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十二章.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고 (1) (15/21)

十二章.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고 (1)

오독오독. 과자를 씹는 소리 같지만 약을 먹는 소리다. 오립송(五粒松)은 보통 잣나무를 말하나 무산 오립송은 송진이 땅에 스며든 뒤 천 년을 묵어 영약이 된 것을 말한다. 구하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강호인들에게 매력 있는 영약은 아니라 유명하진 않았다. 기혈을 보하긴 하지만 내력의 증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희소성에 비해 효과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서에게는 효과 좋은 영약이 맞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문원의 사문처럼 단전에 내력을 모으지 않는 무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약이다.

그러나 무산에서 나야 하고 천 년 묵은 송진이니 구하는 것이 당연히 어려웠다. 온갖 영약을 모았던 현서의 고방에도 없는 물건이었다. 자문원도 어린 시절 스승님이 운 좋게 찾은 두 조각을 먹어본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귀한 오립송이 과자 상자에 든 채로 현서에게 왔다. 상자를 열어보니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언뜻 보아도 스무 개는 족히 되는 듯했다. 오다 주운 것은 아니고 아는 이에게 받았다며 주경이 현서에게 주었다. 그것도 이사도 유위람도 없을 때를 골라 몰래 와서 말이다.

오립송을 알아본 현서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용물의 대단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이것이 현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주경이 알고 있는 것에 놀란 것이다. 현서의 내력이 남다름을 알고 있다는 뜻이니.

상자를 든 현서가 바짝 얼어 있자 주경이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나는 전해주는 것뿐이니 버리든 먹든 네가 결정할 일이다. 그래도 먹는 걸 추천하지. 너 주려고 급히 모은 것이라니 가상하게 여겨 맘 편히 먹도록 해.”

“누가요?”

“그런 이가 있다. 나쁜 사람, 은 아니야. 아니지. 아마?”

눈을 굴린 주경이 마지막 말은 농담이라며 얼버무렸다. 현서가 빤히 바라보자 그 이상을 말하고 싶지 않다며 훌쩍 사라졌다. 그 후로 추궁당할까 봐 현서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주 대협이 줄곧 부탁받았다는 말을 해서 할아버님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그게 누구든 나중에라도 얼굴을 보이겠다면 알아서 튀어나오겠지. 오립송 맞네. 주경의 말이 옳다. 먹어.

안 그래도 산혼투에 관한 말을 하기 전이라 속이 복잡한 옥은 주경에 관해 캐는 것은 급하지 않다고 잘랐다.

현서는 오립송을 먹었다. 지금 이것만큼 도움이 되는 약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경이 주었다는 말에 유위람의 표정이 묘해지긴 하였으나 의선이 현서에게 좋다고 공언하자 두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현서는 지금 오립송을 과자처럼 씹으며 항도로 향하는 배 위에 있었다. 영약을 먹었다고 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행공을 하는 방식을 꼭 취하지 않아도 좋으나 호흡을 다스릴 필요는 있었다.

한 번에 다 먹어보았자 낭비만 될 뿐이라 미리 두 개만 먹었는데도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스무 날을 넘게 자리보전한 후인데도 픽픽 쓰러지지도 않고 제 발로 걸을 수 있으니 말이다.

“주무실 거면 자리를 봐드릴게요.”

현서가 저 약을 먹으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걸 알아 이사가 시중을 들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침상 정리를 마친 이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현서에게 다가왔다. 현서가 이사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냥 이사가 고생하는데 고마워서 그랬어.”

현서의 말에 이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셔도 소인은 현진 도련님도 그렇고, 숙부님 댁 어른들께 패천검의 편은 못 들어드려요.”

이사가 엉뚱한 곳을 짚었다.

원림에서 제자를 키울 것이니 이사와 있으면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 때문에 이사에게 독립 얘기를 밝히는 것을 주저했으나 서녕을 떠난 이후로 현서의 마음도 점차 바뀌었다.

어떻게 말하면 이사가 덜 화를 내고 덜 서운해 할까를 고민하던 현서에게 예상치 못한 문제가 툭 떨어졌다. 현서가 당황하여 되물었다.

“어. 그, 나랑 유위, 패천검 사이가 티 나?”

삽시간에 새빨개진 현서를 보며 이사가 긍정했다.

“안 날 수가 없죠. 도련님이 깨어나기 전부터 패천검께서 티를 내셨거든요. 고산현의 저택에서도 그랬지만, 이 배에서도 패천검이 도련님께 흑심, 아니,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요?”

현서가 열이 오른 볼을 문질렀다. 유위람과 서로 좋아하는 것을 현서도 숨길 뜻은 없었다. 단지 아는 사람을 붙들고 하나하나 알리는 건 괴상하다고 여겨 입을 다문 것뿐이었다.

혼례를 올렸다면 피로연을 열어 알리는데, 동거를 예정하면 뭘 하는 것이 좋을지 몰랐다. 역시 연회를 여는 게 나으려나? 이사에게 조언을 구하기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다시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음 이사에겐 독립 계획을 몰래 얘길 해둘 걸 그랬나. 후회를 하던 현서가 퍼뜩 떠오른 것이 있어 이사에게 물었다.

“숙모님이랑 형이 많이 싫어하셔? 패천검을?”

이사가 대답하지 않아도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근데 왜 나는 전혀 몰랐지?”

고산현에서 현서가 정신을 차리고 이 배에게 오르기까지 유위람은 꿀 발라놓은 것처럼 현서 주위에 있었고, 그때마다 현진과 이약약과 마주치기도 수번이었다. 헌데 현서에게 언급은커녕 꺼려하는 티도 내지 않아 전혀 몰랐다.

“그거야 두 분도 아셔서 그렇지요.”

