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傳 三章. 항도의 여름
상자는 총 열한 개였는데 가장 처음 화각상자를 필두로 옥은 차례로 하나씩 순서대로 지목했다. 오늘은 마지막 열한 번째인 진주로 꾸민 상자에 들어갔다. 상화원에 도착한지 석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열한 개의 상자를 다 쓴 것이다.
옥은 낮게 혀를 찼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정사 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열이 절절 끌어 심하게 아프면 모를까 미열이 나고 근육통으로 며칠 침상 신세를 지는 걸로는 옥이 자제하라고 잔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망할 오립송.
영약의 효과가 너무 좋았다며, 옥이 엉뚱한 탓을 하며 상자 안에 들어간 것을 현서는 몰랐다.
서녕에서 챙겨 온 향유는 거의 남지 않았지만 앞선 열 번이 모두 삽입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오립송을 아무리 먹어도 현서는 벌써 자리보전하고 누웠을 터였고 옥은 대노했을 것이다.
첫 정사 이후 현서가 앓아눕자 그 후 유위람이 자중하려 했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현서도 유위람도 하고픈 마음이 가득했으니 단지 참아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현서의 체력을 깎는 가장 큰 문제가 삽입인 걸 알아 색사를 치를 때면 현서를 집요하게 살피고 또 살폈다.
그 노력이 결실을 얻어 세 번의 정사 끝에 어디까지 해야 그나마 나은지에 대한 적정선을 찾아냈다. 집착의 승리였다.
현서가 버틸 수 있는 선을 확신하게 되자 초반의 주저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유위람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어졌다. 최대한 현서의 체력을 덜 깎으면서 오래도록 즐기는 법을 찾는 것이 최근 유위람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남들만큼 건강하진 않지만 현서도 이십대 초반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몸을 겹치는 일에 흥미도 관심도 많았다. 초야의 기본만을 속성 수업으로 배운 현서는 그 외의 운우지정의 즐거움을 유위람을 통해 배워나갔다.
분명 유위람도 처음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유위람은 어디에서 배운 것인지 현서가 상상도 못 해본 것들을 하려 들었다. 유위람과 하는 그 모든 행위들이 즐겁고 좋았지만 가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정말 해요? 지금 여기서요?”
“네,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유위람이 예쁘게 웃으며 졸랐다. 곱게 접히는 유위람의 눈이 여름 볕에 부서지는 수면처럼 빛이 났다. 현서는 민망함 반, 유위람의 취향에 의구심을 가지는 마음 반이었지만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위람이 현서에게 약하듯 현서도 똑같았으니 말이다.
유위람이 보고 싶다 보채는 것은 현서의 수음이었다. 한 번도 수음을 해본 적이 없다는 얘길 어쩌다 하게 되었는데 그때 유위람이 자신 앞에서 수음해 달라고 졸랐다. 민망함에 못 하겠다고 했더니 넘어가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전히 왜 보고 싶어 하는지 이해를 못 했지만 콩깍지가 쓰인 현서는 유위람이 집요하다고 여기지는 못 하고 이게 그렇게 보고 싶은 일인가 하고 의아해 할 뿐이었다. 현서는 수음하는 유위람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또 수음하는 유위람은 상상이 가지 않아서였다.
현서가 푹신한 베개를 잔뜩 쌓은 침상 머리에 몸을 기댄 채로 다리를 벌렸다. 침의를 벗지 않아 벌어진 자락 사이로 흰 다리와 그것보다 조금 짙은 색의 양물이 보였다.
체모가 적어 수염도 잘 나지 않는 몸이라 음모도 가늘고 숱이 적었다. 이차 성징이 일어나기 전에 독한 약들을 먹었기 때문에 날 때부터 있었던 머리숱이나 눈썹 같은 것들과 달랐다. 그것이 짠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흥분을 불러 일으켜 유위람은 마른침을 삼켰다.
현서가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첫 색사 때 구멍을 풀려고 한 것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고작 수음에 왜 이렇게 부끄러워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 눈 때문이야.’
처음 봤을 때도 티끌 하나 없는 흑마노처럼 새카만 눈동자부터 눈에 들어왔었다. 저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는 이제 정염을 더했다. 욕망하는 것을 전혀 숨기지 않는 열렬한 시선이 어떤 것인지를 이제 알고 있는 현서는 눈으로 범해지는 느낌에 열이 올랐다.
긴장한 현서의 손이 어색하게 성기를 틀어쥐었다. 수음은 처음이었지만 유위람의 성기와 같이 붙잡고 흔든 적은 여러 번이었다. 그것처럼 하면 되겠다 싶어 서툴게 손을 움직였다.
손바닥에 땀이 맺히긴 했지만 그래도 마른 손이라 현서는 향유를 부었다. 집요한 시선에 병을 놓쳐 향유가 허벅지 위로 넘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른 풀 냄새가 나는 향유가 묻은 손으로 문지르니 훨씬 나았다. 멋쩍음에 눈을 질끈 감고는 유위람이 만져 줄 때를 떠올렸다.
굳은살이 박인 큰 손이 귀두 끝의 여린 살을 문지를 때면 신음이 절로 터지며 몸이 움츠려 들었다.
“흣.”
현서의 보드라운 손은 느낌이 전혀 달랐지만 그래도 유위람이 만져서 기분이 좋았던 곳을 여지없이 찾아 문질렀다.
유위람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도 그렇지만 현서 역시 색사의 버릇은 모두 서로에게서 옮은 것이었다. 조금씩 더운 숨을 뱉는 저 움직임이 전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더욱 사랑스러웠다.
시작할 땐 무릎을 세우고 있었지만 흥분할수록 힘이 빠져 결국 다리가 이불 위에 힘없이 벌어졌다. 침의 자락이 손을 덮어 그 위로 얼룩이 번졌지만 현서는 알지 못했다.
“으응. 응.”
물이 차오르듯 점점 올라가는 쾌감에 빠진 현서는 유위람이 보고 있다는 걸 잊고는 손을 더 거세게 흔들기에 바빴다. 조금, 조금만 더 하면 절정에 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손아귀의 힘이 모자란 탓인지 감질나기만 했다.
쾌감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해 현서는 자연스럽게 양물을 잡지 않은 손으로 가슴의 돌기를 문질렀다. 짜르르한 감각에 유두 끝이 빳빳해지며 흥분을 부추겼지만 그래도 뭔가가 모자랐다.
눈을 꾹 감고 있던 현서가 반짝 하고 눈을 떴다. 애가 탄 현서가 조르는 눈으로 유위람을 바라보았다. 유혹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유위람은 기꺼이 현서의 요청에 몸을 던졌다.
곧 젖은 소리와 신음이 요란하게 방을 채웠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따뜻한 수증기에서 나는 물 냄새에 현서는 이곳이 욕탕인 것을 깨달았다. 평소에 절대 쓸 일 없는 근육들이 색사 후에는 자기주장에 여념이 없어진다.
“으응.”
흥분해 성감이 오르게 되면 근육들이 긴장해 다음 날의 아픔으로 이어진다. 첫 정사 이후 유위람은 늘 욕조에서 현서의 온몸을 주물러 딱딱해진 몸을 풀어주었다. 성감을 돋을 때처럼 은근한 손길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아 현서는 잠에 취한 채 유위람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커다란 손이 등을 꾹꾹 누를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며 현서는 좀 전의 일을 떠올렸다.
‘발가락을 물었어.’
수음하는 것을 구경한 것도 그랬지만, 오늘 현서는 발가락 사이도 성감대가 될 수 있다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기겁해서 놀란 현서가 발로 유위람을 걷어차는 불상사가 생길 뻔했다. 깜짝 놀라 침상 끝으로 파다닥 도망간 현서를 보며 유위람이 눈 끝을 내리며 싫으냐고 물어 왔다.
현서가 고개를 저었다. 싫은 건 아닌데. 뭐랄까, 발가락이라니. 양물을 빨릴 때보다 저항감이 더 컸다. 현서가 싫어하는지 단순히 낯설어 하는지를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유위람이 은근한 목소리로 살살 꾀었다.
정말 싫지 않으면 조금만 더 해보자고. 그래도 호 공자가 싫다고 하면 하지 않겠다고.
