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章. 악의
유위람이 새벽부터 만화산에 호출을 받는 바람에 검각에 가려던 예정이 변경되었다. 굳이 용건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날짜를 미루어도 상관이 없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방에만 있는 것도 아쉬우니 저랑 같이 상회에 가실래요?”
“응. 좋아.”
검각이 지척에 있어 항도는 평온한 편이지만 그래도 이사와 현서 둘만 나갈 리는 없었다. 현진과 화정, 그리고 소화리도 가기로 했다.
“두 분은 일찍부터 외출했다 오셨다고 들었는데, 안 쉬고 저희랑 가도 괜찮나요?”
“그냥 사당에 다녀오는 길인 걸. 항도에 있을 땐 매일 이러니까 외출이랄 것도 없지.”
“아. 그렇군요.”
위패 앞에 향을 피우거나 꽃을 새로 가는 일 등을 하기 위해 항도에 있으면 매일 방문한다고 한다.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 현서는 괜히 물었다고 후회했다.
―어휴. 징그러운 것들. 자문원의 혼이 있다고 쳐도 놀라 도망갈 판국에 향은 뭐 하러 피우냐, 피우길.
옥이 혀를 찼다.
이번에도 거룻배를 탔다. 새벽에 잠깐 온 비 때문인지 공기가 좋았다. 소두절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거리의 꽃 장식이나 머리에 꽂힌 꽃들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항도성은 성안에 물길이 많은 만큼 평지가 적어 좁은 땅을 활용하기 위해 층수가 높은 저택이나 건물이 많다고 한다. 호가 상단 역시 정원과 별개로 팔 층짜리 높은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철서의 호가 상단이 다양한 품목들로 가게를 따로 열어 호가 상단 거리를 만들었다면, 이곳은 한 건물 안에 그 모든 것을 넣은 셈이었다. 서녕의 호가 상단도 철서와 크게 다르지 않아 항도의 방식은 현서가 보기에도 특이했다.
서글서글 잘 웃는 항도 지부의 책임자와 인사를 마치고 현서와 현진은 삼 층의 별실로 이동했다. 소화리와 화정을 비롯해 이사는 행수의 안내를 받아 물건을 보러 갔다. 물건을 사는 데 관심이 없는 현진과 체력이 없는 현서는 매우 잘 나왔다는 올해 첫 차를 마시며 노닥거리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대랑 규랑 차민은 지금 어디 있으려나. 형 알아?”
그때 강에서 헤어지고 안가에 도착한 후, 석청담 쪽은 다른 습격 없이 무사히 산해로 가 유괴범을 관아에 넘겼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 후로는 별다른 얘기를 듣지 못했다. 이약약과 현진이 오긴 했으나 다른 석청담의 제자들은 영우곽가의 비무회에 참석하지 않아 더욱 그랬다.
“바다 보러 간다고 복주 남쪽으로 간다는 얘긴 들었는데.”
현진도 잘 모른다는 얘기였다. 강호를 떠도는 중이라 목적지가 일정하지 않아서 현서가 서녕에 있었다 해도 소식을 듣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긴 했다.
“그러고 보니 양주까지 갔는데 송가장의 식구 중 송이원과 송미령 남매만 만나고 말았네.”
신혼부부와 송가장의 어른들을 뵙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현서를 보며 현진이 놀랐다.
“뭐? 그 천둥벌거숭이들을 만났어? 이상한 짓은 하지 않던?”
“이상한 짓? 아니, 예의 바르던걸. 남주가 걸린 내기 얘긴 했어. 내 나이가 몇인데. 형은 진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아.”
“무슨 소리야. 내가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닌데. 네가 부끄러울 게 어디 있어. 송준 걔가 다 좋은데 동생 얘기라면 만년한철보다 더 단단해지니 원.”
혹시나 하고 말했지만 역시나 이도 먹히지 않았다. 조만간 내기 상품인 남주를 받아야겠다는 얘길 하는 현진에게 현서가 물었다.
“그 남주 받을 거야?”
“당연하지.”
“그럼 그거 희서한테 좀 나눠주면 안 될까?”
“희서?”
희서가 진주를 좋아하나 하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현진은 아직 못 들은 모양이었다. 희서의 비녀 얘길 해주자 과연 현진도 깜짝 놀랐다. 서녕호가의 사람이라면 희서가 아끼는 비녀를 모를 리 없었다.
“그냥 남주를 받으면 다 줄 테니 네가 알아서 하렴.”
“응. 고마워 형.”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지만 희서가 크게 상심했을 텐데. 항도에서 선물이라도 보내야겠다.”
영우에서 다 같이 갔던 야시장에서 현서는 희서의 선물을 샀지만 그때 현서의 곁에는 유위람과 기암일사가 포진해 있어 현진과 대화를 나눌 새가 없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찻물이 한 번 바뀌고 이사가 들어와 현서의 팔 길이와 어깨 너비를 재어갔다. 현서가 조금의 기대를 품고 변한 게 있는지를 물었는데 이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석 달 사이 더 마르지 않은 게 어디야.”
실망해 하는 현서를 위로하던 현진이 작게 소리를 냈다. 날씨가 좋아 양방향의 덧창을 전부 열어둔 상태라 아래쪽의 길이 잘 보였다.
“어? 방금 저 사람.”
“왜? 아는 사람 있어?”
석호의 휴양선 안에서도 아는 사람을 만났던 현진이다.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또 만난다고 해도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기암일사인가 했는데.”
“어디? 안 보여.”
현진이 가리킨 곳을 현서도 보았지만 비슷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
“영우 야시장 얘길 하던 중이라 착각했나 보네. 현서야. 왜?”
기암일사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번엔 현서가 아는 사람을 보았다.
“저 사람.”
현서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현서가 저런 얼굴로 본다는 건 좋은 의미가 아니니 현진이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사람이 많은 곳이면 어디든 시시비비가 일기 마련이라 갑자기 시끄러워진 곳이 있었는데, 현서의 시선이 멈춘 것도 그곳이었다.
붉은색의 화려한 꽃 장식을 머리에 단 젊은 여자가 죽립을 눌러쓴 여러 명과 대치 중이었다. 딱 보아도 무림인끼리의 다툼이라 사람들은 멀찌감치 피해 있었다. 싸우면서 이곳까지 온 모양인지 모두의 행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저 사람이 누군데?”
“철서에서 우릴 쫓던 사람 중에 한 명. 화탄이 터졌을 때 시신이 없어서 도망친 줄은 알았지만 여기서 또 볼 줄은 몰랐네.”
대답은 현서가 아니라 화정의 입에서 나왔다. 어느새 별실에는 이사와 화정, 소화리가 돌아와 있었다. 현진이 놀라 현서를 보자 화정의 말이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진은 곧바로 현서를 잡아당겨 창가에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우릴 공격할 것 같지 않은데.”
“그래도 조심해야지. 눈먼 칼에 맞으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이 어디 있어.”
“현진이 말이 맞지.”
화정도 그렇게 말했지만 덧창을 닫기는커녕 소화리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밖의 싸움을 구경했다. 마치 뱀이 살아 있는 것처럼 여자의 손에서 연검이 흔들리며 거센 공격을 이어갔다.
“연검 재밌지. 손에 잡히는 맛이 있거든.”
소화리가 차탁에 있던 간식을 까먹으며 연극을 보는 사람처럼 평했다. 여자는 약하지 않았으나 상대의 수가 많고 이미 부상을 입고 있어 점점 밀리는 것이 보였다. 결국 후퇴를 결정했는지 골목의 담 위로 뛰어오른 여자는 건너편 건물에서 자신을 보던 현서를 발견했다. 잠시 놀라나 싶더니 그대로 호가 상단의 삼 층 별실로 뛰어들었다.
현서와 현진이 놀라 피하기도 전에 현서의 숨은 호위들이 검을 뽑아 들곤 대치했다. 무엇보다 소화리가 여자의 목을 틀어 쥔 후였다. 꽃을 꺾는 것과 다름없이 사람의 목을 딸 수 있는 소화리의 손아귀 아래서 여자가 항복의 의미로 손을 들었다.
“새로운 방식의 자살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강호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것만큼 흔한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건 맞는 말인데. 나는 청사파 사람이라서 말이지.”
소화리의 손아귀 아래 잡혀 있던 여자가 청사파라는 말에 미세하게 움찔했지만 곧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패천검은 저를 오늘의 적이라 여기지 않을 걸요.”
“헛소리를 참 건실하게 하네.”
소화리가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하곤 여자를 창밖으로 집어 던지려고 하자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정우문의 소문주가 나를 불렀어요. 그가 항도로 오라고 했다고요. 패천검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
정우문의 소문주와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은 맞았으나 이 여자에 관한 얘기는 들은 바가 없었다. 그사이 화정이 창밖을 보자 여자를 따라 들어오려 했던 죽립인들이 이곳 사람들이 무인인 것을 알아보고 섣부른 공격 대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이곳이 싸움터가 될 판이라 여자를 쫓아내라고 소화리에게 말할 참이었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화정이 여자에게 물었다.
“당신, 생강시야?”
“무슨 그런 말을! 아. 당신 소의선이죠. 알아보는군요. 그 빌어먹을 놈들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어!”
여자가 화색을 띠며 당장이라도 화정에게 가려 했지만 여전히 소화리에게 목이 잡혀 버둥거리는 모양새밖에 나오지 않았다. 실력이 나쁘지 않아 목이 잡힌 채로 전음을 쓰자 곧 소화리가 인상을 썼다.
“언니, 이 사람 정우문의 간자인 모양인데?”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정우문의 소문주가 부른 것은 맞는 모양이었다. 말인즉슨 저 여자를 살려 패천검의 저택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말로, 밖에 있는 흑립인들과의 싸움이 부득이하다는 뜻이었다. 보아하니 흑립인들도 그냥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저 사람도 소문주가 부른 사람이야?”
화정이 현서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모두의 시선이 현서에게로 모였다.
―뒤.
옥의 말에 현서가 급히 뒤를 돌았더니 웬 남자가 있었다. 주목을 받은 남자가 담담히 말했다.
“저는 도련님의 호위입니다. 도련님의 조부께서 보낸 사람이지요.”
“예?”
방 안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현진이 급히 현서와 남자 사이에 섰다. 남자는 현서와 현진의 조부인 호익원에게서 받은 소개장을 꺼내 들었다. 현진이 그 서신을 받아 심각한 얼굴로 읽었다.
현서는 눈앞의 남자보다 밖에 있는 흑립인들이 더 신경 쓰였다. 언제 공격을 시작할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였다. 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 난리 통에 기절하지 않는 걸 보니 네가 좀 나아지긴 한 모양이다.
‘그러네.’
현서가 멍하니 대답했다. 호부의 조용했던 만희당이 조금 그리워졌다.
❖ ❖ ❖
유월이라 해도 산의 새벽은 어둡다. 하지만 불 하나 없이 산길을 걷는 유위람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경신법을 써 성큼 걷기를 한 시진(2시간)쯤 하자 눈에 익은 소박한 초옥(草屋)이 보였다. 세 칸짜리 저 초옥은 어린 유위람을 제자로 들이며 지은 곳이다. 그전까진 스승님들이 죽은 줄 알아 처소라 불릴 곳도 없었다.
현 검각주의 스승인 당시의 검각주가 놀라며 그럼 이제까지 어디에서 지내셨냐고 묻자, 만화산 전체가 우리 영역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들짐승을 떠올렸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 현명함이 어린 유위람에게 있었다.
열다섯 살 이후론 유위람도 이 초옥에서 지내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남 말 할 일은 아니긴 했다. 그래도 꼬박꼬박 관리를 하는지 초옥은 깨끗했다.
일찍부터 사람을 불러놓고 자리에 없는 것은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현서에게 검각을 구경시켜 줄 예정이 밀렸으니 착실한 제자 노릇을 할 의욕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초옥이 더러웠어도 청소하는 시늉을 할 뜻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얘기다.
유위람은 도착하자마자 대청마루에 오도카니 앉아 스승님들을 기다렸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에 산기슭 저편에서 스승님들이 나타났다. 등에 망태기를 하나씩 지고 있다지만 약초꾼처럼 보일 리가 없었다. 볕에 타지도 않고 옷이 전혀 더럽지 않은 약초꾼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얼핏 보면 쉰은 되어 보였지만 세 명 전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일곱 살의 유위람이 처음 스승님들을 보았을 때와 하나도 다름없는 외양이었다.
“제자 유위람이 스승님들을 뵙습니다. 별고 없이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유위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읍했다.
“왔구나.”
“우리야 늘 강녕하지.”
“혼자네.”
스승님들은 유위람의 인사에 대답하며 망태기를 아무렇게나 툭툭 내려놓았다. 땀을 흘리지도 않았으면서 땀을 닦는 척하더니 순식간에 제자를 공격했다. 늘 있었던 수순이라 유위람은 놀라는 대신 검을 들어 첫 공격을 막아냈다.
검에 미친놈들이 득실거리는 검각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다. 수련에 방해가 된다는 이후로 제자도 들이지 않고, 검각과 연락도 끊어버려 어린 유위람을 앞세워 검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진 죽었다고 여겨진 사람들이었다.
무난한 사제 관계는 아니었지만, 유위람을 가르치는 것에 한해선 누구보다 각별했다. 후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재능 있는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아서였다.
제자를 셋 두는 것도 귀찮아 셋의 전승을 모두 이을 수 있는 한 명을 찾을 때까지 제자를 들일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질 있는 아이를 찾는 데 품을 들인 것도 아니었다. 유위람과 만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운이었지만, 그 운을 잘 잡은 셈이다.
스승들은 무공을 가르치는 것에는 매우 열정적이었지만, 그 외는 유위람이 강호를 피바다로 만들어놓지 않은 한 뭘 하든 내버려 두었다. 유위람이 경천검이란 조롱을 들을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순수한 호기심에 왜 실력 행사를 하지 않는지를 묻기는 하였다.
유위람의 대답은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검선 자문원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스물세 살 이후의 일이라 자신이 그것보다 이른 나이에 위명(威名)을 떨치는 것을 삼가겠다고 한 것이다.
그들이 듣기에 유위람의 이유는 개소리랑 별 차이 없었지만, 궁금증은 해소되었으니 그 외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왜 검선을 본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자가 착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겠다는 것을 말리는 것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사제 간의 인성이 어찌했든 간에 무공에 관해선 네 사람의 합이 잘 맞았다. 유위람은 가르치는 것을 빠짐없이 받아들였고, 발전 속도도 혀를 내두를 만큼 빨랐다.
삼 년 전부터는 셋이서 유위람을 상대했다. 유위람이 셋과 동시에 검을 겨룰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의미였다.
남들이 보았다면 양심 없다고 스승들을 욕했겠지만 유위람은 기꺼워했다. 스승님들과 싸울 때는 무엇 하나 참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유위람의 전혀 갈무리하지 않은 흉포한 내력을 따라 옷자락이 마구 펄럭였다.
“쟤가 우리 앞이라고 마구잡이로 구는구나.”
“아직 어리니 그러는 게지.”
“쟤가 올해 몇 살이더라?”
툴툴거리는 것 같아 보여도 스승들의 얼굴엔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제자를 하나 잘 들였더니 재미가 늘었다. 그렇다고 진즉에 제자를 받을 걸 하는 후회는 없었다. 유위람만 한 재질을 가진 아이를 찾기가 어렵다는 걸 알아서였다.
“이놈 봐라.”
“너 왜 사성검의 세 번째 검초를 그렇게 쓰느냐. 완전히 달라졌는데?”
“스승님들께서 일전에 연구해 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자가 궁리해 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쓰는 검초가 매우 흡족해 저리 말한 것임을 잘 알았다. 오직 스승들을 제압할 목적으로 변형시킨 검초가 살기를 띠는데도 어린아이 재롱을 본 양 기뻐하기만 했다.
그렇게 싸움은 해가 졌음에도 쭉 이어졌다. 곧 보름이 코앞이라 달빛 아래 검날만이 번득였다. 제자의 손에서 검을 뺏을 요량으로 세 자루의 검이 끈질기게 따라붙자 유위람은 아예 검을 허공에 던져 버렸다. 그리곤 검을 쫓아가는 척하며 몸을 돌리다 품에서 단검을 꺼내 검강을 덧씌웠다.
현서가 선물해 준 단검은 무척이나 좋은 물건이라 검기가 아니라 검강을 씌워도 깨지기는커녕 스치기만 해도 뼈를 자를 정도의 날카로움을 자랑했다. 단검이라 짧게 쥐었지만 검강 때문에 스승님의 검을 막기에 충분했다.
검을 쳐내며 가운데 있는 스승님의 품 안으로 달려들 듯이 쑥 들어간 유위람이 발로 복부를 노리자 제자에게 맞아줄 생각이 없었던 스승이 훌쩍 물러섰다.
나머지 두 사람도 싸울 만큼 싸운지라 재차 거리를 벌려 덤비지 않고 그 단검에 흥미를 보였다. 세 명의 스승 전부 길가에서 주운 나무작대기로도 강철검을 동강 낼 수 있지만 애초에 ‘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손에서 검을 떼지 못했다.
“단검이지만 좋은 검이구나.”
지금 쓰는 유위람의 검도 유위람이 약관이 되었을 때 스승님들이 챙겨준 것이었다. 용천 지역에서 만드는 검이 이름 높았지만, 검각의 검술과는 맞지 않아 검각에서는 쓰지 않는다. 그래서 명검이라 이름 붙은 검들을 열댓 개 정도 구한 다음 이리저리 가늠한 뒤 제자에게 주었다.
유위람에게 맞춘 검이라 당연 그도 이 검을 아꼈다. 유위람이 검선을 추앙해도 검각의 사람임은 틀림없으니 말이다.
“어디서 구한 것이냐?”
“영우의 야시장에서 구한 것입니다.”
“야시장? 요즘 야시장은 저런 것도 팔아?”
“산 사람의 안목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현서를 칭찬하는 말이었지만, 스승들은 제자가 자기 얼굴에 금칠한다고 볼 뿐이었다.
“정말 잘 만든 검이다. 단검이라는 게 아쉬울 정도야.”
“이거 허 선생이 만드는 방식이랑 비슷한데.”
“그러고 보니 허 선생이 고향에 다녀온다더니, 아직 소식이 없지?”
“허 선생 주려고 말린 약재들이 제법 모였는데.”
유위람의 단검을 두고 벌어진 대화는 이윽고 현재 스승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검을 만드는 장인에게로 넘어갔다.
명검을 만든다고 할 만큼 뛰어난 장인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아 보통 친족이나 인척이 모여 야장 마을을 이룬다. 유위람의 스승들이 허 선생이라 부르는 허석개 역시 칠성검으로 유명한 소덕현 사람이지만, 젊은 시절 성격이 불같아 맨몸으로 독립을 했다고 한다. 후일 가족과 화해는 하였으나 마을로 돌아가진 않고 항도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스승님들이 쓰는 검은 오래된 검이라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는데, 허 선생만큼 만족스럽게 보아주는 이가 없어 유위람을 제자로 들이기전부터 인연을 이어 오고 있었다.
환갑이 넘은 허 선생의 명줄을 늘이기 위해 스승님들은 철마다 좋은 약재를 구해다 주었다. 아마 오늘 캐 온 망태기에 든 약초의 대부분도 허 선생을 위한 것이 분명했다.
실컷 단검을 구경한 뒤 유위람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차나 한잔 하고 가라.”
“예.”
차를 마시고 가란 얘기는 유위람과의 비무가 제법 흡족했다는 뜻이다. 이, 삼 년 전까지만 해도 검을 맞대고 나면 유위람을 둘둘 말아 수련동에 던져두기 일쑤였다. 서른이 넘어서야 스승들이 수련동에 넣어두지 않을 만큼 된 것이다.
스승님들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이른 지 오래라 초옥엔 음식이랄 것도 없었다. 스승들이 말하는 차는 일반적인 찻잎이 아니라 만화산에서 캔 알 수 없는 재료들로 만들어진 약차였다. 쓰고 떫고 시지만 몸에는 좋다. 제자가 된 이후로 줄곧 마시던 것이라 유위람은 익숙하게 차를 준비했다.
“근데 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느냐?”
차를 마시려던 유위람이 멈칫했다.
세 명의 스승 전부 남에게 찬찬히 설명하는 성격도 아니고, 또 속세와 인연을 끊고 저들끼리 산 기간도 길어 맥락 없이 앞뒤 자르고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스승님들이 뜬금없는 말은 익숙하지만, 그 내용이 심히 공교로웠다.
