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章. 짝사랑의 자각 (1)
영우곽가가 있는 난주 영우에서 검각이 있는 소주 항도까지 가는 길은 여럿이 있다. 그중 가장 빠른 경로는 영우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함청에서 배를 타는 것이겠지만, 현서 일행은 육로와 뱃길을 섞어 택했다.
현서와 현진, 이사, 그리고 패천검은 영우에서 항도까지 쭉 함께 가지만 그 외의 인원에는 변동이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월영사는 무사히 만화산에 도착했다. 현서와 패천검이 얽힌 소문에 월영사를 특정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도, 여기저기 흩뿌린 가짜들은 한 번 이상씩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지금 그 물건은 안전한 곳에 있다.
곽나난을 비롯한 소화리나 감윤, 그리고 화정도 모두 현서가 말한 대로 월영사를 걷어 낼 수 있는 유주 감산 흑하에 가는 것에 동행하겠다고 알려 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같이 가지는 못했다. 곽나난과 소화리는 삼태현에서 있었던 유괴 사건의 실마리를 쫓은 뒤에 만화산으로 올 것이다. 의당 본산에 들려야 하는 화정은 항도에서 합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스승님이 시킨 일을 해야 하는 감윤과, 다시 양주 송가장으로 돌아가는 사씨 남매는 담주까지 같이 가기로 했다.
그렇게 영우를 떠난 열흘 동안 여행은 순조롭고 즐거웠다. 마차를 탈 때도 있었고, 말을 타기도 했다. 날씨가 좋은 날은 나무 그늘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감윤이 사씨 남매와 현진을 데리고 대련을 빙자해 놀아주는 것을 구경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덥진 않으세요?”
오월이 끝을 보이면서 날이 점점 더워졌다. 서녕은 덥지 않은 곳이기도 했고, 현서는 더위를 잘 타는지라 이사가 물어 왔다.
“내가 저렇게 움직였다면 모를까, 그늘에 있는 걸. 괜찮아.”
옥이 선언한 대로 현서는 요즘 바짝 구르고 있었다. 저들처럼 몸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채근당하며 내력을 수련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하지만 정신은 시들시들해도 익힐수록 몸에 활력이 도는지라 느긋하게 움직이는 이 여행에서 지치는 일은 없었다. 더욱이 옥은 당근과 채찍을 잘 사용해서 현서가 눈을 반짝이던 청연참도 같이 가르쳤다. 잘만 익히면 기암일사가 유성추를 몸에 두른 것도 따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현서가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매우, 아주 많은 시간이 들겠지만 말이다.
현진과 대련 중인 감윤은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감윤이 사 씨 남매를 향해 손짓했다.
삼 대 일의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감윤은 아직 여유로웠다. 세 사람이 분해하는 것이 느껴지자 현서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응원했다.
“저러면 재미가 없지요. 재미를 더해볼까요?”
그렇게 말한 유위람이 바닥에 있는 작은 돌을 몇 개 주워 냅다 감윤의 검을 향해 던졌다. 내공이 실린 돌은 검신에 부딪혀 검로를 살짝살짝 틀어 방해했다. 패천검의 방해는 아주 미세했지만, 그 덕에 셋의 검이 감윤을 좀 더 몰아붙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패천검에게 감사를 표한 세 사람이 좀 더 매섭게 감윤을 몰아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감윤이 질 리는 없었지만, 확실히 여유가 없어지긴 했다.
“유위람, 너 이 자식!”
감윤이 검으로 유위람을 향해 삿대질을 했지만, 멈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짜증은 났지만 감윤도 재미가 있었다. 그렇다고 유위람 욕을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위람은 감윤이 유리해질 때마다 돌을 던졌고, 감윤은 족제비 같은 자식부터 시작해 다양한 호칭을 유위람에게 붙였다.
“우와.”
현서는 유위람이 돌을 던질 때마다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비무회 때도 그랬지만, 현서는 대련 구경을 좋아했다. 유위람이 현서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잔재주를 부리는 것이 빤히 보였다. 눈알은 불손하지만 하는 짓은 가상하다며 옥이 혀를 찼다.
담주 난화는 번화한 관광 도시다. 질 좋은 온천 지대인 옥천의 관문 도시라 사람들이 많이 오갔다. 현서 일행 역시 옥천에 들렀다 가기 위해 난화에 도착했다.
옥천에는 현서의 온천 장원이 있었다. 물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데다가 온천은 요양에도 좋으니 현서는 전국 다섯 곳에 온천 장원을 가지고 있었다.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마침 옥천을 떠올린 현규가 가는 길에 들려보라고 말했고, 반대할 이유가 없어 일정에 추가되었다.
현서의 체력을 고려해 난화에서 하루 쉰 다음에 옥천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번성한 여행지답게 객잔과 식당들이 다양했다.
“진씨 아저씨가 여기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고 보증하셨답니다.”
“진씨 아저씨는 또 누구기에?”
“좀 전에 객잔에서 본 풍채 좋으신 분이요. 복주에서 오신 지 닷새째인데 삼 일간 여기 음식만 드셨대요. 유명하기는 복진루가 유명한데 거기보다 더 맛있다네요.”
마차와 말을 맡기기 위해 객잔부터 들렀더니 그사이 아는 사람을 만들어 정보를 얻은 현진과 사무문이 일행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현진이 원체 사교성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사무문과 있으니 세 배쯤 더 극대화되는 것 같았다. 사수연이 사무문의 뒤로 한 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자신과 있으면 어른스럽게 굴려고 하는 형인데, 친구와 있으니 조카들처럼 보여 현서가 웃었다.
진씨 아저씨의 입맛이 틀리지 않았는지 식당 안은 복작거렸지만 다행히 금세 자리가 났다. 오늘의 추천 요리부터 먹고 싶은 것들을 죄 시키고 난 다음엔 술도 시켰다. 물 대신 술을 마신다는 태호문 사람이 아니랄까 봐 감윤이 물처럼 마시려고 시킨 것이다.
“향이 무척 좋네요.”
곡물에 과일 향을 입힌 술은 보기와 달리 독하다고 하는데 마실 일이 없는 현서는 향만을 평했다. 매운 생선탕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매운 것도 먹지 않는 현서는 가벼운 계란탕을 먹었다. 파로 향을 내고 닭육수를 부어 끓인 뒤 계란을 잔뜩 풀어 넣어 폭신폭신하게 익혔다. 모두들 먹느라 잠시 말이 없을 정도였다.
