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傳 二章. 상화원의 봄
유위람과 현서가 살 원림은 소주 단흥부(檀興部)에 있었다. 단흥은 큰 도시는 아니지만 풍광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이라 좋은 원림이 여럿 있는 지역 중 하나였다. 하우대에게 부탁할 당시 현서의 조건은 적당한 크기에 주변의 이웃과는 거리를 둘 수 있는 곳이었는데 딱 알맞은 곳을 찾아주었다.
현서가 서녕에 있는 동안 유위람이 혼자 원림을 찾았다. 위치가 항도에서 가까우니 저택의 살림은 자신이 채우고 싶다는 유위람의 청을 현서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원림은 유위람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특히 번잡한 곳과 떨어졌다는 점이 그랬다.
완벽하게 꾸미려면 일, 이 년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사이 현서와 떨어져 지낼 뜻이 손톱의 끝만큼도 없었던 유위람은 당장 사람이 살 수 있는 구색만을 갖추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감산에서 현서와 헤어지고 곧장 준비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월이 되어서야 대강의 준비가 끝이 났다. 유위람은 물론이고 실내 가구를 만든 장인들도 기뻐했다. 저 멀리 함주에서 많은 것을 뜯겼던 유위람의 가족들도 기뻐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현서와 이사는 송가장에 갈 때처럼 배를 타고 이동했는데, 역시나 안계현에서 잠시 내려야 했다. 작년에 묵었던 금수루에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현서가 잠시 멈칫하더니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도련님!”
예전과 비교도 못 할 정도로 건강해졌으나 그래도 여전히 약한 몸이다. 무엇보다 현서가 몸치인 것은 병약함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독을 먹지 않고 건강하게 자랐어도 수영을 못 배우는 몸이라는 얘기다.
그런 현서가 달음박질을 치니 이사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급히 쫓아가던 이사는 현서가 누구를 향하는지 알게 되자 속도를 늦추어 뒤따랐다.
놀래주려고 약속 없이 안계현에 와 있던 유위람은 현서가 배에서 내릴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이사와 곧장 금수루로 향하는 현서의 모습에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어 전음으로 현서를 불렀다. 걸음을 멈춘 것도 잠시, 현서는 금세 유위람이 있는 곳을 찾아내 정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에 현서에게 가려 했던 유위람은 현서가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주저 없이 뛰는 것에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좋아 작은 욕심을 부렸던 유위람은 곧 그 결정을 후회했다.
“유위람!”
넘어지기 전에 잡아야겠다고 마음먹기 무섭게 현서가 거추장스러운 몽수를 벗어버리며 활짝 웃었다. 기쁨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눈이 부신 미소에 유위람은 일순 숨이 막혔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유위람만 가지는 감상이 아니었다. 왁자지껄한 항구에 한 순간 소리가 사라졌다.
유위람은 제 욕심이 스스로의 발등을 찍은 것에 혀를 차며 급히 현서를 품에 안아 올렸다. 주변의 반응이 눈에 들어올 리 없는 현서는 넘어지기 직전이었는데 절묘하게 잡았다며 와르르 웃으며 목에 팔을 감았다.
“보고 싶었어요.”
현서가 유위람의 뺨에 자신의 볼을 찰싹 붙이고는 속삭였다. 주변의 시선이 현서에게 몰린 것에 뾰족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유순해졌다.
“저도 그렇습니다. 아주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유위람이 사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겨울 연회 이후 유위람이 두 번 호부를 방문하긴 했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현서도 마찬가지라 유위람이 보고 싶을 때마다 수련에 몰두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다 만난 충만한 기쁨이 옥에게 여과 없이 전해졌다. 유위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별개로 현서의 행복은 옥이 싫어할 리 없는 일이었다.
―내 팔자야.
앞으로 이런 일들을 비일비재하게 볼 것임을 아는 옥은 잠시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날씨가 무척 좋았다.
금수루 입구에서 현서 일행을 맞이한 것은 작년에 보았던 그 점소이 아이였다. 일 년 사이 훌쩍 자랐으나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현서는 선물로 과자 주머니를 잔뜩 안겨주었다. 도련문이나 화오궁에 얽히지 않고 무사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였다. 영문을 모르는 점소이는 귀한 과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열 살 아래의 아이들을 유심히 보는 게 버릇이 들어서요.”
점소이를 챙기는 것에 유위람이 궁금해 하자 현서가 설명했다. 단번에 제자를 들이는 일에 관해서라는 걸 알아들은 유위람이 물었다.
“제자는 당장 들이지 않을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근데 인연이라는 게 어찌 될지 모르니까요.”
유위람의 물음에 약간의 조급함이 섞인 것을 깨닫지 못한 현서는 가볍게 대답한 뒤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 저도 무슨 기준을 두고 제자를 들여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특별히 자질이 뛰어난 아이를 찾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아이들을 보면 눈이 가네요.”
유위람이 시커먼 속내를 숨기며 다정하게 말했다.
“호 공자의 말대로 인연이 있으면 만나게 될 테니 서두르지 않아도 좋겠지요.”
옥과 이사가 동시에 속으로 혀를 찼으나 서로 듣지는 못했다. 현서는 당장 제자를 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라며 유위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져 있는 동안 전서구만 날린 것이 아니라 서신도 부지런히 썼다. 새의 다리에 달 수 없는 두꺼운 서신 꾸러미들을 주고받았지만 그래도 하고픈 말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금수루에서 사흘을 쉬다 움직일 예정이라 현서는 유위람과 떠들다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여전히 유위람의 품이었다.
현서가 내려오려고 꾸물거리자 유위람이 고쳐 안아 내려가지 못하게 했다.
“불편하지 않아요?”
“전혀요.”
“무거울 텐데.”
“그럴 리가요.”
유위람이 현서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 역시 오래도록 현서를 보지 못해 애가 닳았다.
현서는 서신에 살이 올랐다고 말했으나 유위람은 겨울에 보았을 때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서녕에서 잘 지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혈색이 더 좋았다.
그럼에도 유위람은 잠든 현서를 한시도 품에서 떼놓지 않고 고른 숨과 안정적인 맥박을 느끼려고 들었다.
화오궁주는 추적 끝에 정우문의 소문주가 그 목숨을 거뒀고, 사영은 감윤이 죽였다. 곽다순은 이제 인세에 나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 주경이 말했다. 현서에게 독을 먹였던 친척도 전부 정리되었다. 그들이 야기했던 쓸데없는 혼사까지 호가가 말끔히 마무리를 지어 유위람이 따로 뒤에서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이제 현서가 같이 살자고 청해준 우리 집에서 즐거운 나날만 보내면 되는데도 가끔 정체 모를 불안이 치솟았다. 서녕이 항도와 멀어 잡념이 끼어든 탓이다.
혹시라도 잘못될까 꽉 껴안지도 못하는 유위람의 심정을 아는 것처럼 현서가 팔을 뻗어 힘껏 안아주었다. 현서 나름의 힘껏이라 유위람이 조금만 움직이면 떨궈져 나갈 테지만 유위람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으로 묶인 것처럼 안도했다.
“월영사로 사람을 묶어둔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 무섭습니다.”
스승님들의 헛소리를 떠올리는 날이 오다니. 유위람의 탄식에 현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턱 끝에 입을 맞췄다.
“전에도 그러더니, 유위람은 묶이는 게 좋아요?”
현서의 순한 물음에 유위람이 소리 내 웃었다.
“호 공자가 해주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지요.”
현서는 저 말이 농담인지 가늠하다 농담이든 아니든 유위람이 원한다면 묶어줘야지 하고 머리 한구석에 잘 갈무리해 두었다.
“배는 고프지 않습니까?”
“아직은 괜찮아요. 그보다 저랑 목욕할래요?”
유위람이 불시에 뒤통수를 맞은 얼굴을 했다. 저렇게나 노골적인 유혹의 말을 들을 줄 몰라서였다. 유위람이 놀라 굳은 줄 모르는 현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사를 불러 목욕물을 준비시켰다. 목욕을 하겠다는 말에 이사가 덤덤히 물었다.
“탕조를 두 개 들일까요?”
“응. 그렇게 해줘.”
유위람은 그제야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았다. 작년 두 사람만 영우로 향하던 때에 방 하나에 탕조를 두 개 들여 씻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은근히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안 할 것은 아니었다.
목욕 시중이 필요 없는 걸 알아 이사는 두 사람만 방에 둔 채 다시 물러났다. 목욕용 중의를 입은 현서가 유위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향이 좋지요? 욕조의 든 물이 전부 차를 우린 물이래요. 작년에도 여기서 목욕을 했었는데 커다란 찻잔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지 뭐예요. 유위람도 들어가 봐요. 마음에 들 거예요.”
현서의 권유에 유위람이 성큼 다가와 현서를 안아 들고는 탕조에 들어갔다. 성인 한 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크기라 둘이 들어가기엔 애매했지만 유위람이 현서를 자신의 다리 위에 올리는 걸로 해결했다.
다행히 물은 넘치지 않았지만 현서는 당황해 건너편의 빈 탕조를 보다 유위람을 보았다. 왜 여기에 같이 들어왔지, 라고 생각하는 표정이 빤했다. 눈을 내리깐 유위람이 물이 묻어 촉촉한 현서의 뺨을 만지며 속삭였다.
“목욕하자 권하기에 호 공자가 유혹하는 건 줄 알았지요.”
은근한 유위람의 말에 볼을 붉힌 현서가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탕조에서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나요?”
속성으로 배운 수업은 뭐든 침상을 기본으로 한 탓이다.
“여러 가지가 있지요.”
유위람이 자연스럽게 벌어진 현서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혀가 엉킬 때마다 소리가 되지 못한 신음이 흘렀다.
“읏. 으응.”
현서는 팔을 들어 올려 유위람의 목에 감았다. 아예 마주 보는 자세가 되면서 욕조 안의 물이 크게 출렁였지만 두 사람은 눈치채지도 못하고 입맞춤에 열중했다.
뜨거운 물이라 현서가 더 빨리 열이 오를까 유위람은 조심해야 했으나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숨을 고를 때마다 입술을 핥으며 안달했던 유위람처럼 현서도 마찬가지였다.
“흣.”
차오르는 달뜬 숨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현서가 급히 유위람에게 달려들었다. 이빨이 부딪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현서가 유위람을 채근했다. 서툴지만 어떻게든 자신과 더 붙고 싶어 안달하는 입맞춤이 좋아 유위람이 목구멍 안으로 웃었다.
양껏 하지는 못했으나 이 이상 했다간 현서가 탈진할 상태가 되어서야 유위람은 아쉬움을 접으며 입술을 뗐다. 물에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며 유위람은 몽롱한 얼굴로 숨을 고르는 현서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춰댔다.
간지러운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던 현서가 정욕으로 새빨개진 눈을 하곤 유위람을 부추겼다. 빈말로도 팔팔하다고 할 순 없지만 현서도 한창때의 성인 남자다. 좋아하는 사람과 살을 맞대는 것을 마다할 리 없다는 의미다.
현서의 허락과 함께 조금, 조금은 더 할 수 있다는 셈이 끝나자 유위람은 계속 눈을 끌었던 가슴팍으로 고개를 숙였다. 물에 젖어 달라붙은 욕의 너머로 달아 보이는 유두가 선명했다.
“아읏.”
생경한 자극에 놀란 현서가 물러나려고 발끝에 힘을 줬다. 하지만 두 사람이 꽉 들어찬 탕조에서 현서의 행동은 유위람을 자극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엉덩이로 문지르자 반쯤 서 있던 유위람의 양물이 순식간에 크기를 키웠다. 따뜻한 물 안에 있어도 확실히 느껴지는 뜨거움이었다.
유위람이 젖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얼굴을 들었다. 현서가 싫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겠다는 뜻으로 본 것이나 받아들인 쪽은 전혀 달랐다. 그저 자신의 입술을 핥은 것뿐이었는데도 눈 둘 곳을 모르게 된 현서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호 공자?”