현서와 다정하고 질척거리는 관계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고, 이후 그런 관계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스승님들이 무언가를 눈치채 물어볼 리가 없었다. 어쩌다 저런 소리가 나온 것인가.
“왜 그리 말씀하셨는지,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유위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대답 대신 말을 돌리자 스승들의 표정이 슬쩍 굳었다. 셋이서 역당 모의하듯 눈을 맞추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네가 누구랑 연애를 하든 혼례를 올리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데, 검각은 정파고 우리도 어쨌든 검각의 맥을 잇는 나부랭이들이니 세간에 지탄받을 일이라면 들키지 말아야 한다. 그 정도는 알아서 할 거라 여기마.”
“들키지 않으면 괜찮다고 하는 건 스승이 하면 안 되는 말 아니냐.”
“저놈 첫 정인데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하잖아. 그래도 명색이 우리가 쟤 스승인데 편도 좀 들어주고 그래야지.”
현서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연애니 혼례니 하는 말이 나왔는지를 유위람이 가늠하는 사이, 스승들은 저들끼리 말하느라 바빴다.
“혼자 온 거 보면 역시 짝사랑이지?”
“월영사면 짝사랑이지. 고백했는데 차였나? 설마 청파사의 걔는 아니지? 청사파 전부랑 싸우는 건 좀 성가실 텐데.”
“영우곽가의 걔 아냐? 부인도 있고 애도 있다며.”
“다시 말하지만 검각은 정파다. 부인을 죽이고, 남편을 감금하고 그러는 건 안 된다.”
“방금 안 들키면 다 된다고 했는데 바로 그렇게 말을 바꾸면 우리 체면은 어찌해. 그냥 들키지만 마라. 좋은 동굴 알려줄까? 전에 곰이 살던 곳인데.”
스승님들만 아니었으면 당장 닥치라고 말하며 칼부림을 했을 끔찍한 얘기였다. 귀가 썩을 것 같은 저 말들은 유위람을 놀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자를 진심으로 위한답시고 하는 말이라 더 기가 막혔다. 유위람은 토할 것처럼 거북해진 얼굴로 말을 막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제자가 어째서 화리나 나난과 연애를 해야 합니까. 제자에게 다시없을 심한 언사입니다. 그냥 욕을 하십시오.”
유위람은 연애나 짝사랑을 부정하는 말은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학을 떼며 싫어하는 모습에 스승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되물었다.
“네 수하가 저 월영사 네가 보낸 거라 하던데? 아니야?”
“맞습니다.”
“고백이 실패해서 납치, 감금해 두려고 저렇게나 많이 구해놓은 거 아니야?”
“아닙니다.”
“정말 아니야? 네가 꼭 우리 제자라서가 아니라 너 정도 되는 아이를 거절하려면 청사파의 걔나, 아니면 유부남 정도인 줄 알았지.”
유위람의 외양이 번드르르 해도 성격이 연애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도통 이해하지 못한 스승들이다.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보다 유위람의 성미가 더 유순한 것을 알아서였다.
더욱이 유위람은 검선의 영향으로 대외적으로도 흠 잡힐 곳 없이 예의 바르게 굴고 다니지 않는가. 자신들의 제자가 고백을 거절할 수는 있어도 고백을 거절당할 거라는 상황을 상상도 하지 않은 것이다.
유위람이 한숨을 삼켰다. 분명 수하들이 월영사를 맡기면서 내막을 이야기했을 터인데 하나도 듣지 않고 스승님들끼리 억측만 했을 것이 뻔했다.
거절당한 연애라고 멋대로 추측한 것도 어이가 없는데, 그 대상을 소화리나 곽나난이라고 하다니. 절대로 그놈들 귀에 들어가선 안 될 이야기다. 들키면 관 뚜껑을 덮을 때까지 놀림당할 테니 말이다.
현서를 두고 왜 저런 녀석들이랑 얽혀야 하는지, 그렇다고 스승들에게 현서를 소개할 마음은 없었지만. 유위람은 확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제자는 월영사라는 게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저것이 실인지도 몰랐고, 풀어내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것도 전해 들었을 따름입니다.”
“그래? 그럼 너는 이거 어디서 구했느냐? 월영사는 제나라 특산품인데. 제나라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망한 지 오래라 이제 저렇게 많은 건 구하기도 힘든데. 네 집에서 주던?”
“아닙니다. 제자도 잘 모르나 추측건대 효장락공주 무덤의 부장품이었을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뭐? 너는 그냥 유부남 납치나 하지 왜 남의 무덤은 털어. 어떻게 그런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느냐.”
연세 탓인지 집에는 관심 없어도 무덤에는 크게 관심이 있으신 스승님들이 부장품을 도굴했다는 말에 버럭 화를 냈다.
유부남을 납치, 감금하는 불륜은 괜찮지만 도굴은 안 된단 말인가. 그리고 왜 자꾸 곽나난이랑 자신을 엮는단 말인가. 도굴도 납치도 불륜도 하지 않은 유위람은 화를 내려다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제자의 손에 들어오긴 했지만 제자가 찾은 물건이 아닙니다.”
유위람이 철서성에 있는 자신의 장원에 들어온 수상한 궤짝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스승님들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용혈 얘기에 관심을 보이던 것도 잠깐, 화오궁의 이야기가 나오자 유위람의 말을 끊었다.
“화오궁이라고?”
“네. 자객들의 등에 있던 점이나 대자의 납치에 연관되어 있던 놈의 등에 점이 꽃 모양으로 있었다는 것을 보아 화오궁이 확실하다고 여겼습니다.”
“하긴 그놈들이 사칭당했으면 이렇게 조용했을 리가 없지.”
“그런데 화오궁이 왜 이렇게 자주 강호에 나오지? 무슨 일 있나?”
“자주요?”
십이 년 전의 백화호 사건을 얼마 전이라고 여기시는 건가.
“화오궁이 한 번 나올 때마다 미친 짓을 해서 그렇지, 실상 그렇게 강호에 빈번히 나오지 않는다. 자주 나왔으면 그렇게 오래도록 악명을 유지하고 있었을 리가 없지. 원한을 갚겠다는 자들에게 깔려 진즉에 멸문지화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역산 혈겁이 건무(乾武) 십이 년의 일 아니었나?”
“건무 십이 년이 몇 년 전이지?”
“제자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십구 년 전입니다.”
“그리고 백화호가 십이 년 전이란 말이지. 그러게, 과연 이상하구나.”
스승님들의 말에 의하면 화오궁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는데 그것도 주기가 있다고 했다. 백화호 몰살 사건은 궁주가 아니라 화오궁의 장로라는 사람이 와서 벌이고 간 일이긴 했으나 역산 혈겁의 십칠 년 뒤라는 것을 의아해 했다.
하지만 스승님들이 화오궁의 행사를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 화제는 화오궁에서 다시 월영사로 넘어갔다. 귀한 월영사를 저만치 모았으니 공주릉의 부장품일 수는 있겠으나,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말에는 스승님들 전부가 코웃음을 쳤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거면 왜 부장품이었겠느냐. 그걸로 죽은 공주나 살렸겠지.”
“월영사로 사람 묶었다거나 감금했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는데, 물건을 넣어두는 건 또 처음 들어보네.”
“그렇지. 약수가 없으면 안 풀어지니까. 그래서 감금하던 놈이 약수를 넣은 병을 잃어버려 난리가 났던 적도 있지 않았나.”
스승님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강호는 어쨌기에 그놈의 감금 얘기가 끊이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유위람이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뭐가 어찌 되었든 결론은 하나였다.
“우리를 보아라. 오래 살 수는 있겠지. 하지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이리 오래 살았어도 한 번도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구나.”
“제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끓여둔 차를 전부 다 마시자 스승님들은 이제 대화를 끝내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너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 원래는 소두절 지나 오겠다고 하지 않았어?”
“제자는 스승님들께서 부르셨다는 연락을 받고 온 참입니다.”
“누가 불렀는데? 부른 사람?”
세 명의 스승 전부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유위람이 얼굴을 굳히곤 서둘러 인사했다.
“제자는 이만 물러납니다.”
그리고 스승님들의 대답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급히 산을 내려갔다.
❖ ❖ ❖
바깥의 소란 때문에 놀란 행수가 사람들을 이끌고 급히 별실에 들어왔다. 행수는 소화리의 손에 목이 잡힌 여자를 보고 놀랐으나 침착하게 용건의 우선순위를 추려 말했다.
“노대인의 소개장을 든 손님이 왔는데 바깥의 싸움을 살피는 사이 갑자기 사라져 어쩌나 하던 참이었는데, 여기 계셨군요.”
자칭 호위라는 남자는 정상적인 절차를 밟고 오기는 한 모양이었다. 행수는 강호인은 아니나 검각을 지척에 둔 항도에서 장사하는 상인이다. 도련님들을 비롯한 손님들이 저 목이 잡힌 여자에게 호의적은 아니나, 그렇다고 밖에 있는 무리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검각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손짓으로 뒤에 있는 사환 둘을 내보냈다. 하나는 검각에 보낼 사람이고, 하나는 현재 건물에 있는 손님들을 대피시키라 보낸 것이다. 검각이 지척에 있으니 이제껏 큰 소요는 없었으나 그래도 강호의 생리를 알아 이곳에서 곧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행수께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현서가 사과했다. 자신이 호가의 사람이라 해도 이곳 항도 지부의 총 책임자는 여기 있는 행수다. 일의 순서가 어찌 되었든 손님으로 와서 싸움을 일으킨 꼴이니 응당 사과해야 했다. 현서의 말에 행수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호가 상단의 행수지만 동시에 항도 사람입니다. 항도에서 검각의 손님을 적대하는 악적을 보았는데 돕지 않는다면 항도 사람이 아닙니다.”
검각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이 보이는 말이었다.
이대로 검각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 대치 상태가 이어지는 것이 가장 나은 일이나 상황이 그리 될 리가 없었다. 별실 안의 모두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은 대치 상황을 끊은 것은 경계하던 밖에서의 공격이 아니었다.
―현서야!
옥이 소리쳤다. 현서는 위험을 감지하긴 하였으나 몸이 판단을 따라가지 못해 도망치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정말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목이 잘렸을 테니 말이다.
“도련님!”
하지만 비수를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검날이 빗겨간 목 위로 핏물이 터지자 이사가 비명을 질렀다. 현서가 손으로 목을 잡자 손가락 사이로 핏물들이 줄줄 흘러내렸다.
현서의 호위 둘이 지척에 자리했지만 행수의 곁에 있던 상단의 호위가 현서를 공격할 거라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현서가 급히 행수를 찾았으나 그 역시 자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었다.
행수가 데리고 온 상회의 호위 중 자객이 섞여 있었다. 기습에 실패하자 재차 공격하려던 칼이 호위들의 칼에 막혔다.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괜…….”
―말하지 말거라.
화정이 놀라 현서의 곁으로 가기도 전에 창밖에서 암기가 날아들며 흑립을 쓴 사내들이 쇄도했다. 양방향의 벽을 전부 터 창으로 만든 별실이었다. 더욱이 덧문도 전부 열려 있어 암기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 때 자칭 호위가 별실 가운데 있던 기다란 차탁을 발로 차서 세워 현서의 뒤쪽으로 엄폐물을 만들었다. 정신을 차린 이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현서의 목을 지혈했다.
그리고 난전이 시작되었다.
호위로 가장한 이들과 창을 타고 넘어온 흑립의 이들이 한패라는 것은 확실했다. 개중에는 상단의 손님이나 일꾼들도 있었다. 누가 아군이고 적인지를 판별하기 어려웠다. 비명과 도망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이 건물 안의 사람들이 전부 적인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그것까지 알아볼 상황이 아니었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고작 다섯, 정우문의 간자라는 여인을 포함해도 여섯 명이 전부였다. 그 여섯이 전부 제 몫 이상을 하나 상대의 수가 많았다. 암기를 피해 바닥을 기어 온 화정이 급히 현서의 상처를 살폈다.
“독도 없고, 천운으로 혈관을 다치지도 않았어. 그래도 피가 많이 나니 이대로 누르고 있어.”
가지고 있던 영견으로 수습이 되지 않아 질이 좋은 현서의 옷을 찢어 목을 감았지만 금세 피가 번져 나왔다. 혈관을 다친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왜 피가 쉬이 멎지 않는지, 두려움에 이사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한 번에 많은 피를 흘려 눈앞이 가물거렸다. 현서는 혀를 짓씹으며 억지로 정신을 차려 이사를 잡았다. 철서성에서 쫓긴 이후로 현서는 밖을 나설 때 그냥 나서는 일이 없었다. 현서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사가 현서의 소매와 품을 뒤졌다. 단검을 비롯해 비상약들이 현서의 옷 안에서 나왔다.
도련님이 왜 이런 것들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지. 이사는 어두운 얼굴로 꺼낸 것들을 전부 화정에게 주었다.
화정이 목 근처의 혈을 눌러 출혈을 최대한 막으며 자신이 들고 다니는 약과 현서가 준 약을 섞어 목에 발랐다. 그리고 환약 하나를 현서의 입에 물렸다.
다시 현서의 옷자락을 찢어 목에 감아놓자 좀 전처럼 피가 배어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이사가 현서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너무 세게 누르면 피가 멎기 전에 현서 숨 막혀 죽는다.”
화정이 저렇게 말하는 것은 급한 불은 껐다는 뜻이라 이사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현서를 부축해 차탁으로 만든 벽에 등을 붙였다.
현서에게 바른 약을 행수에게도 쓴 화정이 난전의 상황을 살피며 인상을 썼다. 창이 열려 있다지만 어쨌든 실내라 들고 다니는 호신용 약을 던지기도 애매했다.
피를 많이 흘려 몸이 떨리고 시야가 점멸하는 것이 기절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현서는 지금 쓰러질 순 없었다. 그래도 그간의 수련이 헛되지 않아 재빨리 목에 강기를 둘렀기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목의 반 이상이 잘려나갔을 터였다.
내상을 입은 것이 아니니 운기를 한다고 해도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지 않겠지만 기절하지 않고 버티게는 해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기절을 할 순 없었다.
입 안에 고여 있는 피를 삼키며 현서는 기맥을 따라 내력을 일으켰다. 온몸에 내력이 돌자 반쯤 흐릿했던 시야도 정신도 또렷해졌다. 현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이사에게 기대 있었는데 올려다보게 되니 싸움의 상황이 더 잘 보였다.
‘좋지 않아.’
여섯 모두 열심히 싸우고 있었지만 적의 수가 많았고, 전부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덤비는 이들이었다. 숨이 끊어지지 않으면 어떤 부상을 입어도 멈추지 않는 적은 성가시기 그지없다. 결국 하나씩 죽여나가야 하는데, 사람을 단번에 죽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던 현서의 눈에 커다란 병풍을 접어놓은 것 같은 창문이 보였다. 이 별실의 창은 이중으로 된 풍문(風門) 구조였다. 밖의 덧창은 예쁘게 조각해 안이 훤히 보이는 화창(花窓)이라 안쪽에 실질적인 창문이 더 필요했다. 접힌 창문의 두께를 보니 제법 두꺼워 보였다. 저 창을 펼치면 차탁으로 만든 벽보다는 좀 더 쓸모 있으리라.
현서는 창의 걸쇠를 찾았다. 이사와 현서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지만 걸쇠가 있는 곳까지 가기엔 거리가 애매했다.
‘청연참을 사용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현서의 지척에 단검이 있었지만 저것을 사용하면 시선을 끌 것이 분명했다.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붙들고 상황을 주시하는 이사의 눈치를 보며 현서는 몸을 살짝 틀었다. 불편해서 움직인다고 여긴 이사가 곁을 비워주었다. 현서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딱딱한 과자 몇 개와 다 쓴 약병을 손에 쥐었다.
과자에 내력을 싣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손이 떨려 애꿎은 걸쇠 옆만 맞추며 과자가 터졌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에 묻혔지만 현서는 순간 움찔했다.
“많이 아프세요? 조금만 참으세요.”
―힘이 너무 들어갔다. 힘을 좀 더 빼고 이제껏 수련한 대로 던져 보아라.
이사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현서는 고개를 저으며 이사의 신경을 돌렸다.
옥의 조언을 들어 현서는 두어 번의 시도 끝에 걸쇠를 부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손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땀을 아무렇게나 닦고는 이사의 손을 잡아다 손바닥에 글을 썼다.
금세 현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은 이사가 차탁의 끝으로 기어가 접혀 있던 창을 있는 힘껏 발로 찼다. 비싼 돈을 들여 꾸민 별실이라 무겁고 큰 창이지만 부드럽게 잘 펼쳐졌다. 등 뒤의 소란에 잠시 멈칫하던 일행이 곧장 상황을 이해하곤 닫힌 창 쪽으로 모여들었다.
“현진아, 너 이리 와.”
모두들 행색이 말이 아니었으나 그중에 현진이 가장 좋지 않았다. 검을 쥐고 있는 현진의 손을 따라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본 현서가 놀라 움직이려고 하자 이사가 막았다. 화정이 재빨리 치료를 끝냈지만 현진의 칼끝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현서의 호위들은 아직 큰 상처는 없었지만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었다. 소화리 역시 자잘한 상처를 입었지만 싸움에 영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죽기를 작정한 이들 사이에서 사람을 지키며 싸우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옷자락을 베인 것 외에 어떤 상처도 없던 자칭 호위가 입을 열었다.
“틈을 보아 물러나죠.”
옳은 말이었으나 물러나기가 쉽지 않았다. 창의 반을 닫아 숨을 돌렸지만 여전히 암기가 날아오고 있어 이 창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지금도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숨을 돌렸다는 것은 등 뒤에서 날아오는 암기까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도망을 가려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적들이 어디서 암기를 날리는 것인지 모르나 삼 층보다 높은 곳에서 공격하는 것은 분명했다. 허나 이 근방에 호가 상단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위로 올라가 빠져나가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얘기를 한다면 적들도 듣게 된다.
전음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지만, 어떻게 하는지는 알아 일단 시도해 보려고 하는 현서를 막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위를 통해 탈출하죠.]
자칭 호위가 현서의 속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현서가 놀라 고개를 들려다 아픔에 몸을 웅크렸다. 이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져 현서가 괜찮다고 손을 휘저어 주다 누군가에게 손을 잡혔다. 자칭 호위의 손이었다.
위로 올라가서 탈출하자는 말을 현서에게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현서를 안아 들자 호위 중의 한 명이 이사를 안아 들었다. 다른 호위가 현진을 도우려고 했지만 발을 다친 건 아니라고 현진이 사양했다. 그에 다른 호위는 행수를 안아 들었다.
“너는 알아서 따라와.”
자신을 정우문의 간자라 밝힌 여인은 난전 중에 도망을 가지 않았고, 돌변해서 이쪽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패천검의 저택에서 정우문 소문주를 만나기로 했다는 말이 참인 듯했다. 무엇보다 좀 전의 말을 보면 화정의 도움이 필요한 게 분명했다.
길을 트기 위해 소화리가 나섰다. 웅 하는 소리를 따라 공기가 떨리며 소화리의 팔을 타고 청사파가 자랑하는 항룡쇄번장(亢龍碎飜掌)이 펼쳐졌다. 용이 하늘에 오르며 모든 것을 부서뜨린다는 뜻처럼 거대한 파문이 장력이 되어 퍼져 나갔다.
내장이 터져 나가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벽처럼 둘러싸고 있던 사람의 뭉텅이가 쓸려나가자 빈틈이 생겼다. 일행은 그 사이로 비집고 나가 달렸다.
잠시 우왕좌왕하던 적들이 현서 일행의 의도를 깨닫고는 급히 뒤쫓아 왔다. 팔 층까지 갈 것도 없이 육 층에 열린 창을 넘어 밖으로 나섰다. 적들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지붕을 타고 경신을 이용해 달리는지라 쉽게 따라잡히지 않았다.
자칭 호위의 품에 안겨 가던 현서의 눈에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적들과도 현서 일행과도 거리가 있는 지붕 위에 멀찍이 서 있는지라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저기 기암일사가 있어. 현진 형이 본 것이 맞았나 봐.’
기암일사가 현서에게 손을 흔들며 거듭 무어라 말했지만 순식간에 멀어져서 어떤 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 ❖ ❖
유위람은 급히 산을 내려왔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긴 지 오래였지만 저택은 평소와 달리 대낮처럼 밝았다. 시끄럽진 않았지만 저택의 대다수가 깨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유위람은 대문을 넘기도 전에 현서가 머무는 곳부터 살폈다.
다행히 현서는 자고 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뱉기도 전에 유위람을 기다리던 수하가 낮의 일을 고했다. 습격을 받아 다쳤다는 말에 유위람은 온몸에 피가 빠지는 기분을 느끼며 급히 현서의 처소로 향했다.
