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六章. 인연이 없으면 마주 보아도 만나지 못한다 (7/21)

Cover

유연천리(有緣千里) 2권

황묘

目次

六章. 인연이 없으면 마주 보아도 만나지 못한다

七章. 영우곽가의 비무 대회

八章. 짝사랑의 자각 (1)

六章. 인연이 없으면 마주 보아도 만나지 못한다

일행의 첫 목적지는 철서성에서 동쪽으로 좀 떨어진 호계라는 작은 항구였다. 석계현은 가는 길이 주로 들판이라 다수의 적을 만나게 된다면 성가시기 때문이다. 호계현으로 가는 길에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을 질러가기로 했다.

“우리가 운이 좋았네.”

“거봐. 내가 동쪽이 대길이라고 했잖아.”

어스름히 해가 뜰 무렵, 산길의 초입에서 대도를 든 거구의 쌍둥이를 비롯해 쉰에 가까운 인원들이 흉흉한 얼굴로 나타났다. 숨길 생각도 없이 나타났기에 갑작스러운 등장은 아니었지만 기꺼운 일은 아니었다.

길을 막아선 것이 누가 보아도 적대적인 모양새였다.

“이 산에 주인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뉘라서 길을 막는 겁니까?”

화정이 입을 열었다.

“허리의 패를 보니 의당의 사람이네. 우린 의당의 인물에게는 용건이 없소. 하지만 뒤에 있는 이들에는 용건이 있지.”

“무슨 일입니까.”

유위람이 말했다. 여전히 현서를 품에 안고 있어 모양새가 나지 않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자네들이 좋은 보물을 들고 있다는 얘길 들어서 말이지. 좋은 건 나누어야지.”

“그렇지.”

쌍둥이인 남자 둘이 서로 추임새를 넣었다. 현서의 추측대로 보물에 관한 소문을 습격 전에 먼저 퍼뜨린 모양이었다.

“소문? 보물? 누구에게 그런 소릴 들었습니까?”

“왜? 알면 가서 따지게? 그것도 목이 붙어 있을 때나 가능한 얘기지.”

남자의 말에 주위가 소란스럽게 웃어댔다. 사람이 많으니 기가 죽으라고 부러 과시하는 모양새였다. 실제로 이사는 딱딱하게 굳어 기절하기 직전이라고 옥이 가르쳐 주었다. 싸움이 터지면 현서는 이사, 완비와 더불어 후방에 있어야 할 테니 그때 이사를 달랠 생각이었다.

“꼴값은.”

차갑게 비웃는 소리가 패천검의 목소리임을 깨닫기도 전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꽉 잡으세요.”

그리고는 그대로 훌쩍 뛰어올라 나뭇가지를 밟으며 나무 위를 달렸다. 전음으로 얘기가 되었는지 나머지 일행들도 패천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패천검이 이렇게 벗어나는 것을 택할 줄 몰라 잠시 당황해 하던 이들이 욕을 하며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패천검이 속도를 줄여 멈췄다.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못하는 인원이 있으니 적당한 자리를 찾은 것이다. 큰 바위가 있어 등 뒤로 적이 오지 못할 곳이었다. 패천검이 현서를 바위의 편편한 부분에 내려놓았다.

“잠시 여기 있어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네. 그럼요. 괜찮습니다.”

현서를 안고 삼 장(약 9m)이 넘는 성의 담도 넘었으면서 바위 위에 두는 건 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소 공포증이 없는 현서는 괜찮다고 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면 괜찮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

“완비를 부탁합니다.”

“네.”

아이를 안고 싸울 수 없으니 곽나난이 완비를 현서에게 맡겼다. 약을 먹고 잠들어 깨어나지 않는 완비를 현서가 품에 안았다. 안고 서 있다가 넘어지면 안 될 일이니 현서는 바로 자리에 앉았다.

“화 누이도 여기 계세요.”

“안 그래도 그럴 거거든.”

육 자(약 2m)쯤 되는 바위 위에 싸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바위 아래는 패천검과 곽나난, 그리고 패천검의 장원에서 같이 온 여섯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보이진 않지만 현서의 호위도 두 명 있을 터였다.

현서는 완비를 품에 앉은 채 한 손으로 몽수의 천을 걷어 올렸다. 이사에게 손짓해 곁에 앉히고는 죽립을 들어 올려 파랗게 질린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아?”

평소라면 이사가 현서에게 했을 걱정을 현서가 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꾹 맞잡으며 이사가 말했다.

“괜, 괜찮아요.”

“이것 좀 먹으렴.”

화정이 혀를 차며 콩알 크기의 환을 두 개 주었다.

“물이 없어서 쓰겠지만, 그래도 꼴딱 삼켜.”

“감, 감사합니다.”

정말로 쓴지, 아니면 너무 놀라 그런지 찡그려진 이사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도, 련님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이사, 저기 있는 분들은 아주 강한 분들이고, 아버님이 보내신 호위도 있어. 무사할 테니 괜찮을 거야.”

앞으로 일은 어찌 될지 모르지만 현서가 가늠하기에 저 무리에게 패천검의 일행이 질 것 같진 않았다.

“석청담의 숙모님이나, 현진 도련님보다 더요?”

작게 속삭이는 이사의 말에 화정이 대답했다.

“회천검이라면 내가 무어라 입을 댈 수 없지만 현진이랑 쟤를 비교하면 현진이 부끄러워서 땅을 파고 숨어버릴걸. 많이 놀랐겠지만 너무 걱정 말렴. 이 정도에 밀려서야 패천검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그리고 나난도 있고.”

“화 누이, 나는 덤이오?”

작게 말해도 바위 아래서 못 들을 리 없었다. 곽나난이 툴툴거렸다. 약의 효과가 빠른지 전혀 긴장하지 않는 일행들 덕분인지 이사도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그사이 적들이 도착했다. 바보처럼 눈앞에서 패천검 일행을 놓치고 졸졸 따라와야만 해서 매우 분했는지 독이 오른 기세가 역력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모습을 보이기가 무섭게 침을 뱉으며 욕부터 했다.

기세와 달리 얌전하게 욕을 하는 사람이네. 자문원의 기억 때문에 욕의 다양한 세계를 알고 있는 현서는 멍하니 있을 뿐이었지만, 이사는 도련님이 거친 말에 놀란 줄로만 알았다. 자신이 떨고 있으면 도련님을 누가 돌보겠는가, 이사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보아하니 지금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은데, 어디 있지? 말해 봐.”

“왜 말이 없어? 겁먹었냐?”

“동생아, 아무리 그래도 천하의 경천검이라는데 이걸로 겁을 먹겠어?”

죽립을 쓰고 있지만, 저들은 눈앞의 사람이 패천검임을 알고 있었다. 사무문 말고도 경천검을 입에 올리는 사람도 있구나, 그것도 패천검 앞에서. 간이 큰 건지, 간이 없는 건지. 현서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파리처럼 왱알왱알거리기만 할 거면 좀 비키든가.”

죽립 아래로 패천검이 귀찮아하며 말했다. 목소리는 매우 좋았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좀 전에 들었던 말이 환청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쌍둥이가 발끈했다.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익히고 있는 내공의 특성이 성질을 욱하게 만들어서 그렇다. 저런 내공 운용은 폭급한 성격과 함께 폭발적으로 끌어 쓸 수 있는 힘을 만들어준다.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지만 빨리 배울 수 있어 사파에선 익히는 일이 드물지 않다. 쌍둥이가 같이 다니는 걸 보니 합격(合擊)에 특화된 것 같았다.

“사람이 친절한 마음에 말부터 거는데, 이름 좀 있다고 싸가지 없긴.”

“정파 놈들이 이렇게나 재수가 없어. 보물 좀 나눠 쓰자는데 배때기가 쳐불러서는.”

곽나난이 픽 웃었다.

“우리가 언제 보물이 있다고 했지? 다짜고짜 있지도 않은 보물을 내어놓으라니. 억지도 정도껏이지.”

“그거야. 네놈들 배에 칼 꽂히면 알겠지.”

곽나난이 죽립을 쓴 채로 슬쩍 고개를 까딱하고 움직였다.

“꽂을 수나 있고?”

죽립을 썼음에도 곽나난이 그들을 하찮아 하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쌍둥이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네놈을 죽여서 그 버릇없는 혓바닥으로 내 귀를 닦아야겠다!”

“이 쌍주야차(雙柱夜叉)가 네놈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네 자식이다!”

거대한 두 개의 도가 교차해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것을 흘려 피하며 곽나난이 비아냥거렸다.

“네놈들이 뭔데 마음대로 우리 집안 족보에 들어오겠다는 거야. 조무래기도 안 되는 것이 뭐래. 우리 집이 콩가루긴 한데, 비싼 콩가루라서 싸구려는 안 받아.”

부친의 사지근맥을 끊어 죽게 하고, 손위의 형을 죽인 뒤 집안을 피로 청소했던 막내 숙부를 가진 집안의 가주가 말했다.

네가 하니 농담으로 안 들리잖아. 곽나난의 말에 화정이 진저리를 쳤다.

곽나난의 빈정거리는 말솜씨에 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문원의 기억 속에 곽나난은 냉소적인 아이긴 했지만, 말수가 많지는 않았다.

패천검의 차가운 말투가 낯설었던 현서는 패천검과 친한 것이 분명한 곽나난의 비아냥거림을 듣고 새로운 착각에 빠졌다.

곽나난에 비하면 패천검은 얌전하게 말하는 거였구나. 당연히 잘못된 생각이었지만, 이번에도 정정해 줄 사람이 없었다.

싸움이 시작되며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인원은 열세였지만, 밀리는 것은 아니었다. 패천검을 노리려 했던 것이 명백했던 쌍주야차는 곽나난의 도발에 넘어가 곽나난과 싸우는 중이었다. 아직 젊어도 곽나난은 한 가문의 가주였다. 합격이 특화되어 있는 쌍둥이와의 싸움도 잘 쳐내고 있었다.

―나난이 잘 싸우는구나. 특히 영우곽가의 독문 보법인 갈량지(葛梁枝)가 수준급이야.

영우곽가는 변화무쌍하면서도 적확한 도법을 구사한다. 그것을 받쳐 주는 것이 보법인 갈량지다. 갈량지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 벼락을 쳐 낸다고도 일컬어지는 도법이 마른 나뭇가지 휘두르기나 다름없이 되어버린다. 자문원이 많이 보았던 무공 중 하나라 곽나난의 실력이 금세 가늠이 되었다.

‘지복도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럼 패천검을 걱정하게?

‘그럴 리가.’

현서는 눈을 슬쩍 돌려 패천검이 싸우는 곳을 보았다. 패천검의 이름을 듣고도 동요가 없던 이들이다. 보물에 눈이 멀었든, 사주를 받았든 그들은 싸워야 할 상대를 알고 온 것이다. 일부러 죽을 자릴 찾아온 것은 아닐 테니 각자 숨겨둔 한 수는 있는 모양인지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곽나난이 쌍주야차의 발을 묶었지만, 적어도 한 사람당 일곱 명쯤 되는 적을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유위람은 산책 나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검을 휘둘렀다. 물론 그 손속은 전혀 느긋하지 않았다. 검이 지나는 궤적을 따라 핏물이 튀었다.

눈앞의 적이 어쩌든 말든 유위람은 그들에게 제대로 된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적들을 처리했다.

―아무래도 이놈들은 시간 끌기용이었나 보군.

‘그런 거 같아.’

철서성을 벗어나면 언제든 습격 가능하게 철서성을 중심으로 매복이 여러 군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중 가까이 있던 다른 매복조가 합류할 듯싶었다.

현서는 가라앉은 눈으로 여차할 때 자신이 쓸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보았다. 기껏해봤자 방심했을 때를 노려 허를 찌르는 것밖에 없긴 했지만 아무 방법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숫자가 많다고 기세등등하던 이들의 반수가 갈려나가자 남은 이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호기롭게 자신의 별호를 외치며 패천검을 죽이겠다며 소리친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현서가 탄식했다. 강호 어디서든 통하는 별호가 있다는 건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다. 무력의 강함만으로 이름이 퍼진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에 주의해야 했다. 소의선 화정의 무공이 고강하지 않아도 그 의술로 별호를 널리 알린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패천검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별호를 얻고 알리지 않았는가.

도산검림(刀山劍林)의 강호에선 사소한 판단 하나가 자신의 목을 바닥에 굴러다니게 만든다. 바로 저렇게.

숨을 고르는 적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죽립을 쓴 유위람의 고개는 여전히 적들의 뒤를 향해 있었다.

스스슥.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공기가 흔들렸다. 현서의 목 뒤로 소름이 확 돋아났다. 현서는 저도 모르게 완비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무공을 알든 모르든 이 존재감을 모를 수가 없었다.

“도, 도, 련님.”

이사가 목이 졸린 사람처럼 꺼져 가는 목소리를 겨우 냈다. 화정이 떨리는 손을 허공에서 몇 번이고 놓치고서야 겨우 이사를 잡아 달랬다. 쉿, 조용히 해야 해.

곽나난의 도에 쌍주야차 중의 한 명이 뼈가 보일 정도로 팔을 깊게 베였으나 신음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뒤로 훌쩍 물러섰다. 분명 그들과 한패일 텐데도 쌍주야차는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사람을 짓누르는 침묵이 이어졌다.

검을 쥔 유위람의 기세가 바뀐 지도 오래였다. 해가 떴으나 나무 사이는 어둑어둑하기만 했다. 그 어두운 산길 사이에 누군가 있었다. 공기마저 내리누르는 거대하고 오만한 기척을 숨기지 않은 채.

현서는 강제로 숨 쉬는 것을 제한당한 것처럼 온몸이 경직되었다. 이대로는 기절할 것 같아 억지로 혀를 씹으며 호흡을 골랐다. 내공은 호흡을 따라 흐른다. 호흡은 모든 것의 기본이 된다. 내력을 일으키자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유리가 깨어지는 것처럼 강한 파열음이 나며 거센 바람이 불었다. 몽수가 날아가고 일순 눈을 뜨지 못할 정도의 강한 바람에 현서는 완비를 꼭 안은 채 웅크렸다. 바람은 금세 멎었다.

이제 아침 해가 산길 사이까지 비추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등 뒤의 흥건한 땀이 아니면 백일몽으로 치부했을 정도였다. 완비를 꽉 붙들고 있던 손이 아렸다.

“도련님. 방금 그건 뭐였지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허옇게 질린 이사가 물었지만 현서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바위 아래의 사람들도 어안이 벙벙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현서가 내려다보자 역시나 죽립이 벗겨진 패천검과 눈이 마주쳤다. 패천검이 살짝 인상을 쓰곤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차에, 어디선가 소 떼가 달려오듯 우렁우렁한 진동과 소음이 들려왔다.

“이, 이건 또 뭐예요.”

당황한 이사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놀라기론 현서도 마찬가지였다. 후발대가 이런 식으로 올 줄이야.

패천검을 비롯해 일행 중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지만, 저토록 많은 인원과 싸우게 되면 좋지 않았다. 좀 전의 그 압도적인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지만, 기운을 갈무리하고 저 사이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다. 현서는 바짝 긴장한 채로 숲길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길에서 소 떼 같은 소리의 원인인 일련의 사람 뭉텅이가 툭 튀어나왔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독식은커녕 꼬락서니만 볼만해졌네.”

무리의 선두에 있던 이가 부상당한 쌍주야차와 바닥의 시체들을 보며 비웃었다. 현서는 주의 깊게 그 무리를 살폈으나 조금 전과 같은 기세를 보이는 이를 찾아내지 못했다. 작정하고 감추었다면 쉬이 찾진 못할 테지만 옥도 잠잠한 걸 보니 없는 것 같았다.

서로 썩 좋은 사이는 아닌지 뒤늦게 나타난 이들은 쌍주야차 쪽을 살피지도 않고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첫 번째 무리에서 쌍주야차 외에 크게 눈에 띄는 이가 없었다면 이번에는 현서의 눈에 걸리는 이들이 몇 되었다. 그들은 모두 작정을 한 듯 패천검에게 달라붙었다.

“보물이라는 게 사람을 얘기하는 거였어? 김빠져라.”

머리에 커다란 붉은 꽃을 꽂은 여자가 바위에 앉은 현서를 보곤 투덜거렸다. 말투는 가벼웠지만 쓰고 있는 연검(軟劍)은 살아 있는 독사처럼 매섭게 움직였다.

“팔면 되잖아.”

“예쁘긴 하지만 사람 팔아 얻는 푼돈이 필요해서 내가 여기까지 와야 해?”