욕망에 낮아진 목소리와 가라앉은 유위람의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저 얼굴, 저 표정을, 저 목소리를 좀 더 보고 싶어 현서는 홀린 듯이 욕의에 감긴 유위람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호 공……. 흣. 이, 잇, 이게 지금. 흡.”
유위람은 현서의 대담함에 화들짝 놀랐으나 몸을 물리거나 거절하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욕조에서 하는 건 배우지 못했지만 손으로 만지는 것은 배웠기 때문이라는 걸 유위람은 몰랐다.
차를 넣었다 해도 욕조의 물은 맑아 벌어진 욕의 사이로 유위람의 커다란 성기가 잘 보였다. 이미 힘을 받아 단단해져 있던 그것이 현서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한 손으로 잡았더니 수월하지 않아 양손을 써야 했다.
잡을 때 완전히 발기했다고 여겼는데 손 아래서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단지 기분 탓이라 여긴 현서가 서툴게 손을 흔들었다. 몽정은 했어도 수음은 해본 적 없는 현서였으나 본능적으로 기분이 좋은 행동이 무엇인지 알았다.
현서는 자신이 빈말로도 능숙하지 않았다는 걸 아나 이 어줍은 손놀림에도 얼굴을 붉히며 신음하는 유위람의 모습에 오싹한 쾌감을 느껴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눈썹을 찡그리고 숨을 뱉는 얼굴에 넋을 판 현서의 손이 미끄러지며 손톱 끝이 귀두를 긁었다. 그것까지 전부 성감이 되어 유위람의 쾌감으로 변했다.
“후웃.”
단 숨을 뱉으며 유위람은 자신을 넋 놓고 보는 현서를 바짝 잡아챘다. 자신의 것을 만지며 반쯤 발기한 현서의 성기를 잡아 문질렀다. 유위람 역시 남의 성기를 잡는 것이 처음이었지만 현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능숙했다.
“아…… 아.”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귀두 끝을 짓누르듯 비비자 현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속절없이 신음만 뱉었다. 과한 쾌락에 자지러져 도리질 치는 현서의 눈가를 핥으며 유위람은 현서의 양손이 두 개의 성기를 붙들게 했다. 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움직이는 손에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꾸만 가쁜 숨을 내쉬는 것이 성감이 올라서인지 숨이 모자라서인지 현서는 구분하지 못했다. 쾌감이 튈 때마다 현서의 눈앞도 같이 튀었다. 이미 욕조의 물이 넘쳐흐른 지 오래였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힘이 빠진 현서가 뒤로 넘어가려 하자 유위람이 한 손으로 등을 받쳤다. 현서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자신이 현서의 양물을 잡아 함께 비비면 될 일이지만 현서의 손이 좋아 유위람은 한 손으로만 도왔다.
“하아.”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숨이 찰박거리는 물소리에 섞여 들었다. 서툴게 허리를 움직이며 현서는 유위람에게 조금이라도 더 닿기 위해 애를 썼다. 빨리 이 추락하는 것 같은 감각을 해소하고 싶었고 동시에 좀 더 끌고 가고 싶기도 했다.
“아, 아, 읏.”
현서가 유위람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사정했다. 녹초가 된 현서가 더 이상 손을 움직이지 못하자 유위람이 현서의 손을 겹쳐 잡은 채로 움직였다. 사정의 여운으로 예민해져 있는 양물이 바짝 독이 오른 유위람의 양물에 쓸릴 때마다 소름이 돋아 올랐다.
“흥. 흐응. 으으응.”
유위람이 움직일 때마다 현서가 귓가에 쏟아 내는 신음은 귀가 범해지는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윽고 허리에 잔뜩 힘이 들어간 유위람이 현서의 손 아래서 사정했다.
“하아.”
이 정도로 지칠 리도 없고 지쳐서도 안 되지만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에 달콤한 숨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현서 역시 마찬가지인지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으나 기분은 좋아 보였다. 현서는 여전히 유위람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로 웅얼거렸다.
“탕조는 좁네요. 우리 집에 큰 욕탕을 만들길 잘한 것 같아요.”
목욕을 좋아하는 현서를 위해 만든 것이지만, 현서는 이 새로운 사용법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춥진 않습니까?”
물이 신경 쓸 만큼 식지 않았으나 더러워졌으니 곁에 있는 탕조로 현서를 안아 옮기려던 때였다. 새파랗게 질린 현서가 번뜩 고개를 들다 뒤로 넘어갔다. 뜨거운 물에서 사정까지 했으니 현서 입장에선 전력 질주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유위람이 급히 현서를 잡았다.
“호 공자?”
몸이 나쁜 것 같진 않았는데, 그래도 너무 한 번에 자극이 과했나 싶어 놀란 유위람이 이사를 부르려던 그 때 현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아, 이를 어째.”
현서의 시선이 왼팔의 팔찌를 향해 있었다. 그제야 유위람은 현서와 즐거운 시간에 정신이 팔려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를 떠올리곤 탄식했다.
옥 님이 대노한 것이다.
현서가 유위람을 만나 느낀 충만한 행복을 옥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만은 둘이 실컷 회포를 푸는 걸 내버려 두려고 의식을 아래로 가라앉혀 두었다. 현서가 옥이 깊은 생각에 빠지면 대답하지 못한다고 말했던 그 상태였다.
그렇게 현서를 위해 한 발 물러났던 옥은 정신을 끌어올리기 무섭게 저 시커먼 놈의 흥분한 양물이 사정하는 장면을 맞닥뜨려야 했다.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을 뻔했던 옥이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유위람이 재빨리 사죄했다. 상황을 무마시키려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전부 제 불찰입니다. 옥 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옥도 유위람도 아무리 화를 내고 사과를 하는 상황이라도 현서를 젖은 채로 둘 리가 없었다. 유위람이 급히 현서를 씻기고 말리고 옷까지 갈아입히는 동안 현서는 끊임없이 옥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색사를 할 때 팔찌를 벗어두라는 옥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유위람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현서는 옥이 무엇을 보고 화가 났는지 알아 더욱 민망하고 미안할 뿐이었다.
현서는 거듭 사과했으나 옥은 대답이 없었다. 옥이 대답하지 않는 것은 정말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현서는 두 번 다시 이런 불찰은 없을 거라고 사과했다.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릴까.’
설마 나랑 계속 말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 현서가 울상을 지었다.
유위람이 현서의 시중을 든다고 해도 너무 오래도록 자신을 부르지 않는 것에 의아해진 이사가 방에 들어왔다.
“도련님?”
보송보송해진 도련님이 잔뜩 굳은 얼굴로 침상에 앉아 있고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의 패천검이 침상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설마 두 분이 싸우셨나.’
호부에 있는 내내 유위람을 그리워했고, 아침의 그 미소를 떠올리면 두 사람의 싸움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캐어물을 상황이 아니라 우선 병풍 뒤로 물러나 탕조를 물리려던 이사는 두 사람이 탕 하나를 쓴 것을 보았다.
현서가 배울 때 이사가 같이 있었으니 금방 무슨 상황이 있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도련님이 만족을 못 하셨나?’
색사에 관심을 보였으니 도련님이 원치 않았을 리는 없는데, 또한 패천검이 억지로 했다면 분위기가 저 정도일 리도 없었다. 이사는 색사가 만족스럽지 않아 헤어졌다는 사람들의 얘기도 있다는 걸 떠올리며 조용히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 시중을 들러 온 이사는 여전히 이상한 광경을 목도했다. 도련님이 혼자 침상에 누워 있었다. 패천검이 자리를 비웠다고 보기에는 곁에서 잠을 잔 흔적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 물어보았다.
“도련님, 패천검께서는 자리를 비우셨나요?”
“아니. 유위람은 옆방에서 잤어.”
“따로 주무셨다고요?”
금수루 오 층을 통째로 빌렸으니 방이 모자랄 리는 없지만 서녕에서처럼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데 따로 자는 것이 이상했다. 무엇보다 말을 하는 현서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이사가 현서를 일으켜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색사가 안 맞아서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곤 하지만 도련님과 패천검은 이제 처음이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처음에 안 맞아도 노력해 보면 차차 좋아지지 않겠어요?”
이사의 말에 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사가 무슨 착각을 했는지를 알게 된 현서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냐. 안 좋기는, 안 좋았을 리가 없잖아. 그게 아니라.”
현서가 시무룩한 얼굴로 털어놓은 내막은 이사의 상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팔찌가 화를 냈다고요?”
도련님이 거짓말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옥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하는 옥이라는 존재가 크게 와 닿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간 이사는 옥의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고 도련님의 오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정도로만 여겼다.
헌데 정말 옥에게 이지가 있다면 크게 화를 낼 만한 일은 맞았다. 더욱이 색사 땐 자신을 빼놓으라고 미리 말해 놓았다지 않은가. 열네 살 이후 도련님의 팔에 쭉 있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때만큼은 같이 있지 않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 표명이 아닐 수 없었다.
“응. 그래서 원림에 도착할 때까지 접근 금지를 지키면 화를 풀겠다고 해서.”
“화가 많이 나셨나 보네요.”
“응. 어쩔 수 없지.”
순간의 욕정이 불러일으킨 사고였다. 옥은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이 다시 생기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이 떨어져 반성하라고 말했다. 안계현에서 장원까진 스무 날은 걸린다. 그 스무 날 동안 두 사람이 먼발치에서 보라는 얘기다.
그 후로 매일 유위람이 청승맞은 표정으로 현서의 주위만 뱅글뱅글 도는 것을 보며 이사는 말하는 옥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다.
‘도련님의 옥팔찌가 진짜 이지를 가지고 말을 하는구나.’
도련님의 상상일 수가 없었다. 저 방법은. 더군다나 저건 패천검만이 아니라 도련님에게도 벌이 된다.
‘도련님이 만들어 낸 거라면 자신만 힘들지 패천검이 저런 얼굴을 하게 만들 리 없지.’
색사의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이사의 예상은 틀렸지만 접근 금지 형을 단호하게 내거는 옥에게 이사는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말하는 것을 몰랐을 때도 상서로운 옥팔찌였는데, 말하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이사는 더더욱 옥을 믿으며 그 편이 되기로 했다.
옥은 현서가 날짜를 줄여달라고 말하면 단호하게 거절하려고 굳게 결심해 두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현서와 유위람은 약속을 착실히 지켰다.
어차피 배에선 멀찍이 떨어질 공간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서의 선실에 따라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접촉 금지만 내렸지 같이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하는 것들까지 금지를 시킨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하루의 대부분을 선상에서 지냈다.
“저는 다섯 칸을 움직이겠습니다.”
“저는 이번엔 쉴래요.”
“그럼 소인이 세 칸을 움직일게요.”
―나는 두 칸만 움직이겠다.
현서와 이사, 유위람, 그리고 옥까지 선상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유위람이 현서와 옥 둘을 위해 제안했다. 배에서 할 만한 놀이론 적당했고 옥의 기분을 적게라도 풀어주겠다는 속내도 있긴 했다.
시작은 그러했지만 넷은 곧 놀이에 골몰했다. 바람이 불어 현서의 머리칼이 이리저리 휘날리는 것에 유위람이 반사적으로 손을 대려다 허공에서 헛손질을 했다. 현서는 눈을 찡그리고 있어 유위람이 뭘 했는지를 보지 못했다.
이사는 유위람이 슬그머니 손을 치우는 것을 모른 척해 주며 자신이 현서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고마워.”
“별 말씀을요. 춥진 않으세요? 바람이 간간이 부니 머리칼을 한 번 더 묶는 게 좋겠어요.”
“춥진 않아. 그럼 부탁할게.”
이사가 익숙하게 현서의 시중을 드는 것을 유위람이 부러움에 찬 눈길로 보았다. 옥은 정말로 확실한 방법으로 두 사람, 특히 유위람을 교육했다. 유위람이 옥 님을 원망할 리는 없지만 이 혹독한 교훈은 뼈에 새겼다.
