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章. 영우곽가의 비무 대회
방천파와 헤어지고 하루 뒤, 현서와 유위람은 영우곽가에 도착했다. 강행군에 피로가 첩첩이 쌓였지만 다행히 현서는 자기 발로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장족의 발전이라고 현서는 후하게 평했다. 현진과 이사가 깜짝 놀랄 것을 상상하니 뿌듯했다.
곽부는 상당히 컸지만, 비무회에 참가하는 이들을 전부 수용하기엔 애매했다. 그래서 아예 참가자들을 영우 내에 있는 객잔과 저택을 빌려 분산을 시켰다고 한다.
청지기가 패천검을 알아보았다. 사람을 불러 안내를 하려는 것을 패천검이 거절했다. 현서는 유위람과 대문을 넘어 그가 가는 대로 따라갔다.
“몇 년 전 대대적으로 증축을 하긴 했지만, 오래된 저택입니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테니 머무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기억과 달라 저도 모르게 이리저리 보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현서는 시골뜨기가 된 기분에 멋쩍게 웃었다. 증축을 했다니 기억과 다른 것이 이해가 되었다.
“석청담과는 또 달라서, 제가 너무 채신없이 굴었지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천천히 구경하는 게 좋다는 뜻이었지요. 곽부도 좋은 곳이지만 항도의 검각도 그러하답니다. 항도에 오면 제가 안내를 하죠.”
유위람이 자연스럽게 현서를 검각에 초대했다. 예의상 하는 말인 줄 알고 현서는 웃으며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서의 뜻을 고스란히 읽은 유위람이 빈말이 아니라고 말하기 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곽나난의 전언을 전하러 온 사람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유위람이 걸음을 멈추고 현서에게 양해를 구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현서는 그들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서아야!”
“도련님!”
담벼락의 무늬를 구경하던 현서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현진과 이사가 종종걸음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형! 이사!”
현진은 그렇다 치지만, 열두 살 이후로 이사와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본 적 없었던지라 현서의 목소리에도 반가움이 그득했다.
한달음에 달려온 현진을 현서가 덥석 껴안았다. 키와 덩치 차이 때문에 현서가 안긴 모양새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현진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현서를 안아 올리고는 이리저리 살폈다.
그사이 이사도 매의 눈으로 현서의 이곳저곳을 보았다. 옷이 좀 꼬질꼬질하고,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상태가 좋았다. 이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디 보자. 아픈 곳은 없고?”
“응. 괜찮아.”
“올 때 별일은 없었고?”
“응. 패천검께서 아주 많이 도와주신 덕에 아무 일 없었어. 형이랑 이사도 별일 없이 온 거지?”
“우리도 무탈했다. 그래서 혹시나 네 쪽에 문제가 있을까 걱정했는데 괜찮았다니 정말 다행이야.”
그사이 볼일을 끝낸 하인이 물러나고 패천검만이 홀로 남았다. 현진은 현서를 내려놓고는 패천검에게 정중하게 공수했다.
“인사가 늦은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패천검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곽나난이 보낸 이와 대화 중이었다고 해도 현서의 목소리는 잘 들렸다. 무사히 재회한 현서의 기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반가움과 애정이 담뿍 섞인 현서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달았다. 이제껏 들었던 것 중 가장 다디단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유위람이 고개를 저었다.
“화운검은 그리 말하면 안 되네. 그대들이 완비를 구해주었기 때문에 이 인연이 시작된 걸 잊지 말아주게. 더욱이 호 공자가 남도 아니, 흠, 호 공자 역시 완비의 은인이니 그렇게 말하면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소중한 동생의 일입니다. 마땅히 깊이 감사드릴 일입니다.”
“저도 다시 감사드립니다. 패천검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렇게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을지를 감히 장담하지 못했을 겁니다.”
현서가 깊게 읍하자 현서의 머리꼭지를 보던 유위람이 이번에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다정하게 말했다. 셋이서 돌아가며 서로 겸양하며 감사 인사를 계속 주고받는 꼴이 되었다.
이래서야 하루 종일 감사만 하고 있을 판이다. 현서를 이제 그만 쉬게 해주고 싶은 이사는 곁에서 눈치를 보았다.
“아끼는 동생을 만나 기쁜 것은 알겠지만, 우선 호 공자를 좀 쉬게 하는 것은 어떻겠나?”
이윽고 현진이 아닌 유위람이 먼저 나서 현서의 휴식을 권했다. 이사는 자신이 끼어들 수가 없는데, 패천검이 먼저 말해 주니 좋았다. 호감이 생길 정도였다.
현진이 왔으니 현서가 같은 곳에 머무르는 것은 당연했다. 유위람은 잠시 멈칫했지만 그곳에서 갈라졌다.
“안 힘들어? 안아줄까?”
“말을 계속 타서 걷는 게 더 나아.”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송가장에 돌아왔을 때 네 편지와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미안해. 걱정했지.”
“너더러 미안해 하라고 한 얘기 아니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이 형은 백부랑 백모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도 못할 거다.”
“그럼 형도 미안해 하지 마. 우리가 한 일이 아닌 걸로 서로 미안해 하는 거 이상해.”
현서가 웃으며 현진을 위로했다. 혼례식에 참석하려고 온 평범한 외유였다. 무리하게 일정을 짠 것도 아니고, 일부러 위험에 발을 넣은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사고도 아니다.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벌인 일에 휘말린 것뿐이다. 휘말린 사람들끼리 서로 미안해 하는 건 안 될 일이다.
“어.”
이윽고 도착한 원락의 모습에 현서가 소리를 냈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형도 여기 있는 거지?”
“왼쪽 방은 네가 머물 곳이고, 형은 오른쪽 방에 머물고 있었어. 바꿔줄까?”
“아냐.”
현서가 고개를 저었다. 오는 길에도 대강 눈대중으로 살폈지만 증축을 한 탓인지 저택은 기억과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잘 알았다. 자문원이 곽다순을 따라 곽부를 방문할 때마다 늘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많이 바뀌어 기억과 일치하는 점을 찾기가 어려웠던 외원과 달리 이곳은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 좀 있었다. 이불이나 등잔, 다기 같은 자잘한 것들은 전부 바뀌었지만, 선녀가 조각되어 있는 창살이나 자단목침상 같은 큰 가구들은 하나도 바뀌지 않은 채였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도 기억과 같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우두커니 서 있는 현서에게 이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가만히 계세요? 피곤하세요?”
“응. 조금.”
현서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철서에서 만월 연회에 참석했던 그날로부터 한 달이 좀 넘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휩쓸렸지만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영우곽가에 도착했다. 화오궁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이제 보물을 둔 아귀다툼에 현서가 휘말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이 놓이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하지만 현서의 발을 잡은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문원이 자신의 전생이라는 걸 알았을 때 놀라긴 했지만, 현서는 자문원 개인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제자를 키우겠다고 결심한 것도 엄청 대단한 뜻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결심을 할 당시 현서는 열다섯 살로 옥과 대화를 한 지 일 년이 막 지났을 때였다. 옥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검술의 기초부터 배우는 시행착오가 있긴 했지만, 자그마한 성취를 얻어 잔뜩 들떠 있었다.
얇은 유리 같은 현서의 몸은 언제 산산조각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화정도 화정의 스승인 의선도 앞으로 십 년을 장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문원의 기억과 옥의 도움으로 얻은 작디작은 성취가 스물다섯 살 너머라는 희망을 주었다. 옥과 함께 방방거리며 기쁨을 나누었던 그날, 꿈을 꿨다.
자문원이 죽는 날의 꿈이었다. 끊어진 염주처럼 빠진 곳이 많은 꿈이었지만, 죽음을 앞둔 자문원의 후회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였다. 제자를 키우겠다고 결심한 것은.
현서는 무공에 관한 지식들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지만, 자문원의 개인사들은 오래전에 읽은 책처럼 덮어두었다. 하지만 양주에서부터 일어나는 일들은 좋든 나쁘든 무공이 아닌 자문원 개인의 기억들을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좀 전의 일을 상기해 봐도 그렇다. 자문원이 본 곽부를 알지만 몇 달 전의 현서라면 굳이 기억과 비교해 보지 않았을 터였다. 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자문원의 기억을 들추어보는 것이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문원이 머물렀던 방에 들어오니 발이 절로 멈췄다. 이유 없는 불안감에 가슴이 술렁였다.
“어지러워? 의원을 부를까?”
“아니야. 형,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봐.”
―괜찮으냐?
현서의 불안을 읽었는지 옥의 목소리에 걱정이 실렸다. 현서가 머리를 흔들었다.
‘응. 괜찮아. 그냥 내가 너무 잡생각이 많았나 봐.’
비무회가 끝이 나면 현서는 서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화오궁이 어찌 나오든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목욕물을 준비시킬게요. 좀 쉬면 훨씬 나을 거예요.”
현서를 자리에 앉힌 다음 현진과 이사가 분주히 움직였다. 따뜻한 물에 온몸을 푹 담구고 있자니 영문 모를 불안이 쓸려나갔다. 피곤해서 잡념이 과했다고 받아들이니 안심이 되었다.
한결 편안해진 현서가 뜨거운 물에서 발갛게 익어 나오니, 유위람이 보낸 연고가 도착해 있었다. 옥과의 수련에 진전이 있긴 하였으나 말안장에 쓸려 피부가 짓무르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유위람이 그에 약을 보낸 것이다.
그사이 현진은 자리를 비워야 해서 방엔 현서와 이사밖에 없었다. 닷새간 말을 달렸다는 얘기에 이사가 깜짝 놀랐다.
“세상에!”
“저번에 소의선께서 그러셨잖아. 많이 좋아졌다고. 정말 그래 보이지?”
침상에 반쯤 기대 노글노글한 얼굴로 얘기하는 바람에 으쓱거리는 자랑이 반이나 깎였지만, 오래도록 현서를 보아온 이사가 모를 수가 없었다. 떨어져 있는 사이 현서의 상세가 혹시라도 더 안 좋아졌을까 노심초사했던 이사는 감격했다.
“닷새나 말을 타고도 이렇게 쌩쌩하시다니 정말 장하세요. 소인도 기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남의 도움을 쏙 빼먹으시면 안 되죠. 분명 패천검께서 무언가를 하신 거지요?”
무공은 몰라도 현서의 상세라면 잘 아는 이사였다. 우쭐거리던 현서는 금세 쭈굴쭈굴해졌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야. 응. 패천검께서 진짜 많이 도와주셨어. 패천검이 아니었다면 지금 눌어붙은 엿가락처럼 침상에 달라붙어 있었을 거야.”
현서가 웃으며 패천검이 소의선에게 배운 의술을 매일 밤 자신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는 얘길 했다.
현서는 이사가 패천검에게 겁 없이 군다고 나무랐지만, 윗사람을 살피는 기술은 현서가 이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분명 패천검 유위람은 이사가 보기에도 차갑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곽 소공자의 일 때문인지 현서의 일에는 빠지는 곳 없이 예의 발랐다.
더욱이 저렇게나 도련님을 잘 챙겨주다니!
현서가 말하는 강호인의 무서움과 유위람의 강함을 이번 여행으로 충분히 겪었지만, 이사에게는 우선순위가 있었다.
유위람에 대한 이사의 호감이 수직 상승했다는 얘기다.
“정말 좋으신 분이네요.”
이사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유위람을 칭찬했다.
❖ ❖ ❖
비무회를 하루 앞두고 현서의 큰형이자 호가의 후계자인 호현규가 도착했다. 곽나난을 만나 공식적인 얘기를 끝낸 현규는 바로 현서를 찾았다. 용혈은 서녕에 있고, 호가도 이 비무회의 주최자니 집안에서 사람이 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현규가 올 줄은 몰랐다.
현규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건강한 사람이었지만, 무공을 배웠거나 특별히 힘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야 몰라도 스무 살이 된 현서를 현진처럼 번쩍 들어 올려 살피진 못한다는 얘기다. 지금 했다간 허리가 나가 드러누울 게 뻔했다.
대신 현서를 세워두고는 뱅글뱅글 돌아가며 앞뒤로 살폈다. 현규가 다섯 바퀴를 돌자 이쯤이면 되었다고 판단한 현서가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멈추게 했다.
“네가 흉한 일에 휘말렸다고 해서 걱정이 컸는데, 크게 상한 곳이 없어 보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현서가 현규보다 며칠 빨리 도착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사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몸을 챙긴 보람이 있었다.
“그래도 살이 좀 내린 것 같구나.”
“많이 움직여서 그런가? 전 잘 모르겠어요. 낮에 소의선께서 다녀가셨는데 좋다고 하셨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화정 얘기를 꺼내자 현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소의선도 여기 계시지! 아직 뵙지 못했는데, 인사를 드려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좀 전에 사람을 보내 저녁에 같이 식사하자고 하셨어요.”
철서에 있는 패천검의 장원에서 머무르는 동안 현서를 꼼꼼하게 살핀 화정은 현서의 수명이 늘어났음을 확신했다. 현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확인을 받아도 좋은 일이었다.
화정은 곧 바로 서녕호가에 서신을 썼다. 화정의 서신에 대부인이 쓰러져 소란이 약간 일었지만,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현재 이 사실은 가족만이 알고 있다. 마음 같아선 서녕 전체를 대상으로 연회라도 열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다 잘 계시죠? 형수님들이랑 둘째 형도 잘 계시지요? 조카들은요? 형은 연주에 갔다고 들어서 숙모님이 오실 줄 알았어요. 언제 오셨어요?”
현규의 합격을 받은 현서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질문을 마구 했다. 현서의 앞으로 약차가 든 잔을 슥 밀어주며 현규가 말했다.
“부모님은 모두 다 잘 계신다. 부인도 제수씨도 잘 있지. 아이들은, 사고를 치지 않으면 아픈 것이니 그게 더 큰일이긴 하지. 큰일이긴 한데.”
마지막 조카들 얘기를 하며 현규가 이마를 찡그리자 현서가 의아해 했다. 큰형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사고뭉치 조카들이 일으키는 사고에 관대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에요? 큰일이에요?”
“큰일이라면 큰일이지. 영서 녀석이 희아랑 장난치다가 희서의 비녀를 망가뜨렸단다.”
현서는 물론 뒤에 있던 이사도 화들짝 놀랐다. 영서와 희서는 올해 열 살인 쌍둥이로 둘째 형 현상의 아이들이다. 희아는 네 살로 현규의 막내다. 사촌들끼리 사이가 좋아 곧잘 노는 일도 많았고, 같이 사고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희서는 어릴 때부터 취향이 확고해 물건에 대한 호불호와 애착이 확실한 아이였다. 큰형이 저렇게 미간을 찡그리고 말할 정도면, 설마.
“형, 설마, 그 비녀가 세 줄의 진주와 부용석(芙蓉石)으로 된 꽃이 있는 그건 아니겠지요?”
“……그거란다.”
“큰, 큰일이네요.”
희서가 애지중지하는 비녀다. 엄청 아껴서 자신이 아니라 현서의 머리에 처음으로 꽂아줬던 물건이다. 좋아하는 숙부가 아파서 두문불출하는 바람에 계절이 지나고야 겨우 보게 되자 기운 나라고 머리에 장식해 준 것이었다.
현서가 할 만한 비녀는 아니었지만 희서의 마음이 좋아 기쁘게 꽂고 있었다. 그때 희서는 여덟 살로, 얼마나 이 비녀를 아꼈느냐면 유산 목록 첫 줄에 적을 정도였다. 혼수품도 아니고 유산 목록이라는 데서 집안사람들이 폭소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아끼는 비녀라는 뜻임을 다 알았다.
현서는 그날, 희서가 그렇게나 아끼던 비녀를 처음 머리에 꽂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수리는 되는 거지요?”
“되겠지만 똑같은 모양으론 되지 않을 거다.”
일부러 그랬든 실수였든 잘못은 잘못이다. 비녀가 부서질지 몰랐던 영서는 희서보다 더 놀라 새파래진 얼굴로 희서에게 사과했다. 희서는 쌍둥이 형제가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희서는 화가 나 곡기를 끊은 채 방에 칩거했고, 희아는 울다가 넘어갔으며 영서는 누이의 방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려는 것을 출발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말해 주었다.
“석고대죄요? 둘째 형이랑 형수님들은 어찌하셨어요?”
“희서는 어머님 처소로 갔단다. 집에 손님이 와서 어수선하니, 제수씨가 중재하긴 하였으나 아마 시간이 들 것이다.”
호부에 손님이 오는 건은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형들을 비롯해 형수들도 늘 바빴다.
“제가 있었으면 좀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사고뭉치 조카들이지만, 모두 현서를 좋아해 얌전히 말을 잘 들었다. 유리, 깃털, 솜인형인 숙부 앞에선 날뛰는 망아지 같은 본성을 모두 잠시 접어두는 것이다. 자신은 손님을 만나지 않으니 희서를 데리고 있기에 적격일 터였다. 희서의 마음이 달래지면 나머지 아이들도 다시 사과할 수 있을 테고. 현서는 희서를 위로하는 서신과 함께 선물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숙모님도 같이 오셨단다. 지인들을 만나러 가셨으니 저녁에나 돌아오실 거다.”
“그래요? 그럼 숙부님도 오셨겠네요. 두 분을 오랜만에 뵙게 되네요.”
