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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章. 신농자의 유산 (14/21)

十一章. 신농자의 유산

배는 좋은 바람을 타 예정보다 하루를 앞당긴 나흘째에 양주 풍장산 어귀에 도착했다. 꽁지깃이 예뻐 나흘간 현서의 관심을 받았던 전서조가 새로운 전서를 달고 포르르 날아갔다.

석호 역시 태호처럼 네 개의 주를 걸치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흔히 석호가 강주, 담주, 소주 세 개의 주만 걸치고 있다고 착각했다. 이유는 양주 풍장산 때문이다. 양주 동북쪽에 자리한 이 험준한 산 때문에 사람들은 양주도 석호를 끼고 있다는 사실을 곧잘 잊었다.

“여기면 괜찮겠습니까?”

선장의 말에 유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곳에 배를 대긴 했지만, 배가 더 이상 뭍에 다가갈 수 없어 정박한 것이 아니라 배가 물 위에 멈춘 것과 다름없었다. 쫓기는 것은 아니지만 가는 길의 편의를 위해 부러 이곳을 선택했다.

“성 두령께 감사 인사를 꼭 전해주시게.”

“그럼 강녕하십시오.”

유위람의 인사를 필두로 현서와 주경도 인사를 건넸다. 급박한 상황이 아니니 전처럼 화살을 날려 도움닫기를 할 필요도 없어 유위람과 주경은 가볍게 배에서 도약한 뒤 물가에 내려섰다.

이곳 풍장산에 현진을 비롯한 곽나난 일행이 있다.

할아버님의 생사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항도를 떠나기 전, 현서는 유위람에게 현진이 별성에 간 이유를 물었다. 기암일사가 현서에게 악의를 보였으니 현진에게도 무언가를 하진 않았을지 불안해서였다. 그에 유위람은 화오궁과 연관이 있음은 맞지만 사영과 연관이 있음은 확언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진이 급히 별성에 간 것은 정우문 소문주와 현서가 움직이는 시체를 처음 본 그날, 하우대 일행의 행적이 묘연하다는 소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우대 일행은 계속해서 인신매매와 유괴 사건들을 쫓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완비를 납치한 세력과 연관이 있을 것이 뻔했다.

현진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하우대 일행은 화오궁과 연결 있어 보이는 유괴의 꼬투리를 잡았다. 그것을 추적하다 양주 풍장산 부근에서 연락이 끊어졌다는 소식을 별성에 있는 호가 상단에서 다시 확인했다.

현진은 그 즉시 석청담과 송가장, 항도에 연락을 보낸 후 양주로 출발했다. 화용으로 출발하는 날까지 현서는 현진의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유위람의 말을 들은 현서는 소화리나 감윤이 화용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할아버님의 생사를 확신하지 못해 고통스러운 것과 별개로 화오궁이 양동 작전을 벌일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현진과 친구들에 대한 걱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풍장산은 무척 크고 험한 산이고 유괴된 아이들의 생사나 목적을 모르니 서둘러 많은 이들이 가야 하는 게 옳았다. 현진이 송가장에 연락을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영우곽가는 말할 것도 없고, 곤혹을 치른 검각주도 제자들을 보냈다. 검각주의 얘기를 들은 방천파에서도 사람을 보냈다. 완비의 일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면 소화리나 감윤만 움직였을 것이나 아이들의 납치, 유괴라 태호문과 청사파도 제자를 보내기로 했다. 당연한 얘기로 정우문도 움직였다.

“도련문과 정우문이 지목한 곳은 전부 다섯 곳입니다.”

풍장산은 크고 산세가 험하다. 위치가 좋지만 관에서 좋지 않게 보는 땅인 탓에 무림 세력이 자리 잡지는 않았다. 대신 수행자들, 화전민, 오가는 약초꾼들이나 사냥꾼들만 있을 뿐이었다.

유괴범을 쫓아온 석청담의 이들은 아이들이 많다는 이상한 마을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화전민이 아니어도 산에 숨어 사는 이들은 어디든 있다.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그 마을에 관한 소문이 특이했다.

목격자들은 전부 하나같이 마을이 움직인다고 말했다. 발견한 장소에 다음에 가면 마을이 없다는 얘기였다. 말쑥하게 입은 아이들이 보인다는 말도 했다. 상서로운 구름이 보이거나 아이들이 전부 날개옷을 입었다는 과장에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호기심, 혹은 탐욕에 마을에 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친 약초꾼이나 사냥꾼도 있었지만 그들 중 살아 돌아온 자가 없다는 것이 더욱 의심을 부추겼다.

그렇게 하우대 일행은 소문의 마을을 찾아 산을 뒤지기로 했다. 서둘러 도착한 현진이 하우대 일행을 찾아냈을 때 그들은 이미 화오궁의 공격을 받아 싸운 후였다. 다행히 큰 부상을 입은 자는 없었으나 자잘한 부상을 입고 고립되어 있던 차에 현진과 조우했다.

현진은 혼자는 아니었으나, 급히 오는 바람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대로 나난 일행이나 송가장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려던 그들 앞에 도련문주가 나타났다. 도련문이 어떤 곳인지를 아는 만큼 모두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련문주는 화오궁에 깊은 원한이 있어 그 때문에 풍장산에 온 것이다.

문주인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장남과 삼남이 후계 싸움을 벌이는 것은 넘어갈 수 있는 일이나 삼남이 패천검에게 자객을 보낸 것은 해선 안 될 일이었다. 경천검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던 종사상을 둔 종가가 어떻게 기울고 있는지를 알기에 더욱 그랬다.

도련문주는 대노해 삼남을 끌고 가 패천검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는 일이 있어도 이 일을 수습하려고 했다. 도련문주는 셋째 아들이 잘못된 과욕을 부린 것인 줄 알았지, 셋째가 이미 죽어 아들의 가죽을 뒤집어쓴 놈이 그 행세를 하는 중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들의 시체도 아닌, 너무도 훌륭하게 무두질된 아들의 가죽을 본 도련문주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깨어난 그를 비롯해 도련문 전체가 복수를 다짐했다.

정우문 소문주가 화오궁에 잠식당한 문파들을 말할 때 도련문을 빼놓은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지만, 그 자리에 없었던 현진은 몰랐던 것이다.

도련문은 정사지간도 아닌 암살을 의뢰받는 사파지만 적의 적은 훌륭한 내 편이다. 더욱이 아이들을 유괴하다 못해 삼태현의 일처럼 일가족을 죽이기도 했으니, 소문의 저 마을이 화오궁 세력, 혹은 조력자라면 강호의 공분을 사기에 그보다 확실한 명분은 없었다.

현서 일행이 항도를 떠나 화용을 거처 풍장산에 도착하기까지 스무 날이 좀 지났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큰 산에서 포위를 저만치 좁힐 수 있었던 것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정우문과 도련문의 활약 덕이었다. 자식을 잃었다는 공통의 분노는 물과 기름일 수밖에 없는 두 집단을 끈끈하게 묶어주었다.

“우리는 다섯 후보 중에 하나인 청우봉(靑牛峰)으로 갈 겁니다.”

마을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신선이나 요괴의 술수가 아니라 진법 때문이다. 사람들이 본 것은 진짜 마을이 아니라 진법에 의해 거울처럼 비친 잔상이었다.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으로 착각을 일으킬 만큼 대단한 진법이지만 그만큼의 제약도 존재했다. 마을이 자리하는 위치 선정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진은 실패한다. 그것을 토대로 다섯 곳을 추렸다. 현서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허탕을 쳐 제외된 곳도 있었다.

“산세가 험하니 꽉 잡으세요. 속이 안 좋거나 어지러우면 반드시 말하고요.”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에 있을 때 현서는 자신만 이대로 검각에 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유위람도 주경도 모두 반대했다.

검각주가 검각을 발칵 뒤집어 정리해 두었으니 화오궁의 손길은 없을 테지만 그 여정이 불안했다. 유위람은 현서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피력했다.

‘게다가 이 일이 끝나면 곧장 만화산으로 가서 월영사를, 이런.’

이전엔 월영사 안에 무엇이 있든 바로 부숴버리려 했지만, 이제는 일단 뭐가 들었는지 확인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뀐 유위람이 혀를 찼다. 일전에 스승님들께 허 선생의 안위를 확인하라고 당부하려던 것을 떠올린 탓이다. 워낙 여러 일들이 한 번에 터진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결국 배에서 내릴 때 날아간 새의 전서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하지만 저 새가 검각으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들에게 소식이 전해지기까지는 시일이 걸릴 것이다.

❖ ❖ ❖

새벽녘에 호숫가에 도착했던 일행은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배에서 내린 곳이 사람이 다니지 않는 절벽 아래였는지라 경공을 쓰지 않고는 오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현서는 유위람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것이 전부였는데도 유위람은 물론이고 주경까지 몸 상태를 물어 왔다. 아픈 곳도 불편한 곳도 없다고 말했는데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예정보다 빨리 도착해 급히 서둘러야 할 필요는 없으니 사양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 괜찮아요.”

현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빈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좀 쉴 때가 되었지.”

주경이 근방에 물소리가 나는 곳이 있으니 그곳에서 쉬자는 말을 했다.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맑은 개천은 깊어도 사람의 허리쯤이 고작이었다. 손을 씻기 위해 개천에 몸을 기울인 현서는 유위람과 주경이 왜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는지 이해했다. 땀범벅은 아니었으나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얼굴은 누가 보아도 더위에 익은 상태였다.

―네가 올해는 삶은 배추나 말린 무청에서 벗어나 그나마 사람 몰골을 하게 된 걸 저놈들이 몰라 놀란 탓이다.

옥이 킬킬거리며 놀렸다. 현서는 차가운 개천 물을 흠뻑 적신 영견을 옥이 있는 왼팔에 척척 걸치는 걸로 항의를 대신했다. 여름이나 겨울에 만희당 밖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던 걸 떠올리면 옥의 말처럼 올해만큼 몸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견딜 만한 것이지 덥지 않은 것은 아니라 손과 얼굴을 닦자 한결 편해지긴 했다. 내친 김에 현서는 반묶음된 머리를 아예 풀어버린 다음 하나로 묶어버렸다. 패천검의 머리를 묶을 때만큼 공을 들인 것은 아니나 그럭저럭 잘 묶였다. 드러난 목덜미도 영견으로 닦아 내자 서늘해져서 좋았다.

―진즉 머리를 묶으라고 할 것을. 만희당에서처럼 중의나 침의만 입고 지낼 순 없으니 말이다.

‘그러게.’

이런 머리는 처음이라 어색해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묶은 머리가 길게 내려오는지라 목덜미가 전부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시원해진 것은 맞아 흡족했다.

간단한 식사 후에 다시 움직이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싸우는 소리가 나는구나.

옥의 말에 현서가 살필 것도 없이 유위람과 주경의 목적지가 바뀌었다. 금방 육안으로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엉켜 싸우는 사람들 중에는 현서가 아는 얼굴들도 있었다. 방천파의 위창이 목이태와 배규선을 엄호해 가며 싸우고 있었다. 목이태가 그럭저럭 잘 막아 내고 있는 것에 비해 배규선은 부상을 입어 검을 들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금 변했네.’

위창은 자문원의 기억과 살짝 달랐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비무회에서 보았던 방천파의 제자 중 이곳에 온 것은 대제자인 목이태와 바로 아래 사제인 배규선뿐이었다. 하긴 다른 아이들은 현서가 보아도 너무 어렸으니 데리고 올 리가 없었다.

위창은 날카롭다 못해 파괴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다친 배규선을 뒤로 빼내려고 틈을 만들려 함인데 그것이 쉽지 않아 번번이 막혀 고전하는 중이었다.

현서를 싸움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곳에 내려둔 유위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난전의 한가운데 나타나 배규선의 목덜미를 잡고는 뒤로 휙 집어 던졌다. 갑자기 당한 난폭한 처사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긴 했으나 다리를 다친 것은 아니라 배규선이 바닥에 꼴사납게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싸움에서 빠지게 된 배규선은 금세 상황을 판단하고 현서의 곁으로 다가왔다.

“호 공자? 호 공자가 어찌 여기 있습니까?”

“자세한 얘긴 좀 있다가 하죠. 그보다 배 소협의 상처는 어떤가요? 약이 없으면 제게 있는 걸 드릴게요.”

조금 전 유위람이 내력으로 말려준 영견과 품에 있던 금창약을 하나 꺼냈다. 자신이 지혈하고 약을 바르는 것이 더 빠르다며 도움을 사양한 배규선에게 영견과 금창약을 건넨 현서와 옥은 싸움의 양상을 살폈다.

전력은 비슷비슷했으나 그중에 눈에 들어오는 화오궁의 강자가 두 명 있었다. 소궁주인 사영을 따라간 호법이나 장로일 듯싶었다. 일대일도 아니고, 제자들을 지키며 싸워야 하는 위창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경과 유위람의 참전으로 싸움의 형세가 바뀌었다. 이윽고 화오궁의 두 사람 중에 한 명의 팔이 유위람에 의해 날아가자 그들은 물러났다.

싸움이 끝나자 누군지도 모를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남은 사람 중 큰 부상을 입은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사망자의 신원과 부상자를 확인하면서 유위람과 대화를 이어가던 위창이 시선을 돌렸다.

부상을 입은 배규선이 아니라 현서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무어라 하는지 들리진 않았지만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강호인이 아닌 현서가 이곳에 있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뻔히 보였다. 분명 격전지에 걸리적거리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고 유위람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있을 게 뻔했다.

배규선은 위창의 말을 들었는지 난처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나 현서가 듣고 속상할까 걱정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로 현서는 아무렇지 않았다. 우선은 듣지 못했고, 위창이 진심으로 짐이라고 말했어도 그것 역시 틀린 말이 아니어서였다. 무엇보다 위창의 책망은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 위험한 곳에 있다는 걱정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마 제자들을 이곳에 데리고 온 것도 위창이 바란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백양교와 싸울 때 젊어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무시당한다며 툴툴대던 사람이 누구였는데. 배규선이 다쳐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듣지 못한 걸 알았어도 나중에 슬며시 와서 사과할 걸 알아 배시시 웃으며 눙쳤다.

“속상하면 말 험하게 하는 거 하나도 안 고친 모양이야. 왼발도 그렇고, 무슨 고집이 그렇게 세담. 황소도 자넬 보면 형님이라고 할 게 뻔해.”

푸스스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답은 잘 들리지 않았다. 물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웅웅거려 머리를 흔들자 심한 두통이 엄습했다.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릴 정도의 두통이었다.

외상을 입은 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몸이 무겁고 아픈 건 무공을 배운 후론 없었다. 왼손에 팔찌가 있으니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인데. 심한 내상을 입은 건가. 몸 안을 돌고 있는 형편없는 내력을 보니 그게 맞아 보였다.

자신이 이 정도로 내상을 입었으니 위험할 상황일 게 뻔했다. 운기하며 내상을 다스리기 전에 상황부터 알아두어야 했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데 곁에 누가 있어서 일순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까지 지척에 사람이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당장 벗어나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빈틈투성이인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으니 적은 아니지만 분명 초면인 상대였다.

날카롭지만 단정한 기세를 보아하니 이름난 정파의 제자일 텐데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성취도 높고 무척이나 잘생겼으니 한 번 보았다면 못 알아볼 리가 없는데. 더군다나 부상을 당했다 해도 모르는 이를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둘 리가 없었다.

모를 때는 물어보면 된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제가 누군지 모르십니까?”

깜짝 놀라며 반문하는 것이 필시 자신을 아는 사람의 반응이라 미안해졌다.

“기억 안 나십니까? 저는 검각의 유위람입니다.”

“유위람? 검각의 유위람? 만화산에 계시는 선배님들이 제자로 들였다는 그 유위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남자가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당황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검각의 그 제자는 이제 아홉 살…….”

―현서야!

그러고 보니 위창에게 왜 제자가 있지?

―현서야!

머리가 심하게 아프고 울렁거렸다. 거꾸로 매달린 채 멍석에 말려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아픔과 구역질 사이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바르작거리기만 했다. 말소리가 들리는데 그저 웅웅거리는 진동으로만 느껴졌다.

“헉!”

강제로 물 아래 처박혔다가 끌려 나온 사람처럼 귀가 팡 하고 트였으나 손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구역질을 해보았자 나오는 것도 없어 눈물만 주르륵 흘렀다.

“호 공자. 괜찮습니까?”

가만가만 등을 쓰다듬는 손에 고개를 돌리니 눈물 너머로 걱정 가득한 유위람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나가며 그 얼굴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시간이 지나자 구역질이 멈추고 소리도 잘 들렸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두통에 관자놀이를 누르던 현서는 그제야 훅 끼쳐 오는 축축하고 눅눅한 공기가 낯설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가 어딘가요? 좀 전까지 방천파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요? 방천파 사람들은 괜찮나요?”

걱정 가득한 현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유위람이 천천히 말했다.

“호 공자, 그건 열흘 전의 일입니다.”

유위람의 말에 현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옥과 유위람은 현서가 머리를 다쳤을까 봐 깊이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반시진이 지나자 엉킨 기억들이 전부 제자리를 찾았다.

“폭발의 충격이 컸던 모양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 사이로 겨우 현서를 붙들 수 있었지만 그 후론 까마득한 추락뿐이었다. 약한 지반이 충격에 줄줄이 무너져 탈출에 유리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동굴 안으로 급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위와 흙더미에 깔려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터였다.

현서는 기절했으나 다친 곳이 없어 안도하던 차였는데 눈을 뜨고 나서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해 유위람은 전전긍긍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대던 것도 잠시, 두통과 구역질을 호소하던 현서가 열흘간을 기억하지 못하자 천하의 유위람도 간담이 서늘했다. 열흘의 기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장 치료를 할 수 없는데 아프다는 것 때문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순간의 충격 탓이었는지 현서의 기억은 서서히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도 이곳에 떨어졌을까요? 제 옆에 주 대협이 있었는데.”

현서의 물음에 폭약이 터지던 순간을 떠올린 유위람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떨어진 것은 저희 둘과 주 대협뿐일 겁니다. 우리가 있던 곳 아래가 동굴과 연결되어 있었던 탓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떨어져 내린 곳은 이미 흙과 바위로 막혀 구조를 기다리긴 어려울 것 같으니, 나갈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할 성싶습니다.”

죽으라고 던진 화탄이니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난리가 났을 터였다. 떨어지기 직전까지 사람들이 급히 피하는 것을 보았으나 그 뒤는 어찌 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현서에게 말하진 않았다.

“일부러 만든 동굴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입니다.”

야명주나 횃대 같은 길을 밝히는 인위적인 물건은 없었으나 야광 이끼와 버섯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먹을 순 없겠지만 동굴 안에선 고마운 존재다. 유위람은 저런 것이 없어도 상관없으나 현서에겐 도움이 될 게다.

유위람이 현서를 안으려다 말았다. 동굴 천장이 낮고 울퉁불퉁한데다 만약 적이 나타난다면 앞에서 나타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유위람은 현서의 손을 꼭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네.”

떨어진 곳으로 나갈 수 없으니 길을 찾아야 했다. 주경도 떨어진 것 같았고, 어차피 흙에 파묻혀 길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하나뿐이라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동굴 안을 걷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옥이 말을 걸었다.

―좀 전에 뭐라 했는지 기억나느냐?

‘내가 뭐라고 했어?’

현서는 자신의 발치로 떨어지는 화탄을 피해보려고 죽을힘을 다해 뒤로 물러선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굉음과 동시에 바닥을 구르는 것이 기억의 끝이었다. 현서의 대답에 옥이 침묵했다.

‘무슨 일이야? 내가 이상한 소리를 했어?’

아무 일도 아니라면 옥이 물어볼 일도, 침묵할 일도 없음을 알아 현서가 채근했다.

―네가 눈앞에 위창을 둔 자문원처럼 말하더구나.

‘내가?’

―그래, 네가 말이다.

옥에 말에 화들짝 놀라 유위람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으나 깨닫지 못했다. 놀람이 가시자 기억을 뒤져 보았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자문원처럼 굴었다니.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퍼뜩 떠오르는 가정에 현서가 급히 물었다.

‘혹시 내가 패천검이 눈치챌 만큼 이상하게 굴었어?’

걱정이 가득한 물음이었다. 스스로를 자문원이라 칭하지 않았고, 동굴에 떨어진 직후라 유위람도 정신이 없었을 게 뻔해 옥도 단언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굴긴 하였는데, 그것으로 저놈이 눈치챌지는 모르겠구나.

‘……싫은데.’

현서가 중얼거렸다. 예전부터 현서는 자문원의 환생임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 말은 이상하지 않으나 팔 년을 함께 해 온 옥의 감이 그것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현서는 자문원의 꿈을 한창 꿀 때도 자문원처럼 굴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강함은 대단하고 건강은 부럽지만 한 번도 자문원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흉내를 내본 적도 없었다. 그런 만큼 자각도 못한 상태에서 자문원처럼 말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었다.

허나 지금 현서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게나 현서를 예뻐하는 가족들과 이사에게도 환생은커녕 옥이 말한다는 얘기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현서를 늘 근심 걱정 하는 가족들에게 짐을 하나 더 얹을까 봐.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위람에게 알리지 않는 것은 좀 다른 이유에서였다. 알게 된 지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사이임에도 현서는 옥이 말한다는 것을 알렸다. 복잡한 사정이 없었다면 밝히지 않았을 테지만 어찌 되었든 현서는 말했고, 유위람은 너무도 간단히 그것을 믿어주었다. 티끌만 한 의심조차 없이.

그래서 유위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상상해 보았다. 호현서가 자문원의 환생임을 유위람에게 밝히는 일을. 현서의 머릿속에서 유위람은 크게 놀라긴 하였으나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심지어 박수를 치며 기뻐하기까지 했다.

‘호 공자가 검선의 환생이라니 정말 대단합니다.’

박수를 치며 활짝 웃는 유위람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유위람이 현서를 꾀려고 무기로 삼은 화사한 웃음이 이번만큼은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웃음이 싫은 게 아니라 웃는 이유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게 상상 속이라 해도.

유위람이 기뻐하면 서운할 것 같았다.

딴 생각을 하느라 유위람이 걸음을 멈춘 것을 몰랐다. 하지만 현서가 유위람의 등에 얼굴을 박는 일은 없었다.

“막 다른 길입니다.”

동굴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떨어진 곳도 흘러내린 흙더미에 막혔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다. 이 좁은 동굴 안에 꼼짝 없이 갇혀 버렸다.

―벽이 얇은 곳이 있어.

“벽이 얇은 곳이 있습니다.”

현서가 놀랄 새도 없이 옥과 유위람이 동시에 말했다. 건너편에 다른 공동(空洞)이 있다는 얘기였다. 운이 좋았다. 만약 공동이 없이 이 굴이 끝이라면 파묻힐 위험을 감수하고 떨어진 곳으로 돌아가 흙을 파내며 길을 찾아야만 했다.

“건너편에 생물의 기척은 없군요.”

옥도 같은 얘기를 했음을 확인한 유위람은 벽에 구멍을 내 빠져나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옥과 유위람이 확인한 바로 벽은 사람 팔 길이 정도 되는 두께라고 했다. 그 정도의 돌이라면 유위람이 부술 수 있으나 문제는 여기가 동굴이라는 점이다. 동굴 천정이 충격에 무너져 내린다면 죽는 일밖에 없음이라 신중해야 했다.

현서의 입을 빌린 옥과 현서, 유위람이 토론했다. 한 번에 벽을 부수는 것은 위험이 높아 검으로 총 여섯 군데의 균열을 만든 다음 부수기로 했다. 그 다음 바로 유위람이 현서를 안고 벽 너머로 뛰어들기로 했다. 건너편에 생물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셋을 셀 테니 꽉 잡으세요.”

유위람이 두부를 자르는 것처럼 벽에 여섯 개의 금을 만들었다. 조심한다고 했어도 우릉우릉 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동굴이 흔들려 흙가루들이 떨어지자 입 안이 빠짝 탔다.

동굴 벽이 다 부서지지 않았지만 만약을 대비해 현서를 품에 안은 유위람이 약해진 동굴 벽을 찍어 내며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동굴 벽 너머에 있던 물웅덩이로 낙하했다.

‘안 돼. 바닥이 얕기라도 하면.’

현서가 자신을 꽉 껴안고 떨어지는 유위람과 방향을 바꾸어보려 했지만 가능할 리 없었다. 걱정처럼 웅덩이는 얕지 않았지만 마음에 준비를 했음에도 차가운 물에 빠지자 일순 숨이 막혔다.

물을 먹을 새도 없이 금세 밖으로 나왔으나 온몸이 젖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희다 못해 푸르게 질린 현서를 붙들고 유위람이 급히 장포를 벗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지 않은 곳이 없으니 빨리 말리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터였다.

“안 돼요.”

장포 안의 중의는 그렇다 쳐도 머리칼과 장포까지 전부 손을 댈 기세라 현서가 급히 말렸다. 동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내력을 아끼는 것이 좋았다. 왜 그러는지를 아는 유위람이 말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현서의 중의와 머리칼까지 전부 말렸지만 정작 유위람 자신은 중의만 말렸다. 주변의 기척을 살펴 안전하다는 것이 확인되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대강 짜고는 자신과 현서의 장포를 적당한 곳에 펼쳐 두었다.

“혹시 모르니 잠시 쉬었다 움직이는 것이 낫겠습니다. 불을 피울 수가 없으니, 혹 춥지는 않습니까?”

“네.”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현서는 희미한 야광 이끼의 빛을 더듬어 챙겨 온 물건을 살폈다. 옷 안에 잔뜩 넣어 온 것들 중 물에 닿았다고 못 쓰게 되는 것은 없었다. 물에 빠질 줄은 몰랐지만 비에 노출될 경우를 상정해 둔 터라 이 정도는 괜찮았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자신의 약이었다. 아껴 먹으면 한동안 버틸 수는 있지만 그런 만큼 변수를 조심해야 했다.

―아직은 괜찮으니 그리 걱정 말거라.

옥의 위로를 들으며 현서는 젖은 영견을 힘주어 꾹 짰다. 더듬더듬 움직여 유위람의 곁에 바싹 붙은 다음 물기를 짠 영견으로 유위람의 머리칼을 두들겼다. 마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손으로 물기를 훑어 내리는 것보다는 나으니 말이다.

반사적으로 말리려던 유위람은 현서의 얼굴을 보곤 가만히 있었다.

―네가 의기소침해 할 일이 아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대답과 달리 목소리에 힘은 없었다.

아홉 살 이후의 현서는 언제나 먼저 챙겨지고 돌보아지는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휘두를 수 있는 만희당에서도 그러하였으니 풍파가 거친 무림에선 말할 것도 없었다.

그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오궁의 공격을 받고, 목이 잘릴 뻔한 적도 있었으나 현서는 이 여정에서 자신이 놀랄 만큼 운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인 이상 자신의 모자람에 풀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견으로 유위람의 머리칼을 말리며 가만히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는 현서에게 유위람이 물었다.

“제가 호 공자의 말을 듣지 않아 서운하십니까?”

“……예? 그럴 리가. 전혀 아닙니다.”

현서가 깜짝 놀라며 부정했다. 현서를 버리고 갈 것이 아닌 이상 유위람이 현서를 먼저 챙기는 것이 정석인 수순이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 몸이니 여기서 아프기라도 하면 손쓸 여지가 없이 큰일이 된다.

패천검의 마음씀씀이를 자신이 오해하고 있다고 여길까 급히 덧붙였다.

“패천검의 판단이 옳은 것을 압니다. 더욱이 저를 염려하는 걸 번연히 아는데 서운하다니요. 제가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화들짝 놀라 구구절절 말하는 현서가 귀여운 것과 별개로 마음 졸이고 있음이 느껴져 좋지 않았다. 유위람이 몸을 돌려 현서의 손을 잡았다. 마음 풀리라고 머리칼 닦는 것을 내버려 두었더니 그새 차가워진 손에 혀를 찼다.

“서운하냐고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제가 잘못 말하였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그저 휩쓸리는 것 같아 속상하지요?”

유위람은 자신의 물음에 현서가 작게 머리를 끄덕이자 좀 더 편히 대화하겠다는 핑계로 언제나처럼 들어 무릎에 앉혔다. 하도 해 버릇해 익숙한 탓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 중이라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현서는 유위람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굳이 무릎에 앉히는 것이 불만이었으나 지금 끼어들 일은 아니라 옥은 입을 다물었다. 유위람이 자신을 달래는 걸 알아 현서는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 애처럼 군다고 옥에게 왕왕 말할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유위람에게 애처럼 보인 것은 부끄러웠던 탓이다.

“무력감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입니다. 날 때부터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은 없고,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길지 아무도 모르니 말입니다. 언제나 좋은 일, 잘할 수 있는 일만 만나면 그것이 어찌 인간의 일이겠습니까. 신선도 그리 살지는 못할 겁니다.”