현서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장 후회했다. 유위람이 현서의 발목을 쥐고는 발가락 사이의 여린 살을 핥자 그대로 자지러졌다. 온몸을 깃털로 간질이는 것 같은 감각은 곧장 흥분으로 이어졌다. 현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속절없이 신음만 뱉었다.
‘좋긴 했지만…….’
자신이 좋았으니 유위람에게도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유위람의 발가락을 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유위람이 희한한 걸 좋아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현서는 다음에는 그의 취향대로 특별한 걸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묶어볼까.’
유위람이 좋아할 거라 믿으며 현서는 눈을 감았다.
상화원에서 현서의 일과는 단조로웠다. 전날 유위람과 뒹굴며 얼마나 체력을 소비했느냐에 따라 다음 날 일어나는 시간이 달라지는 것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식사를 하고 약을 먹고, 유위람과 산책을 하고 아직 책 정리가 다 끝나지 않은 장서루에 갔다가 옥과 수련을 했다. 중간 중간 의원을 만나 진맥을 받고, 서녕에 서신을 썼다. 특이할 만한 일이라면 한창 집 꾸미기에 열중하는 이사와 머리를 맞대고 물건을 고르는 것 정도였다.
유위람은 하루 종일 현서 곁에 붙어 있고 싶어 했지만 가능하지 않았다. 검각과 만화산을 떠나 있지만 유위람은 검각의 얼굴이고, 자신이 데리고 있는 수하들도 먹여 살려야 했다. 현서가 눈을 뜰 때까지 곁에 있고 아침저녁은 늘 같이 먹었지만 점심을 같이 먹지 못할 때도 종종 있었다.
현서에 대한 애정은 지극했지만 늘 바쁜 가족들 사이에서 자랐던지라 그것을 당연하다 여겨 서운해 하지 않았더니 유위람이 새초롬하게 눈을 뜨고는 투정을 부렸다.
‘호 공자는 저를 소매에 넣어 다니고 싶지 않나 봅니다.’
‘유위람이 들어갈 만한 소매는 만들 수 있지만 거기에 넣었다간 전 옴짝달싹도 못 할 걸요.’
부러 삐죽거리는 유위람의 표정은 예쁘지만 그저 농이라 여겨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농담이 아닌 걸 깨달았다.
하루는 유위람이 바빠 거의 얼굴을 못 본 날이 있었는데 그날 밤에 얼마나 집요하게 핥아대었는지 삽입을 하지 않았음에도 현서는 기력이 빠져 다음 날 종일 꾸벅꾸벅 졸았다.
내심 유위람이 서운해 한다는 걸 깨달은 현서는 서재에 같이 있겠다고 말하는 대신 유위람의 목덜미와 손가락을 잔뜩 깨물어주었다. 유위람은 현서를 핥는 것을 즐겼지만 동시에 현서가 깨물어주는 것도 좋아했다.
유위람이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현서는 유위람이 목덜미나 손목 같은 급소가 되는 부분을 물리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어느 날 지나가는 말로 옥에게 얘기했더니 옥이 잠시의 침묵 후에 거하게 혀를 찼다.
―그놈 취향 참 별스럽구나. 세상엔 별 희한한 취향을 가진 자들이 수두룩하니 저놈도 그런 것이다.
그놈은 현서가 자신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다. 당연히 현서에게 그런 말은 해주지 않았다. 한 끗 어긋나면 비틀릴 집착의 씨앗 같은 것이다. 현서가 알아서 좋은 일이 아니었다.
―여차할 땐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콱 물어버려라. 그런다고 피라도 나겠느냐마는. 아니다. 이번 기회에 이빨을 단련해 볼까?
아니지. 피라도 났다가 그놈이 더 기뻐한다는 소리라도 들을까 봐 옥은 오싹해 하며 방금 자신의 말은 헛소리였으니 잊으라고 현서에게 말했다.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아 현서는 처음부터 흘려들어 더 흘릴 것도 없었다.
어쨌든 서운해 하는 연인을 위해 현서는 종종 간식을 싸 들고 유위람을 찾아갔다. 간식 바구니를 챙겨 들고 가려 했더니 이사가 정색을 해 소매에 넣어 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유위람은 아주 기뻐했다.
요즘 현서의 취미 중 하나는 상화원에 있는 유위람의 기척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어? 오늘은 뒤뜰에 있네.”
유위람의 서재는 수강당의 오른편에 있는 건물이었다. 현서와 떨어져 있을 때는 굳이 기척을 찾을 필요도 없이 대부분 서재에 있었지만 오늘처럼 뒤뜰에 있을 때도 있었다. 아직 제자가 없고, 외공 수련을 할 필요가 없어 쓸 일이 없는 수련장을 유위람이 쓰기 때문이다.
현서는 최대한 서둘렀다. 유위람이 수련하는 걸 보고 싶어서였다. 수련할 때 찾아가면 방해가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유위람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달리지는 못했지만 종종 걸어 뒤뜰에 도착했다. 유위람이 현서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황철석으로 만들어진 바닥 위에 선 유위람이 영뢰팔합검 중 하나인 화란쇄열(花爛碎裂)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검각의 검답지 않게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 보드랍게 떨어지는 듯 보이지만 검강이나 강기가 없는 순수한 검압만으로 반경 일 장(약 3m) 안의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광포한 검법이다.
만화산에서 자문원의 옷 하나를 완전히 못 쓰게 만든 일의 주범이기도 했다.
‘느낌이 조금 이상하네.’
유위람이 쓰는 화란쇄열은 처음 보았지만 어쩐지 뭔가가 다른 듯 해 고개를 갸웃거리자 옥이 말했다.
―새 검에 맞춰보느라 그런 것이다.
유위람의 인성은 욕해도 유위람의 실력은 욕하지 않는 옥이 금방 위화감의 이유를 알려주었다. 유위람이 쭉 쓰던 검은 사영의 배에 박혀 사라졌다. 그 다음 검은 사라지진 않았으나 곽다순의 도를 막아내면서 금이 가고 날이 상해 더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때문에 현서가 검을 선물하려 했으나 유위람이 난처한 얼굴로 부드럽게 거절했다. 단검처럼 장검도 선물받으면 분명 늘 패용하고 싶어질 텐데 그럼 스승님들이 삐진다는 얘기였다.
검에 무척 까다로운 만화산의 삼노사는 하나뿐인 제자의 검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했다. 유위람이 검을 잃어버리거나 부러뜨리거나 하는 건 상관없어 했으나 다른 곳에서 공수한 검을 패용하는 건 용납하지 않을 거라 했다.
만화산 삼노사의 괴팍함을 어느 정도 아는 현서와 옥은 단박에 납득했다. 왜 유위람이 검을 맡겨둔 사람처럼 만화산에 연락을 하나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검이 오늘 검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유위람은 영뢰팔합검의 여덟 검을 전부 써보려 했으나 현서가 온 것을 알아 화란쇄열의 초식들만 전부 점검한 뒤 검을 내렸다. 유위람이 자신이 앉아 있는 곳까지 곧장 오자 현서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제가 방해가 되었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곧 호 공자를 만나러 가려고 했는 걸요.”
“항도에서 무슨 연락이 왔나요?”
용건을 맞추는 현서를 향해 유위람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나난에게서 연락을 받았는데, 공덕비가 완공되었다는군요.”
환하게 웃는 유위람의 얼굴은 오늘도 예뻤지만 현서는 눈을 내리깔며 최대한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 네, 그래요. 그게 완성이 되었군요. 그렇군요.”
상화원에 도착해 석 달이 넘도록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항도에 가야 하는 일이 있을 줄은 알았다. 하지만 검각의 일이 아니라 사당의 일이었을 줄이야. 더욱이 현서가 자문원의 환생임을 알고 있는 유위람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처해진 현서였다.
―미친놈들. 기어이 그걸 만들었어?
작년 철서에서 있었던 봄 연회에서 언급되었던 두 번째 공덕비 얘기였다.
“사당이 싫습니까?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라도?”
작년에는 현서가 떨떠름해 하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만 올해는 달랐다. 유위람의 질문에 현서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전부 마음에 안 든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옥이 대변해 주는 마음의 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현서는 얼굴을 문질렀다.
“그냥.”
