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八章. 짝사랑의 자각 (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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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천리(有緣千里) 3권

황묘

目次

八章. 짝사랑의 자각 (2)

九章. 악의

十章. 어떤 비극들 (1)

八章. 짝사랑의 자각 (2)

다음 날도 날씨가 좋았다.

현서는 달게 자고 일어나 아침 일과를 모두 끝내고 이사와 대욕탕으로 갔다. 개인 욕탕도 근사했지만 장원이 자랑하는 대욕탕을 꼭 이용해 보시라며 총관이 권했기 때문이다.

어제는 어두워 자세히 못 보았지만 밝을 때 보니 과연 자신할 만했다. 움푹 파인 엄청나게 큰 바위가 탕을 이루고 있었다. 물이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건너편 누각 쪽에서 이어지는 물길을 비롯해 여러 곳의 물줄기가 대욕탕을 채우곤 다시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야외 온천이긴 하지만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고 그 위에 기둥을 높이 세워 지붕을 올려 그늘을 만들었다. 그리고 계단을 만들어 사람들이 잠시 쉴 수 있는 마루를 깔았다. 벽이 없는 곳이라 마루엔 병풍이 세워져 있었고, 요깃거리를 위해 다과상도 차려져 있었다.

현서가 도착했을 땐 이미 현진과 사무문, 그리고 감윤이 탕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현서가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살피다 이사에게 물었다.

“패천검께선 안 오셔?”

패천검이 같이 어울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감윤이 있으니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패천검께서는 일이 있으셔서 건너편 누각에 계신대요.”

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랐다. 마루에 올라 병풍 뒤에서 겉옷을 벗었다. 욕탕이라고 해도 알몸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처소에서 이미 이사가 챙겨준, 팔찌가 드러날 정도로 소매가 짧은 욕의를 챙겨 입고 왔다.

현서와 이사가 탕에 합류하자 다시금 시끌벅적해졌다. 야외에 있는 탕이라 그런지 처소에 있는 탕보다는 뜨거움이 덜하게 느껴졌다. 처음엔 욕탕 끝에 걸터앉아 무릎까지만 물에 넣었다. 기분 좋은 따뜻함이 발끝부터 타고 올라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현서가 물에 손을 넣어 장난치는 것을 보곤 사무문이 물어 왔다.

“그러고 보니 수연이가 궁금해 하던데.”

“무엇을요?”

“팔찌를 늘 그렇게 차고 다니는 거야? 온천 같은 뜨거운 물도 괜찮고? 수연이 말로는 옥은 잘 깨지니 조심해야 한다던데.”

팔찌 얘기가 나오니 감윤도 궁금한지 곁으로 다가왔다.

“맞아요. 저도 처음에 그렇게 들었어요.”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팔 년 전, 어머니가 깨끗하게 만들어준 옥은 꿈과 똑같은 색을 자랑했다. 어머니는 현서에게 팔찌를 건네주며 몇 가지 유의 사항을 당부했다. 옥은 잘 깨지기도 하는지라 혹시 깨져도 수리할 수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얘기도 해주었다. 현서는 팔찌를 애지중지하며 큰형수에게 물어가며 세심하게 관리했다.

지금의 반도 되지 않던 팔에 팔찌는 매우 커서 열세 살이 되었어도 팔찌를 차는 일은 없었다. 팔찌의 무게조차 팔에 부담이 될까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아 자주 끼고 있지도 못했다.

열네 살, 석청담에 가게 되면서 팔찌를 두고 가기 싫어 팔에 차고 갔다. 잘 때나 목욕할 때도 팔찌를 끼게 된 것은 팔찌와 말을 하고 난 이후였다. 정확히는 사문의 무공을 익히면서라고 할 수 있다.

현서가 잘 때는 물론이고 목욕을 할 때도 팔찌를 끼자 명명도 그렇고 이사도 처음에는 말렸다. 옥이 상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현서가 괜찮다고 말하니 더 말리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옥은 잦은 목욕에도 색이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봄날의 여린 잎처럼 보드랍고 생기 있는 색을 하고 있었다. 영험하신 옥팔찌 님이라는 얘기가 만희당을 휩쓸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도 한몫을 했다.

주변에서 하도 놀라워하니 현서도 궁금해서 옥에게 왜 다른 옥과 다른지, 그래도 괜찮은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내가 심히 잘난 옥인 것을 어쩌겠느냐.

옥의 대답은 그러했고, 현서는 옥도 모른다는 뜻임을 알았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현서는 적당히 대답했다.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옥에 대해 잘 아시는 저희 큰형수님도 처음 보는 일이라고 하셨어요.”

“옥이 아닌 건 아니야?”

사무문의 질문에 현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얘기도 있어서 확실히 감정을 받았는데 채옥은 확실하대요.”

대대로 보석과 장신구를 취급해 온 큰형수의 아버님까지 나서 감정해 보았으나 정말 좋은 채옥팔찌라는 대답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이 팔찌가 잘나서 그렇지.”

현서는 옥이 말한 줄 알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감윤이 한 말이라는 걸 알고는 웃어버렸다.

건너편 누각에 앉은 유위람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서가 대욕탕을 이용한다는 얘기에 유위람은 일부러 이곳에 자리를 마련했다. 한눈을 파는 사이 붓에서 먹이 떨어져 종이 하나를 망쳤다. 유위람은 미간을 찡그리곤 망친 종이를 구겼다. 종이는 곽다순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정우문에 보낼 의뢰서였다.

어제 날아온 전서구는 곽나난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감윤이 말한 대로 곽나난도 곽다순의 행적을 잘 몰랐다. 담주의 끝자락에서 목격 되었다는 흔적이 전부였다. 나난은 검선이 죽은 개웅산으로 갔다고 여겨 추격을 멈추었다고 했다.

그사이 곽나난은 소화리와 함께 인신매매단 몇 곳을 파헤쳤는데 다섯에서 열 살 사이의 아이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크게 돈 것은 최근이나 그 전부터 은밀히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일, 이 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고, 또 최근에 아이들이 많이 필요해진 이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무슨 목적인지 몰라도 좋은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예의상 덧붙인 것 같은 기암일사의 근황도 있었다. 습격을 크게 받았는데 그 후로 종적이 묘연하다는 얘기였다. 기암일사가 신농자의 제자라는 얘기는 그들밖에 모르는 일이긴 하였으나, 현서의 할아버지가 신농자의 저택에 머무는 중이니 호가에서 분명 그쪽에 호위를 보냈을 것이라는 말로 서신은 끝이 났다.

정우문에 보낼 의뢰서를 다시 작성 중인 유위람은 마지막 글을 적기 전에 또 시선을 대욕탕에 빼앗겼다. 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작정하면 시장 한가운데 있어도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듣지 않을 수 있건만 유위람은 그러기는커녕 청력을 최대한 돋워 저곳의 소리를 빠짐없이 듣는 중이었다.

온천탕에서 수영을 배워보자고 부추기는 감윤과 사무문의 목소리 사이로 떨떠름해 하는 현서의 목소리가 무척 잘 들렸다. 이사와 현진이 난색을 표하는 것을 보니 현서는 수영을 전혀 못 하는 것에 더해, 익힐 가능성도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수영을 못 하면 어떤가, 늘 자신이 곁에 있을 텐데. 유위람은 앞으로도 자신이 현서의 곁에 있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결국 의뢰서는 종이를 세 장 더 망치고 나서야 완성할 수 있었다. 현서가 즐거워할 때마다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기 때문이었다.

전서구가 날아가고 유위람의 일도 적당히 마무리되자 현서의 물놀이도 끝이 났다.

한 시진(2시간)이 채 되지 못했지만 너무 길게 하는 온천욕도 좋지 않았다. 발갛게 익어 혈색이 좋아진 현서의 몸을 이사가 가지고 온 커다란 영견으로 감싸는 동안 현서는 하나로 길게 묶은 머리칼의 물을 짜내고 있었다.

현서의 이마와 목덜미를 따라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유위람은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보고 있었다. 이윽고 물로 된 발자국을 남기며 마루에 오른 현서가 병풍 뒤로 들어가자 뒤따라 욕의를 벗는 소리가 들렸다.

유위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듣지 않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유위람의 온 청각이 병풍 뒤에 들리는 소리에 쏠려 있었다. 이사가 춥지 않느냐고 묻는 소리, 옷가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물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은 천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 등이 들려 올 때마다 유위람의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예상치 못했던 감정으로 인한 당황은 고작 이틀 만에 끝이 났다. 유위람은 호현서에게 명백하게 욕정하고 있었고, 그것이 말하는 바는 뚜렷했다.

패천검 유위람은 바로 지금 짝사랑을 하는 중이었다.

❖ ❖ ❖

옥천에서 사씨 남매와 감윤과 헤어지자 현서의 일행은 단출해졌다. 태호만큼 유명한 호수인 석호까지는 육로를 이용하고, 석호를 지나서는 물길을 타고 항도로 갈 계획이었다.

용혈을 노리는 놈들은 기암일사를 쫓아 몰려갔고, 영우를 벗어난 이후로는 화오궁으로 보이는 놈들의 습격도 없었다. 곽다순이 다시 나타나는 일도 없는 평탄한 여행길이었다.

마차를 모는 이는 용씨로 호가 상단의 사람이었다. 옥천에서 석호까지의 마차를 책임지는 이로 이쪽의 지리를 잘 알았다. 현규가 엄선한 인선답게 용씨는 재주도 좋고 입담도 좋았다. 마차 지붕에 눕지 않고, 말을 타고 가는 현진을 음전한 도련님이라고 칭찬해 현서는 이사와 둘이서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이사나 현진이 마차를 모는 용씨 옆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면 현서는 마차 안에서 그 얘기를 듣거나 아니면 옥과 수련을 했다. 마차 안에서 할 수 있는 수련은 한정적이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은 옥이 현서가 녹초가 되기 직전까지 호되게 굴렸다. 사람들은 현서가 기력이 없어 보이는 것을 마차를 오래 탄 탓이라 여겼다.

며칠 연달아 비가 오는 바람에 발이 묶여 작은 현에 머무는 동안에도 옥은 부지런히 채근하며 수련을 이어갔다. 옥의 걱정을 알아 현서는 군말 없이 시키는 것들을 다 했다.

자문원의 기억을 토대로 삼았다고 해도 그것을 체득하는 것은 현서의 몫이다. 한 번 깨달은 심의(深意)라 해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성취를 보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별일 없었다면 현서가 더 하려 해도 말리고 쉬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옥은 최근 생각이 많아 쫓기는 사람처럼 여유가 없었다.

옥이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현서가 식욕이 줄어 평소의 반도 못 먹은 상태에서 코피까지 흘렸을 때였다. 작은 현이라 객잔이라 할 만한 곳도 없어 아예 집을 하나 빌려 머물고 있었다. 일행도 적어 다 같이 외부에서 사 온 음식으로 식사 중이었는데 잠시의 침묵 후 난리가 났다.

코에서 피가 비치기 무섭게 유위람이 현서를 무릎 위에 앉히곤 영견으로 코를 감쌌다. 그 속도가 전광석화와 같아 처음부터 현서가 유위람의 다리 위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평소라면 유위람의 행태에 가만있지 않았을 옥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아 아연해진 상태였다. 용씨와 이사, 그리고 현진이 급히 의원을 찾으러 뛰어나갔다. 정말 순식간에 일이었다. 코피는 이미 멈췄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현에 의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약방의 늙은 주인이 보쌈되어 왔으나 맥도 제대로 짚지 못하는지라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약방 주인은 자신작인 만능 쑥환만 한 주먹 주고 돌아갔다.

현진과 이사가 정 의원의 일지를 꺼내 들고 토론에 들어갔다. 철서를 빠져나올 때 유위람의 장원에 두고 나왔지만, 곽부를 떠나기 전에 현규가 다시 챙겨주었다.

다행히 코피는 더 이상 나지 않았고, 현서도 피곤했을 뿐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큰 도시에 가서 제대로 된 진맥을 받아보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유위람은 이사가 갖고 있는 일지에 관심을 보였다.

코피가 난 것은 급하게 먹은 밥이 체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후일 현서의 몸이 좋아지는 데 일조는 하겠으나 지금은 쉬어야 할 때였다.

옥은 크게 자책 중인 것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 몸이 좋지 않은 현서가 자신을 달래는 데 기력을 쓰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현서는 잠들기 전에 옥에게 말했다.

‘아끼니까 애지중지도 하고, 안달복달도 하는 거야. 가족들이나 네가 그러는 것처럼. 그리고 나도 그래.’