현서를 달래기 위해 입바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열 살의 유위람은 개웅산에서 무력감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배웠다.

“좋지 않은 감정임에는 틀림없지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후에 나아갈 바를 알려주니까요.”

듣고 있던 현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현서는 자신의 몸이 약하고, 무공을 익혔으나 강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주지하고 있어 그에 맞추어 살아 왔다. 서녕호가의 자손인 만큼 남들보다 선택지가 다채롭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직면해도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고 여기며 지내 왔다.

그것은 화오궁과 얽히게 된 후로도 변함없었으나 할아버님의 일 이후로 불안함과 초조함이 조금씩 스며들어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더욱이 풍장산에서는 현서가 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라 더욱 그랬다. 그런 상황에서 동굴에 떨어져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던 것이다.

‘그래, 불안해 한다고 해서 갑자기 자문원처럼 고강한 무공을 지니게 되는 것도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는 않을 테지. 거기서부터 하나씩 하자. 가만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러니 호 공자는 화를 내야 합니다.”

유위람의 조언을 받아들여 마음을 가다듬던 현서는 뚱딴지같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화요?”

“네. 저와 항도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멋대로 벌인 일에 휘말리다 못해 동굴 안에서 이리 헤매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괘씸한 일이지요. 그러니 소궁주를 만나면 머리를 쥐어뜯어 주겠다고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습니다.”

유위람은 사영의 목을 자르라고 하려다 현서에게 권할 일이 아님을 깨닫고 급히 선회했다. 그 외는 구타나 고문이 있는데 그것도 추천할 수 없는지라 급히 적당한 방법을 찾은 것이 머리를 쥐어뜯는 일이었다. 이른 바 말실수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심이 없어 뻔뻔하기론 만화산 스승님들과 자웅을 겨루는 유위람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무력을 느낀 이후에 화를 내라는 조언 자체는 몰라도 대뜸 사영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라니.

“제가요? 소궁주의 머리를요? 그럴 수 있을까요?”

“제가 목을 잡고 있을 테니 호 공자는 쥐어뜯기만 하면 됩니다.”

―어쩐 일로 저놈이 마음에 드는 소리를 다 하는구나.

머리를 쥐어뜯는 것은 둘째치고 너무도 당당하게 사영의 목을 잡아 대령하겠다는 말에 현서는 소리 내 웃었다. 유위람의 말이 농담인 줄 알아서였다. 현서가 웃자 유위람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이윽고 웃음을 멈춘 현서가 유위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패천검께서 너무 손해를 보고 계신 것 같아서요.”

유위람 덕에 조급함으로 위축되었던 마음은 풀어졌으나 미안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유위람이 자신을 챙기느라 쉽지 않은 행로를 가는 것을 알아서였다. 사람을 지키면서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곤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는 것이니 딱히 손해랄 것도 없습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호 공자를 돕는 것이 아니지요. 화오궁이 저 또한 적대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같은 적을 두고 함께 싸우고 있는 겁니다.”

대단히 정석인 말이었다. 유위람은 현서의 앞에서 언제나 예의 바르고 친절한 무림 명숙의 모습을 보였으니 이와 같이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현서는 유위람이 이처럼 말하는 것에 내심 놀랐다.

“엄정한 가르침이 다르니 과연 검각입니다.”

현서의 칭찬에 유위람이 잘라 말했다.

“저는 이것을 검선께 배웠답니다. 그분께서 하신 말이지요.”

그렇다. 자문원은 종종 그렇게 말했다. 어린 유위람의 앞에서 한 것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현서는 자문원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안다.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한다는 자문원의 말은 겸손도 배려도 아닌 담담한 사실 고백일 뿐이었다.

사당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의 제자 얘기도 그렇고 구명지은을 입었다고 하나 같이 한 시간이 짧았는데도 불구하고 자문원이 유위람에게 끼친 영향이 막대함을 느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데운 죽을 받았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인데 이게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현서의 복잡한 심정을 모르는 유위람이 이어 말했다.

“물론 제가 호 공자를 더 각별히 대하는 것은 맞습니다. 좋아하는 상대에겐 늘 잘해주고 싶으니까요.”

자문원이 유위람에게 끼친 영향에 관해 가늠하던 현서의 머릿속이 단번에 깨끗해졌다. 유위람이 현서에게 품은 감정을 입에 담은 것이 이로써 두 번째였다. 옥이 무어라 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도 않았다.

멍하니 패천검의 얼굴을 보던 현서가 언젠가의 고민을 기억해 내어 불쑥 물었다.

“제가 뭘 알면 되나요?”

“무엇을 말입니까?”

현서는 저도 모르게 유위람의 상체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붙었다.

“그때 저를 연모한다고 말하며 지금은 알아만 달라고 하셨지요. 그럼, 그럼, 제가 알고 난 다음은요?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고, 제가 무엇을 알아야 그 다음이 되는 건가요?”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고개를 바짝 들고 유위람을 바라보는 현서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조급함이 있었다. 어스름한 야광 이끼에 의지하는 현서와 달리 유위람은 현서 얼굴의 솜털까지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그러니 현서의 순하고 까만 눈에 감정이 담겨 일렁이는 것이 너무도 잘 보였다. 그 눈에 담긴 사람은 다름 아닌 유위람 자신이었다. 본능이 지금이라고 부추겼다.

“호 공자가 궁금해 하는 것이 이렇게나 기꺼울 줄은 몰랐습니다.”

유위람이 활짝 웃었다. 이대로 동굴 안에 영영 갇힌다 해도 배불리 살 것 같았다. 화사한 미소에 걸린 눈이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불행히도 현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옥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 하나 싶어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니. 옥이 현서에게 저 눈 돌아간 짐승 놈한테서 떨어지라고 말하기 전에 유위람이 선수를 쳤다.

옥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지만 역시나 짐승 같은 감이었다.

“그럼 호 공자, 조금 알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조금요? 어떻게요?”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물었을 뿐이지, 반쯤은 동의나 다름없는 대답이라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린 유위람이 현서의 허리를 휘감아 빈틈없이 끌어당겼다. 그제야 유위람의 의도를 알아차린 현서가 굳었다. 그러나 거절도 허락도 없이 유위람을 향한 고개를 숙이지도 못했다.

기이한 일이다. 잘 보이지도 않는데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참을 수 없어진 현서가 마른 침을 삼키며 바르작거리는 순간 유위람의 입술이 현서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유위람이 고개를 숙인 바람에 덜 말라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칼이 현서의 목덜미에 닿았다. 순간 움찔한 몸이 무엇 때문에 놀랐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너, 너, 네놈!

곧이어 터지는 옥의 노성에 다시 한번 움찔했다. 유위람의 입맞춤에 반응할 새도 없었다. 옥이 화를 내자 현서는 그제야 둘만 있는 것 같았던 순간에 옥도 있었음을 깨달았다. 새빨개진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현서는 귀여웠지만 유위람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런, 옥 님이 화를 내시나 봅니다.”

유위람이 한 손으로 현서의 왼 손목을 붙들어 잡았다. 유위람의 손바닥 아래로 옥이 가려졌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옥이 보지 못할 리 없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팔목을 잡은 유위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화를 안…….

옥이 말을 멈췄다.

시뻘건 얼굴로 유위람과 팔찌를 번갈아 보는 현서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다시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을 살살 핥는 바람에 깜짝 놀란 현서가 입을 벌리자 미끄러지듯 혀가 들어왔다. 현서의 이십 년의 인생은 말할 것도 없고, 자문원의 기억에서도 보지 못한 일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물컹한 살덩이가 입 안에 들어오자 장승처럼 뻣뻣하게 굳은 현서의 등을 유위람이 부드럽게 문질렀다. 팔찌를 잡고 있는 오른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으응. ……읏.”

타인의 혀가 여린 점막을 훑을 때마다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처음 겪는 쾌락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은 현서나 유위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상상했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족감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몸으로 배우는 것은 뭐든 빨랐다. 자신이 금세 혀를 얽으며 숨을 쉬는 요령을 익힌 것과 달리 현서는 온몸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접문 한 번 하자고 현서를 기절시킬 수 없으니 유위람은 아쉬움을 참으며 입술을 뗐다.

한 번에 공기가 들어가면 필시 기침이 터질 것이다. 유위람이 현서를 살살 달래며 숨통을 틔워주었다. 얼굴 여기저기를 입술로 꾹꾹 눌러가며 현서의 숨이 고르게 변하는 걸 살핀 유위람은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이 볼을 따라 흐르자 혀를 댔다. 따뜻하고 축축한 혀가 볼을 싸악 핥아 올리자 넋이 나가 있던 현서가 화들짝 놀랐다.

“왜. 왜. 지금. 무슨.”

현서는 문장 하나도 완성시키지 못했지만 얼굴엔 이게 무슨 짓이냐는 당황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호 공자의 눈물을 볼 때면 늘 해보고 싶었거든요.”

오늘에야 해보는 군요. 유위람의 말에 현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만 깜박였다. 왜 남의 눈물을 핥고 싶었는데. 현서의 얼굴에 드러난 의문에 유위람은 또 웃었다.

“상상처럼 달지도 짜지도 않습니다. 허나 제 마음이 매우 달군요.”

이번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아예 말문이 막힌 현서를 보며 유위람이 웃었다. 야광 이끼가 있어도 어둑해 잘 보일 리가 없는데도 태양 아래서 본 것처럼 선명한 웃음이었다.

“요령은 제가 익힐 테니 호 공자는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그게 무슨 얘기냐고 입을 벌린 현서의 입술 위로 다시 유위람이 들러붙었다.

접문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숨이 막혀 머리가 몽롱해질 쯤이면 귀신같이 물러났다. 가쁘게 숨을 고를 때마다 칭찬하듯 유위람의 입술이 현서의 입가를 지분거렸다.

이게 혀를 얽는 접문의 연장인지 아니면 전부 하나하나 다른 것인지. 제대로 된 사고가 가능하지 않은 현서의 머릿속은 그저 멍하기만 했다.

“흣.”

그와 반대로 쾌감은 무서울 정도로 선명했다. 유위람의 큰 손이 등줄기를 뭉근히 문지를 때마다 현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끙끙 앓기만 했다.

아플 때처럼 온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는데 아프진 않았다. 그저 오감이 무서울 정도로 예민해져 혀가 얽히는 젖은 소리와 등 뒤를 어루만지는 단단한 손이 전신을 짓뭉개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아니, 좋은 게 과해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일은 처음이었다. 현서가 품 안에서 움찔거리는 것을 숨이 막히는 것으로 이해한 유위람이 아쉬움을 참고 재차 입술을 뗐다.

“이……! 그!”

이제 접문이 끝났다고 여겨 슬그머니 몸을 빼려던 현서가 화들짝 놀라 유위람을 바라보았다. 유위람의 얼굴에도 홍조가 올라 발그스레했는데 기쁨과 만족을 한껏 드러낸 얼굴은 환하다 못해 번쩍거릴 지경이었다.

백 리(약 40km) 밖에서 봐도 기쁨을 알 수 있는 얼굴에 잠시 말을 잃은 현서는 곧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아니, 차릴 수밖에 없었다. 본의 아니게 유위람의 다리 위에 앉아 있는 터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몸이 약해 모든 것이 늦되었지만 현서도 사지 멀쩡한 남자니 자신의 몸 아래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서로 중의만 입고 있어 열기를 품고 꿈틀거리는 것이 더 잘 느껴졌다.

현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유위람은 그가 빨갛다 못해 하얗게 질리는 것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너무 좋아 그런 것이니.”

쪽 소리가 나게 눈가에 입을 맞추며 하는 말이 너무 덤덤해 현서는 일순 자신의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엉덩이 아래의 감각이 착각이 아니라고 확실히 알려주었다.

“아니, 그렇지만. 그게.”

저렇게 내버려 둬도 되는 건가. 내가 비켜야 할 것 같은데. 남의 것이 자신의 아래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일이 준 충격은 접문의 두 배 이상은 되었다.

유위람은 허둥지둥하는 현서의 이마에 입 맞추며 반대쪽 허벅지 위로 옮겨 안았다. 내려놓을 생각은 없지만 현서가 놀랐고, 아닌 척해도 자신도 편치 않으니 은근슬쩍 위치를 바꾸었다.

“제가 조금이라 하였으니 지금은 몰라도 됩니다.”

일전에 들었던 말이 이렇게 의미를 달리해 쓰일 줄은 몰랐다. 더욱이 이건 현서가 못 알아들을 여지도 없었다. 다음에는 현서 아래 깔려 있던 저걸 알아달라는 뜻이지 않은가.

“이게 조금. 조금이라고요.”

“그럼요.”

유위람이 고개를 숙여 코를 비볐다. 접문 후에 보이는 친근함이 이제까지의 거리감을 와장창 부수며 훅 치고 들어와 현서는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게 접문으로 고삐가 살짝 풀린 상태라는 걸 현서는 알지 못했고 알았다고 한들 믿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게 어디가 조금…….”

온몸을 찌르르 하게 만든 쾌감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거짓부렁을. 이제껏 유위람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이건 틀림없는 거짓말이다.

현서의 눈에 불신이 차올랐지만 유위람은 떳떳했다. 정말 조금이었기 때문이다. 현서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발라 먹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일생을 현서에게 주겠다고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조금이 맞습니다.”

그러니 유위람은 거리낌 없이 당당했다.

“어땠습니까?”

“무엇이요?”

“접문 말입니다. 거부감이 느껴지거나 싫지는 않았지요?”

싫기는커녕 너무 기분이 좋아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기분 좋은 이유가 처음 해본 접문 때문인지 아니면 접문 상대가 유위람 때문인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건 몰랐지만 일단 현서는 고개를 재깍 끄덕였다.

그에 유위람이 크게 안도하며 활짝 웃었다. 싫어하는 사람의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현서가 확인해 주는 것과는 또 다르니 말이다. 유위람은 아주 기분이 좋아서 지금 사영을 만나도 예쁘게 반 토막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호 공자가 싫지 않다면 되었습니다.”

뭐가 되었다는 건지, 현서는 아리송했지만 또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또박또박 말로 풀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유위람이 보이는 격렬함이 와 닿았다. 때문에 이제껏 유위람과 현서의 관계를 설명하던 보호자, 완비의 은인, 넓은 의미의 지인 같은 정의 말고 다른 말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접문해서 기분 나쁘지 않은, 아니, 접문해서 기분 좋은 사람은 저 세 가지로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으니 말이다. 허나 유위람이 말하는 연모냐고 물으면 자신할 수 없었다. 호의, 호감 등 현서가 유위람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들은 대체로 긍정적이었으나 그것이 꼭 연모와 닿아 있지 않음을 알아서였다.

머릿속은 엉망이고 심장은 평소보다 두근거렸지만 싫지 않았다. 눈이 시리도록 웃고 있는 유위람을 보니 아무렴 어때 싶어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음이 났, 아니, 나다 말았다.

―호 현 서.

현서가 유위람의 품에서 호다닥 떨어져 정자세로 앉았다. 평소의 현서를 떠올리면 발군의 움직임이었다.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은 미인도의 한 장면 같았지만 유위람은 옥 님이 대노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나쁜 짓을 하다 부모님에게 들킨 것 같은 현서의 모습을 옥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만년설처럼 차가운 목소리는 현서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속에서 천불이 나다 못해 없는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또한 현서 때문은 아니었다.

―네게 화가 난 것이 아니야.

‘응.’

―나는 네가 무엇을 하든 언제나 네 곁에서 너와 함께하고, 네 뜻을 존중할 테지만 저 남자에 관해서는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어 보이는구나.

‘응.’

―지금 하자는 것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지.

옥은 자신이 본 게 무엇인지, 없는 눈알을 박박 씻고 싶을 정도였다. 저 날강도 같은 불여우 놈이! 현서를 다그치거나 현서에게 화를 낼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이 울화를 왁 하고 쏟아 내야 했다. 옥의 말이 언제나 현서의 귀에 들리는 것은 아니나 감정이 격해진 만큼 만에 하나도 조심하고 싶었다.

유위람은 그림처럼 가만히 있던 현서가 왼팔에서 팔찌를 빼는 것을 보았다. 현서의 손목보다 팔찌가 살짝 큰 건 알았지만 순식간에 훌렁 빠지는 모습이 의아했다.

그러고 보면 현서의 팔목과 무인인 자문원의 팔목은 두께가 다른데. 그때 옥 님의 크기가 어떠했더라, 유위람은 거기까지 떠올리곤 더 파고드는 것을 그만두었다. 팔찌가 말을 하는 판국에 크기 차이가 좀 나는 게 무슨 대순가 싶었다.

팔찌를 손바닥 위에 곱게 올려둔 현서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말리고 있는 장포 위에 조심히 올려두고 물러섰다.

“옥 님이 저리 해달라고 하셨습니까?”

“네? 예. 잠시 혼자 있고 싶다고.”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는 유위람의 물음에 곧잘 대답하지만 현서의 시선은 옥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현서와 팔찌가 가진 유대가 짐작이 되어 질투하지는 않았으나 조금 아쉽긴 하였다.

‘옥 님이 나를 싫어하는 건지. 현서에게 접근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건지 모르겠군.’

어느 쪽이든 유위람이 헤쳐 나가야 할 문제다. 현서의 마음을 얻으면 서녕호가의 반대는 문제없으리라 여겼던 적이 있었다. 그땐 옥 님의 존재를 모를 때였다. 지금도 현서의 마음이 최우선인 건 변함없지만 호부의 반대보다 옥의 반대가 더 높은 산이 될 것임을 알았다.

“얼마나 혼자 계시고 싶답니까?”

“어. 일 각(15분) 정도요?”

이제껏 옥이 화를 내도 팔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지라 현서의 눈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현서를 뒤에서 껴안은 채 유위람이 몇 가지를 물었다. 옥이 마음의 진정을 찾는 동안 유위람은 옥 님의 정보를 수집했다. 하지만 옥에게 정신이 팔린 현서는 그걸 몰랐다.

‘태생이 팔찌라 그런지 사람이 착용하고 있지 않으면 지각의 선명함에 차이가 생긴단 말이지.’

유위람이 알게 된 가장 큰 성과였다. 앞으로 현서와 하게 될 수많은 일들을 염두에 두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아도 모자람 없는 말이었다.

잠시 후, 현서가 팔찌를 잡으려고 하자 유위람이 말리며 대신 잡아 들었다. 현서가 하듯이 손바닥 위에 팔찌를 올려두고 진지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옥 님께서 저를 저어하시는 것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비단 제가 아니라도 호 공자에 대면 누구라 해도 부족하니 당연한 일입니다.”

현서가 입을 떡 벌렸다. 농담도 비아냥거림도 아니라 그게 더 무서웠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려는 현서의 왼손을 잡으며 유위람이 눈웃음을 쳤다. 시선은 옥을 향해 살짝 내리깔고 있었으나 유위람보다 키가 작은 현서 역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서녕에 쌓인 혼서로 탑을 쌓을 수 있다고 하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누군들 호 공자를 알게 되면 그 곁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천하에 뛰어난 가인(佳人)과 지자(智者)들이 호 공자의 구혼 목록에 이름을 올렸겠지요.”

가족들과 만희당 사람들의 몸 둘 바를 모르게 만드는 상찬도 그런가 하고 넘기는 현서조차도 귀를 틀어막고 줄행랑을 치게 만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유위람이 팔을 잡고 있어 귀를 막을 수도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감히 제가 천하제일이라는 말은 할 수 없으나, 이것 하나는 자신 할 수 있습니다. 호 공자와 일생을 나누려는 사람들 중에서 저 이상의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요.”

옥을 바라보며 현서를 아연하게 만드는 말을 청산유수처럼 쏟아 내던 유위람은 현서의 왼손에 팔찌를 끼우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부디 저를 어여삐 봐주세요.”

현서의 손을 쥐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하는 저 마지막 말은 옥에게 하는 것인지 현서에게 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지금 쟤가 뭐라는 것이냐.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 한 말이었다. 서리 낀 꽃 같은 얼굴이 방긋방긋 웃을 때마다 현서의 정신도 같이 방긋거리는 게 문제였다.

옥도 현서도 현란하기 그지없는 말과 얼굴에 말려 유위람이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구혼자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저 멀리서 울리는 우렁우렁한 진동도 유위람의 기쁨을 흐리진 못했다. 현서가 멈칫하며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서가 더 걱정할까 봐 부러 말리지 않고 내버려 둔 장포는 여전히 눅눅했다. 유위람은 내력으로 장포를 말린 뒤 현서에게 입히며 말했다.

“가까운 곳이 아닙니다.”

당장 이동할 것은 아니나 동굴 안이 서늘하니 입고 있는 게 나았다. 신발도 제 손으로 안 신을 것 같이 생긴 유위람은 제법 시중을 잘 들었다. 현서에게 장포를 입히고 허리에 요대를 꼼꼼히 둘러준 뒤 그대로 일어나 손을 뻗었다.

풍장산에 오른 이후로 하나로 가지런히 올려 묶은 머리만 하던 현서였다. 현서와 마주 보고 머리칼을 매만지는데도 곧잘 묶은 뒤 이마에 입을 맞추곤 한 걸음 물러섰다.

접문을 현서가 싫다고 하지 않았으니 입대는 모든 것을 허락을 받았다고 결론 내린 유위람이었다. 마음이 넘칠 때마다 입 맞출 수 있게 되니 속이 시원했다.

“동굴에 떨어진 지 한나절은 족히 지난 듯합니다. 호 공자, 배는 고프지 않습니까? 약을 먹을 때가 된 것 같은데.”

한나절이 지났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을 정도로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며칠치의 기력을 몰아 쓴 것 같아.’

먹는 것이 적고 허기를 잘 느끼지 않지만 먹지 않으면 금방 티가 난다. 현서는 기름종이에 싸여 있는 과자들을 전부 꺼냈다. 그나마 마실 만한 물이 있어 다행이었다.

“저는 무인이라 며칠 먹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최대한 빨리 동굴을 빠져나가야 하지만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우선 호 공자만 먹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련 중에 며칠 굶는 건 예사라고 덧붙였다. 먹을 게 없었다기보다는 벽곡단이 먹기 싫어 굶은 것이지만 그것까진 말하지 않았다. 현서도 유위람 정도의 무인이 굶는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알지만 혼자 음식을 먹으려니 속이 편치 않았다. 남은 과자를 반으로 나누어 유위람에게 주었다.

“그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오래도록 헤매게 된다면 그땐 패천검도 먹어야 합니다. 많지 않은 음식입니다만, 아니, 그렇기에 먹는 것이 저희 둘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아시지요?”

“네, 그때가 되면 사양치 않고 먹겠습니다.”

동굴 안에서 헤매는 기간이 짧다면 유위람의 제안이 낫고, 반대라면 현서의 제안이 낫다는 의미다. 유위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서가 과자 하나와 약을 먹었다.

“호 공자의 약은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아마 엿새를 넘기지는 못할 겁니다.”

“약을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가장 좋은 것은 엿새를 넘기기 전에 동굴을 빠져나가는 것이나 모든 일이 술술 풀리지 않는 경우도 대비해 두어야 했다. 유위람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현서가 대답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약이 듣지 않아 아픈 적은 있었으나 약을 먹지 않은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제 몸 상태를 보면 며칠 먹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상세가 나빠지진 않을 겁니다.”

애당초 완치를 바랄 수 없는 몸이다. 화정의 약은 말할 것도 없이 뛰어났으나 이 정도로 좋아진 것에는 사문의 내공심법이 큰 작용을 했다. 아마 약이 없어도 내력 때문에 금세 피를 토하거나 기절하진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엿새 안에 동굴을 빠져나가도록 해야겠군요.”

“네, 이곳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지만 동굴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 조심해야지요. 주 대협의 일도…… 걱정이 되고요. 무사……하셔야 할 텐데…….”

폭발에 휘말려 동굴에 떨어진 것도 큰일인데, 거기에 물에 떨어지는 것도 모자라 유위람의 끈질긴 접문까지 모두 뜬 눈으로 겪었으니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으나 이제 한계였다. 약을 먹기 전부터 잠기운이 가득했던 현서는 어느새 졸고 있었다.

“편히 자도 됩니다.”

유위람이 냉큼 현서를 품에 안더니 이미 잠든 현서가 아니라 옥을 보며 말했다.

“바닥이 차갑습니다. 제게는 시원한 정도지만 호 공자에겐 분명 추울 겁니다. 물에 빠진 데다가 불을 피울 수 없으니 사람 체온이 제일이지요. 더욱이 일전에도 보셨다시피 만일의 경우엔 제 내력도 도움이 될 겁니다.”

다 옳은 말이다. 다 옳은 말인데 떨떠름한 이 복잡한 기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이 말한 대로 현서와 평생을 같이 있을 옥이다. 현서가 유위람을 밀어내지 않았으니 옥도 저 눈알 시커먼 놈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두어야 했다.

처음 유위람을 보았을 때 경계를 하는 쪽은 현서였고, 옥은 제법 괜찮은 젊은 준걸로 보았다. 분명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눈에 차지 않았다.

―저놈이 일 번이라서 그런가.

유위람의 말처럼 현서의 곁을 노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 전부를 꼴 보기 싫어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수많은 혼서가 있다는 얘긴 들었지만 옥은 늘 현서와 있었다. 현서가 혼서를 보지 않았으니 옥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상사병을 앓는다는 이들에 관한 얘기도 전부 듣기만 했다. 그러니 현서에게 대놓고 수작을 부리는 놈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뭐든 처음은 특별히 마음에 안 든다. 곽다순 놈을 보아도 그렇다.

옥이 혼자만의 이론을 세우는 동안 잠든 현서를 양껏 껴안고 있는 유위람은 유위람대로 다른 생각 중이었다.

‘패천검으로 부르는 것은 너무 딱딱하지 않나? 좀 더 친근하게 불러주면 좋겠는데.’

접문까지 한 사이지 않은가. 현서가 잠들기 전까지의 대화를 떠올렸더니 그 예의 바름이 괜히 거리감 있게 느껴진 탓이다.

‘위람이라고 불러주어도 좋은데. 하지만 호 공자의 성정에 유위람이라고 부르는 일도 없겠지.’

유위람이 현서가 부르기 좋은 적당한 애칭을 고민하는 것을 옥이 알았다면, 이래서 네놈이 더 싫은 것이라고 욕을 했을 터였다.

‘하다못해 화운검이나 이사에게 하듯 말도 좀 더 편하게 해줬으면 좋으련만. 일전 영우에서 재회하였을 때 둘을 대하던 어리광 섞인 다디단 목소리로 친근하게 불러주면 좋을 테지.’

유위람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변했다. 허나 거기에 유위람이 현서를 친근히 부르는 사안은 없었다. 나이 차이가 있으니 자신이 친근하게 불러도 특별함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화정이 괜히 현서에게 유위람의 성격이 이상하다고 평한 것이 아니었다.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현서는 분명 옥 님에게 말할 때도 화운검이나 이사를 대할 때처럼 친근하겠지. 그것 역시 제법 부러운 일이었다. 당장 패천검이라는 호칭을 떼는 것이 어려우면 말이라도 좀 편하게 해보라 권해볼까 하던 유위람은 현서가 생소한 어투로 말했던 일을 떠올렸다.

‘이제껏 보아왔던 호 공자의 말투와 완전히 달랐지.’

동굴로 낙하하며 기절했다 정신을 차린 직후라 엉뚱한 말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금세 정신을 차리기도 했고, 현서는 물론이고 유위람도 동굴에 갇힌 것이 더 큰일이라 여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말투.’

검선을 닮았다. 푸스스 웃는 것은 몰라도 낯선 것을 대할 때의 표정이나 미안해 하는 말투는 알았다. 검선에 관해선 방에 있던 차탁 모서리까지 복원해 내는 기억력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꼭 같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현서가 걸려 있어서였다.

유위람의 눈이 자연스럽게 현서의 왼팔에 있는 팔찌에 가 닿았다. 어떻게 산을 벗어났는지 모를 검선의 팔찌, 현서와 말을 할 수 있는 신물.

‘눈앞의 보물을 너무 믿지 마려무나.’

담주 난화에서 만났던 그날 곽다순이 보낸 전음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유위람이 인상을 썼다. 귀에 부어둔 독이다. 곽다순이 유위람에게 좋은 말을 해줄 리가 없으니 그 말의 진위 여부를 어찌 믿는단 말인가.

―뭘 봐.

“제가 잠시 헛된 생각을 하여 그렇습니다.”

단순히 옥이 듣고 말할 수 있음을 알아 한 말이긴 하였으나 옥의 말을 들은 것 같은 시기적절한 대꾸였다. 현서를 추슬러 안으며 유위람은 이 의문을 고요히 가라앉혔다.

“으응.”