여자는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가벼운 말투와 달리 패천검에게 붙은 다섯 중에 실력이 제일 좋은지 아직 옷자락 하나 잘리지 않았다. 쌍검으로 패천검의 검을 막아 내려다 뒤로 튕긴 사내가 피를 뱉으며 덧붙였다.

“걔한테 팔면 되잖아.”

“걔가 누군데? 강시 만드는 애? 사람 가죽 갈아입는 애?”

“어느 쪽이든 비싸게 파는, 컥.”

혀를 찬 유위람이 검신(劍身)으로 남자의 얼굴을 쳤다. 가볍게 치는 것 같았지만 돌이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시끄럽다.”

유위람이 긴 발을 뻗어 남자를 걷어찼다. 남자는 짚더미처럼 휙 날아가 또 다른 싸움판의 한가운데 푹 떨어져 그대로 절명했는지 조용해졌다.

패천검을 상대하던 이들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무엇이라 불리는 사람인지를 다시 한번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후론 더욱 공격이 매서워졌다. 연검이나 검을 사용했지만 그 외 암기들도 부지기수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유위람은 다수를 상대하는데도 팔 하나 뻗을 수 있는 공간에서만 움직였다. 유위람이 우위에 있다는 증거였다. 검끝에 실려 나오는 패도적인 기운과 달리 현서는 그 움직임만은 무척 단정하다고 느꼈다.

―조심.

옥이 주의를 주었다. 누군가가 던진 암기가 깨지면서 그 조각이 바위 위로 튀었다. 현서는 자신들에게 떨어지지 않을 건 알았으나 혹시 몰라 소매로 완비를 가렸다.

검압으로 성가시게 덤비던 사람들을 밀어내 떨어뜨려 놓은 유위람이 현서에게는 닿지도 않을 자그마한 암기 조각을 막아내곤 휙 사라졌다.

현서는 눈을 깜박였다. 모르긴 몰라도 현서의 비밀 호위들이 나서지 못해 당황했을 것 같았다.

“저게 보물이 맞나 보네.”

“저 남자일까, 아님 품의 아이일까.”

‘둘 다 틀렸는데.’

이사는 듣지 못했지만 바위 아래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은 현서는 아니라고 정정하지 못해 답답했다.

피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지복도와 패천검은 다치지 않았지만 다른 일행들은 조금씩 상처가 생겼다. 난전을 틈타 현서의 호위들이 암기를 날리는 것을 현서는 알고 있었다. 죽거나 도망간 이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열다섯쯤 되는 인원이 남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패천검과 지복도에게 달려들었다.

현서는 패천검에게 달려드는 이들이 두 부류로 나뉜다는 걸 알았다. 일대일로 덤비지는 못하지만 여럿이라면 가능성 있다고 여겼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중을 위해서인지 실력을 다 내보이지 않은 이들이 있고, 반대로 목숨을 걸어 약간이라도 패천검에게 타격을 입히려는 이들이 있었다.

‘좀 전의 보물 얘기도 그렇고, 누군가 직접 부리는 이들과 부추김당해 오게 된 이들이 섞인 모양이야.’

현서가 완비를 감싸지 않은 손으로 바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사이 화정은 싸움판의 부상자를 가늠하고 있었다. 싸움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정의 눈에도 곧 도망갈 이들이 보였다. 유위람에게 덤볐던 다섯 명 중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은 머리에 꽃을 꽂은 여자뿐이었다.

일행 중 크게 다친 이는 없었지만, 싸움으로 인한 피로는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당장 먹일 수 있는 약이 어떤 게 있더라. 갖고 있는 약을 셈하던 화정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유위람, 저기!”

화정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현서도 이사도 깜짝 놀라 화정이 손짓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특색 없는 검은 무복을 입은 남자가 손에서 피를 흘리며 줄을 잡고 있었다. 유위람이 그대로 손을 잘라버리는 것보다 남자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피해!”

쾅 하는 소리에 바위가 흔들렸다. 현서는 바위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유위람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완비를 안고 있는 현서를 안아 훌쩍 나무 위로 올라섰다. 곽나난이 그 옆으로 와 완비를 꽉 안고 있는 현서의 팔을 풀어 아이를 데리고 갔다.

머리는 화탄이 터졌다는 걸 인지했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갑작스런 큰 소리와 충격에 현서는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정도로 어지러우면 시야가 좁아진다는 걸 알아서 애써 눈을 뜨려 하지도 않았다.

유위람은 괜찮다는 얘기도, 안전하다는 얘기도 하지 않은 채 현서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어지러움과 귀가 먹먹해진 것이 사라지자 현서는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세상에.”

현서는 저도 모르게 패천검을 잡았다. 화탄이 터졌으니 어떤 결과가 생겼을지 알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또 달랐다. 현서는 아연해졌다. 화탄 때문에 터져 나간 시체들이 보였다. 몇몇은 도망을 갔는지 모두 화탄에 휘말려 시체가 된 건 아니었지만 끔찍한 광경이었다.

“실패했을 때의 신호탄인 모양입니다.”

유위람이 혀를 찼다.

“많이 놀랐겠지만, 그래도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정 힘들면 화 누이에게 말해 약을 먹는 건 어떻겠습니까.”

완비처럼 약을 먹고 자겠느냐는 말에 현서는 고개를 저었다. 피 냄새와 화약 냄새가 섞여 토할 것 같은 걸 꾹 참았다. 지금 토한다는 건 탈진해 기절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 때 숲 안쪽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화탄 터지는 소리잖아. 우릴 함정에 빠뜨리려 해?”

“아닙니다. 아닙니다. 대협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자가 진짜 이곳에서 보물과 바꿔준다고 했단 말입니다.”

“무슨 보물인지도 모른다며. 근데 보물이란 말에 무턱대고 유괴를 했다고?”

“이놈 미친 거 아냐!”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아는 목소리는 분명했지만, 여기서 만날 줄 몰랐다. 초췌해져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희게 질려 있던 현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유위람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숲길 끝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아는 목소리가 맞았다.

“화약 냄새 말고 이 피 냄새……! 현서야?”

오랜만에 보는 몇 안 되는 현서의 친구, 석청담의 하우대가 거기 있었다.

하우대를 포함한 석청담의 제자 네 명이 남자 한 명을 포박해 끌고 오는 참이었다. 얼굴에 멍이 든 남자는 연신 억울하다 외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가득한 시체에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현서 너는 왜 거기 그러고 있고.”

하우대가 현서와 아직도 현서를 안고 있는 패천검을 번갈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산 중턱의 피바다보다 몸이 약한 친구의 생뚱맞은 등장이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일행 중 가장 연상인 소나진이 패천검 일행의 얼굴을 알아보아 정중하게 포권했다.

“석청담의 제자 소나진이 검각의 패천검 선배님과 영우곽가의 가주님, 그리고 의당의 소의선을 뵙습니다.”

소나진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 묶여 있던 사내까지 화들짝 놀라며 읍했다. 묶여 있는 상태라 고개만 까딱하는 꼴이 되어 우스웠지만 웃는 사람은 없었다.

소나진은 현진의 친구고, 조규와 경차민, 그리고 하우대는 현서의 한 줌인 친구들이었다.

현서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 유명한 패천검이라는 사실에 하우대를 비롯한 나머지의 얼굴이 슬쩍 풀리긴 했지만 곧 세 명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열네 살의 현서가 석청담에 머무는 동안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 친해졌다. 또래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몸이 약한 생물을 처음 봤던 아이들은 잠시의 혼란한 시기를 거쳐 곧 적응했던 것이다.

무공을 배우고 있어도 전부 햇병아리였던지라 당시엔 전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우린 나중에 배울 테지만 현서는 못 하는데 현서가 몰래 말하고 싶을 땐 어찌해? 그런 걱정에 빠진 아이들은 현서와 머리를 맞대고 어설픈 암호를 만들며 놀았다.

지금 저들의 행동은 그때 만든 암호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납치?’

‘구조?’

당시에 아이들이 가장 먼저 만든 암호는 구조, 납치, 악당, 범인 따위였다. 왜 그런 것부터 만들어야 하느냐고 열네 살의 현서는 항의했지만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육 년이 지난 지금 납치와 구조를 뜻하는 암호가 어쨌든 쓰이게는 된 셈이다.

지금 쟤들은 전음을 쓸 수 있는데, 현서가 혹시라도 암호를 떠올리지 못할까 봐 저러고 있는 것이다. 개중 가장 어른스러운 하우대마저도 저럴 줄은. 현서는 자신의 한 줌밖에 안 되는 저 해맑은 친구들이 고마우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석청담의 제자들은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 사이에 일 년간 폐관 수련을 한 뒤 시험을 친다. 시험을 통과하면 강호에 나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현서보다 두 살 많은 하우대는 작년부터 강호를 떠돌고 있었다. 이제 겨우 일 년이니 아직 강호 초출이긴 하다.

하지만 발아래의 시체들, 아직 피도 굳지 않은 저 시체들은 무정한 강호에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목이 떨어졌다.

친구들이 패천검 일행을 납치범으로 가정했다면 현서에게 전음을 보내는 것이 나았다. 그렇지 않아도 강호는 험한 곳인데. 친구들의 강호 생활이 걱정된 현서는 나중에 현진에게 얘기해 주의를 단단히 받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짧게 얘기할게.”

보물을 가졌다는 의심을 받고 습격을 당했다고 매우 줄여 얘기했다. 혹시라도 저들이 휘말릴까 말을 아꼈다.

자세한 얘길 듣고 싶어도 현서가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아 이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는 얼굴이 늘어나서인지 안색이 한결 좋아진 이사가 현서의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와 친구들이 대화를 이어나가기 전에 현서가 물었다.

“그런데 너희는 여기 무슨 일이야? 저 사람은 누구고?”

새로 등장한 이들이 석청담의 제자들이고 현서와 아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되자 패천검 일행은 대화를 듣기만 했다. 유위람이 여전히 현서를 안아 들고 있었지만, 체력을 아껴야 하는 현서는 가만히 있었고, 나머지는 뭐가 문제인지 깨닫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현서의 친구들은 납치가 아니라면 현서가 안겨 있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다.

딱 한 명, 묶여 있는 사내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입 다물고 있을 눈치는 있었다.

하우대 일행은 양주 산해(山亥)로 향하는 중에 어이없는 통행세를 요구하는 산적 무리와 한바탕 싸움을 했다고 한다. 산채를 몽땅 뒤집어놓고 나서려는데 그때 저놈이 아이를 납치해 가는 것을 보았다고. 다행히 금세 따라잡았는데 뒤를 밟아보니 저 미친놈이 토굴에 아이를 셋이나 숨겨두고 있었다.

자칭 산해 야수왕이라고 큰소리쳤으나 소나진에게 실컷 두들겨 맞기만 했다. 저 눈의 시퍼런 멍도 그때 생긴 것이라고 했다.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관아에 넘겨질 상황이 되자 사주를 받았다고 실토했단다.

납치된 아이들이 더 있을지 모르니 아이들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행과 저치를 관아로 끌고 갈 일행으로 무리가 나뉘었다고 한다.

“그 얘기, 나도 좀 듣고 싶군.”

가만히 듣고 있던 곽나난이 끼어들었다. 패천검과 소의선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소나진이 묶여 있던 남자를 들이밀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은 걸로 가진 용기를 다 쓴 남자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고수들이 포진해 있는 이곳에선 약자처럼 보이지만 어린아이를 팔아 치우려고 납치한 놈이다.

염라대왕 앞에서 실토하듯 어디서 태어났고 몇 살 때 도둑질을 했고 따위를 줄줄이 뱉던 남자는 곽나난의 혀가 길다는 말에 아이들의 납치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아이들을 후한 값을 주고 산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길거리 거지 패나 화전민의 아이들을 샀는데 얼마 후 말쑥한 아이들을 구한다는 조건으로 바뀌었습니다. 잘 먹고 영양 상태가 좋은 아이들은 더 비싼 값에 산다고 하지 뭡니까. 게다가 개중에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으면 보물로 바꿔주겠다고 해서. 그래서…….”

남자가 구체적으로 아이를 사려고 했던 사람의 생김과 접선지, 대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현서가 패천검의 팔을 잡았다. 유위람은 현서의 뜻을 알아듣고는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주었다. 다리가 풀렸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현서가 멀쩡히 서 있자 유위람은 그제야 상체를 붙들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현서가 패천검의 뒤로 물러서자 이사를 비롯해 하우대와 나머지가 우르르 달라붙었다. 하우대와 친구들을 보며 현서가 눈을 깜박였다.

‘물.’

이 암호의 장점이자 단점은 심하게 단답형이라는 것이다. 친구들끼리 만들었으니 별문제는 없지만 말이다. 하우대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죽통을 꺼내 현서에게 건네주었고, 이사는 곁에 와 현서에게 아침에 먹어야 하는 약을 쥐어주었다. 현서가 약을 먹고 이사가 건네준 사탕까지 입에 넣는 걸 본 친구들이 입을 열었다.

“양주까진 어떻게 온 거야? 정말 납치나 가출은 아니지?”

“현진 형이 송가장의 혼례에 참석하는 데 따라왔어. 형이 지금 신혼부부의 회문에 따라가서 없어서 그래.”

“당장 호가 상단에 가서 너 찾았다고 신고할 뻔했잖아.”

“근데 왜 송가장에 안 있고 패천검 선배님이랑 있는 거야?”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오해를 사서 조용해질 때까지 잠시 몸을 숨기려고 그런 것뿐이야. 내가 패천검이랑 있는 건 형도 알아.”

많은 이야기를 생략했지만 현진이 알고 있다는 얘기에 친구들의 표정이 슬쩍 펴졌다. 하우대가 바닥의 아직 피가 굳지 않은 시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다시 현서를 보았다. 현서가 눈을 깜박였다.

‘괜찮음.’

현서가 괜찮다고 한 것을 조규도 정차민도 보았다. 조규가 품에서 육포를 꺼냈다.

“현서야, 육포도 먹어.”

“아니, 입에 사탕 있는 애한테 육포를 주면 어떡해.”

“어떡하긴 먹고 먹으면 되지. 뭐가 문제야.”

딴에는 패천검 일행의 눈치를 본다고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세 마리의 덩치 큰 참새가 자신을 둘러싸고 짹짹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럼 저 시체들이 전부 보물을 노리고 달라붙은 거란 말이지? 너는 짚이는 게 없고?”

그나마 재빨리 냉정을 찾은 하우대가 물어 왔다. 미안했지만 현서는 짚이는 곳이 없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오궁 얘길 꺼내면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패천검 쪽도 같은 생각인지 현서의 말을 듣고 있을 게 분명한데도 말을 보태지 않았다.

“너희는 보물이 나왔단 얘기 들은 거 없어?”

“없어. 저놈이 보물 어쩌고 하는 걸 들은 게 다야.”

“석청담에 갈래?”

서녕호가가 현서 하나 못 지키겠느냐만 어쨌든 무림의 일이니 석청담의 그늘 아래 있겠느냐는 하우대의 물음이었다. 호의는 고마웠지만 고개를 저었다. 현서의 거절에 무어라 말을 더하려던 하우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패천검이 아주 자연스럽게 현서의 뒤에서 현서를 안아 올렸다.

“화탄이 터졌으니 시간을 더 지체할 순 없습니다.”

갑작스럽게 친구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화탄을 잠시 잊었다.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나진에게 들은 것이 있는지 놀라는 것도 잠시, 이사도 안겨 있는 걸 본 친구들은 금세 납득해 눈매가 순해졌다.

인신매매범도 묶인 채로 끌려가고 있었다. 줄을 잡고 있는 하우대가 경공을 사용해 달리니 저도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산길의 온갖 돌이나 나뭇가지들을 몸으로 맞으며 끌려가게 될 테니 말이다. 이름이 뭔지는 모르지만 자칭 야수왕이라는 게 완전 거짓은 아닌지 죽는다는 소리를 내면서도 용케 따라오고 있었다.

“저치가 말한 중계상을 찾는 것과 별개로, 그는 저대로 관아에 가게 될 것입니다. 석청담의 제자들과는 호계까지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그쪽에서 산해로 가는 배를 탈 예정이라더군요.”

현서가 친구들이 걱정되어 말을 아꼈다면, 패천검 일행은 후배에 대한 도의로 일에 연관시키지 않으려 했다. 패천검이 보기에 석청담의 제자들은 잘 배우긴 하였으나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병아리들이나 다름없었다.