현서의 숙부인 호상직은 숙모인 이약약과 사이가 좋아 어지간한 일이면 두 분이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호상직이 일 년의 대부분을 석청담에서 보내는 것도 그래서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호상직이 석청담의 데릴사위로 들어갔다고 알고 있을 정도였다.
“아니, 숙부님은 호부에 계신다. 숙모님만 오셨어.”
“집에 손님이 많이 오셨나 봐요?”
숙부가 호부에 와 계실 정도면 바쁘긴 한가 보다. 현서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현서의 아무렇지 않은 질문에 호현규만이 쓰게 웃을 뿐이었다.
❖ ❖ ❖
소문을 뿌린 뒤 일부러 기한을 짧게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이 몰렸다. 용혈의 이름값과 더불어 오랜만에 열리는 규모가 큰 비무회였기 때문이다.
스무 명이 남을 때까지 치러지는 예선전은 철서성에서 가장 큰 격구장에서 열린다. 적당한 저택을 물색해 수리하는 것보다 격구장을 빌리는 것이 시간으로나 비용으로나 더 나았다. 격구장은 말을 타고 달리는 곳이니 크기도 괜찮았다.
가로 세로 사 장(12m)이 넘는 황철석으로 비무대 두 곳을 만들었다. 사방을 둘러싼 이 층의 누각과 휘장을 두른 일 층의 객석 외에도 비무대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낮은 목책을 둘러 사람들이 서서 구경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一. 생사결을 할 수 없다.
一. 고의로 부상을 입히면 실격패로 간주된다.
一. 싸움이 과열되면 그만두게 할 수 있다.
一. 암기의 사용이 금지된다.
一. 쉰 합을 넘겨 겨룰 수 없다. 승부가 나지 않으면 무승부 처리된다.(예선)
一. 사람, 혹은 무기가 비무대 밖으로 떨어지면 패배로 인정된다.(예선)
현서가 들은 규칙들이 종이에 적혀 여기 저기 붙어 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시끄러운 함성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이사가 현서 곁에 붙어 평소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물었다. 현서는 고개만 끄덕였다. 말을 하려면 소리를 질러야 할 것 같아서였다.
“현서, 이사. 여기야! 여기!”
이 층에 오르자 소화리가 마중을 나와주었다. 주최인 곽나난과 호현규는 첫날을 빼고는 예선에 번갈아 가며 참석하기로 했다. 현규는 어제 참석을 했기 때문에 오늘은 오지 않았다.
현서와 같이 있고 싶어 했지만 현규는 바빴다. 현서는 오늘 참석할 이유가 있어서 어제 현규를 따라가지 않았다. 현규는 서운해 했지만, 연달아 이틀 참석하자고 하지는 않았다.
큰형을 만난 그날 저녁, 곽나난이 주최한 저녁 연회에서 현서는 호아권(虎牙拳) 소화리와 능운검(凌雲劍) 감윤을 소개받았다. 완비의 일도 있지만 화정에게서 미리 팔찌에 관한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두 사람은 현서에게 호의적이었다.
유위람처럼 대뜸 팔찌를 팔지 않겠느냐, 혹은 사당에 기증할 생각은 없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대신 두 사람 다 현서를 검선의 사당에 초대했다. 이것도 무언가의 인연 아니겠느냐며 말이다.
항도에 초대를 받은 것이 이번이 두 번째다. 유위람은 현서가 무슨 대답을 할지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옥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사당에 가보고 싶어 하는 낌새였다.
현서는 웃으며 기회가 된다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현규와 숙모인 이약약이 곁에 있어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서녕이 서쪽 끝에 있다면 항도는 동쪽 끝에 있다. 나라를 가로질러야 갈 수 있는 곳이니 집에서 허락할 리가 없었다.
“회천검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
퇴역 군인이나 사문이 없는 이들도 참가하긴 하였으나 정파든 사파든 대부분 사문을 대표하여 출전했다. 그 말은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였다. 거대한 인맥 쌓기의 장이 열렸다.
더군다나 회천검 이약약은 남편과 깨를 볶느라 사교 위주의 외부 활동은 잘 하지 않았다. 숙부 없이 나온 김에 대부분의 일들을 해치우고 가겠다는 숙모의 뜻이 잘 느껴졌다.
소화리가 일행을 데려간 곳은 이 층 정중앙의 자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좋은 곳이지만 편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곽나난이 먼저 자리해 있었고, 현서가 인사를 마치자 패천검이 막 합류했다.
소화리가 권하는 자리에 앉자 패천검이 그 옆에 앉았다. 빈자리가 몇 없기도 했거니와 탁자에 있는 차를 마시는 것을 보니 원래 패천검의 자리였던 모양이었다.
이틀을 보지 못했을 뿐인데, 최근 줄곧 함께 있어서였는지 아주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 들어 현서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계속 같이 있어 그런지, 고작 이틀이었는데도 오랜만에 뵙는 기분이 들어요. 패천검이 곁에 계시는 것이 익숙해져 그런가 봐요.”
현서가 건네는 인사에 옥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호가 사람들의 애정 표현에 비하면 무던한 편이긴 했지만 현서는 가끔 놀라울 정도로 스스럼없이 굴 때가 있었다. 당연히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현서가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옥은 짧은 사이에 유위람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주,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서의 인사에 유위람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부드러운 얼굴로 인사를 돌려주었다.
저, 저 불여우 놈, 웃는 것 좀 봐라. 옥은 불만이 차올랐지만 현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현서는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을 게 분명하니 없는 입만 아플 뿐이다. 더욱이 옥이 뭐라 하고 싶은 건 유위람이지 현서가 아니었다. 옥은 당당하게 현서를 편애 중이다.
그나마 소화리와 곽나난이 저게 미쳤나 하는 시선으로 유위람을 보고 있어 옥에게 소소한 기쁨을 선사했다.
인사를 마친 현서는 곧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삼 일째인 오늘을 끝으로 참가 인원의 반이 추려진다. 아침부터 시작했던지라 현서가 자리했을 때는 일곱 번의 비무가 끝이 난 뒤였다. 이미 이긴 사람들, 진 사람들도 구경꾼 대열에 합류해 비무장은 매우 북적였다.
우승을 노리지 않고 경험을 쌓겠다는 뜻이 있어도 영우곽가의 이름값이 있으니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이들만이 참가를 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비웃음당하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보는 재미가 있었다.
현서가 앉은 자리는 이 층이라 가깝진 않았지만 주최가 앉은 자리이니만큼 시야가 훤히 트여 두 개의 비무대를 전부 보는 것에 불편함이 없었다. 사씨 남매가 참가한다고 해서 응원차 왔던 현서는 얼마 못 가 비무 구경에 홀딱 빠졌다.
‘재밌다.’
현서가 아는 비무회는 꿈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별로 좋은 내용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백양교의 횡포로 인해 강호의 분위기도 어두웠다. 그래서 비무회는 천의맹에서 고만고만하게 열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것도 여러 세력이 모이니 실력을 가늠하기 위한 목적이 우선되었다. 때문에 생사결이 아닌데도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다들 날이 서 있었다.
자문원도 손님 자격으로 참가하긴 하였다. 처음에는 실력을 증명하라고 다짜고짜 싸움을 걸더니 나중에는 실력 차가 너무 나는데 끼어든다고 욕을 했다. 물론 자문원의 무위에 감탄하거나 축하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문원 역시 무인이다. 상대와 서슴없이 검을 주고받는 만족을 당연히 안다. 하지만 비무회에서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서 현서에게 비무회는 무겁고 칙칙한 느낌을 주는 행사였다.
이 비무회 역시 화오궁 때문에 억지로 열게 되었는지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와서 보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고함도 있고, 시비도 일어났지만 각양각색의 표정들과 함성들은 뾰족하기보다는 즐기는 것에 가까웠다.
‘재밌나 보군.’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는 현서의 얼굴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유위람이 고개를 돌리니 곽나난과 소화리도 비무대가 아니라 현서를 보고 있었다.
영우곽가는 주최라 참가하지 않았고, 검각과 청사파는 모두 참가를 하였으나 이미 이기고 끝이 나 응원할 사람도 없었다. 본선에서 치열하게 싸울 이들은 삼, 사 할쯤 힘을 감추고 있어 예선에서는 흥미를 끌 만한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구경 삼매경에 빠진 현서를 보는 재미가 더 쏠쏠할 수밖에.
볼이 발갛게 상기된 현서가 주먹을 꽉 쥐고는 검이 부딪히고 밀려날 때마다 숨을 참았다 뱉었다 하는 것이 비무보다 천배쯤 더 흥미진진했다. 하루 종일 보고 있으라고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곽나난과 소화리도 비슷한 마음인지 현서가 눈을 빛낼 때마다 추임을 넣었다.
‘경망스러운 녀석들, 비무나 보지.’
그 행태가 싫은 유위람이 혀를 찼다. 저 녀석들은 뭐 하러 현서를 보고 있단 말인가. 옥이 들었다면 네놈도 비무나 봐라 했겠지만, 옥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해도 유위람은 똑같이 굴었을 터였다. 원래 유위람은 양심이 별로 없는 편이다.
비무대가 두 곳이라 시합은 끊어짐 없이 이어졌다.
왼편의 비무대는 뽑기 운이 좋지 않아 하필 원수인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싸움을 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욕을 퍼붓고 있었다.
현서는 왼편은 보지도 않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사무문이 나오는 차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무문의 상대는 요즘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는 젊은 후기지수로 서로가 경험 삼아 겨루기 좋은 상대라고 했다. 이쪽은 뽑기가 잘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숨기는 것 없이 최선을 다해 싸우는 두 사람은 막상막하였다.
쉰 합이 될 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으면 무승부가 된다. 무승부가 된 자들은 나중에 그들만 다시 제비를 뽑아 재경기를 치른다. 재수가 좋으면 부전승으로 본선에 갈 수도 있겠으나 그런 운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무승부가 되면 비무를 또 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무승부를 원치 않았다.
쉰 합이 넘으면 안 된다는 얘긴 쉰 합이 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비무대 위에 있어도 상관없다는 뜻도 된다. 사람들의 야유와 훗날의 명성을 헤아려 그런 짓을 벌일 사람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를 가늠하는 것 정도는 용납이 되었다.
단순히 시간 끌기가 아니라 서로의 약점을 찾으려는 것도 싸움의 연장이니 말이다.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열 합을 남기고 둘은 비무대 끝과 끝으로 갈라져 날카롭게 서로를 견제했다. 사람들의 시선도 바짝 달아올라 있었다.
첫 스무 합을 겨루었을 때 바로 결론이 나지 않을 거라 판단하자 둘은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서로의 전술은 유효한 공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둘 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탓이었다. 결국 무승부를 점치는 소리가 비무대 아래 가득했다.
“검은 옷을 입은 분이 이길 것 같아요.”
현서의 대답에 네 쌍의 시선이 몰렸다. 이사까지 현서를 본 것이다. 막상막하인데 응원하는 사무문을 선택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째서 그리 보셨습니까?”
옥과 예선전의 승패를 계속 가늠하며 떠들고 있었더니 정제하지 않은 말이 바로 나오고 말았다. 이목이 확 집중이 되자 현서는 후회했지만, 이미 쏟은 물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그냥 저 남자가 입은 옷이 좋아 골랐다 해. 뭐라고 말하든 실력으로 알아차렸다고 생각하는 녀석은 아무도 없을 거다.
“어, 옷이.”
당황한 현서의 입에서 얼빠진 대답이 튀어나왔다. 킬킬거리는 옥의 웃음소리가 너무 얄미웠다.
“호 공자가 지금 옷이라고 한 거야? 호 공자, 저 옷이 맘에 들어요? 특이한 비단인가?”
예상외의 답변에 소화리가 순진한 의문을 표했다. 옥의 훈수에 혀가 꼬여 옷이라고 대답한 현서는 손끝으로 옥을 툭툭 두들기며 항의한 뒤 입을 열었다.
“저분의 옷자락이 거의 흔들리지 않아서, 그래서.”
“그래서 검은 옷이 더 뛰어나다고 한 거야?”
“네.”
소화리의 말에 현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저 둘 중 검은 옷이 종이 반 장 정도의 차이로 우세했다. 현서의 말을 들은 유위람의 표정이 일순 묘해졌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라 그 표정을 본 사람은 없었다.
“호 공자는 눈이 아주, 좋군요.”
“감사합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현서에게 유위람이 웃으며 말했다.
“칭찬입니다. 어지간한 문파의 제자라도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알아차리다니 눈썰미가 좋다는 뜻입니다. 제가 보아도 검은 옷을 입은 이가 다섯 합 후에는 이길 것 같습니다.”
대화하는 사이에도 싸움은 이어지고 있었다. 과연 딱 다섯 합 후 사무문이 패배했다. 쉰 합까지 딱 일 합을 남긴 채였다.
사무문의 탈락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러나 땀에 젖은 사무문의 얼굴은 시원해 보였다. 탈락이 아쉽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만족할 만큼 싸운 듯했다.
사무문과 검은 옷의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하는 동안 왼편 비무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규칙을 지켜야 하니 욕설로만 도발하던 두 사람은 이윽고 서로를 반드시 꺾겠다는 과열된 욕망에 사로잡혀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살초(殺招)를 쓸 수 없다는 규칙이 있으나 뭐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이다. 사무문의 경우와 달리 경험이 노련한 둘은 살초가 아닌 척하며 상대의 급소에 칼을 꽂아 넣으려고 애썼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긴가민가했지만 패천검 일행은 이미 저 둘을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예선부터 피가 튀어서야 영우곽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니 말이다.
“어?”
적색 옷을 입은 남자의 검끝이 슬며시 흐릿해지자 현서가 소리를 냈다. 비무회 규칙에 검기를 쓰지 말라는 것은 없었으니 문제는 없다. 조절을 잘해서 아주 살짝 보인 것이 아니라 실력이 거기까지였던 것뿐이지만 역시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저 사람 방금, 손목을 자르려고 한 거지?’
미약한 검기라 해도 손목 정도의 두께라면 스치는 걸로도 잘라버릴 수 있다. 상대가 눈치를 채고 몸을 틀어 소맷자락이 크게 잘리는 것에서 그쳤지만 그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구경하는 이들 중에서도 알아차린 사람들이 많아 비무대 아래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비무를 막지 않고 이대로 두어도 문제가 없을지, 걱정스러워진 현서가 패천검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이야. 저놈 이름이 뭐라고? 완전 맛이 갔는데?”
패천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되묻기 전에 소화리의 감탄 아닌 감탄이 이어졌다. 다시 고개를 돌린 현서도 역시나 놀랐다.
화려한 손놀림으로 눈속임을 하고 있었지만 칼등을 따라 머리카락보다 얇은 세침(細針)이 움직이고 있었다. 암기 사용이니 명백한 규칙 위반이다.
손목이 잘릴 뻔하자 분노로 이성을 잃어 이곳에서 원수를 죽이는 것을 택한 모양이었다. 상대도 뒤늦게 암기를 눈치챘으나 한 발 늦은 상황이었다.
이곳에서 검풍이나 탄지공(彈指攻)을 쓴다면 구경하던 사람들이 다칠지도 몰랐다. 하지만 비무대 근처에 있는 영우곽가의 사람들이 나서는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현서는 당황해 곽나난과 비무대를 번갈아 보았다. 그런 현서를 유위람은 이번에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걱정했던 큰 사고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현서는 왜 곽나난이 가만히 있었는지는 알았다.
칼끝에 걸린 암기가 쏘아지기 직전에 회천검 이약약이 비무대 위로 난입해 기다란 소매를 휘둘러 칼과 침을 같이 휘감아 버렸다. 춤을 추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매서운 힘이 담겨 있었다.
칼을 쥔 남자는 팔이 빨래처럼 비틀리자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팔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이약약이 소매를 반대로 휘둘러 검만 뺏은 다음 남자를 발로 차 비무대 아래로 떨어뜨렸다.
갑자기 제삼자가 뛰어들어 참가자를 날려버리자 놀란 사람들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반칙패다.”
이약약이 남자에게서 뺏은 검에서 아지랑이처럼 흐릿한 세침을 꺼내 들었다. 비장의 한 수로 칼에 장난질을 쳐 둔 모양이었다. 남자는 시뻘게진 얼굴로 바르작거렸지만 바로 도망치지 못했다.
“끌어내.”
이약약이 손을 흔들자 영우곽가의 사람들이 와서 남자를 끌고 나갔다. 치료는 해주겠지만 향후 몇 년간은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그럼 승자는 어찌합니까?”
진행을 맡은 이가 물어보자 이약약이 말했다.
“둘 다 실격이다.”
이약약이 비무대에 혼자 남은 남자를 보며 말했다.
“이유를 말해야 하나?”
“아닙니다. 실격을 인정하겠습니다.”
남자는 실격보다 원수가 꼴사나운 모습으로 끌려 나간 것이 더 기쁜 듯했다. 손목을 자르려고 했던 것을 바로 인정한 남자는 신이 난 얼굴로 사라졌다.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지만,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가 비무대 위의 사람이 서녕호가의 인척이라 비무에 관여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서녕호가와 인척인 고강한 무인. 이약약을 몰랐던 사람들도 금방 정체를 깨달았다.
