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3화 (4/72)

3화

상극(相剋) (3)

쯧.

‘……!’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으나 틀림없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준이 그 행동에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검은 한복 차림의 여자가 차갑게 말했다.

“본가에서는 함부로 영력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바깥보다 영기가 두 배는 더 소모됩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이준은 속으로만 투덜댄 뒤 설명하듯 제게 말하는 그녀를 향해 대답했다.

“알겠어.”

“이쪽으로.”

이준은 제게 짧게 경고한 후 다시 몸을 돌리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변하지 않는군.’

이준은 앞서가는 그녀의 뒤를 말없이 따르기 시작했다.

이준의 본가이자, 고현 차씨 가문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곳, 현가당(玄迦堂)의 본채 건물에는 고현 차씨 가문 가주의 집무실이 있었다. 집무실의 문이 보이자 여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준은 제게 말한 후 이제야 뒤를 돌아보는 여자를 향해 쓴웃음을 흘렸다.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아마 그가 본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겠지.

“말해.”

그러자 잠시 그를 쳐다보던 검은 한복의 여자가 닫혀 있는 집무실을 향해 똑똑 문을 두드렸다.

“가주님. 오라버니께서 오셨습니다.”

오라버니라니. 이준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강주야. 그냥 ‘오빠’면 안 되겠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칠흑으로 무장한 한복 여인의 이름은 차강주.

이준의 아버지 차현종의 딸이자, 이준이 죽도록 사랑하는 두 동생 중 한 명이다.

“들어오시랍니다.”

안쪽에서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음에도 강주는 이준에게 사무적인 말을 뱉어 냈다.

그 행동 역시 강주답다 생각하던 이준은 달칵 열리는 집무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곧 이준의 시야로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진회색의 한복을 입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날 이후 수년이 지났음에도 예전만큼이나 정정한 고현 차씨 가문의 가주이자, 이준의 할아버지.

“왔냐, 이 썩을 놈아.”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에서 몇 존재하지 않는, 퇴마사(退魔師)다.

* * *

평범한 사람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퇴마사’라는 직업은 대한민국에 엄연히 존재한다.

가상 현실이나 소설, 혹은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이들이 존재하는 까닭은 단 하나.

이 세상은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태양 아래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지낼 수 있는 양(陽)이 존재한다면, 그림자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음(陰) 또한 존재하는 법. 우리와 같은 살아 있는 것들이 양(陽)이라면 죽었지만 죽지 않은 ‘그것’들은 음(陰)이다.]

어릴 적,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학교 내의 놀이터를 향해 달려가려던 이준을 억지로 제 앞에 끌어앉힌 고현 차씨 가문의 가주, 태모는 서늘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미 죽어 버렸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결코 죽지 않은 ‘그것’들을 우리는 ‘비생(非生)’이라 부르며, 비생들을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하는 자들을 ‘견자(牽者)’라고 하지. 흔히 말하는 ‘퇴마사’가 바로 견자란…… 이놈, 듣고 있느냐?]

이준은 기다란 회초리를 든 채 책상을 탁탁 두드리는 태모를 바라보며 입을 쭉 내밀었다.

[할아버지.]

[왜, 욘석아.]

[……나 꼭 여기 있어야 해?]

[뭐라고?]

[아니, 그렇잖아. 난 비생인지, 견자인지, 퇴마사인지 전혀 관심 없거든? 오히려 강주가 거기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차라리…… 악! 왜 때려!]

따악―.

커다란 소리가 나자 반사적으로 머리를 쥐어 싼 이준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쯧쯧 혀를 차던 고현 차씨 일가의 가주, 차태모는 말했다.

[어쩌다 저런 놈이 종손으로 태어났을꼬. 우리 차씨 가문은 망했구나. 아주 망했어!]

당시 아홉 살이었던 이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동안 외출은 턱도 없다!”라 외쳐 대는 태모를 향해 “보내 줘! 나 놀러 갈래!”를 외쳐 댈 뿐이었다.

‘불유쾌한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

기나긴 상념에서 벗어난 이준은 쓴웃음을 삼켰다.

이렇게 태모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괜스레 속이 부글거렸다.

자신이 집무실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보면서도 손을 까딱거리고 있는 노인은 건강하기 짝이 없다.

이준은 흥 콧방귀를 뀌며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누가 요괴들 잡아먹고 사는 양반 아니랄까 봐, 아주 혈색이 좋으십니다.”

누가 봐도 비꼬는 소리에 태모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이준은 멈추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요괴는 우리 영감님 쪽인 줄 알겠어.”

“‘요괴’가 아니라 ‘비생’이라고 몇 번을 말하느냐. 명색이 견자라는 놈이 가장 기본적인 단어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이준은 코웃음 쳤다.

