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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천리(有緣千里) 5권
황묘
目次
十二章.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고 (2)
後日譚
外傳 一章. 서녕호가의 겨울
外傳 二章. 상화원의 봄
外傳 三章. 항도의 여름
外傳 四章. 상화원의 가을
十二章.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고 (2)
“언제 왔어요?”
“일 각(15분)이 좀 안 되었습니다.”
현서도 반시진(1시간)의 규칙을 금방 눈치채 그리 물은 것이다.
숙모님과 현진만 그랬다면 현서가 말려볼 만도 하련만, 곽나난을 비롯해 삼중까지 문을 두들기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런 현서를 다독인 것이 유위람이었다. 호 공자를 걱정하고 자신을 놀리려 함이 엉켜 그런 것이니 한동안은 그냥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 두자고 말이다.
옥이 놀랄 정도로 상식적인 말엔 현서도 옥도 모르는 맹점이 있었다. 사람들이 저리 반시진(1시간)만 되면 나타나는 것은 유위람이 현서와 단둘이 있을 때마다 기막을 펼쳐서였다. 모두 현서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님을 알았으나 속 시커먼 놈이 기막을 쳐 두니 찜찜함이 몇 배로 불어났다.
해결책은 매우 간단했다. 기막을 치지 않은 채 잠시간의 대화를 딱 한 번만 노출시키면 되었다. 매번 현서의 대화를 엿듣는 유위람처럼 양심이 작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위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둘만 있는 시간을 조금도 침범받지 않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유위람이 지금 폭풍 같은 첫사랑 중이라는 걸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아 그 소박한 마음은 무시되었다.
물론 유위람에게 옥 님은 예외였다. 현서와 자신의 옷이 좀 더 헐거워지는 때가 오면 또 모르겠지만, 접문을 하고 사소한 대화를 나눌 때는 옥 님이 곁에 있어도 유위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에 대한 옥의 의견은 유위람이 옥 님의 말을 듣지 못해 알 수 없었다.
“화운검과 무슨 얘길 그리 재밌게 하셨습니까?”
현진과의 대화를 죄 엿들었음에도 모르는 척 묻자 현서가 별호를 얻은 이야기를 했다. 사수연은 검이 날래고 강하다 하여 교교검(矯矯劍), 하우대는 석청담의 검법 중 하나인 뇌응검법(雷鷹劍法)을 펼치는 것이 뛰어나 벽뢰검(霹雷劍)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사수연과 하우대 둘 다 순조롭게 별호를 얻었고 모두 좋은 뜻이라 기뻤다. 축하 선물을 잔뜩 보내야겠다고 신이 나 떠들던 현서가 조금 머뭇거리다 말했다.
“사 형님은 가끔 좀 엉뚱한 얘길 하시거든요. 물론 의도가 악한 건 아니에요. 좋은 분이라 잠시만 얘길 해보면 사 형이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은 걸 금방 알 수 있긴 해요.”
현진이었다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목구멍에서 먼저 말을 뱉어서 악의가 없는 거라고 했을 테지만, 현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더욱이 유위람에게 사무문이 항도에서 경천검이라는 소리를 했다는 말은 더 못 했다. 대화는 사무문을 말리느라 장법과 지법이 경지에 오른 사수연에게로 옮겨갔다.
내공을 쓸 수 있음을 유위람이 알고 있어 현서는 좀 더 편히 말했다.
“수연의 장법과 지법은 정말 수준급이에요. 검이 진신무기가 아니었다면 별호가 좀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유위람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은 채로 종알종알 얘기하는 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한다고 질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을 할 때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저 입술을 핥고 싶어서였다.
잠시 고민한 유위람은 연인끼리 입술을 핥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결정하자 움직임은 순식간이었다.
“흣.”
크게 힘들이지 않아도 엄청난 타격을 주는 사수연의 등짝 때리기에 대해 말하던 현서가 놀라 입을 가렸다.
“싫습니까?”
유위람이 예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당황했을 뿐이지 싫은 건 아니었던 현서는 도리질을 쳤지만 손을 내리지는 않았다. 유위람이 웃으며 그 손등을 다시 핥았다. 현서가 파드득 손을 소매 아래로 숨겼다. 몸을 움직이자 옷깃 사이로 목덜미가 붉게 번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워낙 흰 피부라 조금만 열이 올라도 저렇게 금세 붉어졌다.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들까지 전부 발갛게 변해 있을 거라 상상했더니 갑자기 목이 탔다.
유위람이 여태껏 청백(淸白)한 몸으로 지낸 것은 동하지 않아 그런 것이지 욕망이 담백한 편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위람은 자신이 욕심이 많다는 것을 안다. 욕심과 담백함은 양립할 수가 없다.
온 마음과 온몸이 욕망하는 것은 오직 현서뿐이었다. 현서를 볼 때마다 새로이 튀어 오르는 욕심들과 별개로 어리고 약한 현서를 무리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 몸을 핥아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혀가 닿을 수 있는 곳은 전부 핥고 싶었다. 눈물처럼 혀에는 달지 않을지 몰라도 유위람의 마음에는 차고 넘치게 달 것이 분명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이만한 무위를 지니게 된 것은 가진 재능의 뛰어남도 있으나 한 번 결심한 것을 굳게 지킨 의지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굳건한 의지는 욕망을 투영하는 데도 근면했다.
“유위람?”
입을 맞춘 것도 아니고 입술을 핥은 게 전부였지만 유위람의 시선은 발가벗은 현서를 보듯 질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현서는 저 시선이 욕망임을 안다. 손끝에서부터 차오르는 열. 발끝을 곱아들게 하는 간지러움. 아랫배에서 시작해 얇은 피부 아래를 곤두서게 하는 기묘한 감각. 죄 낯선 것투성이지만 싫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대화는 일절 없었으나 진득한 시선이 얽혀 들었다. 자그마한 불티 하나만 튀어도 순식간에 전신을 태울 욕망이 둘 사이에 찰랑거렸다. 누구의 숨인지도 모를 날숨이 길게 터져 나오는 그 순간.
―나 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옥의 딱딱한 말에 현서가 화들짝 놀라 허리를 바로 세워 정좌했다. 입술을 핥은 이후로 머리카락 한 올 닿지 않았으나 손끝이 저릿한 것을 깨닫지 못할 만큼 정신을 놓고 있던 유위람도 조용히 욕망을 갈무리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반성이 먼저였다. 관계를 가지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 걸 알았다. 그 준비에는 현서와의 충분한 대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옥 님을 위한 안배가 필요했다.
평소에 옥 님이 같이 있는 것은 전혀 문제없었으나 현서와 질척한 일을 하려고 할 때 옥 님이 있는 것은 상관이 있었다. 현서와 자신의 색사를 옥 님이 보고 듣는 것은 유위람에게는 별 문제가 아니었으나, 옥 님이 화를 내셔서 지금처럼 도중에 현서가 파드득 물러나 버린다면 큰일이니 말이다.
유위람은 모친에게 부탁한 물건이 도착할 때를 가늠했다.
❖ ❖ ❖
유주는 항도가 있는 소주의 위에 자리한 주다. 황제 직할령인 대주와 서북의 국공령(國公領)인 함주(咸州)를 제외한 열두 개의 주 중에서 가장 작다. 유주의 북쪽에는 곽나난이 검선의 사당을 꾸미기 위해 돌을 공수한 천주가 있다. 천주는 옥과 돌의 산지로 유명하다.
천주의 동쪽 끝에서 내려오는 만년설이 있는 크고 웅장한 산맥은 유주까지 이어지는데, 사람들은 주봉의 이름을 따 흔히 곤산이라고 불렀다. 유주는 곤산맥의 줄기를 따라 이어진 산들이 많은데 감산도 그중 하나다. 이 산에는 대규모 금목서 자생지가 있어 가을이 되면 달콤한 향이 산을 가득 메운다 하여 감(甘)산이 되었다.
일행이 감산에 도착했을 땐 구월이 시작된 터라 금목서는 만개하지 않았으나 꽃망울 사이로도 단향이 피어올랐다. 청량한 가을 공기 사이로 달달한 향이 기분 좋게 숨결 사이로 파고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현서의 미간에 만족스러움이 가득했다.
[향이 무척 좋네요. 우리 집에도 몇 그루 심으면 어떨까 싶은데, 유위람의 생각은 어때요?]
[저는 당연히 좋습니다.]
감산이 가까워지자 길이 험해져 일행은 전부 말을 탔다. 현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약약과 현진이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유위람이 현서를 자신의 말에 태우곤 그 뒤에 월영사를 실었다. 그리곤 유위람 자신은 말의 고삐를 잡았다.
월영사가 아주 무겁지 않다곤 해도 성인 남자 둘을 태우고 짐까지 싣는 건 무리가 가지 않겠느냐는 반론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뜻이 보였다. 그래도 현진이 자신의 말에 태우려는 것을 이약약이 말렸다. 패천검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감산을 지척에 두었으니 뒤로 미룬 것뿐이었다.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조그마한 폭포가 있다고 해서 자정향을 심으면 어떨까 했거든요. 원림이라 정원이 넓으니 계절에 맞추는 데 무리가 없을 것 같아요.]
집 안 가득한 꽃과 과실나무는 부의 상징 중 하나다. 서녕에서도 세 명의 정원사가 부지런히 사철 정원과 유리창을 댄 온실을 관리했다. 더욱이 현서가 산 저택은 서녕보다 남쪽에 있으니, 원림을 꾸미는 재미가 쏠쏠할 터였다.
말을 탄 이후로는 기막을 쳐봤자 소용이 없어 이렇게 전음으로 대화를 했다. 전음을 써도 아프지 않다고 했지만 유위람은 신경을 썼다. 현서가 그것을 눈치채곤 먼저 말을 걸었다.
“잠시 쉬었다 가죠.”
지도를 보던 곽나난이 말했다. 싸움이 일어날 것은 자명한 일이라 길잡이를 구하는 대신 지도만을 구했다. 현서도 유주 감산의 흑하라고만 알았지 그게 감산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몰랐다.
감산에 오르기 전에 수소문해 보니 흑하는 감산에 흐르는 여러 물줄기 중 하나를 일컫는 것이 아니었다. 감산 동쪽에 백맥하(百脈河)라는 강이 있는데 그 강의 일부분을 흑하라고 부른다고 했다.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길은 제대로 찾은 듯싶네. 호 공자.”
말에서 내린 삼중이 현서에게 손짓했다. 현서가 깨어난 이후로 삼중은 틈만 나면 현서에게 음식을 먹이려 들었다. 마른 걸로 치자면 뼈에 가죽만 씌운 삼중이 더 애처로워 보여 모양새가 이상했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주경이 준 오립송은 총 일곱 개를 먹었다. 옥이 지금은 그 이상을 먹어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해 이사에게 잘 맡겨놓았다.
일행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간단한 요기를 하고 휴식을 취했다. 이제까지의 길은 순탄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으니 감산에 도착하고부턴 모두 긴장을 놓지 않은 상태였다.
현서가 약까지 전부 먹자 이약약이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곤 조곤조곤 말했다.
“우리 모두 자기 한 몸은 빼낼 수 있는 사람들이니, 서아야, 너는 누구보다 너 자신을 가장 먼저 살펴 피치 못할 상황이면 무조건 네 몸부터 챙겨야 한다. 알겠지?”
현서의 주위엔 유위람을 비롯해 동굴에 있었던 이들이 포진해 있어 이약약의 당부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약약은 그 일을 여전히 모르지만 무척 적절한 당부였다. 허나 동시에 소용없는 말이기도 했다. 당시 현서가 오직 타인을 지키기 위해 무리해서 움직였다는 걸 알아서였다.
의식이 없었던 아이들을 빼면 당시 현서보다 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때의 현서만큼 시의적절하고 훌륭한 대처를 할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현서의 무위에 관한 의문으로 이어졌으나 지금은 수면 아래의 고요함일 뿐이었다.
“네, 숙모님의 당부 명심할게요.”
현서가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위람조차 그 말을 곧이 믿지는 않았다.
잠시의 휴식을 끝내고 일행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아직 오전이긴 해도 산의 해는 빨리 저무니 밤을 지새운다 해도 흑하에 도착한 후가 나았다.
길을 제대로 찾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흑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들은 대로 낙차가 있는 바위 사이로 강이 흘러 물웅덩이를 이루었다 흘러가는 곳이었다. 강폭은 예상보다 제법 넓었다.
얼마 전에 비가 쏟아졌다더니 과연 바위 위로 떨어져 내리는 강줄기가 거셌다. 계단처럼 이어진 바위 위에 부딪힐 때마다 하얗게 포말이 생겼다.
“정말 검네요.”
하지만 바위 아래로 떨어져 모인 물줄기는 희게 튀어 오른 물방울과 달리 새카맣기만 했다. 바닥에 깔린 검은 돌 때문이라는 걸 아는데도 신기했다. 돌 때문인지 흑하에는 물고기도 수초도 살지 않는다고 하는데, 식수로 먹는 것은 또 지장이 없다고 한다.
유위람이 손을 휘두르자 사람 머리통만 한 물 덩어리가 튀어 올라 바닥에 놓아둔 월영사 위로 쏟아졌다. 월영사를 지켜보던 일행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실이 맞구나.”
이음새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저 매끄럽기만 했던 월영사에 흑하의 물이 튀자 가닥가닥 감긴 실의 형상이 드러났다. 혹 느슨해졌을까 싶어 감윤이 만져 보았지만 실의 모양만 드러났을 뿐 여전히 단단하기만 했다.