접문을 한 횟수가 양손으로 꼽을 수 없어지면서 유위람이 숨을 틔워주는 횟수가 줄었다. 유위람이 양껏 몰아붙이지 않은 덕인 줄 모르는 현서는 꼼짝 못 했던 첫날과 달리 서툴게 혀도 얽으면서 내심 의기양양했다.

“흐으응.”

입술이 엉키며 내는 젖은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현서는 제가 뱉어 내는 소리들이 생소해 연신 도리질을 치며 물러났다. 그때마다 유위람이 혀를 얽어 쫓아왔다.

온몸을 뭉근하게 만드는 쾌감이 만족스러우면서도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은 기분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현서의 마음을 아는 건지 유위람은 왼팔을 잡지 않은 손으로 현서의 등과 허리를 끊임없이 매만졌다.

조카들이 해주듯 볼과 콧등에 내려앉던 유위람의 입술은 어느 순간 현서의 입술과 농염하게 뒤얽히기를 반복했다. 혀를 섞는 접문이 끝나고도 유위람은 못내 아쉬운 듯 입술 양끝과 눈가, 이마 등에 쉴 새 없이 입술을 찍어댔다. 현서의 드러난 피부 온 곳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말이다.

기분 좋은 단 숨을 내쉬던 현서는 유위람이 잡고 있던 왼팔을 놓으며 손끝에 입을 맞추자 그제야 정신을 챙기곤 슬그머니 손을 숨겼다.

옥이 유위람과 접문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첫 접문 이후로 조심하려 했지만, 어느 순간 홀려 입을 벌렸다. 유위람이 혀로 입천장을 긁을 때마다 발끝이 곱아드는 생경한 감각도, 온몸의 감각이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곤두서는 이 느낌도 전부 좋았다. 무엇보다 유위람과 나누는 친밀한 몸짓과 다정한 온기가 좋았다.

―운기해라.

‘으…… 으응.’

옥의 눈치를 본 현서가 냉큼 온몸에 퍼져 있는 내력을 움직이며 운기했다.

수시로 입을 맞추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위람의 사심이었다. 그러나 옥은 탐탁잖은 기색을 내보였어도 대놓고 반대하며 현서에게 입을 대지는 않았다.

옥이 보고도 모르쇠 하는 속내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두 개였는데, 그중 첫 번째가 유위람이 일단 사람이긴 해서였다.

옥은 현서가 유위람 없이 동굴에 외따로이 떨어졌다고 해도 비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것임을 안다. 당연히 자신이 곁에 있으니 혼자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곁에 사람이 있어 얻는 안정도 있다는 것 역시 안다. 그것이 중요한 것도. 옥은 유위람이 현서에게 온기를 나눠주는 사람 모양의 탕파라고 염불을 외웠다.

다른 하나는 지금 현서가 하는 운기와 연관이 있다. 동굴에 떨어진 이후로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쭉 운기했다.

오늘로 동굴에 떨어진 지 삼 일째에 접어들었다. 하루에 먹는 것이 과자 세 개뿐인데도 현서가 이 정도로 기력이 있는 것은 운기를 계속했기 때문이고, 또 유위람이 입을 맞추며 넘겨주는 정기 덕이었다.

유위람은 현서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알고 있으니 내력이 아니라 정기를 나눠주는 것에 그치긴 하였다. 그리고 내력이나 원기를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옥의 합격을 받았다. 여차할 때 싸워야 하니 유위람이 튼튼한 채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력이나 원기가 현서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아서였다.

유위람은 고작 삼 일 만에 날 때부터 접문을 통달해 태어난 것처럼 굴더니 급기야 접문을 하며 정기를 넘기는 요령을 깨쳤다. 기재는 기재라더니 저런 방면까지 뛰어날 줄 몰랐던 옥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현서는 모르고, 옥이 보기에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으나 도움이 되는 것은 맞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서가 싫어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저어하는 기색이 있었다면 현서보단 옥이 먼저 알아보았을 터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기색은 없었다.

―그래, 어디 산속에서 수련하는 도사가 될 것도 아니고, 현서도 이제 두루 사귐이 있을 나이지.

처음이 있으면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생기지 않겠느냐고 옥은 희망을 가졌다. 현서가 유위람을 두고 혼서를 떠올린 것을 알면 당장 뒤도 안돌아보고 서녕으로 돌아가자고 채근했을 터였으나 옥은 그것을 몰랐다.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이 동굴의 가장 큰 장점은 물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자그마한 물줄기가 흐르는 곳에서 잠시 쉬기 위해 멈췄다. 물가는 습윤해 야광 버섯이나 이끼가 군집을 이루고 있어 좋았다.

가볍게 목을 축이고 손을 씻은 현서가 야광 이끼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 옆에서 발을 살짝 굴러보았다. 하지만 이끼만 살짝 흔들릴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동굴은 백주봉(白株峰) 구릉 지하와 연결이 되어 있나 봐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고 물도 풍부한데 동굴에 살아 있는 생물이라곤 버섯과 이끼뿐이라니, 분명 백주봉에서 사술을 쓴 여파로 동물이나 곤충들이 도망간 것이겠지요.”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에 으레 있어야 하는 뱀이나 박쥐는커녕 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현서는 그들이 이 동굴에 떨어지게 된 경위를 떠올렸다.

현서와 유위람이 풍장산에 도착하고 열흘간, 화오궁이 숨긴 마을을 찾는 일은 순항과 난항을 모두 겪었다. 다섯 곳의 후보지 중 세 곳에서 허탕을 쳤지만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일은 납치된 아이들의 일부를 구한 것이었다. 개미굴에 식량을 쌓아두듯, 납치되어 강제로 수면 상태가 된 아이들이 여기저기에 숨겨져 있었다.

화정이 제대로 된 약재 등이 준비되지 않으면 아이들을 깨울 수 없다고 말했다. 더욱이 아이들을 구하면서 화오궁 무리와의 거듭된 싸움으로 부상을 입은 이들이 생겨났다.

풍장산에 납치된 아이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도록 내버려 두었던 터라 유위람이 불러들인 일행 말고도 근방의 무인들도 지원을 왔다.

때문에 거점이 필요해진 상태였다. 산 아래 마을에 급히 저택을 구해 화정을 비롯한 의당의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려갔다.

그 다음이 현진과 석청담 일행 같은 부상자였다. 현진은 항도에서 다친 손이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사제들을 추적하느라, 그리고 그 이후로 화오궁을 상대하느라 부상이 도졌다. 현서가 금패를 써 붙여둔 호위들이 없었다면 현진은 이미 죽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두 명의 호위도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복주에서부터 유괴범을 추적했던 하우대 일행의 상태는 더 좋지 않았다. 현진 일행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현서의 한 줌인 친구들은 전부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다. 영약을 먹여 목숨을 잃거나 폐인이 되는 일은 막았으나 산을 내려가야 하는 것은 확실했다.

현진이 현서를 데리고 하산하려 했으나 유위람이 저지했다. 현진이 완고했기 때문에 화오궁 소궁주가 비무회에 참가했던 기암일사 사영이며, 현서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하얗게 질린 현진은 잠시 넋이 나간 것 같았으나 금세 냉정을 찾았다. 현서에게 거듭 조심을 당부하고 산을 내려갔다.

산에 잔류한 사람들은 이제 남아 있는 두 곳의 후보지를 수색해야 했다. 백주봉과 백은봉(白垠峰)은 쌍둥이 봉우리였는데 산턱에 생긴 구릉지까지 똑같이 생겼다. 그래서 아예 수색조를 두 조로 나누었다. 마을을 발견하면 푸른 연막탄, 화오궁도를 발견하면 노란 연막탄, 가사 상태에 빠진 아이들을 발견하면 붉은 연막탄을 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유위람이 백은봉을 수색했기 때문에 현서도 그곳에 있었다. 완만한 구릉지에 도착해 기문진이 있는지를 찾는 동안 백주봉에서 푸른 연기가 올랐다. 마을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 현서는 주경, 유위람과 함께 다른 일행들의 반대편에서 기문진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옥이 폭약을 경고했으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눈을 찌르는 섬광과 고막을 찢는 굉음이 현서의 정신을 뺏어버렸다. 유위람이 급히 몸을 날려 현서를 안고 뒤로 물러섰으나 땅이 무너지는 것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후로 눈을 뜨니 동굴 안이었던 것이다.

“이곳 백은봉 구릉 아래에도 동굴이 있는 걸 저들이 아는지를 확인할 수 없으나 아무래도 동굴을 벗어나려면 백주봉 지하를 거쳐야 할 듯싶습니다.”

현서도 동의했다. 단순히 옆 봉우리의 사기가 강한 것으로 지하의 생물들이 죄 숨을 리 없으니 말이다. 동굴 지하의 생물이 도망갈 정도의 일이다. 현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어 그저 탄식했다.

현서가 조금 주저하다 말했다.

“신농자 어르신께서 가족을 잃고 세상을 등졌을 때 계셨던 곳이 백주봉인 것 같네요.”

현서의 할아버지인 호익원으로부터 신농자가 제자를 들이기 전까지의 과거를 크게 후회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신농자는 고향은 사라졌고 그저 담주 출신이라고만 했다고 한다. 아마 그럭저럭 사는 양민이나 하급 관리 집안이 아닐까 싶었다.

신농자가 젊었을 몇 십 년 전의 담주 일대는 사정이 좋지 않았다. 가족을 어찌 잃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으나, 원수가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지 못했음은 분명했다.

“강호에는 깊은 산에서 기연을 얻는 경우도 있다 하더니, 하필 그 주인공이 소궁주가 될 줄은 몰랐네요.”

신농자는 스스로 깨우쳐 만통자와 어깨를 나란히 한 천재다. 해소되지 못한 커다란 분노가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신농자 어르신께서는 백주봉을 떠나면서 과거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셨을 겁니다. 그러니 제자를 바꿔치기 한 것이겠지요.”

그렇다. 사영이 신농자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완하고 이용하기 위해 가짜 제자를 만들었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뒤 가차 없이 신농자를 버린 것으로 보였다. 깊은 절망에 빠져 죽음을 맞이했던 신농자와 시신도 찾지 못한 제자를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신농자 어르신께서 남긴 것은 궁주가 아니라 소궁주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겠지요.”

현서는 소궁주 사영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나, 그래도 십이 년 전이면 십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백화호의 일은 궁주와 연관된 일일 것이고.

‘백화호 사건이 있기 십 년 전까지는 궁주가 독인이 되는 일이 순조로웠어. 그러니 자문원에게 독을 쓸 수 있었겠지. 하지만 궁주는 결국 천인살을 완성하지 못하고 실패했어.’

실패 시기를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으나 정우문에 했던 의뢰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높은 확률로 항도에서 호 공자를 공격했던 그 시체와 등에 그려진 진과 관련 있을 테지요.”

“네. 할아버님께서 주신 팔만구의 그림자도 진을 그려 냈지요. 소궁주의 목적은 달라 보이지만, 그래도 자꾸만 같은 얘기가 끼어드는 기분이 들어요.”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효장락공주 무덤의 부장품부터 항도의 시체, 곽 숙부의 바람, 그리고 가족을 전부 잃어버렸던 신농자 어르신의 과거까지. 전부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욕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의 가능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영진자는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고 단언하셨지요. 저는 그 말이 옳다고 봅니다. 간절함, 두려움, 욕심이 눈을 가리고 있어 맹목적인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희망을 놓지 못할 만한 사술을 발견했는지 모르겠어요.”

“그 방법이라는 것에는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아이들이 이용되겠지요.”

“네.”

앞으로 무엇을 보게 될지 몰라도 좋은 것은 아니리라. 현서가 무거운 숨을 내뱉으며 생각에 잠겼다. 신농자도 곽다순도 죽은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욕망을 가질 만했다. 하지만 사영은? 처음 만났을 때, 사영이 말했다. 익히 많은 얘기를 들어왔다고. 현서는 할아버님께 들은 얘기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안다.

‘곽다순은 옥을 알고, 내가 자문원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내게 자문원이 좋아했던 도화함을 먹이려고 한 자가 나를 알까? 내가 도화함을 좋아하지 않는 건 대단한 비밀도 아닌데. 그럼 사영은 누구에게서 나에 관해 들은 걸까.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이전에 사영을 본 적이 없어. 그 유리를 깎은 것 같은 얼굴은 쉬이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현서가 말없이 손가락을 두드리는 것을 본 유위람이 물었다.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뇨. 그냥 기암일사, 그러니까 제가 만난 사영의 생각을 했어요. 그도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을지. 왜 저를 적대하는지. 제가 아는 낯선 사람은 거의 없는데, 한 번 보면 쉬이 잊을 얼굴이 아닌데도 기억나는 것이 없어 좀 답답하다 여기던 차였어요.”

사영에 관해 유위람의 의견을 듣고 싶었던 현서가 재깍 대답했다. 현서의 말을 다 들은 유위람은 서운한 얼굴로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손을 덥석 잡더니 손바닥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현서가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유위람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성적이지 않은 건 아는데, 그래도 호 공자 입에서 사영 소리가 나오는 게 좋지 않군요.”

현서가 옥을 의지해도 질투나 서운함을 가지지 않았던 유위람은 사영 얘기에는 단박에 감정이 움직이는 게 스스로 보아도 좀 웃겼다. 그렇다고 이 마음이 부끄러운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럴 양심도 없었다. 그저 속 좁아 보이는 사람은 현서가 싫어하지 않을까 싶어 조심한 것뿐이었다.

“제가 사영을 싫어하는 터라 그런 모양입니다.”

“저도 싫어해요. 그냥, 그 목적을 짐작해 보려 했을 뿐이라.”

현서가 사영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게 뭐가 있는가.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괴롭히다 못해 죽이려 든 자였다. 대놓고 욕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가지고 있는 감정은 험악했다.

“저도 압니다. 아는데. 호 공자.”

유위람이 현서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예쁘게 웃었다. 현서를 볼 때마다 유위람은 열에 여덟아홉은 웃었으니 이제 익숙해질 만한데도 여전히 저렇게 작정하고 웃으면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제가 더 잘생겼지요?”

―도대체 쟤는 뭐가 문제인 것이냐. 몰래 버섯이라도 처먹은 게야?

옥이 화를 내는 소리를 들으며 현서는 맹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유위람의 말에 대한 동의인지, 옥의 화에 대한 동의인지는 구분하지 못했다.

‘먹었다면 버섯이 아니라 이끼가 아닐까.’

야광 버섯은 옥이 보증한 독이 든 버섯이다. 대신 야광 이끼는 독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식용이 될지 아닐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현서는 여차할 때는 이끼라도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눈여겨보아 두었더랬다.

―나한테 대꾸 말고 정신이나 차려라.

옥이 잡혀 있는 손부터 빼라고 항의했다. 따지고 보면 유위람은 현서의 작은형과 동갑이다. 현상 형이 저렇게 행동했다면 깔깔 웃으며 흉을 보았을 텐데. 패천검에게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자신이 사영보다 더 잘생겼다는 대답은 듣지 못했으나 답을 채근해 현서를 난처하게 할 마음은 없는 유위람은 곱게 말을 돌려주었다.

“소궁주에 대해선 짐작 가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산에 있는 화오궁도라면 궁주가 아닌 소궁주의 편을 든 이들일 테니 죽은 이들의 등을 살펴보았지요.”

그간 수색을 하며 화오궁의 호법이나 장로라고 밝힌 이들과 싸움이 몇 번 있었다. 패하고 도망간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 싸움이 일면 유위람의 옆에 붙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현서는 자세한 사정을 몰랐다.

“그 등에 과연 점을 찍어 만든 여러 겹의 꽃잎이 있었습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우리가 항도에서 보았던 진과 비슷한 진들이 새겨져 있더군요. 영진자가 말했지요. 생물에게 새기는 진은 변수가 많아 극히 조심해야 한다고요. 평범한 점 하나도 문제가 되는데 하물며 꽃 모양을 이루는 점 위로 진을 그리다니 이상한 일이지요. 그에 일전 주 대협이 하오문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해 준 소문이 떠올랐습니다. 정체를 들킨 화오궁도는 도망갈지언정 등의 점을 숨기지는 못한다는 걸 말입니다.”

“아!”

유위람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던 현서는 퍼뜩 깨달은 것이 있어 가볍게 소리를 냈다. 사람은 분노하거나 흥분하면 필요 이상의 정보를 말하기도 한다.

“궁의 비의가 자신의 손에 있는 한 소궁주도 자신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고 했던 화오궁주의 말이 그래서였군요. 그 점이 화오궁주가 궁도를 지배하고 있다는 술법의 결과라, 그래서.”

“네, 맞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납득했습니다.”

정우문의 소문주가 화오궁의 얘기를 할 때 그런 말들이 오갔었다. 화오궁주는 측근을 제외한 이들을 물건으로 여겨 사술로 제어하는 것 같다고.

헌데 장로나 호법은 물론 후계자인 소궁주까지 제어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소궁주가 궁주와 다툼을 하는 중이니 강제를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보다 필요했을 터였다. 그들이 원하는 지식이 신농자에게 있었던 것이다. 곽다순은 몰라도 사영에게 있어 월영사와 장원의 습격은 그저 미끼였을 뿐이다.

“이제 알겠네요. 철서에서 패천검의 장원을 습격하고 보물에 관한 소문을 퍼뜨릴 때 왜 화오궁의 이름을 숨겼는지. 신농자와의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화오궁주의 시선을 우리에게 돌려야 했군요.”

―그때가 삼월이고 신농자를 죽이려 한 것이 유월이니 소궁주 놈이 뭘 했든 거의 막바지였겠지. 그러니 더욱 궁주의 눈을 돌려야 했고. 궤짝에 든 월영사와 패천검이라니 참으로 좋은 방패가 아니냐.

궁주와 소궁주의 권력 싸움은 하루 이틀 사이에 벌어진 것이 아닐 터. 오래전부터 서로 감시하는 사이였을 것이다. 궁주가 와병 중이라 해도 금제를 받고 있는 몸이니 몸을 낮추고 때를 기약해야 하는 쪽은 소궁주였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보기엔 제 장원이 습격당한 것보다 칠암문의 봉문이 먼저로 보이지만 순서가 반대입니다. 호 공자가 들었던 궤짝 얘기를 떠올려보세요. 그때 이미 도련문의 이름이 나왔지요. 그러니 소궁주가 일부러 궁주의 금제를 받고 있는 도련문에 손을 대 주의를 끈 것이 먼저일 수밖에 없습니다. 궁주는 소궁주의 일을 염탐해야 하니 도련문은 그대로 두었지만, 같은 일이 또 벌어질까 급히 칠암문을 불러들였을 테지요.”

현서의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도련문주의 셋째 아들이 가죽이 벗겨져 죽은 것은 그 때문이리라. 소궁주는 궁주처럼 점이 찍힌 자를 부릴 수 없다. 하지만 궁주의 뜻으로 위장해 도련문을 휘저어야 했을 테니.

―참으로 악독하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도가 지나쳤어.

옥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 유위람은 잡은 손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아마 소궁주는 궁주의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들켜 애가 탄다는 시늉도 했을 겁니다. 신농자의 일을 들키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할 테니까요. 그래서 가짜 제자로 위장하는 것도 자신이 하지 않은 겁니다. 호 공자도 알겠지만 시기를 계산해 보면 주 대협이 아는 가짜 제자는 주 대협과 헤어진 이후 다시 화용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소궁주는 항도에 있었지요. 항도 호가 상단에 숨어 있는 간자를 움직여 궁주의 패를 하나 없애 손해를 입혀 궁주의 눈을 끌었습니다. 때문에 궁주가 보복을 위해 시체를 습격했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유위람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이어 말했다.

“허나 그것은 궁주의 실책입니다. 시체를 없애는 것을 궁주가 도운 꼴만 되었지요. 화골산을 주저 없이 먹는 사람은 궁주만이 데리고 있을 테니까요. 궁주는 계속 패배했지만 그 사실을 잘 몰랐을 것이 뻔합니다. 헌데 저희가 갑자기 화용에 가니 그제야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아 애가 닳았던 겁니다. 그러니 연회를 핑계로 제게 과하게 치근덕거리기나 했지요.”

권력 싸움의 생리를 잘 아는 유위람의 말은 청산유수와도 같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현서가 감탄인지 놀람인지 모를 소리를 뱉었다.

“그, 잘 아시네요.”

“비슷한 일을 보아서 그렇습니다. 제가 한 번 본 건 잘 잊지 않아서요.”

대답하는 유위람의 얼굴은 칙칙한 내용과 달리 상큼했다. 곽다순처럼 한 번에 집안을 도륙 내진 않았으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호시탐탐 서로를 노리는 외조부와 모친 사이에서 본 것이 많았다.

“검각의 제자가 된 후로는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향수마저 느껴질 정도입니다.”

철서를 빠져나온 뒤 도착한 안가의 위치나 유위람이 휘두르는 재력을 보아 왕공 귀족 출신이 아닐까 하는 추측은 진즉에 했었다.

서녕호가는 노대인인 호익원의 뼈아픈 경험 때문에 권력 다툼이 일어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자문원은 영우곽가의 집안싸움을 보았다. 권력을 원하든 원하지 않던 결국 사람을 할퀴고 망가뜨린다.

자문원이 유위람을 만난 것은 그가 아홉 살 때로 이미 검각의 제자였으니 더욱 어렸을 때 목도했던 일이리라. 어렸던 유위람이 신경 쓰여 위로를 건넸다.

“많이 힘드셨겠네요.”

“어렸을 적의 일이라 이젠 괜찮습니다.”

힘들기보다는 성가신 쪽에 가까웠지만 현서의 걱정을 부정할 바보 멍청이는 아니었다. 권력 싸움에 휘둘리기는커녕 한 자리 차지했을 것이 옥의 눈엔 뻔히 보였다. 그래도 어린 유위람을 두고 이죽거릴 옥은 아니라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옥과 유위람의 싸움은 그것이 문제였다. 옥은 유위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모질지 못했고, 유위람은 얼마든지 모질 수 있으나 옥에게 그럴 리가 없었다. 허공에 하는 칼질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옥도 알고는 있지만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만 하는 것은 또 아니지 않은가.

유위람은 현서가 집안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이 조금 신기했지만 묻지 않는 일을 미주알고주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신농자는 풍장산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사술과 사람을 죽이는 비법에 심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그분을 보았을 때 금을 삼켜 쇠약해진 것과 별개로 상승무공을 익히지 않았음은 분명했으니 말입니다.”

곽다순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사술, 사영은 사람을 죽이는 비법, 혹은 그 응용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럼 영진자께서 풍장산으로 오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큰 문제가 없다면 수일 내에 도착할 겁니다.”

저들은 신농자에게서 필요한 것을 다 얻은 줄 알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일말의 불안이 신농자로 하여금 팔만구를 현서의 할아버지에게 주게 만들지 않았던가. 사영이 아는 방법이 무엇이든 팔만구의 것만이 가장 옳을 것이다.

걸어온 싸움에 질 생각을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그저 화오궁의 권력 싸움에 이용당한 것도 아니다. 구한 아이들이 백이 넘었고, 죽은 채로 발견된 아이들도 있었다. 모두들 크게 분노했다.

―팔만구의 해석과 상관없이 저쪽 동굴을 무너뜨릴 정도로 분탕을 치라고 전해라. 들어보니 우리가 시간을 버는 게 유리하겠구나.

‘응. 알았어.’

현서는 의아해 하면서도 순순히 유위람에게 말을 전했다. 현서의 말을 들은 유위람 역시 이유도 듣지 않고 일단 알겠다고 긍정했다.

“옥 님이 이유를 말씀하셨습니까?”

“네.”

그사이 옥에게 설명을 들은 현서가 말했다.

“궁주와 소궁주의 싸움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모르나, 궁주의 병세 때문에 소궁주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라고 했어요.”

아이들의 원기를 갈취해 겨우 목숨을 이어가고 있던 궁주를 떠올렸다. 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간은 흘러 시대는 바뀌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이기게 되는 싸움도 있는 법이다.

궁주는 오늘내일하니 소궁주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며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하다못해 궁주에게서 아이들을 뺏기라도 하면 그 시간을 당길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또한, 장로나 호법 같은 궁주의 측근이어야 하는 사람들마저도 소궁주의 편을 들었다. 유위람이 단번에 이해했다.

“화오궁주가 궁의 비의를 소궁주에게 전해주지 않고 죽을 만큼 사이가 틀어졌군요. 심지어 그 멍청이가 그것을 공언한 적이 있는 모양입니다.”

“네. 옥의 말로는 궁주가 대규모 순장을 빌미로 잡았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궁주가 악수를 두는 바람에 호법과 장로들이 등을 돌리게 된 모양입니다.”

점이 행동을 강제하나 그 수가 늘어날수록 자유 의지도 또렷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장로와 호법들이 화골산을 먹고 죽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연회 때 만난 이들은 참석하라는 명을 거절하지 못해도 불편함을 표현했다. 궁주의 말을 따라도 순장될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삶에 대한 궁주의 강한 욕구를 보면 자신의 목숨을 인질로 삼아도 절대로 자살하진 않을 것 같아 보였지만. 그렇지요.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긴 했습니다. 제법 초조하겠군요.”

자신의 주위에 불로불사의 상징을 둘러놓고 피를 토하던 궁주와 신농자가 남긴 흔적 아래서만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소궁주. 둘 다 시간이 촉박하긴 매한가지겠지. 유위람이 현서를 볼 때처럼 활짝 웃으며 과연 옥 님이라고 치켜세웠다.

―저 얼굴 좀 치우라 해라.

옥이 질겁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잠이 든 현서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유위람은 생각에 잠겼다. 현서가 눈을 뜨고 있을 때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이 복잡했다. 약도 식량도 모두 부족하고 동굴을 빠져나가는 길도 찾지 못했다. 백주봉으로 빠져나갈 때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들투성이건만 현서는 의연하기만 했다.

무던하고 다정한 성정 때문인지 무력함을 토로하기는 해도 두려움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관례를 올려 성인이라고 하지만 아직 나이 어리고 귀하게 지낸 경험밖에 없으니 이 모든 일들이 버거울 텐데도 우는 소리 한 번 없었다.

남이라면 그저 대견하다 여기고 끝낼 일이나 현서는 남도 아니었고, 그것을 장하게 여기고 싶지도 않았다. 양심은 희박하지만 상식은 적당히 있는 유위람은 현서의 침착함이 나이와 경험에 비추어볼 때 유난하다는 것을 알았다. 옥 님이 곁에 있어준 덕이라면 다행이지만 현서가 무리하는 것이라면 좋지 않다.

이상한 말이지만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잘 버티고 있어서 더 신경이 쓰였다. 몸 상태도 그렇다. 자신이 정기를 나누어주고 있으나 그것으로 충분할 리가 없지 않은가. 현서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살이 내려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이러다 갑자기 푹 고꾸라질까 두려웠다.

이사나 화운검이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 접문을 할 때마다 볼이 발그레해지고 밀어내지 않는 걸 보면 현서도 어느 정도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뜻일 텐데. 더 쉽게 말하고 편히 요구했으면 좋으련만.

유위람은 잠든 현서를 추슬러 안고는 걷기 시작했다. 깨어나면 미안해 하며 난색을 표할 것이나 진즉에 이랬어야 했다. 얼빠진 놈도 아니고 잿밥에 넋이 팔려 경중을 재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욕했다. 옥 님의 말처럼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해도 현서를 동굴 밖으로 보내는 것이 먼저여야 했다.

이곳에서 더 보낼 시간이 없었다.

유위람의 예상과 달리 잠에서 깬 현서는 난색을 표하는 대신 활짝 핀 얼굴로 반가움을 드러냈다. 눈을 떴더니 주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주경은 꾀죄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다친 곳도 없이 건강해 보였다.

“주 대협!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 컥. 콜록.”

한껏 기쁨을 표현하려다 그만 기침이 터졌다. 한 번 터지면 쉬이 멎지 않아 애초에 기침이 나지 않게 조심하는 수밖에 없는데 들떠 급히 말하느라 숨이 잘못 넘어간 것이 문제였다. 동굴이라 조그마한 소리도 울려 소매로 입을 가리고 몸을 웅크리자 유위람이 아예 안아 들어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기침이 멎자 눈 아래 고인 눈물을 닦아주는 유위람의 솜씨는 이사가 보아도 합격점을 줄 만했다. 하지만 주경의 눈에는 그렇지 않는지 눈은 물론 얼굴 근육을 전부 사용해 유위람을 욕하고 있었다. 물론 유위람에 눈에 그게 들어올 리는 없었고, 현서는 보지 못했다.

“며칠 사이 그 예쁜 얼굴이 반쪽이 되었네. 이사가 보면 울겠다. 용케 버텼구나.”

주경이 그렇게 말하며 현서의 손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토란을 쥐어주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현서에게 먹으면서 들으라고 말했다. 현서는 얌전히 토란을 입에 넣었다. 한 번도 토란을 이렇게 먹어본 적 없었건만 그간 참아 왔던 허기 덕인지 맛있기만 했다.