파도가 밀려왔다 쓸려가는 것처럼 놀람이 번져 나갔다.
가만히 있으면 무공을 전혀 모르는 대갓집 부인처럼 보이는 이약약은 젊은 시절 서쪽의 야차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다. 석청담이 정파가 아니었다면 회천(廻天: 하늘을 돌리다)보다 훨씬 적나라한 별호가 붙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젊은 이약약이 고르라면 수라악귀(修羅惡鬼)나 지옥야차(地獄夜叉) 정도가 좋다고 큰소리쳤다는 얘기는 유명했다.
그 이약약이다.
다음 순서인 두 명이 비무대에 오르지 못한 채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물론 방천파 장문인 대리인 목이태처럼 눈을 반짝이다 못해 번쩍 뜨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장 뛰어가 한 수 배우게 해달라고 굴러다닐 것이 분명한 대사형을 방천파 제자들이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그 패천검도 가끔 뼈를 부러뜨리고 싶다는 얼굴로 바라보는데 회천검 이약약이라니, 뼈가 가루가 날지도 몰랐다. 철없는 대사형이지만 그런 비극적인 일을 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사무문의 비무를 응원하기 위해 오른쪽에 있었던 호현진은 어머니가 등장하기 무섭게 이미 재빨리 튀어 자리에 없었다.
잠시 후, 이약약이 현서가 있는 이 층에 왔다.
이처럼 큰 비무회에 잡음이 나지 않을 리가 없다. 아직 사흘째라 이만한 일로 끝난 셈이다.
영우곽가의 약점은 여차할 때 앞으로 나설 중진의 수가 적다는 것이다. 영우곽가는 혈족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가다. 전 가주의 하나 남은 직계인 곽나난이 가주가 되는 것은 당연했지만, 나이가 어려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곽다순이 전부 치워서 내부의 소란은 없지만, 대신 중진이 모자라게 되었다. 일장일단인 셈이다.
이번 비무회에서 패천검 유위람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어쨌든 유위람도 삼십대 초반이다. 곽나난을 비롯해 소화리도 감윤도 전부 비슷한 또래다. 시비를 걸고자 하는 놈들이 가장 많이 가져다 대는 이유가 나이니만큼 이약약이 부러 나서준 것이다.
미리 협의가 된 일이었지만, 곽나난이 영우곽가의 가주로서 감사 인사를 했다. 공적인 자리라 이약약도 같이 화답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진아는? 너랑 같이 있는 줄 알았더니?”
소화리가 자리를 비켜주자 이약약이 현서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조금 전 사무문 형님의 경기가 끝나서 아마 거기 있을 것 같아요.”
사무문은 끝났지만, 사수연의 비무는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이약약은 조카들 중에서 현서를 가장 예뻐했다. 이유는 현서가 남편인 호상직을 가장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호상직과 호현서의 얼굴을 둘 다 아는 사람들 중에서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이약약뿐이다.
한 번은 현진이 전혀 아니라고 반론했다가 수련을 빙자한 고통을 맛보고 난 뒤 입을 닫았다. 호상직은 부인이 좋아하니 가만히 있었지만, 대신 가족 외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선에서 그쳤다.
“즐겁니?”
“네.”
현서가 이약약 쪽으로 몸을 반쯤 돌려 무엇이 좋았고, 어디가 재미있었으며, 놀라운 점은 무엇인지를 조곤조곤 말했다. 남편을 닮은 조카에게 늘 산들바람 같은 이약약은 현서가 한 번에 너무 많이 말하지 않게 적당한 추임새를 넣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위람이 보고 있었다.
‘막내라더니, 확실히.’
희대의 망나니로 자라지 않은 현서는 잘 배운 대갓집 도련님 특유의 예의 바름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좀 더 허물어지는 모양이었다. 현서가 이사를 가깝게 대해도 동갑이라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큰형인 호현규를 만났을 때나 이약약을 대할 때는, 그러니까 막내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친애나 어리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한 유위람이었다.
‘내게도 제법 친근하게 대하는 줄 알았는데 좀 다른 것 같군.’
방금 전의 살가운 인사도 충분히 마음에 찬다고 여겼는데, 이약약을 대하는 것을 보니 어딘지 아쉬워지는 유위람이었다.
[쟤는 왜 풀어진 미역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뭐 잘못 주워먹었나?]
어쩌다 유위람의 얼굴을 보게 된 소화리가 인상을 팍 쓰며 곽나난에게 전음을 보냈다. 가장 연장자인 소의선 화정을 빼곤 다들 고만고만한 나이차라 서로 스스럼없이 굴었다.
[난들 알겠냐. 쟤 이상한 게 일이 년도 아니고, 그냥 내버려 둬.]
[어휴, 꿈에 나올까 무섭네.]
소화리가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유위람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가 있었다.
소화리의 사문인 청사파는 여인들만 제자로 받는다. 소화리의 사매들이나 어린 제자들은 유위람이 그림같이 잘생겨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소화리는 전혀 동의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차갑기가 새벽 서리에 비할 데가 없는 것도 도도한 아름다움을 더 강조하니 어쩌니 하던 애들한테 저 미역 같은 얼굴 보여주고 싶었다. 소화리의 사매들은 저렇게 빛나는 미역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할 테지만 유위람의 얼굴에 감흥이 없는 소화리는 사매들이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그사이 현서를 한껏 귀여워하던 이약약은 숙모 무릎에 앉아서 구경할래? 하는 소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약약이 어린 현서를 데리고 나무 위나 지붕 위에 곧잘 올라 무릎에 앉혀두고는 나무 아래나 지붕 너머를 구경시켜 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대답하기도 전에 무릎에 앉힐 것처럼 손을 뻗는 모양에 얼굴이 발개진 현서가 재빨리 도리질을 쳤다.
“숙모님, 저 일곱 살이 지난 지 십 년도 훨씬 더 되었어요. 관례를 올린 지도 벌써 이 년이 지났는데.”
“그래. 그래. 우리 현서가 쑥쑥 자라 혼인을 할 만큼……. 혼인. 씨발.”
“숙모님?”
갑자기 욕을 한 것 같은데,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서 현서는 긴가민가했다.
“맞아. 훤칠하게 컸으니 무릎에 앉으면 내가 앞을 못 보겠구나. 나도 참 주책이었네.”
이약약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딴소리를 했다. 현서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약약이 말을 돌린 이상 다시 듣기 어렵다는 걸 알아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좀 있다 큰형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현서와 호가의 뒷조사를 했던 유위람만이 저 욕이 왜 나왔는지를 알아들어 인상을 썼다. 유위람 역시 호현규를 따로 만날 필요성을 느꼈다.
“도련님, 곧 사 소저의 비무가 시작됩니다.”
이사가 현서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사수연의 차례는 오늘의 마지막이었다.
가볍게 긴장한 얼굴의 사수연이 비무대에 올랐다. 상대는 사수연보다 강한 사람이었지만, 어리고 경험 없다고 비웃는 기색 없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곧 비무가 시작되었다. 사수연의 승리를 점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맹탕은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저 아이는 손힘이 좋네? 검에 힘이 고르게 가는구나. 좋은 습관이지. 진아가 말하길 장법(掌法)이나 지법(指法)에 재능이 있다더니 과연 그러네.”
사수연은 이약약도 아는 아들 친구라 비무를 챙겨 보았다. 이약약의 말에 현서와 옥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사수연이 사무문의 등짝을 때리거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찌르던 것을 떠올리면 과연 맞는 말이었다. 옥도 칭찬할 만큼 깔끔한 손놀림의 소유자였다.
더욱이 사무문은 맷집이 좋았다.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인 사수연의 수련에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했다.
사수연은 졌지만, 사씨 남매 모두 후련한 얼굴로 비무대를 내려갔다. 좋은 경험이 되었으니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 새 하루가 지났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오늘의 비무에 대해 말하고 내일의 예측을 하며 즐기겠지만 현서는 곽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내일도 구경 가고 싶다.”
영우곽가로 돌아온 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현서가 말했다. 누가 보아도 즐거워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현서의 몸에 무리가 없다면 좋아하는 것들을 말릴 리가 없는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사도 비무 구경이 재미있었다.
“좋지요. 대신 내일 일어나 보셔야 해요. 피로가 안 풀리면 안 되니까요. 또, 대공자님께 허락받으셔야 하는 것도 아시죠?”
“잘 알지.”
스무 명이 남은 뒤에는 전부 참석해도 좋다는 확언을 받은지라 예선을 보겠다고 무리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최근의 상태를 보건대 내일도 무리 없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공 수련도 순조로웠고, 또 반은 패천검이 도와준 덕이다. 이 자리에 없는 패천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현서는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선잠이 드나 싶더니,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떴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곁에 있는 경우가 많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또 내가 아팠나.’
아플 것 같은 전조는 없었는데. 피곤이 심했나. 현서는 의아해 하며 눈을 떴다가 화들짝 놀랐다. 눈앞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현서는 누운 채였지만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낯선 사람이 있어!’
현서가 몸을 일으키며 다급히 옥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소리쳐 이사를 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해코지할 의사는 없는지 남자는 현서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당황했지만 현서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신중하게 거리를 벌렸다. 등 뒤로는 그림이 걸려 있는 벽뿐이었지만 자신의 체력으론 앞으로 뛰쳐나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길게 드리워진 비단족자가 등에 닿는다고 느끼기 무섭게 뒤로 휙 넘어갔다. 벽이 움직인 것이다. 큰 저택에 밀실이 있는 것은 특이할 일은 아니지만, 갑작스러워 현서는 깜짝 놀랐다.
차가운 흙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어느 순간 다가온 남자가 현서를 잡아주었다.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몸을 빼내야 할지를 고민하는 찰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가만 있거라. 괜찮으니.”
뭐가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일단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현서는 신중을 기했다. 도망을 치려면 방심하는 순간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현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현서를 곧장 안아 올렸다.
잠시 바르작거렸지만 현서는 곧 얌전히 안겼다. 여차하면 남자 뒷목의 혈을 짚을 계획이었다. 쓰러뜨릴 순 없겠지만 잠시 마비를 시켜 시간을 벌 수는 있을 것이다.
“똑똑하구나.”
현서의 의도를 읽은 듯 구는 남자의 칭찬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발이 차가워지자 남자가 걱정 말라며 다독였다.
“쉿. 들어보아라.”
흙벽으로 이어진 길의 끝에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사람의 울음 소리였다. 흔들리는 촛불의 끝이 누군가의 그림자를 짐승처럼 부풀렸다 흩트리기를 반복했다.
남자는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천천히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현서는 긴장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울음은 계속되고 길 끝에 있는 것이 무엇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남자가 길 끝에 다다라 모퉁이를 돌려고 할 때 현서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꽉 잡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섭다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 뜻은 남자에게 전해졌다.
“내가 있으니 괜찮다. 너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잘 보면 되느니.”
남자가 현서의 귀에 속삭이곤 그대로 거침없이 모퉁이를 돌았다. 그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던 현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련님! 도련님! 현서 도련님!”
“허억!”
현서가 눈을 뜨곤 목이 졸린 사람처럼 꺽꺽대다 곧장 기침하기 시작했다.
“이를 어째.”
이사와 옥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현서는 숨을 삼키는 것조차 버거워 버둥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동그랗게 몸을 말곤 이불 안에서 한참을 컥컥대던 현서는 크고 시원한 손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손은 현서의 혈을 짚고는 입을 벌려 그대로 숨을 겹쳤다. 벌려진 입 사이로 자신의 것이 아닌 숨이 들어왔다.
현서가 기침이 너무 심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데도 발만 동동 굴렀던 이사가 유위람의 응급 처치에 정신을 차렸다. 유위람은 거듭 현서의 입으로 숨을 넘겨주었다. 이윽고 현서가 탈진해 늘어지자 유위람이 그 몸을 고쳐 안으며 이사에게 말했다.
“화 누이를 불러오세요. 청당에 있을 겁니다.”
현서의 기침이 멈추고 숨을 고르게 쉬는 것을 확인한 이사가 급히 달려 나갔다.
눈을 감고 있지만 기절한 것은 아니었다. 눈물로 붉게 짓무른 눈가가 신경이 쓰였다. 유위람은 현서를 품에 안은 채 등을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현서는 깃털인형처럼 아무 저항 없이 축 늘어진 채 안겨 있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유위람이 저도 모르게 본심을 꺼냈다.
“아프지 마십시오.”
“……무서워요.”
현서가 작은, 너무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한 것은 아니었으나 유위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엇이 그리 무서우십니까?”
내가 다 없애줄까요? 유위람이 현서를 다독이며 역시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현서는 너무도 낡고 지쳐 보여 자그마한 소리에도 바스라질 것 같았다.
자신의 이 품 안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인 양 굴며, 유위람은 어설픈 손놀림으로, 하지만 부드럽게 현서를 달랬다.
그 후의 소란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영우곽가에 도착한 이후로 현서의 몸 상태는 손에 꼽히게 좋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변했다.
다급한 이사의 말에 화정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제 자리를 비웠던 감윤이 사 온 과자를 현서에게 나눠주라고 화정이 유위람을 부린 터라, 화정과 같이 있던 감윤과 소화리도 덩달아 왔다. 유위람의 품에 안긴 현서는 여전히 새하얗게 질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기절했어?”
“아닙니다.”
화정이 오자 유위람이 현서를 침상에 눕혔다. 하지만 현서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화정이 현서의 눈과 입 안을 꼼꼼히 살핀 뒤 맥을 짚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얼결에 따라온 소화리와 감윤은 긴장한 표정으로 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 아기 완비도 저 정도로 약하지 않았는데.]
[언니가 있으니 괜찮겠지만,]
어제 그렇게나 생기 넘쳤던 현서가 하루도 안 되어 초주검이 되었는지라 소화리는 놀라 말을 흐렸다. 소화리와 감윤은 검선의 팔찌를 가졌다는 것 때문에 처음부터 현서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 현서의 병이 안타까웠다.
“많이 좋지 않습니까?”
이윽고 화정이 맥을 다 짚어 손을 거두자 유위람이 물었다. 화정이 대답하려다 밖의 기척에 소화리와 감윤에게 말했다.
“너희는 가서 사람 좀 불러오고, 내 처소에 가서 침통 좀 챙겨 와.”
부러 내보내려 하는 것임을 알아 둘은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섰다. 그들이 나가는 것과 동시에 호현규가 급히 들어왔다. 이약약과 호현진은 이미 곽부를 나선 뒤라 현규에게만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급히 달려오느라 숨을 몰아쉬며 현규가 침상에 다가갔다. 막냇동생은 죽은 듯 누워 있었으나 오랜 경험으로 가느다랗게 숨을 쉬고 있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현규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힘이 빠진 현규가 넘어질까 봐 이사가 재빨리 등자를 내어주었다.
“많이 안 좋습니까?”
호현규도 유위람과 같은 것을 물었다.
“갑자기 상태가 안 좋긴 한데. 어디가 크게 상해서 아픈 것은 아니야. 한데.”
현서의 몸은 점차 좋아지고 있었고, 최근에 앓았던 것들도 전부 적당한 이유가 있었다. 쫓기느라 심신 모두 무리를 했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쉬이 말을 못 하고, 심장이 빨리 뛰고, 식은땀이 나고, 맥이 허하며 힘이 없어. 더욱이 기혈이 흩어져 있지. 충격으로 인해 생긴 허증(虛症)의 전형적인 증상이야.”
화정의 말에 모두 의문을 표했다.
“현서가 크게 놀랐다는 말입니까?”
“응. 그렇지. 이대로 한동안 정양하면 큰 무리는 없어. 하지만 반복적으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내장이 상해.”
“충격을 받을 정도로 놀랄 일이라니, 이사, 어제 이상한 점은 없었느냐?”
화정의 말을 들은 현규가 곧장 이사에게 물었다. 이사는 열두 살 때부터 현서와 함께 했다. 현서에 관해서라면 이사가 어느 면에선 의원보다 더 많은 걸 아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이사도 현서가 받았을 충격에 관해선 떠오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찬찬히 어젯밤을 떠올렸다.
“어제 해시(亥時: 밤 9시-11시) 말에 주무셨어요. 비무 구경에 무척 기분이 좋으셨거든요. 아침에 대공자님과 식사할 테니 조금 일찍 깨워달라고 하셨어요. 소인이 진시(辰時: 아침 7시-9시) 초에 한 번 살폈습니다. 그때 도련님은 깊게 주무시고 계셨어요. 진시 말쯤에 아침 약을 준비해서 깨우려고 다시 살폈는데 갑자기 도련님이 파랗게 질리시더니 기침을 하셨어요. 기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 사람을 부르려고 했는데, 그때 패천검께서 오셔서 도와주셨습니다.”
이사의 말에 화정과 현규의 시선이 패천검에게 돌아갔다. 화정은 뭐 이상한 게 있었느냐는 시선이었고, 호현규는 거기에 당신이 왜 아침부터 내 동생을 찾아갔느냐는 뜻도 넣었다. 유위람이 시선으로 탁자를 한 번 가리켰다. 정신이 없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과자 상자가 탁자 위에 있었다.
“화 누이가 호 공자에게 과자를 보내주라고 해서 왔던 길이었습니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 급히 와보니 호 공자가 파랗게 질린 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더군요.”