내공으로 취기를 없애는 것부터 배웠다는 감윤이 술을 아예 동이로 시키자 현진과 사무문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하지만 세 사람, 아니, 사수연까지 넷은 곧 부어라 마셔라 하고 흥이 올랐다.
옥수수 낱알을 튀겨 설탕을 뿌린 간식을 간간히 집어 먹으며 현서는 그 왁자지껄함을 즐겼다. 소란이 일어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취객의 소음인 줄 알았던 소리가 점점 커지나 했더니 식당 한쪽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날아온 접시가 현서에게 닿지 않게 걷어 내며 유위람이 혀를 찼다. 이만 일어나 돌아가려고 하는데 감윤이 시킨 술동이에 걸려 넘어진 사람이 식탁을 덮쳤다. 재빨리 그 사람을 밀어내긴 했으나 이미 술이 거하게 취했는지라 현서 일행이 자신을 공격했다며 덤벼들었다. 취객의 동행도 마구잡이로 덤볐다.
감윤과 일행들이 시비꾼과 대거리를 하는 동안 유위람은 현서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초여름이나 마찬가지라 식당 일 층은 모든 문을 열어놓아 한쪽 벽이 전부 트여 있었다. 입구를 통하지 않고도 식당 밖으로 한 걸음 나오게 된 상태였다.
유위람은 이대로 저놈들은 내버려 두고 현서와 이사만을 챙겨 객잔으로 돌아가려 했다. 현서가 갑자기 튀어나가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도련님?”
현서의 돌발 행동에 놀란 이사가 따라가려 하자 유위람이 잡았다.
“내가 갈 터이니 너는 여기 있거라.”
유위람이 쫓아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아는 이사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서가 말을 타고 달린다고 해도 유위람이 못 쫓을 리가 없었다.
초저녁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현서는 이리저리 치여 멀리 가지도 못했다. 혹 넘어져 멍이라도 들까 유위람이 조심스럽게 현서를 잡으려고 했으나 잡지 못했다. 방해꾼이 끼어든 탓이다.
죽립을 깊게 눌러 쓴 다섯 명의 사람이 유위람을 둘러쌌다. 길을 막는 행태에 인상을 쓰고 한 소리 하려던 사람들이 심상치 않은 대치에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현서의 비밀 호위를 찾았더니 그들도 지붕 위에서 죽립을 쓴 이들과 싸우고 있었다.
유위람은 짜증에 눈을 가늘게 떴다.
등 뒤의 소란을 모르는 현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현서야! 왜 이러느냐.
‘너, 너는 못 봤어?’
―무엇을 보았다고 이래.
현서는 사람을 쫓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보았나 했는데 그 사람이 고개를 들어 현서를 똑바로 응시했다. 잘못 보았을 리가 없었다. 닮은 사람도 아니고 본인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정신없이 따라나선 것이다.
닿을 듯 말 듯했던 손이 끝내 옷자락을 잡아챘다. 이렇게 전력 질주를 한 것은 아홉 살 이후로 처음이었다. 말을, 말을 해야 하는데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현서의 행동은 명백히 이상했는데도 옷자락을 잡힌 상대는 현서가 숨을 고르는 동안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누굴 보았다고?
“그러니까! 자문……!”
숨을 잔뜩 몰아쉰 현서가 정신없이 말을 뱉다가 멈췄다. 커다랗게 뜬 눈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누구의 얼굴을 보았는지, 내게 마저 말해 주지 않겠니?”
조곤조곤 말하는 자상하고 다정한 목소리는 기억과 변함이 하나도 없었다. 저 유순해 보이는 얼굴도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익숙했다.
―저놈이 어디서 얼굴을 들이밀어!
옥이 유위람에게 화를 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사납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곽다순…….”
“그래, 나를 아는구나.”
곽다순이 땀에 젖은 현서의 머리를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그 손가락의 차가움에 깜짝 놀란 현서가 진저리를 쳤다.
현서는 자문원의 기억을 갖고 있었지만, 곽다순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곽다순이 배신을 하였든 하지 않았든 그 진실을 알아줄 사람이 이미 없지 않은가. 자문원은 죽었는데.
그런 이유로 비단 곽다순만이 아니라 자문원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더욱이 현서는 영우곽가에서 곽다순이 일으킨 참사를 몰랐다.
그러니 현서가 놀란 것은 곽다순이 살아 있어서가 아니었다.
―저놈을 보고 그렇게 달려 나간 것이야?
‘아니야. 내가 본 건.’
당황해 고개를 젓는 현서를 앞에 둔 곽다순의 눈은 현서의 왼팔을 향해 있었다.
“무슨 얘기 중이니? 문원은 팔찌와 대화한다는 얘길 내게 한 적이 없는데, 문원이 숨겨서일까? 아니면 너만 그런 걸까?”
현서와 옥, 둘 다 크게 놀라 아무 대꾸도 못 했지만 곽다순은 개의치 않아했다.
“부디 전자가 아니길 바라야지. 전자라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구나.”
―네가 아픈 게 무슨 상관이라고.
옥이 화를 냈다. 곽다순의 차가운 손이 다시 현서의 얼굴에 닿았다. 얼굴의 윤곽을 본뜨듯 속눈썹 하나하나를 더듬어나갔다.
“하나도 닮지 않았구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네가 누굴 보았는지 말해 주지 않으련?”
“그, 러니까. 자…… 자문…….”
현서가 말을 끝내기 전에 등 뒤에서 피비린내가 훅 풍기며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뵙는데도 예전처럼 변하신 게 하나도 없으십니다. 곽 숙부님이 이리도 무탈하시니 나난이 기뻐할 겁니다. 허나, 영우는 이곳이 아닙니다. 댁까지 가시는 길을 잊으셨다면 사람을 붙여드리지요.”
현서를 안아 들며 유위람이 말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에는 비아냥거림이 가득했다.
“시건방지기가 어린 시절과 다름이 없어 오랜만에 보아도 금세 알아볼 수 있으니 좋구나.”
