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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章. 어떤 비극들 (1) (12/21)

十章. 어떤 비극들 (1)

유위람이 조심스럽게 현서를 추슬러 안고는 도약했다. 사람이 밟았음에도 나뭇가지나 나뭇잎은 바람결에 흔들리듯 살짝 움직일 뿐이었다. 완벽한 능공허도(凌空虛道)나 허공답보(虛空踏步)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나 유위람의 나이를 감안하면 성취가 대단했다.

더욱이 유위람은 마르긴 했어도 성인 남성인 현서를 안고 있는 상태로 수준 높은 경공을 펼치고 있으니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이긴 하였다.

―쌀 포대는 무슨.

옥이 혀를 찼다. 현서는 잠들기 전에 자신이 쌀 포대처럼 옮겨질 거라고 추측했지만, 저렇게 귀하게 안고 가는 쌀 포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로 현서를 쌀 포대 취급했다면 욕부터 했을 옥이지만 유위람이 소중하게 품에 안고 가는 것도 딱히 성에 차지 않았다.

옥은 유위람의 반 보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주경도 보았다. 주경 역시 유위람을 쫓아오는 것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경은 맨몸에 반 보 뒤쳐지니 쉬이 보면 유위람보다 조금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 말을 하는 놈은 눈깔이 삔 놈이고.

옥이 박하게 평했다.

주경이 펼치는 경공은 초상비(草上飛)다. 풀을 밟아도 풀이 눕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빠른 경공인 초상비 역시 대단히 뛰어난 경공이다. 대신 유명해 사문의 특징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주경이 내력을 밝히지 않으려고 수를 쓴 것이다.

내력을 숨기는 것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실력을 숨기는 것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극성을 이룬 초상비를 쓰며 반 보 뒤를 따라가는 척을 하다니.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현재 현서의 일행은 딱 두 명이었는데, 하나는 속도 눈알도 시커먼 놈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력을 숨기겠다고 이상한 짓을 하는 의뭉스러운 놈이었다. 둘 다 옥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경과 기암일사가 많이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강주 북쪽의 화용에서 소주 항도까지 열흘이 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것도 놀랄 만큼 빨리 온 것이긴 하나 지금은 일각이 아까운 상황이었다.

평범한 일정도 현서가 있다면 속도를 내기 어렵지만, 이번 일정에 현서는 절대로 빠질 수 없었다. 호 노대인에게 아무 일도 없거나 혹 도움이 필요하다면 현서가 있어야 시간 낭비 없는 설득이 가능하다.

사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가 있었지만 다들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정말로 호 노대인이 유명을 달리했다면 자손인 호현서가 그곳에서 유해를 수습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주경도 마찬가지였다. 주경이 적인지 아닌지 애매한 상황에서 금제(禁制)를 걸지 않고 데려가는 것에 모두가 난색을 표했다. 감윤이나 소화리가 따라가면 될 일이나 갈 수가 없었다. 유위람이 화용으로 향할 때 그들도 떠나야 하는 일이 생겨서였다.

그 때문에 주경이 스스로 무공을 펼치는 데 제약을 주는 금제를 걸어도 좋다고 말할 정도였으나 유위람이 코웃음 쳤다. 주경이 적이 아니라면 공격당했을 때 주경까지 챙겨가며 싸우는 것은 낭비고, 설령 주경이 적이라 해도 지지 않을 것이니 상관없다고 말했다.

유위람의 대단히 오만한 발언에 감윤이 말했다.

‘내 친구지만 너 좀 재수가 없어.’

그리고 주경을 포함한 네 명 전부가 감윤의 말에 동의한다며 방아깨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주경의 처우는 그렇게 결정 되었고, 남은 것은 현서였다.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하는데 몸이 약한 현서를 추스르며 서두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최단 거리는 산맥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저를 재우세요.’

이 논의는 본인의 일이라 현서도 자리했다. 이사에게 부재 중의 일을 부탁해 놓고 온 현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현서의 몸 상태를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화정이 찬성했다. 대신 현서의 몸 상태를 고려해 이틀 이상 재우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이틀에 한 번씩 꼭 깨워 식사를 하게 하고 약을 먹이고 몸을 움직이게 했다.

현서를 재운 덕에 일정을 나흘이나 앞당길 수 있었다. 나무 위를 달리던 유위람이 가볍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제 산길이 끝났다. 화용까지 말을 타고 반나절 거리인 부곡현(釜谷縣)에 도착한 유위람은 객잔을 찾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현서를 깨워야 할 때다.

빠듯한 일정이라 그간 객잔에 묵은 것이 이번을 포함해 두 번이 전부였다. 첫 객잔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방이 모자라 한 방을 썼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유위람이 자연스럽게 두 개의 방을 빌린 다음 열쇠 하나를 주경에게 주었다.

셈은 전부 유위람이 치르고 있으니 방을 몇 개 빌리든 주경이 뭐라 할 것은 아니나, 그래도 좀 어이가 없긴 하였다. 자신을 완전히 믿지 않아서 움직일 때면 늘 일격에 검이 닿을 거리를 가늠해 위치하면서 지금 보여주는 이 관대함은 뭐란 말인가.

‘배포가 큰 것인가, 아니면 어디 모자란 것인가.’

주경은 몰랐지만 옥이 자신을 평했던 것과 비슷하게 유위람을 평하며 성큼 걸었다.

침상에 누워 있는 현서를 보며 유위람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 며칠 사이 현서가 축이 난 것이 티가 났다. 제대로 먹지 못한 날들이 이어졌으니 살이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화용까지 말을 타고 반나절 거리니 부곡현에 머물지 않고 화용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처음부터 일정을 그렇게 짜지 않았다. 그런 일은 바라지 않지만, 현서가 호 노대인의 별세를 감당해야 한다면, 여기서 깨어난 다음 몸을 추스르고 가야만 했다.

품에서 약병을 꺼내 현서의 코 아래에 가져다 두었다. 오래 맡으면 각성 효과가 너무 강해 위험하니 정확히 셋을 센 후에 약병을 닫아야 한다고 화정이 당부했다. 유위람이 약병을 치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시선을 떼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유위람은 자신이 좀 우습다는 걸 알았다. 건너편 방에 주경이 얌전히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는 별개였다. 주경에 대한 감시를 아직 거두지 않았으면서 혼자 있게 했으니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유위람은 홀린 듯 현서가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잠이 덜 깨 몽롱하던 눈에 빛이 들이차고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깜박이다 자신을 보고 이윽고 안심하고야 마는 이 광경을 독점하고 싶었던 것이다.

―눈 치우라고.

정말이지 옥은 들리지 않을 걸 알아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오직 현서에게만 들리는 것을 옥은 단 한 번도 불편하다 여긴 적이 없었으나 저놈 때문에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옥은 분통이 터졌다.

부곡현에서 눈을 뜰 것을 현서도 알고 있었다. 그 이유도 알았다. 눈으로 보기 전까진 나쁜 상상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옥도 그 속을 알아 책하지도 달래지도 않고 일상적인 얘기만을 꺼냈다.

‘경공은 정말 아쉽다.’

유위람과 주경이 펼친 경공에 대한 얘길 들으며 현서가 부러움을 담아 말했다.

‘나중에 시간 나면 다시 연습해 볼까?’

―아서라. 다칠까 겁난다.

현서는 객잔에서 방에 준비해 준 탕조에 앉아 익숙한 수련을 하며 옥과 대화 중이었다. 잠들어 들려 다닌 것이 전부인 현서의 몸이 가장 좋지 않았으나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기가 온몸을 도는 일주천(一周天)을 끝내자 축 처진 몸에 활력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

그 후 옥과 계속 대화를 하며 기를 움직이는 수련을 반복했다. 수련의 성과가 눈에 보일 정도로 늘어났다. 현서의 손가락을 따라 물줄기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쪼물쪼물 움직였다. 막 여행을 시작했을 때 성공률은 칠 할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실패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후해진 옥의 칭찬을 들으며 현서는 수련을 마쳤다.