그 말을 하고 순식간에 잠이 든 현서를 두고 옥이 어이없어하다 결국엔 웃어버렸다. 이 맹랑하고 어여쁜 것을 어찌 괴지 않을 수 있을까. 옥은 그 밤 유위람이 현서를 살피러 온 것도 관대하게 넘어가 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다음 날 상쾌하게 일어났지만 눈 밑이 검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비가 그치고도 하루를 더 보낸 뒤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날씨도 좋고, 현서의 상태도 나빠지지 않았다. 수련이 없어지자 마차 안의 현서는 살짝 심심해졌다. 마차 지붕 위에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누구도 찬성하지 않을 일이다. 잠시 쉬기 위해 멈춘 일행이 움직이기 전에 현서는 현진에게 다가갔다.

“마부석에 앉고 싶다고?”

“응. 용 아저씨가 형이 허락하면 자기도 괜찮다고 했어.”

위험한 일도 아니고, 그간 쭉 마차 안에서만 있었으니 현서도 답답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틀 전 코피를 흘린 것도 있어 현진이 고민하자 현서가 언제나처럼 현진의 소매를 잡고 흔들며 호소했다. 호씨 성을 달고 있는 사람에게 백발백중으로 먹히는 방법 중 하나다.

“알았다. 알았어.”

현진이 웃으며 금세 백기를 들었다. 현서가 활짝 웃으면서 좋아하는 것을 유위람이 보고 있었다.

호현서의 좋은 보호자 자격으로 유위람은 이사에게서 현서를 오래도록 살핀 의원이 적었다는 일지를 받아 냈다. 진귀한 무공서를 보듯 일지를 읽던 유위람은 현서가 현진에게 가서 조르는 것을 유심히 보다 고개를 숙였다.

‘소매라.’

귀찮은 것을 싫어해 특별한 일이 아니면 소매가 긴 옷을 입지 않는 유위람이었다. 지금도 소매 폭이 무척 짧은 옷을 입고 있었다. 현진 역시 무인이라 현서가 입은 옷과 소매 폭이 달랐지만 그래도 유위람의 옷보다는 좀 더 넓었다.

유위람은 왼손을 휙 흔들어보았다. 소매가 흔들릴 것도 없었다. 이래서야 현서가 잡고 흔들 수 없지 않은가.

거적을 입어도 감춰지지 않은 미모를 가진 유위람은 지금까지 옷은 추위와 더위만 막으면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 생각이 바뀌어 입고 있는 옷이 눈에 차지 않았다.

유위람이 현서가 잡기 좋은 소매 길이 따위를 비교하는 동안 현서는 즐거워하며 마차의 마부석에 올랐다. 마부석에 있던 이사는 말로 갈아탔다.

마부석에 앉아보는 건 처음이라 현서는 모든 것을 신기해 했다.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끄는 현서가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니 주변이 환해졌다. 과연 호가의 장중보옥이라, 용씨는 헤어지기 전에 마차 안에 있는 몽수를 잘 챙겨주는 걸 잊지 않기로 했다.

큰 마차가 아니라 마차를 모는 말은 두 마리였다. 튼튼하고 힘이 좋은 수말 두 마리라 적당히 조율해 가며 마차를 몰아야 한다는 얘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던 현서의 몸이 살짝 기우뚱했다.

“어.”

빗물이 고인 웅덩이가 완전히 마르지 않아 바퀴가 진흙길에 박혀 마차가 흔들렸다. 사람이 떨어질 만큼 큰 흔들림은 아니었지만, 현서는 앗 하는 사이에 유위람의 말 위로 옮겨졌다.

마차가 멈추자 용씨와 현진, 그리고 이사가 전부 현서를 보았다. 현서가 유위람의 품 안에서 안전하게 있는 걸 보고서야 그들은 마차 바퀴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바퀴가 부서진 건 아니네.”

깊이 빠진 것도 아니라 마차는 곧 진흙길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바퀴가 헐거워졌을지도 모르니 객잔에 도착하면 수리를 해야 합니다.”

용씨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퀴가 상하진 않았으나 사람이 타지 않아 가벼운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았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는 일도 겸해서 말이다. 이 중에서 마차에 관해 가장 잘 아는 전문가는 용씨라 모두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음 목적지까지 그리 멀지도 않아서 현서는 유위람의 말을 같이 타고 가기로 했다.

옥은 현서가 유위람과 같은 말을 타는 것이 탐탁지 않았으나 며칠 전의 일 때문에 부담을 주기 싫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신 현서가 유위람과 대화하지 않게 자잘한 수다를 떨었다. 유위람의 머릿속을 알았다면 당장 현진이나 이사의 말을 타라고 닦달했을 테지만 불행히도 옥 역시 독심술은 하지 못했다.

유위람은 품에 안겨 있는 따끈따끈한 체온에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바르작거리던 현서는 유위람에게 기대서야 편해진 듯 움직이는 것을 멈추었다. 처음 함께 말을 탈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영우로 급히 속도를 내어가느라 현서가 유위람에게 기대는 법을 익힌 것이다.

지금은 달리지도 않는데, 친근함을 보이는 현서의 행동에 유위람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을 참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찌 그리도 간사한지 한 번 마음을 인정하고 났더니 그 후론 조금이라도 현서에게 닿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현서에게 품은 감정이 연모라는 것을 확실히 한 유위람은 언제나처럼 생각에 잠겼다.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세간의 상식에 비추어보는 것은 유위람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원하는 일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능력과 위치를 가진 유위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만으로도 조그마한 양심은 능력 이상의 최선을 다하는 중이라 할 수 있었다. 검선의 사당에 가서도 떳떳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유위람의 작은 양심이었다.

유위람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호현서를 좋아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를 물었다. 당연히 문제없었다. 그러면 자신과 호현서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면 문제가 있는가. 이것도 역시나 문제없었다. 현서가 자신보다 열한 살 어린 것, 남자라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열한 살 어려도 현서는 관례를 치른 성인이다. 현서가 관례를 치르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욕하고 관례를 올릴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 동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럴 리가 없었다.

천하 사람들 중 가장 제멋대로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강호다. 정파야 체면을 차리지만 그래 봤자 별별 인간 군상이 다 있다 못해 미친놈들도 부지기수인 곳이다.

혈족 중심인 세가라면 혼인을 해 자손을 남기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 외의 문파들은 연애나 혼인이 금지인 곳을 제외하면 대개 방만했다. 나이가 차도록 성취가 더딘 것은 문제지만, 혼자 살다 죽거나 자신의 애병(愛兵)에게 정실 자리를 주었다고 큰소리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곳이 강호다.

좋게 포장해 보았자 수틀리면 무기부터 꺼내는 강호에서 범죄가 아닌 사생활을 손가락질하는 행위는 이미 원수거나 앞으로 원수가 되려는 사이뿐이다.

그럼 서녕호가가 문제가 되는가. 이번에도 작은 양심이 열심히 노력해서 호가가 유위람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현서가 유위람을 좋아한다면 가족들의 반대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다. 유위람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호현서의 마음은 얻는 것뿐이다. 현서가 자신에게 호의가 있음은 의심치 않았지만 호의와 연모는 다른 감정이다.

그 때 고삐를 쥐고 있던 현서의 손이 느슨해졌다. 잠이 든 것이다. 현서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님을 알아도 이렇게나 무방비한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기꺼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런 일로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이 우습다는 건 알았지만 그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현서가 열한 살 어리고, 몸이 약하다는 것을 충분히 감안해 천천히를 경문 외듯 되새겼다. 현서가 지금 유위람의 머릿속을 보면 전생에 자신이 검선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놀랄 것을 몰랐다. 또한, 옥이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유위람과 현서를 천만 리쯤 떨어뜨려 놓았을 터였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신선의 경지가 되어야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유위람에게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 ❖ ❖

강호에서 별호가 붙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스스로 붙이거나 사문에서 붙여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타인이 부른 별호가 유명해지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너무 강한 자신감으로 실력에 비해 과한 별호를 붙여 비웃음을 사는 일이 잦다. 하지만 오만한 천재라는 것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으면 남의 별호를 듣고 무턱대고 비웃는 일은 없었다.

후자는 악명이 아니면 강호 활동을 어느 정도 시작한 다음에야 붙는 것이 일반적이다. 누군가가 붙인 이름이 점차 퍼져 모두의 동의를 얻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패천검처럼 압도적인 첫 싸움과 별호가 같이 붙어 퍼지는 일은 드물었다.

검선 자문원은 무위에 비해 별호가 붙는 시기가 늦었는데, 그것은 소인배들의 질시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검선의 뛰어남만 돋보이게 했을 뿐이었지만.

보는 사람을 홀리는 압도적인 무위를 두고 실력이 부족해서 별호를 붙일 수 없다는 말은 아무리 질투에 눈이 멀었어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저 뛰어남에 걸맞은 수식언을 찾지 못하겠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그 어떤 수식도 없는 검선(劍仙)이라는 별호가 붙으면서 소인배들의 추한 질투도 막을 내려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화운검 호현진은 정석을 밟아가고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스무 살에 강호에 나와 삼 년이 지나기 전에 별호를 얻었다. 같은 시기에 강호에 나왔던 사무문과 송가장의 후계자인 송준도 아직 별호가 없으니 또래 중 발군이라 할 수 있다. 십 년 후가 기대되는 젊은 검수의 상단을 차지하고 있을 만했다. 더욱이 현진은 사교성도 좋아 낯선 사람과도 곧잘 친해졌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폄하하지 않는 유위람은 현진의 사교성이 좋은 장점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배에 오른 첫날 현진을 따로 만나 말했다.

“전에 말했다시피 그때 대자의 납치와 관련해 배후를 말하지 못했던 것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네. 하지만 지금은 짐작되는 곳이 있지. 물론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네, 그렇습니다.”

화오궁이 먼저 현서에게 위해를 입히려 했으니 서녕호가가 화오궁을 적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때문에 현진도 어머니와 현규 형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들어 알고 있었다.

“화오궁은 강호에 잘 나오지도 않고 비밀스러운 곳이지.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 이상 어떤 흔적도 없을 순 없어. 이왕 소문이 많이 모이는 배를 탔으니 활용할 수 있는 건 활용해야지. 그래서 자네만 괜찮다면 부탁을 하나 하고 싶어.”

“저한테요?”

현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현서랑 사촌인 것이 티가 났다. 어린 시절 함께 지냈다더니 닮은 행동을 하는 모양이다. 그에 유위람은 좀 더 친절해지기로 했다.

“그렇다네. 나는 화운검이 적격이라고 여겼거든. 화운검의 다감한 성격은 좋은 재능이야. 내 앞에서 쉬이 할 수 없는 얘기들이 이 배 안에 가득 있겠지. 내 부탁은 화운검이 이 배 안에서 많은 얘기를 들어오는 것이라네.”

지금 현서 일행은 석호에 있는 배에 올라 있다. 태호만큼은 아니어도 석호도 커다란 호수다. 원래는 석호를 빙 둘러 가려 했지만, 마침 석호를 가로지르는 배를 탈 기회가 생겼다. 배로 가면 호수를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편하다.

봉래(蓬萊)라는 이름을 가진 배는 석호의 명물로 세 개의 가문이 공동 출자해 만든 여행선이다. 정해진 날짜에 석호만을 오가는데 매우 사치스럽고 볼거리가 많아 유명하다고 했다. 유위람도 처음 타보는 배였다. 그로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으나 현서와 나머지 일행은 매우 궁금해 했다. 공동 출자한 세 가문 중에 하나가 조일당이라는 얘기에 유위람도 배를 타는 것에 찬성했다.

조일당은 금어방이 몰락하면서 그 세력을 흡수하며 생겨난 상가로, 주로 전당포와 전장(錢莊)업을 위주로 했다. 배에 올라 살펴보니 무림인이 많았다. 그에 아직 듣지 못한 소문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현진에게 말한 것이다.

“어떤 이야기들을 들어야 합니까?”

“그에 관해선 모두 화운검의 판단에 맡기겠네. 물론 거절해도 좋아. 나는 자네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니까. 일말이라도 거리낌이 있다면 하지 않는 게 내게도 자네에게도 좋아.”

현진은 검각의 제자도, 수하도 아니니 처음부터 부탁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더욱이 현서와 각별한 사촌이다. 현서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흠 잡힐 일을 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배 안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라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배에 있는 동안 현진을 현서에게서 떼어두겠다는 약간의 사심이 있긴 했지만, 현진의 능력을 높이 사 부탁하는 것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현진은 짧은 고민 후에 곧 수락했다. 현진이 보아도 위험한 일은 아니었고, 그 역시 화오궁을 적대하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도움이 될 일이라면 하고 싶었다.

“하겠습니다.”