서둘러 따라붙은 수하는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의식이 있었고, 소의선께서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했다는 것도 덧붙였다. 이어 말하려는 수하를 물리고 유위람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걱정이 되었는지 방에 등을 켜두고 이사가 간이 침상으로 꾸민 장의자에서 자고 있었다.
유위람은 미끄러지듯이 움직여 현서가 잠들어 있는 침상 앞에 섰다. 고르게 숨을 쉬고는 있었지만 얼굴은 창백했고, 목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자신이 곁에 없는 사이 현서를 잃을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 증거였다.
유위람은 눈을 감으며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속에서 차오르는 흉포한 분노를 내리누르기 위해서였다. 자칫 현서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걱정이 되어 유위람은 억지로 감정을 추슬렀다.
현서의 안전을 눈에 담았으니 이제 돌아가 자세한 상황을 들어야 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발본색원해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위람은 현서의 이마에 붙어 있는 머리칼을 떼어주려다 산에서 그대로 와 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손을 거두었다.
옥이 그만 꺼지라고 말하는 것이 들리지 않아, 한참을 바라보고서야 유위람은 현서의 곁을 떠났다. 방을 나서기 무섭게 얼굴을 굳히고는 기막을 펼쳤다.
방을 나왔으니 굳이 참을 필요도 없었다. 유위람의 검끝을 따라 새파랗게 번득이는 검강이 일렁였다.
현서의 처소에 들 때부터 낯선 기척이 하나 느껴졌다. 그 기척은 자신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지만 유위람은 모르는 기척이었으니 당연히 신경에 거슬렸다.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은 것은 그 기척의 주인을 알아보는 것보다 현서를 먼저 보는 것이 더 중요해서였다.
“나와.”
유위람의 말이 끝나자 호숫가의 나무 그늘에서 사람이 나왔다. 유위람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는 흉흉한 기세에 전혀 위축되지 않은 듯 가볍게 말했다.
“자네, 아니, 당신이 이 저택의 주인인 패천검 유위람이군요.”
“그래, 내가 이 저택의 주인인 유위람이다. 그런데 넌 누구기에 주인이 초대하지 않은 집에 함부로 있는 것이지?”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남자가 금방 납득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몸은 저기 있는 호 공자의 호위요.”
“내가 아는 호 공자의 호위는 네가 아닌데?”
“그거야, 나는 오늘 항도에 도착했으니 모르겠지. 본인은 화용(花茸)에 있는 호 노대인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람이오. 그분의 서신을 다른 호 공자에게 전했고, 방에 있는 호 공자와는 아직 통성명 못 했지만 인정은 받았지. 감사 인사도 받았고. 그래서 여기 있는 것이라오.”
그런 사정이라면 유위람이 입을 댈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호현진이 허락했다고 해도 나난이나 다른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현서의 처소를 지키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에 유위람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런 사정이라면 알겠지만, 그래도 집주인으로서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야 할 것 같군요.”
“자릴 비우라고?”
“처소를 지킬 사람을 좀 더 불러놓지요.”
유위람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호위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유위람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대화를 옥도 전부 들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잠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위람이 돌아오지 않은 것도 있었고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경계가 삼엄해진 탓이었다. 검각의 영역인 항도에서 패천검의 손님이 공격을 받은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유위람이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현서를 보러 간 것을 몰라 이제 도착했다고 여긴 사람들은 유위람이 달고 온 호위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낯선 기척이 있더군.”
유위람은 그 말로 설명을 끝내곤 호위의 진위 여부부터 따지기로 했다.
호위가 말한 얘기는 다음과 같았다. 호위의 이름은 주경으로 현서의 할아버지인 호익원을 잠시 도운 일이 있어 화용에 있는 신농자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영우곽가에서 주최한 비무회 후 기암일사가 우승 상품인 용혈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보물을 노린 사람들로부터 무수한 공격을 받아 여정이 녹록치 않았음을 말했다. 그리곤 기암일사는 현서가 보물의 주인이라 공격받았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아끼는 막내 손자에게 부채를 느껴 늘 걱정하기 일쑤였던지라 호익원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현서가 항도로 갔다는 소식은 알고 있어 처음에는 기암일사에게 호위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암일사가 사문의 일이 있어 돕지 못한다고 거절을 하는 바람에 순서가 주경에게 넘어 왔다는 말이었다.
두 번째의 설명이지만 주경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팔에 붕대를 감은 현진이 말했다.
“할아버님께서 보내신 편지에도 그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필적도 할아버님의 것이 맞고, 무엇보다 편지 끝에 찍힌 낙관은 호가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진품입니다.”
호가 사람만 알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현서 역시 낙관을 알아보았다고 첨언했다. 저 사람이 왜 호위로 왔는지는 알았으나 등장 시기가 공교로워 유위람의 의심이 완전히 거두어지진 않았다.
“의심받기 딱 좋은 건 알겠지만 만나자 마자 이런 일을 겪을 줄이야.”
주경이 턱을 문지르며 이 이상의 결백을 어찌 증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결백한 사람에게 결백을 증명하라는 것은 어렵고 괴상한 일이라는 걸 모두 알아 주경을 탓하진 못했다.
“기암일사가 같이 와서 소개를 했다면 좀 달라졌을까.”
주경의 중얼거림에 현진이 놀라며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길에서 기암일사를 보았다고 말했다.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뭐? 항도에 그놈이 있었다고?”
주경의 어이없어 하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호 공자의 호위는 못 하지만 거절한 것이 미안하니 항도까지 길 안내를 해주겠다며 길잡이를 자처하더니, 항도를 지척에 두고 일이 있다고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진짜 그놈 마음에 안 들어.”
주경이 투덜투덜 기암일사를 욕했다. 주경이 한 말 중에서 유위람의 마음에 가장 드는 것이었다.
오늘의 습격이 없었다면 호위가 한 명 늘어난 것을 두고 이렇게 날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의심한다고 화를 낼 법도 한데 성격이 좋은지 주경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싸우자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알았다. 유위람은 정중하게 협조에 대한 감사를 표하며 사람을 붙여 주경이 머물 곳을 안내해 주었다.
현서의 할아버지가 보낸 호위가 확실하다면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죽이면 될 일이다.
“화운검은 이제 좀 쉬어야 해.”
호 노대인이 보낸 편지의 진위 판정에는 현진이 있어야 했지만 다른 일은 굳이 현진이 없어도 되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부상을 입었는데도 편히 쉬지 못했을 현진을 내보냈다. 현진이 물러가자 유위람이 입을 열었다.
“검각에 가서 만려를 데리고 와라. 최대한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
유위람은 두 번 말하기 싫어 전음을 사용하지 않고 수하에게 지시했다. 만려는 현 검각주 윤채풍의 대제자였다. 유위람의 설명을 기다리는 네 명에게 말했다.
“스승님들께서 나를 부른 적이 없다더군.”
차를 마시는 유위람의 기세가 흉흉했다. 이른 아침 유위람에게 만화산의 전언을 가져다준 것은 검각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검각의 일꾼이 서신을 가져오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더니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단순히 자신만 속았다면 검각을 털어 조사하고 끝날 일이었으나, 현서가 다치는 바람에 유위람의 분노는 끝을 모르는 상태였다.
“네가 오늘 저택에 있으면 안 된다고 여긴 사람이 있었던 거겠지.”
화정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정우문의 소문주가 보냈다고 한 사람이 오늘 패천검을 만나러 올 예정이었는데 누군가 그것이 불만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현서를 해코지하려고 유위람을 떼어놓았다든가.
현서의 근처에 행수가 서 있어 배신한 호위 역시 가까이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력이 없는 현서부터 공격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습을 하려면 현진이나 현서의 호위를 공격해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라도 더 줄이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앞선 일들처럼 이번에도 현서가 재수 없게 휘말렸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어제의 일은 어딘가 이상했다. 벌어진 일들이 모두 현서를 노리고 계획된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나 빈틈이 생겼을 때 현서를 죽이려 하는 의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허나 누구도 이유를 몰랐다.
호가 상단의 행수는 목숨에 지장은 없었지만 거동이 힘든 상태였다. 때문에 습격했던 무리들이 물러나고 수습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곽나난이었다. 현서 일행이 도망친 지 반시진(1시간)도 되지 않아 검각의 사람들이 호가 상단에 도착해 물샐틈없이 봉쇄해 두었다.
헌데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습하는 과정에 적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소화리의 말을 들었을 때는 적어도 스무 구가 넘는 시체가 있을 거라 여겼는데 한 구도 없었다.
화리가 항룡쇄번장을 펼쳤다고 했으니 날아간 팔다리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보이지 않았다. 찢겨진 살점들이 핏물에 섞여 있었을 뿐이었다.
탐문을 하려 했으나 암기가 날아드는 시점에 주위 상인들은 문을 닫고 몸을 피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는 들었지만, 시체를 옮기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난은 행수의 도움을 받아 배신자의 행적부터 찾기로 했다. 상단에서 오래도록 일한 사람이었다며 행수는 침통해 했지만 자신의 눈으로 본 일을 부정할 수 없었다.
“헌데 아무도 없더군.”
당장 행수가 알려준 사람들의 집을 찾아갔으나 배신자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가 사라져 있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하인까지 전부 사라졌다는 것이다.
“마치 칠암문 얘길 듣는 것 같군.”
유위람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어도 칠암문 역시 화오궁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시신을 하나도 못 구한 건 아냐.”
이번엔 화정이 말했다. 얼굴에 숨기지 못한 피로가 가득했다.
주변을 탐문 수색하던 곽나난의 일행이 호가 상단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골목에서 여인의 시체를 하나 발견했다. 혹시 연관 있는 시체일지 몰라 저택으로 가져왔고, 그 시체를 상단을 방문했던 일행이 전부 알아보았다.
여인은 같이 도망쳤으나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그 모습이 없었다. 부상을 입긴 했으나 죽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몸을 피한 건 줄 알았는데 결국 시신으로 발견이 되었다.
“너도 얼굴을 보면 알 거다. 철서에 있는 네 장원을 떠날 때 우릴 습격했던 사람들 중 하나야. 생강시는 아니라는데 기이할 정도로 생기가 없어 이상했거든.”
화오궁의 사람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등을 살폈다고 했다. 무엇보다 화오궁 놈들이 몸에 무슨 짓을 했다는 투로 말했기 때문에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화오궁의 표식인 점은 없지만 등에 진이 그려져 있었어. 사술(邪術)임은 확실한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나도 처음 보는 것이라. 일단 베껴는 두었는데.”
“주인님!”
화정의 말은 급히 들어온 수하에 의해 끊어졌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수하가 다급하게 말했다.
“빈방에 묶어두었던 여인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빈방에 있는 사람이라곤 방금 전까지 화정이 말하던 그 사람이 전부였다.
“숨이 끊어진 것을 몇 번이고 확인했는데. 강시도 아니었는데. 어째서……?”
화정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어졌으나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들 급히 걸음을 옮겼다. 시체는 내원 창고 건물의 빈방에 두었다. 뜰에 도착하니 처소 앞을 지키던 이들이 긴장한 것이 보였다. 안에서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것이 흘러 나왔다.
“너희는 이만 물러가라.”
유위람이 수하들을 물린 뒤 방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창고라 가구랄 것도 없어 바로 시체를 올려둔 침상이 보였다. 지금은 침상에 묶인 몸뚱이가 몸부림을 치고 있으니 시체라 할 수도 없었다.
수하가 말한 난동은 무척이나 순화된 설명이었다. 묶어두지 않았다면 온몸의 뼈가 부러졌을 정도로 기괴하게 사지가 비틀렸다. 담이 약한 사람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을 정도로 끔찍한 모양이기도 했다.
“숨을 쉬는군요. 맥도 뛰고 심장도 움직이고.”
직접 맥을 짚지 않아도 모를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것은 확실하지만 흰자만 희번덕거리는 상태라 의식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혹시 몰라 거리를 유지 중이었지만 발작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화정이 말했다.
“내 눈엔 여전히 저게 강시나 생강시로는 안 보여. 내가 아는 그 어떤 기준에도 맞지 않아.”
시체를 사술로 움직이는 것이 강시다. 강시는 아픔과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몸의 일부를 잃어도, 심지어 목이 잘려도 움직이는 것에 무리가 없다. 허나 사역하는 데 제한이 있고, 임기응변에 강하지 못하며, 술자가 지근거리에 있어야 했다.
그 단점을 보완하고자 만든 것이 생강시다. 죽기 직전의 사람이 회광반조(回光返照)를 보일 때 사술을 걸어 죽지 않은 목숨을 강시로 만드는 것이다.
시킨 일만을 이행하는 강시와 달리 생강시는 주인의 속박을 받지만 어느 정도 자율성이 있다. 창백함이 과하긴 하나 겉보기에도 살아 있는 사람과 다름없다.
하지만 만드는 방법은 강시보다 더 어렵다.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만들 수는 있으나 그대로 죽지 않고, 회광반조를 보이느냐 아니냐는 그야말로 운이기 때문이었다.
과거 목멱곡(木覓谷)이 강시와 생강시를 만들어 부리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백양교와 충돌해 사라졌다. 목멱곡 외에도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괴인들이 강시나 생강시를 만들긴 하였으나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강시나 생강시를 만들어 부리는 것에는 특별한 비술(祕術)이 필요했다. 또한 술자가 가진 능력에 영향을 많이 받고 하나를 만드는 데 큰돈이 들어 강시와 생강시로 군대를 만들었던 한창 때의 목멱곡 같은 위세를 가진 무리는 나오지 못했다.
“강시든 생강시든 백회혈(百會穴)이 비정상적인 모양을 보여. 살아 있을 때야 머리에 꽃을 꽂고 있었으니 못 알아볼 수도 있다고 하지만, 시체를 살펴보았을 때 이상한 점은 없었어. 저것이 강시나 생강시라면 의당이 모르는 새로운 방식이 나왔다고 할 수밖에.”
목멱곡의 쇠락 이후 강시나 생강시를 보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 중에 화정을 제외하고 생강시를 본 이는 아무도 없었고, 강시는 감윤이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화 누이처럼 자세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내가 본 것과도 달라 보이긴 해. 게다가 저건 강시치고는 생기 있어 보이는데.”
“저 발작을 생기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썩지 않았잖아.”
죽은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았지만 유월이다. 따로 방부 처리를 하거나 얼음을 가져다 놓지도 않았다. 그늘진 방에 두었다 해도 입 안이나 눈알 같은 썩기 좋은 부위에서 부패가 진행되었어야 했지만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말은 평온하게 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발작하는 여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팔을 묶어둔 끈이 끊어졌다.
그 때였다. 구속에서 풀려나자 발작이 멈추며 흰자만이 보였던 눈알이 어느새 평범한 눈이 되었다. 주위를 살피듯이 검은자가 움직이는 것에 긴장을 했다. 혹시 이지가 돌아왔나 싶어 살피는데 천창을 보고 있던 고개가 휙 하고 꺾이며 얼굴이 유위람을 비롯한 일행에게 향했다.
단순히 고개를 돌리는 행동이었는데도 부자연스러운 모양새였다. 여인의 입이 열린 것도 그와 동시였다.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억지로 잡힌 날벌레가 혼신을 다해 날개를 파르르 떠는 것처럼 눈꺼풀을 사정없이 깜박이며 거북하리만큼 딱딱한 목소리로 같은 말만을 빠르게 반복했다.
순간 말을 잃을 정도로 기괴하고 기분 나쁜 광경이었다.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도, 다가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여인만이 뜻 없는 말을 저주처럼 내뱉었다.
일 각(15분)이 지나기도 전에 여인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말을 뚝 하고 멈추었다. 눈을 감지도 않았고 입도 벌린 채였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침묵을 깬 것은 유위람이었다.
“다시 죽었군요.”
떨어져 있었지만 호흡도 맥도 없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또 살아날까.”
“한 번 있었으니 두 번도 있을 수 있겠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이런 일을 듣거나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 사람의 등을 좀 봐야겠어.”
화정이 말하자 유위람이 검을 휘둘렀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채 나머지 끈을 잘라내고 손을 휘둘러 시체를 뒤집었다. 시체에 상처를 내지 않고 옷을 잘라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허.”
화정을 제외한 이들이 등의 진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인의 등에는 처음 보는 문자와 알 수 없는 상징들이 가득했다. 붓으로 그린 것일 리가 없으니 전부 문신을 새긴 것일 터.
“내 방에 가면 진을 베껴놓은 종이가 있을 테니 그걸 가져오라고 해. 그리고 지필묵도 새로 가져오고.”
유위람은 화정이 시키는 바를 지시해 두고는 이유를 물었다.
“워낙 복잡한 진이긴 하지만 처음 보았을 때와 모양이 좀 달라진 것 같아.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확인해 봐야겠어.”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가만히 있던 감윤이 말했다.
“삼 사형이 아직 강주에 있을 거야. 사람을 보내 삼 사형을 모셔와야겠어.”
감윤은 검술보다 부적과 진에 능통한 바로 위의 사형을 떠올렸다. 스승님이 시키신 일 때문에 강주에 있어 다행이었다. 소주와 강주는 태호문이 있는 난주보다 훨씬 가까우니 말이다.
“바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유위람이 대꾸했다. 감윤과 유위람이 대화하는 사이 다른 이들은 시체의 처우를 놓고 대화하는 중이었다.
“방부 처리를 해야 할까.”
“그것보단 방에 진을 설치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형이 도착하기 전에 내가 해놓을까?”
감윤이 끼어들었다.
“그럴 필요 없어.”
모두가 감윤을 말렸다. 쓸모없는 부적만큼 쓸모없는 진을 만들어놓을 것이 뻔했다. 그 후, 모든 조치를 끝낼 때까지 시체는 다시 눈뜨는 일이 없었다.
그사이 현서의 새로운 호위가 시체가 살아나 발작하는 소리를 밖에서 듣다가 사라졌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아침 일찍 일어난 현서는 이사가 건네준 약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는 침상에 앉아 손가락으로 침구를 두들겼다. 갑작스러운 공격과 부상에 어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자문원의 기억에서 기인한 화오궁에 대한 혐오는 현서에게도 확실히 뿌리를 내렸다.
―몸에 좋지 않으니 너무 화내지 마려무나.
‘……화가 난 건 아니야. 아니, 화난 거 맞아.’
살해당할 뻔했으니 그 상대에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현서가 화가 난 이유는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호는 무정한 곳으로 협이니 도의니 하고 치장을 해도 결국 힘의 논리가 먼저인 곳이다. 자문원을 그렇게나 배척하려고 했으나 끝까지 그러지 못한 것도 결국 자문원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일방적인 폭력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강자가 약자를 짓이긴다. 비단 백양교의 일이 아니어도 치우친 폭력과 학살은 자문원의 기억에 너무도 많았다.
자문원도 원대한 뜻을 가지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정한 스승님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현서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자문원과 같은 무위도 없었다. 당장 화오궁주를 만난다고 해도 궁주와 겨뤄보기는커녕 그쪽이 휘두르는 손짓 하나에 촛불처럼 순식간에 사그라질 터였다.
그렇다고 분을 삭이며 가만히 있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옥이 현서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과 별개로 현서가 하려는 모든 일을 막아 황금으로 된 울타리 안에서만 지내라고 할 마음은 없었다. 돌인 옥은 천년만년 한 자리에서 꼼짝 않고 지내도 상관없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음을 알아서였다. 인간을 귀애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옥이 보기에도 위험한 일이라면 말릴 테다. 편애는 하지만 서녕에 있는 가족들처럼 무조건 싸고도는 건 아니라고, 옥은 현서가 알았다면 전혀 동의하지 않을 생각을 했다.
결정을 끝낸 현서는 이사를 부르려다 멈칫했다. 깊게 베이긴 않았지만 베인 범위가 넓어 쓰라리긴 했다. 목 안을 다친 것은 아니라 말을 못 할 정도는 아닌데 이사는 현서가 되도록 말을 덜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이사를 찾기 위해 현서는 방 밖으로 나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문을 열고 나서자 할아버님이 보냈다는 호위가 서 있었다. 어제 일에 대한 감사는 여러 번 하였으나 아직 제대로 된 인사를 못 한 것을 깨달았다. 경황이 없었다고 해도 이런 실례가. 현서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간밤에 잘 쉬셨는지요. 제가 부족해서 대협의 이름도 아직 듣지 못하는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제 불찰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현진이 확인한 할아버지의 서신을 현서도 보았다. 하지만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어 서신의 내용까지 꼼꼼히 눈에 넣을 수 없었다. 낙관의 진위 여부만을 가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현서는 이 사람을 할아버님이 보낸 사람으로 인정했다. 눈앞의 호위는 정말로 좋을 때에 나타나 주었다. 그것을 두고 의심할 수 있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을 의심만 하고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을 알아서였다.
