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十章. 어떤 비극들 (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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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천리(有緣千里) 4권

황묘

目次

十章. 어떤 비극들 (2)

十一章. 신농자의 유산

十二章.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고 (1)

十章. 어떤 비극들 (2)

현서는 아직 깨지 않았다. 며칠 머무를 예정이니 푹 쉬게 부러 깨우지 않고 두었다.

뜰 그늘에 자리를 마련한 유위람은 기름종이를 펼쳐 두고 과자를 싸기 시작했다. 현서와 자신의 소매에 넣어둘 간식들이었다. 자리를 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점소이에게 웃돈을 주고 가장 유명한 곳의 간식들을 사 오게 했다.

항도에서 이사가 챙겨준 것들은 이미 바닥이 난 지 오래였고, 화용에서는 정신이 없었다. 유위람도 정 의원과 증보판에 대한 얘길 나눈 것이 전부였다. 이사가 있었다면 달랐을 것을 유위람은 인정했다. 어쨌든 이곳에 머무는 동안 과자를 챙길 여력이 생겼으니 다행인 셈이다.

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과자를 싸고 있었지만 유위람의 정신은 방 안에 있는 현서에게 몰려 있었다.

사실 유위람은 현서의 두려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강한 무공을 가진 이가 노리고 있다는 공포라면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서녕호가의 직계자손이 힘이 없다고 말하면 천하가 항의할 일이나 강호에는 그런 일도 있다. 부처든 황족이든 냅다 목부터 잘라버리려고 하는 놈들에겐 현서는 깃털인형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현서의 두려움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사에게 강호인은 무서우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일이 생기면 화를 냈다. 유위람은 보물에 관한 소문이 났을 때와 항도에서 공격당한 다음을 떠올렸다. 현서는 서녕호가의 이름 뒤에 숨는 대신 호가의 이름을 휘둘러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저 무도한 살인들이 자신 때문이라고 책망했다면 달래기에 앞서 엄준하게 부정한 다음 매일 밤마다 곁에서 현서의 책임이라 아니라 읊어줄 의향이 가득했으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렵군.’

유위람은 뼛속까지 무림인이다. 물론 자문원도 그러했으나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유위람은 자문원에게 없는 오만함과 잔인함이 있었다.

스승들은 그가 훌륭한 대마두감이라고 말하곤 했다. 검각이 오래된 정파고 어렸을 때 검선을 만나 그나마 패천이라는 별호로 갈무리되었지, 난세였다면 이미 스스로를 패왕이라고 칭제한 뒤 나라를 갈라먹었을 종자라고 왕왕 흉을 보기도 했다. 유위람이 듣기에도 틀린 것은 아니라 딱히 험담으로도 느끼지 않은 말이었다.

어쨌든 철서에 있던 장원의 담을 넘었을 때부터 화오궁은 자신의 적이었다. 거기에 곽다순이나 기암일사가 하나나 둘, 더 붙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 불안을 이해하지 못해도 유위람은 현서의 감정 변화에는 예민했다. 울진 않았으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며 깊게 상심하게 만들었으니 사지를 찢어 죽일 이유가 차고 넘쳤다.

“과자 부서집니다.”

주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지막 과자의 귀퉁이가 부서졌다. 이런 것을 현서에게 줄 수는 없지. 유위람은 부서진 과자를 슥 밀었다.

“드시겠습니까? 모양은 이래도 맛은 좋을…….”

“안 먹습니다.”

주경이 잘라 말했다. 뜰에서 대화하자고 해서 왔더니 유위람이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과자를 싸고 있었다. 상념에 빠져 사람이 온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더니 곧 기분 나쁜 얼굴로 과자를 부수는 게 아닌가.

주경은 현서의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고, 또한 신농자의 제자를 찾는 일도 최선을 다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과 패천검은 상성이 안 좋았다. 앞으로도 온갖 걸 다 보겠구나 싶어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호 공자가 뱃길을 따라 수부들을 통해 낸 소문이 주효했습니다.”

돈을 아낌없이 뿌린 덕도 있으나 여러 곳을 오가는 수부들이 공통적으로 입에 올리는 소문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 덕에 재미있는 얘길 들었죠.”

주경은 객잔 밖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정보를 다루는 것은 정우문만 하는 일은 아니다. 거지들의 문파인 개방(丐幫), 기녀, 건달, 노름꾼들의 문파인 하오문(下午門) 역시 정보를 모으는 강호 세력이었다.

정우문이 특정 정보를 사고파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면 이들은 세상의 모든 뜬소문과 뒷소문을 모으고 옮기는 이들이었다. 천하에 천자가 없는 곳은 있어도 거지나 기녀, 건달들이 없는 곳은 없으니 말이다.

허나 각 세력의 특성상 고강한 무위를 지닌 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백양교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인신 공양은 백양교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힘없고 약한 자들이 가장 먼저 희생을 당했다. 건달, 거지, 고아, 기녀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갔다. 사람들이 이상을 눈치챘을 때는 화전민 마을이나 산 아래의 외진 마을들도 사라진 후였다.

백양교의 발호가 가장 극심했던 곳은 난주, 복주, 담주, 양주였다. 난주의 영우곽가가 천의맹주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저 네 지역의 개방과 하오문도들은 대다수가 죽임을 당했거나 도망쳐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천하에 사람이 있는 한 거지나 기녀, 왈패 등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으니 개방과 하오문도 천천히 수복되고 있었다. 사문의 절기나 구전이 이어지지 못해 맥이 끊어진 무공들도 있었으나 소문을 듣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첩자를 구분하는 법을 들었는데 찾아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경의 말에 유위람이 맞장구를 쳤다.

“천하의 머저리나 내일모레 등선할 만한 성인군자만이 하지 않을 일이지요. 그러나 현 강호에 성인군자가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하였으니 머저리 빼고는 다 해보았겠군요.”

“그렇습니다. 대단한 준비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등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라 간단하니 더 손쉽지요.”

뜬소문이라 여기며 반신반의하던 이들이 등에 점을 발견해 버리자 소문은 더욱 부풀어 날개를 달고 퍼져 나갔다.

“점이 있는 이들을 추궁하였더니 자살을 하거나 도망을 갔다고 하더군요.”

그야말로 대문짝만 하게 첩자였다고 써 붙인 꼴이다.

“등 뒤에 점,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군. 과연.”

유위람이 재밌어했다. 알고 한 것은 아니겠으나 현서가 제법 크게 한 방 먹인 셈이다. 그저 비밀 단체의 결속을 위한 증표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정우문 소문주가 말한 금제의 증거였던 모양이다. 유위람은 품 안에 있는 팔만구와 현서를 노렸던 시체 등에 있던 진을 떠올렸다. 빨리 이 팔만구를 삼중에게 보여야 할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따로 떠보았는데 점의 수가 늘어도 특정 모양을 이루는 경우에 관한 소문은 없다고 하더군요. 되레 그런 것도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 처음 듣는 것 같았습니다. 점이 움직였다거나 어린아이 머리통만큼 커졌다 하는 헛소문들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호가에서 찾아낸 납치 사건의 중간책은 목 없는 시체였으나 그 등에는 작은 꽃잎을 이루는 점이 있었다. 호가가 화오궁을 바로 특정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화오궁이 공동의 적이 되면서 유위람은 정우문에게서 들은 정보들을 공유했다. 주경이 대놓고 비밀이 있다고 티를 내었으나 화오궁의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또한, 주경은 점 얘기를 들었을 때 등을 까 보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꽃잎이 아니라 점이니 꼬리겠으나, 그 꼬리들을 전부 들키고 있는 셈이니 약이 오르겠죠.”

화오궁에는 본산이 없다는 정우문 소문주의 얘기에 덧붙여, 핏물로 변하는 자객을 보았다. 진즉에 화오궁이 제자나 궁의 일원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쓰기 편한 소모품을 만들어 낸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허나 아무리 소모품이라 해도 샘물처럼 퐁퐁 솟아나는 것이 아니고 점을 숨길 수 없으니 이제 어딘가에 숨어들어 지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칠암문처럼 방파 하나가 전부 장악당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 역시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이 들어요. 막대하게요.’

항도를 떠나기 전에 현서가 한 말이다. 세뇌든 회유든 사람 하나를 온전하게 부리려면 돈이 든다. 뛰어난 자객을 한 명 만드는 데 드는 돈이 과거 합격자 한 명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여기저기 뿌려놓은 첩자들이 들킨 것도, 이제 같은 방법을 쓰지 못하는 것도 뼈아픈 일이 될 것이다.

주경의 말을 이해한 유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서구가 도착하면 바로 출발을 하려고 했는데. 일정이 좀 바뀔 수도 있겠군요.”

“뱀의 꼬리가 숨은 수풀을 들쑤셔 놓았으니 몸통이든 머리든 곧 튀어나올 겁니다.”

“뭐가 나올지 기대가 되는군요.”

두 사람이 사이좋게 하하 호호 웃었다. 서로가 상성이 안 맞는다고 여기면서도 음모를 꾸미는 악당처럼 웃는 것은 죽이 맞아 보였다.

❖ ❖ ❖

유위람과 주경이 뜰에서 킬킬거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서가 눈을 떴다. 얇은 여름 이불을 돌돌 말고 끙끙거리는 것이 숙취에 시달리는 주정뱅이의 모양새였으나 기실은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중이었다.