“무얼?”

“패천검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을 도련님 앞에서 티를 내었다가 도련님 입에서 패천검과의 사이를 공언하는 말을 듣게 될까 싶어 몸을 사리시는 거죠. 뭐.”

그러면 두 분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아서 그러합니다. 그냥 두시면 알아서 진정들 하실 테니 모른 척하세요. 이사의 말에 현서가 손가락을 톡톡 두들겼다. 옥도 그렇고, 숙모님과 진이 형도 그렇고, 주변의 사람들이 전부 비슷하게 구는 걸 보면.

“서녕의 부모님과 형님들도 싫어하실까?”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작은 댁 어른께서 서녕에 돌아가셨으니 곧 대부인께서 드러누우실지도 몰라요.”

이사의 단언에 현서가 입을 헤 하고 벌렸다. 패천검이 무림 명숙일 때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니, 유위람이 현서의 곁에 서자 평가가 순식간에 박해졌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라실 순 있겠다고 여겼지만, 싫어할 줄은 몰랐다.

“왜 싫어하시지?”

콩깍지가 왕창 뒤집어쓰인 현서는 패천검의 평이 박한 이유를 쉽사리 떠올리지 못했다. 애써 이유를 짜낸 뒤 물었다.

“패천검이 남자라?”

“아뇨. 패천검이 여자라 해도 싫어하셨을 걸요.”

이사가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우선 서운하신 거겠죠. 도련님 일이라면 특히 반응이 격하신 분들이니까요.”

이사의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여기서 시일이 더 흘러 호상직이 패천검의 일을 전했을 때 현서의 어머니인 호 대부인이 드러누운 것은 맞았으나, 딱 반나절 뒤에 벌떡 일어나 남편과 아들들을 전부 불러들였다. 대부인이 말했다.

현서가 아플 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다 괜찮으니 그저 이 아이를 살려만 달라고 빌었다. 그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으니 현서가 패천검을 좋아하는 건 상관이 없다. 집을 나선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짧게 만난 열한 살이 많은 남자였으나 현서가 좋다면 괜찮다.

열한 살 차이라는 말에 유위람과 동갑인 현서의 둘째 형이 저도 모르게 양심 뒈진 자식이라고 욕을 했다. 뒈진 건 아니지만 뒈진 거나 다름없는 상태라 틀린 말은 아니어서 욕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님 앞에서 험한 말을 쓴 서른한 살은 야단을 맞았다.

대부인의 걱정은 다른 것에 있었다. 현서의 첫 연애로는 유위람이 너무 남다르다는 점이었다. 현서는 잘 몰랐지만, 형님들의 혼인이 모두 부모님의 뜻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각자 오랜 시간을 들여 꽃놀이나 연등 행사, 가족 연회 등에 서로 부지런히 오가며 눈도장을 찍고 정을 쌓아 온 뒤에 혼인을 결정했다.

서로 호감이 있지 않았다면 부모님이 주선한 혼인이라 해도 성사되지 않았을 일이었다. 말하자면 오랫동안 교제를 한 경험이 있다는 뜻이다. 보통 열 살 전후로 시작되는 이 사교 활동을 현서는 몸이 약해 하나도 하지 못했다.

유위람의 뒤통수 길이까지 알고 있으니 유위람 역시 누군가를 곁에 둔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것을 알지만 그것은 유가가 알아서 할 일이고, 호가는 현서만 챙기면 되었다.

우린 상인 집안이니 두루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지 않니. 대부인의 말이었다. 마치 아들이 눈에 안 차는 후궁 하나만을 총애하자 간택을 새로 해 후궁을 가득 채우려 하는 태후의 모양새였다.

그렇게 서녕에서 현서에게 서신을 보낸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반대하느라 드러누웠다는 얘기가 적혀 있는 줄 알고 긴장했던 현서는 한창 때의 미혼 남녀의 신상이 적힌 인명 목록을 받아보게 된다.

물론 한참 더 있다 벌어질 미래의 일이다.

미래의 일은 아직 모르는 현서는 서녕의 가족들이 반대를 하면 어쩌나 하고 고민하다 이사에게 물었다.

“이사도 싫어? 서운하거나?”

“소인의 의견을 솔직히 말씀드려요?”

“당연하지.”

현서의 말에 이사가 침상 곁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좀 놀라긴 했는데, 그건 도련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놀라운 거지. 패천검 개인에 대한 호불호는 없어요. 도련님이 좋다면 소인도 좋아요. 더군다나 그분은 도련님을 잘 챙기시죠. 앞으로 패천검만큼 잘하는 분이 또 있을지 몰라서 다음 분이 생기면 그걸 좀 아쉬워할 정도로요.”

패천검을 칭찬하는 것인지 다음 사람을 만나게 될 거란 얘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 다음 분이 무슨 뜻이냐고 되묻기 전에 이사가 먼저 말했다.

“도련님 곁의 사람이 매일 바뀌어도 소인은 반대하지 않아요. 나쁜 사람이라면 물론 안 되지만 패천검은 그래 보이지도 않으니까요.”

그만 주무세요.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침상 근처의 등을 껐다. 현서가 계속 말이 없는 것이 집안사람들의 반응을 걱정해서라고 여긴 이사가 물러나기 전에 덧붙였다.

“그분들은 도련님의 곁에 있는 누가 좋은지 나쁜지를 미주알고주알 따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쁘신 거예요. 자제를 못 했다는 걸 곧 깨달으실 테니, 그냥 두시면 적당히 사그라들 거라 봐요. 그리고 앞으로 두 번, 세 번 쭉 생기면 곧 익숙해지겠죠.”