호위라고 해도 아버님이 현서에게 붙인 호위들과 달랐다. 기존의 호위들은 수대처 소속으로 호부의 사람이다. 하지만 할아버님이 보낸 저 사람은 반쯤은 손님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까다로운 사람은 아닌지 현서의 사과를 받고는 통성명을 끝내다 못해 말을 편히 하라는 권유까지 홀랑 받아먹었다.
“도련님!”
이사가 현서를 발견하곤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사와는 이미 통성명을 마친 듯 눈인사만 건넨 주경이 훌쩍 사라졌다. 아마 이 뜰 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재빨리 현서의 상세를 살핀 이사가 말했다.
“손님이 왔어요.”
“마침 잘 왔어.”
둘이 동시에 말하는 바람에 현서는 품에서 금패를 꺼내려다 멈칫했다. 손님? 의아해 하던 현서는 손님이 누군지를 듣자 두말없이 만나겠다고 했다.
이사가 눈을 살포시 찡그렸다. 실랑이를 해봤자 도련님이 말을 더 많이 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강호의 일은 몰라도 호가의 일은 이사도 잘 알았다. 지금 도련님은 항도에 있는 호가의 자손으로서 할 일을 하려는 것이라 말릴 수 없었다.
얼마 후, 딱딱하게 굳은 중년의 여인과 남자 한 명이 이사의 안내를 받아 왔다. 한 명은 항도에 있는 호가 전장(錢莊)의 행수고, 다른 한 사람은 항도 호가 상단의 부행수였다. 행수가 공격을 당해 누웠으니 부행수가 현서를 찾아온 것이다.
서녕에서 사람이 오기 전까지 현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쓸 생각이었다.
❖ ❖ ❖
되살아났던 시체를 묶어두고, 그 방 전체에 진을 설치하는 것을 끝낸 뒤 구르듯이 달려온 검각주의 대제자를 만났다. 유위람은 엄정한 얼굴로 검각을 전부 점검하고 소식을 갖고 온 일꾼을 대령하라고 말했다.
만려는 새파래졌다. 존경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사숙조는 질책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더 무서웠다.
이것은 변명의 여지도 없는 검각의 실책이었고 유위람은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 윤채풍을 불러다 무릎 꿇릴 수도 있었다. 유위람이 각주의 체면을 늘 챙겨준다는 것을 알았으나 언제까지 그래 줄지 모를 일이다. 부러 숨기지도 않아 따끔따끔한 공기는 사숙조의 심기가 매우 불편함을 말하고 있었다.
만려를 돌려보낸 뒤 유위람은 자신의 장원도 발칵 뒤집어놓았다. 화오궁의 첩자가 이곳에도 숨어들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등에 점이 있는 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유위람은 의심스러워 보이는 두 명을 추려 내었다. 고신할 것도 없이 항도의 유력 가문이 유위람과 선을 대기 위해 보낸 것이라는 자백이 술술 나왔다.
유위람은 첩자를 처벌하는 대신, 패천검의 저택에 끄나풀을 심어 넣는 그 담대함을 칭찬하는 무척이나 정중한 서신을 써 돌려보냈다. 그 두 가문이 벌벌 떨다 항도에서 야반도주를 하든 말든 그건 유위람이 알 바가 아니었다.
원래도 체계가 잘 잡혀 있던 수하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날이 새도록 저택의 안팎을 정리하느라 유위람은 한숨도 자지 않았다.
습관처럼 현서의 기척을 살피던 유위람은 현서가 손님을 맞이했다는 보고를 떠올렸다. 유위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에 잠시 보아 괜찮다는 걸 확인했지만 그래도 눈을 뜨고 있는 현서를 보고 싶었다. 유위람은 우아하지만 빠른 속도로 걸어 현서의 처소에 도착했다. 호위의 기척이 나는 곳을 일별하며 눈썹을 슬쩍 찡그렸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마침 손님을 돌려보내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현서가 유위람을 발견했다. 유위람과 눈이 마주치자 현서의 얼굴에 반가움이 서리며 미소가 번졌다.
그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현서가 보여주는 저 무방비한 기쁨은 유위람에게도 전염이 되어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너무 달아서 심장 안쪽이 아릿해지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이 들었다.
유위람이 움직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린 현서가 그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사레가 들려 기침이 터졌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조금 전까지 말을 많이 한 탓이었다.
기침이 한 번 시작되면 쉽게 멈추지 않는 걸 이제 유위람도 안다. 유위람이 날듯이 다가와 현서를 품에 안아 올려 어깨에 얼굴을 묻게 하곤 부드럽게 등을 도닥였다.
[화 누이를 불러주십시오.]
호위인 주경이 움직이자 현서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섰다. 기침이 쉬이 멎지 않아 침상에 올리지도 않고 처소 안을 서성이며 현서를 도닥이던 유위람은 피 냄새에 숨을 삼켰다. 기침 때문에 목의 상처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두려움을 막지는 못했다.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초가 막 지났을 때, 유위람은 자신의 장원에 가짜 소식을 전했던 일꾼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체의 상태를 볼 때 소식을 전하고 곧바로 숨이 끊어진 것 같다고 했다.
당연히 흉수는 찾지 못했다. 검각은 아직 내사 중으로 사죄를 구하는 윤채풍의 서신만이 먼저 도착했을 뿐이었다.
유위람은 수하의 전음을 들으며 현서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수하는 현서가 오전에 손님을 맞이한 일이 어찌 되었는지 그 경과를 말해 주는 중이었다.
사라진 이들 중에 호가 상단에 적을 둔 이들은 공식적으로 수배 명단에 올랐다. 관과 무림은 거리를 두지만 상인 집안의 자제인 현서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현서가 가지고 있는 금패는 호가의 직계만이 가지는 것으로 현진에게는 없는 물건이다. 이 금패는 원한다면 약속이나 소개 없이 황족이나 왕공을 만날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현서는 작정하고 금패를 거침없이 이용했다.
죄명은 횡령과 그로 인한 살해 모의였다. 관을 통한 공식적인 수배 외에도 현서는 따로 현상금을 걸었다. 호가는 직접 표국을 운영하진 않았으나 여러 척의 배를 가지고 있어 큰 항구마다 지부가 존재했고, 수부(水夫) 연합과도 긴밀한 관계였다.
소문에 큰돈을 얹어 풀었다. 등에 점이 있는 첩자를 둔 은밀한 단체에 관한 얘기였다. 화오궁의 이름은 일부러 뺐다.
배신자나 첩자를 달가워할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다. 어떤 조직이든 무리든 간에 이제 등에 점이 있는 자들을 색출해 낼 것이다. 아직 숨어 있는 화오궁의 잔당이 있다면 들키거나 도망치는 수밖에 없을 터.
어떤 비밀은 지켜질 때만 힘이 된다. 현서는 작정하고 화오궁의 비밀 하나를 없애려 들었다.
부상을 입은 이들과 사망자에 관한 일도 유위람이 입댈 것 없이 확실했다.
목이 잘릴 뻔한 일을 겪었는데도 현서는 대범하게 행동했다. 서녕호가의 훈육이 훌륭한 것인지 타고난 기질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견하다 여기면서도 걱정이 되어 심란했다.
“내가 깨울 테니 너는 호 공자를 채비시킬 준비를 해 오너라. 정찬은 좀 더 있어야 할 테니 가벼운 요깃거리도 같이 챙기고.”
이사가 유위람을 보고 현서를 깨우려 하자 자신이 하겠다고 이사를 물러나게 했다. 유위람은 바로 깨우지 않고 곁에 서서 잠들어 있는 현서를 보았다. 이 저택 안 어디에 있든 유위람이 작정하면 현서의 기척을 느낄 수 있지만 이렇게 두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았다.
지금은 피 한 방울 배어 있지 않았지만 목에 감겨 있는 붕대가 참으로 거슬렸다.
아침의 그 일은 예상대로 기침을 너무 하는 바람에 상처가 벌어진 것이 맞았다. 기침을 멈추고도 기진맥진하여 계속 유위람의 품에 안겨 있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다고 화정이 말했다.
유위람은 납득할 수 없었지만 현서의 상태는 아홉 살 이후 최상이라고 했다. 화정과 이사가 아홉 살에서 열네 살까지에 비하면 새로이 태어난 수준이라고 입을 모았다. 처음 독을 먹었을 때 가장 심하게 타격을 입은 목이 이만큼 좋아진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현서가 몸이 약한 것을 잘 아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영우곽가에서 피를 토한 것에 비하면 이 목의 피는 별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겠지만 유위람에게는 어느 것이나 똑같았다.
무인인 유위람은 사람이 잘 죽는다는 걸 안다. 그 강인했던 자문원도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 그에 비하면 깃털이나 다름없는 현서는 어떠하겠는가.
미동도 없이 얌전히 자던 현서가 더운지 이불을 밀어내곤 팔을 드러냈다. 팔찌를 차지 않은 오른손이었다.
희고 예쁜 손을 빤히 보던 유위람이 가만히 손을 잡아 들었다. 방금 전까지 이불 안에 있어 따끈하고 보드라운 현서의 손이 유위람의 손에 들어왔다.
유위람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숙여 그 손끝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옥은 너무 어이없고 화가 나는 일을 겪으면 말문이 막힌다는 경험을 체험하는 중이었다. 슬그머니 안을 지켜보던 주경도 그 모습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 ❖ ❖
정우문 소문주의 이름은 수경청으로 족히 현서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한의 사내였다. 하지만 기척은 그림자와 같고 움직임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정우문의 독문 무공인 듯했다. 목소리가 차분하고 사람을 편하게 하는 화법을 구사해 옥과 현서 둘 다 수경청에 대한 첫인상이 좋았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제대로 쉬지도 못해 식사가 입에 맞았는지 모르겠군.”
“만족스러운 식사였습니다. 몇 가지는 요리법을 알아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오늘 나온 음식들의 요리법을 적어두라 말해 두지.”
정찬 후 집주인인 유위람이 수경청과 대화를 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화정은 현서에게 목 안을 다친 것은 아니지만 기침을 조심하는 것이 좋으니 되도록 말을 아끼라고 권했다. 현서는 정찬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객인 현서와 수경청의 자리는 상석이라 저택의 주인인 유위람의 좌우에 앉아야 했지만 옥이 반대해서 현서는 부러 다른 자리를 골랐다.
현서가 멀찍이 자리하자 유위람이 잠시 보긴 했으나 굳이 옆 자리를 청하진 않았다. 팔찌가 있는 왼팔을 잠시 보는 것 같기도 했는데, 기분 탓인지도 몰랐다.
‘무슨 일인지 말 안 해줄 거야?’
아직 중요한 얘기들이 나오지 않아 현서는 다시금 졸랐지만 옥은 묵묵부답이었다. 옥이 유위람에게 화를 내거나 툴툴거릴 때는 있지만 오늘처럼 대노한 것은 처음 보았다.
낮잠에서 깼더니 이사보다 패천검이 먼저 보였고 옥은 엄청나게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옥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현서가 모를 수 없었다.
자문원의 팔찌인 옥이 현서와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린 참이다. 그 어마어마한 사당을 떠올려보면 패천검이 옥에게 무례를 저질렀을 거라는 상상은 아무래도 되지 않았다. 하여 도대체 무슨 일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유는 나중에 알려줄 테니, 어찌 되었든 한동안 저 새, 놈 근처에 있지 마라.
‘응.’
방금 욕하려고 한 거 아닌가, 현서는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얌전히 대답했다.
뭔지 몰라도 패천검이 옥의 마음을 상하게 한 건 분명해 보였다. 패천검의 변명을 해주고 싶어도 무슨 실례를 저질렀는지 모르니 어설피 편을 들었다가 옥을 더 화나게 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현서에겐 옥이 하는 말이 더 중했다.
옥은 매우 기분이 나빴다. 저놈은 분명 자신이 보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했다! 긁어 부스럼이라 모른 척했더니 혼자 자각을 했을 줄이야.
유위람이 현서를 좋아하는 건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저놈도 보는 눈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딜 넘봐. 어림없지.
“소문주에게 우선 물어볼 것이 있어.”
각자 다른 상념에 빠져 있던 현서와 옥은 유위람이 인사를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정신을 챙겼다.
“이름은 모르나 연검을 쓰는 여인이 있는데 그자가 자신이 소문주와 연이 있어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더군.”
패천검의 말을 수경청이 바로 알아들었다.
“아, 그 사람이 벌써 도착했습니까? 연락이 없어 늦는 줄 알았더니. 지금 어디 있습니까?”
“좋지 않은 얘길 전해야 해 유감이야.”
어제의 일을 간략하게 말하자 수경청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편의상 수경청의 간자라 하였으나 오래도록 안 사이는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 좋을 리가 없었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수경청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정우문은 정보를 사고파는 곳입니다. 저희가 큰 문파는 아니나 정보의 정확성과 손님에 대한 신의만큼은 자신하지요.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었습니다.”
백화호 지부는 정우문의 중요 거점이라 대대로 소문주가 관리하는 곳이었다. 화오궁의 호법이라는 자가 나타나 백화호 지부의 모두를 살해하였을 때 당시 소문주였던 수경청의 형도 그곳에 있었다.
“시신이 즐비했고 지부는 잿더미로 변했지요.”
십이 년이 흘렀어도 아물지 않는 상처다. 재물과 명성을 잃었지만 가장 큰 슬픔은 사람을 잃은 것이었다.
그날 백화호 지부에 있던 사람은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까지 전부 죽었다. 후계자인 큰 아들을 비롯해 아는 얼굴들이 줄지어 시신으로 발견되자 정우문주는 잿더미 속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며 화오궁을 저주했다.
짓이겨진 현판 아래 정우문이 거짓 정보를 팔았다고 비난하는 글귀가 화오궁의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정우문은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것도 모자라 거짓 정보를 취급했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백보 양보해 그들이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 해도 그 대가를 이렇게 치르게 해서는 안 되었다. 정우문이 중소 문파라 해서 원한도 작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복수를 다짐하며 화오궁을 추적하는 한편, 죽은 이들이 무슨 정보를 찾았는지도 같이 탐문했다.
“형님께서 무엇을 찾았는지 소문주는 아시는가?”
“네, 압니다.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금충(金蟲)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엄자산이라는 도공(刀工)이 만든 검을 추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목이 말랐는지 수경청은 반쯤 식은 차를 한 번에 마셨다. 금충도 엄자산이라는 사람도 여기 있는 이들에겐 전부 금시초문인 이름이었다.
“금충은 연주 수해(樹海)에 사는 벌레입니다. 성체는 손바닥만 해서 잘못 볼 수는 없지만 반년에 한 번 서식지를 몽땅 옮기기 때문에 찾는 것이 쉽지 않지요.”
숲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고 해서 수해라 불리는 악명 높은 곳이다. 영약의 재료가 되는 귀한 식물과 동물들이 산다고 해서 해마다 많은 이들이 그곳을 찾았다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화오궁에서 넉넉한 돈을 주었다면 못 찾을 일도 아니었다.
“엄자산이란 도공은 찾지 못했습니다. 철을 다룬다면 숟가락이나 낫을 만드는 이들까지 전부 알아보았지만 그런 이름은 없었습니다. 딱 한 사람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백오십 년 전의 사람이었죠.”
“이래서야 화오궁이 생트집을 잡은 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어?”
그렇지 않아도 이 자리의 모두가 화오궁을 싫어하는데 백오십 년 전의 사람이라는 말에 화정이 욕을 내뱉듯 화를 내었다.
“소문주는 그 두 가지가 무엇을 위한 것인 줄 아는가?”
유위람의 물음에 수경청은 얼굴을 문질렀다. 피곤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이없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금충은 반혼향에 들어가는 재료고, 엄자산은 일설에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검을 만든 도공이라고 하더군요.”
모두가 잠시 말을 잃었다. 어이없는 대답이 나온 것도 있었으나, 검선을 되살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곽다순이 화오궁의 동맹이라는 것이 떠올라서였다.
“엄자산은 이름을 알린 명장이 아닙니다. 공신록에 올라간 왕공 귀족도 아니고 백오십 년 전의 평민 호적이 남아 있을 리도 없지요. 겨우 소덕현 인근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낸 것이 전부였습니다. 혹시 남겨진 검이 있을까 하여 소덕현에 가보았는데 오래전 역병이 돌아 엄가는 대부분이 죽고 엄자산의 손자만이 허가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손자도 백 년 전의 사람으로 고인이 된 지 오래라 엄자산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검이 남아 있기는커녕 그가 검을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유위람은 수경청의 얘기에서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발견했다. 소덕현의 허씨. 스승님들이 아끼는 허 선생과 같은 성씨에 출신지도 같다.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유위람은 이 회동이 끝나면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말하는 검이라니, 화오궁은 너 같은 존재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싶었던 걸까?’
―나는 무구가 아니다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현서는 엄자산은 몰랐지만 말하는 검에 관한 얘기는 알았다. 몽회견문록(夢回見聞錄)에 나온 얘기다. 몽회, 꿈속에서 깨어난다는 뜻이다. 일필이라는 화자가 여행을 다니며 들은 이야기들 중 꿈에서나 나올 법한 괴이한 일들을 기록한 책이었다.
옥과 대화를 하게 되며 현서와 옥은 여러 가지 실험도 해보고, 옥과 같은 존재가 또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대체로 만희당을 벗어나지 못했던 현서와 옥이 하고 노는 놀이는 그런 것들이었다.
이름은 거창했으나 세간의 뜬소리를 모은 잡서 중의 잡서라 현서도 저 책의 내용은 그저 낭설이라 여겼는데, 엄자산을 찾아내다니. 정우문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금충이라는 벌레가 들어가는 반혼향은 처음 들어보았지만, 반혼향이라 하는 것들은 워낙 종류가 다양해 들어가는 재료도 제각각이라 놀랍지는 않았습니다. 출처도 모를 오래된 기록에 금충, 진주, 침향을 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마 화오궁의 비기에 반혼향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여기까지 말한 수경청이 긴 한숨을 뱉었다. 단단한 얼굴이 순식간에 피로를 덮어썼다.
“하지만 저희가 무엇을 찾든 화오궁의 의뢰는 아니겠지요.”
화오궁이 정정해 줄 리 없으니 수경청이 옳은 답을 찾아도 정우문이 가짜 정보를 주었다는 불명예는 벗을 수 없다. 그 사실을 정우문의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용히 말했지만 수경청의 목소리에는 뿌리 깊은 원한과 그보다 더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손에 잡혀 있던 찻잔에 금이 가자 화들짝 놀란 수경청이 사과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무뎌지는 일이 아니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 정도는 아니 사과할 것 없어.”
유위람의 말에 수경청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윤이 새 찻잔에 차를 따라 밀어주었다.
화오궁이 많은 피바람을 일으켜 악업을 쌓았으나 살아남은 이가 거의 없어 복수를 외칠 사람이 없었다. 직접적인 원한 관계가 아니어도 강호의 의협들이 화오궁을 치려고 하는 시도도 있었으나 그들은 마치 자연재해처럼 불쑥 나타나 악명만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성사되지 못했다.
더욱이 이십구 년 전의 역산 혈겁 때는 백양교라는 더 큰 공적이 있었다. 화오궁이 계속 활동을 했다면 또 모를까 그때도 역산 혈겁을 일으키곤 땅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하지만 백화호 사건은 핏값을 받아 낼 사람들을 남겼다. 백화호의 일로 정우문이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맞았으나 폐문할 정도는 아니었고, 화오궁이 다시 찾아와 정우문을 뿌리 뽑지도 않았다.
복수를 다짐한 정우문은 닥치는 대로 정보를 모았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으나 장장 십이 년이었으니 결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보다 원수가 더 상대를 잘 안다고 하지요. 천하에 저희만큼 화오궁을 아는 곳도 없을 겁니다.”
정우문은 오래도록 복수의 칼날을 갈았으나 화오궁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패천검 유위람이 화오궁에 대한 정보를 전부 사겠다고 연락을 했다.
알아보니 지복도 곽나난의 아들 납치와 패천검에 대한 도발, 거기에 서녕호가의 귀한 아들까지 얽혀 화오궁을 적대하는 이들이 생겼다.
이것은 대단한 기회였다. 때문에 소문주인 수경청이 열일을 제치고 항도에 왔다. 복수를 누가 하느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주인 아버님과 자신이 살아 있을 때 화오궁의 몰락을 두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했다.