갓난쟁이 시절에는 어땠을지 모르나, 어린 시절부터 현서는 욕의를 입지 않고 목욕을 한 적이 없었다. 부잣집 도련님이니 격식을 차린다고 할 수 있으나 중의나 침의를 입고 팔랑팔랑 돌아다니는 것에는 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장중보옥으로 자란 도련님인데도 혼자 하는 일도 곧잘 했고, 동시에 시중받는 일에도 아주 익숙했다. 지금처럼.

하인들이 탕조를 치우느라 부산스러운 와중에 중의만 입은 현서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탕조를 치우는 것은 나중에 하고 우선 머리부터 말리라고 하면 될 텐데 했던 유위람은 급히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탕조를 치우는 하인들이 볼에 홍조를 달고 머리 말리는 일에 몰두 중인 현서를 흘깃흘깃 바라보는 것이 고스란히 보인 탓이다.

그렇다고 탕조를 치우지 말라고 쫓아 낼 수 없으니 못 보게 막으면 될 일이다. 유위람이 성큼 걸어 현서의 뒤에 자리했다.

“이리 주세요. 여름이라 해도 여긴 항도보다 북쪽이고 산이 근처라 감기 들기에 좋습니다.”

속이야 어쨌든 사심이라곤 하나도 담기지 않은 담백한 말투였다. 머리를 말려주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영우로 향하던 때에도 유위람의 도움을 종종 받았다. 현서는 감사를 표하며 유위람에게 몸을 맡겼다.

유위람은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고, 이미 고백까지 하였다는 게 그때와 완전히 달랐으나 현서는 여전히 아무 자각도 없는 듯했다.

‘귀엽기도 하지.’

유위람이 현서의 길고 매끄러운 머리칼을 영견으로 두들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서가 무엇 때문에 정신을 팔아 자신의 고백을 싹 잊었는지를 잘 안다. 유위람의 작은 양심이 이런 일로 서운해 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유위람은 일의 선후를 모르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중에 다시 알려주면 현서가 깜짝 놀랄 게 뻔했다. 유위람은 그때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는데 이럴 때는 양심도 유위람과 한패라 말을 보태지 않았다.

현서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적당히 욕심을 채운 유위람이 내공으로 머리칼을 금세 말렸다. 옥이 현서에게 유위람이 네 머리에 소홀하니 머리 말리는 것은 하인에게 시키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다 되었습니다.”

―저 여우 놈이.

마치 옥의 속을 읽은 것처럼 딱 맞게 끝냈다. 그저 현서가 미인이라 얼굴을 붉히는 하인들이 더 나았다. 옥은 현서에게 들리지 않게 혼자 구시렁거렸다. 현서의 정신이 딴 데 팔린 지금 괜히 그것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는 조금 부산스러우니 주 대협이 계시는 방에 식사를 준비 시켜 놓았습니다.”

유위람은 현서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현서가 머리를 묶고, 옷을 챙겨 입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식기 전에 드세요.”

식대는 유위람이 치르지만 주경이 자신이 준비한 음식처럼 권했다.

항도를 떠난 이후 현서가 눈을 뜬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간 현서가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이들은 호 노대인의 일이나 화용의 일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옥은 둘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이곳에서 화용은 멀지 않으니 무언가 들은 모양이었다.

‘화용에 도착하자마자 현서가 유해부터 수습해야 하는 건 아닌 모양이군.’

그런 것치고는 무작정 밝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좋은 일이었다면 식사 전에 말했을 터인데 그러지 않았다. 입 안에 바늘이 돋친 사람처럼 죽 한 숟갈을 삼키는 것도 고역스러워하는 현서가 들어서 당장 식욕이 날 일은 아니라는 의미다.

탕에 들어가 쉰 덕에 그나마 죽 한 그릇과 건더기 없는 탕 한 그릇을 다 먹을 수 있었다. 더 권했다간 체할 것을 알아 유위람은 별말 없이 현서에게 사탕이 든 주머니를 주었다.

“화용까지 말을 타야 하는데 이것만 먹고는 버티지 못합니다.”

사탕이라면 입에 물고 있을 수 있고 녹여 먹는 것이니 음식을 삼키는 것보다는 수월했다. 현서는 감사를 표하며 소매에 사탕 주머니를 넣었다.

객잔에 방을 잡았으나 자고 갈 것은 아니었다. 부곡현에 도착한 것이 이른 아침이라 식사 후 어느 정도 쉬었어도 여전히 날이 밝았다. 험한 길은 아니지만 초행길이니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객잔을 나와 말을 타기 전에 현서가 두리번거렸다. 혹시 아는 얼굴이 있는지를 무의식적으로 살핀 것이다. 객잔에서 화용에 혹시 변고가 없는지를 물어볼 법도 하건만 현서는 입을 떼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들을까 두려웠던 탓이다.

정확히 어떠한 심정인지 현서의 입으로 듣지 못했으나 추측은 가능했다. 현서가 독을 마신 일로 죄책감을 가진 호 노대인은 손자를 보지 못했고, 손자는 그런 할아버지를 안타까워한 것이겠지. 그렇게 호 노대인이 서녕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십일 년째다.

이런 상황에서 현서를 적대시하는 화오궁이나 기암일사가 호 노대인을 살해했다면, 현서를 괴롭히는 데 이것만큼 적절한 일이 또 있을까.

화용까지의 여정이 힘들다 해도 현서가 단기간에 이렇게나 수척해진 것은 몸보다 정신적인 괴로움이 더 크게 작용했을 터. 화정이 약을 써 재우자는 의견에 흔쾌히 동의한 것도 단순히 몸만을 챙겨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가 객잔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보겠습니까?”

말을 타고 있으나 현 안에서는 달리지 못한다. 말을 하려면 지금 하는 것이 옳았다. 현서가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손에 상처가 날까 유위람은 현서의 손 위로 제 손을 덮어 힘을 빼게 했다.

“네. 듣겠습니다.”

긴장으로 바스락거리듯이 조그만 목소리를 냈지만 유위람이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객잔 주인에게 화용에 사는 친척이 있어 자주 온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이틀 전에 왔다 갔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객잔 주인이 두 분의 존함을 알고 있었는데, 호 노대인과 신농자께서 작고한 일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현서가 고개를 돌려 유위람을 바라보았다. 유위람이 현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참았던 숨을 뱉자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 눈가가 빨갛게 변했지만 현서는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어 감았다 떴다.

할아버님이 살아 계신다는 건 무척이나 기쁜 소식이었으나 그저 무탈하기만 했다면 패천검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을 현서도 알았다.

“다른 얘기도 알고 계신 것이지요?”

“더 들으시겠습니까?”

“네.”

현서의 대답에 유위람이 아예 현서를 제 품에 기대게 해 도닥이며 말을 이었다.

❖ ❖ ❖

대주에 가는 길목에 있어서 외부인이 오가는 부곡현과 달리 화용은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나서 도착했더니 불이 켜져 있는 곳도 몇 없었다. 목적지는 가장 불이 밝은 저곳일 게 뻔해 상관없긴 하였다. 길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 어두워도 말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이곳이군요.”

부곡현을 빠져나온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현서가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유위람이 잠시 말을 세웠다. 어두워 보이는 것은 없었으나 코끝을 맴도는 재의 냄새가 이곳이 신농자의 저택임을 알려주었다. 저택에 불이 난 지 보름이 지났다고 들었음에도 여전히 화마가 남긴 냄새가 났다.

―저택이 전부 탄 건 아니구나.

