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7화 (8/72)

7화

상극(相剋) (7)

“저 녀석이야. 오늘 함께 촬영한다던 그 신입 모델.”

이준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연예계 후배, 구승효와 처음 만났던 바로 그날을.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이 거대한 업계에서 만났다가 헤어지는 사람들은 수도 없었으나, 유독 구승효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만남이, 결코 화기애애하게 끝나지는 않았으니까.

“저 녀석이?”

곧 시작될 촬영을 위해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이준은 당시 자신의 매니지먼트를 맡아 주던 정후의 발언에 고개를 돌렸다.

‘흐응.’

정후의 고갯짓이 맞닿은 곳에는 큰 키의 청년이 서 있었다.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에 고집이 가득해 보이는 꾹 다문 입술, 그리고 짙은 머리카락까지.

‘음울한 인상이군.’

이준은 피식 웃었다.

“형.”

“어?”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뭐?”

“지금껏 저 정도의 도전자는 많았지. 뭐, 소문보다는 의외로 평범해서 꽤 놀랍네.”

“…….”

“왜?”

“아니. 네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오나 싶어서.”

냉정하게 벽에 기대어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구승효’를 평가하는 이준의 발언에 정후는 혀를 내둘렀다.

이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업계 짬밥을 어디 하루 이틀 먹었나.’

연예계에 종사한 지 7년이면 결코 적은 해는 아니다.

이준은 그 7년 동안 다른 사람들은 한 번 겪을 일을 두 번, 세 번 겪은 용자였다.

온갖 사건과 사고를 극복하며 이 자리에 섰으며, 자신을 위협할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꽤 잘 구분해 왔다.

이준이 보기에 구승효는 후자 쪽이었다.

“안 질 자신 있는 거냐?”

“하하, 형. 형은 그렇게 날 못 믿어?”

“…….”

“걱정 마. 이 몸이 고작 신예한테 끌려가는 일은 없어.”

특히 그날 예정되었던 촬영은 이준을 위주로 진행되는 광고 촬영이었다.

그의 상대역이 되는 구승효는 주목받는 모델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이준의 보조일 뿐.

언론에서는 ‘황제’ 차휘와 ‘신예’ 구승효의 만남으로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는 모양이지만, 이준은 온몸으로 긴장한 티를 내고 있는 승효 쪽을 힐긋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이준은 염려 어린 시선을 보내는 정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준 후 “곧 시작할게요. 스탠바이 부탁드려요!”라고 외치는 스태프 쪽으로 걸어갔다.

* * *

“차휘 씨, 이번 촬영 컨셉은 이미 들으셨죠?”

“네. 천사와 악마 컨셉이라면서요?”

“하하, 그렇습니다. 시뮬레이션은 해 보셨어요?”

“음, 글쎄요. 콘티 받고 두어 번 정도 생각해 보기는 했는데, 감이 안 잡히네요. 특히 제 쪽이 천사와는 거리가 멀어서요.”

“에이, 차휘 씨도 참, 일부러 또 그러신다. 막상 콜 들어가면 잘하실 거면서.”

“하하.”

“어쨌든 잘 부탁드립니다. 차휘 씨한테 기대가 커요. 참. 차휘 씨랑 승효 씨, 두 분, 인사는 나누셨어요?”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감독이 다가와 말을 걸자 이준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다 곧 기다렸다는 듯 승효를 언급하는 감독의 발언에 이준은 고개를 돌려 승효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승효는 몇 분 후 시작될 광고 콘티 대본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서 있었다.

“인사부터 해야겠네요.” 하고, 감독에게 살짝 양해를 구한 이준이 성큼성큼 걸어갈 때까지 구승효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준은 그러한 구승효의 앞에 뚝 멈춰 섰다.

스윽.

“그쪽이 요즘 그렇게 핫하다는 구승효 씨죠?”

아무리 저보다 후배라도 먼저 하대를 하지 않았던 이준은 선배의 미소를 지어 가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나는―.”

“……누구?”

제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들려오는 낮은 중얼거림을 이준은 놓치지 않았다.

아아.

그날 있었던 충격은 아직도 뇌리에 각인되어 있을 만큼 생생했다.

덕분에 이준에게 ‘구승효’라는 이름은 잊히지 않았고 정후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을 두게 됐으니.

‘웃기는 자식이네.’

최악.

어떻게 하늘 같은 선배를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현 대한민국 최고의 톱스타의 이름을!

동종 업계에 일하면서 제 얼굴이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본 적 없었다.

멀리서 “두 분 모두 이리로 와 주세요!” 하고 외치는 스태프들의 말이 없었다면 이준은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그대로 쏟아 부었을지도.

“차휘 선배님이셨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물론 뒤늦게 구승효가 제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한번 꽁해 버린 마음이 쉽게 풀릴 리 없었다.

“하하, 그럴 수 있죠. 신경 안 쓰니 걱정 말아요.”