“혹시 해서 하는 말이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있다면 바로 손을 떼겠다고 해주게.”

“알겠습니다.”

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패천검 유위람을 존경했지만 지금은 그 눈이 더욱 반짝반짝했다.

현진과 유위람과의 나이 차는 고작 여섯 살이지만 배분은 까마득했다. 검각의 각주도 유위람의 아랫사람이니 현진과는 석청담의 외증조부뻘 정도로 배분 차이가 났다. 그 말은 현 강호의 어느 문파든 문파를 대표하는 사람 중에 유위람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배분이야 각 문파 내부의 일이나 검각은 오래된 명문 정파고 서로 교류하며 체면치레를 하는 사이니만큼 유위람의 높은 배분을 무시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새파랗게 어린 놈이 배분만 높은 것을 반기지도 않았다. 처음 유위람을 제자로 들였다고 했을 때는 검각의 삼노괴가 노망이 들었다는 비꼼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하지만 유위람의 실력은 비할 바가 없이 뛰어났고, 검선의 영향을 받아 예의 바르게 굴어 배분을 무기로 안하무인으로 구는 일도 없었다. 더욱이 경천검이라는 비아냥거림을 삼 년이나 참아주었던 일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유위람의 높은 배분을 문제 삼는 일도 없어졌다.

그래서 현진은 유위람이 대자의 은인이라 하여 자신을 깍듯하게 대하는 것이 얼떨떨했다. 현진은 자신이 또래 중에 특출 난 걸 알았지만, 동시에 강호에선 아직 애송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석청담과 어머니 이약약의 이름을 뒤에 두었음에도 별호도 없는 애송이라고 당한 무시가 얼마였던가.

그러니 유위람의 이런 정중한 부탁이 기꺼웠다. 더욱이 틀린 말도 없었다. 유위람이 직접 움직이면 너무 눈을 끌 게 분명했다.

강호에 참으로 좋은 명숙이 있다며 현진은 유위람을 상찬했다.

❖ ❖ ❖

승선 이틀째 낮이 되자 현진은 아는 사람이 배에 있어 인사를 가야겠다고 말했다. 워낙 발이 넓고 붙임성이 좋은 현진이라 현서는 의심하지 않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석호의 동서를 가로지르지만 이 배의 목적은 운송이 아닌 유흥에 있었다. 표가 비싼 것은 물론, 객실과 식사 비용을 따로 치러야 했다. 그리고 가벼운 내기 도박을 할 때나 무희들의 춤이나 금 연주를 들을 때도 따로 비용을 요구했다.

태호에도 놀잇배들이 오갔지만 이 정도로 본격적인 것은 없었다. 날씨나 지형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태호를 접하고 있는 지방 관리들의 성향 차이일지도 모르겠다고 현서는 생각했다.

사치스럽고 화려함을 판매 전략으로 삼아 고급스러움을 강조했기 때문에 퇴폐적인 향락은 없었다.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호가 상단의 사람인 용씨가 한 번 타볼 만하다고 말했을 리 없었다.

첫날 객실과 근처만을 가볍게 구경한 현서는 이틀째가 되자 좀 더 본격적인 구경에 나섰다. 이사만 데리고 움직이려 했는데 어느새 유위람이 곁에 있었다.

“저 때문이면 안 나오셔도 되는데. 괜히 쉬는 걸 방해한 것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저도 이 배는 처음입니다. 이왕 탔으니 구경을 해야지요.”

배 안의 치안은 나쁘지 않아 현서와 이사만 보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위람이 그 꼴을 두고 볼 리 없었다. 여기저기 구경하던 현서는 이윽고 주사위 놀이를 하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곳인데, 가장 아래층에 놀이판과 말이 있었고 그 위로 한 칸씩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가장 상석은 삼 층이었다. 낮은 병풍을 두르고 앉거나 반쯤 누워 구경할 수 있도록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유료다. 이사가 돈을 지불하자 곧 차와 간식이 준비되었다.

놀이판은 바닥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한 목침(木枕)만 한 말들이 열 개가 있었다. 규칙은 간단했다.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만큼 말을 움직이는 것이다. 대신 가장 처음 던진 주사위로 말들의 출발 위치를 정하고, 주사위 숫자만큼 전진하거나 다른 말을 방해하거나를 선택할 수 있어 재미를 주었다.

유위람이 보기에 현서는 주사위 놀이나 비무 같은 역동적이고 승부욕을 자극할 수 있는 것들을 좋아했다. 몽수에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것이 누가 봐도 몰두한 사람이었다.

분명 그 예쁜 눈을 반짝이고 있을 텐데 그걸 보지 못해 유위람은 아쉬웠다. 그렇다고 여기서 몽수를 벗게 하는 것은 소탐대실의 어리석음이다.

“팔, 팔이 나오면 좋겠다.”

“그러게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응원하는 말이 생긴 모양이다. 유위람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라면 이 배에 있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주사위에서 팔이 나오게 할 수 있었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만 잠시 고민하는 사이 끝나버렸다. 원하는 숫자가 나오지 않아 아쉬워하는 현서의 목소리도 귀여웠기 때문에 유위람은 주사위에 손을 쓰지 않기로 했다.

“으. 더워.”

두 판을 내리 구경하던 현서가 더운지 몽수를 벗어버렸다. 유위람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이사가 안 된다고 말리려 하다 발개진 얼굴을 보곤 부채를 잡아 부치기 시작했다.

호수에서 바람도 불어오고 그늘막도 쳐져 있지만 그래도 이곳의 유월 낮은 서녕보다 더웠다. 추위에도 약하지만 더위에는 특히 더 약한 현서다. 얼굴 가리겠다고 열사병으로 쓰러지게 할 수는 없었다.

주사위 놀이는 점점 더 열기를 더해 갔지만, 동시에 현서를 보는 눈도 늘어났다. 유위람의 귀에 현서에게 흥미를 보이는 말들이 너무 잘 들렸다. 하지만 누구도 다가오지는 않았다.

유위람은 현서의 등 뒤로 팔을 괴고 방만하게 반쯤 드러누워 있었지만, 안광은 산길에서 만난 범처럼 매서웠다. 현서를 넋 놓고 보다가 유위람의 차가운 시선에 순식간에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쓸모 있네.

‘뭐가?’

―그런 게 있다.

옥이 무엇을 칭찬하는지 모르는 현서가 등 뒤로 고개를 돌리자 해사하게 웃는 유위람이 보였다. 현서는 반사적으로 마주 웃어주며 물었다.

“지루하지 않으세요?”

“아니요. 재미있습니다.”

몽수를 벗어버려 좋은 점 하나는 현서의 옆얼굴이나, 현서가 온몸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더 또렷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 모든 짜증을 잠재울 정도로 재미있긴 하였다. 현서는 유위람도 주사위 놀이를 좋아하나 보다 하는 쓸데없는 오해를 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부채 때문에 반쯤 몸을 돌리고 있던 이사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유위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 의원의 일지를 먼저 챙겨 읽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이사가 보기에 유위람은 든든한 보호자였다.

❖ ❖ ❖

현진은 자신이 경중을 판단하기 어려우니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는 쪽으로 노선을 정했다.

현서처럼 발을 붙들어 매는 미인은 아니지만 호가의 아이들은 조르르 세워두면 한 집안 사람임을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닮은 구석이 있었다. 성격 좋은 훤칠한 호남은 언제든 환영받기 마련이다. 배에 오른 지 나흘이 지나자 현진은 배 안의 대부분의 승객들과 대화를 해본 상태가 되었다.

그중에는 구면인 사람도 있었다. 송가장의 혼례식에서 만나 소개받았던, 친구 송준의 고종사촌 동생인 작모담이었다. 사촌 형의 혼례가 끝나면 견문 여행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에 따라 친구들과 냉큼 나왔다고 했다.

작모담은 여행 경로가 달라 영우에서 열린 비무회 구경을 가지 못해 비무회 얘기를 들려달라며 현진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작모담 일행은 첫 여행에 잔뜩 들떠 사소한 것들도 즐거이 기억해 현진에게 얘기해 주거나 묻거나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형님의 일행은 사촌 동생이라고 했지요?”

“응. 그렇지. 지금은 곁에 없는데 나중에 보면 소개해 주마.”

현서 얘기를 꺼내는 것에 현진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작모담은 송준의 사촌동생으로 신원도 확실하고 현서와 동갑이다. 현서는 늘 집 안에서 지내느라 친구라곤 석청담의 사제들뿐이니 여행 나온 김에 또래 친구를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작모담 역시 현진의 일행이라 인사를 나누려는 의도였던지라 화제는 곧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형님은 아직 이 얘기 못 들으셨겠네요.”

“무슨 얘기?”

“칠암문이 사라졌대요.”

갑자기 나온 칠암문이라는 말에 현진이 기억을 더듬었다. 현서와 안계현에 도착했을 때 처음 칠암문의 봉문 얘기를 들었다. 소문도 없는 봉문이라 이상하게 여겼는데 송가장에 도착하니 문주인 비영도 교암추가 큰 병을 얻어 요양을 위해 봉문을 했다고 하는 게 아닌가. 혼례 초대를 거절하게 된 것을 사과하는 서신이 송가장에 도착해, 송준이 현진에게 말해 주었다.

문주의 와병으로 인한 봉문이라니. 별스럽다고 느끼긴 하긴 하였으나, 칠암문은 역사가 짧고 문주인 교암추에게 기대는 일이 많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더욱이 좋은 일도 아니라 칠암문주의 병 얘기는 몇몇만 아는 것으로 그쳤다.

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칠암문의 교 문주께서 병을 얻으셨다는 얘기가 아니라?”

“네, 그 얘기도 있었어요.”

작모담이 하는 얘기는 다음과 같았다.

교암추의 병 때문에 봉문했으나 먹고 사는 일을 그만둘 순 없어 외부로부터 식자재 공급은 꾸준히 받았다. 봉문 전에는 매일 상인이 드나들었으나 봉문 후에는 사나흘에 한번이라는 차이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인이 도착하니 아무리 불러도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문주의 와병을 알던 상인은 혹시 나쁜 일이 생겼을까 걱정이 되어 문을 열어보았다. 잠기지 않았는지 곁문이 순순히 열리자 슬쩍 들어간 상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혼비백산한 얼굴로 뛰쳐나왔다고 한다.

“건물 안에 사람은커녕 아무것도 없었대요. 텅 빈 건물만 있고 먼지만 자욱했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상인의 비명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만 쌓였을 뿐, 싸움의 흔적은커녕 오래도록 사람이 살았던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교암추가 호인이라 평판은 좋았지만, 칠암문은 정사지간의 문파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주의 와병을 틈타 공격을 받을 수 있으니 봉문을 핑계로 몸을 숨기는 일은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설명 안 되는 석연찮음이 있었다.

“관에서는 싸움을 피해 숨었을 거라고 했다는데 호형, 이상하지 않아요? 칠암문이 소규모 문파라 해도 칠, 팔십 명은 넘는 사람들이 기거할 텐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사라지다니. 전부 어딜 갔을까요.”

현진도 그것이 궁금했다. 도대체 칠암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작모담의 집안은 무림세가는 아니지만 복주 소도 인근에 있는 오래된 유지 가문으로 칠암문과 거리상 가까웠다. 근방에서 괴이한 일이 생기니 여행 중인 아들이 걱정되어 급히 서신을 보냈다. 서신은 이들이 배에 오르기 전에 서신만을 다루는 표국인 보방을 통해 받았다고 한다.

복주에서 일주일 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소문이 퍼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현진은 유위람에게 가장 먼저 이 얘기부터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 ❖

선체에 밀려 부서지는 강물은 햇빛 아래서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였다. 바람을 따라 챙을 덮은 천이 흔들거렸다. 성가셔서 벗고 싶었지만, 이사가 더운 게 아니라면 벗지 말라고 당부를 해둔 참이라 펄럭이는 천의 끝을 손으로 가만히 눌렀다.

내일이면 호수를 가로지르는 여정도 끝이 나 이 배에서 내리게 된다. 옥이 한동안 내공 수련을 금지했기 때문에 현서는 배 안에서 실컷 즐기기만 했다. 독립을 하게 되면 구비해 놓을 놀이판 몇 가지도 정했다.

“저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현서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네? 저를 불렀나요?”

현서가 뒤돌아보자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서 있었다. 현서의 대답에 긴장하고 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는 모령강가의 강자요라고 해. 저긴 내 친구들이고. 계속 네가 주사위 놀이를 구경하는 것을 보았어. 우리가 주사위 놀이를 곧 할 건데 사람이 한 명 모자라거든. 같이 하지 않을래?”

