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傳 一章. 서녕호가의 겨울
정식으로 만희당 소속이 되기 전, 이사는 대부인께 불려가 도련님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도련님이 병중인 건 알았지만 자세한 사정을 몰랐던 이사는 크게 놀랐다. 어렸지만 사리분별을 잘하는 이사는 자신에게 이 얘기를 해주는 이유를 금방 알았다.
‘도련님이 오래 못 사시는구나.’
이사가 원하지 않으면 측근 시종이 되지 않아도 좋다는 언질이었다. 아직 어리고 현서를 돌봤던 유모의 조카라 한 번 더 신경 써준 덕이다.
호의는 고마웠으나 이서는 별로 고민할 것이 없었다. 가족들이 전부 호부에서 일을 해 이사 역시 호부에서 나고 자랐다. 자신 역시 호부에서 일할 거라 여겼으니 다른 선택지를 떠올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릴 때 곧잘 같이 놀았던 도련님을 떠올려 이사는 주저 없이 만희당 사람이 되는 것을 결정했다.
그렇게 만희당 문을 넘고서야 이사는 곧 죽을 사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기억 속 모습과 전혀 다른 도련님은 그야 말로 바람이 불면 훅 하고 날아갈 깃털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이 이사가 재회한 현서를 보고 가진 첫 감상이었다.
병자를 돌본 적은 없었으나 들은 것들은 있었다. 사람이 오래도록 아프면 성정이 예민해지고 괴팍해진다고 했다. 아프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더욱이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꺼질까 하는 이들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으니 도련님은 숨 쉴 때마다 패악을 부려도 상관없었다. 패악을 부릴 체력조차 없긴 하였으나 도련님은 그토록 아프면서도 여전히 다정했다.
이사는 그게 좋다기보다는 불쌍했다. 아직 어려 안타깝다거나 안쓰럽다는 감정이 더 날것으로 드러났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렇다고 작은 마음은 아니었다. 아홉 살 이후 주변엔 줄곧 어른뿐이었는데 이사가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파리한 얼굴로 웃는 현서를 보고 열두 살의 이사는 결심했다.
‘도련님의 마지막까지 내가 곁에 있어드려야지.’
그렇게 시간이 더 흘러 이사는 현서가 스물다섯을 넘기지 못한다는 선고를 이미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 이사는 가끔 생각하곤 했다. 스물다섯 이후의 자신은 호부를 떠날 거라고.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떠날 줄은 몰랐지요.”
이사의 말에 현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감산에서 서녕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넘어가 주는 줄 알고 안도했던 것은 현서의 큰 착각이었다.
호부로 돌아와 몸이 좋아지기 무섭게 이사가 만희당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방문을 닫았다. 거대한 벼락이 떨어질 것을 예감한 현서는 그때부터 납죽 엎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폭풍 같은 잔소리가 쏟아졌다. 단어에 무게가 있다면 현서는 진즉에 짜부라져 눌린 떡처럼 변했을 터였다. 처음부터 무조건 백기를 들었던 현서는 이사가 담담한 목소리로 스물다섯이 넘으면 호부를 떠나려고 했다는 말에 몸이 굳어버렸다. 옆에서 이사를 응원하며 킬킬거리던 옥도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모두를 만족시키진 못한다. 독립을 결정할 때 많은 고민을 한 뒤 현서가 내린 결론이었다. 올해의 일로 쌓은 경험들이 없었다면 현서는 예정대로 옥과 둘이서만 독립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말은 사과밖에 없었다.
“도련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이사가 호부에서 나서 자랐어도 세상 물정을 아예 모르진 않았다. 측근 시종이라 해도 주인에게 따지는 것은 큰 잘못이다. 다른 집이었다면 매를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사는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고, 현서는 주제 넘는다고 화를 내는 대신 진심으로 사과해 주었다. 이사는 그것으로 제 서운함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유능하고 똑똑한 이사는 해야 할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사가 백지를 꺼내 현서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어야?”