“패천검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나뭇가지를 밟으며 달리는 중이었기 때문에 현서는 유위람의 품에 푹 안긴 상태였다. 때문에 현서의 얼굴이 유위람의 목과 어깨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달리는 와중이라 고개를 드는 것이 여의치 않아 그대로 말했더니 유위람의 목에 대고 말하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말씀하세요.”

유위람이 말하자 목이 울리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패천검에게 이 정도로 친밀하게 안겨 다녔다고 말하면 현진 형이 깜짝 놀라겠다. 큰형이랑 작은형 귀에 들어가진 않겠지. 현진은 그렇다치고 현규나 현상이 똑같이 안아보겠다고 나서면 큰일이었다. 형들이 튼튼하긴 해도 무림인은 아니니 말이다.

반대로 현서가 조곤조곤하게 말할 때마다 목 언저리에서 자그마하게 울리는 진동에 유위람도 신기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대자인 완비와 달리 안고 있는 느낌부터 달랐다.

현서가 너무 편하게 안겨 있고 또 유위람이 너무 잘 안고 있어서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완비 이외의 사람을 이렇게 안아 다니는 것 역시 유위람의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호계는 작은 항구였지만, 이른 새벽녘 고기잡이를 나선 배들이 돌아와 항구 주변이 북적거렸다. 아침을 파는 노점들이 여기저기서 고소한 냄새를 뿌리며 유혹 중이었지만, 일행들은 걸음을 서둘렀다.

이곳에서 곽나난과 석청담 일행, 그리고 현서 일행이 갈라질 예정이었다. 곽나난은 완비를 데리고 부인이 있는 처가에, 석청담 일행은 인신매매범을 넘기러 산해로, 현서 일행은 패천검의 안가로 가게 된다. 패천검에게 물으니 현서의 비밀 호위들 역시 잘 따라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아이고, 여기선 산해로 못 갑니다. 여기가 아니라 상계서 타야 합니다요. 이쪽 물길은 여기선 넓어 보여도 조금만 나가면 없어져서 말입니다.”

“지금 바로 상계로 가는 배가 있겠나?”

“큰 배를 타시려면 반나절은 기다려야 하지만 작은 배도 괜찮다 하시면 저쪽으로 가보십쇼.”

멀리 간다면 정기적으로 오가는 큰 배를 이용하는 것이 낫지만 상계는 멀지 않아서 작은 배로 가는 데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조업을 끝낸 배들이 막 들어온 참이라 배를 구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큰 배가 아니라 선원들을 포함해 한 배에 전부 타기엔 무리가 있어 두 척을 구했다.

상계까지 가야 하는 곽나난과 석청담 일행이 한 배에 타고, 현서 일행이 다른 배에 탔다. 현서 일행은 상계에서 내리지 않고 중간에 내릴 예정이라 그랬다. 현서의 호위들은 배를 타지 않겠다고 해서 패천검이 전음으로 도착지를 일러놓았다고 알려주었다.

배를 흥정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능력 좋은 이사가 아침밥을 파는 네 명의 상인들의 물건을 전부 샀다. 호재에 입이 벌어진 상인들은 순식간에 음식이 든 광주리를 배에 실었다.

모두가 이사의 유능함에 감탄할 때 이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서의 손에 따뜻한 좁쌀죽이 든 그릇을 쥐어주고 있었다.

“도련님, 드세요.”

“응. 이사도 먹어. 모두 드세요.”

입이 깔깔해서 식욕이 없었지만, 한입이라도 먹어둬야 한다는 걸 알아 현서는 죽을 홀짝홀짝 마셨다. 석청담 일행은 한창 식욕이 좋을 시기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밤새 고생했기 때문에 배가 당연히 고팠다.

음식을 삼키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따뜻한 음식이 들어가자 긴장으로 딱딱했던 몸이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좁쌀죽 한 그릇을 겨우 다 먹은 현서는 잊지 않고 이사가 준 약도 먹었다.

아파서 잠들지 못하는 밤은 있었지만, 이렇게 밤을 새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자기 발로 걷지도 않았는데도 온몸의 근육이 자기주장을 했다.

뱃전을 가득 메운 아침햇살과 따뜻해진 위장 덕에 현서의 눈이 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잠들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현서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안 되는데. 안 돼.’

안가에 도착하기 전까지 또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긴장을 풀면 안 된다. 현서는 가물거리는 눈에 힘을 주려고 애썼다. 손바닥을 꼬집어가며 졸음을 참고 있는데 패천검이 현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직 꼬리가 붙지 않았으니, 쉬어도 괜찮습니다.”

밤새 가장 편하게 있었던 자신이 제일 먼저 피곤해 하는 것이 민망했지만, 화정과 이사가 뭐가 문제냐고 냉큼 거들었다.

“네, 도련님. 잠시 쉬세요. 저흰 물 위에 있는데 어디서 적이 나타나겠어요.”

“안 그래도 눈 좀 붙이라고 할 참이었다. 나중에 크게 앓아눕는 것보다 지금 쉬는 게 낫다는 거 알지?”

화정의 말은 구구절절 옳아 반박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여기서 사양하면 건너편 배의 친구들도 쉬라고 말을 붙일 모양새였다. 현서는 붉어진 얼굴을 이리저리 문지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잠시 쉴게요.”

현서는 그렇게 말하곤 꾸물꾸물 움직여 이사의 곁으로 갔다. 익숙하게 이사의 곁에서 자리 잡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끈이 끊어지는 것처럼 고개가 푹 떨어졌다.

이사가 도련님이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자리를 만드는 것이 보였다. 현서가 당연히 자신의 곁에 기대 누울 거라 생각해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했던 패천검이 그 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뭘 봐.

옥이 툴툴거렸지만 현서는 이미 잠들어 옥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류로 가는 것이라 배는 순조롭게 움직였다. 호계에서 상계까지 물을 잘 타면 한 시진(2시간)이 안 걸린다고 했다.

현서의 곁에 있던 이사도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현서만큼 몸이 약하지 않아도 비무림인인 이사도 밤새 고생하긴 마찬가지였다. 현서는 전생의 기억 덕에 피가 난무하는 상황에도 평정을 지킬 수 있었지만, 이사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도 컸다.

‘양주까지 배를 타고 왔다더니, 뱃멀미는 없는 모양이군.’

반시진이 넘게 미동도 없이 달게 자는 현서의 모습에 유위람은 다행이라 여겼다. 이대로라면 예상보다 빨리 상계에 도착할 거라는 말에 유위람은 건너편 배에 있는 소나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패천검의 전음에 소나진은 잠시 놀랐지만 곧 경청했다.

소나진과의 대화를 끝낸 유위람은 노련한 선원을 찾아 강의 흐름이나 뱃길의 진로 같은 것들을 물었다. 도착 전에 배에서 내릴 곳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배가 뭍에 닿지 못해도 적당한 거리라면 상관없었다.

“강 건너로 배를 댈 수는 없나?”

“여기선 안 됩니다. 이게 하나의 물길처럼 보여도 근방의 강들이 많아 물길이 합쳐지는 곳이 많습니다. 마치 바다처럼 흐름이 제각각이라 재수 없으면 바로 곁에 있는 배라 해도 엉뚱한 곳으로 흘러갈 때도 많습니다요. 저희들이야 이곳 토박이라 그럴 리는 없지만요.”

“그럼 상계 도착 전에 가장 가까운 뭍 가장자리를 알려주게.”

“네, 그렇지 않아도 좀 더 가면 괜찮은 곳이 나올 겁니다요.”

넉넉한 보수를 받은지라 선원들도 크게 따지는 것이 없었다.

잔잔히 흐르는 물길을 보며 패천검은 기감을 넓혀 물 아래를 살폈다. 수공(水攻)은 어렵고 까다롭다. 공격은 물 아래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 아래로 오지 않는다고 해서 배에 있을 때 안전하다는 얘긴 아니다.

지금처럼.

상계에 다다르기 전까진 공격이 없을 거라 예상했는데, 틀린 모양이었다. 패천검이 혀를 찼다. 저편에서 상선으로 보이는 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상선은 아니었다. 상회의 표식이 없는 상선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사정거리는 아니었지만 패천검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이쪽을 향해 활을 메기고 있는 상선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지.

타고 있는 배의 난간에 깊숙이 기대니 팔이 물에 닿았다. 패천검이 눈으로 저편의 배를 욕하며 물 안으로 손을 쑥 넣었다. 소매가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석청담의 제자들이 패천검의 기행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인가 싶어 패천검과 먼 거리의 상선을 번갈아 보던 이들이 벌떡 일어났다. 상선인 줄 알았던 배가 활을 쏜 것이다.

화살이 쏘아지는 것과 동시에 물기둥이 치솟았다. 마치 물로 만든 벽처럼 강물이 움직여 화살의 진로를 막았다.

곽나난이 혀를 차고, 석청담 제자들의 입과 눈이 밥사발만 한 크기로 벌어졌다. 상선 하나를 막을 만한 물을 움직이는 내공의 크기도 크기거니와 그들이 보기에 가능해 보이는 내공 운용이 아니었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현서가 보았다면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보였을 터였다. 범위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내공으로 움직인 물로 벽을 만드는 일은 현서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순식간에 일변했다. 술렁거리는 소리에 이사와 현서가 눈을 떴다. 패천검은 바로 일어나지 못해 이사의 부축을 받는 현서를 보았다. 현서의 안위를 확인하곤 다시 선원에게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 저 배가 이대로 노를 저어 오면 얼마 만에 이쪽에 도착하겠는가?”

“저 정도 크기의 배라면 일 각(15분) 정도는 걸릴 터인데.”

저 배가 지금 우릴 공격한 겁니까? 선원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좋지 않은 상황인 건 알았다. 어리둥절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패천검이 아무렇지 않게 내공으로 물을 움직여 화살을 막은 바람에 술렁거렸다. 저기서 새로 활을 쏘기보다는 더 가까이 오려고 움직이는 게 명백해 보였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는 중이지. 우리가 내린다면 이 배를 공격할 일은 없을 걸세. 지금 여기서 뭍 가까이로 댈 수 있겠나?”

새파랗게 질렸지만, 타고 있는 이들을 강제로 내리게 할 능력은 없는 선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받지 않게 내려준다면 정말 감사할 일이었다. 물길이 까다로워 작은 배가 서두르니 쉽게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더욱이 패천검이 적들의 배를 바라보며 견제하고 있으니 활을 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느새 눈을 뜬 현서와 이사가 바짝 긴장한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석청담의 일행들이 타고 있는 배는 무사하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노리는 이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지만, 현서는 무작위로 공격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안도하기로 했다.

“다 와갑니다.”

“이런.”

상대 쪽 배가 보기에도 뭍으로 도망가겠다는 패천검의 의도가 뻔해 보인 듯했다. 뭍으로 올라가면 쫓기 힘들어지니 나무로 된 평범한 화살 대신 철시(鐵矢)가 날아와 꽂혔다. 패천검이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이사가 쇠로 된 화살을 그대로 맞을 뻔했다.

“일영.”

“네.”

패천검이 부르자 수하가 이사를 안아 올렸다. 패천검 자신은 한 손으로 현서를 안으며 화정을 향해 다른 손을 뻗었다.

“화 누이.”

“여기.”

화정이 탱자만 한 크기의 환약을 패천검에게 던졌다. 패천검은 그 환약을 잡지 않고 허공에서 손가락을 튕겨 날렸다. 거세게 날아간 환약은 적들이 타고 있는 배 위에서 팍 하고 터졌고, 곧이어 배에서 비명이 들렸다.

“맘 같아선 살과 뼈를 녹이는 화골산(化骨散)이라도 주고 싶지만.”

“바람의 방향이 변할 수 있으니 안 됩니다.”

“그래서 시간 벌기용만 줬잖아.”

화정이 준 약은 흡입하거나 몸에 닿으면 잠시간 통증을 주며 신경을 혼란시키는 약이었다. 의당의 제자들이 갖고 다니는 호신용 환약 중 하나였다. 의당의 규율상 지금 살상 목적의 약은 쓸 수가 없어 시간 벌기용밖에 되지 않았다. 그사이 선원들이 부지런히 배를 몰아 물가에 가까워졌다.

“이 이상은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최대한 가까이 갔지만 모래톱이 있어 더는 갈 수 없었다. 선원들은 안절부절못했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문제없었다.

“숨을 크게 쉬세요.”

이사를 안은 수하와 나머지 수하들이 물에 들어가 헤엄을 쳤다. 화정이 유위람을 보고 말했다.

“저거 하나, 아니, 두 개 뽑아줘.”

유위람이 배에 꽂힌 철시를 두 개 뽑아 화정에게 건넸다. 현서는 화정이 그것으로 무엇 할지 몰라 빤히 보았다.

화정이 철시 하나를 던지는 것과 동시에 배에서 휙 뛰어 철시가 물에 가라앉기 전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다시 하나를 더 던져 또 디뎠다. 철시를 징검다리로 쓴 것이다. 화정의 경공으론 모래톱에 가지 못해 무르팍까지 빠졌지만, 그래도 무사히 도착했다.

훌륭한 사용법에 현서가 감탄하자 유위람이 말했다.

“저는 하나면 됩니다. 꽉 잡으십시오.”

유위람은 철시 하나만을 멀리 던져 한 번의 도움닫기로 깔끔하게 뭍에 도착했다.

“우, 재수 없어.”

화정이 투덜거리면서도 서둘렀다. 현서가 뒤를 보니 현서가 탔던 배와 석청담의 사람들이 타고 있는 배는 물살을 타고 이미 떨어진 뒤였다. 그리고 화정의 약에서 벗어난 적들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오는 것이 보였다.

패천검 일행이 뭍에 먼저 도착한 이상 저들이 아무리 애를 써보았자 이미 늦은 일이다.

기를 쓰고 쫓아오는 적들을 따돌리고 패천검은 무사히 안가(安家)에 도착했다.

안가라고 해서 어디 외진 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패천검이 말한 안가는 양주의 주성(主城)인 하도에 있었다. 더욱이 패천검의 저택은 귀족과 관리들이 살고 있는 거리에 위치했다. 이런 거리의 저택은 비싸기도 하지만, 어지간한 소개가 없으면 돈을 몇 배로 준다고 해도 살수 없었다. 현서가 가족들 몰래 집을 구할 때 하우대를 통한 것도 그래서였다.

이 안가는 검각의 재산이 아닌 패천검 개인의 재산일 것이다. 현서는 그 내력이 살짝 궁금했지만, 생각을 이어나갈 체력이 바닥났다.

“고집은.”

현서가 안가에 도착해서야 기절에 가까운 잠에 빠지자 화정이 혀를 찼다.

잘 교육받은 사용인들이 조용히 저택의 주인을 맞이했다. 안가라고 해서 아예 비워진 집은 아니었다. 저택의 관리를 위해서도 그렇고, 이런 저택에 사람이 없으면 더 눈을 끌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원은 있었다.

“일단 난각이 있는 방으로 가자. 탕파도 준비하고. 뜨거운 물이랑 인삼, 백작약, 반하랑 진피도 준비해 줘. 아. 숯 화로도.”

“호 공자의 상세가 좋지 않아 보입니까?”

자신의 저택이니 유위람이 현서를 안고 성큼 걷기 시작했다. 품 안의 현서가 따끈따끈한 것을 보니 열이 오른 게 분명했다.

“그간 요양을 잘해서 발작을 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아프긴 하겠지. 그러고 보니 이사는? 좀 전에 일호가 데리고 있는 걸 봤는데?”

“젖은 이들은 대욕탕부터 가게 해두었죠.”

난 젖은 것도 안 젖은 것도 아니야. 화정이 투덜거렸다.

어렸을 때의 경험이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개웅산의 산길을 달리고 또 달렸던 열세 살의 화정은 경공의 필요를 크게 깨달았다. 무공을 배울 때 가장 심혈을 기울여 배운 것도 경공이었다.

헤엄을 쳤던 유위람의 수하들보다 싸움에는 능하지 않지만 경공에 더 능한 것도 그 덕이었다. 그래도 유위람 놈은 현서를 안고도 물 한방을 튀지 않았으니 괜히 부아가 났다.

화정에게도 욕탕이 준비되었을 테지만 화정은 다음 대의 의당주다. 현서와의 친분이 아니더라도 환자를 두고 다른 일을 할 리가 없었다.

현서의 부탁으로 이사는 오지 못할 터였고, 몇 안 되는 하인들은 오랜만에 방문한 주인과 일행 때문에 바빴다. 그리고 화정은 원래 패천검을 부리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사람이었다.