어딘지 낯익다 싶었더니 주사위 놀이판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이었다. 구경만 했지 참가하지 않아서 권해보는 모양이었다.

‘하고 싶어?’

―아니, 괜찮다.

옥도 거절했고, 식사 후 쉴 예정이었던 현서는 곧 거절을 표했다.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같이 하자. 재미있을 거야.”

현서의 거절에 침울해진 강자요를 밀치며 등장한 덩치 큰 남자가 다짜고짜 손을 잡아당겼다. 현서는 뿌리치려고 힘을 주었지만, 힘 차이가 커 뿌리쳐지지 않았다. 무례에 기분이 상한 현서가 내력을 움직여 쳐 내려는 순간 불쾌한 손이 떨어져 나갔다. 유위람이 파리를 쳐내듯 휘두른 움직임에 남자는 뒤로 밀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현서의 등 뒤에 서서 새파란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본 유위람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축객령이었다. 강자요와 그 일행들은 아프다는 소리도 못 하고 팔을 움켜쥔 채 나동그라져 있는 친구를 수습해 현서에게 사과한 뒤 급히 사라졌다.

유위람이 혀를 찼다. 지극히 사악한 의도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철없고 배려가 부족한 놈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목을 치지도 않고, 팔을 부수지도 않았으나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팔은? 아프진 않고? 뭐 저렇게 예의 없는 놈들이 다 있담. 서아야. 괜찮아?”

현진이 현서의 손부터 살피자 유위람은 화를 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며 반성했다.

“기분은 좀 나쁘지만 안 아파. 괜찮아.”

현서가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무림인이 아니라고 내력을 안 쓰는 건 고수나 하는 일이고, 너는 내공을 담뿍 실어도 되니 다음부턴 사정 봐주지 말고 쳐 내버려.

‘응. 알았어.’

철없는 녀석들을 응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얼굴만은 똑똑히 기억해 둔 유위람은 점심 식사 후에도 현서의 기분이 저조해 보이자 응징 쪽으로 추가 살짝 기울 뻔했다.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이 떠올라 응징을 미루기로 했다.

“호 공자, 호신술을 배워보지 않겠습니까?”

“호신술이요?”

“거창한 것은 아니고, 가벼운 호신술입니다.”

유위람도 현서가 몸을 쓰는 일을 심하게 못한다는 걸 알았다. 괜히 몸을 움직이게 했다가 다치게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급할 때 쓸 수 있는 유용한 한 수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조금 전처럼 손이 잡혔을 때 뿌리치기에 용이한 방법이라고만 해두지요.”

유위람이 콩을 콩이라고 말해도 팥도 모른다고 야단칠 옥이지만, 현서에게 도움이 되는 일에 관해선 반대란 일절 없었다. 배워두는 게 좋다고 옥도 권하고, 기분이 나빴던 것도 사실이라 현서는 유위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유위람은 많은 것을 가르칠 뜻은 처음부터 없었다. 누군가가 현서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 그 손을 뿌리칠 수 있을 정도만큼을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혈도를 눌러 손을 빼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래, 적당한 정도를 아는구나.

옥도 현서가 유려하게 손을 움직여 빠져나갈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현서의 무공 교육에 관해선 옥이 유위람의 대선배였다. 혈을 짚는 게 안 나왔다면 돌팔이라고 낙인찍고 현서에게 배우지 말라고 말했을 옥이었다.

유위람이 보이는 시범을 유심히 보던 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혈을 눌러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얼마 전에 해본 것 같은데. 언제였지?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유위람이 실습해 보자며 자신의 손을 불쑥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맞아. 실습은 중요하지.

옥이 반색했다. 현서의 수업에 늘 실습이 모자라 아쉬웠던 탓이다. 하지만 현서는 곤혹스러운 시선으로 유위람을 바라보았다. 유위람이 가르쳐 준 혈은 손을 잠시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손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무공은 모르지만 오래도록 병치레를 해서 혈은 몇 가지 알고 있는데, 이건 위험한 혈입니다. 손을 못 쓸 수도 있어요. 그런데 거길 눌러보라니. 저는 못 합니다.”

현서가 손을 내저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야말로 유위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유위람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호 공자는 악력이 약해서 이곳이 아니면 급할 때 효용이 없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옥이 맞장구를 쳤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 현서의 악력은 기대할 바가 못 되었다. 그래도 현서가 주저하자 유위람이 말했다.

“머릿속에서 상상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번 움직여 익히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어디서 무뢰배를 잡아다 실습을 할 수는 없겠지요. 이사는 무공을 배우지 않았고, 화운검은 호 공자가 무공을 배우지 않아서 위험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주 튼튼하지요. 호 공자가 어디를 누를지 알고 있기 때문에 다칠 위험도 없습니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유위람 정도의 고수라면 이토록 빤히 보이는 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렇게나 말하는데 맘 놓고 실습하렴. 저놈은 정말 튼튼하니 네가 마구 누르다 못해 칼로 저 자리를 찔러도 멀쩡할 테니 걱정 말고.

유위람과 옥의 응원에 힘입어 현서는 실습을 시작했다. 손의 크기가 너무 다르고, 손이 잡혀 있는 상태라 처음에는 제대로 된 위치를 찾지 못해 헤맸지만 곧바로 손을 망가뜨리는 혈을 찾았다.

“괜찮습니다.”

현서가 이걸 정말로 눌러도 될까 하는 얼굴로 올려다보자 유위람이 현서를 슬쩍 들어 다리 위에 앉히곤 누르기를 종용했다. 현서는 눈을 딱 감고 눌렀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현서의 악력으로는 유위람의 단단한 거죽을 뚫지 못한 것이다.

“계속하세요. 힘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령을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력을 하나도 쓰지 않은 현서의 공격에 유위람이 당하면 그야말로 세기의 놀림감이 될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손톱만큼도 먹히지 않을 줄이야.

연달아 열 번을 전부 실패하고 참았던 숨을 내뱉던 현서는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이 웃고 있는 유위람을 보자 속이 좀 상했다. 비웃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호승심에 불이 확 지펴진 탓이다.

‘내가 못 할 줄 알고!’

―역시 실습이 좋네.

현서의 의욕이 가득해진 것을 흐뭇하게 보며 옥은 현서가 유위람을 제압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지를 감안하고 있었다. 현서가 손을 조물조물 누르는 것이 간지럽고 기분이 좋아 웃던 유위람은 현서의 눈썹이 확 올라가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요. 연습을 하다 보면 늘게 되어 있습니다. 성공을 하게 되면 제가 선물을 드리지요.”

“선물이요?”

유위람이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주려 했지만 모로 가든 현서의 손에 들어가면 될 일이다. 선물도 선물이지만 호승심에 불이 붙은 현서는 항도에 도착하는 열흘 안에 성공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혈을 짚는 것에 힘은 부차적인 문제다. 주로 상대의 허를 찔러 제압할 때 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신속함과 정확함이다.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지풍(指風)으로도 공격 가능하나 그건 내공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얘기다. 붓보다 무거운 것은 들어본 적도 없고, 몸으로 요령을 깨치는 것은 남들보다 배로 느린 현서라 힘을 아예 쓰지 말라는 조언은 옳지 않았다.

사흘을 내리 실패한 후, 침상에 앉아 손을 움직이고 있는 도련님을 이사는 묘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예의 없는 사람이 무례하게 굴었다는 얘기를 이사도 들어 안다. 매우 화가 나는 일이지만 그것이 왜 도련님의 호신술 연습으로 이어져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호위와 시중들 사람을 더 늘리면 되는 게 아닌가. 도련님이 허락만 한다면 당장 사람들이 도련님의 머리카락 끝 하나도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공격당하면 당연히 반격해야 한다는 의식이 당연한 강호인 두 사람과 옥팔찌 하나, 그리고 그냥 혈을 짚는 것을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만 가득한 현서의 마음을 모르는 이사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굳이 말해 말리지 않았다. 저것도 도련님의 도락일 테니. 대신 너무 무리하는 것 같으면 그때는 말릴 것이다.

이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현서는 침상에 앉아 옥과 대화 중이었다. 현서도 스스로를 잘 알아 열흘을 잡았지만, 사흘을 내리 실패하니 오기가 생겨 위험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티 안 나게 내공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전에 패천검이 직접 내력을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또 같이 말을 타고 갈 때 수련을 했어도 몰랐잖아. 손에 아주 살짝 내공을 실어도 모를 것 같은데, 안 그래?’

빨리 내 말이 맞는다고 해줘. 입 밖에 내 말하진 않았지만 그 뜻은 빤했다. 검술에는 영 흥미가 없었는데, 경공이나 벽효흘, 점혈 같은 순 잡기에만 이렇게 흥미를 보여서야. 속으로 혀를 찼어도 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첫날부터 현서가 유위람과 대적하게 된다면 어떤 방법이 좋을지를 상량했던 것이다. 옥의 편애가 아무리 깊어도 현서가 패천검을 제압하거나 동등하게 싸울 수 있을 거라는 가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타격을 입힐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현서가 관심 없어 해도 살살 꼬여 가르칠 의욕이 가득했던 옥은 내심 기꺼웠다.

항도가 곧 지척으로 여행은 순탄했지만, 유위람의 이마 끝은 불만으로 살짝 주름져 있었다. 벌써 며칠째 식사 때와 뱃마루를 오가는 가벼운 산책을 할 때를 제외하곤 현서가 두문불출했기 때문이다.

현서에게 호신술을 권한 건 충동적인 결정이긴 했으나 정말 순수한 의도였다. 검선의 이름을 걸고서도 떳떳할 수 있다. 물론 부수적인 이득이 아주 좋았다는 것을 부정할 뜻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흘을 실패하고 객실로 돌아간 현서가 다음 날부터 선실 밖에 나오지 않자 엄청 신경이 쓰였다. 현서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혼자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혹여 심정이 상한 게 아닐까 싶어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평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혹시라도 패천검이 엄하게 굴었다거나, 비웃었다거나, 서운하다거나 하는 말이 나올까 봐 수시로 현서의 객실 안을 엿들었다.

이사가 힘들면 하지 말라고 할 때마다 현서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굳이 배우지 않아도 되는데 힘들게 만들었나? 자신을 어려워해 안 하겠다는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잘 말해 그만두게 하는 편이 낫다고 여겨 현서가 산책을 할 때마다 주위를 맴돌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렇게 며칠이 더 흘러 하선 하루 전날이 되어서야 현서가 눈을 반짝이며 유위람을 만나러 왔다. 성공을 확신하는 그 자신만만한 얼굴이 귀여워서 며칠간의 마음 졸임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혹여 실패를 해도 작은 성과가 있었다 말하며 현서를 북돋아 주어야겠다고 결심한 유위람이 수줍게 손을 내밀었다. 이사와 현진까지 긴장된 얼굴을 하고 곁에 서 있었다. 현서는 숨을 크게 들이쉬곤 망설임 없이 유위람의 손을 잡아챘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유위람은 내색 없이 아프지 않지만 쉬이 벗어나지 못할 만큼 현서의 손을 꽉 쥐었다. 하나, 둘, 셋 같은 구령을 욀 필요도 없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유위람이 눈을 치켜뜨는 것과 동시에 현서를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하고 떨어져 나갔다.

“도련님!”

“현서야!”

“봤어? 봤어?”

심정은 폴짝폴짝 뛰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은 현서는 이사의 팔을 잡곤 마구 흔들어댔다.

약간 저릿해진 손의 감각이 현서의 성공을 여실히 증명했다. 갓난아이가 쥐고 있다고 해도 혈 자리를 내어주고 방비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일이다. 현서의 성패 여부와 관계없이 방심하지 않은 유위람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손을 못 쓰게 되는 혈이지만, 유위람에게는 효과가 미비해 약간 따끔한 정도로 그쳤으나 확실한 유효 공격이었다.

“실로 훌륭한 성공입니다.”

일부러 과장되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도 현서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기에 그만큼 놀라워하고, 축하했다. 열흘 안에 성공했고, 패천검의 반응을 보니 내공을 쓴 것을 들키지 않았음이라 현서는 더욱 기뻐했다.

왁자한 축하는 저녁 식사까지 이어져 잔뜩 과식한 현서가 일찍 쉬러 가는 바람에 유위람은 선물 얘길 미처 하질 못했다.

❖ ❖ ❖

뱃멀미는 없지만 확실히 배를 타면 쉽게 피곤해진다. 더군다나 내력을 세심하게 조절하는 법을 익히느라 체력과 심력을 긁어 쓴 현서는 뭍에 도착하기도 전에 졸기 시작했다.