“뭐긴요. 도련님과 소인이 새로 쓸 계약서지요. 소인은 이제껏 호가와 계약을 했는데, 도련님께서 독립을 하신다니 도련님과 계약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사에 말에 멀거니 백지를 보고 있던 현서가 고개를 번쩍 들며 이사에게 되물었다.
“이사, 나랑 같이 가주려고?”
“도련님은 소인이 가는 게 싫으세요?”
현서가 고개를 마구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좋지. 정말 좋아. 이사랑 같이 가고 싶은 게 아니었다면 말도 안 꺼냈어. 근데, 정말 나랑 갈 거야? 괜찮아?”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요. 소인은 원래 도련님의 측근 시종이고, 스물다섯이 넘으면 호부를 떠나려 했지요. 그 두 개가 붙었을 뿐일 걸요.”
이사가 크게 실망해 그만두겠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마음먹고 있었던 현서가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사가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쩌겠는가. 자신 역시 만희당 사람이다. 도련님이 기가 죽은 것보다야 저렇게 웃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이건 이거고, 고용의 안정에 재차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이사는 새 계약서를 매우 꼼꼼하게 썼다. 해고할 땐 반드시 합의를 거친다는 파격적인 조항이 들어간 계약서였다. 현서의 측근 시종임은 물론 새 저택의 총관사라는 초고속 승진도 함께였다. 호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도장까지 찍어 완벽하게 공적 효력을 가진 문서로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사가 계약서를 조심스레 품에 넣으며 물었다.
“헌데 도련님, 왜 독립을 마음먹으셨어요? 호부가 답답하셨어요?”
역시나 유능한 이사는 바로 본론을 잡았다. 현서가 만희당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천하를 유람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곧바로 독립이라니. 그때는 패천검도 없을 때였으니 누군가와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없지 않나.
이사의 예리한 물음에 현서가 쓰읍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모습에 이야기가 길어지거나 복잡해질 것을 예측한 이사가 찻잔을 쥐어주었다.
“목 아프면 안 되니 마시면서 천천히 말하세요.”
“응.”
현서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현서의 왼팔에 있는 채옥팔찌의 얘기로 어째서 현서가 의선과 소의선의 예상을 넘어 명줄을 늘일 수 있었느냐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허.”
현서의 얘기를 다 들은 이사는 밀려오는 현기증에 머리를 잡고 숨을 골랐다. 혼자 살아보고 싶었다거나 집안의 과보호가 지겨웠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말하는 옥팔찌라니. 저절로 시선이 도련님의 왼팔에 닿았다.
현서는 혼란스러워 하는 이사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당장 의원을 부르러 가지는 않는구나.
‘도련님, 어디가 아프세요? 하는 물음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사는 즉각 현서가 거짓말을 하거나 미쳤다고 반응하지 않았으나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즉시 받아들인 유위람이 심하게 특이한 것이었다.
옥은 이사가 현서를 따라 새 저택에 가겠다고 말하면 자신의 일을 말하라고 했다. 당장은 아니나 언젠가 새 저택에서 제자를 키우게 될 테니 가기 전에 말하는 것이 옳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전생에 관한 일은 여전히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이사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팔찌의 얘기로도 저렇게 당황해 하는데 거기에 전생의 일까지 말했다간 서로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을 알아 그랬다. 당황해 차를 세 잔째 마시고 있는 이사를 보니 그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사는 팔찌의 전 주인이 검선인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현서는 그 팔찌가 검선의 사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신물이라 말을 한다고 했다. 팔찌에게서 양생법을 배웠고 그 답례로 제자를 키우는 것을 돕기로 약속했다고 말이다.
누가 들어도 허황된 얘기라 이사는 도련님이 자신을 놀리는 줄 알았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현서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팔찌가 말을 한다는 걸 알게 되니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일들이 떠올랐다. 혼자 생각에 잠겨 노는 줄 알았던 버릇부터, 강호에 대한 지식들 같은 것 말이다.
이사가 눈을 감았다. 머리가 핑핑 돌다 못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치부하려던 이사는 이 반응이 도련님이 호부를 떠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라는 걸 깨달았다.