아니, 왜 자꾸 패천검을 일 번으로 만들고, 이 번도 삼 번도 있는 것처럼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독립할 저택에 유위람을 데려다 놓겠다고 한 건 가벼운 심정으로 한 결정이 아니었는데.

반론을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독립과 미리 사둔 저택 얘기를 안 했다는 걸 깨달은 현서는 입을 얌전히 다물었다.

―그래, 처음이 있으면 두 번째도 있고 세 번째도 있지. 너는 쭉 서녕에 있다 나왔으니 많이, 아주 많이 만나려무나.

이사가 옳은 말 했다며 킬킬거리는 옥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현서는 눈을 감고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 ❖ ❖

팔방으로 발을 놀릴 때마다 공기가 무거워지며 주변을 내리눌렀다. 검을 쥔 채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릿하던 손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져 폭풍을 불러냈다. 검을 따라 휘저어지는 사나운 흐름이 삼 장(약 9m) 이내의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쿨럭.”

검으로 일으킨 폭풍은 완벽했으나 몸이 따라주지 못했다. 퉤, 죽은피를 아무렇게나 뱉어 내며 사영은 입을 닦았다. 사람을 죽여가며 빨아들인 내공이다. 사영의 내공은 이전보다 더욱 늘었으나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다.

패천검의 내력이 실린 검에 배가 뚫려 장기가 엉망이 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더욱이 완치는 불가능했다. 그대로 절명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 했으나 사영은 기적이라면 그 이상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비웃었다.

현재 사영의 몸은 너덜너덜했다. 강제로 끊어진 술법에 대한 반동, 제대로 낫지 않은 부상의 여파가 끊임없이 사영을 괴롭혔다. 하루에도 몇 번씩 피를 토하는 와중에 그나마 쓸 만한 얘기는 주술의 연결이 희미해졌으니 궁주가 뒈져도 곧바로 따라 뒈지지는 않을 거라는 예측뿐이었다.

몸이 못 버틸 걸 알면서도 작정하고 움직였더니 속에서 죽은피가 다시 올라왔다. 소매로 아무렇게나 얼굴을 훔치자 곁에 있던 시시가 급히 영견을 내밀었다.

“소궁주.”

“괜찮아. 피를 좀 토한 것뿐이야. 기분은 더럽지만 몸은 예상보다 가뿐해. 피를 토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군.”

영견을 받지 않자 두 번 권하지 않고 물통을 건넸다. 입 안의 피를 씻어 뱉으며 사영이 중얼거렸다.

“몸에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기분이야. 호 공자는 이런 걸 용케 참는군.”

현서를 입에 올리는 사영의 말에 시시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사영이 지적했다.

“네가 해준 말이 생각나. 너무 오래도록 증오하면 결국 증오하던 상대를 닮는다고 했었지.”

“속하가 주제넘었습니다.”

사영의 말에 시시가 황급히 부복했다. 시시는 사영의 그림자로 자라 신농자의 제자를 죽이고 그 대역까지 했던 측근이다. 그런 수하를 고작 이런 일로 박대할 리 없는 사영이 웃으며 말했다.

“틀린 말도 아니고, 설혹 틀렸다고 해서 이런 걸로 네게 화를 내진 않으니 일어나.”

저 말은 신농자가 했던 말이다. 제자로 위장한 시시는 풍장산 동굴의 비밀을 캐어내려고 무던히 애를 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때 신농자가 제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증오에 매몰되면 가장 싫어했던 것을 닮아버려 종국엔 증오의 대상과 똑같아진다. 그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며 제자에게 거듭 충고하고 당부했다. 그것은 신농자의 회한을 담은 말이었으나, 의도치 않게 사영의 역린을 건드리는 말이기도 했다.

시시가 실패를 고하며 저 말을 전할 때 가짜 제자도 눈치채지 못하는 늙은이의 헛소리라 비웃고 말았던 사영이었다. 하지만 시시는 그날 사영이 자신의 서재 하나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을 기억했다.

“소궁주.”

“되었다. 쉬다 운기하고 들어갈 터이니 너는 물러가 있어.”

생물학적 부친인 궁주를 닮았다는 말을 사영이 무엇보다 싫어한다는 걸 아는 시시가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정말 꼴이 우스워졌어.”

홀로 남은 사영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앉으며 저 말을 다시금 상기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나 궁주는 내공을 일절 가질 수 없는 체질이었다. 물론 그것이 궁주가 되는데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화오궁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등의 점으로 표방되는 비의였고, 그것은 내공과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궁주는 화오궁에 전해지는 모든 비의를 가장 완벽하게 체득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술법에 뛰어났다.

하지만 자존심도 자만심도 강한 궁주는 자신이 무공을 익힐 수 없어 약하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했다. 때문에 스스로 독인이 되는 미친 짓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모두가 만류했으나 궁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긴 고통 끝에 독인이 되는 데 성공했다.

천인살로 고강한 이를 죽여 만족을 얻고 싶었던 궁주에게 배신자들에게 쫓기는 검선은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알아채는 데 뛰어난 눈을 가진 궁주는 역산 혈겁 때 보았던 애송이가 내내 거슬렸던 것이다. 겨우 서른에 검선이라니!

그렇다고 검선에게 단독으로 독을 풀기엔 지나치게 교활했다. 궁주는 배신자들의 무기에 독을 풀었다. 검선이 결국 개웅산에서 죽었으니 궁주의 도박은 크게 성공한 셈이다. 한껏 오만해진 궁주는 자신이 검선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며 거드럭댔다.