자문원의 기억이 있다고 해도 현서의 세계는 거기서 거기였다. 애지중지하는 가족들, 자주 보진 못하지만 사이좋은 한 줌이 겨우 되는 친구들, 형제처럼 붙어 있던 이사가 있었지만 이제껏 현서가 속엣말을 한 상대는 팔에 있는 옥팔찌뿐이었다.

왜냐면 현서가 하는 속엣말의 주제는 보통 전생의 기억이나, 몰래 무공을 익히는 일이거나, 가출 계획을 짜는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옥은 현서가 가진 비밀의 하나뿐인 공유자였다.

길게 말하고 있지만 결국 사람 중에 현서가 감당 못 한 감정을 토로하며 매달린 것은 유위람이 최초라는 얘기였다. 처음으로 타인에게 가감 없이 속을 보여준 것에 당황하는 현서를 보며 옥은 애매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옥은 자신이 현서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곁에 있을 것을 의심치 않았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현서에게 말하는 옥 말고 속을 터놓을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걱정은 늘 가지고 있었다. 연인이든 친구든 무엇이든 간에. 현서와 혼례를 올릴 사람이나, 아니면 현서가 가르칠 제자가 그런 사람이 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저 눈알 시커먼 놈은 예상에 없었다. 현서가 자라는 것을 반기는 감정과 유위람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감정이 부딪혔다.

‘내가 너무 애처럼 굴었어.’

―그야 너는 애니까. 나와는 비교할 것도 없고, 그놈과도 열 살도 넘게 차이가 나지 않느냐.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현서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무서운 걸 무섭다고 하는 게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감정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이 아니야.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것은 맞으나 그것은 좁은 세계라 가능했던 평온이기도 했다. 자의든 타의든 밖으로 나와 풍랑에 휩쓸렸으니 변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다. 아이가 자라는 것은 기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복잡다단한 감정을 옥에게 선사했다.

옥의 속을 빤히 들여다본 현서는 끙 소리를 내며 뒹굴거리는 것을 멈추고는 핀잔했다.

‘이사는 할아버님처럼 굴고, 너는 부모님처럼 굴고. 정말이지.’

어떤 사람들은 현서가 망나니가 되지 않은 것을 신기하게 여기곤 했다. 하지만 현서는 이렇게 흘러넘치는 애정을 받는데 그것을 어떻게 바닥에 쏟아버릴 수 있는지. 그게 어째서 가능하다는 건지, 그것이 더 모를 일이었다.

가족도 옥도 자신에게 무르기 그지없다며 비죽이 웃던 현서의 상념은 가족도 친구도 옥도 아닌데 자신에게 무척이나 다정한 사람에게로 흘러갔다.

‘나를 연모한다고 했지.’

혼담을 원하는 서신을 쌓아 탑을 만들 수 있는 현서지만 직접 고백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의원들은 현서가 스물다섯 살을 넘지 못할 거라고 했다. 늘 몸이 아팠고 고작 감기로도 목숨을 잃을 걱정을 했어야 했으니 인생 최대의 관심사는 오로지 건강이었다. 옥을 만난 이후로는 건강에 독립이 하나 더 붙긴 하였으나 그사이에 연심이니 혼인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일은 전혀 없었다.

자문원의 삼십오 년 인생을 털어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강호에는 오래도록 자유연애가 성행했지만 자문원과는 인연이 없었다.

현서도 사이가 좋은 부부는 알지만 연애는 잘 몰랐다. 형님들은 현서가 독을 먹기 전에 이미 모두 혼인을 했다. 두 내외가 전부 어른들의 안배 아래 어린 시절부터 자주 보아 정을 쌓았다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어린 현서의 기억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때문에 현서는 지금껏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과 혼담을 따로 분리시켜 본 적이 없었다. 관심사가 아니어서 깊이 상량해 본 적 없어 더욱 그랬다.

‘하지만 패천검이 혼서를 호부에 보내는 건 잘 상상이 가지 않는데.’

혼서라니, 양심이 거의 없는 유위람도 깜짝 놀랄 엄청난 비약이었다. 연모한다고 말했더니 그럼 나랑 혼인하겠다는 뜻이냐고 묻는 것과 진배없었다.

당연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현서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나 양심 없는 유위람은 좋다고 바로 혼담부터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방, 아니, 일 년에 한두 번 안부 서신을 보내는 부모님의 고방을 뒤져 눈에 차는 예물을 긁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현서가 저 말을 입 밖에 꺼낼 일은 없으니 그 모든 것은 그저 가정일 뿐이다. 현서는 자신이 연모나 연애에 무지하다는 자각은 있어 이것들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혼자 생각했지 옥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옥이 펄쩍 뛰며 화를 내거나 비웃을 게 뻔해서였다.

그렇다고 유위람에 대해 떠올리는 것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친애의 정과 연모의 정이 결이 다르다고 해도 누군가를 지극히 아끼는 마음은 같았고 그것을 현서가 모를 수는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소소한 세계를 채우는 다양한 다정함은 결국 호현서를 향한 애정이기 때문이다.

패천검은 그 애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현서를 깊이 괴어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을 연심이라고 말했고, 알아만 달라고 했다. ‘지금은’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말이다.

‘그럼 다음도 있다는 건데.’

현서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화오궁, 곽다순, 기암일사 등에 대한 것들이 아니라 패천검 유위람이 보여준 연모였다.

가족이나 친구들, 이사나 옥을 떠올릴 때 느끼는 친애와는 또 다른 감정이 고이고 있었지만, 현서는 아직 몰랐다. 다만 깊게 생각할 뿐이었다.

‘나는 패천검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고 싶은 걸까.’

패천검이 말한 지금의 다음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현서는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현서가 유위람의 고백을 두고 고민하는 것을 옥이 알았다면 당장 현서의 정신을 쏙 빼버렸을 터이나 불행하게도 옥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현서의 사고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손님이 도착했다.

객의 방문을 예상은 하였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체면치레를 위해 적어도 사흘은 기다려주려 했던 유위람은 화오궁이 예상보다 더 애가 닳아 있는 모습에 고소했다. 그렇다고 반갑게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차려 입은 동자, 동녀 한 쌍이 서신을 전하러 왔다고 말했다. 인형과도 같은 예쁜 얼굴은 완벽하게 무표정했다.

유위람은 저 둘이 살아 있는 사람인지, 혹은 정말로 아이가 맞는지를 두고 의심했다. 강호에는 노인, 아이, 여자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방심을 유도하려고 부러 약자를 흉내 내는 괴인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늘에 앉아 기다리길 청했으나 둘은 고집스럽게 서 있었다. 유위람은 두 번 권하지 않은 채 기다리게 내버려 두고는 주경과 함께 현서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서가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식사를 하고 약을 먹을 동안 내버려 둘 참이었다. 방 안의 현서가 밖에 누군가가 온 소리를 듣고 침의 차림으로 나오려고 했으나 옥이 말렸다.

“빨리 나가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맞아. 기를 죽여놓아야지.”

―기를 죽일 것까지야 없지만 급히 서두를 것도 없다.

유위람, 주경, 옥 전부 같은 소리를 했다. 결국 현서는 유위람이 권한 대로 식사를 끝내고 약까지 다 먹은 다음에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어.”

칠월의 햇볕이 고스란히 내리쬐는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서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동자와 동녀를 본 현서가 멈칫했다.

‘……살아 있는 건 맞지?’

―그 시체와 비슷하구나.

스스로를 잘난 옥이라 즐겨 칭하는 입버릇처럼 옥은 금방 저 아이들이 항도에서 조우했던 여자와 닮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살아 있을 때와 비슷하단 얘기다. 죽은 건 아니나 생기가 희박한 것은 맞아.

삼중이 말하길 그 시체가 살아 있을 때는 지속적으로 원기를 빼앗겼을 것이라 했다. 저 아이들은 죽은 것은 아니나 원기를 빼앗기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 된다.

아이들의 처지가 안타까운 것과 동시에 같은 진을 가진 시체가 자신을 노렸던 것도 떠올랐다. 저 아이들이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으나 순간 움찔해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손이 찹니다.”

유위람이 소매 끝에 삐죽이 튀어나온 현서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보곤 손을 잡아 왔다.

“그 항도에서 보았던 그 시체와 비슷하다고, 아니, 비슷해서 조금 놀랐나 봐요.”

옥이 말하는 것을 유위람이 알고 있으니 스스럼없이 말하려고 했던 현서는 주경을 보곤 후다닥 말을 바꾸었다. 현서의 말에 주경의 시선이 아이들에게로 옮겨갔다. 자신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보면서도 아이들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마치 밀랍을 부어 굳힌 것 같았다.

“이제 용건을 말하거라.”

유위람의 허락이 떨어지자 여자아이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비가 주인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말이 끝나자 남자아이가 품에서 비단두루마리를 꺼내 펼쳐 들었다. 아이들은 딱딱한 얼굴로 마치 황궁의 관리가 천자의 말을 전하는 것처럼 굴었으나 유위람이 보기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본 궁주가 연회를 열어 객을 초대코자 하니 부디 귀한 발걸음 옮겨 연회를 빛내 주길 바라노라.”