‘미쳤다는 소릴 도련님 면전에서 할 사람은 없겠지만, 더더욱 과보호를 받으며 만희당 밖을 떠나지 못하셨겠지.’
이사가 자신의 확신에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분도 아세요?”
“그분? 응. 유위람도 알아.”
가장 먼저 말했고, 이사가 두 번째야. 현서가 작게 덧붙였다.
“그분은 믿으셨어요?”
“응. 곧장.”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유위람을 말할 때의 현서는 어딘지 슬쩍 들떠 보였다. 단순히 유위람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바로 믿어주었다는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사는 기쁨이 서린 현서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패천검 유위람이 얼마나 도련님에게 지극한지를 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옥이 도련님께 나빴다면 그 남자가 도련님 팔에 팔찌를 남겨두었을 리가 없다. 또한, 이사 역시 오래도록 보아 온 옥이 삿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강호에 대해 약간 알게 된 이사는 말하는 옥팔찌가 신병이기가 된다는 것 역시 알았다. 그것이 소문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그 중차대한 비밀을 도련님이 자신을 믿어 털어놓은 것이다. 옥이 정말로 말을 하는지는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다. 지금은 그 정도면 되었다.
“소인은 지금 너무 놀라고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도련님이 제게 허언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도련님을 믿을게요.”
이사의 말에 현서의 상체가 푹 하고 고꾸라졌다.
“도련님!”
이사가 깜짝 놀라 급히 현서를 부축했다.
“어디 불편하세요? 정 선생님을 부를까요?”
“아니야. 긴장이 풀려서 그래. 괜찮아.”
현서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손바닥이 축축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이사에게 말해서, 이사가 믿어준다고 말해 주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 ❖ ❖
오랜만에 할아버님을 비롯해 가장 어린 조카인 희서까지 한 자리에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겨울엔 상행을 가지 않지만 연말이라 부모님과 두 형님 내외는 다망해 오늘 같은 날은 드물었다. 귀한 날이라 일찍 시작된 저녁 자리는 늦게까지 끝나지 않았다.
현서가 긴 여행을 다녀온 걸로 알고 있는 조카들이 졸라 현서는 일전에 했던 얘기에 다시 살을 붙여 해주었다. 이약약과 현진 역시 뛰어난 무림인이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무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유위람이 삼 장(약 9m) 높이의 벽을 훌쩍 넘고, 철시 하나로 강을 건넜다는 얘기에 눈을 빛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왜 벽을 넘고 강을 건너야 했는지에 관해선 쏙 빠져 좋은 것들만 걸러 낸 여행기는 현서의 여정이 지난했음을 아는 어른들도 귀담아 들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귀에 거슬리는 이름이 계속 나왔다. 패천검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어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못 들은 척을 했다. 유위람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현서가 몰랐다면 모르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반응이었다. 가족들이 반대한다고 유위람과 헤어질 것은 아니니 현서 역시 모른 척으로 일관했다. 이사의 말처럼 시간이 약일 뿐이니 말이다.
무엇보다 심술을 부려 유위람의 얘기만을 골라 할 것도 없이 현서의 여정에는 그 이름이 잔뜩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양주에 도착한 이후 현서의 곁에는 쭉 패천검 유위람이 있었으니 말이다.
현서는 그 아름다웠던 영뢰팔합검의 얘긴 못 했지만, 능운검 감윤이 현진과 사씨 남매를 두고 삼 대 일로 싸울 때 유위람이 돌을 던져 현진을 도왔다는 얘기는 할 수 있었다. 조카들이 우와 하고 찬탄할 때마다 작은형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도 언젠가는 재미있는 추억이 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두 시진(4시간)쯤 이어진 식사 자리는 현서가 반쯤 졸게 되면서 끝이 났다.
날이 춥고 피곤하니 가마를 타거나 하인에게 업혀가라고 했지만 현서는 사양하고 천천히 걸었다. 차가운 바람에 잠이 깼다. 숨을 따라 하얀 입김이 번졌다 사라졌다.
유위람과 헤어진 것이 가을이었으니 그를 못 본 지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은 셈이다. 서신은 자주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항도와 서녕은 멀다.
