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손각시(孫閣氏) (2)
말도…….
‘말도 안 돼!’
이준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준은 고작 구승효와 입술을 맞댔을 뿐인데―정확하게는 그로부터 영기를 받은 거지만― 놀랍게도, 그간 목소리만 들려오던 차이준의 종속비생 ‘양랑’의 형체가 또렷하게 보였다.
“쉽네요.”
이준이 이 기막힌 상황에 주저앉은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을 때.
구승효가 이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뒤늦게 그 말을 캐치한 이준이 겨우 눈을 돌려 승효를 응시했다.
구승효가 말했다.
“별거 아니네요, 키스.”
뭐?
당황한 이준이 멍하니 그를 응시하자 구승효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요.”
구승효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가를 손끝으로 길게 닦으며 웃었다.
“선배님은 고작 이 정도도 힘드십니까?”
* * *
“푸흡!”
참다못해 웃음을 터트리는 상대의 반응에 이준이 인상을 썼다.
이준이 불쾌한 반응을 보이든 말든 큭큭큭 웃으며 어깨까지 들썩이던 긴 머리카락의 여인은 아래로 내렸던 얼굴을 다시 들었다.
“미안, 미안. 크큭. 안 웃으려 했는데, 푸흐흐, 너무…… 웃기잖아. 큭큭.”
“웃으려면 웃고 말하려면 말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니 어느 것도 안 되잖아.”
“흐흐흐, 응응, 미안, 미안.”
정말 미안한 거 맞냐.
긴 머리카락의 미인, 고급 바 의 바텐더이자 주인인 윤차영은 인상을 쓰는 이준에게 스윽 뭔가를 내밀었다.
반짝이는 글라스 안에 가득 담긴 액체를 응시하던 이준은 흥 입술을 삐죽이다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보여?”
차영의 질문에 이준이 그녀를 응시했다. 차영의 검은 눈동자는 몹시나 반짝거렸는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무척이나 흥미롭게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이준은 입술을 씰룩였다.
“너, 재밌나 보다?”
차영이 씩 웃었다.
“당연히 재미있지.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는 내 서른둘 인생에서 손에 꼽는데?”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차이준을 엿 먹인 녀석이 나타난 거잖아!”
차영은 외쳤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이야? 제 잘난 맛에 사는 차이준이 몇 번이나 엿을 먹었다니. 그것도 죄다 같은 상대한테. 이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할……웁!”
그놈의 엿, 엿.
“다물어, 좀.”
이준은 신이 나 외치는 차영의 음성에 벌떡 일어나서는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차영이 쿡쿡 웃으며 “괜찮아, 알다시피 우리 가게 손님 없잖아.” 하고 말하자 겨우 안도가 됐다.
그녀의 말대로 이 바 안에는 손님이라고는 저밖에 없다.
심지어 그는 손님도 아니다.
단순히 물을 마시러 온 가게 주인의 친구일 뿐.
‘이 녀석, 장사를 제대로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생글생글 미소 짓는 차영의 뻔뻔한 얼굴을 힐긋거리던 이준은 답답한 마음에 글라스에 든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너 물도 체한다는 거 잊지 마.”
“뭐래. 그것보다 아까 뭐라고 그랬지?”
“아직 보이냐고. 너의 ‘양랑’ 말이야.”
글라스 안에 든 물을 모조리 비운 이준에게 다시 얼음물을 따라주며, 차영이 물었다.
‘아…….’
이준은 그녀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오른쪽 귀의 검은 귀걸이를 매만졌다.
이 바는 넓은 공간을 지니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그와 차영 외의 인물, 아니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꼬마 미녀가 본군을 찾는 건가?》
이준은 머리를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쓴웃음을 흘렸다.
꼬마 미녀.
차이준의 종속비생인 양랑이 윤차영을 부르는 말이다.
‘그래.’
《아쉽군. 그녀도 본군의 늠름한 모습을 볼 수 없다니…….》
널 볼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
이준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하려다 말고선 제 대답을 기다리는 차영을 응시했다.
“아니. 이제는 다시 목소리만 들려.”
윤차영.
과거 고현 차씨 저택에서 지내며 견자 후보생으로 지내던 그녀는 현재 견자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영위 중이었다.
오랜 친구이기도 한 그녀에게만큼은 제 마음을 숨기지 않았던 이준의 답변에 차영이 대답했다.
“안타깝네.”
이준은 답하지 않았다.
“구승효라.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는 사람이야.”
“네가 뭘 들었다고.”
“왜. 나 너보다 듣는 거 많아. 우리 가게에 뭐 너만 오는 줄 아니?”
“…….”
이준은 씩 미소 짓는 차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뭘 들었는데?”
“어?”
“들었다며. 구승효에 대해. 그 녀석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어디 한번 말해 봐.”
이준의 명령 아닌 명령에 차영이 황당한 표정을 짓다 고개를 저었다.
이준은 그녀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글쎄다, 구승효라. 뭐, 내가 들은 건 대충 이 정도야.”
차영은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초대형 신인 모델에서 돌연 연기 길을 걷기 시작하더니, 그 대단한 ‘차휘’까지 위협하는 차세대 스타로 성장한 유망주.”
뭐, 그거야…….
‘나도 알고 있지.’
이준은 이제 제 이름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딸려 오는 구승효의 이름을 떠올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영의 말은 이어졌다.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평소 성격이 모가 나 있어도 심하게 있어서 사적으로는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데, 웬일인지 촬영만 들어가면 자꾸만 쓰고 싶게 되는 이상한 느낌을 받는대.”