“그냥?”
“너무 과하도록, 아니, 그러니까 너무 엄청나게 굉장해서. 네. 너무 굉장해서 그래서 사당을 떠올릴 때마다 놀라는 것뿐이에요.”
현서의 말에 유위람이 전혀 이해 못 할 얘길 들은 사람처럼 의아해 했다.
“과하다니, 어디가 말입니까? 사당이라 특히 장중하고 엄숙하게 지었는 걸요.”
황유리기와를 올리거나 감윤의 의견처럼 금을 바른 석상을 만들 예정도 없었다. 현서에겐 참으로 다행인 일로 앞으로도 검선을 본뜬 것은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을 터였다. 작년 곽다순의 일로 모두들 검선을 본뜬 형체에 관해선 질색했기 때문이었다.
“눈에 차지 않는 곳이 있다면 편히 말해도 됩니다.”
현서가 그 휘황찬란함에 질렸다고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유위람이었다.
사당이 부담스럽다 해서 그것에 대해 입을 댈 자격이 현서에게는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애도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문원의 일이지 현서의 일은 아니었다.
“자문원의 뜻을 묻는 것이라면 그건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당을 지은 것은 자문원에게 은혜를 받은 이들이라 했다. 현서와 옥이 질겁한다고 해도 그건 그것으로 끝인 일이었다.
“호 공자에게 그런 뜻으로 물은 건 아니었습니다.”
유위람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아요. 제가 어떤 것도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문원이라면 그 다정한 마음 씀에 기뻐했을 거예요.”
현서의 말이 기뻐 유위람은 사당이 현서 본인의 마음에 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쨌든 유위람은 소중한 연인이니 팔이 안으로 굽었다. 활짝 웃는 유위람의 얼굴을 보니 저렇게 말하길 잘했다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당을 더욱 꾸미는 데 박차를 가하는 짓인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터였다.
사당 얘기는 그만하고 싶은 현서가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유위람은 제자를 키울 뜻은 없나요?”
수련을 위한 전각에 처음 안내를 했을 때 유위람은 오직 현서의 제자만을 얘기했다.
“혹시 검각의 제자는 항도에서만 수련시키도록 되어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아직 제자를 들일 마음이 없어서지요. 검각에는 저 말고도 재능 있는 제자들이 많으니 굳이 제가 제자를 키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스승님들의 경우를 보아도 서둘러서 될 일도 아니고요.”
검각주야 유위람이 제자를 들여줬으면 했지만 당장 해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배분이 더더욱 꼬인다는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엉망이 된 배분에 꼬리를 하나 더 단다고 해서 문제될 게 뭐 있겠는가.
만화산 노사들의 경우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걸 알아서였다. 유위람 역시 오래 살 테니 벌써부터 제자를 들이니 마니하고 단언하지 않았다.
지금 유위람은 제자보다는 당장의 성취와 현서의 건강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신이 오래 사는 만큼 현서도 오래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래도록 시간을 들여 이루어야 하는 일이었다.
현서가 검선의 무공을 십성까지 전부 익힌 다음 그 후로도 쭉 수련에 몰두해 지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면 완벽하게 건강한 몸을 되찾을 수 있다.
그 말은 지선이 되지 못하는 이상 십성을 대성한다고 해도 병약한 몸이라는 뜻으로, 독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이 오장육부라 그렇다.
그 어떤 문파의 무공도 오장육부를 직접적으로 튼튼하게 수련시키지는 못했다. 검선의 무공은 현서에게 스물다섯 이후를 보장해 주었으나 그것이 현서의 천수를 보장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현서는 조금씩 건강해지고 있으나 앞으로도 계속 병치레를 하게 될 것이다. 십성까지 익힌다 해도 열 번 앓을 것을 다섯 번, 혹은 세 번으로 줄여주는 것이지 무공을 배우지 않은 건강한 사람보다도 약한 몸일 것은 자명했다.
‘길게 봐야지.’
유위람은 조바심 내지 않았다. 인내도 집요함도 남다른 남자다. 아직 현서는 육성 중반을 익혔을 뿐이고, 오립송도 남아 있다. 여차하면 그 지선이나 주경을 수소문해 볼 마음도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명줄을 늘리는 것에 남다른 일가견이 있는 스승님들의 약초 바구니부터 털어볼 생각이었다.
항도에 간 김에 할 일을 다 해치우고 오려는 유위람이었다. 현서는 유위람과 천천히 걸어 수강당으로 돌아온 뒤 마중 나온 이사에게 여행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마침 잘되었네요.”
이사가 반색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주문할 것이 많아 직접 별성이나 항도에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을에 첫 연회를 연다고 하셔서 준비할 게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누구도 완벽하게 원림을 꾸민 후에 연회를 열 거라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가을은 제법 시기가 빨랐다. 유위람은 적당히 내년이었으면 했으나 현서가 고개를 저었다. 가족들의 인내가 가을을 넘기지 못할 것을 알아서였다.
유위람의 수하를 통해 서신을 주고받는 것은 상화원이 어디 있는지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가족들이 작정하면 며칠 가지 못해 현서가 단흥에 있다는 사실을 알 게 뻔했다. 그저 현서가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내 초대하고 싶다고 말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봄으로 하자니 너무 양심 없고, 여름은 현서가 더위를 많이 타는지라 타협한 것이 가을이었다. 현서 역시 내년으로 미루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님도 오셔야 하니까요.”
현서는 호부의 가족들이 전부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른 손님들은 몰라도 현서의 가족들은 원림에 며칠 머물러야 했으니 객청을 꾸미는 일이 먼저였다. 이사만큼은 아니어도 자신이 여는 첫 연회다. 현서 역시 들떠 있었다.
“어머님께 도각선자의 연주를 들려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올해 후반엔 스승님을 만나러 가신다나 봐요.”
얼마 전에 철서에서 온 서신이 있었는데 그 얘기였던 모양이었다.
“듣기론 단흥엔 아주 정교한 인형으로 하는 괴뢰희(傀儡戱)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 극단 중 한 곳을 초청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괴뢰희라니 저도 아직 본 적 없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요.”
곁에서 듣고 있던 이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상화원의 주인이 생기자 근방의 여러 곳에서 인사를 위해 명첩을 주고 갔었다. 그중에 분명 극단도 있을 테니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기억해 두었다.
그렇게 오월이 끝나기 전에, 현서와 유위람은 그간 꼼짝도 않던 상화원을 벗어나 항도로 향했다.
상화원이 있는 단흥에서 검각이 있는 항도까지는 넉넉잡아 사오 일쯤 걸린다. 가는 길의 경치가 좋아 말을 탈 예정이었으나 현서는 말을 타기는커녕 경치도 하나 보지 못했다. 어제 잠자리에서 호기롭게 두 번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유위람을 꼬드긴 바람에 눈을 뜨지도 못해서였다.
이사가 말을 타고, 유위람은 현서와 함께 마차에 올라 줄곧 허리와 허벅지를 주물러주고 있었다. 마차 안에 있으니 아예 장포의 요대를 풀어 중의 안으로 서슴없이 손을 넣었다.
옷을 벗기진 않았지만 여름용의 얇은 속바지라 촉감이 묘했다. 하지만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는 손은 담백하기만 했다. 가장 혹사당한 아래를 직접 주무를 순 없어서 골반 아래의 고관절을 꾹꾹 눌러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작게 앓는 소리가 섞이긴 했지만 아프기보다는 뭉친 근육이 풀리기 때문인 걸 유위람도 알았다.
‘분명 의당에 방중술에 관한 쓸 만한 서적들이 있을 텐데.’
그간 할 마음이 들지 않아 관심 없어 했을 뿐이지 색사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천성이 집요하고 몸으로 배우는 것도 빨라 색사의 만족도는 금방 높일 수 있었지만 문제는 삽입 시 현서가 받는 부담이었다. 양물의 크기를 줄일 순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 모색해야 했다. 유위람은 배움의 필요성을 느꼈다.
춘약 같은 건 유위람이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현서에게 상극일까 싶어 섣불리 쓰지 못했다. 아래를 풀 때 약간의 미약을 더하면 훨씬 낫다는 걸 알면서도 향유만을 쓴 것이 그것 때문이었다.