이번에도 말을 한 것은 여자아이 쪽이었다. 남자아이는 펼친 두루마리를 말아 공손하게 건네주었다. 유위람이 현서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받아 챙겼다.

시비나 다름없는 초대였다. 패천검의 이름을 넣어 초대를 한다면 화오궁주라 해도 공대하여야 했으나, 그러기 싫었던 모양이다. 객이라 두리뭉실하게 칭하지 않는가. 가지 않으려면 여기서부터 트집을 잡을 수 있으나 다급히 구는 모양새가 재미있어 내버려 두었다.

“네 주인에게 알겠다고 전하라.”

하지만 참석에 대한 확답은 해주지 않았다. 아이들도 대답을 받아 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닌지 훌쩍 담을 넘어 사라졌다. 깔끔한 도약이 아이들이 지닌 무공이 나쁘지 않음을 보여주었으나 주경은 감탄보다 혀를 먼저 찼다.

“벌건 대낮에 멀쩡한 문 놔두고 왜 담을 넘고 난리야. 올 때도 저러더니.”

주경과 유위람이 나눈 대화를 아직 듣지 못한 현서가 물었다.

“어딜 보아도 홍문연(鴻門宴: 초청객을 모해할 목적으로 차린 주연)인데. 가려고요?”

“재미있는 얘기를 들어 그렇습니다. 호 공자도 들으면 이해할 겁니다.”

유위람이 현서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기 전에 새가 날아 왔다. 만리추종향을 먹인 새로 지금 양주에 있을 곽나난이 보낸 것이었다. 포르르 날아와 자신의 어깨 위에 앉은 새를 흘깃 보며 유위람이 말했다.

“볕이 강합니다. 더우니 우선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지요.”

그 손을 놓으면 호 공자가 덜 덥지 않을까? 주경의 의견은 그랬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 ❖ ❖

다음 날, 신시(申時: 오후 3시-5시) 초 무렵 현서 일행은 서신에 적혀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 그들이 머물던 현을 벗어나면 곧장 나오는 산 어귀였다. 그림에 나올 것 같은 고풍스러운 시골 장원의 입구에 사람이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제 보았던 아이들처럼 딱딱한 얼굴을 한 젊은 남자가 깊게 절을 하며 일행을 맞이했다. 유위람이 곁을 슬쩍 보자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도 원기를 빼앗기고 있다는 의미였다.

안내를 위해 남자가 앞장을 서고 나머지 셋이 뒤따랐다. 흰 자갈이 깔린 길을 걸었지만 현서를 제외한 세 사람은 발소리도 내지 않았다. 다만 현서가 걸을 때마다 허리춤에 묶인 장신구가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전날 유위람의 설명을 들은 현서는 연회 참석의 필요성은 인정했으나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패천검은 말할 것도 없고 주경의 무위 역시 뛰어난 것을 알지만, 한 손은 열 손을 막지 못한다. 게다가 연회 음식에 독을 타는 것은 가장 손쉽게 이용되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닌가.

그 걱정을 들은 유위람은 일리가 있다며 허리에 차고 있던 구슬이 엮여 있는 장신구를 풀었다. 무엇을 하는지 몰라 가만히 있던 현서의 허리춤에 그것을 매어주었다.

‘피독주(避毒珠)입니다.’

대부분의 독을 막아주거나 해독한다는 보물 중 하나다. 질 좋은 피독주는 용혈이나 야명주처럼 구하기 힘든 보물이다. 패천검의 것이니 두말할 필요 없는 상등품일 터.

당황한 현서가 사양했으나 유위람은 돌려받지 않았다. 검각주가 준 것이라 찼던 것이지 자신에게 효용을 더해주어 차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현서가 도움을 청하려고 주경을 보았지만, 주경은 다르게 해석했는지 자신의 검 손잡이 장신구를 보여주며 자신도 비슷한 게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현서는 옥이 독을 구분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유위람이 빌려주는 것이니 개의치 말라는 말을 끝으로 화제를 돌렸다. 결국 유위람의 장신구는 현서의 몫이 되어 걸음마다 흔들리는 중이었다.

중문을 넘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산에서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기문진의 안에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현서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움찔하자 옥이 말했다.

―한 여름의 열기를 막아주는 정도에 그치는 기본 양의(兩儀)진이다. 이런 건 막 진법을 배우는 아이들도 파훼할 수 있으니 별것 아니야.

무해한 연회라는 걸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그게 더 의심을 사는 일임에도 말이다. 사이좋게 하하 호호 하려고 만나는 사이는 아니니 무해하게 굴든, 아니든 간에 긴장을 풀 수 없는 건 어차피 똑같았다.

―이 장원 안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 것 같으냐?

옥의 질문에 현서가 잠시 살핀 뒤 말했다.

‘예순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정확히 예순여섯 명이다. 땅 아래 숨은 놈들이 열 명 있구나. 그 외에 숨은 놈은 없다만, 숨만 붙여놓은 놈 하나, 죽은 놈이 셋 정도 있다.

땅에 숨은 자들을 다시 찾아보라고 옥이 말했다. 더듬더듬 장원을 훑던 현서는 이번에는 열 명이 숨은 자리를 확실히 찾아내 옥의 칭찬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용으로 꾸며놓은 화청에 도착했다. 사방에 여름 정원의 미인도가 그려진 비단휘장을 쳐 그늘을 넓혀두었다. 곳곳에 둔 청동화로에서는 여러 가지 꽃향기가 뒤섞인 향이 났다. 꽃나무가 없어 향으로 갈음한 것이다. 하지만 향도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괜찮다. 그저 썩는 냄새를 감추려고 발악하는 것뿐이니.

저 향은 문제없다고 옥이 말했다.

“주인님, 손님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안내하던 남자의 말에 현서는 그제야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주인님이라 하면 화오궁주임이 분명할 텐데 꽃향기보다 존재감이 옅었다.

화오궁주는 대단히 화려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로 현서는 그 얼굴을 보고 제법 놀랐다. 기억과 너무 달라 일순 같은 사람인지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이십구 년 전, 역산 혈겁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흐릿했다. 오래도록 병을 앓은 현서라 모를 수가 없었다. 옥이 숨만 붙여놓은 놈이라고 칭한 것은 화오궁주였다. 깊은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궁주의 양옆에는 각각 열 명이 되는 동자와 동녀가 화병과 향로, 과일 따위를 들고 서 있었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흰색 비단 옷에는 수묵화로 장수를 상징하는 불로초나 기암괴석 따위가 그려져 있었다. 오래전 어느 황제가 불로초를 얻기 위해 동남동녀 백 명을 멀리 보냈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화오궁주가 자신의 수명에 집착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밀랍을 부어 굳힌 것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궁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화오궁주는 과장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유위람의 손을 잡으며 환대했다.

“본 궁주가 직접 마중하지 못한 걸 부디 탓하지 말아주게. 더운 날씨에 잘 와주웠어. 앉아. 앉게. 너희들은 무엇 하느냐.”

궁주가 유위람을 잡아끌며 자신의 왼편에 앉혔다. 상석은 맞았으나 열 명이나 되는 자객이 바로 흙 아래 있었다. 유위람과 주경이 태연하게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현서도 앉았다.

‘앉은 자리 아래 사람이 숨어 있다니.’

찜찜하고도 기분 나쁜 일이었으나 지금은 모른 척할 때였다.

곧 머리를 높게 올린 시녀들이 물 흐르듯 걸어와 차와 간식을 상 위에 올려주고 물러났다. 화오궁주는 유위람에게로 몸을 반쯤 틀어 친밀함을 끊임없이 표했다.

“본 궁주가 오랜만에 강호에 나왔더니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지 뭔가. 그래도 패천검의 위명을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 강호로 돌아오자마자 젊은 영웅을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네.”

강호의 어른이 젊은 후기지수에게 하는 말로는 흠 하나 잡을 곳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배분상 유위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대꾸도 없는 유위람의 입술에 걸린 비뚜름한 미소는 화사했지만 현서는 저게 좋은 뜻이 아님을 알았다. 네가 어디까지 말하는지 일단 들어주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화오궁주가 예절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주경과 현서는 건너편에 앉은 다섯 사람과 어떤 통성명도 못 해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옥의 말로는 저들은 원기를 빼앗기는 상태는 아니라고 했다. 아마 화오궁의 장로나 호법인 듯했다.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궁주나 유위람을 향해 시선을 두기는커녕 눈앞에 있는 현서나 주경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화오궁주가 억지로 앉혔나 보군.

‘궁주의 명을 거절할 수는 없지만 불만을 감출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현서는 화오궁주가 자신을 죽이려 든다고 추측했으나 지금 보니 틀린걸 알았다. 화오궁주는 자신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자신을 향한 악의와 살의는 전부 기암일사, 사영의 것이었다.

궁주의 건너편 상석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부러 비워둔 것일까 했는데 연회 음식이 놓이는 것을 보니 초대했지만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서 앞에 오른 음식들은 모양도 예쁘고, 냄새도 좋고, 옥이 독도 없다고 말했지만 전혀 먹고 싶지 않았다.

그사이 술잔이 오갔다. 화오궁주에게 유위람을 제외한 사람은 병풍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술을 권하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오직 유위람뿐이었다. 화오궁의 사람들은 인형처럼 움직이거나 그림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기괴한 연회였다.