주경이 떨어진 곳은 기어야 하는 좁은 굴이었다. 차림이 좋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주경은 고수고 챙겨야 할 짐도 없으니 지저분해지는 것 외엔 큰 문제가 없었다.

“패천검에게도 말했지만 여길 빠져나가는 길을 하나 알아. 거길 통해 나갔다 와서 이 음식도 손에 있는 것이고. 하지만 그 길로 나나 패천검은 빠져나갈 수 있지만 너는 안 된다.”

길이라고 할 것도 없는 삼 장(약 9m) 높이에 있는 숨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성인 남자 한 명이 빠듯하게 끼이는 폭이라 누군가를 데리고 운신할 수 없었다. 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밖의 상황은 어떠한가요?”

“폭발로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다더군. 혹시 몰라 곽 가주만 따로 만나 사정을 듣고 온 참이야. 마을을 발견했을 때 화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 일부가 백은봉을 살피러 갔고, 그사이 기문진이 발동했다고 하더군. 서른 명이 큰 부상을 입고 하산했지만 다행히 산 아래는 별일 없다고 하였어. 납치된 아이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는 모양이야. 사라진 아이들 중 무림의 아이들도 있어 몇몇 가문도 합류했다고 하더군. 청사파와 태호문의 사람들도 무사히 도착했다.”

현서와 유위람이 동굴에 떨어져 나흘을 보내는 동안 밖의 사정도 예사롭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을에 진입하는 것은 성공했나요?”

“내가 곽 가주를 만났을 때가 어젯밤인데 그날 성공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사이 내뺄 놈들은 다 내뺐고, 마을에 남아 있는 것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이들뿐이었다고. 곽 가주가 말하길 실패자만 남겨둔 것 같다고 했다.”

유위람에게 미리 얘길 들어 무엇에 관한 실패인지를 알아들었다. 신농자의 지식이 완벽하다고 해도 진법은 매우 까다롭다. 같은 진이라도 중요한 것은 술법자의 능력이니 실험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무엇을 하든 비밀로 해야 했으니 신농자에게서 올바른 조언을 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오차가 생겨 실패자가 나왔겠지.

“아이들은요?”

주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전부 사라졌다. 지금처럼 사람들의 눈이 몰린 이때에 새로 납치할 수 없으니 전부 데려가야만 했을 것이다.

“마을은 그대로 있지만 아직 다른 입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어. 수색중이라더군.”

“그래서 양동 작전을 제안했지.”

현서는 안 되어도 무인이라면 주경이 오간 통로를 이용할 수 있다. 백주봉을 계속 수색하는 척하며 일부가 동굴에 들어와 뒤를 치겠다는 얘기다.

이동하기 전에 주경이 현서에게 약 병을 주었다. 소의선은 여전히 산 아래 있지만 혹시 몰라 곽 가주에 맡기고 간 것을 받아 온 것이라 했다. 아직 약이 남아 있지만 한결 마음이 놓인 현서가 감사를 표하며 약 병을 받아 품에 넣었다.

주경이 앞장서자 유위람은 바로 현서를 안아 올렸다. 동굴 천장이 높아진 덕도 있으나 여차할 때 주경을 방패로 쓸 수 있으니 현서를 안고 있어도 괜찮다는 논리였다. 두 사람은 어둡고 미끄러운 동굴을 급히 걸어가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꼬박 한 시진(2시간) 정도를 이동하자 길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기어가야 할 정도로 길이 좁아지자 현서를 가운데 두고 일렬로 기기 시작했다. 몸을 구부린 채 이 각(30분)을 기니 눈앞이 흐려지고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현서의 상태를 알아챈 유위람이 움직이는 것을 멈추었다. 자신 때문이면 괜찮다고 하고 싶지만 이미 팔에 감각이 없었다. 현서는 바닥에 들러붙다시피 하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아래에서 기척이 느껴집니다.]

유위람이 전음을 보냈다. 백주봉에 들어선 것이다.

―말소리는 없으나 움직임이 느껴지는구나.

이대로 아래로 내려갈 수는 없으니 일단 길이 끝나는 곳이 있는지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선두에 있던 유위람이 먼저 움직이고 괜찮다는 전음을 보내면 현서와 주경이 움직였다. 백주봉에 들어섰으니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얼마나 기었을까. 입에서 단내가 나고 눈엔 흘러내린 땀이 자꾸 들어와 성가셨다. 거친 숨소리도 고수에겐 천둥소리처럼 들릴 게 뻔해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나중에 보면 팔다리 전부가 자잘한 생채기와 멍으로 덮여 있을 것이나 멈출 수는 없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곧 끝입니다.]

유위람이 가리고 있어 보지 못했지만 좁다란 길 끝에 희미한 빛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좁다란 구멍만을 남기고 통로가 끝이 났다.

[사람은 없습니다만, 야명주가 있는 걸 보니 사람의 손을 탄 곳이 분명합니다. 주 대협은 어쩌시겠습니까? 이대로 돌아가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까?]

[그러는 게 나을 것 같군요.]

[헌데 길을 찾으실 수 있으십니까?]

지도는커녕 어두운 길을 이리저리 기어야 했으니 다시 찾아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주경은 사람도 길도 잘 찾는다고 말하고는 금세 멀어졌다.

[주 대협은 사람들을 데리러 갔습니다. 저희가 이곳에서 기다릴 수 있으면 좋겠으나 이 통로를 들키면 낭패일 테니 우리는 일단 내려가죠. 아셨다면 고개를 끄덕이면 됩니다.]

현서의 생각도 유위람과 같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가 좁아 호 공자를 안고 갈 수 없으니 제가 되었다고 하면 바로 뛰어내리세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감을 넓혀 주변을 거듭 살피고 옥의 확언까지 받은 후 유위람이 뛰어내렸다. 꽃잎이 내려앉듯 바닥에 사뿐히 자리한 유위람이 팔을 벌렸다.

[지금입니다.]

제법 높았지만 현서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몸을 던졌다. 잠깐의 부유도 느낄 수 없었다. 곧바로 몸을 날린 유위람이 현서를 잡아 채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대로 현서를 품에 감고는 기척을 감춘 채 바위틈으로 녹아들었다.

두 사람이 빠듯하게 붙어 있어야 하는 곳이라 현서는 유위람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느다랗게 숨을 쉬었다. 젖은 흙과 땀 냄새 사이로 유위람의 살 냄새가 났다. 아마 유위람도 자신과 비슷한 냄새를 맡고 있을 것이다. 땀이든 흙이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저 몸에서 피 냄새가 나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유위람이 작게 속삭이며 틈 밖으로 나왔다. 현서와 유위람이 떨어진 이곳은 작은 방만 한 크기의 공터로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는 장소였다. 원래 있던 동굴도 있고 아마 인위적으로 뚫은 굴도 있을 터였다.

숨을 곳이 마땅치 않으니 계속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가장 큰 통로 너머로는 기척이 많았기에 가지 않는 것이 나았다. 큰 길을 제외하니 눈에 걸리는 곳은 두 곳이었다. 현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오싹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이 두 군데가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앞으로 보게 될 것이 어떤 끔찍한 것일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유위람이 땀에 젖은 현서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성큼 걸었다.

유위람이 고른 길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인위적인 곳이었다. 개미굴처럼 길을 따라 방들을 만든 듯했다. 빈곳이었으나 야명주의 불 아래서도 검붉게 말라붙은 핏자국들이 보였다.

―위쪽에 틈이 있는데 그리로 올라갈 수 있는지를 물어보아라.

길 끝에 자리한 마지막 방에 들어서기 전에 옥이 말했다. 유위람은 가능하다고 말한 뒤 지체 없이 현서를 안고 도약했다. 갈라진 틈 사이로 안착해 적당히 자리를 잡은 유위람과 현서는 아래를 내려다보곤 말을 잃었다.

족히 서른 명은 넘어 보이는 벌거벗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눈에는 이지가 하나도 없어 척 보아도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등에 점은 없지만 대신 커다란 진이 새겨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진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죽은 자다.

옥이 확언했다. 유위람 역시 현서가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전음을 보냈다.

[항도의 저택에서 보았던 경우와 흡사해 보입니다.]

목적 없이 흐느적거리며 걸어 다니니 서로 부딪히기 일쑤였으나 몸이 밀려나도, 넘어져도 상대방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다시 걷는 것을 반복했다. 걸으라, 이 하나의 명령만이 머리에 남은 상태처럼 보였다.

[호 공자, 약 먹을 시간입니다.]

눈앞의 기괴함이 지나쳐 머리가 아플 지경임에도 유위람은 현서의 약 시간을 지켰다. 목구멍에 물도 안 넘어갈 상태였으나 약은 먹어야 했다. 현서는 조심스레 품에서 약병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항도에서와 달리 일 각(15분)이 지났는데도 저들은 멈추지 않는군요.]

그랬다. 항도의 그 시체보다 등의 진이 움직이는 것도 더욱 빨랐다. 아마 항도에서 보았단 시체의 보완형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그사이 살아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덜덜 떨고 있는 어린아이의 머리채를 잡고서 말이다. 남자가 아이의 머리채를 잡지 않은 손에 들린 조그마한 피리를 불자 오로지 걷기만 하던 이들의 눈알이 번들거렸다. 의식을 차린 게 아니라 명령이 바뀌었다는 쪽이 옳아 보였다.

아이는 끊임없이 울고 있었으나, 무슨 짓을 했는지 울음소리 하나 새지 않았다. 조약돌 던지듯 아이들 던지자 순간 모두 걸음을 멈췄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아이를 보더니 동시에 입을 쩌억 벌렸다. 현서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그때처럼.

[꽉 잡으십시오.]

눈앞에서 아이가 산 채로 잡아먹히는 것을 방관할 리가 없었다. 유위람은 틈을 빠져나가면서 남자의 목을 정확하게 잘랐다. 공격당하는지도 몰랐던 남자가 순식간에 죽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아이를 현서에게 밀어주고 유위람이 다시 검격을 날려 아이를 뜯어 먹으려 하는 시체들을 밀어 냈다. 잡아먹으라, 그 명령은 남자가 죽어도 주효해 시체들이 비적비적 일어섰다.

유위람을 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잡아먹겠다는 명령을 우선하기 위해 막아서는 유위람에게 달려들었다. 네 짝의 팔다리 중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부득들 기어 와 입을 벌렸다. 목을 날리는 방법이 가장 깔끔해 유위람은 검에 강기를 둘렀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서너 개의 목이 날아갔다.

시체들이 열구 남짓으로 줄어들자 아이의 눈을 가리고 있던 현서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피해!

“호 공자!”

옥과 유위람이 거의 동시에 반응했으나 한 발 늦었다. 현서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려다 목이 졸리며 아이를 놓쳤다.

“컥.”

시체 하나가 유위람의 팔을 물어뜯는 것이 눈에 들어왔으나 현서는 유위람을 부르지도 못했다.

유성추가 목을 옥죄고 있어 숨을 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숨이 막혀 본능적으로 유성추를 잡아 뜯으려 해봤지만 가능할 리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호 공자. 제가 일전에 곧 다시 만날 거라고 했지요?”

현서의 목을 조르고 있는 유성추의 반대편을 잡아당기며 사영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 ❖ ❖

오래전의 일이다.

그 해 강주 개웅산 일대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강이 불어 넘치고 산 곳곳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개웅산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 근처 민가에 사는 사람들도 전부 대피해야만 할 정도로 큰 비가 계속되다 겨우 그쳤다.

비는 멎었으나 산은 말할 것도 없이 엉망이었다. 뿌리 뽑힌 나무들이 위태로이 얽혀 있어 그 사이로 돌무더기와 토사가 언제 쏟아질지 몰라 사람은커녕 산짐승도 몸을 사렸다.

그 험한 길을 곽다순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길이라 부를 것도 없이 엉망이었으나 그 어떤 것도 곽다순을 방해하지 못했다. 진흙 위로 발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산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지반이 약해졌고, 무위는 오 년 전과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해졌다. 그러나 피를 토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애를 써도 산을 갈라낼 수는 없었다.

곽다순의 내력을 견디지 못한 도가 터져 나가며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파편이 튀어 온몸에 상처를 냈으나 피하지도 않았다. 오 년 전 손으로 흙더미를 파대던 그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 전신을 내리눌렀다.

애초 후회란 그런 것이다. 돌이킬 수도 없고, 돌이켜지지도 않는다. 바짝 말라버린 마음은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대로 이 자리에서 기력을 잃고 죽을 때까지 뿌리 내린 듯 있는 게 고작이었다.

“산을 자르려고? 젊은이가 뜻을 크게 가지는 것은 좋으나 너무 뜻만 높은 게 아니냐? 자기 실력을 제대로 파악해야 올바르게 크지. 지금 네 상태로는 육십 년은 더 걸릴 것 같은데, 우선 좀 더 정진해 보는 게 어떠냐?”

흙바닥에 주저앉은 곽다순의 눈에 신발이 보였다. 평범한, 그냥 시전에서 쉬이 구할 수 있는 신발엔 진흙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불쑥 튀어나온 이는 낮도깨비나 다름없었다. 후일, 곽다순이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보았으나 그날 만났던 사람의 얼굴을 끝내 기억해 내지 못했다.

남자의 충고는 곽다순에게 웅웅거리는 날벌레 소리나 다름없었다. 당장 남자가 곽다순을 죽인다고 했어도 목을 내어주었을 정도로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곽다순을 발로 밀어 내고 산자락을 베어 내지 않았다면 기억에 남지도 않았을 무가치한 조우였다.

허나 잠시 후 남자가 벌인 기사에 곽다순의 부서진 정신에 빛이 들어왔다. 곽다순은 자신이 미친 것을 일찍이 알아 이것이 환각인 것인지, 아니면 이미 죽어 꿈을 꾸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는데 환각이면 어떻고 꿈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왜 잡고 있느냐?”

정신을 차렸을 땐 죽을힘을 다해 남자의 발을 붙들고 있었다. 뿌리치려고 하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으나 남자는 어리고 약한 것들에게 너그러운 편이었고, 심지어 기분도 좋아 선심을 썼다.

“너 이 애랑 아는 사이냐?”

그에 미친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남자는 서 있고 곽다순은 진흙 바닥에 꿇은 채라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이마가 남자의 신발과 진흙 사이에 부딪혔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남자의 품에 자문원의 시신이 있었다. 오 년이 지났어도 하나도 썩지 않은, 파리한 안색을 제외하면 싸움에서 생긴 상처도 사라지지 않아 그저 자는 것 같아 보이는 문원이! 꿈이든 미쳤든 곽다순은 자문원을 넘겨받아야 했다.

곽다순의 입에서 나온 짐승 같은 신음과 흐느낌은 얼마가지 않아 두서없는 말로 변했다. 미치광이의 입에서 나온지라 알아듣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인내심 깊게 들어주었다.

인간사는 새로울 것 없어 내용은 지난했지만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남자도 오랜만이라 흥이 났던 탓이다.

“그럼 이 시신은 네게 줄까?”

곽다순의 표정에 화색이 만연했다. 남자가 개웅산에 온 목적은 간단했다. 팔찌를 찾는 김에 팔찌의 전 주인인 아이의 유해도 거두어 장례를 치르는 것이었다.

따지자면 남자의 후인이자, 자신 이후에 처음으로 검의 끝을 볼 가능성이 높은 아이였으니 그 정도 품을 팔아줄 순 있었다. 죽은 지 오 년이나 된 시체가 멀쩡한 것은 예상에 없었으나 남자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문원의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르게 해주신다면 그 은혜 뼈에 새겨 잊지 않겠습니다.”

남자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곽다순이 애원했다. 어리고 시커먼 것이 옹송그리고 있으니 보기에 좋지 않았다.

“됐다. 됐어. 애초 내 목적은 팔찌였고, 장례를 치르는 것은 덤이었으니 그리 감사해 하지 않아도 된다.”

남자가 자문원의 팔에서 팔찌를 빼냈다. 곽다순은 저 팔찌가 문원의 사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문원의 사문은 일인전승이고, 스승이 작고하여 혼자 남은 문원이 산을 내려왔다는 얘기도 안다. 그러니 이제 문원의 사문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인데.

“네 표정이 참으로 사이하구나. 이게 물에 빠진 놈 건졌더니 보따리도 내어놓으라는 상황인 거냐?”

“아닙니다. 그저 문원이 소중히 여기던 사문의 물건이라. 문원의 사문에는 이제 남은 사람이 없는데 어찌하여 귀인께서 그 팔찌를 원하시는지. 아는 것이 없어본 것이지, 감히 다른 마음을 먹은 일은 결코 없습니다.”

시신이 아직 남자의 팔에 있으니 곽다순이 대경하여 부정했다. 자신이 마음을 바꾸어 이 시신을 주지 않을까 겁을 먹곤 거듭 해명하는 곽다순을 보곤 남자는 소개를 잊은 걸 깨달았다. 사람과 대화하면 지킬 순서가 있음을 또 잊은 탓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신발을 꽉 붙들고 있는 곽다순의 손을 슥 밀어 냈다. 풀잎도 흔들리게 못 할 약한 힘이 죽을힘을 다해 잡고 있는 손을 치웠다. 남자는 허공을 몇 발 걸어 올라 그대로 반 장(약 1.5m)높이에서 가만히 부유한 채로 곽다순을 굽어보았다.

곽다순이 눈을 부릅떴다. 허공을 걷는 허공답보에 이어 허공을 부유하는 능공허도를 뜰을 산책하듯이 편안하게 펼쳤다. 당금 무림에 허공답보가 가능한 이도 한 손에 꼽히는 판국에, 둘 다 극성을 이룬 허공답보와 능공허도라니.

그야말로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경지라 곽다순은 놀라는 와중에도 비웃음이 났다. 부친과 형님의 목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목만 남았어도 질시에 눈을 부릅떴을 게 뻔한 두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이 아이 사문의 개파 시조이자 이 팔찌의 오롯한 보호자다. 팔찌를 만든 제작자이기도 하지. 사람은 곧잘 죽으니 인세를 떠나기 전에 변하지 않는 것을 남기고 싶었거든. 아주 공을 들였어. 만년설이 있는 곤산(崑山) 깊은 자락을 뒤지고 뒤져 마음에 드는 채옥을 골랐지. 그리고 이 무늬 하나하나에 전부 내력을 넣어 새겼다. 어찌 보이느냐. 멋있지 않느냐?”

남자의 말에는 팔찌에 대한 자랑이 가득했으나 곽다순의 귀에 그게 들어올 리 없었다. 산을 가르고 허공에 떠 있는 범접치 못할 무위와 몇 백 년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라. 미쳤어도 상식은 남은 곽다순이 공손하게 물었다.

“지금 귀인께선 본인이 몇 백 년 전의 사람이라고 말씀하는 것인지요?”

“이 아이의 친구라며. 사문을 만든 시조가 지선이라는 얘기를 안 해주던? 인간은 무언가를 익혀 극의에 달하면 지선이 된다. 내가 검의 끝을 보아 지선이 된 것처럼.”

그런 얘기를 곽다순도 안다. 하지만 그건 이무기가 천 년을 수련하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의 말이었다.

“왜? 못 믿겠느냐? 이 애가 좀 더 살았다면 내 뒤를 이어 검의 끝을 보아 지선이 되었을 텐데, 그럼 믿기 쉬웠으려나?”

자문원의 성취를 늘 대단히 여겼지만 정말로 하늘 위의 경지였다는 것에 놀랐고, 동시에 자문원이 왜 개파 시조의 얘길 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아서 비참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문원은 무위에 비해 받쳐 주는 사문이 없어 곧잘 무시를 당했다. 저런 얘길 했다면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을 걸 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리고 천하에 다시없을 바보 천치인 자신은 그 옆에서 그 모욕을 말리지도 막지도 못했을 터였다. 오욕은 고스란히 문원의 것이 되었을 테지.

산을 내려와 처음 만난 친구니 너를 돕겠다고 말했던 문원의 다정한 목소리를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언제나 비겁했고, 나약했다. 부친이 말씀하셔서, 형님이 부탁하시니, 늘 그렇게 변명하며 문원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그렇다고 떠나라고 놓지도 못했다.

자문원은 곽다순의 부탁으로 사지에 걸어 들어갈 순 있었으나 사문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것 또한 곽다순의 죄였다. 후회와 자책이 뒤엉켜 광기가 날뛰었다. 곽다순의 상태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본 남자가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은 말이다. 이 팔찌는 다음 대의 지선을 찾아 내게 알리는 역할을 한단다. 내가 만든 검술만큼 지선이 되기에 적합한 것도 없거든. 하지만 하늘 아래 검의 끝을 본 지선이 둘이나 있는 게 나는 싫다. 그래서 오래도록 사문의 아이들을 감시하고 싹이 날 것 같으면 내가 와서 슥삭 해버렸지. 이 아이는 내가 손을 쓰기 전에 죽었으니 그 답례로 장례를 치러주려 한 것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다순이 쇄도했다. 피가 터진 손에 내력을 실은 금나수(擒拿手)로 시신을 빼앗으려 덤벼들었다. 그러나 곽다순이 붙든 것은 남자의 흐릿한 잔상으로 발끝으로 턱을 후려 차여 진흙 바닥에 처박혔다.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으면서도 공격 기회를 엿보며 넘실거리는 시뻘건 눈을 한 곽다순을 보곤 남자가 소리 내 웃었다.

“이렇게 웃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이렇게 덥석덥석 속을 줄이야. 사람을 안 만난 지 하 오래되었더니 이런 즐거움을 그간 잊었구나. 재미가 있어.”

남자가 웃을 때마다 품에 있는 자문원의 시신도 같이 흔들렸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빛바랜 옷자락이 흔들거릴 때마다 곽다순의 눈에 들러붙어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광기도 조금씩 잠잠해졌다. 곽다순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선인께서 하신 그 말이 전부 거짓이라는 뜻입니까?”

“그래. 네게서 너무 피 냄새가 많이 나기에 무슨 놈인가 싶어 궁금해 한 번 들쑤셔 보았지.”

남자의 말은 사리에 맞지 않았으나 곽다순도 제 정신이 아니긴 매한가지라 상관없었다. 남자가 말한 피 냄새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피가 터진 양손을 숨기며 물었다.

“피 냄새가 나면 안 됩니까? 당장 씻고 오겠습니다.”

큰 비가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이 산에서 물이 흐르는 곳을 찾는 건 금방이다. 당장이라도 강에 몸을 던지고 올 것 같이 굴자 남자가 말리며 말했다.

“그런데 너는 조금 전에 내게 말하길, 이 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해놓고는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 말에 눈이 뒤집혀 덤비더구나. 멍청한데 뻔뻔하기까지 해.”

입이 열 개가 있어도 곽다순은 신음 하나 낼 수 없는 말이었다. 덤벼서 뺏을 수 없음을 진즉에 알았으니 핏줄이 터져 벌겋게 번들거리는 눈알을 하고도 기가 죽은 척을 했다.

“됐다. 네놈이 후안무치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 눈이나 치워라. 징그럽다. 자꾸 그러고 있으니 내가 약자를 괴롭힌 꼴이 되지 않느냐. 옛다. 받아라.”

남자가 문원의 시신을 곽다순에게 넘겨주었다. 곽다순이 잡아챌 필요도 없이 벌린 팔 위에 보드라이 안착했다. 곽다순이 숨을 멈추곤 자문원을 살폈다.

“문원이 죽은 것이 확실합니까?”

품에 안은 문원은 죽은 자 특유의 시취(屍臭)도 뻣뻣함도 없이 그저 차갑기만 할 뿐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는 검의 끝을 보아 신선이 된 자다. 지금 개웅산에서 벌어진 이 모든 일들은 곽다순이 꿈으로도 꿔본 적 없는 일들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달콤한 행운에 곽다순이 희망에 차 다급히 물었다.

“시신이 아니라 그저 잠든 것 같은데. 선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문원이 지선의 자질이 있으니 혹여…….”

곽다순이 하는 헛소리를 듣기 싫었던 남자가 가볍게 손을 휘둘러 입을 막았다.

“헛꿈을 꾸는구나. 지선이든 천선(天仙)이든, 아니, 옥황상제라고 해도 순리를 벗어나는 건 없다. 저 아이의 혼과 백은 이미 새로운 삶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그건 썩지 않고 남은 껍질일 뿐이야. 지선이라도 죽으면 썩는다. 보진 못했지만 옥황상제도 마찬가지겠지. 쟤가 썩지 않은 것은 독 때문이지 않느냐.”

독이라는 말에 곽다순이 숨을 삼켰다.

“지금 선인께선 문원이 독 때문에 썩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나보단 네가 더 잘 알아야지. 모자라고 뻔뻔한 것아.”

곽다순은 묻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으나 남자는 흥미가 다했다. 이렇게 친절하게 말을 받아준 것도 근 백 년 만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해 흥이 난 덕이었다. 하지만 말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옥팔찌에 축원(祝願)을 걸어 세상에 보낼 일에 관심이 기울었다.

곽다순이 자문원의 시신을 품에 안게 된 것도 그야말로 남자의 자잘한 선의와 변덕에 기댄 결과일 뿐이었다. 자문원은 이미 죽어 그 혼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저 피 냄새 좀 나고 미친놈이 시신을 데려다 장례를 치러 번뇌를 덜게 된다면 그것 역시 나쁘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오판이었다.

이전에 인간이었다고 하나 지선은 인간이 아니다. 땅 위에 있든 하늘 위에 있든 까마득히 굽어보는 자들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약한 자들의 마음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곽다순이 그 썩지 않은 시체로 무엇을 꿈꾸고, 무슨 짓을 했는지를 남자는 오래도록 몰랐다.

❖ ❖ ❖

유위람의 팔을 문 사내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남아 있던 모두의 머리가 날아갔다. 사영은 검의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다. 살기를 듬뿍 머금은 매섭고 적확한 검날이 사영의 머리를 노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어깨를 빗맞히는 것에 그쳤다. 사영이 잘 피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현서를 방패로 쓴 덕이었다.

사영의 어깨에서 피가 터지는 것과 동시에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처음부터 기관을 움직일 계획이었던 것이다. 사람의 손을 탄 굴이었으니 만들 때부터 무너뜨리는 것을 고려했음이다.

유위람은 아이를 챙기느라 한 발 늦을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흙과 바위가 쏟아져 유위람이 있던 마지막 밀실을 막았다. 두려워했던 최악의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너무 놀라 손발의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차가워졌다.

―정신 차려라. 저놈은 살아 있다. 아이도 괜찮아. 저걸로 죽을 거였음 검각의 제자가 되지도 못했을 걸 알지 않느냐.

얼어붙은 현서를 옥이 일깨웠다. 통로는 종이가 접히듯 순차적으로 무너졌으나 속도가 느린 것은 아니었다. 목이 잡힌 현서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사영은 통로를 벗어나자 걸음을 멈추어 다친 어깨를 지혈했다.

“패천검이 정파라 참 좋습니다. 호 공자의 몸에 칼을 꽂아 나를 공격할 거란 염려는 전혀 하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여전히 유성추가 목에 감겨 있는 현서는 대꾸할 수도 없었고, 할 생각도 없었다. 사영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보시다시피 어깨를 다쳐서 호 공자를 도울 수가 없군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다시 움직였다. 유성추의 줄로 아슬아슬하게 목을 죄어 숨통을 통제한 상태로 곧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목이 졸렸다. 현서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걸 알면서도 성큼성큼 걸으니 숨이 막히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이제까지 사영의 악의를 겪었던 현서에겐 놀랄 일도 아니었다.

―괜찮으냐?

‘응. 괜찮아. 내력이 흩어지지 않아서 버틸 만해.’

현서의 몸 상태는 깜부기불처럼 아슬아슬했으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옥이 유위람도 아이도 무사하다는 걸 확인해 주어 거리낄 것도 없었다.

유성추에 목이 잡혔을 때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신을 인질로 삼아 유위람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유위람 정도 되는 이의 단전을 폐하려면 산혼투 정도 되는 독이 있거나 내공의 차이가 월등해야 했다. 혈을 짚어 무력하게 만드는 것도 기습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저런 방법들이 아니어도 현서의 목숨을 쥐고 흔들어 유위람에게 큰 타격을 줄 방법은 넘쳤다. 현서의 목에 칼을 대고 팔이나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만들라고 하면 유위람이 어찌 나올까? 눈을 못 쓰게 하거나 독을 마시라고 하면?

하지만 사영은 현서를 검을 막는 방패로는 써도 그 이상은 도발하지 않았다.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서의 목숨과 유위람의 안위를 동시에 도박판에 올렸을 때 유위람이 어디까지 물러줄지를 말이다.