유위람과 함께 한 시간이 고작 칠 개월을 살짝 넘었으니 두 달은 너무 길었다.
“보고 싶다.”
“네? 도련님? 뭐라고 하셨어요?”
등을 들고 가던 이사가 묻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곧 있을 겨울 연회에 그가 올 것이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현서는 이날,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하나 얻었다.
그날 밤, 현서는 유위람을 보았다. 처음으로 접문했던 그날 같았다. 서로 중의만 입은 채로 현서는 유위람의 품에 안겨 그 얼굴을 매만졌다. 유위람이 예쁘게 웃으며 현서의 손바닥을 핥았다. 새빨간 혀가 손바닥을 타고 오르더니 이윽고 현서의 손가락을 물었다.
물기 어린 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자 현서는 간지럽고 오싹한 감각에 움찔대며 유위람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엉덩이 아래에서 뜨겁고 단단한 것이 꿈틀거렸다. 그날처럼 놀란 현서가 비키려고 했지만 유위람이 더 빨랐다.
유위람이 물고 있던 현서의 손가락을 빼 침으로 축축해진 그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렸다. 어느새 반쯤 벗겨진 중의 아래로 유위람의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현서의 젖은 손가락은 유위람이 잡아끄는 대로 궤적을 그리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꼿꼿하게 솟아 있는 유두를 짓뭉개자 유위람이 야릇한 신음을 뱉었다. 현서는 깜짝 놀라면서도 어쩐지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손을 거두지 못하고 계속 움직였다. 실컷 유두를 희롱한 손은 거침없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탄탄한 복근과 배꼽을 지나 그 아래에 있는 검은 거웃에 닿기 전에 현서는 눈을 떴다.
잠과 현실의 경계에 취해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현서는 찝찝한 기분에 손을 뻗어 아래를 만졌다. 샅 주위가 축축했다. 몽정한 것이다.
몽정을 처음 한 것은 아니다. 한창 키가 크던 시기에 손에 꼽을 만큼 드물게 몽정을 했었다. 기억나는 꿈도 없었고 자고 일어났더니 하체가 좀 축축해서 불편하다 정도의 감상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자문원의 꿈처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유위람이 나온 것은 확실했다. 유위람의 몸에 욕정이 인 것이다.
“도련님? 기침하셨어요?”
“응. 이사. 나 좀 씻어야 할 것 같아.”
도련님이 목욕을 좋아하셔도 아침부턴 탕에 들어가는 일이 잘 없는데, 의아해 하던 이사는 휘장을 걷자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허나 현서가 유위람과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호부의 내원을 휩쓸고 있는 때라 이사는 좋은 꿈 꾸셨느냐는 인사는 생략했다.
아침 식사 전이라 탕이 있는 전각에 가는 대신 탕조를 방에 들였다. 따뜻한 물에 들어간 현서는 꿈을 떠올리다 감산 아래서 요양할 때 유위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유위람이 말한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정사는 둘이서 하는 것이니 현서도 미리 알아야 했다. 탕에서 나온 현서는 옷시중을 드는 이사에게 말했다.
“이사, 나 색사를 배우고 싶은데.”
이사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 덤덤하게 말했다.
“네, 도련님. 말씀드려 놓을게요.”
대갓집에선 혼례를 치루기 전에 남자든 여자든 적당한 교육을 받는다. 현서의 형들과 누나도 전부 받았고 이것은 가까이서 부리는 사람에게 감추거나 숨길 일이 아니다. 이제껏 현서는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한 이사는 현서의 큰형인 대공자를 만나러 갔다. 대부인께 가도 될 일이나 그래도 둘 다 남성인 동성이니 대공자를 만나는 쪽이 더 나을 거란 이사 나름의 판단이었다.
이사의 설명을 들은 현규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만큼 동요했지만 곧 평정을 찾았다. 현규는 이사가 현상에게 가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 다행이라 말했다. 동갑이라 그런지 둘째인 현상은 패천검에 대한 감정이 좀 더 노골적이어서였다.