“화오궁이 오래도록 은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본산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경청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본산이 없는 문파라니 황궁이 없는 황제라는 얘기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궁주와 호법 같은 최측근을 제외하곤 화오궁의 문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평생 궁주나 호법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아무리 비밀스러워도 흔적이 남게 되어 있다. 궁벽한 산촌이라도 상인이 드나드는데 무리를 이룬 곳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 때문에 호가는 처음에 화오궁의 본산을 빨리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영우에서 만난 호현규는 화오궁의 본산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궁주와 소수의 측근만이 화오궁의 사람이고, 나머지는 사람이 아니라 화오궁의 물건입니다.”
“물건이라니, 사람을 그리 가혹하게 대한다면 분명 불만을 품어 반기를 드는 자도 있을 텐데요.”
“저희도 그렇게 여겨 오래도록 추적했지만 화오궁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술이군요.”
“그렇습니다. 궁주가 사람을 강제하는 사술을 쓰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만능은 아닙니다. 화오궁과 관련된 소문을 모두 찾아 정리하니 확실히 눈에 들어오더군요. 이전까지 화오궁은 강호에 등장하는 시기가 일정해 보통 이십오 년에서 삼십 년을 주기로 강호에 피바람을 일으키곤 사라졌습니다. 저희는 역산 혈겁 같은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것이 사술의 안정을 확인하는 절차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수경청의 말은 놀라웠으나 납득 가능한 일리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다 소화리가 물었다.
“하지만 백화호 사건은 십이 년 전의 일이 아닌가요? 시기가 맞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역산 혈겁과 백화호 사건 사이의 기간은 십칠 년입니다. 그리고 올해로 다시 십이 년이지요. 역산 혈겁 이후 올해라면 또 모를까, 중간에 백화호 사건이 있어 화오궁이 강호에 나오는 시기가 이상해졌습니다. 이런 일은 저희가 알기론 처음입니다. 그래서 화오궁에 변고가 있다고 추측했습니다. 화오궁주 본인이나 후계자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현서가 적잖이 동의했다.
어제 자객은 자신부터 공격했다. 무공이 고강한 것도 아니고, 공격에 방해되는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철서성을 나온 이후로 위화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다가 어느 순간 기세가 누그러졌다. 화오궁의 동맹인 곽다순은 그날 가벼운 손짓 하나로도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현서는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곳이 두 곳이며, 의견이 갈린 게 아닐까 하고 막연히 짐작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수경청의 말을 들으니 확실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오궁주, 혹은 그에 준하는 높은 사람 중에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네.’
현서의 결론이 매우 싫었으나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옥이었다. 위험이 코앞에 있는데 눈 돌리라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화오궁이 자주 보인다고 말하던 스승님들의 말을 떠올린 유위람이 수경청의 가정에 동의를 표하며 물었다.
“소문주가 그렇게 확신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수경청이 대답했다.
“수하를 강제하기 때문에 화오궁도를 찾아내 죽일 수는 있어도 회유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어떤 방법도 먹히지 않았지요. 하지만 최근 화오궁도는 아니나 화오궁의 일을 했다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전부 화오궁에게 속았다며 노발대발 했지요.”
어제 보았던 여인도 그런 말을 했었다.
“보셨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의 등에는 화오궁을 의미하는 점 대신 진이 새겨져 있습니다. 돈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하던 사이였는데 어느 순간 등에 진이 새겨지곤 금제를 받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의식이 사라지거나 지나치게 유순해지거나 한다는 겁니다. 철서성에서 패천검을 공격한 것도 자신이 이상하리만치 순하게 소궁주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소문주, 잠시만 기다려주게.”
유위람이 수경청의 말을 끊었다.
“그녀에 관한 얘길 더 하기 전에 같이 가볼 곳이 있다네.”
현서와 수경청을 제외한 사람들은 유위람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현서의 곁에 있던 화정이 품에서 조그만 약병을 하나 꺼냈다.
“이것부터 먹으렴. 심장의 기력을 보하는 약이야.”
“놀랄 일이 있군요.”
혹시라도 오지 말라고 할까 봐 현서가 냉큼 약을 삼켰다. 물도 없이 먹어 쓴맛이 입 안을 채웠지만 이 정도는 익숙했다. 현서가 가는 것을 말리려고 했던 유위람도 곧 포기를 하곤 앞장섰다.
걸어가는 동안 현서와 수경청을 위해 간략한 설명을 했다. 살아나는 시체 얘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체가 움직인다고? 강시가 아닌데?
옥도 당장 짚이는 것이 없는 듯 의아해 했다.
[제 뒤에 계십시오.]
유위람이 기괴한 울음소리가 나는 방문을 열기 전에 현서에게 전음을 보냈지만, 옥은 곽나난의 뒤에 서도 충분할 거라고 말했다. 현서는 잠시 고민한 뒤 곽나난과 유위람의 중간쯤 되는 자리에 섰다.
문이 열리자 보인 것은 미리 얘기를 들었음에도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자문원의 기억에도 저런 것은 없었다.
―괜찮아. 저것은 너를 공격하지 못해.
옥이 지금이라도 밖에 나가겠느냐고 물었지만 현서는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로 되살아 난 시체는 어제와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기괴한 목소리라는 언질을 들었음에도 현서는 화들짝 놀라 앞에 있는 곽나난의 옷자락을 잡았다. 곽나난이 현서의 오른쪽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위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모두 눈앞을 보고 있느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제의 반복 같았다. 이제 곧 끝날 거라는 유위람의 전음이 무색하게 형형하게 날이 선 시커먼 눈동자가 현서를 보았다. 현서는 곽나난과 유위람 사이에 있었지만 그 시선이 어디를 향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유위람이 바로 움직여 현서를 가렸지만 시체는 그의 너머를 쏘아보듯 눈을 부라렸다.
발작은 순식간이었다.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너.”
어제보다 더 단단히 묶고 침상 주변으로 진을 그려놓았음에도 일순 움찔할 정도의 격렬한 기세였다. 당장 기어 와 현서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짐승 같은 포효였다. 화정이 준 약이 아니었다면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현서는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지만 여인이 시체로 돌아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다시 숨이 끊어지자 겨우 숨을 내뱉는 현서를 곁에 있던 수경청이 부축해 주었다.
원래라면 이후 화오궁의 수하로 보이는 칠암문과 같은 사라진 사람들 얘기를 하려했으나, 어제와 달라진 반응에 진을 더 보강하기로 해 나머지 얘기는 다음 날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현서와 수경청은 진을 보강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감윤과 함께 돌아갔다. 유위람이 그 모습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 ❖ ❖
소두날이었다.
이사가 아침부터 부산스럽다 싶더니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현서에게 새 옷을 입히곤 자리에 앉혀 머리를 빗겼다.
―어찌나 유능한지. 너 독립할 때 이사를 데리고 가는 것도 염두에 두어봐라.
옥의 말에 현서가 슬며시 웃었다. 최근 현서가 근심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아 걱정하던 이사가 같이 웃으며 물었다.
“무슨 재밌는 일을 떠올리셨기에 그리 웃으세요.”
“이사가 엄청, 엄청 유능하다는 생각을 했지.”
현서가 재깍 대답하자 이사가 머리빗을 흔들며 잔뜩 뻐겼다.
“그럼요. 소인만큼 유능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농담 아니야.”
정말 진심이었다. 습격으로부터 겨우 닷새가 지났을 뿐이었다. 큰 충격을 받을 일이었는데도 이사는 훌훌 털어버리더니 그날의 목적이었던 현서의 새 옷을 구해 왔다. 당연히 난리가 났던 호가 상단에서 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대단했다. 급히 구해 눈에 덜 차는 구석이 있다고 이사는 불만을 표했지만 현서의 몸에 꼭 맞는 하늘거리는 항도식 여름옷이었다.
“색이 조금 마음에 안 차지만 어쩌겠어요. 며칠 뒤에 도착할 것들이 있으니 참아야지요.”
“나는 좋아. 불편한 것도 없고 여러 겹인데도 가볍고 시원한 걸.”
“다행이네요. 매년 여름은 이렇게 입는 것도 좋겠어요.”
속이 비치는 까슬까슬한 여름 비단으로 만든 이 옷은 유위람이 입었을 땐 어디의 신선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현서가 입었을 땐 비 맞은 꽃잎이 물결치는 듯했다. 이사는 천의 색이 너무 짙다고 했지만 현서는 이 청록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반만 올린 머리를 얇은 비단끈으로 묶은 뒤 산호색과 흰색의 꽃들을 꽂아 장식했다.
“어때요? 괜찮으세요?”
평소라면 이렇게 과하게 차리지 않지만 자신의 기분 전환을 위해 이사가 애를 쓰는 것을 알아 현서는 만희당에 있을 때처럼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응. 아주 마음에 들어. 고마워. 이사.”
현서는 이사에게 감사를 표한 다음 뜰로 나갔다. 아침 식사도 약도 다 먹었으니 산책할 차례였다. 이왕 예쁘게 꾸몄으니 소두절을 즐기라고 하고 싶었지만, 저택을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이사가 애를 많이 쓰는구나.
‘티가 많이 났나.’
―이사가 네 곁에서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모르겠느냐.
계속 걱정만 끼치네. 현서가 딱딱해진 얼굴을 문지르며 연못 근처로 걸어갔다. 산책이라고 해도 볕을 피해 그늘에 앉아 있는 게 전부였다.
정우문의 소문주가 도착한 날로부터 오늘이 나흘째였다. 소문주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첫날 그렇게 끝이 났지만, 다음 날로 다시 이어졌다. 소문주가 한 얘기에는 사실도 있고, 사실을 바탕으로 한 추론도 있었다. 증거나 증인이 애매모호한 일들도 있었으나 무척 방대했다. 과연 현재 천하에서 화오궁에 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할 만했다.
화오궁의 일이 아닌 곽다순의 행적을 의뢰한 결과도 있었다. 곽다순이 자문원이 스승님과 지냈던 무산에 갔다고 했을 때 옥은 매우 불쾌해 했지만, 현서는 아무렇지 않았다. 곽다순의 행적은 무산이나 개웅산 같은 자문원과 인연이 있는 곳도 있고, 풍장산(風長山) 같은 전혀 낯선 곳도 있었다.
십이 년 전, 백화호가 있는 오령에서 목격되었다는 말은 놀랍지도 않았다. 현서를 포함한 모두가 곽다순이 그때쯤 화오궁과 손을 잡았을 거라 추측했다.
움직이는 시체에 관해선 아는 사람이었던 만큼 더 크게 충격을 받았던 정우문 소문주는 화정의 의견처럼 강시나 생강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반혼향일 가능성도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향이 곁에 없었고 낯선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반혼향이 종종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경우가 있었으나 죽은 혼이 이 각(30분) 이상 머문 경우는 없다고 했다.
옥도 같은 의견이었다. 혼백을 아주 잠시 불러올 수는 있으나 묶어둘 순 없다고. 게다가 조건도 무척 까다롭다고 알려주었다.
그에 소문주는 떠오른 것이 있다며 말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을 성공했다는 얘기는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백양교가 파성군에게 죽은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접근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눈을 홉떴다. 파성군은 개웅산에서 자문원을 습격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낙영도의 사문인 일사문과 달리 파성군의 사문은 이미 맥이 끊겨 더 추적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그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현서도 놀라긴 하였으나 왜 그 무리에 파성군이 끼어 있었을까 했던 자문원의 의문이 이렇게 풀렸구나 하고 납득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파성군의 아들을 죽인 것이 백양교인데 되살려주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아무리 아들을 잃고 상심에 빠졌다고는 하나, 아들을 죽인 원수의 말을 들을 정도란 말이야?’
‘파성군이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모두가 한 가지를 떠올렸다.
‘빈방에 있는 저 시체의 등에 그려진 것이 어쩌면 백양교의 사술일 가능성도 있는 거군.’
‘백양교의 잔당이 화오궁에 흘러 들어갔나.’
‘반대로 화오궁이 백양교에 사술을 흘렸을 수도 있겠지.’
그날도 시체는 살아났지만, 이번에는 현서가 없었다. 모두가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현서가 없는 탓인지 모르겠으나 시체는 돌발 행동 없이 똑같은 발작 후 또 시체로 돌아갔다. 시간은 일정하니 않으나 하루에 한 번 깨어나는 것은 분명했다.
현서는 자신이 있을 때 바뀌는 것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으나 이 역시도 거절당했다. 무작정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법술이 뛰어난 감윤의 사형이 도착할 때까지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현서를 근심케 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현진의 부재가 현서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정우문 소문주가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 현진이 현서를 찾아와 소주의 주도인 별성(鼈城)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현진은 별성에 가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부상도 낫지 않은 상태라 현서는 우선 말려보았다. 하지만 현진은 이유라면 패천검에게 말했고, 그가 수하를 붙여주었으니 괜찮다고 할 뿐이었다.
현진이 완강해 현서는 물러났지만 그냥 물러서진 않았다. 자신의 호위 두 사람에게 현진의 호위를 부탁한 것이다. 아버님의 사람이라 자신의 말을 무작정 따르게 할 수는 없었으나 현서에게는 금패가 있었다. 할아버님이 보낸 호위와 달리 그들은 수대처 소속으로 결국 호가 상단의 사람이라 현서가 금패를 사용하면 들어야 했다.
현진이 반대했지만 이번엔 현서가 완강했다. 현서는 호위 두 사람에게 무례를 연신 사과했지만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현진은 사, 오 일 후면 돌아온다고 약속을 했고, 현서는 그날부터 걱정을 놓지 못했다.
―왜 이리 걱정을 해. 뭐 짚이는 것이라도 있느냐.
‘아니. 그건 아니야. 근데 모르겠어.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최근에 여러 일을 겪었으니 그저 신경이 곤두선 탓일지도 몰랐다. 현서가 추측하기에 집안일 아니면 석청담의 일이었는데 어느 쪽이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형이 별성에 가는 이유를 알았으면 좀 나았을까.’
현서도 자신이 너무 과하게 걱정한다는 걸 알아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화제를 돌렸다.
‘서녕에 가면 아버님에게 꾸지람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금패를 썼다곤 해도 수대처의 사람들을 그렇게 부렸으니.’
―네 부친이 너를? 너는 아직도 네 가족을 그렇게도 모르는구나.
맹한 것 하며 옥이 혀를 찼다. 현진에게도 호위를 붙일 걸 하고 오히려 네게 더 미안해 할 걸. 내기해도 좋다. 옥이 부러 부친인 호 대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 말해 현서가 웃었다. 옥도 현서를 걱정한 것이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이, 삼 일 뒤면 현진이 돌아오겠지. 그땐 진짜 형 소매를 잡고 울어야겠어, 그럼 말해 주지 않을까? 현서가 농담을 하자 기분이 좀 나아진 것을 안 옥이 잘 우는 방법 따위를 훈수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위람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 현서가 자신을 피하기에 옥 님이 전부 말을 하였나 싶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을 피하라고만 한 것 같았다. 현서와 옥 님의 친분이 더 깊으니 현서가 옥 님의 말을 우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이유를 물어보지 않는 것이 조금 서운하기는 하였다.
매일 현서를 만났지만 현서는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곁에 오지 않았다. 다가가면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난처해 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게 귀여워서 괜히 더 옆에 붙어 서곤 했다.
그러나 현진이 떠난 후, 현서는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이유를 말해 줄까 하다가도 괜히 걱정만 더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현진이 따로 부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현서가 소매를 잡고 흔들어도 말 못 한다 따위의 헛된 다짐을 하던 유위람은 연못가 그늘 아래 앉아 있는 현서를 보곤 무엇을 결심했든 전부 폐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매를 잡고 흔들 것도 없이 그저 올려다보며 부탁하기만 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싶었다. 옥과 대화를 하는 중인지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다 웃는 현서를 유위람은 눈에 새기듯이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위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현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바로 옥에게 한 소리를 들은 것인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유위람이 아무 반응 없이 가만히 보고만 있자 현서는 눈을 굴리던 것을 멈추고는 얼굴을 여기저기 만지기 시작했다. 얼굴에 이상한 게 있나 하고 생각하는 게 뻔히 보였다.
“호 공자가 무척이나 어여뻐 말문이 막힌 것이니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위람에 말에 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다시 눈을 굴리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평평하다고는 해도 돌이다. 현서가 미끄러져 연못에 빠질까 유위람이 금세 다가가 현서를 안아 올렸다. 평소라면 유위람이 안아 올려도 멀끔히 보며 가만히 있었을 텐데 슬쩍 버둥대는 것을 보니 역시.
“옥 님이 저를 피하라고 하셨지요?”
“……어떻게 아셨어요?”
당황한 현서가 이실직고를 해버리곤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현서는 가끔 이렇게 말실수를 할 때가 있었다. 전엔 원한을 산 세력이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했지. 몇 달 전의 일인데도 어제의 일 같았다.
“옥 님이 이유를 말하시던가요.”
“아니오.”
현서가 머리를 흔들자 꽃내음이 났다. 항도식 옷을 입고 소두절을 맞이하려 한껏 꾸민 현서는 무척이나 어여뻤다. 유위람은 현서가 어리니 무엇이든 천천히 하자고 다짐했던 결심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았다.
지금 현서에게 입 맞출 수 없다면 자신을 휘젓는 충동에 휩쓸리는 것이 나으리라. 결정을 끝낸 유위람이 활짝 웃었다.
“제가 호 공자를 좋아하는 것을 옥 님이 아셔서 그러합니다.”
“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말에 현서가 들판에 풀어놓은 소처럼 눈을 껌벅였다.
유위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끔벅이던 현서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현서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큰 소리가 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귓전에 떨어진 벼락처럼 옥의 노성이 우렁우렁 울렸다. 옥의 말은 현서에게만 들리는 소리라 이제껏 이토록 크게 들린 적이 없었다. 아마 옥의 감정이 격해지는 바람에 소리가 엄청 커진 모양이었다.
현서는 너무 놀라 얼이 빠졌다. 몸이 많이 좋아졌기에 망정이지, 몇 년 전이었으면 충격으로 기절했을 정도였다. 옥도 이렇게나 큰 소리가 날 줄은 전혀 몰라 당황해 했다.
―이런, 현서야. 괜찮으냐.
‘어. 어.’
현서는 속으로 대답을 하면서 동시에 고개도 끄떡였다.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유위람이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놀랐는지 현서의 얼굴은 창백하고 귀를 틀어막은 손이 그대로였다.
‘옥 님이 큰 소리를 내셨나 보군.’
유위람은 제가 손가락에 입을 맞춘 일로 옥 님의 노여움을 산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누군가의 반대로 물러설 마음이었으면 애당초 짝사랑을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옥 님이 아니라 검선이 살아 돌아와 반대를 한다고 해도 검선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볼지언정, 연심을 접는다는 선택지는 유위람에게 없었다.
유위람은 자신이 현서를 안고 있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현서의 손을 잡아 내리고는 품에 기대게 해 다독였다. 지금은 옥 님과 대화를 하는 것 같으니 눈치 없이 끼어들지 않는 대신 실리를 취한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옥과 현서는 서로 정신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목소리는 현서밖에 듣지 못하는데 순간의 역정을 참지 못해 현서를 크게 놀라게 한 것이 옥의 심경을 무겁게 했다.
―내가 조심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괜찮으냐?
‘어. 아냐. 괜찮아. 괜찮은데.’
현서는 착실히 대답을 해주면서도 반쯤은 넋이 나가 있었다. 옥이 이러는 걸 본 것도 처음이고, 옥의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 것도 처음인데 이 모든 것이 패천검이…….
“나를 좋아해서라고?”
현서가 중얼거렸다.
“네. 그렇습니다.”
지척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서는 자신이 유위람에게 기대 있다는 걸 깨닫고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제대로 들었다는 칭찬을 건네며 눈을 맞춰 오는 패천검이었으니 말이다.
“좋아하는 감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오해를 줄이는 것이 좋겠지요.”
결정한 바를 돌아보지 않는 유위람은 현서를 닦달할 뜻은 없었으나 도망갈 여지는 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맹하게 눈만 뜨고 있는 현서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이마에 꾹 닿았다 떨어지는 것에 현서가 눈을 홉떴다.
―이! 이! 이!
옥은 억지로 숨이 막힌 사람처럼 한 음절의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현서가 재차 놀랄까 봐 최선을 다해 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서는 그 배려를 느낄 정신도 없었다. 유위람을 가득 담은 눈동자에는 놀람과 당황이 들어찼다.