궁주의 자만심을 끊임없이 채우던 나날은 얼마 못 가 산산조각이 났다. 무공에 자격지심이 있는 궁주는 아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사영이 화오궁의 독문무공을 전수받기 시작하자 시기가 자격지심이 되어 살의로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궁주는 아들을 몇 번이고 죽이려 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수족들이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선대 궁주가 죽으며 안배해 둔 이들이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사영을 죽이는 데 실패하자 궁주는 마음을 바꾸었다. 죽일 수 없다면 아들의 몸을 빼앗거나, 그것도 안 된다면 아들의 단전을 폐해 폐인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전자가 백화호 사건이었고, 후자가 이미 강호에서 사라진 산혼투를 다시 만들어 낸 일이었다.

아들의 몸을 뺏기 위해 금술을 쓰려고 준비하던 백화호 사건은 궁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던 장로와 호법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궁주가 소궁주의 몸을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궁주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율법 두 개를 전부 지키지 않아서였다. 소궁주에게 비의를 계승시키지 않고, 자신의 대에 화오궁을 강호에 두 번 노출시키는 것으로 율법을 모두 어겼다.

그 이유가 우스웠으나 그때의 사영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 사소한 흔들림이 틈을 만들어 다음 해, 산혼투를 먹지 않을 수 있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얄궂은 일이지.”

사영이 픽 웃었다. 아무리 독해도 사나흘 후면 맹물이 되어버리는 독이다. 빼돌리는 것에 급급해 아무렇게나 버린 독이 서녕호가에 흘러가, 그것도 원래 중독시키려 했던 호익원이 아니라 호현서가 먹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사영은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산혼투가 없어져 잔뜩 독이 오른 궁주가 맹독으로 범벅이 된 음식들을 준비해 사영을 불렀다. 궁주는 독인이라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니 독을 탄 음식을 보란 듯이 사영에게 억지로 권해 먹이려는 분풀이였다.

산혼투만 아니면 상관없다 여긴 사영이 웃으며 궁주가 건네준 탕 그릇을 받아 들려는 순간, 궁주가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하며 뒤로 넘어갔다.

다시없을 장관이었다. 그 후로 사영은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날을 떠올리곤 했다.

독인이 된 지 십 년째가 된 궁주는 기세등등해 죽여도 죽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한데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죽지 않은 누군가가 있어 천인살이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환생이라니, 누가 그런 걸 믿겠는가. 하지만 아들의 육신을 뺏겠다며 금술을 준비했던 이를 부친으로 두었으니 사영이 못 믿을 건 또 없었다.

동맹을 맺은 곽다순이 검선의 환생으로 호현서를 지목했을 때 사영은 반신반의하여 그를 쭉 관찰했다. 침입하기 까다로워 호부에 직접 들어가진 못했지만 얘기라면 많이 들었다. 호부를 오가는 이들에게 약간의 약을 쓰면 친인에게 하듯이 줄줄이 현서에 관한 얘기들을 쏟아 냈으니 말이다.

유리, 인형, 깃털. 귀하고 소중한 보옥. 다정한 도련님. 일거수일투족을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뻔한 얘기였다. 처음에는 약간 지루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부터는 습관적으로 듣고 있었다. 귀찮다고 여기면서도 매번 찾아 들었다. 호현서의 단조로운 일상은 특별한 것이 없었는데도 듣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독을 먹은 아이를 부러워한다는 자각조차 없었으니 그것을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비뚤어진 집착과 질시가 세월을 따라 몸집을 부풀렸다. 부친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기와 질투가 스스로를 좀먹었다. 어느 순간 사영은 그토록이나 싫어했던 부친을 닮아 자신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나 깨달았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사영이 제멋대로 키운 감정들은 이제 스스로 돌이킬 수도 없었다. 궁주도 이런 기분인 건가.

“역겹기 그지없군.”

“무엇이 말인가?”

올 것을 알고 있어 사영은 놀라지 않았다.

유순한 얼굴을 한 곽다순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이제와 부친과 닮았음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결국 쓰레기와 미친놈의 동맹이 아닌가. 사영이 웃으며 말했다.

“주제를 깨닫는 중이었죠.”

어차피 후회는 자신의 몫이 아니고 뒤로 돌아갈 수 없다면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 ❖ ❖

현서가 침상 옆의 창을 열었다. 기름칠이 잘된 창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혹 곁방에서 자고 있는 이사를 깨울까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자시(子時: 밤 11시-1시)가 넘은 밤이라 배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달은 없었지만 배에 등이 걸려 있어 완전히 어둡진 않았다.

현서는 창턱에 몸을 기댔다. 적당한 바람과 물비린내가 나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옥에게 산혼투와 화오궁의 얘기를 들은 참이었다.

산혼투는 화오궁에서 흘러나온 것이 맞았고, 현서가 그 독을 먹고 전생을 자각한 바람에 화오궁주는 천인살에 실패해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천인살은 개웅산에서 자문원을 공격했던 그 독이었다.

모든 얘기를 다 듣고 잠시 침묵한 뒤 현서는 옥의 예상처럼 세상에 별 신기한 일도 다 있구나 하고 말했다. 옥은 예측이 맞은 게 하나도 기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현서가 슬퍼하고 침울해 하길 바란 것은 아니라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있던 현서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열린 창으로 유위람이 쑥 들어와 창틀에 앉았다.

“위에 아무도 없었어요? 뱃전에서 사람이 떨어지니 놀랐을지도 몰라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현서는 이제 유위람이 자신의 방에 오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왜 왔는지 묻지도 않았다.

“호 공자도 이쪽에 앉겠습니까? 바람이 적당히 시원해서 좋습니다.”

선실의 창은 침상의 폭과 크기가 같아서 성인남자 둘이 앉아 있을 자리가 되었다. 더욱이 유위람이 곁에 있으니 물에 빠질 걱정은 할 필요도 없다. 현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위람이 냉큼 자신의 다리 위에 현서를 올렸다.