‘다시 잊어버리면 내가 곽나난 아들이다.’
대자인 완비의 동생이 되겠다는, 곽나난이 소름끼쳐 하며 칼부림을 할 법한 다짐을 하는 유위람이었다.
원래 콩가루인 남의 집 족보를 제 마음대로 더욱 심한 콩가루로 만들려 한 것과 별개로 뭔가 수를 써야 했다. 반성은 반성이고 이대로 단흥에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순 없었다. 현서가 전음을 쓸 수 있다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기며 유위람은 자신의 계획을 현서에게 속삭였다.
유위람의 꼼수는 간단명료했다. 옥이 조건을 원림에 도착할 때까지로 걸었기 때문에 일정을 당긴 것이 전부였다. 날씨도 좋았고 선원들의 사기를 높일 두둑한 금전도 있었다. 그 덕에 스무 날이 더 걸리는 일정을 닷새나 당겼다.
두 사람이 전음으로 속닥이며 꾸민 일에 옥이 어이없어 했지만 트집 잡지는 않았다. 안계현에서의 일로 괘씸한 것은 유위람 놈이지 현서가 아니어서였다. 더욱이 유위람을 보아하니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화를 내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일정은 당겼으나 유위람에게 안겨 다닐 수 없어 피곤이 가득 쌓인 현서가 눈을 비비며 저택 앞의 현판을 보았다.
<상화원(相和園)>
앞으로 현서와 유위람의 집이 될 원림의 이름으로, 부부 사이가 화목하고 서로 잘 어울린다는 뜻을 가진 금슬상화(琴瑟相和)에서 따왔다.
처음 유위람이 이 이름으로 현판을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현서는 노골적인 이름에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허나 유위람이 서신마다 부지런히 상화원에서 둘이 지낼 날들을 고대한다고 말해 도착했을 때는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았다.
미리 도착해 있던 유위람의 사람들이 도열해 그들을 맞이했다.
“예상보다 더 할 일이 많네요. 제법 바쁘겠어요.”
상화원의 총관사가 된 이사가 말했다. 말은 걱정하는 것 같았으나 저택을 정비하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일반적인 원림에 비하면 작다는 뜻이지 주거용으로 쓸 내택의 건물 외에도 건물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를 마친 것은 현서와 유위람의 처소와 이사를 비롯한 사용인들의 거처뿐이었다. 그것도 이사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원림의 구경은 차차 하고 우선은 쉬어야 해서, 그들은 곧장 내원의 정방으로 향했다. 저택에 도착했으니 거리낄 것이 없어진 유위람이 냉큼 현서를 안고선 척척 걸어갔다. 평생 둘을 뜯어놓을 것이 아니니 옥은 그 흉한 일을 이것으로 넘어가 주기로 했다.
―저택은 저런 낯간지러운 이름으로 정하고 정작 정방의 이름은 수강당(壽康堂)이라니.
옥이 어이없어했다. 수강, 장수와 건강을 의미하는 것이니 뜻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허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원림의 이름을 수강원, 정방의 이름을 상화당으로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위람은 사이좋은 한 쌍이 사는 저택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쪽을 택했다. 정말이지 원림의 이름부터 정방의 이름까지 유위람의 소망을 꼼꼼히 반영해 고른 것이 여실했다.
정방의 이름은 모르는 현서는 이미 잠이 들어 유위람의 품에 안겨 방에 들었다. 안쪽의 내실로 들어가자 연꽃과 상사수를 조각한 화리목침상이 보였다. 침상의 너비가 평범한 침상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것이 남달랐다.
―얼씨구.
다산의 상징만 있으면 신혼부부의 방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이사 역시 따라 들어와 방의 온도는 어떤지, 이불 두께는 적당한지 등을 살폈다. 준비가 잘되어 있어 이사는 흡족해 했다. 합격을 받자 유위람은 이사를 물리고 잠이든 현서를 깨우지 않은 채 시중을 들었다.
유위람은 자신이 고른 침상에 누워 달게 자는 현서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모든 것이 근사하게 완벽했다. 가만히 현서를 보던 유위람이 입을 열었다.
“옥 님께 먼저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지금 말하겠습니다. 벽면에 상자들이 보이시지요? 그것은 전부 옥 님의 것입니다. 원하시는 상자를 호 공자에게 말하면 됩니다.”
―허.
침상의 벽면에 길게 짜놓은 낮은 장 위에 상자들이 조롱조롱 줄 서 있었다. 그저 장식인 줄 알았던 옥은 그게 전부 자신의 방으로 쓰일 상자라는 얘기에 어이없는 숨을 내뱉었다.
족히 열 개는 넘어 보이는 상자들은 겹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침향, 편백, 녹나무, 홍목부터 시작해 금이나 진주, 마노, 비취, 수정, 백보석(白宝石), 벽옥 등 참으로 다양했다.
“이 중에서 제가 주문한 것은 셋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하례 선물로 받은 것들입니다.”
옥의 대꾸를 들을 수 없는지라 유위람은 그저 쭉 이어 말하는 것을 택했다.
“백주봉에서 호 공자가 내력을 쓰는 것을 본 이들의 입은 전부 무겁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뿐 생각은 하겠지요. 방천파의 위 장로님과 의당의 의선께서 호 공자가 쓰는 내력이 눈에 익은 모양이었습니다. 위 장로님은 발현된 내력의 흐름으로, 의선께선 진맥을 해보고 아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유위람이 현서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제 욕심이긴 합니다만, 호 공자는 필요하면 자신이 검선의 환생임을 밝히겠다고 했으나 저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현서는 자신이 내력을 쓴 일을 명백히 밝혀야 하는 일이 생기면 옥이 신병이기로 소문나 피에 잠기는 쪽보다 자신이 미치광이로 손가락질받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옥과 유위람은 서로 대화를 하지 못하지만 현서의 그 뜻을 반대하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함을 잘 알고 있었다.
“먹기만 하면 일 갑자의 내력이 높아지는 영약이나 삼류 무인도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준다는 비급은 허무맹랑해 보여도 일찍이 있었던 것들입니다. 강호에는 온갖 괴사가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 많은 괴사 중에서도 죽은 사람이 돌아왔다거나 고인이 환생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호 공자가 사실을 밝히면 엄청난 관심을 끌겠지요. 그래서 저들이 작은 착각을 하도록 두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호 공자가 옥 님으로부터 무공을 배워 검선의 후인이 되었다고 여깁니다. 강호인에게 환생은 허무맹랑하나 신병이기가 무공을 가르치는 것은 놀랍긴 해도 적당히 믿을 수 있는 얘기니 말입니다.”
유위람은 줄곧 현서를 관찰해 왔고 무엇보다 곽다순과 현서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현서가 자문원의 환생이라는 매우 확고한 증거였다.
사실 현서가 팥을 돌이라고 해도 그렇구나 하고 고개 끄덕일 유위람 정도가 아니면 누구나 불신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유위람은 현서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싫지만 현서가 진위 여부를 가리는 눈초리, 아주 작은 의심의 눈초리도 받는 것도 싫었다.
현서는 전생인 검선과 선을 그었으나 그 기억은 있다고 했다.
검선은 그 뛰어난 무위와 다정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신을 의심하고 폄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다. 유위람은 현서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는 것을 두고 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검선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은 어린아이라 도움이 되지 못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위 장로님과 의선을 비롯해 총 여섯 명의 사람이 옥 님이 호 공자에게 무공을 가르친 것으로 압니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요. 아마 이사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나난을 비롯한 네 사람은 검선의 후인이 생긴 것을 축하하기 위해 옥 님께 선물을 보낸 것입니다.”
옥팔찌가 말하는 것에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나 검선의 팔찌면 그럴 수 있다고 모두 납득했다. 그들은 현서가 후인이 되어 검선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기뻐했다. 아무리 검선의 사당을 만들고 검선을 기려도 그의 후인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위람이 좋은 의도로만 저들이 오해하게 내버려 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현서가 자문원의 환생이라는 것을 밝히면 곽나난과 다른 세 사람은 큰 무리 없이 받아들일 것이 확실했다. 당연한 얘기로 그들 중 현서에서 유위람 같은 흑심을 가진 이들은 없다. 허나 검선에 대한 존경은 다들 뒤지지 않게 비슷했다.
그러니 잠시 충격을 받은 다음엔 검선을 대하듯 현서를 대하며 그 주위를 맴맴 맴돌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유위람이 그 꼴을 어찌 본단 말인가.
그런 내밀한 사정까지 모르는 옥은 겉으로 보이는 일처리가 제법 만족스러웠다. 유위람이 듣지 못할 칭찬을 건넬 정도로 말이다.
―네가 일을 썩 잘했구나.
앞으로 현서가 키울 제자까지 생각해 일의 아귀가 맞도록 유위람이 손을 써 정리했다. 모든 것을 밝혀야 할 상황이 생긴다면 현서는 옥을 뒤에 두고 자신이 전면에 나서겠다 했으나 옥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현서가 옥을 걱정하듯 옥 역시 그러했으니까.
현서가 손해 볼 일을 만들지 않는 유위람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둘이 있으면 균형이 맞는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여전히 유위람이 맘에 차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서가 저리도 좋아하니 지금은 두고 볼 밖에. 뭐라 해도 옥 역시 호부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라 당장은 현서가 기뻐하는 일을 반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음날 눈을 뜬 현서는 부스스한 얼굴로 유위람에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옥이 알겠다고 전해달래요.”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호 공자도 궁금할 테니 아침을 먹으면서 말하죠.”
유위람이 눈가에 입을 맞추며 현서를 일으켰다.
볶은 땅콩을 부숴 넣은 고소하고 따끈한 죽을 아침으로 먹으며 현서는 팔찌의 새로운 방이 될 상자의 얘기를 들었다. 아직 침상 주위를 제대로 보지 못해 상자를 보지 못한 현서는 기대감에 들떴다.
‘맘에 드는 게 있었어?’
―어디든 들어가면 다 똑같은 상자가 아니냐. 흙에 파묻히든 상자에 들어가든 내겐 다 똑같다.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옥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현서가 웃으며 유위람에게 말했다.
“옥도 마음에 드나 봐요. 전 상자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고마워요. 다른 분들께도 감사하다고 서신을 써야겠어요.”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생선을 발라주며 여상히 덧붙였다.
“호 공자는 서녕에도 서신을 써야 하니 상자에 대한 감사 인사는 제가 대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녕에 보내는 서신은 오늘 쓸 테지만 다른 서신은 오늘 다 쓰지 않을 테니 괜찮아요.”
현서가 검선의 환생임은 모르지만, 검선의 후인이라 믿고 있으니 서신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을 놈들이다. 그런 놈들에게 현서의 자필 서신을 주고 싶지 않은 유위람의 꿍꿍이를 전혀 모르는 현서였다.
옥과 이사는 완벽하게 유위람의 의도를 짚어 내지 못했으나 저것이 개수작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그간 유위람에게 서신을 잔뜩 썼잖아요? 이제 서신을 몇 장 쓰는 정도는 문제없어요.”
“그도 그렇습니다만, 여독이 풀리지 않았으나 천천히 하는 게 좋겠습니다.”
현서가 써 보냈던 두툼했던 서신들을 떠올린 탓인지 유위람의 표정이 한층 온화해졌다. 개수작도 훌륭히 잘라 내고, 유위람의 기분까지 좍좍 펴주는 것에 이사는 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도련님 연애 잘하시네.’
