 너무 허무맹랑한 것 같아요. 근데 그걸 뺏겠다고 다짜고짜 공격부터 할 거라뇨. 이사가 질겁했다.
“비록 우리가 저 물건의 주인은 아니지만, 어쨌든 물건을 가진 사람에게 돈을 치루고 물건을 얻는다. 그건 우리 같은 상인의 방식이지. 하지만 강호의 방식은 달라. 탐욕은 누구에게나 붙는 불이지만, 강호인들은 쉽사리 그 불을 타인의 피로 지필 줄 알거든.”
현서가 꿈에서 보았던 자문원의 기억 중 무서운 것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꼽을 수 있는 일이 있다.
자문원이 아직 검선의 이름을 얻기 전, 신병(神兵)을 두고 싸움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오래 전 무림을 평정했던 화왕(火王) 엽수련의 천수편(千手鞭)을 가지려는 자들의 싸움이었다.
이름난 무기들은 주로 검이나 도였는데 그것은 그만큼 쓰기 좋고, 쓰는 사람도 많다는 뜻도 된다. 그런 만큼 검이나 도가 아닌 무기로 경지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 편견을 깨뜨린 것이 화왕의 채찍인 천수편이었다.
강기(强氣)를 불어 넣으면 원하는 만큼 늘어나고 한 번 휘둘러 칼을 부러뜨릴 수 있었다. 화왕이 열 자(대략 3m) 거리에 있는 이의 눈썹을 잘랐다는 얘기는 천수편에 얽힌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다.
더욱이 천수편은 그 자체로도 대단한 보물이었다. 채찍은 만년한철에 교룡삭과 길량마(吉良馬)의 털을 꼬아 만들었다. 손잡이는 호리병 모양으로 그 안에는 천하 보물 중 하나인 태환단(太丸丹)이 들어 있었다. 화왕의 추종자가 준 선물이었는데, 숨만 붙어 있으면 기사회생을 할 수 있다는 영약이었다. 평생 그 약을 쓸 일이 없었던 것이 화왕의 자랑 중 하나였다.
그 천수편의 주인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천수편을 손에 넣어 공력을 높이고 싶은 사람, 이름을 드높이고 싶은 사람, 보물을 독차지 하고 싶은 사람, 부추기러 온 사람, 중재하러 온 사람, 휘말린 사람 등이 하나의 거대한 지옥도를 이루었다.
성취에 대한 욕구가 크던 곽다순의 작은형이 거기에 끼어들었다가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 일이 곽다순의 형인 곽다주가 본격적으로 엇나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자문원은 곽다순의 청으로 곽다주를 그 아비규환에서 꺼내기 위해 천수편이 발견된 종암산(從巖山)에 발을 들였다.
자문원이 도착했을 때 이미 피를 잔뜩 먹은 천수편은 마치 격구의 공처럼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옮겨 다니는 중이었다. 일 각(15분)을 못 넘기고 주인이 바뀌는 것은 부지기수였고, 그때마다 전 주인의 목은 어김없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결국 최후의 주인이 천수편을 품에 안고 천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뛰어내리는 그를 잡겠다고 같이 떨어진 이들도 십 수 명이 넘었다. 절벽의 아래는 무간호라 불리는 거대한 호수가 자리해 시체도 천수편도 찾지 못했다.
수많은 시체와 부상자, 그리고 원한만이 쌓인 결말이었다. 무던한 성품의 자문원도 그때를 떠올리면 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꿈으로 보았던 현서도 마찬가지였다. 꿈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띄엄띄엄 이어졌는데, 어떤 장면들은 깨고 나서 구역질부터 할 정도로 끔찍했었다. 몸이 아파 정신이 몽롱한 것이 다행이라 여길 정도였다.
그만큼 강렬한 기억이었던지라 보물을 노리는 강호인이란 얘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음모를 모를 때는 한 발 물러서야 해.”
허리띠에 단도를 빈틈없이 넣어두는 현서를 보며 이사가 물었다.
“그런데 도련님은 이런 것들을 어찌 아세요? 저 두 분도 처음 듣는 얘기인 것 같았는데.”
이사의 질문에 현서는 살짝 눈을 굴렸다. 이사가 보았다면 도련님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겠지만, 마침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현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만희당에서 내 일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는 거밖에 더 있어? 그래서 아는 거지.”
이사가 현서의 측근이긴 하지만 그만큼 바빠 늘 붙어 있지는 않았다. 현서의 서재에 늘어나고 있는 서책과 재미있는 얘기를 들으면 당장 달려와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호부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현서와 이사가 중정에 도착했다. 그곳엔 이미 도착한 곽나난이 완비를 안고 있었다. 일부러 깨우지 않아 완비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곽나난이 완비를 안은 채로 작게 묵례했다. 현서도 따라 읍했다.