‘검을 빼앗아 감금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고 여겼겠지. 하지만 그 이상을 요구했다간 패천검이 나를 버리고 공격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믿은 거야. 그리고 검을 빼앗아 감금하는 건 지금으로선 별로 필요가 없어. 이곳이 공격당하는 중이니까.’

사영이 가진 교만한 불신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현서 역시 유위람이 목을 내어줄 거라 여기지 않았으나 목 이외는 냉큼 내어줄 것 같아서 그것이 더 무서웠다. 옥이 무사하다 말했으니 유위람이 빠져나왔을 거라 믿었다. 부디 더 다치지 않고 무사히 오길 바랄 뿐이었다.

“컥.”

현서는 거듭 미끄러졌고 그때마다 목이 졸려 괴로워했다. 사영은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았으나 속도를 늦춰주는 일은 일절 없었다. 목이 졸릴 때마다 살갗이 쓸려 피가 비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간 쭉 운기했던 내공이 현서를 보호했다.

―저놈은 너를 완전히 얕보고 있구나.

‘그럴 만하지. 당장이라도 유성추에 힘을 주면 목이 잘릴 테니까. 저자는 어지간한 무림인도 짚단처럼 볼 텐데 나같이 병약한 도련님은 어떻겠어. 계속 그러라지. 고맙기만 하니까. 방심이, 무시가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가 될 거야.’

사영은 그저 목이 졸린 현서가 괴로워하는 것만을 볼 뿐 그 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장 죽일 계획은 없다는 뜻이다. 유위람은 돌아올 것이고, 양동 작전이 시작되면 분명 틈이 생긴다. 대단한 일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현서는 반격의 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발의 감각이 없어질 쯤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현서는 주위를 살피지도 못하고 바닥에 엎어져 숨을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공이 없었다면 진즉에 기절했을 터였다. 사영은 손을 뗐지만 내공은 거두지 않아 유성추가 여전히 현서의 목을 위협하고 있었다. 여차할 때 목을 조르겠다는 협박이었다.

“소궁주!”

“왼팔이라 상관없다. 패천검의 위명에 과장이 섞인 줄 알았지. 자칫하면 목이 날아갈 뻔했어.”

사영을 기다리던 수하가 있었는지 상처에 대경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더 이상 속일 필요가 없어서인지 수하는 현서가 있는데도 사영을 거리낌 없이 소궁주라 불렀다.

―지금 대화하는 저 수하가 주경이 말한 기암일사의 상처를 가지고 있구나. 이제 신농자의 제자 흉내를 낼 필요가 없으니 변장은 치웠겠지만 상처는 꾸밀 순 없어 진짜로 냈던 모양이야.

어차피 현서가 고개를 들어도 보일 거리가 아니라 그저 엎어져 있었다. 어깨의 상처를 치료한 사영이 현서의 머리 위에서 말했다.

“호 공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군요. 궁금한 게 많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현서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다음 바짝 마른 목을 몇 번 고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물어야 합니까?”

목소리에 힘은 없었으나 머뭇거림은 없었다. 사영이 자신을 싫어하니 무엇을 묻든 답을 해주지 않을 것을 안다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다. 현서가 동굴 밖 하늘이 맑으냐고 물었어도 대답해 줄 마음이 없었던 사영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 보니 호 공자와 이렇게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이 이번이 두 번, 아니, 세 번째군요. 이전에는 듣던 바와 크게 다름없다고 여겼는데 제 생각이 틀렸을 줄은. 패천검의 일도 그렇고, 역시 사람은 겪어보아야 확실히 알게 되나 봅니다. 진즉에 호 공자를 만나 대화를 해볼 걸, 참 아쉬운 일입니다.”

사영이 무릎을 굽혀 현서의 턱을 잡아 올렸다. 유리알같이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현서를 응시했다. 엉망인 상태에서도 눈을 잡아끄는 미모는 여전했지만 사영의 관심을 끈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이라 여행 내내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러니 보호자가 없으면 불안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할 줄 알았는데. 불안해 하는 것은 맞지만 도련님의 허세가 아직 남아 있는지 울거나 애원하지 않았다. 재미있으면서도 재미가 없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눈에 불안과 두려움이 담기었으면 했는데. 이제까지 부러 괴롭힌 보람이 없다며 혀를 찼다.

현서가 사영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손을 쳐 냈다. 힘없는 움직임이었지만 사영은 곱게 밀려나 주었다.

“누구에게서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익히 들어왔다던 그 사람이 서녕호가의 호현서는 아는 것 같군요.”

그냥 들으면 네가 뭘 들었든 전부 틀렸다는 의미지만 현서가 자문원의 환생인 것을 사영도 알고 있다면 다르게 들릴 말이었다.

“고약한 버릇입니다. 남들의 상찬이 언제나 과장되었다고 여겨 깎아 듣는 바람에 패천검의 무위도 호 공자의 영민함도 무시했으니 말입니다. 자꾸 그리 떠보지 마세요. 호 공자는 비싼 선물인데 내가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흠이라도 내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사영의 협박에 현서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아무리 평정을 가장해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소리가 사영의 귀에는 잘 들릴 것이 뻔했으나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하는 행동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을 텐데 어째서 의향을 묻는지, 그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뭘 하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선심 쓰는 척하지 마라는 얘기에 옥이 급히 끼어들었다.

―너무 도발하는 것이 아니냐.

‘괜찮아. 말처럼 흠을 낸다고 해봤자. 기껏 해봤자 뺨이나 때리는 정도일 테니. 내공을 싣지도 못할 걸.’

개미를 살려 가둬야 하는데 개미의 팔다리를 잘라 가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러면 개미는 죽을 텐데. 현서는 사영의 눈을 피하지 않았지만 긴장으로 입 안이 말랐다. 사영은 현서의 불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현서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확인한 사영이 만족감에 방긋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요. 호 공자가 준 뇌물의 답례도 하였는데.”

그 말에 일순 표정이 흐트러질 뻔하였으나 무표정을 가장해 넘길 수 있었다.

“소궁주,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래.”

사영이 현서를 내버려 두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내력을 주입한 유성추가 현서의 목을 감고 있으니 상관없다 여긴 것이다. 사영이 멀어지자 옥이 곧장 화를 냈다.

―너 때문에 내 수명이 백 년은 줄었을 것이다. 내력을 싣지 않고 때리면 멀쩡할 줄 아느냐. 맞아본 적도 없는 것이 큰 소리를 치기는!

‘고문이라도 할 요량이었으면 진즉에 그렇게 했을 텐데 하지 않았어.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니 폭력이 가장 쉬운 방법인데도 말이야. 내가 울었어도 들었던 거랑 다르구나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을 똑같이 했을걸? 그냥 내가 무서워하는 걸 보고 싶었던 거니까.’

현서가 황궁의 황자만큼 귀히 자랐다는 것은 호가의 부나 과보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현서를 진심으로 아끼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자랐다는 말이다. 현서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겪어보지 못했어도 진심과 가식은 누구보다 잘 구분할 수 있었다.

곽다순은 호현서에게 관심이 없지만 사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관심은 굴절되고 어그러져 있었다. 현서가 두려움을 보였을 때 만족했던 그 웃음만이 진짜였다.

―그럼 울지 그랬느냐.

‘체력 떨어지니까 우는 건 안 돼.’

사영은 부러 현서를 잡아 왔지만 팔찌는 일절 건들지 않았다. 사영과 곽다순이 동맹이라고 해도 모든 정보를 공유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현서는 사영이 옥에 대한 것을 모른다고 확신했다. 자신의 목을 죄었으나 팔찌를 빼앗으려 하지도 부서뜨리려고 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애당초 사영이 자신을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던 걸 보면 곽다순과 그리 사이좋은 동맹은 아니다.

곽다순의 목적이 자문원의 부활이라면 그것만큼 현서의 목숨을 보장하는 일도 없다.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진 절대로 호현서를 죽일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영의 계획에는 호현서가 딱히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모습을 드러내 자신을 잡아 온 것은 곽다순과의 흥정을 위해서겠지.

현서의 말을 가만히 듣던 옥은 어째서인지 항도에서 주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옥이 모르는 겁 없다던 어린 현서의 얘기가.

현서가 고집쟁이인 건 옥도 익히 아는 사실이다. 무모한 면이 있다는 것도 안다. 영우에서 피를 토하면서까지 내공을 끌어다 인형을 태웠을 때 현서는 다시 그 상황에 직면한다 해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 단언했다.

그러나 지금 현서의 몸 안에 충만한 내공은 오직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만 썼으면 했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지만 말이다. 내가 나이 많은 옥이란 걸 기억해 뒀으면 좋겠구나.

‘그게 무슨 말이야.’

―없는 간을 바닥에 떨어뜨려 내 수명을 깎지 말라는 얘기다.

사영을 눈앞에 두었을 때 긴장했던 것이 모두 연기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옥이 부러 농담한다고 받아들인 현서였다. 옥이 다시 말했다.

―뺨 정도는 괜찮다는 소리 하지도 말고. 네가 아픈 것도 다치는 것도 다 싫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네가 무모하게 굴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세 번은 고민하겠다고 약속해. 서녕에 있는 가족들과, 눈알 마음에 안 드는 그놈 자식과, 그리고 네 팔에 있는 나를 떠올려서 세 번은 말이다.

‘응. 약속할게.’

현서가 할 수 있는 것은 방심한 틈을 노리는 것이 고작이다. 난전 중에 이 한 몸 빼낼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성과일 테지만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어쩌면 현서가 하는 것들이 헛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옥은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마음 씀을 현서도 잘 알았다.

❖ ❖ ❖

주경이 잠입조와 무사히 공터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십팔 층 지옥에서 기어 나온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유위람이었다. 옆구리에 달랑달랑 끼고 있는 아이가 숨을 쉰다는 걸 모두 알았음에도 순간 유위람이 살해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로 흉흉했다.

곁에 호 공자가 없으니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났는지 모를 바는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흉악무도한 마두로 보이는데 살기는 또 감쪽같이 갈무리를 했어. 맛이 가려면 완전히 가든가. 애매하게 맛이 가고 난리일 건 또 뭐야. 게다가 며칠을 동굴에서 헤맸는데 수염 하나 없는 저 매끈한 면상은 또 뭐고.’

현서는 이차 성징이 시작되기 전부터 독한 약들을 먹어 왔는지라 원래 수염이 잘 나지 않아 유위람이 자신이 잘 때마다 뭘 했는지 몰랐다. 유위람은 현서에게 잘 보이려고 현서가 잠이 들면 몸단장을 했다. 특히 접문을 하게 되면서는 더욱 신경 썼다. 그 사실은 모르지만, 그래도 감윤은 두 배로 재수 없고 징그러운 자식이라고 속으로 욕했다.

감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유위람은 분노가 극심하면 눈앞이 벌게진다는 걸 체험하는 중이었다. 검선의 죽음 이후로 이토록 화가 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는 어리기라도 했지, 지금은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가장 컸다.

유위람이 아슬아슬하게 참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아 어째서 그들이 현서를 잡아갔는지를 묻지 못했다. 사실 유위람도 답을 몰랐다. 현서를 인질로 삼아 유위람을 협박하려 했다면 동굴을 무너뜨리면 안 되었다.

소궁주가 현서에게 정체 모를 악의를 가지고 있으니 하고 막연히 짜 맞출 뿐이었다. 석연치는 않았으나 말이다.

주경이 데리고 온 일행은 주경을 포함해 전부 열다섯 명이었다. 유위람이 잘 아는 얼굴은 나난과 감윤, 소화리, 그리고 삼중이었다. 나머지는 태호문과 청사파, 그리고 영우곽가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예정보다 이르게 도착한 삼중은 평소보다 세 배는 더 불쌍한 몰골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씹고 있어 소화리가 대신 말했다.

“영진자가 네가 넘겨준 팔만구를 살폈는데, 일단 동굴의 진이 움직이면 우리든 저놈들이든 간에 전부 한 시진(2시간) 정도는 내력을 쓸 수가 없다고 해.”

유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을 쓸 수 없다고 해서 싸우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의해 두긴 해야 했다. 음식을 다 씹어 삼킨 삼중이 덧붙였다.

“복잡한 얘기는 지금 할 것은 아니니 간단히 말하면, 이 동굴에는 두 종류의 진이 있어요. 가장 좋은 건 진을 전부 부수는 것이지만 진이 발동이 되면 어려울 겁니다. 그들도 멍청이는 아니니 방비도 해두었을 테고요. 그게 안 된다면 소궁주가 없는 쪽의 진을 깨야 합니다. 또 술법이 진행되는 동안 소궁주가 무방비 상태가 되는 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필사적으로 덤빌 겁니다.”

삼중이 말하는 사이 유위람의 옆구리에 달려 있던 아이가 정신을 차렸다. 겁을 먹어 깨어나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그걸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얘야. 괜찮니?”

아이를 진정시키는 데에는 삼중이 쥐어준 먹을 것이 효과가 좋았다. 무엇보다 아이는 자신을 구해준 유위람을 확실히 기억했다. 여덟 살이라는 아이는 금제가 걸려 말을 할 수 없었으나 간단한 글은 알았다.

아이, 사람, 二二.

아이가 삼중의 손바닥에 쓴 글이었다. 곽나난이 지목한 세 사람이 아이를 따라갔다. 본격적인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아이들을 탈출시켜야 했다. 그 순간 동굴의 공기가 변했다.

“술법이 시작되었습니다.”

삼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위람이 사라졌다.

❖ ❖ ❖

그들에게 현서는 벽에 박혀 있는 야명주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기에 현서는 방해받지 않고 주위를 볼 수 있었다. 옥에 말에 의하면 이 공동 바닥 전체에 진이 그려져 있다고 했다. 반드시 이 동굴이어야 했던 이유가 저 진 때문일 터였다.

사영이 겉옷을 벗고 진의 중심에 서자 그 주위를 수하들이 둘러쌌다. 점을 찍어 만든, 무척이나 화려하고 풍성한 꽃송이들이 있는 등 위로 수십 개의 장침이 꽂혔다. 사영은 바늘에 찔린 벌레처럼 고통에 바르작거렸으나 일말의 동정도 들지 않았다. 바닥을 득득 긁던 사영이 이윽고 아무렇게나 손을 휘둘러 곁에 있던 수하의 목을 틀어쥐었다.

현서가 반사적으로 일어나려고 했으나 목이 졸려 주저앉았다. 두 번째로 보는 광경이었으나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내력이 없어 원기만을 갈취했던 궁주와 달리 사영은 목숨을 취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수하는 순종적으로 목을 내어주고 온몸의 내력을 빼앗긴 채 죽었다. 순식간에 다섯 구의 시체가 생겼다. 그 주변에 자리한 수하들은 전부 사영을 위해 예비한 목숨이었다. 현서는 끔찍한 혐오감에 진저리를 쳤다.

―아이들이 있구나.

옥의 말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언제 끌고 왔는지 족히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겁에 잔뜩 질린 채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구경하라고 데리고 온 것일 리 없으니, 이 역시 사영을 위한 제물일 것이 뻔했다.

목을 빼 아이들의 주변을 살피던 현서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저 반짝이는 게 뭐지?’

―수은이다.

아이들 주위로 반짝이는 물 같은 것이 보여 물었더니 수은이라고 했다. 고개를 좀 더 빼 들고 살피려는 차에 바닥이 와르르 떨리며 목을 감고 있던 유성추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진이 발동되면 이 동굴 전체에 내공이 제한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현서와 옥은 사영이 유성추에 걸어놓은 내공을 유지할 정신이 없다고만 여겼다.

품 안에 단검도 있고, 유성추를 다룰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사영이 유성추를 다시 사용하는 일을 막기 위해 일단 줄을 감아 소매에 넣었다. 신음도 비명도 나오는 것이 없었으나 공기가 사람을 짓누르며 무거워졌다.

―온다.

옥의 말과 동시에 유위람의 모습이 보였으나 사방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철시에 그 모습이 가리어졌다. 그 뒤를 이어 나타난 일행들과 유위람이 철시를 쳐 내는 것을 보며 옥과 현서는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진이 발동되는 바람에 이 동굴에서 내력을 쓸 수 없는 거구나.’

현서는 여전히 제 몸 안을 돌고 있는 내력을 줄곧 느끼고 있었기에 몰랐다. 조심스럽게 손끝에 내공을 실어보았는데 역시나 가능했다. 그 말은 지금, 이 동굴에서 내공을 쓸 수 있는 것이 현서뿐이라는 뜻이었다.

철시를 모두 쳐 낸 유위람이 사납게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왔다. 수하들이 벌 떼처럼 달라붙는 데다 기감으로 현서를 찾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유위람은 현서를 발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현서는 쭉 유위람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눈이 마주쳤다. 상황이 중한데도 반사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로가 서로의 무사함을 다급히 살폈다. 유위람이 무사할 것을 믿었음에도 눈으로 보는 것은 또 달랐다. 현서의 마음에 안도가 차올랐다. 곧장 기절할 것같이 힘든 몸이 유위람을 보자 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서로의 곁에 가 있고 싶었으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현서와 유위람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고 무방비한 소궁주를 지키기 위해 저들도 필사적이었다. 현서가 있는 쪽은 아직 싸움의 여파가 미치지 못했으나 격렬해지는 싸움에 혹 걸림돌이 될까 동굴 벽 쪽에 바짝 붙어 상황을 살폈다.

지금 이 동굴에서 내공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분명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세 번, 세 번은 생각해.’

현서는 냉정하게 싸움을 관조했다. 서로 내공을 쓰지 못하는 상태는 상관이 없으나, 내력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가 적다는 것은 불리했다. 유위람 일행들은 곧잘 싸웠으나 앞으로 치고 나오기엔 사람이 부족했다.

공동에 들어서자 삼중이 주경의 도움을 받아 발아래 있는 진을 곧바로 훼손해 보았으나 이미 발동 중이라 효용이 없었다는 것을 옥이 전해주었다. 진의 핵심 부분인 사영의 바로 아래나, 아이들이 있는 두 번째 진을 망가뜨려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도 함께 알려주었다. 여전히 사영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어 정신이 없어 보였으나 주변에 사람들이 포진해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다.

―저기에 네가 끼어들 순 없다.

옥이 경고했다.

‘당연하지. 나도 그럴 생각은 없어. 하지만 아이들이 있는 쪽은 어떨까?’

―너!

‘싸움에 끼어들겠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두 번째 진을 내가 부술 수 있다는 걸 너도 알잖아. 세 번, 아니, 서른 번은 넘게 생각했어. 두 번째 진이 발동되면 저 아이들이 전부 죽을 텐데 그걸 두고 볼 순 없어. 아무것도 않고 저 아이들이 죽는 것을 보기만 한다면 내가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 진을 부수려면 강한 물리력이나 내력이 필요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쪽까지 오기엔 시간이 걸려. 무엇보다 내가 진을 부순다 해도 당장 나를 공격 못 할 테니 승산이 있어.’

백주봉 쪽에서 입구를 찾았다고 옥이 가르쳐 주었다. 파죽지세라 하니 곧 도착할 것이다. 현서 역시 이대로 버티는 건 어떨까 싶었지만 시간이 맞아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저들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을 해도 내력을 쓸 수 없는 건 똑같다.

‘영진자가 곧 끝난다고 했다며. 시간이 없어.’

현서는 내내 자문원의 기억을 뒤지고 또 뒤져 머릿속에서 계속 그려보았다.

한창 수련할 때 옥은 만 분의 일도 따라하지 못한다고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뭐라 하지는 않았다. 무공을 수련할 때 단 한순간도 노력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문원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이라면 현서 역시 모두 알고 있다.

‘완벽할 필요는 없어. 진을 부수고 아이들을 진 밖으로 밀어 내기만 하면 돼.’

사영의 곁에 있는 이들이 셋도 남지 않았다. 저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곧 아이들의 차례가 온다는 의미다. 한순간의 틈. 현서가 저 흐름을 끊어 내기만 한다면 승산이 있다.

―죽진 않을 테지만, 많이 아플 거다.

현서의 말이 옳았다. 옥은 더 이상 말려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걱정을 담아 말했다.

‘아픈 건 괜찮아. 나만큼 잘 참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현서가 자신과 옥을 위해 웃으며 대답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현서는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거듭 스스로에게 말했다.

혼잡한 싸움 속에서 현서의 움직임을 신경 쓰는 것은 유위람밖에 없었다. 벽에 가만히 붙어 있던 현서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그저 격해지는 싸움을 피해서라고 여겼던 유위람은 현서의 방향이 아이들을 향했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전음을 쓸 수도 소리를 내 시선을 끌 수도 없었던 유위람은 초조함을 내리누르며 현서에게 가기 위해 서둘렀다. 곧 한 시진(2시간)이 끝나니 내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검날에 묻은 피를 털며 사납게 움직이던 유위람은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현서가 서슴없이 수은에 손을 담그더니 곧바로 손을 휘둘렀다. 현서의 손을 따라 솟아오른 수은 줄기가 쾅 하는 굉음을 내며 바닥을 후려쳤다. 강한 내공을 실은 수은은 정확하게 두 번째 진을 갈라냈다.

모두의 시선이 사영을 향했다. 등의 장침은 사라졌으나 희미해지던 꽃이 더 이상 흐려지지 않았다. 시커먼 피를 뱉어 낸 사영이 무서운 눈으로 현서를 노려보았다. 그제야 유위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현서를 바라보았다.

코와 입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리며 현서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현서의 내력을 머금은 수은이 뱀처럼 똬리를 틀어 아이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한 조각의 수은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변해 사영의 머리를 겨냥했다.

[아이들부터 피신시켜야 합니다.]

현서가 자신에게 보낸 전음을 들으며 유위람이 내력을 끌어 올렸다. 한 시진(2시간)이 끝이 났다.

호 공자를 아는 모두가 현서의 행동에 경악했으나 선후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유위람이 내공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적들도 그러하다는 뜻이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성가신 놈들을 치워 내며 움직일 시간이 없었다. 공동의 천장이 높지 않아 경공을 사용해 뛰어넘기도 어려웠다. 유위람은 내력을 쓰는 보법 중 하나인 수선보(水線步)를 사용했다. 험준한 물길을 휘돌아 나가는 강줄기의 흐름을 본 땄다는 수선보는 들러붙는 놈들을 수월히 따돌릴 수 있게 해주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현서의 상세가 심상치 않은 것이 빤했다. 영우에서 피를 토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현서를 데리고 화 누이에게 가야 했다.

이 모든 것이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건만 유위람은 현서에게 닿지 못했다. 그렇게나 서둘렀음에도 사영의 공격이 더 빨랐다. 내력의 금제는 없어졌으나, 사영의 무기가 곁에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영은 손에 내력을 모아 탄처럼 쏘았다. 수은 송곳이 사영이 날린 공격과 부딪혀 비산했다. 수은은 송곳의 모습을 잃고 물방울처럼 촤악 소리를 내며 흩어졌으나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방울방울마다 여전히 현서의 내공을 머금은 채로 빼곡히 흩어져 현서를 보호했다. 사영의 공격이 실패한 것이다.

현서는 미동 없이 그 자리에서 서서 머리카락 한 올 상처 입지 않았으나 뱉어 내는 피의 양이 늘어났다.

그사이 검을 든 사영의 두 번째 공격은 유위람에게 막혔다. 유위람은 잔뜩 독이 오른 사영의 검을 쳐 내며 혀를 찼다. 사영의 등에 꽃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술법이 거의 끝나갔다고는 하나 완성되지 못하고 강제로 끊겼으니 반동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치곤 지나치게 멀쩡했다.

유위람이 낸 어깨의 상처도 없어졌다. 수하를 죽여 내공을 빼앗은 것이 단순히 고통을 중화하는 수단이 아니라 무방비가 되는 상황을 최소화하려 한 방비였던 모양이었다.

흡수되지 않은 내력이 사영의 몸 밖으로 흘러넘쳤다. 사람을 죽여가며 제대로 삼키지도 못할 정도로 내력을 빨아들인 이유가 단지 무력해질 때를 대비한 방패였을 뿐이라니. 징그러운 새끼. 유위람의 눈에 혐오가 깃들었다.

‘시간이 없어.’

백주봉의 지원이 도착했으나 유위람은 초조했다. 현서는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었으나 정상일 리가 없었다.

눈이 돌아간 사영이 현서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유위람에게 엉겨들자 성가신 유위람이 발로 사영을 걷어찼다. 내력을 실은 각법(脚法)은 제대로 맞으면 내장이 터지지만, 사영은 몸에 두른 넘쳐나는 내력 덕에 휘청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난 것이 다였다.

유위람이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인상을 썼다.

사영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저것부터 치워야 했다. 수십 명의 내력이 뭐 어쨌단 말인가? 가로막았다면 베어 내고 찢어발기면 될 일이다. 유위람이 손에 쥔 검을 보았다. 스승님들이 선물해 준 이 검은 내력을 과하게 실어도 당장 터져 나가진 않을 것이다.

검날 위로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선명한 검기가 덧씌워졌다. 금가루를 뿌린 듯 아름다운 검기는 천하제일마두에 소질이 있다는 스승님들의 말처럼 흉악하게 일렁였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몇 합을 나누었으나 사영의 눈은 여전히 유위람의 뒤를 향해 있었다.

“눈 깔아. 뽑히기 싫으면.”

유위람이 정확히 사영의 눈을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이마 위로 피가 터졌다. 핏물이 눈에 들어가지 않게 이마를 훑어내는 사영의 흉흉한 눈은 현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는 절절한 분노로 가득했다. 그에 유위람이 비웃었다.

“용혈을 가지고 쫓길 때도 쳐웃었다던데. 왜 지금은 못 웃지? 웃어봐. 모든 게 네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굴더니, 그걸 방해한 게 하필이면 너무 하찮아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이라 배알이 꼴려 눈이 뒤집어지던? 멍청한 것.”

바로 알 수 있었다. 사영이 현서를 무시해 내버려 두었다는 걸. 억류되어 있지 않아도 무엇도 하지 못하는 현서가 두려움과 무력감에 괴로워하길 바랐겠지. 유위람의 검이 사영의 머리칼을 석둑 잘랐다. 조금만 더 들어갔음 대가리가 반 토막이 났을 텐데. 아쉬움에 혀를 찼다.

필사적으로 유위람의 공격을 막아대면서도 형형한 분노를 담아 현서를 보는 사영의 눈빛이 같잖았다.

“네가 죽이려는 상대는 무조건 그저 무력하게 죽을 것 같았나? 그게 분해? 너보다 약한 자가 너를 막은 것이? 이 강호에서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인지 그걸 누가 결정하기에? 무엇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소갈머리가 좁고 주제를 모르는 것은 네 아비와 똑같구나.”

자문원의 덕으로 대외적으로 말을 삼갈 뿐 원래 유위람은 상스러운 말 없이 욕하는 것을 잘했다. 서늘한 유위람의 얼굴로 사람을 낮잡아 빈정거리면 같은 말이라 해도 몇 배로 기분이 나쁘다고 말한 주변인의 충고를 잘 활용했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잘 들리게 한 마디 한 마디 끊어가며 말해 주었다. 무엇보다 사영에게도 그 아비가 역린일 것이 뻔했다. 궁주가 소궁주의 얘기에 결국 참지 못한 것처럼.

유위람이 무어라 하든 현서만을 노려보며 공격을 이어가던 사영의 눈알이 빙글 돌아 유위람을 응시했다. 이성을 되찾은 것인지 더 돌아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더 이상 현서를 보지 않는 것에 유위람은 만족했다.

당장 목을 꿰뚫어 버리진 못했으나 사영의 부상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유위람 역시 완전히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사영은 자신에게 있는 상처들을 유위람에게 돌려주지 못했다. 그것이 둘의 차이였다.

“궁주를 만났군요.”

“그래, 곧 뒈질 것처럼 골골거리면서 아들 걱정을 하지 뭐야. 소중한 후계자의 몸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 너무 놀라 관에 누울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군. 미리 조의를 표하지. 참으로 안된 일이야. 그래도 부자가 사이좋게 관에 누울 테니 저승 가는 길이 쓸쓸하진 않겠지. 가족 무덤을 만드는 걸 추천하겠어.”

누군가 사영의 몸에 둘린 내력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숭덩숭덩 구멍이 나 있다고 묘사할 것이다. 내력이라 해도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사영이 오래도록 운기해 흡수했다면 또 모를까, 급하게 긁어모은 내력은 양이 많다고 해도 유위람이 쌓아 온 내력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위람과 사영의 검 둘 다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술법의 실패에 대한 반동으로 자신의 몸이 완벽하지 않다고 하나 몸에 두른 내력은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사영은 어깨를 찔린 후로는 유위람을 얕보지도 방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유위람은 오직 검에만 검기를 둘러 자신을 압박했다.

괴물 같은 자식. 사영은 감윤이 들었다면 박수를 치며 좋아했을 감상을 남기곤 뒤로 훌쩍 물러났다. 아니, 물러날 수 없었다. 유위람이 그대로 따라와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사영이 유위람 너머의 현서를 보았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등을 곧게 세우고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다.

