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의식(儀式)
‘후우.’
이준은 저답지 않게 긴장하고 있었다.
만일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면 이 정도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리 만무하지만, 하필이면 오늘은 몹시 중요한 날이었으니까.
[형이 날 어떻게 돕겠다는 거야? 형은 날…… 날 버렸잖아!]
저를 향해 처절하게 외치던 남자의 목소리는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
정신을 차린 이준은 아주 잠깐, 입술을 깨물고 있다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준의 검은 눈 사이로, 대기실 의자 앞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들어온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빛나는 눈동자, 오뚝한 코에 탐스러운 입술이 매력적인 남자였다.
거울 속의 그는 짙은 블랙 슈트에, 안에는 화이트 셔츠, 그리고 레드와 블랙이 적절하게 섞인 나비 보타이로 포인트를 준 의상을 입고 있었다.
이준은 경쟁이라도 하듯, 거울 속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똑똑.
그때였다.
짧은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준이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달칵 문이 열렸다.
“다행히 계시는군요.”
안심하는 그 말투에 이준은 코웃음 쳤다.
“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대기실 앞에 내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나? 당연히 여기 있지.”
퉁명스러운 이준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문을 연 사람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사실이지만, 선배님이 안에 계실지는 확신할 수가 없어서요.”
“설마 내가 약속을 어기기라도 한다는 거야?”
이준의 날카로운 반응에 대기실 문 앞에 서 있던 남자의 눈이 반달처럼 변했다.
‘재수 없는 녀석.’
첫 만남 때도 그랬지만, 이후로도, 그리고 지금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이준은 제 말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신경질적으로 바라보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준의 얼굴에서 짜증이 사라졌다. 일종의 체념이었다.
“걱정 마. 그쪽 말대로 할 테니까.”
“믿어도 되는 겁니까.”
저를 의심하는 남자의 발언에 이준이 미간을 좁혔다.
“나도 주제 파악은 해. 애써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다고.”
그러자 이준을 지켜보던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이따 동편 비상계단에서 뵙죠.”
그러든가 말든가.
이준은 그 말을 끝으로 대기실을 나가 버리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똑똑―.
‘또야? 젠장.’
이미 한 번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고요한 대기실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이준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섣부른 행동은 안 할 거라니……!”
차갑게 일갈하던 이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무전기를 착용한 스태프가 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은 언제 그녀에게 화를 냈냐는 듯 빙긋 웃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화사하기 그지없는 그의 미소에 멍한 표정을 짓던 여자 스태프가 볼을 발갛게 붉히더니 말했다.
“차, 차휘 씨. 10분 뒤 무대로 올라가실 예정이니 스탠바이 해 주세요!”
* * *
「차휘 씨요? 말해 뭐 합니까. 최고죠!」
「제가 듣기로는 요즘 좋은 작품의 대본은 거의 차휘 씨한테 간다고 하던데요.」
「N사가 해외에서 먹힐 것 같다며 찍은 배우라죠?」
「내가 만난 배우 중 가장 기대되는 녀석이야. 나이도 괜찮고, 앞으로가 무궁무진하지.」
「전 차휘 선배처럼 성공한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본명 차이준.
연예계에서 사용하는 예명은 빛날 ‘휘(輝)’ 자를 써서 차휘.
나이는 창창한 서른둘에, 키는 185cm, 몸무게는 73kg.
고등학교 2학년, 열여덟의 나이에 남성 아이돌 그룹 ‘미스틱’의 리더로 연예계에 데뷔하여 최정상의 인기를 끌고, 성인이 되자마자 배우로 전향하여 이제는 완벽하게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되어 버린 사내.
현 30대 배우 중 초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히 넘버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를 선망하는 연예계 후배는 허다하다.
“이번 TOKD 신인 남자 배우는…… 축하드립니다, <더 소울>의 조명우!”
단적인 예로 지금 역시 그렇지 않은가.
“가, 감사합니다! 제가 이 상을 받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시, 신인상이라니.”
입술을 파르르 떨던 후배 배우는 빙긋 웃고 있는 이준을 힐끔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제가 가장 존경하는 차휘 선배님께서 직접 수상을 해 주시니 그 기쁨이 더욱 배가 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게서 상을 건네받을 때 살짝 떨리던 후배의 손가락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웃으며 그의 수상소감을 지켜보기 위해 뒤로 물러나는 자신을 흘긋거리는 그 시선도.
“조명우 씨 말이에요. 수상한 뒤에도 계속 배우님 쪽을 바라보더라고요.”
TOKD.
탑 오브 코리안 드라마의 약칭으로, 201X년부터 열리게 된 전국적인 시상식이다.
시상하고 대기실을 내려온 이준을 보며 그의 매니저인 태경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이준은 답했다.