“별다른 낌새는 없었어?”
비무회 참가자들이 머물지 않는다 해도 지금 곽부에는 손님이 넘쳐 났다. 개중에 이상한 놈이 현서에게 해코지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 비무회 자체가 화오궁의 시비 때문이니 말이다. 호현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설마 화오궁인가.
“아뇨. 도착했을 때 이 건물 이 장(약 6m) 이내로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유위람의 단언에 화정과 현규의 표정이 풀렸다. 패천검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고수가 단순히 겁만 주고 사라졌다는 것은 너무 이상한 가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일부러 벌인 짓이 아니라면 다행이긴 한데.”
화정이 핏기가 가신 현서의 얼굴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독약의 후유증 때문에 자다가 발작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나이가 들고 몸이 좋아지며 점차 줄었는데 최근 여러 일이 있었으니 또 모를 일이다. 의심 가는 일을 찾지 못했으니 우선 화정은 대화를 마무리하고 서탁으로 자리를 옮겨 처방전을 썼다.
“이사, 이대로 약을 지어 오렴. 저 약을 먹는 동안 오리와 매실, 녹두는 같이 먹으면 안 되니 그것도 이쪽 주방에 말해 두고.”
“네.”
화정이 써준 처방전을 챙겨 이사가 서둘러 나갔다. 유위람은 침상에 누운 현서를 보았다. 화정이 혈을 짚어 응급 처치를 하긴 했지만 약도 침도 아직 도착하지 않아 현서는 섬뜩할 정도로 창백해 보였다.
현서가 무섭다고 했다. 무엇이 무서운지 모르지만 유위람은 그것을 치워줄 때까지 곁에 있는 쪽이 좋겠다고 마음먹으며 입을 열었다.
“화 누이, 혹시 악몽을 꿔서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까?”
“악몽? 아직 어리다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현서가 그러기엔……. 너 뭐 짚이는 거 있어?”
“짚인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사가 없으니 어제 비무를 같이 본 사람은 이 방에 유위람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약약의 말 때문에 호현규를 만나려 했다.
유위람은 달변가는 아니었지만, 결심한 일을 실패할 정도는 아니었다. 삼 할의 진실과 칠 할의 사심을 담은 말이 유위람의 입에서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유위람은 양심이 별로 없었다. 자문원의 영향으로 얼마 안 되는 양심이 열심히 일해 멀쩡해 보이는 것뿐이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니 칠 할의 사심이 매우 번듯하게 들렸다. 유위람이 말을 할수록 호현규는 물론 유위람의 성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 화정까지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우선 호부에 계신 부모님께 연락을 해야겠지만, 반대는 하지 않으실 겁니다. 현서에게도 묻겠지만 좋아할 것 같기만 하군요. 하지만 패천검께 너무 폐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호현규의 말에 유위람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 화정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저놈의 농간에 당했구나. 당장 뭐라고 하고 싶은데 호현규가 있다. 저 속 시커먼 놈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결론은 흡족했던지라 여기서 초를 칠 수가 없었다.
화정은 의술을 배우는 것이 좋아서 무공보다 의술에 대부분의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다. 경공을 가장 열심히 배우고 그 외는 설렁설렁했던지라 전음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싶어 하는 화정을 모른 척하며 유위람이 말했다.
“폐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호 공자는 좋은 여행 벗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테지요. 검선의 팔찌를 가진 이가 검선의 사당에 가다니 이처럼 좋은 인연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친구들도 무척 기뻐할 겁니다.”
유위람이 호현규에게 말한 사실 중에는 현서의 팔찌가 검선의 것이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검선의 팔찌라면 호가도 이미 알고 있는 얘기겠지만 유위람은 모른 척하며 말을 보탰다.
패천검 유위람이 작고한 검선을 매우 공경하고 있다는 얘길 호현규가 모를 리 없으니까. 패천검이 현서에게 과한 호의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 또한 수상한 의도가 아닌가 하는 일말의 의심을 잠재우는 데 효과가 있었다. 호현규의 눈매가 살짝 편해졌다.
당연히 현서를 항도에 있는 검선의 사당에 데리고 가고 싶다는 얘긴 진심이었다. 유위람은 검선을 걸고는 어떤 농담도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지금 현서는 호부에 돌아가면 안 된다.
지금 현서를 호부에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호현규의 생각과 유위람의 생각은 미묘하게 달랐지만 어쨌든 큰 틀은 일치했다. 그렇게 호현서가 항도에 가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처럼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옥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현서가 항도에 가는 것은 좋다. 검선의 사당에 가는 것도 좋다. 그래서 옥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속이 시커메 보이는 것은 확실하니 현서가 깨면 죄 이르려 했다.
❖ ❖ ❖
현서는 푹 자서 기분 좋게 잠에서 깼다. 그런데 현규가 가라앉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가족이 이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건 자신이 아팠다는 뜻이다.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누그러진 현규가 익숙하게 현서를 일으켜 물을 마시게 했다.
“몸은 좀 어떠하니?”
“조금 찌뿌둥한 거 빼곤 다 좋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기분은 괜찮고?”
“기분이요?”
현서는 의아해 하면서도 차근차근 대답했다.
“기분은 좋아요. 형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아팠는지도 모를 정도예요. 제가 많이 아팠나요?”
현서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현규를 바라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재차 말을 걸려고 할 때 이사가 화정을 데리고 왔다. 진맥을 끝낸 화정이 한시름 놓아도 되겠다는 말을 했다. 어리둥절해 하던 현서는 꼬박 하루가 지났다는 말에 놀라고, 병명이 충격으로 인한 허증이라는 것에 다시 놀랐다.
“충격이요?”
현서의 기억은 잠들기 전 이사와 했던 대화가 끝이었다. 간혹 자문원의 기억에 놀라 깨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꿈을 꾸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현서의 반응은 꾸며 낸 것 같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현규가 손을 잡아 도닥였다.
“형이 다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아무 걱정 말고 그냥 있으면 된단다. 몸조리만 신경 쓰렴.”
“형님?”
뚱딴지같은 형의 말에 현서가 당황한 얼굴로 화정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화정의 표정도 형과 비슷했다. 두 배로 당황한 현서가 이사를 보았더니 이사는 뭔지 모르지만 큰 도련님이 하시는 일이니 막내 도련님에게 좋은 일이다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에게 설명 듣기를 포기한 현서는 나중에 옥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도 화정이 좋은 얘기를 해주었다.
“단번에 기력이 크게 깎여나가 아팠던 것이니 며칠 제대로 보양하면 비무 구경도 할 수 있을 게다.”
“제가 얌전히 보양하는 건 또 잘하잖아요. 잘할 수 있어요!”
반쯤 포기했던 비무회 구경을 갈 수 있다는 말에 현서가 활짝 웃으며 자신하자 그제야 방 안의 사람들도 같이 웃었다.
고작 하루였는데, 아프다는 소문은 어찌나 빨리 퍼졌는지 깨어난 지 한 시진(2시간)도 지나지 않아 현서는 위문품을 잔뜩 받았다. 그중에는 유위람이 보내준 금귤정과도 있었다.
현서는 침상에 앉아 맹한 얼굴로 금귤정과를 씹었다. 보양은 잘한다고 큰소리쳤지만, 잉어와 인삼을 넣은 탕은 끝내주게 맛이 없었다. 쓰고 비린 맛이 가득했던 입 안에 달고 새콤한 것을 넣으니 좀 나았다.
―무섭다고 했다.
‘내가?’
―그래. 네가.
그때 그 불여우 놈의 표정이 어땠는지를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꺼지는 숨처럼 나왔던 현서의 말은 신경이 쓰였다.
‘꿈을 꾼 것이 아니냐?’
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현서가 자문원의 기억에 놀라 잠을 설치는 일을 옥도 보았기 때문이었다. 현규와 대화할 때 이미 그 가능성을 배제한 현서가 고개를 저었다.
‘자문원의 꿈이라면 꾸지 않았어. 그렇지만 그냥 꿈이었을 수는 있지.’
현서가 오직 전생의 일만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꿈도 꾼다. 그리고 그런 꿈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일이 많았다.
―네, 꿈이라. 그럼 그놈의 말이 완전 틀린 건 아닌가.
옥이 중얼거리는 혼잣말에는 걱정과 탐탁잖음이 전부 들어 있었다.
‘무슨 얘기야?’
현서의 의문에 옥이 입을 열었다. 잠시 후, 손에 들고 있던 금귤정과가 든 접시가 툭 소리를 내며 이불 위로 떨어졌다.
이 년 전, 현서가 열여덟 살이 되어 관례를 치러 성인이 되자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며칠 후, 부모님은 현서를 불렀다. 긴장으로 딱딱해진 표정으로 주저 끝에 꺼낸 것은 현서가 먹은 독에 관한 이야기였다.
현서의 증조할아버지는 자손 된 입장으로 곱게 말해 쓰레기였다. 그런 부친을 둔 조부 호익원의 고생은 이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호익원은 뛰어난 상인이었다. 시류를 보는 눈도 좋았고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결단력도 있었다. 호가가 지금의 부를 쌓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호익원에게는 인복도 있었는데 그중 제일은 사촌인 호익종과 의형제인 교막선이었다.
하지만 그 소중한 인연이 현서에게 독을 먹일 것이라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독을 마신 것도 알고, 배후를 어림잡아 짐작하고 있던 현서에게도 충격적인 얘기였다.
상행 중 공격을 받은 호익원을 구하려다 크게 다친 교막선은 시름시름 앓다 쉰을 넘기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호익원은 소중한 친구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다. 죄책감과 슬픔에 잠식되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교막선은 부인과 일찍 사별해 어린 딸 하나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부친을 잃은 교은설이 쓰러지자 호익원과 호익종은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교은설을 호가의 양녀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고 설득하려던 차에 교은설이 호익종의 차남인 호상융과 좋은 사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의 축하 속에 혼인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현서의 조부인 호익원이 교은설의 후견인이 되어 두고두고 회자될 혼수를 챙겼다. 당시 호가 재산의 대부분을 헐어 넣었다는 얘기가 돌았고, 사실이었다. 교은설과 호상융은 금실이 좋아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교은설의 막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할 무렵 호익원의 사촌이자 교은설의 시아버지인 호익종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집안끼리의 견고한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호익원은 여전히 건재했고, 현서의 부친인 호상택도 육촌인 호익종 형제들과 사이가 좋았다. 호상택에게 다른 사촌들이 전무했기 때문에 육촌이라 해도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 좋은 날들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호익종이라는 거대한 고삐가 사라지자 그 아들들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교은설이 혼인할 무렵엔 호익원보다 호익종의 집안이 더 부유했다. 큰 사고만 치지 않으면 그 많은 식구들이 부유하게 삼대를 누리고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호익종의 아들들 중 자제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태산처럼 거대한 부가 천천히 허물어졌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웃기게도 부외자인 호익원과 호상택이었다.
현서의 조모인 고녕의는 남편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호익종과 교막선의 도움이 다시없이 귀하다는 것도 잘 알았다. 잘난 남편과 자식들을 두었으니 재산을 좀 허물어준다고 한들 어떠하냐며 선뜻 도왔다.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물줄기라도 구멍 난 독은 채울 수 없다. 호익원과 호상택도 무턱대고 계속 주기만 해서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달래도 보고 야단도 쳐 보고 하였으나 호상융과 그 형제들은 귀에 밀랍이라도 부은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고녕의의 패물함을 교은설이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호익원도 대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원조를 끊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호익종과 교막선에게 받은 은혜와 정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방법을 달리해 일을 알선하고, 재산을 묶어 한 번에 탕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숨 돌리기까지 수년을 들였더니 앙심을 품었을 줄이야.
아니, 앙심보다는 사악한 술수였다.
자신들의 부친은 이미 죽었는데, 호익원은 아직도 살아 거대한 부를 누리고 있다며 그들은 방향 없는 원한을 토로하다 이윽고 어떤 악의에 다다랐다. 그들도 교막선처럼 직접적으로 호가의 은인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일부러 호익원을 아프게 만든 다음 지극성으로 간호하고 약을 구해 은인이 되겠다는 미친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악한 일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호익원의 집안과는 여전히 가까웠기에 독을 푸는 것은 어찌어찌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들키지 않고 호상택보다 먼저 해독약을 구해 올 수 있을까? 그러한 독약이 있을까? 난관에 봉착했다.
호상융과 그 형제들의 실력으로는 저 난제를 해결할 재주가 없었다. 그럼 누가 그 손에 독약을 쥐어주었을까. 도박장에서 만난 바람잡이의 주선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믿는 이는 없었다. 더욱이 독은 그렇게 구했다 쳐도, 의당의 소의선도 어렵게 해독한 독의 해독약이 과연 길거리 난봉꾼의 손에 있기나 하였을까.
현서가 열여덟 살이 되기까지 풀지 못한 의문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호상융 집안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네게 미안하구나.”
말을 마친 호상택의 눈 끝이 붉어져 있었다. 따지자면 할아버지인 호익원이 마셔야 했던 독이었으니, 그야말로 어른들의 일에 현서가 재수 없이 걸려든 셈이었다.
음독 사건에 친척인 호상융의 집안이 얽혔다는 걸 처음 안 것은 현서가 목숨은 건졌지만,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였다. 조부인 호익원은 너무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각혈을 했다.
당장 다 쳐 죽이겠다고 길길이 뛰는 호익원을 잡은 것은 현서의 부친인 호상택이었다. 호상택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부친인 호익원이 손을 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해도 좋고, 위선이라 해도 좋았으나 호익종과 교막선이 부친인 호익원에게 베푼 은혜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호익원은 호부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어른들의 사정으로 현서에게는 그저 미안하고 미안할 뿐이었다.
“아버님께서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현서가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그렇게 말했다.
선의가 선의로, 은혜가 은혜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선의를 기억하고, 은혜를 되갚는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현서는 아홉 살 이후로 그 집안 사람들의 머리끝도 본 적이 없었다. 호상융의 집안에서 상이 몇 번 났다는 얘길 들었으나 참석은커녕 제대로 된 부고도 듣지 않았다. 가족들이 현서를 보호하려 한 것이다.
현서에게는 그 마음이 더 중요했다.
“어찌하고 싶으냐.”
“어찌하실 생각이세요.”
현서와 호상택이 동시에 말했다.
“관련되어 있는 자들의 그 죄를 물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대로 하마.”
현서의 선택지에 자신이 살았으니 이대로 넘어가자 하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목숨을 구한 것은 가족들의 필사적인 노력 덕이지, 그들의 손속이 덜 독해서가 아니었다.
용서와 관용 역시 선택지에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현서는 직접 복수했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를 지어 독을 마신 억울함을 풀었을 터였다. 옥을 만나지 못하고, 전생의 기억이 없어 스물다섯 살을 넘기지 못한다면 직접 그들을 죽여 그 집에 불을 지른다는 선택지가 왜 없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자문원의 기억과 옥을 만난 일로 현서에게는 스물다섯 이후의 삶이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자신이 직접 복수했을 때의 시원함과 가족들의 울분 해소를 저울에 올렸을 때, 현서는 후자가 더 이득이 많다고 판단했다. 현서 역시 상가의 자손이다. 가장 이득이 높은 쪽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것 역시 현서가 자문원의 기억을 가져 선택지가 넓어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날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호상융과 관련된 그 어떤 일도 현서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서도 부러 알려고 들지 않았다.
호상융의 집안을 그냥 망하게 하겠다면 진즉에 끝났을 일이었다. 하지만 얽힌 것이 많았다. 아직 찾아내지 못한 일들도 있을 것이다. 현서는 부모님이 시간을 들여도 받을 것은 다 받아 낼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혼인? 내 혼인이라고?’
현서는 옥이 해준 얘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멋대로 내 혼사를 의논했다고? 그것도 한 곳이 아니라?’
―그래. 저들의 계획에 의하면 너는 내년이 끝나기 전에 건정후(乾淨侯)의 삼녀, 막리세가(莫梨世家)의 장녀, 금옥장(金玉莊)의 조카딸과 혼인을 올리게 되겠지. 누구도 측실로 중매를 넣지 않았을 테니 정실만 셋이다. 황제도 정궁은 황후 한 명인데, 저 혼사를 다 치루면 황제보다 더 유명해질 거다.
혼사를 논의하는 의혼(議婚)은 중매인이 양쪽 집을 오가며 뜻을 맞추는 것을 말한다. 당연한 말로 교은설이 중매인의 자격으로 호부를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황당한 얘기에 현서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정신이 아니야.’
―내 생각도 그렇다.
이제껏 호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현서의 음독 사건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된 사람들은 하나둘씩 대가를 치렀다.
독을 주겠다고 속살거렸던 노름판의 건달을 비롯해 몇몇은 관아로 넘어가 목이 잘리거나 국경으로 유배를 간 지 오래였다. 자백을 받고 자백서에 지장을 찍게도 하였으나 음독 사건으로 소송을 걸지는 않았다.
욕이 나오지만 두 집안은 친척이고, 현서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형을 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현서의 가족들은 사형이나 유배가 확실시되는 사람들만 관으로 보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믿는다. 옥을 캐는 유배형 중에 죽은 이가 한 명, 감옥에서 죽은 이가 두 명, 노름판의 싸움에 휘말려 죽은 이가 한 명, 이렇듯 한 집안에서 흉사로 죽은 이가 넷인데도 호상융과 교은설은 호상택이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하는 줄 알았다.