유위람은 이번에는 이 이상 커질 수 없이 커다랗게 뜨여 있는 눈꼬리에 입을 맞추었다. 양쪽 눈가 모두. 분명 조카들에게 많이 받았던 입맞춤과 다를 것이 없는 가벼운 접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서는 패천검이 말하는 좋아한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족들이나 만희당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눈이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현서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새빨개진 얼굴이 유위람이 보기에 무척이나 기꺼웠다.
“호 공자가 영명한 것은 좋으나 좀 아쉬운 일입니다. 이번에도 몰랐으면 확실한 곳을 고르려고 했는데요.”
유위람의 말에 현서가 슬그머니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 모습에 유위람이 소리 내 웃었다. 이번에는 옥이 무어라 하지 않았음에도 현서는 눈알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노골적으로 어여뻐하는지, 이십 년째 서녕호가의 장중보옥으로 살고 있는 현서조차 눈 둘 곳이 없었다.
“그곳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허락 없이 입을 맞출 정도의 무뢰배는 아닙니다.”
―무슨 헛소리를! 지금도 충분히 무례하다! 이 잡스러운 것이! 꺼져!
유위람에게 들리지 않고 현서가 옮겨줄 정신이 없는 걸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옥이었다.
현서의 얼굴은 물을 들인 것처럼 빨갛고 눈동자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놀람과 당황뿐이었다. 익히 아는 사실을 확인받은 셈이지만 기껍지는 않았다. 아직은 짝사랑이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시간은 결국 자신의 편이 될 것임을 유위람은 자신했다.
유위람이 입을 가리고 있는 현서의 손을 붙잡았다. 힘을 주고 있던 것은 아니라 쉬이 떨어져 유위람의 손바닥 위에 현서의 손이 올라왔다. 당황한 현서가 손을 물리려고 했다. 하지만 유위람이 더 빨랐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꼽자면 현서는 유위람과 비교가 안 되긴 하였다.
유위람이 깃털에 입 맞추듯이 보드랍게 손끝에 입술을 대었다가 떨어뜨렸다. 입맞춤이라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였지만 유위람의 입술이 스치고 간 손끝이 간지러웠다.
“이것이 옥 님이 저를 피하라고 한 이유입니다.”
여전히 유위람의 품에 안겨 있던 현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르작거렸지만, 내려줄 리 만무했다. 유위람이 현서를 고쳐 안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사가 자리를 비웠는지 처소에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방에 들어간 유위람은 현서를 두툼한 보료가 깔려 있는 항(炕: 난방이 가능한 다목적 평상) 위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현서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고 그것도 모자라 손에 찻잔까지 들려주고 나서야 현서에게서 한 발 떨어졌다.
유위람이 멀어지자 현서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유위람을 따라왔다. 그에 유위람이 화사하게 웃었다. 자신이 웃을 때마다 현서의 시선이 좀 더 머무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 공자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제가 호 공자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됩니다.”
따지고 보면 그랬다. 패천검이 연모를 고백하였으나 그 다음이 없었다. 그런 패천검의 말에 현서가 반사적으로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자 옥이 답답해 했다.
―연모고 현모고 네놈은 그만 꺼지고! 너는 또 왜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
큰 소리에 현서가 놀랄까 봐 투덜거리는 것도 평소보다 더 작게 말하는 옥은 없는 가슴이라도 두들겨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유위람은 엄청난 발언으로 현서의 머릿속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옥에게 화병을 심어준 뒤 물러났다.
패천검이 나가고 곧 교대하듯 이사가 간식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소두절에 먹는 음식을 가지러 주방에 간 참이었다.
“도련님? 어디 아프세요?”
찻잔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앉아 있는 현서를 보고 이사가 놀라 한달음에 다가왔다.
“어. 어? 왔어? 아냐.”
현서가 머리를 흔들었다. 엉망이 된 머릿속도 같이 흔들렸다. 현서의 상태가 잠시 전과 너무 달라 이사는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혹시 진이 도련님 소식이 온 게 있나요?”
이사가 고개 숙여 눈을 맞추며 진지하게 물었다. 현진에 대한 걱정으로 며칠째 기운이 없던 현서가 잠시간에 넋을 놓고 있으니 이사의 걱정이 그리로 옮겨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냐. 전혀 아냐.”
현서가 깜짝 놀라며 부정했다. 패천검의 고백이 엄청난 충격이긴 했다. 그전까지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던 현진에 대한 걱정 등이 일시에 날아갔으니 말이다. 현서가 탄식처럼 길게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아픈 것도 아니고, 현진 형 소식을 들은 것도 전혀 아냐. 그냥 잠깐 넋을 놓고 있었네. 너야말로 무슨 소식을 들은 건 없어?”
현서는 일단 다른 일로 도피하기를 선택했다. 지금 더 생각했다간 머리에 열이 몰려 드러누울지도 몰랐다. 현서는 애써 유위람의 고백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두며 이사가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시지도 않은 찻잔을 내려놓으려니 찻잔의 열기가 옮은 탓인지 패천검의 입술이 닿았던 손끝에 열이 오른 기분이 들었다. 현서는 괜스레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다 지레 찔려 소매 안으로 얼른 손을 숨겨버렸다.
❖ ❖ ❖
상화병(霜花餠)은 소두절에 먹는 음식 중 하나로 밀가루를 발효해 찐 동그란 떡이다. 패천검의 저택에선 올해 소두절에 손님이 많은 만큼 다양한 소를 넣어 만들었는데 그중의 반이 막 도착한 손님의 배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사형, 천천히 드세요. 또 목 막혀 쓰러졌다간 사문의 어른들과 사형들에게 제가 맞아 죽어요.”
감윤이 시커먼 안색에 해골처럼 삐쩍 마른 남자의 손에 찻잔을 쥐어주며 말했다.
“무, 무, 슨 소릴, 다들 너를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정말로 떡이 목에 걸렸는지 잠시 가슴을 두드리던 남자는 감윤이 쥐어준 찻잔의 차를 한 번에 다 마신 후에야 말을 이었다. 식탐이 남다른 이 남자는 감윤의 바로 위의 사형인 영진자(靈眞子) 삼중이다.
백양교로 인해 가족 모두를 잃은 어린아이는 아사 직전의 상태에서 구조되어 태호문에 입문했다. 근골이 나쁘고 무재도 없었으나 당시 태호문의 어린 제자들 중에서 가장 성품이 좋았다.
검술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도가 계열인 태호문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삼중은 진법이나 부적을 만드는 재능이 뛰어났다.
도문으로 명맥은 잇고 있지만 죄 검술에 치중하던 차라 근심이 있었는데 삼중이 나타나 비시(秘試)를 이었다. 그것도 뛰어난 실력으로. 그 때문에 사문의 어른들은 삼중을 복덩이로 여겼다.
하지만 어릴 때의 아사 체험 때문에 생긴 식탐은 나이를 훌쩍 먹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태호문 사람들은 삼중이 음식을 먹을 때 결코 혼자 두지 않았다.
“전부 다 사형 거니까 천천히 먹어요.”
해골에 가죽을 씌운 남자는 열흘은 굶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아니라는 걸 감윤은 잘 알고 있었다. 태호문에 입문한 이후로 삼중은 한 끼도 걸러본 적 없고 식후 간식까지 다 챙겨 먹었다. 감윤의 당부가 무색하게 떡을 입에 욱여넣으며 삼중이 재차 권했다.
“사제도 좀 먹어.”
“전 벌써 배부르게 먹었어요.”
“정말?”
“제가 이런 걸로 사형을 속인 적이 있었어요?”
감윤의 말에 삼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떡을 잡았다. 삼중의 식탐은 과하지만 남의 것을 빼앗아 먹거나 음식을 독식하는 경우는 없었다. 자신이 굶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만큼 타인이 잘 먹지 못하는 일에도 심하게 민감했다. 그래서 태호문 사람들은 음식 관련으로는 삼중에게 정직했다.
사형이 호 공자의 식사를 본다면 크게 충격을 받으려나. 감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착실하게 빈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육체와 정신의 허기를 조화롭게 채운 삼중은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간의 일로 시체가 되살아나는 것은 해가 지고 나서라는 걸 알았다. 삼중이 도착하고 보니 신시(申時: 오후 3시-5시) 끝 무렵이라 감윤은 오늘 쉬고 내일 살피지 않겠느냐고 권했지만 이런 일은 빨리 보는 게 낫다고 거절했다.
되살아나는 시체가 있는 빈방에 도착하고 보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화정과 소화리도 와 있었다. 모두 초면은 아니라 가벼운 인사 후에 삼중은 시체를 중심으로 진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삼중이 가지고 다니는 부적과 천잠사(天蠶絲)는 감윤도 지니고 있었지만 그 효과는 하늘과 땅 차이었다. 도울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어 나머지 세 사람은 삼중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떨어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시신을 중심으로 성인 남자 키만 한 폭의 원을 첫 번째 진으로 만들고는 삼중이 말했다.
“죽은 것이라면 이 진을 넘지 못할 테지.”
그리고 첫 번째 진에서 반 보를 더 키운 두 번째 진을 만들었다.
“산 것이라면 이 진을 넘지 못할 테고.”
방 하나 크기라 해도 약식도 아닌데 반시진(1시간) 만에 다른 종류의 진을 두 개를 만든 셈이다. 도문(道門)으로서의 맥이 끊어질까 걱정하던 사문의 존장들께서 왜 삼 사형을 그리 예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감윤은 누가 태호문 사람에게 부적 쓰고, 진법 그리는 걸 기대하겠느냐, 어차피 강호 문파인데 칼질만 잘하면 되지 하고 말하다가 주로 등짝을 맞는 쪽이었지만 말이다.
진을 다 만든 삼중은 화정이 베껴놓은 문신 그림을 보았다. 그림은 시체가 발견된 날부터 해서 오늘까지 총 여섯 장이었다. 매우 복잡한 진이긴 하지만 여섯 장을 전부 펼쳐 놓으니 진이 미세하게 바뀌는 것이 보였다.
종이를 살핀 다음에는 시체의 등을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썩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도 아니었다.
“이상하네.”
삼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엔 백양교라 하면 치가 떨리게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삼중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고 있던 삼중의 가족들은 제물이라는 이름하에 백양교도에게 가혹한 죽임을 당했다. 삼중은 허기를 싫어하는 만큼 사술도 혐오했다.
사술을 싫어하기 때문에 사술에 대한 연구를 놓지 않았던 삼중은 사람을 살린다는 많은 사술을 보았지만 정말로 죽은 사람을 살린 것은 보지 못했다.
❖ ❖ ❖
능운검 감윤의 사형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현서는 혹시나 싶어 이른 저녁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술시(戌時: 저녁 7시-9시)를 조금 넘기자 사람이 왔다.
이사는 되살아나는 시체가 저택에 있는 것도 더욱이 현서가 그 시체를 보러 가는지도 몰랐다. 때문에 현서는 아침에 꽂은 꽃이 좀 시들어 보인다고 꽃을 바꿔주는 단장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애써 두어 송이로 타협하긴 하였으나 아예 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사가 이상함을 눈치챌 것이 뻔했다. 이사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뜰을 나서기 전에 당연한 듯 주경이 따라 붙었다. 현서는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주경은 듣지 않았다. 이사는 자신이 가지 않으니 주 대협을 데리고 가라고 넌지시 찬성을 표했다.
하인이 안내한 곳은 며칠 전에 갔던 그곳이 맞았으나 방은 달랐다. 시체가 있던 그 빈방이 아니라 그 옆의 곁방으로 안내했다.
“능운검께서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사 하셨습니다.”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도 원래 창고인지 가구랄 것도 없었다. 급히 챙긴 것인지 차와 과일이 단출하게 올라 있는 차탁과 의자 네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옆방의 상황을 떠올리면 무언가를 먹을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옆방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
주경이 대뜸 물어 왔다. 주경의 무위로 옆방에 있는 시체를 모를 리 없겠지만 이렇게 바로 물어 올지는 몰랐다.
“네, 압니다.”
“겁이 많은 줄 알았는데 듣던 대로 겁이 없는 게 맞나 보구나. 그래, 가족이 말하는 게 더 정확하지.”
주경의 말에 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경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였다.
“주 대협이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서의 말에 주경이 간식을 숨기곤 장난을 치는 조카들처럼 씩 웃었다.
“호 공자가 아직 몰라도 되는 것은 빼고, 다른 건 전부 호 공자도 아는 것이지.”
―이치가 지금 뭐라는 것이냐.
현서의 답답함을 이해한 옥이 거들었다. 하지만 주경에게 옥의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예쁘다고 안장도 올리지 않은 말 등 위에 올라간 일곱 살짜리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어진 주경의 말에 현서는 말문이 막혔다. 아홉 살까지의 현서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엄청난 사고를 쳐 대곤 했던 사고뭉치였다. 희아가 현서를 닮았다고 한 것도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너 그런 위험한 짓도 하였어?
열두 살 이전의 현서를 모르는 옥이 놀라며 되물었다. 현서는 민망함에 얼굴을 문질렀다. 다른 건 몰라도 주경이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건 맞는 듯했다. 할아버님이 아무나 잡고 손자가 말썽 부린 얘길 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서는 처음부터 백기를 들었다.
“그것 말고도 많을 텐데 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호 노대인께서 아는 거라면 다 들었을걸. 내가 다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볼래?”
“아뇨.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현서가 손을 휘저으며 사양했다. 할아버님 앞도 아니고 주경이랑 어린 시절 사고치고 다닌 얘길 해서 무엇 하겠는가. 주경도 가볍게 놀리려고 한 것인지 집요하게 굴진 않았다.
“할아버님께서 제 얘기를 많이 하셨나 보군요.”
“그럼, 호 공자가 관례 올린 날을 그린 두루마리도 보여주셨지.”
할아버님은 현서의 관례 날 오겠다고 하셨지만 그날 도착하지 못하셨다. 늦게 도착하셨지만 잠든 현서의 얼굴만 잠깐 보곤 금방 떠나셨다.
그래서 그날의 기억을 최대한 살려 그림을 그렸다. 열두 폭 병풍으로 만들 요량으로 비단 두루마리 열두 개를 사용한 연작이었다. 그중 마지막은 관례용으로 성장한 현서의 초상화였다.
현서가 할아버님에 관한 얘기를 더 물으려고 할 때 옆방에서 큰 소리가 났다. 현서보다 먼저 곁방의 상황을 알아차린 주경은 이미 차가운 낯으로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움직임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 ❖ ❖
사람들이 사술을 경계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장담하는 결과가 가짜로 혹세무민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수단의 잔인성이다.
후자는 겉보기로나마 목적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치른 대가의 잔악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천 명의 피를 짜 한 방울의 효과를 보는 식이나 다름없었다.
삼중은 두 개의 진을 만든 뒤 시체의 등을 유심히 살피며 몇 장의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등의 진은 복잡하기 그지없어서 사람의 해부도를 그리는 것보다 어렵다고 화정은 툴툴거렸지만 삼중의 붓은 거침이 없었다. 여러 장의 종이를 사용하고 나서야 손에서 붓을 놓았다.
그사이 해가 떨어지자 유위람이 나타났다.
곽나난은 정우문 소문주인 수경청과 독대를 하는 중이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날 수경청이 의뢰받은 곽다순의 행적을 모두 말했을 거라 믿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실종 상태인 가문의 어른이다. 내밀한 사정을 다 알고 이해하는 사이라고 해도 피해주는 것이 옳았다.
유위람 역시 오지 않아도 좋았지만 삼중이 현서를 불렀다는 얘기에 굳이 걸음을 했다.
곁방에 현서와 주경이 있는 것을 알았으나 낮의 일 때문에 부러 이쪽 방으로 바로 온 유위람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현서와 주경의 화기애애한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방에 있는 사람 중 화정을 제외한 모두가 곁방의 얘기를 들을 수 있으나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얘기였다. 하지만 유위람은 당연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유위람의 양심이 희박하고 빈말로도 인성이 좋지 않다는 걸 역시나 이 방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유위람이 곁방의 소리를 엿들으며 기분 나빠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방의 그 누구도 유위람에게 관심이 없어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따위를 모른다는 정도였다.
해시(亥時: 밤 9시-11시)를 넘기자 어제와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짐승 소리와도 같은 억눌린 신음이 나며 시체가 들썩였다. 삼중이 진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은 사지를 묶어두지도 않았고 등에 그려진 진의 변화를 보기 위해 시체를 뒤집어놓았다.
뼈가 살아 있는 것처럼 살가죽을 뚫고 나올 듯이 울룩불룩 움직였다. 등 뒤에 그려진 진이 변화하는 것인지 살가죽의 움직임에 쓸려 다니는 것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삼중은 바짝 집중해 등을 보고 있었다.
사지가 풀려 있자 과연 움직임에 변화가 있었다. 시체는 갓 태어난 짐승, 혹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첫 번째 진을 넘지 못했다. 움직일 때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혔다.
“첫 번째 진을 넘지 못했다는 건.”
“저게 시체라는 뜻이지.”
“새로운 종류의 강시인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고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나 격렬하게 움직일 줄 알았다면 묶어둘 걸.”
삼중이 등을 자세히 보느라 눈을 잔뜩 찡그린 채 혀를 찼다.
“일 각(15분)을 넘기지 않는다고 했지? 사제. 호 공자를 데리고 와.”
삼중의 말에 유위람이 먼저 움직였다. 문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으니 자연스러운 움직이긴 했다.
“짐승 같기도 하네요.”
시체는 이제 네 발로 진 안을 빙글빙글 기어 다녔다. 무림인이어서 일까, 꺾인 각목처럼 딱딱한 몸은 부자연스러웠지만 무척 빨랐다. 좁다란 원 안을 정신없이 네발로 기어 다니는 시체라니 심약한 사람이 본다면 이미 졸도를 했을 것이다.
“무서우면 들어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서를 데리고 돌아온 유위람이 먼저 방 안의 상태를 보고 작게 말했다. 유위람이 보기에게도 기분 나쁜 광경이었다.
“괜찮습니다.”
“힘들면 반드시 말하셔야 합니다.”
“네.”
데리러 온 유위람을 보자 낮의 고백이 떠올라 잠시 멈칫했지만 시체가 있는 방의 소리와 공기가 예사롭지 않아 금세 머릿속에서 밀려났다. 현서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곤 방에 들어섰다.
이제까지의 기록을 보면 현서가 없는 날에도 흰자만 보이던 눈에 검은자가 돌아오면 뜻 모를 단어들을 반복하다 다시 시체로 돌아갔다. 오늘도 눈에 검은자가 보이자 중얼중얼 말을 내뱉었다.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사방을 기어 다니고는 있으나 역시나 첫 번째 진을 넘지는 못했다.
“나는. 나는.”
경련이 난 것처럼 눈꺼풀을 떨어대며 반복되는 소리와 함께 빙글빙글 돌던 시체가 현서가 서 있는 방향에 닿자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의 모두는 서 있고, 시체는 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세에선 현서의 발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자 고개를 들어 올려 사람을 확인했다. 현서와 눈이 마주쳤다.
현서는 바짝 긴장했지만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발작은 없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이 멈추었다. 네 발로 기는 자세로 목을 한껏 뺀 기괴한 모습이었다.
적으로 만났으나 살아 있을 때의 얼굴을 알고 있는 현서는 지금의 모습에서 생전의 얼굴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시체가 몸을 쭉 뻗었다. 성인 남성의 키만큼을 지름으로 삼은 원이 첫 번째 진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몸을 쭉 뻗으면 첫 번째 진에 부딪히게 된다.
“이 무슨!”
하지만 시체, 아니, 이제는 시체라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첫 번째 진을 넘었다. 텅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두 번째 진에 막혔지만 정확히 현서 앞에 도착해 있었다. 두 개의 진이 쳐져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현서를 빼고 모두가 경악했다.
유위람이 재빨리 현서를 안아 올린 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첫 번째 진을 넘은 그것은 집요하게 현서를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그러나 두 번째 진을 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개의치 않아 부딪혀 튕겨 나가도 계속 반복했다. 끔찍한 소리는 일절 내지 않았지만 입을 길게 찢어 미소 짓고 있어 더욱 섬뜩했다.
“저런 건 보지 않아도 됩니다.”
바짝 굳어 있는 현서의 눈을 유위람이 가리며 방을 벗어났다. 일 각(15분)이 그렇게 끝이 났다. 눈이 감기는 것과 동시에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그 몸은 첫 번째 진 안쪽으로 거세게 밀려났다.
―어디서 이런 저급한 짓거리를.
사술로 잔재주를 부린다며 옥이 대단히 불쾌해 했다. 자문원의 기억에서도 본 적 없는 기괴망측한 광경에 소름이 돋았던 현서는 눈을 가려주는 유위람의 온기와 곁에 있는 옥의 말에 안정을 찾았다.