이사의 감탄을 뒤로 하고 현서와 유위람은 즐거이 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 상자를 구경하러 간 현서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어느 상자 하나 대강 만든 것이 없었다. 귀한 재료들을 사용한 것도 그렇지만 만듦새에 품이 많이 들어간 것이 한눈에 보였다. 색이 무척 고운 산호로 장식한 상자를 열어보고는 현서는 들뜬 목소리로 옥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예쁘다. 안도 폭신폭신하고 부드럽네. 너는 무슨 상자든 다 좋다고 했지만 그래도 다음에는 네가 원하는 걸로 만들어볼까? 상자 몇 개를 써보고 나면 네 취향을 알 수도 있으니까. 근데 사실 나는 네가 내 팔에 있는 게 제일 좋아. 하지만 유위람과 어, 그럴 때도 내 팔에 있어달라고 하는 건 안 될 일이니까. 그래서 말인데 상자가 아무리 맘에 들어도 계속 거기 있고 싶다고 말할 건 아니지?’
예쁜 상자에 혹해 신이 나 떠들던 현서는 혹시라도 옥이 상자를 자신의 팔보다 더 맘에 들어 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생각이 닿았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물었다.
―말이라고 하느냐. 내가 떨어져 있겠다는 건 너와 저놈의 색사 때문이지. 그 외에 왜 내가 너와 떨어져 있어야 해. 너야말로 상자를 핑계로 나를 떼어두려고?
‘그럴 리가. 전혀. 절대로 아니야.’
현서가 그런 마음을 먹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파르르 부정하는 것이 귀여워 괜히 심술 부린 옥이었다.
‘옥 님이 재미있는 얘길 하셨나 보군.’
이제 옥과 대화하는 것을 숨기지 않아 무방비하게 드러내는 현서의 표정을 보는 유위람의 얼굴에 흐뭇함이 서렸다. 좋은 사람과 좋은 것이 같이 있는 광경이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면 무슨 얘길 했는지 조곤조곤 얘기해 줄 것이니 그것을 기다리는 즐거움도 있었다.
현서는 여독을 푸느라 도착하고 한동안 수강당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사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서녕에 서신을 보내고 며칠에 나누어 상자를 선물해 준 이들에게 감사 편지도 썼다.
수강당에 만들어놓은 욕탕에서 온욕도 했다. 당연히 유위람이 곁에 있었으나 팔찌를 차고 탕에 들었기 때문에 안계현에서와 같은 불상사는 없었다. 옥이 접문 정도는 내버려 둔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린 유위람이 수작을 부려 그것만은 실컷 했다.
그리고 날을 잡아 화정이 소개해 준 의원을 만났다. 늘 먹는 약은 주기적으로 정 의원께 받지만 현서가 이곳에서 지내려면 실력 좋은 의원부터 알아놓는 것이 중요했다.
의당의 사람은 아니지만 단흥에서 대대로 의원을 한 집안의 의원이라 근방에서 명의로 이름이 자자했다. 불혹을 넘긴 의원은 집안의 가훈인 ‘입이 무거운 의원이 오래 산다’라는 뜻에 따라 과묵한 사람이었다. 서녕호가의 장중보옥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패천검 유위람을 보고도 별말 하지 않았다.
피로가 쌓인 것 말고는 현서의 상태는 크게 나쁘지 않으나 몸이 약한 것은 맞으니 자주 진맥을 하는 것이 좋겠다며 피로 회복에 좋은 처방과 단흥 특산물로 만드는 보양식 몇 개를 알려주고 떠났다.
그렇게 상화원에 도착하고 보름이 지난 볕이 좋은 날, 현서와 유위람은 드디어 수강당을 나와 원림을 둘러보기로 했다.
현서가 걸어 전부를 살핀다면 반도 못 보고 나가떨어질 것이 분명해 수강당을 벗어나기도 전에 유위람이 안아 들었다. 작은 가마의 대용을 자처한 셈이다.
이사는 상화원을 정리하는 일로 바쁘고 유위람이 미리 뽑아놓은 사용인들은 눈치가 좋았다. 두 사람 뒤로 붙어 따라오겠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었다.
상화원은 유위람에게도 의미 깊은 곳이라 아무렇게나 꾸미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아직 빈곳이 많았지만 원림 자체의 조성이 그리 나쁘지 않아 구경하기에 괜찮았다.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현서가 상화원의 전체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줄곧 그림으로 보아왔다. 처음 저택을 살 때 하우대가 보낸 평면도 외에 유위람이 보낸 것도 있었다.
“아뇨. 오늘 다 보지 않아도 좋으니까 천천히 봐요.”
“좋습니다.”
유위람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수강당 뒤편의 작은 원락이었다. 원락은 평범한 세 칸짜리의 건물이지만 뜰에 드넓게 펼쳐진 황철석바닥이 특이했다.
“수련을 위한 곳입니다. 저도 쓰겠지만, 후일 호 공자가 여기서 제자를 가르치겠지요. 아직 폐관수련용 수련동은 만들지 않았지만, 그건 급할 것 없으니까요.”
멀지 않은 곳에 산도 있고. 자고로 폐관수련은 조용하고 사람 없는 곳이 좋다. 유위람의 말에 현서가 대꾸했다.
“폐관수련이요? 유위람이 쓸 것이 아니라면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자문원은 폐관수련을 한 적이 없어서 저도 그렇게 가르치진 않을 테니까요.”
옥이 있지만 어찌 되었든 현서가 미래에 들일 제자는 자문원이 배운 방식을 가장 많이 따르게 될 터였다. 현서가 알고 있는 하나뿐인 교육법이니까.
“폐관수련을 안 한단 말입니까?”
“네, 한 적 없어요. 자문원의 스승님은 언제나 곁에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는 걸요.”
현서가 옥의 기억에도, 그러니까 윗대의 사람들도 폐관수련을 한 일이 없었다고 재차 확언해 주었다. 어릴 때부터 폐관수련을 했던 유위람은 겉으로는 사문마다 다르다며 덤덤하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자세한 얘길 듣지는 않았지만 검선과 그 스승님의 사이는 각별해 보였고, 그렇게 배운 수련법만을 아는 현서는 자신의 제자도 그렇게 가르칠 터다.
현서가 누굴 제자로 들이든 검선의 후인이 될 아이니 그 아일 싫어하거나 저어하는 일이 생길 리는 없다. 가끔 폐관수련을 보내 오붓한 시간을 가지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모호한 마음이 든 것 저것 때문이 아니었다.
‘검선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오래전에 접었지만. 호 공자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호 공자가 검선이 배운 방식으로 제자를 가르치는 것을 곁에서 보면 그 제자를 부러워할 게 뻔했다. 유위람은 그때가 되면 부러움을 예쁘게 포장해 칭얼거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호 공자는 좋은 스승이 될 겁니다.”
유위람의 말에 현서가 말도 안 되는 금칠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이론 말고는 앞에서 시범도 못 보일 텐데 좋은 스승은 못 될 것 같아요.”
“제게 제자는 없지만, 제자 된 입장으로 말하면 꼭 그것만이 좋은 스승의 조건은 아닐 겁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결코 좋은 스승이라 말할 수 없는 만화산 삼노사들과 쿵짝이 잘 맞는 유위람의 말이라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물론 만화산 삼노사의 실력은 말할 것 없이 뛰어났고 검술에 대한 유위람의 욕심이 맞아떨어진 것이 사제 관계가 파탄나지 않은 큰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것 이외도 설명하기 어려운 합이 그들에게 있었다.
―어디 현서를 그 삼요괴와 비교하느냐.
무위가 좀 뛰어난 것 말고는 멀쩡한 점이 한 곳도 없는 놈들이랑 어딜 현서를 비교해. 옥이 기분 나쁜 소리를 한다며 끼어들었다.
천하에 만화산 삼노사의 무위를 ‘좀’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현서는 옥과 유위람의 말에 호부에 있는 것 같다는 감상이 들어 그러려니 하며 웃기만 했다.
“꽉 잡으세요.”
유위람이 다음으로 현서를 데리고 간 곳은 장서루였다. 정확히는 장서루가 내려다보이는 전각의 지붕이었다. 이 저택에는 장서루로 쓸 만한 건물이 없어서 아예 새로 지었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아 어수선하다는 이유로 유위람은 지붕에 올랐다.
“밖은 거의 끝난 것 같네요.”
현서가 원한대로 장서루는 볕이 좋은 날 책을 말리기 좋은 넓은 뜰을 두고 지어진 검은 기와에 청색 벽을 가진 이 층짜리 건물이었다. 내부 공사로 인해 계속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공사를 전부 끝내고 현서의 수많은 책들을 정리해 끝내기까지 두세 달은 걸릴 터였다.
“내려가서 보겠습니까?”
“아뇨. 지금 가면 방해가 될 테니 나중에 다 끝나면 볼래요.”
서책들을 전부 직접 꽂아 정리하지는 못하지만 어디에 무슨 책을 꽂을지 결정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 기대된다 말하며 유위람에게 그때 같이 가자고 권했다.
날도 따뜻하고 현서가 높은 곳을 무서워하지 않아 유위람은 바로 지붕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지붕 위에 있으니 두루 살피기도 좋았다. 그래서 유위람은 이번엔 어디로 가고 싶은지 여기서 골라보라고 말했다.
안겨 있어 시야가 유위람보다 조금 더 높아진 현서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손을 뻗었다.
“그럼 저기로 가요.”
현서가 말한 곳은 원림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원 중 한 곳이었다. 숲이나 연못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정원이 있어야 원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상화원이 일반적인 원림치고는 작다고 해도 수강당을 비롯한 거주 구역보다는 더 넓었다.
유위람이 걸어가는 대신 지붕과 담을 몇 번 밟아 순식간에 현서가 가리킨 자리에 도착했다. 일전에 옥과 자정향을 심겠다고 얘기했던 작은 폭포가 있는 곳이었다.
원래 있던 것인지 일부러 만든 것인지는 모르나 큰 돌로 절벽을 만들어 돌산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재현해 놓았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떨어진 물줄기는 원림의 가장 큰 연못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물줄기와 폭포를 피해 큰 나무들이 몇 그루 있었지만 이전 주인의 취향은 돌산을 그대로 감상하는 것인지 주변은 깨끗했다.
땅에 내려온 현서는 유위람의 손을 잡고 폭포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이곳에 자정향 나무들을 심고, 낮은 평상을 둔, 지붕이 높지 않은 정자를 만들고 싶어요. 자우정에 갔을 때 물이 튈 때마다 잔뜩 핀 꽃들이 흔들리는 것이 무척 예뻐서 원림에도 만들고 싶다고 옥이랑 얘기했었거든요.”
“분명 멋질 겁니다.”
유위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꽃이 달려 있는 자정향 나무를 구하겠단 말은 하지 않았다.
나무를 옮겨 심어 꽃을 피우기까지에는 몇 년이 걸리는 일이라 이 폭포 근처에 자정향 꽃이 만발한 봄이 오기까지는 시일이 걸린다. 돈을 들이면 그 시일을 당길 수도 있겠으나 시간을 들여 같이 사는 집을 만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상화원에서 쌓아나갈 시간들은 분명 행복할 테니 말이다.
걸음을 멈춘 현서는 작은 폭포가 일으키는 포말을 보고 있었다. 자우정에서도 물보라가 튀는 것을 보다 완비를 발견했다. 이미 끝난 일임에도 현서는 새삼 안도를 담아 말했다.
“그때 사 누이가 자우정에 가자고 권한 게 정말 천운이었어요.”
하필 큰 비가 온 다음이라 유명한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없었다. 유괴범들도 그런 계산하에 완비를 거기 버리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호 공자 일행이 그날 거기 있어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때 호 공자가 말했지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했을 일이라고요. 하지만 다른 이들은 없었으니 호 공자 일행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기도 합니다.”
대자의 은인이라고만 여겼던 현서가 세상에 다시없을 소중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곁에 있을 줄은 그때의 유위람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은 현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자우정에 가지 않아 유위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수많은 일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아요.”
곽다순이 말했었다. 자신은 더 기다릴 수 있으나 화오궁주의 목숨이 경각이라 움직이기로 했다고. 현서가 현진을 따라 양주로 향하지 않았다고 해도 곽다순과 사영은 현서의 앞에 나타났을 거라는 뜻이었다.
