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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이라면 악연-8화 (9/72)

8화

상극(相剋) (8)

그래.

돌이켜 보면 그때 더욱 자세히 알아봤어야 했다. 아니면, 양랑의 말을 계속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준은 뭔가 말하려던 양랑에게 “잠깐만.” 하고 그의 말을 끊어 내고선 발을 움직였다.

“……?”

감독과 실랑이를 벌인 후, 다시 앉아 숨을 가다듬고 있던 승효가 갑자기 다가온 자신을 보고 고개를 들자 이준은 한동안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흐응.’

그런 거군.

이준은 승효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아주 작은 무언가를 발견했고, 그것이 일종의 비생이라는 것 역시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승효는 갑자기 다가와 멀뚱멀뚱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이준에게 물었다.

이준은 씩 웃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아악. 가아악!

이준이 엄지와 검지, 기다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그러고는 승효의 어깨 위에 앉아 그의 귀에 속삭이고 있는 놈을 붙잡자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주, 주인!》

“<화(火)>.”

치치칙!

―캬아악!

화르륵, 이준의 손가락 사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어 곧 불꽃이 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재가 된 무언가가 승효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역시, 들리지 않는군.’

이준은 갑자기 손을 뻗어와 무언가 속삭이더니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을 보며, 여전히 표정 변화 없는 승효를 내려다봤다.

“……선배님,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돌연 다가온 이준이 아무 행동을 취하고 있지 않자 구승효로서는 당혹스러웠던 것이 틀림없다.

이준은 조심스럽게 묻는 승효를 향해 싱긋 웃었다.

“승효 씨.”

“네, 선배님.”

대답은 잘하네.

이준은 즉각적으로 답하는 승효와 한동안 시선을 마주하다 그의 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곧 이준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승효 씨가 본인 연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어요.”

“…….”

“물론 일일이 스태프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쉽지는 않죠. 하지만 그렇게 고집스럽게 굴다가는, 여기서는 못 버텨.”

승효가 이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뭐, 이 정도면 비생의 영향을 벗어나겠군.’

승효가 여태까지 예민한 태도를 취한 것은,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작은 비생이 승효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비생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

이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가끔은 타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승효 씨. 우리, 이번에는 끌지 말고 끝내죠.”

상쾌하게 말을 마친 이준이 뒤로 살짝 물러나자 승효의 검은 눈이 일렁였다.

이준은 그러한 승효를 본체만체하며 자신과 승효의 충돌을 보고 노심초사하고 있는 스태프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자, 우리 다시 한번 해 봐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요!”

* * *

[그 녀석 말이야, 구승효. 요즘 잘나가더라.]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거다.

신예 주제에 촬영만 시작하면 스태프들과 적지 않은 마찰을 일으키던 구승효가 점점 태도를 달리하기 시작한 것은.

구승효와의 첫 만남을 좋지 않게 기억했던 이준은 크게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눈치 없는 정후는 계속해서 승효의 소식을 물고 왔다.

‘무슨 소식 물어다 주는 학도 아니고.’

“구승효가 이번 LV SS/SS시즌 모델이 됐더라.”라든가, “걔 새 작품 들어간다던데?” 라든가, “이번에 신작 들어가는 서 감독이 너랑 구승효 공동 캐스팅하고 싶어 하던데?” 등등.

일부러 외면하는 데도 한계가 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내가 구승효를 싫어하는 건 정후 형 때문이네.’

이제야 깨달은 사실에 이준은 파르르 입술을 떨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잠깐. 아까 저 노인네가 뭐라고…….’

[여기 네 앞에 있는 청년은 현월 구가의 현 가주, 승효 군이다.]

“현월 구가…… 가주?”

지긋지긋한 인연에 대해 떠올리던 이준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현월 구씨.

제주도에 본적을 두고 있으며, 한때는 고현 차씨와 쌍벽을 이루던 거대 가문.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세력이 반토막이 나다 못해 현재는 남아 있지도 않다는 소리가 들리는 바로 그 가문.

현 5대 종가에 속하면서도 누가 가주인지, 본가는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는 그 신비로운 가문의…… 가주라고?

‘이 녀석이?’

이준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본디 현월 구가의 일원들은 우리 중 가장 영기가 강했지. 승효 군, 문득 자네 증조부님의 모습이 기억나는군. 그분을 처음 뵈었을 때 나는 태산을 접한 듯했지. 아마 살아 계셨다면 우리 협회는 더 발전했을 텐데.”

“어르신의 말씀을 증조부님께서 들으셨다면 몹시 기뻐하셨을 겁니다. 증조부님도 그러셨습니다. 어르신은 믿고 의지해도 될 만한 훌륭한 견자시라고요.”

“하하, 자네도 참. 그렇게 안 생겼으면서 은근히 아첨을 잘하는군.”

“그렇습니까. 저는 진실만 말씀드리는 건데.”

“하하하하. 이 늙은이 얼굴이 익어버리겠어!”

이준은 자신이 있든 없든, 서로를 향한 칭찬을 주고받고 있는 구승효와 태모를 황당하게 바라봤다.