‘화 누이에게 물으면, 음, 싫어하시겠군.’
화정은 의원이니 건강하고 안전한 성생활의 조언을 구한다고 얼굴 붉히진 않겠지만 유위람을 볼 때마다 눈을 세모로 뜨는 걸 떠올려보면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힐 게 뻔했다.
‘꼭 화 누이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약이라면 현서의 체질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화정이나 정 의원에게 묻겠지만 책의 필사라면 의당의 다른 제자에게 부탁해도 상관없었다.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이 급했던 유위람은 바로 따라오고 있는 수하 하나를 곧장 의당으로 보내버렸다.
“눈이 부시진 않습니까?”
“괜찮아요.”
이른 아침에 나왔지만 날씨가 좋고 여름이라 수면에 볕이 비쳐 반짝였다. 거룻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하던 현서는 머리에 꽃을 꽂은 항도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지나가는 걸 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다고 유위람이 착각했다. 현서는 수로 곁으로 쭉 나 있는 길과 그 위의 건물들을 보는 중이었다.
물길을 따라 주택이 밀집해 있는 곳과 상가들이 번갈아가며 나왔다 사라졌다.
‘이곳은 아니구나.’
항도에는 거룻배가 다니는 물길이 여럿 있으니 물가라 해서 꼭 이 길일 리는 없었다. 바로 찾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아 현서는 실망하는 대신 이 길은 제외했다.
지금 현서는 항도에 있는 하오문 지부가 혹시 보이나 싶어 길을 보고 있었다.
일전에 정우문 소문주의 서신을 받았는데, 항도에 하오문 지부가 생겼다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 원래 정파인 정우문과 정사지간인 하오문의 사이는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였다. 백양교의 일로 하오문의 세가 크게 위축이 되고, 정우문이 백화호 사건의 복수에 매달려 더욱 그랬다.
하지만 화오궁의 일을 마무리 지으면서 정우문과 하오문은 접점이 생겼고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에 동의해 동맹을 맺었다.
당시 현서는 두 곳이 현명한 결정을 했다고만 여기고 끝냈지만 지금은 마침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래 가진 않겠지만 어찌 되었든 유위람이 만화산의 스승님들을 뵈러 가는 날 하오문 지부를 방문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구음하는 법을 가르쳐 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일전에 형이 주선해 준 것처럼 자신에게 이론을 알려줄 사람을 소개받고 싶었다. 유위람에게 말하면 당연히 안 된다고 반대할 테니 현서가 직접 나서려고 함이다.
지금 현서는 아주, 조금, 살짝 골이 나 있는 상태였다. 아홉 살 이후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쀼루퉁하게 굴면 너무 애처럼 보일까 봐 자제하고 있었지만 불만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왜 안 되는데.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현서는 눈을 삐죽 떠 유위람을 고간을 보았다. 처음 유위람이 구음했을 때는 크게 놀랐지만 그게 기분이 좋았다. 눈물이 터질 정도로 너무 느껴 당혹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좋았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현서도 유위람에게 해주고 싶었다.
접문을 하거나 현서가 살갗을 얼러 만질 때마다 달뜨는 유위람을 보는 것도 큰 기쁨 중 하나였다. 해서 자신이 기뻤던 방법 중 하나인 구음도 해주고 싶었다. 아니,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유위람의 걱정도 틀린 바는 아니었다. 자신의 입이 잔뜩 발기한 유위람의 양물을 다 삼키기에 작은 건 확실했다.
현서도 자신이 유위람처럼 목구멍 안까지 깊숙이 삼킬 거란 자신은 하지 않았다. 유위람의 양물을 물고 있다가 기침이라도 터지면 사달도 그런 사달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끝부분 정도는 조금 물어볼 수 있지는 않을까?
‘아주, 조금, 살짝은 괜찮을 것 같은데.’
첫 수업을 했던 상이 말하지 않았던가, 천하에 사람이 산 이후로 늘 운우지정의 즐거움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어져 왔다고.
‘그러니 나도 배워보면 또 다를 수도 있지.’
옥이 알았다면 기가 막혀 비웃었을 생각이었다. 외공을 배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색사를 향한 저 의욕 가득함은 둘째치고 외공 수련을 떠올려보면 정말 그야말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현서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사당이 있는 항도의 북쪽에 도착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공덕비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또 달랐다. 독한 놈들이라고 옥이 진저리를 치는 것을 못 들은 척하며 현서는 반가운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공덕비에 적힌 내용은 한 글자도 틀림없이 자문원이 한 일이 맞았다. 그저 휘황찬란한 미사여구 덕에 정신이 혼미해져 한 줄씩 귀에 들릴 때마다 기운이 쭉쭉 빠져나가는 것이 문제였을 뿐.
소화리의 목소리는 낭랑하고 듣기 좋았으나 그 내용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비문의 낭독이 끝나자 모두 박수를 치며 현서를 바라보았다.
작년, 현서가 그저 검선이 패용하던 옥팔찌의 현소유자일 뿐이었을 때도 호의적이었는데 옥이 말을 하고 현서가 검선의 후인이기까지 했으니 호감이 더욱 커진 상태였다.
현서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기대감 어린 시선은 완전히 감춰지지 않았다. 전부 자신보다 열 살은 많은 이들이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이는 것에 현서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 정말 좋아요. 멋져요. 옥, 옥도 대단하다고 하네요.”
눈을 질끈 감고 결국 빈말을 하자 옥이 버럭 하며 끼어들었다.
―내가 언제!
‘대단하다고는 했잖아.’
―그거야 칭찬의 의미로 한 건 아니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없는 말 지어낸 건 아니잖아. 게다가 저 눈 앞에서 네가 싫어한다고 어떻게 말해? 난 못 해. 네가 할 수 있음 네가 하고.
―내 말이 저들에게 들렸으면 진즉에……!
현서의 모질지 못함에 혀를 차던 옥은 서른을 훌쩍 넘긴 남녀가 기이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것을 보고는 결국 현서의 판단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의 침묵 후에 바람이 빠져 쭈굴쭈굴해진 공처럼 기운 빠진 목소리로 옥이 말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문원이라면 저 마음 씀에 기뻐는 했겠지.
일 년 뒤, 현서와 옥은 더더욱 번쩍거리게 된 사당의 모습에 오늘의 칭찬을 후회했으나 아직은 모르는 일이었다.
“현서는?”
“잠이 들었습니다.”
“피곤한 모양이네.”
새 공덕비를 제외하곤 사당의 안은 작년과 변함이 없었지만 현서와 옥은 잔뜩 지쳐 거룻배를 탈 때쯤엔 유위람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전부 유위람의 저택에서 묵었다 헤어질 예정이라 같이 배에 오른 화정이 현서의 오른손을 잡아 맥을 짚었다.
현서를 예뻐하는 것과 별개로 화정은 의당의 제자의 본분으로 어떤 환자도 소홀히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검선의 후인이 된 현서는 더욱 각별했다. 현서가 무사평탄하게 제자를 키우길 바랐으니 말이다.
“호 공자는 어떠합니까?”
“좀 피로할 뿐이지 크게 나쁜 곳은 없구나.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현서는 남들보다 회복이 느려. 그러니 현서의 몸은 균형을 지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중요해. 다른 사람이라면 하루 이틀이면 나을 것도 현서는 일주일, 열흘을 가기 때문에 쉽게 균형이 깨져. 그게 반복되면 장기에 영향을 줘. 하나가 나빠지면 줄줄이 악영향을 받기 쉬워진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픈 것도 좋아지는 것도 느리게 진행될 테니 잘 지켜봐야 해.”
“네.”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할 테지만 그래도 하는 말이다. 현서는 작년 겨울보다 좋아졌으니 너무 걱정은 말고.”
작년에 겪었던 그 일들을 떠올려보면 현서가 무공을 익힌 것이 정말 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화정의 말에 유위람이 만화산 스승님들의 약초가 도움이 되는지를 물었다. 맘에 드는 장인의 명줄을 늘이기 위해 만화산을 뒤지는 일을 화정도 알기 때문에 금방 대답했다.
“좋은 약이라도 너무 약효가 강하면 현서에겐 오히려 독이나 다름없기는 한데. 어떤 약재인지 모르니 일단 눈으로 보기 전까진 뭐라 말할 수가 없구나.”