이준은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것보다, 우리 오늘 촬영 잘해 봐요.”

물론, 차이준은 속과 겉이 철저하게 구분된 사람이었던지라 얼굴 가득한 거짓 미소는 거두지 않았지만.

* * *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다행히 ‘황제’와 ‘신예’의 첫 촬영은 생각 이상으로 순조로웠다.

두 남자가 함께 찍게 된 광고는 내년 여름 A 자동차 회사에서 나올 신차에 대한 광고였는데, 화이트 앤 블랙, 즉 천사와 악마를 현실화시켜 놓은 듯한 컨셉으로 진행되는 촬영이었다.

이준은 악마와 천사 중 평소의 다정한 이미지와 찰떡처럼 어울리는 천사 역할을 맡게 됐다.

광고는 이준이 맡은 천사에 가까운 인간이 악마 같은 깡패, 승효를 만나 벼랑 끝까지 몰리다가 최후의 위기에서 A자동차의 신차를 타게 되면서 인생이 역전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내용을 한 편으로 끝낼 수는 없었기에, 그날은 이준과 승효의 첫 만남을 다룰 예정이었다.

‘언제 끝나려나.’

당시의 이준은 적당히 연기를 해 주고 적당히 감독과 스태프들의 비위를 맞추어 준 뒤 퇴근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6시간을 예상하던 광고 촬영 시간이 점점 10시간, 그리고 12시간으로 늘어나자 이준은 따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귀찮네, 진짜.’

짧게 끝날 것이라 예상되었던 광고 촬영이 지연되는 이유는 하나였다.

“못 합니다.”

이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있는 신예 모델 쪽을 흘긋거렸다.

“아니, 그러지 말고. 승효 씨, 다시 한번만…….”

“죄송하지만 입장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전 못 해요.”

아아.

벌써 11번째다.

이준은 당황해하는 보조 스태프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응수하고 있는 승효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승효 씨, 의외로 고집 세네.”

“의외는. 대놓고 세지.”

비슷한 감정을 느낀 건지 정후 역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던 걸까.

‘6시간 전쯤부터였나.’

이준은 미간을 좁혔다.

“하하, 차휘 씨! 승효 씨! 너무 좋았어요! 정말 너무 좋았는데, 우리 다시 한번만…….”

“감독님.”

“어? 아, 승효 씨, 할 말 있어요?”

“네. 죄송하지만 방금 찍은 부분은 삭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

“나와서는 안 될 장면이 나온 것 같아서요.”

이제 막 데뷔한 모델이면서 총감독에게 그렇게 제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은 난생처음 봤다.

제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메이크업을 받으러 돌아가는 승효는 마치 오랫동안 이 업계에 지낸 사람과도 같았다.

“뭐…… 뭐야.”

그 모습을 황당하게 느낀 촬영 감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는 것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리고 스태프들과 구승효의 기 싸움은 계속됐다.

“방금 장면이 광고에 나오게 된다면, 전 제 촬영분을 모두 수거해 달라고 요청드릴 겁니다. 죄송하지만 아예 없애거나, 아니면 장면 수정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구승효는 콘티를 받은 순간부터 말하고 싶었다며 커트가 되자마자 계속해서 몇몇 부분의 수정 요청을 부탁했다.

이준은 그러한 승효의 행동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할 뿐, 크게 지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6시간이 지나니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정도껏 해야지.’

이준 또한 이 광고 내용이 황당무계하다는 것을 지극히 잘 알고 있었으나 전체 콘티를 뒤엎을 만한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런데 광고의 메인도 아닌 보조 모델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다니.

‘저 녀석, 오늘 이후로 업계에서 보기 힘들겠는데…….’

이준은 여전히 스태프들과 대치하고 있는 승효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쯧쯧 혀를 찼다.

평소 촬영 감독 스타일이었다면 진작 승효를 자르고 새로운 모델을 물색했겠지만, 오늘밖에 시간이 나지 않는 이준을 생각해서 참고 또 참는 것이 분명했다.

《주인.》

그때였다.

‘양랑. 몇 번을 말했지? 촬영 때는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이준은 자신의 ‘종속비생’이자 수호령이나 다름없는 호랑이 비생, 양랑의 속삭임에 차갑게 대꾸했다.

양랑은 살짝 당황하더니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 녀석 말이야. 저 멀대같이 큰 놈.》

‘멀대? 구승효?’

《이름은 모르겠고. 저 녀석한테서 뭔가 ‘느껴져’.》

‘뭐?’

《혹시 저 녀석 말이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지 착각일 거라 여겼고,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하지만 계속해서 촬영의 흐름을 끊고, 삭제를 요구하는 승효의 행동이 이어질수록 스태프들의 마음과는 달리 주변의 공기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준은 미간을 좁히며 승효를 응시했다.

‘설마.’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승효의 주변은 이상하리만큼 공기의 흐름이 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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