“아주 꽁꽁도 싸맸네. 아예 물에 담그는 편이 빠를 것 같은데?”
여기가 흑하도 맞고 월영사에 효과가 있는 것도 확인했으니 감윤의 말대로 하는 것이 나았다. 뭐가 나올지 모르는데 들고 들어가는 건 위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아예 월영사를 물에 집어 던지려는 순간, 이약약이 나서 손을 휘둘렀다.
유위람이 했던 것과 똑같이 흑하에서 물을 끌어 올린 것이 아니었다. 이약약이 잡아 올린 것은 사람이었다. 물길을 타고 흘러든 시체가 물 밖으로 나오자 눈을 번뜩였다. 삼중이 예견한 대로 백충에게 당한 사람들이었다.
“이 기분 나쁜 건 뭐야.”
시체는 움직이게 되자 훌쩍 떨어져 기괴하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림잡아도 수백이 넘었다.
현서야 말할 것도 없고, 삼중이나 현진을 제외하면 전부 한 문파의 정예들이나 쉰 명이 되지 못했다. 말들은 이미 도망간 지 오래였다. 현서와 삼중은 신중하게 후방으로 물러났다.
“저기에 소궁주나 곽다순이 있는가?”
“아뇨. 없습니다.”
“시간을 끌어보시겠다?”
이약약이 곽나난으로부터 대답을 듣자 그에 비뚜름히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새파란 강기가 줄기줄기 튀며 적들에게 쇄도했다. 피하지 못한 이들 사이로 팍 하고 피가 튀어 오르는 것과 동시에 이약약이 화살처럼 쏘아져 적진에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다수의 적을 상대해 함께 싸우려면 합을 맞춰본 적이 있는 이들이 편하다. 본의 아니게 소화리와 감윤, 그리고 곽나난은 각각 자신의 문파와 가문의 사람들과 뭉쳐지게 되었다. 이약약과 유위람만이 외따로 떨어져 적을 상대했다.
‘둘이 닮았구나.’
손속에 일절 자비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은 아주 닮아 있었다. 숙모인 이약약이 싸우는 것을 현서는 처음 보았는데,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어 피로 된 안개가 이약약을 뒤따르는 것 같았다. 지옥야차나 수라악귀라는 얘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석청담의 검을 오래 보아 잘 아는 줄 알았는데 현서는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을 알았다.
―현진이나 하우대 놈들은 정말 병아리나 마찬가지구나. 한참을 더 배워야겠어.
옥 역시 제대로 된 석청담의 검에 감탄했다. 위험한 상황인데도 타인의 검술에 기어이 감탄하고 마는 것을 보면 옥도 확실히 강호의 일원이었다.
유위람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동굴에서 싸웠을 때 내력과 공간을 제한당한 것을 분풀이라도 하듯 마구 날뛰었다. 영뢰팔합검의 후반부는 일대 다수의 싸움일 때 특히 빛을 발했다. 뇌우가 쏟아지듯 변화무쌍한 검이 내려치는 순뢰팔삭은 말할 것도 없고, 폭풍을 불러 용을 죽인다는 의미의 파룡풍조(破龍風潮)는 왜 유위람이 패천이라는 별호를 얻게 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과연 영뢰팔합검이 검각 일절(一絶)이라 불릴 만하다.
옥은 유위람을 탐탁잖아 해도 그가 지닌 무공을 깎아내리지는 못했다.
모두가 분투하고 있으나 싸움의 양상은 아직까지 누가 유리하고 불리한지를 알 수 없었다. 최대한 넓게 전장을 살피려 했으나, 현서의 눈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은 현진이 있는 쪽이었다. 현진도 무척 잘 싸우고 있었으나 얼마 전까지 부상을 입었고 더욱이 일대 다수의 싸움은 경험이 많지 않았다.
현서는 이제 청연참을 응용해 탄지공처럼 쓸 수 있었다. 물건을 매개로 하지 않아도 내공을 콩알 정도로 손끝에 뭉쳐 원하는 곳을 향해 날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전에 감윤이 현진과 사씨 남매와 대련할 때 유위람이 썼던 잔기술을 보고 따라한 것이다.
대단한 위력은 아니었으나 현진이 부상을 입지 않게 적의 검로를 비트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난전이 한창이라 현진이 의아하게 여겨도 주변을 살필 수 없어 가능한 일이긴 했다.
높은 곳에 올라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싸움이 보이지 않았다. 피 냄새는 점점 짙어지고 비명도 난무하지만 현서는 눈앞의 사람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삼중이 이상하구나.
옥의 말에 현서가 곁을 보니 삼중이 연신 주변을 살피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영진자?”
현서가 주위를 끌자 삼중이 조용히 물어 왔다.
“제 눈에 물안개가 보입니다. 호 공자의 눈에도 그러합니까? 공기나 바람은 문제가 없는데 이상합니다.”
“물안개요? 아니요.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물 근처이니 물안개가 피어오를 수는 있으나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고, 무엇보다 현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현서의 대답에 삼중이 급히 소리쳤다.
“미혼진(迷魂阵)입니다! 환영을 보여주거나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이상하다 싶으면 무조건 의심하세요!”
삼중이 목소리에 내력을 실어 모두가 들을 수 있게 경고했다. 삼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위람은 적 하나를 베어 내곤 급히 물러서 현서의 곁에 왔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판단이었다.
물안개는 오직 삼중의 기억을 자극하는 장치니 현서의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미혼진의 무서움은 이런 식으로 각자 보이는 것을 다르게 만들어, 최악의 경우엔 아군끼리 죽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미혼진이라니! 그럼 지금 저거 나만 보이는 거야?”
소화리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소리쳤다. 싸움이 멈춘 것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의 눈이 소화리가 말한 곳으로 옮겨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눈에도 보인다.”
“나도 잘 보여.”
“저도요. 근데 저 둘은 누구죠?”
“하나는 시체…… 같은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모두 같은 것을 보고 있음을 말해 주었으나 다행은 아니었다. 소화리, 감윤, 곽나난, 유위람 모두 바위 위에 있는 한 사람과 한 구의 시체를 알아보았으나 입에 올리지 못했다. 저것이 환영이어도, 환영이 아니어도 끔찍하긴 매한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곽다순이 잠이 든 것 같은 자문원의 시신을 품에 안고 있었다.
―지금, 지금, 저 미친놈이 안고 있는 것이 문원의 몸이 맞느냐? 저것이 문원이야? 어떻게, 감히, 저놈이.
옥의 노여움은 실로 대단해 왼팔이 떨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현서의 눈은 소화리가 소리치기 전부터 곽다순과 그 품의 시체를 향해 있었다. 곽다순은 자문원을 품에 안고 현서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현서를 비롯한 모두가 바위 위에 시선을 빼앗겼으나 유위람만은 다시 고개를 돌려 현서를 주시했다.
“아니야.”
곽다순을 보았을 때부터 눈물이 흘러 얼굴이 흠뻑 젖었으나 현서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혼란이나 충격이 아니라 깊은 슬픔에 빠진 얼굴이었다.
“사형!”
주박에 사로잡힌 것처럼 곽다순만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감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찾았다. 현서가 뒤돌았을 때 본 것은 사영에게 잡혀 끌려가는 삼중의 모습이었다.
현서는 물론 유위람까지 급히 잡으려 움직였으나, 삼중이 본 희미한 물안개가 아니라 노을을 머금은 것 같은 주홍빛 안개가 훅 하고 퍼지며 삼중과 그들을 갈랐다.
일순간 주변이 바뀌었다. 미혼진이 모두를 덮친 것이다.
“……람, 위람, 살려……살려…….”
현서가 애타게 유위람을 부르며 버둥거렸다. 미혼진에 빠진 일행들이 각자 환영에 허우적거리는 사이 현서만이 남아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적을 피해 몸을 물리려던 현서가 발을 헛디뎌 월영사와 같이 흑하에 빠졌다. 깊지 않은 물이었으나 산의 물은 차갑고 옷자락이 감겨 현서는 버둥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사이 흑하의 물을 뒤집어쓰고 월영사가 흰 머리 타래처럼 풀어져 강 위로 흩어졌다.
유위람이 물에 빠진 현서를 건지기 위해 흑하에 뛰어들기 전에 앙상한 손이 현서를 먼저 잡아챘다. 월영사 안에서 나온 것은 말라 쪼그라들어 목내이가 된 괴물이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칠, 팔 세의 아이만 한 체구였다.
작고 마른 몸이 현서의 등에 들러붙어 마구잡이로 여린 살을 물어뜯었다. 현서의 비명과 피가 흑하 위로 번졌다.
“호 공자!”
유위람이 앞뒤 잴 것 없이 흑하에 뛰어들려는 순간 현서의 가느다란 목이 푹 꺾였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차가운 얼굴에 유위람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미혼진은 말 그대로 사람의 정신을 흩트리는 진이라 탈출을 위한 생문이나 위장용 사문이 없다. 진을 파훼하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운데, 눈앞의 광경에 미혹되지 않으면 된다.
유위람같이 양심이 희박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사람에겐 큰 소용이 없는 진이었다. 올해 초까지라면 말이다.
“제가요? 당신이랑요?”
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사하게 웃는 낯은 예쁘고 동그랗게 뜬 눈은 귀여우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저는 내년에 건정후의 삼녀, 막리세가의 장녀, 금옥장의 조카딸과 혼례를 올리기로 되어 있어요. 하지만 제 혼인 명단에 패천검 유위람은 없는데. 뭔가 착오나 있나 보네요. 저는 당신의 혼인 상대가 아니에요.”
유위람을 전혀 모른다고 말하며 현서는 그만 가시라고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매정하게 고개를 돌리는 현서를 잡는 대신 유위람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짝 하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유위람의 얼굴이 돌아갔다. 이번이 여섯 번째였다.
원래라면 미혼진에 걸릴 일이 없어야 하건만 올해부터 유위람에게는 그 뻔뻔한 정신을 잡아 뒤흔들 유일한 사람인 현서가 있었다.
처음 보았던 현서의 죽음이 끔찍해 유위람은 그것이 환영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못했다. 처음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에 유위람 역시 미혼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첫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유위람을 비웃듯 두 번째의 현서는 미혼진에 갇히기 전에 보았던 것처럼 뺨이 눈물로 엉망이었다. 내버려 둘 수 없어 다가갔더니 눈앞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다. 정말로 참혹했다. 끊임없이 이런 것들만 보아야 한다면. 유위람은 미혼진이 어떻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를 이해했다.
그 후로도 여러 명의 현서가 나타났다. 큰 부상을 입어 죽는 일이 세 번, 타인과 사랑을 속삭이는 일이 두 번, 그리고 이번처럼 유위람을 아예 모르는 현서도 등장했다.
환영이라도 현서니 베어버릴 수도 없었다. 물론 유위람은 환영이라 해도 현서의 곁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것들은 가차 없이 베어버렸지만 그것만으로는 환영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유위람을 미혹시키는 것은 현서니 말이다.
결국 정신이 번쩍 들도록 자해하는 수밖에 없는데, 싸움을 앞두고 몸에 자상을 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 스스로 뺨을 때리기에 이르렀다.
여섯 번째의 현서가 사라지고 남은 건 빨갛게 부어 오른 유위람의 뺨뿐이었다.
“아주 고맙기도 하셔라.”
자신 안의 두려움을 돌아보는 참으로 소중한 기회였다. 이 대단한 기회를 준 사람이 곽다순이든 사영이든 간에 반드시 고마움을 표하겠노라고 유위람은 이를 득득 갈았다.
그사이 예의 주홍빛 안개가 일렁였다. 새로운 환영이 나타난다는 뜻이었다. 유위람은 이제 몇 명의 현서를 만날지 두고 보겠다고 벼르기에 이르렀다.
일곱 번째의 현서는 앞선 현서들과 달리 유위람을 보지 않았다. 울지도 웃지도 않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거나 다른 사람을 껴안고 연심을 속삭이는 일도 없었다.
일곱 번째의 현서는 그 어떤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으나 칼날 같은 엄정한 기세를 보였다.
“이번엔 내력을 쓰는 현서로군.”
현서가 내력을 사용하는 것과 내력을 과하게 사용해서 아픈 것. 그 둘 중에 무엇이 자신의 두려움일까. 유위람이 고민에 빠져 있느라 앞선 여섯 번의 현서가 모두 자신과 눈을 맞추었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했다.
내력을 휘감은 현서는 지척에 유위람이 있는데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안개 너머만을 응시했다. 유위람의 시선이 따라갔으나 어룽어룽한 안개만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유위람은 그 너머에 곽다순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미혼진이니 마음을 흔들 환영을 보여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안개 너머로 곽다순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문원. 너를 다시 만나 정말 기뻐.”
새로이 뺨을 칠 준비를 하던 유위람이 멈칫했다. 곽다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막연히 상상해 본 일이긴 했으나 이제껏 보았던 환영처럼 자신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일이 아님을 알아서였다.
유위람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일곱 번째 현서가 환상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여상한 현서의 대답이 유위람의 가정에 확신을 주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네게서 피 냄새가 진동을 해.”
“네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자네의 육신이 내 품에 있고. 자네의 혼이 어디 있는지도 아는데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유위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자문원의 시신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곽다순이 말했다. 그 뻔뻔한 말에 차갑고 냉정한 질책이 따랐다.
“그 살육의 증거를 감히 내 몸이라 하지 말게. 그건 내가 아니야.”