창틀에 앉을 줄 알았던 현서가 놀라는 것도 잠시, 금방 웃으며 팔을 뻗어 유위람 목에 둘렀다. 현서가 입을 맞추고 싶으면 이런다는 걸 아는 유위람이 기꺼이 고개를 숙여주었다. 유위람도 그렇지만 현서도 얼굴 여기저기에 잔뜩 입을 맞추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 현서는 대뜸 입술부터 덥석 물어 왔다.

유위람이 입술을 슬쩍 벌리자 주저 없이 혀가 들어왔다. 물기 어린 보드라운 살덩이가 입천장을 쓸었다. 코끝에서 나는 신음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유위람이 슬쩍 눈을 떠 현서를 보았다. 감은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한입에 삼켜도 고대로 넘어갈 것 같았다. 집중하느라 미간에 줄이 간 것이 귀여워 목으로 웃었더니 현서가 눈을 반짝 떴다.

현서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술을 떼려고 하자 유위람이 급히 붙잡았다. 입천장은 유위람과 현서 모두의 성감대였다. 유위람이 현서의 혼을 빼놓을 작정으로 몰아붙였다. “으응. 으으응. 읏.”

입을 맞추는 것뿐인데 온몸에 불이 들어온 것 같았다. 용량이 초과된 자극에 현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자꾸 뒤로 뺐다. 유위람이 붙들고 있었지만 현서는 필사적이었다. 결국 현서가 창틀 뒤로 넘어가자 유위람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래가 침상이라는 걸 알지만 당연히 몸을 돌려 현서를 자신의 위에 올려놓아 유위람만이 침상에 누웠다. 졸지에 유위람의 몸 위에 올라탄 현서는 무슨 일어났는지 깨닫느라 잠시 눈을 깜박이다 삽시간에 얼굴을 붉혔다.

현서가 도망칠 리 없지만 그래도 양손을 잡아 깍지를 낀 채로 유위람이 물었다.

“반지는 안 끼지요?”

“네, 무거워서, 팔찌 말곤 다른 장신구는 잘 안 해요.”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호 공자의 손이 희어서 홍옥 반지를 끼우면 어떨까 싶었는데 아쉽군요.”

“패, 유위람이 선물한다면 낄게요.”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나쁜 생각이 나서였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습니다.”

“뭔데……. 아흣.”

유위람은 여전히 누운 채로 현서의 오른손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가 댔다. 검지 끝에 입을 맞추나 싶더니 그대로 살짝 깨물었다. 유위람의 붉은 혀가 손가락을 감아 핥아 올리는 광경을 현서는 여과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좋은 생각이라 여겼는데 손 전체가 발개졌으니, 손가락 전부 반지를 끼운 걸로 할까요.”

유위람이 웃으며 현서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 뒤 손가락마다 입술로 잘근거렸다. 시각도 감각도 허용치를 넘어섰다. 유위람이 공을 들여 손가락을 빨아댈 때마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몸 구석구석에 열이 고였다. 눈 아래가 붉어진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미인이 얼마나 굉장한 파괴력을 가지는지 현서는 모를 것이다.

힘이 빠진 현서가 이불처럼 유위람의 몸 위로 엎어지고 나서야 멈추었다. 기분은 좋은데 그래도 너무 과했다. 항의를 담아 유위람의 턱을 물어버릴까 하고 눈을 가늘게 뜨던 현서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밖에 사람이 왔습니다.”

현서의 방에 들어올 때부터 기막을 펼쳤으니 방의 소리가 새 나가진 않았을 테지만 이 배에서 유위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반시진(1시간)이 되자 칼같이 끌어내러 온 것이다. 현서가 항의를 담은 눈으로 보자 유위람이 미안해 하며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음에 저를 얼마든지 묶고 때려도 됩니다.”

턱만 좀 물어보려 했던 현서는 예상보다 과격한 말에 그건 필요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 ❖ ❖

항도로 향하는 이 배에서 현재 가장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화제는 패천검의 염문이었다.

유위람이 작정하고 갓난쟁이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리낌 없이 호현서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자 오랜 친구들은 당연히 욕부터 했다. 현서의 가족인 이약약과 호현진이 유위람을 볼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뿜어내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허나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현서의 나이를 들으면 화들짝 놀라며 날도둑놈, 하고 말을 흐리긴 했으나 굳이 꼽자면 호의적인 쪽에 가까웠다. 그간 쌓아놓은 패천검의 평판 덕이었다.

다정다감한 성정은 아니나 패천검을 논할 때 예의 바름이 빠지지 않을 만큼 행동거지에 흠 잡힌 적이 없었다. 패천검의 배분을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여전히 폐관 수련 중이라며 종부의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종사상이 벌인 경천검 사건을 떠올려보면 관대하다는 수식어가 붙은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유위람은 도량이 넓은 것이 아니라 경천검이라는 말이 신경 쓰이기는커녕 가렵지도 않아서 무시한 것뿐이었다. 검선보다 이른 나이에 강호 출사를 하지 않겠다는 정신 나간 이유가 확고했다.

만약 스물셋이 되기 전에 백양교 소교주를 찾았다면 검선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튀어나갔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위람이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백양교 잔당의 꼬리가 잡혔다.

유위람의 인성은 모친과 외조부의 피가 만개해 훌륭한 마두감에 교육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으나, 어린 시절 검선을 만나 개안했다. 유위람이 대외적으로 약자에게 관대하고 공명정대한 정파의 어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검선의 덕이었다.

더욱이 오래도록 유위람이 얽힌 염문 한 번 없었다. 유위람의 잘난 얼굴을 보면 신기한 일이었으나 그 역시 검에 미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검각의 사람이니 납득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 유위람이 정분이 난 것을 감추지 않자 그 패천검도 사람이었지 싶어 친근감을 느끼게 된 사람들이 흐뭇해하며 응원했다. 호 공자에 대한 정이 참으로 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말세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게 틀림없어.”