옥이 말했다. 불이 저택을 전부 태운 것이 아니라 불을 끄기 위해 건물을 일부러 무너뜨린 듯했다. 들은 대로 다른 곳으로 불이 번지기 전에 화재를 진압한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누가 옵니다.”

유위람이 새까만 어둠을 응시하며 현서의 주위를 환기했다. 고개를 돌리자 불을 밝힌 등롱을 든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거기 누구십니까?”

수상한 일행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옥이 먼저 알아들었다.

―조 총관이다.

조 총관은 호 대인의 측근 중 한 명으로 오래도록 호가에서 일한 사람이었다. 서녕에서 할아버님의 일을 알고 사람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서녕에서 조 총관 혼자 보냈을 리 없으니 현서는 적잖이 안도했다.

“조 아저씨!”

수상한 방문객이 막내 도련님이라 등불이 급히 가까워졌다. 조 총관은 진짜 현서라는 걸 확인하고는 놀라며 물었다.

“도련님? 항도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여긴 어찌 오신 겁니까?”

“그건 천천히 얘기하죠. 그보다 할아버님은 어떠신가요? 신농자 어르신도 괜찮으신가요?”

목소리는 걱정을 담고 있었고, 등불 사이로 보이는 막내 도련님의 얼굴 역시 좋지 않았다. 우연히 노대인을 뵈러 온 것이 아니었다. 혼사 문제에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항도로 보내놓은 막내 도련님이 아무 이유 없이 왔을 리가 없었다. 도련님은 무슨 얘길 듣고 오신 건가. 핼쑥한 현서의 모습에 조 총관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 의원께서 같이 와 계십니다. 노대인께서는 지금 잠드셨지만 깨어나셔서 도련님을 보시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오래도록 현서를 돌보았던 정 의원의 실력은 누구보다 현서가 잘 알고 있었다. 조 총관이 저리 말하는 것을 보면 할아버님의 상세가 가벼운 것은 아니나 의식이 없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현서는 적잖이 안도하였으나 그 때문에 더욱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농자 어르신은요?”

현서가 처음 물었을 때 조 총관은 대답을 피했다. 현서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물으니 대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 총관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솔직히 말해서 많이 좋지 않으십니다. 정 의원께서 말하길 의당의 의선이 아니라 약사여래(藥師如來)께서 와도 살리지 못할 거라 하셨습니다.”

“부상이 많이 심하신가요? 많지는 않지만 내게 양만고(陽萬膏)와 벽옥삼설고(碧玉蔘薛膏), 그리고 천뢰삼(天雷蔘)으로 만든 환이 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할아버님이 큰 부상을 입으셨을 수도 있다는 걱정에 현서는 당장 구할 수 있는 금창약을 되는 대로 챙겨 왔다. 습격을 받았든 화상을 입었든, 이 외상 약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터였다.

현서가 가져온 약들은 천금의 가치가 있거나 효과가 좋은 귀한 것들이긴 하나 지금 사경을 헤매는 신농자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다. 조 총관이 조용히 고했다.

“그분께서는 부상을 입으신 게 아닙니다.”

“그럼? 내상을 입으셨어요?”

무공이 고강하지 않아도 무림인이다. 내상을 입었다면 정 의원이 치료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근방에 의당의 제자들이 있는지를 수소문하겠다고 말하자 조 총관이 만류했다.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생금(生金)을 삼키셨습니다.”

“아.”

현서는 신음 같은 탄식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유위람도 주경도 모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탄금(吞金), 흔히 금을 삼킨다고 말한다. 세간에서 황금이라고 말하는 제련한 금, 혹은 제련하지 않아 불순물이 많은 생금을 먹는 것을 의미한다. 둘 중 어느 쪽을 먹든 즉사하지도 않고 해독약도 없는 고통스러운 자살법이다.

무거운 침묵 속에 일행은 새로운 저택에 도착했다. 조 총관만 왔을 리가 없으니 현서를 알아본 호가의 식솔들이 놀란 얼굴로 맞이했다. 사람의 수는 적지 않았으나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가 저택을 휘감고 있었다.

“조 아저씨, 나는 할아버님과 같이 있을 것이니 준비해 줘요. 그리고 이 두 분이 쉴 곳을 안내해 주시고요.”

현서 역시 쉬어야 하지만 손자가 할아버지를 만나려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조 총관은 호 노대인이 왜 서녕에 돌아오지 않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 더욱 그랬다. 정 의원이 호 노대인의 곁을 지키고 있으니 차라리 현서도 그곳에 있는 것이 나았다.

유위람이 잠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현서를 바라보았으나 아무 말 하지 않고 주경과 함께 하인들을 따라갔다.

“할아버님의 수행인들이 보이지 않네요? 그들은 괜찮나요?”

현서에게 이사가 있는 것처럼 할아버님께도 측근 시종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나이가 많아 은퇴한 지 오래였다. 새로운 이들은 서녕을 떠날 때 들여 그 후로 할아버님의 곁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네, 다행히 큰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없습니다. 혹시 몰라 정 의원 외에도 인근의 의원들을 모셨지요. 그들은 왜 찾으십니까? 하문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부를까요?”

“그것 때문에 물은 것이 아니니 괜찮아요. 오는 길에 불에 탄 저택을 지나왔는데, 워낙 큰 불이라 다른 이들은 괜찮은지 궁금해 물은 것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원락에는 진한 약 냄새가 가득했다. 크지 않은 저택이라 두 분이 각기 다른 건물을 쓰지 않고 한 원락의 동상방과 서상방을 나눠 쓰고 있었다.

현서는 할아버님이 계신 동상방에서 막 나오는 정 의원을 보았다. 현서를 보고 놀란 정 의원이 급히 걸음했다. 쉰을 넘긴 지 오래였으나 현서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 모습은 여전했다. 놀란 것도 잠시, 종종 걸음으로 다가온 정 의원은 현서의 상태부터 살폈다.

“저는 괜찮아요.”

“면경이 있으면 좀 보라고 하고 싶은 몰골을 하고 그런 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맥을 짚은 정 의원은 그렇게 타박하면서도 당장 자리에 누우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인들이 노대인의 방에 현서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누울 수 있는 탑을 들이는 것을 보며 현서와 방으로 들어섰다.

약 냄새로 뒤 덮인 침상에는 열세 살 이후 처음 뵙는 할아버님이 파리한 얼굴로 누워 계셨다. 그간 할아버님이 약에 취해 잠든 현서를 보고 간 적은 있다고 하였으나 그 반대의 일은 없었다.

현서는 독한 약 냄새를 풍기는 할아버님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목숨을 잃지 않았다. 사경을 헤매는 것도 아니다.

옥이 말하길 지금 이 저택의 경비가 대단히 삼엄해 화오궁이나 기암일사가 재차 습격한다고 해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이제 화오궁이 습격할 일은 없을 터였으나 어찌 되었든 다행스러운 얘기였다.

“할아버님의 상세는 어떠합니까?”

“노대인께서는 화재로 부서지는 건물에 깔려 뼈가 부러지고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천만다행인 일로 금방 구조되어 뼈의 손상이 돌이킬 수 없게 나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도착하기 전에 치료를 했던 의원이 적절하게 조치를 하였으니 그 또한 천운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의원을 찾기 어려우니 말입니다. 날이 덥고 연세가 있으시니 회복은 더디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정 의원은 병세를 말할 때 숨겨 말하는 법이 없었다. 현서를 안심시키려고 과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던 현서가 물었다.

“머리를 다치셨거나 연기를 마셔서 정신이 혼몽하시진 않으시고요?”