서녕호가가 있다고 해도 유위람 없이 현서 혼자 곽다순과 사영을 맞닥뜨려야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치렀을 게 뻔했다.
“자우정의 일이 없었다고 해도 저와 호 공자가 만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곽다순이 검선을 되살리려고 했고, 화오궁의 독이 검선에게 사용되었으니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 반드시 현서를 만났을 거라고 유위람이 확언했다.
“호 공자가 천 리 밖에 있다고 해도 결국 만나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분명 호 공자를 좋아하게 되었겠지요. 지금처럼요.”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웃는 유위람의 얼굴은 해사하기만 했다.
―저 불여우가.
쭉 침묵을 지켰던 옥이 기어이 한 소리를 했으나 유위람의 웃음에 정신이 팔린 현서에게는 불여우란 말이 귀에 닿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예전엔 친절해도 잘 웃지는 않았는데.’
시종일관 예의 발랐으나 차가운 얼굴이 언제부터 이렇게 웃었더라. 현서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또렷한 시기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기억을 돌아보면 언제나 웃는 얼굴부터 떠올랐다.
‘이 사람은 자신이 나를 볼 때마다 웃는다는 걸 알까.’
현서가 손을 뻗자 유위람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주었다. 차가운 옥을 깎아놓은 것 같은 얼굴은 만져 보면 따뜻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볼을 만져 주어 기분이 좋은지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 현서에 대한 애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유위람은 현서를 좋아하고 현서 역시 유위람을 좋아한다. 아주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깨달을 때마다 몸 어딘가에서 반짝이는 불이 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소란스럽게 들떴다. 심장이 빨리 뛰며 꾹 하고 조여드는 감각이 아파서가 아니라 달콤해서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유위람이 좋다.
그에게 같이 살자고 말을 했던 그때보다 더 좋다. 매일매일 이렇게 더 좋아지기만 하니 결국 쌓이고 쌓여 마음이 흘러넘치게 된다. 이렇게.
현서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발끝을 살짝 들어 유위람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붙였다 뗐다. 갑자기 횡재한 유위람이 기회를 놓칠 새라 재차 깊게 입 맞추려는 순간 옥이 끼어들었다.
―나는 붉은색 칠이 된 화각상자로 하련다.
옥의 말을 들은 현서가 빨개진 볼로 와르르 웃어버렸다. 그 탓에 접문에 실패했지만 현서가 즐거워하는 것이 예뻐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유위람의 목에 팔을 감은 현서가 귓가에 소곤거렸다.
“일전에 말한 향유를 써보지 않을래요? 옥은 주칠된 화각 상자가 좋대요.”
안계현에서 사심 없이 욕조를 두 개 들이자 했던 것과 달리 지금 현서의 말은 명백한 유혹이었다.
“지금 제가 눈을 뜨고 자는 건 아니겠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꿈이 아니라는 건 유위람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현서가 몽정을 하며 꿨던 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음란한 꿈만을 꾸었으니 말이다. 왜 갑자기 마음이 동해 이런 대담한 유혹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유위람이 마다할 리가 없었다.
“싫어요?”
“호 공자의 유혹에 싫다고 말하는 놈은 절대로 제가 아닐 테니 칼로, 아니, 무조건 도망치세요.”
칼로 찔러버리라고 하려다 현서가 되레 다칠까 도망가라는 충고를 하는 유위람은 진지했다. 하지만 그 걸음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엔 조금 빨리 걷나 싶더니 이윽고 아예 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강당의 정방, 그것도 침상 위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 유위람이 언질했는지 그들의 도착과 함께 수강당에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창문과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사이 유위람은 현서의 팔에서 조심스럽게 팔찌를 빼어내 붉은색 화각상자에 조심스럽게 넣어 상자를 침상 밖의 차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 날이 밝아 창을 닫았음에도 방은 훤했다. 소주는 서녕에 비해 따뜻한 지역이라 건물마다 창이 컸다. 유위람이 성큼 걸어 침상에 오르는 대신 차탁에 딸린 의자에 앉았다. 왜 침상에 오르지 않는지 의아해 하는 현서를 보며 유위람이 말했다.
“곧 씻을 물을 가지고 올 겁니다.”
유위람의 말에 현서가 냉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속성으로 배운 교육에서도 관계 전후로 씻는 것이 중요하다 한 것이 떠올라서였다.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유위람은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굳이 탕조를 들여 씻으려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양심이 적은 것과 달리 끈기와 인내력도 남들 이상은 된다고 여겼으나 현서의 유혹 앞에선 이미 찢어진 종이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유위람은 현서를 아프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겁먹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호부의 겨울 연회 때 현서가 유위람의 귓가에 교육을 받았노라고 속살거렸지만 현서가 배운 교육들은 유위람의 욕망과는 천양지차일 게 뻔했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번엔 같이 탕에 들어가지 않고 현서부터 재빨리 씻겨 침상에 얌전히 올려두었다. 옷을 갈아입히고 젖은 머리칼을 내력으로 바싹 말려두고는 유위람은 혼자 병풍 뒤의 탕조에 들어갔다.
마음은 흥분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목욕을 마친 유위람은 쫓기는 사람처럼 급히 침상에 다가갔다.
“허.”
만면에 미소를 띠고 현서를 부르려던 유위람은 순간 휘장을 찢어버릴 뻔했다. 분명 현서를 씻긴 다음 중의를 입혀 침상에 올려두었는데 무슨 조화인지 중의가 침상 아래 삐죽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왔어요?”
이불을 돌돌 감은 현서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유위람은 지나친 흥분인지 긴장인지 알 수 없는 떨림에 손을 꾹 한 번 쥐었다가 폈다.
이불을 꼭 쥐고 있던 현서가 손을 뻗은 것이 먼저인지 유위람이 고개를 숙인 게 먼저인지 누구도 몰랐다. 곧장 입이 벌어지고 혀가 얽혔다. 이마와 눈꺼풀에 입술을 대는 것부터 시작하는 접문과 달랐다.
“흐읏. 잠. 하아.”
유위람이 얼굴을 들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현서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간 접문은 자주했기 때문에 현서가 이토록 숨을 헐떡이는 일은 없었는데. 유위람은 시작도 전에 현서를 탈진시킬 뻔했다며 혀를 차며 품에 안아 등을 쓸어주었다.
“흣.”
헌데 이불이 반쯤 벗겨져 현서가 알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접문으로 달아오른 몸에 유위람의 손이 닿자 등이 움찔거렸다.
새하얀 피부에 열이 올라 발긋해지자 유위람은 어쩐지 식욕이 돋았다. 저 피부를 깨물어보고 싶었지만 상처가 날까 봐 유위람은 현서를 다시 침상에 눕히며 이 대신 혀를 댔다. 동그란 현서의 어깨서부터 목덜미까지 한 번에 혀로 슥 핥았다.
“간지러……. 으응.”
간지럽다고 도리질을 치던 현서는 유위람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자 신음을 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유위람의 커다란 몸이 현서를 덮치고 있어 어느 쪽으로 웅크리든 결국 유위람의 그늘 아래였다.
“으응, 읏.”
일전에도 생각했지만 현서의 피부는 어째서 이리 다디단 줄 모르겠다 여기며 목덜미를 따라간 혀는 다시 입 안을 희롱했다. 젖은 살덩이가 엉켜 비벼질 때마다 제대로 된 소리가 되지 못한 신음이 터졌다.
눈을 꼭 감은 채로 속절없이 쾌감에 휩쓸리던 현서는 구명줄처럼 유위람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유위람은 접문에 몰두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손을 휘둘러 서랍장에서 향유 병을 꺼냈다. 내력으로 작은 향유 병 하나 꺼내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그것보다 향유 병을 깨뜨리지 않고 마개를 여는 것이 더 어려웠다. 이대로 병을 깨버려도 유위람은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을 테지만 그의 품에는 현서가 있었다. 유위람이 한 손으로 병의 마개를 열어 현서의 몸 위에 그대로 부었다.
“읏.”
현서가 부르르 떨자 유위람이 향유를 병째로 데웠어야 했다고 늦은 후회를 하며 물었다.
“많이 차갑습니까?”
“아뇨. 그냥 느낌이 조금.”
색사에 쓰는 향유고 현서가 고른 것이라 한 병을 통째로 쏟아부었음에도 향이 그리 짙지 않았다. 옅은 감귤의 향이 기분 좋을 정도로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다.
납작한 배 위에 잔뜩 쏟아진 기름을 유위람이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갓 만든 반죽처럼 부드러운 살이었다. 오랜 수련으로 굳은살이 박인 손이 현서의 납작한 배 위를 슬쩍 눌렀다.
‘넣으면 못 해도 여기까지는 들어갈 것 같은데. 괜찮을까.’
언젠가 이 안에 들어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유위람은 그 상상만으로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양물은 아까부터 잔뜩 흥분해 향유 없이도 성기의 끝이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이성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눈이 뒤집혔다간 현서가 다친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였다.
유위람만큼 흉흉하게 발기하진 않았지만 현서의 성기도 반쯤 힘을 받은 상태였다. 허리 아래 걸려 있던 이불이 갑갑했던 현서가 유위람에게 붙어 하체를 비볐다. 손을 쓰지 않고 이불을 벗으려고 한 의도였지만 유위람의 눈에 불이 튀었다.
이번엔 이불을 찢지 않았지만 널따란 침상 귀퉁이에 휙 던져 버린 유위람이 현서의 희고 마른 다리를 포개 자신의 허벅지 옆으로 비스듬히 걸쳤다. 원래는 어깨에 걸치는 게 더 좋았지만 현서에겐 너무 무리한 자세였다.
교육을 받긴 했으나 다양한 체위를 배운 것은 아니라 눈을 껌벅이던 현서는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로 유위람의 성기가 불쑥 들어오자 깜짝 놀랐다.
“흑.”
놀라는 것도 잠시 유위람의 커다란 성기가 아래를 문질러 오자 절로 신음이 튀었다.
“불편합니까?”
“아니요.”
“아프면 반드시 말하셔야 합니다.”
흥분으로 잔뜩 낮아진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아랫도리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유위람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발기한 유위람의 양물이 현서의 것을 짓눌렀다. 양손으로 잡고 문질렀던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에 현서가 부르르 떨었다.
“으으읏. 응응.”
그렇게 몇 번 움직이자 현서의 아래도 점차 단단해졌다. 맞붙은 두 개의 성기가 바짝 서 있자 유위람의 허리짓이 서서히 빨라졌다. 향유 덕에 움직임이 수월했으나 현서의 허벅지에 유위람의 음낭이 부딪힐 때마다 향유로 인해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현서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물려고 하자 유위람이 부드럽게 저지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물렸다. 현서는 입에 들어온 것이 유위람의 손가락인지도 몰랐다. 힘을 주어 깨물려고 해도 유위람이 몰아붙이는 바람에 입 안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져 물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흣. 흐응.”
열이 가득하다 못해 뜨거운 유위람의 성기가 비벼 오는 오싹한 감각이 너무 좋았다. 크고 단단한 것이 질척이며 문질러 오자 발끝이 곱아들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낯선 감각이지만 싫은 게 아니라 좋았다.
좋은 것이 과해서 헐떡였으나 현서 역시 절정을 맞이하고 싶어 애가 탔다. 허리를 흔들어보려고 했지만 몸으로 하는 건 뭐든 서툴러 허리를 움직이는 건지 온몸을 바르작거리는 건지 구분이 잘되진 않았다.
“으으응.”
절정을 맞이한 현서가 토정했으나 유위람은 여전히 흉흉했다. 움직임을 멈추고 색색 밭은 숨을 내쉬는 현서를 주의 깊게 보던 유위람이 이윽고 허리를 거세게 움직였다.
몸이 약해 토정한 성기가 바로 힘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달아올라 있는 몸이다. 열락에 신음을 내뱉자 겨우 물고 있던 손가락이 결국 떨어져 나갔다.