“견자는 무슨. 그럴듯한 말로 치장해 봐도 퇴마사는 퇴마사더이다. 게다가 요괴를 퇴치하는 건 영감님이지 내가 아니잖아요.”

“이, 이 썩을 놈이!”

“영감님도 참. 간만에 본 장손한테 썩을 놈이라뇨. 세상 사람들한테 물어보십시오. 제가 썩을 놈이면 영감님은 대체 뭡니까.”

“장손? 자앙손? 네놈이 장손 짓을 제대로 하기나 하면 내 말을 안 한다! 매번 일이다 뭐다 해서 꽁무니 빼기 바빠 동생들한테 다 맡기는 주제에 감히 장손을 언급해?”

이준은 휘휘 손사래를 쳤다.

“됐고요. 바쁜 저를 이곳까지 호출한 이유가 뭡니까. 급하다고 해서 오긴 왔는데, 별것도 아닌 걸로 부른 거라면 앞으로 본가엔 다시는 안 와요.”

“네놈이 인간이냐!”

“그러길래 싫다는 사람을 왜 자꾸 부르신대.”

“이, 이 녀석이…… 후우, 말을 말자. 네놈과 더 얘기하다간 내 목숨도 끝나겠다.”

파르르 떨며 저를 노려보는 태모의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지다 겨우 펴졌다.

이준은 빙긋 웃었다.

“뻔뻔한 놈.” 하고 태모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개의치는 않았다.

내가 이렇게 지내는 게 어디 한두 해인가.

“일단 거기 앉아라.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중요한 얘깁니까?”

“그게 아니면 네놈 말대로 귀하신 우리 ‘종손님’을 이곳까지 불렀겠어? 아주 중요한 일이니 잔말 말고 앉아.”

“…….”

“강주야.”

“예, 가주님.”

“도 비서한테 얘기해서 이 녀석 잠자리 좀 준비하라 전해.”

뭐? 잠자리?

이준은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영감님. 나 자고 갈 생각 1도 없는―.”

“휘준이는 안 볼 생각이야?”

태모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낯익은 이름에 이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태모는 서늘한 얼굴을 하는 이준을 향해 말했다.

“너랑 같이 자겠다며 그 어린 것이 몇 날 며칠을 기다렸다.”

“어리기는. 휘준이, 이제 열일곱 아닙니까.”

“성인이 안 됐으면 다 애지!”

이준은 생떼를 쓰는 태모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 없는 이준을 지켜보던 태모가 말했다.

“그래도 가 버릴 거라면, 뭐. 말리진 않겠다.”

“……게요.”

“뭐라고?”

이준은 일부러 제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 한 번 더 묻는 태모를 향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다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자고 갈 테니 하려던 이야기나 계속하십시오.”

굳은 얼굴로 말을 한 후 정색하는 이준을 보고 피식 웃던 태모가 문 입구에 서 있던 강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칵.

강주가 문을 닫으며 집무실을 벗어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준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소파의 상석에 앉은 태모를 응시했다.

“무슨 큰 상을 탔더구나.”

이준은 고개를 들었다.

저 인간이 지금 속세 일에 관심을 가진 거야?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말을 마치고도 저를 바라보고 있는 태모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결코 환청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이준은 중얼거렸다.

“별거 아니에요. 아무나 다 타는 상이고.”

“그래? 하긴. 이름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천라만상이라니. 무슨 상 이름이 그러냐.”

천라만상이 아니라 백상예술대상이고, 그것도 남우주연상이라고요.

게다가 딴따라가 아니라 배우입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연예계에 좋은 감정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차태모 회장에게는 닿을 수 없는 발언이다.

이준은 잠자코 태모가 다음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런 이준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태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준이 너,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느냐?”

쿵―.

그 말에 심장이 바닥으로 수직 낙하했다.

순간적으로 쓰디쓴 물이 깊은 곳에서 밀고 올라오는 듯했으나 이준은 최대한 태연해지려 애썼다.

‘모를 리 없지.’

밑바닥을 내리찧은 심장이 다시금 거세게 뛰기 시작한다.

쿵쿵. 쿵쿵.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모를 응시했다.

“영감님. 아무리 제가 바빠서 날짜 감각이 무뎌졌다고 하지만, ‘내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내년은, 차이준이 너무도 사랑하고 정말이지 아끼는 두 동생 중 막내인 차휘준이 열여덟이 되는 해이다.

그런 휘준의 부모님이자 이준의 부모님이 되는 두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18년째가 되는 해다.

그리고 휘준의 ‘귀영(鬼迎) 의식’이 일어나는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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