“배우 인생에서 신인상을 받는 건 영광이니까. 기억에 남을 만도 하지. 특히나 그 상을 시상해준 사람이라면, 더욱이.”
“아뇨, 그게 아니라…… 뭐랄까. 흑심이 있는 눈빛이었다고요!”
“뭐?”
“왜, 사전 인터뷰에서도 조명우 씨는 배우님이 자기 이상형이라고 했을 걸요?”
“정말? 하하, 그거 영광이네.”
“배우님. 조명우 씨는 남자예요!”
“그거 꽤 위험한 발언이야, 태경아. 남자건 여자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그저 감사한 거라고.”
“뭐, 하긴…… 그건 그렇죠.”
“그것보다 태경아. 오늘은 먼저 퇴근해도 돼.”
“예? 그럼 배우님은 어떡하시게요?”
나?
“나는 볼일 좀 보고 갈게. 귀가는 ‘그 녀석’이랑 같이할 거야.”
“예? 아…… 네, 알겠습니다.”
단호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준의 시선에 태경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하고 태경을 비롯한 ‘차휘’의 스태프들이 대기실을 나가며 소리쳤다.
이준은 빙긋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스태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이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긴장한 얼굴이네, 주인. 왜. 막상 ‘하려니’ 망설여지나?》
거울 속에 비친 슈트 차림의 제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누군가의 음성에 이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망설여지다니.”
《뭐, 본군도 주인의 마음이 아예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야. 본인보다 강한 영기(靈氣)의 소유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건 솔직히 불쾌한 일이지. 나 같았으면 벌써 엎었어.》
“이봐, 뚱냥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누구한테 머리를 조아려.”
《누가 뚱냥…… 흥! 어쨌든 사실이잖아. 주인이 ‘그 녀석’보다 영기가 약하기 때문에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거. 그래서 차가의 꼬맹이가 주인에게 혼인 의식을 치르라고 한…….》
“<함(喊)>.”
이준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곧 허공에서 글자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이 제 주변을 맴돌던 무언가의 입에 닿았다.
《――!》
우우웅―!
이준의 반응에 불만이라도 있는 듯, 그의 주변을 맴돌던 무언가가 이준의 머리로 진동을 쏘아 댔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이준은 한 번 더 심호흡한 뒤 몸을 돌렸다.
달칵.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북적이던 이곳 대기실 복도는 그나마 고요한 상태다.
아마 무대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상식의 2부로 인해, 다른 층의 대기실 복도가 북적거렸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이미 1부의 시상자와 수상자들이 한 번 무대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기 때문에, 이 스테이지의 관심도는 줄어든 상태.
때문에 시상식의 스태프들도 유유자적하게 복도를 걷고 있는 이준을 그 유명한 ‘차휘’라고는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동편 비상계단이었던가.’
어째 접선 장소도 매번 이런 음침한 곳이냐고.
소란스레 움직이는 스태프들의 관심 밖에서 천천히 걸어가던 이준은 어느새 도착한 비상계단 입구 앞에 뚝 멈추어 섰다.
문고리를 잡기를 몇 번이나 주저하던 이준이 결국 힘을 주어 문을 열자, 비상계단 안의 모습이 보였고, 그곳에 이미 도착해 있던 선객이 시야로 들어왔다.
예의 선객은 차휘’의 대기실에 찾아온 남자와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이준을 발견한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서 오세요, 선배님. 조금 늦으셨군요.”
이준은 그에게 다가가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빨리 온다고 온 거야. 정리하자마자 왔으니 트집 잡지 마.”
그러자 상대가 유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언제 트집을 잡았다고 그러십니까.”
이준은 멀끔하다 못해 눈부시기까지 한 상대의 빛나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정돈되어 있던 보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풀어 헤치며 말했다.
“후딱 해치우자고. 상황이 상황이니까.”
“알겠습니다.”
이준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남자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이준을 당기더니 꼬옥 품으며 이준을 내려다봤다.
‘윽.’
집어삼킬 것처럼 강렬한 시선이 이준을 옭아맨다.
망할.
입 밖으로 뱉어 내지 못할 욕설이 목구멍 안에 감돌았다.
그런 이준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갈색 눈동자의 그가 물었다.
“그럼 준비는 되셨습니까?”
태세를 갖추었음을 이미 파악했음에도 굳이 묻는 뻔뻔함이란.
이준은 그런 그에게 핀잔을 주려 했으나 이내 다가오는 강한 숨결에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이준의 오른쪽 귀에 달린 검은색 귀걸이를 매만졌다.
이준이 “빨리 안 해?”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우웁!”
손목에 힘을 준 그가 이준의 얼굴을 끌어당기더니 제 입술을 이준의 입술 위로 포갰다.
‘하아.’
밀려오는 따뜻한 기운을 속 안으로 삼키던 이준은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드럽게 달콤하네.
[연재] 악연이라면 악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