“서운한 소릴 다하네. 이 몸은 네 것이야. 개웅산 아래 잠들었던 그 몸이지. 선인(仙人)께서 그 절벽을 갈라 꺼내주어 내 품에 있게 된 것이지. 그분이 누군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오해 말게. 네 몸이 그대로인 건 천인살 때문에 썩지 않은 것뿐이야. 그때부터 늘 나와 함께 있었어. 네가 이 몸에서 눈 뜰 날을 기다리며 말이야.”
차근차근 알려주는 목소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다정다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기만과 거짓으로 가득했다.
“이번에도 너는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비탄이 섞인 나지막한 말은 매서운 질책보다 더 차가웠다.
끼어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지를 유위람이 고민하는 사이 현서가 움직였다. 살짝 움직였으나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곽다순의 얼굴에 상처를 내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현서가 노린 것은 곽다순이 아니라 품에 있는 시신이었다. 곽다순이 그것을 알아 막아선 것이었다.
그제야 보게 된 일곱 번째 현서의 얼굴은 유위람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 위엔 곽다순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썩지 않은 게 천인살 때문이라고? 가증스러운 거짓말을. 천인살은 실패했으니 진짜 몸이 있었다고 한들 십일 년 전에 벌써 썩어 없어져 버렸겠지. 어린아이들의 살을 저며 만든 피 비린내와 원한이 자욱한 그 역겨운 인형을 자문원의 몸이라고 하다니!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리를!”
이렇게 격렬한 거부와 분노를 드러내는 현서를 유위람은 처음 보았다. 현서의 손 위로 푸른 불꽃이 선명하게 일렁였다. 영우곽가의 밀실에서 인형을 태웠던 그 불꽃이었다.
비무회를 보고 잠들었던 그날, 현서를 깨운 것은 사문의 개파 시조인 지선이었다. 현서를 품에 안고 어둑한 밀실의 복도를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시간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렇게 지선은 현서에게 과거에 그 밀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현서는 미쳐 버린 곽다순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반복해서 혼이 깃들지 못한 인형을 부수고는 어린아이의 피부를 저며 붙이는 것을 보았다.
누가 자신을 데리고 갔는지,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잊어버렸으나 그 공포와 혐오만은 현서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박혔다. 때문에 현서는 피를 토해도 그 인형을 태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밤, 밀실의 일을 똑바르게 기억하지 못했지만 저 인형을 보는 순간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피부를 벗겨 낸 뒤 기워 만든, 자문원의 모습을 본 딴 육신이 또 있을 줄이야. 현서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이것은 자문원의 분노가 아닌 호현서의 분노다. 현서는 자신이 전생을 자각한 이후로 줄곧 곽다순을 싫어했음을 깨달았다.
❖ ❖ ❖
일신의 무력은 강하지 않지만 술법에 관해선 누구보다 뛰어난 삼중이다. 사영이 자신을 완전히 끌고 안개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그 손을 뿌리치는 데 성공했다. 잠시간의 시간 벌이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다.
허나 미혼진은 마음에 틈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이든 보게 되어 있었다. 외따로이 떨어진 삼중은 발밑을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물안개를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볼 환상은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삼중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주변의 모든 풍경이 변해 있었다. 모든 것이 썩어 들어가는 냄새가 지독했다. 오랜 굶주림에 두려워할 기력조차 없어 죽는 날만 기다리던 그때였다. 어린 삼중이 부모의 손가락을 핥고 있었다.
부모님의 얼굴을 정확히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여긴 삼중은 이렇게나마 다시 볼 수 있는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삼중의 가족은 사술의 효험을 높인다는 이유로 아사 직전의 상태로 만드는 중인 제물이었다. 먹을 수 있는 건 하루 한 번 토굴 아래로 밀려오는 더러운 강물이 전부였다.
물안개는 그들의 감옥에 물이 차오른다는 알림이었다. 차갑고 지저분한 물은 체온을 뺏어가고 먹을수록 몸을 아프게 했지만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중은 다섯 살도 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자식이니 그냥 잡아먹어도 되련만 부부는 나오지도 않는 피를 억지로 짜내어 삼중에게 먹였다. 굶주림과 공포에 지쳐 표정조차 사라졌고 말은커녕 울 기력도 없었으나 그들은 아들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기억은 금방 사라진다.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부모님의 얼굴은 희미해도 그 애정만은 잊은 적이 없었다. 다정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 환영은 삼중을 미치게 하지도 못했고, 환영의 사람들이 돌변해 삼중을 공격하지도 않았으나 계속 이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니 위험했다. 똑같은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토굴에 강물이 차오르고 덜덜 떨면서도 물을 마시려고 입을 벌리는.
저 고통이 어떻게 더 나은 영혼을 만드는 제물이 된다는 것인가. 삼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을 뽑았다. 사제인 감윤과 비견할 수 없다 해도 그 역시 태호문도다. 허공에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 같았던 검은 챙 하는 소리를 내며 공격을 막아 냈다.
사영의 공격을 맞받아 칠 수는 없어도 막을 수는 있었던 삼중이 뒤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나는 사술이 정말 싫어.”
그에 사영이 대꾸했다.
“나도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필요한 걸 어쩌겠어요?”
삼중의 품에 있는 팔만구도, 진에 대한 삼중의 지식도 모두 필요한지라 사영이 삼중의 다리를 노리며 말했다.
“순순히 말해 줘도 의심스러우니까 팔, 다리 하나씩 자르고 시작하죠. 적당한 고통은 진실을 말하는 데 도움이 되니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고문은 자백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니까. 하지만 자신은 그 오랜 굶주림에도 끝까지 사람이었던 이들의 아들이다. 팔, 다리 하나론 어림도 없지.
“당신의 고문이 대단할지, 사술에 대한 내 증오가 더 클지 한 번 대보든가.”
삼중이 검을 고쳐 쥐며 대답했다. 팔만구에 대한 대책은 세워두었고 여기서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입에서 제대로 된 답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
“아이고, 사형,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릴 하세요. 사제가 사문의 어른들께 맞아 죽는 꼴을 기어이 보시려고요.”
잠시 시간을 끌었던 삼중의 도박이 성공했다. 감윤이 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능청스러운 말과 달리 사영을 보는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사형은 저기서 과자나 좀 드시고 계세요. 사제는 저 미친놈을 좀 두들겨야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의 검이 부딪혔다.
태호문은 오랜 전통을 가진 도가 문파이다. 검각처럼 사납고 매서운 검은 아니나 중후한 검과 청정한 심법이 뛰어난 조화를 이루는 태을현원검(太乙玄元劍)은 태호문이 자랑하는 검법이었다.
감윤은 태호문의 정수를 뛰어나게 체득한 검수였다. 태호문의 어른들이 삼중을 예뻐하는 것처럼 감윤을 아꼈다. 물론 표현 방식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태호문의 무공은 단전에 쌓이는 내공이 특히 정순해 마공에 가까운 화오궁의 검과는 상극이었다. 사영이 타인의 내공을 갈취해 내력을 높였기에 더욱 그랬다. 사영이 가진 내공은 감윤을 훨씬 능가했으나 완벽히 흡수하지 못했고, 술법이 강제로 끊어진 반동으로 내력을 사용할 때마다 죽은피를 뱉어야 했다. 거기에 서로 상극이니 감윤의 내력이 밀린다 해도 일방적으로 불리한 싸움은 아니었다.
그간 화오궁과 사영 때문에 울분이 쌓여 있던 감윤이 히죽히죽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감윤은 삼 사형이 어린 시절을 보았을 것을 뻔히 알아 과자를 먹으라고 권했지만 삼중은 들어주지 않았다. 저 둘의 싸움에 끼어들 순 없지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삼중은 검을 휘둘렀다.
백충에게 조종당하는 이들은 시체라 미혼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미혼진의 환각에 빠져 버둥대자 시체들이 무방비한 저들을 가차 없이 공격했다.
유위람마저 현서의 환상에 휘말렸으나 천만다행으로 주경과 이약약이 남아 있었다. 유위람처럼 양심이 희박하진 않으나 주경과 이약약은 미혼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약약은 젊은 시절의 경험으로 요령이 생긴 탓이고 주경은 처음부터 미혼진 따위는 상관없는 것처럼 굴었다.
패천검이 제 뺨을 치는 것을 보고 이약약은 혀를 차며 급히 현서를 찾았다. 현서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이라 미혼진의 영향을 받은 건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몸을 돌리고 있어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쓰러진 것은 아니니 우선 다행이라 여겼다.
“호 공자와 패천검 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회천검은 저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거리상 주경이 현서 쪽에 더 가까이 있으니 타당한 말이었다. 이약약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두말 않고 아들부터 찾았다.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현진의 모습이 보였다.
“집에 데려가서 수련을 다시 시켜야겠어.”
“화운검 정도면 나이에 비해 잘하는 것이니 너무 야단치지 마십시오.”
“주 대협의 말이 독특하군요. 패천검 또래인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 봅니다?”
이약약의 말에 주경이 아차, 하는 얼굴을 하곤 말을 돌렸다.
“적들의 지원이 오는 것 같으니 서둘러야 합니다.”
미혼진에 사람들이 휩쓸리자 흑하 방향으로 술렁이는 기척이 늘어나는 것을 이약약도 알았다. 주경을 털어보는 건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니 먼저 환상의 적과 싸우는 아들의 등을 퍽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충격에 고꾸라졌던 현진이 정신을 차리곤 벌떡 일어났다. 모친의 매서운 눈길에 현진은 아프다는 소리도 못한 채 빠릿빠릿하게 일어나 상황 판단을 하곤 검을 다 잡았다. 모친의 눈을 보니 석청담으로 끌려간 후의 미래가 눈에 선했다.
“진아. 잘 보렴. 이게 은파참(銀波斬)이다.”
여러 명의 적에서 둘러싸인 사람을 구하기 위해 가볍게 도약한 이약약이 적들 사이에 거꾸로 떨어지며 검으로 바닥에 찍었다. 검이 바닥에 꽂히자 기파가 퍼져 나가며 지면을 흔들었다. 동시에 검을 지지대로 삼아 그대로 몸을 팽이처럼 휘돌려 발로 적들을 후려쳤다. 이약약의 각법에 적들이 나뒹굴었다.
이약약 역시 어머니라 이 와중에도 현진의 앞에서 석청담의 절기 중 하나인 은파참을 응용해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법을 시범 보이며 교육에 힘썼다. 현진은 어머님이 저걸 완벽히 체득할 때까지 석청담에 가둬둔다는 소릴 하지 않길 바랐다.
“감사합니다, 회천검.”
도움을 받은 검각의 제자가 이약약에게 감사를 표했다.
“인사는 끝나고 해도 늦지 않네.”
긴 소맷자락을 휘둘려 눈앞에 있는 시체의 목을 감아 부러뜨리며 이약약이 가볍게 대꾸했다.
잠시 후, 불쾌한 표정이 가득한 곽나난과 소화리도 싸움에 합류했다.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나 유쾌한 환각은 아닌 게 자명했다. 이르게 빠져나온 것을 칭찬해 줄 만하지만 여전히 미혼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어디서 이렇게 꾸역꾸역 밀려오는 거지.”
많이 죽였는데도 적들의 수는 여전했다. 이곳이 결전지가 될 것은 알았지만 예상보다 나타나는 적의 수가 더 많았다. 이약약과 주경이 느낀 기척이 당도해 불쑥불쑥 튀어나온 탓이다. 가면들 쓴 이들은 누가 보아도 의도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미혼진이 발동되면 후발대는 영향을 받지 않으니 이쯤에 합류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겠지.
“거 참, 귀살대(鬼殺隊)를 다시 다 보네. 하도 보이지 않아 이젠 망한 줄 알았더니.”
이약약이 가면을 쓴 이들의 정체를 바로 맞췄다. 젊은 시절에 귀살대와 몇 번 싸워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자문원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는 백양교가 압도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파나 흑도의 무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귀살대는 상대적으로 백양교의 영향력이 약했던 기주와 연주 일대에서 악명을 뿌리던 무리로, 액수가 맞으면 뭐든 해준다고 하는 강호의 쓰레기 단체다.
귀살대는 문파가 아니라 점조직 조합이라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쓴다. 저 가면 아래 창창한 정파의 후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귀살대가 뭔진 몰라도 저런 계약은 돈 많이 줘야 하는 거 아냐? 야, 곽 숙부가 네가 모르는 재산이 많은 것 같은데?”
소화리가 검을 든 적의 품으로 파고들어 팔을 부러뜨리며 나난에게 말했다.
“그러게, 천의맹주 하던 시절에 빼돌린 것들이 제법 쏠쏠했나 봐. 숙부님과 재산 분배에 관한 대화를 좀 해야겠어.”
집안을 아울러야 하는 가주의 고난은 남다른 법이다. 숙부를 잡아 재산 분배를 의논해야겠다며 비뚤어진 웃음을 지으며 곽나난이 사납게 도를 휘둘렀다. 싸우는 와중에 패천검과 현서가 있는 곳을 보았으나 열심히 분투하는 주경만 보일 뿐 현서와 유위람의 근처에는 안개가 일렁이며 피어올라 잘 보이지 않았다.
저 안개는 어딜 봐도 사술이라. 곽다순이 안고 있던 검선의 시신을 떠올린 모두의 마음이 좋지 않았으나 어찌 되었든 지금은 유위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손 위에서 흔들리는 푸른 불꽃이 아름다웠다. 내력에 비해 몸을 쓰는 것은 여전히 서툴렀다. 현서 역시 자신의 약점을 알아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거리를 가늠하며 기회를 노렸다. 그에 유위람이 끼어들었다.