침상에 누운 현서의 맥을 짚으며 화정이 말했다.

“와서 현서 옷 좀 벗겨봐.”

“네?”

“침을 등에 놓아야 할 것 같으니, 옷 좀 벗겨보라고.”

화정이 환자를 돌볼 때 보조한 경험이 있는데도 유위람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화정이 빨리 안 하고 뭐 하냐며 재촉했다. 유위람은 누워 있는 현서를 상체만 일으켜 안은 채로 허리의 끈을 풀었다.

두 겹으로 된 요대를 풀어 장포의 윗부분을 벗기자 품에 숨겨두었던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겨울을 대비해 식량 모아두는 다람쥐도 아니고. 여러 개로 나눠 담은 주머니들과 작은 단도까지 나오자 화정과 유위람이 웃어버렸다.

“이사가 걱정이 많았나 보네.”

이사가 아니라 현서가 한 일이었지만 둘은 당연히 몰랐다.

“나 침 소독해야 하니까, 너는 저기 따뜻한 물로 현서 등 좀 닦아놔.”

화정이 침통을 들고 숯 화로로 가버렸다. 침상에는 의식이 없는 현서와 잠시 난감한 기분이 든 유위람만이 남았다. 화정을 도와 여러 번 해봤던 일인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몸이 움직이기 전에 덜컥덜컥 멈췄다.

그렇게 한 박자 늦었지만 유위람은 거침없는 손길로 현서의 장포를 전부 벗긴 뒤 중의는 상체만 벗겼다. 난각에 불을 넣었고 숯 화로도 두었건만 급격한 기온 변화 탓인지 흰 피부 위로 소름이 돋은 것이 보였다.

유위람은 자연스럽게 마주 보는 상태로 현서를 안은 다음 그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영견에 물을 짜 등을 부드럽게 닦았다. 화정을 도왔다는 게 빈말은 아니었던지라 제법 세심하게 현서의 등을 닦아 냈다. 따뜻한 물이지만 그래도 추운지 현서가 부르르 떨며 유위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넌 왜 하필 그렇게 안고 있, 아니, 아니다. 잘됐네. 그냥 그대로 있어.”

침을 다 소독한 화정이 유위람을 보곤 혀를 찼다.

화정이 능숙하게 장침을 이용해 현서의 등에 침을 놓았다. 열일곱 개가 되는 침을 다 놓자 현서의 숨이 한결 편하게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현서의 맥을 짚은 화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켰다.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시진 후에 뽑으면 되는데 이건 네가 뽑아도 되거든. 침은 뽑아서 두고, 인삼, 백작약, 반하랑 진피 달인 물을, 아니다 이건 내가 해야겠네. 약 달여 보낼 테니까 저기 주머니에 있는 환 하나랑 같이 먹여. 안 일어나면 굳이 깨울 필욘 없어. 나도 씻고 잘 거니까 내버려 두고.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현서 상태가 변하면 불러.”

화정이 손을 팔랑 흔들고는 사라졌다. 싸움에서 가장 공이 컸지만, 동시에 이 정도로는 피곤해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인 유위람만 방에 남았다. 석양이 지고 있어 등을 켜두었지만, 환자가 있는 방이라 어둑어둑했다.

유위람은 현서를 품에 안은 채 상념에 잠겼다.

‘안가에 도착하면 이사를 따로 쉬게 해주세요. 이사에게 너무 긴 밤이었어요.’

현서가 유위람에게 했던 부탁이었다.

분명 몸이 약한 현서나 건강해도 무림인이 아닌 이사에게 험한 밤이긴 했다. 이사는 사용인이긴 해도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다고 들었다. 측근 하인을 가족처럼 대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허나 현서의 말은 꼭 이사만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처럼 들려서 이상했다.

화정이 단언하길 황궁의 황자도 그만큼 귀히 자라지 못할 거라고 했다. 당금 황제가 다시없을 폭군이라 황궁을 피바다로 만들고 다닌다는 말은 없으니 호현서 역시 이런 시산혈해(屍山血海)는 처음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서의 반응은 귀하게 자란 도련님 같지 않았다. 화탄이 터진 후 얼굴이 안 좋긴 했으나 그건 시체 때문이라기보다는 참담한 죽음의 방식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아 보였다.

‘그저 담이 큰 도련님인가 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닐 것 같단 말이지.’

유위람은 고개를 돌려 현서의 왼손에 걸려 있는 채옥팔찌를 보았다. 팔찌는 어스름한 등불 아래서도 흔들림 없는 단정한 빛을 자랑했다.

검선이 패용했던 물건이다. 유위람은 백팔 번 죽었다 깨어나도 저 팔찌가 현서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터였다. 대신 그 반대로 검선의 팔찌니 그야말로 신물(神物)이라 현서에게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가능했다.

맞는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닌 답안이었다.

유위람이 느끼기에 방 안은 심하게 따뜻했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그런지 현서는 유위람의 품에 다시금 파고들었다. 상의를 벗고 있어 더욱 그런 듯했다. 등에 꽂혀 있는 침에 영향이 가지 않게 유위람은 조심스럽게 현서를 추슬러 안았다.

추워하는 현서의 모습에 유위람이 호의 반, 꿍꿍이 반을 담아 오른 손목을 잡았다. 본인의 내공을 이용해 체온을 높이면서, 동시에 현서의 내력을 살피려는 행동이었다.

무림인끼리는 가족이나 연인이라 해도 함부로 해서 안 되는 매우 민감한 행위다. 그러니까 지금 유위람은, 현서가 내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무척이나 실례가 되는 짓을 하는 중이었다.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뽑은 유위람의 내력이 현서의 손목을 타고 들어가 몸 안의 경혈을 따라 흘렀다. 혹여 현서가 탈이 날까 유위람은 매우 주의를 기울였다. 십이경맥(十二經脈)과 기경팔맥(奇經八脈), 하중상의 모든 단전을 훑었지만 내공을 익힌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저 현서의 몸을 따뜻하게 만든 것으로 끝이 났다.

“미안합니다.”

유위람이 손목에서 손을 때며 작게 사과했다. 그가 현서를 의심했다는 걸 깨달은 옥이 혀를 찼지만 그 귀에 들릴 리 없었다.

내공을 살피느라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반시진이 지나자 하인이 화정이 시킨 대로 약을 달여 가져왔다.

“거기 두고 나가.”

“네.”

유위람은 현서를 품에 안은 채로 등에서 침을 하나씩 빼는 중이었다. 휘장이 반만 걸린 어둑한 침상에서 주인의 품에 안겨 있는 백옥처럼 하얀 등이 요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교육을 잘 받은 하인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물러났다.

침을 전부 뺀 유위람은 현서의 옷을 입힌 다음 사람을 들였어야 했다고 반성하며 중의를 입혔다.

안가에 도착한 이후로 현서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미동도 없는 것이 잠보다는 기절의 지분이 높아 보였다. 화정이 깨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고, 유위람도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약을 먹이는 몇 가지 방법을 알아 굳이 깨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약 그릇의 수저로 대강 입을 벌리곤 기도가 막히지 않을 선에서 약을 들이붓는 방식을 취했을 유위람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괜한 사람을 의심했다는 미안함도 있어, 왼팔로 현서를 안고는 오른손 검지로 입술을 눌렀다. 말라서 거슬거슬할 거라고 예상했던 입술이 유위람의 손가락 아래서 보드랍게 눌리며 벌어졌다. 그 부드러운 간지러움에 유위람이 일순 움찔할 정도였다.

열이 떨어지지 않아 뜨겁게 느껴지는 혀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눌러 입을 더 벌렸다. 현서가 숨을 내쉴 때마다 습하고 오싹한 공기가 유위람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약을 먹이는 것뿐이야.’

현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방엔 유위람 자신뿐이었지만 어쩐지 변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라 이상했다.

긴 하루가 완전히 저물었다.

❖ ❖ ❖

도련님이 자신을 재우려고 수를 썼다는 사실에 이사는 단단히 뿔이 났다. 폭풍 같은 잔소리를 마음먹었건만,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거리는 현서를 보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끔 눈을 뜨긴 했어도,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서는 꼬박 이틀을 앓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몸에 납이 달라붙은 것처럼 무겁고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이렇게 아픈 것도 오랜만이라 생각하며 현서는 눈을 떴다. 눈을 뜨니 침상 곁의 의자에 앉아 있던 이사가 먼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현서가 배시시 웃었다.

도련님이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웃는다는 걸 모를 이사가 아니었다.

“그렇게 웃으셔도 안 넘어가요.”

이사는 능숙하게 현서를 일으켜 앉히곤 준비해 둔 약차를 한 숟갈씩 떠 입에 넣어주었다. 바짝 마른 목은 약차를 세 잔이나 들이붓고 나서야 좀 나아졌다.

“이, 큼, 큼. 미안해.”

이사의 신경이 한계에 달해 있던 걸 알아 현서는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테지만 독단이었으니 잘못한 것은 맞다.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소인은 도련님의 측근 시종이라고요.”

“응. 잘못했어.”

현서가 자신을 걱정해 그랬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사도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프고 났더니 현서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이사의 우선순위가 정해졌다.

“도련님 덕분에 잘 자고 일어나서 밥도 잘 먹었답니다. 여기 밥이 맛있더라고요.”

“그래?”

“춥진 않으세요? 오한이 들거나 그렇진 않으세요?”

“응. 그냥 좀, 큼, 흠.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데. 큼, 안 추워.”

현서가 말하기를 힘들어하자 이사가 끓인 백탕에 꿀을 넣었다. 쌉싸래하고 진한 꿀맛이 입에 가득 찼다. 익숙한 맛에 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청(石淸)이야?”

“네, 자주 드시던 말라산 석청이에요. 검각은 많이 부유한가 봐요.”

깊은 산 절벽에서 채취되는 꿀인 석청은 원래 귀하기도 했지만, 말라산 석청은 일반 석청 가격의 다섯 배를 넘는다.

이사의 말처럼 검각은 대문파이니 부유하긴 하겠지만, 장원을 포함해 이것들은 순전히 패천검 개인의 재산일 것이다. 현서는 안가에 막 도착했을 때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이 저택의 위치도 그렇고, 아마 패천검의 집안이 제법 이름 있는 곳이 아닌가 싶었다. 자문원의 기억을 뒤져 봐도 패천검의 가문 얘기는 없었다. 그에 현서는 무림 세가가 아닌 왕공 귀족 집안이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했다.

“아직 목욕은 안 되겠지?”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땀을 많이 흘리셔서 몸을 몇 번 닦고 옷도 갈아입혀 드렸는데. 그래도 많이 찝찝하세요?”

만희당에서 지낼 때 현서는 목욕을 자주 했다. 혈액 순환이나 재활에도 좋아 자주 했던 것이 현서의 취향에도 꼭 맞았다. 그래서 방에 탕조(湯槽)를 들이기도 했지만, 만희당엔 욕탕이 있는 전각이 따로 있었다. 최근에는 몸이 제법 좋아져서 땀을 흘리면 바로 욕탕에서 씻는 버릇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혔다고?”

이사의 말 중 묘하게 걸리는 것이 있었다. 도망치는 중이었으니 따로 챙겨 온 옷이 없었다. 게다가 몸에 닿는 천이 거슬리지도 않았다. 고개를 숙이니 확실히 품이 큰 옷이 보였다. 중의라 옷이 커도 돌려 묶으면 되는지라 바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이거 패천검의……?”

“네, 그렇죠.”

이사가 매우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여긴 패천검의 저택이고, 다른 가족분들은 계시지 않으니까요. 여쭤보니 패천검의 의복은 늘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얻었지요.”

놀란 현서를 보고 오해한 이사가 덧붙였다.

“새 옷이랬어요.”

“어.”

―이사, 쟤가 인물은 인물이다.

옥이 평했다.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그렇게 움직이세요. 이사가 야단쳤다. 현서는 이불을 둘둘 말고 얌전히 있었다.

깨어난 후 일주일간, 현서는 잘 먹고 잘 지냈다.

아프긴 했지만, 약한 몸이 놀란 것뿐이라 보양과 휴식이면 충분했다. 화정이 곁에 있는 것도 빠른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현서가 깨어난 그날은 현진이 송가장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혼례일로부터 열흘도 지나지 않은 셈이다. 현서의 서찰을 보고 놀랄 현진이 걱정이 되었으나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패천검의 옷을 입고 지내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현서가 입고 온 옷들은 이미 세탁을 마쳤지만, 언제 안가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쭉 패천검의 옷을 입고 지낸 탓이다. 옷은 컸지만 격식을 차리는 자리도 아니었고, 적당히 수선했더니 질질 끌려 밟고 넘어지는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수선하기 전엔 밟고 넘어질 뻔했다는 얘기다. 다행히 길이만 고치면 되어 두 번 넘어질 일은 없었다.

‘소의선께서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다른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했는데, 패천검도 모를 정도라니 좀 안심이 된다.’

근육통이 덜해지자 현서는 뜰 계단에 앉아 볕을 쬐면서 옥이랑 대화를 나누었다. 옥은 현서가 기절한 동안 패천검이 현서의 내력을 살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걸 들킬 거란 걱정은 안 했지만, 이렇게 확인을 받으니 안심이 되었다.

자문원의 무공은 특이한 축에 속했고, 친한 사이에도 내력을 살피는 것은 매우 큰 무례라 자문원과 가깝던 이들도 그의 단전에 내공이 없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제자를 들인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제자로 들일 아이는 언젠가 현서와 달리 자문원이 썼던 검술을 쓸 테니 알아보는 이들이 생길 테지. 그때의 대책도 준비해 두긴 했다. 만희당에서 현서가 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활동은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조심은 해야겠다. 너를 들키면 어찌해.’

―어찌 되긴, 어디의 황제도 부럽지 않게 섬김받겠지.

옥의 너스레에 현서가 소리 내 웃어버렸다. 마침 뜰에 들어오던 유위람이 그 모습을 보았다.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봅니다.”

상냥한 말이었지만, 혼자 웃는 사람으로 보였을 게 분명해 현서는 민망함에 볼만 긁적였다. 현서가 어색해 하자 유위람은 더 캐어묻지 않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화운검에게서 서신이 왔습니다.”

하도와 철서성의 거리는 하루, 이틀 정도다. 하지만 숨어 있는 입장이라 쉬이 연락할 수가 없었다. 분명 현진을 감시하는 눈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빨리 서신을 받아 올 줄 몰랐다.

놀란 현서는 감사를 표하곤 얼른 서신을 뜯어보았다. 현서에 대한 걱정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얘기해야 하는지 현진도 알고 있었다.

서신을 다 읽은 현서는 패천검을 올려다보았다. 서신만 전해주고 가지 않은 걸 보니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서신을 읽어보니 무슨 얘길 할지 알 것 같았다.

“소문이 예상과 다르게 퍼지고 있는 거지요?”

현서의 질문에 패천검이 애매하게 웃더니 말했다.

“그렇습니다.”

안가에 도착한 이후 앓아누운 현서와 달리 패천검은 수하들을 불러 밖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보물에 대한 얘기가 위험하게 퍼졌을 것 같았는데, 방향이 짐작과 달랐다. 유위람이 냉큼 현서의 곁에 앉더니 자신이 수집한 소문에 관한 얘기를 시작했다.

철서성에 있던 패천검의 장원이 습격받은 얘긴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보물이 나왔다는 소문은 퍼졌다. 패천검이 지니고 있는 보물 때문에 쌍주야차나 적사검(赤蛇劍), 차봉도(車鳳刀) 등을 비롯한 제법 이름이 나 있는 이들이 패천검에게 덤벼들었다가 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현진이 기함을 하며 서신에 적기를 보물과 관련된 소문에 호현서의 이름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물의 정체는 제멋대로였다. 전조의 옥새라는 얘기엔 현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 어디에도 월영사에 관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떠올려보니 그들을 쫓아왔던 이들도 보물을 내어놓으라고만 했지 월영사를 입에 올린 사람은 없었다.

“왜 소문에 월영사 얘기가 없을까요.”

유위람에게 물었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현서가 계단을 톡톡 두드렸다.

현진과 패천검은 현서가 보물에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을 숨기지 않았다. 소문 중엔 호현서의 보물을 패천검이 뺐었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보물인 현서를 패천검이 억류했다는 소문엔 침묵했다.

잠시 후, 현서가 말했다.