“밤이라 철서성 문은 닫혀 있지만 군이 주둔하는 성이 아니라 인원이 적다면 오가는 것에 큰 제약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담을 넘을 겁니다.”
장원은 착착 비워지고 있었다. 패천검의 사용인 모두가 얼굴이 알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부는 철서성 안에서 흩어지기로 했다. 그중에는 현진이 돌아오면 송가장을 통해 현서의 소식을 전해주기로 한 이도 있었다.
“이걸 쓰십시오.”
완비를 제외한 모두가 죽립을 썼다. 현서는 왜 자신만 천이 드리워진 몽수를 써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이 상황에 따지는 것은 아니라 얌전히 썼다. 앞이 흐릿해 보여 천을 슬쩍 걷으려는데 유위람이 먼저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현서가 대꾸할 새도 없이 유위람이 현서를 덥석 안아 들었다. 놀란 현서가 바르작거리자 유위람이 속삭였다.
“급히 가야 해서 그렇습니다.”
고개를 슬쩍 돌리니 패천검의 수하가 이사도 잘 챙겨 들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경공을 못 쓰니 먼저 감사를 표할 일이었다.
“성가시게 해서 송구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성가신 것은 호 공자가 아니라 일을 이렇게 만든 자들이죠.”
틀린 말은 아니라 현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자세가 습격당할 때와 비슷했다. 분명 자신은 이사나 패천검보다 작고 가볍다. 패천검쯤 되는 무인에게 큰 부담은 아니겠으나, 어째서인지 안겨 있는 자세가 이사보다는 완비에 가깝다는 게 좀 그랬다. 정말 애를 안고 있는 것처럼 안고 있잖아.
아프고 나서는 기력이 없어 여기저기 잘 안겨 다닌 현서지만 낯선 사내에게 아이처럼 안겨 있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현서는 한숨을 삼켰다. 어쨌든 일은 생겼고, 일이 끝나기까지 현서는 도움은 못 될 망정 발을 잡고 싶지는 않았다.
현서가 힘을 빼고 얌전히 기대자 유위람이 칭찬하듯 다독이며 작게 웃었다. 정말 아이가 된 느낌에 현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몽수의 천이 가려줘서 다행이었다.
현서는 자신이 패천검과 열한 살 차이가 난다는 것을 떠올렸다. 무림의 후배는 아니지만 연장자가 베푼 배려라고 여기자 조금 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현서는 집안에서 쭉 막내여서 연장자의 호의에 익숙했다.
보름달이 뜬 날이라 밤 깊은 시간에도 길이 훤히 밝았다. 패천검과 그 일행은 소리도 없이 그늘 아래만을 골라 훌쩍 달렸다. 패천검의 경공 솜씨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이제껏 조용했던 옥이 물어 왔다.
―너 월영사랑 약수 얘긴 어디서 들었어?
‘어디서 듣긴, 백양교가 효장락공주 무덤을 습격했을 때 곽다순이 해준 얘기였지. 백양교의 목적은 공주의 시체 하나만이 아니라 월영사도 있었다고. 부친인 천의맹주가 해준 얘기라고 했어. 그러고 보니 천의맹주와 그 측근들은 모두 죽었을 테니, 어? 나 뭔가 말실수한 건 아니겠지?’
강호인과 보물이라는 조합에 긴장한 현서는 이제야 자문원의 기억을 여과 없이 바로 말한 것을 떠올려 걱정했다. 이제까지 무공에 관한 일이 아니고서는 자문원에게서 얻은 정보를 들추어 낸 적이 없었던 현서였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네가 남모르는 걸 알고 있다 해도 너를 자문원이랑 바로 연관 짓지는 못할 거다. 여차하면 호가를 팔아.
옥이 혀를 차며 덧붙였다.
―저치가 자문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니 내 느낌에 들켜도 나쁘게 굴지는 않을 것 같긴 한데, 그것이 좋은 일인지는 애매하구나.
옥과 현서가 대화하는 동안 패천검과 그 일행들은 순찰병들을 따돌리고 이미 성을 넘은 뒤였다.
자문원의 기억에도 밤에 성을 넘은 경우가 제법 있었지만 현서의 몸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삼 장(약 9m)을 훌쩍 뛰어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서는 옥과 대화하느라 이사가 비명을 겨우 참으며 숨을 삼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사에 반해 현서가 너무 조용해 유위람은 기절을 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현서의 맥박이나 옷을 꼭 쥔 손 때문에 기절하지 않은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병약해서 호부의 뜰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담이 큰 도련님이로군.’
유위람이 마음에 드는 자세라 칭찬하며 빙긋 웃었다.
<유연천리(有緣千里)>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