‘현월 구씨, 견자, 가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러니 가끔은 타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가만히 있어 봐.

‘그럼 나, 완전 그때 완전 똥폼 잡은 거 아니냐?’

이준은 넋이 나간 얼굴로 구승효를 바라봤다. 승효가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태모가 아닌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이 보인다.

부르르, 몸을 떨던 이준은 억지 미소를 지어 가며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

“구승효 씨, 보여요?”

두근두근.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정확히 무엇이 보이는 건지 묻지 않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설마.

‘설마…….’

숨까지 참아 가는 이준을 향해 승효는 대답했다.

“네.”

“……!”

“보입니다. 아주 잘.”

콰쾅. 머리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뭐가 보인다는 거야?”

“비생(非生)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미소 짓는 승효의 말에 태모가 미간을 좁혔다.

“엥? 이 녀석아, 당연한 거 아니냐. 승효 군은 너 같은 초짜가 아닌 진퉁이다. 유년 시절부터 나나 네 아비 등과 함께 비생들을 잡으러 다녔어!”

뭐?

“네게 영기를 건네서 우리 집안을 도와줄 사람도 바로 승효 군이다. 네 녀석은 듣기만 할 뿐 보지 못하는 산군님도, 승효 군이라면 볼 수 있다고.”

“누, 누가 영감님한테 물어봤…… 잠깐만요.”

무심코 흘려넘기기엔 엄청난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신경질을 내며 태모에게 대꾸하려던 이준이 손을 들었다.

이준은 주르륵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누가 누구한테, 뭘 줘요?”

* * *

“도련님! 도련님, 가지 마세요! 도련님!”

힘차게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이준을 향해 웬 중년 여성이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이준의 바짓자락을 잡아끌 것처럼 애절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준은 단호했다.

“채선 아주머니. 죄송해요. 저 더는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도련님!”

“강주나 휘준이한테는 미안하다고 아주머니가 대신 전해 주세요. 그럼.”

“도련니임!”

이준은 울상을 짓는 채선의 손을 뿌리치며 결국 본가의 앞마당을 가로질렀다.

‘드럽게 넓네.’

이 빌어먹을 현가당은 한 번 나가려면 이리도 번거롭다.

‘대문까지 왜 이렇게 멀어!’

이준은 씩씩거리며 저 멀리 보이는 대문을 향해 달려갔다.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된 걸까.

그 해답은 간단했다.

이준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소리를 태모에게서 듣고야 말았다.

[여기 승효 군이, 너한테 영기를 준다고 했다.]

[구승효 씨가 나한테 영기를…… 준다고요?]

[그래.]

[하지만 영감님.]

[……?]

[구승효 씨는 남자잖아요. 남자가, 어떻게 나한테 영기를 줘요? 뭔가 잘못 얘기한 거죠? 영기는 나와 혼인할 사람한테서 받는 거라면서요. 그래야 우리 집안에……설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한 번 듣고 완벽하게 이해해 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이가 없다는 코웃음을 흘리며 사고회로를 정리하던 이준의 눈이 싸늘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영감님 말씀은, 나랑 결혼할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이 남자라는 소립니까?]

[그럼 승효 군이 여기 왜 있겠냐?]

제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태모의 얼굴이 아른거려 이가 부드득 갈린다.

‘제기랄.’

아무리 가문의 위기,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의 위험이 코앞이라지만 어엿한 남자한테 남자랑 결혼하라는 게 말이나 돼?

‘한국 사회가 그걸 이해해 줄 것 같냐고!’

심지어 차이준, 아니 ‘차휘’와 구승효다.

보통 이름난 인물이 아닌 TV 브라운관과 영화 스크린에서 수도 없이 보이는 두 남자.

강남 한복판의 옥외 광고에는 차휘의 자동차 광고가 걸려 있고, 명동에는 구승효의 시계 광고가 절찬리에 걸려 있다.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바드득. 이준은 용납하기 힘든 태모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응접실을 벗어났고, 이렇게 현가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쾅―

‘아무래도 빨리 이 동네를 벗어나야겠어.’

하지만 다짐이 무색하게도 무려 현관을 나선 지 10분이 지난 후에야 이준은 현가당의 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는 경비 요원을 노려보던 그는 선글라스를 쓴 이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망할!’

현가당이 가장 중심에 존재하는 이곳, 서울시 성북구 고현동에는 택시가 존재하지 않는다.

본가의 보안팀으로부터 출입을 허가받은 차량만 진입이 가능하기에 그렇다.

이럴 때, 스스로 운전할 수 없다는 것은 큰 디메리트다.

이준은 한숨을 푹 내쉬다 주머니를 뒤적였다.

―어? 배우님? 어쩐 일이세요?

이준은 귀에 가져다 댄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태경의 의아한 목소리에 입술을 움직였다.

“저기, 태경아. 미안한데, 지금 여기……!”

직접 운전을 할 수 없으니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가려던 이준의 시선이 갑자기 빼앗긴 핸드폰 쪽으로 향했다.

―배우님? 뭐라고 하셨어요, 배우님?

저 멀리서, 태경의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준은 제 눈앞에 어느새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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