‘정말 끔찍하게 재수가 없는 모양새야.’

인정했다. 이번 판은 자신이 졌다. 그것도 줄곧 무시하고 깔보고 있던 상대 때문에. 하지만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었다. 한 번의 실패로 무너질 것이었으면 진즉에 죽어 백골이 되었을 것이다.

이 동굴은 물론 이 산 전체를 손바닥 보듯 훤히 아는 사영이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두는 버릇 때문에 이 동굴 안의 탈출로만 해도 한둘이 아니었다.

아군이 늘었으나 넓은 공터가 아니라 호재만은 아니었다. 그 옛날 백양교와의 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소궁주를 지키겠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과 이지를 상실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덤벼드는 이들. 그 아수라장을 현서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옥은 현서가 무언가를 보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몸은 한참 전에 한계를 넘어 현서를 버티게 하는 것은 오로지 현서의 정신뿐이었다. 지켜야 한다. 지금 쓰러질 수 없다. 현서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 두 가지뿐이었다.

‘아파. 아파. 아파.’

현서는 자신이 뭐라고 중얼거리는지도 몰랐다. 옥의 말을 듣지 못 한 지도 이미 오래였다. 옥은 속이 탔다. 눈알 시커먼 저 자식도 오고 외부의 지원도 도착했으니 그냥 정신을 잃고 쓰러지길 바랄 정도였다.

지금은 사영이 눈이 뒤집어져 유위람과 대치하고 있으나 저놈도 머리가 있다면 물러나야 할 때임을 알겠지. 그러니 현서가 쓰러져도 괜찮다.

그 때였다.

쭉 앞을 응시하고 있던 현서의 고개가 스윽 돌아갔다.

―무엇을 보느냐? 저 미친놈이!

현서가 무엇을 본지 금세 알아챈 옥이 노발대발했다. 난전의 소음이 일순 사라진 것 같았다. 야명주도 없는 어두운 벽면에 곽다순이 있었다. 원래라면 어둠에 가려 볼 수 없는 모습이건만 현서는 또렷하게 보았다.

내공을 사용하는 현서의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곽다순은 현서와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이 이상 기쁠 수 없다는 환한 미소가 만면에 가득했다. 눈꼬리가 내려간 순한 얼굴이 활짝 피었으나 좋아 보이기는커녕 소름 돋는 기괴함만을 남겨주었다.

‘너는 계속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옥은 현서가 중얼거리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되묻지도 못했다. 착각인 것처럼 곽다순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졌고, 옥은 현서가 벌이는 미친 짓에 정신이 쏙 빠졌기 때문이다.

―호현서! 이게 무슨 짓이야! 네가 기어코 정신이 나갔구나!

옥이 비명을 질렀으나 현서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 자신과 아이들의 주위에 두른 수은을 전부 거둬 낸 현서가 그것을 채찍처럼 만들어 벽면을 후려쳤다. 물이 없어 떠올린 고육지책이었다.

유위람을 비롯한 사람들이 현서의 기행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모래알만큼 잘게 부서진 돌가루와 수은이 현서의 내력을 머금고 허공을 뒤덮는 것과 동시에 천장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곽다순이 사영을 위한 틈을 만들기 위해 공동을 무너뜨렸다.

현서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모두가 무너진 돌무더기에 깔려 죽거나 크게 다쳤을 터였다. 현서가 자리한 곳의 천장은 무너지지 않았으니 움직이지 않았다면 현서만은 무사했을 터였으나, 그런 건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호 공자!”

벽에 박힌 야명주들이 대부분 박살 나 공동은 어둠속에 잠겼으나 유위람은 정확히 현서를 찾아냈다.

곽나난의 저택에서 현서가 인형에 불을 냈음을 유위람은 그제야 알았다. 정순하고 웅혼한 내력이 현서로부터 비롯되어 이 공동을 감싸고 있었다.

눈, 코, 입, 귀. 얼굴의 모든 곳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멈추지 않았다. 유위람은 더럭 겁이 났다. 이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충격으로 흐트러졌거나 넘어졌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떡 벌렸다. 그들도 내로라하는 무인이다. 어둠 속이라도 해도 누구의 내력이 어떻게 자신들을 지켰는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곽나난을 비롯한 감윤과 소화리는 현서가 만들어놓은 내력의 방패에 자신들의 내력을 보탰다. 이런 식으로 내력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 효율적이지 않았으나 다친 사람들과 아이들을 먼저 보낼 동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삼중의 재촉에 얼이 빠진 이들이 정신을 차렸다. 곽나난이 한편에서 썰물처럼 빠지는 적들의 기척에 혀를 찼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살아남은 적들이 그들의 탈출로를 이용해 도망가는 것을 내버려 둘 수밖에.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금제에 걸려 소리도 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정신을 잃은 채였다. 주경이 다치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 충격으로 흙과 돌이 내려앉은 굴의 입구를 밀어 내고, 나머지는 기절한 아이들을 하나둘씩 옆구리에 끼었다. 아이들은 현서의 뒤에 있었기 때문에 지나갈 때 자연히 현서에게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주경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아이들을 챙겨 가며 현서를 보았다.

패천검의 곁에 있는 현서의 얼굴은 피 범벅이었다. 서녕호가의 호현서를 알든 모르든 그들은 현서에게 빚을 졌다는 것을 알았다.

“호 공자.”

현서는 기절하지 않았으나 유위람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무시한 것이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이다. 내력을 과하게 쓰면 의식의 일부가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유위람은 배워 알고 있었지만 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두 번 보고 싶은 광경이 아니었다.

현서가 어째서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심한 무리를 하고 있음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현서와 떨어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눈앞의 이 몸은 금세라도 바스라질 것 같았다. 무력함에서 오는 공포가 너무도 선명했다.

“아하하하하하!”

그 때였다. 사영의 웃음소리가 공동을 채웠다. 진즉 몸을 피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유위람의 검이 배에 박혀 사영 역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호 공자가 나를 두 번이나 돕는군요. 진절머리가 나는 일입니다.”

곽다순은 사영이 탈출할 틈을 만들어주려고 공동을 무너뜨렸으나, 사영 역시 깔려 죽을 수 있음은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동굴이 무너지는 그 순간에 유위람의 검이 배에 박혔으니 제때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영은 자신의 머리 위를 보았다. 현서의 내력을 머금은 모래알과 수은 방울들이 촘촘한 그물처럼 둘러져 있는 것을.

곽나난과 다른 이들도 이미 빠져나가 남은 것은 현서와 유위람의 내력뿐이었다. 그럼에도 현서의 내력이 가장 도드라졌다. 현서가 유위람보다 내공이 더 큰 것이 아니라, 응용법이 아예 달랐기 때문이다. ‘검선’이 하는 것이니 아무나 따라 할 수 없음이다.

곽다순이 현서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못해 무공을 사용할 수 있음을 자신에게 숨겼다. 원래 돈독한 동맹은 아니니 이걸로 트집 잡을 수는 없으나 기분이 더러웠다. 사영이 입에 고인 피를 뱉으며 말했다.

“호 공자가 산혼투를 먹고도 살아나는 바람에 내 아비가 뒈질 날을 받은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나. 그때 호 공자가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그치지 않는군요. 배은망덕한 일이지요. 허나 어찌합니까? 구명지은은 좋은 말이나 어딘가에 은혜를 갚는 이가 있다면 은혜를 버리는 이도 있으니 말입니다.”

“소궁주!”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하는 사영을 말리는 것인지 퇴로를 확보했다는 알림인지 모를 부름이 수하의 입에서 나왔다. 얼굴에 흉을 달고 있는, 신농자의 가짜 제자 노릇을 했던 그 수하였다.

사영의 말을 들은 것은 유위람과 옥뿐이었다. 허나 유위람도 옥도 당장 현서에게 신경이 쏠려 있어 그 말을 귀 담지 않았다.

“소궁주! 서두르셔야 합니다!”

수하가 다시 사영을 재촉했다. 사영은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현서를 한 번 일별하곤 사라졌다.

우릉우릉 하고 동굴이 연이어 떨렸다. 위험한 징조였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없었다. 현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현서의 내력이 무너지는 흙과 돌을 막고 있었다.

유위람은 속이 타다 못해 미칠 것 같았으나 억지로 끌고 가기는커녕 손을 댈 수도 없었다. 함부로 옮겼다가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서가 스스로 내력을 거두어야 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모두 물러났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빌어먹을 사영까지 물러나자 유위람이 현서에게 계속 속삭였다. 이제 현서는 정신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몸은 무너지지 않았고 천장을 받치는 내력은 여전했다.

―독한 것! 이 독한 것!

걱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옥의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현서는 고개를 돌려 공동 안에 남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유위람의 손을 꽉 잡았다.

[패천검이 있는데 왜 아무도 없는 것입니까. 걱정 말렴. 이제 괜찮단다.]

전음이었다. 말을 하면 입에서 핏덩어리가 쏟아질 테니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현서의 말은 이상했지만 유위람은 그것을 따질 정신이 없었다. 현서가 내력을 거두겠다는 뜻을 보이자 유위람은 기다렸다는 듯 현서를 안아 들고는 내달렸다.

유위람의 옷은 그 자신의 식은땀과 현서의 피로 순식간에 축축해졌다. 유위람은 자신이 떨고 있는지도 몰랐다.

“화 누이가, 소의선인 화 누이가 산 아래 있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자신을 위한 말인지 현서를 위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유위람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의 피가 다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현서는 너무 가볍기만 했다.

현서와 유위람의 내력이 사라지자 굉음이 터지며 무너지는 공동을 뒤로 하며 현서가 유위람을 다독였다. 자신을 안고 있는 유위람의 몸이 떨리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건네는 위로였다.

그러나 두서없이 전해 오는 말은 옥에게 하는 것인지 유위람에게 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서른 번은 넘게 고민했다고 말했는데. 너무 화 내지 마요. 아픈 거지 안 죽는다고 했잖아. 아픈 건 익숙하고 잘 참는데.]

아프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끔찍했다. 유위람이 눈을 질끈 감았다.

❖ ❖ ❖

패천검 유위람이 화정이 머무는 산 아래 마을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있어 현서의 상태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모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유위람이 따로 경고할 것도 없이 동굴에서 현서가 벌인 기사를 본 이들은 전부 침묵했다. 그들의 염치는 둘째치고 현서의 상세가 그만큼 좋지 않아서였다.

백주봉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고산현에 아이들과 부상자의 치료를 위해 거점을 꾸렸던 화정은 현서의 모습에 기함했다. 성한 곳이 없었다. 기어 다닌 탓에 팔다리에 빼곡하게 든 멍이 가장 나은 상세였다. 유성추에 졸린 목은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끊임없이 흐르는 피였다. 탕약을 뱉어 내길 수차례, 화정이 혈을 누르고 침을 써 피를 멎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이상은 몸이 약해 약은 물론이고 침도 당장은 더 이상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아직 여름이 한창이건만 현서의 몸은 얼음장 같았다. 내력으로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유위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스승님께서 곧 오실 거야.”

화정은 현서가 내력을 사용했단 얘길 들었으나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맥을 짚어도 현서의 단전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서가 내공으로 사람들을 지키고 전음까지 사용한 것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면 유위람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긴 하였다. 일전에 몰래 현서의 내력을 살펴본 적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눈앞에서 본 일을 부정할 멍청이는 아니다. 유위람의 눈이 팔찌가 있을 현서의 왼팔을 향했다.

“밥 먹자.”

소화리와 감윤, 주경이 찬합을 주렁주렁 들고 왔다. 현재 산 아래의 마을인 고산현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 현서가 있는 이 방이었다. 좁지 않은 방이었으나 침상의 유위람과 현서를 제외하고도 여섯 명이 자리하자 금세 복작였다.

세 개의 찬합은 삼중의 몫이었다. 소화리는 유위람에게도 음식을 하나 건네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파리한 현서의 상태가 안타까운 탓도 있지만 유위람이 잔뜩 날이 선 상태로 현서를 싸고도는 것을 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저 미친놈이 새파랗게 어린 현서에게 흑심이 있다는 걸 말이다.

양심도 없다는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 왔으나 지금 할 말은 아니라 억지로 참았다. 나머지도 소화리와 비슷한 감상이었다. 지금 바로 욕을 할 수 있는 화운검 호현진은 현서가 오기 전에 서녕호가와의 연락을 위해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곽나난이 피곤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그들이 처음 주경을 따라 동굴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을 대피시키라고 세 사람을 보냈다. 그들과 아이들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백주봉에서 진입해 갈라졌던 이들 중 일부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신농자가 남긴 유산은 위험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동굴을 폐쇄할 계획이었으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운이 좋아 동굴만 무너지는 것에 그쳤지, 백주봉 전체가 영향을 받아 산사태라도 났으면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을 겪었을 터였다.

유위람이 말했다.

“우리가 처음 도착했던 그 공터에 길이 여럿이었던 거 기억나? 그중에 두 곳이 느낌이 안 좋았어. 하나를 골라 갔더니 항도에서 보았던 움직이는 시체들이 있었고.”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한 것은 동굴이 무너지는 데 휩쓸린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

“그래, 나머지 한 곳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곽 숙부가 오셨을 터이니.”

유위람의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해 했다. 유위람을 비롯해 아무도 곽다순을 보지 못했기에 폭발과 관련된 것이 소궁주의 수하라고 여겼다.

“소궁주가 나를 떼놓으면서까지 호 공자를 데리고 갔다. 술법에 필요해서 데리고 간 것이 아니었지. 호 공자는 벽 근처에 있었으니까. 그러니 동맹인 곽 숙부를 위해 데리고 갔다는 말밖에 더 되겠나.”

“일전에 곽 숙부가 호 공자를 유인한 것도 그러했고. 곽 숙부의 목적은 검선의 부활 같은데, 그게 호 공자와 연관이 있다는 말이야?”

“그저 팔찌가 필요한 것만은 아닌가 보군.”

반드시 필요했다면 팔을 잘라가면 그만이었을 테니. 감윤과 곽나난이 말을 보탰다.

“호 공자가 내력을 사용한 것과 연관되어 있는 걸까?”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이지.”

“그런데 호 공자는 누구에게 배운 걸까? 더군다나 왜 하필 내공만 익혔을까.”

내공의 흔적이 없는 것도 기이한 일이지만 외공 수련은 흔적이 남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환골탈태를 해 신선의 반열이 든 것이 아니고서야 무기를 사용하는 자는 그 몸에 수련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현서가 환골탈태를 했다면 아플 일도 없으니 내공만 익혔다는 말이 된다.

무공을 배울 때 외공과 내공 중 하나만 익혔다는 것은 참으로 괴상한 얘기였다. 외공만 익힌다면 고수가 될 수 없고, 내공만 익힌다면 무슨 득이 있겠는가? 무어라 포장하든 무공은 타인과 싸우기 위함이니 외공을 익히지 않은 것은 이상했다.

외공 없이 내공만을 익힌 것은 무림인의 입장에선 팔 한 짝, 다리 한 짝만 있는 옷을 입은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으나 의원인 화정의 의견은 또 달랐다.

“현서의 건강과 관련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에 소화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호 공자가 언니의 예상과 달리 건강해졌다는 말을 했었지요?”

현서의 건강이 좋아져 스물다섯 살 이전에 요절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화정은 기뻐하기에 바빠, 의당의 의선과 소의선이 같이 내린 진단이 틀리는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었다.

“호 공자의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면 좋은 일이지만 결국 그게 곽 숙부의 목적과 무슨 상관있는지는 모른다는 얘기로 돌아가는군요.”

“호 공자가 깨어나면 알 수 있을까?”

“내공을 배운 일에 관해서라면 모를까, 곽 숙부의 일을 호 공자가 알까?”

감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들은 현서가 깨어난다고 해도 현서에게 물을 마음이 없었다.

내공은 현서의 큰 비밀일 것이 분명했다. 내공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누구도 몰랐으니 말이다. 허나 필요한 순간에 현서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오랜 비밀이 들통 날 수도 있다는 것을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현서의 유리 같은 몸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지금 이 결과를 본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움직였을 게 뻔했다. 그러니 추궁 같은 후안무치한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유위람은 다르게 보았다. 옥이 현서와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공은 옥에게 배웠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현서가 말하길 열네 살 이후 옥이 말했다고 했으니 화정의 말처럼 건강을 위해서였겠지.

유위람은 현서가 왜 외공을 배우지 않았는지도 쉽게 이해했다. 가벼운 수영을 배우는 것조차도 못 할 거라고 이사와 현진이 난색을 표하지 않았던가. 배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배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상한 점이 도드라졌다. 내력을 잘 쌓는 것과 내력을 잘 쓸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현서가 강호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석청담과 인연이 있다고 해도 비무회 때의 반응을 보면 타인의 무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현서의 판단과 내력의 사용은 무척이나 정확하고 노련했다. 이것을 단순히 옥 님의 조언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몸으로 배우는 것이 어려워 수영은 물론이고 손의 혈을 짚는 간단한 것도 며칠을 쏟아부은 뒤 성공했던 현서였다. 그 급박한 상황에 조언만으로 그렇게 완벽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훌륭한 내력의 응용, 동굴에 떨어졌을 때 현서가 했던 이상한 말들, 거기에 곽 숙부의 과한 집착까지. 설마 현서가, 어쩌면.

‘아니. 너무 허황된 생각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이 너무 황당무계하게 느껴져 유위람은 실소했다.

“그럼 먼저 아는 것부터 얘기하도록 하죠.”

젓가락을 내려놓은 삼중이 입을 열었다. 복잡한 얘길 할 차례였다.

곽나난 일행이 현진을 비롯한 석청담 사람들을 찾아 떠나고 현서 일행도 조부가 있는 화용으로 떠난 뒤, 홀로 남은 삼중은 진을 베껴놓았던 종이를 붙들고 연구에 몰두했다. 태호문에는 도움받을 수 있는 고서가 많았으나 항도와 거리가 너무 멀었다.

“호 공자의 측근인 이사는 정말 유능하더군요.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상천관에서는 패천검 유위람이 누군지도 몰랐던 이사는 삼중에게 만화산 삼노사를 만나는 것은 어떠하냐고 조언할 만큼 강호에 관한 지식이 늘었다. 무엇보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삼노사를 두 번의 만남 끝에 낚아 올린 것은 어디에 견줄 수도 없는 빛나는 업적이었다.

만화산 노사들이라 해도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들의 관심도 검과 검법에 쏠려 있다. 대신 그들에게는 연륜이 있었다.

삼노사는 삼중이 보여준 진법은 처음 보지만 등에 진이 움직이는 것은 짐작 가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삼중에겐 전부 금시초문인 얘기들이라 도움이 되었다.

삼중이 한숨을 쉬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나쁘게 말해선 안 된다고 하나, 당금 천하에 저 진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다시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신농자가 불세출의 천재인 동시에 너무도 끔찍한 것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복수와 죽은 가족의 부활을 꿈꾸었으니 좋은 걸 만들어 내진 않았을 거라 막연히 짐작했으나, 삼중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명백한 혐오였다.

굴이 확실히 무너졌음을 확인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한 삼중은 모든 일이 끝나면 팔만구를 가루로 만들 거라고 말했다.

“만약에 산 자의 목숨으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럼 죽은 사람 한 명을 살리는 데 필요한 생목숨은 몇 명이 적당할 것 같습니까?”

“생목숨이 한 명이어도 옳지 못한 일이나,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신농자의 계획에선 필시 한 명이 아니었겠군요.”

“차라리 한 명으로 가능했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입니다. 그러면 살리겠다는 사람만 죽으면 될 일이니 말입니다. 사술을 쓰는 이들은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큰소리치며 죽은 사람 하나를 살리는 일에 산 사람의 목숨을 물을 쏟듯 죽여버립니다. 이 무슨 모순입니까. 사술을 쓰는 이들이야말로 불가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더 큰 제물이, 더 악독한 희생만이 망자를 되살린다고 포장하는 것이지요.”

태호문에서 가장 성품이 좋다고 말해지는 삼중이지만 사술에 관해선 가차 없이 냉정했다.

“강시가 아니어도 시체를 움직이는 사술은 여럿 있습니다. 당장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열이 넘지요. 하지만 신농자의 방법처럼 말도 하고 맥과 심장이 뛰는 상태로 만든 건 보지 못했습니다. 혼을 불러들이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벌고 싶었는지, 아니면 그 상태로 만족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렇게 만들기까지 엄청난 생목숨이 들어갔다는 건 분명합니다.”

신농자는 시체를 움직이기 위해 타인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거라고 삼중은 추측했다.

원기, 내력, 진기 따위를 타인에게서 빼앗는 것이 가장 쉽고,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다음이고, 가장 어려운 것은 빼앗은 것을 원하는 상대에게 주는 법이라 했다. 특히 마지막은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에 무공이 고강한 이들도 쉬이 할 수 없다.

때문에 신농자는 진을 만들어 냈다. 타인의 원기, 내력, 진기 따위를 수월히 빼앗아 옮기는 진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왜냐면 그 빼앗은 원기, 내력, 진기 따위를 받아들여야 하는 쪽이 이미 시체니 말이다.

삼중이 머리가 아픈지 인상을 찡그렸다. 이 모든 것들은 그저 망상으로, 실패해 어리석은 시도로 끝나야 했으나, 신농자가 보기 힘든 귀재(鬼才)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도 제정신이 아닌.

“똑똑하든 아둔하든 간에 대저 미친 자의 맹목이라는 것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삼중의 말에 방 안의 모두가 이성을 잃은 지 오래인 사람 하나를 동시에 떠올렸으나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빼앗은 생기를 시체에 넣기 위해 나온 것이 등의 진입니다. 생기를 차차 빼앗긴 뒤 죽으면 그때부턴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됩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진 않지만 꼭두각시는 확실히 움직이지요. 생기를 빼앗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그 시체조차 아깝다 여겨 이용한 것입니다. 참으로 효율적이고 악독한 방법입니다. 죽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대량의 예비 시체를 만들고 그 시체로 수하를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찬찬히 말하던 삼중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입에 올리기 싫을 정도로 기분 나쁜 일인 듯했다. 곁에 있던 감윤이 꿀을 넣은 차를 주었다. 단번에 차를 마신 삼중이 숨을 한 번 삼키고는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기세로 쏟아 냈다.

“그것을 위해 등의 진을 새길 때 먹에 벌레의 알을 넣었습니다. 만화산의 노사들께서 알고 계시더군요. 백충(白蟲)이라고 하는 이 벌레는 죽은 알에서 산 애벌레가 나오는 기생충의 일종입니다. 어미가 두 개의 죽은 알을 낳고 자신도 죽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부화한 두 마리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고 다시 새끼를 낳고 죽는 것을 반복한다고 하더군요. 그럴수록 벌레는 점점 커지고 그 때문에 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항도에서 삼중이 만든 두 개의 진 중에 살아 있는 것을 걸러 내는 진에 걸린 것은 등의 벌레 때문이라는 말이다. 처음 시체가 움직였을 때도 진은 죽어 있는 것으로 인식했음을 기억했다. 삼중은 그 시체 등의 벌레가 아직 작아 일 각(15분) 사이에 부화하고, 잡아먹고, 다시 알을 낳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시체는 움직여도, 말을 해도 시체일 뿐이었고, 살아 있는 것은 진을 유지하기 위해 넣은 벌레였다는 얘기였다. 진이 움직이는 것은 벌레가 번식하고 있다는 표식이라 했다.

가만히 듣던 소화리가 물었다.

“그러니까 시체를 말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려면 사람의 생명력이 필요한데,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매개로 벌레를 썼다는 말이지요? 제가 이해한 것이 맞나요?”

삼중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화리가 다시 질문했다.

“번식을 할 때마다 진이 움직인다니, 진법엔 작은 착오도 있어선 안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게다가 등에 새겨진 진이 빼앗은 생명력을 시체에 전달한다는 건데, 벌레가 움직이기 전에 시체가 먼저 움직였잖아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소화리의 의문은 타당했다. 삼중이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감윤이라면 신농자를 향해 쌍욕을 했을 삼중은 차마 욕을 하지 못해 그런 것이다.

“굳이 백충을 고른 의도가 거기에 있을 겁니다. 허나 저도 그 원리는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아요. 장담하건대 지금 강호에는 저걸 이해하는 이가 또 있진 않을 겁니다. 저런 귀재가 다시 나오지 않아 소궁주 일행도 저 동굴을 떠나지 못한 겁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지요.”

인상을 쓴 삼중이 다시 말을 이어가자 사람들의 표정 역시 점점 나빠졌다.

신농자는 가족을 살리고 복수를 하기 위해 많은 사람의 생명력을 빼앗아 죽인 뒤 그 시체로 군대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항도에서 보았던 시체는 사영이 만들어 낸 것이니 신농자가 작정을 했다면 정말 되살아 난 것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우문 소문주가 말한 파성군과 그 아들의 얘기가 떠올랐다. 신농자의 고향인 담주는 백양교가 극성을 부린 지역 중 하나였다. 신농자가 백양교와 연관이 있든, 백양교의 사술에 영향을 받았든 둘 다 좋은 얘긴 아니었다. 소화리가 토할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말을 끝낸 삼중은 찻잔의 반을 꿀로 채운 차를 연거푸 마셨다.

“그러니까 저 백충이라는 벌레는 부자(附子: 투구꽃의 뿌리)를 먹고 죽은 어린아이의 비장으로 꾀어낸다는 말이군요.”

완비의 납치가 성공했다면 정기를 빼앗겨 죽었거나 독을 먹고 죽은 뒤 내장이 파여 벌레의 먹이가 되었을 거라는 말이었다. 되물어보는 곽나난의 얼굴이 전에 없이 사나울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부자는 독성이 강하지만 약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신경통, 중풍, 관절염에 쓰이는 약이라 어린아이에게 쓸 일이 없지. 사고나 독살이 아니면 아이가 먹을 일이 없는데 그걸 먹고 죽은 아이의 비장에서 나오는 벌레라고? 의당에서 들어본 적도 없는데!”

화정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나 서둘러 사라졌다. 구출해 낸 아이들 중에 중독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은 없었으나 다시 확인해 보아야 했다. 소화리가 그런 화정을 따라갔다.

신농자는 평생을 후회했다고 했다. 무엇을 후회하였을까? 저 끔찍한 사술을 만들어 낸 것을? 그가 저 사술을 만들었을 때 가장 먼저 가족들부터 말하고 움직이는 시체로 만들어보았을까? 저 사술을 연구하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신농자는 이미 죽었으니 그 답을 말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화정과 소화리가 떠난 방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깨고 유위람이 입을 열었다.

“신농자의 일이나 항도에서 보았던 시체의 일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것이 소궁주와 소궁주를 따르는 이들이 이곳에 둥지를 튼 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소궁주와 수하들의 바람은 등에 새겨진 금제를 없애 궁주가 쥐고 있는 목줄을 푸는 것일 터. 그것이 어째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시체를 움직이는 비술과 일치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곽다순의 목적과 일치해 보이지 않나. 유위람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거기까진 말하진 않았다.

어제 삼중은 공동 안에서 진이 움직이는 것을 줄곧 관찰해 진에 손을 댄 흔적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신농자의 제자 노릇을 하며 배운 지식으로 수정한 것일 게 뻔했다.

“진을 이용한 법술은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다 한들 팔괘(八卦)와 구궁(九宮)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저 두 가지가 모든 진법의 어버이지요. 하지만 신농자의 진법에서는 팔괘와 구궁의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신농자가 이제까지의 법칙을 모두 무시하는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건 오직 그만이 아는 방법이지요.”

삼중이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착실히 가짜 제자 노릇을 했지만 스승인 신농자가 너무도 홀로 뛰어나 원본을 통하지 않으면 감히 새로운 진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다.

“저는 소궁주 일당이 백충을 사용하는 방법은 제법 통달했으리라 여깁니다. 독을 독으로 제압한다는 말이 있듯이 백충을 사용한 진이 장로나 호법들에겐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궁주에겐 소용이 없었겠지요. 어제 소궁주의 등을 보았습니다. 점으로 이루어진 등의 꽃들이 그리 크고 화려한데 백충을 사용한 진은 보이지 않더군요. 궁주는 죽어가고 신농자는 이 동굴의 비밀에 대해 단호했을 겁니다.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삼중이 품에서 팔만구를 꺼내 들었다. 내력을 주입하자 납작하던 팔만구가 동그랗게 변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이 봉인진이고, 어제 동굴에서 저들이 손을 대어 고쳤던 진과 비슷하다는 것뿐입니다.”

삼중은 이것이 소궁주에게 완벽한 자유를 줄 완성본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삼중 역시 팔만구의 진이 정확히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유위람은 적당히 상상해 보았다. 사영과 그 일당은 저 동굴을 발견하고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았을 것이다. 벌레에 관한 것도 그때 알았을 터. 그러나 실패하자 동굴의 주인을 찾아보려 했겠지. 하지만 신농자는 이 동굴의 일을 크게 후회했으니 어지간한 방법으론 회유하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제자를 바꿔치기할 수밖에.

