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상극(相剋) (9)
싸늘하기 그지없는 이준의 발언에 그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빼앗은 남자가 이준의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 배우님, 괜찮으세요? 괜찮…….
그러고는 이준의 반응에 크게 당황하는 태경의 전화를 툭 끊어 버렸다.
이준이 얼굴을 구겼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구승효 씨, 많이 컸네요.”
이준의 앞에 서 있던 구승효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선배님 덕분입니다.”
이 자식이.
이준은 태연하게 대꾸하는 승효의 발언에 황당한 숨을 흘렸다.
구승효는 개의치 않고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님만 괜찮으시다면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하고 싶은데요.”
“난 할 얘기 없는데요.”
“하지만 전 할 얘기가 있습니다.”
“…….”
승효는 어이없어하는 이준을 살짝 내려다보더니 미소 지었다.
“저한테 시간 좀 내주시죠.”
* * *
“이제 오세요, 승…… 헉!”
이준은 앞서가는 남자의 뒤를 밟고 있었다. 그러다 앞의 남자에게 인사를 하다 자신을 발견하고선 화들짝 놀라 파들파들 떠는 여자를 발견하고선 멈칫했다.
‘뭐, 뭐야.’
마치 귀신 보듯 저를 응시하는 여자의 얼굴은 기묘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새빨개지기도 했다.
그 모습이 워낙 급변하여 순간 움찔거리기는 했으나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준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안녕하세요.”
“차, 차, 차…….”
“하하. 네. 차휘입니다. 반가워요. 좋은 하루 되세요.”
꺄아악―.
로비를 가득 울리는 외침으로 인해 고요하던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너무 좋다며 소리를 지르는 중년 여성에게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여 준 이준이 앞서갔던 승효에게 다가가자 승효가 피식 웃었다.
“왜요.”
“선배님은 확실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인기가 많으신 것 같아서요. 부럽습니다.”
야, 너 지금 나 멕이냐?
이준은 어느새 도착한 고층 전용 엘리베이터 문을 콕콕 가리키는 승효를 노려보다 흥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하죠. 대한민국에서 내 이름을 듣고도, 이 잘난 얼굴을 보고도 콧방귀를 뀌는 사람은 우리 집 영감님뿐일 겁니다.”
승효는 수긍했다.
“뭐, 하긴. 회장님께서는 이쪽 일에는 영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이준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게 대꾸하고선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33층 누르는 승효를 응시했다.
통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는 곧장 1층에서 33층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실 말이 있으십니까?”
이준은 제게 묻는 승효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어딜 가는 거죠? 설마 구승효 씨네 집에 가는 겁니까?”
승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그편이 대화를 나누기 편할 것 같아서요.”
“카페로 가는 방향은 생각 안 해 봤어요?”
“선배님은 이 시간에 저와 카페에 가고 싶습니까?”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이준은 투덜댔다.
“보안을 생각하는 거라면 내 집에…….”
“그건 곤란하죠.”
응?
이준을 바라보던 승효가 빙긋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선배님 댁은 본가에서 꽤 멀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비해 저희 집은 선배님의 본가에서 고작 15분 거리고요. 어떻게 생각해도, 저희 집으로 가는 게 조금 더 나은 방향 같아서요.”
“…….”
빌어먹을.
하필이면 사실만 늘어놓는 구승효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준은 인상을 좁히다 아직 올라가는 중인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말씀하세요.”
“그쪽…… 구승효 씨는 우리 영감님이랑은 언제부터, 어떻게 알고 지낸 사입니까.”
한국 견자 협회의 회장으로 있는 태모라지만, 그가 현월 구씨의 자손들과 연락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현월 구씨는 과거의 명성과는 달리 힘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은 비밀리에 활동하거나, 자취를 감추고 있어 자손들의 이름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설마 태모가 언급한 ‘혼인 상대’가 현월 구씨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노인네, 힘 있는 놈들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었군.’
이준은 낮은 탄성을 터트리는 승효를 올려다보다 인상을 썼다.
승효는 난처하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 곧 입술을 움직였다.
“차 회장님께는 어릴 적부터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어릴 적부터?”
승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 회장님께선 감사하게도, 갈 곳 없는 저희 가족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지금 저희 가족이 지내는 곳도 회장님께서 마련해 주신 곳입니다.”
“여기 말이에요?”
“아, 그건 아닙니다. 이곳은 제가 직접 마련한 저의 자가입니다.”
흐응.
이준은 차분하게 대꾸하는 승효를 빤히 바라봤다.