“예. 보시다시피 얼굴에 상처는 있으나 심한 것은 아닙니다. 멍으로 부어 있으니 통증은 있으나 말씀하시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약도 잘 드시고요. 잠시 기절은 했으나 연기를 오래 마신 것은 아니라 의식도 또렷하십니다. 서녕에서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혼란스러워하는 조 총관과 저희를 일사불란하게 부린 것도 노대인이십니다.”

신농자의 저택에서 원인 모를 큰 화재가 일어나 저택이 무너지고 다친 이들이 속출했다는 것이 유위람에게 들은 얘기였다. 근방에 돌팔이가 아닌 의원이 잘 없어 걱정이라는 얘기도 들어 내색하지 못해도 걱정이 깊었으나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할아버님을 최악의 상태로 만나지 않은 기쁨이 클수록 신농자에 대한 것들이 무거웠다.

“그럼 그분께서는.”

서상방에 있는 신농자의 상태를 묻는 물음이었다. 현서의 질문에 정 의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의원이 살리지 못하는 환자를 두었을 때 가지는 깊은 안타까움이 말에서 묻어났다.

“화상을 입긴 하였지만 그분을 괴롭히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도련님의 표정을 보니 금을 삼켰다는 얘길 이미 들으셨군요. 저희가 알았을 때는 이미 손 쓸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을 줄이는 어떤 방법도 원치 않으십니다. 엄청난 고통일 텐데, 마치 스스로를 벌주려 하는 것처럼 감내하고 계십니다.”

서녕에서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신농자는 화상 치료만을 요할 뿐이었다. 가벼운 화상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치료를 못 할 정도로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정 의원의 치료도 곧잘 받았던 신농자는, 그러나 호 노대인의 상세가 안정되자 곧바로 금을 삼켰다.

금을 삼켜 생기는 고통은 의원이니 누구보다 잘 알았다. 생금을 삼켰으니 산 채로 내장이 썩어들어 가는 고통이 따를 것이다.

“의원으로서 저는 비상이라도 털어 먹이고 싶으나, 그분과 대화를 나눈 노대인께서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그 말이 끝이었다. 허나 충격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신농자가 금을 삼킨 것은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노대인은 치료를 받는 것을 소홀히 하진 않았으나 말을 하지 않았다.

“도련님을 보면 노대인께서도 기운을 차리시겠지요. 참으로 적절한 때에 오셨습니다.”

마음의 병이 깊어지면 몸의 치료에도 영향을 준다. 정 의원을 그것을 경계했기 때문에 현서가 와서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현서를 오래도록 보아 왔던 정 의원이다. 걱정과 피로에 축난 채로 있는 것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호 노대인이 먹은 약에 진통제와 수면제를 같이 넣었기 때문에 아침까지 깨지 않을 것이라 하며 현서도 그만 쉬기를 종용했다. 정 의원은 하인을 불러 현서가 식사를 하고 약을 먹고 시중받는 것을 전부 감독하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

―정 의원의 말이 옳다. 내일 좋은 얼굴로 보려면 이만 잠들어야지.

걱정으로 억지로 버티고 있으나 이제 한계에 달해 쉬어야 한다는 걸 현서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환자가 있는 방이라 등불을 치우지 않아 밝았고, 탑은 등받이가 있어 현서는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할아버님을 볼 수 있었다.

정 의원의 약이 잘 들어 고른 숨을 내쉬는 할아버님을 보며 현서가 말했다.

‘화오궁과 연관된 건 기암일사뿐이었구나.’

―그래.

‘누가 진짜 기암일사인지 모르지만 신농자 어르신은 제자라고 믿었던 이가 자신을 기만한 걸 아셨던 거야, 그래서.’

두려워하던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할아버님의 얼굴을 바라보던 현서의 눈이 가물가물하게 감겼다.

“깊은 절망과 슬픔이 사람을 저렇게 죽이는구나.”

잠에 취해 까무룩 잠들기 전에 현서가 그리 중얼거리는 것을 유위람이 듣고 있었다.

❖ ❖ ❖

“할아버님.”

호익원이 눈을 떴을 본 것은 이 년 만에 만난 손자의 얼굴이었다. 현서의 관례 날 잠든 손자를 몰래 보고 왔으니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왜 여기 있는지를 묻는 대신 손부터 내밀었다. 기운이 좀 더 있었다면 손자를 끌어안았을 터였다.

“아가.”

현서가 할아버지의 손을 맞잡았다.

“소손이 관례를 치른 지 이 년이나 되었는데 아가라니요.”

현서가 발개진 눈으로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잠들지 않은 현서를 본 것은 칠 년만의 일이었다. 말간 얼굴로 약이 없어도 좋으니 할아버님이 서원에 계셨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어린 손자로부터 도망친 이후로 처음이었다.

현서가 관례를 올린 후 아들이 모든 일을 말했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현서와 나눈 대화를 아들은 한마디도 빠짐없이 적어 보냈으나 그것이 호익원의 죄책감을 덜지는 못했다. 죽기 전에 현서를 만날 것이라 막연히 예상은 하였으나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다.

할 말이 무척이나 많았으나 두 조손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눈물이 흘러내지 않게 크게 눈을 깜박인 현서가 말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무서웠는데, 오는 내내 무섭고 또 무서워서. 할아버님이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현서는 고장 난 것처럼 다행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픈 이후로 어른스럽게 군다고 해도 현서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자문원의 기억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할아버님을 걱정하는 두려움을 덜어주지는 못한다. 혹시라도 할아버님이 잘못되었을까 봐 현서의 불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는 걸 알아 무섭다는 말을 입에 올릴 수도 없었다.

이성이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고 하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감싸고 있는 짙은 약 냄새가 아니었다면 덥석 안고는 펑펑 울었을지도 몰랐다.

“정 의원을 부를게요. 할아버님께서 깨어나시면 말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옥과 할아버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 느껴져 현서는 씩씩하게 말했다.

곧 정 의원이 들었다. 익숙하게 노대인의 약을 갈고 차도를 살피면서도 현서에게 식사를 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고 있는 와중에 급히 사람이 들었다.

“서상방에 상주하는 의원이 전하길, 어르신께서 곧 돌아가실 것 같답니다.”

호익원이 깊게 탄식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였으나 그가 서상방에 가는 것을 말릴 수 없었다.

옥이 말해 주어서 현서는 밤새 서상방에 패천검과 주경이 머물렀다는 걸 알았다. 신농자의 하인들이 주경을 알아보았고, 무엇보다 주경이 그간의 인연을 들어 침상을 지켰다. 이제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주경이 호 노대인이 보낸 사람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해진 셈이다.

유위람 역시 주경을 의심해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강호 선배인 신농자에 대한 예의로 곁을 지켰다.

열 명 남짓이 모인 서상방에는 침통한 기색이 가득했다.

“……영아. 어디…….”

내장을 찢어발기고 독이 오르게 하는 생금을 삼키고도 이 정도로 버틴 것이 기적에 가깝다고 했다. 정신을 차릴 때마다 신농자는 드문드문 말을 하였으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호익원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자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찾아주겠네. 걱정 말게.”

무엇을 말하든 신농자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 뻔했으나 거듭 그렇게 말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마치 피눈물 같았다.

입을 달싹이던 신농자는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눈을 감지도 못했다. 호 노대인이 부축을 받아 그 눈을 감겼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화상을 입어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으나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조 총관, 장례 준비를 하게.”

“예.”

만통자에 비견되며 천하에서 아는 것이 가장 많다고 손꼽히던 신농자의 죽음은 그러했다.

현서는 할아버지의 곁에서 죽을 한 숟가락씩 떠 먹여드리며 천천히 그간의 얘기를 했다.

전부를 얘기한 것은 아니나 기암일사에 관한 것은 거의 빠뜨리지 않았다. 영우의 비무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항도에서 기행을 벌여 두 명의 기암일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까지, 그래서 주경을 의심해서 같이 왔다는 얘기도 모두 했다.