“그러고 보니 내 불초한 아들인 사영이 철서에서부터 여러모로 패천검에게 폐를 끼쳤다는 얘길 들었네.”

본론이 빠르게 나왔다. 어떤 병인지, 병세가 어떤지 모르겠으나 궁주는 환자라 시간을 끌 수가 없는 게 빤했다.

신농자의 제자 행세를 하던 기암일사의 이름은 모르지만, 자신을 사영이라 소개한 기암일사는 현서도 익히 알았다. 그가 소궁주라는 것은 놀랍지 않았다. 궁주의 뜻과 상관없이 화오궁의 수족들을 부려 자신을 죽이려 들려면 그 정도의 위치는 가져야 했으니까. 오히려 사영이 본명이라는 것이 더 놀라웠다.

하지만 사영이 소궁주라는 것은 현서 일행에게 꼭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반대로 사영에게는 감추는 게 더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사영이 아들이라는 걸 들먹이며 철서의 일을 언급했다. 마치 화오궁이 한 일이 아니라 아들이 한 일이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걸 보니.

―저 부자의 사이가 나쁘구나.

옥이 단언을 뒤로 궁주의 말이 계속해서 들렸다.

“어릴 땐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였는데, 뒤늦게 나이가 들어 속을 썩일 줄이야. 아비 마음을 몰라주고 사고를 곧잘 친다네.”

화오궁주의 표정이 간곡해졌다. 얼굴만 보면 자식 걱정에 애끓는 부모의 귀감처럼 보였다.

“자식의 허물은 부모의 허물이라고 할 수 있지. 그 아이가 저지른 잘못을 얘기해 주게.”

아들이라는 소궁주의 편을 드는 말도 없고, 그렇다고 궁주 본인이 사과를 하겠다는 말도 없었다. 두리뭉실하고 애매모호하게 아들의 잘못을 말해 달라고만 할 뿐이었다.

옥이 코웃음을 쳤다.

―그놈이 뭘 하는지 궁주는 모르는구나. 그리고 저기 앉아 있는 놈들도 모르고.

부자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궁주는 병에 걸렸고, 사영은 건강히 활개를 치고 다녔다. 실권도 야금야금 넘어갔겠지. 그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게 빤히 보였다.

‘화오궁의 반응이 이상할 정도로 급작스럽다 싶더니. 궁주가 애가 많이 탔던 모양이군. 뺏긴 것이 많은 모양이야.’

권력 암투에 관해선 현서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유위람이 속으로 비웃으며 좀 더 들쑤셔 보기로 했다. 유위람은 이십구 년 전의 화오궁주를 몰랐지만 궁주의 판단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가정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궁주는 소궁주의 잘못을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차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만 했던 유위람이 가차 없는 하대로 입을 열었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검각의 각주가 유위람의 사손뻘이라 화오궁주도 유위람의 아래 배분이 된다. 사이가 좋다면 체면을 차려주었겠지만 화오궁에는 챙겨줄 체면도 없었다.

“대단한 얘기라도 나올 줄 알고 부러 발걸음 했더니.”

유위람의 비웃음에 궁주의 표정이 굳었다. 연회장에 있는 화오궁 사람들의 기세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죽을상을 하던 호법이나 장로들의 얼굴도 매서워졌다. 억지로 자리하고 있다 해도 궁주가 면전에서 무시를 당했는데 가만히 있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물러날 것이었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유위람은 권력 싸움 중인 부자지간, 병든 아비가 밀리는 상황을 어떻게 부채질할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비슷한 일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실망이야. 화오궁의 위명은 궁주가 아니라 소궁주가 쌓았나 보군. 이런 식상한 꼬락서니를 보여주려고 초대한 건가? 기껏 왔더니 어디서 저잣거리 기예꾼들도 써먹지 않을 얘기나 하는지.”

유위람은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내력을 살짝 넣었다. 음공으로 타격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소리도 또렷하게 들리는 효과를 주기 위해서였다. 사람 속을 뒤집는 데 효과적인 방법으로, 유위람은 이것을 모친에게서 배웠다.

“그래. 내가 소궁주의 잘못을 말하면 궁주가 아들을 대신해 보상이라도 해주려고? 화오궁주라는 허울 말고는 남은 게 없어 보이니 가능할 것 같지가 않은데?”

마지막 말이 화오궁주의 역린이었던 모양이었다. 점점 싸늘해지던 화오궁주가 저 말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남은 것이 없다니. 감히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본 궁주가 화오궁의 주인이다. 궁의 비의(秘儀)가 내 손에 있는 한 소궁주도 나를 주인으로 모셔야 해!”

“궁주!”

“주인님!”

화오궁주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시커먼 피를 토했다. 내장의 일부분이 괴사한 것이 분명했다. 어찌어찌 목숨을 이어 붙이고는 있으나 반 이상은 저승에 발을 걸친 상태다.

―실패했군.

옥이 전에 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실패했다는 거야?’

―독인(毒人)이 되려다 실패했다는 얘기다.

독인은 몸에서 독을 만들어 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독이 소용없는 만독불침의 위 단계를 말한다. 스스로 독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독에 당할 일도 없으니까.

처음에는 가벼운 독을 만들어 내는 것을 시작해 점점 단계를 올린다. 그렇게 몸에서 새로운 독을 만들어 천 명을 죽이면 독인이 되었다고 일컬어진다.

‘그럼 저 피도 독이야? 피하라고 알려야……!’

―실패했으니 이제 저 독은 화오궁주 자신밖에 죽이지 못해.

‘그건 다행이네.’

―저 독이 화오궁주의 천인살(千人殺)이었던 거겠지. 왜 실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 독이 개웅산에서 쓰인 그 독이다.

옥의 말에 놀라 움직이는 바람에 과일 그릇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유위람과 주경의 시선이 현서에게 닿았다. 현서는 뭐라 말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는데 유위람이 갑자기 손을 뻗어 현서를 끌어당겼다.

“이 난장판은 무엇이야.”

곽다순이 여전히 그 순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하며 걸어왔다. 상석의 한 자리가 곽다순의 자리였던 모양이었다. 화오궁과 동맹이니 놀랄 일은 아니지만 현서는 유위람의 품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화오궁주가 토해 내는 저 독을 곽다순은 아는 건가? 모르는 건가?’

현서는 아연한 얼굴로 곽다순을 응시했다.

희게 질려 있는 현서의 표정에 아랑곳없이 곽다순은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로 다정하게 말했다.

“놀랬나 보구나. 궁주의 몸이 미령하여 그렇단다. 곧 괜찮아질 테니 걱정하지 말려무나.”

현서는 화오궁주를 전혀 걱정하지 않았고, 화오궁주의 상세는 어떻게 보아도 좋아질 것이 아니니 상냥한 위로는 상황에 맞지 않아 겉돌기만 했다.

곽다순을 보는 장로와 호법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저들의 못마땅함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은 곽다순이 현서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유위람의 검이 경고조로 곽다순의 목을 겨누었으나 그 또한 개의치 않았다.

곽다순은 손에 들고 있던 접시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네가 온다고 해서 급히 만들어 왔단다.”

그릇에 있는 것은 색이 예쁜 도화함(桃花餡)이었다. 천 장의 복숭아 꽃잎을 설탕에 절여 만드는 과자다. 손이 많이 가고 제대로 맛을 내기도 어려워 고급 과자로 꼽히니 백양교가 날뛰던 그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자문원은 과자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스승님과의 추억이 있어 유일하게 먹는 과자였다. 그 때문에 주제도 모르고 사치스럽다는 욕도 들었으나 자문원이 좋아한다는 인식이 퍼져 종종 곽다순이 챙겨주거나 선물로 받기도 했다. 스승님에 대한 기억과 귀한 과자를 챙겨주는 고마움에 자문원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은 음식이었다.

하지만 현서는 좋아하지 않았다. 서녕호가에서 도화함은 귀한 과자가 아니었는지라 봄이나 겨울에 자주 올라왔는데 어릴 때부터 입에 맞지 않아 먹지 않았다. 전생을 자각한 뒤에 자문원의 추억을 떠올려 먹어본 적 있으나 역시나 현서가 좋아하는 맛은 아니었다.

“꽃잎을 모으는 것부터 전부 내가 다 했단다. 오래전부터 만들었는데 한 번도 네게 주질 못해 서운하던 차에 올해 이렇게 좋은 날이 생겼구나.”

기분 나쁠 정도로 기이한 다정함에 주변의 시선이 현서와 곽다순에게로 몰렸다. 화오궁의 사람이든, 유위람이든 곽다순이 왜 이렇게 현서에게 친밀하게 구는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현서 역시 알지 못했다. 자신이 자문원의 환생이기 때문이라는 답은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저 순해 보이는 까만 눈동자가 이미 미친 자의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나 맛보렴.”

색도 모양도 완벽해 보이는 과자를 곽다순이 거듭 권했으나 현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곽다순의 뒤로 보이는 광경에 시선을 뺏긴 탓이었다. 그러나 광인의 곡해는 빨랐다. 번들거리는 광택이 일순 눈동자 위로 떠올랐다 사라졌으나 목소리만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내가 주는 걸 받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화가 났니?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 할 수만 있다면 무릎과 이마가 닳아 없어지도록 빌고 또 빌고 싶구나.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너도 알다시피 네게 사과할 수는 없지 않겠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주절주절 내뱉고 나서야 곽다순은 현서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길들여진 초식동물 같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무언가를 깨달은 듯 뒤를 돌아보며 작게 탄식을 뱉었다.