“그럼 일단 약재를 챙겨는 놓지요.”
제자의 첫정을 위해 곰 굴도 소개해 주신다 했으니 약초는 당연히 나누어주시겠지. 스승님들의 약초를 강탈할 수는 없지만 받아올 마음은 가득한 유위람이었다.
다음 날까지 푹 잔 현서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가을에 열릴 연회에 모두를 초대를 했다. 전부 바쁜 사람들이니 미리 연락을 해두어야 했기 때문에 아예 초대장을 준비해 왔다.
유위람의 원림이라면 굳이 구경할 필요는 없지만 앞으로 현서가 제자를 기를 곳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곽나난을 비롯해 전부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하겠다는 말을 했다. 감윤에겐 이번에 항도에 오지 못한 삼중의 초대장도 주었다.
“삼 사형은 당연히 가겠지만 이 사형이 같이 갈 수도 있는데 괜찮아?”
“물론이지요. 와주시면 감사할 일인 걸요. 다른 분들도 일행이 있으면 사양 말고 함께 오세요.”
“나는 사매들이랑 갈지도 몰라. 그럼 미리 연락할게.”
“네. 알겠어요.”
“나도 그쯤에 일정을 비워두겠지만 혹시 바쁜 일이 생기면 말해 둘게.”
화정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있다면 쉽게 자리를 뜰 수 없는 의원이라 일정도 딱딱 끊어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호 공자를 보고 싶다고 부인이 말했지만 아직 아이가 어려서 말이지. 나 역시 일정을 확실히 정해 답신하지.”
“아이가 아직 어리니 긴 여행은 힘들지요. 완비가 태원과 곽부에 초대한 것도 있는 걸요. 편히 하세요.”
현서의 연회에 당연히 현진과 사씨 남매도 오기 때문에 완비의 은인을 보기 위해 곽 부인이 직접 오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나난의 둘째가 올해 초에 돌을 넘겼기 때문에 다 같이 오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초대장엔 가족 전부를 초대한다고 써두었다.
현서도 돌잔치에 가고 싶어 했으나 그때 서녕에 눈이 많이 내리고 가볍긴 해도 열이 나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선물만 보냈는데 후일 곽 부인과 완비에게서 감사 인사를 받았다. 왜 완비의 서신도 있었느냐면, 완비의 선물도 챙겼기 때문이었다.
만희당을 오래 비운 게 서운했는지 조카들이 자주 찾아왔는데 그때 해준 조언이었다. 완비와 동생이 일곱 살 차이가 나지만 완비도 아직 어리다. 동생이 있는 영중과 영경, 영리가 한 목소리로 동생만 선물을 받으면 서운하다고 입을 모았다.
늦둥이 막내로 누나, 형들에게 언제나 무언가를 잔뜩 받았던 현서에겐 낯선 주제긴 하였다. 나중에 현서가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큰형 현규가 아닌, 그나마 터울이 조금 덜한 열한 살 차이가 나는 현상에게 서운했느냐고 물었더니 현상이 박장대소하며 오래된 서첩 두 개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현서가 태어났을 때 현상이 자신의 물건 중에서 현서에게 줄 만한 것들을 추린 선물 목록이었다. 다른 하나는 현상의 장남인 영리가 두 살 터울 나는 쌍둥이 동생 희서와 영서가 선물받은 커다란 말 인형을 두고 속상함을 토로하는 서신이었다.
당시 여섯 살이던 영리가 비뚤비뚤한 글씨로 자신은 동생들에게 좋아하는 장난감도 양보를 했는데 동생들은 새것을 받고 자신은 그렇지 못한 것이 비정하다고 적어놓았다.
아마 당시 영리가 비정하다는 단어를 어디서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비정을 여섯 번이나 적어놓았을 리가 없었다.
현서도 배가 아플 정도로 크게 웃은 뒤 돌아가 완비에게 줄 선물도 빠짐없이 챙겼다. 물론 현상이 자랑으로 보여준 선물 목록은 슬그머니 못 본 척했다.
며칠 뒤엔 현규가 은근슬쩍 자신도 서운해 한 적 없다고 말해 현서는 이 화제가 벌써 호부 내원을 돌았음을 알았다.
여러모로 곡절이 있었지만 보낸 선물에 곽 부인과 완비가 만족했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현서의 초대장을 받고 하루를 더 묵은 뒤 모두 바삐 떠났다.
소두절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유위람은 곤히 잠든 현서를 반시진 정도 보고 있다 깨웠다. 현서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유위람은 자신이 소두날에 현서에게 고백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은 특별히 같이 보내고 싶어 일정을 안배했다.
잠이 덜 깨 눈을 깜박거리는 현서에게 유위람이 말했다.
“만화산에 가 스승님들을 뵙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자고 오진 않겠지만 서둘러도 새벽은 되어야 돌아올 텐데 괜찮겠습니까?”
“제가, 아함. 제가 애도 아니고 괜찮아요. 유위람이야말로 밤길을 걱정할 필욘 없다지만 그래도 무리해서 늦게 오진 마세요. 참, 그렇지 않아도 저도 오늘 나가 볼 생각이었어요.”
하품을 하며 고개를 젓던 현서가 중얼대며 일정을 말하자 유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 지부에 간다고 했지요. 소두를 지나 저와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오문 지부가 위험한 곳도 아니고, 그냥 식당인 걸요. 생강을 올린 청증어(淸蒸魚)랑 게알을 넣은 작은 교자가 맛있대요. 그래서 이사랑 같이 점심을 거기서 먹으려고요. 주문할 게 많아요.”
상화원이 있는 단흥은 좋은 곳이지만 항도나 별성만큼 번화하진 않아 이사는 나온 김에 물건을 왕창 주문할 거라고 했다.
호가 상단의 사람을 상화원에 부르진 않지만 어차피 물건을 가지고 호가 상단의 사람들이 상화원에 올 것이다. 하지만 주문자가 현서라고 밝히진 않을 터라 눈 가리고 아웅할 수준은 되었다. 그것을 아는 유위람이 현서가 하오문에도 주문을 넣겠다고 하자 의아해 하며 물었다.
“하오문 지부에 따로 부탁할 만큼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 있습니까?”
“그건 아닌데, 좀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서요.”
“아, 가구 말이군요.”
“네, 가구요.”
연회의 손님은 대강 마흔 명이 넘었고 그중에 스무 명은 현서의 가족들이었다. 멀리서 오는지라 미리 와 묵을 것이 당연하니 객청을 꾸미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었다. 마흔 명을 전부 재울 방을 정리하고 가구를 맞추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급히 준비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만든 엉성한 가구를 들일 수는 없었다.
이름난 소목장(小木匠: 가구 장인)들이 전부 맞춤 가구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미리 한 벌로 가구를 맞춰두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 하오문에 가서 화리(花梨), 영목(影木), 황양목(黃楊木) 등의 귀한 목재들을 사용해 미리 만들어놓았거나 중간에 계약이 어그러져 오도 가도 못 한 상태가 된 물건들을 수소문해 달라고 의뢰하려고 한 것이다.
의뢰인이 망했거나 파혼으로 가구를 팔지 못한 경우는 소문이 퍼지면 좋지 않아 쉬쉬한다. 그런 가구들은 알음알음 소개로 팔기 때문에 하오문을 통해 주문하는 것이 빨랐다.
“호위를 붙이겠습니다.”
유위람의 말에 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를 붙이지 않겠다고 하면 더 놀랄 일이었다.
작년의 일을 떠올리면 걱정이 들 수밖에 없으나 화오궁은 몰락했고, 곽다순과 사영은 더 이상 현서의 앞에 나타날 수 없다. 불안하다고 현서를 숨겨두고 자신이 곁에 없으면 한 발짝도 밖에 못 나가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아 유위람은 호위를 여럿 붙이는 걸로 자신의 근거 없는 근심을 달랬다.
“오늘은 옷이 다르네요.”
현서가 아침을 먹는 동안 만화산에 갈 준비를 다 마친 유위람이 인사를 하러 왔다. 작년 이후로 유위람의 옷은 대부분 소매가 길게 내려오는 장포로 바뀌었다. 더욱이 항도에 도착하고 나선 항도식 여름옷을 입고 있어 오늘처럼 소매가 짧은 무복을 입은 것을 보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별로입니까?”
