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12화 (13/72)

12화

손각시(孫閣氏) (3)

“아빠. 아빠, 아빠!”

“응. 우리 준이. 왜 그러니?”

“이 호랑이 말이야. 나도 언젠가 이 녀석을 탈 수 있는 거야?”

오래전의 일이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흑색 털을 지닌 흑호(黑虎)를 응시하며 이준이 아버지 현종에게 물었다.

그런 이준을 보고 풉 웃음을 터트린 것은 비단 현종뿐만이 아니었다.

《이 꼬맹이가 뭐라는 거냐. 감히 본군을 탄다고?》

“그래! 나, 너 타고 싶어! 탈 거야, 너!”

《주인. 이 꼬맹이, 죽여도 되냐? 왠지 열받는데.》

배시시 입꼬리를 올리며 외치는 이준을 향해 붉은 눈을 지닌 흑호가 콧등을 구겼다.

그러자 하하 웃음을 흘리던 현종이 양랑의 커다란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우리 이준이가 양랑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응! 나, 호랑이 좋아해!”《흥. 본군이 위대한 건 하찮은 꼬맹이도 아는군.》

“만져 봐도 돼?”

《감히 어딜…… 흐흣!》

“히히.”

《흐흐흐.》

이준이 고사리 같은 손을 들어 양랑의 아랫배를 만지작거리자 양랑이 움찔거리더니 갑자기 하늘을 향해 벌러덩 누웠다.

《주, 주인! 크크큭. 사, 살려 줘!》 하고 소리치는 양랑을 내려다보던 현종은 계속해서 양랑의 배를 긁고 있는 이준에게 말했다.

“이준아.”

“응!”

“양랑은 나를, 너를, 그리고 나아가 우리 가족을 지켜 줄 종속비생이란다.”

현종의 말에 이준이 행동을 멈추자 양랑의 웃음소리 역시 끊어졌다.

현종은 양랑 역시 저를 바라보는 것을 확인하고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영기를 잃는 날이 오면 안 돼. 네가 양랑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는 날엔, 우리 가족 역시 위험해질 테니까.”

당시 현종의 말은 여덟 살의 이준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준은 멍하니 현종을 바라보다 “내가 어떡하면 돼?” 하고 물었고, 현종은 대답했다.

“영기를 잃지 않도록 열심히 수련해야지.”

“응, 아빠! 나, 열심히 수련할게! 호랑이도, 가족도, 지킬게!”

힘차게 외치는 이준을 보며 현종은 웃었고 그런 이준을 힐긋거리던 양랑은 중얼거렸다.

《꼬맹이가 말은 번지르르. 네가 그 약속을 지키는지 두고 보겠어.》

하지만 그로부터 8년 뒤.

이준은 ‘그 사건’을 겪으며 양랑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 * *

유년 시절의 이준은 고현 차씨 집안에서 가장 강력한 견자가 될 거라는 평가를 받는 소년이었다.

그는 아버지인 현종으로부터 영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고, 제법 괜찮게 영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종속비생인 호랑이 비생 ‘양랑’과 주종 계약을 맺었기에 고현 차씨 일가의 미래는 탄탄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열여섯이 되자 상황은 바뀌었다.

차기 가주라 불리던 현종과 그의 아내가 사고로 위장되어 살해당했고, 이준은 그에 휘말려 적지 않은 영기를 잃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준은 여전히 차씨 일가에서 가장 많은 영기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열여섯까지는 보였던 ‘양랑’을 더는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주인. 설마…… 설마 본군이 보이는 거야?》

두근.

며칠 전의 깊은 밤.

이준은 다시 흐른 16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양랑’과 두 눈을 마주쳤다.

그간 듣기만 하던 양랑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울렸으며, 양랑의 윤기 흐르는 털과 늠름한 자태 역시 시야로 들어왔다.

이준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양랑을 바라보았다. 양랑 역시 이준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선배님.”

양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준을 향해 손을 내밀며 구승효가 말했다.

마치 처음부터 양랑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하긴. 그 노인네가 그랬었지.’

차태모 회장은 말했었다.

이준이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양랑을, 승효는 두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선배님?”

승효는 멍하니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이준을 의아하게 내려다봤다.

제게 많은 영기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승효는 꽤나 멀쩡해 보였다.

이준은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괜찮다고 말한 뒤, 도망치듯 승효의 집을 나왔었다.

[선배님이 빠른 결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제집을 나서는 이준을 보며 승효는 경고하듯 말했다.

이준은 그가 언급한 ‘시간’이 제 동생인 휘준의 귀영 의식까지 도달할 시간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기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도발도 안 먹히다니.’

은근히 그를 자극하여 스스로 물러나게 할 생각이었는데, 도리어 구승효의 필요성만 자각하는 이상한 결말을 맞이하게 됐다.

그리고 의외로 영기를 주고받는 그 의식이 생각보다 괜찮은―.

‘차이준 너 인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손가락을 올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이준은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발견하고선 화들짝 놀랐다.

무심코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던 그 순간을 떠올려 버렸다.

순간적으로 기겁한 그는 휘휘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 일을 떨쳐 내려 애썼다.

지이잉.

그때였다.

‘…….’