“검선께 저를 예의 바르다 상찬하시며 인사시켰던 분이 곽 숙부셨는데, 그새 잊으셨나 봅니다. 하긴 댁에 돌아가시는 길도 모르는 분께 제가 괜한 소릴 한 것이겠지요.”
곽나난의 얼굴을 보아 바로 검을 빼 들지 않았을 뿐, 입으로 뱉는 말들에는 예의라곤 하나도 없었다.
―똑같은 것들끼리 잘하는 짓이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았던 현서는 두 남자의 날선 대거리와 옥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곽다순에게 모질게 말하는 유위람이 낯설지만 그보다 현서를 아연하게 한 것은 피 냄새였다.
음식점에서 일어난 싸움으로는 이런 피 냄새가 날 리가 없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곽다순이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는 몰라도 현서의 눈에 자문원이 보인 것은 예삿일이 아닌데, 아무 의심 없이 덥썩 따라나섰다. 미끼를 보고 좋다고 급히 달려든 물고기나 마찬가지였다. 현서는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곤 탄식했다.
“다치셨어요?”
현서의 목소리가 들리자 유위람은 언제 날을 세웠냐는 듯 유순하게 대답했다.
“제 것이 아닙니다. 다치지 않았습니다.”
급히 따라오느라 손속에 여유를 하나도 두지 않았을 뿐, 유위람 자신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없었으니 저들도 억울할 일은 없을 것이다.
패천검의 품에 익숙하게 안긴 현서가 연신 그를 걱정하는 모습을 곽다순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현서가 고스란히 비쳤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참으로. 기분이 나빠.”
작게 달싹이는 말은 유위람밖에 듣지 못했다. 현서를 안심시키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위람의 서늘한 눈이 곽다순을 향했다. 곽다순을 경멸하고 싫어하는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눈이었다.
유위람이 왜 그리 보는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으나, 납득해 주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자신을 그렇게 보아도 되는 사람은 눈앞의 저 어린 녀석이 아니니까. 엉망으로 뒤섞인 허무, 후회, 질투 따위가 곽다순의 광기를 부채질했다.
저놈의 팔을 잘라 내곤, 현서를 낚아채 갈까 하고 가늠하던 곽다순은 아직은 안 된다는 걸 깨닫고는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대로 곱게 보내주기에는 배알이 꼴린다. 어둑하게 가라앉은 곽다순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문원의 팔찌를 잘 보아두어라.]
[제가 왜 그 말을 들어야 합니까?]
[팔찌가 어떻게 밖에 나왔는지 궁금할 테니까?]
[제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군요.]
[눈앞의 보물을 너무 믿지 마려무나.]
전음을 보내며 곽다순은 현서를 보았다. 유위람은 그 시선이 어딜 향했는지 알았으나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곽다순이 현서를 보는 것이 싫어 치워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곽다순도 딱히 유위람의 대답을 바라지 않아 더 이상의 전음은 없었다. 그저 현서에게 재차 말을 걸었다.
“내가 너무도 미련해서 말이다. 알지만, 그래도 네 입으로 듣고 싶단다. 내게 말해 주지 않으련? 무엇을 보았니?”
곽다순이 다정하게 말했지만 현서는 입을 꽉 다물고 고개만 저었다.
현서는 곽다순을 자문원으로 보고 쫓아왔다. 닮은 사람을 두고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입고 있던 옷, 허리에 차고 있던 검, 머리를 묶은 끈까지 전부 천의맹을 떠나던 그날과 똑같았다. 현서가 옷자락을 잡는 순간 모든 것이 변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참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현서의 입은 열리지 않았지만 곽다순은 채근하지 않았다.
“하고픈 말이 많건만, 오늘은 이만 가야 하는구나. 다음에 보면 그땐 답을 해주길 바라마.”
부드럽게 말하며 곽다순이 흐릿하게 웃었다. 마치 우는 것과 같은 그 표정은 자문원이 천의맹을 떠나던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곽다순이 사라지자 현서와 유위람만이 남았다. 품 안의 현서가 눈치를 보느라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유위람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왜 갑자기 달려 나갔는지, 곽다순과 무슨 얘길 했는지, 곽다순이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팔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현서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바짝 긴장한 채로 눈치만 보고 있는 현서의 모습에 유위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걱정했습니다.”
“……죄송해요.”
추궁하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를 걱정했던 현서는 예상에 없던 유위람의 말에 당황했다.
“이사가 기다립니다. 돌아가지요.”
“……네.”
자박자박, 흙을 밟는 소리만이 들렸다. 굳어 있는 현서를 다독이며 유위람이 말했다.
“궁금한 게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호 공자가 얘기하지 않으면 캐어묻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사합니다.”
유위람의 배려가 무척이나 고마웠던 현서는 어떤 것들은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다. 물론 그 전에 옥과 상의를 해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현서는 자신이 곽다순을 따라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온 줄도 몰랐다. 큰길로 나가자 왁자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익은 식당이 보였다.
“도련님!”
식당 앞에서 목을 빼고 있던 이사가 현서를 발견하곤 한달음에 다가왔다. 유위람의 품에 안겨 있던 현서가 내려오자 이사가 매의 눈으로 현서를 살폈다.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때부터 폭포 같은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어딜 갔다 오셨어요. 그렇게 갑자기 가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시면 소인을 데리고 가셔야죠. 혼자 가시면 안 된다고요.”
틀린 것 하나 없는 이사의 말에 현서가 쩔쩔 매면서 앞으론 조심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보였다. 유위람은 가벼운 충격에 빠졌다. 이사가 너무도 서슴없이 자신이 하고 싶었지만 못 했던 말을 하고 있어서였다.
현서가 숨기고 있는 것들이 궁금하긴 했다. 분명 검선의 팔찌와 연관이 있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유위람의 신경을 건든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같이 있어야 해요. 이사는 너무도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말이지만, 패천검 유위람은 호현서에게 내비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유위람은 그 차이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형은? 싸움은 어찌 되었어?”
“싸움이라고 할 게 있나요. 도련님이 뛰어가시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리되었어요. 술에 취해 오해가 있었다며 주인에게 은표까지 주며 사과하던 걸요. 저희한테도 깍듯이 사과하시며 밥값도 대신 치렀어요.”
“그래?”
취객이 난동을 부린 것이 이번만이 아닌 듯 식당은 어느새 정리를 끝내고 새 손님을 받았다.