“노부가 손자를 대신해 주 대협께 사죄하겠소.”

병상에 기대앉은 호익원이 현서의 부축을 받은 채로 깊게 고개 숙였다. 주경이 급히 다가와 노대인을 잡아 더 숙이지 못하게 말렸다.

“노대인께서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두 알고 있는데 엉뚱한 사람이 사과를 해서 어찌합니까?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더욱이 저를 의심했다고 해도 무례하게 군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주경은 패천검과 현서에게서 이미 사과를 받았다. 상황의 공교로움을 떠올리면 주경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일로 주경이 크게 화를 낸다고 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허나 주경은 무척이나 관대하고도 시원스럽게 문제 삼지 않았다.

“신농자가 용혈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고?”

“네, 우승하지 못하면 부끄러우니 아는 척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했어요.”

“발칙한. 그 사람이 제자에게 그런 소릴 할 리가 없거늘.”

주경이 아는 기암일사와 현서가 아는 기암일사는 다른 사람이지만 두 사람이 한패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신농자의 제자가 아닐 줄은 몰랐다. 제자가 화오궁의 첩자인 것이 아니라 제자를 바꿔치기당했을 줄이야.

“신농자는 젊은 시절 가족을 전부 잃어 이름도 버린 사람이다. 나도 그의 본명을 몰라. 그런 사람이 아들로 여겨 제자로 받은 아이가 영아다.”

신농자가 아들처럼 여긴 제자는 영아라고 불렸다고 했다. 현서는 가짜 기암일사가 밝혔던 사영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사영을 친근히 부르면 영아라고 부를 수도 있다. 기암일사라는 별호나 영아라는 이름은 과연 누구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노대인의 말은 상처로 인해 느리고 끊어지길 반복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신농자와 영아는 무척이나 사이가 돈독한 사제 관계로 친 부자나 다름없었다. 영아는 자라면서 속을 썩이는 일도 없었다. 가끔 스승님께 드린다는 이유로 특이한 물건을 구해 오는 것이 일탈의 전부였다. 용혈도 그렇게 구했다.

현서의 말과 달리 신농자는 용혈을 궁금해 하긴 했으나 제자에게 구해 오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암일사는 비무회에 출전해 우승자가 되어 용혈을 스승님에게 주었다. 신농자가 용혈이 아니라 제자의 성취에 기뻐했음은 당연했다. 입이 귀에 걸린 채 하루에도 몇 번씩 자랑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아의 행동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와보니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고 하는 쪽이 옳았다.

자식들과 손자들이 있는 호익원은 얌전한 아이들도 사고를 치는 시기가 있다며 다독였다. 가장 귀애하는 손자인 현서도 아프기 전엔 눈을 뗄 수 없는 사고뭉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영아가 사문의 일로 호익원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들은 뒤로 신농자는 부쩍 불안해 했다.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달싹이길 여러 번이었으나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후 영아가 돌아왔다. 두 사제 간의 대화가 잘 풀리길 바라며 호익원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무척이나 정이 도타운 사제지간이니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허나 호익원이 보게 된 것은 화재였다.

“급히 가보니 영아는 보이지 않았고 비명을 지르는 그 사람만 있었지. 불이 났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단다.”

신농자가 있던 서재 건물의 서까래가 무너지는 바람에 호익원이 깔리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두 사람 다 무사히 구출되었다. 불도 저택을 넘지 않았고 서녕과의 연락도 재빨리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친구는 그때 이미 죽었던 게지.”

부상을 입으며 정신을 잃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바로 묻지 못했다. 그것을 깊이 후회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본인도 화상을 입었으나 신농자는 서녕에서 사람이 오고 호익원이 괜찮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금을 삼켰다는 얘기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농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식을 잃은 부모가 내는 비탄이었다. 화재가 일었던 그날, 신농자는 영아를 영원히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살아만 있다면 영아가 마두가 되었어도 신농자는 그 편을 들었을 것이다.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끝까지 그 아이의 곁을 지켜주었겠지.”

신농자가 무엇을 견디지 못했는지, 무엇이 스스로를 고통 속에 놓게 했는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벌주듯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속은 건 문제가 아니었다. 목숨보다 귀히 여긴 제자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끔찍해서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비가, 스승이 아무것도 모르고 가짜에게 웃어주며 가르치고 아낀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 신농자를 미치게 했다.

호익원의 약속은 그것이었다. 천하를 뒤져서라도 진짜 영아의 시신을 찾아주겠노라고. 시신을 찾지 못한다면 시신이 버려진 곳이라도 찾아야 했다.

음울한 침묵과 무거운 애도로 호익원의 말이 끝났음에도 모두들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칼로 찔러야만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야.”

호익원이 탄식했다. 깊은 절망이나 슬픔도 사람을 죽인다.

―놈들이 신농자에게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은 모양이구나.

옥이 말하길 진짜 영아가 몇 살에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바꿔치기를 하려고 했다면 스무 살은 족히 지난 후일 거라 했다. 얼굴의 형태를 바꾸는 역용술(易容術)이나 키나 덩치를 숨기는 축골공(縮骨功), 아니면 정교한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썼다고 해도 근골이 다 자란 성인이 아니면 바꿔치기할 수가 없다. 더욱이 어릴수록 신농자가 볼 시간이 많을 테니 금세 들키게 된다.

언제 바꿔치기를 했는지는 모르나 고작 일, 이 년 전의 일은 아닐 것이다. 제자를 깊이 아꼈으니 아는 것을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을 테지. 그리고 쓸모가 다하자 착한 제자로 남는 것을 그만두었다.

‘기암일사가 두 번 말하지 않았던 것은 정말로 할아버님의 일이 어찌 되든 상관없어서였구나.’

자신의 추측이 맞았으나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신농자의 가짜 제자로 지내는 것이 목적이었고, 호 노대인의 일은 덤과 같은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생사를 몰라 현서가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좋고, 할아버지가 죽어서 괴롭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어느 쪽이든 현서를 괴롭힌다는 점에서는 사영이 손해 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유리를 깎아 만든 것 같은 그 얼굴은 호현서는 물론이고 현서가 아는 자문원의 인생에도 없었다. 옥의 기억에도 없었다. 이 악의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현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현서는 쭉 노대인의 곁에 머물렀다. 신농자의 가솔들과 주경, 그리고 패천검이 빈소를 지켰다. 널리 소식을 알리지 못했으나 근처에서 오는 조문객들도 있었다.

호익원은 첫날 빈소에서 한 시진(2시간)을 버틴 끝에 실신했다. 정 의원이 더 고집을 피우면 낫지 않는다고 강하게 말해 빈소와 가까운 곳에서 정양하기로 했다. 현서의 몸 상태로도 종일 자리를 지킬 수 없어 매일 빈소에 가 절을 하고 향을 피운 뒤 호 노대인에게 갔다.

할아버지의 수발을 들며 현서는 여러 가지를 얘기했다. 하지만 그중에 현서의 혼사로 벌어진 일은 없었다. 할아버지가 모를 리 없으나 두 사람 중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가끔 호 노대인이 현서의 손을 잡고 물끄러미 볼 때가 있었으나 속엣말을 하는 일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할아버지가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것은 현서가 말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색하진 않았다. 현서는 위험했던 일은 쏙 빼고 양주를 떠나 항도에 가기까지의 재미있는 일만을 말했다. 현서의 말만 들으면 즐거운 강호 유람기였다. 서녕을 떠나 본 것들은 현서가 대부분 처음 겪는 일이라 과장할 것도 없었다.

듣다 보니 호익원은 현서의 얘기에 패천검 유위람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우에서 열린 비무회 때문에, 패천검 유위람을 비롯해 강호 유명인사와 인연이 생겼다는 얘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으나 호익원의 예상보다 더 친근한 사이로 보였다.