“아뇨. 오늘도 근사해요.”
현서의 칭찬에 유위람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웃으며 자리를 비웠다.
유위람의 계획은 하루 만에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될 리가 없었다. 새로 보낸 검을 길들이는 데는 싸워보는 것 만한 것이 없다며 세 명의 스승님들이 유위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실 그건 핑계로, 감산에서 곽다순과 싸운 이후 실력이 더 늘어난 유위람과 겨루는 것이 재미있는 것뿐이었다.
적당히 몸을 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약초를 준다는 핑계로 잡았다. 결국 유위람은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자고 스승님들과 검을 겨뤘다. 나중에는 너무 열받아 마치 생사결처럼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댔지만 아직 스승님들을 전부 꺾기엔 무리가 있었다. 제자의 재롱에 스승님들이 즐거워할 뿐이었다.
이틀 만에 넝마가 된 유위람을 두고 씻고 가라고 잡았지만 약초만을 쟁여 들고는 부리나케 사라졌다. 원래도 곰살 맞게 구는 제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검을 겨룰 때는 불만 없던 제자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에 세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 왜 저래?”
“화났나?”
“화는 무슨. 맞다. 쟤 연애한다잖아. 연애. 그래서 약초 달라며.”
“뭐? 몸이 약한 애랑 연애를 한다고?”
“쟤가? 상상이 안 가는데.”
어렸을 때부터 오래도록 유위람을 보아 왔던 스승님들은 납치감금을 하는 제자는 상상할 수 있어도, 누군가를 애면글면하는 제자는 상상하지 못했다.
“정 궁금하면 구경 가보든가.”
“아니. 그 정도로 궁금하진 않아.”
“나도.”
하나뿐인 제자니 그 연애를 위해 곰이 살던 굴을 소개해 주거나 약초를 나눠줄 순 있지만 굳이 상대가 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진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곧장 유위람과 겨루었던 검술의 복기로 넘어갔다.
엄청난 속도로 산을 내려왔지만 수염도 깎지 못하고 옷은 찢어지고 온몸은 흙투성이라 유위람은 곧장 현서를 보러 가지 않았다.
작년엔 현서가 객청에서 지냈지만 올해엔 유위람의 처소에서 지내기 때문에 유위람은 저택의 문을 넘기 무섭게 다른 처소에 목욕물을 준비시켰다.
목욕을 하는 동안 병풍 너머로 수하에게서 그간의 일을 보고받았다. 유위람이 만화산에 가던 날 현서 역시 예정대로 외출을 했고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다른 외출은 하지 않고 저택에서 산책만을 했다고 한다.
“하오문 지부에서 식사를 마치신 뒤 호 공자님은 하오문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셨고, 이사는 물건을 주문하느라 바빴습니다.”
걱정이 되어 호위는 붙였으나 대화를 엿듣게 시키지는 않았다. 유위람 자신이 엿듣는 건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지만 수하들이 엿듣는 건 싫었기 때문이다. 일관성이 없었으나 남의 말을 엿듣는 것에 일관성 운운할 일도 아니었다. 더욱이 무슨 주제였든 현서가 얘기해 줄 테니 상관없었다.
“그럼 지금 호 공자는 무얼 하지?”
“조반을 드신 후 산책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돌아오셨다고 기별을 할까요?”
“되었다. 내가 가면 될 일이니. 너는 이만 물러가라.”
수하를 물리며 유위람은 욕조에서 일어났다. 예정보다 시간을 더 지체했지만 다행히 오늘이 소두절이었다. 유위람은 현서에게 소두절의 항도를 구경하자고 청할 계획이었다.
머리에 꽃만 꽂지 않았을 뿐 누가 보더라도 항도 사람이 소두절을 맞이해 한껏 꾸미고 나온 모양새로 치장을 마친 유위람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현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뜰의 그늘에 가만히 서 있던 현서가 유위람이 문어귀를 넘기가 무섭게 고개를 돌렸다.
“유위람!”
현서를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던 유위람이 되레 놀라며 한달음에 곁에 섰다.
“제가 온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현서를 안아 올리며 묻자 잔뜩 들뜬 기색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산책하며 옥과 기감을 넓혀보는 연습을 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마침 그때 유위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뭐예요. 처음엔 제가 잘못 느낀 건 줄 알았어요.”
“제가 딱 맞춰 돌아왔군요. 그런데, 호 공자. 방금 연습중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호 공자의 팔에 옥 님이 없는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현서가 팔에서 옥팔찌를 빼둘 때는 유위람과 정사를 나눌 때뿐이었다. 하지만 방금 현서가 옥 님과 수련 중이라 하지 않았던가. 옥 님과 무슨 일이 있었다면 현서가 이렇게 밝은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지금 자신이 짐작하는 것이 맞는지, 유위람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현서를 바라보았다. 눈 아래를 발그스레하게 붉힌 현서가 팔을 뻗어 유위람의 목을 감으며 속삭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거든요. 그러니 방으로 가요.”
소두절 외출은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이미 유위람의 머릿속에서 멀리멀리 사라졌다. 유위람은 조종당하는 강시처럼 척척 걸어 침실에 들었다.
“누굴 만나 뭘 했다고요?”
하지만 현서를 침상에 올려둔 유위람은 곧장 현서를 둘러메고 외출하지 않은 것을 후회해야 했다.
“뭘 한 게 아니라, 들었다고요.”
하오문 지부를 찾아간 것이 구음하는 요령을 배우기 위해서라니. 유위람은 일순 눈앞이 아득해지며 현기증이 나는 기분에 머리를 짚었다. 고간을 유심히 바라볼 때부터 현서가 자신의 간을 바닥에 패대기를 치는 날이 올 것이라 여겼지만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양심이 대충 없는 거나 다름없는 유위람도 이럴 때의 현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게 현서가 자신보다 한참 어려 거침이 없는 것인지, 세상 물정을 몰라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하오문을 찾아가는 걸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아닌데.’
유위람은 한숨을 삼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처음부터 찬성할 거란 생각은 현서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꼭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가득 차다 못해 밖으로 넘실거리는 현서가 반짝이는 눈을 하고 유위람을 졸랐다.
“저도 유위람의 걱정이 뭔지 알아요. 들었는데 걱정처럼 위험할 수도 있대요. 하지만 끝만 살짝, 조금 물어보는 건 괜찮다고 했어요. 아주 조금, 진짜 조금만 해보고 안 될 것 같으면 그만 둘게요. 유위람이 지켜보면 되잖아요. 네? 네에?”
문제가 여기저기 산적해 있었다. 유위람이 이십대의 성욕과 호기심을 너무 쉽게 봤다는 것도 문제고, 현서가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런 목소리와 이런 방식으로 조른 적이 없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작년 영우곽가에서 현진이나 회천검을 대할 때의 그 어리광이 섞인 목소리를 유위람을 대상으로 내어본 적이 없었던 현서였다. 현서와 교제하게 된 이후로 그것을 아쉬워한 적 없었는데 어쩌면 내심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유위람의 이성이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대답은 없지만 기민하게 알아차린 현서가 비장의 무기를 썼다.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위람에게 백발백중이라는 것 역시 문제였다.
“정말 조심해서 할게요. 그러니 한 번만 해봐요. 네?”
현서가 현진에게 하듯 유위람을 올려다보며 소매를 잡아 흔들었다.
평소라면 현서가 이처럼 사랑스럽게 굴어도 안 된다고 거절했을 유위람이지만 오늘은 이틀 밤을 새었다는 게 문제였다. 유위람 정도의 무인이 이틀 못 잔 게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세 명의 스승님들과 생사결을 하듯 검을 맞대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성이 느슨해진 틈을 타 작은 양심을 발로 뻥하고 차버린 욕망이 유위람을 뒤흔들었다.
웃음 하나로 그 시끄러운 항구를 일순 정적에 빠뜨리는 미인이 자신의 양물을 빨아보고 싶다고 조르는데 그걸 무시하는 건 고자나 미친놈일 게 뻔했다. 유위람은 고자도 미친놈도 아니었고, 양심은 이성과 함께 뒷방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현서가 소매를 흔들며 얼굴 가득 원한다고, 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는데 이 이상 거부할 재간이 없었다. 목덜미가 붉어진 유위람이 거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정말 살짝입니다. 조금이라도 안 된다 싶으면 바로 그만둘 겁니다.”