하지만 현규도 현상도 할아버님의 당부를 기억했다. 현서가 가족들의 눈치를 보느라 원하는 것을 포기했으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패천검을 털었지만 가족의 이름으로 반대할 만한 명분 하나도 찾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규는 사람을 보내겠다는 말로 이사를 물렸다. 현규의 목소리에는 복잡다단한 감정이 섞여 있었지만 이사는 모른 척했다.
며칠 후, 만희당에 낯선 사람이 들었다.
종아리까지 길게 천을 늘어뜨린 몽수를 쓴 손님은 자신을 상이라고만 소개했다. 집안에 따라선 색사를 가르칠 때 사람을 붙여 직접 실습하게 하거나 색사를 관람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호가는 그러지 않았다.
대공자의 소개로 왔다는 그는 간단한 이름 말고는 그 어떤 내력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실내에 들었어도 몽수를 벗지 않았고 요청으로 병풍까지 친 상태였다. 병풍 너머로 가벼운 인사가 오간 후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상이 본론을 꺼냈다.
“공자는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남성인 두 사람이 초야를 치를 때 알아야 하는 것 정도만 알면 됩니다.”
운우지정의 즐거움은 유위람과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고 현서는 기본 준비에 관심이 있었다. 현서의 말에 상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공자는 바라는 것이 확실하군요.”
이윽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상이 만희당 대문을 넘기도 전에 옥은 듣지 않을 거라며 의식을 돌렸다. 이사와 현서만이 상의 말을 경청했다.
한 시진(2시간) 정도의 대화 후에 상이 돌아가자 이사가 휴식을 권했다. 침상에 누운 현서의 이불을 덮어주며 이사가 말했다.
“향유가 중요하다니 종류별로 준비할게요. 도련님,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세요.”
“응. 고마워.”
작게 하품을 하곤 눈을 감는 현서를 두고 이사가 물러났다. 문을 닫으며 이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현서가 종종 할아버지처럼 군다고 툴툴거렸지만 이사는 현서와 동갑이다. 현서의 측근 시종이니 이사에게도 혼담이 제법 들어왔다. 하지만 스물다섯 이후 호부를 떠날 생각을 했던지라 전부 거절했던 이사는 도련님 덕에 남녀의 색사를 알기도 전에 남성끼리의 색사부터 알게 되었다.
처음 만희당 문을 넘었을 때 명명이 뭐든 알아두면 다 좋은 것이니,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다 배워두라고 했던 조언을 떠올리며 이사는 상념을 털어 냈다. 도련님의 두 번째 사람이 여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도련님이 쓰실 좋은 향유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여전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이 있을 거라 믿는 이사였다.
❖ ❖ ❖
겨울 연회 후, 호부의 사람들은 유위람의 장점이라곤 현서와 나란히 세워두면 인형처럼 잘 어울린다는 것밖에 찾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딱히 반대할 흠을 찾은 것도 아니었다.
유위람을 만난 대부인이 더욱 세심하게 현서에게 줄 인명록을 만들기만 할 뿐, 가족 중 누구도 현서에게 유위람의 일을 입대지 않았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드러누우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현서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사가 말했다시피 서운함과 탐탁찮음이 가라앉고 나니 현서의 기쁨이 눈에 보인 탓이었다.
현서의 증조부가 심한 쓰레기였던 탓에 조부인 호익원에게는 애정 없는 부부 사이를 경계하는 약간의 강박이 있었다. 때문에 자손들의 혼사에 많은 공을 들였다. 차남인 호상직이 뜬금없이 무림인인 이약약과 혼인을 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하는 이약약의 부모님을 설득한 것도 호익원이었다.
신경을 많이 쓴 덕인지 혼인을 한 아이들은 다들 사이가 좋았다. 장성한 자손들이 좋아하는 이와 마음을 나누고 내밀한 정을 주고받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현서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 가족과 주변인의 애정을 넘치도록 받았지만 연심은 또 다른 것이라 현서에게 오는 그 많은 혼서들을 볼 때마다 가족들의 가슴에 그늘이 졌다. 그들이 각자의 부인과 남편에 대한 돈독한 정을 품었기에 더욱 그랬다.