토정을 하였는데도 연달아 밀려오는 거센 감각이 좋은 것과 별개로 낯설어 현서는 연신 도리질을 치며 유위람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유위람 역시 애가 타긴 마찬가지였다. 눈을 꼭 감고 있는 현서와 달리 짐승의 안광처럼 형형한 눈을 한 유위람은 눈에 새길 것처럼 현서를 보고 있었다.
작게 벌어진 붉은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단 숨이 아까워 유위람이 몸을 숙여 그 입을 머금었다. 마치 잡아먹히듯 유위람에게 감싸인 것도 잠시, 거센 움직임 끝에 유위람도 절정에 달했다.
“하아.”
전혀 지치지 않았지만 머리끝을 통과하는 만족감에 유위람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달아오른 눈가를 따라 눈물이 흘러내리자 현서가 눈을 깜박였다. 팡 하고 부풀어 오르는 쾌감을 따라 눈물이 퐁 하고 터지는 감각은 몇 차례 겪어보았음에도 여전히 생경했다.
향유와 두 사람분의 정액이 엉켜 엉망이라, 눈물이 남은 현서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유위람이 이번에도 손을 휘둘러 영견을 끌어왔다. 누가 보았다면 미친놈이 색사로 허공섭물을 수련한다고 욕을 할 모양새였다. 하지만 여전히 자문원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러려니 하는 현서는 무덤덤했다.
“따갑거나 아프진 않습니까?”
조심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여린 허벅지 사이와 엉덩이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만져 보니 열도 느껴졌다.
“허벅지가 조금 뜨거운 것 같긴 한데 아픈지는 모르겠어요.”
여전히 숨을 몰아쉬던 현서가 몽롱한 얼굴로 답했다. 아프진 않지만 멍이 들 것 같긴 했다. 멍이 드는 건 아무렇지 않았지만 유위람이 걱정하는 건 싫었다.
말을 탈 때 옥과 연습했던 것처럼 색사 중에 허벅지나 엉덩이에 내력을 둘러볼 순 없을까? 유위람이 색사로 허공섭물을 대성할 것처럼 구는 걸 뭐라 할 게 아니었다. 이런 면에선 현서와 유위람은 합이 잘 맞았다.
현서는 옥과 유위람이 황당해 할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영견으로 현서를 닦아주던 유위람이 흠칫하며 굳었다가 몸이 찝찝한가 보다 하고 지레 짐작했다. 향유가 묻지 않은 곳이 없어 다리 사이와 엉덩이 안쪽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현서를 가볍게 닦아주고 같이 누워 후희를 즐기고 싶은 유위람이 나중에 목욕을 한 번 더 하자고 말하려 했으나 현서가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같은 향을 몇 개씩 사두길 잘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향이 섞이면 좋지 않으니까요. 좀 꺼내주세요. 같은 색 끈이 향유 병 뚜껑에 묶여 있어 찾기가 편할 거예요.”
욕조에서 한 것처럼 이것 역시 현서 맘에 든 모양이었다. 유위람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았고, 현서의 반응을 집요하게 살폈으니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확인받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을 주었다.
“지금은 몰라도 곧 있음 허벅지가 쓰라릴 겁니다.”
잠깐 쉬었다 다른 방법으로 즐기자는 은근한 제안에 현서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위람이 상상도 못 한 방식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현서가 다리를 좀 더 벌리며 무릎을 접자 손에 쥐고 있던 향유 병이 툭 하고 떨어졌다. 현서는 떨어진 병을 가볍게 쥐고는 두 손으로 뚜껑을 열었다.
영문을 몰라 가만히 보고 있던 유위람은 향유를 뿌린 현서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에 기겁해 현서를 불렀다.
“잠시, 잠시만, 호 공자. 잠시만 멈추세요.”
맘이 급한 유위람은 말과 동시에 몸도 움직여 현서의 두 손을 덥석 쥐었다. 그 바람에 쥐고 있던 향유 병이 다시 떨어졌다. 뚜껑을 닫아놓아 다행이라는 태평한 소리를 하며 현서가 엄청나게 무서운 소리를 유위람에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한 것과 많이 달라서 혼자는 못 할 것 같았는데 좀 도와주겠어요?”
‘뭘 말입니까?’ 하고 물을 것도 없는 명명백백한 광경에 유위람은 신음을 흘렸다. 놀라 심장과 간이 철렁했다. 오장육부를 단련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유위람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침상의 천개 무늬를 한 번 보았다가, 숨을 삼키며 현서를 안아 다리 위에 올렸다. 둘 다 알몸이라 따뜻하고 말랑한 엉덩이가 그대로 유위람의 거웃에 닿자 속 모르는 현서가 간지럽다고 웃었다.
현서가 향유를 써보자 하는 얘기에 좋다고 수강당으로 날듯이 들어왔지만 검선의 사당에 맹세코, 유위람은 오늘 현서의 저 좁은 안에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테지만, 오늘은 그저 가볍게 즐길 마음만 먹고 있었다. 정말이다. 긴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유위람이 열심히 평정을 가장해 물었다.
“호 공자, 무엇을 하려고요?”
유위람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현서는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래를 풀려고요. 유위람이 그때 제게 물었지요. 어디까지 해도 괜찮냐고요. 또 정사를 나누기 위해선 준비할 게 많다고요. 제가 선생님을 초빙해 배움을 구했다는 얘길 했었죠? 그분이 말하길 향유를 사용해 충분히 풀어주는 게 중요하다 하셨거든요.”
흥분의 잔재가 가시지 않아 얼굴은 물론 알몸 전체가 발그스름하게 열이 올라 있지만 목소리만은 말갛기만 했다. 유위람은 그때 심술을 부렸던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싫은 건 아니다. 머리에 칼 구멍이 난다고 해도 싫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현서와 관련된 일이니 유위람의 작은 양심이 엄청나게 자기주장을 했다.
자신도 현서도 경험이 없는데, 현서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아래를 풀려고 하는 것에 눈이 풀려 덤벼들지 않았다. 자신의 속살거림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너무도 현서의 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기색을 보여 현서가 그에 맞춰주는 것이 아닌지 하는 걱정을 할 정도로 양심은 최선을 다했다.
유위람이 이불을 가져와 현서를 돌돌 말며 다정하게 말했다.
“네, 제가 그랬지요. 하지만 그 준비를 호 공자가 해야 한다고 한 기억은 없습니다. 헌데 왜 호 공자가 아래를 풀어야겠다고 결심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현서가 유위람의 아래에 향유를 들이 부었다면 묻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자신에게 삽입하고 싶다고 해서 식어버릴 감정이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유위람이 현서의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유위람이 꾸는 그 추잡스러울 정도로 상스러운 꿈들을 떠올리면 지금은 수도승처럼 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욕망도 현서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었다.
인내가 강하고 집요한 성격은 무공의 성취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그것은 연애와 색사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하지만 유위람이 무슨 마음을 먹든 결국 선택은 현서의 몫이었다.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요.”
그렇다. 현서가 무턱대고 자신의 아래를 풀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현서는 상으로부터 양쪽이 즐기는 방법을 다 들은 뒤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유위람과 접문을 하고 서로의 몸을 만져 성욕을 해소하는 것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쾌감을 주었다. 한껏 고양되었다 천천히 아래로 끌어내려지는 감각은, 살을 맞댄 사람이 유위람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이 분명했다. 상대가 유위람이 아니라고 가정하는 순간 거부감이 확 일었으니 말이다.
현서는 유위람과 하는 것이 너무 좋은 만큼 유위람도 자신과 하는 것이 좋았으면 했다. 서로가 충만한 애정을 주고받기 때문에 정사를 나눈다고 말하는 것일 테니.
하지만 현서가 아무리 상상을 해보아도 지금 자신의 체력으로는 유위람의 쾌락을 끌어내 만족시키는 것이 어려워 보이기만 했다.
“하하.”
일목요연한 설명에 유위람이 마른세수를 하며 웃었다.
논리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현서가 그저 그러고 싶다고 한마디만 해도 상관없을 일을 두 사람의 기쁨과 행복을 두고 열심히 고민했다고 말해 주었다.
유위람은 난감함과 별개로 현서가 이럴 때마다 마음이 근질거렸다. 현서를 천하에 자랑하고 싶다가도 또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춰두고 혼자만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손끝이 저릿해지는 달콤함에 만족스러운 숨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유위람은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이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던가요?”
“당연히 아프다고 했지요.”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위람 말고 타인의 성기를 본 적은 없지만 그 크기가 남다르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자문원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방법만 모를 뿐 삽입이 어디로 이루어지는 알았다. 때문에 많이 아플까요? 하는 물음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준비가 없으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됩니다.’
현서의 물음에 일일 스승이었던 상이 단언했다. 몽수도 쓰고 병풍도 쳤지만 현서의 시무룩해진 기색을 바로 알아차린 상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저 아프기만 했다면 천하에 수많은 남색가들이 울 것입니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정을 통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저 아프기만 했다면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상의 말에 현서가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뭐든 처음은 좀 힘들겠지만, 아프기만 한 건 아닐 게 분명해요. 그리고.”
“부디 아픈 건 잘 참을 수 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어?”
현서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리는 유위람의 목소리는 여상했지만 그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풍장산에서 내력을 한계까지 끌어 쓴 현서는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끊어져 유위람이 어떤 경로로 저 말을 들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허나 그 내용은 현서를 아끼는 이라면 마음을 다칠 얘기였다.
현서가 아예 몸을 틀어 유위람을 마주 보곤 그 손을 잡았다. 모두 끝이 난 일이고 이제 다 나았으니 괜찮다고 말해서는 안 되었다.
풍장산의 일로 자신을 아끼는 옥과 유위람에게 깊은 걱정을 끼쳤다. 하지만 그것을 사과할 수는 없었다. 같은 상황에 놓이면 현서는 똑같이 행동할 텐데 사과를 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해서 현서는 다른 얘길 했다.
“어릴 때 저는 굉장한 개구쟁이라 한시도 가만히 자리에 있는 일이 없었어요. 하지만 아홉 살 이후로는 움직일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지요. 스물다섯까지 숨을 쉬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으니까요. 옥을 만나고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에요. 당연한 얘기지만 수련도 처음부터 성공했거나 쉬웠던 것은 아니었어요.”
옥의 꾐에 넘어가 정석으로 배워 정석의 순서를 밟아 외공 수련부터 했던 현서였다.
“외공 수련이니 당연히 아팠어요. 그래도 그 아픔은 좋았어요. 저를 살게 해줄 아픔이라 여겼으니까요.”
“호 공자의 말대로 무공은 생을 살게 해주는 것이지만 색사도 아닌, 제가 호 공자에게 넣는 걸 같은 선상에 두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귀여워해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랐던 현서다. 유위람의 목소리에 드리워져 있던 무거움이 가시고 말랑해진 것을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현서의 본능이 지금이 승부처라고 속삭였다. 현서는 잡은 손에 힘을 주곤 조곤조곤 말했다.
“전혀 다르지 않아요. 탑을 만들 정도로 많은 혼서가 들어왔지만 그것들은 단 한 장도 제게 오지 않았어요.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살을 맞대는 일이 가능하다고 여겨지지 않았으니까요. 스물다섯 살을 넘길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한 것은 단순히 수명이 늘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해선 안 된다고 한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스물다섯을 넘어서도 그저 아프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꼽았다면 제자를 키울 생각도 만희당을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만희당만큼 제게 안온한 곳이 또 있겠어요? 비단 유위람과 하는 색사를 말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아플 거예요. 앞으로도 아플 일이 생기겠지요. 하지만 아플 것을 미리 두려워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진 않아요. 그렇게 살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새콤달콤한 향을 풍기는 향유를 묻힌 알몸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너무 무거운 얘길 했다고 여긴 현서가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남들보다 좀 더 아플 순 있겠지만 제게 기회가 생겼으니 해보고 싶어요. 안 돼요?”