남의 연애만큼 재미있는 것이 또 없다고 사매들이 입을 모았다. 현서가 그 패천검의 곁에 있어도 존재감이 확고한 미인이란 점도 좋아했다. 사매들이 재잘재잘 전해주는 배 안의 여론을 들은 소화리가 진저리를 쳤다. 주경과 감윤도 딱따구리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소화리의 감상에 동의했다.

“사형도 그리 생각하지요?”

배에 오른 뒤 매일같이 유위람이 현서의 선실에서 끌려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란 삼중이었다. 참고로 태호문은 도가의 문파로 삼중도 감윤도 전부 혼인 불가의 규율을 지키는 도사다. 감윤이 돌아보자 삼중이 손에 팔만구를 쥔 채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사형?”

감윤이 의아해 하며 거듭 부르자 그제야 삼중이 돌아보았다.

“사제? 무슨 일이야?”

“그건 제가 물을 말입니다. 문제가 있어요?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 그냥 좀 잡다한 생각을 하느라.”

가볍게 대답했지만 피로와 한숨이 섞여 있었다. 삼중은 백주봉에서 항도로 떠나는 배에 오르기까지의 일을 되짚었다.

화오궁주와 소궁주는 어찌 되었든 죽을 목숨이니 화오궁은 끝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렇게 기세를 떨쳤던 백양교도 잔당만이 남자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세상일이란 것이 그런 법이다. 삼중을 근심에 빠지게 한 것은 그런 인간사의 흐름이 아니었다.

“백충을 이용하는 법이 어떤 이들에겐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이겠다 싶어서 말이다. 백양교의 사술이 흔적을 남긴 것처럼 저것 역시 앞으로 이어질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아.”

천하에 존재하는 사술의 명맥을 죄 끊어놓고 싶어 하는 삼중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농자의 천재성은 이어지지 못했으나 저들이 부스러기라도 챙긴 것은 분명해 보였다.

사영의 등에는 백충을 이용한 진이 없었다. 하지만 백충이 등에 붙은 시체들이 동굴에서 그들을 공격했었다. 그것은 많은 시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저들 나름대로 백충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았다는 뜻과 일맥상통해 보여 삼중의 심경을 무겁게 만들었다.

감윤이 바구니에 있던 달달한 연자떡을 집어 삼중의 입에 밀어 넣어주며 말했다.

“스승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사형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입에 들어온 음식을 거절할 삼중이 아니라 열심히 떡을 씹고 있으니 주경이 말을 보탰다.

“인간사라 해도 인간이 어찌 다 알고 대비하겠습니까. 신선, 아니, 옥황상제라 해도 그러지 못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이 이리 혼탁할 리가 없지요. 허나 영진자가 고민하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 저지른 일은 사람이 갚아나가면 될 일입니다. 앞으로 영진자가 좋은 제자를 많이 둘 것이 분명해 기대가 되는군요. 태호문의 앞날이 참으로 밝으니 그 또한 홍복입니다.”

친화력이 좋아 의심스러웠던 등장에 비해 금방 녹아든 주경은 건들건들한 말투를 잘 썼는데, 가끔 저렇게 좋은 사문이나 집안에서 잘 배운 티를 내는 번듯한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주경을 그리 나쁘게 보지 않은 소화리는 다음에 술을 왕창 먹여 사문을 캐어봐야겠다는 음흉한 생각을 했다.

❖ ❖ ❖

일천봉에 있는 것을 조건으로 항도에 가는 것을 호상직과 이약약이 반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현서의 반응은 애매했다. 그것을 제멋대로 결정했기 때문이라 오해한 유위람이 급히 사과했으나 현서는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술법을 망친 현서에 대한 원한 때문이든 팔만구에 대한 소문을 흘렸기 때문이든 소궁주는 유주로 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곽다순은 어떨까. 곽다순이 자문원의 부활을 꿈꾼다면 어디에 있든 결국 자신을 찾아오게 되겠지.

현서는 유위람이 자신의 비밀을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음을 몰라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렸다.

“곽다순, 그분의 집념, 그러니까 집착이 예사롭지 않아 보여서요.”

그렇지만 만화산에 가지 않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현서는 자문원의 기억만큼 만화산 삼노사를 안다. 그 옛날, 검선도 어리다 하여 보호해 주었는데 현서야 말할 바가 있을까. 갑자기 제자 놈이 짐 덩이를 데려 왔다며 유위람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할 수는 있으나 약자를 모른 척할 리가 없다.

유주에 가야 하지만 변수가 많은 행로에 현서의 안전을 고심한 유위람의 고뇌가 엿보였다.

오립송 덕에 현서는 오성을 순조롭게 완성한 뒤 육성 중반에 접어들었다. 이제 내공만 따지면 혼자 강호를 주유해도 손색없으나, 육신은 여전히 약해 반쪽짜리 성취라 옥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식은 엿처럼 현서의 곁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놈이다. 작은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아 현서를 일천봉에 남겨 보호하려고 하는 것을 옥은 알았다. 물론 현서에게 언질하진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만화산 삼노사가 만화산에 없을 줄은.

항도로 마중 나온 만려로부터 얘길 들은 유위람이 미간을 찡그렸다. 스승님들은 만화산 전체를 제 집처럼 여기시니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그리로 할 수 없었다. 연락이 오가는 시간과 일정을 따졌더니 답신을 받을 여유가 없었다. 해서 방문 알림만을 검각에 해두었더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이유는 아는가?”

주변의 눈치를 보아 만려는 전음으로 상황을 전했다. 유위람의 구겨진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 이 역시 유위람의 실책이었다.