“저것 때문에 그러는구나. 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줄 알았구나. 완전하지 않은 네가 주제넘은 줄 알았더니 내 오해였어. 다행이네, 다행이야.”

곽다순이 현서에게 도화함을 권하는 동안 화오궁의 이들은 궁주를 보살폈다. 궁주가 더 이상 피를 토하지 않자 옆에 있는 사람이 인형 같이 서 있던 아이들 중 한 명을 잡아당겼다. 그것이 곽다순의 헛소리보다 더 현서의 눈을 끌었던 것이다.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온 아이는 아프다는 신음 하나 없이 목을 들이밀었다. 도살당하는 짐승처럼 목을 드러내는 유순함에 의아해 하는 것도 잠시 현서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입을 틀어막았다.

화오궁주가 피 묻은 손으로 아이의 목을 틀어쥐자 아이는 순식간에 목내이처럼 생기를 잃고는 바닥에 버려졌다. 궁주가 아이의 원기를 뺏은 것이다. 깜짝 놀란 현서가 숨을 삼키자 유위람이 말했다.

“죽지 않았습니다.”

유위람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숨기지 않은 혐오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 말에 자세히 보니 바닥에 쓰러진 아이는 실처럼 가느다랗게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화오궁의 사람들은 아무도 쓰러진 아이에 눈을 주지 않았다.

“그래, 죽지 않았단다. 보아서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만 그저 치료의 일환이란다. 너는 다정한 사람이니 미리 주의했어야 했는데.”

곽다순의 말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사이 두 번째 아이에게 손을 대려고 하는 궁주의 손을 잘라버릴 작정으로 유위람이 검을 휘둘렀다. 곽다순은 막을 마음은 없는지 그릇의 도화함을 아쉬운 표정으로 보곤 훌쩍 물러섰을 뿐이었다.

날카로운 검격은 화오궁의 무리에 의해 저지되었으나 연회장은 엉망이 되었다. 유위람은 다음 공격을 위해 공격 자세를 거두지 않았다. 주경 역시 무서운 얼굴로 검을 들고 있었다. 아이가 죽지 않았다 해도 사람을 저런 용도로 쓰는 것을 보았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현서는 긴장한 채 발아래 있는 자객들의 상황들을 주시했다. 땅 아래 있는 이들에게 바로바로 수신호를 보내는 것은 쉽지 않으니 아마 처음부터 약속한 시간이 되면 습격하도록 되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방심은 할 수 없었다.

“감히 본궁의 궁주를 공격하다니! 어린 것이 조그마한 위명을 믿고 설쳐 대는 것이 가소롭구나!”

장로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가 대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흑색의 커다란 도로 검격을 막은 자였다. 줄기줄기 뿜어내는 살기에 피부가 아릴 정도였다. 화오궁주는 쭉정이나 다름없었고, 그 곁에 남은 이들도 계륵 같은 이들이나 그 무위는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유위람이 현서를 자신의 뒤로 물려 살기로부터 보호했다. 싸움이 시작될 경우 가장 약한 자신이 먼저 표적이 될 것을 알아 현서는 내력을 일으키며 만약을 대비했다.

“궁주라니? 나는 어린아이의 정기를 갈취하는 늙은 요괴밖에 보지 못했는데 어디에 궁주가 있단 말인가? 화오궁은 저런 걸 궁주라고 하는 모양이군.”

어찌하여 강호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가 했더니 저런 버러지가 궁주라면 부끄러워서라도 숨어 지낼 만해. 유위람이 혀를 차며 비아냥거렸다. 곽나난과 괜히 친구가 아니었다. 현서 역시 자신이 아는 욕을 전부 끌어다 붓고 싶은 심정이었는지라 유위람의 말에 동의했다.

―저놈은 단전이 없어. 내공이 있다면 저런 식으로 원기를 갈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은 쥐꼬리만 한 자비가 아니라 능력 부족이란 얘기였다. 장로와 호법들이 막아서고 있으나 화오궁주는 다시 아이들의 목에 손을 대지 않았다. 유위람의 공격을 신경 쓴 것이 아니라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자존심 상해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저렇게나 영락하였을 줄은…….’

현서는 경멸 어린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백양교는 시작부터 끝까지 교리에 대한 광신에 지배당했다. 사교였고 그들이 추앙하는 선지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 굳건한 믿음이 엄청난 수의 살상을 일으켰다.

엽수련의 천수편 쟁탈전은 귀한 보물을 둘러싼 무인들의 탐욕을 바닥까지 보여주었다. 천수편의 주인이 된다고 해서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이 아닌데 신병이기의 주인이라는 허명에 자신과 타인의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화오궁이 일으킨 역산 혈겁은 커다란 쾌락 살인의 현장이었다. 화오궁주의 즐거움을 위해 역산 삼맹의 세 문파가 떼죽음을 당했다.

세 경우 모두 인세에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피바람을 불러왔으나 역겨움에 있어서 화오궁이 단연코 선두였다. 진법으로 탈출로가 막힌 채 화오궁의 몰이에 갇힌 이들은 서로 죽이거나 자살했는데 사지가 멀쩡한 시신이 단 하나도 없었다.

자문원은 그때 사람을 움직이는 흙인형 정도로 취급하는 화오궁주를 보았다. 자문원을 비롯해 뒤늦게 도착한 천의맹의 사람들은 끔찍한 광경에 구역질을 하며 화오궁과 대치했다. 피바람이 불 거라는 예상과 달리 화오궁은 일으킨 혈겁에 비해 쉬이 물러섰다. 화오궁주가 보아야 할 것은 전부 보았으니 흥미가 떨어져 돌아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소수만이 살아남았으나 그들 역시 얼마 못 가 죽거나 미쳤다. 사지가 온전히 붙어 있지 않은 시체들만이 역산을 뒤덮고 있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사람들은 역산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아이 하나의 생기를 게걸스럽게 훔쳐 먹고도 좋아진 느낌은 전혀 없었다. 저치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무엇이라도 된 양 오만하게 시체들을 굽어보던 남자는 오늘의 쇠락을 꿈이라도 꿔본 적이 있을까. 현서는 화오궁주에게 강한 혐오를 느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유위람이었다.

[꽉 잡으셔야 합니다.]

현서에게 전음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유위람이 내력을 실은 발로 있는 힘껏 바닥을 치며 비상했다. 물웅덩이에 불로 달군 바위를 던진 것 같은 강한 내력이 파문처럼 번져 나가며 연회장의 바닥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싸움의 시작이었다.

현서를 안고 훌쩍 뛰어오른 유위람은 엉망이 된 바닥 대신 난간에 발을 올리기도 전에 사방에서 공격을 당했다. 호법과 장로 중 두 명은 주경에게, 세 명은 유위람에게 붙었다. 곽다순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궁주의 곁에 있을 뿐이었다.

오 대 이의 싸움이 아니었다. 바닥이 엉망이 되면서 흙 아래 숨었던 자객들은 타격을 입었으나 그렇다고 전부 죽지는 않았다. 매복을 들켰지만 상관없었다. 얌전히 얼굴만 보고 돌려보낼 일은 처음부터 없었던 터라 싸움을 위해 준비된 이들이 모두 달려들었다.

숫자만 본다면 철서에서 쫓겨갈 때보다 적었으나 그렇다고 나은 상황은 아니었다. 적은 더 강했고, 이쪽은 그때보다 수가 적었다.

유위람은 한 손으로 현서를 안은 채로도 무리 없이 싸웠지만 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 현서는 품에 안긴 채로 급히 주위를 살폈다.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적당한 자리를 찾으며 저 다섯 명의 무공을 눈여겨보았다.

세 명이 도를 쓰고 두 명은 창을 쓰고 있으나 같은 내공 심법을 쓰는 자 특유의 공명이 느껴졌다.

‘화오궁에 독문 무공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네.’

―그래, 비무회 때 사영 그놈이 쓰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구나.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아.

주경과 유위람은 아직 다치지 않았으나 언제 다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현서는 서슬 퍼런 창날이 보이자 반사적으로 유위람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창날에 머리칼을 묶고 있던 끈이 잘려나가며 유위람의 머리카락이 확 풀어졌다.

유위람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곧 현서에게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격한 싸움 중인 무인이 이렇게 쉽게 딸려 올 만큼 현서를 순순히 믿은 것이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와 닿을 줄이야.

―정신 차려!

피와 살이 튀는 와중에 얼굴을 붉힐 뻔한 현서는 옥의 일갈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다 잡았다. 곧 적당한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가 괜찮겠어요.”

장정 둘을 가릴 정도의 굵은 기둥이 있는 자리였다. 연회석의 특성상 사방이 트여 있으나 현서와 옥의 계산에 싸울 수 있는 이들은 이미 다 도착한 뒤였으니 등 뒤를 조심하지 않아도 되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위람도 같은 결정을 내려 현서를 기둥 앞에 내려놓았다. 계속 안고 싸우다 이도저도 아닌 상황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서를 내려놓아 훨씬 자유로워진 유위람의 공격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전부터 그랬지만 유위람은 다수와 싸우는 검에 능숙했다. 사람 같지도 않은 스승 셋과 싸우면서 체득한 배움이었다.