현서를 치료해 주었던 소의선 화정이 그들 사이에 있어 그런 모양이라고 어림짐작했다. 더욱이 호익원이 보기에 손자인 현서는 어딜 내어놓아도 모자람 없는 아이라 일견 당연해 보였다.

“패천검의 위명은 익히 들었지만 과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듣던 것보다 훨씬 헌앙하고 기세가 좋은 젊은이더구나.”

현서에겐 열한 살 많은 무림 명숙이지만 할아버님께는 젊은이였다. 그게 재미있어서 현서는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옥은 부아가 나 마음 같아선 호익원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고 싶었으나, 호익원은 어차피 옥의 말을 못 듣는다. 더욱이 상심한 할아버지의 심경을 생각해 일부러 즐거운 얘기를 하는데 옥이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옥은 자신이 화병이 생긴 최초의 옥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 배분이 높다고 해서 어려운 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무척 친절하고 다정한 분이셨어요.”

“뛰어난 실력에 성품도 좋다니 검각, 아니, 무림의 홍복이구나.”

할아버님이 패천검을 칭찬하자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좋았다. 화용까지 오는 내내 패천검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고 말하려는 현서의 머릿속에 그날의 고백이 불쑥 튀어나왔다.

‘지금은 제가 호 공자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됩니다.’

마치 유위람이 귀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서가 놀란 새처럼 파드득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러느냐? 어디가 안 좋은 것이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현서는 너무 달아서 어찔했던 그 목소리와 고백을 다시 꾸물꾸물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놓았다. 이 고백에 대해 깊이 고민할 때가 올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미루어둔 일에는 때론 이자가 붙기도 한다는 걸 현서는 알았어야 했다. 상인 집안의 자손으로서 큰 실책이 아닐 수가 없었다.

❖ ❖ ❖

장례가 끝이 났다. 신농자의 관은 깊은 땅속에 묻혀 이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사십구재가 끝이 나면 서녕으로 돌아갈 것이다. 정 선생도 괜찮다고 하더구나.”

침상에 엎드려 있는 현서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호익원이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나약해 오랜 시간 동안 네게 부끄러운 일을 하였어.”

“할아버님은 그런 적 없으세요.”

현서가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잡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고로 현서가 독을 먹었을 뿐이지 원래 독을 먹이려고 했던 대상은 할아버지였다. 평생의 가족이요. 친구이자 은인인 호익종과 교막선에 대한 깊은 신의와 애정을 배신한 것은 그들의 자식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고통은 오롯이 할아버님의 몫으로만 남아야 하는가. 배은망덕한 치들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뻔뻔히 살아가는데.

현서는 그것이 너무도 싫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나 다른 가족들이 자신에게 미안해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앞으로 절대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할아버지이, 약속해 주세요. 예? 네?”

현서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아이처럼 보채며 말했다. 아무리 어른스럽게 말해도 할아버님의 눈에는 어린 손자일 뿐이니 이렇게 조르는 것이 나았다. 아홉 살 이후로는 할아버님께 이렇게 굴어본 적 없지만 현서는 이 방법이 가장 좋다는 걸 알았다.

“그래, 알았다. 앞으론 그리 말하지 않으마.”

착한 손자가 끔찍한 독을 먹었음에도 자신부터 다독이는 것에 호익원은 금세 바라는 약속을 해주었다. 호익원의 말을 들은 현서는 다시 침상에 고개만 뉘어 할아버지의 손을 주물러드리며 말했다.

“할아버님이 호부로 돌아오시는 건 좋아요. 만희당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늘었거든요. 분명 할아버님도 좋아하실 거라 자신해요. 소손이 전부 구경시켜 드릴게요. 하지만 할아버님께 조금이라도 주저함이 남아 있다면 안 오시는 게 옳아요.”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았다면,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약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못 박았다. 사고를 몰고 다녀 시녀든 시종이든 주렁주렁 달고 다녔던 손자가 이렇게 의젓하게 자라기까지 그 시절을 눈에 넣지 못한 것을 호익원은 다시금 안타까워했다.

“그게 아니란다. 어떤 일들은 그에 맞는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뿐이지.”

이 나이가 되어서도 깨달을 것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구나. 그렇게 덧붙였다. 신농자의 죽음이 할아버님의 뜻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 같았다. 할아버님의 결심이 굳건하니 현서가 더 말릴 일은 없었다. 그저 할아버님이 무엇을 하시든 많이 슬프진 않았으면 했다.

“할아비가 돌아가 집을 다 치워놓을 테니 즐겁게 여행하다 기쁘게 돌아오너라.”

“네.”

호익원이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았다면 절대로 현서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대신 현서를 품 안에 꼭 끼고 있다 집에 같이 데리고 돌아갔을 터였다. 아들도 손자도 걱정할까 봐 자세한 사정을 말해 놓지 않아 호익원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 ❖ ❖

화오궁의 술수가 어떠하든 수하들이 화수분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니 이곳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미 모든 계략이 끝이 났으니 기암일사가 돌아올 일도 없다.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현서는 떠나기 전날까지 부지런히 확인했다. 옥이 보증하고 패천검이 물샐 틈 없는 호위로 짜여 있다는 것을 확답해 주고서야 안심했다.

조 총관에게 부탁해 등에 점이나 꽃무늬를 이루는 점이 있는 자가 있는지도 살폈다. 서녕에 도착하면 할아버님도 알게 될 일이다. 현서는 할아버님께 비밀로 하라며 조 총관에게 항도 호가 상단에서 있었던 습격에 대해 말했다.

새파랗게 질린 조 총관이 개미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색출했으나 걸리는 자가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화용을 떠나는 전날이 되었다. 호 노대인, 현서, 패천검과 주경이 식사 후 한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주 대협은 어찌 하겠나? 이곳에 남겠다면 나와 같이 서녕에 가지 않겠나?”

오해까지 받게 했으니 현서의 호위를 계속 부탁할 수는 없다고 호익원이 말했다. 그에 주경이 자신은 그 일을 마음에 두지 않지만, 그렇다면 신농자의 진짜 제자를 찾는 일을 돕고 싶다고 했다.

“임종까지 지킨 분이 그런 무정한 죽음에 이르렀는데 어찌 돕지 않겠습니까.”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일이나 단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범인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두 명의 기암일사 중 어느 쪽이든 찾아서 실토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현서에게 악의가 있으니 재차 현서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았다. 호 노대인은 주경이 현서와 같이 항도로 되돌아가는 것을, 기암일사들의 행적이 끊어진 곳이 항도여서라고 여겨 이상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경이 여전히 일행이라는 얘기에 슬쩍 미간을 찡그렸던 유위람은 언제 그랬냐는 얼굴로 예의 바르게 물었다.

“호 노대인께서는 고인께서 최근까지 하시던 연구가 무엇인지, 혹시 아시는지요.”

신농자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면 노린 것은 그의 지식일 것이 뻔했다. 제자로 위장하고 지냈으니 대부분의 지식을 전수받았겠지만 그중에서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을 터였다.

유위람의 물음에 노대인이 기억을 더듬었다. 신농자와는 만날 때마다 다양한 얘길 나누긴 하였으나 노대인이 화용에 머무를 때는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볼 때마다 연구하는 것이 늘 바뀌곤 했지. 무인이 무공 성취에 욕심을 두듯 그이는 지식욕이 강했거든.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요 몇 년간은 진법에 관한 연구를 했다네.”

“어떤 진법인지 아십니까?”

“아니. 그건 잘 모르네.”

호익원은 뛰어난 상인이지만 진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연구에 관한 깊은 대화는 하지 않았다. 저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던 신농자의 서재가 전부 소실되어 버려 남은 무언가를 찾기도 어려웠다.