검각이 아니라 항도에 있는 패천검의 개인 저택으로 가는 동안에도 현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잤다. 현진이 안고 다닌 것도 모른 채 밥 먹고 약 먹는 시간을 뺀 이틀을 비몽사몽으로 보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실컷 자서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해가 떴는데 이사가 곁에 없는 걸 보니 잠시 나간 모양이었다. 현서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천천히 걸어 방 밖으로 나왔다.

물소리와 꽃향기가 아침 공기에 섞여 있었다. 물과 꽃의 고향이라 불리는 항도라 그런지 객청 앞의 뜰에도 물이 흐르고 있었다. 실개울이 연못을 이루고 연못에 꽃이 가득했다.

현서는 뜰 계단에 앉아 멍하니 주변을 구경했다. 철서에 있던 장원에도 개울이 있었다. 패천검이 항도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사인 줄 알고 고개를 들었는데 성장을 한 패천검이 눈앞에 서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럼요.”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지만 패천검이 왜 아침부터 왔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약간 굳어 있는 현서의 눈썹을 손으로 슬슬 만지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는 유위람이 입을 열었다.

“이사는 호 공자의 식사와 약을 챙기기 위해 큰 주방에 갔습니다. 좀 전에 만났지요.”

“패천검께서도 같이 식사하시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현서가 물었다. 아무리 집주인이라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아침부터 남의 처소에 오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 싶지만 저는 일이 있어 곧 나가보아야 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렇게 근사하게 입은 유위람을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용무가 없다면 놀랄 일이긴 했다.

회색과 옅은 물빛이 흐릿하게 섞인 까슬까슬한 여름 비단은 자칫하면 사람의 인상을 흐리게 만들 수 있는데 유위람의 화려한 얼굴 덕에 차분하고 고상한 느낌만 주었다. 기다란 소매 끝에는 창포가 몇 송이 수놓아져 있었다. 패천검이 이렇게 긴 소매의 옷을 입은 것은 처음 보았는데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한쪽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차려 입고 한쪽은 세수도 안한 중의 차림이었지만, 둘 중 그것은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녁 식사는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화 누이를 비롯해 나난과 소화리, 그리고 감윤까지 곧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네.”

그 얘길 하러 굳이 외출 전에 여기까지 온 건가. 입은 열지 않았지만, 시선이 그렇게 말했다. 이유 없어도 그냥 보러 오는 사이가 되고 싶은 유위람은 속으로 고소하며 소매를 뒤져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얼마 전에 뇌물이라고 받아간 두 개의 주머니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비슷하게 생긴 다른 주머니였다. 유위람이 현서의 손에 주머니를 쥐어주자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이게 무엇인가요?”

“혈을 짚는 걸 성공하면 선물을 드린다고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그날 주지 못해 지금 주는 것입니다.”

선물보다 성공 여부가 중요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는 이만 물러납니다. 천천히 보세요.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현서가 유위람의 성장이 멋지다고 칭찬할 새도 없이 가볍게 인사한 뒤 멋들어지게 소매를 휘날리며 순식간에 물러났다.

“뭐지.”

어느 정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주머니를 받아 든 현서가 중얼거렸다.

―열어보아라. 무엇을 주었는지 궁금하구나.

동그란 모양이 아무래도 구슬 같았다. 손바닥 위에 무리 없이 올릴 크기였다.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처음에는 상아로 만든 구슬인가 싶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야명주였다. 귀한 보석임이 틀림없지만, 현서의 고방에도 몇 개가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없었다. 하나의 구슬을 조각하고 파내어 안에 구슬 하나가 더 들어간 것 같은 모양을 만들었다. 처음엔 크기가 더 컸을 야명주를 조각해 손바닥만 한 크기로 만든 게 분명해 보였다.

야명주는 밤에 빛을 내는 보석으로 크기가 클수록 더욱 귀한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굳이 조각을 하겠다고 야명주를 깎다니.

자세히 보니 봉래산을 본떠 진귀한 화초나 동물들이 조각된 것이 보였다. 홈이 파인 것이 보여서 함의 덮개를 열듯 돌려보았지만 분리가 되지는 않았다. 대신 안쪽의 야명주가 돌아가면서 손톱보다 큰 구멍을 만들어 냈다.

달콤한 향기가 나서 흔들어보았더니 자잘한 꽃잎 모양으로 만든 설탕과자가 쏟아져 나왔다.

선물은 야명주가 아니고 설탕과자였다. 야명주를 설탕과자 상자로 쓴 것이다. 온갖 귀한 것을 보고 자란 현서도 놀랄 만큼 배포가 큰 사치였다.

투명한 꽃잎처럼 만든 설탕과자는 보는 재미도 맛도 있었다. 식사 전이라 두어 개만 맛보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물건은 일, 이 년 사이에 뚝딱하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장인이 오래도록 고심해 만든 물건일 테니, 분명 패천검이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물건일 터.

‘내가 받기엔 너무 과한 물건 같은데.’

그렇다고 선물이 귀해 받지 못한다고 하는 건 자칫 패천검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설탕과자만 먹고 야명주는 버리라고 말하는 옥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현서는 나중에 현진과 상의해 보기로 결정하고는 주머니를 방에 가져다 두었다.

❖ ❖ ❖

검선의 사당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 밝았다. 유월이지만 항도는 온난한 지역이라 한낮이 되면 서녕보다 더웠다. 때문에 일찍 가기로 했다.

어제 저녁, 모두가 항도에 모이자 매우 당연하게 다음 날 첫 일정은 검선의 사당에 참배를 하러 가는 일로 결정되었다. 항도에 왔는데 이들이 사당을 방문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긴 했다. 같이 가자는 감윤과 소화리의 초대에 현서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 것이 왔다.

자문원이 전생이라고 해도 자신과 동일시해 본 적 없었는데 어째서 이 사당만큼은 그렇게 민망한지, 현서도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내가 자문원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한마디 했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한참을 옥에게 야단맞았다. 하지만 그것도 항도에 도착하기 전에 끝난 일이었다.

현서는 마음에 거리낌 하나 없이 사당에 잘 다녀올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사당에 다녀온 다음에 패천검에게 옥을 소개할 계획이었다.

아침 대신 과일로 만든 갱(羹)과 차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사가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소인이 같이 안 가도 되겠어요?”

“응. 이사는 사당에 관심 없잖아. 틈틈이 쉬어야지. 밖에 나왔다고 제대로 못 쉬면 다 내 책임인 걸. 명명이 제대로 못 가르쳤다며 울 거야.”

“설마요. 명명 누이는 소인이 알아서 쉬어야 했다고 절 야단칠 걸요.”

만희당 식솔들의 우두머리가 할 법한 말을 이사가 흉내 냈다.

이사의 배웅을 받으며 뜰에 나오자 유위람이 현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얇게 비치는 흰색 여름 비단을 여러 겹 겹쳐 매무새를 만든 소매가 긴 장포를 입고 있었다.

현서 덕에 어지간한 미모는 무던히 넘기는 이사도 감탄사부터 내놓을 정도였다. 결 좋은 새까만 머리칼과 옷자락이 꽃향기가 섞인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 한 폭의 미인도 같았다.

“어제의 성장도 정말 근사했는데, 오늘은 어딘가의 신선 같으시네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 찬탄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현서의 가감 없는 칭찬에 긴 소매 안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귀 끝에 오른 열을 무시하며 유위람이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호 공자가 좋게 봐준 덕이지요.”

여러 겹 겹치긴 했지만 워낙 얇은 비단이라 더위에 강할 것 같았다. 항도에 지내는 동안 도련님 옷도 저렇게 해봐야겠다며 이사가 매의 눈으로 유위람을 훑는 것을 뒤로하고 현서가 손을 흔들었다.

꽃과 물의 고향이라는 말답게 항도성엔 물길이 많았다. 그중엔 거룻배가 오가는 수로도 있어 항도 사람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사당이 있는 항도성 북쪽에 가기 위해 거룻배를 탄 현서는 느릿하게 흘러가는 항도의 모습에 감탄을 내뱉었다.

자문원은 검각과 만화산에 방문해 머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땐 오갈 때 전부 늦은 밤이라 항도를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

처음 본 항도는 현서의 마음에 쏙 들었다. 수로와 수로 사이의 다리가 전부 다른 모양과 장식을 하고 있는 것도, 물건을 잔뜩 실은 배들이 장사를 하며 다니는 것도, 어디든 꽃이 만발한 것도 모두 보기 좋았다.

“사람들이 머리에 생화를 장식하네요.”

수로를 지나는 배라 오가는 사람들이 잘 보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크고 작은 꽃을 꽂고 있는 것이 신기해 물었다.

“곧 소두(梳頭)가 다가와서 그렇습니다.”

“소두요?”

“네. 유월 보름에 하는 항도 인근의 풍속입니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칼과 몸을 씻어 삿된 것을 흘려보내는 날이지요. 소두가 되기 전까지 머리를 향기롭게 한다는 뜻에서 주로 생화를 꽂습니다.”

현서가 말을 듣는 동안 화정이 건너편 배에 파는 꽃을 한 무더기 샀다. 그중에서 아직 완전히 피지 않은 산호색 작약 하나를 현서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귀 옆에 꽂을까 했는데 여기도 잘 어울리네.”

머리 뒤에 꽂힌 거라 동경이 있었어도 보이진 않았을 터였다. 싫은 건 아니지만 좀 아쉽긴 했다. 현진이나 이사가 같이 왔더라면 그들 머리에도 꽃을 꽂아주고 즐거워했을 텐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현서가 꽃을 꽂아주면서 장난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옥의 눈에는 잘 보이는지 칭찬해 주었다. 나중에 꽃팔찌를 만들어서 옥 위에 감아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물길을 따라 흘러갔다.

배에서 내린 다음에는 좀 걸어야 했다. 큰 나무들이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두고 있어서 덥지는 않았다. 인가가 드문지 한산해 보였다. 정리가 잘된 돌길을 타박타박 걷다가 설마 이 길도 사당에 포함된 영역인가 싶어 퍼뜩 고개를 들었던 현서는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저게 뭐야.’

현서의 놀란 표정을 감탄으로 이해한 감윤이 얼른 곁에 붙어 설명했다.

“호 공자는 금세 알아보는구나. 맞아. 여기서부터 사당이야. 왼쪽은 검선의 생애를 적은 비석이고, 오른쪽은 검선의 덕을 칭송하는 비석이지.”

길의 좌우에 팔작지붕을 덮은 정자가 두 개 있었는데 각각 장정 키만 한 비석이 서 있었다.

“그리고 새로 만들 공덕비는 이쪽에 둘 거야.”

여기서 더 뭘 늘리겠다는 뜻인가. 사당에 위패가 늘어나 증축하는 경우는 들어보았지만, 사당 주인이 한 명인데 뭘 자꾸 늘리겠다는 거지. 철서에서 들었던 새 공덕비가 빈말이 아니었단 말이야. 현서는 현기증이 났다.

정자를 지나자 길이 바뀌었다. 윤이 나도록 반질하게 깎은 흑석판이 깔린 길이 쭉 이어졌다. 바둑돌을 만들 때 많이 쓰는 이 돌은 예쁘지만 잘 깨져서 바닥 돌로 쓴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쓰고 있네.’

현서가 맹하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근방에 흑석판을 취급하는 상인은 매일이 기쁠 것이 틀림없었다.

길 끝에 커다란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저택이 보였다.

“여기야. 이곳이 검선의 사당이지.”

감윤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아예 저택을 지어두고 거길 사당이라고 하는지 몰랐다. 중앙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지만 사람이 오가라고 열어둔 문은 아니다. 사당의 참배객은 양옆의 쪽문으로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단다.

안에 들어가면 더 굉장한 걸 볼 거란 두려움에 현서가 숨을 들이 쉬곤 손님용 곁문 너머로 한 걸음 들어섰다.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바닥에 발이 닿기 무섭게 옥이 욕을 했다. 그리고 그 욕을 현서도 십분 이해했다.

‘이거 순행팔괘진(順行八卦陣)을 변형한 거 같은데.’

사당에 첫발을 내딛자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일찍 출발했지만 사당까지 오는 동안 해가 더 높이 떴다. 헌데 북쪽임을 감안한다고 쳐도 적당히 좋은 볕만이 저택 안을 내리쬐고 있었다.

‘이게 진짜 항도의 볕이고 바람일까?’

대문 너머는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기문진법(奇門陣法)의 영향권이었다. 누군가 사당에 기문진을 깔아두었다고 했다면 현서는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느냐고 물었을 터였다. 근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세상은 넓다더니.’

