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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日譚 (17/21)

後日譚

밤사이 폭설이 내렸다. 숯 화로를 점검하기 위해 진시(辰時: 아침 7시-9시) 초에 도련님 방에 들었던 명명이 묘한 표정으로 나왔다.

“언니?”

포하(抱廈)에서 대기 중이던 춘도가 명명을 불렀다. 최근 도련님의 몸 상태는 무척 좋았고 무엇보다 도련님이 아파서 나올 표정이 아니었던 탓이다. 

“도련님이 기침하셨더구나.”

“예? 벌써요? 아직 진시 초입인데, 어. 설마 언니?”

“그래, 식사하시고 성장하시겠다고 하니 준비하렴.”

춘도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표정이 명명처럼 요상해졌다. 도련님이 일찍 일어나 성장까지 할 정도로 오늘 오는 손님을 각별히 여긴다는 뜻을 보인 탓이다.

만희당을 오가는 모든 사람들은 오늘 오는 손님이 누군지를 알았다.

패천검 유위람.

우리 막내 도련님과 서로 좋아하는 사이란다. 도련님의 열애 소식은 응당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나 호부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막내 도련님이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아도 그래, 그래, 옳지 잘 뽑는다, 힘든데 대신 뽑아줄까 하고 칭찬만 해줄 사람들이 열한 살 많은, 만난 지 반년도 되지 않는 남자의 등장에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도련님이 좋다고 하니 좋은가 싶다가도 ‘아니, 근데!’ 하고 말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현서의 앞에서 반대하지는 못했다. 도련님의 모친인 대부인도 뭐라 못 하시는데 자신들이 무어라 하겠는가. 그저 좋은 일은 맞지 하고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패천검 유위람은 워낙 유명해 서녕에서도 이름난 사람이었다. 호 대인께서 어련히 알아보았지 않겠나 하면서도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들끼리 아는 말이 있다며 소문을 뒤졌다. 하지만 새로울 것이 없었다. 패천검 유위람은 대외적으로 흠잡을 곳 없는 무림 명숙이었고, 연애에 관한 지저분한 소문 하나 없었다.

서른한 살이 되도록 연애 한 번 하지 않았다니 고자임이 틀림없다고 트집을 잡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 우리 도련님이 고자랑 사귄단 말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어 고자로 흠잡기도 쑥 들어갔다.

기주 지역의 상인들은 겨울이 되면 상행을 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서녕호가도 마찬가지라 겨울에 큰 연회들이 많았다. 올해는 친척인 호상융 집안이 횡액을 크게 당해 연회를 열지 않고 넘어가나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막내 도련님이 많이 건강해진 것을 축하하고, 강호에 나갔다 도움을 받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호상융의 일로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을 쇄신하는 줄 알았으나 이 연회에는 그 집안이 끝난 것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었다.

연회는 닷새 후에 열리지만 패천검 유위람은 오늘 도착한다는 연락을 주었다. 항도와 서녕은 멀다. 연회에 늦지 않기 위해 일찍 출발한 손님이니 크게 환대하며 맞이해야 하건만 현서를 제외한 모두의 반응이 떨떠름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굳이 이렇게 먼저 오다니. 그것도 이렇게 폭설이 내린 날에. 닷새나 빨리. 말은 안 했지만 대강 저런 눈치였다.

어떤 놈인지 두고 봐주마. 패천검이든 경천검이든 우습게 보일 수 없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눈을 쓸고 아침부터 집 안을 꾸미는 사람들을 지나쳐 만희당에 왔던 명명은 잔뜩 들뜬 얼굴로 일찍 일어나 있는 막내 도련님의 모습에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패천검이 떨떠름한 것과 별개로 관례 이후 성장할 일이 없었던 현서를 꾸미는 일에는 모두가 진심이었다. 철서에서 한 번 성장을 했을 땐 이사 혼자뿐이었지만 오늘은 명명을 비롯한 자리와 춘도까지 모여 왁자하게 현서를 꾸몄다.

광택이 나는 짙은 남색 비단은 처음부터 검은 비단실로 무늬를 빼곡히 넣어 만든 옷감이라 따로 자수를 넣지 않아도 고상하고 화려했다. 더위만큼 추위에도 약한지라 현서의 겨울옷은 외출 시 걸치는 두봉(斗蓬)이 아니어도 목깃과 소매 끝에 털을 덧댔다. 성장을 해도 장신구를 많이 쓰지는 않아 허리춤에는 여의길상문으로 조각한 양지옥패가 전부였다.