사영은 가짜 제자가 모든 것을 배웠다고 여겨 쓸모없어진 신농자를 버리라 명했겠으나 틀렸다. 아마 사영은 자신이 불완전한 방법을 시도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팔만구를 알게 되면 그 꼴이 제법 볼 만하겠지. 유위람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술법이 완벽하게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동굴이 무너졌지요. 그 말은 소궁주가 매달릴 것은 이제 이 팔만구뿐이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소궁주는 팔만구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큰 부상을 입었으니 그사이 죽었을지도 몰라.”

감윤과 곽나난은 동굴이 무너질 때 검기가 실린 유위람의 검이 사영의 배를 찌른 것을 확실히 보았다. 타인의 내력을 감고 있어 즉사하지 않았으나 즉사해도 무리 없을 부상이니 도망을 쳤어도 수월하지 않을 게 뻔했다.

유위람이 삼중의 손에 있는 팔만구를 빤히 보며 말했다.

“봉인진이 있는 팔만구가 우리 손에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나올지 참 기대되는군. 그때까진 살아 있어야 하니, 화오궁주에게 영약이라도 보내주고 싶을 정도야.”

은혜만큼 원한도 깊게 두고 갚는 유위람은 사영이 도망치다 화오궁주가 먼저 죽어 두 부자가 같이 나자빠지는 것을 직접 볼 수 없다면 제 손으로 멱을 따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현서가 눈을 뜬 이후여야 했다.

❖ ❖ ❖

강호가 발칵 뒤집어졌다.

백양교 이후 새로이 등장한 공적 때문이다. 이제까지 화오궁은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알던 강호의 괴담 같은 것이었다. 역산 혈겁은 백양교가 발호하던 이십구 년 전의 일이었고, 백화호 사건은 정우문의 세가 그리 크지 않은 바람에 묻혔다. 더욱이 그때도 백양교 소교주가 도피 중이라 이 역시 백양교의 일로 보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등 뒤에 점이 있는 간자에서 시작된 소문은 아이들의 유괴 사건으로 이어져 강호를 뒤흔들었다.

서녕호가의 장중보옥인 막내 도련님이 화오궁의 술수에 당해 의식 불명이라는 것은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다. 서녕호가는 화오궁의 궁주와 소궁주를 비롯해 화오궁과 관련된 이들에게 엄청난 현상금을 붙였다.

이곳 풍장산 어귀의 조그만 마을인 고산현에 전 무림의 관심이 쏠렸다. 혹시 잃어버린 자식이 이곳에 있을까 하고 찾아온 부모들, 이름을 알리려고 온 강호인들, 순수한 선의로 돕고자 하는 이들, 이 기회에 한몫 잡으려는 이들 등이 섞여 고산현은 밤이슬 피할 자리도 부족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북적였다.

허나 마을에서 반시진(1시간) 정도를 가야 나오는 이 저택은 상대적으로 고요했다. 이 저택은 곽나난 일행과 부상이 심해 조용한 곳에서 치료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빌린 곳이었다. 때문에 저택 안은 약을 달이는 냄새로 가득했다.

화정의 스승인 의선은 현서가 쓰러진 지 사흘째 되는 날에 도착했다. 환자의 상세를 정확히 알아야하기 때문에 의선은 현서가 내력을 사용했다는 얘길 들었다. 의선 역시 현서를 진맥해 단전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나 놀라진 않았다. 그저 현서의 왼팔에 있는 팔찌를 한 번 보고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니 호들갑 떨지 말라고 일축할 뿐이었다.

현서의 얼굴을 비롯해 온몸을 뒤덮은 멍과 상처들은 보기에 처참했으나 약만 잘 바르면 나을 일이었다. 문제는 내상이었다. 심하게 기혈이 뒤틀린 채로 약한 몸에 균형이 깨어져 제대로 요양하지 않는다면 후일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고 했다.

“피가 너무 차가워서 안 된다. 이러면 온몸에 피가 돌지 못하니 문제가 생겨.”

강한 약을 쓸 수 없어 하루 두 번 침을 놓고 약과 미음을 먹는 것이 전부였다. 한여름인데도 현서의 손끝은 파랗게 보일 정도로 차가웠다.

이에 유위람이 작정하고 현서를 돌보았다. 매일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키고, 손발을 주물러주고, 내력을 써 따뜻하게 품고 있었다. 유위람을 익히 알고 있던 의선이 유위람을 닮은 다른 사람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혈맥에 직접 내공을 흘려 넣어 따뜻하게 해주는 방법을 써도 되는지 유위람이 의선에게 물었으나 아직은 시기상조라 거절했다. 의선은 제자인 화정에게 저놈이 진짜 검각의 그놈이 맞는지를 거듭 물었다.

현서의 변고를 들은 호 대인 부부가 당장 풍장산으로 향하려고 했으나 현서의 숙부인 호상직이 말렸다. 자신이 더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형님 내외를 대신해 급히 고산현에 도착한 호상직 부부는 현서를 만나러 가기 전에 의선과 소의선을 만나 상세부터 들었다.

가장 걱정했던 생명의 지장은 없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낙관할 상황도 아니라고 했다. 무엇보다 현서가 의식 불명이었다. 산혼투를 먹은 현서를 포기한 적 없었으니 이번이라고 다를 바가 아니었다. 그저 현서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길 바랄 뿐이었다.

면담을 끝내고 현서에게 가려 하자 화정이 그들을 붙들었다. 소의선은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다 결국 아무 말 못 하고 동행했다.

그렇게 호상직의 가족은 기행을 벌이고 있는 유위람과 맞닥뜨렸다. 유위람이 현서를 품에 안고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얼굴과 목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저것이 단순한 호의가 아님을 누가 봐도 알았다.

호상직이 소처럼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놀랐을 때의 행동이 현서와 비슷한 걸 보니 남편과 현서가 닮았다는 이약약의 말이 완전 과장은 아닌 게 맞았으나, 지금은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부인, 내가 지금 뭘 본 건지 모르겠소만.”

“나도 같은 거 보았으니 부정하지 말아요. 진아, 지금 내 조카를 안고 있는 저 움직이는 흑심 새끼가 패천검 유위람처럼 보이니?”

“네, 어머니. 소자의 눈에도 그러합니다.”

“진아, 내가 강호 소식에 둔해 네게 물으마. 패천검의 나이가 올해 서른하나라 하지 않았느냐?”

“네, 아버님. 그렇지요. 현서와 정확히 열한 살 차이가 납니다.”

열한 살에서 이빨이 딱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유위람을 뜯어놓으려는 이 일가를 말린 것은 이럴 줄 알고 따라온 화정이었다. 화정은 유위람을 볼 때마다 눈을 세모로 떴으나 의원으로서 유위람의 수발이 도움이 되는 걸 피력해야만 했다.

썩은 소태를 씹는 얼굴로 치료에 필요하다고 말하는 화정의 말에 일단 현진의 가족들은 현서가 깨어날 때까지 보류한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현진은 지금 오고 있을 이사가 빨리 도착하길 바랐다.

현서가 눈을 뜨지 못한지 열흘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 ❖ ❖

그렇게 닷새가 더 흘러 현서가 눈을 뜨지 못한 지 보름이 넘었다.

최근 유위람의 하루는 단조로운 듯 바빴다. 하루의 일과가 현서를 돌보는 것에 맞춰 있다 못해 아예 한 방에서 지냈다. 이약약과 호상직이 때때로 뒷목을 잡고, 사교성 좋은 호남이란 평을 듣는 현진이 눈이 뾰족해진 채 돌아 다녔으나, 모르는 사람들은 현서를 걱정하기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현서의 몸에 내력을 넣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유위람은 더욱 찰싹 붙어 지냈는데, 이약약이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으나 의선이 패천검의 손을 드는 바람에 물러났다. 물론 유위람은 저런 일들에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저는 위람 정도가 딱 좋은 것 같습니다. 위랑이나 람랑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나 요즘엔 잘 쓰지 않는 촌스러운 호칭이라는 말이나 들었지요.”

따뜻한 수건으로 현서의 손가락 끝을 닦으며 유위람이 칭얼거렸다.

현서를 데리고 산을 내려온 첫날 이후 유위람은 현서가 깨어 있는 것처럼 계속 말을 걸었다. 원체 뻔뻔한 종자라 혼잣말하는 것을 전혀 어색해 하지 않았다. 뱃속에서 혼잣말하다 태어났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품에 안고 있으니 심장과 맥이 뛰는 것을 누구보다 잘 느끼는데도 가끔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어보는 것처럼 혼잣말 또한 불안감의 발로였으나, 너무 자연스러워 모두가 수작질로 느낀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호 공자는 보통 서아라 많이 불렸겠지요. 그럼, 위아나 람아는 어떻습니까? 사실 호 공자가 친근히 불러준다면 뭐든 다 좋습니다. 야, 혹은 너로 부르는 것도 좋지요. 호 공자가 저를 그만큼 가깝게 여긴다는 방증일 테니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군요. 물론 호 공자가 저를 야나 너로 부르는 것은 상상이 안 되긴 합니다만. 그럼 람람은 어떠합니까?”

그사이 손을 다 닦고 약까지 꼼꼼하게 전부 발라준 유위람은 현서의 정수리에 얼굴을 반쯤 박고는 내력을 밀어 넣으면서 보챘다.

―저놈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옥은 유위람의 불안을 알았다. 그래서 조금 짠하게 보다가도 방금 전과 같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면 속에서 천불이 치솟아 올라 버럭 소리 칠 수밖에 없었다.

―람람 같은 소리 하네. 쟤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이냐? 내가 너무 오래 살았느냐? 왜 이렇게 근자에 미친 것들을 많이 보아야 해.

옥이 이렇게 툴툴거리는 것은 오랜만으로 유위람의 불안과 달리 기쁘기 때문이라는 것을 현서는 알았다.

‘아니, 패천검의 정신이 혼곤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물론 람람은 좀 그렇긴 해. 너무 귀여워서, 아니. 패천검이 귀여운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내가 입에 올리기엔 좀.’

현서가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에 옥이 없는 가슴을 두드렸다.

―좀은 뭐고! 입에 올리긴 뭘 올려!

옥이 깊이 안도하고 있음을 알아 현서는 옥이 뭐라고 하든 좋았다.

눈을 뜨지도 말을 하지도 못해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현서의 의식이 깨어난 지 오늘로 사흘째였다. 정신을 차린 첫날은 깨어 있는 시간도 짧았고, 예상보다 덜 아파서 참을 만하다고 말한 바람에 곤혹을 치렀다.

이틀째부터 주변의 소리를 들었는데 종일 유위람이 자신에게 어떻게 굴고 있는지를 알게 되어 현서는 말을 잃었다. 귀 끝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나며 부끄러웠으나 현재 현서의 육신은 차갑기만 해서 아무도 몰랐다.

옥이 말하길 보름이 넘도록 내내 이랬다고 했다. 현서는 유위람이 하는 별것 아닌 말들을 전부 경청했다. 유위람을 두고 람람이나 야, 혹은 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저 사람의 손을 잡고 그 목소리에 대답해 주고 싶었다.

❖ ❖ ❖

현서가 쓰러진 지 스무 날이 되기 전에 이사가 도착했다. 먼 길 왔으니 쉬어야 한다는 현진의 권유를 물리고 이사는 현서부터 보러 왔다. 현서가 이번처럼 길게 의식불명인 것은 이사도 처음 겪는 일이나 오는 길에 마음의 준비를 한 탓인지 크게 상심한 티는 내지 않았다. 얼굴이나 손발의 멍, 목의 피딱지 같은 것들이 거의 사라진 덕일 수도 있었다.

허나 유위람이 현서에게 찰싹 붙어 수발드는 것을 보곤 인상을 굳혔다. 혹여 이사가 유위람에게 삿대질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방 안의 모두가 긴장한 순간이었다. 현서의 숙부인 호상직 내외와 사촌 형인 현진이 눈을 세모로 뜨는 것과, 측근이라 해도 하인이 이사가 대거리하는 것은 사안이 다르다 여긴 탓이다.

예상과 달리 이사는 유위람의 흑심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이 현서를 챙기는 데 미진한 부분만을 지적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유위람은 불쾌해 하기는커녕 이사의 조언에 감사를 표했다.

이사와 어안이 벙벙해진 다른 사람들이 떠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화정만이 남자, 유위람이 여상히 말했다.

“호 공자를 잘 돌보기만 한다면 이사는 상대가 옥황상제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설마 이사가 그 정도로 겁이 없으려고?”

“유능한 것입니다. 잘 보세요. 누이, 이사는 내가 받아들일 것을 아니까 말한 것이지 객기를 부린 것이 아닙니다.”

떠올려보면 유위람이 감정을 자각하기 전부터 이사는 필요한 것들을 스스럼없이 요구했다. 이사의 기준은 단순하고 확고했다. 현서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의 강시가 곁에 있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사나 호가의 사람들에게도 말하는 옥팔찌는 비밀이었다. 그 당시 현서는 열네 살이었고, 이사가 곁에 있은 지도 이 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 쭉 비밀로 해 왔다.

이것이 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현서가 가장 믿고 안심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지. 현서가 오직 자신에게만 비밀을 터놓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가 새삼 와 닿아 유위람이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그 기분 나쁜 표정은 좀 치워. 하려던 말이 머리에서 날아갈 것 같구나.”

화정이 질색했다. 유위람은 지난 시간 동안 현서의 수발만 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하들을 불러들여 일을 시키고, 검각의 제자들을 부리고, 사영을 추적하고, 무너진 백주봉의 뒤처리를 하는 등 쉴 새 없었다.

당연히 곽나난과 다른 이들도 바빴으나 특히 의당이 가장 다망했다. 아이들의 치료 때문이었다. 약재와 물자의 수배는 호가가 도맡았으나 치료는 오롯이 의당의 몫이었다.

삼중의 말을 듣고 다시 살폈더니 깨어나지 않은 아이들 중에 백충에 감염된 아이들도 있어 골머리를 앓았다. 숙주인 아이들이 깨어나면 백충이 활동을 시작하는 터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거기에 현서를 비롯해 중환자의 치료까지 더해 의선과 소의선은 이곳 고산현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유위람이 화정에게만 따로 물었던 것에 대한 답을 지금에서야 할 수 있었다.

“스승님께 독인에 대해 여쭈어보았단다.”

의당은 정보 교환이 자유롭고 화정 역시 의당의 후계자로 많은 것을 알았지만 어떤 것은 당주여야 접할 수 있다. 독인에 관한 것이 그러했다. 의당 당주에게는 독인을 만드는 방법까지 전부 전수되기 때문이다. 의당은 독인을 만들어 내기 가장 쉬운 집단이라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하지만 유위람이 알고 싶은 것은 독인이 되는 방법이 아니라 실패에 관한 것이었다. 석호를 가로질러 풍장산으로 향하던 배 위에서 현서가 주경이 없을 때를 골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화오궁주와 독인, 그리고 천인살과 검선의 중독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전 영우에서 현서가 내력으로 인형을 태우고 기절했을 때, 그때 화정이 검선의 죽음에 일조한 독에 관한 얘길 하며 그것을 추적하고 있노라고 말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옥도 같이 들었다는 걸 지금의 유위람은 안다. 유위람은 옥이 검선이 독에 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독인과 천인살의 얘기는 유위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제까지 유위람을 비롯한 다른 네 명은 검선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을 찾아내 대가를 치르게 했다. 독에 관해선 늦게 알았다 해도 똑같았다. 헌데 거기에 화오궁이 걸려 있었을 줄이야.

화오궁이 그들을 적대하지 않았어도 결국 서로 피를 보아야 하는 사이였다.

“이것은 우선 너와 나만 아는 것으로 하자.”

“알겠습니다.”

이 방엔 옥이 있으니 이윽고 현서도 알겠지만 유위람은 개의치 않았다.

“선천적으로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체질의 사람들이 있어. 단전에 내공이 쌓이면 목숨이 위중해지는 사람들이지. 뭐, 강호인으로 살지 않으면 천수를 누리는 데 문제는 없단다. 고수는 못 되겠지만 외공만을 익힐 수도 있고. 이런 체질의 사람들만이 독인이 될 수 있다고 하시더구나. 만독불침이 되는 것과 비슷하지만 내력을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다르다고 하셨는데 보질 못했으니 나는 뭐라 할 수가 없네.”

화정은 여기까지만 말했다. 의선은 아끼는 제자이자 후계자인 화정에게도 말을 아꼈다.

“제가 보아 압니다. 화오궁주는 내공은커녕 무공을 배우지도 않았습니다.”

“천인살은 독인이 되는 마지막 단계를 말한다고 하셨어. 스스로의 피 안에 새로운 종류의 독을 흐르게 해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면 된다고. 그때부턴 내력이 있든 없든 범접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지게 되는 거라고 말하셨어.”

“천 명을 전부 독살해야 합니까?”

유위람의 물음에 화정이 고개를 저었다.

“독살이 아니어도 된다는 게 웃기더라. 그냥 천명에게 독을 먹인 뒤 칼로 찔러 죽여도 천인살은 완성된다지 뭐야. 검선께서 독 때문에 수세에 몰렸을지언정 그분의 사인이 독살이 아닌 것처럼. 만독불침이 무공 수행으로 이루는 단계인 것과 달리 약과 의술을 사용하지만 사술이라는 차이 때문인 것이겠지. 어처구니가 없어.”

화정이 이를 득 갈았다. 어린 날의 화정은 검선에게 독이 사용된 것은 알았으나 무슨 독인지를 알지 못했다. 독을 쓴 흉수를 특정하지 못하는 것이 분해 닥치는 대로 의술을 배웠는데, 그것이 화오궁주가 독인이 되기 위해 만든 새로운 독이라니. 복잡한 기분이었다.

“천 명이 확실히 죽는 것이 중요한데, 그렇지 않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 새끼, 아니, 화오궁주의 꼴은 네가 보았으니 더 잘 알겠지. 타인의 목숨으로 연명하지 않았다면 진즉 뒈졌을 것이다.”

“오직 천 명을 죽이는데 실패해야 독인이 되지도 못하고 그 반동도 받는 것이군요.”

“그래. 천인살이 실패하면 그 독은 오직 시전자를 죽이는 데만 유효하다고 하셨어.”

옥이 현서의 입을 빌려 전한 말과 일치했다. 화오궁주가 만들어 낸 천인살이 검선에게 쓰였다. 허나 천인살은 실패했고, 그 때문에 화오궁주가 죽어간다고.

“누군지 모르겠으나 천인살에 죽지 않은 이에게 감사를 표해야겠군요. 그 덕에 저희가 직접 궁주의 목을 벨 기회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허. 이게 무슨.

유위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가 막힌 옥의 탄식이 따랐다. 현서는 잠이 들어 둘의 대화를 듣지 못했으나 옥은 잠들 일이 없어 전부 듣고 있었다. 현서가 깨어 있었다면 옥이 심하게 동요하는 중이라는 것을 금세 눈치챘을 터였다.

옥은 의당의 당주만큼은 아니어도 독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동굴에서 빠져나온 후 현서의 상세가 워낙 나빠 사영이 한 말을 따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허나 독인에 대한 유위람과 화정의 대화를 들으며 옥은 사영이 무엇을 얘기한 것인지, 그 아귀를 너무도 쉽게 맞출 수 있었다.

조금 전 화정처럼 옥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늘의 그물이 성겨도 놓치는 것은 없다 하더니, 빌어먹을 그물이 아닌가. 이것들이 어디서 계산을 이 따위로 해.

옥이 거침없이 하늘을 욕했다. 화오궁주가 천인살에 실패한 것은 그놈의 업보니 자승자박인 꼴이나 그 때문에 현서가 겪어야 했던 고통에 관한 셈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옥을 분노케 했다. 손이 있었으면 하늘을 향해 삿대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천리(天理)는 인간 하나하나를 살피지 않는다고 하나, 참으로 매정하구나.

옥은 잠들어 있는 현서를 보며 탄식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단 말인가.

현서가 산혼투를 먹고 죽다 살아나는 바람에 전생을 자각했다. 그 바람에 자문원이 죽지 않는 것으로 셈해질 줄은. 그 누가 알았을까. 하긴 이와 같은 일이 천지에 두 번 있었을 리는 없을 테지.

그 때문에 화오궁주의 천인살은 실패했고, 사영이 목숨을 건졌다. 백화호 사건은 현서가 여덟 살 때 일이고 독은 아홉 살에 먹었다. 그쯤 궁주가 사영을 죽이려 했으나 천인살의 실패로 물거품이 되었다는 말이다. 사영은 즉사를 면했지만 후계자로 금제에 걸려 있으니 시한부가 되는 조건으로 살아났을 터.

―그놈이 말한 두 번의 은혜 중 첫 번째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겠지.

화오궁의 부자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사정 따윈 알 바가 아니나 문제는 거기에 현서가 끼어 있다는 점이다. 자문원, 아니, 현서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도 더럽게 덧얽혔다.

천인살의 실패 원인을 뒤지다 저들이 현서를 찾아낸 것으로 보는 게 타당했다. 사영이 오래도록 현서를 지켜보아 왔다는 것도 그 연장선이겠지. 거기에.

―곽다순 놈은 또 어떻게, 뭘 알고 저기에 끼이게 된 것이야.

너무 많은 사실과 추측들이 뒤섞여 옥의 상념이 복잡해졌다.

자문원의 팔에 있을 때부터 옥은 곽다순이 싫었다. 순한 얼굴로 아무것도 못 하겠다는 울상이나 지으며 우물쭈물하기나 해 결국 모든 손해는 자문원이 다 지게 했다.

하필 그런 걸 첫 친구로 만나서. 옥이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였다. 그때 지금처럼 말할 수 있었다면 곽다순과 절교하라고 문원의 귀에 싹이 나도록 떠들어댔을 터였다.

하지만 자문원은 옥의 말을 들었어도 들어주진 않았을 테지.

―문원, 그 애는 좀 외골수라. 애초 강호에 발을 들인 것도 스승이 자신에게 베푼 것처럼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목표 때문이었으니.

기본적으로 자문원은 관대하고 다정했으며 도량이 넓었으나 때론 무심했다. 스승의 죽음으로 산을 내려오기 전까지 자문원의 세계에 사람이라곤 스승뿐인 탓인지 타인에게 다정한 것과 별개로 사람과의 관계에 서툴렀다.

더욱이 자문원은 너무 강해, 자신이 보기에 전부 약자라 자신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문원이 상처받지 않고 실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옥은 곽다순이 가장 싫었다.

―이런 건 또 닮아서는.

옥이 대상없는 원망을 되뇌었다. 환생이라 해도 현서와 자문원은 자라 온 배경도 성격도, 하다못해 입맛까지 각기 달랐다. 어린 현서가 압도적인 기억에 휩쓸릴까 옥이 자문원과 너는 별개라고 가르쳐 버릇하며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현서는 훌륭하게 자신의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무던한 성품은 같았다. 어찌 되었든 혼은 같으니 말이다.

옥은 교은설이 무슨 음모를 꾸몄든 산혼투의 출처는 화오궁과 관련이 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현서를 노리고 푼 독은 아니다. 산혼투가 든 떡을 하필 현서가 먹은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인과가 없는 뜻밖의 사고와 이미 끊어졌어야 했던 과거의 인연이 얽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옥이 이 얘기를 하면 현서는 잠깐 놀라긴 할 테지만 억울해 하며 침잠하진 않을 것이다. 자신이 자문원의 환생임을 알았을 때처럼 금세 받아들이겠지. 세상엔 별 신기한 일이 다 있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 것이 뻔히 보였다.

그래서 싫었다.

그 무던한 성품이 나쁜 것은 아니나 옥은 속이 상했다. 화오궁주 놈이 제 죄의 업보를 치르는 데 현서의 고통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이것은 자문원의 복수도 아니었다. 자문원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일에 천인살의 역할은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문원은 복수를 원하지 않았다.

현서가 산혼투를 먹고 전생을 자각한 이 모든 일이 안배로 점철된 음모만을 뒤집어쓴 결과일 리가 없다. 세상은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고 현서와 자문원도 그 세상 안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옥은 안다.

그럼에도 저것이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것은 옥이 그만큼 현서와 자문원을 아끼기 때문이다.

‘……나 얼마나 잤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잠에서 깬 현서의 몽롱한 목소리가 곧장 걱정을 담았다. 옥의 감정이 격해져 있었던 탓에 현서가 금방 알아챈 탓이다.

“잠시만요. 누이. 호 공자가 약을 먹을 시간입니다.”

옥이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사이 유위람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는 화정과 대화를 하던 중에도 현서의 약 시간은 칼같이 챙겼다.

옥은 현서가 스물다섯 이후의 미래를 가지게 되었으니 세계가 더 넓어지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독립을 해 제자를 키우겠다는 말에 찬성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혼인을 하든 연애들 하든, 혹은 제자를 키우든 간에 말이다.

옥의 상상은 보통 현서를 닮은 맹한 제자와 현서가 서로 방싯거리며 무공을 전수하는 것에 그쳤다. 저 눈알 시커멓고 속은 더 시커먼 놈은 옥이 그린 미래에는 없었다.

하지만 저놈이 현서에게 가진 진심을 부정하진 못했다. 어차피 현서가 팔순이 되어도 옥의 눈에는 솜털 보송한 어린 것일 테지. 또한 그때가 되어도 여전히 무던하고 맹할 것이니, 걱정이 끊이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러니 이 매정한 세상에서 현서 대신 발을 굴러가며 화를 내줄 시커먼 놈 하나 정도는 곁에 둬도 괜찮지 않을까?

―이 무슨 흉한 생각을! 내가 미친 게지!

‘응? 아니, 무슨 일이냐니까? 응? 말을 해야 알지. 왜? 나 자는 사이 누가 괴롭혔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누가 날 괴롭혀. 내 잠시 정신이 나가 놀라 그랬다. 이젠 괜찮다. 괜찮아.

옥은 유위람이 현서의 곁에 있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본 스스로의 생각에 소스라치며 반성을 거듭했다. 아무래도 수상해 현서는 더 캐어물으려 했으나, 옥은 말해 주지 않았다.

현서에게 약을 먹이는 유위람을 보는 화정의 표정이 기묘했다. 왕왕 부려먹은 전적이 있으니 맹탕이 아닌 것은 알았으나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의식 없는 환자를 돌보는 올바른 교본으로 삼아 의당의 어린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할 말이 있으시면 하십시오.”

약을 다 먹인 다음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주는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네가 뭐든 다 잘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참으로 다재다능하구나.”

“누이도 참.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까. 제가 성심을 다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지 특별히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림도 없다는 뜻이었다. 백주봉에서 탈출한 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왔는지, 눈이 달린 생물이라면 패천검 유위람이 호현서에게 지극히 구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어떤 감정에 기반을 둔 것인지도.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닌 건 알겠다만, 갑자기 이렇게 티를 내는 것도 네 나름 이유가 있겠지. 헌데 현서는 네 마음을 알아? 어리고 순하다고 네 마음대로 밀어붙이는 건 아니고?”

빗으로 현서의 머리를 빗기던 유위람이 인상을 찌푸렸다.

“스승님들도 그렇고 화 누이도 대관절 나를 뭐라고 여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크게 잘못 알고 있습니다. 화 누이, 우리 사이의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호 공자가 하는 것이지요. 나는 그저 선택해 주길 바라며 얌전히 기다리는 일개 구혼자일 뿐입니다.”

유위람이 구렁이 담 넘듯 은근슬쩍 현서와 자신을 우리로 엮고는 거기에 구애가 아닌 구혼을 끼워 넣었다. 어찌나 기름칠을 잘했는지 느끼할 정도였다.

영우에서 현서의 큰형에게 항도로 가는 게 좋다고 권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설마 쟤가 그때부터 작정하고 달라붙은 건가. 오해하는 화정의 얼굴이 예전에 주경이 짓던 표정과 비슷했다. 오만상을 찡그렸다는 의미다. 화정이 혀를 차며 말했다.

“네가 참으로 총명하구나. 그래, 호가가 너를 치우겠다고 자객 십만 명을 고용하거나 검각과 네 본가에 압력을 넣고 싶어도, 현서가 너를 좋아하면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 말이다.”

단순 짝사랑과 양방 연애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유위람이 양심 없는 날도둑놈이라 해도 현서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공언해 버리면 호가는 치우는 것도 죽이는 것도 못 할 것이다. 속앓이만 드글드글 하겠지.

“별로 알고 싶지 않지만, 그래, 네 감정은 잘 알겠다. 헌데 현서의 비밀이 네 마음에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던?”