저보다 조금 높은 눈높이에 워낙 잘난 얼굴, 그리고 놀랍게도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비생이 보이는…… 견자.
“이쪽입니다.”
어느새 33층에 멈추어 선 엘리베이터를 벗어나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는 승효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잠깐만.’
이거 잘만 하면…… 생각보다 밑지는 장사는 아니겠는데?
그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준이 손해를 볼 일은 없다.
‘나도, 저 녀석도, 어차피 결혼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야 할 테니 언론에 공개되지는 않을 거고.’
자신도, 구승효도 연예인인 만큼 구승효 쪽에서 먼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을 거다.
게다가 무엇보다 두 사람이 남녀가 아닌 남남의 사이이니, 혼인 신고를 할 수도 없다.
‘그렇게 보면…… 어디까지나 휘준이의 의식을 치르기 전까지만 함께 지내는 동거나 마찬가지군.’
[그 3년 동안 네가 혼인 관계를 유지하며, 그쪽으로부터 영기를 받아들이고 휘준이나 다른 일족에게 나누어 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태모는 말했다.
휘준을 위해서라도, 이준은 3년 동안 혼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그 혼인 관계는 결코 정식 혼인 절차를 밟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형식적인 관계는 유지해야 했다.
이것은 집안과 집안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거래.
그런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현 차씨 집안의 장남과 현월 구씨 집안의 장남이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님, 선배님?”
사고회로를 굴리던 이준이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어느덧 문 앞에 도착하여 저를 응시하고 있는 승효가 보였다.
3303호.
‘숫자 3이라.’
누가 괴이한 것들을 퇴치하는 집안의 사람 아니랄까 봐, 성스러운 숫자인 3으로 이루어진 호수를 바라보며 이준은 쓰게 웃었다.
“아닙니다. 들어가죠.”
* * *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차를 내오겠습니다.”
3303호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승효는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경계하던 이준은 슬쩍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는데, 구승효와의 일이 크게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이준이 거실의 소파에 착석하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개인용인데다, 이미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될 거라고 말을 해 두었던 터라 사무실이나 태경으로부터 온 연락은 아닐 것이다.
<오라버니. 강주예요.>
놀랍게도 문자는 강주에게서 도착한 것이었다.
이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꽤 긴 메시지를 펼쳤다.
<오라버니께서 구가의 가주님과 혼인하는 게 정 싫으시다면,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꼭 오라버니께서 짊어지실 필요는 없어요.>
‘이 자식…… 평소에는 문자 한 통 없더니.’
이준은 심각하기 그지없는 강주의 문자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걱정해 주는 거냐?>
아니, 이건 아니야.
키패드를 누르던 이준은 다시 지움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천천히 할 말을 늘어놓았다.
<됐어, 강주야. 난 괜찮아. 그리고 너희들을 위해서 나도 뭐 하나쯤은 짊어져야지. 고작 몇 년 동안만 생판 남이랑 지낸다는 건데 뭐가 그리 걱정이야? 오빠 그렇게 안 약하다. 그리고, 이 오빠는 그런 놈한테 너 못 줘.>
“누구죠?”
전송 버튼을 누르고 피식 웃고 있던 이준의 곁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커피를 내온 승효가 보였다.
고마워요, 하고 승효에게서 커피잔을 받아 든 이준이 말했다.
“동생.”
“남자?”
“여자.”
“강주 씨군요.”
이준은 마치 잘 안다는 듯 중얼거리는 승효를 흘긋거리다 들고 있던 커피잔을 근처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곳은 당신과 나밖에 없는 듯하니, 구승효 씨가 원한 대화가 가능할 것 같은데.”
승효가 말없이 제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이준은 물었다.
“구승효 씨는 정말로 영감님…… 우리 가주님의 말을 들을 생각입니까?”
“네.”
“나 남잡니다.”
“알고 있습니다.”
“형식뿐인 결합이니까 괜찮다는 겁니까?”
그러자 구승효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른 거니 괜찮다는 겁니다.”
진짜 얄미운 자식이네.
대화하기 어려운 녀석이라 여기기는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이상하게 모호했다.
이준은 후우,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승효 씨.”
“네, 선배님.”
이준은 감히 뱉어 내지 못하고 입안을 머물던 말을 결국 꺼냈다.
“견자인 사람들끼리 영기를 주고받으려면 무엇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승효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을 보고 멈칫하던 이준은 곧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이준의 검은 눈동자가 승효를 향했다.
“너, 나랑 키스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