“화오궁에 동맹이 있는 모양이네요. 장원에 하급 무사를 보낸 건 저희를 염두에 둔 게 아닌 것 같아요. 아마 동맹과 관련된 일일 테지요. 무언가의 약속이나 확인이 아닐까 싶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소문은 빨리 퍼지고 있는데, 보물의 정체는 중구난방이어서요. 월영사를 모른다고 해도 궤짝에 들어 있던 물건의 모양을 얘기하는 소문도 없네요. 게다가 패천검과 서녕호가를 언급했음에도 화오궁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패천검과 제 이름이 들어갔으니 그 보물이 무엇이든 간에 귀중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분명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을 테지요. 하지만 화오궁이 한 발 걸쳐 있다는 소문이 나면 보물을 노리는 자들 중 몇 할은 걸러질 텐데 전혀 그러지 않았어요. 그저 패천검과 저만이 소란의 한가운데 떨어졌을 뿐이에요. 화오궁이 이름을 숨기는 것이 이상해요.”

“호 공자는 무림의 일을 잘 알고 있군요.”

패천검의 감탄에 현서가 눈을 도르르 굴리며 볼을 문질렀다.

“그런 건 아니고 들은 얘기가 많아서요. 늘 호부 내에서만 지내니 제가 답답할까 봐 가족들은 물론이고 상행을 다녀오는 행수들까지 만희당에 얘길 해주러 오시거든요. 상인의 눈은 천하에 퍼져 있다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들은 걸로 제가 너무 아는 척을 했지요?”

현서의 행동은 무언가 숨기고 있어 켕겨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패천검이 자신을 의심했다고, 옥에게 미리 언질을 들어놓길 잘했다. 한 번은 이런 얘기가 나올 수 있다고 여겨 현서는 모르는 척 호가를 언급했다. 호가의 사람들이 현서에게 많은 얘길 해준 것은 사실이었으니 완전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현서의 변명이 먹혔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유위람이 한층 온화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호 공자를 아끼는 호부 사람들의 마음도 그렇거니와 이런 얘길 하는 것은 호 공자가 영명하여 그런 것인데, 아는 척이라니요.”

“영…….”

아니, 영명하다니. 남사스러운 과한 칭찬에 되레 현서의 얼굴이 빨개졌다.

❖ ❖ ❖

“그게 그렇게 부끄럽나?”

“예? 하문하셨습니까?”

“아니. 혼잣말이다.”

신경 쓰지 말라며 유위람이 손을 휘휘 저었다.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성정이라 수하는 별다른 말없이 물러났다.

유위람은 두 통의 서신을 쥐고 있었다. 막 도착한 것으로 모두 서녕호가에서 보낸 서신이었다. 하나는 현서에게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패천검 유위람 친전이라 적혀 있었다.

화운검의 서신을 현서에게 전해준 것이 어제였다. 그랬는데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이 안가로 서녕호가에서 보낸 서신이 도착했다.

서신을 전해준 것은 같은 골목을 마주 보고 있는 참정(參政) 집안의 가복(家僕)이었다. 복주에 사는 참정의 친척이 보내준 해산물을 맛보라고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서신은 복주산 복어(鰒魚: 전복) 상자 아래 있었다.

관리의 집이 줄지어 있는 거리라 각 집안의 행사니 모임이니 하는 일들이 늘 많았다. 서로 초대하고 초대받는 사이라 초대장이나 선물을 들고 가복들이 바삐 오간다.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는 방식임은 틀림없었다.

“대단하군.”

유위람이 들고 있는 서신의 아래에는 좌서가 보낸 보고서가 있었다. 안가에 도착하고 닷새 뒤에 받은 이 보고서에는 유위람이 명한대로 서녕호가와 호현서에 관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좌서는 호부의 가족 구성부터 현서가 호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같은 것들을 적어 보냈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얘기도 있고, 현서가 왜 독을 먹었는지, 어떻게 대응했는지 같은 호가가 숨긴 것까지 전부 적혀 있었다.

다만 팔찌에 관해서는 현서의 말과 다르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으로, 그 이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행적이 매우 한정적이라 현서 본인에 대한 것은 호불호에 관한 걸 제외하곤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화정의 얘기로도 그랬고 보고서를 보아도 현서가 얼마나 애지중지 아낌받으며 자랐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니, 보고서가 없었어도 이 두 통의 서신이 호가가 현서를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서녕은 안가가 있는 하도에서 배로 보름 이상 걸리는 곳에 있다. 현서가 철서의 장원을 떠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화오궁도 찾지 못한 이 안가로 서신을 보낸 것이다.

호가는 온건하지만 확실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저력을 쏟아부을 만큼 현서를 지극히 아낀다는 것을 두 통의 서신으로 인식시켰다.

보고서에는 현서가 호가에서 깃털, 유리, 솜인형으로 분류된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아주 귀한 깃털, 유리, 솜인형인 셈이다.

“그런데도 영명하다는 말이 그렇게 부끄럽나?”

유위람이 재차 중얼거렸다.

영명하다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누가 현서에게 무림의 지식을 알려주었나 하는 의심과 별개로 상황을 짚어 낸 것은 현서의 능력이었다.

자신의 칭찬에 얼굴을 붉히곤 꼼지락거리는 게 좀 귀엽긴 했지만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영명하다는 칭찬을 숨 쉬듯이 들었던 유위람은 저렇게 부끄러워할 일인가 싶었다.

유위람은 자신이 똑똑하고 뛰어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던지라 칭찬이라기보다는 사실 적시라고 보았다. 화정이 괜히 성격 괴상하다고 혀를 차는 것이 아니었다.

“화 누이가 다정하다고 하더니 겸손하기도 한 모양이군.”

현서 외의 사람에게 영민하다는 칭찬을 해본 적 없었던 유위람의 착각이었다.

이 서신을 가져다주면 호 공자는 놀랄 것이다. 눈을 댕그랗게 뜬 모습이 저절로 그러졌다. 유위람은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서를 만나러 갈 참이었다.

과연 호부에서 보냈다는 서신에 현서가 놀랐다. 놀란 모습이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 유위람이 기분 좋게 웃었다.

자신에게 보낸 편지는 이미 뜯어보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급히 서신을 뜯어 읽는 현서의 표정은 화운검이 보낸 서신을 볼 때보다 더 다채롭게 변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윽고 현서가 한숨을 내쉬며 다 읽은 서신을 내려놓았다.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쳤네요.”

“답장을 쓰는 게 어떻겠습니까? 호 공자가 서신을 보내면 어른들께서도 안심을 하시겠지요.”

현서가 답신을 쓴다면 서신이 온 방식 그대로 돌려보내려 했다. 아마 호부에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 하지만 현서는 당장 답신을 쓰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전에 먼저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소의선과 같이 뵐 수 있을까요?”

“화 누이라면 별채에 있을 겁니다. 갈까요.”

현서는 유위람이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잡은 손을 놓기 전에 유위람이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게 현서의 손을 자신의 팔 위에 올렸다. 현서는 이게 맞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유위람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 아무렴 어떤가 하고 같이 걸어갔다.

❖ ❖ ❖

하늘이 순식간에 흐려지더니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금세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빗줄기가 굵어지기 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객잔에 들어왔다. 봄비는 변덕스러워 길 생활을 오래 한 이들도 대비하기 어려워 비를 맞기 일쑤였다. 그래도 이들은 운이 좋았다.

이들은 담주와 난주를 오가는 행상이었다. 이곳은 담주와 난주의 경계에 있는 마석현이다. 마석현 입구에 있는 이 객잔은 허름하지만 밥이 싸고 맛있어서 행상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비슷한 지역을 돌아다니니 얼굴이 익은 이들이 태반이었다. 소중한 짐이 비를 맞지 않은 것을 확인한 다음 상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인사를 나누었다.

“망할 놈의 비. 시원하게도 내리네.”

“데운 황주부터 좀 줘요. 으슬으슬하네.”

이곳은 그날그날 바뀌는 음식들을 사람 수에 맞추어 주기 때문에 술 말고는 따로 주문할 것도 없었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데운 술병이 한 바퀴를 돌자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요즘 괜찮지?”

“잘 팔리지. 하지만 흉흉한 놈들이 지나가면 깜짝깜짝 놀랜다니까.”

“말도 말게. 저번에 허가는 놀라 지렸다지 뭔가.”

“관도로 다녀. 급하게 가겠다고 산길 타는 거 아녀.”

“목 달려 있어야 돈도 만지니 큰 욕심은 내지 말고.”

“네놈이나 잘하셔.”

요즘 난주와 담주 일대를 다니는 상인들의 가장 큰 화두는 오월에 열린다는 비무회였다.

영우곽가가 주최하는 이 친선 비무회는 원한다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대신 인원수에 제한을 둬 참가를 원하면 서둘러야 했다. 그 바람에 최근 영우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상인들은 때 아닌 성수기를 맞이했다.

무공을 배웠다고 하는 강호인의 태반은 누군가와 끊임없이 싸워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족속들이었다. 친선 비무회가 종종 열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규모가 큰 행사는 오랜만이었다. 영우곽가의 젊은 가주와 친분이 있는 검각과 태호문, 청사파도 비무회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오랜만의 큰 행사에 강호가 술렁였다. 영우는 용담호혈(龍潭虎穴)이 되겠지만 그만큼 어중이떠중이가 난동을 부릴 수 없기도 했다. 그러니 구경을 원하는 이들도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 호재를 놓치지 않는 부지런한 상인들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누구의 무공이 어떤지, 누가 더 강한지 이런 게 무슨 상관있겠어.”

“그렇지. 서녕호가라면 관심 있지만.”

“호가가 새로 표국을 내려고 비무회를 열었다는 게 사실일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서녕호가에 눈도장 찍어 나쁠 게 뭐가 있겠나.”

“맞아. 벌써부터 우승자가 받는 보물 얘기에 귀가 아플 지경일세. 서녕호가에서 비무회 우승자에게 용혈(龍血)을 준다며.”

“용의 피라고? 그런 게 진짜 있는 거야?”

“우리한테야 비린내 나는 물이지만, 강호인에겐 한 방울당 수레 하나만큼의 금과 바꿀 정도의 귀한 약이라고 하지 뭔가.”

“뭐? 한 방울에 한 수레의 금이라고? 그걸 그냥 준단 말이야? 서녕호가의 배포가 대단하군.”

강호인들은 용혈 얘기로 칠일 밤낮을 지새울 수도 있지만, 보부상들에겐 구미가 당기는 물건이 아니었다. 용혈을 금으로 바꿔준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호현서와 유위람이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났으니 보물을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강호 사람들이 크게 혹할 만한 것들을 추려보던 현서는 자신의 고방에 용혈이 있다는 걸 기억해 그것을 우승 상품으로 삼았다.

호부는 현서를 위해 몸에 좋다고 하는 온갖 비약들을 사들였다. 하지만 그중에 현서의 입에 들어간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현서의 체질이나 상태에 맞지 않거나 내공을 가지고 있는 무림인을 위한 약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용혈도 그중 하나였다. 어렵사리 구한 것은 맞는데 현서에겐 맹물보다 못했다. 내력을 가지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용혈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작은 수정병에 들어 있다. 빛 아래 두면 옅은 보라색과 쪽색으로 빛무리가 퍼져 무척이나 예뻤다. 방에서 못 나가는 날에는 창문을 열고 용혈이 든 수정병을 갖고 놀곤 했다.

어쨌든 강호를 술렁이게 할 보물은 맞았다. 효과가 좋은 영약은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용혈은 제대로 음용하기만 하면 큰 효과를 보았다.

음용자의 상태에 따라 용혈의 효력은 다양했는데 내력이 크게 늘어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효과였다. 몇몇 크게 운이 좋은 사람들은 몸의 탁기가 씻겨 머리가 검어지거나 이빨이 다시 나는 등 젊음을 되찾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내공이 아예 없는 사람에겐 그냥 비린내 나는 물일 뿐이다. 운이 나쁘면 배탈이 날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어중간한 내공을 가진 자가 먹으면 독을 삼킨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부작용이 사람들의 탐욕을 줄이지는 않았다. 내공이 모자라서 당장 마시지 못한다면 어떤가. 무공의 성취 단계를 올려주는 보물을 마다할 무림인이 몇이나 있을까.

패천검 유위람이 호가를 대신해 가지고 있다는 용혈은 영우로 향하는 무인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그런 말들을 떠들어대는 상인들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은 시끄러운 대화를 배경 삼아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맛있다.”

적당히 식은 닭곰탕을 마신 현서가 만족스러운 감탄을 뱉었다. 진한데도 비리지 않고 생강 향이 은근히 나는 것이 정말 맛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맛있어 하는 몸짓이 느껴졌다. 유위람은 그런 현서를 보며 자신도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삼태현 얘긴 들었어?”

“아니. 무슨 일 있어?”

비무회 얘기가 끝이 나자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보부상들이 잘 아는 지역의 정보를 주고받았다.

“혹시라도 그쪽에 갈 일이 있거나. 가려는 놈들 보면 말려. 한동안 가지 말라고.”

“왜?”

“그쪽은 지금 줄초상이 나서 난리래. 동네 분위기가 흉흉하다더라. 우리 같은 외지인이 그럴 때 갔다간 좋은 꼴 못 보니까, 알고 있으라고 말해 두는 거야.”

“말하는 것 보니 역병은 아닌 거 같고 그 작은 동네에 줄초상이 날 게 뭐 있어?”

“애들이 실종되었대.”

“인신매매?”

아이들을 잡아 파는 일은 종종 일어나는 비극이었다. 도적떼가 지나가면 마을 하나가 통째로 노비로 팔려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난주와 담주 일대에 큰 도적이나 흑도 무리가 설친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도적과 전염병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 것이 보부상인 자신들이었으니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낚시하러 간다던 아이 셋이 전부 사라졌대. 그중에 문씨 성을 가진 집이 있는데 아이가 없어지자 팔려갔다고 생각해 집을 팔아서라도 노비 문서를 되사 오겠다고 난리를 쳤다지 뭐야. 그리곤 어찌 되었다는 줄 아나?”

“어찌 되었기에?”

상인은 들은 얘기를 옮길 뿐인데도 온몸을 떨었다.

“그 집안 식솔들이 전부 목이 잘려 죽었대.”

일순간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질린 표정의 보부상들은 이미 식어버린 황주를 벌컥 들이켰다.

“그, 그래서? 범인은 잡았고?”

“범인을 잡았으면 내가 이런 말 했겠어? 세 집의 아이가 없어졌는데 그중에 아이를 찾겠다고 하던 두 집안이 전부 몰살당했고, 발만 동동거리던 집은 살긴 했지만 그 집안사람들은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라고 하더라.”

“누구한테 들은 거야?”

“누구긴, 삼태현에서 도망치듯 나오던 장씨한테서 들었지.”

“맞아, 장씨가 삼태현에 주로 갔었지. 그럼 장씨는 지금 어디로 갔어?”

“넋이 나간 채로 도망가던걸. 집에 갔을 수도 있고. 어쨌든 그리로 가지 마. 분명 동네 분위기가 흉흉할 테니 혹시라도 범인으로 몰리면 맞아 죽어.”

남자의 말이 끝나자 무거운 한숨이 자리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인신매매일 리는 없고, 그 어린 애들로 인신 공양 같은 거 하는 건 아니야? 백양교 같은 거 말이야.”

연거푸 술을 마신 상인 한 명이 벌게진 얼굴로 중얼거리자 주변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색이 달라졌다.

“찌끄래기들은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교주나 높은 놈들이 전부 뒈졌는데 그럴라구.”

천하에 사교가 백양교 하나뿐인 것은 아니지만, 인신 공양 때문에 백양교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은 매우 심했다. 자기들끼리 죽이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한창 기승을 부릴 때는 메뚜기 떼처럼 마을 하나를 다 제물 삼아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보부상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서 백양교가 한창 득세할 때 벌였던 끔찍한 일들을 듣거나 본 자들이었다. 자연히 표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상인들의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식사를 하던 현서의 움직임은 어느새 점점 느려져 결국엔 탕 그릇을 손에 쥐고만 있게 되었다. 먹을 만큼 먹었고, 더욱이 식욕이 날 만한 얘기도 아니니 말이다.

유위람은 현서에게 더 먹을 것을 권하는 대신 잘 먹었던 몇 가지를 포장했다. 그간 현서를 지켜보면서 조금씩 자주 먹게 하는 게 좋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끝내자 두 사람은 객잔의 삼 층으로 올라갔다. 숙박을 위한 방은 낡긴 했지만 기물이 부서져 있거나 더러운 것은 아니라 소문을 들으러 온 김에 하루 묵기로 했다.

