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6화 (7/72)

6화

상극(相剋) (6)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남자 배우요? 글쎄, 전 TV를 잘 안 봐서.」

「핫한 남배 하면 당연히 차휘 씨죠! 그 섹시한 눈빛부터 큰 키에 탄탄해 보이는 가슴 근육까지! 로망 그 자체라니까?」

「하지만 차휘 씨는 ‘남자’라기보단 ‘미소년’에 가깝지 않나요? 이제는 차휘 씨를 위협할 만한 존재가 있을 것 같은데.」

「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차휘 씨를 위협할 만한 존재라니. 그런 사람은 안 보이는데…….」

「안 보이기는! 구승효 말이에요!」

「하긴. 구승효 씨 정도면 괜찮지. 차휘, 긴장되겠네요. 새파랗게 어린 배우가 이렇게 급성장하다니. 자칫하다가는 ‘국민 남친’ 타이틀을 넘겨줘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연예계의 흐름을 짚으며 고정 패널들끼리 토론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날 토론 주제는 ‘국민 남친의 자리는 과연 확고한가?’라는 것이었다. 제목의 ‘국민 남친’은 당연히 ‘차휘’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과연 ‘차휘’를 위협할 만한 배우가 누가 있을까― 하는 것이 바로 그날 토론의 핵심이었는데, 깔깔 웃으며 말하던 패널들이 주목한 이는 불쾌하게도 그 사람이었다.

‘구승효.’

이준보다 4살이 어리고, 이준보다 4센티가 더 컸으며, 이준보다 4배로 수능 성적이 높다고 알려진 엘리트 배우.

1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준과는 달리 4개 언어를 사용한다며 해외 진출도 용이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 빌어먹을 배우는, 어느 순간부터 이준에게 있어 반가움보다는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구승효?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우리 차 배우랑 구승효랑 어떻게 비교가 돼. 당연히 여러 면에서 네가 훨 낫지! 걔는 반짝이야. 금방 타올랐다가 곧 사라질 거라고. 그런 애들 어디 한두 번 봤냐?]

지나칠 정도로 구승효를 경계하는 이준을 보며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이정후 대표는 휘휘 손까지 내저으며 확신했다.

그럴 때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꺼내는 건지 의심이 되기는 했으나, 이준은 부디 이 대표의 말이 사실이기를 빌었다.

[준아. 이 녀석…… 대체 뭐냐?]

[구승효, 네가 노리고 있던 그 드라마에 캐스팅될 거라던데?]

[저기, 준아. 너 진짜 구승효랑 같이 출연할 생각 없어?]

그러나 이 대표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구승효는 승승장구했다.

[최 감독이 이번에…… 아니다. 어차피 안 할 거지? 내 선에서 커트할게.]

“이상하다. 내 느낌이 틀릴 리 없는데.” 하고 중얼거리던 이 대표는 구승효와 가급적 얽히지 않으려던 이준을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이준은 단호했다.

구승효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퍼진지 4년 만에, 그는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며 이제는 ‘차휘’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현재 ‘차휘’와 구승효의 관계는―.

「영혼의 라이벌이죠!」

「차휘 선배님과 구승효 씨? 라이벌이라기보다는 인연이 아닐까요?」

「아니지. 인연보다는 오히려 악연이겠죠.」

‘정확해.’

확실히 ‘차휘’는 구승효와 인연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언가.

‘악연이라면 악연이지.’

이준이 쓰고 있는 마스크인 ‘차휘’는 고등학생 때부터 연예계에서 활동해 온 잔뼈 굵은 연예인이었다.

이준은 어떻게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았고, 그만큼 잘 버텨 왔으나 이상할 정도로 구승효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준과 구승효는 첫 만남부터가 잘못됐다.

그것을 계기로 이준은 줄곧 그에게 거부감을 느껴온 것이다.

구승효가 냉정하고 침착한 물이라면, 차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름이다.

물과 기름.

이 얼마나 상극의 관계란 말인가.

그런데…….

“구승효…… 씨?”

고현 차씨 일가가 모여 살고 있는 서울시 성북구 고현동에, 대체 이 구승효가 왜 있느냔 말이다.

이준은 저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구승효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미송 김씨 여자들은?’

어디 있어?

‘왜 여자는 안 보이고 사내새끼가 보이는 거야?’

이준은 승효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뭐 하는 게야.”

응접실의 문턱을 갓 넘긴 이준이 더는 다가오지 않고 주위만 두리번거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모가 물음을 던졌다.

이준은 인상을 썼다.

‘잠깐.’

일단 진정하자.

‘진정하고, 구승효가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 건지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고.’

이준의 혼약 상대가 될 ‘미송 김씨’ 여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구승효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 역시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결론이 나지 않자, 이준은 결국 체념했다.

생각을 이어 나가기를 거부한 그가 얼굴에서 당혹감을 지워 버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모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이준은 그 모습을 못 본 체하며 승효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제 접근에 자신을 쳐다보는 구승효를 바라보며 사무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승효 씨. 마지막으로 본 지 한…… 4년 됐나?”