현서의 머리를 빗기고 있는 춘도를 보던 자리가 잊고 있었다며 장신구 상자를 가지고 왔다. 안에는 못 보던 진주를 두 줄로 늘어뜨린 비녀가 있었다.

“도련님, 처음 보시죠. 희서 아기씨가 선물로 보내주신 비녀예요.”

일전 조카들끼리 놀다가 희서가 아끼던 비녀가 망가졌다는 얘기를 들은 현서와 현진이 남주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호부로 보냈다. 희서가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현진과 현서에게 답례를 했다. 현진에게는 검에 다는 옥패를, 현서에게는 진주를 엮은 비녀를 보내 왔다.

희서도 이제는 너무 좋아하는 숙부의 머리에 그렇게 화려한 비녀를 꽂으면 안 된다는 걸 안다. 때문에 남성용 비녀를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장식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손가락 길이만 한 두 줄 진주가 희서의 고뇌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현서를 포함한 모두가 와르르 웃었다.

비녀까지 꽂고 나니 성장이 끝이 났다. 수고한 시녀들을 위해 빙그르르 돌자 진주가 부딪혀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일찍 일어났으니 성장을 끝내고 약을 먹은 뒤 탑에 앉아 잠시 쉬던 현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련님?”

“두봉을 줘.”

갑자기 어딜 나가신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두봉을 달라는 얘기에 자리가 두말없이 옷을 둘러주곤 끈을 묶어주었다. 매무새 점검이 끝나자 현서가 부리나케 방을 나섰다. 만희당 뜰을 가로질러 성큼 걷던 현서가 활짝 웃었다.

“유위람!”

그 순간 만희당의 모든 식솔들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

‘역시 우리 도련님, 안목도 좋으시지.’

유위람의 얼굴을 보자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진주색 비단에 홍매화를 얹은 화려한 비단 두봉이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도련님의 곁에 서 있으면 참으로 인형같이 보기 좋은 한 쌍이 될 것 같은. 명명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세상에, 내가 무슨 생각을.’

자리나 춘도도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젓는 것이 명명과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호 공자. 미끄러집니다. 조심하세요.”

유위람이 한달음에 다가와 현서를 안아 올렸다. 잘그락거리는 진주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현서의 웃음소리가 만희당 뜰을 채웠다.

‘그분이요? 도련님 시중을 잘 드세요.’

여전히 두 번째, 세 번째 이론을 밀고 있는 이사가 어째서 유위람을 저 한 줄로 평했는지 명명은 이제야 이해했다. 열한 살 차이라고 들었는데 도련님은 유위람이라고 부르는 것에 서슴없었다.

‘이사가 헛꿈 꾸는구나.’

아기 때부터 현서를 보아 왔던 명명은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대부인께서 왜 반대를 입에 못 올리는지도 알았다. 대부인 처소의 시녀들과 친한 명명은 한동안 위장약을 넉넉하게 준비하라 조언하기로 했다.

유위람이 현서를 안은 채로 자박자박 걸었다.

“성장을 한 걸 보는 게 이번이 두 번째군요. 철서에서 처음 성장한 것을 보았을 때도 말을 뺏길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오늘도 그러합니다.”

자신이 온다고 성장했다는 것을 알아 칭찬을 건네는 유위람의 목소리가 녹진녹진했다. 길 안내를 위해 앞서 가던 자리와 춘도는 유위람이 여우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동시에 저 정도 되는 사내가 우리 도련님이 좋아서 저렇게 녹아드는 목소리로 여우짓을 하는 중이라는 것도 알았다.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는.’

유위람을 편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왜 도련님의 곁에 있는지는 이해가 되어 관대해졌다. 하긴 패천검도 눈이라는 것이 달렸는데 우리 도련님을 어떻게 안 좋아하겠어? 유위람은 모르는 유위람을 포함시킨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유위람의 도착 소식에 노대인을 제외한 현서의 부모님과 두 형님 내외가 그를 보러 나왔다.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이어서가 아니라 현서가 벌써 유위람과 교제하고 있음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호상직 내외와 현진은 아직 석청담에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유위람을 실제로 보았던 사람은 노대인과 현규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유위람의 초상화를 보았음에도 현서의 형수 두 명이 놀라 소매로 입을 가렸다. 도련님의 곁에 있어도 밀리지 않는다는 얼굴이 뭔지를 깨달아서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서로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아 찻잔에 입을 대고 난 다음에야 유위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첫 방문이라 약소하게나마 소소한 선물을 가져왔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유위람이 선물을 준비했다는 말에 현서의 부친인 호 대인이 부드럽게 사양했다.