옥이 있었다면 ‘불여우 옆에 두었더니 네가 새끼 여우라도 된 줄 알고?’ 하고 야단을 쳤을 일이나 안타깝게도 옥은 이 상황을 전혀 몰랐다. 유위람은 완전히 백기를 들었다. 여기서 어떻게 안 된다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유위람은 절대로 그럴 수 없음을 알았다.
현서는 단 한 번도 황금울타리가 쳐진 호부와 만희당을 답답하다 말하지 않았다. 자신을 소중히 대하는 이들의 마음 씀도 귀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호현서라는 사람은 호기심도 많고, 두려움 앞에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어도 곽다순과 사영의 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 홀로 독립했을 테지.
유위람이 이미 항복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현서는 아무런 대꾸가 돌아오지 않자 어떤 깨달음에 생각이 닿았다.
“혹시 유위람, 나랑 거기까진 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것부터 물었어야 했는데, 옥의 말대로 순서를 자꾸 틀린다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단한 오해였다. 유위람은 현서가 그런 오해를 가지게 두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닙니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을 잊었습니까? 호 공자를 원하지 않는 저는 제가 아니라 제 탈을 쓴 흉적일 테니 도망가라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호 공자에게 연심을 품은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대를 욕망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현서의 눈가에 입을 맞춘 유위람이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
“그저 제가 호 공자를 다치게 할까 봐. 그게 무서울 따름입니다.”
유위람 역시 현서가 처음이다. 몸으로 배우는 것은 뭐든 잘한다고 하지만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현서를 상처 입히는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현서의 안에 자신을 파묻으면 끔찍하리만큼 달고 중독적인 쾌락이 따라올 것이 확실하니 혹시라도 제 정신을 잃을까 봐.
하지만 현서가 인생의 모든 순간을 물러서지 않고 함께하자고 말했다. 처음부터 유위람이 지는 싸움이었다.
“유위람이 저를 다치게 한다고요? 으음. 상상이 안 되는데.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건 옳은 답이 아니겠지요? 정말정말 아프면 아프다고 하지 말라고 할게요. 아예 발로 찰까요?”
유위람이 완전히 넘어왔다는 걸 안 현서가 둘둘 싸놓았던 이불을 주섬주섬 벗으며 호기롭게 말했다. 이제 와서 더 이상 몸을 뺄 명분도 마음도 없어진 유위람이 현서의 볼에 입 맞추며 말했다.
“너무 참지는 마세요. 호 공자가 억지로 참으면 열흘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 겁니다.”
유위람의 선언에 눈을 동그랗게 뜬 현서가 와르르 웃으며 목에 팔을 감았다.
“정말 무서운 얘기네요. 하지만 아파도 유위람이 입 맞춰주면 다 잊어버릴 것 같은데.”
쪽 소리가 나는 가벼운 입맞춤은 금방 열기를 머금고 질척하게 변했다.
“으응.”
혀를 얽으며 유위람은 능숙하게 향유를 손에 잔뜩 묻혔다. 보지 않아도 오밀조밀하게 닫혀 있을 구멍이 어딘지 단번에 찾아낼 수 있음에도 긴장에 손이 떨려 손가락이 회음을 스치며 밀려났다. 얼결에 회음을 문지르는 것이 되어 현서가 부르르 떨었다.
유위람이 금세 손을 물리자 현서가 팔을 잡아 왔다. 접문으로 모자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꾸물꾸물 움직였다. 편하게 드러누운 뒤 무릎을 접은 채로 다리를 활짝 벌린 자세를 만들고야 만족스러운 숨을 뱉었다.
“호 공자. 이 무슨.”
꽉 맞물려 있는 작은 구멍이 훤히 보여 순식간에 아래로 피가 확 몰렸다.
“처음엔 이렇게 하는 게 편할 거랬어요.”
둘 다 처음이었으니 속성반의 수업은 초야를 기본으로 했다. 착실한 학생인 현서는 배운 것을 잘 기억하는 것도 모자라 실습에도 적극적이었다.
너무 좋은데, 좋기는 한데.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좋은 것이 정말 좋은 건지 유위람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호 공자, 저 좀 봐주세요. 유위람이 조용히 읊조리며 손을 뻗었다.
“읏.”
향유를 듬뿍 머금은 유위람의 검지가 천천히 아래를 벌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지만 가늘진 않아 하나만 넣었는데도 벌어지는 느낌이 불편하고 답답했다.
“아픕니까?”
“아뇨. 안 아파요.”
현서가 도리질을 쳤다.
유위람은 유위람대로 이성의 끈을 쥐고 있느라 곤욕이었다. 따뜻하고 습한 현서의 안은 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 유위람의 이성을 마구 뒤흔들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빠듯하게 달라붙는 내벽이 좁아 걱정이 되는 것과 별개로 현서의 뒤를 쑤시는 것만으로도 사정할 수 있을 만큼 황홀했다.
하지만 자신의 양물 크기를 가늠하자면 손가락 세 개를 다 넣어 풀어준다고 해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유위람은 이성을 단단히 잡아야 했다.
“후우.”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가자 현서가 길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이 역시 상에게 배운 호흡법이었다. 향유를 들이부었기 때문에 유위람의 손가락 움직임을 따라 찌꺽이는 음란한 소리가 울렸다. 아픈 건 아닌데, 강제로 아래가 벌어지는 감각과 속이 꽉 착 답답한 느낌에 속절없이 발뒤꿈치로 이불만 밀어 냈다.
세 개째의 손가락이 들어가자 흡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유위람이 멈칫하자 현서가 냅다 소리쳤다.
“안, 안 아파요!”
허벅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지만 현서는 아프지 않다고 우겼다. 정말이었다. 유위람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신중하게 움직이는지라 들어찬 이물감에 속이 좀 울렁거렸지만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현서의 앞은 여전히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아프진 않지만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란 얘기였다. 질척하게 달라붙는 내벽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것과 별개로 현서가 쾌락을 느끼지 못하면 삽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유, 유위……. 하악.”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숙여 말랑하게 처져 있던 현서의 양물을 입에 물었다. 조금의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위람 역시 처음이었기 때문에 구음을 잘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현서의 양물이 순식간에 반응을 했다. 소스라쳐 놀라며 발을 버둥거리는 현서의 다리는 곧장 쾌락에 허물어졌다.
“아응. 읏. 읏. 아. 이게. 아아.”
비릿한 풋내는 낯설었지만 입 안에서 단단해지는 현서의 양물이 기껍기만 했다. 사내놈의 성기를 물어볼 거라고 일평생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일 년 전만 해도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면 그놈을 쳐 죽였을 것이나 지금은 현서의 양물을 물지 못하게 막는 놈이 있으면 그놈을 쳐 죽일 생각이었다.
눈을 살짝 들어 현서의 반응을 살피더니 얼마 못 가 유위람은 과연 천하의 기재답게 금세 요령을 익혔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깊게 빨아들일 때마다 현서가 자지러지자 내벽도 유위람의 손가락을 꽉꽉 물었다. 새빨갛게 변한 눈가를 따라 눈물이 퐁퐁 솟았다. 도리질을 치자 검은 머리 타래가 이불에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현서만이 아니라 유위람에게도 과한 자극이었다. 직접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유위람의 양물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사정이 곧 다가오는지 현서의 허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 그. 아아. 이상…….”
말이 되지 못한 단어 부스러기들은 유위람이 양물을 뱉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어림없었다. 현서가 아픈 것이 아니라면 유위람이 물러설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입 안은 유위람의 성감대도 되었다. 현서의 성기가 입 안에서 부풀며 입천장을 긁자 유위람의 성기도 꿈틀거렸다. 다른 자극이 없어도 이것만으로도 유위람은 흥분했다.
마구 도리질을 치던 현서가 발을 들어 유위람의 어깨를 밀어 내려고 하던 순간, 갑자기 허리가 크게 튀었다.
“아아아!”
현서의 입에서 비명 같은 교성이 튀었다. 유위람의 손가락을 자를 기세로 내벽이 콱 하고 달라붙으며 입 안의 양물이 순식간에 부풀었다 사정했다. 곧 사정을 할 것은 알았지만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구음으로 절정에 오른 것이 아닌 것이다.
결국 현서는 유위람의 입 안에 토정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허리와 허벅지가 수습되지 못한 쾌감의 잔재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정액의 대부분은 유위람의 입 안에 있었지만 마지막의 일부가 유위람의 얼굴에 튀었다.
너무 강한 쾌감에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늘어져 있던 현서가 유위람이 정액을 뱉지 않는 것에 놀라 버둥거렸다.
“뱉, 뱉어요. 아니, 얼굴엔. 아니. 왜 그걸 삼켜요. 아니. 얼굴에.”
당황과 부끄러움, 충격에 현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허리를 세울 힘도 없었다. 눈물이나 살갗과 달리 비릿한 정액은 맛없었지만 현서의 것이라 아무렇지 않았다.
유위람은 마지막의 급격한 절정이 자신의 손가락이 내벽의 도톰한 살덩이를 눌렀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자신의 것이 들어갔을 때 현서도 함께 즐기려면 찾아야 하는 곳임을 알고 있었다. 유위람이 밀어 넣는다면 양물은 현서의 배꼽 아래까지 들어찰 테니 어디에 위치하든 못 찾을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삽입 전에 찾아 다행이라 여겼다.
유위람이 힘이 빠져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현서의 발목을 잡아 천천히 벌렸다. 방금 전까지 세 개의 손가락을 삼킨 것이 거짓말처럼 꼭 닫혀 있었지만 녹진하게 풀린 구멍에서 향유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유위람의 눈알이 향유를 바른 것처럼 번들거렸다.
“그, 그, 그렇게 봐야 해요?”
현서의 얼굴은 이 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개졌다. 알몸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익숙한 현서였으나 내밀한 곳을 빤히, 그것도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보는 것은 부끄러웠다.
현서의 뒤에 손가락을 넣었을 때부터 발기해 있던 유위람의 양물은 위용을 자랑하듯 더 커졌다. 아무리 풀었다 해도 현서의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남은 향유를 전부 부어버린 유위람이 미끈거리는 양물을 현서의 엉덩이 골에 비볐다.
“으응.”
“힘을 푸세요.”
귀두 끝이 구멍 주위를 덧그렸다. 애가 타는지 구멍이 움찔거리지만 동시에 긴장도 되는지 몸에 힘이 들어갔다.
“도저히 못 참겠으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요?”
“발…… 발, 로 차요. 아흑!”
유위람의 양물이 현서의 아래를 벌리며 좁은 구멍을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상상 이상의 충격에 현서가 눈을 부릅떴다. 몸을 감싸고 있던 쾌락의 잔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과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 밀고 들어오는 아픔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소리도 나오지 않아 그저 입만 벌렸다. 하악 하고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났지만 누구의 숨인지 알 수도 없었다.
쾌락으로 번졌던 눈물이 순식간에 아픔으로 인한 눈물로 뒤바뀌었다.
“숨을 쉬세요. 천천히.”
물 밖에 억지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댈 뿐 숨도 못 쉬고 있는 현서를 본 유위람이 귀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몸을 뒤로 물리려고 했다.
“시, 싫어요! 발, 로 차, 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알아차린 현서가 고개를 저으며 힘을 주자 유위람은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알았으니. 힘, 힘을 빼요.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쉬어봐요.”
현서가 유위람의 말대로 느리게 숨을 쉬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아예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헐떡였다. 이대로 한 번에 밀어 넣으면 현서가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여긴 유위람이 고개를 숙여 눈가의 눈물을 핥았다.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아픔이 좀 덜할지도 모른다는 계산에 유위람은 이슬비가 떨어지는 것처럼 입술을 찍어댔다.
온 신경이 엉덩이 사이의 아픔에 몰려 있던 현서는 유위람의 의도는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희미한 쾌감을 따라가려 애썼다. 유위람의 양손이 현서의 가슴을 감싸 유두를 문지르자 짜르르한 감각이 잔물결처럼 퍼졌다.