승효는 대답했다.

“아뇨, 선배님. 저희는 저번 달에도 봤습니다.”

‘저번 달에?’

“그, 그랬었나?”

놀라 묻는 이준을 보며 승효가 대답했다.

“예. ‘스튜디오 크레온’ 창간 기념 파티에서 인사를 나눴죠.”

아…….

‘그러고 보니 그 창간 파티 때 나, 완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얼마 전 처음으로 발간한 패션 잡지, ‘스튜디오 크레온’ 창간 기념 파티에 참석한 기억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제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권유하는 칵테일을 쉬지 않고 마시는 바람에 이준은 그날 밤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차휘! 너, 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윤 편집장이 앞으로 네 기사는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1면에 싣겠다고 난리야!]

―하고, 저를 향해 울분을 쏟아내던 정후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으나, 끝내 그날의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물론 패션 잡지 1면에 뜨는 것은 딱히 나쁜 일은 아니었고, 후일 다시 연락을 했던 ‘스튜디오 크레온’의 윤지수 편집장과 즐거운 대화를 나눈 것으로 보아 큰 문제는 아니었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그러네! 그날 봤었군요, 우리.”

“말씀 놓으시죠. 저보다 연상이신데다 선배이신데 말씀을 높이시니 제가 죄송해서요.”

인마.

내가 너보다 늙었다고 지금 시비 거는 거냐?

이준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뱉어 내려다 말았다.

그는 깔끔하게 거절했다.

“하하, 그럴 순 없죠. 전 친한 사람한테만 말을 놓아서요.”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저한테 볼일이 있었으면 직접 전화를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예?”

“대체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신 거죠? 설마 저희 대표님이 말씀해주셨습니까?”

지독한 녀석.

이준은 대답 없는 구승효를 바라보다 짧게 숨을 뱉어 냈다.

“후우. 뭐…… 일단은 알겠습니다. 승효 씨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지만, 일단 이곳까지 오셨으니 대접은 해야겠죠.”

이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낮게 그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말이죠, 지금은 제가 조금 중요한 일을 해야 해서요.”

“중요한 일이라면…….”

“집안일이니 말씀은 못 드립니다.”

이준은 도통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구승효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렇게 똑똑하다더니,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들어?’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하는 ‘배우로서의 일’을 저 구렁이 같은 영감 앞에서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고현 차씨 일가를 대표해서 희생양이 되기 직전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게다가 구승효와 자신의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태모의 행동이 영 수상쩍지 않은가. 영감이 쓸데없는 짓을 하기 전, 저 뱀 영감으로부터 구승효를 떼어 내야 했다.

‘그것보다, 이 자식 정말 어떻게 그 바리케이드를 뚫은 거야?’

이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현 차씨 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동네 고현동은 고현 차씨 일족에 속한 사람들만 살고 있다.

철저한 신분 검증을 거쳐 출입까지 통제되어 왔던 터라 간혹 택배 회사들의 불만을 받지 않았던가.

이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승효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설마 그 반반한 얼굴로 유혹이라도 한 건가.’

부드럽고 다정한 인상의 자신과는 달리, 샤프하고 날렵한 인상의 구승효가 각광 받는 시대다.

저 눈빛 한 번에 바리케이드 앞을 지키던 경비 요원들이 움찔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준은 흥 콧방귀 뀌며 그를 노려보았다.

“준아.”

그때였다.

이준이 구승효에게 다가간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태모의 입이 열렸다.

이준은 손을 들어 올렸다.

“할아버지는 나서지 마세요. 이건 제가 일하는 업계의 일입니다.”

“…….”

“구승효 씨는 아무래도 제 ‘손님’으로서 이곳에 온 듯합니다. 제 손님이니 제가 직접 대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준은 구승효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소를 바꾸죠, 승효 씨.”

이준은 저를 올려다보는 구승효에게 빙긋 웃었다.

“풉.”

그 순간.

이준은 제 귀를 울리는 웃음에 멈칫했다.

“큭큭. 크크큭.”

이준이 고개를 스윽 돌리니 구승효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자신을 보고 태모가 클클 웃는 모습이 보였다. 이준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노인네가 또 무슨 꿍꿍이야?’

기분 나쁘게 왜 웃냐고.

태모가 정체 모를 웃음을 흘릴 때는 항상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이준이 부르르 몸을 떨던 순간, 태모가 큭큭대던 웃음을 겨우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촌극은 그만해라. 충분히 우스웠으니까.”

“예?”

“그리고 정식으로 인사하도록 해. 네가 이 청년을 누구로 인식하는 건지 모르겠다만은, 여기 네 앞에 있는 청년은 현월 구가의 현 가주, 승효 군이다.”

“할아버지, 제가 그걸 몰라서 드리는 말씀이…… 예?”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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