오래 시간을 끌면 결국 불리해지는 것은 현서 일행이다. 그 때문에 유위람은 현서와 떨어지자 곧장 기선 제압에 나섰다. 유위람의 우미한 내공이 검을 따라 줄기줄기 감기는 광경에 현서는 눈을 빼앗겼다.

‘예쁘다.’

그간의 내공 수련으로 눈이 더욱 트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철서에서 옥이 유위람을 칭찬할 때 시큰둥했던 현서가 처음으로 유위람의 무위에 감탄한 순간이었다.

검각이 자랑하는 영뢰팔합검(靈雷八合劍)의 마지막인 순뢰팔삭(旬雷捌搠)이 만화산 삼노사(三老師)로부터 더욱 발전하여 유위람에게로 이어졌다. 이름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는 뇌전이 천지를 찢어발기듯 번뜩이며 적들을 공격했다.

현서는 영뢰팔합검을 자문원의 기억에서 모두 보아 알고 있었다. 자문원이 자신이 보았던 순뢰팔삭 중에 만화산 삼노사들의 것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감탄했던 것도 안다. 그러나 이제부터 현서에게는 유위람의 것이 가장 아름다운 순뢰팔삭으로 기억될 터였다.

‘예쁘다니, 너는 말을 좀 이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예쁘게 죽이는 게 무슨 소용이야. 빨리 죽이고 잘 막아야 좋은 검이지.’

‘거, 젊은 애가 예쁘다는데 예쁘다고 좀 해줘라.’

감탄을 금치 못하는 자문원을 향했던 퉁명스러운 목소리들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아무리 뒤에 있다고 해도 긴박한 상황이니 정신 차리고 있어야 했다.

유위람이 작정하고 나서자 검을 맞받아 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가장 기세가 좋았던, 흑도를 쓰는 이도 흘려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낙관할 수는 없었다. 곽다순이 아직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변덕으로 가만히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변덕에 기대 있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주경과 유위람에게도 자잘한 상처들이 생겨났다. 서로 사정 보아줄 사이가 아니라 살초가 끊임없이 오갔고, 큰 부상을 입은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부상을 입어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달려든다는 것이 문제였다.

무위가 뛰어난 다섯 명은 그렇지 않았으나 나머지는 확실히 금제를 받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통증을 느끼거나 몸을 사리는 보신 행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빨리 물러나야 해.’

도주를 위해 틈을 살피던 현서는 주경이 역모를 꾸미는 악당처럼 웃는 것을 보았다. 장로 한 명을 집어 던져 거리를 벌린 유위람이 현서를 안아 드는 것과 동시에 주경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을 향해 던졌다. 혼례식에 쓰는 폭죽보다 훨씬 시끄러운 소리와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둘러쌌다.

현서는 몰랐지만 저것은 개량 화탄이었다. 관에서 보면 슬쩍 눙칠 만큼 위력이 크지 않으나 싸움에서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만큼은 되는. 더욱이 크기도 작아 들고 다니기도 좋았다. 그런 것을 주경이 있는 대로 던졌다.

강호의 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들만의 생존법이 있다. 무공의 전수가 끊어졌다고 해서 그들이 강호의 구성원이 아닌 것도 아니고, 싸움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강주의 하오문도가 재미있는 물건이 있다 소개하여 정보 교환비 조로 받아두었다. 이렇게 빨리 쓸 줄은 몰랐으나 제법 좋은 효과에 주경은 자신의 선견지명을 칭찬했다.

유위람과 주경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조그만 틈이었고, 저들은 하오문의 새 기물을 모르니 적절하게 유효했다.

도망치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종이를 찢는 것만큼 쉽게 파훼되는 양의진은 보잘 것 없어진 화오궁주를 고스란히 상징하는 것 같았다. 현서를 안은 유위람과 주경은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장원의 담을 훌쩍 넘었다.

불 하나 없는 길은 아주 어두웠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추격자가 붙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화용에 갈 때처럼 경신법을 사용해 한 시진(2시간)을 달리고서야 멈추었다.

축시(丑時: 밤 1시-3시)를 훌쩍 지나 어둡고 웃자라 껑충한 여름풀이 가득한 물가였다. 체력이 이미 한계에 달해 반쯤 졸던 현서는 물비린내에 정신을 차렸다. 주변에 민가는커녕 나루터 하나 보이지 않았으나 유위람은 개의치 않고 성큼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부러 가리고 있던 등덮개를 치우자 몇 명의 사람들과 적당한 크기의 배가 보였다.

“저희 두령께서 말씀하시길 필요한 것은 모두 준비해 두었으니 편히 가시면 된다 하셨습니다.”

“성 두령께 감사 인사를 전해주시게.”

“별말씀을요. 패천검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저희 두령께서 서운해 하실 겁니다.”

“이 짧은 시간에 들어달라고 떼를 썼는데 감사 인사도 하지 않았다간 이자를 붙이신다는 걸 내 모를 줄 알고.”

유위람이 가벼운 농을 던지며 승선했다. 물가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어둠에 잠기고 배는 소리도 없이 흘러갔다. 미리 얘기를 들어두었기 때문에 놀라진 않았으나 좀 신기하긴 했다.

개웅산의 일은 살아남은 이들 모두에게 상흔을 남겼다. 천의맹의 위선에 대한 실망과 검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화정이 경공을 배우는 것에 몰두했던 것처럼, 살아남은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치유해 나갔다. 유위람은 고립을 경계해 검각이 아닌 개인의 세력을 꾸렸고, 곽나난은 곽씨 성을 가진 이들을 믿지 않았다. 소화리는 다수를 죽이는 무공에 몰두했고, 감윤은 사문의 불화를 경계하는 한편, 암기를 질색해 파훼법에 열중했다.

강호인이 아닌 열다섯 명의 증인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이겨내려 했다. 이미 천수를 누리고 죽은 사람도 있고, 항도에 있는 자문원의 사당을 지키는 이도 있고, 아예 은거하게 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다섯 아이들처럼 의문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성소여, 당시 스물여덟 살의 젊은 과부로 강해표국과 사돈이 되는 금어방의 사람이었다. 강해표국이 몰살당하는 것을 목격하는 바람에 금어방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녀는 정확히 십삼 년 후에 금어방을 몰락시켰다.

금어방의 사업을 그대로 흡수해 조일당의 두령이 된 것이다. 현서 일행이 석호를 가로지를 때 이용한 여행선의 공동 출자자 중의 하나인 그 조일당이다.

금어방의 몰락도 계획에 있었던 유위람을 비롯한 모두가 성소여를 알음알음 도운 것은 당연했다. 우방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서로 검선 자문원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은 확실히 믿었다.

사당 지붕을 황실에서 쓰는 황유리기와로 하자며 비용 전부를 대겠다고 했던 사람이 성소여였다.

곽나난이 보낸 전서를 받은 유위람은 저 연회가 어찌 끝나든 간에 양주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현서도 주경도 찬성했다. 가장 빨리 가는 길은 강을 타고 석호를 건너가는 뱃길이었다. 호가 상단에 연락해 배를 수배하겠다는 현서의 말에 적임자가 있다고 한 것이 유위람이었다. 조일당의 일을 현서는 그때 처음 알았다.

‘자문원이 기뻐할까?’

현서가 내릴 수 있는 답은 아니었다. 눈을 부릅뜨려고 할 때마다 눈이 더 감기는 기현상에 현서는 반쯤 굴복한 상태였다. 유위람이 웃으며 현서를 침상에 내려놓고 나가려고 하는데 현서가 유위람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호 공자? 배에 탔으니 편히 자도 됩니다.”

유위람에 말에 현서는 고개를 흔들며 무어라 웅얼거렸다. 유위람이 귀를 쫑긋 세웠지만 이미 반 이상 잠에 빠진 사람의 말이라 옥이나 이사라 해도 못 알아들을 소리였다. 유위람이 자신의 뜻을 모르자 답답해 하던 현서는 손을 놓더니 곧장 허리를 묶은 요대를 훌렁 풀어버렸다.

유위람은 자신이 바라는 의도가 아님을 알면서도 현서가 갑자기 옷을 벗자 순간 놀라 당황했다. 중의를 입은 것까진 제법 보았으나 현서의 헛손질에 중의도 풀어져 어깨가 홀랑 보였다.

티 하나 없는 새하얀 어깨를 깨물거나 핥고 싶다는 욕망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쥔 유위람은 곧 실소를 터뜨렸다. 현서의 옷 안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물건들 때문이었다. 유위람이 챙겨준 과자부터 없는 게 없어 보였다.

‘무슨 보따리상도 아니고.’

눈을 감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이번에는 헛손질하지 않았다. 자개로 만든 조그마한 함을 유위람 손에 꽉 쥐어주었다.

“상처……약. 약. ……경.”

현서가 쥐어준 것은 금창약이었다. 대단찮은 상처인지라 유위람도 잊고 있었는데,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할 일을 다 끝냈는지 아예 푹 잠이 들어버린 현서를 유위람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손을 대는 것도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는 게 무엇인지 실감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불편하게 자는 것을 그냥 둘 수도 없다.