현서를 그리도 애지중지하니 당장 자신들을 죽이겠다고 달려올 게 분명하다고 벌벌 떨던 날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자 안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 자신만만해졌다.
호상택이 바로 저들을 치지 않은 것은 많은 이들이 얽혀 있는 탓이지, 죄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호상융은 자신의 집안이 점점 호상택의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음을 몰랐다. 손발이 되어주던 측근 어멈과 하인들이 이미 세 번이나 바뀌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눈이 멀었다.
돈 나올 구석이 줄어들고 호상택의 집안과 왕래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지자 그들은 현서와 교은설의 손녀를 혼인시키려는 수작을 부리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현서가 알기로 그 손녀는 희아와 동갑인 네 살이었다. 현서는 저들의 미친 사고방식에 그저 탄식만 내뱉을 뿐이었다.
‘그래서?’
―네 조모의 유언이라고 혼사를 날조하려고 했다가 안 될 게 뻔하니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린 게지. 재작년 초여름에 네 건강이 좋아져서 석청담 애들과 외출한 거 기억하느냐.
‘응. 그랬지.’
하우대를 비롯해 친구들이 일 년짜리 폐관에 들어가기 전에 현서를 만나러 왔다. 그때 몸이 좋아 야외서 고기를 구워 먹자며 현서를 데리고 나간 일이 있었다. 여름 피서지로 유명한 곳이라 현서 일행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체면을 차려 아는 척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소문만 무성했던 호가의 막내아들을 열심히 보았다.
거의 집에만 있어 체감할 일이 없지만, 현서는 개인 재산이 무척 많았다. 몸이 약해도 그 재산을 노린 중매가 많았는데, 그 와중에 현서가 제법 건강해진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재산만을 노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혼사를 논하고자 하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턱이 닳도록 호부를 오간 중매인 중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씨 부부는 현서가 원한다면 모를까 그들이 먼저 나서 현서의 혼사를 논할 뜻이 일절 없었던 탓이다. 부모가 아들 혼사를 막는다고 욕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때문에 신랑감 호현서의 인기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 사이를 교은설이 끼어들었다.
지금이야 왕래가 없지만 어쨌든 호상융은 현서의 부친인 호상택의 육촌이다. 사이가 좋았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도 많았다. 두 집안이 왕래를 끊은 것은 호상융의 무분별한 사치 때문인 줄로만 알아 중매를 부탁하는 것은 괜찮다고 보았다.
중매쟁이는 제법 많은 중개료를 받는다. 물론 성공했을 때의 일이다. 하지만 교은설은 갖가지 핑계로 미리 많은 돈을 받아 챙겼다. 상인으로서의 재주는 최악이라 손을 대는 족족 재산을 말아먹었는데 사기 치는 실력은 어쩜 그렇게도 발군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막리세가와 금옥장은 사이가 좋지도 않은데. 양쪽의 중매를 다 받았단 말이야?’
현서가 탄식했다. 왜 어머니가 자신을 양주로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들떠 깊이 살피지 못했던 실책이었다.
―네가 그때 알았어도 뭐 하게. 안다고 해서 네 모친이 너를 호부에 남겨두었겠어?
세 집안 전부 현서도 알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더욱이 막리세가는 가풍이 막무가내라고 할 정도로 제멋대로라 작정하고 현서를 납치한 뒤 혼례를 치를 수도 있는 집안이었다.
현서의 부모님이 청한 혼사가 아니고, 사주단자(四柱單子)나 예물이 오간 것도 아니니 적당히 잘 마무리할 수도 있을 일이긴 한데, 그래도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긴 했다.
호가는 세 집안이 세간의 이목을 끌지 않게 적당히 시기를 나눠 만나야 했다. 혹시나 이 일로 외부의 비웃음을 산다면 그 원망을 고스란히 호가에 돌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이가 좋지 않은 금옥장과 막리세가는 혼담이 얽힌 것을 알게 되면 서로의 자존심 때문이라도 먼저 포기하려 들지 않을 가능성도 높았다. 호현서가 두 집안의 자존심을 건 상품이 되는 셈이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물건처럼 흥정되고 있었다니, 아주 불쾌했다. 아마 가족들도 현서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그래서 형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고 하신 거야?’
―아니! 그건.
불여우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옥이 현서에게 직접 하는 말이 아니라 잘 들리지 않았다.
―말하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응.’
―혹시 독을 마셨을 때의 충격이나 아팠을 때의 일을 떠올린 게 아니냐?
‘어?’
옥의 목소리가 진중해져서 긴장했던 현서는 예상에 없던 질문에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건 두 번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기억나지도 않는다면서 왜 그렇게 단언해. 내게까지 감출 필요가 있느냐.
현서가 강한 척한다고 여긴 옥이 달래었다. 현서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려고 하다가 손이 금귤정과 때문에 찐득해진 걸 알아차리곤 그만두었다. 이사가 잠시 자리를 비워서 이대로 있어야 할 거 같았다.
‘속이는 거 아니야. 무섭다고 말한 건 꿈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너도 나를 쭉 봐 와서 알잖아. 어릴 때도 그러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그러겠어?’
옥의 말에 곰곰이 생각했지만,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아니었다. 아파서 잠 못 들 때도 많았고 분명 힘든 시기를 넘겼다. 하지만 독을 먹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도 아플 정도로 충격받지 않았는데, 이제 와 옛 기억이 났다고 허증을 앓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그놈이 입만 살아서는.
옥의 목소리에는 깊은 안도가 섞여 있었지만, 내용은 누군가를 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서는 그놈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도대체 패천검이 무어라 한 거야?’
현서의 단언으로 조금 안심한 옥이 결심했던 대로 패천검의 말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화오궁에 쫓겨 폭약으로 사람이 죽어나갈 때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호 공자가 이처럼 안전한 곳에서 허증을 앓은 것은 가족들을 보아 안심하는 한편 오래전의 충격과 공포가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라고 했다고?’
―그래, 단어 하나 안 틀렸네.
자기랑 있을 때는 험한 일을 겪어도 괜찮았는데, 이곳에서 가족을 만나기 무섭게 아픈 게 예전에 겪었던 무서운 일 때문이 아니면 뭣 때문이겠냐고 한 것이지 않느냐. 옥이 해설을 붙여가며 유위람을 욕했다.
‘그거 참 큰형님이 홀랑 넘어갈 수밖에 없는 말을 하셨……. 어?’
―왜 그러느냐? 뭐가 기억이 나?
‘아니, 그게 아니라. 패천검의 말을 들으니 내가 독을 먹은 것부터 지금 호부의 상황까지 잘 아는 듯해서?’
―그거야 당연하지.
옥이 되레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유위람은 직접적으로 뒷조사를 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정이나 무림의 지인을 언급하며 어떤 것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언질을 호현규에게 예의 바르게 고지했다.
그 태도가 호현규의 호감을 샀다. 패천검 유위람 정도 되는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었다면 진즉 의뭉스럽고 재수 없는 놈으로 도장 찍어 소중한 동생과 천만리쯤 떨어뜨려 놓았을 것이다.
―네 큰형도 이미 그놈에 대한 조사를 싹 마쳤을걸. 하다못해 그 녀석 뒤통수 길이도 알고 있을 거다. 궁금하면 물어보든지.
‘아니. 괜찮아. 안 궁금해.’
뒤통수 길이를 알아서 뭐 하게. 현서가 맹하게 말했다. 내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나? 하하 호호 웃으며 서로 뒷조사했음을 격식 차려 알렸다고 하니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현서를 보며 옥이 어휴 저 맹추 같은 것 하고 혀를 찼다.
‘그래서 패천검이 과거의 충격 어쩌고 하는 얘기를 꺼내 형님을 대번에 흔들어 얻은 결론이 무어야?’
―뭐긴, 너를 한동안 보호하겠다는 거지.
서녕호가는 지금 현서와 혼인하겠다고 난장을 부리는 세 집안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기에 뜬금없이 화오궁이 끼어들었다. 저들을 상대하랴, 화오궁의 뒤를 캐고 현서를 보호하랴 그야말로 난리 통일 게 뻔했다. 현서는 왜 수완 좋은 숙부가 숙모와 함께 오지 않았는지를 알았다.
화오궁이 없었다면 잠잠해질 때까지 현서를 경치 좋은 장원이나 온천이 딸린 산장에 머물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오궁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화오궁과 싸울 수 있는 무림 고수가 호의를 보이며 먼저 나서 보호를 해주겠다 하니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 현서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는 가족들에게 유위람의 제안은 무척이나 반길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서가 보기에 이건 너무 과한 호의였다. 완비의 일을 넣어도 그렇다.
‘나를 보호하겠다고? 왜? 패천검이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지?’
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패천검이 호가의 복잡한 일로 현서가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틀렸지만, 어쨌든 결론은 현서를 돕겠다는 말이었다.
―그거야, 그놈의 시커먼 눈알이!
‘응?’
옥이 버럭 하다가 입을 다 물었다.
세상엔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있다. 현서를 보는 유위람의 눈알이 매우, 너무 불측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현서에게 부러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옥이 보기엔 그놈도 뭣도 모르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옥은 다른 얘길 했다. 일단 과장도 거짓말도 아니었다.
―검선의 팔찌를 가진 이가 검선의 사당에 가다니 이처럼 좋은 인연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하더구나.
‘어, 아직도 너를……?’
현서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그날 이후로 팔찌에 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아 현서도 반쯤 잊고 있었던 터였다.
―그치가 자문원에 대해 얼마나 깍듯한지는 너도 보아 알지 않느냐.
‘하긴. 그건 그랬어.’
사당이 잘 지어졌다는 칭찬에 명백히 기분이 좋아지던 패천검이 떠올랐다. 그간의 일들을 보면 이제 팔찌의 소유권 이전을 바라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검선의 팔찌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하니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동안의 일들이 전부,
‘내가 팔찌를 가지고 있어 그랬구나.’
어딘지 시무룩해지는 결론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현서가 서녕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전부 ‘은혜’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과한 욕심으로 은혜와 원한이 물고 물리는 바람에 독을 먹었고, 당장 집에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패천검은 검선의 은혜에 늘 한결같음을 보여주었다. 그 강직함은 분명 칭찬할 일인데도 금귤정과의 맛이 모조리 사라진 것처럼 입 안이 썼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얘기에 지쳤는지 현서는 일찍 잠이 들었다. 현서의 잠자리를 살핀 이사도 곁방으로 물러나고 방에 깨어 있는 건 옥뿐이었다.
유위람이 했던 말 중에 현서에게 하지 않은 것이 있다.
옥도 현서가 먹은 독이 산혼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맥이 끊어져 이십 년이 넘도록 강호에 나온 적이 없다는 것은 몰랐다. 화정이 개웅산의 마지막 날, 자문원이 독에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인 것도 처음 알았다. 화정이 그 독이 산혼투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이번에 안 사실이다.
‘하지만 산혼투는 아니야.’
산혼투였다면 자문원이 그날 살 수 있었을까? 쓸데없는 가정이다. 하지만 화정의 가정이 완전 헛된 것은 아니었다.
단전에 내공을 싣지 않는 자문원의 내력을 진탕으로 만든 독이다. 단전을 파괴시키는 산혼투와는 정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둘 다 쉽게 만들 수 없는 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니 호궤마나 호궤마의 진전을 이은 이가 아니어도 같은 사람이나 같은 곳에서 만든 독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위람은 화오궁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고, 옥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처음부터 화오궁이 호가를 노리고 독을 풀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나 혼자 이런 생각을 해봤자 소용없지.’
어찌 되었든 이 일은 좀 더 명확해지기 전까지 현서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결론도 없는데 괜히 현서만 심란하게 할 뿐이다.
“으음.”
현서가 뒤척이는 소리에 옥은 깊어지는 근심을 털어 냈다. 맥은 안정적인데 꿈을 꾸는지 잠을 설치는 것처럼 보였다. 옥이 현서를 깨울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곁방에 있던 이사가 들어왔다.
“꿈이라도 꾸시나.”
이사도 옥과 같은 생각이었다. 식은땀을 흘리거나 심한 잠꼬대를 하는 기색이 없어 깨우지는 않았다. 일 각(15분)쯤 살핀 뒤에 이사는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옥은 기분이 팍 상했다.
―왜 네놈이 여기 있어.
한밤의 그림자처럼 슬그머니 나타난 유위람이 침상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방 안을 휘 둘러본 뒤 편안한 안색으로 잠을 자는 현서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보던 유위람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낯선 기척이 느껴져서.”
현서는 깊게 잠이 들어 있었고, 유위람의 시선 아래에는 팔찌도 들어 있어 마치 옥에게 변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말이다.
유위람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실력은 인정하는 바, 이사의 기척과 타인의 기척을 구분하지 못할 리 없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옥이 살펴도 낮선 기척은 전혀 없었다. 전날 놀란 현서를 본 저놈의 낯짝이 좀 안 좋긴 했다. 그래서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어떤 이유든 탐탁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가라, 좀.
하지만 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위람은 만족할 만큼 현서를 바라본 뒤 사라졌다.
❖ ❖ ❖
며칠이 지나 예선이 전부 끝나고 이제 스무 명만이 남았다. 현서는 아직 관람을 허락받지 못했지만 심심하진 않았다. 방문객들로 처소가 북적거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대강의 사정을 전해 들은 현진이 놀랐을 현서를 위로하기 위해 사씨 남매를 데리고 온 것이 시작이었다. 사씨 남매의 비무를 열심히 지켜본 현서가 눈을 반짝이며 감상을 마구 말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비무를 보고 현서에게 얘기를 해주게 되었다.
스무 명이 남게 되면서 비무회의 규칙도 몇 가지 바뀌었다. 한 번에 두 개의 비무대에서 진행되었던 예선과 달리 비무대는 하나만 사용했다. 또, 죽이지만 않으면 결판이 날 때까지 싸우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 하루에 많으면 두 번 정도의 비무만 이루어졌다.
여기서 사교성 좋은 현진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회천검 이약약을 소개해 달라고 달라붙은 목이태와 그 사제들을 비롯해, 같은 과자점에 들른 감윤까지 홀딱 묶어서 현서 처소의 방문객으로 만들었다.
현서와 이사는 아주 좋은 청자였다. 무공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비무회가 즐거운 현서와 정말 조금도 모르는 이사가 보이는 반응들은 말하는 이를 흥겹게 했다. 자신이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일말의 흥미도 보이지 않는 그 목이태마저 손짓을 섞어가며 설명을 하게 되었다.
복작복작하고 즐거운 날들이 이어지자, 현서는 자신이 유위람에게 서운함을 가졌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여긴 눈알이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없으니, 옥 역시 현서의 사교 생활에 아주 만족스러움을 표했다.
그놈이 밤마다 오는 것만 아니었음 더 좋겠지만!
유위람은 그날 이후로, 밤마다 현서의 침상 옆에서 장승처럼 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다. 옥은 불만에 가득 찼지만 딴에 현서를 걱정해 온 것이라는 걸 알아 가만히 있었다. 물론 현서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유성추로 비무대를 부쉈어요?”
현서의 목소리에 놀람과 감탄이 섞였다. 마지막 두 사람이 겨룰 때는 관전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참이라 유력한 우승 후보를 놓칠까 더 열심히 들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여섯 명이었다. 열 명이 남고부터는 더욱 격해졌다. 대부분 이름을 알린 이들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가면을 쓴 남자는 스스로를 기암일사(奇巖一蛇)라고 소개했다. 굳이 내력을 알리지 않아도 되는 비무회였기에 사람들은 처음에 그를 주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곡차곡 승리를 쌓아 오늘 최후의 육 인에 들어갔다.
주최에 서녕호가가 있으니 돈을 아낄 것이 없었다. 두 개였던 비무대는 스무 명이 남으면서 더 넓은 하나의 비무대로 바뀐 지 오래였다. 오늘의 싸움은 길지 않았지만 기암일사가 비무대의 사 할을 박살내는 바람에 경기가 일찍 마무리되었다.
“도련님 유성추가 뭐예요?”
현서가 답할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답이 나왔다. 하지만 생소한 무기인지라 그것으로 검을 든 검수와 싸운다는 것이 바로 와 닿지 않았다. 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목이태가 나섰다.
“그러니까 이런 거지.”
목이태가 허리띠 위의 장식 술을 끌러 끈 양쪽 끝에 장식용으로 둔 모과를 묶은 다음 휘둘러 보였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휙휙 소리를 내는 것이 제법 위협적이었다.
“대강 이런 식으로 생긴 무기다. 기암일사가 쓰는 것과 비교할 순 없지만. 검에 맞아도 끊어지지 않는 걸 보니 틀림없이 귀한 재료를 썼어.”
“이걸 휘둘러 검을 막는 건가요?”
“그렇지.”
검 말고는 크게 관심 없는 목이태였지만, 기암일사가 상당한 고수라 주의 깊게 보았다. 배우는 건 검이 좋고, 싸우는 건 강자면 그 무기가 삽이든 젓가락이든 뭐라도 좋았다. 호기롭게 자리에서 일어난 목이태가 장식 술에 모과를 매단 가짜 유성추를 들고 몇 가지 흉내를 냈다.