유위람은 현서의 말을 믿었다. 현서가 아니라고 하면 눈앞의 저것은 검선의 시신이 아니다. 더욱이 그 끔찍한 방식이라니. 그것만큼 검선을 모독하는 것이 또 있을까.
검선은 강호에 나온 이후로 늘 약자들을 도왔고, 타인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목숨까지도 걸었던 사람이었다. 어린아이의 살을 뜯어 인형을 만들고는 그것을 검선이라 칭하다니. 그런 모욕이 또 어디 있을까. 조금 전 곽다순이 자신을 실망시켰다고 하던 현서의 차가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유위람은 망설임 없이 곽다순을 향해 쇄도했다. 현서가 하고 싶다면 하게 해주면 된다. 더군다나 검선의 일이다. 유위람 역시 분노할 이유가 차고 넘쳤다.
인형을 품에 안고 있느라 검을 빼 들지 않은 곽다순이 손을 휘저어 유위람을 밀어냈다. 검에 서린 강기와 손에 감긴 장력이 부딪혀 쾅 하는 굉음과 바람을 일으켰다. 유위람은 곁눈으로 현서의 안위를 확인하곤 곧바로 검을 찔러 넣었다.
곽다순은 어지간히 손에서 떼기 싫은지 인형을 안은 채로 물러섰다. 하지만 유위람의 공격은 품에 인형을 안은 채 피하기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에 얘기하자꾸나. 차근차근 설명하면 문원은 틀림없이 내 뜻을 알아줄 테니.”
결국 곽다순은 소중히 안고 있던 인형을 내려놓고 도를 들었다. 일전에 느꼈던 공기를 짓누르는 따끔한 살기가 곽다순의 주변에서 넘실거렸다.
[호 공자, 최대한 물러나세요.]
곽다순이 자문원의 모양을 흉내 낸 인형을 안고 있었을 때부터 현서의 머리와 마음에선 폭풍이 불었다. 분노, 실망, 슬픔 등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미혼진이라는 말은 현서의 귀에 들리지 않았고 미혼진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눈물을 쏟게 한 깊은 슬픔이 물러나자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날선 분노였다.
때문에 유위람을 이제야 제대로 보았다. 뺨이 발갛게 부었는데 누가 보아도 손자국이라 현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곽다순과 대치 중인 이때에 말을 걸 순 없어 현서는 묻지 않고 물러섰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안개가 자욱해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술인가.’
―술법이다. 안개 외에 다른 건 없으니 괜찮다.
사술이 아니라는 말에 현서가 안심하고 안개 쪽으로 물러나자 거리낌이 없어진 유위람이 흉포하게 웃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도 유위람의 발끝에서부터 옷자락이 펄럭였다. 자문원의 사후, 곽다순이 거리낌 없이 가진 재능을 꽃피웠다 해도 유위람 역시 만화산 삼노사 전부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몸이다.
아홉 살, 검선과 스승님들을 같은 저울에 올릴 줄 알았던 그 짐승 같은 감이 이번에도 유위람에게 알려주었다.
“질 것 같진 않네.”
검을 휘두르는 유위람은 곽다순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기로 흉흉했다. 그것은 곽다순 또한 마찬가지였다.
검과 도가 부딪히자 서로의 내력이 충돌해 불꽃이 튀었다. 사나운 풍압에 옷자락의 끝이 단박에 너덜너덜해졌다. 순식간에 열 합을 맞받아친 두 사람은 거리를 벌려 물러섰다. 서로 단번에 죽이지 못할 것을 알아 틈을 보려는 것이다.
현서가 눈에 안력을 돋우지 않았다면 첫 격돌 외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터였다. 제법 떨어져 있었음에도 무거운 공기가 현서를 괴롭혔다. 내력을 두르지 않았다면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였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내력은 여전히 현서의 몸 안에 충만했다. 오립송 덕이었다.
―조금 더 물러나.
옥이 안개 쪽으로 더 붙으라고 말했다. 미혼진의 일부처럼 꾸며 사술처럼 보이게 했으나 옥은 저 안개가 사술이 아님을 알아 현서를 물러나게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 안개 때문에 옥은 주경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현서는 조심스럽게 물러났지만 눈은 여전히 곽다순의 너머에 있는 인형에 꽂혀 있었다.
―괜찮으냐?
옥은 자문원의 인형을 보았을 때 대노해 이성을 잃을 뻔하였으나 현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현서가 어찌 알았느냐에 대한 물음은 주경의 배후를 짐작하는 바, 나중으로 미루었다.
옥은 스스로 할 수 있다면 당장 저 인형을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현서 역시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았다.
죽은 자문원을 욕보이는 것이다. 인형에게 붙은 피와 원한을 보아서도 반드시 없애야 하는 물건이었다. 저 인형이 움직인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일전에 했던 것처럼 내력으로 태워버릴 수 있으나 지금 현서의 실력으로는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더불어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비등해 보이는 둘의 싸움에 섣불리 움직여 유위람의 정신을 흩트리는 변수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있을 것이다.
현서와 옥은 인형을 없애는 방법에 골몰하느라, 나머지는 각자의 싸움을 이어가느라 정작 흑하에 왔던 목적인 월영사가 방치되어 있음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곽다순의 도가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사방에서 치고 들어왔다. 유위람은 전부 받아쳤으나 검날이 쩡 하고 울릴 때마다 손아귀가 저릿했다. 손바닥이 터져 나가지 않았으나 손가락 사이의 피부가 찢어져 피가 났다. 유위람이 혀를 차며 옷자락에 피를 아무렇게나 닦아 냈다. 피 때문에 검 자루를 잡은 손이 미끄러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내가 이렇게 다쳤는데 곽 숙부가 멀쩡하면 안 되지. 유위람의 걸음이 바뀌었다. 유위람이 주로 쓰는 검각의 절기인 영뢰팔합검이 아닌 사성검(四猩劍)을 쓰기 위함이었다.
사성검은 원래 네 가지 성취라는 의미로 검각에 입문하는 제자들이 다른 검을 배우기 전에 반드시 배우는 기초 검술이었다. 그 검술을 삼노사가 꾸준히 발전시켜 이름의 뜻조차 네 가지의 무자비함으로 바꾸어 유위람에게 전수했다.
만화산 밖에서 이 검술을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보법 자체가 신묘해 이형환위(以形換位)를 쓰듯 순식간에 유위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사성검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초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보법이 중요했다.
흐릿해진 신형이 곽다순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곽다순이 갈량지를 사용해 미끄러지듯 피했으나 적절하지 못했다. 왼쪽 등부터 사선으로 피가 터졌다. 뼈에 닿을 정도로 깊이 들어가 큰 부상을 입힐 줄 알았는데. 유위람이 아쉬움에 혀를 찼다.
부상을 입은 채로 빙글 돈 곽다순이 도신(刀身)으로 유위람을 후리며 거리를 벌렸다. 유위람의 상처보다 곽다순의 상처가 더 컸으나 그래도 생사를 가를 만한 상처는 아니었다. 거리를 벌린 곽다순이 급히 점혈해 피를 멎게 했다.
유위람이 발을 굴렀다. 진각을 밟아 위력을 더하려 함이다. 곽다순이 급히 막았으나 제대로 막지 못해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유위람과 곽다순의 싸움이 격해져 근방의 지형들이 마구잡이로 부서졌다. 바위가 자갈이 되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나무가 갈기갈기 찢기어 형체를 잃어버렸다.
유위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릿한 팔을 털었다. 심장과 다리, 목을 노린 유위람의 사성검은 주효했는데도 곽다순의 심장과 다리, 목은 상처만 입었을 뿐 잘려나가지 않았다.
검각의 검이 사납고 매섭다면 영우곽가의 도는 변화무쌍하면서도 적확하다. 나난과 자주 겨뤄보았기에 영우곽가의 도에 익숙한 유위람은 어딘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곽다순도 마찬가지였다.
검각의 검과 영우곽가의 도가 추구하는 극의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둘에게서는 같은 결이 느껴졌다. 상승무공이 결국 하나의 강함으로 이어지는 것과는 또 달랐다.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지지? 왜 그런지 알겠니?”
곽다순이 가슴팍을 지혈하며 거리를 벌렸다. 유위람이 심장을 찌르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깊은 자상을 내는 것에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다. 유위람도 너덜너덜해져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곽다순보다는 나았다.
곽다순이 천천히 도를 들어 올려 내리긋는 자세를 취했다. 검이든 도든 무기를 잡게 되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에 하나인 종(縱)베기였다.
“너와 내가 같은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그러하다. 나도 너도 산을 베고 싶어 하니 말이다. 아니 그러니?”
유위람이 퍼뜩 이해했다. 열 살의 유위람이 검선이 절벽을 베는 것을 본 것처럼 곽다순도 누군가의 기사를 보았던 것이다. 곽다순이 무엇을 하려 함인지를 깨달았다.
유위람 역시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을 따라 내력이 휘감겼다.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무공을 배우지 못한 이들도 똑똑히 본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검선의 그 압도적인 기세를.
그 옛날의 검선만큼은 아니어도 두 사람이 뿜어대는 기운 역시 대단했다.
천천히 검과 도가 위에서 아래로 그어졌다. 어린아이도 피할 수 있을 만큼의 속도였으나 사실 저것은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해봐. 질 것 같진 않으니까.”
유위람이 웃었다. 산을 베어 내는 것을 보았던 두 사람의 검과 도에서 나온 기운이 맞부딪혔다.
“아니, 저 미친놈들이! 뛰어!”
눈앞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며 주경이 크게 소리쳤다. 영문을 몰라 하던 사람들은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자 기겁을 했다. 산사태였다. 사영을 찌르기 직전이었던 감윤이 혀를 차며 물러났다.
“재수 좋은 자식.”
감윤에게 맞아 얼굴이 피범벅이 된 사영이 죽은피를 뱉으며 웃었다. 큰 소리에 이어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계단식 논처럼 층층이 쌓인 바위 사이로 흐르던 흑하 근방의 땅이 갈라지며 내려앉았다.
주경의 경고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리를 피했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은 없었으나 부상을 입은 이들은 있었다. 산을 흔드는 큰 소리와 흙먼지가 가라앉자 사람들이 본 것은 그들이 있던 자리에 새로이 생긴 절벽이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면면히 살피던 이약약은 현서와 패천검이 절벽 위쪽에 남겨졌음을 깨달았다.
“어머니.”
현진이 이약약의 손을 잡곤 한곳을 가리켰다. 급히 보니 이젠 폭포로 변해버린 흑하 물줄기를 따라 새하얀 머리 타래 같은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람인 줄 알고 놀라던 것도 잠시 그들은 그것이 물에 풀어진 월영사임을 알아보았다.
가닥가닥 풀어진 흰 실은 사람의 머리타래처럼 께름칙했다. 하지만 어딜 보아도 내용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현서가 걱정된 이약약이 서둘러 절벽을 오르려 했으나 아직도 돌들이 떨어져 내리는지라 위험해 다가갈 수 없었다. 더욱이 해가 지고 있었다. 산의 해는 금세 진다.
마음이 급해진 이약약이 돌이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절벽에 다가갔다. 그때 절벽 위에서 얼굴이 쑥 나아왔다. 주경이었다. 흙먼지로 엉망이 된 주경이 자신이 두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말하며 안심시켰다.
다시 한번 땅이 흔들리며 크게 토사와 돌들이 위험하게 흘러내렸다. 현진이 지금은 절벽을 오를 수 없다고 어머니를 말렸다. 절벽을 노려보던 이약약이 현진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서 수습을 할 테니 너는 다른 길이 있는지를 찾아보아라.”
현진이 고개를 끄덕이곤 재빨리 멀어져 갔다.
❖ ❖ ❖
―몸을 웅크리고 전에 연습했듯이 호신강기를 두르는 것처럼 몸 위로 막을 만든다고 생각해라. 서둘러.
옥의 다급한 말에 현서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내력을 두르곤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내력으로 보호하지 않았다면 고막이 터져 나갔을 굉음과 거센 압력이 밀어 닥쳤다.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어 현서는 내력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별이 가득한 어두운 밤하늘이었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전신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유위람과 다른 사람들은?’
정신을 빨리 차리기 위해 눈을 깜박이며 옥에게 말을 걸던 현서는 위화감을 느끼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왼팔에 팔찌가 없었다. 현서는 한순간에 피가 식는 기분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급히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현기증이 나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눈앞에 곽다순이 있었다.
“깼구나.”
얼굴이 피 범벅에 왼팔이 날아간 곽다순이 여전히 보드랍고 순한 얼굴을 하곤 다정하게 말했다.
“기분은 좀 어때? 아프진 않고?”
현서는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니 희미한 빛이 보였다. 어둠이 내렸는데 산속에서 곽다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안력을 돋우니 희미하게 보이는 사슬이 자신의 발을 감고 있었다. 현서는 자신이 사술에 구속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침착하게 최대한 주변을 살피려 했지만 보이는 것이 없었다. 곽다순이 사술을 펼쳐 자신을 억류했다면 하려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그러니 팔찌는 그 인형의 팔에 있겠지. 옥이 느끼고 있을 참담함이 걱정되어 현서는 애가 탔다.
‘유위람은 괜찮아.’
유위람이 죽었다면 곽다순은 그 시체를 보이는 곳에 두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유위람이 큰 부상을 입었어도 죽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죽지 않았으면 괜찮아. 괜찮아. 떨리는 주먹을 꽉 쥐며 눈을 내리깔았다.