낡은 숙소는 침상 두 개 사이에 차탁이 하나 있는 게 전부였다. 차탁 위에는 객잔에서 준비해 놓은 찻주전자와 찻잔이 있었다. 식사를 하러 내려간 사이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없음을 확인한 유위람이 포장해 온 음식을 올려두었다.

현서가 약을 먹는 동안 유위람은 휴대용 지필묵으로 쪽지를 썼다. 비가 그치면 전서구를 통해 보낼 쪽지다.

“내일부터 말을 타야 할 것 같습니다.”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혼자는 못 탑니다.”

“예, 제 기마술로는 걷는 것과 큰 차이 없을 테니 패천검께 신세를 져야 할 듯싶습니다.”

현서가 농담 같은 사실을 말했다.

“허나 제가 건강하지 않다고 해도 말을 오래 타 얻는 건 남들보다 좀 더 긴 근육통뿐이니 제 사정 봐주시지 말고 달려도 무방합니다.”

현서가 확신을 담아 말했지만, 유위람은 개미 눈곱만큼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억울했지만, 유위람을 붙들고 아파도 근육통으로 끝날 테니 믿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둘이 다닌 첫날부터 폐가 튀어나올 것처럼 기침한 사람의 말에 믿음이 가겠냐.

옥이 하는 위로인지 핀잔인지 구분 안 되는 말에 현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에 유위람이 속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최대한 서두르긴 할 테지만,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로 말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패천검이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 모르지만 현서는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고른 숨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현서가 잠든 것이다. 본인의 주장처럼 숨소리가 고른 것을 보니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위람은 차탁 의자에 앉아 잠이 든 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휘장을 치는 형태의 침상이 아니어서 반듯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있는 현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현서와 유위람은 지금 곽나난이 있는 영우곽가로 가는 길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화오궁이 패천검과 현서를 먼저 공격한 것은 자명했다.

패천검은 처음부터 화오궁이든 누구든 자신을 적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뜻이 확고했다. 명백히 적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서는 가능하다면 조용히 넘겨 지나가기를 원했다. 소문이 퍼지는 양상에 그 생각을 접어야 했지만 말이다.

‘이대로라면 검각의 제자나 호가의 상단이 보물을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리는 이들에게 습격당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한 달 전, 호가에서 보내온 서신을 읽은 현서가 유위람과 화정이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화가 난 현서의 표정이 차가웠다. 원치 않은 물건을 던져 주곤 그 보물의 주인이라고 소문을 내 사람을 사냥감으로 만들었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몸을 낮춰 피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현서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서녕호가의 비호를 받는 현서와 패천검을 비롯한 이들이 한 배를 타기로 한 것이다.

소문 속의 보물 종류가 제멋대로인 게 오히려 호재가 되었다. 소문을 부추기는 건 화오궁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말이다. 서녕, 태원, 하도가 마치 이웃한 것처럼 빠르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강호는 새로운 소문으로 들끓어 올랐다. 그것이 서녕호가와 영우곽가가 주최하는 친선 비무회였다.

패천검이 가지고 있다는 비밀스럽고도 정체 모를 대단한 보물은 용혈이 되었다. 호현서는 패천검에게 억류되어 보물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용혈을 패천검에게 맡긴 사람으로 바뀌었다. 패천검과 서녕호가가 숨기려는 은밀하고 대단한 보물은 없어지고, 서녕호가와 영우곽가가 주최하는 친선 비무 대회의 상품만이 남았다.

이렇게 되면 패천검이나 현서를 습격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된다. 비밀스럽게 숨겨 독식하려는 보물은 빼앗을 수 있지만 만천하에 공개된 보물을 빼앗는 것은 명분부터 지는 싸움이었다.

더욱이 비무회의 우승 상품이다. 우승자는 영예와 보물 둘 다를 챙기게 된다. 영약과 위명, 강호인이 좋아하는 두 가지가 다 있으니 강호가 들썩거리는 것이 당연했다.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화오궁에서 이제 와서 월영사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보물이라는 얘기를 흘려봤자 먹힐 리가 없었다.

뚜렷한 효과와 희소성이 막대하다는 점에서 용혈은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현서를 제외한 모두가 남아 있는 용혈이 있다는 사실에 놀랄 정도였으니 말이다.

화오궁에 대한 서녕호가의 노여움은 대단했다. 귀한 아들의 목숨을 노리는 무리가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분노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현서가 받은 궤짝을 추적하던 호가는 곽완비의 납치 사건에 화오궁의 사람이 발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곽가는 말할 것도 없고, 대부인 유위람을 비롯해 화정과 소화리, 감윤 모두가 대노했다.

곽나난과 다른 이들도 추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오궁도 바보는 아니라 쉽게 꼬리가 밟히지 않았다.

화오궁과 영우곽가는 연결 고리랄 것이 없었다. 납치 당시의 정황을 보아도 지복도 곽나난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부잣집 아이로 보여 유괴한 것이었다. 유괴범들은 완비가 무림세가의 아이임을 알자 겁을 먹어 완비를 물에 던지고 도주했다.

유위람이 잡아 심문했으나 그들은 죽기 직전까지 한결같이 노비 상인의 사주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들이 지목한 노비 상인은 과연 유괴로 노비를 채우고 있었다.

멀끔한 양민의 아이를 유괴해 팔면 돈이 더 되었다. 그 재미를 알아버린 노비 상인은 유위람의 손에 죽었다. 남아 있는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팔려버린 아이들을 추적했다.

그럼에도 무언가 석연치 않아 뒤를 더 캐고 있었는데, 딱히 잡히는 것이 없었다. 과욕에 눈이 먼 상인이 벌인 일로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호가에서 그 노비 상인이 정식으로 노비 계약을 하거나 유괴한 아이들을 빼돌렸다는 매매 증서를 보내기 전까진 말이다. 매매 증서는 몇 사람을 거치긴 했지만, 그 끝엔 시체가 있었다.

목이 잘리고 산짐승에게 여기저기 뜯겨 성한 곳이 없었으나 등에 작은 꽃잎을 이루는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화오궁의 표식은 현서만 아는 것은 아니다. 호가 역시 등의 점이 화오궁의 표식임을 알아 곽나난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거기서 연결은 끝이었다. 곽완비 납치범의 배후를 찾아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것이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알았다.

미쳤다는 평을 듣는 화오궁이지만, 이제까지 일으킨 혈사는 모두 강호인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무림 문파를 몰살시키는 것과 무림인이 아닌 아이를 납치하고 그 가족들을 죽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세인의 공분을 사는 것도 그렇지만, 관이 주시하기 때문이다.

강호의 적은 공포의 대상으로 남을 수 있으나, 천하의 적은 살아남을 수 없다. 백양교의 일을 보아도 그렇다.

그러니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화오궁이 아이들을 유괴하려 했다면 석청담의 제자들이 잡아왔던 그 인신매매범처럼 잔챙이들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이것이 단순 범죄인 것인지 화오궁이 얽힌 일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보부상들이 말한 삼태현의 일은 화오궁에서 벌였을 가능성이 컸다. 어느 미친 노비 상인이나 유괴범이 아이를 유괴하곤 일가족을 몰살시킨단 말인가.

지금 머무는 이 객잔은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했다. 현서를 먹이고 상인들의 소문도 확인해 볼 겸 왔는데 뜻밖의 얘길 들었다.

삼태현은 담주의 남쪽에 있다. 그들은 난주의 영우로 향하는 길이니 정반대였다. 유위람은 잠시 고민했으나 삼태현엔 수하들을 보내고, 현서의 말처럼 자신들은 하루라도 빨리 영주에 도착하는 것이 더 낫다고 결론 내렸다.

엿새 전, 친선 비무회에 대한 소문이 어느 정도 퍼지자 일행은 영우곽가로 가기 위해 안가를 벗어났다. 전 무림의 표적이 되는 일은 막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안가는 들키지 않았지만, 하도를 벗어나기 무섭게 습격이 이어졌다. 비무회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찔러보는 부류와 여전히 보물 얘기만 들은 부류, 그리고 화오궁에서 보낸 이들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가장 귀찮은 것은 단연 화오궁에서 보낸 이들이었다. 질 것 같으면 도망가 버리는 다른 두 부류와 달리 화오궁에서 보낸 이들은 죽기 살기로 덤볐다.

세 번째 습격을 처리하고 난 뒤 일행은 갈라지기로 했다. 길바닥에서 힘을 빼느니 일행을 쪼개 하루라도 빨리 곽가에 도착하는 게 나았다. 이사는 현서와 떨어지는 것을 무척이나 걱정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서에게 비밀 호위가 있으니 유위람과 현서가 함께 가는 것으로 결정되어 따로 떨어질 화정과 이사에게 각각 두 명의 호위를 붙였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이 흩어져 곽가에서 만나기로 했다.

각자 흩어진 방향도 달랐다. 이사는 중간에 현진과 합류하기로 했고, 화정은 태호문의 감윤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렇게 현서와 유위람 둘이서 움직인 것이 오늘로 나흘째였다.

첫날 산어귀에서 흩어졌는지라 말을 구할 수 없었다. 당연히 유위람이 현서를 안고 산을 넘었는데, 산바람이 좋지 않았는지 심하게 기침을 했다. 피를 토할 것처럼 기침을 하는 바람에 유위람은 제법 놀랐다. 하지만 기진맥진하면서도 현서는 이 정도는 문제없다고 말했다.

유위람이 의심의 눈초리로 보자 현서는 이사도 그냥 넘어갔을 거라고 말했다. 그 대답에 유위람의 표정이 삐딱해졌다. 이사가 현서를 오래도록 돌보았으니 현서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이 맞을 텐데, 괜히 기분이 상한 탓이다.

그렇게 첫날 이외는 순조로운 여행이었다.

현서는 걷기도 했지만, 주로 유위람이 안고 다녔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지만 유위람이 진지하게 현서의 걸음 속도와 몸 상태, 영우에 도착해야 하는 시기까지 얘기하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패천검이 사람 하나 안고 다닌다고 불편해 한다면 그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느냐는 말에는 반론의 여지도 없었다.

유위람을 오래도록 본 사람들. 예를 들자면, 스승님들이나 검각의 각주가 보면 놀랄 일이긴 했다. 그가 평소 친절하게 말해도 두 번 권하지는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유위람은 자문원의 영향으로 대외적으로 예의 바른 편에 속했다. 그러나 설득까지 해가며 누군가의 편의를 위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검각이 있는 항도는 천 리 밖에 있고, 유위람은 이게 평소와 다른 친절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유위람은 현서를 안고 다니는 것이 재미있었다.

입고, 먹고, 자는 것에 엄청나게 까다로울 것 같은 생김과 달리 유위람은 아무거나 잘 입고 길바닥에서 자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련할 때 먹었던 벽곡단(辟穀丹)에 비하면 길가의 풀이 더 맛있다고 여기는 쪽이라 가리는 음식도 없었다.

유위람은 오히려 현서는 어떨까 했다. 이제껏 보아 온 현서의 성정이라면 거친 음식을 대놓고 거부하진 않아도 고역스러워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현서도 잘 먹었다. 많이 먹진 못했지만. 피곤할 때도 뭐라도 입에 넣으려고 했다. 식욕이 없다고 아무것도 안 먹으면 오히려 더 안 좋기 때문에 습관을 들였다고 했다. 유위람에게 반쯤 기대 안겨 있었지만 웃으며 말하는 현서의 목소리는 씩씩했다.

왜 현서의 소매에 간식이 많은지를 알게 된 유위람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노점에 간식이 보이면 사다 먹였다. 대부분의 음식들을 현서는 처음 먹어본다고 말했다.

야금야금 조금씩 먹지만, 맛있든 맛없든 금방금방 반응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음식을 건네줄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는 표정이 다채로워 재미가 있었다. 아주 잠시긴 하지만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다니는 게 어떨까 하고 고민할 정도였다.

그렇게 현서를 안고 다니면서 입에 음식을 넣어주는 것에 재미가 들린 유위람은 현서의 상태를 핑계 삼아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 났다.

톡―

유위람이 잠이 든 현서를 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비가 그친 모양이었다. 창문 너머에서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기감을 넓혀 자신들이 묵고 있는 이 객잔 주위에 따라 붙은 꼬리가 없는지를 확인 다음 창문을 조금만 열었다.

문이 좁은 게 불만이었는지 새가 몸을 휙 틀며 안으로 들어왔다. 새의 발에서 작은 통을 풀어낸 다음 물과 먹이를 주자 새는 불만을 잊고 곧바로 식사에 몰두했다.

흩어진 일행들이 모두 무사히 난주 땅을 밟았다는 소식이었다. 지금 유위람과 현서는 난주와 담주의 경계에 있으니 늦긴 했다. 유위람의 손끝에서 종이가 타들어 가 곧 사라졌다.

잠시 후, 새는 유위람이 새로 달아준 통을 달고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수하들을 삼태현에 보낸다는 쪽지였다.

찬바람이 들어오자 유위람은 반사적으로 현서를 살폈지만, 피곤으로 기절에 가까운 잠에 빠진 현서는 미동도 없었다. 내일부턴 더 힘이 들 것이다. 유위람이 혀를 찼다.

아침이 밝았다. 바로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은 현서지만 이런 상황에서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일단 자리에 일어나 앉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여전히 반쯤 몽롱한 상태라 현서는 딱딱한 베개를 지지대 삼아 기대고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오늘부터 수련을 좀 하자.

옥이 말했다.

아파 드러눕고, 쫓기느라 난리였지만, 안가에 있을 때도 그랬고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현서가 이 정도 버티는 것도 화정의 약과 수련의 도움이었다. 반년 전이었다면 현서는 기절한 채 쌀 포대처럼 옮겨지고 있을 터였다.

현서가 대답을 하는 건지 다시 조는 건지 모르는 상태로 고개를 꾸벅이다 베개 끝에 얼굴을 박았다.

―그럴 거면 아예 누워 자고.

이사가 곁에 없으니 옥의 잔소리가 더 늘어났다. 이사 몫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현서가 웅얼거렸지만, 제대로 된 단어 하나 만들어지지 않았다.

“말은 준비되었습니다. 잠시 후, 점소이가 씻을 물과 간단한 아침을……. 이런.”

막 방에 들어오던 유위람은 베개를 껴안고 있는 현서를 보곤 웃었다. 현서가 아침에 재깍재깍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알았는데, 이러고 있는 건 처음 보았다. 오늘은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해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다.

“좀 더 자도 되는데. 무리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길게 세운 베개 끝에 파묻힌 현서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유위람이 혀를 찼다. 거친 베개에 얼굴이 쓸려 여린 볼살이 발갛게 일어난 것이다.

상처가 난 것도 아니고 시간이 좀 지나면 가라앉겠지만, 유위람은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베개를 치우고 현서의 얼굴을 제 손 위에 올렸다. 손가락으로 발개진 부분을 가만히 쓸자 간지러운지, 현서는 움찔거리면서도 베개보단 나은 촉감과 따뜻함에 볼을 비볐다.

만희당에 있을 때 현서의 얼굴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나 가까운 이들뿐이었기 때문에 몸에 익은 행동이었다. 유위람의 손가락이 움찔거렸지만, 곧 얌전해졌다.

―야. 야. 좀 일어나 봐라. 너는 손 좀 치우고!

속이 없어서 속에 천불이 날 일이 없었건만, 옥에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오늘처럼 잘 와 닿는 날이 없었다.

유위람은 세숫물을 가지고 온 점소이가 문 앞까지 오고서야 손을 떼곤 현서를 깨웠다. 그제야 정신을 또렷이 차린 현서는 옥이 왜 점소이를 칭찬하며 그의 건강과 안녕을 빌어주는지를 알 수 없었다.

현서가 씻고, 옥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점소이가 아침을 가져다주느라 분주한 사이 유위람은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 ❖

난주에 들어선 것이 오늘로 사흘째로, 모레엔 영우에 도착한다.

난주는 양주보다 북쪽이지만, 이곳도 봄이 한창이었다. 마석현에서 급히 구한 말은 괜찮은 준마였다. 힘 좋은 수말은 계속된 강행군에도 전혀 지친 기색 없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현서는 피곤하긴 하지만 또렷한 정신으로 봄바람 사이로 흩어지는 봄 풍경을 음미했다. 드넓게 펼쳐진 보리밭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억 속의 풍경은 남의 것이다. 현서는 자신의 눈으로 보는 이 광경들이 무척이나 좋았다.