“연회의 손님에게 선물을 주지 못할망정 받다니,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패천검의 뜻만 고맙게 받겠네.”

“손님이 주는 선물이라면 당연히 그렇지요. 하지만 가족에게 받는 것이니 남들이 알아도 좋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가족이라면 더욱 사양해야지. 멀리서 온 사람에게 선물까지 어찌 받겠나.”

남의 선물은 안 받는다. 남이 아니라 가족이다. 네가 가족인지는 두고 봐야 알지라는 대화가 다정하게 오갔다.

‘여우네?’

‘여우죠.’

두 명의 형수가 눈을 마주치며 재빨리 뜻을 교환했다. 규방의 여인들은 전음을 익히지 않아도 얼마든지 눈짓과 몸짓으로 뜻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 저는 선물이 궁금한데 받아요.”

큰며느리가 웃으며 참전했다.

“듣자하니 만희당 사람들의 것까지 전부 있다고 하더군요. 분명 도련님이 신경 쓰신 것이니 패천검의 말대로 가족이 주는 것이 맞죠.”

이대로 더 사양하며 끌었다간 현서가 자신이 고른 선물이니 받아주면 안 되냐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면 패천검이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선물은 현서가 고르고 패천검은 이름만 내민 꼴이 되니 어차피 현서가 주는 선물이 되는 셈이다.

“그러네요. 도련님. 어쩐지 흑백 무늬의 비단 잉어가 있더라니. 고마우셔라.”

둘째 며느리가 현서를 향해 웃으며 누구에겐지 모를 모호한 감사인사를 했다. 현서의 직계 가족은 물론이고 외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취향까지 전부 조사해 놓았으나 부러 현서에게 물었던 유위람의 패배였다.

‘춥다.’

여름처럼 후끈한 방이었으나 옥이 한기가 돋아 여기 있기 싫다며 투덜거렸다. 화기애애하게 차를 마시고 헤어진 다음 대부인은 현서에게 줄 인명 목록에 열 명을 더 넣었다.

이틀째 날에는 유위람의 손을 잡고 할아버님을 만나러 갔다. 노대인은 유일하게 이 집안에서 유위람을 반대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유위람이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현서에게 미안한 것이 많아 현서가 좋아하는 것을 반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은 날씨가 좋아 연못가에 놀러 갔다가 조카들을 만났다. 아이들이 유위람을 뱅글 둘러싸고 헤하고 입을 벌렸다. 세상에서 자신들의 숙부가 가장 예쁜 줄 알았는데 그 비슷한 사람을 처음 보아서였다. 하지만 예쁜 것보다 과자가 더 좋았다. 조카들은 현서의 소매 주머니를 털고는 우르르 사라졌다.

이쯤 되니 호부의 사람들도 깨닫는 것이 있었다. 패천검이 도착하고 사흘간 꼭 걸어야 하는 산책 시간을 빼곤 막내 도련님이 자기 발로 걷는 일이 없었다는 걸 말이다.

워낙 현서를 애지중지하는 이들이라 금세 패천검이 동류인 것을 알아보았다. 여전히 그들의 눈에는 현서가 너무너무 아깝고 패천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날도둑놈이었지만 자리와 춘도가 그랬던 것처럼 공감대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래. 패천검도 눈이 있지. 우리 도련님을 보고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잘 알고말고.

아주 새카만 흑심이 있다는 것이 그들과 완전히 달랐지만 현서와 다닐 때는 그저 다정다감한 모습만 보일 뿐이라 아주 깜빡 속아 넘어갔다.

현서가 유위람의 처소를 만희당으로 결정했을 때 사람들이 아닌 척하면서도 낯 뜨거운 이유로 놀랐다. 하지만 유위람은 현서의 방을 예의에 어긋나는 시간에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부적절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연회 전날이 되어서야 현서가 유위람의 방을 방문하겠다고 나선 것이 전부였다.

겨우 나흘이었지만 사람들이 유위람에 대한 경계를 풀게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늦은 시간에 유위람의 방에 가는데도 춘도는 말리는 대신 춥다며 침의 위로 두꺼운 두봉을 걸쳐 주며 배웅까지 해주었다.

방 앞에서 춘도가 아침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멀어지자 유위람이 물었다.