갈비뼈의 아픔 때문에 잠시 숨을 고르던 노대인이 사람을 불렀다. 얼마 후 하인이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 같은 자개함을 하나 가지고 왔다. 그을음이 떨어지지 않아 지저분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열어보아라.”

노대인의 말에 현서가 자개함을 열자 나온 것은 정체 모를 물건이었다. 금속으로 만든 동글납작한 것으로 용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할아버님, 이게 무엇인가요?”

“신농자가 내게 준 물건이란다. 팔만구(八慢球)라고 하더구나. 패천검에게 주련?”

패천검이 팔만구를 쥐자 호 노대인이 말했다.

“가운데 조그마한 홈이 만져지면 거기에 내력을 불어넣어 볼 수 있겠소?”

“네, 가능합니다.”

내력을 주입해야 움직이는 기물은 귀한 것이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것을 본 적 있는 유위람이 적당히 내력을 주입하자 팔만구라는 물건이 살아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볼록이며 움직이더니 곧 동그란 구체로 변했다. 납작한데 왜 구라는 이름이 붙었나 했더니 이 때문인 모양이었다.

듬성듬성 구멍이 난 구체를 등불 곁에 가져오라 했다. 유위람이 순순히 시킨 대로 하자 팔만구 너머로 그림자가 생겼다.

“야명주 불빛 아래서 보는 것이 가장 또렷하게 보인다고 하더구나. 나도 이렇게 보는 것은 처음이란다. 장난삼아 만든 장난감이니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손자나 증손자에게 선물로 주라고 하며 주었지. 이제 보니 장난감이 아닌 것 같구나. 이 정도로 불안해 했을 줄은.”

노대인의 목소리가 쓰디썼다. 누구도 바로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은 노대인의 말에 깊게 드리운 슬픔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 명 모두 비슷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시체의 등에 있던 그것과 비슷해 보여.’

―내 눈에도 그러하구나.

주입된 내력이 사라지자 팔만구는 이전의 납작한 모양으로 돌아갔다. 현서는 잠시의 고민 뒤에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신농자 어르신께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비법을 연구하셨다는 얘길 하신 적은 없나요?”

현서의 물음이 의외라 노대인은 손자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젊은 시절 가족을 모두 잃고 자포자기에 빠져 금술(禁術)에 심취한 적이 있다고 했으나 그것들을 바깥으로 끌고 나온 적은 없다고 했단다.”

“혹시 그것을 제자에게 가르쳤을까요?”

“영아를 자신이 이룬 일가를 물려받는 제자가 아니라 아들로 여겼던 그이다. 자식에게 그런 것을 가르칠 사람이 아니야.”

슬픔과 복수에 눈이 멀어 사람이길 포기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신농자는 본시 모질지 못한 사람이었다. 복수를 위해 지냈던 시간들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나, 어린아이를 기르다 보니 다시 그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은 알겠다고 말했다. 만약 제자가 졸랐다고 해도 제자를 귀애하기 때문에 더더욱 알려 줬을 리가 없었다.

한 번에 너무 말을 많이 하는 바람에 지친 노대인에게 더 이상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 노대인은 쉬어야 했고 아침이 되면 화용을 떠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노대인의 방에서 잠을 자는 현서를 빼고 나머지 두 사람은 물러났다. 팔만구는 여전히 유위람의 손에 있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 ❖ ❖

화용을 떠나 항도로 돌아가는 길에는 잠들지 않았다. 화정이 지은 것이긴 하지만 억지로 사람을 재우고 깨우는 약이니 장복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현서가 깨어 있고 서두를 이유도 없어졌으니 산을 질러가는 행로를 고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느리게 이동하는 것도 아니었으나 노숙을 하는 일은 없었다.

화용을 떠난 지 엿새가 되어 제법 큰 현에 도착하자 주경이 며칠 정도 머물자고 말했다. 마침 전서구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라 유위람도 찬성했다. 지금 머무는 객잔은 제법 좋은 곳이었는데 남은 방이 큰 객청을 둔 별채뿐이라 그곳을 빌렸다.

짐을 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경이 자리를 비운다고 말해 왔다. 현서의 호위였을 때 주경은 그 직분에 충실해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허나 이제 주경은 호위가 아니라 기암일사의 뒤를 쫓는 일행이 되었으니 단독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했다.

여전히 비밀이 많은 사내였으나 그를 보증한 것이 호 노대인이었다. 더 이상의 추궁은 무의미한 일이다.

악인이 아니어도 사정이 있어 사문이나 내력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강호에 허다하다는 걸 현서도 유위람도 안다. 항도에서 의심을 받을 때에도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사문 몰래 움직이거나 사문과 좋지 않게 헤어졌거나 하는 일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비밀이 있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주경은 성격이 좋았다. 평범한 강호인도 체면을 구겼다고 화를 낼 일들을 시원시원하게 넘어가 주었다. 현서는 고마움을 잊지 않고 서녕으로 돌아가게 되면 주경을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님은 물론이고 어린 조카들도 주경을 반겨줄 터였다.

일찍 잠이 든 탓인지 어중간한 때에 잠이 깨버렸다. 옥이 조금 전 삼경(三更: 밤 23시-1시)을 알리는 딱따기 소리가 났다고 했다. 창에 내려진 휘장을 걷어보니 별채 정원에 등이 켜진 것이 보였다.

‘주 대협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끄지 않은 건가?’

무슨 이유든 현서에겐 나쁘지 않았다. 현서는 침의만 입은 채 방문을 열었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피아 식별을 편하게 하려고 밤이 되면 부러 객잔의 하인들을 전부 물려두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이 객잔에서 가장 비싼 곳이라 비어 있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뜰도 세심하게 잘 만들어두었다.

화용을 떠난 후로 현서는 옥과 수련에 매진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수련을 하고 객잔에 도착하면 금방 잠이 들었다. 화정과 정 의원이 칭찬할 만한 규칙적이고 바람직한 생활 중이었지만 그 때문에 상념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반쯤은 옥이 의도한 일이었다.

천천히 뜰을 돌던 현서가 불쑥 물었다.

‘곽다순은 자문원을 살려 뭘 하고 싶은 걸까?’

현서가 너무 많은 근심과 걱정에 매몰될까 봐 적당히 대화하고 다시 재워야겠다고 계획하고 있던 옥은 예상 못 한 주제에 조금 놀랐다. 옥의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닌지 현서는 이어 말했다.

‘되살아난 자문원에게 용서를 구하려는 걸까?’

자문원이 그렇게나 심하게 쫓겨 다닌 것은 배신자들이 필사적인 것도 있었지만 자문원과 곽다순만 알고 있던 경로를 들킨 탓이 더 컸다. 어떤 일이 있었던 간에 오직 곽다순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정보였다.

자문원은 당연히 그 사실을 알았으나 곽다순을 크게 원망하지 않았다. 더욱이 현서가 아는 자문원이라면 바라는 말을 해줄 수도 있겠지. 곽다순은 그의 오랜 친구였으니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터.

‘용서를 빌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미쳐 버린 건지도 모르겠네.’

현서의 말은 적당히 맞았지만 적당히 맞지 않기도 했다. 옥도 그날 곽다순을 같이 보았으니 말이다. 광기를 머금은 곽다순의 눈에 있는 건 후회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옥은 말하지 않았다. 현서가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사실 이해도 잘 못 할 것이 뻔했다.

“여름이라도 해도 침의만 입고 나오면 안 됩니다.”

잠시 전부터 유위람이 덮을 것을 들고 서 있는 것을 알아, 그만 자러 가자고 방으로 등 떠밀려고 했던 옥은 한 발 늦은 것을 깨닫고는 혀를 찼다.

“감사합니다.”