옅은 금색을 뿜는 진은 눈을 빼앗길 정도로 화려했지만 현서는 속지 않았다. 저것은 사술이다. 성공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자신의 혼을 인형에 옮기는 진일 터. 그렇다는 건 마지막엔 인형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첫 공격을 성공하지 못해 곽다순의 경계를 샀을 테니 인형을 없애려면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현서는 내력을 확인했다. 곽다순은 현서가 내공을 쓸 수 있는 걸 알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단전이 없는 자신의 내력을 폐하는 법을 모를 테니까.
‘아픈 건 괜찮아. 참을 수 있어. 참을 수 없는 건 그런 게 아니야.’
현서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세 번을 훨씬 넘게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내 아래서 빛을 내는 이 진이 월영사 안에 숨겨두었던 것이야?”
현서의 물음에 고개를 살짝 기울인 곽다순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문원, 우리가 효장락공주의 부장품 얘길 했던 것을 기억하나?”
“그래, 부장품인 월영사에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법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퍼져 백양교가 도굴했다는 얘길 네가 해주었지.”
현서가 순순히 답하자 곽다순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기억하는구나. 맞아. 이건 효장락공주의 무덤에 있던 월영사야. 그때는 나도 너도 그런 비법 같은 건 믿지 않아 백양교의 어리석음을 탓하기만 했지.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렇겠나.”
백양교가 도굴했으나 결국 행방을 잃었다고 했던 그 월영사는 곽다순의 작은형이 빼돌린 재물들 사이에 있었다. 썩지 않은 자문원의 시체를 품에 안았을 때 곽다순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바로 그 월영사였다.
“기대와 달리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법 따윈 들어 있지 않았어. 그저 사치스럽고 대단치 않은 것들만이 있을 뿐이었지. 금과 은, 상아와 비단으로 만든 소꿉놀이 도구 따위가 들어 있었거든. 공주가 가장 좋아했던 옷들과 혼수품이 되었을 패물들과 구구절절 애틋함을 표현하는 황제의 친필 편지 따위 같은 것들. 그중 가장 쓸 만한 건 월나라 염공이 이 부인을 부를 때 썼다던 반혼향뿐이었지. 냉큼 피워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 뭐야. 나는 네가 이 부인처럼 깨운 것을 질책하면 뭐라 말할까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때를 떠올리는 곽다순이 우스운 얘기를 한 사람처럼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현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슥 하고 상체를 현서 곁에 바짝 붙이고는 다정하게 현서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내가 어리석어서 몰랐던 거지. 네가 여기 있는데. 어디서, 어떻게 혼을 불러오겠어?”
반혼향이야말로 쓸모없는 물건이었지. 근데 그것도 모르고 백화호까지 갔지 뭐야. 그래도 완전 시간 낭비는 아니었어. 곽다순이 방긋 웃었다.
“화오궁주는 재미있는 사술을 많이 알고 있더라고. 예를 들자면, 아들의 육신을 뺏기 위해 아들의 혼을 물건에 봉인하고, 껍데기만 남은 육신에 새 영혼을 집어넣는 방법 같은 것들 말이야.”
자격지심에 먹힌 자를 충동질하는 수만 가지 방법을 곽다순은 알고 있었다. 천인살의 실패로 아들의 몸을 빼앗지 못해 질투에 미쳐 가던 궁주를 부추겨 곽다순은 월영사에 진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 월영사가 현서에게 가도록 손을 썼다.
곽다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서 아래에 있던 금빛이 더더욱 진해졌다.
“문원. 자네가 보기에 이 진은 둘 중에 어느 것 같아?”
곽다순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보드랍게 물었다.
“어느 쪽이든 네가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해.”
“네가 돌아오면 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아. 가장 먼저 네게 사죄부터 해야겠지만.”
현서의 말은 나지막했으나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곽다순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굴었다.
빛이 점점 강해지자 밀려오는 수마에 현서의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약으로 재울 때처럼 강제된 졸음이었다. 삼중은 세상에 그 어떤 사술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고 단언했고 현서 역시 그에 동의했으나 이미 존재하는 혼을 빼앗는 것이라면 어떨까. 자신의 혼을 저 역겨운 인형으로 옮기는 것이나, 혹은 정신을 망가뜨릴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곽다순이 계속 모른 척하고 있으니 어쩌면 백치가 되는 쪽이 그의 구미에 더 맞을지 모를 일이다. 현서는 입 안의 여린 살을 피가 나도록 짓씹으며 잠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다리는 묶여 있으나 손과 내력은 봉해지지 않았다. 일전에 삼중이 발동된 진의 대부분은 중앙을 파괴하는 것이 가장 빠른 파훼법이라 가르쳐 주었다. 허나 이 진은 대부분에 들어가지 않는지 현서의 내력을 튕겨 냈다.
삼중이 대부분이 아닌 경우도 말해 주었는데, 머리가 멍해지자 생각이 엉클어졌다. 입 안에 피가 고이도록 씹어댔지만 몰려드는 잠은 더욱 거세기만 했다.
잠들지 않으려 애쓰던 현서의 상체가 고꾸라지는 것을 본 곽다순은 기대 어린 표정을 지으며 문원의 몸을 데려오려고 움직였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곽다순의 얼굴이 돌아갔다. 원래 현서는 그의 배를 노렸으나 억지로 밀려드는 잠 때문에 조준이 빗나갔다.
현서가 쓰는 저 내력이야말로 곽다순이 그토록 바라던 증거였다. 그날, 그 새벽, 자신의 살기를 견디기 위해 내력을 쓰는 현서를 보았을 때의 기쁨을 어디에 비견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만족과 별개로 충격으로 바닥에 떠밀린 곽다순은 얼굴을 굳히며 벌떡 일어났다. 현서에게 맞은 것 때문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현서가 완벽하게 제압되지 않은 것을 깨달아서였다.
제물이 완전히 잠들기만 하면 그때부턴 그 어떤 방법으로도 파훼할 수 없다고 했다고 화오궁주가 확언했다.
현서가 내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알아 그에 여러 조처를 취했으나 곽다순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유위람과의 싸움에서 팔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곽다순의 단전은 회복 불가의 내상을 입어 칠 할 이상의 내력을 상실했다.
화오궁주에게서 받아 낸 진은 완벽했으나 시전자가 불안정해진 것이 문제였다. 약해진 내력 탓에 제압에 실패했으니 물리력을 써야 했으나 지금은 곽다순도 진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곽다순이 깨어진 단전에서 억지로 내력을 뽑아 다시금 현서를 억누르려 했으나 현서가 더 빨랐다.
곽다순을 때려 자신의 내력이 진 밖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첫 공격과 동시에 현서는 남아 있는 모든 내력을 땅 아래로, 땅 아래로 밀어 넣었다. 수면 아래의 진동이 물 위의 파도를 만드는 것처럼.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금빛을 뿜어내던 진이 땅 아래서 올라온 공격에 사금파리처럼 갈라지며 조금씩 빛을 잃기 시작했다.
미소를 지운 곽다순이 진을 응시하자 휘청거리는 몸을 위태롭게 일으키면서도 웃고 있는 현서가 보였다. 웃을 때마다 입 안에 고여 있던 피가 줄줄 흘렀으나 현서는 개의치 않았다.
사술이든 아니든 진법의 가장 큰 약점은 변화라고 삼중이 말했다. 바른 방법으로 해제할 수 없다면 그 다음으로 효과적인 방법은 물리적인 충격이라고.
변화하는 진을 만든 신농자는 그야말로 불세출의 천재이나 그는 화오궁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화오궁의 진법 역시 물리적인 충격에 영향을 받을 거라 생각해 움직였다.
진이 깨어져 빛이 흐려지고 있으나 곽다순의 무표정한 얼굴을 못 볼 정도는 아니었다. 미소를 짓고 있지 않으면 특유의 유순함 때문에 가련한 인상이 두드러졌으나 지금은 오싹하기만 했다.
현서의 앞에 바싹 다가온 곽다순이 입을 열었다.
“개웅산에서 조금도 썩지 않은 너를 품에 안으며 확신했지. 하늘이 내 죄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그는 네가 죽어 돌이킬 수 없다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어.”
지금 자문원의 몸을 안고 있는 것처럼 멀쩡한 오른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조금 차가울 뿐, 이토록이나 생생한데 죽었다니.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까. 혼이 없으면 불러오면 될 일이지. 내 죄를 속죄하는 일이니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다는 걸 그땐 몰랐으나 그건 문제가 아니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반혼향을 찾아다니던 시기가 곽다순이 미친 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허나 그 행복은 오 년을 넘기지 못했다.
미쳤어도 곽다순은 영우곽가의 사람이었다. 자문원을 되살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사람을 부려야 한다는 걸 알아 자신이 죽인 부친과 형이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을 거리낌 없이 썼다. 저 재물들의 상당수는 문원에게 갔어야 했던 것이니 문원을 되살리는 데 쓰는 것이 당연했다.
은밀히 풀어놓은 자들이 금충의 정보를 물어 와 백화호 지부를 찾았던 그날, 곽다순은 하늘이 여전히 자신의 편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백화호 지부가 바른 답을 주었기 때문에 입막음을 한다는 이유로 피에 잠기는 것을 보았다.
화오궁의 잔악함은 곽다순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화오궁의 사술들과 금충을 사용한 반혼향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에 곽다순은 그날 처음 만난 사영에게 동맹을 제의했다. 사영의 상황을 단번에 알아보아서였다.
유위람이 권력 싸움을 잘 아는 것처럼 곽다순은 숨겨지지 않는 질투와 사람의 밑바닥을 까발리는 자격지심을 무척이나 잘 알았다. 치졸한 질시와 자격지심을 가진 부친이 권력까지 가지고 있으니 사영의 처지가 어떠한지 곽다순의 눈에는 손금을 보는 것처럼 빤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곽다순의 마음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백화호 사건이 일어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자문원의 시체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썩는 것이 아니라 모래가 바람에 날려가듯 그렇게 바스러져 사라져 갔다. 곽다순은 이미 미쳐 있었기 때문에 다시 미칠 수도 없었다.
얼마 후, 사영이 들뜬 목소리로 화오궁주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사영이 말하더군, 부친의 천인살이 실패해 그 반동을 받았다고. 그때의 나는 독인도 천인살도 몰랐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있었어. 천인살로 죽였다고 하는 천 명의 사람 중에 검선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내가 모르겠나! 듣는 순간 알 수 있었지. 하늘은 나를 벌할 뿐이지 버리지 않았음을!”
곽다순이 온몸을 떨었다. 죄책감에 우는 것 같기도 했고, 넘치는 희열에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자문원이 천의맹을 떠나기 전, 곽다순은 부친과 형이 문원에게 독을 쓸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을 막지도, 문원에게 말하지도 못했다.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심약함과 우유부단함이 곽다순을 구성하는 대부분이라 자문원이 죽기 전까지의 평생은 대체로 그러했다.
권력욕이 강한 부친과 인정 욕구가 강한 작은형, 적당한 실리주의자인 큰형 사이에서 가장 좋은 선택지가 큰형임을 알았음에도 곽다순은 머뭇거렸다. 결국 큰형은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었다. 죄책감에 나난을 보호하면서 그렇다고 완전한 후견인을 자처하지도 못했다. 작은형과 대립할 강단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친은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둘째 아들이 정식 후계자가 되면 자신이 위협받을 것임을 알았다. 그에 자질이 뛰어나다는 핑계로 곽다순을 놓지 않았다. 작은형의 매서운 견제를 받으며 곽나난을 어설피 돌보고, 부친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는 곽다순이 그나마 숨을 쉴 때는 강호를 떠돌 때뿐이었다.
그렇게 자문원을 만났다. 쭉 스승님과 산에서 살았기에 곽다순이 첫 또래 친구라 했다. 그것은 곽다순도 마찬가지였다. 영우곽가는 번성했으나 곽다순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우유부단함을 견디지 못했다. 하지만 자문원은 달랐다. 곽다순의 나약함도 비겁함도 문제 삼지 않으며 곁에 있어주었다.
자문원이 곽다순처럼 모든 일에 흐리멍덩하고 어물거려 곁에 남은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악의 어린 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문원은 자신이 옳다고 결정한 일들을 해냈다. 그저 경외할 수밖에 없는 실력만이 아니라 그 내면도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자문원이 다정한 사람이어서 곁에 있어주는 것을 곽다순은 너무도 잘 알았다. 모든 것이 자신과 다르면서 눈이 부시게 빛나는 자문원에게 속절없이 빠져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곽다순은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고 도망쳤기에 자문원을 향해 쏟아지는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선택, 그것은 언제나 곽다순을 물러나게 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곽다순은 가족과 자문원 중 어느 쪽도 고르지 못해 가족을 막지도, 자문원에게 독을 조심하라는 말을 하지도 못한 채 그를 보내야 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선택하지 않는 것 또한 결국 선택임을 그때의 곽다순은 몰랐다.
“바로 알 수 있었어. 알았다고! 그 천 명 중 누가 살아났는지 찾을 필요도 없었지. 네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을! 나는 알았어! 알았다고! 너를 발견했을 때 나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어. 화오궁주가 피를 토했을 때 너는 갓난아기가 아니었으니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 잘 알고말고! 그저 환생했기에 천인살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자문원이 깨어났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걸 어째서 모를 수가 있겠나. 아아.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얼마나.”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도 황홀함으로 가득한 곽다순의 외침이 어둠을 갈랐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상관없었어. 결국 이뤄질 것을 알았으니까. 네 몸도, 네 영혼도 다 찾았으니 나는 좀 더 기다릴 수 있었어. 헌데 화오궁주가 올해를 버티지 못한다고 하더군. 마침 네가 서녕을 벗어나기도 했고, 동맹에 대한 선의의 결과가 변변찮았지만 이해해.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야.”