“그럼 형님과 다른 분들은?”
“현진 도련님과 일행분들은 숙소로 돌아가셨어요.”
“정말?”
현진이 술에 취해 쓰러져도 현서를 잊을 리가 없었다. 그에 놀라워하자 이사가 인상을 썼다.
“패천검께 정말 고맙다고 하셔야 해요. 바로 도련님을 찾으러 가주셔서 현진 도련님께 말하지 않았어요. 아니었다면 지금 여기 관군이 깔렸을지도 몰라요.”
그간의 경험으로 패천검의 확고한 실력을 믿은 이사가 일이 커지지 않게, 현진 일행에게 현서는 패천검과 이곳이 소란스러워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사가 현서를 따라가지 않은 것을 의아해 했지만, 패천검이 동행했고 곧 돌아올 거라는 말에 안심하고 객잔으로 돌아갔다. 현진이 남으려고 했지만 이사가 괜찮다며 돌려보냈다고 했다.
만일 패천검이 없었다면 이사는 주저 없이 현진에게 말했을 것이고, 현진은 난화를 발칵 뒤집어놓았을 것이다. 현서는 정말 면목이 없었다.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일에 정신이 없었지만 현서의 감사 인사는 놓치지 않는 유위람이었다.
객잔에 도착해 현진을 만나 대화를 하고 모든 일과를 끝내자 옥이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너도 알지?
‘응.’
현서는 자신의 신중하지 못함을 반성했다. 석청담의 친구들이 무정한 강호에서 사소한 실수로 다칠까 봐 그렇게 걱정을 해놓고는 정작 자신이 조심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옥은 크게 야단을 치려고 했지만 자신을 잘못을 깨달아 기가 죽은 현서에게 다시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이번은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도 운이 좋을 거란 법은 없으니 운에 기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자꾸나.
‘응.’
―피곤할 테니 그만 자.
‘하지만.’
―무슨 얘길 하고 싶은지도 알고, 무슨 걱정을 하는지도 알지만. 지금 너는 자야 해.
곽다순과 유위람에 관한 얘기를 더 하려고 했지만, 옥이 현서를 재웠다. 씻을 때부터 이미 눈이 반쯤 감겨 있던 현서는 곧장 잠이 들었다.
현서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옥은 생각에 잠겼다. 현서는 자문원의 기억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며 무척이나 기뻐하고 감사했지만, 옥은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늘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영혼임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은 과거가 현실의 발을 잡아선 안 될 일이다. 더욱이 전생을 자각했을 때 현서는 지금보다 더 어렸다. 자문원이 천수를 누린 것은 아니지만 그는 현서보다 한참 어른이었고, 몸이 아파 호부에서만 지낸 현서에 비하면 경험의 밀도 차이가 너무도 컸다.
큰물이 작은 물을 삼키듯 그 강력하고도 강렬한 기억들에 현서가 압도되어 이미 죽은 자문원의 그늘에 묻힐까, 옥은 늘 그것을 경계했다.
이번 일만 보아도 그렇다.
자문원에게는 위기의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신중함이나 조심성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다치고 죽을 뻔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가 아니라 평생을 강호인으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자문원의 성정 탓도 있었지만 자라기를 그렇게 자랐다. 어렸을 때는 스승이 그늘이 되어주었고, 스승이 죽은 뒤에는 스승에게 받은 배움이 그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현서의 세계는 자문원이 자란 세계와 완전히 달랐다. 지식은 있지만 그건 현서의 경험은 아니다.
현서의 인생이라면 현서가 직접 부딪혀가며 배우는 것이 맞다. 하지만 자문원의 일까지 현서가 부딪히는 것이 맞는 것일까. 강호인이 아닌 현서가 강호의 삶에 부대끼도록 두어도 되는 것일까. 제자를 키우는 것은 괜찮다 싶었는데, 말렸어야 했을까. 잠들지 않는 옥의 시름이 깊어졌다.
그리고 또 다른 방에선 유위람이 잠들지 못한 채 상념에 빠져 있었다.
전서구가 창을 넘어 들어오자 유위람은 기감을 넓혀 객잔 주위에 쓸데없는 것들이 붙지 않았는지를 살폈다.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고 현서가 잠이 들었는지 기척이 단순해진 것만이 느껴졌다.
깊이 잠이 든 것이 확실해지자 유위람은 살피는 것을 멈추었다. 곽다순을 만난 일로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잠을 설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 전, 허증을 앓은 이후로 유위람은 수시로 현서의 위치와 기척을 주시했다. 현서가 무엇을 두려워하든 그것을 없애주겠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고, 그 약속을 잘 지키는 중이었다.
모든 확인이 끝이 나자 유위람은 전서구가 가지고 온 쪽지를 펼쳐 보았다. 수하가 보내온 쪽지에는 몇 가지 소문과 정보들이 얽혀 있었다. 그중에는 기암일사가 영우를 떠나기 무섭게 용혈을 노린 이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도 적혀 있었다. 아쉽게도 죽었다는 얘기는 없었다.
비무회 승자를 축하하는 연회이니만큼 기암일사가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다. 용혈이 든 병을 받아 들자 많은 눈들이 번뜩였다. 축하 인사에는 기암일사 자신이 용혈을 먹을 것이냐는 질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에 기암일사는 유위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패천검이 용혈 주인이라면 먹겠느냐고 말이다.
유위람은 코웃음을 쳤다. 용혈은 확실히 뛰어난 영약이 맞다. 삼 년 전이었다면 유위람도 먹어볼 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위람의 경지에는 바닷물에 소금을 더 넣는 정도라 필요 없었다. 유위람이 오만하게 대꾸했다.
‘좋은 영약이지만, 내겐 필요 없다.’
‘저도 먹지 않습니다. 드릴 분이 따로 계시거든요.’
묘한 대답이었다. ‘저도’라는 말이 유위람처럼 용혈이 크게 효과를 보지 않는 경지라는 것인지, 먹지 않는 것이 같다는 의미인지 애매모호했던 것이다.
세인의 관심은 먹지 않는다는 말에 쏠렸다. 비무회의 승자가 되지 못했으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 참가하지 않았으나 용혈이 갖고 싶은 이들이 따라 붙었겠지. 그렇지 않아도 현서의 손을 잡고 느물느물 웃는 것이 거슬리는 사내였다. 죽지 않아도 제법 성가실 테니 그럭저럭 좋은 소식이라 여기기로 했다.