현서는 지금 자신의 몸 상태에 대단히 놀라는 중이었다. 최근에 한 가장 긴 승마는 자우정을 구경하기 위해 정산에 올랐던 그게 전부였다. 말에 올랐다뿐이지 사람이 걷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였다. 그러니 이번에 말을 타면 어지간한 근육통으론 끝나지 않을 거라 단단히 각오를 해둔 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에는 앓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낮 동안 열심히 달린 말을 밤사이 제대로 쉬게 해야 했기 때문에 규모가 있는 객잔을 골랐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객실에 웃돈을 주면 탕조를 넣는 일은 어려울 것도 없었다.

현서는 뜨거운 물에 앉아 한참을 있었다. 물 안에서 옥이 시키는 대로 내력을 움직여 몸에 활력을 보탰지만, 그래도 시중을 드는 객잔의 하인이 안쓰러워할 정도였다.

탕조를 치우고 침상에 누워 있자 곧 유위람이 나타났다. 현서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맑은 탕을 들고 온 유위람은 근육통에 시달리는 현서를 보았다.

말을 타는 자세로 인해 허벅지가 쓸려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객잔에 말안장 위에 깔 도톰한 덮개를 준비해 달라고 말해 놓고 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긴장과 익숙하지 않는 자세에서 오는 근육통에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위람이 현서의 혈을 짚겠다고 하자 옥이 화를 냈지만, 화정에게 배운 방법이라고 하니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눈알이 마음에 안 드는 놈이라고 다시 한번 버럭 화를 냈다.

현서는 온몸이 아픈데 옥까지 저러니 정신이 없었다. 그에 옥은 금세 조용해졌다. 현서에게 좋은 일을 옥이 막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현서는 유위람의 방법이 통할까 반신반의했지만 어차피 밑져도 본전이었다.

현서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허락하며 몸을 맡기자 이번에는 유위람이 당황했다. 현서는 무림인도 아니고, 의원들과 하인들로부터 치료나 시중을 받는 일이 당연했기 때문에 타인에게 몸을 내맡기는 것이 익숙했다. 조금만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인데도, 현서의 무방비함에 놀란 스스로를 나무랐다.

화정이 가르쳐 준 방법은 효과는 탁월했지만, 힘 조절이 중요했다. 화정이 유위람에게 가르쳐 줄 때는 사심을 담아 아프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유위람은 내력을 세심하게 조절할 줄 안다고 칭찬받은 적도 있으니 별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지금이라면 옥은 그 칭찬을 없었던 일로 하겠지만 말이다.

깃털이 올라간 정도로 손끝에 내력을 모은 뒤 유위람은 조심스럽게 현서의 혈을 누르기 시작했다. 상체의 여덟 곳, 하체의 여섯 곳, 양팔의 각각 두 곳과 목 뒤의 한 곳이었다. 처음으로 진검을 잡았을 때도 이처럼 긴장하지 않았다. 점혈을 마친 유위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현서를 보았다.

전혀 아프지 않았는지 현서는 그사이 잠이 들었다. 뼛속까지 강호인인 유위람은 이 무방비함이 신기하면서도, 기꺼웠다. 하지만 만족도 잠시, 현서를 깨워야 했다. 약을 먹지 않고 잠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현서는 한결 가뿐해진 몸에 크게 기뻐했다. 배시시 웃으며 감사를 표하는 현서에게 옥은 화정이 뛰어난 덕이라며 툴툴거렸다.

‘패천검이 혹시 실례라도 저질렀어?’

패천검을 칭찬했던 옥이 얼마 전부터 싫은 기색을 보였다. 옥이 이유 없이 그럴 리가 없어, 의아해진 현서가 물었다. 혹시 자신이 잠들었을 때 팔찌를 노렸나? 하지만 옥은 현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날부터 수련법을 바꾸었다. 전날 말에 탔을 때 현서의 등 뒤로 유위람이 바짝 붙어 있었지만, 내력을 움직여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현서의 상태가 좋아졌으니 현서와 옥은 수련 강도를 천천히 더 높여보기로 결정했다.

현서에게 내력이란 평소에는 피처럼 몸 안에 흐르고, 필요할 때는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었다. 열네 살, 작은 물방울 크기 하나로 시작한 내력은 어느새 현서의 몸 안을 고루 흐를 정도가 되어 있었다.

현서와 옥은 계획을 당겨 기를 몸에 두르는 방식을 익히기로 했다. 외공을 익혀 육체를 단련시키는 방법은 폐기된 지 오래였다. 아예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의 백 배가 되는 노력을 해도 결과는 일이 나올 테니 비효율적이다.

현서의 목표는 건강이지 누군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몸을 지킬 방법은 많을수록 좋다. 지금 옥과 현서의 목표는 내력으로 허벅지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호신강기(護身罡氣)는 아직 익힐 수 없으니 꼼수를 쓴 것이다.

호신강기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바로 응용으로 넘어가 버렸으니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동기 부여가 확실한 덕인지 재미는 있었다. 현서와 옥이 끙끙거리며 내력을 움직여 약간의 성과를 보았다.

하지만 일등 공신은 매일 밤 내력을 써 혈을 짚어준 유위람이었다. 그 덕에 현서가 지금처럼 봄 경치도 구경하고, 자신의 발로 움직이는 사람 꼴은 차리게 되었다.

현서가 고마움을 표할 때마다 패천검은 별거 아니라고 말하거나, 완비에게 베푼 호의를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은혜와 은혜 갚기가 똑같은 무게로 오가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현서는 유위람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자신에게 주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패천검에게 이 자상한 호의와 배려들을 갚을 수 있기를 바랐다.

“저기서 잠시 쉬어가죠.”

길 끝에 토지묘(土地廟)가 보였다. 오가는 이들을 위한 곳인지 우물도 있었다. 유위람이 말에서 내리더니 곧이어 현서도 내려주었다. 계속 말 위에 있는 것보다 잠시라도 걷는 게 낫기 때문이었다.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네.”

땅에 내려온 현서가 몇 번 발을 굴린 다음 팔도 이리저리 움직여보곤 대답했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을 정도는 아니었다. 누워 앓을 정도만 아니면 괜찮았다.

말에게 신선한 물과 건초를 주고, 말에 묶여 있던 대바구니를 가지고 왔다. 처음 유위람이 대바구니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현서는 현진한테 말하면 안 믿어줄 거라 확신했다. 그만큼 놀라운 광경이긴 했지만 대바구니를 들고 있어도 패천검의 미모나 기세가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대바구니 안엔 점심이 들어 있다. 현서는 말린 과일이나 육포로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유위람은 어차피 객잔에서 준비하는 것이라며 점심을 따로 챙겼다.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가벼운 음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확실히 육포나 말린 과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대바구니에서 예상하지 못한 것이 나왔다. 고기와 야채를 넣어 납작하게 구운 병(餠)과 작은 단지에 넣은 죽이었다. 전부 현서가 오늘 아침으로 잘 먹은 것들이었다.

―먹지 마라. 너 저거 차가운 채로 먹으면 배탈 난다.

기름이 많은 고기는 지금처럼 몸 상태가 완벽히 좋을 않을 때 차갑게 먹기엔 무리였다.

‘죽은 괜찮을 거 같아.’

괜히 사양하지 않고 먹었다 탈이 나면 그것이 더 문제다. 하지만 죽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죽만을 받으려고 했으나 유위람은 바로 주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따뜻해질 겁니다.”

옥이 혀를 차고 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위람이 내력을 이용해 음식을 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유위람 정도의 고수라면 내력을 사용해 불을 일으키는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사용할 수 있다. 삼매진화를 펼칠 수 있으면 종이를 태우는 것이나 음식을 데우는 것이나 큰 차이는 없었다.

현서와 옥은 패천검이 굉장한 일을 해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자문원이 쫓길 때 곧잘 했던 일이어서다.

도망 중 어찌어찌 음식을 구해도 차갑거나 생고기였다. 산의 밤은 춥고 차가운 음식은 체온을 낮춘다. 무공을 익혀도 어린아이들, 성인이어도 무공을 배우지 않은 이들이었다.

자문원이 처음 내력으로 토끼 고기를 구웠을 때, 무림의 아이들은 전부 기겁을 했다. 내력을 이렇게 낭비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했던 것이 열 살의 유위람이었다. 그때 자문원은 불을 피우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며 계속 고기를 구워댔다.

그런 날도 있었다.

현서와 옥은 침묵한 채 유위람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문원의 사당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와는 또 달랐다.

자문원이 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남아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며 슬픔이 몰려왔다. 현서는 이 슬픔을 무어라 정의 내려야 할지 몰라서 그냥 바라만 보았다. 계속.

이윽고 유위람이 따뜻하게 데워진 죽 그릇을 현서의 손에 쥐어주었다. 현서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니 유위람이 말할 때까지 그가 무엇을 했는지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되었다.

손에 잡힌 따뜻한 죽 그릇을 한 번 보고, 다시 유위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릇이…….”

따뜻하다는 말을 미처 끝내지 못했는데 유위람이 웃으며 말했다.

“내력으로 데운 것입니다. 불을 피워 데우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아 현서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여기서 이렇게 먹을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감사,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현서가 느릿하게 죽을 마셨다. 아침에도 그랬지만, 과연 맛있는 죽이었다. 유위람은 현서가 평소와 달리 조용히 식사하는 것을 피곤한 탓이라 여겼다.

아침에 잘 먹는 것을 챙겼더니 역시 잘 먹어 뿌듯함을 느끼던 유위람이 인상을 썼다. 묶여 있던 말도 귀를 쫑긋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 너머에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경우 좋은 일이 없어서 현서는 죽 그릇을 내려놓고는, 바닥에 내려둔 몽수를 꼭 쥐었다. 현서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자 유위람이 다정하게 현서의 머리 위에 몽수를 씌우며 말했다.

“귀찮긴 해도 적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말에 안심하기는 했지만, 그러면 몽수는 왜 씌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패천거어어어어어엄!”

사람이 작대기처럼 보이는 거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자후에 현서의 몸이 흠칫하자, 패천검이 현서를 자신의 뒤로 물렸다.

“선배니니니이이이이임!”

그 뒤로 메아리 같은 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패천검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작대기는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사람이 되었다. 대단히 잘 차려 입은 젊은 남자가 그 뒤로 더 젊은이들을 데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서 뭐라고 아우성을 치는 모양인데 아마도 뛰지 마라, 조용히 좀 해라 그런 얘기들인 것 같았다.

일 장(약 3m)이 채 못 되는 거리에서 멈춰선 남자는 싱글싱글 웃는 모습이 상쾌한 호남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그간 강녕하셨지요? 신수를 보니 여전히 강녕하신 것 같습니다. 참으로 잘되었습니다.”

남자는 패천검과의 거리를 두고 정중히 인사하더니 다짜고짜 검을 빼 들었다. 현서가 놀랄 새도 없이 남자가 뛰어들었다.

“오랜만인데 좀 싸웁시다!”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으나 금세 한 손으로 머리를 싸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빨라 현서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옥이 알려주었다. 유위람이 검집째 머리를 후려 팬 것이다. 그 와중에 검을 놓치지 않은 건 칭찬할 일이었다.

“내가 지금 장문인 대리인데 내 체면 좀 세워주시지.”

머리를 문지르며 남자가 투덜거렸다.

“체면은 대사형 스스로 깎았잖아요.”

뒤늦게 도착한 일행 중 한 명이 남자를 매섭게 야단친 뒤 유위람을 향해 공손하게 읍했다.

 “방천파(方擅派)의 배규선이 검각의 패천검을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깍듯한 인사였다. 뒤이어 도착한 이들도 줄줄이 인사를 했다. 패천검은 정파에서 이름 높은 검각의 웃어른이니 응당 해야 하는 인사지만, 이들의 목소리에는 더 많은 친근감과 존경이 담겨 있었다.

현서는 방천파를 알았다. 당시 천의맹에 무공은 강하지만 받쳐 줄 사문이 없는 자문원을 무시하거나 이용하려는 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방천파는 자문원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있던 문파 중 하나였다.

나이가 다르니 저들 중에 아는 이는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함에 현서가 유위람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현서를 향했다. 유위람은 내심 불만스러웠지만, 현서가 관심을 보인 이상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쪽은 방천파의 문도들입니다. 어린 제자들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영우로 가는 모양입니다.”

보물을 두고 싸우는 쟁탈전이었다면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무회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생사결(生死決)이 금지였다. 상대에게 큰 부상을 입히는 것도 안 된다. 비무가 격해지면 주변에서 강제로 싸움을 막는 것도 가능했다. 때문에 비무회가 있으면 경험을 쌓기 위해 출전하거나, 관전하러 오는 경우도 많았다.

방천파가 저 철딱서니 없는 것을 장문인 대리로 삼아 그보다 더 어린 제자들만 보낸 것을 보니 출전이 아니라 관전만 시키려는 것이 분명했다.

간단한 소개를 들은 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몽수를 벗었다. 유위람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녕호가의 호현서라고 합니다.”

개중에 십대 후반의 아이들이 현서의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현서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꽁지 빠진 새처럼 순식간에 시선을 후드득 돌렸다.

“저는 방천파의 대제자인 목이태입니다. 소소하게나마 직무검(直懋劍)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편한 쪽으로 부르세요. 뒤에 있는 이들은 방천파의 제자들로, 제 사제들입니다. 들으셨겠지만, 저희는 영우에서 열리는 비무회를 관전하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용혈이 호 공자의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진실로 존재했다니 정말 놀랍군요. 용혈을 먹으면 내력이 오른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것의 음용법도 같이 알려줍니까?”

“네, 올바르게 음용해야 하니까요. 의당의 의선께 여쭈었답니다. 직무검께서는 용혈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예의상 물었습니다!”

목이태가 당당하게 말했다. 사형, 제발! 뒤에 있던 사제들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서의 세계는 좁아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만날 일이 없었다. 이런 화법을 사용하는 사람을 처음 만나서 좀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다.

목이태는 필요한 만큼 예의를 차렸다고 보았는지 곧 눈을 과하게 반짝이며 유위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배님! 인사도 마쳤으니 이제 싸우죠!”

목이태가 재차 유위람에게 검을 겨누었다.

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현서가 보기에 유위람은 성정이 너그러운 사람이기는 했다. 그래도 타 문파의 후배가 이렇게 덤비는데도 크게 언짢아하지 않을 정도인 줄은 몰랐다.

‘방천파랑 검각이 인연이 있나?’

“그는 검각주의 조카입니다. 어려서부터 검각에 자주 드나들어 얼굴을 익혔더니 저를 제 사형이라고 착각하는 듯합니다. 저와 겨우 세 살 차이가 날 뿐인데도 일곱 살처럼 떼를 쓰는군요.”

너무 궁금해 하는 것이 티가 났던 모양이다. 현서는 민망해 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유위람의 말은 작지만 또렷해 방천파의 제자들도 똑똑히 들었다. 그들은 대사형이 애처럼 구는 것에 이골이 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자신을 욕하는데도 목이태는 유위람과 검을 겨룬다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어 다른 것은 상관없어 했다. 현서는 남자가 뼈다귀를 앞에 둔 커다란 개 같다고 생각했다.

도가나 불가의 문파들과 달리 검각은 제자들의 연애나 결혼이 자유였다. 그러나 검각에 있는 대부분의 제자들은 혼인은커녕 연애도 잘 하지 않았다. 검각에 입문하면 후천적으로 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그러한 이들만 들어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검각은 검술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역대 검각주 중 혼례를 한 이를 꼽는 것이 하지 않은 이를 꼽는 것보다 빨랐다. 혼례를 한 쪽이 손에 꼽히기 때문이었다. 현 검각주도 미혼이었다. 대신 그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여동생은 제법 이르게 혼인을 해 슬하에 자녀를 두었다. 그 아이가 눈앞의 저 천둥벌거숭이인 목이태였다.

현 검각주는 제법 이른 시기에 다음 각주로 내정되었다. 그런 만큼 바빠 검각을 잘 떠날 수가 없었고, 그 때문에 어린 조카인 목이태가 자주 검각에 방문했다.

목이태는 검각에서 태어난 아이처럼 검을 좋아해 자연스럽게 검각에 입문시키자는 얘기도 나왔다. 유위람보다 세 살이 어렸기 때문에 목이태는 유위람이 자신의 사형이 될 줄 알았다. 목이태가 어려 유위람의 배분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착각이었다. 검각에 입문했으면 목이태는 유위람을 사숙조라고 불러야 했다.