“네, 그럴게요.”
현서가 자기 욕심을 들어줘서 고맙다며 유위람을 와락 껴안았다. 양물을 빨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듣다니 이거 괜찮은 건가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반짝 스쳤지만 곧 사라졌다.
“제 욕심만 차린 게 미안하니까 대신 유위람이 좋아하는 것도 같이 해요.”
“제가 좋아하는 것이요?”
저 예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하는 두려움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천하의 패천검을 이토록 몰아붙이는 것은 오직 호현서 한 명뿐이다. 현서가 의기양양하게 요대를 풀며 말했다.
“손 좀 들어봐요.”
현서가 유위람을 침상에 밀어 눕히며 요구하자 순순히 손을 들었다. 현서가 야무지게 유위람의 양팔을 묶으며 아프진 않는지를 물어보았다.
“하.”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좋다는 점에선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유위람은 양손이 결박당한 상태로 침상에 누워 현서를 올려다보았다. 여름이지만 타지 않아 새하얀 볼이 발그레해진 현서가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서슴없이 유위람의 장포를 걷었다.
“어.”
현서가 유위람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숙이고 하의를 완전히 벗겼을 때 본 것은 예상과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현서가 빨아준다고 했을 때부터 반쯤 발기해 있던 유위람의 양물은 현서의 기억과 전혀 달랐다. 손으로 만졌을 때나 아래를 파고들 때보다 지금이 훨씬 거대해 보였다. 기분 탓인 건 알았지만 손 아래서 더욱 묵직해지는 부피에 현서는 순간 자신을 잃을 뻔했다.
향유를 바르고 물면 안 된다는 얘길 들어서 현서는 맨손으로 기둥을 잡았다.
“흣.”
유위람은 현서와 정사를 할 때 느끼는 것을 감추는 법이 없이 늘 솔직했다. 그에 자신을 얻어 좀 더 대담하게 손을 움직였다. 손으로 유위람의 양물을 수음해 주는 것은 여러 차례 해서 이것은 자신 있었다.
양물이 손아귀에서 확 부피를 늘려 단단해지자 현서가 고개를 숙였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허벅지를 간질이자 움찔 하는 것이 느껴졌다. 현서는 머리칼을 정리할 정신도 없어 그대로 혈관이 울퉁불퉁한 기둥을 혀로 핥았다. 유위람의 허벅지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당과를 핥듯이 하랬는데.’
이렇게 큰 당과는 어릴 때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현서는 색사에선 두말할 나위 없이 착실한 학생이라 배운 것은 뭐든 따라해 보고 싶어 했다. 처음부터 유위람처럼 양물을 다 삼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서는 핥는 것에 집중했다.
가장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는 것처럼 귀두를 남겨두고 기둥과 그 아래에 열중하다 음낭을 덥석 물었다.
“호 공, 호 공……자. 으읏.”
간지러워 웃음을 터뜨리면 호 공자가 불퉁해 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기둥을 핥는 서툰 혀 놀림에도 쾌락이 몰아쳤다. 유위람은 현서 한정으론 세상에서 가장 쉬운 남자였다.
자신이 구음을 해줄 때 이런 느낌을 받는 걸까. 유위람은 현서의 아래를 빨 때 그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렸지만 현서가 그렇게 했다간 납작하게 짜부라질 게 뻔했다. 그래서 유위람은 쾌락에 움찟거리면서 의식적으로 다리를 더 크게 벌렸다. 그게 현서를 더 부추기는지는 유위람은 꿈에도 몰랐다.
두 개의 음낭을 실컷 빨고 났더니 힘이 바짝 들어간 양물이 현서의 이마를 툭 하고 칠 정도로 단단해졌다. 번들거리는 귀두를 보고 현서가 입을 벌렸다.
“읍.”
“흣.”
양물의 반은커녕 귀두와 그 끝부분을 삼켰을 뿐인데도 입 안이 가득 찼다. 목구멍에 닿는 것을 피하려고 현서는 공을 들여 입에 문 것만을 빨았다. 있는 힘껏 빨며 얼굴을 앞뒤로 움직이자 입 안에서 양물이 부풀었다.
‘여기서 더 커지면 어떻게 해.’
유위람은 유위람대로 죽을 맛이었다. 음낭을 입에 넣었을 때도 충격이었는데 양물의 끄트머리가 현서의 입 안에 들어가는 것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바로 쌀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은 것까진 좋았는데 눈치도 없는 양물이 더 힘을 얻었다. 당황한 유위람이 몸을 뒤로 물리려고 했지만 현서의 입천장만 자극하는 꼴이 되었다.
“하아. 하아.”
유위람의 신음이 마치 귀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아래가 간질거려.’
입천장은 현서의 성감대이기도 했다. 유위람의 양물이 입 안의 여린 살들을 자극할 때마다 현서도 아래가 단단해지며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허리를 움찔거리며 흔드는 것을 현서는 몰랐지만 유위람은 알았다. 이 이상 흥분하면 현서가 다칠 걸 알아서 움찔거리는 허리에 힘을 바짝 주었다. 현서가 미리 묶어놓아 다행이라 여겼다. 혹시라도 흥분해 현서의 머리칼을 붙들었으면 큰일이 났을 게 뻔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서가 입 안에 넣지 못하는 양물을 손으로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현서는 입에 넣지 못하는 부분까지 만지려고 한 것이겠지만 그것이 유위람의 이성을 잡는 마지막 장치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양물이 점점 커지는 것은 막지는 못했다. 의지대로 양물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천지에 없으니 유위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입 안에서 유위람의 성기가 꿈틀거렸다. 사정이 곧이었다. 현서와 유위람 모두 입에서 양물을 뺀 다음에 사정할 거라 여겼지만 합이 맞지 않았다. 유위람이 물러서려는 순간 현서가 마지막이라 여겨 있는 힘껏 입 안을 조였다.
“흣.”
침과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양물에서 정액이 튀어 현서의 입 주변을 더럽혔다. 양물을 입에 넣었을 때 느꼈던 맛과 향과는 또 다른 진한 풋내가 확 차올랐다. 성감을 느끼며, 동시에 입 안이 얼얼해 눈물을 뚝뚝 흘리던 현서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문질러 유위람의 정액을 손에 진득하게 묻혀버렸다.
“읏. 거기까지. 저를 심장 마비로 죽게 할 작정이 아니라면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사정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죽은 사람의 양물도 세울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얼굴을 한 현서가 혀를 빼 손바닥을 핥으려고 했다. 유위람이 깜짝 놀라며 흐트러진 장포 자락으로 급히 현서의 손을 닦았다. 묶어놓은 끈이 이미 끊어진 지 오래라는 건 둘 다 눈치채지 못했다.
“더럽습니다. 아무거나 입에 넣지 마세요.”
“유위람의 것이 왜 더러워요.”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몽롱한 얼굴을 하고 유위람이 닦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던 현서의 눈동자에 불이 켜지는 것처럼 반짝 하고 빛이 들어왔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연습하면 좀 더 늘 것 같은데.”
아니었다. 유위람은 깨달았다. 오늘부터 매일 현서가 구음을 해서 십 년을 보낸다 해도 오늘과 별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유위람을 흥분시키는 것은 현서의 구음 실력은 아니었으니 상관없었지만 물론 그것은 현서에게 비밀이었다. 현서가 더 하겠다고 하는 일은 막아야 했다.
유위람은 대답 대신 마치 항의라도 하듯 현서의 양물을 덥석 물어버렸다.
“앗. 흐읏.”
현서를 침상 머리에 세워두곤 무릎을 꿇어앉은 채였다. 유위람의 양물을 빨며 반쯤 흥분해 있던 현서의 아래가 순식간에 유위람의 입에서 크기를 키웠다. 목구멍을 열어 안쪽까지 밀어 넣고 짜내듯 빨아들이자 현서가 교성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다리에 힘이 빠져 유위람의 어깨 위에 걸쳐진 상태가 되었는데 그게 더 좋았다. 유위람의 입은 여전히 양물을 빨고 있었지만 양손으로 현서의 엉덩이를 벌렸다. 향유가 언제 유위람의 손에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도 없었다.