“무슨 소식이야?”
감윤이 야식을 챙겨 들고 들어오며 물었다.
“기암일사가 습격당했다더군.”
“저런.”
“그리고 정우문의 소문주가 항도로 오겠단다.”
십이 년 전 백화호 사건으로 정우문이 화오궁에 가진 원한은 상당했다. 바로 반격해 복수하지 못했다고 해서 손만 빨고 있었을 리는 없다. 해묵은 원한이 더 무섭다. 강호의 은원은 길고 깊다. 정우문이 가지고 있는 화오궁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사겠다고 했더니 소문주가 직접 오겠다고 한 것이다.
유위람에게서 건네받은 쪽지를 다 읽은 감윤이 물었다.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처음에는 흔한 시비인 줄 알았던 감윤은 현서와 유위람이 사라지자 상황을 의심했다. 허나 유위람이 같이 있었기에 이사가 둘러대는 것을 받아주었다. 나머지 일행을 객잔에 데려다 두고 뒤를 좀 캤더니 취객들 중 여행객을 갈취하는 근처 건달패가 섞여 있었음을 알았다. 아는 것 없는 하수인임이 뻔해 잡아다 족치지 않고 돌아왔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돌아왔다. 둘 다 표정이 좋지 않은 채였다.
“곽 숙부께서 오셨어.”
유위람의 말에 감윤이 묘한 표정을 했다. 밀실의 일로 곽다순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렇게 금세 만날 줄을 몰랐던 탓이다. 유위람만큼은 아니어도 감윤 역시 곽다순에 대한 평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도 곽나난의 숙부니 험한 말은 할 수가 없어 애매하게 물었다.
“뭐, 그분은 좋아 보이시던?”
미친 것 같았느냐는 질문이었다.
“너무 건강하신 탓인지 내 팔을 자르고 싶어 하시던걸.”
“우와, 곽 숙부를 응원할 뻔했네.”
감윤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금방 표정이 굳었다.
“역시. 그러셔?”
“미쳤냐고? 아주 그래 보였지. 하지만 건강하단 얘기도 맞아. 부리는 수하들도 있고, 그간 잘 지내신 듯해.”
곽다순의 등장 자체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곽다순이 조카의 친구인 유위람의 팔을 자르려고 했다는 것은 제법 놀랄 일이긴 했다.
곽다순은 형제 중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순하고 우유부단한 성정이 실력을 가로막아 비웃음을 사던 사내였다. 어린 유위람의 눈에도 곽다순이 걸출한 재능을 억지로 눌러두고 있는 것이 빤히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검선이 죽으며 끝이 났다. 폐관 수련이라는 이름하에 죽으라 보내진 곳에서 오 년의 절치부심 끝에 돌아와 곽가를 피로 물들인 일로 증명이 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오늘 곽다순의 모습에 유위람은 확신했다. 철서를 떠나 산에서 쌍주야차를 만났을 때 산속에 있던 모두를 짓누르던 강대한 기운. 분명 공격할 의사를 뚜렷이 보이며 살기를 뿌리다 어느 순간 물러나 버렸던 인물이 곽다순이었음을 말이다.
‘화오궁에 동맹이 있는 모양이네요.’
안가에서 현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곽다순이 화오궁과 손잡은 것이다. 조금 전 앞길을 막던 놈들의 등을 갈라볼 걸. 유위람은 아쉬워하며 감윤에게 물었다.
“곽 숙부의 행적을 좀 알아봐야겠어. 나난이 아는 게 있을까?”
“없을걸. 나난은 행적을 감춘 게 그분의 뜻이라면 존중하겠다고 하곤 수색도 보여주기 식으로 하다 말았으니까.”
자신이 했어야 했을 가문의 정리를 시기를 당겨 대신해 주었으니 곽나난은 막내 숙부를 모른 척하는 것으로 그 빚을 청산하기로 했다.
검선의 죽음에 곽다순이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곽나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곽다순이 무엇을 했든 그 후회가 처절한 것은 확실했고, 그것만큼 곽다순에게 큰 형벌도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나난이 괜찮다고 하면 정우문에 의뢰를 넣어야겠어.”
어쨌든 곽가의 사람이니 나난에게 물어보아야 했다. 곽다순에 대한 유위람의 호오와 별개로 곽나난에 대한 예의였다.
“근데 그분은 왜 호 공자를 데리고 간 거야?”
감윤은 현서가 먼저 움직였다는 것을 몰랐다. 곽다순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현서가 휘말렸다고 잘못 알았으나 유위람은 정정하지 않았다.
“검선의 팔찌가 궁금하셨던 모양이야.”
뭐가 더 있었지만, 지금은 말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유위람도 현서에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유품이라도 모으고 싶으셨나.”
검선의 죽음에 대한 후회가 곽다순을 미치게 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아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유품이라. 감윤의 말을 들은 유위람이 물었다.
“그 인형, 검선을 닮은 거 같았나?”
“뭐?”
유위람의 질문에 감윤이 깜짝 놀라더니 진저리를 쳤다. 그건 참으로 기분 나쁜 얘기였다. 팔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감윤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남자의 인형이었고, 목이태가 말하길 검수의 손이라고 하긴 했지만 얼굴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으니 확언할 수가 없네. 누가 그것을 보고 검선을 떠올릴 수 있겠어.”
그리고 잠시 후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후회를 견디지 못해 검선의 인형이라도 만들어놓고 싶으셨던 걸까? 그것 참, 안타까운 건지 끔찍한 건지.”
갈수록 작아진 뒷말은 속삭임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감윤도 월영사에 관한 얘기를 들었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급이 들었다는 데는 회의적이었다. 천하에 기이한 일이 많다고 해도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은가. 더욱이 검선의 시신은 이미 흙이 되었을 것이다. 육신은 썩고 혼과 백은 이미 흩어진 지 오래일 텐데 무엇으로 살리겠다는 것인가.
그 기분 나쁜 인형으로 검선을 살린다는 건 더더욱 상상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의 육신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난도질해 둔 것을 보면 인형은 그냥 인형이겠지. 감윤은 그렇게 결론 내렸지만 찝찝하긴 했다. 상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친 사람이니 말이다.