기문진은 사물을 축으로 삼아 만드는 결계의 한 종류다. 진짜 출구인 생문(生門)과 가짜 출구인 사문(死門)을 두고 있음은 진법과 비슷하다. 하지만 진이 펼쳐진 공간을 지키거나 가두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진법이라면 기문진은 거기에 환상을 더한다. 사당의 물건들이 환상일 리 없으니, 계절이나 날씨가 환상일 가능성이 컸다.

검선의 사당에서 피를 보려 하지 않을 테니 사문으로 빠진다고 해도 사람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 올 때까지 계속 같은 자리를 돌거나, 겁을 주는 것이 고작일 테지. 나쁜 의도 없이 길을 따라 잘 움직인다면 무탈하게 참배를 마치고 나올 터였다.

사당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것은 분명하지만 너무 과하다. 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택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내부는 일반 저택과는 달랐다. 사람이 거주할 목적으로 지은 것은 아니니 당연했다. 태호와 무산을 본 따 만든 인공 연못과 가산(假山)이 저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완비가 무산을 검선의 성지라고 말한 것이 말실수가 아닌 것이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 돌은 나난이 천주에서 가져온 돌이야.”

완비가 아버지가 천 리 길을 가서 가져온 돌이 있다더니, 영우에서 천주는 천 리는 더 되는데.

“힘드셨을 텐데 대단하시네요.”

현서가 최대한 예의 바르게 칭찬을 하자 그것을 기점으로 각각 자신들이 어디서 무엇을 공수해 왔는지를 왁자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마음의 준비는 다 끝났다고 기세 좋게 나왔는데, 현서는 자신의 마음가짐이 모자랐음을 인정했다.

그저 낯부끄러워 사당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와서 보니 그냥 낯부끄러워할 문제가 아니었다.

왕부의 사당도 저렇게 꾸미진 못할 것이다. 하나하나 설명을 들을수록 현서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그들이 자문원을 기억하고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겠지만 이건 너무, 너무 과하지 않은가. 세상에. 저들이 자문원 교도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태호를 본 딴 연못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른 이들은 감탄해서 그런 것이라 믿어 더욱 설명에 공을 들였다.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아니지만 건물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참배객을 위한 객청, 회랑, 정자 등이 있었다. 사당이기에 단정하고 고아한 풍취를 보였으나 현서는 알았다. 허투루 쓴 목재나 조각 등이 일절 없었다. 호숫가를 향한 객청의 벽은 은은히 물이 비치도록 문틀 전체에 유리를 끼웠다.

‘유리 상인도 사당을 향해 매일 절하겠다.’

아연해진 현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현서의 눈에 확실히 들어온 건물은 다른 것이었다. 아닌 척 사치스럽게 지어진 다른 건물들과 달리 수수한 건물이라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형태가 눈에 익어서였다. 자문원이 천의맹에서 머물던 전각이 꼭 저렇게 생겼었다.

“황유리지붕을 올리고 벽을 꾸미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래도 검선께서 지내시던 곳이라는 상징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 반려했지.”

화정의 설명이 붙었다. 꼭 똑같이 만들어야 필요가 있을까? 현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알맹이지.”

감윤의 득의양양한 목소리에 현서는 감상에 잠길 겨를도 없이 긴장했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그런 현서를 보며 깜짝 놀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한 감윤이 손을 번쩍 들어 과장된 모양으로 방문을 열었다.

“바로 이곳!”

“어! 여기는…….”

“검선께서 쓰시던 방을 고스란히 재현한 방이다.”

“뜯어 온 거 같은데……?”

속으로 말한다는 게 너무 놀라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말해 놓고도 검선의 방을 어찌 아느냐고 물어볼까 봐 긴장했는데, 듣는 쪽에서는 다른 의도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우리도 뜯어 오고 싶었지만, 화재로 소실되어서 그러질 못했어.”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지만 처소는 기억과 너무 똑같아서 현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문원이 쓰던 문방사우의 정리 순서를 비롯해, 차탁의 모서리가 긁힌 것까지 전부 똑같았다. 침상에는 자문원이 쓰던 검의 모조품과 주로 입던 옷가지들이 놓여 있었다. 저 자리에 팔찌를 놓으려고 패천검이 그때 그렇게 물은 것이다.

팔찌는 사문의 신물로 대대로 내려왔다. 너무도 당연하게 이 팔찌의 다음 주인은 사문의 제자고 그 외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유위람이 팔찌를 팔라고 했을 때도 가차 없이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 광기 어린 광경에 압도되어 현서는 저도 모르게 옥에게 물었다.

‘그……. 나 죽은 뒤에 여기 있을래?’

―싫다. 절대로 싫다.

자문원의 묘와 사당에 처음부터 흥미를 가졌던 옥은 기문진을 발견했을 때부터 완전히 질린 모양인지 질색을 하며 거절했다.

현서가 말없이 멍하니 있자 이 방의 진위를 의심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아니, 현서는 너무 똑같아서 놀라는 중이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검선의 처소를 방문했던 이들이 모두 검선의 처소와 똑같다고 말했다며 으쓱했다.

“패천검, 이 친구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지요.”

“역시 어릴 때부터 기재라 듣던 사람이라 확실히 달라.”

“내가 가장 검선과 친했으니까.”

유위람의 목소리에는 숨겨지지 않는 자부심이 있었다. 현서의 입은 이제 다물어지지도 않았다.

―언제 친했는데?

‘내 말이.’

하지만 옥 말고 현서의 물음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그 유위람의 자랑 아닌 자랑을 납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패천검에게 네 얘기를 해도 좋을지 자신이 없어졌어.’

패천검에게 팔찌의 비밀을 말하려고 했던 현서였다. 하지만 검선의 사당을 꾸미기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검선과 관련된 것들을 똑같이 재현해 둔 것을 보니 마음이 흔들리다 못해 단단한 결의가 생겨났다.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검선의 환생인 건 들키지 말아야겠다.’

검선의 환생이라고 하면 이 사당에 모셔질 것 같았다.

저택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깜빡 졸았던 것 같기도 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으니 휘장을 걷으며 이사가 말을 걸어왔다.

“도련님? 끙끙거리시기에 안 좋은 꿈이라도 꾸시나 해서 깨우려고 했더니 일어나셨네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현서가 일어나는 것을 돕던 이사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며 말했다.

“웬 땀을 이렇게 흘리셨어요. 더우세요?”

“아니, 괜찮아. 좀 씻고 싶어.”

“네, 준비시킬게요. 배는 안 고프세요?”

“응. 지금은 안 고파.”

이사가 물러나고 현서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땀에 젖은 몸이 끈적끈적했다. 반시진(1시간) 정도 자는 동안 가위라도 눌렸는지 앓는 소리를 내기에 현서를 깨우려고 했던 옥이 연신 욕을 했다. 저놈들이 정도를 몰라서 애를 놀라게 만들기나 하고.

―괜찮으냐.

‘으응. 괜찮아. 안 괜찮을 일도 아니지. 그냥 자문원의 사당이, 어, 너무. 그러니까 너무.’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적당한 말을 못 찾은 건지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던 현서가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상상력이 많이 빈곤하다는 걸 알았어.’

―누가 저런 걸 상상이나 하겠느냐. 저놈들이 이상한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현서가 상상했던 사당은 저런 게 아니었다. 그간의 얘기들을 종합했을 때 무자비(無字碑: 덕행과 공적이 글로 새기지 못할 정도로 많아 아예 글을 새기지 않은 비석) 정도는 있겠거니 했는데,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사당이 나올 줄이야.

태호와 무산에 사는 동식물을 고스란히 옮기고 싶었지만, 항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일부만 가지고 와서 아쉽다고 했다. 태호의 물을 가져와 연못을 채웠다는 말도 떠올랐다. 계속 태호의 물을 가져오는 것인지, 저 꽃나무들과 물속의 물고기들이 살아 있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순행팔괘진 때문에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묻지 못했다.

현서가 물었다면 기꺼워하며 대답해 줄 사람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누가 대답하든 부담스러운 대답일 게 분명했다.

―한 번 다녀왔으면 되었지. 앞으로 갈 곳도 아니니 그만 생각해라.

‘응.’

욕조에 들어가서도 멍하니 있자, 옥이 그만 잊으라고 했다. 순순히 옥의 말을 들어 사당의 일을 머리 한구석으로 치우려던 현서에게 새 의문이 생겼다.

‘패천검이 자문원과 가장 친했다고 말한 건 무슨 기준일까.’

다섯 명 중 아무도 패천검이 검선과 가장 친했다는 자랑에 반박하지 않은 걸 보면 그 나름의 기준이 있는 모양이었다.

―뭔지 몰라도 분명 멀쩡한 기준은 아니겠지. 우리가 듣도 보도 못 한 기준일 게 분명하다.

옥이 차갑게 대꾸했다.

감윤, 소화리, 화정은 천의맹을 떠나기 전에 처음 보았지만, 다순의 조카인 나난과 검각의 어르신인 유위람과는 그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어리고 당시 백양교와의 싸움으로 어수선해서 자문원과 딱히 친분을 쌓을 만한 일은 없었다.

‘만난 횟수라면 나난을 더 어릴 때부터 보아 왔는데.’

현서가 물을 튕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따뜻한 물에 몸이 풀어지니 좀 진정되었다. 엄청 놀라긴 했으나 나쁜 일은 아니다. 생명의 은인을 잊지 않고 깍듯하게 공경하고 있으니 누가 들어도 칭찬할 미담이다.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현서도 굉장하다고 감탄하며 사당을 구경했을 것이 뻔했다.

전생의 기억이 있다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믿기 어려운 일이니만큼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아서였다. 자신이 미쳤다는 오명을 쓰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로 인해 가족들이 괴로워하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저 사람들 좀 다를 것이다. 물론 저들도 처음에는 의심하며 진위를 판정코자 할 것이다. 그리고 현서가 자문원의 환생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면, 그 후의 일은 아마 현서에게 그렇게 즐거운 일은 아닐 듯싶었다.

백보 양보해서 사당은 저렇게 지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자문원과 호현서가 연관 있다는 건 알리지 말자는 다짐은 더욱 굳건해졌다.

‘집에 돌아가면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서녕에서 꼼짝도 하지 말아야겠어.’

―그래.

‘수련 계획도 새로 짜고.’

독립 전에 사, 오성까지만 익히면 될 줄 알았는데, 밖에 나와보니 오성 이상을 익힐 필요를 느꼈다. 그러니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수련한 뒤 독립해서 조용히 제자를 키우면 될 일이다. 제자가 독립하려면 제자의 나이 스무 살은 넘어야 할 테니까. 검선의 무공이 다시 세상에 나오는 것도 한참 뒤의 일이 될 테지.

서녕으로 돌아가면 앞으로 화정은 몰라도 다른 네 명은 만나는 일이 없지 않을까. 화정을 만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왕래가 잦은 건 아니니 제자에게 그때만 조심하라고 말하면 될 것 같았다. 아니, 아직 들이지도 않은 제자의 일은 나중에 고민해도 될 일이다.

대에게 부탁해서 산 원림이 항도 근처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대에게 미안하지만 정 신경 쓰이면 저택을 다른 지역에 새로 사는 게 나을 성싶었다.

“도련님, 너무 오래 계셨어요.”

항도와 사당에서 멀어질 미래를 차곡차곡 정리해 보니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유위람이 알았다면 서녕호가 옆에 저택부터 샀을 생각을 끝내며 현서는 욕조에서 나왔다.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현진이 돌아왔다. 항도에 있는 숙모님의 지인을 뵈러 간다고 일찌감치 나선 현진은 양팔에 꽃을 한 아름 안고 머리에도 잔뜩 꽂은 상태였다.

“주 선사님을 비롯해 오늘 나를 보는 사람마다 머리에 꽃을 꽂아주려 하지 뭐야. 이것도 반절은 거절해서 이 모양이다.”

머리에 꽃이 넘쳐 아예 화관을 얹은 것 같았는데 그게 또 현진에게 잘 어울렸다. 현서와 이사가 칭찬하자 현진이 한 바퀴 뱅그르르 돌아주었다. 과하지 않은 꽃향기가 순식간에 방을 채웠다.

“이건 네 몫이다.”

“제 몫이요?”

“응. 오늘 길에 이곳의 시비가 들고 오는 것을 대신 받았지. 네 처소에 보내는 꽃이라던 걸.”

“아침에도 꽃을 보내더니, 저녁에도 보내주네요. 꽃 인심이 후하네요.”

이사가 받아 들며 말했다.

“사당에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많이 피곤하니?”

화정의 저녁 초대를 거절하고 혼자 먹겠다고 했더니 현진이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물었다.