가족과 친우의 정만 있을 거라 여겼던 현서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유위람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얼굴은 물을 담뿍 머금은 봄의 새순처럼 화사했고, 반짝이는 눈망울에는 정이 가득했다.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들도 익히 겪어본 것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모두 알고 있었다. 유위람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그저 자신들의 욕심이라 해줄 수 있는 것은 현서의 첫사랑을 축하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허나 알면서도 못 하는 것이 사람이다. 호부의 사람들은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완벽한 성인군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현서가 없는 곳에서 양심은 뒈졌지만 눈알은 제대로 달린 놈이라고 구시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옥은 가끔 그 소리를 들었는데 제법 마음에 들어 들을 때마다 흡족해 했다.
하지만 산 너머 산이라고 했던가. 현서가 유위람을 좋아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라고 겨우 받아들인 가족들에게 동거도 모자라 독립하겠다는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꼭 동거를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현서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유위람이 좋고 그 사람과 쭉 미래를 함께 하고 싶은 걸요. 누님과 형님들께서 매형과 형수님들에게 그런 것처럼요.’
완벽한 정론이라 반론의 여지도 없었다. 뭐라 대꾸하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현서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혼례를 올려 명분을 챙기는 것이 좋을까요? 관의 호적에는 올리지 못하지만 각자 집안의 족보에는 올릴 수 있을 테니까요.’
독립을 반대하면 혼례부터 올릴 테다 하는 은근한 압력이 아니라 한 점의 사심 없는 진심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현서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혹시 나랏법에 위배될까 대전(大典)도 찾아보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대전에 안 된다는 조항이 없으니 해도 위법은 아니라는 해석까지 똑 부러지게 했다.
현서의 앞에서 유위람을 흉볼 마음은 없지만 여전히 대부인의 인명록은 도톰하고 현서의 연애 목록에 두 번째 세 번째도 있으리라 헛된 꿈을 꾸는 가족들은 결국 동거에 찬성해야 했다. 헤어질 때를 감안하면 혼인보다 동거가 더 나은 게 틀림없었다.
서녕 근처에 좋은 저택이 있다고 재빨리 말하는 큰형을 보며 현서가 배시시 웃었다. 소주에 이미 저택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소주에는 검각이 있는 항도가 있으니 모두들 유위람이 선수를 쳐 현서를 꼬드긴 것이라 여겨 이를 박박 갈았다. 사실 집을 구한 것도 현서였고 같이 살자고 말을 꺼낸 것도 현서였으나 유위람이 도둑놈인 것은 맞아 억울할 일은 딱히 없었다.
그렇게 겨우내 이사 준비를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단출한 짐을 예상했던 현서는 만희당을 아예 뜯어 보내려고 하는 가족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현서는 유위람의 조언대로 이사 후 연회를 열기 전까지 원림의 위치를 비밀로 하길 잘했다고 여겼다.
새 보금자리를 꾸미는 일로 전서구가 부지런히 항도와 서녕을 오갔다. 사실 아무것도 없는 원림을 반년도 되지 않아 다 채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현서와 유위람은 최소한의 살림살이만을 먼저 갖추는 것에 합의했다. 이를테면 둘이서 쓸 커다란 침상이나 물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현서를 위해 정방 옆에 욕탕이 있는 방부터 완성하는 것 말이다.
그렇게 이른 봄이 되자 현서는 이사만을 데리고 호부를 떠났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으로 유위람이 보낸 이들이 여럿이 있었다.
이사 말고는 아무도 같이 보내지 못한다며 부모님이 서운해 했으나 현서는 잘 알았다. 새 저택에서 첫 연회를 열고 나면 그 후로 서녕에서 보내는 심부름꾼들과 가족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을 것을 말이다. 그래도 서운해 하는 마음을 알아 현서는 손을 꼭 쥐고 자주 서신 보내겠다고 말했다.
남들 가는 여행을 가겠다고 드러누웠다가 몰래 원림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던 계획과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현서는 지금이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