아주 간단한 흉내였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사람들이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흥이 오른 목이태가 본격적으로 움직여보려고 모과에 내공을 싣는 순간 줄이 뚝 하고 끊어졌다. 허리에 다는 장식 끈이니 목이태의 내력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나름 내력을 조절한다고 조절해서 그 자리에서 모과가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모과는 열어놓은 격선문을 지나 현서의 침상 안쪽 벽에 부딪혀 터졌다.
당혹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친 사람은 없지요?”
현서의 질문에 모두가 끄덕였다. 사람은 여럿이었지만, 모과가 지나가는 길엔 다행히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아, 진짜. 목형 이게 뭡니까.”
사무문이 끊어진 장식 술을 흔들며 크게 웃었다. 당황스러움이 가시자 그제야 이 웃긴 사태에 사람들도 같이 웃기 시작했다. 현서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이라 해도 현재 이 처소의 주인은 현서다. 부서진 집기를 물어주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그래도 남의 집 물건을 부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를 느꼈다.
“다친 사람이 없으니 되었지요. 다행히 벽에 걸려 있는 그림도 망가지지 않았으니 모과만 닦으면 될 듯합니다.”
사람을 불러 뒷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한 발 먼저 침상에 도착한 이사가 현서를 불렀다. 이사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 우르르 침상 앞으로 간 사람들은 다시금 말을 잃었다. 그냥 모과로 귀한 그림을 망가뜨리는 게 더 나았다.
내력이 실린 모과의 일부분이 벽에 박혔다. 단순한 구멍이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누가 보아도 벽 뒤에 숨겨진 밀실이 보이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로 큰 저택에 비밀 공간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건 외부인이 알 일이 아니다.
모두 자신의 집안이나 사문에 있는 비밀 공간을 떠올리며 난처해 했다. 아니, 내원이라곤 해도 객청인데 왜 비밀 통로가 있고 난리야. 몇몇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현명하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서는 우두커니 서 밀실의 입구가 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문원의 기억 속에 없는 곳인데도 어딘지 낯이 익었다.
“들어가 볼까?”
현서는 자신이 말했는지 알고 깜짝 놀랐으나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감윤이 흥미로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감윤의 말에 목이태가 재빨리 찬성을 표했다.
“전대 고수가 남긴 비급(祕笈)이 있을지도 몰라!”
“대사형, 제발 큰일 날 소리 좀 마세요. 그런 게 있다고 쳐도 그건 곽가의 것입니다. 주인 없는 비급이 갖고 싶거들랑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나 하세요.”
배규선이 목이태를 절벽에서 밀어버리고 싶다는 얼굴로 말했다.
“영우곽가는 도문(刀門)이야. 방천파는 검문(劍門)이잖아. 비급이 있어도 그림의 떡이지.”
감윤이 해맑게 웃으며 목이태의 꿈을 깨주었다. 사무문도 한마디 얹으려고 하였으나 사수연의 손가락이 옆구리에 닿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남의 집 비밀이다. 보아도 모른 척하며 사람을 부르는 것이 가장 바른 답이다. 하지만 이 중 연배가 높고 발언권이 큰 감윤과 목이태가 옳다구나 하며 들어가려고 하니 막을 사람이 없었다.
“도련님.”
이사가 난처한 얼굴로 현서를 불렀다. 그러나 현서 역시 자신이 나서 말려야 한다는 마음과 저 안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갈피를 못 잡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사람을 불러오세요. 지위가 낮은 사람은 안 됩니다. 총관 정도면 괜찮겠군요. 오라버니께서 같이 가실 겁니다.”
“어? 내가?”
“네.”
현서가 놀라 말문이 막혔다고 여긴 사수연이 대신 말해 주었다. 그 김에 사무문도 같이 딸려 보냈다. 이사 혼자 보내는 것보다 나을 테니 말이다.
“적당한 사람을 못 찾으면 소의선이나 패천검도 괜찮아.”
현서가 덧붙였다.
상식적인 사람들이 뒷일을 챙기고 있는 동안, 물 만난 비상식인 두 명이 벽을 완전히 밀어 열었다. 어두운 공동 사이로 흙냄새가 흘러 나왔다. 냉큼 들어가려고 하는 두 사람을 배규선이 붙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 전부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두 사람만 들어가도 안 될 일이라 현서와 배규선이 따르기로 했다.
혹여 면구한 일이 생겼을 때 면피가 가능한 범위의 사람들이었다.
“네가 따라가게? 너는 몸도 약한데 여기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아뇨. 지금 제가 이곳에 머물고 있으니 같이 가야지요. 제가 갈 수 없는 곳이라면 능운검도 가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곽가의 사람이 오기 전에 후다닥 구경하고 싶은 목이태가 바로 찬성을 표했다. 현서와 배규선이 뒤에 서고 두 사람이 앞선 상태로 천천히 진입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것을. 갑자기 동굴 탐험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야?
옥이 의아해 했다. 현서가 감윤에게 한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실 현서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그냥 조금,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문원의 꿈에 나왔느냐? 내 기억에는 없다만.
‘아니. 꿈엔 안 나왔어.’
이 비밀 통로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문원이 머물던 시기에 있었다고 한들 친우의 집에 와서 밀실을 찾다니 그런 경우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때문에 자문원의 기억에는 저곳이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낯이 익었다. 서녕호가에도 밀실이나 비밀구역은 여럿 있으니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겠으나, 저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호 공자 괜찮습니까?”
현서의 손이 땀으로 축축해지자 배규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길이 평탄치 않을 뿐 좁은 흙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다. 금방 길 끝의 모퉁이가 보였다. 현서는 긴장으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배규선의 말에 대답도 못했다.
숨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상태로 현서는 복도의 모퉁이를 돌며 눈을 질끈 감았다.
“뭐야? 시체?”
목이태의 놀란 목소리에 현서가 눈을 떴다.
“시체는 무슨. 인형이다.”
감윤이 바로 정정했다.
길의 끝에 나온 것은 작은 밀실이었다. 침상 하나와 차탁 하나가 있는 소박한 방. 하지만 그 내용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침상 위에 얼굴이 완전히 난도질당한 성인 남성 크기의 인형이 누워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언뜻 보면 엉망진창이 된 시체로 보일 법도 했다.
하지만 핏자국도 없고, 자세히 보면 옷 위로 드러난 곳들이 인간의 살과 달리 우윳빛의 반투명한 껍질이라 사람이 아닌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인형보다는 꼭 뱀이 허물을 벗은 것 같기도 하네요.”
배규선이 난감해 하며 말했다. 차라리 비급이나 대단한 무기 따위가 있는 게 나았다. 이런 흉물스럽고 괴상한 물건이라니. 영우곽가에서 자신들을 죽여 입을 막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로 기분 나쁜 물건이었다.
사제의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이태는 인형 쪽으로 고개를 숙여 살피느라 바빴다.
“목 위로는 곤죽을 만들어놨네. 으.”
그러더니 시선을 돌려 이불 밖으로 비쭉이 나와 있는 인형의 손을 거리낌 없이 잡아채 만져 댔다.
“정말 잘 만들었다. 살캉거리기는 한데, 따뜻하진 않고. 손금에 굳은살까지 있네. 배 사제. 이것 봐. 이 손, 검수(劍手)의 손이야. 검을 쥐는 부분이 확실히 티 나. 누군가를 본 따 만들었나?”
“대사형. 아무거나 만지지 마세요. 좀.”
배규선이 질색을 하며 인형을 잡고 있는 목이태의 손을 뜯어냈다. 검수라는 말에 감윤도 흥미를 보이며 다가와 이불을 훌렁 걷었다. 목이태보다 한 술 더 뜨는데 감윤은 말리지도 못할 사람이라 한숨만 쉴 뿐이었다.
인형의 옷은 무림인이라면 한 번은 입어봤을 법한 평범한 무복이었다. 허리의 장신구나 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색이 바래거나 삭은 곳이 없는 것을 보아 비교적 근래에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게 고작이었다.
배규선이 인형을 뒤집거나 침상에서 끄집어내지 말라고 속으로 비는 것이 통했는지 둘은 곧 인형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벽에 있는 저거 글 같지?”
잔뜩 흥분한 목이태가 재빨리 등불을 가져다 대니 벽면에 글 비슷한 것이 보이기는 했다. 너무 아무렇게나 새긴 것이라 목이태는 손으로 더듬어가며 읽어야 했다.
<내가 전부 망쳤다.>
“뭔 소리야.”
회한이나 애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목이태가 해석 불가한 외국어를 읽은 것처럼 반응했다. 목이태는 포기하지 않고 벽을 더 살펴보았지만 저 짧은 문장 하나가 끝이었다. 원하는 것들이 나오지 않아 금세 실망했다.
“천하를 제패한 검이었으나 뜻한 바가 있어 이곳에 두노라, 아니면 검로를 그려두고 후학이 이 뜻을 깨닫기를 바라노라. 이런 거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사람을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는.”
기대가 뻥하고 터져 속이 상한 목이태가 고시랑거리자 감윤이 솔깃한 얘기를 하나 해주었다.
“검로는 모르겠다만, 저거 검기로 새긴 거라네.”
“네? 저 괴발개발 쓴 글이요?”
“그래. 이 좁은 공간에서 굳이 검을 휘둘렀다는 게 좀 웃기긴 한데. 저 기분 나쁜 것을 뭉개고 나니 감정이 격해졌나?”
옷과 이불의 상태를 보니 그리 옛날에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나난을 제외하고 곽가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지. 실실 웃는 감윤의 눈동자가 차가웠다. 그 외에 자잘한 물건들이 몇 있었지만, 신분이나 정체를 특정할 만한 물건은 없어 시선을 끌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빠져나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곽 가주에게 맹세할 의욕이 가득한 배규선은 아까부터 조용한 현서가 신경이 쓰였다. 오는 길에 손이 축축했던 것도 그렇고, 잔뜩 겁을 먹은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병약한 도련님이 책임감에 망나니 같은 두 사람을 따라 들어온 길이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현서를 살피던 배규선은 크게 놀랐다.
작게 떨리고 있는 몸과 시신같이 창백한 얼굴엔 식은땀이 흥건했고, 눈에는 초점도 없었다.
“호 공자!”
―현서야? 무엇을 하려고? 안 된다. 현서야? 그만둬라. 호현서!
뒤로 넘어가려는 현서를 잡아주려고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누군가가 현서를 잡아채어 갔다.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군요. 이런!”
배규선이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현서가 피를 토하는 게 먼저였다.
“호 공자!”
“이게 무슨 일이야!”
“악! 불이야!”
“불이라니!”
현서가 피를 토하는 순간 침상에 있던 인형에 불이 붙었다. 누군가 실수로 등을 떨어뜨린 것이 아니었다.
새파란 불꽃은 내력으로 일으킨 불길이었다. 그 말은 저 인형만을 태운다는 뜻이기도 했고, 저 인형이 다 타기 전까진 꺼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두들 유위람이 불을 낸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서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바람에 모두의 정신이 그리로 쏠려 묻지는 못했다. 유위람은 새파란 불꽃 아래 녹아내리고 있는 인형을 흘깃 보곤 날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련님을 기다리고 있던 이사는 놀라긴 하였으나 곧 침착하게 화정을 부르러 급히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들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현서는 멍하게 눈을 뜨고 있었지만 의식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엉망이 된 침상 위에 눕힐 상황이 아니라 유위람이 현서를 추슬러 편안한 자세로 안은 다음 감윤을 바라보았다. 세상 억울한 감윤이었지만 지은 죄가 아예 없진 않아서 전음으로 얌전히 상황을 설명했다.
―현서야. 내 말이 들리느냐. 현서야!
옥은 계속 현서에게 말을 걸었다. 밀실이 나오기 전부터 줄곧 말을 걸었지만, 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옥이 느낄 수 있는 현서의 감정들은 강한 거부감뿐이었다. 밀실에서 현서가 내력을 억지로 일으키려 하자 옥이 기겁을 하며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듣고도 모른 척한 것이 아니라 아예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뻔히 아는데, 그걸 어떻게 두고만 볼 수 있을까.
―이 미련퉁이야. 왜 그런 게야. 저게 무어라고.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다행히 내력을 오래 쓰지 않아 더 큰 화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옥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속상함이 가득했다.
아직 현서의 실력으로는 무모한 일이었다. 현재로선 기를 쓰면 열 번에 한 번 정도 작은 쪽지 하나 태울 수 있을 정도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 사성을 전부 익히긴 하였으나 사성을 완성했어도 안 될 일이었다.
지금 현서는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내력을 끌어다 쓴 바람에 극심한 반동을 받아 기혈이 뒤틀린 상태였다.
다른 문파들이 알면 욕을 할 정도로 사기에 가까운 뛰어난 내력 운용법이 이 순간엔 독이 된 셈이다. 온전하지 않은 내력을 강제로 사용했으니 가뜩이나 약한 몸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옥이 현서에게 무공을 가르친 것은 건강해지라 한 것이지, 아프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몸을 보호하려고 배운 능력으로 몸을 상하게 하다니, 이런 바보 같은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현서가 이유 없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속상한 것 또한 별개의 문제였다.
‘견딜 수가 없어. 그건 안 돼. 싫어.’
여전히 옥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현서는 독백이나 다름없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소란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곽나난이 곽가의 가주로서 함구해 줄 것을 정중히 부탁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이 일을 떠들고 다닐 이도 없었다. 실제로 안에 들어갔던 것은 네 명뿐이었고, 목이태가 막 사는 것처럼 보여도 이런 일을 입에 올릴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진 않았다.
현진과 현서가 머물던 별채는 폐쇄되었다. 두 사람은 처소를 옮겨야 했는데 현재 곽부는 손님으로 포화 상태라 마땅한 곳이 없었다. 현규가 자신의 처소로 데리고 가려 했으나 사람이 많이 드나들어 정양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유위람이 나서 자신의 처소를 추천했다. 유위람도 마냥 한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규보다는 덜 바빴고, 무엇보다 유위람의 처소에는 드나드는 객이 없었다.
이번에도 현서를 도와주어 현규의 신뢰가 더욱 도타워진지라 물 흐르듯 결정되었다. 현진은 어머니인 이약약의 처소로 가고, 현서만이 유위람의 별원에 머물게 되었다. 현서가 눈을 뜨기 전에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이사였다.
그렇게 유위람의 처소에서 현서를 진맥하게 된 화정은 이토록이나 급작스러운 기력의 뒤틀림에 당황했다. 현서의 비밀을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 현서에게 일어난 일들이 전부 평범한 일들이 아니었던지라 그 때문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한밤중이 되자 다섯 명은 밀실에 모였다. 현서가 일으킨 불은 아주 깔끔하게 인형만을 불태웠다. 혹시나 화재로 번질까 감윤이 끝까지 지켜보았지만 그 기분 나쁜 인형만이 촛농처럼 녹아버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인형이 입고 있던 옷과 이불은 그을림 하나도 없었다.
‘저놈 저거 나한테 말도 없이 삼매진화의 경지를 저 정도로 올렸어? 상도덕도 재수도 없는 놈일세. 그사이 얼마나 더 는 거야.’
감윤이 애꿎은 유위람을 욕했다. 내력으로 일으킨 불은 맞지만 삼매진화는 아니었고, 유위람이 했다면 옷 정도는 다 태웠을 거라는 걸 감윤은 몰랐다. 졸지에 과대평가로 칭찬받으며 욕도 먹게 된 유위람이었다.
“근데 왜 태운 거야?”
그 누구도 유위람이 하지 않았다는 가정은 하지 않았다. 이걸 좋게 봐야 하는 건가. 유위람이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내가 하지 않았다.”
유위람이 손끝에 불꽃을 일으켰다. 내력으로 일으킨 푸른 불꽃은 낮의 불꽃과 색이 살짝 달랐다. 이윽고 그 불은 녹아버린 잔해에 옮겨 붙었다.
“봐. 내가 했으면 저렇게 옷에도 불이 붙었을걸.”
옷가지에 불길이 옮겨 붙자 유위람이 손을 휘저어 불을 꺼버렸다.
“들키면 불이 붙게 되어 있었나.”
소화리의 추측은 그럴듯했다. 유위람이 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할 수 없었으니 당연한 추론으로 보였다. 모두가 소화리의 말에 납득했다.
딱 한 사람 유위람을 빼곤.
유위람은 현서를 의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심하는 것은 현서의 팔목에 있는 팔찌다.
그간 현서와 지내며 유위람은 몇 가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서가 강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서녕호가의 대단함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치자. 그 정보력과 금권의 위력을 유위람도 체감했으니까.
허나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현서는 종종 가만히 있다가 웃거나 표정이 변할 때가 있었다. 슬쩍 캐어보니 오래도록 병상에 혼자 있어 생긴 버릇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혼자 공상하는 것이 아니라 팔찌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느라 그런 것이라면?