품 안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던 현서의 몸이 풀어지는 것이 느껴지자 유위람은 앞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제야 유위람의 품에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현서가 내려왔다.
현서를 내려놓고 반 보 정도 뒤에 선 유위람은 어느새 곁방에서 나와 있는 주경을 슬쩍 보았다. 이 소란에 나와보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 나왔다고 해서 탓할 수는 없었다.
주경은 말을 얹지 않고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위람은 주경이 자신이 검을 뽑았을 때 바로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돌렸다.
유위람은 현서를 데리고 방문 하나를 넘었을 뿐이라 훤히 열린 문 너머로 방 안의 상황이 잘 보였다.
방 안의 누구도 입을 떼지 못할 때 삼중이 휘적휘적 움직여 진 바깥쪽의 부적을 하나 치웠다. 그리곤 시체 앞으로 걸어가 등이 보이도록 시체를 굴렸다. 비쩍 마르긴 하였으나 시체 한 구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체의 등을 보고 쭈그려 앉은 삼중이 인상을 썼다.
“이상하네. 왜 움직이지?”
그렇게 말하며 아무렇지 않게 시체의 등을 꾹꾹 눌렀다. 기분 나쁜 상황에 잠시 말을 잃었던 이들은 삼중이 되살아났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제, 거기 있는 종이뭉치 좀 가져다줘.”
“예. 사형.”
삼중이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굴자 방 안을 채웠던 긴장감이 옅어졌다. 삼중은 자신이 그려둔 것과 화정이 그려놓은 것을 다 살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저렸는지 잠시 휘청거리나 싶더니 문어귀에 서 있는 현서를 향해 느릿하게 걸어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식으로 인사를 하지는 못했으나 서로 누구인지는 알아 현서는 가볍게 고개만 숙였다.
시체가 현서에게 반응했으니 그에 관한 말일 게 뻔해 모두들 삼중이 무슨 말을 할지 귀를 기울였다. 현서도 긴장한 채 삼중을 보았다.
“호 공자.”
“네.”
“그 소매 안에 있는 것 좀 주시면 안 됩니까?”
아이고, 사형. 감윤이 앓는 소리를 냈다.
현서는 조금 당황했지만 소매를 털어 과자를 전부 삼중에게 주었다. 삼중은 자신의 두 손 가득 올린 과자를 나눠 먹자고 권했지만 응하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방금까지 시체가 꿈에 볼까 무서운 몰골로 기어 다닌 방 안에서 삼중은 혼자 과자를 야무지게 먹었다. 바삭바삭 과자를 씹는 소리만이 울렸다.
시체의 등을 만져 놓고는 과자를 뜯기 전에 옷 위로 슥슥 두어 번 닦은 게 다였다는 걸 지적할 사람도 없었다. 저기 누워 있는 시체보다 안색이 더 안 좋고 심하게 마른 사람에게 먹을 걸로 말을 얹는 건 정말 나쁜 짓처럼 보인 탓이다.
순식간에 과자를 다 먹어 치운 삼중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뱉었다.
“기분 나쁜 걸 본 탓인지 갑자기 허기가 졌는데 호 공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원기(元氣)에 손상을 입은 자로구나.
옥이 삼중의 상태에 대해 말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 선천진기라고도 말하는 원기는, 간단히 말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래 가지고 태어나는 기운을 말한다. 무공을 배워 쌓는 내력은 원기와 다르다. 수련으로 쌓은 내력과 달리 원기는 상하면 쉬이 회복되지 않고, 어느 기점을 넘기면 회복도 되지 않는다.
삼중이 어느 정도로 원기에 손상을 입었는지 모르겠으나 쉬이 허기가 지고, 저렇게 뼈밖에 없는 것도 전부 그 때문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저자가 너보다는 훨씬 건강해.
옥이 혀를 찼다. 자문원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선천진기를 써버린 게 아니라면 원기가 상한 상태가 독을 먹은 현서보다 나았다. 저렇게 뼈와 가죽밖에 없는 원기 손상자가 현서보다 더 건강한 이유는 현서가 먹은 독이 하필 산혼투여서 그렇다. 독성이 강하기로 유명한 짐독(鴆毒)이나 학정홍(鹤顶红)을 먹고 살아났다고 해도 이 정도로 약해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과자를 다 먹은 삼중은 현서에게 그가 만든 진에 대해 설명했다. 시체를 중심으로 죽은 것은 첫 번째 진을 넘지 못하고, 산 것은 두 번째 진을 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현서가 오기 직전까지는 심히 격렬하게 움직였으나 첫 번째 진을 넘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저는 몸의 반이 각각의 진에 걸쳐져 있는 걸 보았는데요.”
“맞습니다. 상체는 살아났는데 하체는 죽어 있다니 정말로 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몸 전체가 두 번째 진으로 넘어갔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호 공자는 못 보았겠지만 움직이지 않게 되자 순식간에 첫 번째 진으로 밀려들어 갔어요. 그래서 저는 상체에 비밀이 있을 거라 봅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냥 상체를 갈라보면 안되나?”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고 갈라야지.”
소화리의 물음에 화정이 대꾸했다. 삼중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은 현서 없이 두 개의 진을 넘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기분 나쁨과 기괴함이 옅어지자 현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시체가 움직이는 것은 놀라운 기사긴 하지만 현서는 그 이유나 사술의 방식이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내일 진을 하나도 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나오는지를 살피는 건 어떨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안 됩니다.”
유위람과 옥이 동시에 말했다. 화정을 비롯해 다른 이들도 현서가 위험한 발언을 했다는 것을 알아 눈을 동그랗게 뜨곤 반대했다. 모두들 움직이는 시체가 현서를 노릴 거라 보았기 때문이었다. 현서의 예상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좀 더 명확히 하고 싶어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보니 저 시체를 일부러 두고 간 것 같아 보여요. 그렇다면 분명 목적이 있겠지요. 시체가 움직이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 같지는 않아서요. 집 안에 간자가 들었다면 풀어서 감시하는 게 가장 빠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체가 움직이는 시간은 대략 일 각(15분)이다. 만약 그 시간을 넘긴다고 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저 시체 하나 못 막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반대하는 이유는. 모두의 시선이 현서를 향했다.
“저도 제가 습격당할 확률이 가장 높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이제까지 병풍처럼 가만히 있던 주경이 끼어들었다. 여전히 주경은 방에 들어오지 않은 채였지만 주경이 이곳의 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주경이 저렇게 나왔는데 자신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동의하고 현서 옆에 있는 것이 더 나았다. 유위람도 현서의 방안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현서가 위험할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대신 저도 곁에 있을 겁니다.”
“어차피 움직이는 건 일 각(15분)을 넘기지 않으니 다 같이 여기 있으면 되겠네.”
감윤이 결론을 내려주었다.
❖ ❖ ❖
밤새 현서는 깊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선잠을 드나 싶다가도 소스라치며 깨어나길 반복했지만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자문원에 관한 꿈은 그리 선명할 수가 없는데, 정작 현서가 꾸는 꿈들은 흐리멍덩하기 그지없었다.
이사는 식은땀에 절은 현서의 침의를 갈아입히며 해가 뜨면 화정에게 가서 수면 향을 좀 얻어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현서는 해가 뜰 때쯤 다시 잠이 들어 느지막이 일어났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있는데 삼중이 방문했다. 미열도 있고 잠을 제대로 못 잔 현서는 팔걸이가 있는 장의자에 반쯤 기대 죽을 마시는 중이었다. 머리도 묶지 않고 풀어놓은 채 침의 위에 장포 하나만 걸치고 있었는지라 손님을 맞이하기에 적당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인은 병으로 얼굴을 찡그려도 시선을 빼앗는다는 옛말이 과장이 아니어서 삼중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병약한 미인은 본 적이 없어서 면역이 없는 탓인가 싶었다.
삼중이 가만히 있는 것이 너무 격의 없는 차림 탓이라 여긴 현서가 서둘러 일어나려고 하자 삼중이 말렸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괜찮으니 마저 먹어요.”
“아뇨. 마침 다 먹었는 걸요.”
현서가 작은 죽 그릇을 내려두며 하는 말에 삼중이 놀라 이사를 보았다. 하지만 이사가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어 삼중은 두 번 놀랐다. 시체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보다 더 놀란 삼중을 뒤로하고 현서가 내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간단하게 의관을 정제한 현서가 나왔다.
“눈이 붉은 것을 보니 잠을 설쳤나 봅니다.”
“네, 티가 좀 나지요.”
이사가 곁에 있어 현서는 시체의 일을 언급하지 않고 눈가를 꾹꾹 누르기만 했다. 움직이는 시체가 직접적으로 해를 끼친 것은 아니나 보아서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삼중이 보기에도 기분 나쁜 광경이었으니 현서가 보기엔 더욱 그랬을 터였다.
어제 소매 안의 간식을 모두 털었고, 지금도 현서 몫의 간식밖에 없었던지라 이사가 간식을 더 가지고 오기 위해 차를 준비해 둔 뒤 물러났다.
“이게 호 공자에게 도움이 좀 될 겁니다.”
삼중이 품에서 부적 주머니 하나를 꺼내 현서에게 건넸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평안부(平安符)입니다. 몸에 지니고 있거나 잘 때 침상에 두세요. 호 공자가 편히 자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겁니다.”
―조금이라니 겸손하구나. 좋은 평안부다. 어지간한 수면 향보다 나을 테니 잘 챙겨두어라.
옥이 후하게 평했다. 현서가 귀한 물건을 주었다고 감사 인사를 건네자 삼중이 손사래를 쳤다.
“감사는요. 어제 과자의 답례입니다.”
“어.”
삼중에게서 받은 평안부를 소매 안에 넣던 현서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호 공자?”
―왜 그러느냐.
비슷한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현서는 기시감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으나 잠이 부족해 머리가 무거운 탓인지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서는 머리를 한 번 흔들고는 부적을 소매 안에 잘 넣었다. 몇 안 되는 과자를 다 먹은 뒤 삼중이 손을 닦으며 물었다.
“호 공자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현서가 고개를 저었다. 애초 현서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비법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았는데 필요한 것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간절함, 욕심, 두려움입니다. 죽은 자를 살린다고 큰소리치는 사술들의 면면은 저 세 가지를 넘는 법이 없습니다. 진실로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저 세 가지가 산 사람의 눈을 가려 죽은 자를 살린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삼중의 말을 듣던 현서가 무언가를 깨닫곤 배시시 웃었다. 그들보다 어리고, 강호의 사람도 아닌 현서가 시체가 움직이는 사술을 보고 혹여 겁을 먹거나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 걱정하여 삼중이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저 시체는 살아난 것도 아니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고.
평안부도 그렇고 삼중이 왜 자신을 방문했는지 알아 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리고 경험이 일천하나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수 없다는 이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그저 담이 작아 놀라긴 하였으나, 영진자의 말씀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삼중은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호 공자, 다음에 꼭 태호문에 한번 와주세요. 호 공자의 예의범절을 사제와 사질들에게 좀 보고 배우라 해야겠습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겁니다.”
사실 삼중의 방문은 유위람이 손을 보태 생긴 일이다. 유위람은 밤새 현서가 잠을 설친 것을 알았고, 삼중의 성품 또한 알았다. 슬쩍 언질을 해두면 강호인이 아닌 현서를 위해 삼중이 평안부를 챙겨줄 것을 알았던 것이다. 물론 삼중은 속이 시커먼 유위람이 일부러 말을 꺼냈다는 걸 전혀 몰랐다.
그사이 이사가 간식을 잔뜩 챙겨 돌아왔지만 삼중은 할 일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서는 그 간식을 모조리 삼중에게 주었고, 삼중은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갔다.
평안부 덕분인지 낮잠은 푹 잘 수 있었다. 아침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진 현서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어제와 같은 시간에 나서려고 하자 곁채에서 주경이 슬렁슬렁 걸어 나왔다.
“잘 쉬셨어요?”
주경도 종일 잠을 잔 것인지 아침 식사 때 이외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이사가 말했다. 주경이 손을 흔드는 건지 기지개를 펴는 건지 구분이 안 가는 자세로 손을 뻗었다. 인사라고 받아들인 이사가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이사의 배웅을 받으며 뜰을 벗어나자 주경이 물었다.
“미끼를 자처한 셈인데 무섭진 않나?”
“미끼라뇨. 그런 큰일 날 말씀은 마세요.”
바보가 아니고서야 시체가 현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등에 그려진 진조차 무엇을 뜻하는지 전부 아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호 공자는 무섭지 않나?”
“많이 놀라긴 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시체가 그렇게 움직이는 것은 무섭다기보다는 화가 나는 일인 것 같아요. 강시든 아니든, 죽은 자를 저렇게 욕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싫은 일이니까요.”
그리곤 덧붙였다.
“언제나 죽은 자보다 산 자가 더욱 무섭고, 시체가 움직이는 것보다 시체를 움직이는 목적을 모른다는 것이 무서운 일이긴 해요.”
주경과 대화를 하는 사이 시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문을 넘자 뜰에 모두가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현서와 주경이 가장 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곽나난과 정우문 소문주인 수경청도 자리하고 있었다.
시체가 있는 방의 문을 전부 활짝 열어둔 상태라 안이 잘 보였다. 인사가 오간 후 주경이 현서의 왼편에 자리하자 유위람이 다가와 현서를 안아 올렸다.
“저, 그냥 패천검의 곁에 있어도 될 것 같은데 내려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현서는 패천검의 고백을 홀랑 잊은 상태였다. 현서에게 고백보다는 움직이는 시체가 준 강렬함이 더 컸던 탓이다.
품에서 작게 버둥거리는 것이 고백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유위람은 저기 누워 있는 시체가 더욱 꼴 보기 싫어졌지만 지금 그것을 티낼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주경과의 대화를 듣지 못했어도 현서가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려는 것을 유위람이 모를 리가 없었다. 현서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고 싶어도 안전에 관해선 타협할 수가 없었다.
유위람이 단호하게 말했다.
“호 공자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무엇보다도 그대의 안전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 대협도 곁에 있지만 시체가 호 공자를 습격한다면 제가 안고 있는 것이 가장 낫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은 저 녀석의 말이 옳다.
옥도 패천검의 편을 들었으니 현서는 입을 댈 여지도 없었다. 안전을 놓고 보면 패천검의 의견은 틀린 것이 없다. 하지만 현서의 계획과는 차이가 있었다.
“호 공자는 시체가 팔이나 다리를 잡아 오면 그 정도는 괜찮다 싶어 내어주려고 했던 거지요?”
유위람의 말에 현서가 눈을 굴렸다. 유위람은 옥의 잔소리를 들을 때 외에도 현서가 멋쩍거나 난처하면 볼을 긁거나 눈을 굴린다는 걸 알았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의미다.
옥이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하면 어찌하느냐고 타박했다. 대화에 끼어들지는 않았으나 이 뜰에 있는 사람들 중 이 대화를 듣지 못한 이들이 없었다. 역시나 다들 말로 현서를 타박하지는 않았으나 시선으로 반대를 했다.
“미끼는 아니라더니.”
주경이 입을 열어 쐐기를 박자 현서는 백기를 들어 자신의 계획을 전면 철회하기로 했다.
―네가 지금 걱정이 많아 초조해 하는 것은 알지만 네 안위를 챙겨야지.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도 네가 상한다면 그런 주객전도가 또 어디 있어.
‘응. 맞아.’
호가 상단에서 습격당한 이후, 현서는 줄곧 심정이 편치 않았다. 화오궁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이유 모를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아서 초조했다. 옥과 하나하나 되짚어 보며 대화를 해도 딱히 걸리는 것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여유가 바닥나 조급증이 든 모양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떠올리며 현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패천검의 품 안에서 힘을 풀었다.
해가 졌지만 시체가 바로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편하게 있는 것 같아도 긴장을 늦추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뜰은 불을 잔뜩 두어 해가 졌지만 매우 밝았다. 물색없는 날벌레들이 불 근처를 휘저으며 날아다녔다. 그 사이로 삼중이 수경청과 대화를 나누는 나지막한 소리만이 들렸다.
삼중이 말하길 시체의 등에 그려진 진은 일부 훼손된 것 같다고 했다. 주기적으로 원기를 빼앗기는 상태인 것은 확인했으나 이것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 했다. 또, 수경청의 말대로 사람을 강제하고 조종하는 것에 관해서는 삼중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복잡하든 간단하든 진은 술자의 의도에 따라 배치되어 명령대로 움직인다. 잘못 놓인 돌멩이 하나가 생문(生門)을 사문(死門)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는 것이 진법이다. 때문에 변수가 많은 생물에 진을 새길 때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수정은 훼손이나 마찬가지라 위험하니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이라고 배운다. 하지만 누군가가 시체의 진에 손을 댔다고 삼중이 공언한 것이다.
“제가 세상의 사술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하는 것들은 제법 보았습니다. 헌데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진이 훼손되는 바람에 움직이는 건 아닐까요?”
“그럴 확률은 낮지요. 원기를 빼앗는다는 건 사람을 살리는 행위는 아니니 진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그와 같은 일을 기대하긴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호 공자에게 반응하는 건 진에 손을 댄 탓일 확률이 높아요.”
저 시체가 패천검의 저택에 들어온 이상 현서를 공격한다고 해도 직접 상해를 입히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걸 적들이 모를 리 없다. 그러니 호 공자에게 공포 외엔 줄 것이 없어 보이는데, 무슨 목적인지를 모르겠다고 삼중이 고개를 젓는데 방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움직이는군요.”
방과 뜰을 대낮처럼 밝혀 현서가 보는 데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시간이 제멋대로일 뿐, 움직임의 순서는 똑같았다.
“이제 맥이 뛴다.”
여전히 네 발로 기는 짐승처럼 굴고 있지만, 검은자가 돌아오고 맥과 심장도 뛰는 상태가 되었다.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작게 기침이라도 할까 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시체는 이미 현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현서가 긴장으로 마른 침을 삼킨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시체가 현서의 눈앞에 나타나 입을 쩌억 벌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나풀거리며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유위람이 물러서지 않았다면 현서가 시체에게 물어뜯길 뻔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첫 시도는 실패했지만 시체는 여전히 네발짐승처럼 기며 유위람의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전날 현서를 보며 기괴하게 미소 짓던 입이 오늘은 입맛을 다셨다.
“괜찮습니까?”
손이나 발을 잡히게 두었으면 어찌 되었을지. 산채로 물어뜯길 뻔한 현서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유위람을 비롯해 모두가 현서가 공격당한 그 순간에 시체를 제압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현서의 뜻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서가 두려워하면 움직이는 시체는 바로 움직이지 못하는 시체가 될 것이 뻔했다. 현서는 유위람의 품에 안긴 채로 등을 곧추세우며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지금 저게 현서를 먹으려고 하는 거야?”
화정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자유로워진 시체가 현서를 공격할 거란 예상은 당연히 했지만 살해나 상해가 아닌 섭식의 의도를 가지고 달라붙을 줄은 누구도 몰랐다.
혹시나 싶어 소화리가 일부러 팔을 걷은 채로 끼어들었지만 시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안광을 빛내며 오직 현서만을 노리고 입을 벌렸다.
손톱을 세워 휘두르고, 입을 벌려 물어뜯으려고 했다. 옷자락, 머리카락 하나 닿지 못했지만 시체는 포기하지 않았다. 현서의 피와 살을 먹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사제.”
등에 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상체를 벗겨두어야 했지만 시체라 해도 여인의 몸이라 가슴을 가린 배두렁이까지 벗기진 않았다. 하지만 등의 진을 관찰하려고 긴 머리칼을 올려 묶어놓았으나 날뛰는 사이 풀려 엉망이 되었다.
진을 관찰하던 삼중이 혀를 차며 감윤을 불렀다. 일 각(15분)이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감윤이 시체를 제압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유위람이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이었다.
“유위람!”
“안다.”
허공에서 화살이 날아 왔다. 화살보다는 말뚝에 가까운 모양새긴 하였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당연히 현서를 노렸을 거라 여겨 유위람은 방비했으나 화살은 그를 비웃듯 정확히 시체의 등에 박혔다.
곧바로 곽나난과 소화리가 처소의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 별채는 저택의 안쪽에 위치했다. 그 말은 아무리 내력을 실어 활을 쏘았다고는 해도 저택에 침입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저택 안을 지키던 유위람의 수하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침입자가 있다는 고함과 함께 별채의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나난과 화리가 침입자를 찾아 사라졌다.