풍장산에 도착하기 직전에 스승님들께 연락을 했었다. 스승님들이 애지중지하는 검을 만드는 장인인 허 선생이 화오궁이 찾았던 엄자산의 후예라는 얘기와, 고향에 돌아가서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이 떠올라 혹시 몰라 연락한 것이 화근이었다.

허 선생은 발을 다쳐 요양하느라 고향에 더 머물게 된 것뿐이었다. 허나 유위람의 서신 덕에 말하는 검이라는 것이 그저 낭설이 아니라 허 선생의 조상이 만든 물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좋은 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스승님들이니 흥미가 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편으로 보내려고 했던 좋은 약재를 본인들이 둘둘 싸들고 소덕현으로 우르르 떠나버렸다.

그나마 유위람이 맡긴 물건을 몰래 검각주인 윤채풍에게 건네주고 간 것이 스승다운 일이었다.

화오궁주를 만난 직후라 찜찜한 기분에 혹시 몰라 주의하시라고 보낸 서신이었는데, 백화호 사건이 십이 년 전의 일임을 상기했어야 했다. 아마 한동안 스승님들은 만화산으로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유위람이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제 실책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으나 유위람은 이약약에게 만화산에 스승님들이 없다는 얘기를 알렸다. 만려의 전음을 전해 듣는 유위람의 얼굴에 낭패가 서릴 때부터 기분이 좋았던 이약약이 호탕하게 말했다.

“선배님들께서 자리를 비우셨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제대로 된 연락을 하지 못하고 온 것은 우리 잘못이니. 그럼 패천검, 나와 아이들은 항도에서 잠시 쉬었다 서녕으로 돌아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겠습니다.”

처음부터 현서를 안전한 곳에 두어야 한다며 스승님들을 팔았던 유위람은 말문이 막혔다. 유위람이 그나마 믿고 맡길 곳은 그분들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곁뿐인데, 같이 갔다가 현서가 사람들을 돕겠다고 내력을 쓰는 일이 생길까 하는 걱정에 유위람은 섣불리 말릴 수가 없었다.

―나야 이대로 네가 서녕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좋다만, 곽다순 놈의 일이 걸리는구나. 헌데 네 거취에 관한 일인데 아무 말 않을 것이냐.

‘아냐. 숙모님께서 저리 말씀하셔도 내 의견을 물으실 테니 그때 말하려고 했지.’

현서는 느낌에 유주에 따라가야 할 것 같았으나 무어라 설득해야 좋을지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때 뜻하지 않은 도움이 나왔다. 삼중이었다.

“회천검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삼중은 현서가 자문원의 전생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으나 사람을 되살린다는 사술은 많이 보았다. 애초에 죽은 사람을 살리겠다고 하는 사람의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으니 얼토당토않는 이유로 제물을 고르는 것도 잘 알았다.

호 공자는 검선의 팔찌를 지니고 있으니 인연이 있다 여겨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운 제물로 찍었을 거라는 얘기를 이약약에게 했다.

“영진자, 잠시. 잠깐만.”

이약약도 화오궁에 관한 얘긴 대강 안다. 현서와 산혼투의 얘기도 정신이 없었는데 검선의 부활이라니. 말한 사람이 영진자가 아니었다면 헛소리라고 한소리 했을 터였다.

가주의 몸으로 외유 중이라 일에 치여 눈 아래가 꺼멓게 변한 곽나난이 슬쩍 다가왔다. 삼중이 곽다순의 이름을 올리지 않은 배려를 해주었으니 나머지 일은 자신이 말해야 했다. 곽나난이 전음으로 곽다순이 미쳐서 검선의 부활을 꾀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얘길 전했다. 이약약이 인상을 쓰며 툭 말을 내뱉었다.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정확한 말이었다. 곽나난은 그 미친놈이 하필 자신의 숙부라 문제였다. 가문에서 진즉에 내쳤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냈었어야 했는데, 숙부가 자신의 일을 앞당겨 치워줬다고 여겨 내버려 둔 것이 화근이었다. 대가 없는 이득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 곽나난은 어리고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던 터라 깊게 챙기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완비 납치에 대한 치죄와 곽다순의 일을 수습하지 못하면 영우곽가는 타격을 입을 것이 뻔했다. 상황을 이해한 이약약의 표정이 유해졌다.

“집안에 사람이 많으면 꼭 정신 나간 것들이 한둘씩 있기 마련이라. 더욱이 곽 가주는 집안의 어른이니 걱정이 크겠소이다.”

호상융과 교은설을 떠올린 이약약이 동정 어린 목소리로 곽나난을 위로했다. 동시에 속으로 백 가지가 넘는 욕을 곽다순에게 퍼부었다.

가만히 곁에 서서 일이 돌아가는 추이를 살피던 현서의 손을 이약약이 잡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네가 유주까지 가야 할 듯싶구나. 물론 나도 진아도 함께할 거란다. 괜찮겠니?”

이약약은 현서가 미친놈의 표적이 된 것을 팔찌 탓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 힘든 투병의 시기에 옥팔찌가 현서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를 만희당 문을 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이왕지사 부잣집 막내로 태어났으니 귀하게 예쁨만 받고 살았으면 싶었던 이 어린 조카가 박복한 것에 이약약은 한숨을 삼켰다.

“숙모님, 걱정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현서는 유주에 가는 것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숙모의 걱정도 모두 감당할 만한 것이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현서도 유주에 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이사는 항도에 남기로 했다.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상황은 이해했으나 연신 불안해 했다. 오립송 덕에 현서의 상세는 예상보다 빨리 좋아졌지만 스무 날을 넘게 의식불명이었으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이사는 아닌 척했지만 잠을 설친 기색이 역력했다.