“으응.”
눈가를 핥은 입술이 귓가로 옮겨 귓불을 잘근잘근 물었다. 뭉근히 차오르는 쾌감에 몸이 이완되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양물을 밀어 넣었다.
아래가 벌어지고 커다랗고 단단한 양물이 들어오는 것은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아프고 배 아래가 답답한 기분에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손가락이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상상 이상의 아픔이지만 억지로 참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몸의 아픔은 분명했지만 정신적인 만족감 역시 또렷했다.
미간을 찡그린 유위람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이 몸 위로 뚝 떨어질 때마다 불로 된 꽃이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온몸에 달아오른 꽃이 떨어져 현서의 몸 안 깊숙한 곳에 화인을 찍어댔다.
영겁의 시간처럼 길었던 삽입이 끝이 났다. 현서는 유위람의 거웃과 음낭이 자신의 엉덩이에 닿자 참았던 숨을 뱉으며 물었다.
“다. 다 들어갔어요?”
유위람이 주는 쾌감에 집중하려 했지만 아픔은 쉬이 가시지 않아 눈물이 샘처럼 퐁퐁 솟았다. 현서가 눈을 여러 번 깜박이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나갔다. 유위람이 혀로 그 눈물을 핥으며 현서의 손을 잡아 배 위에 올렸다.
“읏.”
“여기까지 들어갔는데 알 것 같습니까?”
“모르, 모르겠어요.”
더듬더듬 배를 만져 보았지만 온몸의 감각이 제멋대로라 배꼽 아래에 올린 손을 살짝 눌러보아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양물의 존재감은 확고했다.
아래가 빠듯하게 벌어져 아팠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할 수 없으니 현서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의기양양하게 뻐겼다.
“봐요. 다, 다 들어가잖아요.”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가쁜데도 당당하게 괜찮다고 주장하는 그 얼굴이 귀엽고 예쁘긴 한데 묘한 괘씸함도 같이 피어올랐다.
“호 공자가 흘린 눈물을 전부 담아놓아야 했는데 말입니다. 분명 탕조 하나를 거뜬히 채웠을 겁니다.”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를 때마다 빼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유위람이 코를 살짝 깨물며 항의했다. 현서가 배시시 웃으며 유위람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유위람이 천천히 몸을 뒤로 뺐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현서의 내벽은 유위람을 놓아주지 않았다. 속살이 찰싹 달라붙은 채 딸려 나오는 감각에 두 사람 다 숨을 멈췄다.
“아픕니까?”
“아뇨. 그냥 좀. 좀.”
찢어질 듯이 벌어진 아래가 더 벌어지는 감각이 익숙해지지 않아 움찔거렸는데 이걸 말로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유위람이 살짝 인상을 썼다. 손가락을 넣었을 때와 양물을 넣었을 때의 느낌이 너무 달라 그곳을 제대로 찾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현서를 유심히 바라보며 탐색하듯 허리를 얕게 움직였다.
내장이 짜부라지는 느낌이 너무 이상해서 현서는 찡그려지는 미간을 억지로 피려고 애를 썼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저어하는 티를 내면 유위람이 바로 그만둘 걸 알아서였다. 그건 싫었다.
유위람이 했던 것처럼 작은 쾌감을 찾아내려고 얼굴 옆을 짚고 있는 유위람의 팔목을 자근자근 물던 현서의 몸이 튀며 교성도 함께 터졌다.
“아읏!”
한 번도 뱉어본 적 없는 소리에 놀랄 정신도 없었다.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격렬한 쾌감이 밀려 왔다. 유위람이 위험한 얼굴을 하곤 방긋 웃더니 주저 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유위람의 커다란 성기가 내벽을 전부 콱 눌러 비벼대니 눈앞에서 불꽃이 터지는데 눈을 감을 수 없는 상황처럼 감각들이 제멋대로 쏟아져 내렸다.
한 번에 수용하기 어려운 쾌락에 속수무책으로 잠겨들어 허우적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 아아. 으응. ……람. ……위람. ……유위람.”
현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도리질을 치며 유위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이 유위람을 더욱 부추긴다는 걸 모르고선 말이다. 간당간당한 이성은 용케 끊어지지 않았으나 유위람 역시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삽입 후 반쯤 죽어 있던 현서의 양물이 힘을 되찾는 것을 보며 유위람이 흉흉하게 웃었다. 몸을 뒤로 쑥 빼나 싶더니 퍽 소리가 날 정도로 한 번에 처박았다.
“아아아.”
헐떡이며 교성을 뱉어 내는 현서의 얼굴을 집요하게 눈에 하나하나 새겼다. 그만하라는 듯 도리질을 치고 있지만 잘라먹듯 꽉 조였던 내벽이 유위람의 움직임을 따라 반기듯이 들러붙었다.
“후, 흣.”
눈앞에서 불꽃이 튀는 것은 유위람도 마찬가지였다. 콱 하고 쳐올릴 때마다 향유가 잔뜩 묻은 음낭이 엉덩이에 부딪히며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거친 숨소리에 섞인 신음 소리, 살과 살이 부딪히자 땀과 향유가 만들어 내는 외설스러운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지러운 소리들 사이에 현서는 풍랑에 떠내려가는 나뭇조각처럼 흔들렸다.
너무 좋은데 그게 또 무서워 현서는 그때마다 구명줄처럼 유위람의 손을 붙들었다.
“흐응. 으. 읏.”
유위람이 발기해서 덜렁거리는 현서의 양물을 쥐자 안이 빠듯하게 조여 들었다. 사정을 돕기 위해 유위람의 커다란 손이 양물을 감싸 쥐곤 위아래로 흔들었다. 엄지손가락이 귀두를 문지르자 현서가 자지러졌다. 앞과 뒤의 자극이 너무 거셌다.
그건 유위람도 마찬가지였다. 부드럽지만 빈틈없이 달라붙어 움직이던 내벽이 콱 깨물 듯이 유위람을 조이자 그대로 사정할 뻔했다.
현서가 숨을 몰아쉬고 있어서 접문을 할 수는 없자 유위람은 고개를 숙여 현서의 가슴을 빨았다. 뒤를 빠듯하게 채우는 유위람의 양물과 자신의 양물을 잡고 흔드는 유위람의 손, 그리고 가슴을 빠는 입술까지 현서는 쾌감에 허우적거리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토정했다.
뒤가 꽉 조여드는 감각에 유위람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유위람이 현서의 귀를 잘근거리며 질게 사정했다.
“흣.”
뜨거운 유위람의 정액이 몸을 채우는 감각조차 성감이 될 줄은 몰랐다. 이미 사정한 후라 다시 사정할 순 없었던 현서는 혹독한 쾌감에 떨기만 했다.
현서와 달리 사정을 했음에도 여전히 크고 단단한 유위람의 성기는 이대로 조금만 쳐올리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날 터였다. 하지만 욕심껏 움직였다간 그야말로 현서를 초주검을 만들어놓을 게 뻔했다.
맘껏 날뛰지 못했으나 유위람이 느끼는 만족감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했다. 현서의 볼에 자잘한 입맞춤을 뿌리며 느릿하게 몸을 뒤로 물렀다.
“이런.”
그 커다란 것이 박혀 있었으니 한 번에 다물어지지 않은 구멍에서 유위람의 정액과 향유가 새어 나왔다. 눈을 돌리지도 못한 채 못 박힌 듯 그 광경을 고스란히 바라보던 유위람은 다시 흉흉하게 발기한 자신의 양물을 못 본 척하며 현서를 보았다.
밭은 숨을 겨우 몰아쉬던 현서의 눈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순흔을 남겼다간 심하게 멍이 들까 봐 깨물지는 않았으나 빨아 올린 살들이 불긋불긋해져 있었다. 유위람은 혀를 차며 조심스럽게 현서를 안아 올렸다.
억지로 눈은 뜨고 있었지만 반쯤 기절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현서가 유위람의 손에 얼굴을 부비며 중얼거렸다.
“봐요. 제 말이 맞았죠. 제가 했으면 이런 만족을 어떻게 얻었겠어요? 이제 안 한다는 말 안 할 거지요?”
기쁨과 만족이 가득한 얼굴로 행복한 숨을 뱉으며 현서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이 든 것이 아니라 기절한 것이었다. 유위람이 자책할까 봐 있는 기력을 죄 끌어다 말한 것이다.
“하.”
정말 좋았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할 줄은 몰랐다. 오직 현서만이 이렇게 유위람의 감정을 출렁이게 하고 쥐락펴락했다. 아래가 꼿꼿이 서다 못해 배에 바짝 붙었지만 유위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현서를 보드랍게 품에 앉았다.
눈물로 짓무른 현서의 눈가에 입술을 댄 채로 유위람은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그 후로 다시 몸을 겹친 것은 아니었지만 유위람은 꼼꼼하게 잠이든 현서의 뒤처리를 하고 씻고 혼자만의 후희를 잔뜩 즐겼다. 그사이 잠든 현서를 보며 자위도 했다.
자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일인지 하고 씁쓸하게 생각할 정도의 양심은 애초부터 없었다. 유위람은 자신이 현서의 얼굴만 보고도 세울 수 있고, 현서의 숨소리를 들으며 사정할 수 있는 것이 기껍기만 했다.
하지만 문제는 현서가 눈을 뜨고 나서였다. 조심에 조심을 했지만 결국 된통 몸살에 걸렸다. 순흔을 남기지 않았음에도 양물에 쓸린 허벅지와 엉덩이, 핥아댄 몸 여기저기에 멍이 생겼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현서는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아픔에 시달리고 열까지 올라 식욕을 완전히 잃었다.
죽은커녕 물도 마시고 싶어 하지 않아해 석청을 탄 물로 입술만 겨우 축이고 말았다. 작년 가을 이후 이렇게 아픈 것도 처음이고 더욱이 색사의 후유증으로 아픈 것이라 유위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현서와 이사, 하다못해 하루가 넘도록 꼬박 상자 안에서 지냈던 옥까지 전부 당연하다 여겨 아무렇지 않아 했다. 초야를 보내고 나면 현서가 아플 것을 알아 미리 연통을 보내 의원까지 모셔다 놓은 이사였다.
옥과 이사는 현서가 며칠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앓을 것도 각오하고 예상보다 상세가 훨씬 좋다며 감탄했다. 열이 올라 끙끙거렸으나 의식을 잃지는 않았던 것이다.
땀이 많이 나 침의를 여러 번 갈아입혀야 했는데 붉게 쓸려 멍이 든 곳들은 보여도 얼룩덜룩하게 짓씹어 둔 곳이 한 곳도 없었다. 무엇보다 의원으로부터 도련님의 아래가 붓긴 했지만 상처가 나거나 피가 나진 않았다는 말을 들어 이사는 내심 유위람을 다시 보았다.
입이 무거운 의원은 몸살에 좋은 처방전은 물론 멍과 아래에 바를 연고까지 챙겨주고 돌아갔다. 이사가 의원의 배웅을 배웅하고 약을 준비하러 자리를 비우자 방엔 현서와 유위람, 옥만이 남았다.
유위람도 현서가 아플 것은 알았으나 직접 보게 되니 마음이 더 좋지 않았다. 현서가 무언가를 새로이 겪으려면 이 정도의 아픔이 뒤 따르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반나절을 꼬박 잠들었던 현서는 식사 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욕은 아직 없었지만 약을 먹어야 해서 유위람이 죽을 조금씩 덜어 먹여주었다. 반 그릇을 겨우 먹고 약까지 다 마신 현서에게 사탕을 하나 건네주며 이사가 말했다.
“단흥이 기후가 좋아 그런가 도련님의 몸 상태가 좋네요. 다행이에요.”
“그지. 정말 건강해졌다니까.”
현서가 웃으며 이 정도로 몸이 좋으니 앞으로 색사를 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겠다며 자화자찬하자 이사와 옥 둘 다 동의했다. 유위람만이 동의하지 못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