기괴하게 들떠 있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웃음도 기쁨도 모두 지운 곽다순이 물었다.
“왜 자꾸만 벗어나려고 하지? 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해? 이게 너의 답인가? 어째서?”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은 위협적이기보다는 초라해 보였다. 현서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말해 보았자 곽다순은 모를 것이다. 미친 자의 맹목이란 벽에 말을 거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들어먹지 않을 것을 알지만 현서는 말하기로 했다.
곽다순에 대한 현서의 거부감와 달리 이것은 자문원의 너그러움이라. 현서가 입가의 피를 닦은 뒤 천천히 말했다.
“나를 어찌 찾았는지는 모르나 천인살이 실패했을 때 내가 갓난아기가 아니라는 것 하나로 자문원의 혼이 깨어났음을 알아차릴 정도로 영민한 네가 이것에는 어찌 이리 아둔하게 구는가? 내 영혼이 저 인형, 아니, 진짜 자문원의 몸에 들어간다고 해도 나는 자문원이 되지 못해. 몸이 바뀐 호현서가 될 뿐이지. 맞아. 나는 자문원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그렇다 해도 나는 자문원이 아니야. 자문원의 삶은 이미 끝이 났으니까. 나는 태어나기를 호현서로 태어났고, 호현서로 스무 해를 살았어. 앞으로의 삶도 쭉 호현서일 테지. 나는 자문원이 아니라 전생이 자문원인 호현서야. 이 사실을 모른 척하지 말게.”
자문원의 기억을 가지고 자문원의 말투로 말해도 결국 이 말을 하는 사람은 호현서다. 전생에 대한 담담한 긍정과 현생에 대한 확고한 인정을 들은 곽다순의 얼굴이 시체처럼 딱딱해지더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거짓말! 자네는 그저 내게 화가 너무 많이 났을 뿐이야. 내가 비겁하고 무능해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내가,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천만 번을 빌고 또 빌 테니 제발. 응? 문원.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었지 않아? 마지막으로 이것 한 번만 들어주면 안 될까? 응? 제발. 문원, 내가 이렇게 빌겠네. 제발. 제발.”
현서의 발치에서 곽다순이 거듭 애원하며 빌었다. 현서가 눈을 꾹 감았다. 이 아픔도, 이 슬픔도 전부 자문원의 것이라 선을 그어도 현서는 마음이 울렁이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무거워도 저 말을 거부하는 것도, 들어주는 것도 자신의 일은 아니었다. 마음이 먹먹한 것과 달리 현서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내가 백 번, 천 번 용서를 한들 그게 자문원의 용서가 될 수는 없어요. 죽은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니까요. 당신의 후회는 당신의 것일 뿐. 자문원에게는 이제 그 무엇도 닿지 못합니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자문원의 슬픔과 별개로 호현서는 곽다순이 싫었다. 자문원과 호현서는 같은 영혼이나 같은 마음을 가지지는 않는다. 현서의 거듭된 싸늘한 거절에 곽다순의 눈이 점점 붉어졌다. 펑펑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이 아니라 살기가 어린 것이다.
하지만 현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망칠 힘이 없는 것과 별개로 곽다순이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을 알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현서의 발끝을 잡은 곽다순의 오른손이 움찔거렸으나 그 이상은 힘주지 못했다.
현서를 죽인 뒤 다시 태어난 혼을 찾아낸다고 쳐도 그 사람은 자문원을 전생으로 가진 이가 아니라 호현서를 전생으로 가질 이라서 그렇다.
곽다순에게 자문원의 기억이 없는 혼은 의미가 없다. 월영사의 안에 화오궁주를 구슬려 얻은 진을 숨겨둔 것과는 별개로, 현서가 곽다순과의 얘기를 기억하는지를 떠보기 위해 굳이 월영사를 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월영사만으로는 확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서 일행은 월영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유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그에 곽다순이 직접 행차를 했다.
그 살기는 진짜였다. 현서가 내력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곽다순은 현서가 자문원과 같은 내력을 쓰는 것을 알아보았기에 순순히 물러났다.
영우를 떠났을 때 갑자기 나타나 자문원의 환영을 보여준 것도 그 연장이었다. 동굴에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내력을 쓰는 현서를 보며 얼마나 만족스럽게 웃었던가. 곽다순은 집요하게 현서가 자문원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했다.
자문원의 환생이라며 현서의 혼을 탐했지만 사실 매우 또렷하게 자문원과 호현서를 잘라 구분한 것은 정작 곽다순 자신이었다. 현서의 혼이 자문원의 몸에 들어가기만 하면 현서가 사라지고 자문원이 될 거라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호현서는 완벽한 자문원이라 하지 않았다. 저런 모순을 쭉 모른 척할 만큼 자문원만이 소중했던 것이다.
가련한 사내이나 불쌍하지는 않았다.
자문원의 시신도. 화오궁의 일도. 신농자의 일도. 모두 각각 떨어져 끝날 일을 기어이 곽다순이 제 욕심으로 엮어 냈다. 이 모든 일을 억지로 이어붙이기 위해 흘려야 했던 피가 끔찍이도 많았다.
하지만 곽다순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실패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자문원의 진짜 몸이 남아 있다고 해도 말이다.
자문원이 죽은 다음 해에 호현서가 태어났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은 곽다순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멀쩡한 척 굴었지만 멀쩡할 수 없는 몸이라 식은땀을 흘리는 창백한 피부가 고스란히 보였다.
“내가 무엇을 해도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럼 같이 죽자.”
곽다순을 둘러싼 새빨간 광기가 날름거렸다.
“제가 저런 말까지 참아야 합니까? 더는 못 참겠습니다.”
어둠이 깔린 현서의 등 뒤에서 스윽 하고 손이 튀어나와 현서를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곽다순을 발로 걷어찼다. 불시에 당한 습격이라 무릎 꿇고 있던 곽다순이 그대로 땅에 처박히며 밀려났다.
곧고 단단한 손이 조심스럽게 현서의 왼팔을 들어 팔찌를 끼워주곤 손을 꼭 잡아주었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감각에 현서가 급히 물었다.
‘괜찮아?’
―그래. 괜찮다. 다 괜찮으니 걱정할 것 아무것도 없다.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해 주는 옥의 목소리에 무리해 버티고 있던 몸에 힘이 빠졌다. 현서가 휘청거리자 큰 손이 익숙하게 안아 올렸다. 어둠속에서 이를 깨물며 억지로 참아대던 유위람이었다.
기습을 당했으나 금세 반격하려던 곽다순을 주경이 제압했다. 주경이 흑하를 타고 전부 흘러간 줄 알았던 월영사로 솜씨 좋게 곽다순의 재갈을 물린 뒤 무릎을 꿇렸다. 유위람에게 당해 이미 멀쩡하지 않은 몸을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던 터라 저항은 미약했다.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으나 그럼에도 곽다순의 눈은 여전히 형형했다. 현서는 곽다순을 보지도 않은 채 옥의 안부를 묻고 유위람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 고집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유위람! 얼굴, 얼굴이. 다치지 않았다면서요. 이를 어째.”
자연스럽게 유위람의 목에 팔을 감으려던 현서가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뺨이 부은 것은 알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 참혹했다. 유위람이 있는 힘을 다해 스스로의 뺨을 때렸고, 흙바닥에 긁혔기 때문이었다. 얼굴은 곽다순과의 싸움에서 생긴 것보다 뺨을 때려 낸 상처가 더 심했지만 현서는 분간할 수 없었다.
아플까 봐 뺨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현서에게 지금 호 공자의 모습은 보고 하는 말이냐고 유위람이 한 소리 하려는 순간 주경이 끼어들었다.
“나중에 패천검을 벗겨놓고 안위를 확인하든지 하고, 지금은 여기 좀 보지?”
주경은 떫은 감과 쓰디쓴 소태를 한입에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현서는 민망함에 저도 모르게 땅을 바라보았다.
곽다순과의 격돌에서 유위람은 공언한 대로 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승리를 확신했으나 위치가 나빴다. 유위람이 곽다순의 일격을 흘려 낸 뒤 공격을 하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었으나 그렇게 되면 일행들이 위험해진다. 주경이 흩뿌려 놓은 안개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경이 급히 전음을 보내 경고했다. 때문에 유위람은 곽다순이 온 힘을 다한 공격을 온전히 받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유위람은 이를 꽉 깨물었다. 목을 비롯해 팔다리가 날아가게 할 수 없으니 과다 출혈을 동반하는 부상 정도는 감내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주경의 조그만 도움이 있어 유위람은 곽다순의 도강을 받아 내면서 그의 팔까지 자를 수 있었다. 미세한 도움이라 해도 원래 종이 반 장 정도의 실력 차이로도 생사가 갈리는 것이 강호의 싸움이었다.
허나 유위람이라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현서는 모르지만 유위람은 그 직후 내력이 진탕이 되어 잠시 정신을 잃었다. 현서는 외상만을 살폈으나 지금 유위람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팔이 날아가고 내력의 칠 할 이상을 잃은 곽다순을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유위람은 자신이 격돌한 지점에서 삼 장(약 9m)을 날아가 처박힌 상태였다는 걸 알았다.
급히 현서를 찾아 움직이는 유위람의 눈에 주경이 들어왔다. 주경이 끔찍한 벌레를 억지로 만지는 얼굴로 인형의 목덜미를 잡아 끌고 가는 중이었다.
그 팔에 팔찌가 있었다. 유위람은 주저 없이 인형의 팔을 뽑아 팔찌를 소중하게 챙긴 뒤 인형의 목을 날려버렸다. 현서가 했듯이 내력으로 태워버리고 싶었으나 내상을 입은 지금은 내력을 아껴야 했다.
주경이 인형은 부서졌으나 술법이 시작되었으니 현서의 의식부터 살펴야 한다고 했다. 주경이 하겠다는 것을 말리곤 직접 전음을 써 현서를 불렀다.
전음을 쓰는 그 작디작은 내력의 움직임에도 진탕이 된 단전이 고통을 호소했으나 유위람은 거듭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술법이 시작되어 의식을 빼앗기던 현서는 그렇게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짤막한 상황을 들은 현서는 유위람에게 너무도 어려운 부탁을 했다. 하지만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기척을 숨기고 어둠 속에 녹아들어 현서의 지척에 있었다. 곽다순 역시 몸도 정신도 정상이 아니라 유위람과 주경이 지근거리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위람은 곽다순과 현서의 대화를 머리에 새기듯 들었다. 현서가 자문원의 환생임을 인정하는 것에 크게 놀랐으나 그 후에 따라온 분노가 더 컸다. 현서가 저택에서 찬찬히 고백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 저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할 때가 왔다. 같이 죽겠다니. 현서를 안아 올려야 하지 않았다면 남은 오른손도 잘라버렸을 터였다.
유위람의 품에 안긴 현서를 보는 곽다순의 눈이 형언할 수 없는 질투로 가득 찼다. 누가 보아도 현서와 유위람이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곽다순의 질투는 현서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은 자문원과 저럴 기회가 영원히 사라졌음을 알아서였다.
그렇다. 질투였다. 곽다순이 평생을 경계했던 질투가 순식간에 그를 점령하고 함락시켰다. 절망, 질투, 분노, 후회. 온갖 감정이 곽다순을 와드득 씹어댔다.
주경이 묶어놓은 곽다순을 흘깃 보며 물었다.
“먼저 호 공자에게 물어볼게. 우리 중에 호 공자가 저치의 가장 큰 피해자니 그 처우의 결정권을 우선해야지. 저자를 여기서 죽일까?”
주경의 물음에 옥이 첨언했다.
―사문의 개파 시조가 지선이 되었다는 얘기를 기억하느냐? 주경은 그 지선이 보낸 사람이다. 그가 자문원의 시신을 곽다순에게 넘겼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지기 위해 주경을 보냈다고 하더구나. 선인은 인간사에 직접 끼어들지 못하니 말이다.
오립송을 보냈다고 하는 이가 누군지 빤해졌다. 그래서 주경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어설프게 말했던 것이다. 옥과 현서는 ‘나쁜’을 얼버무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주경은 ‘나쁜’과 ‘사람’ 둘 다에 말을 얼버무렸던 것이었다.
유위람이 현서와 곽다순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 주경은 기막을 치고 옥에게 소곤거렸다. 주경은 옥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도 옥이 자신의 말을 듣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옥을 만든 장본인이 알려주었다고 하나 옥은 그가 누군지 몰랐다.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원칙은 지키지만 자신이 이루어 낸 사문과 공을 들여 만든 옥팔찌에 대한 각별함은 있었다. 물론 인간 기준의 각별함은 아니다. 팔찌가 세상을 떠돌다 사문의 맥을 이어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도록 축원을 걸어 보낸 것이 그가 보인 호의의 전부로, 그것이 끝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되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자들이라 인간의 눈으로 보면 자연재해나 다름없지요. 왜 폭우가 이곳에 내리는지를 따질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문에 곽다순과 조우했다 쳐도 자문원의 장례를 잘 치렀다면 그렇게 끝날 일이었다. 허나 곽다순은 지선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욕심으로 천리를 어그러뜨리겠다고 날뛰며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
곽부에서 과거를 환시해 곽다순의 만행을 확인한 지선은 자신이 끼어들 수도, 내버려 둘 수도 없어 빚을 지워놓은 적이 있는 주경을 찾아내 대리로 보냈다.
옥과 현서를 살피고, 곽다순을 잡아 오라고.