“호 공자를 불편하지 않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유위람은 옥 님에게 그 어떤 사심도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 뒤 현서의 겉옷을 벗겼다. 흐트러진 중의를 바로 입히고 보따리장수의 짐처럼 쏟아져 나온 물건들도 한곳으로 치워둔 뒤 현서의 머리칼을 쓸며 이마를 매만졌다.

사심이 가득했으나 어차피 유위람의 귀에는 옥의 욕설은 들리지 않는다. 마지막엔 주경도 챙겨주라고 한 것 같았지만 유위람은 깔끔하게 듣지 못한 걸로 치기로 하고 현서가 준 약을 잘 챙겨 넣었다. 성 두령이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했으니 어차피 이 배에도 금창약은 있을 터였다.

❖ ❖ ❖

이 배는 석호에서 탔던 그 여행선에 비하면 새끼 물고기나 다름없었으나 사람을 챙기는 세심함은 다르지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난 현서는 물 흐르듯 이어진 시중을 받아 식사까지 전부 마쳤다. 그사이 옥의 묘한 침묵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일이 잠시 있었으나, 결국 옥이 한숨을 섞어 말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너를 탓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왜 그래? 내가 잘 때 무슨 일 있었어?’

―이 더럽고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한탄을 좀 했을 뿐이야.

‘무슨 소리야. 그게.’

옥이 농담한다고 여긴 현서가 와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둘 중에 하나라도 기쁘면 되었지. 옥은 묘하게 관대한 마음이 되었다.

선실을 벗어나 배의 갑판에 올랐으나 주경과 유위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늘막을 쳐 둔 자리가 있었다. 작아도 여행선 같은 느낌이었다.

현서가 자리에 앉자 배의 시종들이 재빨리 차와 과일, 그리고 과자를 준비해 주었다. 더우면 곁에서 부채를 부쳐 주겠다는 말은 사양했다. 가만히 앉아서 수면이 반짝이는 것을 보자 서녕을 벗어나 철서로 향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양주 여행을 한다고 신나 있었지. 그때 현서가 갖고 있던 고민이란 독립할 집을 꾸미는 것 정도였다. 집을 떠난 지 반년도 안 되었는데 평생을 움직인 것보다 훨씬 많은 곳을 돌아다니게 될 줄은.

이런 일은 상상의 영역도 아니었으니 꿈꿔 본 일도 없었다. 강호에 나왔어도 기껏 예전에 자문원이 알던 사람들을 좀 만나겠구나 하는 감상이 전부였던 것이 얼마나 안일했던지. 현서는 한숨을 쉬었다.

현서에게는 평생이니 이십 년은 긴 시간이겠으나 어떤 사람들에겐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비단 곽다순의 얘길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은혜도 원한처럼 긴 시간 동안 남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유위람이 긴 머리카락을 그대로 풀어헤친 채 나타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에 현서는 잠시 놀라다 곧 어제의 공격 때문에 머리끈을 잃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머리를 풀고 있는 모습도 근사하게 잘 어울렸지만 그래도 편하진 않을 것이다.

“마침 제게 여분의 끈이 있는데.”

‘드릴까요?’라는 말을 마치기도 전혀 유위람이 현서의 앞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머리를 묶어주신다니 저야 기쁘지요.”

“네? 예.”

유위람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데 거기에 대해 끈만 주려고 했다는 말을 못 하는 현서는 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우르르 쏟아진 현서의 물건 중에 여분의 머리끈이 있는 걸 본 유위람의 수작이라는 것을 옥만이 알았다.

끈은 있었지만 빗은 없었다. 눈치 좋은 하인이 빗을 가져다준다고 말하려다 유위람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더 큰 눈치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는 모습에 유위람은 성 두령이 사람을 잘 키운다며 흐뭇해했다.

조카들에게 인기가 많은 현서는 종종 아이들의 머리칼을 묶어주어서 제법 솜씨가 좋았다. 하지만 빗이 없어서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내리려니 어딘지 어색했다. 유위람이 볕 쬐는 고양이처럼 늘어져 만족하고 있는 걸 알 리 없는 현서는 최선을 다해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패천검께 검선은 어떤 사람인가요?”

숱이 많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자꾸 손아귀를 벗어났다. 현서는 반복해 머리칼을 가지런히 모으려다 너무 조용한 것 같아서 별 의미 없이 물었다.

‘엄청 굉장한 소릴 하는 건 아니겠지.’

몇 번의 시도 끝에 만족스러운 모양이 잡혀 이제 끈으로 묶기만 하면 상황이었으나 유위람의 대답에 그만 손을 놓쳐 버렸다.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은 분이셨지요. 저는 어릴 때 검선의 제자가 되고 싶었답니다.”

언제나 유위람의 말은 현서의 상상을 벗어났다.

유위람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잘남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부친의 출신 문제가 있고, 모친이 외조부와 권력다툼을 하는 중이라 적장자로 인지받지 못한 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주위에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귀찮기만 했다. 어머님이 승리하시면 당연히 해결될 문제고, 어머님이 승리하시지 않아도 자신이 쟁취하면 될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성가셨다. 타고난 재능이 모친과 외조부를 넘어섰는데, 성격 나쁨도 두 사람을 뛰어넘은 탓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만화산의 삼노사가 어린 유위람의 빛나는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았다고 했는데,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조금 달랐다.

일곱 살의 유위람을 본 그들이 길가에 함부로 풀어두기 위험한 재능이라 제자로 삼고 싶다고 한 말을 다듬은 것이다. 더 좋은 말로 포장을 했어도 당시에 하나뿐인 아들인 유위람을 검각에 보낼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얼마 후, 권력 싸움이 극에 달하자 모친은 아들을 검각으로 피신시켰다. 그곳에서 유위람이 멋대로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려 정식으로 검각의 제자가 되는 걸 알았다면 절대 보내지 않았을 터였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검선의 제자요?”

현서가 놓친 머리를 다시 추스르며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를 확인했다. 자문원의 기억을 더듬어보면서도 이번에는 실수 없이 유위람의 머리를 깔끔하게 묶었다. 불편하진 않느냐는 물음에 유위람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보곤 만족을 표했다.

면경은커녕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면서 대단히 잘되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유위람은 대답을 하며 은근슬쩍 현서를 자신의 곁에 앉혔다.

“네, 검선의 제자가 되고 싶었지요.”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자문원이 어린 유위람을 만났을 때 이미 검각의 배분 높은 제자님이었다. 만나기 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빛나는 재능은 자문원이 직접 보아도 그러했다. 예의를 차린 소개가 오가긴 했으나 그 외에는 딱히 기억나는 일 없이, 자문원의 기억 속의 유위람은 어른스럽고 의젓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사당에서 패천검이 자문원과 가장 친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었나.’

유위람이 기억하는 과거는 어떤 것일지 흥미진진한 기대 반, 감당 못 할 얘기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걱정 반의 감정으로 현서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검선께서 제게 겸손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제 부모님도 스승님들도 절대로 제게 가르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을 말입니다.”

―자문원이?

‘언제?’

현서와 옥 둘 다 어리둥절해 했다.

“제가 아홉 살 때의 일입니다.”

이야기가 궁금한지 자신의 곁에 바짝 붙어 앉은 현서를 보며 유위람이 웃었다. 그에 부러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를 줄였다.

아홉 살의 유위람은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아이였다. 곽나난이 친척인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로 집안은 콩가루였으나 귀한 신분이었고, 일신의 재능도 뛰어났다.

검에 홀려 검각의 제자가 된 이후로도 어려운 일은 없었다. 열 살 미만이던 시절이 까마득한 세 노인네가 정도를 모르고 제자를 굴려 댔으나, 어린 제자가 우는 소리는커녕 쓰러지지도 않고 재깍재깍 해낸 탓이었다.

유위람을 제자로 받는 일 때문에 만화산 삼검왕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된 전대 검각주가 송구스러워하며 찾아왔다가 얼굴이 파래져 말렸다는 얘기는 검각 내에서 유명했다.

강도를 줄였으나 유위람의 실력은 차곡차곡 늘어 입문한 지 일 년도 안 되어 오 년 이상 수련한 이들을 거뜬히 이겼다.

“당시의 저는 좀 부아가 나 있었습니다. 스승님들께서 열다섯 명을 전부 이기고 나면 진검을 허락하겠다 하셨는데 곧 그 말을 바꾸셨거든요.”

아홉 살짜리에게 진검을 주는 일이 상식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린 전 각주 때문이었다. 성격은 좋게 말해 개차반이고, 제멋대로 구는 것에 순위를 매기자면 셋이서 머리채를 쥐어뜯어야 하는 삼노사는 그래도 사문인 검각을 져 버린 것은 아니라 각주의 체면을 적당히 챙겨주었다. 그래서 유위람은 진검을 가질 수 없었다.

그때 만화산에 자문원이 도착했다. 스승님들을 만나려고 검선의 별호를 가진 사람이 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진검 때문에 불만에 차 있던 유위람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초옥의 툇마루에 불퉁하게 앉아 있던 유위람은 길 저편에서 가만가만 걸어오는 사람의 기척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검선이라 누가 먼저 불렀는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잘 지은 별호네.’