현서가 겉옷을 여미며 감사를 표했다. 유위람은 할 일을 끝내고 보니 현서가 뜰에 있는 것이 보여 나왔다는 입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을 술술 한 다음에 물었다.

“그런데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습니까?”

옥 님과 대화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걸음이 멈춘 것이 상량하는 중으로 보였다고 덧붙였다.

“고민이라고 할 것까진 아닌데, 곽다순 그분이 왜 검선을 되살리고 싶어 하는지를 짐작해 보는 중이었어요.”

유위람도 현서의 말이 예상 외였는지 잠시 멈칫했다.

“못 다 이룬 일을 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남아 있는 미련 같은 것 말입니다.”

유위람은 곽다순의 눈을 뒤덮은 것이 연심이라고 인정해 줄 뜻은 조금도 없었으나, 그것이 단순히 친우를 향한 마음은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미련이라.”

현서가 중얼거렸다. 유위람은 현서가 곽다순의 잘못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현서는 곽다순이 미쳐 영우곽가의 사람들을 도륙 낸 것을 몰랐다. 그 때문에 서로의 말이 애매하게 두리뭉실해졌다.

곽다순의 비틀림을 현서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늦어갈 곳이 없어진 애정이 쌓이다 못해 집착이 되어, 사람을 미치게 만든 폭력적인 감정이다. 따지고 보면 현서가 그런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현서와 나누고 싶은 감정들은 저런 것이 아니니 말이다.

“되살아난 검선을 만나 미련이 해결되면 그 다음은 어찌 되는 걸까요?”

“글쎄요.”

유위람은 그 집착에 끝이라는 것이 있을 것 같지 않아 말을 흐렸다. 그러나 곽다순이 용서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라 여긴 현서는 그 다음을 떠올렸다.

되살려놓고 용서를 구하고 그 다음에는? 되살아난 검선은 개웅산에서 끝이 났던 자문원의 인생을 계속 이어 살게 되는 건가? 그럼, 나는 자문원을 대신해 제자를 키우지 않아도 되나? 그것보다 자문원이 되살아나면, 그의 환생인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흘러가는 생각이 점점 중구난방이 되어가는 것을 현서는 깨닫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검선은 자신이 되살아나는 것을 원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어째서요?”

“이 부인의 고사를 아십니까?”

유위람의 말에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혼향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다.

월나라 염공이 총애하던 이 부인이 죽자 시름에 잠겨 반혼향을 만들었는데, 오색구름이 깔리며 나타난 이 부인의 혼백이 섧게 울다 크게 꾸짖으며 부르지 말라고 세 번 외친 뒤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이 얘기를 반혼향의 성공을 말하기 위해 가져다 썼으나 사실 망자를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교훈을 담은 고사였다.

“흩어진 혼백도 그리 화를 내는데, 망자가 되살아난다면 더 크게 화를 내겠지요.”

물론 살아난다면 말입니다. 유위람이 덧붙인 말에 현서는 생각이 너무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곽다순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술을 끌어다 써 천하를 피에 잠기게 만든다 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문원의 혼은 이미 호현서가 되어 벌써 스무 해를 살고 있지 않은가.

“제가 너무 바보 같았네요.”

―잠을 덜 자서 그렇다. 이만 자러 가자꾸나.

평소라면 헛소리를 한다고 타박했을 옥도 별말 없이 자자고만 할 뿐이었다. 유위람이 현서에게 손을 뻗어 안아 들고는 눈을 맞춰 왔다.

“호 공자가 바보 같은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탓입니다. 화용에 도착하기 전에는 노대인을 걱정해서라고 여겼는데, 화용을 떠나고서도 종종 표정이 어두워지더군요.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유위람이 현서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

“무엇이 호 공자의 마음을 그리 무겁게 합니까?”

현서는 입을 벌리려다 다물었다. 두 사람의 숨이 섞이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지금의 현서는 민망함 대신에 패천검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만 여겼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현서가 그렇게 말하면 패천검은 더 캐묻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서는 그러지 않았다. 한숨의 무게가 다른 것을 알아챈 사람에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직 옥에게도 말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제 옥도 듣겠지. 말은 하겠지만 그사이 얼굴을 보는 건 자신이 없었다. 현서는 고개를 슬쩍 틀어 패천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한껏 숨을 들이마시자 뜰에 피어 있는 여름 꽃향기 사이로 낯선 냄새가 끼어들었다. 패천검의 살내음이었다.

“항도에서부터 알고 있었어요. 만약 신농자 어르신께 변고가 생긴다면 할아버님이 무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요.”

기암일사가 노린 것이 신농자라면 할아버님은 목표가 아니게 되니까. 그렇다고 신농자에게 변고가 생기길 바란 것은 맹세코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서는 모든 가정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았다. 신농자의 일과는 별개로 할아버님의 생사를 손바닥에 가려진 동전처럼 만든 것에는 자신을 향한 악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기 때문에.

“화오궁이 미치광이 소굴이라 해도 의도가 전무할 리는 없어요. 곽가의 그분과 손을 잡은 것은 어떤 부분에선 화오궁의 흥미나 목적, 혹은 이득이 겹친다는 뜻일 테지요. 저는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생각했었는데…….”

차근차근 말하는데도 숨이 막히는지 현서는 가끔 말을 멈추고 헐떡이는 숨을 골라야 했다. 유위람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듣기만 하며 숨을 편히 쉬게 등을 쓸어주기만 했다.

“곽다순, 그분이 제게 와 말했어요. 듣고 싶은 말이 있다고. 기암일사는 제게 악의가 있음을 숨기지 않았죠. 만약 그 둘을 엮는 공통점이 나라면.”

현서가 자문원의 환생임을 알고 있는 옥은 그 말을 좀 더 또렷하게 이해했다. 곽다순은 자문원을 놓지 못했고, 기암일사는 현서에게 영문 모를 악의를 가졌다. 자문원이든 호현서든 저 둘을 엮는 공통점은 결국 한 사람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무서워요.”

참았던 숨을 내뱉는 것처럼 격양되게 말을 쏟아 냈던 현서는 탈진해 버려 완전히 유위람에게 기댔다. 그들이 현서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놓을 수 없는 것이라면 주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현서에게서 무언가를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많은 죽음과 음모에 현서를 끼워 넣었다. 현서가 느낀 것은 공포였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두려움에 짓눌려 어찌할 바를 몰라 했을 터였다. 더욱이 현서는 몸이 약해 이제까지의 대부분을 호부 안에서만 지내며 귀히 자란 사람이었다.

이대로 노대인과 호가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호가는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현서를 보호할 것이다. 하지만 현서는 그러지 않았다. 무서워하면서도 계속 고민하고 움직이려고 했다.

부드럽지만 꺾이지 않는 이 심지를 유위람은 늘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품에 안은 현서를 다독이며 유위람이 천천히 걸었다.

“제가 계속 호 공자의 곁에 있을 테니 괜찮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든 다 괜찮습니다. 무서워 마세요.”

곽다순도, 기암일사도 다 죽여줄 테니. 마지막 말은 입 안에 넣은 채 유위람은 현서가 잠이 들 때까지 뜰을 돌았다. 풀벌레 소리와 여름 꽃향기가 가득한 정원을 걷던 유위람이 담장을 바라보았다.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을 한 주경이 거기 있었다. 이 꼴을 안 보려고 호위를 그만두었던 주경이 진저리를 치며 조용히 담 너머로 사라졌다. 술을 마시려는지 객잔 대청으로 향하는 것까지 살핀 뒤 유위람은 기감을 거두었다.

마침 현서가 완전히 잠이 든 것이다. 유위람이 꼼꼼하게 현서의 잠자리를 봐주었으나 옥은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유연천리(有緣千里)> 4권에서 계속 

LUST 유연천리(有緣千里)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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