허황된 꿈에 젖어 한세월 보내는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그 흉물스러운 인형을 검선이라고 우기는 것은 안 될 일이다. 미친 건 아무래도 좋으니 적대적인 관계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난의 숙부에게 검을 겨누는 건 썩 입맛이 좋은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안 한다는 선택지가 없는 것이 감윤답긴 했다.
“역시 그 인형, 곽 숙부가 태운 거겠지?”
감윤의 질문에 유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찌가 인형을 태웠고 그 바람에 현서가 피를 토한 것이 아니라 곽다순이 사술을 썼고, 그 영향으로 현서가 피를 토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큰 착각이었지만, 곽다순의 무위가 어느 정도 가늠이 되니 제법 그럴듯해 보였던 탓이다.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건지. 탄식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감윤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야, 이번 기회에 우리도 사당에 검선의 동상이나 석상을 만들어보는 건 어때?”
현서가 들으면 질겁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감윤이었다.
번쩍번쩍하기론 황금만 한 것이 없다며 황금상이나 금박은 어떠하냐고 본인의 취향을 잔뜩 늘어놓은 감윤이 돌아가고, 방엔 유위람 혼자만 남게 되었다.
아침이 되어야 날아갈 전서구는 붓걸이를 횃대 삼아 졸고 있었다. 곽다순에 대한 뒷조사 여부를 곽나난에게 묻는 편지를 다 쓴 유위람은 붓을 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감윤에게는 곽다순이 검선의 팔찌에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지만 완전한 사실은 아니었다. 단순히 팔찌만을 원했다면 빼앗으면 될 일이다. 현서의 팔에서 팔찌를 뺏는 것은 어린아이 손을 비트는 것과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곽다순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더 없이 애틋한 시선과 다정한 말투로 현서를 대했다.
곽다순이 기막(氣幕)을 펼쳐 놓아 앞에 무슨 얘길 했는지 듣지 못했으나 뒷얘기는 유위람도 들었다. 곽다순은 원하는 대답이 있었다.
무엇을 들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니 하고 묻던 곽다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검선에 관한 것임은 틀림없겠지만 원하는 내용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유위람은 조소했다. 친우와 가족 사이에서 무엇 하나 선택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미쳐 버린 사람의 머릿속 따위 알 게 뭔가.
하지만 그 미친놈의 무위는 얕잡아 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 기분 나쁜 눈을 떠올리면 현서를 납치한다고 해도 놀라울 바가 아니었다. 곽다순과 싸워서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지킬 것이 있는 쪽은 유위람이라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다.
한층 더 신경 써 현서의 곁에 있어야겠다고 결심한 유위람이 미간을 찡그렸다. 단호하게 현서의 곁을 주장하던 이사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물론 지금의 유위람도 거리낌 없이 현서의 곁을 차지하고 있었다. 현서의 위치나 기척을 살피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현재 현서의 보호자는 유위람이다. 호현규에게 막냇동생의 안전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호가도 당연히 유위람을 믿고 항도로 보내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니 현서를 보호하고 살피는 것은 유위람의 몫이었다. 더욱이 곽다순이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붙어 있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이사는 현서의 측근 시종이라 그와 같은 말을 더 강하게 했던 것이겠지만, 그래도 뭔가가 달랐다. 현서의 좋은 보호자로서의 위치는 확고했다. 하지만 역시나 탐탁지 않았다.
신경에 거슬리는데 딱 들어맞는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한 유위람은 곧 원하는 답을 찾아낼 것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답지 않은 답답함에 혀를 찼다.
❖ ❖ ❖
이래서 사람은 찔리는 걸 들키면 안 돼. 현서는 아닌 척 눈을 굴린 다음 현진의 곁으로 스리슬쩍 다가갔다.
아침 일찍 눈을 뜬 현서는 침상에 누워 팔찌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째서 곽다순이 팔찌의 일을 아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현서가 곽다순을 자문원으로 보았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이것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둘 다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고민했으나 현서와 옥은 곽다순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결론밖에 내지 못했다. 혼란스러웠지만 곽다순이 말해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투성이다.
현서가 끙끙 앓자 옥이 혀를 차며 곽다순이 눈앞에 없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 물어보면 순순히 대답해 줄 것 같긴 했으나, 앞으로 만나는 일 자체가 없었으면 했기 때문에 옥은 그 얘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위람은 눈앞에 있다. 현서가 말하지 않으면 캐묻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지만, 그래도 켕기는 것이 있는 만큼 목에 가시가 걸린 기분이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패천검의 시선이 평소보다 좀 더 따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것. 제 놈이 더 묻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현진의 등 뒤로 숨었는데도 유위람의 시선이 따라붙었다고 옥이 화를 내는 것을 보니 기분 탓도 아닌 모양이었다.
멀찌감치 피할 순 없지만 그래도 제 발 저린 것이 있어 현서는 이사나 현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현서의 몸이 현진의 뒤로 반쯤 가려지자 유위람의 눈이 스윽 가늘어졌다.
[야, 호 공자 구멍 나겠다.]
보다 못한 감윤이 한 소리했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자신의 욕망을 바닥까지 파헤쳐 본 유위람은 지금 살짝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아주 살짝.
바라는 것이 호현서의 좋은 보호자나 다정한 친구가 아니라 좀 더 질척하고 사사로운 관계라는 점이 유위람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한 번 먹은 마음을 뒤돌아보는 일이 좀처럼 없던 유위람도 이번만은 우왕좌왕했다. 그래서 현서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계속 눈으로 좇았던 것이다.
찔리는 것이 있는 현서는 유위람이 자신을 추궁한다고 느꼈고, 유위람의 눈알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옥은 어제의 일 때문에 더 집요하게 군다고 보았다. 그리고 감윤은 저놈이 왜 저러나 싶었다.
유부남인 곽나난이 보았다면 또 모를까, 진득하거나 간질거리는 감정과는 천만 리쯤 떨어져 있는 감윤은 곽다순이 팔찌를 노리는 것 때문에 유위람이 지나치게 현서를 주시한다고 여겼다.