유위람이 항의하는 걸 듣기 싫다고 도망가 있던 스승들이 어느 순간 전부 곁에 서 있었다.

‘야. 요즘은 바로 싸우자 하면 실례야?’

‘그건 우리 때도 실례 아니야?’

‘그럼, 잘됐네. 우리가 언제 체면 차리고 살았나?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잘되었지.’

곧장 합의와 납득을 거친 스승들이 검을 빼 들고 자문원의 눈앞에 순식간에 떨어졌다.

―그 정신 나간 놈들.

수십 년이 지났지만 다시 떠올려도 열받는지 옥이 욕을 했다. 여기서부턴 옥과 현서도 잘 아는 얘기였다. 검각주의 안내를 거절하고 혼자 만화산 일천봉에 있는 초옥에 도착하기 무섭게 세 명의 노사들이 공격해 왔다. 실컷 검을 휘두르고 났더니 자문원도 개운해져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긴 하였으나 초면의 후배를 공격하는 일을 잘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자문원은 잠시 지낼 곳이 필요해 만화산에 왔다. 이를테면 피신이다. 백양교 교주를 죽인 자문원의 공을 가로챈 천의맹주가 토사구팽을 가늠하자 그에 곽다순이 주선한 일이었다. 천의맹에 배신자가 나온 일로 예정보다 빨리 돌아가긴 하였으나 만화산 일천봉에 그렇게 머문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겸손을 가르친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현서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지만 미묘해진 것을 눈치챈 유위람이 웃으며 물었다.

“만화산에서 있었던 일을 옥 님에게 들은 적이 있나 보지요?”

순간 아니라고 하려다 거짓말할 일도 아니라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옥이 말해 준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표정이 유위람의 얼굴에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지금은 자신이 현서에게 설명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였다.

“저를 제자로 들이며 스승님들이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천외천(天外天)의 고수가 돌아왔다는 얘길 많이 했었지요.”

하늘 밖에 하늘, 고수 위에 아득한 고수가 있다는 뜻으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말라는 경계로 많이 쓰는 관용구다. 만화산 삼검왕이 돌아온 바람에 그야말로 살아 있는 예시가 되었다.

하지만 유위람에게 스승님들은 하늘 밖의 하늘은 아니었다. 왜냐면 자신이 언젠가 저 셋을 뛰어넘을 날이 올 것이기에. 그것은 자만이나 만용의 영역과는 다른 확신이었다.

삼노사가 자신들의 검을 물려받을 딱 맞는 아이를 찾자 공을 들여 꾄 것도 있으나 체질적으로 유위람은 검이 잘 맞았다. 무재가 출중했고 무골은 말할 것도 없었다.

흔한 말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영민함이나 또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움직임 같은 것들도 훌륭한 자질이었다. 하지만 유위람의 큰 재능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재능이라기보다는 짐승 같은 감이었지만, 유위람은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 불여우가 어디서 자꾸 수작을!

옥이 뭐라 화를 내든 귀에 들리지 않는 유위람은 현서를 다리 위에 올려 품에 안고는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 적의 일이긴 해도 천둥벌거숭이였던 시절의 얘기를 하려니 좀 긴장이 되네요. 제 얘길 듣고 호 공자가 비웃을까 봐 걱정도 되고요.”

날 때부터 오만함을 가지고 태어나 나난을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재수 없다고 평해지다 못해 감윤이 주경에게 너무 재수 없이 굴면 칼침이라도 놓으라고 조언하게 만든 유위람이었지만 현서에게는 그런 사람이 될 리가 없었다.

유위람은 현서의 앞에서는 언제나 다정하고 배려 깊은 좋은 사람이었다.

“안 비웃어요.”

어릴 때의 일을 비웃을 리도 없거니와 자문원의 기억 속 유위람은 차가워 보이긴 해도 예의 바른 아이였다. 현서가 거듭 다짐을 하고 나서야 유위람이 짐짓 민망해 하며 말했다.

“막 검을 배웠을 때의 저는 검술이 너무 재미있어서 세상을 두 부류로 나누는 놀이를 했지요. 지금 이길 수 있는 이들과 시간이 지나면 이길 수 있는 이들로 나누는 것을요.”

막 검을 배운 아이들이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그런 놀이를 많이 한다고 덧붙였다. 완비도 하는 놀이라는 얘기까지 잽싸게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위람의 말에 반대부터 하고 싶었던 옥은 어린 완비가 언급되자 입을 다물었다.

사실 옥도 현서도 일인전승 출신이라 무공을 배울 때 누군가와 비교한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더욱이 자문원은 스승님으로부터 잘한다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그것을 예뻐해서 하는 빈말이라 여겨 스스로의 실력을 오 할이나 넘게 잘라 절하하는 바람에 강호 초행 시절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스승님이 자문원을 예뻐한 것은 맞지만 그 실력을 칭찬할 때 과장이 없었던 것을 몰랐던 탓이다.

결국 자문원은 그와 같은 사실을 강호를 구르며 깨닫게 되었고, 자문원의 기억을 토대로 하고 있는 현서는 유위람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제 스승님들은 무척 강하긴 하시지만, 그래도 제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스승 셋을 전부 뛰어넘는 것은 가정이 아니라 확신이었지만 겸손하게 보이기 위해 유위람은 일부러 말을 부드럽게 썼다.

“그날이 오면 제 스승님들도 무척 기뻐하시겠지요.”

일찍이 유위람의 저 짐승 같은 감을 알아차리고 인정한 스승님들이 말했다. 그날이 오면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를 테니 얼굴 보이지 말라고. 하지만 이 역시 현서에게 말하기엔 적절하지 못했다.

사실 적시가 아니라 패기에 기반을 둔 관념이라고 받아들인 현서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뜻이 큰 것은 좋은 일이다. 더욱이 뛰어난 재능에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지금 패천검 유위람이 보이는 무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검선은 달랐습니다.”

유위람의 표정이 일순 엄숙해졌다.

“아무리 보아도 저는 검선의 나이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름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미래의 일을 셈해도 더욱 그랬지요. 제가 성장하듯이 검선께서도 나날이 발전할 테니까요. 자꾸만 커지는 태산이 눈앞에 있어 아득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천외천. 그 뜻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것 역시 말이죠.”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었다고 유위람이 덧붙였다.

스승님들의 강함과 달랐다. 스승님들 역시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고, 검에 있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들이지만 같은 나이를 두고 볼 때 자문원의 성취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가장 어린 천하제일인이 될 거라는 얘기가 빈말이 아니었다.

짐승의 본능과도 같은 유위람의 감이 말했다. 손에 닿지 않을 경지라고. 저 사람이 숨 쉬고 있는 한 뛰어넘을 수 없다고. 시기조차 생기지 않는 강함은 곧 동경이 되었다.

검선이 일천봉에 있는 내내 유위람은 검선의 시야가 닿는 곳에 있었지만 제대로 대화해 본 적은 많지 않았다. 자문원은 유위람을 볼 때마다 늘 먼저 말을 걸었으나 긴장한 유위람이 단답형으로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두고 자문원은 유위람이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오해했다.

“그래서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게 겸손을 알려주셨으니 더 굉장한 것들도 가르쳐 줄 거라 믿었죠. 그땐 어려서 이미 구배지례를 올렸고, 검각의 가장 중요한 내공 심법을 배워서 단전을 폐하지 않는 한 다른 문파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걸 몰랐으니까요.”

유위람이 현서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이 얘기는 정말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으니 비밀로 해주세요.

지금 유위람이 이 말을 해도 단전을 폐한 뒤 쫓아 낼 리는 없지만 그래도 좋은 소릴 들을 말은 아니었다. 현서는 꼭 비밀로 하겠다고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현서를 공범으로 만든 유위람이 어리광 부리며 현서의 어깨에 얼굴을 올리곤 조용조용 말했다.

“저는 그냥 검선이 좋았습니다. 그 압도적인 강함도, 그 다정함도 전부요. 제자가 되면 곁에서 그것들을 다 배울 수 있을 거라 그런 꿈을 꾸었지요.”

해가 지나 열 살이 되어 만난 검선은 여전했다. 검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열 살의 유위람은 알았지만 그래도 검선을 본받고 싶었다. 그 덕에 유위람은 대마두의 길을 가지 않고 작고 작은 양심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어깨에 턱을 살짝 걸치고 있어 보이는 것은 유위람의 등밖에 없었지만 어쩐지 유위람이 조금, 아주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어쩔까 하다가 현서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적당히 숨기고 잘라도 되는 얘기를 해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자문원의 기억과 유위람이 말은 같은 일인데도 전혀 달랐다. 유위람에게 자문원과 만화산에서 지내던 시절이 그렇게 의미가 큰 줄은 몰랐다. 서로 다른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현서에게는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만화산에서 지냈던 그 나날들 때문에 유위람이 자문원과 가장 친한 사람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린 유위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고 대화를 더 이어나가지 않은 것을 현서가 아쉬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쉬움은 현서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을 말하는 패천검을 전보다 조금 더 가깝게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현서는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역시 절대로 자문원의 환생인 걸 들키지 말아야겠다.’

저번처럼 사당에 모셔질 것을 걱정한 것은 아니지만. 유위람의 기억 속 자문원을 생각하니 알게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는 전과 달랐지만 어찌 되었든 결론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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