노괴(老怪)라고 불릴 정도로 오래 산 스승님들은 내키면 기담괴설(奇談怪說)이나 비사(祕事) 같은 것들을 얘기하곤 했다. 스승님들의 얘기를 전부 믿지 않지만, 세상에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단언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개웅산으로 보냈던 우서의 연락도 유위람의 의심에 한몫했다. 검선이 무너뜨린 절벽은 이십 년이 지나 이미 산의 일부가 되어 온갖 나무와 풀들이 엉겨 자랐다. 어디가 원래 절벽이었는지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다. 누군가가 흙을 판다면 무성한 풀과 나무들에 손을 댈 수밖에 없다.
팔찌가 서녕호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팔 년 전의 일이다. 산세를 잘 아는 약초꾼들을 두루 탐문한 결과 십 년이 넘도록 지형이 바뀐 일은 없었다고 했다. 큰 비가 몇 번 오긴 하였으나 윗부분의 토사만이 쓸려나간 것이 고작이라고 한다. 인위적으로 땅을 판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유위람은 생각을 달리해 보았다. 팔찌는 검선이 패용하던 것으로 아마 사문에서 대대로 물려 내려온 신물일 것이다. 검선의 사문이 유명하지 않다 해도 한 사문의 귀물(貴物)이다. 팔찌에 신묘한 신성이 어려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니 팔찌가 신물이라 호현서가 팔찌와 교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현재 유위람이 가진 의심의 골자였다.
그러나 유위람은 자신의 의심을 발설하지 않았다.
우선은 현서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이 싫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데 저놈들까지 붙어 정신없게 만들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이유는 현서가 피를 토했기 때문이다.
유위람은 인형이 불에 타는 것에 팔찌가 일조를 했다는 의심을 가졌지만, 현서가 피를 토하는 바람에 폐기했다. 검선의 팔찌가 현서에게 위해를 끼칠 리가 없다고 믿어서였다.
소 뒷걸음을 치긴 쳤는데, 이건 쥐를 잡은 건 아니고 쥐를 살짝 건드려본 수준이다. 그러니 맞은 것도 틀린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가 되었다.
“네가 모르는 밀실은 아니지?”
“그래. 내가 가주가 되면서 들어가게 된 비고(祕庫)에는 저택의 밀실과 비밀 통로가 전부 그려진 지도가 있었어. 집 안에 내가 모르는 비밀 통로는 없다.”
“그건 다행이네.”
검으로 벽을 부수거나 구멍을 내는 것과 달리 글을 새기는 것은 좀 더 높은 경지를 필요로 한다. 그런 경지의 사람이 집 안을 몰래 오간 것이니, 혹여 가주인 곽나난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있을까 싶어 걱정한 것이다. 그런 친구들의 염려를 아는 곽나난이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주에 오르고 난 뒤 한 번씩 집 안의 모든 비밀 통로와 밀실을 확인해 왔거든.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이 오 년 전인데 그때 이곳은 아주 깨끗했어. 아니, 가구도 없었단 얘긴 아냐. 가구는 있었지만 살아 있는 건 거미 한 마리도 없었다는 말이지.”
곽나난의 손이 거침없이 벽면의 글자를 짚었다.
“이건 가문의 도법인 절속도(絕俗刀)의 흔적이야. 마치 검흔처럼 보이게 하는 특징을 가져. 이렇게. 절속도는 곽가의 직계만이 배우고 익힐 수 있어.”
“아.”
화정의 탄식이 따랐다.
“막내 숙부께서 몸 건강히 잘 지내시는 모양이야. 집에 돌아오셨으면서 조카 얼굴도 한 번 안 보시다니. 매정하시네.”
곽나난의 말이 이어질수록 모두의 표정이 묘해졌다. 미쳤는지 제 정신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오 년 이내에 곽다순이 이곳을 방문했다는 뜻이 된다.
어쨌든 곽다순은 친구의 숙부이니 계속 입에 올리기도 애매하다. 이 일은 이렇게 일단락 지어야 했다.
“저 기분 나쁜 건 어쩔 거야? 내가 부적 하나 써줄까?”
감윤이 물었다. 태호문은 도가 계열로 감윤 역시 전통에 따라 축귀부(逐鬼符)나 정화부(淨化符) 따위를 쓸 수 있었다. 다만 효력은 없다. 감윤에게 부적을 쓰는 재능은 없었지만 사기(邪氣)에 예민해서 저대로 두어도 되는지를 물은 것이다.
“막내 숙부의 분실물로 보이니 잘 챙겨두어야지. 부적은 됐어.”
“네가 쓰는 부적을 믿느니 내가 만든 고약을 붙여두는 게 더 영험하겠다.”
영양가 없는 대화들을 뒤로 하고 유위람은 상념에 빠졌다.
‘곽다순이라.’
현서가 피를 토한 건 곽다순 때문일까? 곽다순이 검선의 팔찌를 노리나?
여전히 팔찌가 현서에게 나쁠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전혀 하지 않는 유위람이었다. 결과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유위람의 소는 여전히 뒷걸음질을 이상하게 치고 있었다.
유위람은 현서를 좀 더 주의 깊게 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살피는 것이 팔찌가 아니라 현서라는 게 이상했지만 예의는 있어도 양심은 없는 유위람에겐 그 어떤 문제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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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업자득이란 이런 것이다. 현서는 뾰족한 바늘이 천 개쯤 꽂힌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더니 옛말 틀린 것이 하나도 없구나.”
현규의 탄식에 현서는 더욱 쪼그라들었다. 옥도 단단히 화가 났는지 달래주는 말 한마디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호기심에 따라가 여러모로 걱정을 끼쳤어요.”
밀실에 들어섰을 때의 기억은 물에 풀어놓은 실타래처럼 얼기설기 흐트러져 명확하지 않았다. 심하게 열이 올랐을 때처럼 온몸의 감각이 유리되어 붕 떠 있었다.
하지만 또렷한 것이 있었는데, 눈앞의 저걸 치워버려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지금도 그것을 떠올리면 심장이 쿵쿵 뛰고 입 안이 말랐다.
그것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진저리 치게 끔찍했다. 단 한순간도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없애지 못하면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기에 다시 그 상황에 놓인다고 해도 현서는 주저 없이 내력을 사용했을 것이다. 몸이 어떻게 되든 간에 반드시.
허나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따끔거리는 양심의 가책에 현서는 방아깨비처럼 꾸벅이며 사과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너더러 사과하라고 한 얘기가 아니야.”
현규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며 다독거렸다. 이사에게 물었더니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현서가 따라가길 원했다고 했다. 이유가 있겠지. 아니, 이유가 없어도 괜찮았다.
황금으로 만든 정원에서 평온한 삶을 누리기만을 바라는 것은 가족의 욕심이다. 현규가 자식을 낳아 길러보니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들이 현서에게 안온을 이유로 무엇을 막고 있는지를 말이다.
이제 현서는 스물다섯 이후의 미래를 얻었다. 그러니 앞으로 쭉 하고픈 것만 하며 살길 바랐다. 그 발아래 황금이든 비단이든 깃털이든 못 깔아줄 게 어디 있을까.
“네가 건강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네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야.”
처음엔 건강을 유념하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사과만 하는 동생을 보니 현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아마 부친이 오셨어도 똑같았을 거라 확신하며 말을 돌렸다.
“여행을 가려면 이 반쪽이 된 얼굴부터 다시 살찌워야겠다. 잉어인삼탕을 하루 세 번 먹는 건 어떨까?”
“차라리 약을 더 먹을게요. 그런데 여행이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현규가 지금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 비무회가 끝나고 나면 너를 항도에 보낼까 하는구나.”
“항도요? 거긴 왜요? 너무 멀지 않을까요?”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은 현규가 아니라 유위람이었다.
“멀다 해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항도는 풍광도 인심도 좋지만 기후가 온난한 곳이라 요양하기에 그만한 곳이 없지요. 천하에 좋은 원림이 다 모여 있다는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검각 사람이어서 이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항도는 호 공자도 좋아할 곳이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유위람이 양손 가득 찬합을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이걸 직접 들고 오시다니.”
“바로 앞에서 받은 것이라 괜찮습니다. 식기 전에 드시는 게 좋겠네요.”
이사가 받아 들려고 하자 유위람이 괜찮다며 그대로 찬합들을 전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패천검께서도 식전이면 같이 드시는 건 어떠십니까?”
양손에 네 개씩, 총 여덟 개의 찬합이니 양이 부족할 리가 없었다. 이사는 패천검이 같이 식사를 하려고 일부러 왔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사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유위람은 항도의 명물들을 잘 알고 있어 현서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추천하기도 했다. 항도를 다녀온 적이 있는 현규가 적절히 맞장구를 쳤다. 항도 여행이 결정되기까지의 우여곡절도 있었거니와 검선의 사당에 대한 부담감이 있던 현서도 긍정적으로 느끼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업보 청산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식사 후 두 사람이 떠나고, 이사도 자리를 비운 방엔 현서만이 남았다.
‘화 많이 났어? 나랑 계속 말 안 할 거야?’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대답은 없었다.
현서가 정신을 차리자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던 옥이 화를 냈다. 옥이 보기에 현서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형국이었으니 놀람과 걱정이 화가 되었다. 이번에야 운이 좋았지만 주화입마(走火入魔)에라도 빠졌다면 화정, 아니, 화정의 스승이 와도 구할 수 없었을 터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정신이 없었기도 했거니와 옥에게 무언가를 숨길 마음이 없던 현서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고스란히 말했다. 현규에게 하지 못했던, 다시 그 상황이 된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는 얘기까지 전부.
말을 끝내고 나서야 옥이 불벼락을 내리겠구나 싶어 아차 했다. 하지만 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차 말을 걸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현서는 옥이 평소와 다르게 화가 난 것을 알아 얌전히 기다리며 하루를 꼬박 채웠다. 옥과 대화한 이후로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현서는 내내 마음을 졸였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화 풀면 안 될까?’
잠시 후, 한층 더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옥이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화 난 거 아니다.
‘하지만 아침에 엄청 화내고 계속 대답도 안 했으면서.’
일단 옥이 대답하자 크게 안도한 현서가 옥에게 치댔다. 옥이 사람이었다면 옥에게 달라붙어 있었을 모양새다. 하루 종일 곁에 있고, 이사나 다른 가족들에게 못 하는 얘기도 할 수 있는 만큼 가장 친밀하게 여기는 상대가 옥이다. 그런 옥이 화를 낸 뒤 말을 하지 않으니 심정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게 아니야.
현서가 심히 안심하는 모습에 옥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누그러졌다. 옥은 저 어린 것을 괜히 마음고생시켰다고 혀를 찼다.
분명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다.
하지만 현서의 말을 듣고 곰곰이 되짚어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현서가 저렇게 격하게 반응을 보였다는 것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옥도 물론 그 인형을 보았다. 시체로 만드는 강시, 산사람으로 만드는 생강시, 사람 가죽을 이어 만든 인형부터 반혼의 제물까지 옥은 다양한 것을 알고 있지만, 옥이 보기에 밀실에 있던 그것은 그냥 인형이었다.
크기가 크고,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들이 갖고 노는 헝겊인형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그냥 감상하거나 갖고 노는 것 말고 다른 용도로 쓰지도 못한다. 왜냐면 저건 알맹이가 없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깊게 살피지 않았다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별것 아닌 인형이라고 넘겼을 터였다. 실제로 옥은 현서의 상태가 이상한 것에 집중하느라 인형에 관해선 별 이상한 취미도 다 있다고 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알맹이가 없다 해도 목적을 가지고 만든 인형임을 한눈에 알아보아야 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그때부터 옥은 자신의 기억과 사물을 보는 지각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옥이라고 해서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고, 모든 시간들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옥의 지식은 사문의 사람들이 쌓은 것에 편중되어 있었다. 태생이 팔에 차는 옥팔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다. 사람의 팔에 있을 때의 자각과 기억이 가장 선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자문원의 스승이 자문원에게 말하길 팔찌는 지선이 된 개파 시조로부터 내려온 것이라 했으나 옥은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몰랐다. 기억에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자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옥도 모른다.
옥의 기억은 돌에 새겨진 흔적 같았다. 오래된 기억들은 풍화되듯 흐려졌고 최근으로 올수록 뚜렷했다. 현서와 함께 한 기억이 가장 선명하고, 그 다음이 자문원, 그리고 자문원의 스승, 그 스승 이런 식이었다.
하루를 몽땅 투자해 기억들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지만, 옥은 왜 자신이 저 인형을 그냥 넘겼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적잖이 찜찜한 일이었다.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랬다.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야.
옥이 옛 기억을 더듬으면 외부 자극에 둔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가 잘못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
옥은 현서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옥은 현서가 독을 먹고 삼 년이 지나서야 현서의 손에 들어갔다. 이전에 말을 해본 적이 없어 사람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몰랐다. 석청담에서 속이 터져 한 소리 하는 것을 현서가 들으며 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현서가 꿈 이야기를 하고서야 자문원의 환생이라는 것도 알았다. 당시 옥과 현서는 세상에 이런 인연도 다 있구나 하고 놀라워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옥은 지금 그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그건 불가항력이었는데…….’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네가 또 하겠다면 내가 말려도 소용이 없을 것이 아니냐. 그러니 그만한 실력을 가지도록 하는 수밖에. 네가 내력으로 집을 태워먹어도 멀쩡한 걸 목표로 삼아야겠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혹독하게 수련을 해야지. 원.
단호한 옥의 말에 울상을 짓는 척하며 현서가 푸스스 웃었다.
‘내가 정말정말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말로 때울 생각 하지 말고.
옥은 걱정들을 밀어 넣고, 우선 편애하는 이 어린 것이 어디서 피나 토하며 쓰러지지 않게 대비부터 할 요량이었다.
❖ ❖ ❖
며칠 뒤, 비무회 결승의 날이 밝았다. 흐린 날씨지만 오월 중순이라 따뜻했다.
잉어인삼탕의 위력인지 내용물은 가르쳐 주지도 않던 팥죽색의 약 덕분인지 현서는 비무회를 보러 가도 좋다는 허락을 무사히 받았다. 팥죽색 약의 가장 중요한 재료를 이약약이 구해다 주었다고 하는데, 숙모께서 무엇을 구해 왔는지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기암일사라면 그 유성추라는 걸 사용하신다는 분이죠?”
이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벽에 구멍이 나고 현서가 쓰러지고 그 난리의 시작이 기암일사의 얘기라 그런 모양이었다.
“유성추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는데.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너무 궁금해.”
결승에 오른 사람은 검각의 제자인 정금검(精金劍) 벽부용과 기암일사였다. 기암일사는 얼굴을 가리고 사문을 밝히지 않아 추측이 난무했다. 별호가 기암일사라고 하였으나 유명한 사람은 아닌지 이렇다 할 얘기도 없었다.
마공(魔功)을 쓰거나 무림 공적이거나 지명 수배 중인 범죄자가 아닌 이상 사문을 밝히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은거기인이나 유명한 고수가 이름을 숨기고 참가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무회에 참가하지 않은 고수들의 명단을 만들어 기암일사의 정체를 맞춰보려는 이들도 있었다. 내기도 성행했다. 그간 보여준 정금검의 무위도 훌륭했지만, 정체를 밝히지 않은 고수에 무게가 쏠려 내기는 사 대 육 정도로 갈라졌다.
결승전이니 만큼 누대의 이 층에는 곽나난과 호현규를 비롯해 있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있었다.
“정금검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도 기암일사가 우승하리라 봅니다.”
“뭐? 돈은 정금검에게 걸었다며.”
“그거야. 정금검은 검각의 제자이니 당연하지요.”
주최의 체면으로 곽나난과 호현규는 내기에 참여하지 않았고, 현진은 이약약의 눈치를 봐서 하지 않았다. 목이태를 비롯해 현진의 친구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패천검을 빼고 화정과 소화리, 감윤 모두 기암일사에 걸었다.
“검을 쓰시니 정금검이 더 유리할 줄 알았는데요.”
현진이 이약약에게 묻자 그런 아들을 귀여워하며 말했다.
“오늘 경기를 잘 봐둬. 많은 공부가 될 거다. 강호인이 검을 많이 쓰는 건 그만큼 장점이 많아서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검이 더 유리한 건 아니야. 게다가 기암일사가 원래 쓰는 무기는 검이거든.”
“네? 정말요?”
“그럼, 너 빼고 여기 계신 분들 다 알고 있을걸.”
이약약이 말하는 여기에 무공을 모르는 호가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대화하는 사이 열 합이 지났다.
정금검은 현규 또래의 여검수로 대기만성형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사제들에 비해 뒤쳐진다는 평을 많이 받았으나 묵묵히 수련의 시간을 보냈다. 세월이 흐를수록 진가가 드러나 현재 그 또래 중에서 손에 꼽히는 검수로 자리 잡았다.
“여기서 지겠지만 배워가는 것이 있으니 분명 좋아할 겁니다.”
검각의 제자니까요. 유위람이 말했다. 겨루어보면 실력 차를 스스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정금검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현진이 엄청 집중한 얼굴로 관전하는 것에 이약약이 흐뭇한 얼굴을 했다.
“와!”
정금검이 비장의 한 수로 날린 검이 회전하는 유성추 끈에 부딪혀 막혔다. 유성추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회전하며 기암일사의 몸을 감싸 검을 쳐 냈다. 자세히 보면 유성추는 기암일사가 잡고 있지 않은데도 허공에 떠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력으로 유성추를 조정한다는 뜻이었다.