“뾰족하지. 암, 아주 뾰족해.”
이준은 수긍했다.
차영은 웃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홀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멀어지고 싶지만, 정작 캐스팅보드 1순위에 오르는 배우라나?”
“재수 없는 녀석이군. 누군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겨우겨우 올라왔는데 말이야.”
“어머, 차이준. 말은 바로 해야지.”
“응?”
“넌 구승효보다 더 했어.”
이준은 “뭐?” 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차영은 설명했다.
“우리 바에 온 사람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이 뭔 줄 알아?”
“뭐, 뭔데.”
불길한 예감에 이준이 미간을 찌푸리자 차영은 말했다.
“구승효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별똥별 같은 존재라면, 너는 지구를 향해 달려드는 무서운 혜성 같은 존재였대.”
크흠.
“당시 존재하던 네 거대한 팬들의 위세는 물론, 네가 풍기는 기운이 얼마나 위압적이었는지. 캐스팅을 안 하면 자기가 죽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내 이야기는 그만, 됐고. 하여간 구승효가 그런 평가를 받는다 이거지.”
“하여간, 유리 멘탈. 제가 듣기 싫은 말은 칼 같이 자른다니까?”
이준은 픽 웃는 차영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렸다.
그러면서 지난 밤, 구승효의 집에서 있었던 그 일을 찬찬히 생각해봤다.
[별거 아니네요, 키스.]
제게서 떨어져나온 이준을 향해 팔을 뻗으며 구승효는 말했다.
[왜요. 선배님은 고작 이 정도도 힘드십니까?]
힘들기는!
‘웃기는 자식. 제가 하는 걸 내가 못 할 줄 알고?’
이준은 흥 코웃음을 흘렸다.
‘고작 입을 통해 영기를 주고받는 일일 뿐인데, 뭐.’
그래, 확실히 쉬운 일이다.
이준은 아이돌 가수에서 배우로 전향한 뒤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고 러브신을 거리낌 없이 찍어 왔다.
그가 ‘로맨스의 황제’라 불렸던 것은 연기를 할 때 일명 ‘멜로 눈깔’로 돌변하여 상대를 내려다봤기 때문이다.
‘차휘’의 시선 한 번에 평소 이상으로 극에 몰입하게 된 상대 배우는 자연스럽게 끌려왔고, 그는 어렵지 않게 상대에게 키스를 선사하곤 했다.
‘그런데 감히 이 몸을 무시했다 이거지.’
이준은 마치 그는 그럴 수 없을 거라 확신하는 듯하던 구승효의 모습을 떠올렸다.
은근히 저를 비웃는 듯한 연갈색 눈동자부터, 그 밑에 살짝 존재하는 검은 점, 그리고 오뚝한 코와 그 코 밑에 볼록 튀어나와 있는 탐스러운 입술.
‘입……술.’
이상했지.
구승효의 벌어진 입술 안에서 흘러나온 체액은 달콤했다. 허겁지겁 탐해도 자꾸만 원하게 될 정도로 중독성이 있었다.
‘영기 때문일지도.’
이준은 다시 한번 오른쪽 귓불에 박혀 있는 검은 귀걸이를 만지작댔다.
우웅―.
아마도 쉬지 않고 만지작대는 이준의 손길 때문인지 귀걸이 속의 무언가가 반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젯밤, 이준과 승효는 그 행위를 통해 처음으로 주고받았다.
승효가 얼마나 많은 영기를 소유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 꾸준히 얻게 된다면 이준은 분명 휘준의 귀영 의식 때까지 적지 않은 영기를 얻게 되겠지.
‘그렇게 된다면 수월하게 영력을 사용할 수 있을 거고 또…….’
이 혼인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차…… 이준.”
무심코 눈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겨 있던 이준이 정신을 차렸다.
“너, 자제해라.”
고개를 들어 차영을 응시하자 조금 전까지 그를 바라보고 있던 차영이 어느덧 이준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왜 그래?”
이준은 어떻게든 저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차영의 행동에 미간을 좁혔다.
차영이 후우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방금 위험했어. 나까지 아찔해질 정도였다고.”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차영이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방심만 하면 유혹 페로몬을 흘려 댄다니까. 그런 건 네 팬들 앞에서나 해. 우리, 친구의 선은 지키자고. 내게 그 선을 넘게 하지 말라 이거야.”
이준과 자신 사이에 긴 선을 그어 가며 차영이 경고했다.
이준은 피식 웃더니 귓불에 꽂힌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는 행위를 끝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다.”
“뭐? 벌써? 내가 농담 좀 했다고 가는 거야?”
서운해하는 차영을 보며 이준이 말했다.
“내일 스케줄 때문에.”
“어머,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얼른 가.”
쉽게 수긍한 차영이 손을 휘휘 젓더니 곧 이준의 주변에 있을 ‘누군가’를 향해 외쳤다.
“언제나 보고 싶은 양랑도 잘 가요!”
《그래, 잘 있거라, 꼬마 미녀. 또 보자.》
“양랑이 잘 있으래.”
“호호, 우리 멋진 양랑. 못 보는 게 한이다, 한이야. 참!”
응?
“너 절대로 잊지 마.”
차영은 씩 웃었다.
“두 사람 결혼식에 나 초대하는 거!”
……내가 부르나 봐라.
어느새 출입구 앞에 선 이준은 쾅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