“조금 잤더니 괜찮아. 어디 나쁜 게 아니라 날이 더워지고 있으니 무리하지 않으려고. 내일은 검각을 방문하기로 했고, 항도 구경도 해야지. 오늘 보니 서녕이나 철서와는 완전히 달라서 재미있었어.”

몸이 좋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현진의 표정이 풀렸다.

“그러고 보니 내일 검각에 가시면 소인은 상회에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응? 응. 다녀와. 나는 내일 검각에 가는 거 말고 다른 일 없으니까. 종일 비워도 괜찮아.”

현진을 비롯한 패천검 일행이 모두 가는 것이라 이사가 안심하고 외출해도 상관없었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현진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었다. 석호에서 탔던 배에서 들었던 얘기들도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작 공자의 얘기만 들었지 인사를 못 했네요.”

“그러게, 나이도 비슷해 네 친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현서가 혈 짚기를 성공하겠다고 몰두하는 바람에 작모담 일행에게 인사할 겨를이 없었다. 화제는 자연히 작모담이 해준 칠암문 얘기로 넘어갔다. 칠암문 얘기를 해준 사람은 과자를 사러 갔다 온 이사였다. 당연히 이사도 현서도 봉문 얘기를 기억하고 있어서 현진이 해주는 얘기에 깜짝 놀랐다.

“칠암문이 사라져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강호에는 진짜 별일이 다 있네요.”

“칠암문도의 가족들이 전부 칠암문 내에서 사는 건 아닐 텐데. 그들이 가만히 있나요?”

“아끼던 딸의 생사도 모르게 되었으니 문주의 부인 가문에서 관에 몇 번이고 진정을 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무림의 일인 데다가 정말로 몸을 피해 숨은 걸 수도 있으니 미적지근한 모양이야.”

―시체도 혈흔도 없으니 관에서 입을 대기도 난처할 것이다.

관과 무림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서로 관여를 잘 안 하니 그쪽의 관청도 괴이쩍다 여기면서도 섣불리 끼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보름도 지나지 않은 일이라 강호에 소문이 퍼지는 것도 시간이 걸릴 테니 무슨 의도가 있든 간에 당장 드러나지는 않을 성싶었다.

“흉사는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이사가 부르르 떨며 한마디를 보탰다.

혼자 먹으려던 저녁은 결국 셋이서 먹게 되었고, 현진이 해주는 얘기들을 듣다 보니 과식을 하게 되었다.

약을 먹고 산책을 하러 뜰에 나왔다. 보름을 앞두고 있어서 달이 밝았다. 현서는 물이 흐르는 개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옥과 대화를 나누었다.

낮에 사당에서 놀라 질색을 했지만, 전생에 관한 것이라면 몰라도 팔찌에 관한 것은 역시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월영사도 그렇고, 화오궁의 일이나 곽다순이 나타난 상황을 보면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사당에 가기 전까지는 옥과 대화하는 것이 제한적이라고 말하려 했다. 유위람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말하는 옥팔찌는 신물이자 신병이기다. 현서로서는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당을 다녀온 이후로 마음을 바꾸었다. 저토록 검선에 성심을 다하는 이들이니, 옥이 신병이기가 되어 진창을 구르는 것을 막았으면 막았지 두고 볼 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현서와 옥은 대화가 일상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까지 전부 말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라 현서의 얼굴은 딱딱했다.

‘좀 긴장된다. 안 믿어주면 어떡하지?’

처음으로 팔찌를 타인에게 소개하는 일이다.

―어찌하긴, 처음 말하고 안 믿는다 싶으면 그냥 더 말하지 말거라. 네가 설득할 필요도 없다.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그놈의 몫이니.

‘나를 광인으로 보는 건 상관없지만, 네가 부정당하면 슬플 것 같아. 네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데.’

―나를 알아주고 소중히 여기는 네가 있는데, 다른 놈들이 뭐라 하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좀 잘난 옥이라 말을 하는 것이지, 너는 미친 것도 아픈 것도 아니야. 누누이 말했지 않아. 내가 아무나와 말하는 줄 아느냐. 저 시커먼 놈의 팔목에 있었다면 아무 말도 안 했을 거다. 그러니 저놈에게 말할 때 더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화한 건 내가 처음이라며. 어? 저놈?’

자신만만해 하는 옥의 말에 웃던 현서가 이상한 단어에 고개를 돌리니 개울의 다리 위에 유위람이 서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라 정말 패천검이었다. 패천검이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지. 현서는 의아해 하며 인사했다. 현서가 아는 체를 하자 유위람이 한달음에 가까이 왔다.

식사는 했는지 따위의 가벼운 인사를 끝낸 뒤 현서가 산책하러 나온 참이었다 말하자 유위람이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당을 나올 때부터 얼굴이 좋지 않은 듯해 말입니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데 무리한 게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왔는데, 확실히 낮보다 나아 보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현서가 사당 때문에 기가 질렸다는 생각은 못 할 유위람이지만, 현서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은 금방 알아챘다. 현서의 낯빛에 그늘이 진 것이 내내 신경이 쓰였는데,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바로 오질 못하고 이제야 오게 된 것이다.

―그런 것을 보여주었으니 애가 안 놀라겠느냐.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걱정은 무슨 걱정.

옥의 불만을 들으며 현서는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만졌다. 자면서 끙끙거릴 정도로 놀란 것은 별개로 하고, 검선을 지극히 위하는 마음으로 지은 사당을 저어하는 티가 났을까 걱정이 되었다.

자신은 자문원과 끈끈한 인연이 있으니 질겁한 것이지만, 저들이 자문원을 깊이 기리는 것은 현서가 무어라 할 일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저들은 좋은 뜻으로 현서를 데리고 간 것인데.

―별걱정을 다 한다. 저 사당을 보고 미친놈들이라고 욕한 사람들이 이제껏 한 명도 없었을 것 같으냐?

“항도의 모습에 너무 들떠서 체력이 빨리 떨어졌나 봐요. 잘 쉬었더니 괜찮아요.”

다행이라면 유위람을 비롯해 나머지 네 명도 현서가 사당의 규모와 꾸밈에 충격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현서는 자신과 옥의 충격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안도하며 말했다.

“그래서 부러 오셨어요? 패천검께서 다정하신 성정인 건 알지만, 별일 아닌데 괜한 걸음 하게 한 것 같아 죄송하네요.”

다정이라니. 자신을 지칭하는 말에 다정이 들어가자 유위람은 기습을 당한 사람처럼 움찔했다. 자신더러 빈말이라도 다정하다고 해주는 사람을 처음 보아서였다.

다양한 말들로 칭찬을 들어왔지만 다정 같은 단어는 한 번도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다정하다니. 당치도 않은 말이라고 얼른 정정하라고 작은 양심이 따끔거리며 항변했지만, 작아서 티도 안 났다.

유위람은 자신이 다정은커녕 그 비슷한 성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눈알이 썩은 놈이라며 차갑게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서의 말에는 비웃음이 일기는커녕 마음만 간질간질해졌다.

다정한 사람이 아니면 어떤가. 계속 현서에게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면 문제없지. 유위람이 방긋 웃었다.

“바쁜 일도 없고, 무엇보다 호 공자를 보러 오는 것은 어렵거나 힘든 일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바쁜 일은 다 끝내고 왔으니 거짓말도 아니다.

―저 꼬리 아홉 달린 여우 놈 상대해 봤자 간이나 뺏기지. 됐다. 됐어. 내 소개나 시키고 얼른 보내버려라.

기분 나쁜 눈알도 치우고, 되도 않는 개수작도 부리지 말고 썩 꺼지라고 하고 싶지만, 개수작이라는 것을 현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일단 참아보는 옥이었다.

“잘되었네요. 그렇지 않아도 패천검을 만나려고 했는데.”

“저를요?”

“네.”

현서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유위람의 손을 잡고는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개울이 끝나는 곳에 있는 연못에 가서 멈췄다. 척 보아도 이사가 듣지 않았음을 원함이라 유위람이 슬쩍 기막을 펼쳤다.

기세 좋게 유위람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와놓고는 바로 입을 떼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던 현서가 길게 숨을 내쉬곤 입을 뗐다.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얘기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무슨 말이든, 호 공자가 원하는 대로 편히 하세요.”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얘기라니, 현서가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쌍욕을 한다고 해도 달콤하게 들릴 서두였다.

“제게 무척이나 아주 많이 소중한 존재가 있는데, 패천검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서 좀 긴장이 되네요.”

소중을 강조하는 말이 무척, 아주, 많이 세 가지나 되자 유위람의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자신은 무척도 아주도 많이도 없는 다정이 전부였는데! 빈정이 상해 배알이 꼬이고 있었지만 겉가죽은 유순하게 현서의 말을 경청하는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호 공자가 그리 말하는 이라면 분명 좋은 사람이겠지요. 저도 꼭 소개받고 싶군요.”

가족이나 이사는 아닐 테고, 도대체 누구기에 이렇게나 공을 들여 말하는 것인지. 왜 자신에게 처음으로 소개하는지에 대한 의문보다는 그 인간을 꼭 봐야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이 무척 이상하게 들릴 걸 아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도 미친 것도 아니에요.”

“누가 그런 흉한 말을 호 공자에게 합니까? 설마 제게 소개하겠다는 그 사람은 아니지요?”

호부에서 세상에 다시없을 소중한 깃털, 유리, 솜인형으로 지내 온 현서다. 그런 현서에게 저런 폭언을 한 사람이 있다면 당장 호부에서 요절을 냈을 터. 부러워서 이성이 잠시 나갔던 유위람은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정신을 차렸다.

“당연히 절대로 아니죠.”

현서가 펄쩍 뛰었다가 주저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사람은 아니에요.”

왼팔을 들어 소매를 슬쩍 걷자 유위람이 익히 아는 팔찌가 눈앞에 자리했다.

“이 팔찌가 호 공자의 무척이나 아주 많이 소중한 존재라는 말이군요. 검선의 팔찌니 응당 그러할 만합니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이 호 공자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만든단 말입니까?”

유위람은 팔찌에 비밀이 있다는 자신의 가설이 맞았음을 알았지만 의심하고 있었다는 티는 일절 내지 않았다. 유위람이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드러내지 않자 현서는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이 팔찌는 제 소중한 친구예요. 옥과 어떻게 친구가 되느냐고 의아해 하실 수도 있지만, 저와 옥은 서로 대화할 수 있어요. 저는 옥이 말하는 걸 들어요.”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말하는 현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입술이 떨리는 것을 감추진 못했다. 유위람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현서에게 시선을 똑바로 맞추고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옥에게 비밀이 있을 거라 짐작했던 유위람도 직접 듣게 되니 놀랍고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위람은 현서가 한 말의 진위를 의심하거나 광증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이지(理智)를 가진 팔찌의 얘기는 처음이었으나, 세상엔 이제껏 몰랐던 일도 있는 법이다. 더욱이 검선의 팔찌지 않은가.

왜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말 못 했는지, 또 왜 처음 말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선택했는지를 깨달았다.

‘곽다순 때문인가 보군.’

그때 곽다순을 만난 것은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론 득이 된 셈이다.

놀라움이 가시자 그 자리엔 다른 감정이 들어찼다. 좀 전의 불쾌함도 씻은 듯 사라졌다. 검선의 팔찌에는 무척, 아주, 많이가 붙을 수도 있지. 현서도 좋고, 현서의 팔에 있는 검선의 팔찌도 좋다. 아주 좋은 사람과 좋은 것이 함께 있는데 싫어할 이가 어디 있겠는가.

유위람이 아무렇지 않게 긍정을 하자 되레 놀란 쪽은 현서였다. 당황한 현서가 눈을 깜빡이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유위람이 현서의 손을 잡아 도닥이며 진정시켰다. 유위람의 얼굴에서 어떤 부정적인 표정도 찾지 못한 현서가 숨을 한 번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일전에 팔찌를 할아버님이 주셨다고 했는데 아니에요. 사실 팔찌는 제가 열두 살 때 야시장에서 샀어요. 너무 좋아해서 그때부터 쭉 곁에 두었는데, 열네 살 때 옥이 하는 말을 제가 들으면서 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유위람의 머리에 화정에게서 들은 만희당의 아침 행사나 좌서의 보고서 등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과연 그렇게 된 것이군요.”

이번에도 유위람은 현서의 말을 긍정할 뿐이었다. 걱정했던 부정적인 반응은커녕 정말이냐고 한 번 더 되묻는 것도 없었다. 유위람이 자신의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에 현서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제 말을 제대로 들으신 거지요?”

“물론입니다. 검선께서 패용하셨던 이 팔찌가 신물이라 오롯한 지각 능력을 가져, 호 공자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아닙니까?”

“맞아요.”