“만족했습니까?”

현서가 유위람의 침상에 올라 그 손을 잡고는 배시시 웃었다. 현서와 유위람이 처음부터 무언갈 꾸민 것은 아니었다. 현서는 집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난 것뿐이었고, 유위람은 하던 대로 현서를 대한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노대인의 처소를 다녀올 때 부러 길을 빙 둘러가자 유위람은 그때 처음으로 현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현서의 생각이 귀여우면서도 재미가 있어 사람의 눈이 붙으면 더 예쁘고 단정하게 굴었다.

“그럼요. 유위람은 이렇게 좋은 사람인데 저 때문에 괜히 나쁘다고 오해받는 거 아까워서요.”

좋은 사람은커녕 속이 시커멓고 양심도 많이 모자라지만 현서의 말이 다 옳다고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미덕이 유위람에게 있었다.

현서는 가족들이 자신이 좋다고 하면 결국 좋아해줄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다. 이사의 말처럼 갑작스럽고 서운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테니 말이다. 물론 부모님과 형님들은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봄이 오면 저는 호부를 떠날 건데 너무 서운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압니다.”

유위람이 현서를 품에 안아 도닥였다. 이 역시 현서가 외유를 하며 바꾼 결심 중에 하나였다. 올 봄만 해도 비밀을 지켜야 하니 이사도 가족도 모두 남겨두고 도망가듯 떠나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앞으로도 가족들에게 팔찌나 환생의 비밀을 말하지 않을 테지만 도망치는 형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옥이 서로 비밀을 공유하고 있어 끈끈한 사이라면 유위람은 현서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라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유위람이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현서가 몸을 빙글 돌려 유위람을 푹 껴안았다.

“우리 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서든 유위람을 이렇게 껴안을 수 있는 게 참 좋네요.”

“저도 좋습니다.”

현서가 유위람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많이 보고 싶어서 유위람이 나오는 꿈을 꿨는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유위람이 재깍 대답했다.

“그래서 향유를 샀어요.”

“향유요?”

―저 맹꽁이는 이제 순서 같은 건 다 잊어버렸으니 어쩌겠느냐. 너는 평생 그러고 사는 수밖에 없다.

이쯤 되니 옥도 어이없어 하며 유위람을 동정하기에 이르렀다.

흑심은 유위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닷새나 이르게 오는 유위람의 처소를 만희당으로 정하며 현서도 즐거운 상상을 열심히 했다. 무엇보다 만희당에는 커다란 욕탕이 있는 전각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희당의 모든 시선이 유위람에게 향한 것을 보고 흑심을 조금 미루기로 했고 그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현서는 이사가 사다 준 향유 병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잠들었다.

연회 아침이 되었다.

밤새 달게 잔 현서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보이는 유위람에 얼굴에 방긋 웃었다. 현서의 눈가에 입 맞추며 유위람이 그 향유 병은 뭐냐고 물었다. 그제야 현서는 어제 자신이 대화 중에 잠든 것을 깨닫고는 대단히 미안해 하며 순순히 대답했다.

“유위람이 저한테 알려주었잖아요.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고요. 그 향유들이 좋대요!”

저도 유위람과 하고 싶은 거 많거든요. 유위람의 볼에 입을 맞춘 현서가 슥 일어났다. 밖에 춘도가 데리러 온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전의 사소한 심술이 곱절이 되어 돌아온 것에 유위람이 헛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이자를 붙이는 재능이 뛰어난 현서였다.

―이럴 거면 나를 방에 두고 가든가!

나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팔에 차고 가는 거냐며 옥이 현서를 향해 잔소리를 했다.

‘나랑 있는 게 싫어?’

기절한 사이 곽다순이 팔찌를 억지로 뺏은 것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 지금도 자다 깨 팔을 확인할 때가 있는 걸 알아 순식간에 마음이 약해졌다. 뭐라 해도 옥이 가장 현서에게 물렀다.

―너랑 저놈이 색사를 할 때는 나를 빼놓겠다고 약속해.

이대로 자칫하다간 못 볼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옥이 거듭 다짐시켰다. 현서는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얼마 후, 못 볼 꼴을 보여준 죄로 유위람과 나란히 벌을 서게 된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일 뿐이고 오늘은 그저 연회를 열기에 좋은 날이었다. 성장을 마치고 나오자 차가운 바람을 타고 반가운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서는 방긋 웃으며 자신을 기다리는 유위람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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