두꺼운 화살이 시체의 상체를 꿰뚫자 시커멓고 진득한 무언가가 튀어 현서의 소매에 묻었다. 죽은 자의 피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그것은 불길한 색을 하고 있었다. 유위람은 만약을 대비해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현서의 소매를 찢어 냈다.
찢어진 소매가 바닥에 떨어지며, 그 안에 들어 있던 삼중이 주었던 평안부와 이사가 챙겨주었던 간식 주머니도 전부 흩어졌다.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화살을 타고 일어난 불이 순식간에 시체를 집어 삼켰다.
“이런, 당했어!”
“곽 숙부?”
감윤이 혀를 차고 화정이 중얼거렸다. 시체를 뒤덮은 화마는 내력으로 일으킨 새파란 불꽃이었다. 현서가 곽부에서 일으킨 불과 비슷했지만 이것 역시 시체의 옷가지까지 다 태운다는 점에서는 유위람이 일으켰던 불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 인형을 불태운 것이 현서라는 것을 누구도 몰랐기에 곽다순부터 떠올렸다.
삼중이 급히 달려와 불을 꺼보려고 했지만 내력으로 일으킨 불은 원래 쉽게 꺼지는 것이 아니었다. 감윤이 삼중을 도와 불길을 잡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유위람, 좀 도와봐.”
감윤이 불렀지만 유위람은 대꾸하지 않았다. 시체가 불에 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품 안에 있는 현서의 상태가 이상했다.
“호 공자?”
시선이 바닥에 있어 처음에는 불에 타고 있는 시체를 보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았다. 현서는 바닥을 뒹굴고 있는 물건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난장판이 된 상황이라 모두 각자가 보고 있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옥과 유위람은 현서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서의 이상을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 지붕 위에서 기암일사가 무어라 했는지 못 보았다고 했지?’
―그랬지. 뭔가 기억이 났느냐?
그날, 옥은 현서가 다친 것에 정신이 쏠려 있었던 터라 기암일사까지 챙겨 볼 상황이 아니었다. 현서가 지붕 위에 기암일사가 있다고 했을 때도 옥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나중에 현서가 기암일사가 무어라 말을 했는데 거리가 멀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입모양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혹시 본 게 있는지 물어 왔다. 하지만 옥은 멀어지고 난 뒤 기암일사의 인영을 흘깃 본 것이 전부였다.
‘기암일사가 내게 ……라고 했어.’
―응? 뭐라고? 현서야?
옥이 재차 물었지만 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새파랗게 질린 현서가 유위람의 품 안에서 발버둥을 쳤다. 내려달라고 말할 정신도 없는 게 분명했다. 유위람은 혹여 현서가 버둥대다 다칠까 일단 바닥에 내려주었다. 현서가 이유 없이 이렇게 굴지 않는 걸 알아서였다.
바닥에 내려온 현서는 그대로 구르듯이 주경에게 돌진했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그제야 다른 이들도 현서의 이상을 알아차렸다. 감윤과 유위람은 이미 검을 빼 들어 주경을 겨누고 있었다.
주경은 현서의 이상 행동에 놀라긴 하였으나 일단 이유를 들으려는 듯 자신을 잡아채도록 내버려 두었다.
현서의 머릿속에는 온갖 상황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주경에게 물어볼 것이 수없이 많았으나 입 밖에 나오는 물음은 하나뿐이었다.
“할아버님은 어디, 어디 계십니까!”
“호 공자?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좀 진정을 하고 차근차근 말을 해봐.”
현서가 무엇을 하려는지 두고 보려고 했던 주경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당황했다. 현서가 주경의 팔을 있는 힘껏 붙들며 재차 말했다.
“기암일사나 주 대협의 정체가 뭐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할아버님에게 아무 일 없다고 말해 주……!”
감정이 격해진 현서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현서야!
“호 공자!”
모두가 깜짝 놀라며 현서를 불렀지만 귀에 들리지 않았다. 시체가 자신을 먹으려고 했던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조금 전까지 현서가 보던 것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평안부였다. 삼중이 답례로 준다고 말했던 그것. 답례, 현서는 자꾸 그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렸다. 분명 그와 같은 말을 들었는데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답답했다. 기억에 기억을 더듬던 현서는 이윽고 깨달았다. 들은 것이 아니라 본 것이다.
호가 상단에서 습격을 받았던 그날, 주경에게 안겨 도망치던 현서는 기암일사를 보았다. 그가 손을 흔들며 무어라 말했지만,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현서가 듣지 못하는 것을 아는지 기암일사는 거듭 반복해서 말했으나 그때는 바로 알지 못했다.
손을 흔드는 기암일사의 팔목에는 현서가 선물했던 금팔찌가 매달려 있었다. 기암일사가 말했다.
‘답례가 마음에 들었기를.’
기암일사가 무어라 했는지를 떠올린 순간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말한 답례가 습격이든 저 시체든 간에 기암일사는 자신이 화오궁과 연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렸다. 기암일사가 화오궁의 사람이라면, 그의 스승도 화오궁의 사람일 테고, 그렇다면 기암일사의 스승과 함께 있는 할아버님은 화오궁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오궁의 누군가가 호현서를 죽이고 싶어 하는 이때에 가능성만을 저울에 올려 할아버님의 안전을 낙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현서는 할아버님이 무사하신지를 알아야 했다.
피를 토해 의식이 가물거리는 상황에서도 주경을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 ❖ ❖
소화리의 얼굴에는 노여움이 가득했다. 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별반 다름이 없었다.
침입자를 찾아냈으나 그는 이미 한 줌의 핏물로 변한 뒤였다. 퇴로가 막혀 죽은 것이 아니라 임무를 완수한 뒤 바로 죽은 것이다. 자객이 배후를 숨기기 위해 독을 먹는 경우는 왕왕 있으나 시체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스스로 화골산을 먹은 일은 처음 보았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간에 산 채로 온몸을 녹여 죽는 법을 택하게 만들다니. 수하를 소모품으로 쓰는 행태 중에서도 특출하게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핏물이 된 누군가는 칠암문처럼 사라진 이들 중 하나일 터.
“미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소화리의 목소리엔 숨기지 않은 혐오가 가득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려고 차갑게 식은 차를 단숨에 마셨다.
“계속 이렇게 끌려다니는 거 질색이야.”
“나도 그렇다.”
소화리의 말에 곽나난이 동의했다. 완비의 납치부터 오늘의 습격까지. 화오궁이 벌이는 짓에 줄곧 휘둘리고만 있었다. 단 한 번도 스스로를 화오궁의 사람이라 밝힌 자와 격돌한 적 없었으나 공격은 벌써 수차례 당했다. 정체를 숨긴 채 일방적으로 걸어오는 음모가 달가울 리가 없었다.
소화리와 곽나난, 그리고 감윤은 현재 유위람의 처소에 딸린 정자에 앉아 있었다. 새벽이긴 하지만 저택의 하인들이 발 빠르게 준비한 덕에 편히 있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현서와 주경을 따라 방 안에 들었다.
피를 토하며 횡설수설했지만, 화정이 있어 현서는 기절하지 않고 또렷하게 기암일사가 했던 말을 전할 수 있었다.
기암일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 주경을 향하고 있던 감윤과 유위람의 검이 더욱 날카로워졌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연기가 뛰어난 것인지 정말로 무고한 것인지 주경은 자신이 화오궁이나 기암일사, 어느 쪽과도 연관 없음을 피력했다.
지금 방에선 한참 주경을 추궁하고 있었다. 화정은 현서의 몸 때문에, 삼중은 주경이 사술에 걸려 있는지를 판별하고자, 그리고 신농자를 아는 수경청이 주경의 말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갔다. 유위람은 저택의 주인이니 당연히 자리해야 했다.
그래서 이 세 명은 혹여 주경이 탈출할 때를 대비해 밖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말이다.
주경은 호 노대인의 소개장을 가지고 왔고, 소개장이 가짜가 아니라는 판단하에 받아들여졌다. 사문이 어디고, 어떤 내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강호에서 밝히지 않는 내력을 억지로 캐어묻는 것은 대단한 무례로, 칼부림을 일으키는 훌륭한 사유 중 하나였다. 그러니 주경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사문과 내력을 밝힌다면 듣는 귀가 적은 것이 옳았고, 주경이 공격을 한다면 누군가는 밖에 있는 것이 옳았기에 이 셋은 지금 정자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음식을 먹을 기분은 아니지만 목은 타는지 소화리가 연거푸 찻잔을 비웠다.
“기암일사가 정말 화오궁의 사람일까? 그렇다면 정말 뻔뻔스러운 인사가 아닐 수가 없네. 낯짝 한번 두껍기도 하지.”
화오궁이 보물이 있다고 소문을 낸 바람에 현서와 유위람이 곤란해졌고, 그 때문에 비무회를 열어야 했다. 그런데 그 비무회에 화오궁의 사람이 참가해 우승을 하고 보물까지 가졌다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주최를 비웃으려고 참가한 것과 다름없으니 소화리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용혈을 받은 다음 기암일사는 내내 습격에 시달렸어. 정말로 화오궁의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낸 소문에 자기 발이 걸린 것이니 웃긴 꼴이 되긴 하였지.”
호 공자가 좋은 것을 골랐지. 마지막 용혈이라는 소문까지 붙는 바람에 용혈을 노리는 작자들이 많았거든. 곽나난의 설명에 소화리의 표정이 좀 풀렸다.
“그건 좀 고소한 얘기네.”
“기암일사의 정체는 그렇다치고, 화오궁은 왜 호 공자를 노리는 거지?”
모두 궁금했지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철서성에 도착한 궤짝부터 시작해 항도에서 받은 습격, 움직이는 시체의 공격, 더욱이 호 노대인의 일까지. 단순한 우연의 일치나 착각일 수가 없었다. 화오궁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현서를 대하고 있음이 명백했다.
완비의 납치 사건은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계획에 완비가 걸린 것이지 곽완비를 노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서와 관련된 일은 서녕호가보다는 호현서를 겨냥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기도 했다.
몸이 약해 인생의 대부분을 호부에서만 지냈고 스무 살이 된 올해 겨우 기주를 벗어난 사람이다. 화오궁과 접점이 있다면 그것이 더 놀라운 일이라, 현서는 짚이는 곳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니 이유는 오로지 화오궁에 있다는 말이다.
“검선의 팔찌 때문인가?”
곽다순이 화오궁과 연관되어 있고, 또 현서를 만난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유위람의 말로는 곽 숙부께서 자기 팔은 자르고 싶어 하셨어도 호 공자에겐 위협적으로 굴지 않았다고 했어. 팔찌를 원했다면 어린애 팔을 비트는 것보다 쉽게 빼앗을 수 있었을 텐데.”
검선의 유품이니 가지고 싶어 할 수도 있다. 단순히 팔찌만 노렸다면 곽다순은 진즉에 팔찌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현서를 노리는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으니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소화리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곽 숙부는 검선을 되살리고 싶어 하시는 것 같네.”
말은 하지 않았어도 세 명 모두 곽나난의 저택에서 보았던 그 기분 나쁜 인형을 떠올렸다. 검선의 육체는 이미 썩어 사라졌을 테니 되살리겠다면 육체를 대신할 것이 필요할 터. 그것은 그 실패작일지도 몰랐다.
죽은 자를 살리는 비법의 진위 여부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모두 곽다순이 미친 것을 알았고, 미치광이의 논리가 정상일 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불에 타기 전의 인형을 보았던 감윤은 그 인형이 시체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상해 보고는 진저리를 쳤다. 끔찍한 일이었다.
“부디 곽 숙부께서 저 시체와 같은 것을 살아났다고 여겨 화오궁과 손잡은 게 아니길 바라.”
감윤의 말에 소화리는 물론 곽나난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진(4시간)이 지나자 해가 뜨려는지 어슴푸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이들 중 하루 잠을 자지 않는다고 피곤해 할 사람은 없지만 긴 밤이긴 했다.
잠시 후, 역시나 피곤한 얼굴을 한 화정과 삼중, 수경청이 밖으로 나왔다. 현서는 억지로 재웠고, 유위람이 주경의 감시역을 자처해 안에 있다고 했다. 주경은 여전히 사문과 내력을 말하지 않았으나 의심의 일부분을 치워 내는 데 성공했음을 화정이 알려 왔다.
기암일사를 두고 서로의 말을 맞춰보던 현서와 주경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날 현서는 지붕 위에서 기암일사를 보았다고 했으나 주경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급박하게 도망가는 상황이었으니 보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주경의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붕 위에서 경망스럽게 손을 흔드는 이를 주경도 보았으나 주경은 그 남자를 기암일사로 보지 않았다. 현서가 아는 기암일사는 유리를 깎아 낸 것 같은 미남자였으나 주경이 아는 기암일사는 오른쪽 볼과 귀 사이에 상처가 있는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다.
신농자의 어린 제자였을 때 나무에 올랐다가 떨어진 바람에 생긴 흉터라고 했다. 그 말에 수경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경청도 신농자로부터 같은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기암일사가 두 명이 있다고 해서 주경이 완벽히 혐의를 벗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용혈과 현서가 야시장에서 샀던 선물들이 전부 신농자와 호 노대인의 손에 들어갔으니까. 두 명의 기암일사가 한패라는 증거밖에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주경 역시 속았다는 가능성에 무게가 더 실렸다. 굳이 항도에 들어오기 전에 헤어진 것도 현서 일행이 또 다른 기암일사의 얼굴을 알기 때문으로 보였다. 주경은 반쯤의 결백과 유예를 얻었다.
“이것이 답례라니.”
화정의 이야기를 다 들은 곽나난이 조소했다. 두 명의 기암일사와 신농자 중에 누가 화오궁의 사람이고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가짜 기암일사―비무회에 참가한 쪽을 우선 가짜라고 부르기로 했다―가 자신을 노출하면서까지 호 노대인이 위험할 수 있음을 알린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답례라고 포장한 그 행위에 선의가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주경이 살아 있는 호 노대인을 본 것은 보름도 전의 일이다. 주경이 떠난 후 호 노대인의 무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라도 호 노대인을 신농자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라는 얘기일까, 아니면 이미 죽은 시신을 수습하라는 얘기일까.
어느 쪽이든 가짜 기암일사가 호 현서에게 호의를 표했다고 하기엔 감춰지지 않는 악의가 삐죽했다. 호 공자가 피를 토할 정도로 동요한 것 역시 그 악의를 알아서일 게 뻔했다.
가짜 기암일사는 그저 호 공자를 괴롭히기 위해 자신의 위장 신분이 드러나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화오궁의 사람이 호현서에게 악의를 가진 것은 명백해졌으나 여전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에 곽나난이 정리해 주었다.
“저놈도 미쳤긴 매한가지라는 말이지. 그러니 숙부님이랑 한패긴 한 모양이겠지만.”
다들 생각만 하고 차마 못 했던 말을 곽나난이 툭 해버렸다. 예사롭지 않은 발언에 놀란 것은 수경청뿐으로 화정은 작게 혀를 찰 뿐이고, 나머지는 듣지 못한 척을 했다.
❖ ❖ ❖
약을 써서 재웠지만 현서는 그리 오래 잠들지 못했다. 한 시진(2시간)을 겨우 넘겨 눈을 떴지만, 어지럼증 때문에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이른 햇볕에 잠을 설칠까 덧창을 닫고 휘장을 내려 어둡게 만든 방 안이나, 아픈 곳은 없는지를 묻는 유위람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숨기지 않은 걱정이 가득했다.
눈을 떴으나 아직 정신을 명료하게 차리지 못한 현서는 패천검이 이틀 전에 연심을 고백했다는 것을 여전히 상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조용히 쌓이는 눈처럼 현서의 안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유위람은 현서를 일으켜 제 품에 기대게 한 다음 약을 먹이고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눕혀주었다. 더 말을 걸지도 않았다. 약을 마신 현서의 손이 툭툭거리며 부산스러운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이 상황을 바라보는 주경의 표정이 참으로 괴상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미운털이 잔뜩 박히다 못해 의심받는 상황에서 괜한 말을 보태지 않았다. 전부터 별꼴을 다 보네 하는 목구멍으로 넘어온 말을 얌전하게 쑥 밀어 넣었다는 의미다.
침상의 휘장을 다시 내려준 유위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냉담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유위람은 현서가 생각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며 전음으로 수하들을 부지런히 굴렸다. 호 노대인은 강주 북쪽의 화용에 있다고 주경이 말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든 아니든 그곳에 가야 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출발할 수 있게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유위람이 무엇을 하든 감시당하는 처지에 가릴 것 없는 주경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운기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할아버님을 찾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걸 아는 현서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두통으로 머리가 웅웅 울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옥이 전해준 얘기들을 듣고도 한동안 손가락을 두들기던 현서가 길게 한숨을 뱉었다.
삼중이 말했다. 진이 망가진 것 때문에 시체가 현서를 노리게 되었다고. 하지만 침입자의 목표는 시체였다.
옥이 말하길 침입자는 한줌의 핏물로 변했다고 했다. 시체가 저택의 문을 넘은 이후로 자객이 든 것은 이번에 처음이었다. 그 말인즉, 저들에게 오늘 꼭 시체를 처리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 그것 때문에 지금 영진자가 정우문 소문주를 데리고 그에 관한 얘길 하고 있다.
할아버님의 일로 충격을 받은 현서보다 다른 이들이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당연했다. 시체를 남긴 것은 기암일사의 짓이나 시체를 없앤 것은 기암일사가 지시한 일이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가짜 기암일사가 왜 시체를 남기고, 그 시체로 하여금 자신을 물어뜯게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난제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기암일사는 내가 자신의 말을 모르는 걸 알았을 텐데도 다시 알리려고 들지 않았어.’
현서가 기억을 떠올린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영진자가 현서의 과자를 먹지 않았다면, 평안부를 답례라 하며 주지 않았다면, 기억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기억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습격을 받은 지 오늘로 칠 일째니 그사이 현서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도 남았을 터. 하지만 그 후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암일사가 말하던 그때에 이미 모든 것이 끝이 났거나, 아니면 기암일사가 호 노대인의 일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뜻이 된다.
만약 모든 것이 벌써 끝나 혹여 정말 할아버님이……. 전자의 경우를 염두에 두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꽉 조이며 숨이 막혔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에 열이 몰렸다.
현서는 얼른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울면 안 된다. 피를 쏟아 낸 후다. 약을 먹었다고 해도 지금 울었다간 탈진하게 된다. 할아버님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이때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휘장 밖의 유위람과 현서 팔의 옥이 현서가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사람 하나와 옥 하나가 울지도 않은 현서를 달래지 못해 속이 썼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어찌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할아버님이 괜찮다고 가정하고 움직이는 수밖에 없으리라.
할아버님께서 밖을 떠돌고 계시기 때문에 호가에선 할아버님의 안전에 주의를 기울였다. 할아버님이 정정하시다고는 해도 연세가 있으시니 더욱 그랬다.
현서는 패천검 유위람이 안전을 보장하였기 때문에 두 명의 호위를 붙인 것이 다였으나 할아버님의 호위는 더 많을 게 분명했다. 현서가 떠올릴 수 있는 무수한 불길한 가정과 무서운 가능성들 중에서 지금 매달릴 곳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더욱이 기암일사가 두 명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누군가가 기암일사를 사칭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신농자가 한패가 아닐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신농자가 기암일사와 한패인 것보다 상황을 조금 더 낙관할 수 있게 된다. 저들의 목표가 신농자 하나라면 할아버님이 무사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현서는 입술을 깨물며 이어지던 생각을 억지로 멈췄다.
유위람은 팔이 여덟 개가 달린 것처럼 전음으로 수하들을 굴리고 있었으나 신경은 온통 휘장 너머에 쏠려 있었다. 현서가 눈물을 참기 위해 숨을 들이 쉬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유위람은 주먹을 꽉 쥐었다.
화오궁과 기암일사가 현서에게 보내는 적의가 너무도 선연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유위람은 미친놈들의 의도를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을 따기 전에 고신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휘장 안의 현서가 일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유위람은 금세 곁으로 다가가 부축했다. 파리한 얼굴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사를 부르겠습니까?”
밤새 도련님이 돌아오지 않아 전전긍긍해 하던 이사는 유위람의 전각에 수차례 찾아왔으나 아직 현서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네, 하지만 그 전에 패천검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참 말을 하지 않아 현서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지고 낮았다. 혹여 기침이라도 할까 유위람은 석청을 타놓은 물 잔을 현서의 입에 가져다 댔다. 현서가 달게 받아 마셨다. 탐탁잖음을 티내지 않았던 옥은 주경이 괴상망측한 표정을 지으며 유위람을 보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