지선이 말한 살피라는 뜻은 옥이 깨지지 않고 현서가 죽지 않으면 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주경은 오래 살긴 했으나 만화산 삼노사보다 어렸기에 최대한 사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려 했다. 의뢰인의 의뢰를 완수하려면 곽다순을 잡아가야 하지만 현서의 의사를 먼저 존중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좋은 사람이라고 보았던 현서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주 대협께서 데리고 가세요.”
너무 선선히 나온 대답에 주경과 유위람이 되레 말렸다. 현서더러 직접 죽이라는 것은 아니다. 나나 패천검이 할 것이다. 죽이는 것을 보기 힘들다면 눈을 감고 있어라 등등 현서가 마음이 약해져 곽다순을 살리려는 줄 아는 두 남자가 필사적이었다.
지선을 만난 곽다순이 지금 죽는 것보다 더 낫다는 걸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곽다순에게 천리를 어그러뜨린 대가를 묻는다면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보다 지선을 만나는 것이 더 엄정할게 분명했다. 더욱이 곽다순의 모든 염원은 하나도 남김없이 부서지지 않았던가.
현서가 두 사람 모두 잘못 짚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주경이 받은 의뢰가 없었다면 이 자리에서 곽다순을 죽이는 것에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굳이 직접 죽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왜냐면.
“저 사람의 생사가 제게 무가치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한 것이니 사양 마세요.”
현서가 덤덤한 목소리로 고했다.
과거의 일을 제쳐 두고라도 자문원이 그렇게나 소중하고 과거를 후회했다면 문원이 죽은 뒤 저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현서는 곽다순의 심정에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곽다순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몰랐다. 주경이 덕분에 빚을 청산했다며 다음에 인사하러 오겠다고 말한 뒤 곽다순을 끌고 사라졌다.
주경을 배웅하자 엉망이 된 흑하 주변에는 현서와 유위람, 그리고 옥만이 남았다. 현서가 유위람의 어깨를 살짝 도닥여 두 사람은 바닥에 앉았다. 조금 쉴 필요가 있었다.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았으나 현서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유위람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많이 아파요?”
주경이 떠나자 옅어지는 안개 사이로 아침볕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현서가 유위람의 뺨을 잡는 대신 머리칼을 넘겨주며 울상을 지었다. 산사태를 일으킬 정도의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도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서 속이 상했다.
“누가 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서의 입 안이 엉망인 것은 아직 모르나 그것을 제하고라도 현서의 몰골 역시 엉망이었다. 누가 더 가슴 아픈지를 따지는 대회를 열 것도 아니니 두 사람은 거기서 말을 아꼈다.
한동안은 크게 앓을 게 뻔했지만 그래도 옥과 유위람이 곁에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현서가 만족 어린 숨을 내쉬며 말했다.
“맘껏 자고 싶어요.”
“당장 자도 괜찮습니다.”
유위람이 자신을 품 위에 올려두려고 하자 현서가 고개를 저었다.
“따뜻한 물로 씻고, 부드러운 침의를 입고 화로를 들여 따끈한 침상에 누워 유위람을 껴안고 자고 싶다는 말이에요.”
현서가 오른손으로 연신 왼팔의 옥을 매만지며 말했다. 말하진 않았어도 옥이 사라진 일에 많이 놀랐는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팔을 뻗어 어깨를 감았다.
“저도 좋습니다. 우리 집에 어서 가고 싶군요.”
“근데 우리 집엔 아직 침상도 하나 없는데.”
유위람이 입에 올리는 우리 집이 좋아 현서가 키득거리다 입 안이 아파 얼굴을 찡그렸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좀 자라.
결국 옥이 끼어들어 잔소리를 하자 마음이 완전히 놓인 현서가 큰 소리로 웃어버리다 기침을 시작했다. 옥이 혀를 차고 유위람이 놀라 등을 쓰다듬어 주는 와중에 목소리가 들렸다.
“서아야!”
밤새 길을 찾은 현진과 결국 기다리지 못해 절벽에 검을 박아 뛰어오른 이약약이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엉망이 된 풍경에 놀랄 겨를도 없이 급히 달려오는 두 사람의 너머로 뒤따라오는 다른 사람들도 보였다.
어느새 안개는 전부 사라지고 해가 떴다. 긴 밤이 끝이 났다.
❖ ❖ ❖
향이 만 리를 간다는 이름처럼 금목서의 달콤한 향기가 서늘한 아침 공기를 가득 채웠다.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채로 삼중이 가만히 뜰에 서 있었다. 손 위에 올려놓은 납작한 팔만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움푹 파인 구멍에 내력을 주입했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팔만구는 이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삼중이 팔만구를 뺏길 때를 대비해 놓은 장치였다. 쓸 일은 없었지만. 사영은 감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감윤의 손에 죽었다. 허망한 최후라 할 수 있으나 원래 죽음은 허망하다.
내력을 주입하면 부서져 내리게 손을 써놓은 팔만구. 이것이 팔만구가 악용되지 않기 위해 한 선의인지. 아니면 사영의 눈앞에서 희망이 부서지길 바란 악의였는지, 자신이 행한 일이지만 그 의도를 뚜렷이 나누지 못했다.
꽃향기에 섞여 바람에 날려가는 팔만구의 잔해를 보는 삼중의 뒤로 손에 서신을 쥔 감윤이 불쑥 나타났다.
“아이고, 사형, 큰일, 큰일입니다. 저는 이번에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요.”
“사제. 진정해 봐. 무슨 일인데 그래.”
감윤이 삼중의 손을 붙들고는 우는 소리를 냈다.
“이 사형이 오신답니다!”
이번 일로 깨달은 바가 생긴 삼중은 태호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호를 돌며 배움을 얻고 싶다는 뜻을 사문에 전했다. 그에 뼈밖에 없는 삼중을 가장 싸고도는 그들의 둘째 사형이 막내 놈이 바람을 넣었다며 노발대발하는 서신을 급히 보내왔다. 당장 찾아갈 것이니 그때까지 삼중을 꽉 쥐고 기다리라고.
일신의 무공 하나만을 생각하면 다음 장문인이 될 대사형도 감윤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감윤은 그것을 빌미로 건방지게 굴거나 압력을 행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삼중이 사술을 지극히 혐오하는 것처럼 감윤은 사문의 불화를 경계했다. 이것 역시 검선의 일이 감윤에게 남긴 흔적 중 하나다.
천 명의 사람에게는 천 개의 사연이 있는 법이다. 현서를 죽이려 함에 스스럼없었으나 죽을 때까지 사영의 팔에 현서가 선물해 준 팔찌가 달려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악인의 사연에 귀 기울일 필요는 없지.
손바닥에 남아 있던 팔만구의 잔해를 털어버리며 삼중이 가볍게 말했다.
“이 사형이 심심하셨던 모양이네. 사형도 같이 가자고 하면 두 말 안 하실 걸.”
“삼 사형이 우리 중에 제일 똑똑하고 사부님이 늘 그러시더니! 삼 사형 말이 옳습니다.”
감윤은 사형이 내려준 명답에 기뻐하며 얼른 아침 먹으러 가자며 삼중을 잡아당겼다.
공식적으로 곽다순은 패천검과의 싸움에 패해 죽었고 시체는 산사태에 떠밀려 사라진 것으로 결론이 났다. 현서의 부상을 본 이약약은 오체분시를 해버리겠다며 분기탱천했으나 감산을 다 뒤진다고 해도 시체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현서는 삼 일간 깨어나지 못했으나 발작이 일어난 것은 아니고 내력을 한계까지 쥐어짜는 바람에 몸의 기력이 다해 잠든 것뿐이었다. 입 안의 상처와 양발목의 살갗이 벗겨진 것이 가장 심했고 그 외는 전신 타박상이었다.
삼 일 후 깨어난 현서는 여러 사람의 병문안을 받았지만 그중에 유위람은 없었다. 잠들기 전까지 유위람과 대화했던 현서는 의아해 했으나 그가 내상을 입었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다. 유위람을 찾아가고 싶었으나 의원까지 나서 절대 안정을 권하는 터라 방을 벗어나는 일도 어려웠다.
―매일 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너를 보러 오니 내상이라 해도 심각한 것은 아니다.
결국 옥이 나서 정리해 주었다. 입 안이 엉망이 된 현서를 보고 유위람이 지은 참담한 표정에 마음이 쓰였으나, 현서가 그놈 걱정에 시름하는 것도 싫었던 옥이 절충안을 찾아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은 저렇게 했어도 옥 역시 유위람이 내상을 완전히 치유할 때까지 몰래 보고 가는 줄 알았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옥이 유위람의 외상에 별 관심이 없어 그런 탓도 있었다.
유위람의 뺨은 현서가 잠들기 전까진 그저 붉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시퍼렇다 못해 흉한 검보라색으로 변했다. 유위람은 그 얼굴을 현서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멍이 너무 심해 보여 현서가 걱정하는 것도 싫었지만 이 모습을 기억에 남기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좀 더 컸다.
유위람이 열흘간 내상 치료에 힘을 쏟은 것은 원활한 내력의 흐름이 외상 치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황궁의 비빈들이 상처 치료에 쓴다는 값비싼 연고도 구해다 매일 듬뿍 발랐다.
멍이 사라지다 못해 얼굴에서 광이 나자 유위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현서를 만나러 갈 준비를 했다. 그것이 감산의 싸움이 끝난 지 열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현서 말고도 내상과 외상을 입은 이들이 부지기수라 그들은 감산 아래 마을에 머물며 몸을 추슬러야 했다. 내상이 심하다면 각자의 사문으로 돌아가 치료하는 것이 나았기 때문에 주로 외상만을 치료했다. 몸 상태를 챙긴 다음에는 서슴없이 떠나갔다.
곽다순이 죽었으니 더 이상 집안을 비울 수 없는 곽나난과 죽은 귀살대를 뒤졌더니 청사파의 공적이 튀어나온 바람에 보고를 해야 하는 소화리도 사문으로 돌아갔다.
지금 이곳엔 태호문으로 돌아가지 않는 삼중 일행과 더 정양해야 하는 현서 일행, 그리고 유위람만이 남아 있었다. 오립송을 먹었던 덕인지 현서의 회복도 빨라 이약약은 곧 서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항도에 있는 이사도 담주에서 만나 합류하도록 했다.
모든 일이 끝이 났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현서 역시 반대하지 않았다. 할아버님도 호부로 돌아오셨고 유위람과의 동거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도 있으니 말이다.
그에 현서는 아예 일찍 잠이 들었다. 오늘 유위람을 보지 못한다면 내일은 자신이 찾으러 갈 마음을 먹고 말이다.
‘어.’
달게 잠들었다 눈을 뜨니 품이 따뜻했다. 고개를 돌리니 유위람이 현서의 옆구리에 찰싹 붙어 누워 있었다. 현서가 유위람을 품에 안고 자는 것처럼 보이게 말이다.
“유위람.”
현서가 깬 것을 진즉에 알았음에도 유위람은 현서가 자신을 부르고 나서야 고개를 들며 싱긋 웃었다. 밝지 않은 촛불 아래서도 얼굴에서 빛이 났다. 현서가 자신의 뺨부터 볼 것을 알아 부러 얼굴부터 들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현서가 손을 들어 뺨을 만져 왔다.
“일전에 많이 다쳐 있어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다 나아서 다행이에요.”
“이젠 괜찮습니다. 보세요. 비단보다 더 부드럽지 않습니까.”
유위람이 현서의 손바닥에 얼굴이 부비며 대놓고 아양을 부렸다. 유위람에 대한 걱정과 그래도 열흘간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았다는 서운함에 얼굴을 보면 조금 툴툴거려야지 했던 현서였으나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현서가 소리 내 웃자 유위람은 그제야 현서를 가볍게 들어 올려 자신의 품 위에 올려두었다. 옥은 한 소리 하고 싶었으니 유위람이 그 빌어먹을 인형의 팔에서 자신을 챙겨주어 도움을 받았으니 오늘만은 가만있기로 결심해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호 공자야말로 입 안은 괜찮습니까?”
옥 님이 없었다면 매일 입 안을 직접 살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저 현서를 돌보는 의원과 하인에게 물어볼 뿐이었다.
“그럼요. 다 나았어요. 이틀 전부턴 죽 말고 다른 것도 먹는 걸요. 아직도 입 안에서 단맛이 나는 것 같아요. 이러다 충치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을 정도예요.”
말라산 석청은 일반 꿀에 비해 씁쓸한 맛이 나지만 어쨌든 꿀이다. 석청에 약재를 섞어 입 안에 바르는 약을 만든 것은 의원 인생에서 처음으로 해보는 사치라 약을 만들 때마다 손이 떨린다고 현서를 돌봤던 의원이 말했다.
하루에 다섯 번씩 약을 덧발랐는지라 당분간은 단건 입에도 대고 싶지 않다고 현서가 말했다.
“단건 싫다니. 그런.”
유위람이 짐짓 안타까운 소릴 내자 어디서 과자라도 구해 온 줄 안 현서가 유위람이 주는 거라면 먹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에 유위람이 현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리도 다디단데 싫다고 하시니 안타까워 그렇습니다.”
유위람이 작정하고 눈웃음을 치며 수작을 부리는 것에 현서가 입을 떡 벌렸다. 수작이라는 단어는 떠올리진 못했는데 대신 옥이 말하던 여우, 불여우가 현서의 머릿속에서 반짝거렸다.