아주 정확히 알고 있어서 현서는 얼떨떨해 했다. 긴장했던 일이 너무도 쉽게 끝이나 맥이 풀렸다.

“그런데 놀라워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으시네요.”

“아닙니다. 보기엔 이래도 심히 놀라워하는 중입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미쳤다고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현서의 걱정을 이해는 하였으나 그 역시 문제는 아니었다. 유위람에게 현서가 미쳐서 환각을 듣는다는 가정은 일말의 가치도 없었다.

“호 공자가 거짓을 말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고, 해서 공자에서 생기는 이득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진위 판정은.”

유위람이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제가 어려서 검선을 처음 뵈었을 때 칠칠치 못하여 그분 앞에서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상냥하게 일으켜주시곤 옷의 먼지를 털어주셨지요. 혹시 그 일을 기억하시는지 여쭈어주십시오.”

―어디서 그런 거짓말로 떠보려고.

옥이 화를 냈다. 사실 이건 옥이 말해 주고 말고 할 일도 없었다. 현서도 자문원의 기억 덕에 알고 있는 일이니까.

“아니요.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해요. 검선께서 패천검의 스승님과 검을 겨루는 것을 넋 놓, 아니, 열심히 지켜보셨다고.”

―눈과 입이 접시만큼 동그랗게 변해서는 넋 놓고 구경했지.

옥의 말을 순화해서 전하자 유위람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마치 그것 보아라 하는 듯한 얼굴로 기뻐했다.

“맞습니다. 이 일은 저와 스승님들, 검선밖에 모르는 일입니다. 그 일을 이렇게 정확히 말하는데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더 의심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일입니다.”

그렇긴 한데. 믿기 어려운 얘길 하는 쪽이 의심을 권하고 듣는 쪽이 두말할 필요 없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기이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사가 오는군요.”

기막을 거두며 유위람이 언질을 주었다.

“도련님, 약 드실 시간이에요.”

현서와 패천검이 대화를 하는 중이라 멀찍한 곳에서 보고 있었지만, 약 때를 거를 수는 없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이사는 약을 비롯해 얇은 겉옷 등을 챙겨주곤 물러났다.

약을 마시느라 잠시 이야기가 멈추었다. 그사이 현서가 오래도록 서 있었다고 여긴 유위람은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싶은 욕망을 참고 대신 평평한 바위에 겉옷을 깔았다. 그리고 현서를 바위 위에 앉히며 물었다.

“호 공자가 이 오랜 비밀을 말한 것은 난화에서 곽 숙부를 만났던 일 때문이지요?”

나난의 숙부니 패천검도 응당 곽다순을 숙부로 부르는 것이다. 순간 누구를 지칭하는지 몰라 잠시 멈칫했던 현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난화에서 그 일이 있고,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분명 이상했을 텐데, 저를 염려해 묻지 않으셨지요. 배려에 감사드려요.”

―배려는 무슨, 안 캐묻겠다고 한 놈이 다음 날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느냐.

패천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에 찬성했지만 마음에 차는 일은 아니라 옥이 평소보다 더 투덜거렸다. 현서는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옥을 달래듯 다독였다.

유위람은 유위람대로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다정하다는 것도 그렇고, 배려도 그렇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얘기를 현서가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기분이 들뜨는 것과는 별개로 현서가 너무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좋게 봐주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유위람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 바 아닌 현서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날 환영을 보았어요. 할아버님이 부상을 입으셨는데 그래도 급히 가시기에. 너무 놀라서 앞뒤 없이 따라가 붙잡았는데 할아버님이 아니라, 그.”

곽다순을 지칭하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말을 멈추었다. 곽다순의 별호는 알지만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곽다순하면 욕부터 하는 옥도 말한 적 없는 별호였다.

소돈후(笑敦厚) 곽다순. 잘 웃고 유순함을 일컫는 뜻으로 좋은 별호처럼 보여도 사실 무시하고 비웃는 의미로 경천검보다 더 질이 나쁜 경우였다. 생전의 자문원이 매우 싫어했음은 물론이고, 곽다순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유위람도 그 별호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잠시 고민했던 현서는 그냥 곽다순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곽다순이라는 분이었어요.”

거짓말이다. 하지만 자문원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대단한 사당에도 초상화 한 점 걸려 있지 않았는데 현서가 어떻게 자문원의 모습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옥이 자신이 쫓아가라 시켰다고 말하라고 했지만, 그러긴 싫었다. 거짓말하는 건 같은데도 이것저것 잰다고 옥이 핀잔하긴 하였으나 결국 환영을 본 것은 맞으니 다친 할아버지의 환영을 보았다고 말하기로 한 것이다.

“그랬군요.”

현서가 독을 먹은 일로 죄책감 때문에 밖을 떠돈단 얘기는 알고 있었다. 그런 조부가 다친 채 길을 헤매는 것을 보았으니 현서가 놀라 따라갈 만했다고 납득했다.

“할아버님도 아니었고 다친 사람도 없어 무척 놀랐는데, 그분이 옥을 알아보곤 인사를 했어요.”

곽다순이 팔찌를 못 알아보았다면 가짜 곽다순이겠지만 알아보았다고 해도 기분이 나쁜 얘기였다.

“환영을 보여주어 호 공자를 유인했군요. 왜 그런 일을 했는지는 혹시 말했습니까?”

“듣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어요. 제가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요. 근데 무슨 얘기를 원하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이건 거짓말은 아니다. 그날 곽다순이 자문원의 환영을 보았다는 답을 원하는지 현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곽다순이 거듭 물은 것은 자문원을 보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는지였기 때문이다. 현서의 말을 들은 유위람이 물었다.

“혹시 팔찌에 손을 대려고 하거나 팔찌를 달라고 말하진 않았습니까?”

“아니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날도 제 머리칼을 넘겨준 것 말곤 다른 접촉은 없었는데. 손이 무척 차가워서. 하지만 저랑 옥이 말하는 것은 알았어요.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그날의 일을 회상하느라 두서없이 말하는 현서를 보며 유위람은 곽다순을 싫어할 이유가 더 늘어났음을 알았다.

곽다순은 옥이 현서와 대화하는 것을 알았지만, 시종일관 정중하게 말하며 옥을 노리는 언행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이 된 현서가 팔찌를 쥔 손에 힘을 주고는 물었다.

“그분이 팔찌를 노릴까요?”

“그 속은 모르지만 호 공자와 곽 숙부의 접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검선의 팔찌뿐이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요. 곽 숙부께서 많이 변하셔서 말입니다.”

현서에게 하는 말이라 곽다순이 미쳤다는 얘기를 완곡하게 표현했다. 현서가 곽다순을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곽다순이 제 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아볼 만큼은 되어 현서도 유위람의 말을 알아들었다.

잠시의 침묵 후에 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분이 완비의 납치를 종용하셨을까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화오궁의 동맹일 테니까요. 저희가 안가로 피할 때 산에서 만난 습격자들 뒤에 있었으니까요. 왜 갑자기 살기를 거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공격할 의사를 보였다고 했어요.”

“맞습니다. 저도 이번에 뵙는 바람에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산의 일은 옥 님이 말해 주셨나 보군요.”

옥이 원하지 않아서 옥을 따로 부르는 이름이 없다는 걸 안 유위람은 주저 없이 옥 님이라고 불렀다.

“네.”

“이것을 다행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아직까지 완비의 납치에 곽 숙부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현서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곽다순과 화오궁은 한패니 아이들의 유괴 사건에서 곽다순의 결백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허나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곽다순이 완비의 유괴를 직접 교사했다면 더 나쁜 일이니, 이 숨이 안도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괜찮아요.”

현서가 선선히 대답했다.

“호 공자는 궤짝에 월영사를 넣어 보낸 것이 곽 숙부라고 보십니까?”

유위람의 질문에 현서가 긍정을 표하며 말했다.

“효장락공주 무덤의 부장품인 삼 척짜리 월영사의 얘기는 당시 천의맹의 기밀 중 하나로 그분이 검선에게 해준 얘기라고 했거든요.”

도련문에 화오궁의 첩자가 있고, 곽다순이 화오궁의 동맹인 것을 보니 확신이 갔다. 안계현에서 현서가 월영사에 관한 얘기를 들은 것은 우연이자 우연이 아니었다.

현서가 점소이 아이에게서 얘기를 듣지 못했어도 궤짝은 철서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궤짝을 추적하면서 안계현에서 들었던 얘기를 똑같이 듣게 되었을 테지. 현서의 변덕으로 순서만이 바뀐 셈이다.

현서가 순순히 철서에서 했던 얘기들 중 어떤 것들은 호부에서 들은 것이 아니라 옥에게서 들은 것임을 시인했다.

‘옥 님께 들은 거라 호 공자가 화오궁은 알았지만 백화호 사건은 몰랐구나.’

유위람은 그때의 의문 중 하나를 납득했다. 숨긴 것을 책할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옥 님과 관련된 것을 조심하려는 호 공자의 결정은 옳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호 공자가 자신을 믿어서 오직 자신에게만 이 비밀을 알려줬다는 사실이다.

“옥 님의 목소리는 호 공자만 들을 수 있습니까?”

“네.”

현서가 즉각 대답하자 유위람이 흥미를 보였다.

“어렸을 때 옥이 말하는 것이 신기해서 몇 가지 실험을 했었거든요. 이사나 형님들, 석청담의 대를 비롯해 여럿에게 실험을 해보았는데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무공의 여부를 비롯해, 남녀노소에게 팔찌를 채운 다음 목소리를 듣는 이가 있는지를 찾아보았으나 옥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옥의 말을 들은 것은 사문의 무공을 배우기 전이니 사문의 사람에게만 적용된다는 가설도 맞지 않았다.

결국 옥과 대화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현서뿐이라는 결론만 났고, 이것을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만이 확실해졌다. 나 혼자만 듣고 말할 수 있는 대화 상대라니.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에 딱이니 말이다.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곽다순도 이 사실을 알아서 팔찌를 뺏으려 하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

“호 공자의 팔찌가 검선의 팔찌인 것을 알게 되어 개웅산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혹여 검선께서 잠드신 곳에 문제가 있나 싶어 말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줄곧 변함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혹시 옥 님이 어찌 밖에 나오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한 번도 대화해 본 적 없는 얘기여서. 잠시만요. 물어볼게요.”

이번에는 즉각적인 답이 나오지 않았다. 현서는 자문원의 최후를 알았지만 옥이 어떻게 흙더미 밖으로 나왔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생김이라 신기했을 뿐이고, 그 다음에는 말을 하는 게 놀랐고, 그 후로 무공을 연마하며 친구가 되어 오랜 시간을 지내느라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 그랬다.

‘혹시 기억나는 거 있어?’

―없다.

사람의 팔에 없을 때는 이지가 선명하지 않다. 말을 하고 있어도 어쨌든 팔찌의 정체성은 돌이다. 현서와 같은 것을 보고 듣지만 그 방식이 인간과 같으냐고 물으면 아니었다. 하지만 저런 얘기들은 유위람에게 하지 않았다.

“모른다고 해요.”

개웅산에서 옥팔찌를 꺼내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 없다. 유위람은 답이 없는 것에 미약한 아쉬움을 느꼈지만 곽다순이 제멋대로 흩뿌리고 간 의심은 싹을 틔우지도 않은 채 말라비틀어져 사라졌다.

싫은 놈이 하는 말을 왜 들어준단 말인가. 싫은 놈이 하는 말은 콩을 콩이라고 해도 콩같이 생긴 팥이라고 빈정거릴 유위람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옥이랑 죽이 잘 맞는다고 할 수 있겠다. 옥은 노발대발하며 부정하겠지만 말이다.

“모레 정우문의 소문주를 만날 텐데, 그때 동석하지 않겠습니까?”

“정우문의 소문주요? 제가 자리해도 괜찮나요?”

“물론입니다.”

곽다순이 다시 나타날 확률은 매우 높았다.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숨길 수 없다면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 곁에 두는 게 낫지. 유위람은 현서에게, 아니, 옥 님에게 나난의 집에서 보았던 그 인형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든 얘기는 현서의 입을 통해야 해 저어되었다. 그때 현서가 피를 토하고 앓았는데 혹여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이제 그만 들어가 쉬는 게 좋겠습니다. 피곤해 보입니다.”

반시진(1시간)이 넘도록 밖에 있었으니 현서는 이제 쉬어야 했다. 유위람의 말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던 현서가 당부했다.

“이 일은 패천검만 아는 비밀로 해주세요.”

화정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유위람 외의 사람에게 말할 뜻은 없었다.

“물론입니다.”

유위람이 나서서 다른 녀석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일을 현서가 먼저 청하다니 만족스럽게 웃으며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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