유성추로 무기를 감아 부러뜨리거나 상대의 몸을 묶는 것은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방어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현서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비무대 아래의 반응도 컸다.
―유성추의 줄이 반짝이는 걸 보니 금속이 들어간 것 같은데, 뭘 쓴 거지. 제법 쓸 만해 보이는구나.
‘그래? 하긴 직무검도 좋은 재료를 쓴 것 같다고 했지.’
무구에 관한 칭찬을 잘 하지 않는 옥이 괜찮다고 말하자 현서는 저 유성추가 신병이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현서가 헛짚은 것으로 옥은 현서의 호신 무기를 가늠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비다.”
후끈 달아오른 비무대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흐리더니 기어이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 비에 비무가 멈추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 맞는 것이 싫은지 기암일사는 하늘을 힐긋 보더니 기세를 바꾸었다. 속전속결로 끝을 내려는 것이다. 정금검이 검을 바로 잡았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격돌했다.
❖ ❖ ❖
밤사이 비가 많이 내렸는데 아침이 되니 아주 맑게 개어 화창했다. 느지막이 일어난 현서는 밥을 먹은 뒤 볕을 쬐기 위해 뜰에 나와 앉았다.
어제로 비무회는 끝이 났다. 이변 없이 우승은 기암일사의 차지였다. 기세를 바꾸자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유성추의 줄이 정금검의 목을 감고 날카로운 추가 얼굴을 겨누었다. 누가 보아도 기암일사의 완승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용혈의 주인이 생겼다.
비무회가 끝이 났으니 남은 것은 연회였다. 비무회 참가자라면 연회에 참가할 수 있었으나 상위 스무 명만이 저택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되었다.
애초에 현서는 그 연회에 참석할 뜻이 없었다. 저녁에 현진과 사씨 남매, 그리고 방천파 사람들과 이곳에서 조촐한 연회를 열기로 했다. 패천검도 흔쾌히 허락했다.
이사의 진두지휘 아래 연회 준비 중이었다. 현서는 처소를 꾸미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볕도 쬘 겸 뜰에 나와 있었다.
‘항도에 가면 검선의 사당에 가게 되겠지?’
―뭘 그렇게 걱정해. 거기서 살 것도 아닌데. 그렇게 싫으면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해. 그놈이 억지로 데려가진 않을 것이니.
‘억지로 가는 건 아냐. 그냥 좀 민망하네.’
옥과 두런두런 말을 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연회 준비로 곽부의 시비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던지라 현서는 그중 한 명이겠거니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유리를 세공해 만든 것 같은 미남자가 현서의 앞에서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현서가 반사적으로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남자가 손을 덥석 잡아 일으켜주었다.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뒤 손을 빼려고 했지만, 남자는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저자, 기암일사로구나. 왜 여기 있지?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기회가 생겼군요.”
“저를요? 누구세요?”
현서는 눈앞의 미남이 기암일사라는 것에, 그리고 자신을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에 놀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놀란 것은 기암일사의 등 뒤에서 나타난 패천검이었다. 패천검은 서슴없이 검집으로 기암일사의 목을 겨누었다.
“그 손 떼.”
검집이어도 충분히 위협적인 상황이었으나 남자는 여전히 현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요. 익히 말씀 많이 들어왔답니다. 그 때문에 저 혼자 너무 친밀하게 느꼈나 봅니다. 놀랐다면 미안한 일이네요.”
생글생글 웃어서일까. 미안하다고 하는데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정신없는 상황에 현서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는 눈앞의 남자와 그 뒤의 패천검을 번갈아 보았다.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패천검의 이마에 주름이 져 있었지만, 남자가 기암일사라는 것을 아는지 당장 목을 치진 않았다.
“목이 아프니 얼른 인사드리고 가야겠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사영이라고 합니다.”
유리같이 반짝거리는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 ❖ ❖
“그건 됐어.”
이사가 현서의 머리 위에 몽수를 씌우려고 하자 고개를 흔들었다.
“현진 도련님이 보내신 건데.”
“한밤중이잖아. 저걸 썼다간 앞이 안 보일 거야. 게다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나만 쓰고 있으면 이상하잖아.”
현서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현진의 걱정을 아예 모르지도 않아 잠시 고민하던 이사는 그래도 현서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럿이서 야시장 구경을 하는데 도련님만 꽁꽁 싸매고 있었다간 더 눈에 뜨여 표적이나 되기 십상이었다.
“이건 큰형님이 너 주라고 한 거. 이건 내 것.”
현서가 주머니 하나를 잡아 이사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소매 안에 넣었다. 모레 영우를 떠나 항도로 향한다. 그 전에 야시장에 가기로 했다.
전날 현서의 처소에서 열렸던 연회 자리에서 철서의 귀시장(晷市場)에 못 간 것을 아쉽다고 얘기하자 이곳도 비무회로 야시장이 열렸다며 구경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집안이 시끄러운 바람에 현서가 아팠다고 믿는 현규가 두말할 것 없이 찬성했다. 야시장을 통째로 살 수 있는 용돈도 넣어주었다. 준비를 마친 현서가 방 밖으로 나오자 사영이 혼자 뜰에 서 있었다.
“사 공자, 일찍 도착하셨네요. 안에 들어오시지 그러셨어요.”
“막 도착해서 괜찮아요.”
사영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사영은 우승자니 패천검의 처소에서 열었던 연회 참석자는 아니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동행하게 되었다.
어제 낮, 갑작스러운 인사를 건네며 등장해 일방적인 친분을 말했던 것은 기암일사의 스승이 현서의 할아버지인 호익원과 아는 사이여서였다.
현서가 독을 마신 일로 큰 충격을 받은 호익원은 서녕호가를 떠났다. 가끔 호가에 들를 때도 있었으나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현서가 독을 먹은 사실을 모를 때 할아버지가 자신의 약을 구하느라 밖을 떠도는 것이 쓸쓸하고 슬퍼 잡은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연신 현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나약한 사람이라 그렇단다.’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현서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아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후일, 독을 먹은 것을 알고 내막도 알게 되자 할아버지의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독을 먹은 일에 대해 현서는 분노는 했어도 배신에 관한 충격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하지만 평생의 인연이 엮인 할아버지가 느낀 배신감과 참담함은 전혀 다를 것이다.
가족들도 그것을 알기에 호부로 돌아오는 것을 강권하지 못했다. 대신 할아버지는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꼬박꼬박 알려왔다. 현서를 제외한 가족들이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천하를 떠돌며 진귀한 약재나 서책, 희귀한 물건들을 현서에게 보내왔다. 그러다 알게 된 사람 중에 신농자(神農者)가 있었다.
강호에는 기인(奇人)이 많은데, 신농자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이치를 알고 싶다고 공부를 하는 기인으로, 아는 것이 많아 만통자(萬通者)에 비견된다고 했다. 무림인이라기엔 학문을 하는 선비에 가깝지만, 대신 파고드는 분야가 잡학이라 재야 거사보다는 강호 기인으로 불린다고.
하지만 신농자의 무공이 출중하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기암일사의 고강함을 떠올리면 특이하긴 하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 데다 매우 실례가 되는 주제니 물어보는 이가 없었다.
얘기를 들은 현서가 내가 가르쳐도 천하제일인이 나올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가 옥에게 핀잔만 잔뜩 들었다.
익히 신농자와 할아버님의 인연을 알고 있던 현규가 어째서 처음에 밝히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기암일사가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용혈을 구해 오라고 하시긴 했는데, 우승하지 못하면 쪽팔리니 절대 아는 척하지 말고 몰래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으니 우승 후 말을 건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긴 하였다.
현서는 기암일사가 자신을 아는 것을 할아버님 때문이라 여겨 더 묻지 않았다. 중인환시에 가족들이 현서에게 하는 말들을 기암일사가 죽 나열하면 너무 수치스러울 것 같아서였다.
어쨌든 기암일사가 뜬금없이 현서의 앞에 나타난 이유는 알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야시장 모임에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기암일사가 조부에게 보낼 선물을 직접 고르지 않겠느냐고 말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영은 일찍 떠나야 한다며 야시장에 따라가 물건을 바로 받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거부할 리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야시장 일행에 기암일사 사영이 포함되었다.
“이제 가죠.”
현서가 이사, 기암일사와 같이 처소를 나서려고 하자 반대쪽 전각의 문이 열리며 패천검 유위람이 나왔다. 원래 여긴 유위람의 처소이니 배웅해 주는 건가 싶었는데 그는 자연스럽게 현서의 곁에 섰다.
“패천검께서도 가시는군요.”
“그렇다.”
기암일사의 물음에 유위람이 대답했다. 현서가 이사를 보았지만 이사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설마 형이 패천검께 부탁한 건가. 현서가 패천검을 바라보았지만 유위람은 유순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저놈이 가고 싶어 붙었겠지. 뭘 그렇게 미안해 하느냐. 싫었다면 현규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았을 거다.
옥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현규는 부탁하지 않았다. 유위람이 그냥 따라가고 싶어서 가는 것뿐이었다.
유위람은 원래 애들 놀러가는 데 따라갈 의향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기암일사가 같이 간다는 얘기를 안에서 듣고 있자니 가야겠다는 욕망이 강하게 들었다.
양심이 작은 패천검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잠시 생각해서 세간에 지탄을 받을 일인지를 셈해 본 뒤 그렇지 않다고 결론 내리면 그 다음부터는 거리낌 없이 행했다.
야시장에 가는 것은 당연히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유위람은 떳떳하게 현서의 곁에 자리했다.
저택의 입구에 있던 일행들은 현서가 양옆으로 기암일사와 패천검을 끼고 나타나자 잠시 굳었다가 서로 전음을 보내기 시작했다. 패천검이 왜 여기에 끼어? 너 이유 알아? 모르지. 이런 내용들이 오갔다.
현진마저 현규를 범인으로 짐작했지만, 사촌 형을 두둔하기 위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나중에 패천검이 동행했다는 보고를 들은 현규가 잘되었다고 좋아했으니 그리 억울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기암일사를 보는 목이태의 눈이 흥미로 잠시 반짝였지만 금세 시큰둥해졌다. 여기선 못 싸운다. 싸울 수 없는 상태의 사람은 관심 없었다. 일사문에서 사람들 복장을 뒤집고 계실 스승님의 선물이나 사기로 했다.
비무가 이루어졌던 격구장을 둘러싸고 야시장이 섰다. 여기저기 등을 잔뜩 켜놓아 전혀 어둡지 않았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양옆에 유위람과 기암일사를 둔 현서는 단연코 시선을 끌었다. 물론 현진이 준 몽수를 썼다면 더 눈을 끌 모양새긴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엄청 바쁘게 현서와 기암일사, 패천검을 오갔지만 두 남자의 남다른 기세에 밀려 멀찍이서 보는 것이 전부였다.
“됐어요. 이리 와요.”
현진이 현서를 챙기려고 그 사이에 끼어들어 보려고 했으나 번번이 밀려났다. 보다 못한 사수연이 현진을 잡아당겼다. 무슨 흑도 무뢰배도 아니고 일행이 전부 횡으로 길게 늘어서서 갈 순 없으니 말이다.
이사 역시 한 발 뒤로 물러섰지만 전혀 불만이 없었다. 저 사이에 끼고 싶지도 않았고, 도련님의 안전을 따졌을 때 조합이 좋았다. 더욱이 도련님이 자신을 찾지 않을 리 없다는 확고한 자신감도 있었다. 도련님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패천검과 기암일사의 시선이 같이 붙었으나 이사에게 그런 건 문제되지 않았다.
현서는 정말 오랜만에 오는 야시장에 들떠 물건들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조부와 기암일사의 스승님, 서녕에 있는 가족들을 비롯해 선물을 챙길 사람이 많았다.
“이 청자기잔은 무척 예쁘네요. 이거랑, 저 잔이랑. 저기 흑유잔도 다 주세요.”
영우는 강을 끼고 있지는 않았지만 지리적으로 상인들이 오가기 좋았다. 당연히 물건들도 다양하고 질도 괜찮았다.
현서는 보는 눈은 좋았지만, 자기 손으로 물건을 사본 적이 거의 없어서 적정 가격이라는 것은 잘 몰랐다. 하지만 바가지는 일절 쓰지 않았다. 이사가 나설 것도 없이, 상인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면 유위람이 물끄러미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약간의 바가지 정도는 그냥 모른 척해 주기도 해서 이사가 감탄할 정도였다.
영우가 있는 난주는 유명한 가마가 몇 곳 있어 찻잔이나 화병이 많이 있었다. 예쁜 것들부터 특이한 것들까지 다양했다. 현서는 개중에 가장 잘 만든 찻잔을 두 개를 조부와 신농자의 선물로 골랐다.
아끼는 비녀가 부서진 희서를 위한 청금석구슬부터, 비단 잉어를 좋아하는 둘째 형수님을 위한 잉어 모양의 매듭까지 이 야시장에서 괜찮은 물건은 싹쓸이할 기세로 물건을 샀다. 대부분의 물건은 곽부로 보냈는데 그 외 남긴 몇 가지 물건은 전부 유위람이 쥐고 있었다. 건네받으려고 이사가 청했지만 유위람은 재밌어하며 주지 않았다.
물건을 사는 재미에 담뿍 빠진 현서는 아직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기암일사는 그 광경을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기만 했다.
“맛있다.”
다리가 아파 올 무렵이 되자 유위람이 현서를 데리고 근처 다점에 갔다. 차 대신 발효한 청귤에 설탕과 얼음을 넣은 음료를 마셨는데 맛있었다. 야시장의 다점이라 노점이었는데 적당히 따뜻하고 시원한 봄밤이라 괜찮았다.
현진 일행은 바로 건너편의 술을 파는 노점에 앉아 있었다. 야시장 구경은 끝이 난 것인지 술부터 먹고 구경을 할 건지 한창 흥이 오른 일행들이 아는 척을 해 오자 현서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인상을 쓴 유위람이 양해를 구하곤 자리를 비웠다. 전음을 받고 졸지에 현서를 주시해야 하는 목이태가 툴툴거리긴 했지만 유위람의 말을 착실히 지켰다. 건너편의 일행이 아닌 척하며 이쪽을 주시하는 것에 사영이 웃었다.
“호 공자는 술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까?”
“관례를 올릴 때 제례용 술을 입에 머금어본 게 다라 먹어본 적은 없어요.”
현서의 몸 상태로 음주가 가능할 리가 없다.
“다음에 뵙게 되면 자랑하는 술을 대접하려고 했는데 아쉽게 되었군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차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기암일사가 떠날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려 왔다. 현서는 조금 전에 유위람이 들고 있어서 놀랐던 두 개의 찻잔과 서신 한 통, 그리고 기암일사의 몫으로 산 팥알보다 작은 금구슬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끈을 주었다.
“이것은 제 선물입니까?”
“네, 그리고 이건 뇌물이구요.”
현서가 소매에서 과자 주머니 하나를 꺼내 올려두었다.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기암일사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번에도 현서의 손을 잡아 왔다. 아프진 않았지만 상당히 꽉 잡아서 손이 빠지지 않았다.
“뇌물 감사히 받지요. 다시 만날 날이 곧 올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어둠에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저놈…….
‘왜?’
―맘에 안 들어.
옥이 작게 중얼거렸다. 패천검이 뭐만 하면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옥이라 현서는 이번에도 그런 종류인가 했다.
“저한테는 선물도 뇌물도 없습니까?”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어느새 돌아온 유위람이 현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맡겨놓은 선물 찾는 듯한 당당함에 가만히 듣고 있던 이사도 저도 모르게 납득하며 같이 물었다.
“그러게요. 도련님, 제 것은요?”
진짜 현서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선물을 줘야 할 것 같은 기세가 유위람의 말투와 몸짓 안에 녹아 있었다.
“어? 어. 물론 두 사람 것 다 있어요.”
―허, 참.
옥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를 뒤로하며 현서가 주섬주섬 몇 안 되는 짐을 뒤져 선물들을 꺼냈다. 이사의 것은 조그마한 조롱박이었다. 손바닥 크기의 조롱박을 열면 안에 금과 도자기로 만든 작은 인형들이 들어 있는 장식품이었다. 이사는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해 현서가 조카들의 선물을 고를 때 같이 감탄했던 것을 기억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위람에게는 한 뼘이 조금 넘는 화문검을 주었다. 화문검은 날 위로 비단을 떨어뜨리면 비단이 그대로 잘린다고 하는 가볍고 날카로운 검이다. 제작비가 비싸 채산성 때문에 장검으로 만드는데 단검으로 만든 것이 신기해서 샀다.
무슨 이유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팔리지 않아 야시장까지 흘러들어 온 물건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겐 비싼 장식용 검이겠지만, 패천검은 저 단도 하나로 야시장의 있는 사람의 칠 할은 너끈히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가죽에 섬세한 무늬를 새긴 검집도 무척이나 예뻤다. 야시장에서 물건 하나 사는데 금 한 냥을 썼지만 현서는 그만한 가격을 한다고 보았다.
패천검도 흡족한지 이리저리 검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뇌물은요?”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현서는 주섬주섬 소매에서 과자 주머니를 꺼내 패천검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얼결에 두 개가 나와 두 개 다 주었더니 패천검이 무척이나 흡족해 하는 얼굴로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