검선의 황금상은 만들 수 있어도 현재 소유주가 있는 팔찌는 내버려 둬야 한다는 뜻이 확고한 감윤은 유위람의 과한 시선이 현서를 겁먹게 할 거라 보았다. 지금 유위람의 머릿속을 알면 현서가 겁먹긴 할 것이니, 결과적으로 틀리진 않긴 했다.
감윤의 말을 들은 유위람이 시선에서 힘을 빼는 것과 동시에 현서가 숨듯이 마차에 올랐다.
옥천에 가기 위해 마차에 오른 현서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아침부터 기운도 없어 보이고, 패천검을 은근히 피하는 것을 보았던 이사다. 현진과 사씨 남매도 현서가 패천검을 피한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이것은 무공을 익혔고 익히지 않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위람의 시선이 평소와 다른 건 이사도 당연히 몰랐다. 하지만 이사가 살피는 것은 패천검이 아닌 현서다.
분명 어제 일로 기가 죽은 것일 테지. 마음이 약해진 이사는 오늘치의 잔소리는 빼주기로 했다. 현서가 자리에 앉자 간식 주머니를 넣은 소매를 정리해 주며 이사가 말했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어제 일 때문에 그러세요? 혹시 패천검이 화내셨어요? 패천검이 화를 내셨다고 해도 도련님을 걱정해서 그런 것일 텐데. 설마 엄청 크게 화내셨어요? 소인이 가서 대신 뭐라 해드려요?”
패천검이 화를 내다니. 현서가 재빨리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패천검이 화를 내다니 그런 일 없었어. 그리고 어제 일은 내가 경솔하게 군 것이 맞아. 잘못했지.”
“정말 화내지 않았어요?”
“응.”
“그럼 왜 패천검을 피해 숨으세요?”
허를 찌르는 질문에 현서가 일순 굳었다.
“어. 티가 났어?”
“소인의 눈에는 잘 보였는데 다른 분들은 모르실 거예요. 괜찮아요.”
너무도 당연하게 마차 안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유위람은 현서가 자신을 피한 것이 맞다 하자 손을 들어 가슴을 꾹 눌렀다.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화는 아니고, 서운함과도 달랐는데, 이게 무슨 기분인지를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패천검은 화를 내거나 그러지 않았어. 진짜야. 그냥 괜히 내가, 음.”
숨기는 것이 있다. 혹은 찔리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어 말을 고르자 이사가 나머지를 채워주었다.
“미안해서 그러셨다고요?”
“응. 그렇지.”
현서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말 못 한 것이 있긴 하지만, 아니, 그래서 미안한 것도 맞았다.
“패천검이 화를 내서 도련님이 기운이 없는 거라면 소인은 패천검께 가서 대거리하려 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그늘져 있는 현서를 위로하려고 부러 농담을 섞어 말하자 현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진짜 강호인 무서운 줄 모르고. 농담으로라도 절대 그런 소리 하지 마.”
“네, 알겠어요. 그러니 소인이 그런 무서운 일을 하지 않게 도련님이 절 챙겨 다니셔야 해요.”
끝에 하는 얘기가 본론이라더니 그 말이 맞았다. 현서는 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마차 안의 얘기를 듣고 있던 유위람은 현서가 강호인의 무서움을 잘 안다고 흡족해 하다가, 알면서 겁도 없이 곽다순을 쫓아가다니 하고 걱정했다가, 그럼 나도 무서운 강호인인가 하고 고찰하기에 이르렀다.
눈을 내리깔고 고민에 빠진 모습은 얼음결정으로 만들어 낸 미인의 모습이었지만 그 속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사와 대화가 끝이 나자 현서는 옥이랑 대화를 이어나갔다.
항도에 도착하면 패천검과 대화하겠다고 옥에게 말했다. 곽다순을 만난 일로 무언가 의심을 하고 있을 테니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유위람이 옥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현서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옥은 여러 가지를 따져 본 뒤에 유위람에게 말해도 좋은 것들을 현서와 골라내기 시작했다.
❖ ❖ ❖
난화와 옥천은 그리 멀지 않아 점심을 막 지나 장원에 도착했다. 장원의 소유주는 현서였지만 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짝 기합이 들어간 장원의 총관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현서를 맞이했다.
장원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일행의 수가 많지 않아 처소가 모자랄 일은 없었다. 일반적인 저택과 달리 온천 중심의 휴양 장원이라 구조가 다소 특이했다.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은 모든 처소에 개인 온천이 있다는 점이다. 대욕탕을 이용할 수 없는 사수연이 기뻐했다.
첫날의 이른 저녁은 커다란 멧돼지통구이였다. 장원의 주인이 온다고 근처의 사냥꾼들에게 특별히 부탁해 잡은 것이라고 했다. 양념을 바른 돼지를 벽돌을 쌓아 만든 화덕에 오래도록 구워 껍질에서 윤이 났다.
식사는 장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누각에서 이루어졌다. 누각은 단층이었지만 지대가 높아 건너편의 대욕탕이 내려다 보였다. 누각을 휘두른 좁은 개울이 대욕탕으로 이어지며 물소리를 만들어 냈다. 희미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것은 개울을 흐르는 물도 온천수기 때문이다.
이미 조리가 다 되었지만 보기 좋으라고 숯을 넓게 편 화로 위로 멧돼지가 통으로 걸렸다. 서녕에선 본 적 없는 조리에 현서가 즐거워했다. 비록 고기는 기름져 몇 입 먹지 못했지만 바삭한 껍질을 뿌린 죽은 맛있게 먹었다.
현서를 제외한 나머지는 잘 먹는 사람들이라 멧돼지는 금세 뼈를 보였다. 술도 빠지지 않았다. 온천에서 며칠 머문 다음 사씨 남매와 감윤과는 일정이 갈릴 예정이라 아쉬움에 술자리가 이어졌다.
현서와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위람도 일어섰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여기서 산책하고 있을게.”
이사가 약을 가지러 간다고 하자 현서가 따라 나왔다. 몸 상태가 좋아서 과식을 했으니 걷고 싶어서 대욕탕 근처에서 산책을 하려는 것이다. 근처의 환한 불빛과 잘 정리된 길을 보고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올 테니 멀리 가지 마시란 당부도 잊지 않았다.