이준은 ‘영감님’이라 적힌 핸드폰 액정 속의 문구에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다 문자를 확인했다.

<양심도 없는 놈!>

아니나 다를까, 첫 멘트부터 분노를 가득 담고 있다.

다음 내용을 읽을까 말까 살짝 고민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네 녀석이 그리 나가 버리고 승효 군이 널 따라가 바래다줬다 들었다. 네 녀석 성격에 과연 승효 군한테 고맙다고 말은 했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승효 군과의 혼인은 네 마음대로 못 그만둬. 조만간 상견례 날 잡을 거니, 그리 알아!>

회유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문자였다.

‘우리 두 사람 중 더 양심 없는 양반이 누군데.’

[받거라.]

[……이건 또 뭡니까.]

[뭐기는. 보는 그대로, 귀걸이다.]

[영감님.]

[네놈이 목걸이도, 팔찌도 싫다 하니 어쩔 수 없이 귀걸이라도 만들지 않았느냐! 한 짝밖에 안 되니 차고 있어!]

[아니, 제가 왜 이런 걸…….]

[그 귀걸이는 네가 승효 군의 영기를 보다 잘 흡수하도록 도와줄 거다.]

[……!]

[어쩌면 네놈이 그리 게을리하던 영력을 다루는 것도, 그 귀걸이의 존재로 인해 수월해질 수 있겠지. 여하튼 승효 군과 영기를 주고받을 때뿐 아니라 한동안 그걸 끼고 있거라.]

[…….]

[네 녀석이 진정 우리 가문을, 아니 휘준이를 생각한다면 더욱더.]

협박이나 다름없던 본가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이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손을 들어 올려 오른쪽 귓불의 흑요석으로 만든 동그란 귀걸이 한 짝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이 귀걸이를 꼈을 때…….’

그 녀석의 영기가 강하게 느껴지긴 했는데.

“……우님.”

“……”

“배우님?”

“어?”

“아까부터 얼굴이 어두우세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차이준이 멍하게 앉아 있다 돌연 얼굴을 구기고 긴 숨까지 흘리는 모습을 힐끔대던 태경은 못내 우려됐던 모양이다.

그제야 이준은 자신이 사적인 문제를 공적인 자리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자각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것보다 우리 어디 가는 길이랬지?”

현재 이준은 태경의 연락을 받고 집에서 나와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있었다.

의아해하는 이준을 보며 태경이 활짝 웃었다.

“아, 네! 오늘 황 감독님께서 최 작가님이랑 함께 사옥에 오시기로 하신 날이잖아요. 잊으셨어요?”

“그날이 오늘이었어?”

태경이 언급한 황규호 감독과 최재선 작가는 몇 년 전부터 이준이 함께 일하기 위해 연락을 취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조만간 대형 자본이 들어간 드라마를 제작하려고 하는데, 그 주인공으로 이준을 캐스팅 물망에 두었던 것이다.

오늘은, 황 감독과 최 작가가 직접 이준의 소속사로 찾아와 이준의 차기작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로 몇 달 전부터 잡아 놓은 약속의 날이기도 했다.

“배우님도 참. 얼마 전부터 오늘만 기다리시지 않으셨어요?”

“그건 맞는데…….”

“배우님. 혹시 본가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니죠?”

태경의 말에 이준이 움찔했다. 태경은 말을 덧붙였다.

“배우님이 본가에 다녀오신 이후로 조금 이상해서요. 걱정돼요.”

룸미러에 비친 태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호쾌하게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어.”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이준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기는 했지.’

그는 말없이 미소 짓고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준을 태운 태경의 차는 마침 TVX 방송국의 본관 앞 도로를 지나가는 중이었는데, 신호에 걸려 멈추어 선 사이 방송국 안으로 수어 대의 구급차가 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예? 아, 또 구급차네.”

이준은 태경이 중얼거린 단어 하나에 주목했다.

“또라니?”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이준이 묻자 태경은 어느새 초록 불이 된 신호등을 발견하고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는 말했다.

“배우님, 얼마 전에 TVX 방송국 지하 주차장에서 사람이 죽은 건 들으셨죠?”

지하 주차장이라.

[이준이 너, 한 달 전 T국 주차장에서 발생한 사건은 들었지?]

그러고 보니 정후와 주고받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알고 있지. 그런데 한 달 전 아냐? 여자 PD 살인 사건이잖아. 아직 용의자를 붙잡지 못한.”

그러자 태경이 “네?” 하고 오히려 되물었다.

“아니야?”

“아니에요. 한 달 전이 아니라 며칠 전, 어, 정확히는 사흘 전에 발생했을걸요?”

“뭐?”

“제가 알고 있기로 성별도 여자가 아닌 남자예요. PD가 아니라 작가고요.”

이준은 제 말을 조곤조곤 부정하는 태경을 보며 인상을 썼다.

‘한 달 전이 아니라고?’

분명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사흘 전이라면…… 그쯤이네.’

이준이 갑작스러운 차 회장의 부름으로 본가를 방문한 시기였다.

‘그래서 혼동한 건가?’

본가를 나온 이후 줄곧 정신없는 생활을 보냈던 터라 더욱이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준은 사옥을 향해 달리는 차를 스쳐 지나가는 몇 대의 구급차를 더 지켜보다 시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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