어찌 되었든 방천파 장문인의 손자가 검각의 제자가 되기에는 걸림돌이 많았다. 더욱이 검에 재능이 있는 아이를 방천파에서 검각에 보낼 리가 만무했다. 목이태는 검각과 방천파의 대전(臺前)에서 데굴데굴 굴렀지만 결국 뜻을 이루진 못했다.

그 후로도 왕래는 쭉 이어졌다. 대신 유위람과 어떻게든 검을 섞어보려고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무시할 때도 있었지만 유위람이 아예 상대를 안 해준 것은 아니었다. 목이태가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검각주를 배려해서였다.

방천파의 장문인 부부는 호방해도 예의 바른 사람들인데도 그 아들은 검술과 관련만 되면 떼를 쓰니 어쩌면 검각에 맞는 인재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유위람은 이번에는 상대를 해주기로 했다. 얼마 전 유위람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각주의 서신을 받은 것이 떠올라서였다.

상대해 주지 않으면 해줄 때까지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굴 게 뻔했다. 목이태는 영우곽가에서도 굴러다닐 수 있는 녀석이었다. 예뻐하는 조카가 비무회에서 굴러다녔다는 소식을 각주의 귀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저어된다는 마음이 성가심을 이겼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유위람이 현서에게 양해를 구했다. 무슨 뜻인지를 이해한 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일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닌지 방천파의 제자들은 익숙하게 현서 곁으로 와 자리를 잡았다. 비무에 방해되지 않을 거리였다.

유위람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꼬리는 붙지 않았지만, 영우에 도착하기 전까지 성가신 일을 더 만들 생각이 없었다. 빨리 끝낼 거라는 뜻이었다.

염치없는 대사형을 욕하며 수군수군 떠들던 방천파의 제자들도 본격적으로 검이 오가자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을 했다.

방천파의 검은 속도가 빠르고 변화가 다양한 것을 장점으로 삼았다. 덩치가 큰 개 같았던 목이태는 검을 잡자 쾌검(快劍) 특유의 빠른 속도를 강점 삼아 예상 못 한 방향에서 공격을 넣었다. 그러나 유위람은 세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모두 쳐 냈다. 현서의 눈에 공격하는 목이태의 검보다 방어하는 유위람의 검이 먼저 자리한 것이 보였다. 목이태의 검로(劍路)가 간파당한 것이다.

실력 차가 분명했다. 목이태는 지금 당장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패천검이 봐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잇몸이 보일 정도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 직무검의 스승이 누군지 알 거 같아.’

옥의 대답을 듣지 않고 현서가 이어 말했다.

‘왼발을 고치는 게 좋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못 고친 것 같네.’

천의맹에 파견 나온 방천파의 사람들은 총 스물두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문원과 사이가 좋았지만, 그중에 백양교와의 싸움에 같이 나가며 친해진 인물이 있었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태의 검이 부러지며 일방적인 비무가 끝을 맞이했다. 부러진 검날이 회전을 하며 빠르게 날아가는 것을 유위람이 검을 휘둘러 치웠다. 검날은 정확히 목이태의 발끝에 내려 꽂혔다.

“아, 검을 부러뜨리시면 어떻게 해요.”

“시끄럽다. 어느 멍청이가 검을 그렇게 잡아. 내가 검을 안 쳐 냈으면 네 녀석 팔목이 부러졌을 거다. 쾌검을 쓴다고 네가 암살자인 줄 알아? 그럴 거면 판관필(判官筆)이나 들고 다녀.”

싸늘한 말이었지만 목이태는 금과옥조처럼 새겨들으며 정중하게 공수했다.

“선배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가르침이라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되었다. 그것 말고 왜 네가 장문인 대리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냐? 사문의 다른 어른들은 어딜 가셔서.”

“아버님과 어머님은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장로 중 세 분은 폐관 수련 중이시고, 두 분은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은 병문안 가셨습니다.”

“병문안?”

“아니, 조문일 겁니다.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거든요.”

“누가?”

“일사문의 조 장로님이요.”

목이태의 말을 들은 유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현서는 옥에게 말했다.

‘직무검의 스승이 위창이 아닌 걸까? 일사문에서 조 장로로 불릴 만한 사람이라면 조목목일 텐데. 위창은 조목목을 아주 싫어하잖아.’

―조목목이 잘 죽었다고 구경 갔을 수도 있지.

‘설마 그럴려고. 나이가 들어 유해졌나 보다.’

설마가 맞았지만 현서는 몰랐다. 조목목의 죽음을 확신하는 유위람의 마음이 매우 흡족해진 것도 몰랐다. 기분이 좋아져 너그러워진 유위람은 다음 마을까지 동행하려는 방천파 일행을 쫓아 내지 않았다.

❖ ❖ ❖

교영도(巧英刀) 조목목은 젊은 시절부터 야심이 컸다. 실력이 야심을 받쳐 주지 못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일사문은 크지 않지만 유서 깊은 문파였다. 일사문의 장문인은커녕 장로가 될 가능성도 없어지자, 그는 재빨리 노선을 틀어 천의맹 파견을 자원했다.

조목목은 무공이 강하지 못해 토벌대에 들지 못한 것을 매우 자존심 상해했다. 그러나 배정받은 회계처에서 큰 충격과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오가는 금전과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크기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천의맹에 모이던 돈과 권력은 조목목을 황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조목목은 빨리 판단했다. 권력욕과 명예욕을 꼭 무공의 고강함으로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셈이 빠르고 말을 잘해 조목목은 순조롭게 승승장구했다.

동시에 자문원의 위명 역시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 이제껏 조목목은 자문원을 천의맹주 막내아들의 이름을 등에 업은 잡배라 여겨 무시했다. 하지만 자문원의 실력은 진짜였다. 사문도 불문명한 어린놈의 무공이 고강한 것도, 천의맹주의 멍청한 막내아들과 친구라는 이유로 남들의 주목을 받는 것도 싫었다.

배알을 뒤트는 열등감은 순식간에 미움으로 변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조목목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마음껏 비열하게 굴었다. 자문원에게 대놓고 반감을 보이는 놈들에게는 두둑한 지원을 했고, 자문원이 있는 토벌대에는 지원이 늦거나 누락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것은 단순히 돈으로 화풀이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백양교와 천의맹의 싸움이 십 년을 넘긴 것은 그들이 강해서만은 아니었다. 분명 뛰어난 무공을 가진 수뇌부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백양교 신도들의 수와 그들의 광신이 문제였다.

무공이 강하지 못해도 그들은 광신도로 끔찍한 수법을 사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조각낸 시체를 가죽부대에 담고 다니며 시독(屍毒)으로 땅과 물을 오염시켜 천의맹의 사람들을 고립시킨 다음 사냥하듯 죽이는 것은 예사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잘린 목이 사람을 물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생존과 연관된 문제였다. 가서 죽어 돌아오라고 등 떠미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자문원이 부족한 지원 때문에 사람들을 보호하느라 다치는 일도 많았다. 누군가가 항의를 하면 다섯 중에 네 번은 자문원의 탓처럼 변명했다. 조목목이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조목목의 눈치를 보아 자문원과 거리를 두거나 한 술 더 떠 모든 것을 자문원이 잘못했기 때문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횡포에 화내는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주 같이 토벌을 나갔던 방천파의 위창은 너무도 화가 나서 천의맹으로 귀환하기 무섭게 조목목에게 달려가 교언영색(巧言令色)의 달인이라 교영도라고 불리냐고 화를 내었다.

조목목은 시뻘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분노로 뒤로 넘어갔다. 현재 방천파의 장문인인 위창의 대사형이 와서 정식으로 사과할 정도였다. 그는 사문으로 불려가 한 달이나 면벽 수련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남들이 듣는 데서 말한 것은 잘못이지만 내용은 하나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방천파도 그런 위창을 더 야단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제자의 무도한 말에 대해 방천파가 정식으로 사과하긴 하였으나, 장로도 아닌 대제자를 보냈으니 조목목이 한 짓을 방천파도 좋게 보지 않았다는 뜻도 되었다.

위창은 면벽 수련을 하는 한 달 내내 벽에 대고 조목목을 욕했다고 한다. 그 덕인지 몰라도 그 한 달 뒤, 그의 검이 더욱 날카롭게 다듬어져 실력이 늘어났다는 후문이 있었다.

그 후로 조목목은 자문원을 가만히 두는 것 같았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자문원에 대한 미움은 더욱 커졌고, 자문원의 활약 소식을 들을 때마다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천의맹이 해체되면 조목목은 일사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간의 공은 인정받겠지만, 그렇다고 장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런 직함도, 권력도 없이 입문 시기가 석 달도 차이 나지 않는 사형을 장문인이라고 깍듯이 불러야 하는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조목목이 백양교와 손을 잡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세상에 어떤 것들은 비밀이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제대로 숨기려는 생각도 없다면.

그 당시 아이들은 개웅산에서 낙영도나 만불수라 같은 이들을 바로 알아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고수라는 것은 알았다.

고수들이 자신의 실력을 감추며 싸우는 일은 드물지 않으나 그것은 자신이 더 강할 때나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자문원을 상대하려면 전력을 다해도 모자라는데 실력을 숨길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아이들은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들이 쓰는 무공들을 똑똑히 보았다. 낙영도와 일사문의 이름이 끌려 나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던 것이다.

‘일사문에 가서 조목목의 목을 따?’

소화리가 눈을 반짝였다.

조목목이 백양교와 손을 잡고 일사문을 배신한 것과 막내 사제인 낙영도를 죽게 한 것의 증거가 모두 모였을 때의 일이었다. 소화리가 제시한 방법이 끌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유위람을 비롯해 다른 이들도 전부 고개를 저었다.

‘좋은 의견이다만, 그렇게는 못 해.’

증거에는 점 하나도 더 붙이지 않았다. 실제로 죽을 뻔했으니, 유위람을 포함한 이들에게는 명분도 있었다. 하지만 증거가 명명백백하다 해도 일단 시비가 붙게 되면 구설에 오르게 된다. 더욱이 검선은 이미 죽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었다.

검선이 활동하던 당시, 대놓고 해를 끼치지 않았어도 양심에 찔리는 짓을 한 이들도 많았다. 조목목이 주도하긴 하였으나 위든 아래든 타인들의 암묵적인 비호가 없었다면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중에 이제 와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할 이들이 몇 할이나 될까?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핑계로, 자기들의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해 검선을 책잡으려 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게 뻔했다.

아무리 검선이 결백해도 수면 위로 올리면 반드시 진흙탕 싸움이 된다. 유위람을 비롯한 모두는 검선의 이름이 그런 일로 소인배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게 되는 일은 원하지 않았다.

‘꼭 목을 자르지 않아도 되잖아.’

감윤이 말했다. 태호문은 도가 계열의 문파다. 소화리가 눈을 찡그렸다.

‘뭐? 염라대왕 앞에서 고신당할 때가 올 테니 내버려 두란 얘기냐?’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죽음보다 살아 있는 지옥이 더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거 알잖아. 조목목이 장로직을 빼앗기면 어떨까? 숨겨둔 재산을 한 푼도 쓸 수 없다면? 그 어떤 존경이나 칭찬을 받기는커녕 바닥에 떨어질 명예도 없어진다면?’

감윤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를 모두가 알았다. 조목목은 기어이 장로 자리를 꿰어 찼다. 공석이 나는 바람에 이루어진 인사였는데, 그 일에도 당연히 조목목이 연루되어 있었다. 감윤은 자신들이 조목목을 죽이는 대신 살아서 대가를 치르게 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일사문이 추문을 덮기 위해 조목목을 안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화정이 말했다. 모든 문파가 투명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문파의 체면이 무엇보다 우선으로 고려될 때도 있으니 괜한 걱정은 아니었다.

‘다른 일은 그렇다 쳐도 낙영도의 일이 있습니다. 일사문주는 조목목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곽나난이 말했다.

곽나난은 한 가문을 책임지는 가주로서 무엇이 수장들의 역린인지를 잘 알았다.

무림 문파는 결국 강자를 얼마나 배출하였는지, 현재 이름을 알린 고수가 있는지로 흥망이 갈리게 된다. 지금 일사문은 사문을 대표할 고수가 없어 참으로 애매한 상태였다. 고수가 없다고 해서 일사문이 당장 문을 닫을 리는 없지만 낙영도 같은 심혈을 기울인 기재가 없으니 기세가 위축된 것도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조목목은 천의맹에서 빼돌린 돈을 거의 잃어 일사문에 이제 더 줄 것도 없었다. 제자를 들여 가르치는 것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장로가 되면 제자를 길러야 했지만, 조목목은 제자가 아니라 추종자를 만들려고 해, 일사문에서는 아예 어린 제자를 조목목에게 보내지 않았다.

곽나난은 일사문주가 조목목이 백양교와 손을 잡은 것에도 기함을 하겠지만, 낙영도의 일에 가장 크게 분노할 것임을 확신했다.

자문원의 또래인 낙영도는 기재라 불리며 사문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천의맹에 와서 더 넓은 세상이 있고, 강자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또래 중에는 여전히 강해 체면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자문원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낙영도는 충격을 받은 것도 모자라 자존심을 크게 다쳤다. 그때 그를 다독이고 수련에 전념시켜야 했을 사형제가 조목목밖에 없었다는 것이 낙영도의 불행이었다. 조목목은 자신처럼 사제인 낙영도에게 자문원에 대한 분노와 열등감을 심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낙영도도 세 살짜리 아이는 아니다. 조목목이 약속한 부와 열등감의 해소를 선택해 사문을 배신하고 백양교와 손을 잡은 것은 결국 낙영도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조목목이 부추기지 않았다면 낙영도가 사문을 배신한 채 죽지는 않았을 터였다.

일사문은 낙영도가 죽은 다음에야 그가 개웅산에서 검선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욱이 당시에 검선의 죽음은 강호를 뒤흔들 만큼 큰 충격을 주어서 검선을 싫어하는 이들도 다른 말을 입에 담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에 낙영도가 천의맹을 배신해 검선의 죽음에 한 팔을 보탰다는 얘기가 나오게 되면, 일사문은 폐문(廢門)을 각오해야 할 정도였다. 낙영도는 일사문의 다음 기둥으로 이름을 알린 자였으니 일사문이 몰랐다는 것을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게 확실했다.

일사문은 낙영도의 부고를 알리면서도 불명예스러운 이유를 감추기 위해 많은 여력을 쏟아부어야만 했음이다. 조목목은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사문의 은폐를 도왔다. 얼마나 많은 괘씸죄가 가중이 될지.

조목목은 돌려받을 것이 많았다.

곽나난이 움직이고 계절이 하나 지났을 무렵, 일사문의 조 장로가 병환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올해로 오 년째였다.

‘십 년은 버틸 줄 알았더니.’

유위람이 고소했다.

일사문의 방법은 간단했다. 조목목을 단칼에 죽여 그의 죄를 만천하에 확고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를 품고 가지도 않았다. 일사문은 조목목의 무공을 폐했다. 사문을 배신했으니 사문의 무공은 당연히 돌려받아야 했다. 그 후로도 독을 쓰거나 폭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파문하지도 않았다. 조목목은 여전히 일사문의 장로였다.

하지만 조목목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평생 집착했던 명예와 부, 그 어느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무공을 폐하지 않았어도 화병으로 병석에 눕기엔 충분한 일이었다.

조목목은 모든 권한을 빼앗긴 채 일사문의 높은 담장 안에서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조목목이 정말로 병들었다고 알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조목목이 바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 자신이 한 일이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그 끝을 만들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기쁘셨나 봐요.”

점심을 먹으며 본의 아니게 쉰 탓에 현서는 객잔에 도착하고도 기력이 남아 있었다. 방천파의 제자들은 말을 타지 않아 현서 일행보다 늦게 도착할 것이다.

말은 매섭게 했지만, 유위람은 식사를 청하는 목이태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말을 타고 오는 내내 확실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제가 기분이 좋아 보입니까?”

“네, 평소와 달리 조금 웃고 계시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넘겨짚었나요?”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얼굴을 매만졌다. 현서가 알 정도로 심하게 얼굴 근육이 풀어졌나 보다. 그만큼 좋은 소식이긴 했다.

“아닙니다. 목이태를 만나 기쁜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어 그렇습니다.”

유위람이 방긋 웃었다. 정말로 방긋이었다. 유위람을 만나고 그가 이렇게 환히 웃는 것은 처음이라 현서는 그만 입을 헤벌리고 바라볼 정도로 시선을 빼앗겼다.

―저. 저. 불여우!

불여우도 저런 불여우가 없다고 노발대발하는 옥의 말은 현서의 귀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