현서의 팔에 있는 옥도 오늘은 조용했다. 식사 전에 현서에게 생각할 것이 있으니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수 있다고 알려두었다. 며칠 전 대답하지 않는 옥을 두고 화가 났다고 여겨 현서가 기가 죽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미리 언질해 준 것이다.
옥은 종종 호가의 사람들이 현서를 너무 싸고돈다고 혹평했지만, 현서를 편애하는 일에는 옥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오롯이 혼자가 된 현서가 온천을 둘러싼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처음 집을 떠나 양주로 향할 때만 해도 이렇게 멀리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독을 마신 일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일인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가족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자신의 혼사 문제를 비롯해서 화오궁에, 곽다순까지 만나게 되니 정신이 없었다.
가장 먼저 만난 과거의 인연은 화정이었다. 허나 전생을 떠올린 것보다 독을 먹은 것이 먼저라 사실을 알았을 때 별일이 다 있구나 하고 놀라는 것에 그쳤다.
숙모인 이약약과 현진이 강호 사람이지만, 석청담은 자문원과 인연이 없었다. 사무문과 사수연의 집안인 요천사가도 그러했다. 이제까지 전생의 기억으로 현서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말하는 옥팔찌였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양주에 도착하기 무섭게 곽나난의 아들인 완비와 유위람을 만났다. 그 뒤로 꼬리를 물듯이 감윤과 소화리를 비롯해 결국엔 곽다순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현서는 자문원이 죽었으니 모든 것이 끝이 났다고 여겼다. 아홉 살 이후로 죽음은 늘 현서의 코 아래 있는 존재였다. 아픈 건 싫고, 죽는 것은 무섭고, 가족들의 슬픔은 무겁지만 그래도 죽으면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은 잘 알았다.
그러니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그렇게 많지 않다. 항도의 있다는 검선의 사당이나 서녕호가의 사당에 늘 켜져 있는 장명등처럼 말이다.
하지만 곽다순은 달라 보였다. 현서의 눈에 그는 그 무엇도 끝나지 않은 사람처럼 구는 것 같았다. 그가 미쳐서일까? 여기서 현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곽다순이 미친 것에 대한 놀람도, 의문도 신기할 정도로 생기지 않은 것을 깨달아서였다. 자문원의 가까운 친우였는데 희미한 안타까움도 없다니.
“내가 싫어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유위람의 목소리에 현서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코앞에 유위람이 있었다. 현서는 눈을 껌벅이며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유위람의 팔을 보았다.
“저 때문에 놀라 넘어질까 봐 걱정이 되어서요.”
유위람의 기척을 못 읽으니 일견 타당하게 들렸다. 그렇구나 하고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옥이 보았다면 개수작이라고 한 소리 했겠지만, 현재 옥은 유위람의 수작질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산책 중이었습니까?”
유위람이 현서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침나절이었다면 시선을 피했겠지만 항도에 도착하면 비밀의 일부분을 털어놓겠다고 결정해서 마음이 놓인 상태였다. 껄끄러움이 가시자 현서는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네.”
현서가 평소와 다름없이 웃자 유위람이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현서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을 타고 현서가 당황해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호 공자가 평소보다 더 먹기에 산책을 하나 싶었지요. 여기서 더 가면 길이 축축하고 어두워진답니다. 이러면 넘어지지 않을 겁니다.”
길이 젖은 건 맞았지만 아주 조금이었고, 탄지공을 써 멀쩡하던 등 몇 개를 꺼버린 건 유위람 자신이었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현서가 다시 걷자 보폭에 맞추어 유위람도 천천히 움직였다.
깨물었던 혀가 쓰라렸다. 유위람은 방금 현서가 웃어주자 이젠 피하지 않네요, 라고 속마음을 불쑥 뱉을 뻔했다. 그 말을 들은 현서가 놀랄 것을 알아 혓바닥에 달라붙은 말을 가까스로 참았다.
현서가 유위람을 피한 건 아침나절의 잠시였으나 그 잠시간도 서운했다. 현서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살가운 것은 아니었으나, 철서를 떠난 이후로 보여주었던 그 무방비한 신뢰에 취해 있어 그 찰나의 외면도 뼈아팠던 것이다.
유위람은 자신의 감정이 혼란스럽기는 하였으나, 부정은 하지 않았다. 지금도 현서와 좀 더 닿고 싶어서 손을 잡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무엇이 싫었습니까?”
“네?”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호 공자가 혼자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
곽다순을 떠올리며 했던 말을 들은 것이다. 현서는 잡혀 있지 않은 손으로 볼을 한 번 긁은 다음 순순히 말했다.
“어떤 사람이요. 제가 아는 사람의 친한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이 아픈 것 같은데,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아서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을 싫어하나 하고 깨닫던 참이었어요. 아니면 제가 너무 매정한 탓이겠지요.”
“저는 호 공자를 오래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호 공자가 매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호 공자가 그자를 꺼려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유위람은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유위람을 아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자문원과 곽다순의 일인데 괜히 말한 건 아닌가 하고 금세 후회했던 현서는 패천검이 보여준 다정함이 좋아 배시시 웃었다.
“좋은 말씀을 해주시네요. 기운이 나요.”
“다행스런 일이군요.”
살랑대는 봄바람에 느슨하게 묶은 머리칼이 흐트러지자 유위람이 손을 놓고는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손 안의 온기가 이마로 옮겨가는 것에 현서의 시선도 자연히 들려 유위람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눈이 마주치자 유위람의 눈동자가 커졌다가 곧바로 해사하게 휘어졌다. 목이태를 처음 만난 날 보여준 혼을 빼는 환한 웃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선이 사로잡혔다. 현서가 멍하게 바라보자 이마를 따라 내려오던 유위람의 손가락이 귓불에서 멈췄다.
“도련님, 어디 계세요?”
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눈을 한 번 깜박인 유위람이 손을 거두었다.
“이사가 찾는군요.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이사가 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저 동그랗고 예쁜 이마에 입 맞추었을 것이다. 유위람은 자신의 충동에 당혹스러움과 아쉬움을 느끼며 물러났다.
“도련님? 왜 그러고 계세요?”
약이 덜 달여져 늦었다고 말하며 이사가 약 그릇을 들고 왔다. 현서는 영문 모를 간지러움에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유연천리(有緣千里)> 3권에서 계속
LUST 유연천리(有緣千里)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