민망해진 현서가 일전의 복수를 겸해 턱 대신 귓불을 콱 깨물었다. 유위람이 움찔하자 아프게 물었나 싶어 금세 미안해진 현서가 소곤소곤 사과를 했다. 그 사과를 유위람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
유위람이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릴 내며 몸을 훌떡 뒤집었다. 유위람의 몸 위에 올라가 있던 현서가 금세 이불 위에 누워 유위람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제가 졌습니다. 아무리 작정을 해도 호 공자의 속삭임 하나만 못하다니. 모자람이 이토록 크니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겠습니다.”
옥이 옆에서 욕을 하지 않아 유위람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현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되물을 수도 없었다. 곧 입맞춤이 이어져 사소한 의문 같은 것들은 전부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읏. 으응.”
발끝에 힘이 들어가자 보드라운 이불이 다리 사이로 감겨들었다. 입 안의 상처를 찾으려는 듯 유위람의 혀가 집요하게 현서의 입 안을 헤집을 때마다 오싹오싹해 몸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이전까지의 입맞춤은 모두 현서가 숨을 제대로 쉬는지 확인하며 중간 중간 숨을 틔워주었는데 오늘은 숨이 모자라 헐떡이는데도 게걸스럽게 탐하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결국 숨이 막혀 몽롱해진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고 나서야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손가락으로 눈물이 흐르는 눈가를 문지르며 젖은 입술로 귀와 턱 사이를 지분거리던 유위람이 현서의 목을 핥았다.
현서가 깜짝 놀라 몸을 파다닥거리자 유위람이 고개를 들어 예쁘게 물었다.
“싫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게.”
싫은 건 아닌데 좋으냐고 하면, 이전에 느꼈던 자극과는 또 달라, 이게 좋은 건지 모르겠는데 또 싫으냐고 물으면. 욕망에 눈 아래가 붉어진 유위람의 얼굴에 홀린 현서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아뇨!”
그에 유위람은 현서의 눈가를 매만지던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오른손 엄지로 입술 끝을 은근히 문질렀다.
“싫으면 물어요.”
그리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여 현서의 목을 핥았다. 보드라운 여린 살이 혀에 닿을 때마다 유위람은 자신의 예측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눈물은 달지 않았으나 혀에 감기는 현서의 맨살은 달기만 했다. 이대로 한 움큼 씹으면 입 안에서 녹아버릴까 무서울 정도였다.
허나 현서를 아프게 할 수는 없었다. 눈앞이 벌게져 이성이 아슬아슬해지는 쾌감 속에서도 혹시라도 아플까 이빨로 깨무는 대신 입술로 잘근거리고는 핥기를 반복했다.
몸의 모든 감각이 유위람이 매달린 목에 몰렸다. 그저 누워만 있는데도 열이 올라 밭은 숨을 내쉬던 현서는 입가를 지분대는 손가락을 콱 물어버릴까 하다가 물어버리면 유위람이 멈출 것을 알아 참았다.
유위람이 멈추는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현서는 입술을 치대는 유위람의 손가락을 핥아보았다. 유위람이 움찔 하는 반응이 흡족했던 현서는 엄지손가락을 혀끝으로 감아 입 안에 넣어 우물거렸다.
그 순간 유위람의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딱 굳었다. 온몸을 달뜨게 만드는 자극이 사라지자 현서가 열기 어린 눈을 도륵 굴리다 물었다.
“싫어요?”
싫었나 보다. 현서가 민망해 하며 혀로 유위람의 손가락을 슬쩍 밀어냈다. 유위람이 검선의 사당에 맹세코 목만 조금 희롱할 마음으로 애써 줄인 불씨에 자신이 기름통을 던지다 못해 화탄까지 집어 던진 꼴이 된 걸 몰랐다.
새카맣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애써 감추었지만 욕망에 잔뜩 갈라진 목소리까진 어쩌지 못했다.
“제가 어디까지 해도 괜찮습니까?”
유위람의 목소리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은 현서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이것 역시 성감이라는 걸 아직 몰랐다. 하지만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유위람이 내게 하려는 일 중에 내가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게 있나요? 왜요?”
쾌감에 아롱진 눈동자가 선연했으나 그 말은 어린 짐승이 목을 내어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껏 쭈그러져 있던 양심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 거세게 자기주장을 했다. 현서가 자신보다 열한 살 어리다는 것을 굳이 이 순간 깨달을 필욘 없지 않은가. 갈 곳 없는 원망이 치솟았다.
유위람은 거듭 한숨을 쉬었다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결국에는 현서 팔목에 있는 옥 님까지 보고서야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현서였다. 유위람이 옥을 살핀다고 생각했던 현서가 발개진 얼굴로 속삭였다.
“옥은 지금 깊이 생각 중이라 밖의 일은 모르는데.”
유위람이 필사적으로 이성을 잡으려 애를 쓴 것을 전혀 모르는 현서가 예쁘게 웃으며 유위람의 이성을 난도질했다. 이성이 끊어지면 눈앞이 일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유위람은 이때 처음 알았다.
정말 찰나였으나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현서의 침의가 소리도 없이 찢겨져 있었다.
눈앞에서 침의가 조각나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는데도 눈앞의 사람이 유위람이라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인 현서의 얼굴이 보였다. 유위람의 작은 양심이 필사적으로 몸을 부풀려 거대해지려고 애썼다. 흉포해진 욕망을 달래기 위해 현서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유위람이 마치 경문처럼 이름을 외웠다.
“호 공자. 호 공자. 호 공자. 현서야.”
그렇게 현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며 유위람은 잔뜩 성이 난 욕망을 가라앉혔다. 유위람은 세상 모두가 마땅히 자신을 칭찬해야 한다고 여겼다.
새 침의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급한 대로 이불로 꼼꼼히 여며주자 현서가 다 끝난 것이냐고 물었다. 끝은 무슨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양심도 조용히 물러섰다.
유위람이 비죽이 웃으며 자신과 현서가 몸을 나누기 전에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속삭였다. 심술을 부려 잔뜩 낮춘 목소리가 간지러워 몸을 움츠리던 현서는 유위람의 말이 이어질수록 얼굴이 하애졌다, 붉어졌다를 반복했다. 어, 어, 어 소리밖에 못 내던 현서가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 유위람이 그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저와 호 공자가 몸을 나눈다는 것은 그런 것들이 다 합의된 이후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쪽이든 호 공자만 있으면 저는 다 좋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상량한 다음 말해 주세요. 그때가 되면 무엇이 시작이고 끝인지를 호 공자가 아주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무척이나 달고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사나운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현서는 자신이 들은 내용을 곱씹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그만 심술을 부렸으나 유위람이 현서를 두고 계속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불로 돌돌 만 현서를 품에 안고는 방 안을 돌아 다녔다. 따뜻한 물을 마시게 하고 새 침의를 찾기 위해서였다. 침상에 현서를 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안고 싶어서 유위람은 현서를 도롱이로 만들었다.
놀라긴 하였으나 유위람이 귀에 쏟아부은 말들의 충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현서는 상상도 못 해본 일들을 유위람이 나열했지만 어차피 누군가를 좋아해 정사를 나눈다는 것이 이제껏 현서의 인생에 없었던 탓이다.
낯선 일이긴 하지만 유위람과 하는 접문이 좋았던 것처럼 그것들도 좋아질 거라 믿었다. 그렇다고 당장 결정을 다 내렸으니 지금 하자고 말하진 않았다. 돌돌 말려 유위람의 품에 있는 것도 좋았던 것이다.
가만히 있던 현서가 불쑥 입을 열었다.
“큰 손이었어요. 손을 잡아주셨는데 손이 쏙 들어가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손을 잡고는 산길을 걸었어요. 걸을 때마다 진하게 올라오는 풀 냄새가 코를 간질이고 웃자란 여름풀들이 가슴팍에 걸리며 사락사락 소리와 함께 흔들렸어요.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리며 보폭을 맞추려고 애를 썼어요. 금세 힘이 빠지자 아예 품에 안아 올려주셨죠. 다정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는데 그게 꿈에서 가장 처음 본 얼굴이었어요. 문원의 가족이고 스승이며 친구였던 단 한 사람.”
자문원의 일생에서 제일 큰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 자문원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를 움직인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사람이었다.
첫 꿈이 뭔지는 아직도 모른다. 정신을 차리는 시간도 짧았고 너무 아파 다른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문원의 기억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꿈이 저것이었다.
“나는 전생을 오로지 꿈으로만 보았는데, 개웅산의 일도 그러했어요.”
현서의 말을 잠자코 들으며 방을 돌던 유위람이 설핏 몸을 굳혔다. 전생이든 꿈이든 죽음을 체험했다는 것을 걱정해서 그렇다. 현서가 그 마음이 좋아 작게 웃었다.
“열다섯의 나는 조그마한 내력이지만 그것으로 처음 일주천을 끝낸 뒤라 잔뜩 들떠 있었거든요. 그날 처음으로 개웅산의 일을 꿈으로 꾸었어요. 자문원은 사문의 대가 끊기게 된 것을 미안해 했어요. 스승님께 죄를 지었다고 슬퍼했죠. 스물다섯을 넘길 수 있다면 내가 대신해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자문원을 대신해 제자를 키우고 싶다고 옥에게 말했죠.”
처음부터 옥이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서의 결심은 굳건했고 조용히 제자를 키우는 것은 옥이 보기에도 괜찮아 보여 결국 찬성했다.
“몰래 저택을 구한 것도 서녕에서 멀리 떠나 제자를 두려고 그랬던 거예요.”
“지금도 그 뜻은 변함이 없습니까?”
자문원의 전생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겪었는데 그래도 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제자를 가르치는 건 저택에 유위람을 들여놓고 말하려고 했는데, 현서가 자기가 내심 준비했던 일의 순서가 바뀌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때도 그렇고, 나는 지금도 전생의 기억들에 감사해요. 그 기억들이 아니었다면 서녕 밖으로 나오기는커녕 넘기지 못할 스물다섯 살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면 유위람을 만날 일도 없고 가족들도, 옥도 슬퍼했겠지요. 옥은 어린 내가 전생의 기억에 매몰될까 늘 걱정하며 신경 써주었어요. 사실 옥을 만난 이후로는 꿈을 꾸는 횟수가 많이 줄었는데 그래도 옥이 있어주어서 나는 어떤 꿈을 꾸든 깨어나면 호현서로 있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현서가 조금 머뭇거리다 물었다.
“내가 자문원의 환생인 것이 나에 대한 당신의 마음에 영향을 주나요?”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현서의 걱정이 귀엽기만 했다. 유위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검선을 두고 귀엽다는 수식어를 절대로 붙이지 못할 테니 현서의 걱정은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었다.
하지만 웃으며 말하지 않았다. 유위람이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공경과 연심을 구분할 줄 압니다. 검선을 경애하고 그분이 언제까지나 제 인생의 큰 빛임을 확신합니다. 제게 아주 중요한 분이죠. 하지만 저는 그분을 이렇게 사랑스럽다 여긴 적도, 애가 타 동동거린 적도 없고 무엇보다 단 한 번도 그분께 욕정한 적이 없습니다.”
“욕정. 어, 유위람이 자문원을 보았을 때는 아홉 살이었는데…….”
“제가 그분을 그런 의미로 좋아했으면 더 자라 욕정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유위람이 현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말했다.
“저는 공경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거 못 합니다. 호 공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호 공자가 좋은 겁니다.”
유위람의 단언에 아닌 척해도 긴장을 하긴 하였는지 현서가 저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위람 역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열흘 만에 현서를 본 탓도 있지만, 현서가 머릿속에 여우, 불여우를 떠올릴 정도로 요사를 떤 것은 유위람 역시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서가 전생의 자문원임을 확언한 것을 자신이 들었다는 것을 아니, 혹시 그것을 이유로 자신과 멀어지겠다고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서로 안심한 두 사람이 잠시의 침묵 후에 동시에 말했다.
“서신 하겠습니다.”
“서녕에 오세요.”
유위람 역시 뒤처리 때문에 항도와 만화산에 가야 했다. 마음 같아선 같이 서녕에 가고 싶었지만 사실 예의에도 맞지 않았다. 이약약과 현진의 반응을 보면 서녕의 반응도 별 차이가 없을 게 빤해 유위람은 책잡힐 행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
유위람과 동거할 테니 당연히 가족들에게 소개할 마음이었던 현서가 물었다.
“그런데 저는 어디에 인사를 가야 하나요? 유위람의 집? 아니면 만화산?”
“어머님은 이미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호 공자가 간다면 너무 놀라실 것이 분명하니 스승님들을 만나러 가죠.”
장남이 서녕호가의 장중보옥을 데리고 오면 뒤늦은 후계자 싸움이라도 걸러 오는 줄 알고 온 집안사람들의 간이 바닥에 떨어질 게 눈에 선했다. 심술 부릴 생각이 아니라면 가지 않는 것이 나았다.
현서가 자그맣게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유위람을 보려고 일찍 자두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많은 일로 체력을 빼앗겨 이 정도도 장하게 애를 쓴 것이었다.
순식간에 잠이 든 현서를 품에 안은 유위람이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항도의 사당이 마음에 들었는지를 묻지 못했는데.”
여전히 유위람은 자문원이든 현서든 그 사당을 기겁할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이 눈알 시커먼 놈이! 무슨 짓을 한 게야!
도움을 받은 것을 셈해 잠시 물러나 있었던 옥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보게 된 찢어진 침의 잔해에 기겁을 하며 화를 냈으나 이미 잠든 현서는 대답하지 못했고, 행복에 겨운 유위람은 처음부터 듣지를 못했다.
시름에 겨운 옥팔찌 하나만 없는 속이 터지는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