현서가 선보인 무위는 단순히 놀랍다고 표현하고 끝날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다 빗은 현서의 머리칼을 느슨하게 묶어 정리하던 유위람이 잠시 멈칫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걸리는 망상이 있었다. 하지만 유위람이 무엇을 의심하든 가장 처음 말할 사람은 화정이 아니었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보다 그 비밀 때문에 나를 선택하지 않을까, 그것이 무서울 따름입니다.”

―저놈, 저 여우 놈 저거! 내가 듣고 있음을 아니 저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냐! 어디서 음전하고 조신한 척을!

조금 전, 현서 곁에 시커먼 놈 하나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무른 생각을 했던 옥이 파르르 떨었다. 막 잠에서 깬 바람에 이 모든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들은 현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정신에도 온기와 색이 있다면 죄 빨갛게 달아올라 따끈따끈해졌을 터였다.

현서가 옥의 강한 감정을 느끼듯 옥도 그러했다. 현서에게 천인살과 전생에 관한 얘길 하기 전에 여우 얘기부터 하게 될 줄이야. 옥이 한숨을 섞어 물었다.

―현서야. 너 저놈이 좋아?

‘어? 어? 어.’

현서는 단번에 대답하지 못했으나 저 반응이 부정적인 감정이 아님을 모를 수가 없었다. 왜 하필 저 시커먼 여우 놈이 현서 눈앞에서 알짱거려서. 그렇다고 현서의 마음을 무시할 순 없으니 뾰족하게 일렁이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혔다. 유위람은 마음에 차지 않으나 자신이 싫은 티를 내어 현서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은 또 싫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성적이지 않은 처사라는 건 알지만 원래 편애란 그런 것이다.

옥의 물음에 현서는 찬찬히, 그리고 진중하게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았다. 옥은 현서와 가장 가까운 존재다. 그런 옥에게 얼버무리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유위람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선택은 호 공자의 것입니다.’

유위람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 선택도 결정도 모두 현서의 몫이었다.

❖ ❖ ❖

다음 날부터 이사가 현서의 곁을 지켰기 때문에 유위람은 저택 밖으로 나와 백주봉에 올랐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기 전에 동굴이 제대로 폐쇄되었는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호 공자는 좀 어떻습니까?”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으나 의선께서 많이 좋아졌다고 하셨습니다.”

“다행입니다.”

한동안 백주봉에서 지냈던 주경이 물었다. 주경은 삼중이 주축이 되는 동굴 폐쇄 작업을 도왔다. 신농자의 과오와 별개로 죽은 제자의 시신을 추적하는 것은 그만두지 않았다.

제자를 언제 바꿔치기했는지, 주경이 본 얼굴이 비슷하게 꾸민 얼굴이긴 한 건지 따위는 소궁주를 붙들어 추궁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더욱이 이미 죽어 백골밖에 남지 않았다면 주경이 알아볼 방법은 더더욱 없다. 허나 시신이 버려졌다면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이 이 동굴이니 삼중을 돕겠다고 말했다.

“개미나 뱀 같은 것이 아니면 들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당장은 사기 때문에 어떤 짐승도 터를 잡진 않겠지만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누군가가 작정하고 파낼 수도 있겠지만 신농자와 같은 천재가 아니라면 진을 복구해도 지렁이가 지나간 자국과 다름없으니 소용이 없고, 절망한 귀재가 어디서 다시 나타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 백주봉의 일은 여기서 끝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삼중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주봉에 관해 경고를 해 괜한 이목을 끄는 대신 유괴 사건으로 죽은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갈음하기로 합의했다.

유위람의 예상처럼 무너지지 않은 굴에서 아이들을 구하러 갔던 이들의 시신도 발견했다. 여름이라 급히 이곳에 매장을 한 뒤 각자의 사문에 부고를 전했다. 각각 방천파, 영우곽가, 도련문의 사람들이었다.

“그럼, 위령제는 예정대로 내일 치르는 것으로 하죠.”

곽나난이 말했다.

“화 언니는 한동안 여기 있을 거라 했으니 어쩔 수 없고, 위령제가 끝나면 누구부터 추적할 셈이야?”

소화리가 물었다. 현상금을 붙인 지 아직 한 달이 되지 않았지만 금액이 워낙 크고, 서녕호가가 지불을 보증했기 때문에 별의별 제보가 다 들어왔다.

아직까진 대부분 쭉정이 같은 정보들이었지만 그 와중에 우습게도 소궁주가 아니라 화오궁주에 관한 제보가 많았다. 화오궁주 쪽이 더 쇠락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유위람이 입을 열었다.

“화오궁주 쪽은 정우문의 의향을 먼저 물어봐야 할 것 같아.”

“하긴.”

화오궁주의 목에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이 정우문일 것이다.

“정우문이 주축이 되어 추적하는 것이 낫겠지. 문주와 소문주의 한은 궁주를 죽여도 풀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위안은 될 터이니.”

화오궁주를 산 채로 찢어 죽여도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진 않겠으나 십이 년간 복수에 몰두해 온 정우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궁주의 최후를 그들이 보아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럼 우린 소궁주와 곽 숙부 쪽을 처리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대답을 들은 소화리가 정리했다. 그들에겐 삼중이 검증한 팔만구가 있었다. 현서의 개입으로 술법이 실패했으니 팔만구가 절실할 터. 소문을 내면 함정인 걸 알아도 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미끼다.

“하지만 곽 숙부께 매력적인 미끼는 아니지. 그러니 팔만구와 월영사를 챙겨 들고 유주에 가자.”

처음부터 유주 흑하로 가 꽁꽁 싸놓은 월영사를 풀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할 계획이긴 했다.

“그 안에 뭐가 있을지 상상하기도 싫어.”

흉한 것들을 줄줄이 봤더니 마음이 안 좋다며, 다 끝나면 사문에 돌아가 심법 수련부터 해 세속의 번뇌를 좀 벗겨야겠다고 소화리가 말했다. 그렇게 앞으로 일정과 수다를 겸한 얘기들을 나누며 백주봉을 내려 와 각자 갈라졌다.

“사매들이 자꾸만 너랑 인사하고 싶다고 난리다. 귀찮으니까. 나 여기서 먼저 갈래.”

저 미역 같은 게 뭐가 예쁘다고 그 난리인지. 현서라면 모르겠다만. 고산현 근처에 도착하자 미의식이 반만 멀쩡한 소화리가 투덜거리며 훌쩍 멀어졌다. 감윤은 태호문의 제자들이 영진자가 밥 먹는 걸 보지 못했다고 소란이라 같이 식사해야 한다며 삼중을 챙겨가고, 곽나난은 내일 있을 위령제 마무리를 위해 물러났다.

주경은 현서가 머무는 저택에 자신의 방이 있으니 유위람과 동행해야 했지만 그 역시 볼일이 있다고 떨어졌다. 더 이상 주경을 사영이나 곽다순과 한패라고 의심하진 않지만 여전히 의뭉스러운 사내긴 했다.

‘뭐, 두고 보면 될 일이지.’

유위람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주경의 뒷모습을 더 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위 장로님.”

저택에 들어와 현서가 있는 원락에 가던 길에 위창을 만났다. 방천파의 사람이 죽었으니 내일 있을 위령제 때문에 나난을 찾으러 왔나 했으나 아니었다.

“패천검. 호 공자의 상세는 좀 어떠합니까?”

위창이 방천파의 장로라고 해도 배분은 유위람보다 아래다. 하지만 목이태 때문에 얼굴 맞댄 일이 종종 있었는지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대외적인 예의를 챙기는 것과 별개로 유위람은 좋은 사람에게는 나쁘게 굴지 않았다. 검선의 친구였던 위창은 말은 퉁명스럽게 하나 정이 많고 기본적으로 바른 사람이다.

현서가 비무림인이라 난색을 표했던 위창이니 현서에게 도움을 받고 나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 뻔했다. 더욱이 그 후로 쭉 의식불명이었으니 더욱 심경이 무거웠겠지. 현서가 내공을 사용한 일에 대해선 모른 척을 해도 걱정까지 숨길 필요는 없었다.

때문에 위창은 그간 현서의 상세를 직접 물어 왔다. 이제까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유위람이 걸음을 멈췄다.

“왜? 좋지 않습니까? 의선을 모셔 오는 것이!”

유위람의 표정이 굳자 위창이 놀라 의선을 모셔 오겠다고 급히 움직이려 들었다. 유위람은 그런 위창을 만류했다.

“아뇨. 호 공자는 괜찮습니다. 조금 생뚱맞은 질문이 떠올라 그런 것뿐입니다. 위 장로님께선 혹시 예전에 왼발 사용에 관한 조언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을 입에 올려도 될까 하고 잠시 망설였으나 결정을 끝내자 질문은 술술 나왔다. 위창의 표정에서 유위람은 듣지 않은 답을 알았다.

같은 사문이 아닌 외부인이 무공에 대해 입을 대는 것은 강호에서 칼부림 나기 좋은 이유 중 하나로,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조심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조언을 해주고 받는 사람들의 사이가 좋거나 한쪽의 무공이 대단히 고강해 배움을 청하고 싶어 하는 경우다.

목이태가 후자라면 위 장로는 전자였을 것이다. 위 장로는 검선과 사이가 좋았다. 위 장로가 현서를 걱정하며 찾아오는 것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그 동굴에서 현서가 쓴 내력을 보고 떠오른 것이 있었다던가.

“패천검?”

이사의 부름에 유위람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육안으로도 손끝이 파랗게 보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직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오늘도 내력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왔건만 정신을 딴 데 팔았다.

“불편한 곳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도련님이 뭔가 안 좋은 건가요?”

이사가 보기에도 유위람이 이상했는지 걱정스러운 질문이 따랐다.

“아니,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런 것뿐이니 괜찮아. 끝나면 부를 터이니 자네도 이만 물러가서 좀 쉬어.”

이곳에 온 지 이틀째였으나 유위람이 공사다망한 것을 알아 이사는 금세 납득하고 물러났다.

유위람이 단번에 현서를 품에 안아 그 상태로 현서의 오른 손목을 감싸 쥐었다. 의식이 없는 타인에게 내력을 나누어주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접문을 하며 기력을 나눠주는 것도 후다닥 깨우쳤던 유위람이었다.

오늘도 유위람은 현서의 몸 안에서 단 한 톨의 내력도 감지하지 못했다.

‘호 공자가 옥 님을 스승으로 삼아 검선의 후인이 되었다는 가정이 가장 온당해 보이건만 이상하게도 그리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단 말이야. 한 번도 상상력이 좋다고 여긴 적은 없는데.’

자꾸만 이치에 맞지 않는 망령된 상상으로 추가 기울어 적잖이 당황했다. 유위람은 환생에 회의적이기보다는 전생을 기억한다는 쪽에 회의적이었다. 그건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다는 소리와 별 차이 없어 보였다.

다른 누군가의 일이었다면 미쳤다고 여겨 상대조차 하지 않았을 일이다. 나난을 비롯한 친구들이나 스승님들의 일이라면 좋은 의원을 소개해 주었을 것이고.

하지만 이것은 현서의 일이라 그게 문제였다. 현서를 무시하는 것도, 현서가 미쳤다고 치부하는 것도 유위람에게는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런 선택지도 없다.

유위람은 지금 자신이 두 가지 문제에 봉착했음을 알았다. 하나는 현서가 환생을 했다 치면 그 전생이 검선 자문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생한 것이 맞을 경우 현서가 그것을 숨기고 싶어 하는 걸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천하의 유위람이라 하여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 당장 무어라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두 번째는 사람을 구하려 들지 않았다면 끝까지 숨겼을 일을 드러낸 현서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전생이니 하는 허황된 추측은 자신만 했다고 쳐도, 현서에게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생겼다. 화정에게 했던 우려는 옥이 듣고 있음을 알아 점수를 따려고 번지르르하게 포장한 빈말이 아니었다. 칼자루는 현서가 쥐고 있으니 유위람을 겁먹게 하는 것도, 멈추게 하는 것도 오로지 현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껏 유위람이 거리낌 없이 굴 수 있었던 것은 현서가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였다. 유위람은 현서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울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도록 지킨 비밀과 유위람을 골라야 할 때, 자신을 선택해 줄 정도로 현서의 마음을 샀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현서가 조금이라도 난색을 보이면 자신은 물러나야 하는데.

내력을 나눠주는 것은 벌써 끝이 났지만 유위람은 여전히 현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좋지 않아.”

[무엇이요?]

유위람은 깜짝 놀라 잡고 있던 손을 놓칠 뻔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확인하기 전에 유위람은 조심스럽게 현서의 몸을 살짝 돌려 얼굴이 보이도록 고쳐 안았다. 내공을 옮길 때는 등 뒤에서 껴안은 자세가 편했기 때문에 쭉 그러고 있어서였다.

여전히 현서는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유위람이 전음을 보냈다.

[호 공자? 정신이 들었습니까?]

[정신은 이전에 차렸는데. 이제야 말을 할 수 있네요.]

현서의 손끝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원래부터 체격 차이가 났는데 그사이 더 말라 현서는 유위람의 품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다. 때문에 현서의 온몸이 정신을 잃었을 때와 달리 미세하게 약동하며 깨어나는 것을 유위람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넘쳐흐르는 기쁨에 환성을 내지르는 유위람의 심장이 마구 날뛰었다.

숨이 너무 가느다랗게 이어져 뻔히 알면서도 가끔은 손끝을 코 아래 대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맥이 뛰는 곳을 잡아보았던 유위람은 현서의 숨이, 맥동이 천천히 바뀌는 것에 웃었다. 웃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눈꺼풀과 속눈썹이 잘게 떨리며 점점 움직였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찰나였다. 완전히 눈을 뜬 현서는 눈이 부신지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그에 금세 눈물이 차올라 눈꼬리를 따라 도르륵 흩어졌다.

유위람이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대어 눈물을 훑어 내자 현서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깜빡, 그리고 다시 떴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거울처럼 반질거렸다. 그 커다랗고 예쁜 눈에 유위람이 가득 담기자 현서가 배시시 웃었다.

너무 좋아서 정신이 나갈 것 같으면 심장이 쥐어짜듯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유위람은 처음 알았다.

그 순간 유위람은 결정했다. 환생이든 환생 할아버지든 현서가 말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ㄹ……. 크……크흠.”

“아직 말하지 마십시오.”

긴 시간 동안 말하지 않았으니 목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유위람은 손을 휘둘러 차탁에 있던 물 잔을 당겨왔다. 허공섭물은 아니지만 볼 때마다 놀라게 되는 재능이었다.

그러나 옥은 감탄보다는 욕부터 했다. 저놈이 현서가 전음을 보낼 때 이미 방에 기막부터 둘러 소리가 밖에 들리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현서가 깨어나는 그 모든 순간을 독점하고자 한 것이다. 옥이 괜히 여우, 불여우라고 욕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옥은 인내를 다닥다닥 끌어모아 지금은 그 어떤 참견도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침묵했다.

유위람이 물 잔을 받쳐 주자 현서가 아주 느리게 물을 삼켰다. 바짝 마른 목에 무리가 가지 않게 조심하느라 천천히 한 잔을 다 마시고도 바로 말하지 못했다.

“아픈 곳은 없습니까? 화 누이, 아니, 의선을 청해야겠습니다.”

유위람의 말에 현서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픈 곳도 없고, 지금은 패, 천검과 먼저 말하고 싶어요.]

현서가 그렇게 말하는데 유위람이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현서는 물 한 잔을 다시 느릿느릿하게 마시고는 숨을 골랐다.

“말하기 힘들 테니 전음을 쓰는 것은 어떠합니까?”

그 말에 현서가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아. 혹시 전음을 쓰는 게 어려워서 그런 것입니까.”

동굴에서 벌인 기사를 떠올리면 전음 몇 마디 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인지 어린 완비도 알 일이지만, 유위람은 진지하기만 했다. 현서가 유위람을 멍하니 보다 툭 뱉었다.

[전음을 쓰는 것이 어려운지만을 묻고는, 어째서 쓸 수 있는지는 묻지 않으시네요.]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순간 긴장했다. 설마하니, 비밀을 지키고 싶으니 자신과 인연을 끊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호 공자가 자신을 버릴까? 그러면 어째야 하지? 역시 서녕에 저택부터 사야 하나?

두려움에 기반을 둔 유위람의 머릿속이 중구난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모든 생각들이 순식간에 뚝 하고 부서졌다. 아니, 생각뿐만이 아니라 유위람의 심장도 뚝 하고 떨어졌다.

“유위람.”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아 평소의 목소리와 조금 달랐으나 그래도 틀림없는 현서의 목소리였다. 유위람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나 싶어 눈을 치떴다. 기대하던 반응이 없자 현서가 다시금 불렀다.

“유위람. 유위람. 어, 이렇게 불러주길 바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뒷말은 자신이 없어진 현서의 중얼거림이었지만 똑똑히 들었다. 유위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소리인지를 가늠하게 되자 곧 웃었다. 너른 들판에 꽃망울이 일제히 터지는 것 같은 빛나는 미소였다.

“심장이 바닥에 떨어진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데 이것이 또 세상에 다시없이 달게 느껴지니 큰일입니다. 제 심장이 남아나지 않아도 좋으니 이를 어쩝니까.”

유위람이 현서를 고쳐 안으며 말했다. 꽉 껴안고 싶은데 어디 한 곳이 부러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동동거리는 마음에 고쳐 안는 것이 고작이었다. 몸 위에 내려앉은 깃털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평소보다 낮고 느린 목소리가 유위람의 고막을 두드릴 때마다 오싹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냥 너무 좋았다. 전부 좋았다. 이대로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기도 하고, 그냥 계속 품에 안은 채 있고 싶기도 했다.

“무슨 말이든 호 공자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됩니다.”

유위람이 여전히 붙들고 있는 현서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불편해서 빼려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현서가 유위람의 손가락을 잡아 왔다. 현서의 손아귀에 유위람의 손가락이 전부 잡힐 리 없고, 아직 힘도 없어 손가락 세 개를 덮은 것에 불과했다. 현서가 긴장하자 유위람도 덩달아 긴장했다.

“패천검이 말한 연모와 그 다음에 대해 상량해 보았어요. 옥이 다른 사람과도 비교해 보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비교를 위해 다른 사람과 접문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옥 님의 조언은 정석이긴 하지만 현서가 시도해 보겠다고 할까 봐 심장이 덜거덕거렸던 유위람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길게 앓았던 몸이라 얼굴은 눈처럼 창백했으나 유위람은 그 뺨에 홍조가 오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느릿하던 현서의 심장이 두근대며 점점 빨라지는 것을 유위람이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서가 유위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패천, 유위람이 좋아요. 유위람을 좋아해요. 그래서 말인데, 이 일이 끝나면 제 집에서 함께 살지 않을래요? 물론 싫지 않다면요.”

“……이예?”

현서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만으로도 심장이 널을 뛰었는데 갑자기 동거 제안까지 튀어나오는 바람에 되묻는 유위람의 목소리가 미끄러졌다.

“아참, 서녕은 아니에요.”

자신이 말한 집이 서녕의 부모님 집인 줄 알아 유위람이 놀랐다고 본 현서가 재빨리 정정했다.

옥과 대화 이후 현서는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았다. 유위람이 말한 연모는 몰라도 자신이 유위람을 특별한 의미로 좋아한다는 것은 알았다. 접문을 하면 기분이 좋고, 유위람이 흥분했을 때 당황해서 놀라긴 하였으나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이것이 단순한 친애의 감정일 리가 없었다.

호현서의 인생을 통틀어 이런 마음이 들게 한 사람은 유위람 한 사람뿐이었다.

유위람이 좋다.

유위람을 좋아한다.

유위람이 먼저 연모를 말해 이제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이 혼인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동거라고 보아 유위람에게 권했다. 현서가 보기엔 그게 순서에 맞았으니 말이다.

유위람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자신의 저택에 유위람을 데려다 놓고 하나씩 말하고 싶었다. 마음이 흡족한 상상이었다. 아직 꾸미지 않은 저택이지만, 아니, 그래서 더 좋은 계획처럼 느껴졌다. 저택을 꾸밀 때 유위람의 취향도 반영할 수 있으니 말이다.

현서는 한 번 결정하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 열다섯에 제자를 키우겠다고 결심하고 주르륵 계획을 짜 움직인 것처럼 유위람을 제 사람이라고 마음먹자 그 다음은 멈출 일이 없었다.

유위람은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 엄청난 행운을 두말없이 받아들이며 함박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니, 저 맹추가. 아니, 너는 일의 순서를 어찌 그리 섞어서.

두 사람이 행복한 와중에 옥의 속만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

유위람이 그저 알아만 달라고 했던 연모를 현서가 데굴데굴 굴려 유위람조차 아직 꿈꾼 적 없는 이자를 붙여 냈다. 현서는 이자를 불리는 데 재능이 있었다. 과연 거상의 자손이라 칭할 만했다.

스물다섯이 넘으면 독립을 하려고 가족들 몰래 원림을 샀다고 했다. 하우대를 통해 샀다는 얘기는 깔끔하게 무시한 유위람은 옥 님 외에 아무도 모르는 저택이라는 말만 머리에 넣었다. 그 저택에 현서가 자신을 넣어두고 싶다고 말했다. 어감이 미묘하게 달랐지만 뜻은 통했으니 상관없다고 유위람의 작은 양심이 허락했다.

“저는, 정말이지. 저는.”

뺨이 발그레해진 유위람이 말을 더듬었다. 옥이 못 볼 꼴을 본다고 욕을 했으나 현서 눈에는 좋아 보이기만 했다.

“저는 당연히 좋습니다.”

유위람은 아직 허공답보를 완성하지 못했으나 맨땅에서도 구름 위를 밟고 있는 기분을 한껏 만끽했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원림이라는 말에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새로 가구를 맞추려면 장인을 수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목재부터 챙기는 것이 먼저다. 모친의 고방만큼 적당한 곳도 없겠지. 모친의 고방에 자신의 몫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유위람이었다. 없으면 동생들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마음이 삐딱해진 유위람이 장자의 권리를 휘두르며 귀환하겠다고 선포하는 것보다 고방을 털어주는 것이 수지맞는 계산이라는 걸 영명한 모친과 동생들은 잘 알 것이다.

상상보다 훨씬 기뻐하는 유위람의 모습에 현서도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얼굴에서 광이 나도록 생글생글 웃는 유위람을 보며 현서는 다음 말을 할 용기를 얻었다.

“음, 동굴에서의 일 말인데, 이상하다 여기셨지요?”

오늘이 무슨 날인가. 아니면 내가 선 채로 꿈을 꾸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현서가 바라던 얘기만을 먼저 꺼내주어 순간 얼떨떨해진 유위람이었다. 볼을 꼬집지는 않았지만 금방 꿈이 아닌 건 알아채 다행이었다. 진실로 꿈이었다면 분통이 터져 주화입마에 빠졌을 것이다.

현서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좋아한다는 말부터 한 것이 아주, 매우, 엄청나게 정답이었다. 현서의 고백과 비밀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따질 가치도 없이 고백의 압승이었다. 현서가 자신을 좋아하며,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외에 무엇이 더 중요하겠는가.

그렇다고 모든 것이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호 공자의 비밀이 궁금하지 않다면 그것은 호 공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일 테니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호 공자의 비밀이 아닙니다. 제일 먼저 묻고 싶은 것은 호 공자가 내력을 쓸 때마다 아프지는 않는지 입니다.”

당시 현서의 판단은 정확하고 신속했다. 현서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상황은 훨씬 나쁜 쪽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죽었겠지. 현서 한 명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납치된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

서른 번을 넘게 고민했다고 말했다. 몸에 무리가 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음에도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했다는 의미다. 유위람 역시 같은 선택을 해야 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을 안다. 때문에 자신은 해도 되지만 호 공자는 해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고 해서 속이 쓰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음을 쓸 땐 아프지 않은데 내력을 얼마나 써야 아픈지는 저도 몰라요. 전음을 써본 것도, 내력을 이렇게 한껏 써본 적도 처음이라.”

현서가 일전에도 내력을 사용해 본 적 있다는 고백을 해버렸으나 유위람은 일단 못 들은 척했다.

유위람이 유순하게 듣고만 있자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자신에게 무른지 모르겠다며 현서가 탄식했다. 추궁은커녕 현서가 부담을 가질까 궁금해 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으니, 유위람이 너무 손해만 보는 것 같아 미안했다. 대단한 착각이었으나 옥도 유위람도 현서의 속을 몰랐다.

현서는 자신이 유위람을 좋아한다는 걸 재차 깨달았다. 일부러 눈을 맞출 필요도 없이 고개를 들면 유위람의 눈이 보였다. 그 눈에는 보들보들한 애정이 가득했는데, 현서는 유위람도 자신의 눈에서 그런 감정을 찾아내길 바랐다.

살짝 손에 힘을 주자 유위람이 단번에 고개를 숙여주었다. 현서가 귀엣말을 하려는 줄 알아서였다. 배시시 웃은 현서가 고개를 살짝 들어 유위람의 입술을 콕 찍었다.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도 힘에 부쳐 그저 갖다 붙이기만 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야말로 대단한 미인계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천천히 제대로 말하고 싶어요.”

현서의 입맞춤에 눈을 크게 치떴던 유위람이 사르르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는 우리 집에서 호 공자가 편히 말하는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우리 집. 현서와 유위람 모두를 흡족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불행히도 옥만이 불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저 꼴을 보라지. 현서가 자문원의 환생이 아니라 옥황상제라고 해도, 좋아하는데 옥황상제가 문제가 되느냐고 물어볼 놈이다.

“이사, 호 공자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기막을 거두며 유위람이 곁방의 이사를 불렀다. 이대로 밤새도록 현서를 품에 안고 욕심을 채우고 싶었으나 더 이상은 현서가 원해도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는 걸 알아서였다. 이사가 급히 방에 뛰어들어 오자 유위람은 미련 없이 일어나 의선을 청하러 사라졌다.

옥은 저 쓸개 빠진 놈이 곽다순보다 개미 뒷다리만큼은 낫다고 보았으나 그것이 유위람의 점수를 올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스무 날이 넘도록 의식불명이었던 조카가 눈을 떴으니 호상직 일가가 한달음에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서는 여전히 초췌했으나 의식이 있으니 한결 나아 보였다. 동굴에 있던 이들이 철저히 비밀을 지켜 이약약조차 현서가 화오궁 소궁주 때문에 다친 것으로 알았다.

“서녕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호상융 일가가 벌인 일 때문이냐? 걱정 안 해도 된다. 네가 번잡해지지 않기를 바라 그런 것이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일이 아니야.”

호상직이 현서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래, 아버님께서 뜻을 정하셨다는 연락도 받았단다.”

처음부터 이약약은 호상융 일가를 한 번에 때려죽이는 것을 지지했다. 이약약 자신이 직접 죽일 생각이었다. 때문에 시댁의 방식, 특히 시아버님이 너무도 무르게 보였으나 입을 대지는 않았다. 같이 자식을 기르는 처지에 단번에 찢어 죽이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형님 내외의 고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아는데 괜히 마음의 짐만 더 얹지 싶어서였다. 시간이 걸렸으나 시아버님이 결단을 내렸으니 이제 호가가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숙부의 권유가 적절하다는 것을 알지만 현서는 쉬이 서녕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사영보다 곽다순이 걸린 탓이었다. 이대로 호부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았으나 마땅히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현서가 저도 모르게 유위람을 바라보았다.

“제가 호 공자를 대신해 말해도 괜찮겠습니까?”

난처해 하는 현서 대신 유위람이 입을 열자 세 쌍의 눈이 칼날처럼 번뜩였다. 안 괜찮다. 네가 왜 끼어들어! 불만스러워하는 호상직의 표정이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현서에게서 좋아한다는 소릴 들은 몸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유위람의 표정은 대자대비하기만 했다.

[제가 해결하겠으니, 저를 믿어보세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현서에게 유위람이 전음을 보냈다. 미리 의논을 하지는 않았으나 서녕으로 돌아가기엔 두 사람 모두 곽다순이 걸렸다. 그렇다고 곽다순의 얘길 할 수는 없었다.

유위람이 무슨 소리를 하여도 반대부터 하려 했던 호상직 부자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유위람이 이약약에게만 전음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동굴에서 소궁주가 호 공자가 먹은 산혼투에 대해 말하더군요.]

이약약의 표정이 확 굳었다. 유위람은 거짓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적당한 생략과 아주 약간의 순서 바꿈이 있었을 뿐이었다.

잠시의 대화 끝에 둘은 현서가 만화산 일천봉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에 합의했다. 현진과 이약약도 동행한다는 조건을 걸었으나 문제없었다.

사랑에 빠져 칠렐레팔렐레 하고 있다고 해서 양심이 갑자기 커질 리는 없었다. 유위람의 양심이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자그마했다. 커질 예정도 없었다.

칭찬을 바라는 유위람의 시선에, 자신이 일천봉에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현서가 방긋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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