“으응. 아아아.”
이런 자세로 뒤를 쑤셔진 적은 없었다. 커다랗게 밀려드는 쾌감에 현서의 발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지만 유위람이 단단히 잡고 있어 아예 쓰러지진 않았다.
아닌 척해도 오늘의 유위람은 평소보다 훨씬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현서가 아래를 빨아준 것도 좋았고, 이런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해 더욱 흥분한 상태였다. 현서의 아래를 쑤시며 다시 발기한 양물이 이윽고 말랑해진 구멍으로 파고들었다.
“아아아. 아.”
언제 자세가 바뀌어 침상에 누웠는지도 모르는 현서는 안 돼요, 못해요, 그만,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색사 중에 흥분을 참지 못해서 한 말이든 아니든 간에 유위람을 멈추게 할 말임을 알아서였다. 현서는 목구멍에 걸린 말을 참으며 속절없이 신음만 내뱉었다.
한참을 흔들리던 현서는 이윽고 할 수 있는 말을 찾아 눈을 치뜨곤 애원했다.
“천. 흣. 흣. 천천. 아읏. 천천히 해줘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인 눈알을 핥고 싶은 것을 인내하며 유위람이 몸을 빙글 돌려 현서를 자신의 위에 올려 앉혔다.
“히익.”
갑자기 깊어지는 자세에 현서가 진저리를 쳤다. 혹시라도 피가 났을까 봐 유위람이 자신의 양물을 물고 있는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읏. 하, 하지 말아요.”
잔뜩 벌어진 아래를 더듬는 손길도 현서에게는 과한 자극이 되었다. 신음을 뱉을 때마다 흥분한 현서의 양물도 같이 떨렸다.
“저는 천천히가 안 될 것 같으니 호 공자가 움직여보세요.”
유위람이 거짓말로 현서를 꾀며 현서가 움직이기 편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기승위는 처음이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유위람의 손을 지지대 담아 현서가 발끝에 힘을 주고 허리를 들어 올렸다. 몸 안을 꽉 채우고 있던 유위람의 양물이 내벽을 훑으며 밀려 나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흐으응.”
눈을 꼭 감은 채 유위람의 손을 꽉 쥔 현서의 팔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요분질을 하는 현서에게는 아쉽게도 물고 있는 양물은 정말 조금만 빠져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했다. 결국 몇 번 하지 못하고 힘이 빠져 주저앉았는데 그게 더 좋지 않았다.
“아아아아.”
이제껏 닿은 적 없었던 곳에 양물이 닿아 현서가 자지러지며 허리가 뒤로 꺾였다. 현서의 정액이 유위람의 가슴에 튀었다. 아직까지 뒤의 자극으로만 절정에 이른 적이 없었던 현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신을 못 차리는 현서와 마찬가지로 유위람도 꽉 조이는 내벽에 일순 눈앞이 새카매졌다.
“하. 아. 아읏. 아아아.”
그대로 현서의 허리를 잡아 쳐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감질났는지 자세가 다시 바뀌었다. 부드러운 이불에 등을 대고 누웠는데도 현서는 숨을 헐떡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유위람의 접문은 부드러웠지만 아래는 흉포하게 짓이기며 쳐올렸다. 워낙 커다래서 가만히 넣고만 있어도 내벽을 전부 꽉 누르는 느낌이었는데 거기에 거세게 쳐올리니 현서는 신음밖에 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욱이 현서는 한 번 사정하고 나면 다시 사정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런데도 잔뜩 예민해진 몸은 느끼는 것에 여념이 없어 유위람의 숨결, 스치는 머리카락에도 파드득 떨었다.
유위람이 현서의 안에서 길게 사정을 했다. 사정을 끝낸 유위람이 현서의 아래서 양물을 빼냈다. 언제나처럼 뒤처리를 위해서였다.
현서는 가물거리는 눈에 힘을 주고는 힘겹게 발을 들어 유위람의 허리를 감았다. 뒤꿈치로 꾸욱 허리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아주 약한 힘이었지만 유위람의 움직임을 막기엔 충분했다.
“조금만 있다가 같이 씻으러 가요.”
하품을 길게 한 현서가 유위람의 맨살에 파고들며 곧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기절 같은 잠에 빠졌다. 유위람도 잠든 현서의 정수리에 얼굴을 부비고는 곧 잠이 들었다. 정사 후 이렇게 바로 잠이 든 것은 유위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반시진(1시간)도 되지 않아 옅은 피 냄새에 유위람이 대경하여 잠에서 깼다. 자다가 칼에 찔렸어도 이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터였다. 피 냄새의 주범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잠들 때까진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현서의 볼이 부어 열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정사는 이제까지 중에서 가장 격렬했던지라 현서가 열이 나고 몸살이 나는 건 각오해 두었다. 하지만 구음 때문에 입술 가장가리가 찢어졌을 줄은 몰랐다. 잠이 들기 전에는 피가 나지 않아 몰랐는데 입 안과 볼이 부으면서 자극을 받아 아슬아슬한 상태였던 입술 끝이 기어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유위람은 깊은 한숨을 삼키며 사람을 불렀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별걸 다 보는구나.
“이건 확실히 찢어졌네요.”
옥이 없는 가슴을 칠 수가 없어서 속이 막힌다고 잔소리를 하고 이사가 확실히 찢어진 것이 맞다고 확언을 해 현서는 시무룩해졌다. 잠이 들 때까지만 해도 턱과 입술이 좀 아팠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눈을 떴더니 입술 끝에 피가 나 있을 줄이야.
유위람은 그 엄청난 크기의 양물을 넣으면서도 자신의 아래를 찢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자신은 양물 끝을 좀 물었다고 입술이 찢어질 게 뭐람. 현서는 불퉁해져 툴툴거렸다.
“이제 두 번 다시 안 됩니다.”
유위람이 엄숙한 얼굴로 못 박았다. 단순히 강하게 말했다면 다음에 다시 졸라볼 여지가 있었지만, 유위람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이 느껴져 현서는 얌전히 포기했다.
적게나마 자고 일어났더니 이성이 돌아와 유위람은 본격적으로 반성했다. 현서가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자신보다 열한 살 어리고, 아무리 예뻐도 조른다고 다 들어줄 게 아니었다.
‘그놈의 소매.’
못 자서 피곤했다고 하지만 소매를 잡고 올려다보는 게 이성을 치울 정도로 그렇게 어여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부친에게 홀딱 빠져 있던 모친을 떠올리며 유위람은 자신이 새삼 모친을 닮았음을 재차 확인했다. 욕심도 성격 나쁨도 전부 외탁했으니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이미 옥 님의 일로 곽나난의 자식이 되는 형벌은 예약이 되어 있어 유위람은 나난의 족보를 마음대로 써먹는 대신 두 번 다시 소매가 긴 장포는 입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현서가 손이든 옷이든 붙잡고 조르면 넘어갈 수 없는 걸 알지만 괜히 소매 탓을 해보는 유위람이었다. 소매 입장에선 억울한 일이었다.
하루가 지나자 현서도 구음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접문이 금지된 것은 당연하고, 목이 붓지는 않아 음식을 삼키는 것은 괜찮았지만 입 안이 부어 음식을 입에 넣는 것이 고역이었다.
현서가 못 먹자 유위람이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자신이 더 자제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호 공자가 아프게 되었다고 비 맞은 꽃처럼 애처롭게 굴었다.
유위람에게 콩깍지가 쓰이지 않은 옥과 이사는 저것이 개수작임을 알았으나 유위람의 뜻에 동조하는 바 모른 척했다. 현서만이 유위람을 위로하며 거듭 다음부턴 구음에 도전하지 않겠다며 달랠 뿐이었다.
유위람의 무릎에 앉은 채 유위람을 안아 달래는 꼴에 옥은 없는 코도 막힐 지경이었지만 현서가 구음을 하다 입술이 찢어지는 꼴을 또 볼 생각이 없어 그저 하늘만 볼 뿐이었다.
―날씨 좋네.
창밖에 장맛비가 줄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