현서는 망설이고 있던 결심을 굳혔다. 현서가 이사를 붙들고 소곤거렸다. 거듭된 당부를 건네던 이사는 현서가 하는 귓속말이 이어질수록 눈이 점점 커졌다. 도련님이 한 말을 이해하기까지 잠깐의 시간을 들인 이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지옥의 수문장처럼 변했다.

“도련님!”

이사가 소리치자 현서가 재깍 사과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미안해.”

“도련님! 아니, 도련님! 소인이랑 잠시 얘기 좀.”

주종의 애틋한 이별 장면이 순식간에 죄인을 심문하는 국문장처럼 살벌해졌다. 현서가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건강했다면 당장에 마차에 올라타 등짝부터 후려칠 모양새였다.

하지만 현서는 등짝을 두들겨 맞을 만큼 건강하지 못했는지라 이사의 도련님, 다녀와서 봐요, 하는 소리만이 마차 뒤로 우렁우렁 울려 퍼졌다.

―너는 정말. 전부터 순서가 왜 그 모양이냐. 일 다음에 오는 게 이인 줄은 알긴 하고? 맹하다 맹하다 했더니 진짜 네가 맹꽁이라도 된 줄 아느냐.

옥이 혀를 찼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사가 항도에 남아 현서 걱정에 매일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분기탱천해 돌아올 도련님에게 할 잔소리를 산처럼 쌓아두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옥도 알았다.

거기에 고백하자면, 현서에게는 자신이 없을 때 이사가 화를 잔뜩 내두면 나중에 덜 야단맞지 않을까 하는 꿍꿍이 섞인 기대도 작게 있었다. 하지만 이사는 유능하고 꼼꼼한 측근이라 그런 일은 없다는 걸 현서는 몰랐다. 돌아온 현서가 거대한 후폭풍을 마주했을 때 자업자득이라며 옥도 편들어 주지 않았다.

“이사가 저리 화를 내는 거 처음 봤구나. 서아야. 무슨 일이야?”

마차에 훌쩍 올라탄 현진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다. 패천검이 찰싹 들러붙어 있어도 무던히 굴었던 이사가 이토록 화를 내는 것 보면 분명 큰일이 있다는 것인데. 패천검의 일 말고도 더 큰 문제라니. 눈이 흔들리는 현진의 물음에 현서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현서가 저리 웃으며 입을 다물면 캐물을 수 없다는 걸 아는 현진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 또한 부모님께 모든 일을 다 말하지 않는데 현서를 보호한다는 이유를 들어 일거수일투족을 요구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아서였다.

관례를 올린 지 이 년이 지났어도 마냥 어리게만 보았던 동생이 오래전부터 다 자라 있었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라 기분이 묘했다. 기뻐해야 하는 일인데, 마음 한곳이 섭섭한 것은 또 어쩔 수 없었다.

그에 현진은 말을 돌렸다.

“저게 그 월영사구나.”

마차 안에는 현서 외에 큰 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월영사였다. 따지고 보면 저 물건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현진은 그간 말로만 들었지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기해 했다. 여기저기 만져 보고 두들겨도 보았지만 들은 대로 이음새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실 같지 않구나.”

화오궁이 벌인 그간의 미친 짓을 떠올리면 보면 저 안에 있는 물건이 멀쩡할 리가 없어 보였다. 때문에 월영사로 봉인되어 있다고 해도 마차 안에 두는 것에 모두 난색을 표했는데 현서만이 덤덤했다.

“크기도 애매하네. 길이만 보자면 검이 들어 있다고 해도 믿겠는데 폭은 좀 더 넓으니.”

현진이 월영사를 들어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검 하나만 들었다 보기엔 무게감이 있는데 그렇다고 엄청 무거운 것은 또 아니었다.

“검이 여러 자루거나, 아니면 도일지도 모르지.”

현서가 맞장구를 쳤지만 두 사람 다 검이나 도가 들었을 거라 믿고 한 말은 아니었다.

‘시체 같은 거나 아니면 좋겠는데.’

―끔찍한 소릴 잘도 하는구나.

옥이 핀잔했으나 옥 역시 그런 걱정을 해본 적이 있기는 하였다.

현진과 현서는 곧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석청담의 하우대 일행은 항도로 오는 대신 유괴 사건의 마무리를 돕고 싶다고 풍장산에 남았다. 사씨 남매는 정우문과 송가장을 도와 화오궁주를 추격하는 쪽에 손을 보태기로 했다.

기분 좋은 얘기도 있었다. 사씨 남매와 하우대에게 별호가 생겼다는 소식이었다. 강호에 큰 사건이 생기면 젊은 후기지수가 활약할 일이 많아 이렇듯 별호를 얻는 일이 왕왕 생긴다.

사무문이 아무 말 없는 조용함을 뜻하는 정묵검(靜默劍)이라는 별호를 얻었다는 얘기를 듣자 현서는 너무 웃는 바람에 기침이 터져 버릴 정도였다.

기침이 겨우 멎자 옥과 현진의 야단을 동시에 들으며 현서는 사씨 남매와 하우대에게 축하 선물을 잔뜩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너무 웃은 것이 미안해 사무문의 선물은 특히 더 신경 쓰려 했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 어느 순간 잠이 든 현서가 눈을 뜨니 유위람의 품 안이었다.

“잘 잤습니까?”

유위람이 현서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물었다.

<유연천리(有緣千里)> 5권에서 계속 

LUST 유연천리(有緣千里) 4권

지은이 | 황묘

표지 일러스트 | 해사화

표지 디자인 | Another

발행처 | ㈜서울미디어코믹스

<유연천리(有緣千里)>

© 2022 황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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